WednesdayColumn2012. 1. 18. 22:23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40084


“엄마, 엄마, 제 몸에 기생충이 있어요!”
 
1년 여 전의 일이다. 대학 기숙사에서 지내던 큰 아들이 숨 넘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용변에서 실같은 벌레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설명을 들어보니 ‘촌충’에 감염된 것 같았다. 촌충에 감염되었을 때는 옷이며 이부자리 등을 깨끗이 소독하고, 구충제를 먹으면 대개 해결이 된다. 그래서 “학교 보건소에 가서 구충제를 타먹지 그러니?”라고 일러주었는데 그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일단 의사를 만나서 용변검사 및 여러 가지 검사를 한 후에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 구충제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또 며칠이 지날 것이 아닌가? 고민을 하고 앉아 있다가 내게 한국산 구충제 딱 1인분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한국에 다녀온 학생이 미국에서는 구충제 구하기가 어렵다며 내게 선물로 줬던 것이다. 그래서 그 길로 차를 달려 아들에게 가서 약을 먹였다.
 
그 해 겨울에 한국에서 가족이 올 때 나는 다른 것 말고 구충제를 많이 사다 달라고 했다. 나도 먹고 주변에 급한 사람이 생기면 나눠 주려고. 올해도 나는 작은 아들과 함께 종합 구충제를 한 알씩 먹는 것으로 새해를 시작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성장한 세대라면 학창시절 해마다 채변봉투를 채워 내던 일이나 혹은 ‘기생충 알’이 발견된 아이들의 이름을 선생님이 부를 때 거기에 내 이름이 끼면 어떻게 하나 근심하던 일들이 기억나실 것이다. 학교에서 주는 약과는 별도로 집에서 종합 구충제를 해마다 봄, 가을에 온 가족이 복용하기도 했었다. 온종일 흙장난을 하고 비누로 손을 자주 씻을 줄도 모르던 어린 시절 우리들은 쉽게 기생충 감염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기생충 박멸이 우리 몸에 마냥 좋은 것만도 아니다. 우리 몸에 살던 기생충들이 위생적인 환경과 구충제의 영향으로 몸에서 사라지면서 ‘아토피’나 ‘알레르기 질환’이 늘어났다고 설명을 하는 의사들도 있다. 인간이 지나치게 위생적인 환경에 살게 되면서 면역계를 조절해주던 장내 기생충을 잃어버리고 기생충과 미생물들에 충분히 노출되지 않기 때문에 면역계가 모든 것에 과민 반응을 한다는 ‘위생 가설’도 등장했다. 이른바 알레르기, 천식 아토피성 피부염같은 자가면역질환들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기생충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사례를 소개한 학자도 있다.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정준호 지음)에서는 돼지 편충 알을 이용하여 ‘크론병’이라는 소화기 계통의 질환을 치료하는 획기적인 방법이 소개된다. 이 질병은 장내 기생충이 많이 발견되는 지역에서는 보기 힘들고 한국, 일본, 유럽 등 고소득 선진국에서 발견되는데 기생충 알을 약 대신 투여하여 질환을 치료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기생충 알 값이 무척 비싸서 부유층에서나 그 의료 혜택을 볼 수 있다고.
 
피부가 곪아 터지는 환자의 환부를 깨끗이 소독하는 데는 금파리의 유충인 구더기가 효과적이라고 한다. 금파리의 구더기는 환부의 썩은 부분만 깨끗이 빨아내고 생살은 건드리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위생도구로 환부를 소독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고 한다.
 
몸의 질환을 화학제재가 아닌 기생충이나 기생충 알로 치료할 때의 장점은 이들이 우리 몸의 면역계에 치명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명의 문제를 생명으로 푸는 것이 화학제재로 해결하는 것보다 부작용이 덜한 이상적인 방법이 된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지어진 피조물 중에 악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것은 악종으로 보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착하고 좋은 것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하지만 장내 기생충조차도 그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우리는 함부로 판단하기가 어렵다고 기생충 학자들은 설명해 준다.
 
박멸이 아닌 ‘상생’을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 단지 기생충만의 문제일까? 신이 지으신 피조물은 모두 아름답다. 인간의 지혜는 생명의 말살이나 박멸이 아닌 ‘상생’ ‘조화’의 길로 더욱 나아갈 것이라 기대해 본다.

Posted by Lee Eunmee
Pop Art2012. 1. 17. 05:09


어제는 한가롭게 누워서 미술사 책을 이리저리 읽고 있었는데 (요즘 도통 업데이트를 못하고 있지만, 미국 미술에 대한 책 읽기는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문제는, 알면 알수록 쓰기가 어려워 진다는 것이지... 아이구야...) 앤디 워홀에 대해서 읽다가 '문득'  -- 이 사람 패션 스타일이 '스티브 잡스'하고 꽤 비슷하구나 했다. 물론 앤디 워홀이 스티브 잡스보다 한 세대 위이므로 스티브 잡스가 워홀과 닮았다고 해야 맞으려나...


앤디워홀은 카네기 멜론에서 미술 학사를 마치고 뉴욕에 가서 둥지를 틀었는데, 어릴때부터 몸이 허약하기도 했지만,  활동하는 내내 향 정신성 약물을 친구들과 더불어 즐긴 사람이라 건강이 썩 좋지 않았다. 막판에는 저격까지 당하면서 건강이 더욱 악화 일로를 걸었다.

그는 일찌감치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고, 결국 그가 생각해 낸 것이 '가발'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큼직한 미술관에 가보면 은빛 가발을 쓴 거대한 워홀의 초상화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그는 죽을때까지 그 은빛 가발을 벗지 않았고, 검정색 셔츠와 검정색 겉옷, 그리고 청바지를 고집했다.  이것이 그가 유지한 스타일 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어떤 면에서, 그가 죽고 난 후에 더욱 유명해 진 것도 같은데, 특히나 이세이 미야케의 고민의 결과였다는 그의 패션이 널리 알려졌다. 검정색 터틀넥 셔츠,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  그는 이 옷차림을 죽을때까지 유지했다.   아마도 그의 반쯤 벗겨진 대머리 위에 워홀의 은빛 가발까지 덮어 놓으면 둘은 형제처럼 닮아 보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패션만 닮은 꼴인 것은 아니다.

워홀은 미국 예술계에 '팝 아트'라는 핵폭탄 급의 새로운 예술을 투척했던 인물이고, 뉴욕을 세계 미술의 중심에 우뚝 세운 예술가들중의 한명이라고 할 수있다. 그는 지금 돌아봐도 참 획기적이다.

잡스는 (나는 그가 디자인 한 도구를 갖고 있지 않지만),  우리 일상의 도구에 혁명을 불러온 예술가로 보인다. 그가 죽은후 세간의 평가가 그러하다. 

말하자면, 워홀은 일상의 공장 생산품들에 예술적 가치를 덧칠할줄 알았고 (그리고 그는 선구적이었다),  잡스는 공장 생산품에 명품의 혼을 불어 넣고 싶어했다.

와홀의 엄마는 영어도 서툰, 그는 가난한 이민자의 유약한 아들이었고, 잡스 역시 어느 가난한 중동계 외국학생이 정자를 제공한 가난뱅이 소년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미국이 자랑할 만한 '미국인'들 이기도 하다.

스티브 잡스의 전기가 여전히 서점에 쌓여 있고, 잘 팔려나가고 있지만, 나는 그 책을 읽을 동기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워홀과 잡스를 비교하고 연결하기 위해서 (그냥 취미로) 어쩌면 그의 전기를 읽게 될지도 모르겠다.  잡스 때문이 아니라, 워홀 때문에...  :-)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2. 1. 11. 23:35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35980

시사잡지 뉴스위크가 금주 특집으로 ‘머리가 좋아지는 31가지 방법’을 소개했다. 내용을 간추려 보면, 우리 두뇌의 기능 중에서 ‘단기 기억장치’ 기능의 향상이 지능의 향상과 맞물려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능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향상되거나 저하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의 지능이 높거나 낮다고 해서 이를 ‘운명’처럼 받아들여서는 안되며 개인의 노력에 따라서 얼마든지 ‘똑똑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보면 되겠다.

기억력 증진 방법으로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보조적인 수단으로 걷기, 낮잠, 아무 생각 안하고 쉬기와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하루에 30분씩 일주일에 5회 이상 걷거나 이와 유사한 운동은 뇌의 기능을 활성화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하루 일과 중 잠시라도 눈을 붙이고 낮잠을 자거나 밤의 충분한 숙면도 기억력을 향상시키거나 유지하는데 필수적이다. 나이키나 구글에서는 직원들을 위한 수면실도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일과 중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앉아 있다거나 백일몽에 들어서는 것도 역시 필요하다. 우리가 ‘멍하니’ 있는 동안 뇌는 여러 가지 쌓인 일을 정리하고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제 2언어나 외국어 공부는 기억력 증진 및 문제 해결 능력, 판단력에 이르기까지 매우 효과적이다. 그러니까, 현재 미국에 살면서 영어가 능통하지 않아 스트레스 팍팍 받으시는 분들은 이 참에 영어 공부에 재도전하실 것을 권한다. 영어를 더 잘하기 위해서 노력 하다 보면 단지 영어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소통 능력도 높아지고 게다가 머리까지 좋아지는 것이다.

다음은, 뉴스위크가 소개해준 머리 좋아지는 31가지 방법이다. 이중에 몇 가지라도 의식적으로 실천해본다면 ‘더 머리가 좋아지는’ 한 해가 될 수도 있겠다.

(1)크로스워드 퍼즐과 같은 단어놀이 (2)심황 뿌리가 들어간 음식 먹기. 인도 카레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3)태권도 배우기. 태권도가 아니라도 춤추기, 공놀이 등 심장박동을 증가시키면서 손발이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운동이 좋다고 한다 (4)‘알 자지라’와 같이 내가 평소에 접하지 않는 뉴스 접해보기. 늘 새로운 정보에 열려있으라는 뜻이다 (5)스마트폰과 같은 온라인 도구들에서 벗어나서 시간 보내기 (6)근무 중에 낮잠도 자고 잠을 충분히 자기 (7)TED(http://www.ted.com/) 자료 시청하기 (8)문학 페스티벌 참가하기 (9)뭔가 외우는 일을 습관적으로 해보기 (10)외국어 배우기 (11)다크 초콜릿 먹기 (12)뜨개질 하기 (13)가끔 미간을 좁히고 사색하는 표정 짓기. 다시 말해서 골똘히 생각해보고 기억해내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14)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비디오게임 해보기 (15)트위터에서 유명 과학자들 팔로우하기 (16)요거트 먹기 (17)슈퍼메모 프로그램 활용하기 (18)셰익스피어 연극 보기 (19)상황에 따라서 빠르게 또는 느리게 사고하기 (20)물 많이 마시기 (21)유명대학의 온라인 강의 보기. 비록 대학생이 아니라도 요즘은 유명대학의 명강의는 유튜브나 다른 매체에서 쉽게 시청할 수 있다 (22)미술관 가기 (23)악기 연주하기 (24)종이에 손으로 글 쓰기 (25)모래시계를 이용해 25분 작업하고 잠시 휴식하기 (26)가끔 ‘생각 안 하기’. 내가 아무 생각 안하는 동안 뇌는 중대한 일을 수행하고 있다 (27)커피가 기억력을 증진시킨다고 한다 (28)즉각적인 보상을 미루고 잘 참는 사람이 학업 성취도가 높다고 한다 (29)자신만의 특기 키우기 (30)일기장이나 온라인 블로그에 글 쓰기 (31)도심을 벗어나 자연으로 나가 시간 보내기.

