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올듯 말듯 하더니 펑펑 오기도 하고 먼지처럼 흩뿌리기도 하면서 종일 온다. 창밖을 내다보니 많이 쌓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흰 눈이 길을 덮고 있다. 눈이 쌓이면 운전자에게는 힘들지만, 운전할 필요도 외출할 필요도, 농작물이나 하우스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는 그저 평온한 풍경일 뿐이다. 친구와 만나 점심을 먹기로 했다는 남편에게 "점심 드시고, 뒷산에 진도개 있는 집앞길을 지나 산책을 하시고, 그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따뜻한 차도 마시고 눈을 실컷 즐기고 오셔"하고 보냈는데, 정말 돌아오지 않고 있다. 즐거운 한 나절이 되기를...
나는 KBS FM을 배경음악으로 틀어놓고 - 지난 명절기간동안 (나흘간) 팽개쳐두었던 성경을 다시 붙잡고 필사를 하며 고요한 시간을 편안하게 보낸다. 눈오는날 '사우나'에 가면 온천에 간것 같겠다, 비록 눈오는 노천 온천은 아닐지라도... 그런 상상을 하며 동네 목욕탕에 갈까 망설이다가, 그것도 귀챦아서 집에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 입고 성경쓰기를 한가롭게 한다.
쓰고 있던 빨강펜이 다 닳아서 새것으로 교체하면서 - 여태까지 쓰고 모았던 펜 껍데기들을 한자리에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다. 12월 1일부터 성경필사를 시작하여 오늘 (1월 31일)에 이르기까지 2개월간 검정펜 11자루와 빨강펜 네자루를 다 썼구나. 성경필사공책도 지금 쓰고 있는 마가복음까지 마치면 다 쓰게 될것 같다. (이미 여벌로 2권을 배달시켜 놓았으므로 아무 걱정이 없다).
아래의 첫번째 사진은 서재에서 내다보이는 - 집의 뒷편 풍경이다. 멀리 산과 들판이 흰눈에 뿌옇게 보인다. 거실쪽 창으로는 구청앞 버스정거장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이 버스정거장 주위로 걷거나 서있는 모습이 작게 보인다. 정겨운 풍경이다. 남편은 이 눈속에서 절친과 눈 구경을 하고 있겠지.
하느님, 눈이 햇살에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지듯, 저의 근심, 제가 안고 있는 문제, 이러한 것들이 눈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질것을 믿습니다.
KBS FM에서는 오늘 대체로 장송곡과 같이 무겁고 어두운 음악을 주로 틀어대고 있다. 어제 일어난 포토맥강의 민간기-블랙호크 충돌로 67명이 하늘의 별이 된것을 애도하는 것인가? (이것은 나의 지나친 확대 해석인가?). 사람의 목숨이...한치 앞도 알수 없으므로, 크게 근심할일도 크게 자신할 일도 없다. 지금 살아서 숨쉬고 눈뜨고 눈구경을 할 수 있는 동안,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드리는것이 인간이 할 일이라...
* 유엔난민기구의 후원자가 되어 달라는 광고를 보고, '그래 후원해주지 뭐..'하고 웹으로 찾아서 들어갔는데 [후원하기] 클릭하면 - 후원에 대해서 뭐라뭐라 정보가 나온다. 그래서 후원하기 위해서 '아이디'를 만들어야 한다고 해서 '아이디 만들기'를 하려하면 -- 이름과 전화번호를 넣으라고 (다른 옵션으로 이메일도 있다) -- 그래도 인증하기 위해서 -- 아무리 이름과 전화번호를 넣고 '확인코드'를 받기 위해서 클릭을 해도 - 후원하고자하면 전화를 걸어서 담당자와 이야기를 하라는 메시지만 줄창 뜬다. 내가 여러단체를 후원했지만 이렇게 까다로운 단체는 처음이다. 내가 꼭 전화까지 해야해? 그냥 후원하겠다니까! 몇차례 '전화 안걸고' 후원하려고 시도하다가 포기했다. 나는 전화걸어서 담당자와 얘기하는 그게 장대높이뛰기의 장애물처럼 높게 여겨진다. 왜, 왜, 왜, 전화를 걸라고 하는거지? 다 인증이 되는 시대에 이렇게 구태의연하게 책상놀음을 하면 될까?
위 사진에서, 빨간 펜 끝이 가리키는 31절 - 예수님 말씀 부분. 빨간색 잉크로 인쇄되었어야 했다.
신약은 내 평생에 두번째 필사이다. 이번에는 번호도 꼼꼼하게 매기고, 예수님 말씀은 성경에서처럼 '빨간색펜'으로 적고 있다. 그러다보니 아주 사소한 편집상의 실수가 발견되는데, 마가복음 필사할때 아주 아주 사소해서 '실수 할수도 있겠다' 할만한 것들이 두세번 발견되었었다. 이를테면 "말씀중에" he said, "다시 말씀..." 이 경우에 말씀을 빨간색으로 설명은 검정색으로 표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냥 빨간처리를 한 것이 몇차례 발견되었었다. 그때는 그냥 지나쳤는데, 마가복음 6장 31절은 '대형사고'라 할만하다. 아예 예수님 말씀을 통째로 검정잉크로 처리를 했으므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보면 성경을 필사하는 것의 엄중함에 대하여 잘 그려지고 있다. 나도 그 소설 읽을때 -- 옛날에 인쇄기술이 미비하여 오로지 사람 손으로 성경을 필사하여 전하는 상황에서 필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의 책임을 심각하게 지키려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을 빨간잉크로 처리하기로 약속한 책에서 말씀을 검정으로 처리하다니! (중세시대 같았으면 목이 달아날 일일것이다. 하하하) 아가페 NIV 이다. 최신판.
마태복음까지는 매일 서너시간씩 성경필사를 하며 보냈고, 마가복음부터는 내가 할일들을 하면서 하루에 최소 '복음서 한장'씩 필사하고 있다. 지금 내게 성경은 나를 살아 숨쉬게 하는 유일한 안식처이다. 하느님이 지켜주실 것이다.
성경을 읽을때나 혹은 베껴적기를 할 때, 혹은 사람들과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때, 나는 베드로가 나오는 장면에 오래 머물며, 그에 대한 얘기를 할 때면 어린아이처럼 울먹이게 된다. 오랜 습관 같다. 아마도 2011년1월부터 그러했던 것 같다. 당시에 지홍이는 군대에 가있고, 남편 역시 귀국하여 한국에 있고 찬홍이와 나 단둘이 지내던 시기인데 - 나하고 동갑쟁이였던 제자가 '신년기도회'에 가자고 하여 난생처음으로 제자를 따라서 일박이일로 진행되었던 한국인교회의 기도회에 가게 되었다. 미국교회에서는 이런 행사를 안하므로, 제자를 따라 간 한국교회의 기도회가 꽤나 신기하고 흥미진진했었다. 저녁에 어느 '기도원' 강당에 모여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그리고나서 정해진 숙소에 가서 (호텔방 같은 숙소) 자고 아침에 다시 강당에 모여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오후에 이런 모든 행사를 마치면서 그제야 빵을 나눠주었다. (그러니까 어제 저녁부터 꼬박 금식을 하고 받아 먹는 빵이라서 - 그 하와이안 브레드라고 보통 식품점에서 파는 모닝빵 덩어리 - 꽤 맛있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기도회의 마지막 행사로 빵을 나눠줘서 그걸 먹으며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데, 목사님은 베드로와 예수님이 처음 만나는 장면을 이야기해주셨다. 대략 기억에 의거하여 옮겨보면 -- '베드로는 평생 어부로 산 선수란 말이지요. 그 베드로가 밤새 아무것도 못 잡고 돌아오는데 호숫가에서 웬 낯선 남자가 서서 물어요, "물고기를 많이 잡았소?" 지친 베드로가 "한마리도 못잡았소"하고 대답을 하지요. 그러니까 그 낯선 남자가 "배를 저리 돌려서 그물을 저쪽으로 내려보시오" 이런단 말야. 프로 어부 베드로로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란거죠. 그렇지만 베드로가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이 있어서 이 낯선 남자가 범상치 않아 보였던 모양이에요. 그래가지고 이렇게 대꾸합니다, "내 밤새 한마리도 못잡았지만, 댁이 그렇게 말을 하니 내가 그러면 한번 해보지요" 이게 무슨 말인가하면 - '내가 명색이 어부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거냐. 내가 밤새 한마리도 못잡은 고기를 여기서 어떻게 잡으라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마음을 바꾸고 "댁이 그렇게 말을 하니 내가 댁네의 말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져보겠소"라고 했단 것이지요. 이해하시겠어요 이대목? "말씀에 의지하여.."가 이런 맥락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가 거기 들어있더란 것이지요. 이때 베드로가 눈을 떠요. 베드로가 예수님의 범상치 않음을 바로 자각하고 곧바로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가 시작된거죠.
그때 목사님이 대략 이런 이야기를 아주 흥미진진하게 들려주셨는데, 그 얘기가 내 귀에 꽂혔다. 아마도 심장에 꽂힌듯 하다. 당시에 찬홍이가 운전면허 시험 준비를 하던 중이었는데, 매나서스 운전면허시험장까지 데려다주면서 내가 그 이야기를 찬홍이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내가 운전대를 잡은 채로 하이웨이에서 통곡을 했다. 찬홍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다 말고 이 대목에서 통곡을 했다. (찬홍이는 엄마가 원래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서, 늘 엉뚱한 짓을 하므로, 크게 개의치 않고 침묵을 지켜주었다. 그날 찬홍이는 운전면허시험에서 떨어졌다. 하하하.)
