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0. 7. 11. 22:08

옛날에, 자식들이 아직 어릴 때, 고민도 많고 울통불퉁한 시기를 지날 때 내가 아이들에게 신신당부를 한 내용이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네가 무슨 실수를 하고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혼자 해결하기 힘들면 엄마한테 말해. 엄마가 뭐든 도와줄게." 

 

자식들이 내게 말하지 못하고 스스로 극복해낸 일화들이 더 많겠지만 - 그래도 때때로 힘이 들 때 아이들은 내게 와서 문제를 토로하곤 했다. 나느 훌륭한 엄마도 아니고 아주 불량엄마도 아니고 그냥 보통의 엄마이고 (때로는 상대가 아들이라는 이유로 안심하고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음을 인정한다. 아들은 패도 되는줄 알았다). 내가 철이 들어 "전에 내가 너희들 때린거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이렇게 성인이 된 아들들에게 사과를 하면 작은 아들은 정색을 하면서 "엄마가 잘 못하신거 맞아요." 나의 잘못을 분명히 지적하고  군복무을 마친 큰 아들은 "됐어요 엄마. 다 맞을만해서 맞은거지.  임마 엄마가 때리신걸 갖고 뭘 따져"  이렇게 너그럽게 나의 과오를 용서해준다.  아무튼 내멋대로 내 기분 내키는대로 자식들을 키우고 가끔 패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철권 마징가제트' 처럼 '엄마에게 말하면 뭐든 해결된다'는 그런 엄마가 되려고 노력했다.  작은 아들은 심지어 그의 '첫경험'까지 내게 이야기하고 싶어했고, 큰 아들은 내게 신세한탄을 많이했다.  적어도 그들은 내가 그들을 품어줄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엄마니까. 엄마는 굉장한 존재이니까. 

 

남편에게도 나는 가끔 그런 얘기를 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 20년 전에도 나는 남편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무슨 일이 닥치고, 무슨 실수를 해도 너무 걱정하지마. 나는 괜챦아. 내가 다 막아줄게."  그래서인지 남편은 정말로 사고를 친 것까지 내가 묻기 전에 내게 와서 이실직고를 하기도 했다.  나는 그의 실수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도 어떤 면에서는 심하게 태평하다. 

 

어느 도시의 시장님이 갑자기 증발되었는데, 그 증발의 사유가 '성추행 혐의' 와 연관이 된것같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아마도 소문에는 근거가 있을 것이다. 소문을 사실이라고 치고.  나는 남편에게 당부했다 --"있쟎아, 당신이 똑같은 상황에 빠지면 증발하지 마, 왜? 당신에게는 내가 있으니까.  겁먹지 마. 내가 다 해결해줄게.  내가 당신하고 함께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무릎을 꿇고 싹싹 빌거야. 혼자 빌면 무섭지? 나하고 함께 빌면 무서울거 없어.  그러니까 말야, 무슨 실수를 하고 어떤 사회적 지탄을 받을 일이 생겨도 기죽지 마. 내가 있으니까. 잘못을 반성하고 참회하고 싹싹빌고 다시는 그런 짓을 안하면 되는거야. 피해자들과 손 맞잡고 웃을수 있을때까지 싹싹 빌어야 하는거야. 그게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 그렇게 피해자들이 상처를 씻어내릴때까지 반성하고 싹싹 빌어야 하는거야. 그게 필요해. 피해자들에게는 바로 그런게 필요해.  그게 진정한 사죄인거지. 도망가는건 그냥 도망에 불과한거야. 죽어도 벗어나기 힘들어. 그러니까 나하고 같이 가서 싹싹 빌자.  도망가지 마. 알았지? 내가 다 해결해줄게." 

 

* 그게 큰 문제가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 피해자의 기억속에 그것들이 모두 증발되어 '아무것도 아닌일'로 남을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참회와 '사회'의 협조가 필요하다. 

 

나의  말도 안되는 '만담'이 싫지 않은지 남편은 킥킥 웃고, 나를 위하여 설겆이를 해 주고 집으로 갔다. 

 

말못할 성추행의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사는 입장에서  내가 '성추행'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렇다.  그냥 한편 생각하면 - 죽으면 태워 없어질 혹은 썩어 없어질 사람의 몸이 뭐 별거인건가? 성추행이건 성폭행이건 사실 기억에서 사라지면 별것도 아니다.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으니 문제인거지.  두고두고, 죽을때까지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문제이지.  그러니까 이 일은 문제일수도 문제가 아닐수도 있다.  그래서 법륜스님은 이런 기억을 털어버리고 '아무것도 아니다'에 집중하라는 말씀을 종종하신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자각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게 되는거니까. 그게 쉽지 않다는거지.  나도 지금도 불쑥불쑥 분노가 치밀며 '저새끼 아직도 사과 안해..저 천벌을 받을 새끼....' 이런 생각을 하곤 하니까.  그런데 그 '저새끼'는 자신의 과오를 까맣게 잊고 있을지도 모르지.  때로는 '그게 천벌 받을 짓이었을까?' 스스로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성추행이나 성폭행 당한 사람이 이것을 발설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것인지, 이것을 공론화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것인지.  당해봐야 알겠지. 안당해보면 모르지.  차라리 남이 그러면 발설하기가 쉬울것이다. 가족 내부에서 발생하면 이건 출구가 없는거다. 직장도 마찬가지이고.  차라리 교통사고가 간단한거지. 

