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4. 2. 8. 22:27

 

2024년 2월 8일 목요일.

 

 

지난해까지 내가 수행하던 중요 프로젝트들을 대거 정리하면서 나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말했었다, "하나님께서 새해에는 뭔가 프로젝트를 주실것 같아요.  정리해 놓고 가만히 있으면 뭔가 보내실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상치 못했던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를 하나님이 툭 던지셨다.  나는 닷새간 잠을 이루지도, 밥을 먹지도 못하고, 숨쉬는 죽은 사람처럼 멀거니 시간을 보냈다.  목사님과 교회 어르신들께서 통곡의 기도를 올려주셨다. 내 머리와 뺨위로 내 눈물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눈물이 떨어져 흘러내렸다.  그분들의 눈물과 기도가 나를 일으켜세웠다. 

 

오빠와 언니가 응원해주기 위해서 온다길래, 집이 아닌 해변에서 만나자고 했다.  바닷물에 서리가 내린듯 살짝 성에가 낀 쌀쌀한 날씨였지만, 햇살이 따스했고 바람이 없어서 포근한 느낌이었다. 

 

 

개펄 멀리서 바다가 소리를 내며 밀려오고 있었다. 바다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며 오빠와 나는 맨발로 개펄을 걸었고, 남편과 언니는 개펄에 들어가기 싫다고 해안 보드워크를 걸었다. 남편이 높다란 산책로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어 주었다.  오빠는 개펄에서 맨발로 걷는것이 평생 처음 경험이라며 즐거워하였다.  나도 오랫만에 개펄을 걸을수 있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오빠는 개펄위에 아랍글자처럼 꼬불꼬불 씌어진 조개들의 발자취를 신기해 했다. 한번도 그런것을 본적이 없다고 했다. 세계적인 기업의 경영인이었던 그는 너무 큰것들만 보느라 아주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제대로 들여다 볼 시간이 없었나보다. 

 

 

바닷가 산책을 마치고 근처 카페로 가려고 자동차로 갔을때 - 내 자동차 열쇠가 사라지고 없었다. 외투 주머니에도 바지 주머니에도, 가방에도 어디에도 없었다. 가방을 거꾸로 들고 다 털어서 보아도 자동차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도 없었다. 해변으로 달려가 내가 모래를 털고 양말과 신발을 다시 신었던 자리에도 가보고, 산책로 입구쪽에도 가보았다. 혹시 내가 실수로 흘렸나해서.  내가 다녔던 곳을 다시 뒤진다해도 열쇠를 되찾을수 있을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일부러 멀리서 나를 보러온 손님들을 마냥 기다리게 할 수만도 없었다. 마침 남편이 늘 여벌의 열쇠를 갖고 있으므로 크게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단지, 내 열쇠에 함께 걸려있는 연구실 열쇠...그것이 없으면 연휴가 끝날때까지 연구실 출입이 불가하다. 연휴동안 밀린 일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으로는 '연구실 열쇠를 어떻게 해결하지?' 생각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기위해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습관처럼, 아무것도 없이 텅빈 내 외투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지던 내 손 끝에 무언가가 감지되었다.  외투 주머니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그리고 외투자락으로 무엇인가 굴러다니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외투자락 끝에, 뭔가가 있다. 내가 손으로 호주머니 아랫쪽 외투자락을 훑어보니 거기 뭔가 입체적인 것이 있다.  외투에 난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뒤져보았다.  열쇠였다. 내 자동차 열쇠가 주머니에 생긴 구멍을 통해 외투 안쪽으로 빠져 들어가서 내가 움직일때마다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잃어버린 열쇠는 내 안에 있었다.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도록, 가장 안전하고 깊숙한 곳에서 내 열쇠는 뒤척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열쇠는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내가 잃어버렸다고 상상 했을 뿐. 열쇠는 나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 내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시는 메시지라고 판단했다. 

