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Walking2012. 3. 24. 00:18


찬홍이와 벚나무아래

찬홍이갸 '봄날은 간다' 노래를 틀어줘서  둘이 함께 연인모우드로 듣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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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12. 3. 23. 23:45




찬홍이와 벚꽃축제 :) 걷기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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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2. 3. 21. 20:24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79841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81526

 

 

 

동물도 인간처럼 말을 할 수 있을까? 동물에게도 언어 능력이 있을까? 언어학을 배우는 학생들은 교양 수업 중에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 언어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에 따라서 답이 달라질 것이다. 인간들이 구사하는 언어에는 보편적인 구조가 존재하고, 이러한 언어구조 능력은 인간에게만 존재한다는 논리를 펼친 학자로 노엄 촘스키 (Noam Chomsky)가 있다. 요즘 그는 언어학자이기보다는 진보적 지성으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에게도 언어 능력이 있을 거라는 가정하에 동물 연구를 하는 학자들이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특히나 진화학적으로 인간과 가장 가깝다는 영장류 침팬지가 이들의 언어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1973
년 갓 태어난 침팬지에게 님 침스키 (Nim Chimsky)’라는 이름을 붙인 연구팀이 침팬지의 인간 언어발달 연구를 시작한다. 태어난 지 2주 만에 엄마 품에서 떨어진 님 침스키는 인간의 아기가 자라나는 환경과 똑같이, 인간의 가정에서 인간 대우를 받고 성장한다. 그리고 전문 교사들이 이 침팬지에게 언어 학습을 시킨다. 이 침팬지는 청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미국 수화를 토대로 극히 기초적인 어휘들을 습득해 나간다. 3년여의 교육과 관찰 끝에, 연구진은 침팬지가 인간 언어를 습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연구를 중단한다.

            
여기까지는 교양 과정 언어학 수업에서도 많이 소개되는 일화이다.  그런데 연구가 실패로 돌아간 후에 님 침스키는 어떻게 되었을까? 님은 원래 그가 태어난 동물 연구소의 철창 안으로 돌아갔다. 인간의 아이로 성장하던 님은 다른 침팬지들과 똑같이 철창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된다. 그 후에는 신약 연구팀에 실험용 동물로 팔려 간다. 그는 각종 백신의 생체실험 동물로 이용되다가 간신히 구출되어 야생동물 보호소로 보내졌다.  그 보호소에는 동료 침팬지가 없었고, 그는 우리에 갇힌 채 2000 26세로 사망하기에 이르도록 모진 세월을 견뎌야 했다. 이 침팬지가 죽을 때까지 그를 찾아가 친구가 되어준 이는 그를 인간의 아기처럼 끔찍이 아끼던 그의 보모들이나 연구자들, 교사들이 아니었다. 동물 연구소에서 그를 친구처럼 대하던 동물원 직원이 언어 교육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침팬지와 활발하게 소통하며 죽을 때까지 그의 벗으로 남았다.



2011
년에 소개된 다큐멘터리 영화인 프로젝트 님 (Project Nim)’은 이러한 님의 일생을 담담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해에 이와 흡사한 영화 한편이 출시가 되었다. 제목은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인데 사람들은 이를 고전 영화 혹성탈출시리즈의 전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우주 비행사가 불시착한 이상한 별은 유인원들이 지배하는 땅. 우주비행사는 결국 그 유인원의 땅이 바로 자신이 떠나온 지구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줄거리의 혹성탈출을 나는 어릴 때 흑백 텔레비전으로 본 적이 있다. 지구가 어떻게 유인원의 땅이 되었는지를 2011년에 출시된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인데, 참 놀랍게도 이 영화와 거의 유사한 침팬지 학대가 사실은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니, 님 침스키의 기구한 몰락과 영화 속 침팬지의 파란만장한 역정이 너무나 일치해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침팬지가 인간 언어를 습득할까 하는 연구는 아직도 연구가 진행 중인데,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침팬지에게 바나나이라는 단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침팬지에게 바나나를 물에 넣어라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침팬지가 바나나를 창 밖으로 휙 던졌다. 몇 번이나 같은 지시를 해도 침팬지는 똑 같은 짓을 반복했다. ‘역시 침팬지는 안돼……’ 연구자가 한숨을 쉬며 창 밖을 내다보니 창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고 한다.



내일은 대학원생들과 국립 동물원에 필드트립을 나간다. 침팬지 사육장에 가서 침팬지들을 관찰하며 간단한 언어 실험도 해 보려고 한다. 문득 궁금해 진다. 인간 언어를 침팬지가 잘 못 배운다고 치고, 인간은 침팬지의 언어를 얼마나 잘 배울 것인가?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12. 3. 21. 10:30



봄날이 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학교에서 수업 마치자 마자 대충대충 책상위를 정리하고 집으로 달려왔다.  운동을 다녀와서 쉬고있던 찬홍이를 끌고 포토맥으로 향했다.  찬홍이가 운전대를 잡아서, 내가 차창밖의 풍경을 사진기에 몇장 담을수도 있었다.  체인 브리지 로드.  하늘에 떠있는 '꽃구름.'


비가 뿌렸던 걸까? 길이 촉촉하고 웅덩이에 물이 고여있기도 하고, 온세상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 그렇게 싱싱한 봄날의 오후. 웅덩이에 고인 물에 비친 나무의 연두가 너무 생생해서 슬프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일까?  작년까지도 나는 꽃잎에 열중했던 것 같은데, 올해는 자꾸만 초록, 연두가 시선을 잡는다. 심지어 이 봄날의 연두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길가다 문득 문득 발을 멈추고 연두 잎을 들여다보거나 손으로 만져보기도 한다.  연두, 초록, 네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  살아서 이렇게 아름다운 색깔을 보고 만지고 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산다는 일은 참 벅차고 힘든 숙제 같은 거지만,  그래도 이렇게 고운 빛깔을 볼 수 있으니 위로가 되고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찬홍이가 찍은 내 뒷모습이 참 태평하고 아담해보여서 맘에 들었다.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 살았다는 것을 기억해야지.




키브리지



조지타운 스포츠 용품점 쇼윈도. Run, Recover, Repeat. 달리고, 회복하고, 다시 달리고.
찬홍이가 달리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하루에 5-7마일을 꾸준히 달리고 있다고. 하도 기특해서 내가 달리기 운동화와 운동복을 사주기로 했다.  찬홍이를 따라서 나도 조금씩 달리기를 해 봐야지.



요즘 찬홍이와 외출을 하면 프로즌 요거트를 사 먹을때가 종종 있다. 만날때마다 한번씩은 사 먹는것 같다.  전에 혼자서 프로즌 요거트를 사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맛이 없어서 먹다 버렸다.  찬홍이와 먹으면 맛있는데, 혼자 먹으면 재미가 없다.  그래도 아이스크림은 느끼해서 다 못먹는데 프로즌 요거트는 작은것 하나는 거뜬히 해결한다. 즐거운 프로즌요거트.





집에 돌아오는 길에 조지타운에서 아주 고색창연하고 위엄있어보이는 빵집을 하나 발견했다. 빵집 점원이 갓 만든 빵을 진열하다 말고 창밖의 내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다음에 조지타운에 오면 이 빵집에 들러서 예쁜 파이 하나를 사 먹어봐야지!!!






꽃잎이 잔설처럼 내려 쌓인 조지타운 수로변. 파타고니아 옷가게 앞이다.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를 무심코 흥얼거리게 된다.

