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4. 9. 23. 22:32

우리 동네 쇼핑센터 여성복 매장 구석에서 발견한 표시. 판매하는 여성복의 기장이나 뭔가 수선이 필요할 때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리라.  Sewing Room 을 의도했으리라. '바느질방'  철자 'e'가 빠져서 졸지에 '스윙룸'이 되어버렸다.

 

 

서구식으로 제대로 표현하려면 'Alterations' 혹은 'Tailoring Service' 또는 'Alterations and Tailoring Service' 로 하면 좋을것이다. Sewing Room 은 문자 그대로 '바느질방'.  집에 재봉틀 있고 뭐 그런 공간. 

 

 

그러면 Swing Room 은 뭘까? 우체국 직원들이 잠시 쉬는 곳을 Swing Room 이라고 한다.

 

 

 

어떤 아줌마가 '스윙 춤'을 추면서 옷 기장을 줄이는 광경이 연상이 된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9. 10. 10:44

8박9일의 신촌생활을 순조롭게, 무사하게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몇가지 준비까지 해 놓았지만 다행히 돌발상황 없이 돌아올 수 있었다. 이것은 '예상치 못한,' '무척 복된' 상황이다. 여름내내 기도를 드린 것에 대한 하느님의 배려와 은혜라고 해석하고 있는 중이다.  신촌에서의 일상도 평온하였다. 순조로웠고, 돌발 상황이 전혀 없었으며, 믿어지기 힘들정도로 모든 일이 시냇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아, 하느님의 평화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지옥에서 맛보는 평화 같은것.)

 

일상으로 돌아와 수업을 하고, 과제물을 평가하고, 또 다음 수업 준비를 하고. 이런 일상이 어찌나 '달콤'한지...

[전쟁이나 질병, 파산, 사망 혹은 관계의 망가짐으로 인해 일상이 망가진 사람들은 문득 발견하게 된다 --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천국'이었음을.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내가 없는 사이에 향란이 저 혼자 피어나서 나의 정원을 향기로 채우고 있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얼마나 향기로운지. 

 

 

 

(지난 여름의 기억)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8. 31. 14:03

 

동료가 몬스테라 화분을 기르다 싫증이 난다고, 내게 키워보겠냐고 물었다. 나는 마침 몬스테라가 궁금해서 화분 하나를 살까 말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어디선가에서 잘 자라던 제법 큰 (높이가 내 가슴까지 올라오고 제법 넓게 벌어진) 몬스테라 화분을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원래 작고 볼품없던 화분에 대충 키우던 중이었다던데 너무 잘 자라서 아파트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하게 되자 '파양'에 이른것 같았다.  나는 일단 번듯하고 큰 화분을 사다 분갈이도 제대로 해주었다. 분갈이를 해주니 식물의 모양이 더욱 살아나면서 정말 귀티와 부티를 겸비하게 되었다. 그랬다. 6월 말쯤에 우리집에 와서 분갈이를 한 모습은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처럼 우아하고 고귀해보이기까지 했다.  몬스테라가 반음지 식물이고 직사광선을 쬐면 오히려 힘들어한다고 해서, 거실 안쪽에 직사광선을 피하면서도 환하고 환기도 잘 되는 것에 자리를 잡아주기까지 했다.  

 

나는 이 화분에 반했다. 그 크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잎사귀와 그 색상에 반해서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그리고 바퀴달린 화분받침을 이용하여 자주 욕실에 데려다가 샤워를 시켜주기도 했다. 내가 샤워하는것보다 몬스테라를 샤워 시킬때 더욱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 크고 우아한 잎사귀가 끝부터 누렇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과습이구나' -- 나는 바로 알아봤다. 물을 너무 자주 줬구나.  그래서 나는 과습 방지를 위해서 물을 '안줘야지'하고 다짐했다. 샤워 시키고 싶은것도 참고, 물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내가 제법 물 주는것도 자제해서 1주일이나 열흘에 한번씩 물을 줘도 잎사귀들이 하나 하나 자꾸만 누렇게 변해갔다. 참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그래서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일단 누렇게 변색되는 잎사귀들을 다 잘라냈다.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리고 화분을 세탁실이 있는 북쪽 베란다로 옮겨 놓았다.  북쪽이지만 환기도 잘되고 환하고 넓직한 곳이라서, 화분을 갖다 놓으니 베란다 분위기가 갑자기 고급스러워지기까지 했다.  아무튼 나로서는 내가 자주 가지 않는 베란다로 이 몬스테라를 유폐시키는 것이 그를 '보호'하는 길이라는 판단이었다. 내 눈에 띄지 않게, 내가 뭔가 자꾸 들여다보고 손을 쓰지 않게. 최대한 거리를 두고 자주 쳐다보지도 말자. 

 

2주전에 나는 송도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2주 정도 화분에 물을 주지 않아도 웬만한 식물은 말라죽지 않는다. 그리고 내 집에 있는 화초들은 나의 오랜 부재까지 감안하여 한달동안 물을 안줘도 죽지 않을 녀석들뿐이다. 나는 집의 식물들에 대하여 그다지 염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2주만에 돌아왔을때, 나는 보았다. 나의 몬스테라가 내가 안보이던 동안 새로운 잎사귀 하나를 키워내고 있었다는 것을.  이 새잎사귀는 아직도 다 펼쳐진 것이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도 어딘가가 갈라져야 한다.  새끼고양이나 강아지들이 눈을 감고 태어나는데, 일주일 쯤 지나면 조금씩 조금씩 그 닫힌 눈꺼풀이 갈라지면서 눈을 뜨게 된다. 몬스테라의 잎사귀도 마치 강아지의 눈꺼풀이 갈라지듯, 잎사귀들이 서로 갈라지면서 벌어지는 모양이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서 몬스테라의 새 잎을 발견하고, 가슴에 초록색 희망의 샘이 솟는다. 

 

그래서 몬스테라에게서 나는 배웠다.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무심한 듯' '일정한 거리를 두고' '너무 친절하지 않게' 그냥 내버려두며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야 함.  프레디 머큐리가 노래하지 않았던가, "Too much love will kill you."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8. 18. 15:47

 

우리집 현관문을 열고, 중문을 지나 정면으로 마주보이는 벽의 중앙 (집의 중앙)을 십자가로 장식하였다.  

 

위의 나무십자가는 오빠 집에서 자작나무 가지치기를 하여 발생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내가 작업하여 만든 것이다.  아랫쪽 그림은 지난해 12월에 내 친구와 그림그리기 카페에 놀러갔을때 그렸던 작품이다.  처음에 십자가만 걸려있었는데, 그림을 가져다 벽에 대보니 십자가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서 함께 연출을 하게 되었다. 우리집에 오는 사람들마다 신기한 듯이 이 그림과 십자가를 감상한다.

 

그 아래 흰석고 십자가는 목사님들께서 심방오실때 가져오신 선물인데 153면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성경 구절 153과 관련된 것이라는데 성경의 어느대목인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음에 뵈면 여쭤봐야겠다. 

 

협탁을 덮고 있는 것은 'Cathedral Window (성당창문)'이라는 별명이 붙은 퀼트 기법 작품이다. 원래 두장을 갖고 있었는데 한장은 내 영혼의 친구에게 몇해전에 선물했고, 한장은 이제야 제 자리를 찾았다. 