위에 소개된 서른 한 가지를 들여다보면 결국 항상 새로운 정보를 만나고 사색하는 시간을 갖고 적절히 운동을 해주고 휴식을 취하라는 것이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고 생활 속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도 머리가 좋아진다니 새해를 맞아 외국어라도 한가지 배워볼까 싶어진다.

2012,1,11,ㅇㅇㅁ
Posted by Lee Eunmee
Humor2012. 1. 11. 05:37


어느 인기 넘치는 정당에서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로 모 청년의 제안을 받아들여 '눈높이 위워회'라고 조직 개명을 했다고 한다.  소통위원회가 ===> 눈높이 위원회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아이디어가 국내 굴지의 과학자를 키우는 핵교를 거쳐서 미국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대학을 나왔다고 뽑힌 명석한 두뇌의 청년에게서 나왔다고 하니 걍 누나와 형들이 만장일치로 승인을 한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그, 선거때만 되면 '국민의 눈높이'대로, '낮은 자세로' 뭣을 하겠다는 인물들에 대하여 넌더리가 나다 못해서, 방법만 알면 '소송'이라고 걸어버리고 싶어진다. 요즘 한국에서 고소, 고발, 소송이 유행병처럼 번진다더니 바람을 타고 그 바이러스가 나한테까지 날아온 모양이다.  동네 가겟방에 들러서 독감 백신이라도 뒤늦게 맞아야 하는걸까?

내가 '눈높이'라는 말에 대하여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는것은 이들의 무신경함과 후안무치의 뻔뻔함에 있다.

눈높이가 뭔가?  좀, 그 말을 비주얼로 살펴보자.  위의 그림에서 오른쪽에 꼬마가, 왼쪽에 어른(선생님)이 있다.  어른(선생님)이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대화를 하는 장면이다.   그러면 정당이나 정치인이 '눈높이'를 논할때, 어른 자리엔 누가 가는가?  당근빠따, 자기네가 어른(선생)이다 이거겠지?  그러면 그들이 눈높이 맞추는 상대는? 키작은 아이, 그리고 국민이 되는거겠지?

참 기고만장하고 뻔뻔한 아이디어 아닌가?  아래 그림은 바빠죽겠는 (사실은 백수와 다름없는) 내가 친히 그린것이다. 정말 저사람들하고 눈높이 맞추려다보니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설명을 해야 겠어서.



생각해보자. 국민은 의식 수준이 이정도다.  그런데 '눈높이'를 극구 강조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의 의식, 행동 수준은 이정도다. 뱁새가 붕새를 어떻게 따라와?  눈높이가 바닥인 존재가 눈높이가 하늘에 닿아있는 존재의 눈높이에 어떻게 맞춰? 응?

국민은 지금 정당들의 밑바닥 눈높이에 눈높이 맞춰 주느라 허리가 꼬부라질 판이다.

무슨 말을 써먹으려면, 정치인이 정치적으로 어떤 '언어'를 감각있게 써 먹으려면, 그걸 정확히 포착해서 써먹어야지. 그냥 마냥 '눈높이'는 좋은말!  좋아 쓰자 써!  그러면 되겠는가? 아, 정말 당신들하고는 눈높이가 안맞아서 대화가 불가능하다.

헤이 수재~  한국말 다시 배우셔.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런 이름 붙인거면, 구제불능일세. 오직 존경할따름~)



웃자고 하는 말이다. 써놓고 보니 하품나네....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2. 1. 11. 01:12




매주 수요일에 실리는 내 칼럼은 2010년 8월에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그 때부터 매주 한편씩 2,000 자의 글을 신문에 발표를 한 셈이다. 주제를 정하지도 않았고, 그냥 마음가는대로 편안하게 써 달라고 해서, 그렇게 써오기는 했는데... 그 사이에 독자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뭐 별로 관심을 받을 일이 없으니까 나쁜 반응이랄 것이 없고.  누군가 아는체를 할 때는 대개가 덕담이므로. 헤헤.

칼럼을 계기로 모르는 분이 찾아와 내게 일을 부탁하여 기꺼이 수락을 한 경우도 있고,  모르는 분이 연락한 것에 내가 답을 하지 않고 지나친 경우도 있다. 나는 교육 관련 사회단체와는 협조적이지만 그 외에 정체가 애매한 단체와는 잘 협조가 안된다. 내가 그 분야에 대해서 잘 모를때는 나서기를 저어한다. (나 스스로 아무데나 깝죽대고 얼굴 들이밀고 그러는것은 실례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는 내가 진정으로 쓸모가 있는 곳에 서 있고 싶다. 돈이 안되는 일이라도.)  칼럼이 인연이 되어 내 학생이 된 분도 있고. 모르는 사람인데 그냥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덥석 손을 잡아준 분도 계시고 -- 글 잘 읽었노라고.

칼럼을 쓰면서 가장 덕을 많이 본 사람은 나 자신일것이다.  (1) 일단 나는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졌다. 옷 매무새도 좀 조심스럽게 하고, 행동도 튀지 않게, 오만불손하지 않게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편이다.  (2) 내 글과 내 행동이 일치하도록 노력하는 편이다. (3) 매주 새로운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보거나, 일단 주제가 정해지면 최소한 '멍청한 소리'를 해서는 안되므로 관련 자료도 챙겨보게 된다.  그러다보니 나 스스로 많이 배우고, 정돈된 생각을 갖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나라는 한 인간을 완성시켜가는 과정에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한다.

대개 수요일에 실리는 원고는 화요일 오전까지 담당기자에게 전해져야 하는데, 나는 성질이 급한 축이라서 뭐든 닥쳐서 하지 못하고 앞서서 하는 편이다. 그러니 일요일 저녁이면 원고가 완성된다. 월요일 아침에 다시한번 원고 상태를 체크하고 (다듬을데가 발견되면 기쁜 마음으로 다듬는다), 그리고 나서 안심이 되면 월요일 오후에 원고를 보낸다.  원고란 것이 써놓고 덮어 뒀다가 다시 보면 뭔가 미진한 것들이 발견되기 마련이다. (그런 후에도 신문에 실린 글에서 오자, 탈자, 잘못된 정보가 발견되는 경우도 왕왕 있다.  내가 잘못 쓴것을 편집자가 고쳐 놓은 경우도 종종 있다.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지난 주말에는 글 생각이 안나서 그냥 보내버리고, 월요일 저녁까지도 아무 생각이 안나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잠자리에 들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일어나 뉴스위크지를 집어들고 특집 기사를 요약소개하는 형식으로 글을 써서 보냈다. 번갯불에 콩을 튀겨먹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평소에 내가 흥미롭게 관심가지고 관련 서적들을 보아오던터라 글 쓰기가 재미 있었다. 어쨌거나 편집자가 작업하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새벽에 원고는 날아갔다.

아침에 이메일을 열어보니 서울의 김선배가 신년 축하 메시지를 보내셨는데, 그 속에 유머가 한편 들어있다. 그냥 웃고 지나갈 만한 유머이지만, 사실 이론적으로 들여다보면 '원인'에 대한 착각이나 오해와 관련된 내용이다.


만득이가 벼룩에게 말했대요. '뛰어!' 벼룩은 팔짝 뛰었답니다.
이번에는 벼룩의 다리 하나를 부러뜨리고 말했답니다. "뛰어!" 벼룩은 미동도 하지 않았겠지요?
만득이가 내린 결론; 벼룩은 다리가 부러지면 귀가 먹는다.

위의 유머와 관련된 실생활의 예는 얼마든지 있을수 있다.  한 학생이 수업중에 집중을 하지 않고 산만하고 노트필기도 잘 안하고 그래서 선생님이 관찰을 했는데, 알고보니 그 학생이 시력이 안좋아서 칠판의 글씨가 제대로 안 보였다는 것이다. 그 학생은 칠판이 안 보이니 옆자리 친구가 베껴쓰는 것을 훔쳐 보거나 혹은 잘 보기 위해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을 것이다.  그것이 선생님 눈에는 태도가 불량하게 비쳤을수도 있다.

빈민가 지역 교도소에 흑인 수감자가 많은것을 보고, '흑인들은 범죄 유전자를 타고 났다'고 판단을 할 수도 있겠다. 겉보기에 그러하다.  하지만 빈곤한 상황이 이들을 감옥으로 보내는 한가지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한국에서 미국에 방금 온 학생이 하나 있다. 그는  한국에서 수재,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여러모로 탁월하다. 하지만 영어는 아직 제대로 할 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영어를 잘 못 알아듣고, 말을 할때도 제대로 하지를 못한다. 그래서 겉보기에 바보같다.  사람들은 그가 말귀를 잘 못알아듣고, 말을 잘 못하므로 바보 천치라고 판단한다. 영어가 문제라고는 상상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수한 미국 만득이들이  내리는 결론, '한국의 천재는 미국의 바보 수준이다.'

하여...이 유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가, 한가지 '스르르' 드는 생각.  매주 수요일에 나오는 내 칼럼을 쓸때, 주제가 어떠하건 한가지 '유머'를 가지고 시작하면 어떨까?  유머가 있는 칼럼. 유머 한가지를 통해서 세상 사는 일을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잠시 해봤다. (그런데 사실 유머 적재적소에 활용하기가 참 어렵고, 게다가 유머를 발굴해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서점에 가서 유머집을 좀 들여다봐야 하려나....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2. 1. 4. 17:13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31639

2012년이 활짝 열렸다. 올 한해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정치적으로 역동적인 나날이 이어질 것이다. 미국은 11월6일 치러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요즈음 공화당의 후보 경선이 한창 진행 중이다. 한국에서는 4월11일 국회의원 선거, 12월19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인 이합집산이 진행되고 있다.
 
2012년 한국의 선거가 특히 재외 국민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제 해외에 살고 있는 한국 국적의 국민들에게도 참정권을 행사 할 기회가 열렸다는 것이다. 재외 국민에게 본래 선거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정권 시절에 재외국민의 투표권을 폐지한 이래, 40년 만에 어렵게 되찾은 국민의 권리인 것이다.
 