 

하나님은 내가 풀어내기 힘든 고난도의 문제를 하나 주셨다.  나는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애쓰다가 낙심하여 미치거나, 죽자고 작정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슬퍼할것이고, 좌절할 것이고, 많이 울것이고, 많이 기도할 것이고, 사색할 것이고, 자꾸만 자꾸만 작아져서 마침내 내가 나를 잃을 것이고, 나는 매일 매일 죽을것이다.  하지만 나는 매일 매일 다시 살아날 것이고, 내가 죽은 자리에 새로운 내가 생성될것이며, 어쩌면 하나님께서 주신 어려운 문제의 해답을 풀고, 잠긴것처럼 보이는 문을 열을수 있을것이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자명하다: 아가, 아가, 소중한 나의 아가야. 내가 네게 문제를 주었을때 이미 나는 너에게 열쇠도 주었음을 기억해라.  나는 네가 이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켜 주었다.  나는 네가 벌여놓은  여러가지 쓸데없고 잡다한 일들을 정리하도록 해 주었고, 성경통독을 통해서 나의 존재에 눈뜨게 해 주었다. 빅토를 프랭클의 책도 읽도록 해 주었다.  사실 너는 문제를 풀 준비가 다 되어있다. 이제부터 문제를 풀면 된다.   이제부터 내가 네 안에 감춘 열쇠를 네가 발견해라. 꼭 성공하길 나도 빈다. 아가 아가 울지 말고 일어나서 네가 갖고 있는 열쇠로 문을 열고 내게 더 가까이 오너라. 열쇠는 네 안에 있다. 아가. 네가 죽고, 새로운 네가 열쇠를 찾아내기를. 

 

 

이제부터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길을 찾아낼것이며, 거기서 나의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길이 멀고 지루하고 힘들겠지만, 이 여정이 어딘가에서 끝날때, 거기 블루벨이 만발한 길의 끝에서 나는 쉴 것이다, 다음 프로젝트를 기다리면서. Dear God, I'm ready. Let's go.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1. 30. 18:44

카톡을 통해서 '자동차검사'를 필하라는 메시지가 와서, 사전에 온라인 신청을 했고, 오늘이 예약 날짜라서 다녀왔다.  카톡으로 메시지가 왔을때도 스캠인지 아닌지 헛갈리니까 온라인 검색을 해보고 '정상적인 메시지'라는 것을 확인 한 후에 예약을 진행하였고, 자동차검사장에 가기 전에도 검색을 해보니 벌써 여러 분이 자신의 블로그에 내가 가기로 한 검사장에 다녀온 후기를 사진과 함께 상세히 적어 놓으셔서 현장에 가면 어떠할지는 충분히 가늠하고 다녀올 수 있었다. 

 

버지니아에서는 해마다 emission 검사를 하고 검사필증을 자동차 번호판에 붙여 놓는 식인데, 한국에서는 신차의 경우 출고 이후 4년, 그 이후부터는 2년에 한번씩 자동차 검사를 받는것 같 같다.  그러니까, 내가 내차를 새로 구입한지가 벌써 4년이 되었다는 뜻이다. (세월이 빠르구나.)  예약할때 이미 검사비 지불 정보를 입력했기 때문에 예약한 시간에 차를 갖다 놓고 기다리니 검사필증을 프린트해주고 그것이 끝이다.  내 차는 - 그야말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중고차 딜러들이 무조건 광고하는 '여교수가 타던 차' 바로 그런, 얌전하고 주행거리 많지 않고, 사고 기록 전혀 없는, '거의 새차'에 해당된다.  검사필증 내주시던 과장님이 '차 별로 안타셨네요. 새차네요' 하셨다.  출퇴근도 안하는 차이니까 기껏해야 근처 농수산물 시장에 채소 과일 사러 다니고,  주말에 엄마 보러 다니고, 가끔 바닷가에 바람쐬러 가거나, 신촌에 다녀오는. 주로 지하주차장에 얌전히 서 있는 '여교수차.' 

 

2년 후에 다시 오라고 한다.  고맙다 복덩이 내 차. 