 

 

 

지난 7월 19일부터 오늘까지 (8월 18) - 100시간의 기도를 하였다. 한 색깔이 하루를 나타난다. 꽃잎 세장이 한가지 색으로 칠해져 있으면 그날 세시간 기도를 했다는 뜻이다. 첫날은 세시간, 둘째날은 두시간, 셋째날은 세시간, 넷째날을 한시간... 색이 바뀌면 날이 바뀐다. 막판으로 갈수록 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최장기록은 하루 여덟시간.  병원도 다녀야 했고, 일도 해야했고, 특강을 하러 외출을 하기도 해야 했고. 꾸준히 이 기도표를 채우며 한달을 보냈다.  그 전 한달도 내 생활은 별 차이가 안나지만, 기도를 충실히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정하고 기도를 해 봤다.  지금으로서는 내가 기도 외에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다.  아무런 종교도 없는, 기도 조차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런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나보다 더 괴롭고 암담할 것이 뻔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목사님들이 폭우가 종일 쏟아지던 칠월의 어느날 멀리까지 심방을 오셨다.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교회 소속의 모든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이 총 출동하셨다. 비가 쏟아져 먼길 오시기 힘드시니, 날짜를 옮기시거나 취소하시면 어떨까하는 의논을 드리니 - 아무 염려말라고 하시며 모두 오셨다. 그리고 그날 온집안을 기도로 꽉꽉 채워주시고 가셨다.

 

목사님들을 배웅하고 - 손님접대에 피로하여서 소파에 누운채로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 누워있는 소파에서 정면으로 나의 그림이 보였다. 우리오빠를 비롯해서 - 나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아이들이 나무를 감싸고 있는 이 그림에 대하여 '성화같다'라는 평을 한다. 내가 '성화'를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보는 사람들에게는 이 나무가 십자가처럼 보인다고 한다. 잠에서 깬 내 눈에 들어온 나무그림의 나뭇가지들에 불이 붙어서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나는 '참 이상하다. 왜 나무가 불타고 있는것처럼 보이지? 내 눈에 문제가 생겼나?' 생각하고 눈을 깝짝이거나 손으로 눈을 부비기도 했다. 그러고 다시봐도 나뭇가지들이 불타고 있었는데 - 나는 이 광경을 물끄러미 보면서 불이 났다기보다는 내 눈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 스트레스가 극심할때, 갑자기 눈에 섬광같은것이 비춘적이 있었는데, 노화 현상이라고 했고, 잠시 발생했다가 사라진적이 있다.) 그때처럼 뭔가 눈의 노화현상이 발생한걸까 의심하면서 이글이글 불타는 나뭇가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다시 깨어났을때, 그림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것처럼 그냥 거기 있었고 - 나는 내가 경험한 것이 '꿈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그것 꿈이 아니었다. 나무는 불타고 있었고,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어느 순간 발생한 현상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이 나무 그림을 더욱 자주 바라보게 되었다.  하나님이 나를 위로하고 안심시키기 위해서 환상을 보여주셨을거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제 일주일후에 개강이다. 내일 개강준비를 위하여 인천으로 돌아간다. 개강을 하고, 학생들을 맞이하고, 외부 특강을 해야 한다. 9월2일에 수술이 잡혀있다. 방학동안에 잡혀 있었다면 좋았겠으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최선/최고의 선물을 준비하신다고 믿기 때문에, 주어진 일정에 맞추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세워나가고 있다. 큰, 아주 큰 파도가 내가 다가오고 있는것 같다. 나는 담대하게 그 파도위를 미끄러져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된장잠자리'를 생각하곤 한다. 저 멀리 동남아시아에서 한국땅까지 날아온다는 그 평범한 잠자리는 제트기류를 타고 여기까지 온다고 한다. 잠자리는 그러니까 날개짓을 한다기보다는 - 제트기류라는 어마어마한 파도에 몸을 맡기고 온전히 온 몸과 마음을 다 맡기고, 아마도 먹지도, 마시지도, 잠을 자지도 못하면서 -- 그러나 태평하게 미끄러져 여기까지 왔을것이다. 그럴것이다.  잠자리가 제트기류에 몸을 맡기고 그 먼길을 오듯, 나는 이제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태평하게 미끄러져 앞으로 나아갈것이다. 기도와 찬송이 나의 먹이이고 물이고, 안식이다. 오 주여, 저를 구원하소서.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6. 15. 13:57

미국 대학에서 교수가 총장을 만날 일은 '거의 없다'는설이 있다.  총장은 학교를 대표해서 결정을 내리거나 대외 활동을 해야 하는 직책이고 교수들은 학생들 가르치고 골방에서 혼자 혹은 여럿이 연구를 해야 하는 직책이므로 서로 접점이 별로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러 버지니아에서 날아온 총장님과 나란히 움직이며, 상을 받고, 대화를 나누고, 기념사진을 찍고 할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그냥 '가문의 영광'에 해당되는 일이라 할 만하다.

 

 

 

 

특히 나를 기쁘게 했던 것은, 우리들의 대장 '총장님'의 -- "I saw your plants at your garden, they were so lovely" 라는 코멘트였다. 나의 부재중에 그의 바쁜 일정중에 내 구역을 돌아봤고, 나의 정원을 살폈고, 그 정원을 기억했고, 그 정원의 정원사가 나라는 것을 기억해주고 있었다니, 그의 성품이 굉장히 세심하거나 아니면 그 정원이 그에게 무척 인상적이었으리라. 

 

우리 총장님이 아주 좋아졌다. 

 

이 자리에 올수 없었던 남편에게 말해줬다, "나중에 내가 노벨상 받을때 그때 오셔."  (혹시 아는가? 우리 하나님께서 그보다 더 큰 선물을 준비하고 계신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6. 11. 10:32

나의 부엌 경력 36년만에 나 스스로 - 이것 한가지 만큼은 여느 부엌 전문가를 뺨치는 고수의 경지라고 자랑할 만한 작품이 최근에 탄생했다.  그것은 바로!  각종 양념이며 잡동사니 부엌 도구들 (잡동사니이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꺼내야하는데 - 늘 그것을 찾아 헤메야 하는)을 일거에 평정하는 친구를 하나 창조해 냈다는 것이다. 

 

아래의 파랑색 트롤리는 쿠팡에서 29,000원쯤 준 것이고, 그 안의 흰 수납상자들은 무엇이든 다 있는 상점에서 한개에 천원씩하는걸로 사온 것이다.  그리고 나의 부엌 고민의 약 90퍼센트가 해결되었다. 

 

나는 결혼 할 때까지 내 손으로 밥을 지어본 적이 없다.  물론 라면을 끓인다거나 엄마가 부엌일 시키면 심부름으로 이것저것하면서 어깨너머로 대충 배우기는 했지만 - 내가 밥을 짓기 시작한 것은 결혼하여 내가 밥을 지어야만 했을때부터였다.  그 이후로 나는 부엌에 큰 관심을 기울인적이 없었다. 부엌 집기를 사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고, 여하튼 부엌은 내가 굶어죽을수 없으므로 들어가서 뭔가 음식을 해 먹고 치워야 하는 '의무적 장소'였다.  지금도 나는 부엌일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평생 담쌓고 살아왔는데 - 늙은 개가 변하겠는가?