 


그리고 수로 너머로 지는 저녁해.  찬홍이와의 즐거운 강변 산책.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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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12. 3. 20. 10:45





 



리버밴드 파크에 산책 갔다가 만난 퍼그 종 개 한마리. 물론 곁에 주인이 있었다. 목줄을 묶어야 하지만, 한적한 숲속이고, 개도 순둥이라서 주인이 그냥 풀어놓고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이 녀석은 오만상을 찌푸린채로 (원래 생긴게 그런 것이지 원래 걱정이 많은 개는 아닐 것이다), 꽃밭을 서성이며 연신 꽃무리에 코를 박고 나오려 하지 않았다. 못생긴 개와 꽃이 어쩐지 아주 잘 어울리고, 정겨워 보였다.  이 장면에 맞은 짧은 동화를 만들어보고 싶다 (나중에, 생각나면.)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12. 3. 20. 10:39



폭탄 맞은듯 갑자기 몰아닥친 봄날에, 내가 마음이 바쁘다. 갑자기 봄이 왔기 때문에 예년 같으면 차례차례 피어날 봄꽃들이 순서 무시하고 한꺼번에 피어나고 있고,  아마도 이렇게 황망하게 봄날은 지나갈 것이다.  이꽃이 지면 저꽃이 피고, 이런 순서가 사라진 것이다.  아쉬운 일이다.

퇴근후에 저녁나절에 리버밴드 파크에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내가 예상했던대로 작년보다 이르게 버지니아 블루벨 (파란 종) 꽃이 이미 길섶을 푸르게 물들이고 있었다. 앞으로 열흘정도 후에는 길이 온통 파랑이 되겠구나.  놓칠뻔 했다. 금주중에 터키런에도 가 봐야 하고...마음이 더욱 급해진다.  봄 아가씨가 벌써 저만치 가버리는 것 같아서다.





그레이트폴스까지 산책.











돌아오는 길에 찬홍이가 강가에서 놀다가 뻘흙에 두발이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넓다란 바위에 앉아서 흐르는 물에 찬홍이 양말도 빨아주고, 발도 씻어주고, 뻘흙이 뒤범벅이 된 운동화도 깨끗이 빨아 주었다.  강변의 바위에 앉아 빨래를 하고 있자니 마음이 한가로워졌다. 

찬홍이가 내게 미안했기 때문에, 앞으로 봄방학 끝 날때까지 매일 엄마가 산책가자는대로 함께 다니기로 했다.  4월말에 50 킬로미터 걷기를 성공적으로 하려면 이제 슬슬 몸만들기를 해야 한다. 거의 두달가까이 꼼짝 않고 누워서 뒹굴거리고 지냈기 때문에 몸이 둔해지고 발걸음에도 속도가 붙지 않는다. 민첩하고 단단한 몸을 만들어놔야 장거리 걷기를 무사히 해 낼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올 봄에는 단거리 달리기에도 도전을 해 볼 것이다.  이 봄이 다 가기전에 해야 할 일들이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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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12. 3. 19. 23:29


봄의 제전 (1905) 가로 56 인치 세로 26인치

미국에는 프레데릭 처치 (Frederick Church) 라는 이름의 유명한 화가가 두명 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생존했던 분들인데 풍경화가로 유명한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 가 있고, 그리고 일러스트레이터로 유명한 Frederick Stuart Church 가 있다.  풍경화가 에드윈이 약 20년 먼저 태어나 활동했다.

프레데릭 스튜어트 처치 (1842-1924)는 그당시 문화예술계에서 후진국이나 다름 없었던 미국의 화가/화가 지망생들이 유럽을 동경하고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는 세태에 대해서 무관심했다. 그는 미국을 사랑했고,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유럽으로 유학 가서 유럽 화풍을 배우는 일 보다는 스스로의 미술세계를 일구는데 충실했고, 상업 일러스트레이션 분야에서 인정을 받았다.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과 렌윌 갤러리에서도 그의 소형, 대형 작품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는데, 대개는 신화나 우화를 모티브로 한 몽환적인 작품들이 보이고 있다.

'봄의 제전'이라는 위의 작품에는 숲속에 온갖 동물들이 모여서 봄의 여신같은 여인들과 어울려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몽환적인 장면이 담겨 있다.  요즘 나 역시 겨울잠에서 깨어나 세상에 나온 곰처럼 그렇게 꽃속에서 몽롱하다.

2012, 3, 19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12. 3. 19. 04:24
지난 금요일 저녁에 스프링 브레이크를 맞은 찬홍이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어제는 종일 5월의 날씨처럼 화창했고, 꽃이 천지에 미친듯이 피어났고 햇살이 너무 눈부셨다.

오늘은 종일 구름낀 날씨가 예보되어, 아침에 찬홍이와 산책을 나갔다. 오랫만에 찬홍이와 베데스다.

차를 포토맥강변 마을에 세우고,  개나리가 만발한 어느 집 담장 앞에서 사진도 찍고.


숲길에 핀 야생 수선화에게 인사도 하고


누군가가 쓰러진 나무를 토막 내어 세워 놓고는 심심풀이로 조각을 한 듯.  나무 토막 일부를 잘라내어 의자를 만들어 놓았다.  나무꾼의 의자.





오랫만에 찬홍이와 커플샷 놀이도 하고. (불쌍한 찬홍이. 아직도 여자친구가 없어서 엄마하고 논다)
엄마 곰은 날씬해. 아기 곰은 뚱뚱해. 찬삐곰은 너무 귀여워~!


연두빛으로 물이 오르는 숲의 자태가 눈물겹게 아름다운, 아주 짧은 일년중 한때.


개울가 숲지대를 덮고 있는 이끼같이 고운 Buttercup.


다리의 철조망 사이로 삐죽 내민 벚꽃. (호기심 많은 강아지가 울타리 밖을 내다 보는듯 앙증맞고 귀엽다).





케닐우드 벚꽃 마을의 벚나무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아직 만발한 것이 아니다. 다음 주말에 가면 온동네가 흰 벚꽃으로 뒤덮이리라... 다음 주말에 또 이곳에 와야지. (이 나무에 이렇게 걸터 앉으면...(작년에도 이 가지에 걸터 앉았었다) 어김없이 오스카 와일드의 '키다리 아저씨, 이기적인 거인 이야기가 떠오른다.  아이들이 나무에 오르자 봄이 찾아왔다는 이야기. 한아이가 나무에 오르지 못해 울고 있자 거인 아저씨가 아이를 나무에 올려 준다. 그러자 그 나무에도 꽃이 피고, 거인은 아이의 손발에 못자국 상처가 있는 것을 보고 화를 낸다, "누가 네게 이렇게 몹쓸짓을 한거냐?"   빙긋 웃고 사라지는 아이.

나무아래를 지나가는 꼬마 아이가 부러운듯 쳐다본다.



나무에 기어오르는 꼬마아이들.


늘 들르는 카페 뺑 꼬디디엥에서 늘 먹는 음식을 주문하여 먹고, 즐거운 봄날의 오전.

***  ***

살면서 올해 봄처럼 반갑고 고마운 봄은 처음 인 것 같다.  그만큼 지난 겨울 나기가 힘이 들었다. 2월 한달간은 정말 하루하루가 힘이 들었다. 내가 뜨개질만 내내 했던 것은, 일어나 걸을수가 없이 힘이 들어서, 침대에 기대 앉은채 뜨개질을 하다가 자다가 했기 때문이다. 잠이 깨면 뜨개질을 하고 그러다 졸리면 다시 뜨거운 전기담요 속으로 들어가 자곤 했다.  드디어, 결국, 내가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이러다 죽나보다 했다.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중병 환자 병동에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곤 했었다. 병원에 일찌감치 안 간 이유는, 중병 선고 받기가 싫어서. 최대한 미루기 위해서.

의사는 '아무 병도 아니다'라고 나를 안심 시켰고, 그래도 나는 여전히 아팠고, 3월이 되고 세상이 꽃이 피면서 나를 괴롭히던 통증도 요술처럼 사라졌다. 정말 요술 같다. 내가 세상에 꽃이 피어나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하면서 내 몸의 통증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지금 1년전처럼,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처럼 몸이 가볍고 건강하다.  부활한것처럼.