 

어쨌거나 피해자가 그 기억에서 벗어날수 있도록 하는 가장 좋은 약은 가해자의 '진심에서 우러난 사과'이다.  사과와 보상 없이 뺑소니를 치면 안되는거다.  그러니, 혹시 내 아들이, 내 남편이 실수를 저지르면 나는 그들의 손목을 이끌고 가서 싹싹 빌겠다는 것이다. 손이 닳도록 싹싹 빌어서 '원한'을 풀어 내야만 한다. 

 

인간이 신이 아니니, 의도했던 의도치 않았건 얼마든지 실수하고 죄를 저지를수 있다.  내가 그런 상황에 빠지면 나는 그것을 감당해야만 하는거다. 비가 오면 비를 맞는거다. 나는 누군가 비를 맞으며 걸어 갈때 함께 비를 맞을 것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으면 한다.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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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20. 7. 11. 21:01

 

지난 밤부터 오늘 아침 사이에 성경 통독을 모두 마쳤다. (낮에는 쿨쿨 자고 밤에 일어나 성경읽기를 하는 삶이었다).  성경은 처음에는 내가 읽기 시작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사라지고 누군가가 읽는다.  나는 사라지고 성경의 숲을 관통하는 내 발길이 빨라진다.  

어느부분은 대충 눈을 거치는 식으로 넘어갔고 어느 부분은 소리 내어 읽었다.  어느 부분에서는 울었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마치 초저속 카메라로 하늘의 풍경을 찍은 것 처럼, 그것을 정속으로 풀었을때 갑자기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고요해지고 파란 하늘, 다시 구름이 한꺼번에 미친듯이 돌아가듯이 성경을 읽는 나의 시간이 그러하였다. 

 

지금 돌아봤을때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매번 통독 할 때마다 포인트가 조금씩 변하는데 올해 통독하였을때는) -- 욥기.  욥기가 너무나 아름답다.  요나에서는 깔깔 웃음이 나왔다. 

 

가장 놀라운 부분은 -- 이전에 읽을 때 재미없이 통과했던 '성전 건축'의 부분이 이번에 눈에 확 들어왔다. 아 그 지난한 역사.  예수님이 '날아가는 새도 집이 있고 여우도 돌아갈 굴이 있는데 사람의 아들이 머리 둘 곳이 없구나' 하셨던 대목처럼 구약에서 '언약궤'는 머리 둘 곳도 없이 정처없이 떠돌아야 했다.  심지어 모세는 하느님의 십계명 돌판을 홧김에 집어 던져 박살을 낸적도 있지 않은가.  참 더럽게 말 안듣는 '자식'들 덕분에 '여호와 하나님'도 뒷방 노인처럼 인간들의 배은망덕과 오만불손과 온갖 구박을 다 견디셔야 했다.  그걸 그분이 왜 그렇게 참으시고 견디셨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분이 '사랑'이라서 다른 방법이 없으신건가?  아무튼 그를 위한 성전은 쉽게 세워지지 않았고, 한번 세워진 후에도 편할 날이 별로 없었다.  구약-신약을 통틀어서 그 '성전'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내 '집'을 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내 신세가 그 문제에 투사가 되어서일까?  나의 '정처없는 이 발길'의 삶을 성경속에서 위로 받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하여, 내 가슴속에 솔로몬의 영광기에 세워진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으로 채워진 성전과 같은 -- 아름다운 성전을 세워야 한다는 어떤 상념에 이르렀다.  그것이 무너지면 나는 또 세운다.  무너지지 않는 성전은 --- 내 가슴에 예수님을 온전히 간직하는 것이지.  (그건 내게 쉬운 일이 아니지...) 

 

예언자들의 예언서가 대개는 '재앙'이 닥쳐올것에 대한 경고, 그리고 그럼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예언자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면서, '이사야, 엘리야, 예레미야 모두들 울고 있지 않은가?' 문득 --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우울증'의 여러가지 증상들이 아닐까?  정신과 의사들은 성경속의 인물들에 대하여 어떤 '진단'을 할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욥기'를 가장 아름답다고 봤던 이유도 '욥기'는  '우울증'의 여러가지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울증에 빠지면 그냥 우울감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정말로 몸도 고통스러워지고 정말로 사는게 힘들어지지 않던가?   인간이 당할수 있는 고통중의 고통을 모두 겪은 자가 욥이 아닐까?  그렇지만, 그러하므로 그는 찬란한 하나님의 음성과 가르침을 듣는다.  그는 회복된다. 참 아름답다. 특히 하나님의 등장 부분은 풀오케스트라의 연주와 같다. 