 

오빠가 새로 수리하여 단장하여 넘겨주신 나의 옛집으로 돌아와 부엌에 들어섰을 때, 내가 당면한 문제는 -- 부엌이 크고, 수납 공간이 하도 많아서, 뭔가를 아무 생각없이 어딘가에 집어 넣으면 - 그것을 나중에 찾기 위해서 온갖 문을 하나 하나 하나 다 열어봐야 한다는 것이었고, 기가막히게도 내가 찾는 것은 항상 맨 마지막 문에서 발견되곤 했다.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데 가장 필수적인 것은 음식의 맛을 내는 각종 양념들이다. 간장, 소금, 식용유, 생강가루 뭐 이런 크고 작고 잡다하고 그런 것들. 또 무슨 도구들 - 국자, 주걱, 큰 포크, 작은 포크, 과도, 식도. 차를 마시기 위한 이런 저런 차 종류들. 손님에게 접대할 믹스커피스틱들.  오만 잡동사니가 수납장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니 뭔가 국한가지를 끓이려고 해도 나는 '간장을 어디다 뒀더라? 위? 아래?  여기저기 문을 열고 뒤지고, 뒤지고, 뒤지고.  (내가 이렇게 두서가 없고 정리가 안된다. 부엌에 관한한 그렇다.) 그렇다고 그것들을 모두 싱크대위에 늘어놓고 쓰고 싶지도 않다. 나는 벽에 뭐 주렁주렁 거는것도 싫다. 다 보여야 하지만 - 아무것도 노출시키고 싶지도 않다. 다 보여야 하지만 - 아무것도 노출시키지 않는것은 해결하기 힘든 문제다. 그래서 내가 골치가 아팠다.

 

그래서, 고민고민 하다가, 뭔가 웹으로 집안 도구들을 검색하다가 이 트롤리를 발견하고 - 생각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트롤리는 밤사이에 도착했고, 조립하는데 10분쯤 걸렸고, 제법 튼튼했고, 바퀴가 달려 강아지처럼 내가 끄는대로 잘 따라 다녔다. 집근처 다있는상점에 가서 천원짜리 수납함들을 몇개 사왔고, 한시간도 안되어 내 스트레스의 주범 - 온갖 필수불가결한 잡동사니들을 제법 계통세워서 정리하는데 성공했다.  나는 잡동사니들을 어디에 뒀는지 기억하기 싫다. 그냥 내 눈앞에 있으면 된다. 문을 열지 않아도, 찾아 헤메지 않아도 - 그냥 내 눈앞에 있으면 된다. 바로 이 트롤리 안에 내가 부엌에서 필요한 작은 친구들이 다 들어있다. 작업이 끝나면, 부엌 구석에 세워 놓으면 사람들 눈에도 띄지 않고, 부엌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단정하다. 

 

그래서 이제 나는 이 파랑 트롤리를 향해 -- "나의 베스트 프렌드!  잘잤니?"하고 살갑게 인사까지 보내게 된다.  부엌일이 참 단순하고 쉬워졌다. 나의 베스트 프렌드 '파랑이.' 

 

 

부엌의 한 쪽 구석에 엄마의 조각보를 전시해 놓았다.  모두들 이 작품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엄마도 와서 보시고 아주 좋아하셨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6. 5. 09:38

우리는 서로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 뭔가 그의 평생을 곁에서 함께 해 주었던 늙고 병든 개를 끌고 나가 안락사 시키거나 길거리에 버리러 나가는 기분이랄까, 뭐 그런 비슷한 느낌이었다. 남편이 골라서 상자에 담아놓은 책들이 현관앞에 있었다. 중고서점 (알라딘)에 내다 팔 것들이었다.  저녁을 먹고, 운동 할 겸, 그 책들을 백팩에 가득 담았다. 마치 늙은 부모를 지게에 지고 나가서 산속에 버리려는 패륜 자식들처럼 (고려장 혹은 나라야마 부시코) 우리는 책을 짊어지고 1 킬로미터쯤 되는 상가 거리를 지나 알라딘에 도착했다.  우리가 지나치는 상가거리를 우리끼리는 '소돔의 거리'라고 부르는데, 대학생들이나 젊은 직장인을 목표로 한 술집들과 고깃집들이 즐비한 그 거리를 지날때마다 늘 반복해서 떠오르는 단어가 '소돔'이기 때문이다. 

 

소돔의 거리를 지나서 '알라딘'에 도착한 우리는 책을 매대에 꺼내 놓았다. 점원이 자신들이 구매할 책과, 살 필요가 없는 책을 따로 구분하였다. 구매할 필요가 없는 책들은 우리가 그대로 놓고 갈 경우 그냥 폐기된다고 한다. 어떤 책들은 진열대로, 어떤 책들은 폐기 상자로 가겠구나. 등이 아프게 짊어지고간 그 책들을 내려놓고 우리 알라딘 계정에는 9,000원이 들어왔다. 단돈 구천원에 세계의 지성들이 쌓아올린 그 지식의 보석들을 폐기하는구나... 

 

돌아오는 길, 우리는 자주 들르던 카페에 들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팔아넘긴 그 값진 지식의 저장소가 단돈 구천원이었기 때문이다.  빵하나 커피 한잔 값에 불과한 지식.  우리는 팔아버린 늙은개가 미안해서 그 돈을 함부로 쓸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마도 당분간 우리는 어쩐지 카페에서 사오천원에 판매되는 음료수를 덜컥 사먹을수 없을것만 같다. 남편이나 나나 '지식'을 전하는 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우리는 지식을 폐기하고 돌아온 패륜아(들)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저녁마다 우리는 백팩에 가득 늙은개를, 늙은 어머니를, 늙은 아버지를 짊어지고 내다 팔것이다. 운동삼아.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5. 26. 20:38

 

5월 25일, 식탁이 들어오는 것으로, 일단 나의 집에서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제 냉장고를 채우고 각종 양념등 요리를 해 먹을 재료들만 들이면 된다.  집 수리의 총책임자를 자원하고 시작부터 끝까지 세심하게 관리한 오빠가 집의 완성을 기념하기 위해 엄마를 모시고 오셨다. 내가 엄마를 위해서 신경써서 꾸민 방에서 엄마는 눈을 빛내며 기뻐하셨다.  엄마방은 반고흐의 '노란방'을 연상시키는 '노란방'이다.  우리집에는 피카소의 청동시대를 연상시키는 푸른 방도 있고, 아직 완성이 되지 않는 방들도 있다.  주방은 파랑과 노랑이 만나는 중간지대이다.  엄마는 '식탁이 굉장히 크다!'하고 놀라워하셨다.  오빠는 인덕션이 제대로 작동을 하는지 들여다보았다. 나는 아직 인덕션은 만져보지도 않았다. 정수기의 물을 딸아서 엄마와 오빠께 접대했을 뿐.  아직 내 부엌에 내가 익숙치가 않다. 

 

 

 

남편은 이미 깨끗이 치워져 있는 집안을 돌아다니며 걸레질을 했고, 걸레질을 하는 내내 노래를 불렀다. 남편이 그렇게 오랫동안 흥겹게 노래하는 것을 아주 오랫만에 보았다.  지금 사는 숙소에서는 노래 한곡이 끝나기 전에 청소기가 꺼지는데, 우리집에서는 아주 한참 노랫소리가 들렸다. 