 

* 뭔가 내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하여 정보가 필요할 때, 검색을 해보면 누군가가 블로그에 상세하게 사진과 함께 정보를 올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체로 요즘은 '광고'를 다는것이 대세인 모양인데, 어떤 분은 광고도 없이 상세한 정보를 담아 놓으셨다. 블로그 자체에 대한 애정이랄까, 광고도 없이 좋은 정보를 올려주시는 분들이 아직도 많이 계시는구나.  그런 것을 발견할 때 기쁘다.   옛날에 우리들은 광고 그런것에 신경쓰지 않고 정말 정보를 많이도 올리고 했는데...  지금은 내가 정보도 안올리지만, 앞으로도 나는 광고없이 나의 블로그를 사용할것이다. 어차피 나혼자 쓰고 보고 하는것이니까.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1. 30. 01:22

아마존 킨들에서 저가에 판매가 되길래 (USD2.99) 간단히 읽어보려고 샀다가 첫 챕터만 읽었는데 - 책의 효과를 보았다. 서문에 저자는 'No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욱 존중받는다'고 설명한다. Yes 라고 무조건 받아주는 사람은 다소 만만하게 보이고 No 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욱 당당해보이고 주도권을 가질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을 읽고 났는데, 마침 내가 어떤 결정을 할 일이 생겼다. 평소 같았으면 '그래. 해줄게'였겠으나, 지금 방금 아주 좋은 조언을 들었던터라 '아니. 안해'라고 답했고 내 결정이 옳다는 것을 나는 확신힌다.  나의 시간과 노력은 내가 주도적으로 결정한다. 

 

기분이 좋아져서, 이 책을 좀더 샅샅이 읽기로 한다. 나는 이제부터 조금더 집중적으로 내게 꼭 필요한 것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며 살겠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1. 30. 00:23

 

저자 Rex Ogle 의 자전적 어린시절 이야기를 담은 non-fiction 이라고 한다. 

 

Free lunch (무료 급식) 라는 미국의 청소년 복지 시스템이 있다. 점심시간이 되면 미국의 초-중-고등학교 (K-12) 학생들은 학교 식당에 가서 돈을 내고 점심을 사 먹거나, 자기가 집에서 싸가지고 온 점심을 펼쳐놓고 먹는다.  그런데 식당에서 점심을 골라서 먹는 학생들 중에 돈을 내지 않고 무료로 받아 먹는 학생들이 있다. 학교에 저소득이라고 알리면 대개 그것이 가능해지는 듯 하다.  내가 플로리다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유학을 할 때, 가난한 유학생 자녀들도 '저소득층'에 해당되었고 학교에 신고만 하면 무료 급식이 가능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애들 기죽이기 싫고 내 형편이 애들 점심도 못 먹일 형편이 분명 아니므로 무료급식을 신청하지 않았었다.  나와는 반대로 '사회복지'를 전공하던 '지금은 모 명문 주립대 교수이신 내 이웃친구'는 '당연히 누려야할 복지 서비스를 외면할수 없다'며 자녀들에게 무료점심을 받게 했다. 그 댁 자녀들 역시 누려야 할 복지를 누리는 것이 지당하다고 믿고 그다지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무료 급식 서비스를 누린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이 글의 저자는 중학교 (6학년)에 들어가서 자신이 무료급식자로 등록이 된것에 대하여 수치스러워하였고, 다른 친구들이 그것을 알아챌까봐 전전긍긍하고 괴로워한다. 그래서 제목도 '무료급식 Free Lunch' 이다.  '무료급식'은 여기서 - 미국 사회에서 '무료급식' 서비스를 신청할수 밖에 없는 보통 사람들의 헤어나기 힘든 상황 전체를 대변한다고 할 만하다. 