한국을 떠나기 전, 나는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권리이기도 하고 동시에 의무이기도 한 선거권을 포기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간접적으로 체육관에서 치러졌던 기묘한 대통령 선출 방식을 경험하며 성장 했던 내게, 대통령 직접 선거를 하거나 내 손으로 시장을 뽑는다는 것이 기적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내가 표를 던진 후보가 당선되면 기뻤고, 내가 표를 주지 않은 후보가 선출되었을 때는 아쉬웠다. 하지만 나는 직접 선거 방식의 민주주의를 사랑했다. 그래서 내게 투표는 기쁜 의무와 권리였다.
 
그런데 한국 땅을 떠난 이래로 십 년 가까이 여전히 한국인으로 살면서 나는 투표권을 누릴 수 없었고, 이는 매우 서운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마침내 2012년 ‘재외국민’ 혹은 ‘부재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목소리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다.
 
그래서 얼마 전 DC의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린 위안부 문제 시위에 참석하러 가던 날, 주미 한국 대사관 총영사관에 들러서 재외국민 선거인 등록을 하였다. 총영사관에 들어서면 재외국민 등록을 위한 장소가 마련되어 있고, 담당자가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안내에 따라서 본인이 신청서 양식을 작성하고, 해외 체류자는 여권 원본과 사본을, 영주권자인 경우에는 여권 원본과 사본, 그리고 그린 카드 원본과 사본을 제출한다. 원본은 그 자리에서 돌려 받고, 사본은 신청양식에 첨부된다.
 
선거인 등록을 하고 돌아와 생각해보니 대학에 다니는 작은 아들놈이 만 19세를 넘겼다. 한국에서는 만 19세 이상이면 참정권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작은 놈도 선거인 등록을 해야 한다. 나는 녀석이 방학을 맞아 집에 오기를 기다렸다. 이제 녀석을 데리고 총영사관에 가서 등록을 할 차례다. 초등학생 시절에 미국에 와서 십 년 가까이 살아온 녀석은 한국의 정치에 대해서 잘 모른다. 나는 한국의 정치 현안과 관련된 한국 서적 몇 권을 녀석에게 던져 주었다. 한국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국민된 입장에서 제대로 투표를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요즘 한국의 서점가에서 신들린 듯 팔려나가고 있다는 책 ‘닥치고 정치’에서 저자인 김어준의 주장은 과격한 제목과는 달리 매우 평범하고 온순해 보인다. 정치란 것이 거창한 것이 아니고, 시민 각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아주 작은 권리 혹은 의무인 ‘선거권’을 휴지 조각처럼 방치하지 말라는 것이다. 국민이 ‘투표’라는 아주 작은 행위로 제 목소리를 내면 목소리 낸 것만큼 존중 받고, 그만큼 민주주의는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아주 간단한 원리를 그는 호소하고 있는 듯 해 보였다.
 
참고로 선거의 역사를 살펴보면, 초기에 선거권을 가진 이들은 유산계급, 남자들 중심이었다. 미국에서 여성이 참정권을 가진 것은 1920년에야 가능했다. 스위스에서는 1971년에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다. 대한민국은 1948년 건국과 함께 남녀 공히 참정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참정권이 간단히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은 아닌 것이다.
 
2012년 40년 만에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해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선거를 할 기회가 주어졌다. 간단히 주어진 기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설령 번거롭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권리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내일은 아들의 손을 잡고 총영사관에 가리라. 아직 늦지 않았다. 등록은 2월11일까지 가능하다.


2012, 1,  4 ㅇㅇㅁ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2. 28. 19:50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26668

연말 연초에 가족과 함께 즐겁게 볼만한 영화로 마틴 스콜세지 (Martin Scorsese)감독이 야심 차게 메가폰을 잡은 3차원 입체영화 ‘휴고(Hugo)’를 권할 만 하다. 배경은 1930년대, 전쟁 이후의 프랑스 파리. 고아 소년 휴고는 기차역의 시계탑에서 산다.

소년이 하는 일은 거대한 시계 내부를 관리하는 것. 그는 조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에 기름칠을 하고 시계바늘이 정확히 돌아가도록 돌본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아버지의 유물인 망가진 태엽 로봇을 고치는데 보낸다. 그는 이 로봇을 애초에 누가 디자인했으며 어떤 기능이 있는지 모르는 채, 이것을 수리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달랬으리라.
 
이 영화의 제작자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영화배우 조니 뎁 (Johnny Depp)이다. 이들 두 사람의 작품들을 익히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이것이 ‘영화에 미친 사나이들’이 합심하여 탄생시킨 작품임을 한눈에 알게 된다. 제작자들의 이름이 자막에 흐를 때,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영화 판의 대단한 감독과 골수 영화배우가 작심하고 영화에 헌정하는 진짜배기 작품 하나를 만들어 냈구나!”
 
이 영화는 어찌 보면 영화에 대한 영화이다. 뤼미에르 형제 시절의 원시 형태의 영화들이, 그리고 그 제작 현장들이 다큐멘터리처럼 화면을 누비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잃어버린 환상에 대한 이야기 이기도 하다.

주인공 소년 ‘휴고’가 고아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부유하는 쓸쓸한 인생들이다. 과거의 영광과 꿈을 접고 서서히 사그라져가는 노인, 부모가 누구인지 몰라서 자신의 정체를 잘 알 수 없다는 소녀, 전쟁에서 다리를 다친 경관, 전쟁에서 오라비를 잃은 꽃집 여주인, 개가 으르렁거려서 도무지 연애를 할 수 없는 여자와 남자. 이들 모두 어딘가 다치고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삶의 불꽃을 다시 지피는 방법으로는 자신의 가치를 알아 주는 사람과의 만남, 나의 소명이 무엇인가 탐구하는 열정, 사랑에게 다가가는 용기와 지혜, 이러한 것들이리라.
 
이 영화는 또한, 삶을 살아가는 소명 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기도 한다. 거대한 시계탑의 톱니바퀴에 기름을 치던 소년 휴고 가 중얼거린다. “기계에는 쓸모 없는 부분이 한군데도 없어. 모두 꼭 필요한 부품들이야. 만약에 이 세상이 어떤 위대한 목적을 가진 기계와 같다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나 역시 어떤 목적이 있어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일거야. 나는 나의 사명을 완수하고 싶어….” 꼬마 고아 소년 휴고가 생각에 잠겨서 이런 독백을 할 때, 객석의 나 역시 ‘나의 소명은 무엇일까? 나를 이 세상에 보낸 설계자가 있다면, 그 설계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기왕이면 그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완성해 나간다면 좋을 것도 같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지난 세월 동안 우리에게 선사한 것은 성인 등급의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휴고’는 온 가족이 모두 손을 잡고 가서 각자의 입장에서 볼 만한 가족영화라고 할만하다. 꿈과 환상을 제시하지만, 솜사탕같이 한없이 가볍고 달콤하지만은 않다. 제법 무게 감이 있고 진지하다. 또한 2006년에 소개된 영화 ‘보랏(Borat)’의 주인공을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보랏 역의 배우, 코언(Cohen)의 등장에 연신 웃음을 터뜨리게 될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흐를 때, 관객은 자신의 삶에 지쳐서 잃어버리고 만 열정과 꿈이 뭐였는지 돌아보게 될지도 모르고, 그 꿈을 향해 다시 나아가도 늦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2011년 한해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지난 일년을 돌아보고, 새해에 대한 설계를 해 보는 시기이기도 하다. 새해에는 많이 웃고, 그리고 내가 힘들다고 포기했던, 일상에 지쳐서 외면했던 나의 소망들에 대하여 돌아보고 다시 도전해보는 그런 시간을 살아보고 싶다. 분명 나에게도 이 세상에 내가 태어난 어떤 위대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어보는 것이다.

2011년 12월 28일, 수. 이은미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2. 21. 17:55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22490

매년 12월에 시사 주간이 타임 (Time)지는 ‘올해의 인물’을 선정하여 기사화하는 전통이 있다. 올해 12월 26일자 타임의 주인공은 ‘시위자들 (The Protester)’로 선정되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방송이나 신문에서 ‘다사다난했던’이란 표현으로 한 해를 정리하는데, 올 한해도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한국에서는 ‘무료 점심’ 투표에 이어진 ‘서울시장’ 선거로 올해 하반기가 거침없이 흘러주었고, 미국에서는 ‘월스트리트 점령’을 필두로 한 점령운동이 이어졌으며 현재 진행 중이다.

며칠 전에는 30년 넘게 북한을 통치한 최고 통치자의 사망 소식이 있었고, 그 지역에서는 3대에 걸친 세습이 이어질 모양이다. 일본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기도 하다.
 
이 많은 일 들 중에서 전세계적으로 발생하여 바이러스처럼 번져 간 한가지 현상을 타임지는 주목했다. 2011년은 전 세계의 압제 받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서 서로 생각이 통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뭉쳐서 독재자들을 몰아내거나, 진정한 민주주의의 발판을 만들기 위해서 연대했던 시간으로 기억되게 될 것이다.
 
그 발단은 튀니지에서 점화되었다고 타임은 설명한다. ‘모하메드 보와지지’라는 스물 여섯살의 청년은 튀니지의 작은 마을에서 길거리 행상으로 가족과 연명을 하며 살고 있었다. 1년 전 12월 중순, 길거리 단속에 나선 경관이 그의 저울을 빼앗고 그를 때린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단단히 화가 난 그는 관청에 찾아가 호소를 해보지만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는 몸에 인화물을 뿌리고 분신한다. 이 청년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청년은 1월4일에 운명했고, 그로 인한 튀니지의 시민 시위는 정점에 다다랐다. 그리고 튀니지의 대통령은 사우디 아라비아로 망명을 해야만 했다. 시민의 승리였다.
 
이집트에서도 칼레드 사이드라는 28세의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경찰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저항하여 일어난 시민들은 히잡을 쓴 여성들, 기독교인들, 무슬림들, 각계 각층의 빈부를 초월한 사람들이었다. 3주간 45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이는 14세 이상 이집트 전체 인구의 8%에 이른다는 통계이다. 시민들의 시위가 이어지는 동안 무바라크 대통령의 군사조직 조차 시위대에 총을 겨누지 않았다. 독재자의 실각이 이어졌다.
 
요르단, 바레인, 모로코, 알제리아, 시리아, 리비아에서 독재자들에 대항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스페인, 그리스, 이스라엘, 영국에서도 사회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마침내 7월에는 뉴욕의 경제 중심가에서 "Occupy WallStreet" 운동이 발화되기에 이른다. 이 운동은 아직도 겨울의 추위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타임지는 이 모든 시민의 저항 운동 속에서 인터넷이나, 페이스북, 트위터와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의 기능을 재조명 했다. 이전까지 인터넷은 사람들이 그저 개별적으로 음악을 찾아 듣고, 재미있는 동영상을 찾아 보고,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차단해버리는 도구로 사용했다면, SNS의 등장 이후, 사람들이 자신과 생각이 통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연대하고, 광장에 모여서 행동하도록 보조하는 도구적 역할을 해 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인터넷이 사람들을 골방으로 이끌었다면, 오늘날 SNS가 사람들을 광장에 모이게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이 세계의 민주화에 가장 기여한 것으로 미국이 개발해 낸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도구들일지도 모른다는 자평을 하고 있다.
 