그래서, 지금 내가 누리는 이 몸 가벼운 건강함이 얼마나 소중한지, 내가 건강한 몸으로 맞는 이 봄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지 절절하게 느끼고 있다. (오늘 오랫만에 걸으러 나갔는데, 조깅하는 사람들을 따라서 달려도 몸이 가벼울만큼 그렇게 가뿐했다.) 이제 다시 뭔가 계획하고 노력하고 성취할수 있을것 같다.  다시 봄이 온것 같다.

지난 겨울은 너무나 혹독했고, 웅녀처럼 내 굴속에서 뜨개질을 하며 버티던 그 겨울의 시간은 내게 많은 소중한 것들을 일깨워주고 있었으리라.  굴밖의 세상은 황홀하게 아름답다. 이제 다시 부지런해져야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조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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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2. 3. 15. 00:06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75304

http://americanart.tistory.com/1569




모차르트가 작곡한 오페라 ‘코지 판 투테 (Cosi fan tutte)’가 지난 2월부터 3월15일까지 케네디 센터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 중이다. 제목 ‘Cosi fan tutte’는 이 오페라에 등장하는 세 명의 남자들이 합창하는 곡의 대사이기도 한데, 우리 말로는 ‘여자는 다 그래’라는 뜻이다. 애인들의 사랑이 진실하고 영원한지 시험을 해 보는 남자들, 그 남자들의 꾐에 넘어가는 애인들. 그래서 결국 남자들은 ‘여자는 다 그래’라고 노래 부르게 된다는 것인데,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 제목은 그다지 냉소적이거나 여성 비하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냉소적 가사 뒤에 남녀간의 사랑의 유한성을 받아들이는 철학적 관조가 스며있는 유쾌한 코미디다.

 
1790년에 처음 무대에 올랐다는 이 작품이 이백 년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관객의 공감을 얻으며 오페라 하우스를 폭소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이유가 모차르트 음악의 탁월성에 있기도 하겠지만, 연애가 갖고 있는 보편적이고도 통시적인 속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도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는 입고 있는 옷이 바뀔 뿐 그다지 변하지 않는 것이니.

 
그래서일까? 2012년 워싱턴 국립 오페라단의 ‘코지 판 투테’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일상을 그리는 ‘시트콤’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화려한 무대가 아닌, 현대적 디자인의 단순한 무대가 세시간 내내 변함없이 지켜지고, 캐주얼 의상, 오토바이 폭주족 의상, 그리고 최근 새로 도입된 미군 복을 입은 주인공들이 무대 위를 활보한다. 출연자들은 스마트폰으로 이메일을 확인하거나 즉석 사진을 찍기도 하고, 결혼식에 참석하는 군중도 객석은 쳐다보지도 않고 스마트폰에 열중한다.

 
고전적이고 화려한 무대를 기대했던 내게 2012년의 ‘코지 판 투테’는 그 일상성 때문에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면서 동시에 나의 상식의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고전적 오페라를 고전에 가두지 않겠다는 새로운 조류를 발견하는 것은 아프면서도 산뜻한 경험이다. 사람들은 늘 새로운 해석을 하고 새로운 도전을 한다.

 
이 코미디 오페라에는 세 명의 남자와 세 명의 여자가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가 주인공이라고 할 만큼 각자 중요 역할을 해 낸다. 내가 지난 11일에 본 공연에서는 한국 출신 소프라노 양제경씨가 그 주인공들 중 하나인 '데스피나' 역을 아주 활발하게 해 냈다. 다른 출연자들에 비해 체구가 다소 작은 듯 하지만 작은 체구를 무색하게 하는 힘찬 음성과 연기로 무대를 압도하고 관객들의 폭소를 자아내는 그를 보니 특히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오페라를 보러 갈 때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갈까? 라디오나 음반을 통해 귀에 익은 아리아를 흥얼거리며 그것을 오페라 무대에서 확인하기 위해 가는 수도 있고, 드라마 그 자체를 즐기는 경우도 있고, 화려한 무대나 조명을 기대하는 수도 있고, 오페라를 위한 오케스트라 연주에 열광하는 수도 있겠다. 오케스트라 연주나, 유명 아리아들, 줄거리, 가수들의 연주와 연기, 무대 연출과 조명들, 많은 요소들이 한편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종합 예술’이라고 칭한다.

 
예전에 나는 '오페라'에 대해서 부정적인 편견을 가졌던 적이 있다. ‘오페라’는 부자들이나 즐길 수 있는, 서민 생활하고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고, 게다가 노래 가사도 알아 들을 수 없는 것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비용 문제는 아직도 걸림돌이 될 수 있겠다. 하지만 가사 이해 문제는 무대 위 쪽으로 자막 처리를 해 주므로 해소가 되었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일까, 이제는 역량 있는 성악가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힘을 모아 기획하고 무대에 올리는 종합예술인 오페라 구경을 하는 일이 참 좋다. 입장료는 여전히 부담이지만, 조금 부지런을 떨면 그럭저럭 싼 표를 구할 수도 있다. 케네디 센터에서 ‘코지 판 투테’를 보고 오는 길에 5월에 열리는 ‘나부꼬’와 ‘베르테르’ 공연표를 샀다. 제일 싼 25달러짜리로. 구석자리 가장 싼 표라도 오페라를 볼 수 있다니 참 기쁜 봄날이다.


2012,3,14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2. 3. 8. 01:56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70581

영화 ‘철의 여인 (The Iron Lady)’이 한참 전에 개봉했음에도 여태 안 본 이유는, 영화의 실제 인물인 ‘마가렛 대처 (Margaret Thatcher)’에 대해서 어딘가 내키지 않는 구석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이는 12년간 영국의 총리를 지낸 인물로 영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성 총리이기도 하고 영국은 아직도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런데 인물이나 역사물을 즐기는 내가 이 영화를 안보고 지낸 이유는 좀 엉뚱한데 있다.

 
대처가 총리를 지낸 1979년부터 1990년 그 12년 사이의 한국의 현대사는 어떠하였는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가 쏜 총에 사망했고, 이어서 1980년에는 광주 민주화 항생이라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리고 전두환, 노태우의 잇따른 집권.

 
보수주의자 대처가 영국의 총리로 국제무대에서 화려한 명성을 쌓는 동안 한반도에서 한창 자라나던 나는 걸핏하면 수업이 중단되거나 휴교령이 내려지던 대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돌아보기에도 씁쓸하고 암울했던 시절. 그래서 나는 동시대를 살았던 대처의 세월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메릴 스트립이 이 영화로 2012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영화를 지나쳐버렸을 것이다.

 
영화 ‘철의 여인’은 노년에 쇠락해가는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잡화상의 딸이었던 한 사람. 결혼을 하더라도 남성의 품에 기대있기보다는 사회활동을 하고 싶었던 사람. 그가 마침내 이룬 영광의 세월과 그리고 이어지는 노년과 상실의 시간.

 
대처의 보수적 정치 노선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그가 느꼈을 갑갑함에는 깊이 공감하는 편이다. 이 영화에는 남녀가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식사를 마치자 남성들은 남성들끼리, 그리고 동반하여 온 여성들은 여성들끼리 따로 자리를 옮긴다. 이 때 어쩐지 쫓겨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는 젊은 날의 대처. 나는 그이의 그 좌절감에 깊이 공감했다.

 
나는 부부동반 모임을 좋아하지 않으며 잘 가지도 않는다. 남편이 싫어서가 아니다. 남편과 나는 사이 좋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부부동반 모임에 가면 나는 부속품 신세로 변모한다. 한국인들의 경우 부부동반으로 초대를 받아가도 대개 남자는 남자들끼리, 여자는 여자들끼리 모여 앉는다. 남자들은 서로 술을 주고 받으며 직장이야기나 사회, 정치 이야기를 하고, 동반한 부인들은 자녀교육 얘기나 식탁에 차려진 요리를 어떻게 한 것인지 이야기를 한다. 어느 때는 맥없이 기다리는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그 시간에 책을 읽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부부싸움을 한 적도 있다, 내가 꼭 필요하지도 않은 자리에서 막연히 남자들의 파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못 된 여자가 아닌가 하는 죄책감도 드는 것이다.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던 여자, 결혼을 하더라도 집에서 살림만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는 젊은 날의 대처를 보며 나는 위안을 받았다. 대처의 곁에는 그가 정치인으로 쑥쑥 자라도록 착실히 외조 했던 남편이 있었다.