 

성경을 제한된 시간안에서 최대한 빨리 속독하여 통독 할 때 일어나는 일은 -- 구약에서 반복되었던 어떤 메시지들 혹은 '어휘들'이 신약에서도  반복되면서 그러한 것들이 한줄에 휘리릭 꿰어진다는 것이다.  성경이 방대하고 '하느님의 메시지'이므로 한자 한자 한구절 한구절 곱씹고 곱씹다 보면 정말 부분 부분만 사색하고 지나가게 되는데 -- 그런 성경 읽기를 하다가 일년에 한번쯤 번개치듯 통독을 하면 소나기를 맞은것처럼 머리가 시원해지면서 '큰 그림'을 다시 갖게 된다.  내비게이터의 메시지만 듣고 운전을 하다가 문득 벽에 걸린 세계지도를 대략 찬찬히 살필때의 느낌.  우리는 세세한 내비게이터도 커다란 지도도 모두 필요하다.  정독과 통독이 모두 필요하다. 

 

볼때마다 우는 대목은 --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타나시는 장면들  처음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을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을때.  베드로가 강변에서 물고기 잡는 것에 훈수를 두신 분이 예수님이셨다는 것을 자각하고 허둥지둥 외투를 걸치고 달려 갈때.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가 그려지는 장면에서 나는 늘 운다. 그보다 아름다운 '사랑'의 장면이 또 있을까?  일설에 예수님께서 '요한'을 애지중지 하셨다고 하지만 (이번에 읽으면서 '사랑의 요한'을 알겠더라. 요한 1-2-3서가 온통 사랑 타령이더라) 내 눈에 가장 아름다운 연애는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의 연애가 아닐까 한다.  다가옴 - 못 알아봄 - 알아봄 - 함께함 - 배신 - 도망 - 후회 - 연민 - 사랑 - 떠남 - 기다림  뭐 이런 '사랑 이야기'의 요소들이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있다. (말귀 못알아듣는 어떤 미친 기독교인이 내 글을 우연히 읽고 이게 무슨 게이 스토리냐고 예수님 모독하지 말라고 잔소리하는 댓글이 달리지 않기를 바란다. 지겹다, 말귀 못알아 듣는 가짜들.) 

 

아, 그런데, 성경통독은 아직도 내게는 '용기'가 필요한 프로젝트이다. 올해 겨울 방학때 다시 한번 할 수 있을까?  코비드가 진정되지 않아 겨울에도 다시한번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때 통독을 하게 될까?  아직 장담하거나 약속하지 않기로 하자. 나는 하나님께는 함부로 약속을 안드린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생각만 하고 있자.

 

이런 생각은 해 봤다.  누군가 뜻이 맞는 사람들과 일주일에 딱 한시간 만나서 다른 것은 안하고 인사도 무엇도 생략하고 정해진 시간에 모여 앉아서 성경을 소리내어 교독하는 것이다. 천천히 한구절 한구절 돌아가면서 읽다가 한시간이 지나면 모두들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모임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왜?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New International Version 으로. 

 

 

 

 

 

자가격리를 돕는 최고의 장치는 '온라인 쇼핑'이다. 자가격리의 숨은 영웅은 '택배 요원'이다.  서리태 (검정콩)을 온라인으로 주문한지 24시간도 안되어 문앞에 도착하였다.  오늘부터 서리태로 콩물을 만들어 먹기로 했다. 남편에게 매일 콩국수 사다 달라고 하다가 아예 매일 콩국물을 직접 만들어 먹기로 한거다. 

 

 

나도 어쩔수 없이 나이를 먹어 - 그 무서운 '갱년기' 증상이 이렇게 저렇게 나타나고 있다. 문득문득 다가오는 '발열감'은 차라리 견딜만 하다. 안면홍조도 없고 선풍기 바람도 필요하지 않고, 그냥 발열감일 뿐이니까.  (전에는 열이 난줄 알고 타이레놀 먹고 그랬는데 체온계로 재보면 체온은 오히려 저온이란 말이지...). 한달 전부터 왼쪽 손이 그냥 얼얼하고 아프다. 손마디도 아프고 손끝도 맵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이걸 '내가 잠을 잘 못자서, 몸으로 손을 덮치고 자서 그런가?' 그런 추측을 했는데 검색해보니 전형적인 갱년기 증상이란다.  생각해보니 우리 언니가 몇해전부터 손이 아프다고 파라핀 온열치료기도 쓰고 뭐 그랬다. 나는 우리 언니가 부지런한 살림꾼이라서 손을 하도 많이 써서 아픈가보다 했는데 - 요즘 나도 손이 아프다. 난 일 안하는 게으름뱅이이고 내가 손쓰는 일은 자판 두드리는 것 정도이다. 내가 손이 아플일이 없다. 그런데 손이 아프다.  갱년기 증상인 것이다.  그래서 검색을 해보니 갱년기에 도움이 되는 식품들이 있는데 그 중에 으뜸이 검은콩이더라 (하하하)  나는 콩국수도 좋아하므로 콩국물은 언제나 좋아한다. 잘 됐다. 내가 콩국물을 직접 만들어서 매일 먹으면 되겠구나. 이런 결론. 