사실 ‘개신교’에 해당하는 영어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인데 이는 구교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저항자들’, ‘시위자들’, 구시대의 가치나 이념에 의문부호를 달고 의견 개진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인류사는 발전을 거듭해왔다. 저항이나 시위라는 말에 어떤 ‘저항’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저항이나 시위 역시 역사 발전의 동력이며 과정임을 돌아보는 안목도 필요하리라.

2011,12,21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11. 12. 18. 21:11



http://www.imdb.com/title/tt1441912/

'순례자의 길'로 알려진 800 킬로미터에 달하는 산티아고 가는길이 영화에 담겨있다.  각자 다른 사연으로 순례자의 길에 오르는 사람들.  800 킬로미터라면, 내가 혼자 앉아서 따져 보니까, 하루에 30 킬로미터씩 27일을 꼬박 걸어야 한다. 중간에 며칠 쉬거나 일정이 늦어질경우 한달이 훌쩍 넘어 버릴수도 있는 여정이다.

하루 30 킬로미터가 어떤 거리냐 하면,  내가 지난 가을에 하루 20마일씩 몇차례 걸은적 있는데 (20마일은 대략 32 킬로미터 된다), 아이고, 이거 하루 걸으면 그 다음날은 그냥 뻗어버려야 할 판국이다. 다리가 뻗뻗하고, 발 바닥도 부르트고 그렇다.  하루 30 킬로미터를 줄창 걸어대는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 게다가, 등에 기본적인 생존 도구들을 짊어지고 걸어야 한다. 등짐 지고 하루 30 킬로미터는 간단한 행진이 아니다.  (그래서 요즘 나의 고민은,  내가 가볍게 산책 나갈때도 등짐을 지고 연습을 해야 하는가?  이런 것이다.)

이 산티아고 가는 길에 대해서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에 죽은 엄마가 넋두리 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소설가인 딸에게서 들었던 순례자의 길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려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 속에서 실종되어 구천을 떠도는 엄마가, 순례의 길에 올랐다는 해석을 했었다.

또 있다. "엄마 또 올게"라는 책이 있다.  정경화 라는 분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모하며 만들어낸 책이다. 그 어머니는 '인간극장'에 소개된적도 있는 분인데, 근래에 돌아가셨다. 나는 운좋게도 그 할머니 생존시에 나오신 인간극장을 한국에 갔을때 테레비로 본 적이 있다. 이것도 인연이다. 그 따님이 70이 다 되신 분인데, 그 순례의 길을 떠나신다. 늙으신 어머니는 딸이 떠나 있는 동안 자신이 죽을까봐, 자신이 세상 하직 할 때 딸이 없을까봐, 그 딸이 순례의길을 안 갔으면 좋겠다고 내심 생각하지만, 그 딸은 순례의 길에 오른다.  (할머니는 따님이 돌아온  후에 돌아가셨다.)  --> 이것은 소설이 아니고 실화이다.

그래서, 그 순례자의 길에 관심을 가져보긴 했는데,  영화에 그 풍광이며 문제상황까지 상세히 나와줘서, '나도 거기 가서 실컷 걸어보고 싶다'는 열망이 좀더 구체화 되었다.

이것도, 내 삶에서 꼭 해보고 싶은 것 리스트에 담아 두기로 하자.

2011, 12.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11. 12. 18. 04:39



모처럼 왕땡이를 데리고 조지타운에 산책을 나갔다. 왕눈이가 장거리 워킹을 한 지 오래되었고, 나이도 연로하셔서 잘 걸을지 약간 염려가 되었는데, 노익장!을 과시하듯 문제없이 가볍게 6마일 거리를 왕복을 했다.  헥헥거리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왕눈이가 장거리 걸을때 헥헥거린 이유는 날씨가 더워서 땀이 나서 그랬던 모양이다. 날씨가 쌀쌀하니까, 왕눈이 입장에서는 덥지가 않으니까 가볍게 잘 걷더라.

나 역시, 왕눈이를 위해서 왕눈이가 평소에 먹는 '과자'를 몇개 주머니에 갖고 나가서 약 1마일 걸을때마다 하나씩 꺼내 먹였다. 말하자면 그것이 왕눈이에게는 '에너지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군소리 않고 걸어주었으니까.





조지타운 컵케이크 가게에서 오랫만에 컵케이크 하나를 사 먹었다. 점심도 안 먹었고, 출출하고, 배고프면 걷기 힘드니까, 에너지 보충을 위해서.  역시 토요일 오후라서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5분쯤 기다리다가 가게에 들어갔다.  왕눈이는 가게앞 기둥에 묶어 놓았다.  밖에서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왕눈이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이 예쁘다고 쳐다보면서 보살펴 주었으므로. (줄서서 기다리다가, 개 한마리가 보이니까 덜 심심했을것이다.)



컵케이크 하나, 그리고 커피 작은것 한잔을 주문해서


착하게 기다려준 왕땡이와 컵케이크는 둘이 똑같이 노나 먹고,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달콤한 컵케이크와 뜨거운 커피는 이렇게 추운날에는 환상의 콤비이다.  조지타운 컵케이크는 내가 먹어본 중에서 오늘것이 가장 맛있었다.  배고프고 춥고 그런 상태에서 뜨거운 커피와 먹으니까 환상적이었을것이다.

왕눈이는 겁에 질려서 사방을 둘러보다가 유리문 안의 나를 발견하고는 앙앙거리고 짖어댔다.  왕눈이는 늘 그런다.  사람들이 나를 부러운듯 쳐다봤다. 모두들 왕눈이를 만져보고 싶어했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은 남의 개를 만져볼때는 사람들이 반드시 "May I pat your puppy?" 하고 먼저 승락을 받는 편이다.  그러니 개 주인인 내가 제왕이 된 기분이 드는 것이다.  :-)




컵케이크를 사이좋게 노나먹고, 다시 강변을 걸어서 돌아오는길



예정대로 였다면, 지금쯤 왕땡이는 자기를 세상에서 가장 예뻐하는 '아부지'의 품에서 놀고 있었겠지만, '아부지'께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휴가를 반납한 관계로, 불쌍한 왕눈이가 되었다.



조지타운 왕복 산책로 중간 지점쯤에 이런 벤치가 하나 있다. 이곳을 지날때면 왕땡이는 습관적으로 이 벤치위에 냉큼 올라가서 다리 쉼을 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의자를 '왕눈이 의자'라고 이름 지었다. 오늘도 왕눈이는 이 의자에서 하염없이 수로의 물을 바라봤다.









왕눈이가 정정해서 다행이다. 겨울 동안에는 워킹 나갈때 왕눈이도 데리고 다녀야겠다.  왕눈이를 데리고 나가면 카페나 책방에 들르기가 어려위지지만, 그러니만큼, 시간 낭비 안하고, 돈도 안쓰고 걷기만 하게 된다. 그러니 좋은 일일 것이다.  왕눈이를 운동을 많이 시켜서 날씬하고 건강한 상태를 유지를 해야, 이 친구도 내곁에서 오래 오래 살게 될 것이다.  요즘은 내가 왕눈이를 돌봐주는 것이 아니고, 왕눈이가 나를 돌봐 준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우리들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들일 것이다.

2011, 12, 17, 토, 흐린 날.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2. 15. 05:00

        오늘은 수요일이다. 그리고 1992 1월부터 20여 년 간 매주 수요일이면 모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미 10년 전부터 이 모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집회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고, 매주 그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오늘이 이들의 천 번째 모임의 날이다. 본래, 서울의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작되어 진행된 이모임의 천 번째를 기념하기 위하여, 워싱턴 DC에서도 일본 대사관 앞에서 사람들이 모인다. 오늘 정오, 1000차 일본 종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세계 연대 시위 수요 집회가 열리는 것이다.

        2차 대전 중 일본에 의해 종군 위안부로 끌려 갔던 여성은 대략 20만 명으로 추산이 된다고 한다. 국적도 다양하여, 한국, 일본, 중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다양한데, , , 일 출신의 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했으며 그 중 한국여성이 52퍼센트, 중국여성 36 퍼센트, 일본 여성 12 퍼센트 정도 된다는 자료도 있다.  과반수가 한국에서 끌려간 소녀들 이었다는 것이다.

 
      
종군 위안부를 영어로는 ‘Comfort Women’이라고 쓰기도 하고, 좀더 정확하게는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일본군 성 노예)’라고 표기 하기도 한다. 나로서는 성 노예라는 표현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Comfort Women’이 위안부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자리를 잡은 것도 같다.

  
     
자료를 찾아보면 태평양 전쟁 말기에 12세 이상의 소녀들과 여성들을 정신대명목으로 데려다가 공장에서 일을 시키거나 위안부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1935년생인 나의 어머니도 소학교 (초등학교) 꼬마였을 때의 일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일본 순사가 처녀들을 잡아간다는 소문이 돌아서 집안의 여자들을 감추거나 얼굴에 숯검정을 칠하기도 했다고 한다.

 
      
미국의 한국계 소설가 노라 옥자 켈러 (Nora Okja Keller) 1997년에 발표한 소설 ‘Comfort Woman (위안부)’은 우리들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 세대에서 겪었던 조선인 위안부들의 처절했던 삶을 스케치 하고 있다. 취직을 하는 줄 알고 따라 나섰던 소녀는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어 먼 나라로 떠돌며 짐승 같은 대우를 받는다.

 
      
소설에 그려진 일화 중에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병들어 죽어가는 조선인 위안부를 일본인 병사들이 막대기로 입을 통과시켜 하체까지 꿰어서 마치 사냥한 짐승을 잡아 옮기듯 내다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생지옥을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 전쟁 이후의 삶 역시 편안하지 않았다. 그들은 존중 받지 못했고, 보상 받지 못했고, 위로 받지 못했다.

  
     
이러한, 역사의 오점을 바로 잡기 위한 작은 몸짓이, 바로 그 20년간 지속 되어온 수요일의 집회이다. 이들이 일본 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일본이 역사적으로 저지른 반 인간적 범죄를 시인하고, 진상을 낱낱이 밝히고, 사과 하고, 관련자를 처벌하고, 피해자에게 보상하고, 일본 역사 교과서에 이 일을 사실대로 정리하여 재발을 방지 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진정으로 참회하라는 것이다.