 

 

2002년에 이 집을 떠났으니까 22년만의 귀향이다. 집 근처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오빠는 엄마를 모시고 가셨고, 남편과 나는 산책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 건너편에 구청이 있어서인지 도로변을 페추니아화분으로 단장을 해 놓아서, 우리집 입구는 페추니아와 장미로 뒤덮여 있었다.  많은 것이 변했고, 그 속에서 22년전과 마찬가지로 남아있는 것들도 있었다. 여전히 그자리를 지키는 나무들과 쇼핑몰 그런 것들을 발견하며 내가 집에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지난주에는 해변에 갔었다. 주말에는 사람이 많을것이기에 평일 오전에 도착하여 바다가 밀려 나가는 것과 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실컷 바라봤다.  오후에 우연히 그 해변에서 아이들과 함께 온 조카를 만났다. 그 조카는 우리 큰아들과 동갑쟁이이고 늘 함께 지냈으므로 조카의 아이들은 내 손주와 다를바가 없다. 조카보다도 어린 손주들을 우연히 만난것이 참 기뻤다. 조카의 아들은 이제 유치원에 다니는데 나를 '영어할머니'라고 부른다.  이녀석을 만난것도 2년만이다. 그래도 '영어할머니'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사이에 동생이 생겼다. 조카는 두아이의 아빠노릇을 의젓하게 잘 해내고 있었다. 조카는 내게 두 아이를 맡기고 아내와 근처로 산책을 갔다. 나는 두아이의 '엄마'가 되어 해변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놀았다.  옛날에 이렇게 어린 형제를 데리고 놀던 시절이 분명히 내게도 있었다. 그것이 30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나는 22년전에 떠났던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인천으로 돌아오기 위해 문닥속을 하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아버지, 이 집을 아버지의 집으로 사용하소서. 저도 이곳에서 쉬게하여 주시고, 아버지의 자녀들이 이 곳에서 위안과 평안과 치유를 얻게 허락하소서."

 

 

지금은 숙소에 돌아와있다. 주말이 되면 갈 것이고, 방학이 되면 가서 살것이다.  나는 여전히 나그네처럼 살아간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5. 26. 20:30

 

십년전 비디오클립에서 나의 뜨개 작품들에 뒤덮여있는 나의 오래된 소파를 발견했다. 붉은 양귀비가 그려진 나의 소파.  이 비디오 속에 있는 작품이나 인형들중에서 사라진 것도 있고, 아직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친구들도 있다. 큰 퀼트곰은 아이들이 버렸다고 한다. (집에 물이 넘쳐서 집기가 젖는 사태가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피해를 입은 나의 수집품들이 많이 버려졌다.).  작은 곰은 아직 나와 살고 있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5. 21. 11:03

 

곧 나의 집으로 옮길 퀼트 작품 상자를 점검하다가 발견한 우리 엄마 유여사의 젊은날의 패치워크 작품.  세로가 내 키만하고 가로는 그보다 짧다.  대략 아기이불커버 정도되는 크기이다. 1970년대 초반에 엄마가 잡동사니 헝겊을 모아서 재봉틀질로 만드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이 작품이 50년이 넘은 것이구나) 우리가 성북구 하월곡동에 살던 시절 - 처음에 우리 부모님은 그 집의 단칸에 세를 살았고 (그래서 그 셋방에서 여섯식구가 살수 없었기때문에 나는 시골에 남겨졌던거다), 나도 초등학교 1학년때는 상경하여 그 단칸방에서 이리저리 포개져서 잠을자야 했고, 2학년때 우리부모님은 그 집의 안채로 들어가 세를 살았다 (그래서 안방과 건너방 이렇게 방 두개에서 살게 되었다). 그 이듬해 3학년때 우리 부모님은 그 집을 통째로 다 사가지고 안방, 건너방, 사랑방 이렇게 방 세개를 쓰게 되었고, 문간에 세주는 방이 있었는데 그 셋방에서 영훈이 아버지어머니가 '양장점'을 차리셨다. 그냥 정말 손바닥만한 방에서 손님들 칫수를 재서 옷을 만드는 일을 밤이나 낮이나 했다. 그 집에서는 자투리 헝겊이 많이 나왔는데, 버리기 아깝고 쓸데도 없으니까 그 자투리천을 '주인집 아주머니'인 우리 엄마에게 주었고, 엄마는 그 자투리천으로 이런 패치워크를 많이 만드셨다.  돌아보면 우리 부모님이 상경하여 단칸방에서 시작하여 단칸방에서 한 2-3년 사신것 같고 - 두칸방을 1년 살고 - 그리고 집을 사셨다. 상경하여 4-5년만에 집을 장만하셨다.  그리고 3년후에는 잔디가 깔리고 장미넝쿨이 담장을 덮고, 감나무 잎이 무성한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그 때는 그게 정석처럼 보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자란 나 역시, 가난한 청년과 결혼하면서도 별로 겁이 없었다. 몇 년 고생하면 집을 살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지금은 그게 힘들다고 한다.

 

 

어쨌거나, 저 연보라색 '전자파처럼 지글지글한 무늬' (위에서 둘째줄, 왼쪽에서 세번째)는 비단처럼 보이는 나이롱이었는데 1972년 우리 훈란이 고모 결혼식에 엄마가 입었던 한복감이다.  위에서 다섯째줄 가운데에 보이는 빨강 노랑 까망 사선 체크무늬 나이롱으로 엄마는 내게 리본이 달린 짧은 뽕소매 블라우스를 만들어 주셨다. 오른쪽 맨 끝줄 중간에 보이는 연두색 체크무늬는 고급 면 인데 나는 그 면으로 만들어진, 주름이 많이 잡힌 짧은 치마를 빨간 블라우스와 함께 입었다. 그 치마는 원래 대학에 다니던 우리 사촌언니들의 옷이었는데 대학생 언니들이 '미니스커트'로 입던 것을 물려받아 초등생인 내가 '치마'로 입던 것이다.  우리 사촌언니들은 김지미 엄앵란 시절보다 다소 어린 축이지만, 어쨌거나 신화적 시대를 살던 처녀들이었다. 그 대학생 언니들이 입으시던 주로 이대앞에서 맞춰 입었던 헌옷을 우리가 물려받아 초등학생때 입었다.  그들은 체격이 작았고, 나는 체격이 컸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우리 사촌언니들은 그당시 '준재벌'집 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입던 헌옷은 우리에겐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단, 문제는 처녀아가씨들의 상의의 경우 가슴이 불룩하게 재단이 되어 있었는데 - 어린 내가 그걸 입으면 어딘가 '장애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엄마는 개의치 않고 그런 것들을 '잘 맞네'하면서 입게 했다. 

 

 

자주색 단풍무늬 얼룽덜룽한 천은 엄마가 오래 입으셨던 한복감이다. 하늘색 바탕에 꽃무늬는 영훈이네 집에서 자주 옷을 맞춰입던 '고급 요정' (요즘식으로 룸살롱쯤 되려나? 텐프로?)에 나가던 아가씨의 옷 감이다. 엄마가 재봉틀질을 하면서 '이 옷감은 어떤 아가씨가 맞춘 옷감'이라고 이야기를 하면 - 아빠는 눈살을 찌푸리시며 '그따위 물건을 왜 집안으로 끌어들이는가' 하며 언짢아 하셨다.  우리 골목에는 대학에 나가던 우리 아버지부터 술집에 나가는 아가씨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살았다. 뭐 그게 어쨌다는 말인가. 나는 들강아지처럼 쏘다니는 인생이었다. 

 

 

내 집으로 가면, 나는 주말마다 엄마를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올것인데, 그래서 손님방 하나를 엄마의 취향으로 꾸미고 있다. 이 작품으로 벽 어딘가를 장식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5. 16. 23:06

웹에서 빌려온 이미지. 망고나무 슬랩 테이블

 

"엄마! 망고나무 테이블이어야 해요!"