 

 

 

콩 삶아서 (6-7시간 불리고 10분쯤 끓는 물에 삶는다, 너무 오래, 너무 짤게 삶지 않고 적당히. 그것이 10분쯤이란다) 물, 우유하고 함께 갈아서 소금 약간 뿌려서 먹는다.  매번 삶기 귀챦으니까 한꺼번에 삶아서 삶은 콩을 봉지봉지 담아 냉동실에 얼렸다가 한봉지씩 꺼내서 갈면 되지 않을까?  일단은 2회분만 삶아보았다.  몸이 삐걱삐걱 녹스는것 같다. 운동을 못하니 배도 나온다. 아 ... 나도 늙는구나.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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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20. 7. 11. 00:01

자정 넘어서 확인한 뉴스에서 서울시장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만감 교차.  그를 지지하던 사람이나 반대편에 있던 사람이나 비슷한 기분이었을것다. 모두다 어리둥절하고 '뭐지?' 싶은 그런 심경. '각자 다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만다. 이미 그는 이곳에 있지 않으므로 우리들의 영향을 전혀 안 받을것이므로. 

 

그런데 이제서야 수긍이 가는 점이 있다.  미국에 있을 때 '성추행 관련' 상황이 발생했을 때, 내가 소속한 곳에서는 이 문제에 연루된 사람들에 대하여 극도의 '함구령'이 유지되었다.  그러니까 최초 신고자에서부터 상황에 연루된 모든 사람에게 '일체 다른 곳에 이 일을 발설해서는 안된다'는 엄중한 경계가 내려졌다.  나도 그 상황 속에 연루된 사람이었는데 가슴이 답답하고 무척 불안했다. 주변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리고 뭔가 더 많은 협조를 받고 싶었지만 한정된 숫자의 사람 외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조사가 진행되었다.  

 

성추행 관련 사건에는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과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나는 피해자 측의 사람이었는데 이 조사를 얼마나 '쥐도 새도 모르게' 진행하던지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자신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 조차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피해자측 사람들은 (나를 포함) 숨이 막히는 심리적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이러다가 흐지부지하게 묻히는게 아닐까? 이런 불안감.  시스템 자체에 대한 불안감.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 일은 '공정하게' 마무리 되었다. '가해자'가 응분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리고 상황은 일단락 되었다. 

 

그런데, 이 상황이 얼마나 철통같이 보안이 되었던지 이 사건에 대해서 '관련 된 사람들' 외에는 전혀 '아무도' 몰랐다. 물론 수근수근하면서 알음알음 뭔가 감을 잡은 사람들도 발생할 수 있었지만, 아무도,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이 일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아 이것이 미국에서 상황을 수습하는 방법이구나' 정도로 이해하고 지나갔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상황이 끝났을때.  아무도 모른다 상황이 진행되는 동안. 오직 관련자들만 알 뿐이다. 심지어는 그래서 그 '가해자'가 소리소문도 없이 한마디 말도 없이 그곳에서 사라졌을때 주변의 사람들은 그가 '영전되어 떠났다'고 까지 상상하였다. 그런 소문이 한참을 돌았다. 그가 더 큰 물로 가기 위해서 이곳을 떠났다고.  그가 '승자'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그가 떠난 이유를 알 수 없었으므로 상상한 것이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런 쓰레기 같은 사람은 아주 공개 망신을 줘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한편으로 내가 그 시스템에 수긍했던 이유는 그 사람이 너무 챙피해서 자살이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근심에서 우리가 벗어날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살하지 않았고, 다른 영역으로 가서 잘 살아내고 있다. 과오는 과오일 뿐이다.  그 당시에 나는 '미국 시스템이 참 맹숭맹숭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나는 분명히 안다. 그때 그것이 공개되었더라면 '피해자'들 중에 '자살'로 뛰어들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지. 어떤 사건이 공공연하게 알려질 때 '자살'가능성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찾아온다.  '눈에는 눈, 귀에는 귀' 처럼, 한 사람의 과오는 그 과오에 대하여 지적받고 처벌받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 과오가 죽을 정도의 과오가 아니라면 죽으면 안된다. 

 

그래서, 이제 내가 나이를 먹고 이 사회에서 '성인'으로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하여 내가 '판단'을 해야 하는 입장에 섰을때 나는 제일먼저 '그 사람이 다치지 않을까?' 부터 생각해본다.  가령 어떤 학생이 부정행위로 걸렸다. 그래서 이를 심의해야 한다. 그럴때 내가 제일먼저 다른 동료들에게 당부하는 것은 '이건 단지 그냥 부정행위일 뿐이야. 교정이 가능해. 이 문제로 학생이 패닉에 빠지거나 이 일이 트라우마로 남게 되면 안돼. 학생이 개선하는 방향과 방법을 찾아야 해.' 