 
      
현재 당시의 참상을 증언 해 줄 생존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도 않다. 지난 20년간 많은 분들이 위안부라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안은 채 한 많은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 사이에 일본 정부는 이들의 시위와 요구에 대하여모르쇠로 일관 하고 있다. 희생자들이 모두 사라지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집회, 20년간 매 주 진행된 질기디 질긴 집회,‘일본 종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 집회는 사실 너무 오랫동안 진행되어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집회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제 그 1000회를 맞이하여, 워싱턴 DC에서도 이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인다. 날씨가 추운들 어떤가? 위안부 할머니들은 노구를 이끌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본 대사관 앞에 서지 않았는가?  오늘, 나도 피켓 하나를 들고 그 자리에 서리라. 우리들이 힘을 모아, 이제 그만 이 슬픈 집회가 끝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011, 12, 14, 수 이은미




간 길에 영사관에 들러서 재외국민 투표 등록도 했다. 몸은 미국에 있지만, 나도 대한민국 국민이니까, 투표 해야 하는거다.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의무이며 권리이다.


워싱턴 일본 대사관 앞에서 당일 정오에 시작된 집회



정각에 맞춰서 도착했는데, 이미 단체 버스로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에서 오신 한인 단체 어르신들이 집결해 계셨고, 주로 어르신들이 많으시다보니, 내가 이나이에 '꽃띠'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젊은 축이라서, 기록 사진사들이 나를 세워놓고 사진을 많이 찍었다 (나에게 사진이 배달이 되지는 않겠지만, 기꺼이 모델이 되어 드렸다.) 젊은 친구들은 다들 생업이 바빠서 오기가 힘들었을거라고 추측한다.

마침, 영상 카메라를 세워놓고 열심히 취재를 하는 젊은기자가 있었는데, 이 친구가 '자랑스러운 나의 제자'이다.  대학원 코스 아직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지역 방송국에 취직하여 열심히 기자와 피디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다. (테레비에도 나온다는데, 내가 테레비를 안보는 관계로 녀석을 테레비로 본적은 없고, 취재 현장에서 활동하는 것을 발견하고, 내 자식을 만난듯 반갑고 자랑스러웠다.)






참여자가 대개 한인들이었지만, 간혹, 한인이 아닌 분들도 보였다.  왼편에 '나꼼수' 후드티를 입은 분이 보인다. 나꼼수 후드티 입은 분을 여럿 발견했다.


굳게 닫힌채 미동도 않는 일본 대사관 문.  앞에 계시는 어르신은, 내가 자문해드리는 영어프로그램 담당 선생님이신데, 이자리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 프로그램에 계시는 선생님들이 모두 나오셨다고 한다.



보상하라, 사과하라, 역사에 기록하라 이런 구호들을 외치고, 애국가, 아리랑, 울밑에선 봉선화 노래도 함께 부르고, 이 조직의 대표자가 대표로 일본 대사관에 들어가서 요구문을 전달하는 것으로 이 모임은 파했다.  너무나도 대견하고, 기특하고, 자랑스러운 내 제자와 한장 찍었다. "얘가 제 제잡니다!"하고 자랑을 꽤나 했다.   이 친구가 곱상해도, 태권도가 4단이라 태권도 사범도 하고, 학보사 출신이고, 내 제자이기도 하니 팔방미인이라서 개국하는 지역 방송에서 두말 않고 좋은 조건으로 채용을 해줬다. (성격도 좋아서, 어디에 가나 성실하게 일하고 사랑을 많이 받을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2. 8. 00:44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13380
1970년대 초반, 매섭게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의 겨울 밤이었다. 서울 변두리의 단칸 셋방에서는 네 명의 아이들이 이리저리 포개진 채 잠이 들어있었다.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한 아낙은 숨겨뒀던 꾸러미를 꺼냈다.

꾸러미에서 나온 것은 아동용 초록색 벙어리 장갑 한 켤레. 짝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줄로 연결되어 목에 걸고 다닐 수 있게 만들어진 그 벙어리 장갑을 그이는 낮에 월곡천 건너 시장에서 샀다. 막내둥이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큰 아이들에게도 장갑은 없었다. 하지만 네 명의 아이에게 장갑을 사 줄 형편이 못되었던 아낙은 다섯살박이 막내의 장갑 한 켤레를 샀다. 그래도 내일이 ‘크리스마스’니까. 그리고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돌아다닌다고 하니까. 아낙은 막내 아이에게만이라도 산타 할아버지를 선물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낙이 장갑을 들여다 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일곱 살짜리 셋째가 잠이 깨어 두리번거렸다. “엄마, 그게 뭐야?” 아낙은 얼른 자신의 집게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고 속삭였다. “쉿, 막내가 깨면 안돼! 이것은 막내에게 주는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이야.”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셋째가 물었다. “엄마, 산타 할아버지가 누군데?”
 
아낙은 빙긋 웃으며 설명을 해줬다. “있어, 그런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선물을 준대. 세상에 그런 할아버지가 어디 있겠니. 다 만들어낸 얘기지. 하지만, 우리 막내가 산타 할아버지한테서 선물을 받으면 얼마나 좋아하겠니. 그러니까, 너는 모른 척 해야 해, 알았지?”
 
그날 밤 나는 이 세상에 ‘산타 할아버지’라는 경이로운 존재가 있다는 것과 그것이 ‘순거짓부렁’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한꺼번에 알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 막내둥이가 머리맡에 놓여진 초록색 장갑과 ‘산타 할아버지’의 존재감에 놀라워할 때 나는 막내의 포근한 장갑을 쳐다보며 혼자 애늙은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산타 할아버지 따위…’ 나에게도 달콤한 솜사탕 같은 ‘환상’은 필요했는데, 그것은 내게는 허용되지 않는 사치였을 것이다.
 
최근 시카고의 폭스 뉴스에서 한 여성 앵커가 “산타 클로스는 없다”고 말했다가, 사람들로부터 항의를 받고 사과방송까지 하는 일이 벌어졌다. 온가족이 다 함께 보는 뉴스 시간에 부주의한 발언을 하여 어린이들의 마음 상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사과였다. 글쎄, 산타 할아버지가 없으니까 없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과를 할 정도의 발언이었을까? 하지만 사회적인 분위기나 정서는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12월이 되면 미국의 쇼핑몰이나 공공장소에서 산타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쇼핑몰의 한 구석에서 아이들이 산타 할아버지의 무릎에 안겨서 그와 사진을 찍고 그에게 어떤 선물을 갖고 싶은지 소원을 빌기도 하고 그런다. 사진사도 있어서 그 자리에서 기념 사진을 찍기도 한다. 이곳을 지나칠 때면 성인인 나도 산타 할아버지한테 가서 소원을 빌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설령 산타 할아버지가 없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 영국에서는 산타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을 때의 주의사항을 각급학교에 배포를 했다고 한다. 가급적이면 산타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지 말 것이며 혹시 앉더라도 무릎 끝 쪽에 걸치기만 하라는 것이다. 어린이 성추행 방지를 위한 대책처럼 보인다. 이쯤 되면 산타 할아버지 품에 한번 안겨 보고 싶다는 나의 망상은 접어야 할 것도 같다.
 
산타 할아버지가 있거나 없거나, 매년 12월에 크리스마스는 온다. 1년 중 가장 추운 때, 그래서 인정의 불꽃이 가장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구세군의 종이 울리고 교회나 각종 사회단체에서 도시 인근의 가난한 청소년,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모으고 있다. 나는 워싱턴 DC 빈민가의 어린이들을 위한 선물을 마련하는 것으로 12월을 시작했다. 산타 할아버지가 그 선물을 잘 전달해주길 바라면서.

산타 할아버지가 있거나 없거나, 인정과 나눔은 우리 삶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어 줄 것을 믿는다.

2011,12,07, 수, 이은미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2. 1. 03:55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08921


올 가을에 나는 ‘백마일 걷기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는데, 띄엄띄엄 날을 잡아 20마일, 10마일, 15마일, 이런 식으로 계획을 성취할 수 있었다. 물론 매일 개를 끌고 산책을 하거나, 10마일 미만으로 걸은 거리는 계산에서 제외했다. 20마일이면 대략 32킬로미터를 상회하는 거리이다.

이전에 내가 하루 동안 걸은 최장 거리는 50킬로미터이다. 그날 열 시간이 넘도록 걸었는데, 동행 없이 혼자서 하루에 걷기에는 쉬운 거리가 아니라서 나 혼자 걷는 것은 하루 20마일로 잡고 걷고 있다. 혼자 나가서 20마일을 걸으려면 대략 여덟 시간은 잡아야 한다. 처음엔 빨린 걷지만 후반에 속도가 떨어지고, 중간에 휴식도 취해줘야 한다.
 
나의 걷기는 주로 포토맥 강변의 수로길(Chesapeake & Ohio Canal Road)에서 이뤄진다. 나는 이 수로의 시작점에서 68마일까지 두 발로 통과한 기록을 갖고 있다. 나의 소망이라면 워싱턴DC에서 오하이오까지 이르는 184마일 구간 전부를 내 두 발로 밟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하루에 20마일씩 걸으면 9일 혹은 10일 줄곧 걸으면 되겠다는 계산이 나오지만, 20마일마다 숙소가 나와 주는 것도 아니라서, 나 혼자 해내기에는 여러 가지로 무리다. 그래도 나는 언젠가 이 구간 전체를 걸어보리라는 꿈을 간직하고 있다.
 