 

내가 식탁을 알아보러 나간다고 하자, 화상통화를 하던 아들이 외쳤다, "엄마! 망고나무 테이블이어야 해요!"  가구쇼 전시장에는 슬랩 판목들을 전시한 매장이 여럿 있었고 - 단순히 가격만 비교하는 것으로도 어떤 목재를 골라야 할지 정답이 나왔다.  내가 가구쇼에서 슬랩 작품들을 한꺼번에 - 한눈에 조망해보니 의외로 '좋은 나무'를 찾기가 수월했다. 일단, 값이 비싼게 고급스럽고 값이 싼게 싼티가 난다. (가장 기본적인 접근 방법인데, 크게 틀리지는 않는다.) 그 이전에 내가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개별적인 작품들을 감상할때는 눈치채지 못하던 것을 전시장에서 한꺼번에 살피니 저절로 '판별'하는 안목이 생겼다.

 

 

 

일단, 나는 내 생활권의 어느 휴게실에 있는 제법 고급스러워보이는 우드슬랩 테이블을 거의 일년쯤 면밀히 관찰했는데, 내가 그것만 볼때는 그것도 좋아보였지만 - 그것은 '가짜'였다. 엉터리였다. 그것이 엉터리라는 것을 잘 몰랐는데, 좋은 작품 보고 나니 감식안이 저절로 생기더라. 

 

 

우드슬랩 상판들이 전시되어 있을때, 아주 좋은 상판들이 모여있는 곳에서는 향긋한 '나무' 냄새가 난다. 다른 잡냄새가 안난다. 시골 사랑채 - 종일 양지바르던 사랑채 마루에서 나던 자연스런 나무냄새 말이다. 그것보다 급이 떨어지는 슬랩 상판들이 모여있는 곳을 지날때는 '칠 냄새'가 진동을 한다. 나무가 미려하게 재단되어 있고 칠이 입혀져 있다. 그러니 칠냄새가 강하게 난다. 이것이 나쁜것은 아니나, 우리가 우드슬랩을 찾을때 원하는 자연미에서는 멀어져있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는 - 칠이 두텁게 입혀져있어서 칠이 금이가는거다.  그것은 처참했다. 나는 가까운 휴게실의 고급스러운 테이블에서 그 현상을 발견했다.  사전에 이리저리 다니며 귀동냥에 눈동냥한것이 훌륭한 리써치 작업이 되었다. 

 

 

나는 한 열명쯤 둘러앉을수 있는 2200mm 테이블을 주문했다. 우리집 주방이 그 식탁을 담아낼정도로 큼직하다는 것에 감사한다.  몸이 야윈 남편은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기를 힘들어한다. 그를 위해서는 특별히 푹신한 식탁의자를 별도로 주문할 생각이다. 아주 특별하고 예쁘고 튀는 색의 의자를 그에게 선물할 것이다.  나에게는 계획이 있다. 그 식탁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밥을 먹거나 담소를 나누게 할 것이다.  나는 내 집을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채우고 싶다. 사람들의 행복한 웃음소리는 '하나님의 웃음소리'와 닮았을거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음성이 궁금한가?  밥상주위에서 웃는 식구들의 웃음소리가 하나님의 웃음소리일거다. 나는 그렇게 상상한다. 

 

 

 

"엄마가 네가 말한대로 망고나무 테이블을 샀다!" 내가 말해주자 아들은 기뻐했다. 엄마가 자신의 제안을 그렇게 심각하게 듣고 실행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고 한다. 아들이 제 집을 산 기념으로 산 식탁이 망고나무 식탁인데 - 녀석은 그것을 꽤 귀하게 여기고 내가 혹은 아내 (나의 며느리)가  테이블에 물컵을 아무렇게나 놓는것 조차도 못마땅해 했다. 뭐든 코스터(받침)를 사용하라는 것이다.  아들이 사랑하는 망고나무를 나도 사랑하기로 하자. 엄마는 너를  사랑하니까.  아들 내외가 시월쯤엔 휴가를 내어 집으로 올지도 모른다. 망고나무 식탁 주위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웃고 떠드는 것을 상상하니 가슴이 따뜻해진다. 우리 하나님께서 내게 시련을 주실때는 그것을 모두 이겨낼 더 큰 복을 주신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https://www.posteakfurniture.com/blog/what-is-suar-wood-slab-pros-and-cons/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5. 16. 22:28

 

 

지난 주말에 장을 보러 나간 길에 헌책방에 들렀다.  책방은 새책방이건 헌책방이건 그냥 지나치기가 힘든 곳이니까. 일없이 기웃대다가 콘라드 로렌츠의 '솔로몬의 반지' 하드커버본을 발견했는데, 어쩐지 이 책을 읽고 싶어졌다.  1판 1쇄가 2000년, 그리고 이 책은 22쇄 2014년에 나온 책이다. 아마도 나는 1판1쇄를 사서 읽었을것이다.  그리고 24년이 흘렀을것이다. 

 

'솔로몬의 반지'는 아마도 나를 '자연과학'으로 이끈 최초의 책이었을것이다. 그해에 나는 폭식하듯 생물학, 동물학, 물리학, 진화생물학, 기술서적등 평소에 내가 읽지 않았던 과학책들을 밀린 숙제 하듯 읽어'치웠다.'  '질풍노도의 자연과학책 탐독시기' 정도 되려나.  그해에 읽었던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이후에 플로리다주립대 대학원에 들어갔던 첫학기에 '패러다임 쉬프트'라는 주제로 SLA의 패러다임 변화를 논할때도 역시 언급이 되어져서 놀랐었다.  그 놀라운 과학책의 세계로 이끌어준 책 '솔로몬의 반지.' 

 

 

 

 

 

나는 이 책을 나의 집, 내 서재의 하얀소파에서 뒹굴며 읽었었다.  이제 나는 집으로 돌아가, 내 소파에 누워서 오래된 이솝 이야기책을 읽고, 또 읽고 하듯 이 책을 띄엄띄엄 읽을것이다. 

 

나는 요즘 좀 맥이 빠졌다. 나이가 들어서 에너지 레벨이 낮아진 탓도 있지만 - 최근에 내 책의 최종 작업을 해야 했다. 내 책은 시월에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독서의 계절에 맞춰서 서점에 출시하려는걸까? 나는 알고 있다. 시월이 금세 닥치리라는 것을. 나에게 시간은 가혹하리만치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것처럼 여겨진다. 시월은 금세 닥칠것이다.  그때까지 별일 없기를.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아무튼 최종 원고 작업을 하고 나니 맥이 빠지고, 머릿속이 텅 빈 기분이 든다.  나는 앞으로 또다른 책을 쓸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가?

 

우리 오빠는 이따금 내게, '너 왜 소설 안쓰니?'하고 묻는다.  오빠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젊은날의 나를 기억하는 몇 안되는 사람중의 한명이다.  오빠는 내 소설이 출판되어 나온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몇 사람중의 한명이다. 그 책이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는 소설에서 너무 멀어져있다. 근 이십여년간 여간해서는 소설책조차 읽지 않았다. 사람이 어떤 임계점을 지나면, 소설을 쓰지 못하게 된다.  인생에 대해서 너무 상세하게, 그리고 입체적으로 알아버리고나면 소설을 쓰는 일이 어딘가 맥이 빠진다.  소설도 아직 사람이 젊을때 시작할수 있는거다. 물론 젊어서 소설 쓰기를 시작한 사람은 나이 들어서도 잘 써나갈것이다.  하지만, 인생을 너무 많이 알아버린 사람은 소설을 시작하기기 힘들어진다.  나는 어쩌면 더이상 무엇을 쓰지 못할수도 있다.  그래도 상관 없다. 나는 글을 쓰기보다는, 바닷가로 가서 밀물과 썰물을 바라보는 것이 더 좋다. 