 

어찌보면 비참하고 슬픈 상황인데, 다행스럽게 책의 저자이며 화자이며 주인공인 렉스는 착하고 바르게 상황들을 헤쳐나간다. 해피엔딩이다. 그리고 그는 멋진 작가가 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미국에서 저자와 비슷한 또래로 성장한 내 두아들이 학교에서 겪었을 여러가지 장면들을 상상할 수 있었다.  큰아이 존이 가끔가다 그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웃기는 에피소드를 늘어놓으며 온가족이 포복절도 하곤 하는데, 녀석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써보라고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

렉스는 자기가 가난하고 해진 옷과 신발을 신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백인 아버지와 멕시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나 피부빛깔이 진하다는 이유로 영어선생님(우리나라에서 국어선생님)에게 차별을 당하고 있음을 직감한다. 자유롭게 읽기 시간에 그가 천페이지가 넘는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네가 그렇게 두꺼운 책을 어떻게 읽는다는거냐' (거의 다 읽어가는데요)  '네가 읽는다면 나쁜책이 분명하다, 네 엄마에게 알리겠다' (헌책방에서 엄마가 사준건데요) 이런 식의 노골적으로 경멸섞인 반응을 보인다.  하루는 단어 받아쓰기 시험을 봤는데, 분명히 모든 단어를 정확히 썼는데도 85점을 받았다. 선생님에게 가서 어디가 틀렸는가 묻자 선생님이 세개의 단어를 가리켰다. 'U'자로 쓴것이 'W'로 보인다는 것이다.  렉스가 '나는 분명히 철자를 알고 있다. 나는 잘 못 쓰지 않았다'고 항변하자 - 선생님은 95점으로 점수를 고쳐줬는데 - 5점 깎은 이유는 글씨를 헛갈리게 쓴것에 대한 징계라고 했다.  화가난 렉스는 "선생님, 이거 20개 문제를 내셔야 했는데 선생님은 19개의 문제만 내셨어요. 한문제 빠졌다구요.  그 한가지 빠진 단어를 제가 채워드리지요"라고 말하고 시험지에 PREJUDICE (차별) 이라고 적어 놓고 자리를 뜬다. 

 

이튿날, 렉스는 겁에 질려서 학교에 간다. 분통을 터뜨린것까지는 기분이 좋았으나 아무래도 선생님이 단단히 화가나서 자신을 응징할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수업시간에 렉스를 복도로 불러낸 선생님 - 벌벌 떨고 있는 렉스 -- 선생님은 렉스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며 용서를 빌었고 렉스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 정말 현실에서 이런 극적인 태도의 반전이 가능할까?  이야기에 재미를 더하기위한 장치가 아닐까? 읽으면서 생각을 해 봤는데, 뭐 사실이건 허구이건 간에 여기서 교훈은 'You should resist and speak up' 으로 정리 될 수 있겠다.  부당한 일이 진행될때, 가만히 있으면 바뀌는게 없다, 어느 순간에 결연히 맞서야 한다. 그래야 깨지거나 해결되거나 할 것이다. 사회가 정의롭지 않게 돌아갈때, 충돌 없이 바뀔수 있는게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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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스가 그보다 조금 부유한 친한 친구와 만나서 놀다가 식품점에 가게 된다. 그 친구가 목이 말라서이다. 렉스도 목이 마르지만 돈이 한푼도 없으므로 아무것도 살 수가 없다. 식품점에 간 친구는 계산도 하기 전에 차가운 음료수 하나를 꺼내서 마신다. '내가 계산도 안하고 음료수를 마시면 나는 잡혀갈텐데...' 하고 렉스는 상상한다. 

 