지난 한 달 간 나는 새벽에 일어나서 내가 갖고 있는 영문 바이블을 베껴 적는 일을 해왔다. 새벽 네 시에 자명종 시계가 울리면 일어나서 간단히 씻고, 뜨거운 차 한 잔을 준비하고, 책상 앞에 붙어앉아 공책에 문장 하나 하나를 정확히 옮겨적었다. 물론 문장을 옮겨적기 위해서는 소리내어 읽어서 내용을 머리에 담은 후에, 그것을 펜으로 종이에 옮겨야 한다. 대략 한 시간 정도 그렇게 소리 내어 글을 읽고 공책에 베껴 적기를 하다 보면 하루에 한 챕터 정도를 적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28장이 되는 마태복음 베껴쓰기를 마치고, 요즘은 마가 복음을 베껴쓰는 중이다. 처음에는 문장 단위로 베껴적는 일이 시간이 많이 걸리더니, 요즘은 문장 전체를 한번에 읽고 옮겨 적는 일이 아주 수월해졌다. 비슷한 어휘와 비슷한 형식의 문장이 리듬감 있게 반복되므로 일단 문장과 내용에 익숙해지니 속도가 붙게 된 것이다. 그러다 뭔가 생각의 불꽃이 피어오르면, 멀리 장미 빛으로 동이 트는 창 밖을 내다보며 나의 생명과 구원의 문제 등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수 년 전 내가 미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첫 해에는 논리정연한 학자의 저널 몇 편을 골라서 수 차례 베껴적기를 한 적도 있다. 내가 한국에서 훈련받은 글쓰기 방법과 미국 대학원의 학문적 글쓰기 방법에는 차이가 있으므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미국 학자의 아주 깔끔한 저널을 직접 베껴적으면서 미국식 글쓰기 방법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려고 했었다. 이제 나는 내 삶에 집중하고 있고 같은 방법으로 바이블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새벽에 성경 베껴쓰기로 하루를 시작하고 시간날 때면 강변으로 나가서 지치도록 걷다가 돌아오는 것이 내 생활의 활력소인 셈인데 어쩌면 글 옮겨쓰기와 걷기에는 일맥 상통하는 원리가 있다. 비행기나 자동차로 여행을 하는 사람은 땅 위의 아주 세밀하고 은밀한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오직 걷는 사람 눈에 들어오는 세상이 있다. 글을 베껴적는 것 역시 속독이나 정독과는 다른 것이다. 글을 읽고 머릿속에 담아서 공책에 내 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글의 ‘체화(體化)’가 일어난다. ‘몸’으로 사색을 하는 경지가 되는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온 몸으로 길 위에 내 생명을 쓰는 것이고, 쓴다는 것은 온 몸으로 글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디지털의 속도로 이뤄지는 놀라운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느리게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일과 한 글자 한 글자 쓰는 일을 통해서, 나는 속도가 줄 수 없는 심연으로 깊이 들어선다. 나는 걷고, 나는 쓰고, 나는 웃는다.

2011, 11, 30 (수)






오늘 아침에, 마가 복음 쓰기 마쳤다.  누가복음 쓰기 시작했다.  지난주 수요일에 시작했으니까, 마가복음은 일주일 걸렸다. 누가 복음은 꽤 내용이 많으니까 일주일에 마치기는 힘들것 같고,  하여튼 박선생께서 집에 오시기 전에는 누가복음까지 마치고, 함께 복된 크리스마스를 보내야지.  음...새벽에 앉아서 쓰기 시작하면 두시간이 금방 흘러간다. (두시간 쓰고도, 재미있어서 더 쓰고 싶지만 스스로 자제하고 다른 일을 한다.)  재미있는 놀이걸이를 찾은것 같애 아무래도... (나 원래 어려서부터 책 종류 베껴쓰는게 유희였다...책은 읽어도 재밌고, 베껴써도 재밌고, 심지에 베게로 써도 좋고...)

그냥 다른 생각 안하고, 골똘히 베껴적는 그 과정이 참 좋다. 이거 하다보면 사람이 말이 없어지고, 고요해지고, 태평해지고, 대체로 평화로워진다. 함박눈이 내 영혼에 내려 쌓이듯이 그렇게 고요하고 풍성해지는 기분. 세상 근심을 잠시 잊는다.

* 아, 서점에서 성경베껴적기용 공책을 판매를 한다. 그래서 그것 한권 구해서 쓰는데, 종이 질이 좋아서 양면으로 써도 잉크가 번지지 않고 편리하다. 세부사항 기록하기도 편리하다.

Posted by Lee Eunmee


Grandma Moses (1860-1961) <---101년을 사셨네~
Painted by Kristin Helberg (1948 -) in 1998
Acrylic on canvas attached on board

70대 중반에 류머티즘 때문에 수 놓는 일이 힘들어졌을때, 소일 삼아서 붓을 들었던 모세 할머니는 나이 80에 미국을 상징하는 할머니 화가로 떠오르면서 돌아가실때까지 영광의 나날을 보내셨다.

모세 할머니처럼 혼자 그림을 익힌 크리스틴 헬버그가 사진속의 모세 할머니를 자기 식으로 그렸다.  아마도 크리스틴에게 모세 할머니가 역할 모델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2011년 11월에 미국 미술관, 초상화 갤러리를 방문 했을때, 미국을 빛낸 위인들 초상화들 속에서 모세 할머니의 초상화를 발견 했다. 이 그림은 그린 화가는 작품 속에 모세 할머니의 작품 일부를 그려 넣었다. 애정 담긴 그림으로 보인다.

2011, 11, 이은미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11. 11. 25. 20:23

꽁지 아래 부분이 흰털로 덮여서 '흰꼬리 사슴'이라고 불리우는 사슴.



어제 하퍼스페리 숲길에서 오후내내 뻥뻥 울리는 총소리를 들었다.  아마도 사슴 사냥 계절이 온 모양이었다.  강변 길이라도 내가 주로 나가 걷는 워싱턴 인근에서는 총소리를 들을수가 없는데 (백악관이 지척에 있는 수도 중심에서 사냥질을 해댈수는 없겠지),  역시 웨스트버지니아 산골로 오니 사냥 총 소리가 난다.

처음에 어딘가에서 뻥!하고 총소리가 났을때, 나는 대포라도 터진줄 알았다.  깜짝 놀랄정도로 그 소리가 컸다. 정말 너무 깜짝 놀라서 가슴이 따가울정도였다. (체한것처럼 심장이 찌르르 찌르르 할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사슴 가족이 숲속에서 단체로 달려가는 것도 몇차례 봤다.  사슴이 쫒기고 있는가보다...

내가 알기로 버지니아 메릴랜드 웨스트버지니아 일대에서는 겨울 일정 기간에 사슴 사냥 허용을 해서, 대책없이 늘어나는 사슴의 개체수를 조정한다고 한다. 사슴 사냥철이 왔을것이다.  어느 댁에 가면 거실과 집안 곳곳에 자신이 사냥한 사슴의 머리며 곰을 박제를  해서 전시를 할 정도로 사냥 애호가가 있기는 한데, 나로서는 합법적으로 이루어지는 살륙에 대해서 뭐라고 반감을 가질 건덕지는 없다.  사슴이 사랑스럽다고 무한정 늘어나게 방치 할 수만도 없는 노릇일것이다. 게다가 미국인들중에 사슴을 혐오하는 사람들도 많다. '라임병'에 걸려본 사람들이라면 사슴을 아주 골치아픈 존재로 안다.  아무튼, 현실적으로 각자 입장이 다를수 있는데,  나는 뭐 그냥 대책이 없는 사람이고, 사슴 숫자가 넘치거나 말거나 사슴은 사랑스러운 존재일 뿐이고.  쫒기는 사슴은 나를 슬프게 한다.

사냥이 신나는 스포츠라도, 어쩔수 없다고 해도, 나는 사냥이 슬프다. (먹을거 많쟎아. 왜 취미로, 생명을 죽이는가?)

내가 기껏 해 줄수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을 보고 달아나는 사슴을 향해서, "사슴아, 멀리 멀리, 사람이 안보이는데로 달아나!!!"

하지만, 이세상에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어디있는가.  사슴이 숨을데가 없는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11. 11. 25. 10:24

올가을 프로젝트,  장거리 여러번 해서 백마일 걸어보겠다고 생각한 것을 오늘 마칠수 있었다.  원래는 20마일 걷기를 다섯번 해서 백마일 채우는 것이 목표였는데, 그렇게는 못했고, 20마일은 세번, 나머지는 10, 15 뭐 이런 식으로 했다.  오늘 찬홍이와 20마일 할 생각이었지만, 찬홍이가 학교에서 풋볼하다가 무릎을 다쳤다고 엄살을 떨어서,  그냥 무리하지 않고 15마일로 마무리 했다.

오늘 코스는 하퍼스 페리 시내에 차를 세워놓고, 다리 건너서 61마일 지점에서 68 마일 지점까지 왕복 (7x2=14)하고 다시 하퍼스 페리 시내로 돌아가는 15마일 거리였다.

이로써 나는 체사피크 오하이오 수로길을 워싱턴 디씨의 시작점에서부터 68마일 거리까지 내 두발로 걸은 셈이다. 지난 봄에 50킬로미터 걷기의 마지막 지점이 하퍼스 페리였기 때문에, 그 이후의 길이 늘 궁금했었는데, 오늘 드디어 그 '너머' '미지의 세계'를 가 볼수 있어서 소원 한가지를 풀은 기분이었다.  나는 여태 몰랐는데, 하퍼스 페리 너머, 북쪽으로 올라 갈수록 수로변 강의 풍경이 절경이 되더라....  기가 막히는 절경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전 열시반에 하퍼스페리에 도착하여 걷기 시작.  오후 다섯시에 다시 차 세워 둔 곳에 돌아왔다.  중간에 앉아서 다리쉼도 하고, 여유있게 걸었다.



(아래)  셰난도어 강과 포토맥강이 만나는 지점 (하퍼스 페리가 두 강이 만다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여기서 오늘의 걷기 출발.



하퍼스페리의 상징과도 같은 철교를 지나 (저 건너 하퍼스페리 마을이 보인다)




반마일쯤 가다보면, 이런 수로변 마일 표시를 만나게 된다. 61마일.


지난 며칠간 날이 흐리고 비가 왔기 때문에 강에 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파도소리같은 물소리가 났다.  흑탕물같은 강물이 거침없이 막 쏟아져내리는 풍경을 보면서 --- 아, 아이스 카페라테 같구나...했다.





62마일 포스트.



그런데 상류로 올라가면 강이 호수처럼 고요해진다.
내가 발견한 현상.  강이 호수처럼 고요해보이는데, 강물에 나무기둥 떠내려가는 것을 보면 내가 달리기하는 속도보다 더 빨리 떠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니 물이 흐르는 속도가 엄청 빠른 것인데, 육안으로는 마치 고여있는 호수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 고요해보이는 강을 한참 내려다보고 걸으며 생각했다. 

-- 정말 너르고 큰 강은, 물이 아무리 거칠고 세게 흘러도 저렇게 호수처럼 평온해보이는구나.  수로쪽 개울은 얕은데도 돌돌돌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데 저 큰강은 오히려 물이 깊고 넓고 빨리 흐르면서도 소리가 없구나.   저렇게 크게 움직이면서도 고요할수 있는 인품을 키운다면 좋겠다.  어떤 일에도 호수처럼 고요할수 있는 평정심을 키우면 좋겠다.







수문 근처에는 반드시 수문 관리인의 사택이 있는데, 물론 지금은 인적이 없는 기념물에 불과하다.  나는 이 빈집을 지나칠때면 늘 똑같은 생각을 한다: "저 집에서도 한때는 온가족이 모여서 웃고, 떠들고, 저 안에서 애도 태어나고, 누가 죽기도 하고 그랬을텐데...."  늘 같은 생각에 잠겨서 수문관리인 주택을 지나치게 된다.

수로 근처에는 이렇게 버려진, 혹은 허물어져가는 건물들이 남아있는데,  빈집이나 허물어져가는 건물의 흔적들이 보이면 쉽게 시선을 떼지 못한다.  나는 허물어져가는 것들에 대해서, 강박증적인 집착을 보이는것도 같다.  거기 살던 사람들이 웃음소리가 들리는것도 같고.  자꾸만 슬픈 기분이 드는 것이다.