그날 이후로, 나는 성경을 읽다가, 쓰다가, 성경 이야기를 하다가,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 부분이 나오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흐른다.
오늘 성경을 쓰다가 내가 발견한 것은 --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어떤 면에서 -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의 대화 같다는 것이다. 사랑은 늘 나의 가슴을 뛰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던가. 아, 나는 사랑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아, 잊고 있었는데, 그 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내게 신비한 현상이 일어났었다. (어디에 사진을 찍어 놓은 것이 있으리라. 어느 파일 구석에). 기도회 모두 마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어'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돌아왔는데, 문득 내 왼손바닥에 붉은 십자가가 보였다. 나는 처음에 -- '내가 운전하면서 오다가 운전대를 너무 세게 잡아서 손바닥의 손금같은 것이 눌려서 벌겋게 된건가?' 이런 추측을 했다. 손바닥의 중심의 '명운'이라고 하는 굵고 선명한 손금을 중심으로 십자가모양으로 붉게 충혈이 되어 있었으므로. 어딘가에 눌린 자국이라고 추측을 했다. 그런데 그 붉은 십자가가 일주일 정도 그대로 그자리에 유지가 되었다. 내가 그 손바닥의 십자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모두들 신기해했다. 물감으로 칠한것도 아니므로 아무리 비누로 문질러 닦아도 지워지지 않았고, 분명 손바닥 투명한 피부 안쪽에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때 함께 일하던 우리학교 학장님이 그걸 보시고 '이런걸 스티그마 (stigma)라고 해요. 이런게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고 해요. 이교수 은혜 받았네! 밥사요!" (그래서 내가 학장님에게 밥을 샀다.) 하하하.
그게 정말로 기독교에서 일컬어지는 stigma (성흔)이라면 그게 왜 나같은 잡종 인간에게 나타난 것인지..는..잘 설명이 안된다. 어쨌거나, 하느님은 어쩌면 내가 상상하는 것 보다 더 가까이 내 곁에 계시는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살아보자.
새벽에 일어나 쉬엄 쉬엄 외출준비를 하고 여섯시에 출발하려고 밖을 내다보니 눈이 쌓여 있었다. 오늘 2025년 들어서 첫 예배라서 온라인으로 드리기 싫어서 송도에 가려고 생각했는데 - 눈이 계속내리고 있으니 어쩐다? 잠시 망설였지만 -- '내가 눈길을 헤치고 예배드리러 가는데, 하느님께서 알아서 다 살펴주시겠지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송도로 향했다. 텅빈 도로, 차창으로 날아오는 함박눈, 모두 '먼 낯선 나라를 여행하는 듯한 신비한' 풍경이었다.
송도 집에 도착하여 챙겨온 밥과 국으로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뜨거운 차도 한잔 마시고, 교회로 향했다. 주차장에도 차가 몇대 없었다. 쌓인 눈을 뽀드득뽀드득 밟으며 교회로 걷는 기분이 유쾌했다. 참 좋구나. 눈이 내리는 가운데 교회로 가는 발걸음이 - 달력속의 풍경화처럼 아름답구나.
입구에 서서 사람들을 맞이해주시던 부목사님들이 깜짝놀라시며 "이 눈길을 헤치고 오셨어요!" 하고 반가워하셨고, 목사님께서도 어디선가에서 나타나서 - 자리에 앉은 남편을 위해 안수기도를 해 주셨다. 장로님들도 권사님들도 일부러 다가와서 안부를 묻고 반가워하셨다. 우리 가족을 위하여 매일 매일 중보기도를 드려주시는 고마운 분들이다. 여기가 나의 집이다.
예배를 마치고 학교에 들렀다. 화단에 물을 준지 30여일쯤 된다. 그동안 목이 말랐겠다. 겨울에는 3-4주에 한번 물을 줘도 괜챦다지만 식물마다 물 먹는 주기가 조금씩 차이가 나고, 겨울철이라고 해도 학교건물에는 기본적인 난방이 계속 제공되기때문에 우리집보다도 따뜻하다. 물을 더 자주줘야 한다. 방학에 집으로 돌아간 동료 교수들이 갖다 놓은 화분들도 눈에 띄고. (식구가 일시적으로 늘어나는 계절이다.) 일단 물을 시원하게 뿌려주고, 시든 잎들을 정리해주고, 스킨답서스와 자주달개비 줄기들을 듬성듬성 잘라 담았다. 스킨답서스는 물에 담가 뿌리를 내린후에 화분에 심고, 자주달개비는 곧바로 잘라서 흙에 심으면 된다.
내가 물을 퍼다가 목마른 화분들에 물을 주는 동안, 남편은 시든가지를 정리하고, 화분 주변을 청소해주었다. 즐거운 화단정리. 본된 주일이다. 눈속을 달려 귀가.
2025년이 밝았다. 하느님 올 한해도 제가 광야에서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절망하지 않게 하시고, 온전히 무사히 주님께서 정하신 길을 따라 걷게 하소서.
[시편]에 이어, 결국 신약으로 왔다. 마태복음을 시작으로 신약을 쭈욱 걸어갈것이다. 예전에 2011년에 성경필사를 시작해서 2022년 말까지 구약 창세기-시편-신약을 한번 쓴적이 있다. 올 한해 신약을 다 베껴적을수 있을까? 뭐 길을 걷다보면 헤메기도 하겠고, 쉬기도 하겠지만 결국 어딘가에서 끝내겠지. 그래도 두번째 쓰기라고 - 나도 뭔가 이번에는 더 잘쓰자는 생각에, 예수님 말씀은 '빨간색'으로 쓰고 있다. 2011년에는 내가 성경을 잘 모를때 썼기때문에 쓰는 그 자체에 급급했었고 (그것만으로도 은혜였고) - 지금은 그래도 그때보다는 더 많이 알고 익숙하니까, 생각도 해가면서 내 식으로 해석도 해가면서. 오래된 연인들처럼.
신촌 연세암센터 3층 로비 (세브란스 본관과 암센타를 연결하는 입구의 로비)에 '김종학'씨의 그림이 나타났다. 2주전에 들렀을때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크리스마스 전후하여 이곳에 설치된 것으로 추측된다. 임시로 설치한 듯한 각목 받침대가 보이고, 아직 이 작품의 제목이나 작가, 그림소재를 알리는 이름표도 붙지 않았다. 대략 가로 2미터 세로 3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대작이다. 캔버스라고 보기엔 어딘가 허술하여 종이에 그린건가 싶기도 하고.
병원 안내부쓰 옆의 빈 벽에 설치되어있는데, 이 그림에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아마도 암센타의 속성상 위중한 질환과 관련하여 근심에 쌓여 오가는 분들이 다수일것이고, 사람을 치료하는 사람들이나 치료 받는 사람들이나 지친듯한 표정의 일상이므로 그림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수도 있겠다.
그래도 이 세상에는 '그림'에서 힘을 얻는 사람도 있는 법이고, 새벽에 이 작품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추운 겨울 아침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장작불처럼 거대하게 거기 있던 그림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쿵쿵 뛰고 온몸이 활활 불타듯 따뜻해졌다. 마법의 그림. 나는 이 그림앞에 한참 서서, 화가가 그려넣은 파란 잠자리와,거미와, 나비와 사슴벌레와, 내가 이름을 알아 맞출수 있는 꽃이름들을 하나 하나 소리내어 불러보았다. 나리꽃. 백일홍, 메꽃, 나팔꽃, 금강초롱... '설악산 화가'라는 별명처럼 설악산의 꽃으로 거대한 화폭을 가득 채우셨구나.
여엉 가고 싶지 않은 장소이지만 (누가 암센터를 가고 싶겠는가. 의사들 조차도 자신의 직장이 싫을것 같다), 그래서 그곳에 갈때 이 그림을 볼수 있다면 위로가 될 것이다. 최소한 '아 오늘은 김종학 화가의 그림을 보러가는 날'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는거니까.
이 그림이 임시로 왔다가 가는게 아니라, 그냥 여기 영구소장되길 빌어본다. 김종학 화백님 감사합니다!
12월 1일부터 성경 시편 (NIV) 필사를 시작하여 오늘 마쳤다. 이어서 다음편에는 어느편을 쓸지 오늘 생각해보겠다. 평균 하루에 두시간씩 쓴것 같다. 수성볼펜 여덟자루를 다 닳게 쓰고 반자루 정도 썼다. 처음부터 쿠팡에 이것을 한 50자루 한꺼번에 저렴하게 사서, 쓰다 떨어지면 새로 꺼내다 쓰고, 다 쓴것은 별도로 봉지에 담아 보관했다 (나중에 보려고).
시편을 쓰면서 발견한 것 몇가지는
일정한 어휘가 반복된다. 시편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어휘들은 : praise the lord, forever, rock, shield, stronghold, refuge, deliverer ...
Blessed are those who 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8복의 노래는 시편에 이미 존재하는 양식이었다. (아, 신약은 대체로 구약의 패턴이 그대로 옮겨진 것이구나.)
