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난 겨울여자 세대다. 이건 뭔 소리냐하면, 그냥 심심해서 붙여본거다. 의미 없다.
조해일의 소설 겨울여자는 내가 어릴때 신문에 연재되던 연재 소설이었다. 그리고, 난 뭐든 닥치는 대로 읽는 것이 거의 유일한 취미였던 아주 게으른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중에 장미희 언니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영화 겨울여자로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가 되었을때, 나는 긴 생머리 장미희 언니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라는 환상을 품기도 했었다. 장미희 언니, 정말 예뻤다. 원래 장미희가 데뷰한것이 무슨 가족드라마였는데, 그 때 '강부자'가 "우리 복성, 덕성..."하면서 장미희를 무척 예뻐했다 (드라마에서). 그래서 한때 신인 장미희는 '복성, 덕성'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할 정도였다. 그때 가곡 '비목'이라는 노래가 장미희의 비련적 장면마다 등장을 해서, 라디오만 틀면 여기저기서 가곡 '비목'이 흘러 나오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 나도 역시, 라디오에서 그 노래가 나올때 열심히 노래가사를 받아 적어서 부르고 부르고 또 불렀다. 비련의 예쁜 여자를 생각하면서 말이지. 내가 어린 시절에는 노래를 배우고 싶으면 라디오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무조건 받아 적는거다. 아아 듣기, 받아쓰기 실력은 그냥 곁두리로 향상 되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중에 장미희가 주연한 '겨울여자' 영화가 대박이 나긴 했지만, 그 이전에 일일 연재소설 '겨울여자'가 존재했다는 말씀이고, 매일 매일 '겨울여자'가 탄생하여 자라나는 과정을 어린 나는 지켜봤다는 것이 중요한 대목이다. (참 중요한 일도 쌨다 카이...)
그기 얼마나 신비로왔던가, 어느 여학생에게 매일 모르는 남자에게서 편지가 배달되고, 결국 만나고, 같이 놀러갔다가, 사고가 날뻔 했는데 그냥 뿌리치고 ...그리고 그 남자가 죽고, 나중에 어느 대학생 남자하고 ..군대에 면회를 가서였나, 어떻게 된 일인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석기'던가, 그 남자하고 결국 '러브러브' 근데 그 남자도 죽지 아마... 나중에 대학교수..
난 사실 줄거리 이해도 잘 못했다. 난 동화책을 읽어야 할 수준의 어린아이였고, 집에 동화책이 부족했던 관계로 그냥 닥치는대로 활자라는 활자는 무조건 먹어치우고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내가 얼마나 책만 읽어댔냐하면, 집에 형제 자매 많은 집 애들이 대개 그러한데, 일단 학교에서 책을 받아오면, 교과서를 아주 재밌게 읽는다. 재밌으니까 읽고 또 읽고, 마침내 지겨워질때까지 교과서를 보는거다. 그리고나서, 언니 교과서를 슬금슬금 갖다 읽고, 언니교과서 다 읽은 후에는 오빠 교과서... 만약에 그때 나에게 언니 오빠가 열명쯤 있어서, 그 언니 오빠들이 대학원, 대학생, 이렇게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면, 나의 교과서 독서는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을것이다. 하하. 하지만 언니는 고작 나하고 1년 차이였고, 오빠는 나보다 3학년 높았다. 그러니까 나의 독서 수준이란 것이 고작해야 나보다 3년쯤 앞선 고만고만한 애들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등학교 교과서 수준의 독서력으로 '겨울여자'라는 성인 소설을 내가 제대로 이해 했기를 기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뭘 읽고, 뭘 이해한건가. 그냥 그런거, 이름 모를 사람에게서 편지가 온다는 그 신비감. 남자가 옷을 벗기려하고 했는데 여자가 도망을 쳤다는거..그 정도는 그냥 대충 이해 할 수 있었고, 그 이상 '성인급' 내용을 읽어도 잘 몰랐다가 정석이 될 것이다. 사실 나는 잘 몰랐다.
뭐냐하면, 초등학교 6학년때, 우리 학교 앞 '주차장' 집에 사는 친구가 있었다. 커다란 공터 한구석에 살림집이 있고, 거기가 내 친구네 집이었는데, 거기가 주차장이라고 했다. 요즘에야 유치원생도 '주차장'이 뭔지 알 정도로 자동차 생활이 보편화 되었지만, 그때는 '주차장'이란 말 자체가 신비롭고도 난해한 것이었고, 나는 도대체 내 친구네 집 마당이 왜 그렇게 넓은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 주차장 구석에는 작은 버스가 있었는데, 그 버스를 개조해서 어떤 남녀가 살림을 차려서 살고 있었다. 버스가 살림집이었던 셈이다.