68마일 포스트에서 반환.




저기, 아직 내가 걷지 못한 길이 이어져 있고, 저기 길이 남아 있어서 나는 안심이 된다.



아까 지나쳤던 작은 집 앞 계단에서 쉬면서 뜨거운 커피.




물에 허리까지 잠긴 강변의 나무들.



오늘 나의 동행이 되어준 나의 귀냄이.




산골에는 저녁이 빨리 찾아온다. 저만치 철교가 보인다. 저 다리를 건너 다시 하퍼스페리 시내로



추수감사절 휴일이라, 가게가 문을 열지 않아 텅빈 유령의 도시 같이 고요했던 하퍼스페리.



오늘 날씨가 참 화창하고 따뜻하고 좋았다.  그래서 얇은 겨울 잠바 입고 간것도 벗고 나중에는 그냥 스웨터만 입고 온종일 걸었다. 선물같은 아주 예쁜 하루였다.  :-)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1. 23. 20:52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04740

내가 태어나 성장한 용인의 고향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의 일이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 마을 사람들은 저녁이면 남포나 호롱에 불을 밝혔고, 불을 때서 밥을 짓고, 쇠죽을 끓이며 살았다. 이곳이 집성촌이었으므로, 마을 사람 대개가 일가붙이였고,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내게 ‘시누님, 우리 아기씨’라는 호칭을 쓰기도 했다.
 
우리 바로 윗집에는 우리 할머니와 비슷한 시기에 이 마을에 시집와서 평생 자매처럼 지낸 할머니가 살았다. ‘응굴’에서 시집와서 ‘응굴댁’인 그 할머니는 어쩌다 댁에서 미역국을 끓이는 날이면, 새벽이거나 저녁이거나, ‘언제나’ 미역국 한 그릇을 두 손으로 감싸안고 우리 집 안채로 달려와서 할머니를 찾았다. “정렬이 할무니, 오늘 우리 막내 생일이라 고기 좀 넣고 미역국을 끓였어유. 이것 맛이나 보시라고.” 할머니가 어느 날 그 미역국의 사연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어느 해, 만삭으로 돌아다니던 응굴댁이 며칠 보이지 않아 올라가 들여다보니, 며칠 굶은 산모는 혼자 애를 낳아 제 손으로 탯줄을 끊어 애를 안고 누워있는데, 먹을 것이 없어 다 죽어가는 얼굴이라. 내가 얼른 미역 한 꼬리를 갖다가 국을 끓이고, 쌀을 퍼다 쌀밥을 지어 뜨거운 국물에 먹이니 산모가 그제서야 살아나더라. 그 후로는 저이가 수 십 년을 미역국만 끓이면 이렇게 한 그릇 떠갖고 내려온다.” 지금은 내 할머니도, 응굴댁 할머니도 모두 고인이 되셨지만, 두 분은 천국에서도 서로 오가며 미역국을 나누실 것이다.

 1984년 겨울, 휴가를 나온 박 상병은 이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나 가난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충치로 고생이었지만, 변변한 치과 치료를 받아본 적도 없었다. 부대에서도 고통을 호소하면 진통제나 처방해 주는 정도였다. 너무나 괴로웠던 박상병은, 집 근처, 어느 치과에 들어섰다. 그는 무작정 충치 치료를 부탁하며, 자신에게는 돈이 한 푼도 없다고 설명했다.

휴가 며칠간 그는 치과에 드나들며 오랫동안 그를 괴롭히던 충치 치료를 받았다. 휴가가 끝나갈 무렵 서둘러 치료를 마친 치과의사가 박상병에게 말했다. “건강하게 잘 지내게. 내게 치료비 갚을 생각은 하지 말고, 나중에 어려운 사람 보이거든 도와주게.” 지금은 중년이 된 그 사람은, 가끔 그 치과 의사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이 글썽해진다. 이따금 듣는 똑같은 이야기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도 모두 운다. 박 상병이었던 그 사람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못 지나치는 나의 큰 시동생이다.
 
6년 전, 플로리다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이었다. 개미에게 발가락을 물렸는데, 물린지 30분도 안되어 얼굴과 몸이 붓고, 현기증이 나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가 갑자기 죽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놀란 나의 아이들이 한달음에 달려간 곳은, 마을에 살고 있었던 어느 한국인 아저씨 댁이었다. 아이들은 무작정 그 댁 문을 두드리고 “우리 엄마가 죽어요!” 하고 알렸고, 아이들의 설명을 들은 그는 한달음에 우리 집으로 왔다. 그의 손에 알러지 치료제가 한 뭉치 들려 있었다.

그는 약 한 움큼을 내게 먹이고, 급성 알러지 현상으로 보이니 이 약을 먹고 차도가 보이면 계속 약을 먹고, 차도가 보이지 않으면 응급차를 부르겠다고 했다. 그는 개미 독으로 죽은 사람도 보았다고 했다. 그는 처치 약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한참을 기다려 내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내 생명을 살렸고 졸지에 고아가 될뻔한 내 아이들과 가족을 살렸다. 그분은 자신이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을 지금 기억할까?

 내일은 ‘땡스기빙 데이 (Thanksgiving Day)’. 우리 주위에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 내가 오늘 온전히 살아 있음은, 이 세상 사람들의 사랑과 베풂이 있어 가능한 것이리라.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내가 잊고 지내던 고마우신 분들께, 예쁜 꽃 카드라도 정성껏 만들어 부쳐드리리라 하고 다짐을 해본다.


2011,11,23 (수) 이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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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응굴댁 할머니와 관련된 에피소드 한가지 추가:

그 응굴댁 할머니는 평생동안 우리집을 자기집처럼 임의롭게 드나드셨는데,  웃기는 일이 뭔가하면, 우리집에서 기르는 개들이 응굴댁 할머니만 대문에 들어서면 으르렁대고 짖어댔다.  우리집 개들은 대대로 사랑채에 있는 바깥대문 앞 나뭇광이 침실이었다. 거기 짚을 쌓아주면 포근한 짚에서 지낼수 있으니까.  그런데 요놈들이 대문 앞을 지키고 살면서 응굴댁 할머니만 나타나면 사납게 으르렁댔다.  그러면 응굴댁 할머니는 개의 목줄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개를 피해서 지나곤 했다.

우리집 개들은 대대로, 서울 식구가 어쩌다가 나타나도 좋아서 퍽펄 뛰곤 했다.  그러니까 일년에 서너차례 내가 나타나도 나를 보면 좋아서 이리뛰고 저리 뛰면서 나를 핥고 난리를 떨었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나는 일년에 몇차례 나타났다 사라지는 '손님'이고, 응굴댁 할머니는 늘 그곳을 드다느는 식구같은 존재이건만.  개는 '내식구'와 '남의식구'를 정확히 구별해서 행동했다.

우리집 개들은 어떻게 그렇게 어쩌다 한번 오는 식구들을 알아서 반기고, 아웃사촌들을 '남'으로 규정을 하게 된 것일까?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11. 11. 20. 06:00

어제는 내 친구와 만나서, 베데스다까지 걸어갔다 왔고 (거기 커피하고 베이글 샌드위치가 너무 너무 맛있어서, 다음에 내 친구하고 또 가서 그것 먹을거다.  가격은 저렴하고, 맛은 황제급이다.  한국의 김선배가 있었다면 너무 너무 좋아하셨을 거라고 생각했다. (김선배께서는 귀가 무척 근질거리셨을 것이다.)

어젯밤에, 찬홍이를 데리고 왔다. 찬홍이가 감기를 앓고, 뜨거운 밥에 김칫국 그런거 먹고 싶다길래, 다음주에 추수감사절 휴가때 어차피 올거지만, 주말에 데려다가 김칫국하고 밥 해먹이려고 데리고 왔다.

오전에 느지막히 일어나 찬홍이를 데리고 오랫만에 함께 조지타운에 나갔다.  우리는 조지타운에 브런치를 먹으러 가기 위해서 3.5마일을 걸어가고, 그거 한끼 먹고 다시 3.5 마일을 걸어온다.  찬홍이에게 조지타운 하버에 새로 열린 공원을 보여주었다.  날씨가 화창해서 걷기에 아주 좋았다.  조지타운 거리의 상점들을 기웃거리고 구경을 하고, 문구점에 들러서 카드용지를 사기도 했다.  카드용지가 다 떨어져서 카드를 못 만들고 있었는데, 이제 만들어서 소중한 분들께 카드를 보내드려야지.





키브리지 아래, 보트 하우스의 암초록색 나무 벽 앞에서.



조지타운 하버에 새로 개장한 공원이 참 아름답다. 내 친구가 아직 못 봤을거다. 함께 가서 보여줘야지.




저기 키브리지가 보이고, 다리 건너 알링턴 시내 고층 건물들이 보이고. 



강에 바로 이어지는 계단.  저 멀리 케네디 센터와 동그란 워터게이트 빌딩.




강물이 계단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사진 속에서는 마치 모세가 홍해를 가른 것 처럼 강물이 계단보다 높아보인다.  초현실적 조작된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카페에서 커피와 브런치를 먹었다.  오랫만에 찬홍이하고 얘기하면서 걷고, 먹고 그러니까 참 좋다. 난 내 아들이 아주 친한 친구같다. 말이 잘 통하는 친구.



Urban Outfitters 에 구경 갔다가 엘모 장갑을 발견하고, 끼고 놀아봤다. 그런데 한켤레에 40달러인가 해서, 비싸서 사지는 못했다. 참 예뻤다.



황금빛 나무 밑으로 내 친구 찬홍이가 걸어간다. 내 작은 백팩을 녀석이 매니까 정말 고목나무에 매미 매달린 꼴이다.  나 혼자 지내면서 심심하다거나 쓸쓸하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는데, 찬홍이가 오니까 무척 재미있고 즐거워지면서, 내가 혼자 보낸 시간이 참 쓸쓸했던것 같다는 자각이 들었다.  혼자 있을땐 심심한걸 모르고 잘 놀고 잘 사는데, 찬홍이가 오니까 내 시간이 곱절로 빛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나, 어쩌면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모두 외롭다.)  이런 자각도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다음주, 추수감사절 휴가 기간에 좋은 날 하루를 잡아서, 하퍼스페리부터 20마일을 걷는 프로젝트를 찬홍이와 함께 하기로 했다.  찬홍이가 함께 걸어주면,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착하고 고마우신 나의 귀냄이.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1. 17. 00:22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00295

강준만씨가 최근 펴낸 ‘강남좌파: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2011)’는 한국 사회에서 ‘강남 좌파’라는 신조어가 갖는 위상과 의의를 소상하게 설명해 주며 조국,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을 그 대표적인 ‘왼편’에 그리고 소위 ‘강남 우파’라 할 만한 오세훈, 박근혜의 행보를 대별하여 스케치하고 있다. 올해 7월에 발간되어 인쇄를 거듭하고 있는 이 책이, 몇 달 후에 태어났더라면, 저자는 아마도 수 백 만원 월세를 내고서라도 셋방살이를 ‘강남’에 고집했던 박원순씨나 그를 지원했던 안철수씨를 왼편에, 강남의 고액 피부 클리닉을 드나들었던 나경원씨를 우편에 배치하지 않았을까 상상을 해보게 된다.