친구는 점원이 바쁜 틈을 타서 진열대에 있는 과자 나부랑이들을 주머니에 집어 넣는다. 발각되지 않는다. 친구는 렉스에게도 어서 먹을것을 훔쳐서 옷에 숨기라고 한다. 하지만 렉스는 물건을 훔치지 않는다 '너희 아버지는 변호사라서 걸려도 별일 없겠지만, 나는 잡히면 교도소에 가게 될거야'하고 렉스는 생각한다.  여러가지 과자를 몸에 숨긴 친구는 자신이 마신 음료수의 빈캔을 계산대에 올려놓고 점원과 즐거운 대화를 하며 계산을 치르고 나온다. 그는 밝고 명랑하고 세련되고 그리고 점원들의 환대를 듬뿍 받는 귀공자. 그들이 상점에서 나오는데 점원이 렉스를 불러세운다. '너 옷속에 뭔가 숨겼지?' 점원이 렉스의 몸을 더듬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점원은 심지어 미안한 기색도 없이 그를 보낸다.  이를 보고 있던 친구는 깔깔대며 말한다, "내가 훔치는 동안 점원이 너를 감시했단 말이지. 우리 보석가게도 털러 가자. 네가 의심받는동안 내가 훔치면 되니까."   렉스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그런데 너는 부자이고 아버지도 변호사이고, 갖고 있는 돈도 많은데 왜 물건을 훔치는거지?" 렉스가 묻자 친구는 대답한다."그냥, 훔칠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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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중심의 미국사회에서 유색인종이나 이민자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백인들이 100퍼센트로 일을 할때, 나머지 우리들은 200퍼센트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간신히 그들이 누리는것에 근접할 수 있다. 하지만 설령 근접한다고 해도 동등한 혜택을 누린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비장애인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 시스템속에서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한 생산성과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비장애인보다 몇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현실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구조 속에서 여성이 남성이 누리는 것만큼을 누리기 위해서 역시 몇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것과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정치사회경제적인 힘을 갖고 태어난 자와, 그것을 갖고 태어나지 못한자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갖고 태어나지 못한자'들은 '갖고 태어난자들'에 비해서 힘들고 피곤한 삶을 살게 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그것은 자명한 일이고. 

이런 공공연한 문제를 사회 시스템을 개선하는 식으로 바꾸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 동시에 '개인'이 이것을 어떻게 대면할것인가의 문제도 동시에 생각해봐야 한다.  각자 잘 싸우고, 공동의 장에서 만나서 또 잘 싸우고. 서로 도와주고. 서로 위로해주고. (뻔한 소리). 

 

 

이민자들은 이것을 디폴트로 받아들이고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1. 29. 01:34

 

어릴때 (대학시절에) -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한글 번역서로 요즘 '먹방 선수'들이 한꺼번에 라면을 열다섯봉지씩 먹어치우듯이  그렇게 그냥 속도전을 하듯 방학동안에 하루에 한두권씩 책을 읽어 '치우던'시절 한번 읽고 지나갔던 책이었다.  그 당시에는 이 책을 읽으며 아무런 것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냥 이야기가 너무 끔찍하고, 그냥 대체로 끔찍하고 괴로운 '안네 프랑크의 일기'류의 무엇으로 대충 읽고 지나간 듯 하다.  그러니까 중학교 때 사회선생님의 스토리텔링으로 '안네의 일기'를 발견하여 - 그 책을 무슨 사서삼경처럼 모시고 읽었던 시절이 있었고, 이에 대한 역작용으로 머리가 굵어진 후 부터는 '이차대전과 유태인들 고통겪은 이야기'에 대하여 그냥 '지겨움'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후로도 내내 그런 기분이다. 홀로코스트의 끔찍함과, 유태인들의 고통과, 그들이 역사의 다른 장에서 펼치는 '만행'에 대한 삐딱한 시각이 여전한 가운데 - 얼마전 이 책이 눈에 들어왔고, 이제서야 왜 이 책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고 읽는것인지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으니 -- 나에게는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세월'과 '경험'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물론 내가 저자와 같이 끔찍한 고통을 겪지는 않았으므로, 여전히 그가 말하는 것의 심연까지 닿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지금은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이해하고, 공감한다.  이 사람의 이야기는  그대로 (내가 여전히 사색하고 있는 하박국 3장 17-19)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금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를 지옥에서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거룩한 책'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내가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에 소개된 '죽음의 수용소'와 같은 극한 상황의 경험치가 필요했을수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죽음의 수용소를 전전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2022년에 내가 처했던 상황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수용소와 다를바가 없었던 위급한 병동. 그 안을 돌아다니던 친절하거나 불친절했던 감시자들, 친위대원들, 늘 기웃대고 있던 죽음. 5분단위로 전해지던 코드블루.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  내가 유일하게 상황을 컨트롤 할 수 있었던 것은 - 성경책을 펼치고 시편을 필사하거나 조용히 기도하는 일이었다.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을때는 찬송가를 불렀다.  다른 사람이 있을때는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방해를 하면 안되므로.  조금 여유가 생기면 '수용소'가 마련해준 기도실에 가서 한시간쯤 기도를 드렸다.  '병동'과 '수용소'가 참 흡사하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발견했다. 