 

사랑이 끝난 자리에서 글을 쓸수 있을거라고 상상했던 적이 있는데, 사랑이 끝나고나면 다 끝나는거다. 파도소리만 남는 것이다. 파도소리면 족한 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5. 16. 11:06

 

소파를 샀다. 이 소파이다. 가구 쇼핑을 함께 따라 나서 주었던 나의 막내동서는 내가 이 소파 앞에 서서 관심을 보이자 - 나를 슬며시 째려 보았다. (맘에 안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젊은 막내동서는 요즘 유행하는 기능성/기계식 기역니은자 (한국에서 일명 카우치소파라고 불리는) 그런 소파를 살 것을 기대했던 눈치이다.  물론 처음에 나도 이 소파를 살 생각은 별로 없었다. 내가 찾던 디자인의 소파 프레임을 발견했으니 여기서 시작해서 좀더 현대화된 그러나 클래식한 프레임을 유지하는 소파를 찾아 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 매장에서 이런 클래식한 프레임의 소파를 철수시키기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요즘 통 안팔린다고) - 그 소파를 팔아치우고 싶어했다. 

 

이 소파에 대하여 맘에 안들어하던 내 막내동서는 '그것 참 잘되었다. 이런 구닥다리 디자인을 요즘 누가 산단 말인가' 이런 심산으로 거래를 깨겠다고 작정한 듯 가격을 무자비하게 후려치기 시작했다. 동서는 이 소파의 가격을 말도 안되는 가격으로 후려치면 거래가 성사가 안 될 것이고, 그러면 저 고물딴지같은 '형님'이 마음을 접고 매장에서 떠날것이라고 기대했으리라. 

 

일단 소파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던 나는, 비슷한 디자인의 다른 가구들을 둘러보기 위하여 매장 이곳저곳을 안내받으며 돌아다녔고 - 그 사이 막내동서는 매장 사장님과 소파 가격 흥정을 진행했다. (그녀의 목표는 판을 깨고 어서 이곳을 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나는 이 매장에서 소파와, 일인용 리클라이너와, 마스터베드룸 침대 한개와, 손님 방 용 침대 두개와, 거실장과, 협탁등을 계약했다.  알뜰한 살림 베테랑인 내 막내동서는 저 소파값을 '중고거래 앱에 나온 가격보다 더 싸게 흥정'하는데 성공했고 (안 사겠다고 막나가는 사람과의 거래에서 매장 사장님은 속수무책으로 당한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그분들이 손해보는 장사를 할리는 없다), 다른 가구들에 대해서도 '응징'을 가하는 무서운 심판처럼 가격을 후려치는 것처럼 보였다.  가구 쇼핑을 마치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동서는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엔 형님이 그 소파 앞에 서있는데, 나는 형님이 미쳤다고 생각했어요. 마침내 우리 형님이 미치셨구나... 그런데, 그 앞에 서서 흥정하면서 보면 볼수록 그 소파가 맘에 드는거예요. 지금은 그 소파가 너무 맘에 들어요!"  나로서도 소파값이 너무 비싸서 포기할까 생각했는데, 동서가 흥정을 잘 해줘서 내 예산범위내에서 이런 고급 소파를 장만하게 되어서 마음이 흡족했다.

 

 

남편은 사실 요즘 유행하는 기능성 (리클라이너도 들어가있고, 뭐 컵홀더에, 유에스비도 꽂을수 있는 기계식 다기능) 소파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구식 소파를 고르게 되었으므로 남편을 위해서는 개인용 리클라이너를 주문했다. 난 그 기계식 리클라이너를 볼때마다 어릴때 다니던 동네 '이발소'의 의자가 생각난다. 나는 그런 의자에 앉을 생각이 없다.

 

 

소파는 내게 각별하다.  나는 예쁜 소파를 갖고 싶다. 최근  한달 가까이 집근처 가구점을 돌아다니며 소파며 가구 구경을 했다. 남편은 가구의 기능성을 봤고, 나는 가구의 '디자인'을 봤다.  가구에 대한 내 생각은 이런 것이다 -- 2002년에 집을 떠난후 22년간 나는 '내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미국에서는 줄곧 월세 아파트에서 살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사택에 살고 있다. 특히 사택의 경우 모든 가구며 집기가 이미 준비되어 있어서 내가 살기위해서 뭘 더 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창세기 속의 인물들처럼 집도 없이 22년간 떠돈 느낌이다. 불행했다는것이 아니라, 때로는 '내 집'이 그리웠다는 것이다.  최근에 오빠가 '잊혀진 나의 아파트'를 기억해 냈고, 그 집을 수리해주셨다.  너무 오래 바깥으로 떠돌았으니, 이제는 집에 가서 편안한 시간을 가지라는 배려였다. 나는 집에 가보지도 못하고 있었고, 오빠가 드나들며 그 집을 싹 새로 수리해주셨다.  오빠는 이따금 전화를 걸어서 '벽지 무슨색으로 할래? 타일 무슨 색으로 할까?' 이런 '색깔'과 '디자인'에서 내 판단을 구했다.  22년전에 내가 떠난 내 집은 우리 오빠의 선의와 노력으로 새단장이 되었다.  나는 플로리다의 노란 햇살과 파란 바다 컨셉으로 노랑과 파랑 인테리어 색을 정했다.  플로리다의 바다와 햇살이 우리집에 가득할것이다. 

 

 

소파는 내게 각별하다. 나는 예쁜 소파를 갖고 싶다. 한달 가까이 근처 가구공단의 큼직한 전시장들을 둘러보면서 요즘의 가구시장 트렌드와 가격대를 익혔다.  요즘 나오는 가구들은 전혀 내 영혼을 끌어당기지 못했다. 가구점을 아무리 돌아다녀봐도 - 나를 감동시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달 넘도록 시간을 보냈고,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막내동서가 '가구박람회' 티켓을 구해놓고 그 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가구박람회에서 나는 '영혼'을 건드리는 가구를 찾지 못했다. 내가 "찾는게 없어. 피곤하다. 그냥 집으로 갈까봐" 하자, 막내도련님 (우리 동서의 남편)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근처 가구공단에 가보자 했다.  안그래도 되는데. 내게 '막내 도련님'이지만 - 대학생때는 내가 도시락을 싸주곤 하던 귀한 시동생이지만 그도 지금은 50이 넘은 신사가 아닌가. 우리 모두 팍삭 늙었다.   그렇게 국내 최대 가구공단 다섯손가락안에 드는 가구점 거리로 가서 몇집을 도는 동안 나는 반복했다, "내 영혼을 건드리는 가구가 안나와. 나를 건드려야 내가 살텐데." 


 

그렇게 몇집을 돌다가 마침내 이 소파 앞에 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소파를 시작으로 그 매장에서 일사천리로 중요 가구들을 선택했다. 