내 친구는 학교가 끝나면, 자기 집에 가서 놀자고 가끔 나를 꼬셨고, 그러면 나는 어차피 집에 가는 길이니까 내 친구네 가서 숙제도 같이 하고, 내 친구네 오빠가 마당에서 웃통벗고 등목할때, 내 친구가 그의 등에 바가지로 찬물을 떠서 뿌려댈때, 그 옆에 물끄러미 서 있곤 했다. 나는 그때도 남자들한테 좀 뚱해가지고 일체 말을 섞지는 않았다. 수줍었다기보다는 뚱했다. 그래서 멀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내 친구 오빠가 뭐라고 무연하게 - 집에 온 손님이니까 나한테 뭐라고 그러면, 나는 그를 쳐다보곤 그냥 말았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그냥 씹었다는 차원일 것이다. 그래도 그 시절엔 그런 것이 그다지 흉이 아니었던 것도 같다. 남녀가 유별했으니까 말이지. 하하하.
그런데, 하루는 내 친구가 그 버스 살림집을 가리키면서, "저 버스에 사는 언니가 애를 뱄다"고 설명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버스'하고 '애기 배는 일'하고는 도무지 연결이 안되었다. 애기는 방에서 배는것이 아닐까? 그래서 내가 좀 이해가 안되어서, "어떻게 버스에서 애기를 배니?" 물으니까, 내 친구가 코를 찡그리고 귀엽게 웃으면서 (사실 내 친구가 참 예뻐서 남자 선생님들이 무척 예뻐하셨다), "넌 그것도 모르니, 남자하고 여자하고 뒹굴면 애는 어디서든 생기는거지."
근데 난 또 그걸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남자하고 여자하고 같이 뒹굴면 애기가 생긴다고? 나의 걱정이 뭐였냐하면, 내 동생하고 나하고 집에서 레슬링한다고 맨날 서로 씨름하듯 엉겨 놀고, 요 깔고 막 레슬링한다고 밀고 치고 받고, "야 살살 해 새꺄!" 막 아프면 살살하라고 소리지르고 그러고 노는데 그러다가 나한테도 애가 생기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내가 왜 애 생기는 것을 겁을 냈냐하면, 테레비 보니까 여자들이 애 날때 아주 죽겠다고 생난리를 치는게 보이니까, 애 낳는 것은 죽는거보다 더 무섭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던것이지.
내가 순진했다는 얘기를 하려는게 아니다. 나도 본거, 읽은거는 많은데, 그것과 현실을 잘 연결을 못하고 있어서, 초등학교 졸업반이 되도록 애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남자 여자는 어떻게 힘을 합쳐서 애를 만드는지 그 원리를 잘 몰랐다는 것이지. 대략 방에서 남자 여자가 같이 이불 덥고 자면 애가 자동으로 만들어질거라는 정도의 애매한 상상을 할 뿐이었는데, 방이 아니라 버스에서도 애가 만들어진다는 내 친구의 설명에 나로서는 잔뜩 쫄았던 것이다.
수준이 이 정도이다보니, 소설 겨울여자를 내가 매일 기다려서 봤다고 할 지라도 뭘, 얼마나 이해했을지는 가늠이 안된다는 것이다.
각설하고, (여태 딴소리 실컷하고 뭘 각설이냐...)
그 영화 겨울여자를 미성년자인 내가 봤을리는 없고, (난 학교에서 보지 말라 하는 것은 보지 않았고, 하지 말하 하는 것은 안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말 잘듣는 잘 안보이는 -- 다시 말해서 별 볼일 없는 애였다.) 그냥 겨울여자는 그렇게 내 삶을 지나쳐갔다. 그런데 오늘 아침 앉아서 나는 혼자 '난 겨울여자 세대야'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소설 줄거리는 잘 모르겠고, 당시에 잘 이해못했던 어떤 메시지들이 기억속에서 떠오르며, 지금은 그것의 의미를 대충 이해하는 것 같다. 어릴때 누군가 준 메시지를 뜻도 모르고 간직하고 있다가 어른이 된 후에 문득, 그 메시지들이 떠오르면서 그 뜻을 홀연 눈치채는, 그런 경험이 있지 아니한가.