 

옛날에 메릴랜드에 살 때, 하이웨이에서 교통경찰차가 경광등을 켜고 따라붙었다.  뭔가 내가 실수를 한 모양이다.  그런데 교통경찰이 따라오면 나를 포함한 보통 사람들은 갑자기 가슴이 뛰고 두렵고 초조하고 그렇게 되지 않는가?  차를 길가에 대고 창문을 내리고 경찰을 기다리던 나는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헉!헉!  놀란듯한 가쁜 숨을 쉬었다. 나로서는 겁났다는 싸인 랭기지 같은거였다.  눈 크게 뜨고 놀란 표정과 함께.  ---> 그런데 그런 내 모습을 본 경찰도 놀란 표정이었다. 그는 "Calm down, calm down....Can you breathe?  Alright?" 진정해 진정해. 숨 쉴수 있지? 괜찮아?  이러면서 나를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물론 나는 괜챦았다. 그냥 놀란 리액션이 좀더 드라마틱 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경찰 입장에서 볼 때는 앞에서 어떤 아시아 여자가 숨이 넘어가는 것 같았겠지.   사실 내용은 별게 아니었다.  경찰차가 갓길에 있을때는 차선을 바꿔서 (2차선을 달리고 있었다면 1차선으로 옮겨서) 경찰차와 거리를 두고 가야 했는데 나는 차선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규정이 있는줄도 몰랐다. 그날 처음 알았다.  사실은 티켓 (벌금)을 받아야 할 사항이지만 네가 너무 놀란것 같으니 앞으로 주의하라고.  (바로 그거야. 그래서 내가 대개 무척 놀란 표정을 짓곤 하지 ㅎㅎㅎ 교통경찰에게 불쌍하게 보여서 상황 모면하기 성공.)   그런거다. 매 다섯대 맞을 일에 목숨을 끊으면 안되는거다.  그리고 사회는 매 몇대 맞을일에 사람이 죽게 해서도 안되는거다. 그 교통경찰은 간단한 주의를 받을 일에 내가 숨이 넘어갈까봐 걱정이 되었던거다. 

 

잠깐 살다가는 인생인데, 한번 눈감으면 그걸로 다 끝나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아무쪼록 피해자 분들도 마음의 평화를 되찾으시길 빈다. 잘못된 것이 바로 잡히길 원했던 것이지 그가 죽어서 사라지길 원했던 것은 아니니까. 불안하고 화가 나실 것이다. 죄책감이 들 수도 있다.  살아서 잘 견디고 이겨내시길 응원한다. 죽지 마시길.   

 

***  ***

얼마전에 유학 동문들과 밥을 먹다가 이런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다. 나의 평소의 궁금함 -- 경제, 사회, 정치적으로 대단하신 '대가리'들이 어떤 문제에 연루되어서 (뇌물이나 부정 청탁이나 파렴치 범죄나...) 교도소에 1-2년 다녀 온 후에 그들은 어떤 식으로 사회의 정상으로 다시 돌아오는가?

 

1) 경제사범들은 그들이 정말 '대가리'들이라서 황제처럼 들어갔다가 황제처럼 나오신다. 

 

2) 정치사범들 역시 그들이 정말 '대가리'일 경우 몇년후에 다시 중앙으로 복귀한다.

 

3) 사회적  '대가리'인데 '파렴치 범'인 경우가 참 애매하단 말이다.  특히 미투상황 속에서 연루되었던 사회적 '대가리'들은 어떻게 과거의 영광으로 복귀할 수 있을까? ===> 이것이 내가 던진 그날의 '화두'였다. 

 

 

경제, 정치 사범들은 제자리로 곧바로 돌아오는데 3)번 케이스에 이렇다할 모범 케이스가 안보인다. 누군가 어떤 해답을 찾았으면 한다.  뒤집어 보면 이 사회는 경제 사범들에 대하여 너무나 관용적인것 같기도 하고. 경제사범들도 파렴치범인데 성폭행범과 다를바가 없는데 그들은 영광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것처럼 내 눈에 비쳐진다. 이 사회는 경제사범을 황제처럼 떠받들고 있는게 아닐까?   왜 사람들은 파렴치범인 경제사범은 슈퍼스타 대하듯 떠받들고 찬양하면서 성추행범만 손가락질하고 침뱉고 밟는가?  경제사범 처벌을 강화하라!!!!  성추행범의 사회적 망신에만 혈안이 될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성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라!!!!  처벌강화! 처벌강화! 처벌강화!   사회적 망신주기를 멈추고 처벌을 강화하라!!  그것이 법치사회 아닌가?