 
대처의 시대는 갔다. 한국에서도 신 군부의 시대는 갔고, 혁혁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한국에도 대처를 방불케 하는 여성 지도자들이 정계에 많이 등장했다.


제일 야당대표인 한명숙씨도 있고, 대권 주자라는 박근혜씨도 있다. 진보의 아이콘 이정희씨와 심상정씨가 있고, 서울 시장 후보에 올랐던 나경원씨도 있다. 독신인 박근혜씨를 제외하면, 이들 여성 정치인들은 모두 남편의 착실한 외조를 받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이들의 정치적 노선은 각기 다르지만 오늘날 한국의 정치 판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사실이고, 개인적인 친밀도와는 상관없이 나는 이들 여성 정치인들의 활약을 보면서 기쁨을 느낀다. 이들은 한국 정치의 장에서 아직까지도 여건이 척박한 여성들의 몫을 넓히는 철의 여인들인 것이다. 이제 좀 더 많은 여성 인재들이 철갑 옷이 아닌 본성의 부드러움으로 한국 정치의 폭을 넓혀주기를 기대해 본다.


2012,3,7 이은미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2. 2. 29. 20:37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66380



‘진흙을 자꾸 던지다 보면 일부는 들러붙기도 한다(Throw enough mud, and some of it will stick)’이라는 영어권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이 사용되는 상황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실력이 별로 없고 서툴지라도 자꾸 하다 보면 일부는 성공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뜻이 되기도 하고 둘째로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 근거 없는 비방을 자꾸만 하게 되면 설령 그 사람에게 잘못이 없을지라도 점점 인상이 나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사람을 문제에 빠뜨리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근거 없는 소리도 늘어놓으면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지난 주말 한국에서 날아온 인터넷 뉴스는 많은 사람들을 안도하게 했다. 강모 의원이 박모 서울시장의 아들에 대해서 병역비리를 제기하며 매일 블로그를 통해 그리고 의원회관에서 뿌려대는 보도자료로 흑색선전을 계속하던 중이었다. 이 흑색선전은 박시장의 아들이 전격적으로 신체검사를 다시 받음으로써 일단 종결되는 듯 보였다. 의료진은 검사에 문제가 없었음을 입증했고, 흑색선전에 열을 올리던 강모씨는 이를 깨끗이 수긍하는 듯해 보였으며, 고통 받던 박시장은 모든 일을 불문에 붙이기로 했다.

 
그래서 이 일은 이쯤에서 정리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며칠 잠잠하던 강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앞으로도 문제들을 캐 낼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 것으로 2라운드에 들어가는 듯 하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진흙을 자꾸 던지다 보면 들러 붙는 것도 있다’는 속담이 떠오르고 말았다. 그런데, 흑색선전으로 고통을 받던 박시장이 한 말이 눈길을 끈다. 자꾸 아들의 신체검사 결과에 대한 의혹이 반복되니까 급기야는 아버지인 자기 자신마저 ‘내 아들이 혹시 나 모르게 무슨 부정을 저지른 것이 아닐까?’하는 의혹에 빠지게 되더라는 것이었다. 자식을 키워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혹시 내 자식이 나 모르게 못된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순간 부모가 겪는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식품점에 가게 되면 계산대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눈앞에 진열된 각종 잡지로 눈길이 가게 된다. 그 잡지 중에 ‘내셔널 인콰이어러(National Enquirer)’라는 것도 있다. 이번 주에는 얼마 전 작고한 가수 휘트니 휴스턴의 장례식 시신 사진이 커버에 실려있다. 그 옆에 ‘피플’이라는 잡지 역시 휘트니 휴스턴을 커버에 실었는데 전성기의 아름다운 모습을 실어 놓았다. 나는 시신 사진을 허락도 받지 않고 실었을 내셔널 인콰이어러를 보며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이제 고인이 된 사람의 모습을 저런 식으로 싣다니 얼마나 무례한가!



 나는 내셔널 인콰이어러지를 직접 사서 들여다 본 적은 없지만 계산대 앞에서 이 잡지 커버를 보는 것만으로도 잡지의 정체를 짐작하게 된다. 이 잡지는 허구 헌 날 영국 찰스 황태자의 가족문제나 이혼문제,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의 파경설, 어느 여배우의 임신 소식 등 주로 이혼, 불륜, 파경소식으로 도배를 한다.


 
그래서 하루는 장을 보며 아들에게 말해줬다. “저 잡지가 사실이라면 안젤리나와 브래드는 벌써 몇 수십번 이혼하고, 결혼식하고, 집나가고, 헤어지고 그랬을 거다.” 그러자 아들이 말해줬다. “저 잡지는 하도 이상한 소문을 많이 내다보니 어떤 경우에는 우연히 그 소식이 맞아 떨어져서 대박이 날 때도 있어요.” 그렇군, 진흙을 계속해서 던지다 보면 맞아 떨어지는 것도 생기는 법이군.

 
장난으로 던지는 돌에 개구리는 죽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한 술 더 떠서 아주 죽이자고 작정을 하고 돌을 던지면 배겨낼 개구리가 얼마나 될까? 개구리뿐 인가? 사람은 강하면서도 연약하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인간’은 한없이 강하고 너그러워질 수도 있지만, 인간인지라 한없이 연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니 자꾸만 돌을 던지면 분명 다친다.


돌에 맞는 사람만 다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다치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돌 던지는 그 자신의 영혼이 망가진다. 이제 진흙 던지기 놀이는 그만 좀 해줬으면 좋겠다. 진흙 던지는 그 사람이 너무 딱하다.



2012,2,29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2. 2. 29. 20:34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62181

중년의 미국 학자 베리씨는 청바지 몇 벌 있는 것을 십 년 넘게 입었다. 이것도 오래 입다 보니 헤어지길래 모처럼 갭 (GAP) 매장에 청바지를 사러 나갔다.


‘갭’은 ‘올드 네이비’와 더불어 미국 서민들의 대표적인 옷 가게로 자리를 잡은 매장이다. 그런데 청바지 진열대 앞에 선 베리씨는 한참을 서성댔다.  청바지들은 쌓여 있는데 도무지 무엇을 골라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진열대를 들여다 보자. Straight, Boot, Original, Skinny, Standard, Easy, Slouchy Slim, Loose, Skater Chino, Cropped Jeans…. 그 외에도 아직 정체 불명의 바지들이 널려있었다. 결국 미국 심리학계를 주름잡는 학자 베리씨는 직원의 도움으로 아주 평범한 ‘진짜 청바지’를 간신히 하나 고르는 데 성공했는데 집에 와서도 그는 전혀 개운치가 않았다. 자기가 사온 것이 정말 그 중 제일 나은 것인지 혹시 거기에 정말 자기가 원하던 물건이 남아있었던 것은 아닌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내 남편은 미국 대학에서 석사 공부를 마쳤고, 미국 근무만도 3년 넘게 하고 영어도 한 가닥하는 사람인데 가족과 외출을 하거나 식당에 갈 일이 있을 때는 모든 거래를 아이들이나 아내에게 일임한다. 도무지 영어가 성가시고 피곤하다는 것이다.