시편 119편에는 내가 모르는 기호들이 나타나는데, 찾아보니 그것이 히브리어의 알파벳에 해당되는 것들이었다. (말하자면 가....나...다...라... 이런식의 부제를 따라서 노래들이 나온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자료를 찾아보려고 한다)
시편을 필사하다보면 - 반복되는 찬양의 표현으로 인해서 어떤 '힘'을 체험할 수 있다. 신세한탄 하는 노래에서 나의 신세한탄이 떠오르고, 위로를 바라는 노래에서 나도 위로를 바라고 있으며, 찬양의 노래에서 그럼에도 나 역시 기쁜 노래를 부르게 된다. '말'이 내 안에 들어와 아궁이의 불을 지피듯 내 영혼에 불을 지피는 듯한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필사의 시간이 하루중 가장 속 편하고, 그야말로 안전지대로 몸을 숨기듯 자꾸만 책상앞에 앉아 끄적이게 된다. 나의 살 길을 찾은듯한 기분이 든다. Praise the Lord.
....
내가 시편을 필사하면서 체험했던 신비로운 경험 사례들과 새로 발견된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니 - 모든 것을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남편이 -- "아 그런것 자세히 알려면 온라인에 좋은 논문이나 자료들 많아 성경관련해서 좋은 자료 많아" 하고 아는체를 했다. 그래서 내가 진지하게 대답해주었다,
"물로 나도 알지, 내가 성경을 옮겨적으며 때로 이해가 잘 안되는 구절이나 구조, 혹은 새로운 발견에 대하여 좀더 깊이있게 이해하기위해서 구글 몇겹 들어가보면 차고 넘치는게 좋은 자료라는 것을. 그런데 말씀이야. 그것은 나하고 지능이 똑같은 내 수준의 사람들이 자기가 먹고 소화시키고 게워낸 것을 내가 가서 핥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요. 다른 잡다한 지식은 그렇게 접근해서 얻는게 많지만, 성경 만큼은 -- 내 '몸'으로 만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이건 '교제'하는거 같은거야. 내가 어떤 사람과 교제하고 서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직접 만나야 하는거지. 나는 내가 교제하고 사랑하고 섹스를 나누고 싶은 사람을 티브이나 넷플릭스나 다른 사람들의 논평을 통해서 들여다보고 싶지가 않아요. 나는 그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나누며 음성을 즐기고, 손을 만지며 체온을 나누고 이렇게 전신으로 입체적으로 성경을 만나고 싶은거야. 남이 그와 나 사이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가 않아요. 꼭 필요할때, 그때 참고자료를 볼 수는 있지만, 그건 꼭 필요할때 뿐이야. 하느님은 논문속에 있는 존재가 아니거든. 당신이 백날을 성경 논문을 들여다보라고 거기 하느님이 계시는가..." 물론 성경속에만 하느님이 계시는 것은 아니지, 문맹이라 평생 성경을 못 읽는 이라도 믿음으로 하느님께 다가갈수 있는거니까. 하지만, 성경을 통해서도 하느님을 만날수 있는거고, 나는 하느님의 말씀이 적혀있는 성경 속으로 들어가서 그 원시림 속에서 그분과 교제하는 중이야 지금. 나의 방식으로 그분과 교제중이라는 것이지. 그런 교제에 남이 소화시킨 배설물이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어요. 나는 날것의 하느님을 가장 좋아해요."
몇 해전, 매주 금요일마다 동료교수들과 두시간씩 '글쓰기'시간을 가졌을때 대충대충 엮었던 책의 원고를 국내의 십여개가 넘는 출판사에 보냈을때 나는 번번히 퇴짜를 맞았는데, 마침내 어느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마침 편집자가 바로 그 주제의 책을 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이디어가 맞는 원고라는 것이다. 그래서 계약을 하고, 수정하거나 다시 쓰거나 하면서 몇년을 보냈다. 코비드가 왔다 가는 사이에 계속해서 수정 보완을 하면서, 지난주에는 맺음말을 보내라고 하더니, 오늘은 책 날개에 실을 저자 약력을 직접 쓰라는 숙제가 와서 그것도 써보냈다. 책은 언제 세상 빛을 보려는가? 크리스마스 이후가 되려나? 아니면 2025년 새해맞이로? 뭐 가장 좋은 때에 나오겠지.
그런데 사실 2주 쯤 전에 다음에 나올 책에 대한 계약도 이루어졌다. 지난번에는 원고를 수백페이지 써서 여기저기 뿌리고 거절당하기를 밥먹듯 하다가 계약이 성사되었다면, 이번에는 아직 '원고' 한글자 쓰지 않았는데 - 단순히 '네 머릿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 내길 바래'라는 메시지의 계약서였다. 계약서에 싸인을 했고, 돈도 받았으니, 이제 글을 써야한다. 그래도 내 평생에 - 중학교때부터 방송국에 글 써보내고 상품권 받거나, 대학교때부터 학교 신문이나 교지 이런데 투고하여 원고료 짭짤히 챙기고 하면서 늘 글 쓴후에 글값 받았는데 -- 이번에는 글을 쓰기전에 글값을 미리 받으니 내 형편이 그래도 제법 많이 좋아진것도 같아서 잠시 흐뭇했다. 글을 써서 돈을 받는 일을 하던 가운데 - 이제 선금을 받는 팔자가 되었으니 일취월장 아니던가. 에라 좋구나.
그런데 전에는 글을 써서 보내고 그 글이 소개가 될까, 신문에 실릴까, 책에 실릴까, 출판을 해 줄까 뭐 그런 기다림의 시간을 보냈는데, 요즘은 '아이고 이거 덜컥 쓰겠다고 계약하고 내가 글을 못쓰면 어떻게 되는거지?' 이런 근심을 할 때가 많다. 길을 걸으면서, 운전을 하면서, 설겆이를 하면서, 샤워를 하다가, 청소기를 돌리다가도 멍하니 그 책 생각을 한다. 이걸 못쓰면 어떻게 하지? 응? 처음 느껴보는 새로운 종류의 두려움이다. 그 가운데 나는 성경필사만 줄창 하고 있다.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고 피난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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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네살 때, 시골집 사랑방에서 둘째, 셋째, 넷째 고모들이 책상 주위에 모여서 호롱불에 의지하여 책을 읽거나, 숙제를 하며 이따금 우스개 소리를 하고 왁자지껄 웃기도 할때, 내가 중학생이던 막내고모 어깨너머로 "글씨 쓰기 가르쳐줘"하고 조르던 생각이 난다. 고모가 16절지 누런 종이에 가나다라 이런것을 써주면, 내가 그것을 따라 쓰면서 한글을 떼었다. 그러니까 내게 한글을 가르쳐준이들은 내 고모들이었다. 나는 너무나 심심한 나머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집갈 준비를 하던 둘째 고모와, 당시 중학생이던 셋째, 넷째 고모들이 돌려 읽던 시집이며 소설책이며, 교과서들을 떠듬떠듬 읽어나갔다. 너무나 무료하고 심심했던 나머지. 나는 뜻도 모르고 '의적 일지매'를 읽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채 글씨들을 해독하는 재미로.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위해 서울의 가족과 합류했을때, 엄마는 시골서 데리고 온 작은 딸아이가 얼굴도 더럽고, 머리도 떡지고, 손등은 다 터지고, 사람과 들짐승 사이의 경계가 애매한 수상쩍은 몰골일지언정 길거리 간판을 소리내어 읽으며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의기양양해 하셨다. (서울에 올라오니 온거리에 읽을것 투성이라서, 그리고 그것을 읽을때마다 엄마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고 나도 잠시나마 기를 펼수 있었다.)
서울집은 시골집보다 문화적으로 더욱 궁핍해보였다. 단칸방에서 여섯식구가 기역니은 이리저리 포개서 잠을 자야 했으므로. 장난감도 없고, 산과 들도 없고, 새도 꽃도 없고, 강아지도 없고, 나는 숫기도 없어서 이웃아이들과 쉽게 친해질수 없었고, 온종일 방구석 신세였다. 그 당시에 나의 유일한 읽기책은 '엄마의 일기장'이었다. 나는 대체로 신세한탄으로 일관된 엄마의 일기장을 읽고 또 읽었는데, 그 외에 다른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 역시 애들이 일기장을 보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 식목일즈음. 비가 주룩주룩 오던날. 나는 너무나 심심한 나머지 종이를 반절을 접어서 실로 꿰메어 '공책'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책에 이야기를 쓰고 그림을 그려넣었다. 만화도 그려넣었다. 그것이 내가 제작한 최초의 책이었다. 그 후로 고등학교를 마칠때까지 나는 그런 짓을 꽤 했다. 어릴때는 직접 공책을 만들어서 내용을 잔뜩 채웠지만, 형편이 나아지고 용돈이 제법 생기면서 나는 예쁜 공책들을 사다가 좋아하는 시를 옮겨적고 그림을 그리고 장식하고 그러면서 노닥거렸다. 내가 꾸민 그런 '명시집'같은 것들은 결혼하여 애엄마가 된 셋째, 넷째 고모가 예쁘다며 달라고 했고, 나는 이미 그것을 완성할 즈음에는 그것에 싫증이 났기 때문에 누가 달라고 하면 기꺼이 그것들을 내주었다. 일기장들은 일년에 한두번씩 뒷마당에서 태워없앴다. (뭔가 그게 멋있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그 일을 반복했다.) 그래서 내게는 남아있는 일기장이 없다. 딱 두권의 일기장이 미국집에 있는데, 지홍이 찬홍이의 육아일기. 그것들이 남아있다.
그러니까, 내가 한글을 호롱불 밑에서 고모들에게 배운 이래로 나는 늘 연필을 손에 쥐고 살아왔고, 나는 글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거다. 그래서, 나는 멈추지 않고 글을 쓰고 쓰고 쓸것이다.