 

 

뜬금없이....  문득.... 노회찬씨가 그게 그가 목숨을 버려야 할 과실이었나?  매 몇대 맞을 일에 목숨을 버리신게 아닌가?  왜 갑자기 노회찬씨가 그리워지는가... 내가 기억하는 사회적 인물들의 죽음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죽음은 '노회찬'씨의 죽음이었다. 아직도 가끔 그가 그립다. 우리들의 낭만이었던 정치인.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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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20. 7. 10. 03:55

7월 2일에 입국하여 자가격리에 들어갔으므로 7월 2일이 자가격리 Day 1 이지만, 성경읽기는 7월 3일에 시작했으므로 성경읽기 Day 1 은 7월 3일이다. 자가격리 스케줄과 하루 차이가 난다. 

 

 

Day 8 (자가격리 Day 9) 금요일 새벽에 구약 읽기를 마쳤다. (헥헥헥 숨차게 달림)

 

 

구약은 하루에 170페이지 읽는 것으로 계산을 했고, 신약은 하루에 90페이지.  첫 며칠은 집중이 잘 안되어서 진도가 안나가서 끙끙 앓았고 어제, 그제부터 속도가 붙어서 씽씽 달렸다.  중도에 포기하면 '천벌'을 받을까봐 고민을 많이 했다. 성경에 그런 말씀이 나온다 -- 하느님께 함부로 저 이것 하겠습니다 뭐 이런 약속을 하지 말라. 약속하고 지키지 않는 것을 하느님이 싫어하신다. 아이구야.  그래서 포기하려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열심히 달렸다.  아 다행이다.

 

 

구약을 전력질주하듯 달리면서 배운 것 몇가지

  1. 인간은 참으로 하느님 말씀을 지겹게도 안듣는다.  은혜를 쉽게 잊고 언제든지 샛길로 빠질 준비가 되어있으며, 불평도 쉽게하고 번번이 하느님을 실망시킨다. 아주 하느님을 실망시키는데 선수들이다.  마치 부모 속 썩이기 위해 태어난 자식처럼 속을 썩인다. 
  2. 하느님은 인간에게 참 인내심이 많으시다. 딱 착한 부모님 같으시다. 참고 참고 참고 용서하고 용서하고 용서하신다. 죽이겠다고 결정하신 후에도 반성하면 돌이키신다. 예언서의 주된 내용이 뭔가하면 예언자들 풀어서 '혼내주겠노라' 하시고 웬만하면 곧바로 (그냥 참회하는 시늉만 해도) 곧바로 기다렸다는 듯이 용서해주시고 복을 퍼 부어 주신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요나가 하느님의 이러한 태도에 불만을 품고 불평을 해 대겠는가. 하지만 하느님은 불평하는 요나마저 살뜰히 돌봐주신다.  참 좋으신 하느님이시다. 
  3. 재난과 고난 가운데를 걸어갈지라도 -- 설령 그것이 나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형벌이라고 해도 '안심'할 수 있다. 하느님이 주시는 형벌이라면 그것조차 우리는 안심할 수 있다. 하느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하여 우리는 안심해도 된다. 형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놀라운 메시지이다.  이것을 이번에 새로 깨달았다. 
  4. 예언서 (예언자들이 나열된 부분)는 시간순으로 정리된 것이 아니었다.  시기가 오락가락 한다. 나는 여태 그걸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에 읽으면서 예언자들이 시간순으로 정리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5. 그리고 또 알게 된 것!  예언서들이 구약의 마지막에 정리된 것과  신약의 요한계시록이라는 예언서가 신약의 끝부분에 배치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구약과 신약을 공히 예언서로 마무리를 했구나...
  6. 그냥 잡념 -- 코로나 난국에 사람들 바글거리는 클럽이나 비치에서 마스크도 없이 향락을 즐기는 군중의 모습과 구약의 망해가는 도시 사람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을때 마을 사람들은 노아를 비웃었으며 소돔이 망하기 직전에 롯이 사위들에게 함께 떠나자고 할 때에도 사위들조차 롯을 비웃었다.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상황에서 눈을 감는 군중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있으며 인류가 망하는 그 날까지 되풀이 될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라서 나도 매일매일 이렇게 넘어지며 살고 있으므로.  인간은 어리석다. 한치앞도 내다보지 못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의지하여 하루하루 사는 수 밖에 없어보인다. 
  7. 이번에 구약을 통과하면서 가장 큰 '득템'은 우리 하느님이 참 좋으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 전에는 내가 왜 그런 생각을 못했지?  역시 성경 통독을 할 때마다 크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다. 

 

이제 신약을 달려보자.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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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20. 7. 9. 22:17

점심에 남편이 약속대로 콩국수를 사다 줘서 맛있게 먹었다.  내일도 그 콩국수를 사다 달라고 했다.  콩국수가 좋은 이유는 일단 부드럽고 고소하고 속이 편안한데다가 국물 자체가 '두유'이므로 국물도 음료수 마시듯 안심하고 먹을수 있기 때문이다. 