식당에 간다고 치자. 햄버거 하나를 주문했다고 치자. 고기는 어떻게 익히기를 원하는가, 햄버거에 치즈를 추가할 건가, 어떤 치즈를 추가할건가, 야채는 무엇을 넣어줄까, 사이드 메뉴는 뭘 선택할래, 물에는 얼음을 넣어줄까말까, 커피에는 크림과 설탕도 필요한가 등등 자질구레한 질문을 알아듣고 일일이 순간순간 판단하고 선택하고 설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로서는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냥 한국식으로 알아서 한 상 차려다 주면 얼마나 좋을까?

 
앞서 소개한 베리씨의 청바지 구매 사례는 ‘선택의 역설(The Paradox of Choice)’이라는 책의 저자 베리 슈워츠 (Barry Schwartz) 박사가 서술한 그의 경험담을 정리한 것이다. 내가 그의 사례를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미국 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종종 느끼는 곤혹스러운 경험들이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이민자이기 때문에, 혹은 원어민이 아니라서 느끼는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평범한 서민용 청바지 한 장 맘에 드는 것을 산다는 일이 저명한 미국인 학자에게도 간단한 일이 아니며 평범한 일상을 산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만만치 않은 일인 거구나 깨닫게 된다.

 
최근에 내게도 스마트폰이 생겼다.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애플리케이션들 중에서 내게 전혀 필요하지 않은 항목들을 지우려고 하는데 기본설정이라 지워지지가 않는다.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과 씨름하느라 며칠을 보냈다. 그뿐이 아니다. 내게 스마트폰이 생겼다는 것을 발견한 지인들이 이러저러한 앱을 사용하라고 추천들을 한다. 대개 내 삶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나는 꼭 필요한 것만 집중적으로 사용한다. 이런 내가 답답한 사람처럼 비쳐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뭐든 복잡하게 나열되는 것들이 피곤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이란 고사성어가 있다. 넘침은 모자람과 같다는 것이다. 영문으로는 ‘More is less’라는 표현이 있다. 청바지 매장에 너무 많이 널려있는 다양한 디자인의 바지들은 나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스마트폰에 너무 많이 깔려있는 앱들, 페이스북에 너무 많이 연결되어 있는 얼굴들, 수 십 가지의 케이블 TV 채널들, 너무 많이 날아오는 우편함의 광고 우편물들, 일반 커피 한 잔을 사 마시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카푸치노, 카페 라테, 에스프레소, 톨, 라지, 벤티, 스킴, 레귤러 밀크 등 너무 많은 선택사항들이 나를 지치게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 때문에 기죽을 필요는 없다. 판단과 선택은 누구에게나 피곤한 과정이라고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거나 혹은 삶을 단순화하면 된다. 두리번거리지 않고 내 갈 길을 그냥 가는 것이다.


2012,2,22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2. 2. 15. 20:34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57467

 케냐의 어느 마을에서 한 살짜리 아기 하마 오웬이 발견되었을 때 이 하마는 심한 탈수증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오웬은 야생동물 보호구역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130세의 거북이 할머니 앰지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2004년 처음 만난 이후로 단 한시도 떨어져 지내지 않는 단짝이 되었다. 이들은 늘 함께 잠들고 함께 식사를 하며, 서로의 얼굴을 핥아주기도 한다.


앰지 할머니가 오웬의 꼬리를 살짝 깨물면 그것은 저쪽으로 비키라는 뜻이다. 오웬이 앰지 할머니의 오른발을 슬쩍 밀면 오른쪽으로 가라는 뜻이고, 왼발을 슬쩍 밀면 왼쪽으로 가라는 뜻이다. 아기 하마 오웬에게는 보호자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것이 이들의 우정의 시작이 되었을 거라고 학자들은 해석한다. 2월20일자 시사주간지 ‘타임’지의 기획기사에 실린 사례이다.
 

내가 키우는 개 ‘왕눈이’는 7년 전 동네의 유기견 보호소에서 데려왔다. 작은 잡종 털북숭이 개다. 열 살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생김새가 귀여워서 동네에 데리고 나가면 모두들 귀엽다며 만져보고 싶어한다. 왕눈이는 털이 복실복실한 종류의 개들과는 사이좋게 지내지만 털이 짧고 행동이 민첩한 개들과는 원수지간처럼 사이가 안 좋다.
 

우리 왕눈이에게도 단짝친구들이 있었다. 작은 학생용 아파트에 살 때는 이웃 건물에 사는 ‘포메라니안’ 개의 집에 자주 놀러 갔다. 개가 없어지면 그 집으로 찾아가면 되었다. 그 개 역시 문만 열리면 우리 왕눈이를 보러 왔다. 왕눈이는 그 개가 오면 제 밥그릇까지 내 주며 친구를 반겼다.
 

개인 주택에 살 때는 동네의 ‘비천 프리즈’ 종의 털이 오글오글하고 흰 귀염둥이 개 한 쌍이 틈만 나면 우리 왕눈이를 보러 달려왔다. 내가 일부러 이들과 교제하도록 한 것도 아니었다. 자기네들끼리 동네에서 알게 된 후에 서로 집을 기억해 놨다가 문만 열리면 친구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물론 이들은 모두 중성화 된 개들이라 짝을 짓겠다고 오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서로 친구가 그리운 모양이었다. 요즘 왕눈이는 이렇게 서로 오가는 단짝친구가 없다. 왕눈이로서는 딱한 일이다. 개에게도 단짝 친구는 필요할 것이다.
 

동물학자들은 ‘동물’에게도 ‘친구’나 ‘우정’이란 것이 존재할까 하는 물음표를 던져놓고 연구를 하기도 한다. 동물학자들이 규정하는 우정이란, 가족의 범주를 벗어난 대상과 일시적이지 않고 수 년간 지속적이며, 한쪽이 죽거나 사라지면 스트레스 증상을 보이고, 서로 보호해 주는 시스템인가 하는 것이다. 침팬지, 돌고래, 말, 작은 원숭이 등 사회성이 발달된 동물들이 그 연구 대상이다.
 

학자들이 이러한 연구에서 알게 된 사실로는 돈독한 친구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동물들이 절친한 친구가 없거나, 혹은 교제가 적은 동물들에 비해 건강하고 장수하며 새끼들도 건강하게 키워낸다는 것이다. 친구 없이 혼자 외따로 지내는 동물은 질병에 걸리거나 일찍 죽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우리 왕눈이가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부러 나가서 동네 개들과 교제하도록 신경써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개들도 멀리서부터 맘에 드는 개를 발견하면 서로 다가가고 싶어서 안달을 하지 않던가.
 

이것이 단지 동물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인가? 가족이나 친지들과 긴밀하게 연결된 사람들은 고혈압에 걸릴 가능성이 적으며, 스트레스 호르몬이 상대적으로 적고, 면역체계가 강하다고 한다. 2010년 브리검 영 대학의 과학자들이 30만 명 이상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주변 사람들과 관계가 소원한 채 고립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거나, 비만증인 사람들만큼이나 조기 사망률이 높다고 한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혼자 있으면 외롭고 외로우면 건강도 저하되는 것이다.
 

130세 거북이에게도 친구는 필요했으리라. 우리가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이나 혹은 우울감에 혼자 처박혀 지내는 친지를 자주 찾아 뵙지는 못한다고 해도 전화라도 자주 드려야 하는 이유는 전화통을 통해서라도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서로의 안부를 물어야 한다.


2012,2,15

Posted by Lee Eunmee
Humor2012. 2. 12. 03:01
Recipe

First, grill a cowboy and then serve hm on a plate with some vegetable and sauce.  Enjoy your meal!!

숯불구이 카우보이 스테이크  조리법:

카우보이를 숯불에 굽는다.  야채와 소스와 함께 접시에 담아 낸다.









조지타운에 나가서 어슬렁거리다가 어느 식당에 걸린 안내판을 보았다.  <숯불구이 카우보이 스테이크...>

자, 생각을 해보자. <치킨 스테이크>는 닭고기 스테이크.
<비프 스테이크>는 쇠고기 스테이크
<포크 스테이크>는 돼지고기 스테이크
<샐몬 스테이크>는 연어 스테이크

그러면 카우보이 스테이크는?  카우보이고기 스테이크. 