 강씨의 해설에 의하면 ‘강남 좌파’란 ‘고학력, 전문직, 화이트 칼라 중산층이면서 진보적 발언을 하는 이들로 기존의 좌파가 노동자 단체를 주요 지지 세력으로 하는 것과 차이가 나며, 자본주의를 비판하더라도 사회주의 이념을 고수하지 않고 복지국가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 ‘강남 좌파’가 유독 21세기의 한국 사회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라서, 다른 나라에도 명칭은 다르지만 비슷한 집단이 존재한다. 일단, 미국에는 ‘리무진 리버럴(limousine liberal)’이 있다. 리무진이나 개인 비행기를 타고 다닐 정도의 부유층이면서 진보적 발언을 하고, 환경문제에 관심을 보이되 소형차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공공교육을 주장하고 지원하면서 자신의 자녀들은 사립학교에 보낸 민주당의 테드 케네디 같은 정치지도자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사실 나는 오바마 대통령의 팬이지만, 그가 워싱턴DC에 입성하면서 그의 두 딸을 공립학교가 아닌 상류층 자녀들만 다니는 사립학교에 보냈을 때 약간 실망했었다. 워싱턴DC의 공립 교육이 열악하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대통령의 자녀가 다니기에 어려운 점이 있었겠지만, 그가 공립학교 쪽으로 결단을 내려줬다면 얼마나 멋있었을까?

 비슷한 개념으로 영국에는 ‘샴페인 사회주의자(Champagne Socialist)’가 있고, 러시아에 ‘샴페인 볼셰비키(Bollinger Bolshevik)’, 호주와 뉴질랜드에는 ‘샤도네이 사회주의자 (Chardonnay Socialist)’가 있다. 대략 빈민, 노동자 계급을 대변한다는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고급 음료 ‘샴페인’이나 ‘샤도네이 백포도주’를 즐기는 것과 같은 모순점을 지적하는 별칭이다. 독일에는 ‘토스카나 파(Toskana Fraktion)’가 있다. 여름휴가를 토스카나에서 즐기는 좌파를 지칭하는 말이다. 프랑스에는 ‘캐비아 좌파(Gauche Caviar)’가 있다. 고급 상어 알 요리를 즐기는 좌파라고 비꼬는 표현이다. 네덜란드의 ‘살롱 사회주의자(Salon Socialist)’들은 자신들이 너무나 고고한 나머지 주로 살롱에 앉아 사회주의를 논하는 데 그치고 만다는 것을 풍자한 것이고, 폴란드의 ‘커피숍 혁명가’는 사회주의를 논하긴 하지만 빈민층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중상류층 식자들을 비꼰 것이다.

 전체적으로 ‘강남 좌파’를 비롯하여, 이와 맥을 같이 하는 세계 여러 나라의 표현들은 대개는 먹고 살만한 지식인들의 좌파적인 언행과 그에 부합하지 않는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냉소적인 표현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강남 좌파’는 이제 그 개념이 초기의 부정적 이미지에서 서서히 중립적인 이미지로, 심지어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이미지로 진화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사회가 다양화되어 가고 있고,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하는 요인이 아닌 21세기에, 자본주의 체제를 살아가는 사회에서 좌파에게만 순결주의적 자기희생이나 도덕성을 묻거나 요구하는 것 역시 모순 일 수 있다는 뜻이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좌파나 우파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상황에 따라서 좌파적으로 혹은 우파적으로 판단하거나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강준만씨는 이 책에서 좌파나 우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내게 보여준다.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부지런히 자판을 두드리는 것도 내 오른손과 왼손이 아닌가?


2011,11,16 이은미


박원순씨 서울시장 취임식을 유튜브로 보면서, '아하!' 그 사람의 방법을 파악했다.  이분이 '뭐 공약이 뭐냐고 묻는데, 공약이 별건가요. 이렇게 서울 시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희망사항을 잘 꾸려나가면 되는거 아닌가요 (기억나는대로 정리)' 라는 대목이 있었다.  시장선거중 상대편이었던 나씨가 청사진을 제시하며 조목조목 따지고, 박씨한테 당신도 이런걸 제시하라고 몰아 붙일때, 박씨가 좀 어벙하게 대꾸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고 살림을 꾸려나가겠다 이거다.

가령 지도자가 큰 그림을 그리거나 제시하고 남들에게 따라오라고 제안하는 방식은 Top-down Process, 지도자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려 나가는 방식을 Bottom-up Process 라고 하는데  한쪽에서는 탑다운으로 리드를 하면서 자신의 시선을 낮추겠다고 말했고, 한 쪽에서는 큰 그림 제시 없이 밑바닥 정서부터 훑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 말하자면, Empowering Evaluation 기법이라는 것인데,  Fetterman 이라는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가 열정적으로 여러나라 지방도시에서 직접 실연을 하던 방법이기도 하다. 도시나 커뮤니티에서 뭔가 계획을 세울때, 구성원들이 모여서 가장 필요한 것을 정하고 순번을 정하고 실행 방법을 정하고...  왜 Empowering Model (Empowerment Evaluation)이라고 하는가 하면, 구성원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구성원들이 주체가 되도록 도와준다는 것이지.  박시장도 '여러분이 시장이고 제가 시민입니다'고 설명을 하는데, 바로 시민에게 힘을 실어주는 방법을 그가 서울에서 현재 실천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몇해전에 Empowerment model 을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모델을 짜면서, Fetterman 교수에게 메시지를 보냈을때, 그는 동영상으로 즉시 답신을 보내 올 정도로 그가 하는 일에 열정적이었다.  이런 일이 열정 없이는 참 하기 힘든 일이 아닌가?

이제 좌파니 우파니 하는 말은 어쩌면 걸핏하면 아무한테나  '빨갱이' 소리를 내지르는 '뭘 잘 모르는 사람'들의 언어가 될 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1. 9. 22:17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295940

http://www.imdb.com/title/tt1268799/

지난 주말 우리의 친구 ‘해롤드와 쿠마’가 크리스마스 캐롤과 함께 우리 곁에 돌아왔다. 2004년 ‘해롤드와 쿠마, 화이트 캐슬에 가다(Harold and Kumar Go to White Castle)’에 힘입어 2008년에 나온 2편, ‘해롤드와 쿠마, 관타나모를 탈옥하다 (Harold and Kumar Escape from Guantanamo Bay)’에 이어 3년 만에 이들의 크리스마스 에피소드가 나온 것이다. 특히 이 영화에는 한국계 배우인 존 조 (John Cho)가 주인공 해롤드로 나와서 한국인에게는 더욱 친밀감을 준다.
 
3편에서 ‘엄친아’인 해롤드는 성공한 비즈니스맨이 되어 있고, 쿠마는 여전히 사고를 치며 살고 있다. 그리고 또다시 소동은 시작된다. 성인물답게 포르노그라피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도처에 깔려있고, 도저히 남녀노소 온 가족이 손잡고 영화관에 가서 볼 만한 작품은 아니다.

주말의 영화관에도 주로 20대 젊은이들이 객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영화의 1편, 2편을 아직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3편은 어쩌면 그저 황당한 얘기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딱히 전작을 찾아 보지 않더라도, 3편 자체만으로 한나절 유쾌하게 웃고 지나갈 성인물로는 손색이 없어 보인다.
 
나는 사회언어학 수업이나, 문화 관련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해롤드와 쿠마’ 시리즈 1편, 2편을 보고 감상문을 작성하라는 숙제를 내주거나, 영화의 일부를 보고 함께 토론을 할 때가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인도계 미국인인 쿠마와 한국계 미국인인 해롤드이고, 영화에는 미국의 이민자 사회나 혹은 소수 문화에 대한 편견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 지뢰밭처럼 깔려 있다.
 
가령 2편에서는 해롤드와 쿠마가 관타나모 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탈옥하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이때 미국 정보국에서 해롤드의 가족과 친지를 심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계 미국인인 해롤드의 부모에게 수사관은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대화를 시도한다. 해롤드의 부모가 한국계이니 영어가 안 통할 거라고 미리 판단한 것이다. 해롤드의 아버지가 “나는 미국에서 수 십년간 살아온 미국인”이라고 유창한 영어로 설명을 해도 수사관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는 그가 ‘이상한 한국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계는 영어를 못 할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고정관념, 영어로는 스테레오타입 (stereotype)이라고 한다.
 
이들이 유태계 미국인을 심문할 때는 동전이 가득 든 주머니를 잘랑잘랑 소리나게 흔들어댄다. 유태인들은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니 돈 소리를 내면 모든 것을 자백할 거라는 생각에서다. 그 뿐만이 아니다. 공항이나 비행기 안에서 쿠마는 필요 이상으로 의심을 받는다. 그가 유색인종이고, 아랍계 사람들과 비슷한 용모라서 무조건적인 경계의 대상이 된 것이다.
 
3편에서는 쿠마가 친구와 함께 차를 타고 성공한 해롤드의 집에 도착했을 때 해롤드를 한번도 본 적이 없던 쿠마의 친구가 말을 한다. “난 네 친구 해롤드가 백인일 거라고 상상했어.” 해롤드라는 이름, 그리고 성공한 비즈니스맨을 조합하면 백인이 어울리는 것이리라. 해롤드가 결혼한 남미계 부인의 가족이 등장할 때 한 마을 사람 모두가 온듯한 장면 역시 사실은 인종적 스테레오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다문화 다민족들이 어울려 사는 미국 사회에 뿌리깊게 깔려있는 인종, 문화에 대한 소소하고도 질긴 편견들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사실 이 영화에 깔려 있는 이런 ‘편견 코드’를 얼마나 속속들이 읽어 내느냐가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관건 일수도 있겠다.
 
이태 전, 학생들에게 이 영화 속에 깔려있는 편견들을 찾아보라는 숙제를 내 준 적이 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현재 살고 있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미국인의 삶 속에 스며있는 각종 편견의 요소뿐만 아니라, 자신이 안고 있는 편견의 덩어리들을 발견하는 시간을 가졌으리라. 그런데 영화가 난잡해서 눈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는 평도 있었다. 성인물 코미디 해롤드와 쿠마, 그들이 있어 유쾌한 인생이다.

2011,11,9 이은미

아, 또 보고 싶다. 나중에 추수감사절에 찬삐 집에 오면 둘이 같이 가서 조조할인으로 또 봐야지~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