 

 

자가격리에서 무사히 해제되기 위해서는 다음주에 재검 받을 때 음성 판정을 받아야 한다. 첫 검사에서도 깔끔하게 음성이 나와주었으므로 재검에서 다시 깔끔하게 음성 판정을 받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내가 기대할수 있는 최선이다.  (사람의 일은 알 수가 없고, 갱년기 여성인 나로서는 내 건강도 장담을 못하므로 조심 또 조심이 상책이다.)   나는 정말로 그동안, 이 오피스텔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체온계라던가 필수 아이템 주문한 것이 문앞에 배달되었을때 문을 빼곰히 열고 그것을 집어 들이거나, 남편이  내 '먹이'를 갖고 올때 빼꼼이 문을 여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무사히 자가격리에서 해제되어 저 멀리 눈앞에 보이는 '나의 숙소'로 귀환해야 한다. 

 

어제 회의를 했다. 동료들은 회의실에 모여있었고, 나는 온라인으로. 이제 이런 온라인 회의가 일상이 되어 크게 불편함도 없다. 나는 평소대로 있다가 화면 앞에 앉을때 립스틱만 바른다. 립스틱이 에티켓이다.  내게 자가격리에 대해서 궁금한 것을 묻는다.  조만간 미국에 다녀와야 하는 동료들이 있으므로.  그래서 내가 일목요연하게 영문으로 정리하여 알려주기로 했다. 나는 마치 내 조직에서 '선발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동료들 중에서 '자가격리'를 경험한 최초의 구성원이고 '아무도' 이게 어떤 것인지 모르고 있다. 뉴스나 언라인에서 정보를 구할 뿐.  그래서 자가격리중인 내가 회의에 참석하여 내가 살고 있는 풍경을 보여주니 -- 회의 주제보다는 '자가격리' 주제로 더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돌아보면 내 인생은 어떤 면에서 늘 '선발대' 같았다.  늘 새로운 것을 먼저 경험하고 그것에 대하여 종알거리곤 했다.  우리집 아이들도 늘 그런 얘기를 한다.  '엄마는 늘 뉴에이지, 얼리 어댑터고 우리는 엄마를 따라 가느라 헉헉 댔어요'가 두 아들이 내게 하는 말이다.  이제 그들이 나보다 앞선 테크놀로지의 일꾼이 되어 있긴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내 얘기를 경청하는 편이다.  내게는 그들 전문영역의 지식은 없어도  그 너머를 내다보고 있으니까. 어떻게?  책을 읽으니까...  내가 어떤 영역의 전문가들인 내 아들들을 아직도 선도할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그들보다 더 많이 책을 읽기 때문이다.  책속에 다 씌어 있는데 뭐.  그리고 나는 매일 하느님한테 길을 물으니까.  아 아무튼 내 경험에 미루어 내 동료들 그리고 가을학기 미국에서 한국으로 입국하는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자가격리 정보를 정리해야 하는 새로운 숙제가 생겼다. 

 

 

 

 

내 일상은 대개  낮에 종일 낮잠이나 뒹굴거리면서 보내다가 해가 지면 깨어나서 성경읽기에 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난관을 거슬러 올라가 본래 하느님께 약속드린대로 성경 통독을 마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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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통독을 하면서 내가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은 (매번 성경 통독을 할 때마다 나는 늘 조금 새로운 것과 만난다) -- 속독으로나마 성경을 통독한다는 일은 내 영혼에서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내린 성전을 재 건축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보면 하느님의 언약궤를 모시고 강을 건널때 이적이 일어나기도 하고, 전쟁중에 적군에게 빼앗기기도 하고, 잊혀지기도 하고 그 언약궤에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다윗 시대에 다윗이 언약궤를 모실 성전을 짓고자 하나 여호와께서 이를 승인하지 않으신다.  네 아들 솔로몬이 짓게 하겠다고 하신다.  그래서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성전의 완성을 보게 되는데 그 성전을 짓는 동안에도 많은 방해와 난관이 이어진다.  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성전 건축의 역사를 재미없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읽다가 문득 이런 각성을 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실 성전을 짓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구나.  지루하고 재미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던 것이구나.  그래서 완성된 성전을 묘사할때 그 언어가 그렇게 화려하게 치장되었던 것이구나.  화려한 치장에 재미없어 할 것이 아니라 성경 저자들이 왜 이렇게 기쁨에 들떠서 세밀한 묘사를 했던 것인지  생각을 해 볼 만 하구나. 

 

감옥에 갇혀 있는 듯한 자가격리 공간에서 한여름에 지루한 묘사로 이어지는 구약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는 지금 내 영혼의 무너진 성터를 다시 건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루하고 재미없어도 내 무너진 성전을 다시 쌓아 올리도록 하자.  코로나 핑계로 여러가지 핑계로 나는 조금씩 조금씩, 아주 조금씩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삶에서 멀어진 것이 아닌가. 예배를 드리나 딴짓을 했고, 기도를 드리나 딴짓을 했고, 기도한다고 하나 정말로 기도했는가 돌아보면 나는 안이하고 나태하다.  하느님은 말없이 나를 지켜보신다. 그 지켜보시는 눈을 마주하고 다시 나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왜냐하면 분명 내가 이 세상에 온 사명이 아직 남아있을것이므로.  오늘 밤도 성경속에서 보내야겠다. 