(언어유희.)

2012,2,11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2. 2. 8. 22:13

미학자이며 논객인 진중권씨는 10여년전 내 눈에 났다. 그의 베스트셀러라는 '미학 오딧세이'를 읽다가 책을 집어 던지는 것으로 나는 그와 절연했다. 그는 독자인 나를 알리도 없지만 말이다.  이유는?  참 별것도 아닌 이유다.  하지만 책 읽다가 내가 감정이 상했기때문에 나 혼자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려 버린 것이다.  뭣때문에?  그가 무슨 작품에 대한 썰을 풀던중 "권력이 생기면 술과 여자도 얼마든지 즐길수 있고...." 이런 말을 했다.  '술과 여자'  참 아무나 쉽게 내뱉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진중권의 책에서 그런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오리라고는 기대를 안했다.  '이 새끼도 똑같은 새끼군...재수없어...' ---> 이것이 그당시 나의 아주 원색적이고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결국 --> 너같은 놈이 쓴 미학책 따위, 개나 물어가라고 그래.  뭐 이렇게 된거다.

나는 현재 진선생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의 책을 들여다 볼만큼의 애정은 느끼지 못한다. 그가 그의 분야에서 건필하기를 바랄 뿐이다. 

***

강아무개 의원이 술자리에서 몇마디 실언을 한것이 문제가 되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을때, 나는 그의 인생이 참 딱하게 풀린다는 기분이 들었다.  실언 맞다.  나는 내심 그가 빨리, 잽싸게, 꼬리 팍 내리고 무릎 조아이고 싹싹 빌면서 '죽을 죄를 졌다. 술먹고 실언했다.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사내 대장부'답게 '쿨'하게 행동을 해주기를 바랬다.  머리좋고 전도 양양한 쓸만한 국회의원이 아닌가 말이다.  그의 불운하고 억울한 가족사와 개인사가 제법 나의 마음을 움직였을수도 있다. 난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를 좋아한다. 드라마틱하니까. 하지만 그는 지저분하게 일을 마무리했고, 이상한 나락에 빠져들었다.  나는 그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

나꼼수가 비키니 파동에 휘말렸다.  기성언론이 어떤식으로든 이를 언어적 성추행의 프레임으로 엮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것 같아 안타깝다.  하지만, 저쪽의 프레임 놀이와는 별도로, 나는 나꼼수가 이것을 어떻게 깔끔하게 정리하고 넘어갈지 주시하고 있다.  내가 아직 젊고 철이 덜 들었을때는, 단지 '술과 여자'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쓸만한 논객을 단칼에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는 치기를 보였지만,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고, 인내심도 좀 생겼고,  내 동생뻘 되는 남자들이 세상을 잘 모르고 말 실수 하는 것에 대해서 제법 관대해 진 면도 있다.  그래도, 그들은 '무엇'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왜 어떤 단어나 말이 여성들을 분노하게 만드는지 들여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쏟아내는 말 99 프로가 옳다해도 1프로가 오류가 있다면 시정을 해 주기를 나는 바란다. 쿨하게. '실패!' 이러고 한마디만 외쳐줘도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에게 박수를 날리고 여전한 애청자로 남을 것이다. 1프로의 오류 때문에 99프로를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쫄지말라. 그리고 사과하라. 사과는 원래 진정 쫄지 않는 사람만이 할수 있는거다.

****

나는 처음 만난 사람(남자)가   대뜸, "미인이시네요" 하고 인사를 날리면 겉으로는 무표정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 하는 욕설을 상대에게 날린다. 재수없고 불쾌하다는 뜻이다. 내가 일하는 사회적인 영역에서 내가 미인이건 아니건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  거기서 미모를 논하는 것은 무례한 태도이다.  <====== 남자들은 이런 내 심사에 대해서 "미인이라고 칭찬하는데 뭐 어때서 난리니?" 할지도 모른다.  글쎄, 나로서는 그 말이 성추행에 버금가는 아주 불순하고 지저분한 말처럼 들린다. 상대방의 의사와는 별도로 나로서는 기분이 아주 더럽다.  ---> 바로 이런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심사다. 아무자리에서나 그저 이쁘냐 안이쁘냐 가슴이 섹시하냐 안하냐 이런거 논하지 말라.  이쁘다 안이쁘다는 내 가족 내 애인이 내게 해줄수 있는 말이지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이 내게 대놓고 할 말이 아니라는거다.


****

여자 참 상대하기 어렵고 거추장스럽다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겨우 이정도를 숙지하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고 거추장스러운가?  여자들은 온갖 눈치를 다 보며 겪으며 살아가는데, 새발의 피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여자들 남자보다 몇배 노력해야 남자와 동등한 위치에 오른다.  그 여자들이 기울이는 노력의 반의 반의 반만이라도 남성들이 여성을 대하는 예의에 신경을 써준다면 이 세상, 참 많이 평화로워질것이다. 잘 모르겠으면 여성학 책이라도 보고, 공부도 좀 하고 그래야 한다. 

이해하려는, 배우려는 노력도 않고,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지랄들이야!" 하고 쿨하게 그냥 넘어가러 들때 그때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2. 2. 8. 14:28
Practical Wisdom


철수씨는 병원에서 청소부로 일한다. 철수씨가 매일 해야 하는 일은 그의 근로계약서에 상세히 명시되어 있는데, 바닥을 걸레질한다든가, 환자의 침구를 정기적으로 교체한다든가 하는 일이다. 철수씨가 일하는 병동에는 지난 6주간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는 흑인청년이 있다. 그 흑인 청년은 동네에서 친구와 다투다가 그 지경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환자의 아버지가 매일 와서 절망적인 표정으로 환자를 지키고 있다. 철수씨는 그 아버지의 모습이 참 딱해 보였다. 그래서 그 아버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매일 일과 중 아버지가 잠시 화장실에 간다거나, 밖에 나가서 바람을 쐰다거나 하는 이유로 자리를 비울 때 환자의 병실을 치워주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복도에서 만난 흑인 청년의 아버지가 다짜고짜 철수씨에게 화를 냈다. 왜 아들의 병실을 며칠째 치워주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는 철수씨가 청소하는 것을 눈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청소를 안 했다고 굳게 믿고 있는 눈치였다. 철수씨는 난감했다. 분명 오늘도 신경 써서 깔끔하게 청소를 해 줬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청소부 철수씨’라면 나는 어떻게 처신 했을까? 몇 가지 답안이 있을 수 있다. 첫째, 청소를 했노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환자의 아버지는 내 말을 믿지 않고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고 갈지도 모른다. 둘째, 부서 감독관을 불러다 놓고 내가 청소를 했는데도 억울한 소리를 들었다고 3자 개입을 부탁한다.  그러면 나는 좀 덜 억울한 상황이 될지도 모르겠다. 셋째, 나도 똑같이 큰소리로 화를 내는 방법도 있다. 결국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 아니던가? 넷째, 상대방을 싹 무시하고 냉정한 표정으로 내 할 일을 할 수도 있겠다.