넷플릭스에서 본 영화로 2017년 출시작이다. 어딘가 자폐적으로 보이는, 평생을 사회정의구현을 위해 헌신한 - 커튼뒤의 '인권변호사'였던 로만. 영화 중반이 지나가도록 그의 모든 행동거지가 나를 짜증나게 했는데, 나는 그가 '덴젤 워싱턴'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만큼 덴젤 워싱턴이 연기한 인물 자체에 그대로 빠져들었던 것인지도 모르는데, 사실 영화 중반까지 부엌을 왔다갔다 하면서, 빨래를 거실에 널어가면서, 운동용 자전거에 올라 앉아 운동을 해가면서 그냥 대충대충 볼 정도로 영화에 대한 몰입감도 없었다. 그러다가 중반부터 화면에 몰입하게 되었으리라. 로만은 보통사람이 보기에는 그냥 짜증나는 '찐따'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장점을 꿰뚫어보는 똑똑한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만약에 현실에서 로만같은 사람이 내 근처에 있다면 - 나는 그 사람을 답답해하고 슬슬 피했을것이고, 그러므로 그 역시 나를 좋아하지 않았을것이다. 대체로 나를 짜증나게 하는 인간형이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을 눈여겨 보기 시작한 것은, 그가 길에서 노숙자가 죽어있었을때 - 경찰들이 그 시체를 아무렇게나 다루려고 할때 시체의 가슴에 그의 명함을 넣어두고 집요하게 경찰과 대치하던 장면부터였다. '그는 아무나가 아니야. 그도 어떤 사람이었어. 내가 장례비를 치를테니까 그를 무연고자로 태워버리지 말란말야.' 그가 이렇게 경찰과 대치하는 사이에 죽은것 같았던 노숙인이 부시럭거리고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현장을 떠나버리고 경찰과 로만의 대치도 그것으로 종결된다. ---> 지금 생각해보니, 이 장면 -- 죽은자를 살린것은 로만의 '인간애'였던것이 아닐까? 작가이며 감독이었던 사람은 그런 의도로 이 장면을 만든것은 아닐까?
아, 저 짜증나게 답답한 저사람이 정말 착한 사람이구나... 그래서 그 영화를 집중해서 보게 되었다.
로만이 십만달러를 벌어가지고 해변으로 갔을때, 바다에서 혼자 즐길때, 나는 내심 '영화가 그냥 저기서 끝났으면 좋겠다' 하고 간절히 바랬다. 그냥 저렇게 평생 답답하게 사회정의를 위해서 살아온 사람에게도 저런 뜻밖의 행운이 찾아오고 즐거웠으면 좋겠다 하고 간절히 그를 응원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영화는 우리가 원하는 장면에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잠깐의 행운/행복은 거품처럼 사라지고, 그는 스스로가 피고가 되고 스스로가 원고가 되어 자신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글을 쓴다. 그는 회개하고 자신의 과오를 되돌리려 최선을 다한다. 그의 마지막 독백은 (기억에 의거하여 정리해보자면) -- 우리가 평생을 바쳐서 정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나 실수를 저지르고 과오를 범할수 있는데, 그럼에도 과오를 저지른 우리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되돌이켜야 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작은 과오는 용서받을수 있다 -- 대략 이런 내용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고발하고 그럼으로써 나는 용서받을수 있다 뭐 그런 거다. 영화 마지막 대사를 다시 돌려봐야 하려나?
나는 문득 '노회찬'씨를 떠올렸다. 그가 왜 죽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가 무슨 명백한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는 뭔가 과오를 저질렀을수 있다. 하지만 그의 과오가 그의 목숨만큼 커다란 과오였을까? 사형선고를 받을 만큼의 과오였을까? 시절이 수상할때마다, 나는 그를 떠올린다. 그가 살아있다면 지금 그는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가끔 문득 문득 그리워지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노회찬씨가 그 몇안되는 사람들중 한사람이다.
로만은 법의 엄중함을 알고, 그 법의 잣대를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하여 스스로를 고발하였다. 비록 실수를 저질렀으나 그는 그의 과오를 바로잡으려 애썼다. 우리나라에서 법 잘아는 사람들, 검사들, 그들이 그들의 잣대를 그들 스스로에게 적용한다면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지는 않겠지. 우리나라 사법연수원에서 틀어줘야 할 영화라는 생각도 잠시 했다. 물론 나의 도덕성에 대하여도 역시 ...할말이 없다....
오랫만에 제대로 된 좋은 영화를 봐서 리뷰를 남겨본다. (영화 다섯편 리뷰하는 세션하나 만들까 생각해봤다. 사회정의와 관련된 잘 만들어진 영화 다섯편을 선정하여...)
위 이미지는 내 머릿속의 '골목길'을 검색하여, 가장 비슷한 것을 빌려온 것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서,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던 나는 이런 골목길에서 성장했다. 집들이 있고,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에는 가게들이 즐비하고, 드문드문 주택과 상점이 뒤섞여 있는 그런 곳 말이다. 주택의 일부를 가겟방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집과 가게가 뒤섞여 있는.
대체로 도시생활이 아파트 거주로 바뀌면서 - 아파트 상가나 혹은 상가거리외에 집과 가게들이 뒤섞여 있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물론 지금도 지방 중소도시에 가면 그런 풍경들이 남아있으련만, 내가 현재 거주하는 인천 송도나 고양시 모두 아파트, 상가, 빌딩, 도로 뭐 이런 식의 구획이 분명하다. '사람의 집'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가게'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사람들이 살고, 상점들도 있지만 - 내 머릿속의 사람의 '집'과 사람의 '가게'를 현실에서 찾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도 용인의 고향땅에서 농사 짓는 일에 싫증이 나셨는지, '외도'를 몇년간 하신적이 있다. 수원의 원천호수 근처 마을에서 '가게'를 여셨다. 그 가게라는 것이, 호숫 입구 마을의 마당있는 보통 집이었는데, 원천 유원지 입구이고, 버스정거장도 바로 집앞에 있는지라, 그냥 보통 마당있는 집의 마루에 '물건'을 진열하여 팔기 시작하셨는데,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그 마루를 개조한 가게의 수입이 짤짤해지고, 그러면서 판매되는 물건의 종류도 점점 다양해지고, 뭐 간판을 달지도 않았지만, 그 가게를 하면서 두분이 수원바닥의 돈을 쓸어 모았다는 얘기도 있고, 어쨌거나 한재산 모으셨으리라. 개울건너 밭건너에 '선경직물' 공장과, '삼성전자' 공장이 그 당시 지어지고 있었고, 이어서 그곳에서 일하는 '공장 직원'들이 빵이나 사탕, 사이다를 사 먹을데가 우리집 밖에 없었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 이다. 상가도 상점도 무엇도 아닌, 그냥 마당있는 집 마루에 대충 만든 가게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내 머릿속에 뿌리내린 '가게'의 이미지는 그런 것이다. 사람의 집과 사람의 상점이 결합된. 그런것들은 새들이 멸종하고, 식물이 멸종하듯이 멸종되는 중이리라.
그런데, 오랫동안 남에게 빌려줬던 고양시의 내 집으로 이십여년만에 철새처럼 돌아온 요즘, 바로 내 집 근처에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우리집에서 길을 건너면 구청이다. 우리집 베란다에서는 구청의 마당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내가 원한다면 구청장님과 구청직원들이 출퇴근하는 것도 '감시'할수 있다. 집 앞에서 건널목을 건너면 구청담을 끼고 산책을 할수 있는데, 구청 담을 끼고 조금 걷다가 길을 건너면, 상가건물 사이로 '차의 통행이 금지된 구역'이 나온다. 거기서부터 대략 500미터 정도 되는 길의 양 옆으로 각종 가게들이 있다. 오늘 오후에 내가 산책을 나가서 들렀던 가게들을 저 끝에서부터 되뇌어 보자. 길의 끝까지 갔다가 집쪽으로 차례차례 되돌아 오며 가게를 들르는 것이다.
정말 '구멍가게'라고 할만한 자그마한 '구멍' 혹은 '굴'같은 도넛가게가 있다. 거기서 나는 모짜렐라 치즈볼을 4개에 오천원을 주고 샀다. 그집 꽈배기도 맛있지만, 나는 새로 발견한 치즈볼에 재미가 들려서 그걸 산다. 딱 한개만 먹으면 되는데 왜 네개를 사느냐하면 - 그냥 오천원 내는게 편해서 그렇다. (나이 먹은 사람이 잔돈 주고 받고 하는게 어쩐지 미안해서. 그정도 여유는 있으니까. 그렇게 작은 가게에서 크레딧카드 쓰는것도 어딘가 미안해서 꼭 현금으로.)
도넛가게 맞은편에 떡볶이, 어묵, 각종 튀김 그런것 파는 역시 작은 가게가 있다. 일전에 군대 제대한 조카가 온다고 해서, 조카 주려고 그집에서 떡볶이를 산 적이 있다. 오천원어치 샀는데, 조카와 둘이 1/3 정도 먹고, 나머지 2/3는 아직 냉장고에 있다. 나중에 먹을 것이다. 오늘은 그 집에서 튀김 오천원어치를 샀다. 튀김 한개에 800원이라고 해서, 그냥 오천원어치 달라고 했더니 일곱개를 준다. 오늘 한개 먹었다. 나머지는,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생각날때 꺼내 먹어야지. 나이 먹으면 먹는 양이 줄어든다. 생각같이 많이 먹지를 못한다.