 

 

 

나의 아파트는 우리 가족이 2000년도에 사서 입주한 곳인데, 그 때 너무너무 행복했다. 동네에서 몇년간 살면서 눈여겨 보던 큼직한 아파트였다. 이곳에서라면 아이들이 다 장성하여 결혼을 해 나가고, 손주들이 놀러와도 좋겠다고 - 이제 평생 이사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좋아했다.  그당시 아이들이 어렸으므로 거실에 TV를 놓는 대신에 '서재'처럼 꾸미자고 생각하고, 근처 목공소에 책꽂이를 맞췄고, 소파를 한달 넘도록 고르러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골라낸 소파가 아래와 같은 것이다. (디자인은 동일하고, 패브릭의 꽃무늬가 조금 차이가 나지만 이런 분위기였다). 일인용 암체어는 올리브색 체크무늬였다.  당시에 '수입가구점'에서 이 소파 세트를 샀는데, 제법 값이 나갔다. 서양사람들 몸집에 맞게 제작된 것이라 소파가 다소 높기도 했고, 아무튼 그당시에는 꽤나 '별중스럽고' 유별난 아이템이었다.  보수적인 사람들 눈에는 '유난맞아'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 언니는 - 너는 평범한걸 사지 왜 이렇게 유난맞은걸 사냐고 평했다.)  남들의 평이 어쨌건, 나는 내 소파가 너무너무 좋았다.  2년후에 우리는 집을 비우고 미국으로 떠났고, 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몇년후에 남편이 모든 살림을 싸가지고 버지니아로 왔고, 나는 몇년 만에 이 소파를 버지니아에서 만났다.  원래 미국에서 수입해 온 소파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셈이다. 

 

 

그 이래로 이 소파는 대략 2020년도까지 우리 미국집에서 살았다. 내가 미국집을 떠난 후에도 방학때 가면 소파는 여전히 그자리에서 나를 반겼다. 나는 침대에서 잔 날보다 이 소파에서 잔 날이 더 많을 것이다. 패브릭으로 만들어진 내 소파는 나달나달 해지고 낡아갔고, 나는 조안스 패브릭에서 소파수선용 헝겊을 사다가 덧대어 꿰매가며 이 소파와 살았다. 소파와 나는 '함께 살았다.'  이 소파에는 우리 개 '왕눈이'의 냄새가 배어있었고, 그 모든 시간의 냄새가 스며있었다. 

 

 

2020년쯤 아이들이 장성하여 하나는 아리조나로 하나는 버지니아 남부 도시로 직장을 따라 이사하게 되면서 집의 집기며 가구들을 나누거나 정리해야 했는데, 너무나 누덕누덕한 소파를 마침내 '처분'하는데 모두 동의했다.  두 아들이 소파를 들어 아파트 쓰레기장에 갖다 놓았다. 나는 내 방에 꼭꼭 숨어서 소파가 나가는 것도 보지 않았고, 아파트 쓰레기장 앞에도 가지 않았다.  나는 약 일주일 가까이, 외출할 일이 생겨도 일부러 아파트 쓰레기장을 피하여 멀리 돌아가곤 했다. 내 사랑하는 소파가 버려져있는것을 두눈으로 볼 수가 없어서. 소파는, 집에서 키우던 '개'와 별 차이가 없는 '정서'적 대상이었다. 나의 소파는 20년간 나와 함께 살았다. 소파를 끌고 왔던 남편이 워싱턴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큰애가 한국으로 가서 군대에 가 없는 동안에도, 작은 애가 대학 기숙사로 가서 나와 왕눈이만 남겨졌을때에도 나는 별로 외롭지 않았다. 나는 왕눈이와 함께 소파에 기대고 눕고 뒹구르고, 술래잡기를 하면서 태평하게 시간을 보냈다.  나는 내 소파를 사랑했다.

 

 

 

나에게 소파는 각별하다. 내가 그 품에 눕고, 내가 그 품에 기대고, 안겨서 위로를 받는 '존재'다.  내 소파는 '사무용가구'나 '공공시설' 혹은 '호텔가구'와는 조금 달라야 한다. 내 소파는 '집'이어야 한다. 집의 가구는 '집 가구'여야 한다. 나는 아마도 가구를 찾는동안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가구를 다 정한후에 이런 생각들이 정리가 되었다.  내가 찾아 헤메던 것은 '집'에 어울리는 가구였다. 

 

 

 

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이 오면, 나는 내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곳에서 푹 쉴 것이다. 나의 옛 소파는 사라지고 없지만, 그 소파를 닮은 새 소파가 아주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를 반길 것이다. 

 

내가 갖고 싶은 집 색상 컨셉: 햇살이 졸린듯 따스하고, 파란 바다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나가고, 나는 고양이와 모래사장에 누워서 낮잠을 자야지.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4. 16. 22:54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2. 8. 22:27

 

2024년 2월 8일 목요일.

 

 

지난해까지 내가 수행하던 중요 프로젝트들을 대거 정리하면서 나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말했었다, "하나님께서 새해에는 뭔가 프로젝트를 주실것 같아요.  정리해 놓고 가만히 있으면 뭔가 보내실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상치 못했던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를 하나님이 툭 던지셨다.  나는 닷새간 잠을 이루지도, 밥을 먹지도 못하고, 숨쉬는 죽은 사람처럼 멀거니 시간을 보냈다.  목사님과 교회 어르신들께서 통곡의 기도를 올려주셨다. 내 머리와 뺨위로 내 눈물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눈물이 떨어져 흘러내렸다.  그분들의 눈물과 기도가 나를 일으켜세웠다. 

 

오빠와 언니가 응원해주기 위해서 온다길래, 집이 아닌 해변에서 만나자고 했다.  바닷물에 서리가 내린듯 살짝 성에가 낀 쌀쌀한 날씨였지만, 햇살이 따스했고 바람이 없어서 포근한 느낌이었다. 

 

 

개펄 멀리서 바다가 소리를 내며 밀려오고 있었다. 바다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며 오빠와 나는 맨발로 개펄을 걸었고, 남편과 언니는 개펄에 들어가기 싫다고 해안 보드워크를 걸었다. 남편이 높다란 산책로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어 주었다.  오빠는 개펄에서 맨발로 걷는것이 평생 처음 경험이라며 즐거워하였다.  나도 오랫만에 개펄을 걸을수 있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오빠는 개펄위에 아랍글자처럼 꼬불꼬불 씌어진 조개들의 발자취를 신기해 했다. 한번도 그런것을 본적이 없다고 했다. 세계적인 기업의 경영인이었던 그는 너무 큰것들만 보느라 아주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제대로 들여다 볼 시간이 없었나보다. 

 

 

바닷가 산책을 마치고 근처 카페로 가려고 자동차로 갔을때 - 내 자동차 열쇠가 사라지고 없었다. 외투 주머니에도 바지 주머니에도, 가방에도 어디에도 없었다. 가방을 거꾸로 들고 다 털어서 보아도 자동차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도 없었다. 해변으로 달려가 내가 모래를 털고 양말과 신발을 다시 신었던 자리에도 가보고, 산책로 입구쪽에도 가보았다. 혹시 내가 실수로 흘렸나해서.  내가 다녔던 곳을 다시 뒤진다해도 열쇠를 되찾을수 있을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일부러 멀리서 나를 보러온 손님들을 마냥 기다리게 할 수만도 없었다. 마침 남편이 늘 여벌의 열쇠를 갖고 있으므로 크게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단지, 내 열쇠에 함께 걸려있는 연구실 열쇠...그것이 없으면 연휴가 끝날때까지 연구실 출입이 불가하다. 연휴동안 밀린 일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으로는 '연구실 열쇠를 어떻게 해결하지?' 생각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기위해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습관처럼, 아무것도 없이 텅빈 내 외투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지던 내 손 끝에 무언가가 감지되었다.  외투 주머니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그리고 외투자락으로 무엇인가 굴러다니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외투자락 끝에, 뭔가가 있다. 내가 손으로 호주머니 아랫쪽 외투자락을 훑어보니 거기 뭔가 입체적인 것이 있다.  외투에 난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뒤져보았다.  열쇠였다. 내 자동차 열쇠가 주머니에 생긴 구멍을 통해 외투 안쪽으로 빠져 들어가서 내가 움직일때마다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잃어버린 열쇠는 내 안에 있었다.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도록, 가장 안전하고 깊숙한 곳에서 내 열쇠는 뒤척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열쇠는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내가 잃어버렸다고 상상 했을 뿐. 열쇠는 나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 내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시는 메시지라고 판단했다. 