여러 가지 방법이 순식간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것이다. 그런데 철수씨는 어떻게 했을까? 그는 빙긋이 미소 짓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 후에 자신이 조금 전에 싹 치운 병실에 들어가 다시 청소를 하고 나왔다. 철수씨는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아들은 벌써 6주째 의식불명이고, 그 아버지는 속수무책으로 아들 병실을 지키고 있고, 내가 보기에 이들이 너무 딱했어요. 그 아버지로서는 청소가 안되어 있다고 내게 행패를 부리는 것 외에는 그 슬픔을 해소할 데가 없었을 거에요. 딱하잖아요. 내가 그이 보는 앞에서 청소를 하면 아버지가 누워있는 아들을 위해서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했다는 보람이라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사실 철수씨는 병원 청소부이고, 그의 근로 계약에는 환자나 환자 가족의 마음을 배려하고 보살피라는 내용은 들어있지 않았다. 그는 단순하게 청소만 하면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철수씨는 자신을 ‘청소부’로만 여기지는 않았다. 철수씨는 걸레질을 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위 이야기는 인간의 사회성을 연구하는 심리학자 베리 슈워츠(Barry Schwartz)의 근저 ‘Practical Wisdom (실용적 지혜)’의 서두에 소개된 어느 청소부의 실제 사례를 한국인 이름으로 바꿔서 요약해 본 것이다. 그 청소부의 이름이 철수씨이거나 지미, 요한이라 해도 결국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삶을 조화롭게, 정의롭게 지켜주는 것은 사실은 법에 명시되거나 계약서에 명시된 사항들이 아니다. 우리가 삶의 경험을 통해서 쌓을 수 있는 ‘배려심’, ‘덕성’이 오히려 더욱 소중한 가치라고 이 심리학자는 역설한다.

 
요즘 텍사스주의 댈러스에서 한국계 이민자들과 유색인종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다는 소식이 들린다. 발단은 굉장히 사소해 보인다. 어느 한국계 가게 주인과 흑인 손님 사이에서 일어난 극히 개인적인 마찰이었다. 그런데 그 마찰이 인종문제로 비화된 모양새이다. 어쩌면 양측 모두 화가 날대로 나서 갈 데까지 가보자고 작심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사는 일에 지쳐서 악에 받치다 보면 의도하지 않았던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기도 하고, 앞뒤 안 가리고 상대방과 나 자신에게 독이 되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 후에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막심한 후회감은 어찌해야 하는가? ‘청소부 철수씨’의 아량을 기억하면 오늘 하루 나의 실수를 모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12,2,8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12. 2. 2. 10:29

http://onedayhike.org/

오늘 정오에 등록창이 열렸다. 일년에 딱 하루 모이는 모임. 4월 마지막 주 토요일 (4, 28) ! 결전의 날이다!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서 12시가 되기를 기다리다가 등록을 하고, 셔틀버스 서비스 신청서 작성도 마쳤다.

 * 등록비 : 100 킬로미터, 50 킬로미터 선택에 상관없이 일인당 50 달러.
 * 셔틀    : 가는 것은 무료, 돌아오는 것은 10 달러.  (50 킬로 참가자들은 Shady Grove 역에서 모여서 화이츠페리로 이동해야 한다. (중간지점에서 출발)

작년에는  뒤늦게 신청했다가 셔틀 서비스를 못 받아서 라이드 구하느라고 속 좀 썩였다. 그래서 이번엔 1등으로 신청하겠다는 각오로.

준비 완료.  그날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다.  찬홍이는 마침 기말고사 기간이라 '면제' 되었다. 찬홍이가 어찌나 기뻐하던지!  안 갈수 있는 완벽한 핑계가 생겼으니.

이번에는 나도 혹 달린 것 없이 자유롭게 내 패이스대로 걸어볼수 있겠다. 나의 목표는 열시간 안쪽에 50 킬로미터를 완보한다는 것.  찬홍이하고 12시간 걸렸으니까, 혼자라면 10시간 이내에 가능할 것으로 본다. (해 넘어가기 전에 끝내자.)

달력 보니 90일도 안 남았다.  뭔가 기다릴것이 있으니 기분이 좋다.  이번엔 또 어떤 길동무들을 만나게 될까. 버지니아 블루벨이 피어나겠지. 그 햇살과 산들바람. 강물소리.

*****

 

Hi,

Registration closed in record time around 7:30 tonight after reaching the 350 max. If you were unable to register, there will be other opportunities as cancellations accumulate, probably around late March.

Mike





우와...정오에 등록창이 열렸는데 저녁 7시 반에 350명 정원이 모두 차서 등록창을 닫았다고 대장이 단체 이메일을 보냈다.  하하. 세상에!  오늘 기회를 놓치신 분들께서는, 중간에 취소하는 사람들이 나오므로 3월말에 다시 등록 받을때, 그때 등록을 하시면 될 것이다. 사실 나도 작년에 4월 초에 (처음 이 단체를 알게 되었을때) 그때 등록을 했었다. 그때가 아마도 추가 등록 기간이었던 모양이다.  추가등록기간에 자리가 널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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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2. 2. 1. 21:19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48183

2월에 발표되는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휴고 (Hugo)’와 ‘예술가 (The Artist)’가 유력한 후보로 각축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두 작품 모두 ‘영화에 대한 영화’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휴고’가 1930년대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초기 영화사를 재조명하고 있다면 ‘예술가’는 1930년 경제 대공황을 전후로 전개된 미국의 무성영화, 유성영화의 변천을 담아 내고 있다.

 
‘예술가’의 예술성이나 작품성 같은 것은 둘째치고, 이 영화가 정말 맘에 드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렇게 알아듣기 쉬운 미국 영화를 처음 보게 된 것이다! 영어실력이 아무리 좋은 분들이라도 한국어를 모국어로 성장한 사람들에게 미국에서의 영화 보기는 참 씁쓸하고 자존심 상하는 경험이 되기도 한다. ‘자막’ 없이 영어로만 된 영화를 보면서 대사를 다 알아듣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영어를 잘 모르시는 분들이라도 ‘예술가’만큼은 걱정 없이 볼 수 있다. 영화에 ‘대사’가 없는 ‘무성영화’이기 때문이다.

 
무성영화 시절의 스타인 주인공은 녹음시설을 갖춘 영화가 세상을 지배할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하는 그의 몰락은 불 보듯 뻔한 일이 된다. 우리의 주인공은 이런 변화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는 결국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재기 할 것인가? 우리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근심스럽게 그의 몰락을 지켜보며 그의 행운을 빌게 된다.

 
흑백의 무성영화는 자칫 지루한 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감초처럼 화면을 오가는 강아지가 우리의 근심을 덜어주고 관객을 웃게 만든다. 저 충성스러운 개를 봐서라도 주인공은 기운을 차려야 한다고 우리는 주인공에게 다가가 말해주고 싶어진다.

 
지난 일요일에는 개를 끌고 강변 산책을 하다가 조지타운에 들어섰다. 조지타운에 가면 꼭 들르는 곳이 있다. 반즈 앤 노블 책방이다. 습관처럼 그 책 방 앞을 지나는데 책방 폐업을 알리는 빨간 안내판이 유리창에 붙어있다. 조지타운의 심장부에 있던 3층짜리 책방 하나가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나는 오래된 친구를 잃은 것처럼 맥이 빠져서 집으로 오면서 ‘내 탓이오’를 수없이 중얼거려야 했다.

 
책방에 자주 가서 책을 들여다보거나 구경을 하면서 시간 보내기를 좋아했지만, 근래 2년간 나는 책방에서 책을 산 적이 없다. 좋은 책을 발견하면 언 라인 책방에서 저렴한 가격에 샀으며, 최근에는 그나마 종이 책도 사지 않고 전자 책을 샀다. 지난 몇 년 간 책방은 나의 휴식처였지 내가 책을 사는 곳은 아니었다. 결국, 나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동네 책방은 설 자리를 잃고 마는 것이리라.
 

거리의 책방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면, 나는 어디로 놀러 가나? 이 문제를 생각해보니 더욱 맥이 빠졌다. 하지만, 책의 미덕과는 별도로, 시대는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고 매체가 다양해져 가고 있다. 무성영화의 주인공이 퇴물처럼 사라지듯, 오늘날 동네 책방도 신문물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게 되는 걸까?

 
내가 미국에 와서 가장 사랑한 미국적인 풍경은 마을마다 하나씩 있는 공공 도서관과, 여유 있는 책 방 인심이었다. 책방에 소파와 테이블까지 놓아주고 읽고 싶은 책은 맘껏 읽다가 손 털고 나가도 아무도 눈치 주지 않는 그 여유. 인구 많은 한국의 도시에 살면서 늘 바글거리는 책방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책 구경을 하며 살았던 내가 미국의 책방 인심에서 대국의 풍모를 읽었다면 과장 일까? 그런데 그런 책방들이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보더스가 갔고, 반즈 앤 노블 매장이 줄어들고 있다.