몇 집 내려와서, 손두부 가게에서 - 사장님이 오늘 만들었다는 두부 두모를 샀다. (한개 오천원, 두개 만원). 그런데 사장님이 직접 만들었다는 누릉지도 있길래 그것은 한봉지 육천원에 샀다. 비상식으러 뒀다가, 출출하고 뭔가 뜨끈한 숭늉이 먹고 싶을때 끓여먹어야지.
길가에서 할아버지 한분이 이것저것 늘어놓고 농산물을 파시길래 감자를 한봉지 샀다. 역시 현금 오천원.
내가 고양시 집에 오면 반드시 가는 과일가게가 그 골목에 있다. 그 과일가게에서는 진열한 여러가지 과일중에 귤이 있는데, 참 이상하다. 큰 귤은 한바구니에 칠천원이고, 작은 귤을 한바구니에 만원이다. 전에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과일가게 사장님에게 물어봤다, "그런데 저것은 작은데 왜 더비싸요?" 나는 큰귤을 좋아한다. 과일사장님 왈, "원래 귤은 작은게 더 비싸요. 작은게 더 달고 맛있거든요." 어라..어라..난 큰 귤이 더 시원하고 맛있던데요? 과일사징님 왈, "그렇더라구요. 큰귤 좋아하는 분들은 작은귤 싫어하고, 작은귤 좋아하는 분들은 큰귤 싱겁대요." 나는 큰귤파다. 큰귤이 더 싸니 더 좋지 (원래 내 입맛이 저렴해요).
골목의 끝에 **생협이 있다. 사실 나는 생협이 뭔지도 모르는데, 살림의 여왕인 내 친구가 "너 생협에 멤버십 가입하고, 거기서 좋은거 사다 먹어라"하고 알려줘서, 친구가 이르는대로 멤버십가입하고 일주일에 한번은 들른다. 집에 올때마다 한번은 들르는 셈이다. 오늘은 거기서 콩나물, 쑥갗, 그리고 통영굴을 한통 샀다.
생협 맞은편에 '반찬가게'가 있다. 다섯개에 만원. 다섯개의 작은 팩에 들은 여러가지 반찬을 골라담았다. 시래기나물 두팩, 멸치볶음 두팩, 그리고 파래무침 하나.
물론 이 외에도 이 골목에는 빵집에 몇군데 있고, 남자 머리 깎는 미장원도 두군데 있고, 일반 미용실도 몇군데 있고, 여성 맞춤옷 만드는 그 옛날식 양장점 (기성복이 아니라 몸에 못 맞추는 그런것 말이다)도 두군데나 있고, 꽃집도 있고, 문방구, 김밥집, 떡집, 커피집...다음에 산책가면 입구부터 하나하나 기록을 해 볼까보다.
홈플러스나 뭐 롯데마트나 이마트를 갔다면, 나는 그 '마트'에서 이런 것들을 '카트'에 담고 한꺼번에 계산을 했겠지. 하지만, 그 가게골목에서 나는 일곱개의 가게에 들러서 일곱명의 가게 주인/점원과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주고 받고, 봉지, 봉지, 조롱 조롱 내게 필요한 먹을 거리들을 샀다. 봉지 봉지 조롱 조롱. 그중에서 무겁고 부피가 큰것은 시장가방에 담고, 찌그러지면 안되는 것은 따로 들고, 조롱 조롱. 우리 동네에 이런 가게 골목이 있다. 그래서 나는 우리 동네가 아주 맘에 든다.
2주 전에 노란 은행잎 빛깔로 물들었던 연세 백양로의 나무들은 이제 잎을 떨구고 겨울 휴식으로 들어서는 풍경이었다.
평소대로 오전 6시에 집을 나섰다. 네비게이터는 40분 후에 신촌에 도착할거라고 알려주었다. 길은 막힘없이 순하게 잘 흘러가고 있었는데, 운전을 시작한지 10여분이 흐른 후에 운전석 대쉬보드에 '타이어'에 문제가 있다는 표시등이 들어오더니, 이어서 타이어가 앞 뒤 모두 공기압이 떨어져있으니 점검하라는 좀더 상세한 메시지가 뜬다. 아마도 기온이 내려가니까 타이어 공기압이 줄어서 그런거 아닐까? 미국에서는 도로를 달리다가 이런 표시가 뜨면 근처 주유소에 들러서, 주유소 구석에 반드시 있는 공기주입기로 직접 공기를 넣어주면 되지만, 한국의 주유소에는 코인 공기주입기가 없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본적이 없다.) 살살 운전을 하면서 생각을 굴리다가, 일단 주유도 해야 하니까 근처 주유소에 차를 세우고 타이어 점검을 해보기로 했다.
수색 못미처서 (고양시와 수색 경계쯤 되는 곳) 전에도 새벽에 들렀던 그 주유소에 들어서니 어딘가에서 주유해주시는 아저씨가 나타나셨다. 나는 셀프 주유를 하려고 문을 열고 나선참이라서 아저씨가 주유를 하는 동안 차를 둘어보며 발로 쿵쿵 타이어를 쳐보기도 하고, 내 식으로 타이어 점검을 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타이어 표시가 떴는데, 어디서 공기를 넣죠, 이 새벽에?" 나 혼자 타이어를 발로 쿵쿵 치면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주유하던 아저씨가 흘려듣지 않고 대꾸했다,, "왜요? 차에 타이어표시 들어왔어요?"
그: 그러면, 주유 다 끝났으니까, 차를 저 구석으로 빼 놓고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이 형님이 오시면 되는데...
나: (차를 주유소 구석으로 빼 놓음)
그: 여기 계시면 우리 형님이 오실거예요. 그러면 형님이 봐주실겁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한 5분쯤 후에 새벽 어둠 속에서 또 한 사나이가 다가왔다. 그는 한구석 창소에서 공기주입기에서 연결된 호스를 가져다가 내 차의 네개의 타이어를 하나씩 점검하며 공기를 넣어주었다.
그2: 겨울에는 공기압이 줄어서 이런 일이 생기죠. 일단 임시방편으로 공기 맞춰 놓았으니까, 만약에 또다시 타이어 표시가 뜨면 그땐 어딘가 빵꾸가 났을지도 모르니까 자주 다니시는 카센타 가셔서 점검 받아보세요.
그1과 그2는 조심해서 무사히 목적지까지 잘 가시라는 덕담과 함께 나를 그냥 보내려했고, 나는 '커피'라도 사 드시라며 인사를 챙겼다. 극구 사양하던 그분들이 내 작은 선물을 받으며 훈훈하게 웃으셨다. 이분들이 새벽에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내 오늘 하루는 훨씬 더 고단했을것이다.
(추신) '휴대용 자동차 공기주입기'를 언라인으로 검색하여, 그중에서 평이 좋고 가격이 높은 (싼게 비지떡이라, 뭔가 잘 모를땐 가격 높은걸 고른다) 것으로 주문을 했다. 차에 갖고 다니다가 '타이어' 표시등 들어오면 당황하지 말고 내가 직접 손봐야지.
"내가 암에 걸렸지 정신병에 걸린줄 알아?"
복도에서 갑자기 쩌렁쩌렁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부터 모든것은 내가 '귀'로만 들은 내용이다.
온동네가 시끄럽자 마침내 그의 담당간호사였던 사람의 목소리가 등장했다. 노신사는 일부러 그 근처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들으라는 듯이 호령을 해 댔는데, 그의 큰 목소리덕분에 문제의 본말을 대체로 (주로 그의 시각에서) 주워들을수 있었다.
문제는, 항암치료를 받으러 온 그는, 자신이 항암제를 제대로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항암치료 다 끝났으니 이제 귀가하셔도 됩니다'라는 메시지를 듣고 황당해진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제대로 처방을 받고 주사를 맞은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했다. 마침내 소환된 간호사는 '제가 아까 모두 설명 드렸습니다' 하는 입장이고, 화가 난 노신사는 '당신이 언제 나한테 설명을 했다고 그래? 왜 거짓말을 쳐? 나한테 제대로 설명 안했쟎아. 왜 나한테 설명안하고 마치 내가 못알아들은것처럼 얘기하는거지?' 이런 입장이었다.
이때, 이 노신사가 분기탱천하여 했던 한마디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암에 걸렸지, 정신병에 걸린줄 알아?"
결국 해당 간호사가 '제가 정확히 설명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처방대로 주사 모두 맞으셨고요, 보호자님께 설명 드렸고요, 보호자님도 인정하시고요. 저의 실수에 대하여 사과드립니다. 오늘 주사 모두 끝나셨습니다.' 이렇게 설명과 사과를 나붓나붓 하는 것으로 이 소동은 끝이났다.
그냥 어느 한구석에서 이 소동을 귀로만 듣는 내 입장에서는 노신사가 약간 히스테리컬한 면도 있었고 (그 부인은 쩔쩔매는 말투였다), 아마도 어딜가나 저렇게 장군처럼 당당하게 자기 하고 싶은 말씀은 결국 하시는 분인것도 같고, 대체로 좋은 인상을 주기는 힘들었지만 그가 했던 한마디는 두고두고 곰곰 생각하게 했다. "내가 암에 걸렸지, 정신병에 걸린줄 알아?"