 

명불허전

 

 

미국에서 20년 가까이 살면서 내 삶의 많은 부분이 미국식으로 채워졌다.  Victoria's Secret 도 내 삶의 일부인데 20년 가까이 그 속옷을 입고 살았다. 대개 세장에 얼마씩 싸게 판매하는 것 위주로 여러장씩 사다가 입는 식이었다. 한국에서 근무하면서 미국을 오갈때마다 꼭 들러서 실용적이고 편안한 속옷들을 사서 나도 입고 가끔은 언니나 조카에서 선물도 하고 르했는데,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는 쇼핑을 못했다. 대부분의 매장이 문을 닫은 상태였고, 나도 거의 '자가격리'와 같은 생활을 했으므로 살 기회도 없었다. 

 

 

티브이 홈쇼핑에 한국산 속옷을 예쁜것을 팔길래 '일명 엄마 속옷'이라는 -- 아가씨들은 입지도 않을 평범하고 펑퍼짐해보이는 속옷 세트를 샀다.  인견으로 만들었다는 알록달록하고 경쾌한 무늬의 속옷인데 '세상에 다시 없이 편한, 안 입은것 같은' 속옷이라는 칭찬이 자자했다.  언라인으로 리뷰를 봐도 나쁘지 않았고 엄마와 딸이 함께 입는다는 말도 있고. 그리고 원래 한국에서 이런 실용적인 속옷을 참 잘 만들지 않는가?  그래서 믿고 샀다.  왔다.  모두 빨아 널어 말려가지고 예쁘게 정리도 해 놓았다. (감옥살이니까 심심풀이로).  그런데 오늘 새거 한장 입어보고 실망했다.  불편하다.  내가 평소에 입는 Victoria's Secret 보다 크기도 크고 펑퍼짐한 디자인이고 신축성도 좋고 촉감도 좋고 색상도 좋고 다 좋아서 정말 눈으로보고 손으로 만질 때는 '우리 나라 속옷 정말 잘 만들어!!!' 감탄했는데 -- 막상 입으니 매우 불편하다. 

 

 

어떻게 불편한가 하면 그 Y zone 이라는 부분의 고무줄이 살을 파고든다. 내가 살이쪄서 고무줄이 살을 파고 든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Victoria's Secret 입을때는 불편하지 않은걸.  가위로 고무줄 부분을 잘랐다. (그러면 속옷은 망가지는거지. 그래도 잘랐다) 고무줄 자르면 옷은 망가지지만 편안 할 줄 알았다.  살을 파고드는 고무줄을 잘라서 숨통을 트여 놓아도 여전히 불편했다.  작은걸 샀냐고? 아니 넉넉하게 입으려고 아주 풍신하고 펑퍼짐한 사이즈로 샀다. 그런데 내 체형에 안맞는다. 그러니까 촉감도 좋고 펑퍼짐하고  다 좋은데 고무줄이 살을 파고든다. 숨이 막히는 것 같다.  새로 산 속옷들을 아마도 가위로 고무줄 부위를 잘라서 딱 한 번 입고 버리게 될 것 같다.  그래서 내가 Victoria's Secret 속옷하고 맞대어 놓고 비교를 해보니 VC의 편안함은 그 디자인에서 오는 것으로 보였다.  VC는 Y zone 에 편안함 을 주기 위하여 그 선을 피해서 재단을 하고 마감을 해 놓았다. 살이 겹치는 곳에는 살만 겹치게하여 속옷의 이물감을 제거했다.  여기서 산 속옷의 문제는 살이 겹치는 곳에 고무줄도 겹쳐서 내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 든다.  그걸 들여다보면서 '명불허전'을 생각했다.  괜히 VC가 속옷의 선두주자로 자리잡은것이 아니군. 속옷 디자인에도 전문가적 식견이 필요한 것이군.  그래서 오늘 새삼스럽게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던 Victoria's Secret 의 탁월성을 깨닫게 되었다.  VC 팬티와 브라는 내 평생에 가장 즐겨입는 가장 내 몸에 편안한 속옷이다. (인정). 

 

* 나는 양말목도 조인다 싶으면 가위로 잘라서 신고, 뭐든 내 혈관을 누르거나 조이는 것은 가위로 잘라서 숨통을 트이게 하는 편이다. 아니면 그냥 버리거나. 혈관을 조이거나 숨통을 조이는 것을 참지 않는 편이다.  편한 빤쓰 찾아 입기도 쉬운 일이아니구나. 싸건 비싸건간에 빤쓰가 편해야 몸이 편하지... (결론).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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