 
영화 말미에 무성영화 주인공 남자의 ‘목소리’가 나온다. 그는 새로운 시대에 거듭나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하나 둘 사라져가는 동네 책방들, 그 책방들도 어쩌면 내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옷을 입고 돌아와 책방의 위용과 품위를 되찾게 될 지도 모른다. 영화나 책방뿐이랴. 우리 인생 역시 맥없이 흘러 갈수도 있고 나날이 자라날 수도 있다.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의 아름다운 귀환을 빌어본다.

2011,2,1,ㅇㅇㅁ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12. 1. 28. 22:28

Walking


날씨가 추워지면, 나는 집안에 박혀서 꼼짝을 안한다.  그래서 겨울에는 운동을 못하고 몸이 둔해진다. 체육관? 돈도 아깝고, 역시 귀챦아서 못간다.  이럴때는 '걷기'관련 책이라도 보면서 스스로를 달래는데, 책 찾다가 소로우 아저씨의 '걷기'라는 아주 짧을 책을 발견했다.  킨들버전은 공짜다. 킨들로 다운 받아서 읽었다.

소로우 아저씨는 어딘가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구석이 있는데, 이분의 '워킹' 책을 읽으며, '아하, 이제 알았다. 이 사람의 글은 워즈워드의 시를 산문으로 옮긴것과 같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문학사조에서도 영국 낭만주의와 미국의 초절주의 (Transcendentalism)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는 어쩌면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라고 한지 문에 고모가 잉크로 적어 놓았던, 그것을 뜻도 모르고 읽던 다섯살때의 지적 영역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그 언저리를 맴돌고 있으니 말이다.  다행인지도 모른다 시를 좋아하던 할아버지와 고모들 속에서 내가 성장한것이. 아니 운명일지도 모른다.

소로우의 '걷기'는 '스포츠'로서의 '걷기'와는 거리가 멀다.  '동물중에 유일하게 사색하면서 걷는 종자가 낙타'라고 하는데 그 낙타처럼 걸으라고 그는 말한다.  나는 동의한다는 뜻에서 열심히 하일라이트 처리를 한다.

그래, 살을 빼기위해서라던가,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걷기 그 자체가 좋아서 걸어야 진짜 걷기하는 것이지.  자연스런 걷기 그 자체. 걸으면서 바라보는 세상. 눈에 들어오는 그 세상을 충분히 바라볼수 있는 여유. 그것을 위해서 걸으러 나가는거지. 그 자체가 기쁨일수 있을때, 우리의 걷기는 완정되는거지. 그것이 곧 우리의 '성지 순례'인것이지. 

내가 서 있는 이 대지가 성지가 아닌가. 아, 순례자가 되어 보기로 하자. 잠시만이라도. 강변으로 나간다.

201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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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2. 1. 25. 21:33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43666


그저께는 음력 설날이었다. 아직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은 아들놈을 데리고 장을 봐다가 올해도 가볍게 설 상을 차리고 차례를 지냈다. 본디 ‘설날’의 의미는 ‘조심하는 날’이라고 한다. 밤 껍질을 벗기고 예쁜 각이 지게 쳐내다가 손을 베었지만, 반창고를 감고 마저 하던 일을 하고, 두부를 부치고, 고기적을 굽고, 조촐하게나마 떡국을 끓여 차례상을 차렸다.

 
옛날에 내가 새색시이던 시절, 설 차례를 지내러 시댁에 가니 시어르신들이 “이 집 큰며느리가 왼손잡이”라고 수군거리시는데, 시아버지께서 “우리 새아기도 나를 닮아서 외손잡이네”하며 웃으셨다. 선머슴처럼 사느라 변변한 음식도 만들 줄 모르던 며느리를 들여다보며 “우리 새아기는 밤을 참 곱게도 치네!”하고 칭찬도 해주셨다. 부엌일하기 싫어 밖으로만 돌던 나는 유일하게 젯상의 밤 치는 일을 곧잘 했는데, 친정에서 할아버지께서 밤 치실 때 곁에서 밤 조각 얻어먹으며 눈 동냥으로 배운 실력이었다.

 
시어머니도 안 계신 시집에서, 제사 때가 되면 시아버지는 큰며느리인 나를 데리고 앉아, 홍동백서, 어동육서, 두동미서 등 제사상의 기본 틀을 설명해주셨고 나는 제사 많던 친정에서 구경한 깜냥으로 이런 것들을 금세 배워나갔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제삿날이나 제사 상 차리는 일을 잘 아는 사람은 우리 시아버지 다음으로 나이다. 남편과 그 형제들은 세세한 규범들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나는 달력을 보지 않아도 제삿날이 다가오면 정확히 그 음력 날을 맞추곤 한다. 창밖에 개나리가 필 때, 유월 앵두가 열릴 때 이런 식으로 계절 따라 돌아오던 제삿날들이 창 밖 풍경이 바뀌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다.
 

몇 해전 설날이 잊혀지지 않는다. 큰 아이가 대학입학 문제로 방황을 하여 집안 분위기가 어둡고, 모두 기운이 없을 때였다. 나는 속이 상해서 설을 지낼 기분이 아니었다. 그런데 새벽에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고기 굽는 냄새가 났다. 남편이 혼자서 서툴게 음식 장만을 하고 있었다. 혼자 음식을 준비하던 남편의 뒷모습이 어찌나 딱해 보였던지! 하는 수 없이 나도 아이들을 깨워서 온 가족이 부랴부랴 차례상을 차리고 다 함께 떡국을 먹었다. 대충 차린 엉성한 차례상이었지만 그날 모처럼 온 가족이 뜨거운 떡국을 먹으며 기운을 차리고 웃을 수 있었다.

 
그날 나는 생각했다. 차례상을 차리는 것이 번거로워도 이를 통해 정작 우리가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게 되지 않았는가? 그 후로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추석 차례나 설 차례를 챙기게 되었다. 차례를 지내는 것이 의무도 아니고, 그저 즐겁고 고마운 가족만의 대동단결의 자리인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해마다 민속 명절인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차례상’ 차리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과 긍정적인 시각 사이에 갈등이 빚어진다. 차례상 폐지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제사나 차례 지내는 것이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도 아니고 수 천 년간 이어진 미풍양속도 아님을 강조하고, 반대편에서는 온 가족이 모일 수 있는 전통의 아름다움을 주장한다. 나의 입장은 분명하다. “만약에 차례상이 그토록 의미 있고 중요하면, 남이 차려다 바치는 것 받아 먹지만 말고 직접 차려보고 말을 하라.” 자기 자신은 차례상 차리는 것을 주도하거나 거들기는 싫으면서 전통의 아름다움을 역설하는 것은 참 무책임한 태도이다.

 
반대로 여태까지 우리가 간직했던 전통을 무조건 폐기처분 하는 것에도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전통의 틀을 유지하되, 힘들지 않게, 기쁘게, 간단히, 모두 즐겁게 그런 자리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올해도 나는 아무도 봐 줄리 없는 차례상을 차리고 한국의 가족들과 통화를 하며 설날 아침을 보냈다. 세상이 좋아져서 화상통화도 가능한 시대라 태평양의 이쪽저쪽에서 설날 보내는 가족들의 모습을 직접 볼 수도 있어서 그나마 위로가 된다. 어느 집 맏며느리로 몸은 비록 태평양 건너에 있지만, 그래도 그 집 차례는 내가 지내 준다는 자부심 역시 내가 이역에서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
 

올해도 설 차례를 지냈다. 올해도 한국의 시아버지께 세배도 못 드리고 설날이 지나갔다.


2012,1,25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