'환자'는 우리가 종종 잊고 있지만, 이 사회에서 '약자'에 속한다. 그들은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 그들이 신경질을 내면 - 환자로서의 히스테리로 보기도 쉽다. 몸이 아프기때문에 짜증을 내는 면도 있겠지만, 환자라는 이유로 어쩌면 무시당하고, 바보취급 당할수도 있을 것이다.
비명
테이크아웃으로 음식을 주문해놓고, 식당 벽에 기대서서 기다리는 동안 내 눈에 들어온 광경이다. 마침 점심시간이라서 직원과 방문객들로 장터처럼 붐비던 그 구내식당. 나는 벽에 기대서서 기다렸다가 음식을 들고 나가면 그만이었지만, 자리가 필요한 사람들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빈자리를 찾고 있었다.
평소에 그곳은 주문대에 서있던 식당 직원이 노약자들에게 마땅한 좌석을 찾아 안내를 하기도 하는데, 가끔 그런 광경들을 발견하면 그분들이 천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우연히 내 눈안에 들어온 광경: 한 젊은 여성이 입구 가운데 서서 홀 안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 두리번두리번 하는 사이에 카운터 직원이 그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나가서 기다려주세요." 젊은 여성은 그 말을 듣고, 입구에서 밖으로 사라졌고, 마침 그의 어머니인듯한 노부인이 그를 뒤쫒아 나서며, "저기 자리 네개 맡아놨다. 먹고 가자!" 외쳤고 - 이미 기분이 나빠진 젊은 여성은 노부인을 끌고 나갔고, 노부인의 뒤를 이어서 아파보이는 노신사도 영문을 모르는채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주문한 테이크아웃을 받으러 갔다 오니 식당입구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내가, 나갈줄 몰라서 거기서 나가라고 하는거에요? 내가 그런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보여요? 우리 아버지 오늘 항암받으러 오셔서, 뭐라도 드시게 하려고 자리 찾고 있었던건데 나가서 기다리라고요? 여기 나가서 기다리는 시스템이라도 있어요? 여기 병원 식당이면, 여기 오는 사람들의 기분이 어떤지는 아실거 아니에요? 지금 이것을 안내라고 하는거에요?" 해당직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대체로 상대가 흥분을 가라앉히기를 기다리며 사과하고 달래는 중이리라.
내게는 그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외마디 비명처럼 들렸다, '나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누군가 나를 좀 위로해줘. 내게는 늙으신 부모님이 계시고, 우리 아빠는 말기암환자야.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받으시는 중이야. 너무나 딱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는 비명같은것. 그것을 비명으로 듣는다면 - 그 카운터 직원도 칼과 같은 그의 말에 다치기보다는 공감하고 그리고 위로의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있는대로 화를 내는 그 젊은 여성에게 다가가 등을 토닥이며 - 괜챦아, 다 괜챦아질거야 - 뭐 이런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미소
그곳에 가면, 나는 의식적으로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때마다 방긋 웃어준다. 평소에 내가 밝게 미소를 지으면 사람들은 내 미소가 멋있다고 말한다. 그걸 기억해내고, 그곳에 가면 나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쩌다 눈이 마주친 사람들에게 그 멋있는 미소를 보내려 애쓴다. 오늘도 누군가가 "9번이 어디지..."하고 두리번 거리길래 "저기에요"라고 손가락으로 정확히 가리키며 환하게 미소를 보냈다. 항암치료를 받으러 온 그 창백하고 마른 사나이는 내 미소에 화답하듯 밝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이구 가르져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곳에 가면, 그냥 단지 미소만 보냈을뿐인데도 사람들은 고마워하고 인정의 꽃같은 미소로 화답하곤 한다.
그래, 우리 이렇게 살다가 내일 마른꽃처럼 진다고 해도, 오늘은 인정의 꽃을 활짝활짝 피우며 순간을 화려하게 사는거다. 웃는거다.
기말이 다가오고 있다. 기말 프로젝트 제출 시한이 다가오고 있고, 기말 제출 이전에 '드래프트'를 제출하고 심사를 받는 기간이다. 그 '초안 (드래프트)'에 이러저러하게 고치고 보충하라는 피드백을 주는것이 교수에게는 아주 중요하고 골치아픈 과제이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과제를 하느라 죽을 고생을 한다고 상상하는데,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들은 하나만 하면 되지만, 가르치는 나는 이걸 수십명 분을 들여다봐야 한다구! 내가 더 중노동이라구!"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학생이 과제하다가 몸살을 겪을때 - 그 과제를 들여다보고 피드백을 적절히 줘야 하는 교수는 피드백 주다가 응급실에 실려간다. 그래서 기말이 되면 학교 전체가 조금씩 미쳐가는것도 같다. 학생들도 피로에 쩔은 얼굴이고, 교수들도 넋이 나간 사람들처럼 허둥지둥 돌아다닌다. 우리 모두 힘든 산을 함께 넘는 것이다.
내 수업을 두가지를 수강하는 학생이 있다. 참 착실하고, 의지가 되는 학생이다. 아침 9시 수업을 학생들이 회피하고, 지각을 하고 그러는 편인데 이 학생은 내가 오전 8:40 쯤에 강의실에 도착하면 이미 와 앉아있다. 이른 아침 빈 강의실에 불도 안키고 조용히 앉아 있다. 뭘 하는지 모르지만 늘 일정하게 그자리에 같은 표정으로 앉아있다. 그래서 컴퓨터를 켜고 수업 세팅을 하면서 그와 이런 저런 대화를 하곤 한다. 참 좋은 사람이다. 오후에 진행되는 다른 수업에서도 그는 성실하고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해 나간다. 그 학생이라면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모든 과제를 무난하게 잘 해낸다.
그런데, 이 학생이 '연구 논문쓰기' 관련 수업에서 뭔가 이상 증세를 보였다. 기말 연구논문 제출 전에 '초안'을 제출하라는 과제에 엉뚱한 초안을 제출했다. 그동안 배우고 익힌 연구 논문 구조와 거기에 담을 내용 전체를 싸그리 무시한 제멋대로 아무거나 담겨있는 초안이었다. 나는 몇번이나, '이것이 우리 000이가 제출한 초안이란 말인가?' 컴퓨터를 확인 또 확인해야 했다. 나로서는 믿기지 않는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뭐 이러저러하게 잡다한 피드백을 덧붙이면서 맨 마지막에 별도로 개인적인 메시지를 추가했다 -- "There's something wrong going on with you. I think we need to talk."
오늘 아침에, 역시 일찍 나온 그와 빈 교실에서 수업 세팅을 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농담하듯이 물었다, "Hey, what's going on with you? Any family issue or girl friend trouble? Your draft is telling me something... I guess you have something to tell me..."
수업은 순조럽게, 활기차고 유쾌하게 지나갔다. 학생들이 모두 떠난 빈교실에서 내가 교실 컴퓨터를 끄면서 마무리를 하고 있을때 그가 다가왔다. '지난 주에는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까마득해요. 교수님 수업 뿐 아니라 다른 수업들도 엉망이었어요. 사실은 동생이 큰 사고를 당해서, 온 가족이 모두 정신이 없었어요...'
그랬다. 사고였다. 뭔가 이상했다. 감기에 걸리면 기침을 하고 그걸 주위 사람들이 알듯이, 학생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학생은 어떤 식으로든 '기침'처럼 신호를 보내고, 우리는 감지한다. 구체적인 내용을 모를 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의기소침해진 등을 툭툭 쳐서 위로를 하고, 이 위기 상황에 어떻게 학기를 잘 마무리 할지 의논을 한다.
어제, 연세대 심리학과 김민식 교수의 '더 컨트롤러'라는 책을 읽고 있다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는 폴 사뮤엘슨 선생님의 행복공식을 발견했다. 대충 이런 식이다 (위의 낙서). 내가 책 읽다 말고, "이런 공식이 있었네!"하고 감탄하자 - 옆에 있던 남편님이, "그러니까 행복해지려면 그 분모 값을 '영'에 가깝게 하는거야. 그게 스토아 철학자들의 생각이었어. 우리나라에서 조순 경제학책이 유명한데, 사실 그 책은 말이지 사뮤엘슨의 책 내용을...블라블라블라"
세상 천지 모든것을 다 아는것처럼 깝치던 내가 - 세상 사람이 다 아는 '공식'을 모르고 앉아있었던거다, 여태까정... 그런데, 내 수학적인 머리에 뭔가 문제가 있는것인지 '행복은 소비 나누기 욕망이다'라고 하면 나는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을 분수식으로 이렇게 그려놔야 내 머릿속에 개념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나는 나눗셈 인간이 아니고 '분수'인간인것 같다. 그렇지 '분수'를 알면 되는거지. 그래서 '안분지족'이란 말이 있는거 아니겠어?
1. 깊어가는 가을 단풍이 아름다웠다. 전세버스 타고 다녀오는 동안 운전 안하고 차창밖 내다보며 거리의 단풍구경을 할수 있어서 좋았다. 동료들과의 심심파적 대화도 소풍같았고. (결론은 날짜를 정해서 둘러앉아 마오타이주를 마신다는 것이었다....)
2. 제너럴모터스 생산직 근로자들의 임금인상과 고용계약을 하라는 현수막들이 뒤덮여 있었다. 단풍과 현수막이 어울려 있었는데 - 한글을 읽을줄 모르는 동료교수들은 그것을 무슨 '설치미술'처럼 상상했고 - 내가 간단히 설명을 해주자 그제서야 분위기를 눈치챘다.