'이화'는 전통적인 가족주의에 의문을 품는다. 왜 꼭 자기 가족만 소중한가. 왜 가족과 가족 아닌 것에 금을 긋는가.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해주면 안되는가. 뭐 그런 의문을 품는 것 같았다. 소설가 조해일씨의 ---- '가족'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나 제안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화는 어떤 한 남자와 연결되기보다는 그냥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그런 삶을 선택한 것 같았다.
***
난 사랑을 주냐 마냐, 가족주의냐 아니냐 그런것에 큰 관심없다. 현재 결혼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가족의 구성원이 되어 아주 이기적으로 살고 있으니까 말이지. 그렇지만 '가족주의적 언어행위'에는 아주 신경질적이 되어있다.
엊그제 나주에서 초등학생이 한밤에 납치되어 강간당했을때, 그 때 웹에 뜬 한국 기사들을 보고 난 너무 화가 나서 노트북을 집어던지고 싶었다. 너무 화가 나서. 한국 기자들이 문패처럼 만들어 매달은 헤드라인들이 이런 식이었다: "강강범 잡고 보니 이웃집 아저씨." "이웃집 삼촌."
소녀의 엄마와 강간범 고종석이가 피씨방에서 만나서 나눈 대화가 "매형하고 언제 술한자..." 고종석이가 애 보쌈해서 납치해가면서 했던 말 "삼촌이니까 괜챦아..."
아저씨는 무슨 빌어먹을 아저씨인가. 삼촌? 아무나 삼촌이야? 피한방울 섞이지도 인척간도 아닌 타인을 왜 아저씨라 칭하고, 저희 멋대로 삼촌, 누님, 매형인가. 무슨 말이 그렇게 돌아가냐구. 왜 그러냐구!?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그냥 이웃이면 사촌이고, 이웃 남자면 아저씨나 삼촌이나 오빠나 그런건가? 뭐가 그따위냐구.
만나자마자 나이 순서 따져서 형님 아우 해야 직성이 풀리고, 자동으로 '언니'라고 안부르면 버르장머리 없는 년이 되고, 식당에 가도 언니, 미장원에 가도 언니, 이모, 만만하고 홍어 @같은 '아줌마,' 그리고 '할머니' 온통 가족주의 어휘로 무장을 한 나라에서 심지어 이웃집 강간범에게도 '아저씨' 타이틀을 씌워준다. 그 수준의 사람들이 신문 기사를 쓰고, 타이틀을 달고, 그걸 웹에 올리고 지랄들이다.
한국어 아름답다. 한글, 위대하다. 그런데 한국어가 이상하게 사용되고 있다. 아무한테나 가족관계로 엮어대는 그따위 언어행위는 이제 버릴때 안됐나? 동네 남자는 동네 남자다. 동네 여자는 동네 여자다. 이웃집에 나보다 열살 많은 여자가 살면 이웃집에 '형님'이나 '누님'이나 '언니'가 사는게 아니라 그냥 이웃집에 한 사람/여자가 사는거고 그 사람은 이웃집여자인거다. 친구가 되면 친구고 아니면 마는거다.
가족이 아니어도 서로 친철할수 있고, 가족이 아니어도 사랑을 베풀수 있다. 그래야 한다. 가족이 아니어도 가족보다 더 서로 친밀해질수 있다. 가족 일가 친척들처럼 서로 누님 매형 누나 언니 아줌마 아저씨 불러가면서 성폭행하고 강간하고 죽이고 버리고 그런 사회보다 그냥 쿨하게 타인을 타인으로 대하고, 이웃을 이웃으로 대하고, 지나치면서 서로 도움이 필요할때 기꺼이 도와주는 '사마리아인'이 있는 세상, 그 세상이 옳은 세상이라고 본다. 내가 회상해보니 어릴때 내가 뜻도 모르고 읽었던 그 성인 소설 '겨울여자'의 주인공 여자 '이화'가 꿈꾸던 세상이 그런 세상이었던 것 같다.
한국어에서 부족주의적, 씨족공동체적 언어행위를 지워버리자. 왜냐하면 지금은 부족사회도 씨족사회도 아니니까. 성폭행범 새끼를 '잡고 보니 이웃집 아저씨'라는 식으로 기사쓰고 헤드라인 쓴 새끼들 다 무릎끓고 반성해. '동네 남자'면 되는거야. 병신새끼들, 그걸 그렇게 몰라?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