 

이 책의 저자가 기술한 것을 보면 - '수용소'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현명하게 상황에 대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죽음을 넘어서는 무엇이 간절히 필요하던 시기에 나는 죽음을 넘어서는 존재와 함께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위로 받았고, 내가 왜 하박국의 노래에 매달려 있는지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 다시 삶을 들여다보면 - 이 책이 아직도 유효한 이유는 - 결국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빠져나가기 힘든' 수용소를 살고 있는 셈이다. 이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잘 보낼것인가. 저자는 고통의 이야기를 하며 스피노자의 윤리학 일부를 소개하는데 (대략 내 말로 설명하자면 )-- '고통을 객관적으로 관조할 때, 고통이 삶의 의미로 다가온다, 곧 우리는 고통의 심연에서 벗어난다는 것인데 -- 이는 불교에서도 역시 동일한 가르침이 있고, 나는 고통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훈련을 '수용소'에 있을때 받았던 것같다.  그 당시 나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지금도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안다. 

 

 

이 책에 소개되는 '테헤란의 죽음' 이야기는 작가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어느 부잣집의 머슴이 어느날 '저승사자'를 맞닥뜨렸다. 깜짝 놀란 모슴은 부자 주인에게 저승사자로부터 도망치기 위하여 테헤란으로 도망가려하니 말 한필을 달라고 한다.  부자는 머슴을 살리기 위하여 가지고 있던 말중에서 가장 빠른 말을 그에게 주고 빨리 도망가게 해준다. 참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머슴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저승사자가 서 있었다.  당신은 왜 우리 머슴을 놀라게 한거요? 하고 주인이 묻자 저승사자가 답했다, "놀래키려고 한것은 아니고, 내가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직 여기 있길래 내가 그만 깜짝 놀랐지 말입니다."  결국 머슴은 사력을 다하여 예정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거다.  그러니 우리는 '운명'을 회피하려고 노력해봤자 소용이 없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상황'에 대하여 회피의 가능성이 없을때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그는 말하고 싶어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황에 대하여 속수무책일때 (가령, 갑자기 죽을병 선고를 받았을때, 갑자기 사고로 인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재난을 겪고 있을때, 구약의 욥과 같이 모든것을 잃고 괴로움에 빠졌을때, 그 재난에는 내 잘못도, 합리적인 원인도 그 무엇도 없을때. 내가 속수무책일때)  그때, 나의 자세에 대하여 - 저자는 바로 그때 삶의 의미를 들여다보고 방향을 잡으라는 조언을 하고 있다, 그의 경험에 의거하여.  그는 운좋게 살아남았지만, 설령 가스실에 끌려가 죽음을 당해야 했던 사람들중에도 성자들이 있었고, 선한 사람들이 있었고, 악당들이 있었다.  살아남을 운명이라 살아남았듯, 죽을 운명이라 죽었을 뿐이다. 그 운명에 어떤 설명을 기대해선 안된다.  이런 면에서 '운명'과 '우연'은 동일한 뜻으로 보인다.  그저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회피하건 환영하건 일은 무심하게 일어난다. 이 때 이것을 대하는 나의 자세만큼은 내가 선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 이유없이 수용소에 끌려와서 아무런 잘못도 없이 죽어가면서 한 소녀가 창밖에 간신히 보이는 밤나뭇가지를 매일 내다보는데 소녀는 나뭇가지가 말을 거는 듯한 상상에 빠진다, 나무는 이렇게 말한다고, "나 여기 있어. 나 여기있어. 나는 영원한 생명이야. 그러니까 너도 괜챦아." -- 언젠가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저자의 뜻을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삶이 고통스러운가? 이 책이 어떤 위로나 혹은 해법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좋은 책이다.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