3. 시민대 프로그램에서 2년전 인연을 맺은 '학생'님께서 내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가 모여있던 회의실로 와 주셨다. 그는 회의실에서 (즉석에서, 사전에 아무런 협의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서) 우리 대학과 제너럴모터스를 연결하는 고리로서 간단한 스피치를 했다. 대학과 기업이 협력하는 모델을 멀리가서 찾을게 아니라 -- 바로 저 분의 케이스에서 찾으면 된다는 내 제안에 그가 즉석에서 (유창한 영어로) 자신의 경험과 아이디어를 발표했던 것이다. 너무너무 사랑스러운 제자이자 친구이다.
4. 인체역학실험인가, 뭐 그 사람모형 가지고 각종 충격실험 하는 그 실험실에서 실험하는 것을 보여줬는데 - 그런것은 뭐 티브이 광고나 뉴스 같은데서도 많이 봐서 새로울 것은 없었는데 - 그 인형 (dummy)하나에 십억원까지 간다고 해서 놀랐다.
5. 뭐 딱히 놀랍게 새로운 것은 그들이 안보여줬거나, 안알려준것이 아닐까? 나를 깜짝 놀라게 할만한 새로운 것은 내가 식견이 부족하여 못본것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 자동차회사 기획실에서 일하는 내 조카는 "곧 하늘을 날으는 택시가 나올겁니다. 먼 얘기가 아닌데요, 제가 그거 개발하고 있거든요" 라고 했는데 - 그런 꿈같은 얘기를 제너럴모터스에서는 들어볼수가 없었다. (말 안해주는걸거야 아마....)
끝.
음 돌아보니, 가장 기억에 남을 것은 - 회의실에 와서 앉아있던 내 제자를 발견한 순간. 아, 그가 얼마나 멋져 보이던지....
화초 키우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만만하게, 신경안쓰고 번식시킬수 있는 화초 몇가지가 있다. 스킨답서스, 센세베리아 뭐 이런친구들과 함께 '나비란'이 있다. 가장 흔한 것이 흰 줄무늬가 들어간 (위) 종류일 것이다. 몇해전에 엄마 집에 있는 것을 조금 잘라다가 학교에서 키웠는데, 지금 무지무지 많이 번식했고, 학교에서 자라던 것 몇가지를 끊어다가 집으로 와서 뿌리를 내려 키우니, 여기서도 무섭게 번식을 하고 있다. 위의 친구는 흙이 기름지고 햇살이 좋으니 뻗어나온 꽃대가 '공룡'처럼 느껴질 정도로 '튼튼'하게 잘 자라고 있다.
아래는 내가 어제 동네 미장원 원장님에게서 얻어온 것이다. 그 미장원은 아파트 근처 개인주택가 골목에 숨어있어서 동네사람이 아니면 찾아가기도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어제 독감백신을 맞기위해 25년전에 내가 우리 어린 두아들 데리고 다니던 '가정의학과'에 들렀는데 - 백신 맞고 돌아오다가 문득 '이 머리좀 잘라야겠다' 생각하고, 근처 골목길을 기웃기웃대다가 이 미장원을 발견한 것이다. 대추차가 고요히 끓고 있던 그 미장원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가정의학과에 들렀을때에도 손님이 하나도 없어서 나는 들어서자마자 대기할것도 없이 바로 의사선생님을 만났던 것인데, 미장원에서도 대기할 필요없이 곧바로 머리를 자를수 있었다. 머리 자르다말고 원장님이 "새치 염색 안하셔요?" 하고 물었고, "머리 자르고 새치염색하는데 시간이 얼마가 걸릴까요?" 물으니 한시간도 안걸린다고 했다. 그래서 한시간도 안되는 시간에 내 용모에 변화가 올수 있다면 그것참 좋은 일이다 싶어서 새치염색까지도 함께 하기로 했다. 그렇게 머리를 하다가 미장원에 있는 화분에 눈길이 갔고, "저것은 나비란 같은 모양인데 줄무늬가 없네요...." 했더니, "갖고 싶으시면 조금 끊어 드릴까요?"하고 원장님이 흔쾌히 이걸 나눠주시겠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나비같이 가볍게 머리를 자르고, 산뜻하게 새치염색도 하고, 미장원에서 얻어온 나비란을 들여다보고 있다.
어제 오후에 산책을 나갔다가, 그 산길을 대비로 쓸고 있는 분을 발견했다. 그냥 길에서 흔히 보이는 눈에 안띄는 검정색 운동복을 입은 60대 아저씨가 맨발인채로 산길의 낙엽들을 쓸고 있었다. 천천히, 마치 집앞 마당을 거쳐 오솔길을 쓸듯 그렇게 천천히. 그래서 나도 멀리서부터 그를 발견하고 인사를 했다, "아하! 어쩐지 산길을 누군가가 빗자루로 쓸어 놓은듯이 깨끗하고 비질 자국이 보이길래 이 산길을 누가 쓰는걸까? 능 궁금했는데 선생님께서 쓸어 놓으신거군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사나이는 나의 활달한 감사인사가 싫지 않았는듯, "뭘요. 나만 쓰는게 아니에요. 좋아해주시니 저도 좋죠"하고 답을 했다.
그를 지나쳐 산길을 더 오르다보니 길가 운동틀 옆에 빗자루가 세워져 있는것이 보였다. 이거구나. 이걸로 쓰는거구나. 그래서 나도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낙엽이 쌓인 오솔길을 아까 그 아저씨가 있는 방향으로 쓸어내려갔다. 그가 쓸어 올라오고, 내가 쓸어 내려가면 중간지점에서 만나게 되리라. 아저씨가 저만치 보이는데서 빗자루를 제자리에 갖다 놓고 마저 산길을 올라갔다.
잠깐이지만 -- 산길에 쌓인 낙엽을 쓸어낼때 기분은 - 고요한 오대산 월정사 앞길을 나 혼자 쓸고 있는 느낌. 혹은 눈쌓인 고향집 바깥마당에서 이웃집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쓸고 있는 느낌. 그런것. 세상에서 가장 고요하고, 평화롭고 따스한 '순간'과 '장소'에 몰입되어 있는것 같은 느낌이었다. 세상에 이런 평화 다시 없어라 (비발디의 세상에 참평화 없어라) - 바로 그 '참평화' 의 순간이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지, 무엇이 내게 가장 위로가 되는지 아시고, 깊은 가을날 집 근처 숲에서 세상의 모든 고요를 주시다.
버지니아에서 내가 간신간신히 별로 희망도 없는 직장에서 단지 '영주권'한가지를 기다리며 '영주권 노예살이' 시기를 보낼때였다. 박사학위고 뭐고 '미용기술'이나 '손톱 다듬는 기술'보다도 돈이 안되는 학위가지고 막연한 시간을 보내던 시절 나는 생계 꾸리기도 힘든 작은 대학 교수질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기술'이라도 배우자는 심정으로 지역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간병사' 교육을 받았다. Personal Care Aide. 그래서 내가 버지니아주 간병사 자격증을 갖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제도가 운영되고 있는 것을 본다). 뭐 그냥 정해진 수업시수를 잘 채우고 성실하게 가서 듣고 간단한 실습을 하면 되는 극히 초보적인 교육 과정이다.
그런데, 간병사 과정을 배울때, 간호와 관련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초청되어 강의를 해주셨으므로 - 내가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다채로운 내용을 배우게 되었다. 호스피스 전문가도 오시고, 간호대 박사과정 선생님도 오시고 - 현장에서 평생 근무하신 간호사 선생님도 오시고. 참 많은 내용들을 귀동냥하게 되면서 CNA 코스 (Certified Nursing Assistant, 간호조무사)에 대해서 알게 되고 역시 사회단체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CNA 과정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CNA는 우리나라의 간호조무사 제도처럼 교육과정도 6개월 정도 되고, 수업이나 실습의 양이 많고 엄중하게 진행되었다. CNA 부터 뭔가 professional 의 단계로 여겨졌다. 정말 공무 열심히 해야 하는 자격증인 것이다.
나는 PCA을 착실히 했고, CNA 과정은 다니다가 그만두었는데 - 그 이유는 본래 그 자격증을 따려던 목적이 - 내가 그걸로 어딘가에 취직을 하려던 것이 아니고 -- 그 당시에 진로 고민하다가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무슨 새로운 전공을 공부해야 할까?' 고민하던 우리 귀냄이 녀석에게 "귀냄아, 간호대를 가보는 것은 어떨까? 잘만하면 그쪽도 의사 못지 않은 전도유망한 분야란 말이지..." 살살 꼬셔서 녀석과 함께 PCA도 끝내고 CNA도 함께 등록하여 공부하고 있었던 것인데, 우리 귀냄이가 주위 친구들의 강력 추천으로 Information Techonology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CNA 과정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나 역시 더이상 그것을 마칠 동기가 사라졌던 것이다. 그렇다, 내가 아들의 장럐를 위해서 자격증 공부까지 함께 해 줄 정도의 엄마이기도 했다. (내가 좋은 엄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식의 앞날을 위해서 '함께' 그 길을 가주는 친구이기는 했다.)
뭐 그래서 귀냄이는 간호대학으로 편입하려는 계획을 접고 공대로 간것이고, 나역시 '내가 뭐 현장에서 정말 환자들을 돌볼 사람도 아니므로' 대충 기본적인 상식 공부를 한 셈 치고 그 과정을 그만 둔것인데.
그런데 내가 그냥 심심파적으로, 뭔가 상식의 경계를 넓히고자 잠시 공부했던 PCA, CNA 과정이 내 삶에 전환점을 가져왔다. 그 얘기를 하려던 것인데 서론이 너무 길었다.
내가 뭔가 번듯한 직장에서 '다시 시작'해보고 싶어서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백의종군 하는 심정으로 집구석에 처박혀서 미국 전역의 2년제 4년제 사립 공립 대학교에 이력서를 보내며 소일하고 있던 어느날 메릴랜드의 몽고메리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전화가 왔다. ESL 수업을 맡아 달라고. 그래서 당장 가서 공식 채용 절차를 마쳤는데 - 다시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가 이민자를 위한 의학영어 과정을 열어야 하는데 - 네가 적임자인것 같아. 네 이력서를 보니 너는 PCA 자격증도 있고 CNA 과정도 일부 이수했다고 나오네. 너 외국에서 온 의사, 간호사들에게 의료 관련 영어를 가르치는 커리큘럼을 짜서 가르칠수 있을까? 그 과정은 특수 과정이라서 강의료도 높고, 네가 잘하면 고정적인 과정으로 자리잡을수도 있어. 우리에게 ESL 강사는 많은데 메디컬 영어를 가르칠 사람이 없어, 너밖에." 이런것을 우리 업계 용어로는 ESP (English for Special Purposes)라고 한다. 일반 영어교육이 아니라, 특수 목적의 영어 교실을 말한다, 말하자면 의사들을 위한 영어, 파일럿을 위한 영어 이런식으로 특수 직군에게 필요한 영어 과정들이다.
후보가 나밖에 없다니 (나도 한번도 안가르쳐봤지만....), 게다가 일반 강의보다 강의료가 세배나 높은데 -- 이게 웬 떡인가. 그래서 나는 그날 당장 관련 서적들을 사들여서 착실히 공부를 하고 수업과정을 설계했다. 심지어는, 내가 PCA, CNA과정에서 전문가들로부터 이수했던 '실습'과정까지 내가 다 가르치게 되었는데 대학에서는 내가 영어와 실기까지 다 가르칠수 있다니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반겼다. 그렇게 - 몽고메리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나는 '이민자/난민' 의료인들을 위한 의료 영어 교육 전문가가 되었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고, 나는 아프리카등지에서 온 난민 학생들 (미국에서 간호사가 되고 싶어하는, 고국에서 간호사나 의사로 일했던)을 위해서 여러 사회단체에 죽어라고 이메일을 보내어서 - 희망하는 사람들이 CNA 과정을 무료로 공부할수 있도록 장학금을 끌어다 주기도 했다. (이메일 질에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내가 활발하게 일을 하자 몽고메리 칼리지에서는 내게 풀타임을 제안했다. 그 때 내가 마음이 잠깐 흔들렸다.
그런데, 그 당시 나는 조지메이슨에서도 시간강사를 하고 있었다. 몽고메리 칼리지와 조지메이슨 두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면서 내 희망은 조지메이슨에 풀타임 교수로 가는 거였다. 그런데 몽고메리에서 내게 풀타임을 제안한 것이다. 잠시 흔들렸지만 나는 곧바로 '감사'와 함께 그냥 개인 사정으로 시간강사는 할 수 있지만 풀타임은 할 의사가 없다는 답을 했다. 내가 몽고메리에 풀타임으로 자리를 잡으면 조지메이슨에서 풀타임 자리가 났을때 움직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럴경우 나를 믿고 뽑아준 몽고메리에도 미안한 노릇이고. 나는 함부로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깝지만 그자리를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학기에 나는 내 소망대로 조지메이슨에 풀타임 교수로 들어갔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최근에 내가 프로포절을 작성한 십만달러짜리 미국 정부 교육프로그램은 '난민을 대상으로 한 영어, 문화 교육 프로그램'이다. 지금 내가 속한 대학에는 '난민' 전문가 교수들도 있고, '영어교육' 전문가 교수들도 있다. 그런데, '난민 대상 영어교육' 프로그램을 디자인하거나 제공했던 사람은 '나' 한 사람 밖에 없다. 그래서 - 내가 이 프로젝트를 디자인하게 되었다.
지금 그 난민 대상 영어교육 프로그램과 -- 간병사나 간호조무사 공부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의 별것도 아닌 간병사, 간호조무사 공부 이력이 나를 '이민자들을 위한 의료 영어교육' 전문가로 키웠고, 의료영어 교육 전문가로 크는 동안 -- 내게 수업을 들은 학생들 - 정치적 난민들, 취약계층을 위하여 내가 발벗고 나서서 장학금을 끌어오거나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을 했던 이력이 나를 특수 영어 교육 전문가로 캐웠으며 ----> 그 이력이 나를 '난민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설계자로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얘기를 하려는거다.
나는 이런 얘기를 최근에 내게 상담을 하러 온 학생에게 들려주었다. 우리학교에 회계학 전공으로 들어온 그 학생은 - 원래 간호대에 가고 싶었는데 간호대 입시에 실패해서 - 그냥 부자 할아버지가 가라고 하셔서 자기는 별로 관심도 없는 우리대학 회계학과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학생에게, 이번학기 성적관리나 잘하고 학교를 그만두라고 얘기해주었다. "간호사가 되고 싶으면 간호사가 되는 길을 가, 여기서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말고" -- 이것이 내가 그에게 해 준 말이다. 나는 그 학생에게 한국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간호대에 들어갈수 있는 여러가지 경로를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내 간병사-간호조무사 공부 얘기도 해주었다. "당장 겨울방학에 동네 구청에서 공짜로 제공하는 간병사 자격증 공부라도 심심파적으로 해봐라. 거기서 시작해서 네가 소망하던 간호사의 길을 가면 된다. 가만보니 너희 집안이 먹고 살만하고 교육수준도 되게 높아서 - 아마도 네가 어느 구석의 허름하고 이름없는 간호학과 같은데 가는것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로 보이는데 -- 그분들 말 들을거 없다. 네가 하고 싶은 공부를 차근차근 해라. 네가 가고 싶은 길을 가라. 네가 그 길을 성실하게 가다보면 - 나중에 그분들이 너를 우러러볼수 있는 그런 자리에 네가 가 있을것이 자명하다."
모처럼, 아무런 숙제도 없는 주말이다. 가을학기 개강이후에 매 주말마다 뭔가 나를 짓누르는 숙제들이 있어왔다.
교수 승진 위원회에서 승진신청 교수님들 자료 분석하고 신청추천서 작성하고, 평가 심의회에 참석하고, 누군가를 위한 변론도 해야 했고. 그 일은 아직도 진행중이긴하지만 큰 파도는 지나갔다.
몇년 끌어온 책 원고의 마지막 교정 작업도 진행했다. 그것도 마쳐서 넘겼으니 나머지는 이제 출판사에서 마무리해서 출시하겠지. 안도의 한숨.
누군가를 위한 포상 신청작업도 했다. 내가 아닌 내 주위의 훌륭한 사람이 마땅한 포상을 받을 수 있도록 추천서와 문서작업을 하는 일이었다. 그분이 상을 받을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 사이에 미국의 아들 부부가 보름간 다녀갔다. 자식이라해도 내 '구역'에 온 손님이기도 해서 - 아무것도 안해도 보름간 신경을 썼다고 할 수 있다. 애들이 가고 난 후에 '포진'도 올라오고 한차례 몸살을 앓고 지나갔다. (아, 오늘은 가까운 내과에 가서 독감 백신을 맞아야지. 그동안 몸 상태가 편치 않아서 독감 예방 접종도 미루고 있었다).
십만달러짜리 프로젝트 프로포절을 일주일 넘게 주무르며 작성하여 엊그제 보냈다. (잘 접수되었다는 확인서가 왔다). 그걸 드래프트 작업하면서 -- 나 이걸 쓰긴 쓰는데, 채택이 안되기를 내심 바라고 있다. 채택되면 일을 해야 하는데 그 일을 할 기운이 없다 -- 이런 생각을 했다. 안되면 다행이고, 되면 .... 그 때 가서 어떻게 시간과 에너지를 안배하여 이 일을 추진할 것인지 고민을 시작해야 할것이다.
2025년도 지역사회를 위한 시민 교육 프로그램 커리큘럼 디자인 작업을 현재 진행중인데 - 다행히 신임교수들께서 적극 참여 의사를 밝히셔서, 근사한 팀을 짜는데 아무 문제가 없어보인다.
그래서, 이번 주말은 - 아무런 숙제도 없이, 뭔가를 마감해서 보내야 한다는 강박감도 없이 머리 가볍게 쉬면서 보낼수 있을것이다. 물론 다음주 월요일부터 다시 고난의 시간이 시작될 것이지만 - 이제 뭐 신촌에 가야 하는 일정도 어느정도 익숙해진것도 같다. 신촌에 가는 날은, 아침 나절에 연세대 백양로를 지나쳐 캠퍼스 일대의 동산을 이리저리 산책을 하기도 한다. 지옥에도 햇살은 빛날것이다. 누군가 고통의 강을 건널때도 그 강변에 꽃이 피고 지며, 새들이 위로하듯 날아 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11월도 곧 갈 것이다. 그러면 방학이 온다. 학생들은, 고맙게도 잘 해내고 있다. 학생들의 눈빛이 깊어가는 가을처럼 깊어지며 사색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젊은 그들이 깊어지고 높아지고 성숙해지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하루하루 단풍이 붉어지듯 그들이 깊어지는 것이다. 향기로운 대학생들과 생활하는 특혜를 주신 하나님께 오늘도 감사와 찬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