 

하나님은 내가 풀어내기 힘든 고난도의 문제를 하나 주셨다.  나는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애쓰다가 낙심하여 미치거나, 죽자고 작정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슬퍼할것이고, 좌절할 것이고, 많이 울것이고, 많이 기도할 것이고, 사색할 것이고, 자꾸만 자꾸만 작아져서 마침내 내가 나를 잃을 것이고, 나는 매일 매일 죽을것이다.  하지만 나는 매일 매일 다시 살아날 것이고, 내가 죽은 자리에 새로운 내가 생성될것이며, 어쩌면 하나님께서 주신 어려운 문제의 해답을 풀고, 잠긴것처럼 보이는 문을 열을수 있을것이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자명하다: 아가, 아가, 소중한 나의 아가야. 내가 네게 문제를 주었을때 이미 나는 너에게 열쇠도 주었음을 기억해라.  나는 네가 이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켜 주었다.  나는 네가 벌여놓은  여러가지 쓸데없고 잡다한 일들을 정리하도록 해 주었고, 성경통독을 통해서 나의 존재에 눈뜨게 해 주었다. 빅토를 프랭클의 책도 읽도록 해 주었다.  사실 너는 문제를 풀 준비가 다 되어있다. 이제부터 문제를 풀면 된다.   이제부터 내가 네 안에 감춘 열쇠를 네가 발견해라. 꼭 성공하길 나도 빈다. 아가 아가 울지 말고 일어나서 네가 갖고 있는 열쇠로 문을 열고 내게 더 가까이 오너라. 열쇠는 네 안에 있다. 아가. 네가 죽고, 새로운 네가 열쇠를 찾아내기를. 

 

 

이제부터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길을 찾아낼것이며, 거기서 나의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길이 멀고 지루하고 힘들겠지만, 이 여정이 어딘가에서 끝날때, 거기 블루벨이 만발한 길의 끝에서 나는 쉴 것이다, 다음 프로젝트를 기다리면서. Dear God, I'm ready. Let's go.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1. 30. 18:44

카톡을 통해서 '자동차검사'를 필하라는 메시지가 와서, 사전에 온라인 신청을 했고, 오늘이 예약 날짜라서 다녀왔다.  카톡으로 메시지가 왔을때도 스캠인지 아닌지 헛갈리니까 온라인 검색을 해보고 '정상적인 메시지'라는 것을 확인 한 후에 예약을 진행하였고, 자동차검사장에 가기 전에도 검색을 해보니 벌써 여러 분이 자신의 블로그에 내가 가기로 한 검사장에 다녀온 후기를 사진과 함께 상세히 적어 놓으셔서 현장에 가면 어떠할지는 충분히 가늠하고 다녀올 수 있었다. 

 

버지니아에서는 해마다 emission 검사를 하고 검사필증을 자동차 번호판에 붙여 놓는 식인데, 한국에서는 신차의 경우 출고 이후 4년, 그 이후부터는 2년에 한번씩 자동차 검사를 받는것 같 같다.  그러니까, 내가 내차를 새로 구입한지가 벌써 4년이 되었다는 뜻이다. (세월이 빠르구나.)  예약할때 이미 검사비 지불 정보를 입력했기 때문에 예약한 시간에 차를 갖다 놓고 기다리니 검사필증을 프린트해주고 그것이 끝이다.  내 차는 - 그야말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중고차 딜러들이 무조건 광고하는 '여교수가 타던 차' 바로 그런, 얌전하고 주행거리 많지 않고, 사고 기록 전혀 없는, '거의 새차'에 해당된다.  검사필증 내주시던 과장님이 '차 별로 안타셨네요. 새차네요' 하셨다.  출퇴근도 안하는 차이니까 기껏해야 근처 농수산물 시장에 채소 과일 사러 다니고,  주말에 엄마 보러 다니고, 가끔 바닷가에 바람쐬러 가거나, 신촌에 다녀오는. 주로 지하주차장에 얌전히 서 있는 '여교수차.' 

 

2년 후에 다시 오라고 한다.  고맙다 복덩이 내 차. 

 

* 뭔가 내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하여 정보가 필요할 때, 검색을 해보면 누군가가 블로그에 상세하게 사진과 함께 정보를 올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체로 요즘은 '광고'를 다는것이 대세인 모양인데, 어떤 분은 광고도 없이 상세한 정보를 담아 놓으셨다. 블로그 자체에 대한 애정이랄까, 광고도 없이 좋은 정보를 올려주시는 분들이 아직도 많이 계시는구나.  그런 것을 발견할 때 기쁘다.   옛날에 우리들은 광고 그런것에 신경쓰지 않고 정말 정보를 많이도 올리고 했는데...  지금은 내가 정보도 안올리지만, 앞으로도 나는 광고없이 나의 블로그를 사용할것이다. 어차피 나혼자 쓰고 보고 하는것이니까.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1. 30. 01:22

아마존 킨들에서 저가에 판매가 되길래 (USD2.99) 간단히 읽어보려고 샀다가 첫 챕터만 읽었는데 - 책의 효과를 보았다. 서문에 저자는 'No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욱 존중받는다'고 설명한다. Yes 라고 무조건 받아주는 사람은 다소 만만하게 보이고 No 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욱 당당해보이고 주도권을 가질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을 읽고 났는데, 마침 내가 어떤 결정을 할 일이 생겼다. 평소 같았으면 '그래. 해줄게'였겠으나, 지금 방금 아주 좋은 조언을 들었던터라 '아니. 안해'라고 답했고 내 결정이 옳다는 것을 나는 확신힌다.  나의 시간과 노력은 내가 주도적으로 결정한다. 

 

기분이 좋아져서, 이 책을 좀더 샅샅이 읽기로 한다. 나는 이제부터 조금더 집중적으로 내게 꼭 필요한 것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며 살겠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1. 30. 00:23

 

저자 Rex Ogle 의 자전적 어린시절 이야기를 담은 non-fiction 이라고 한다. 

 

Free lunch (무료 급식) 라는 미국의 청소년 복지 시스템이 있다. 점심시간이 되면 미국의 초-중-고등학교 (K-12) 학생들은 학교 식당에 가서 돈을 내고 점심을 사 먹거나, 자기가 집에서 싸가지고 온 점심을 펼쳐놓고 먹는다.  그런데 식당에서 점심을 골라서 먹는 학생들 중에 돈을 내지 않고 무료로 받아 먹는 학생들이 있다. 학교에 저소득이라고 알리면 대개 그것이 가능해지는 듯 하다.  내가 플로리다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유학을 할 때, 가난한 유학생 자녀들도 '저소득층'에 해당되었고 학교에 신고만 하면 무료 급식이 가능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애들 기죽이기 싫고 내 형편이 애들 점심도 못 먹일 형편이 분명 아니므로 무료급식을 신청하지 않았었다.  나와는 반대로 '사회복지'를 전공하던 '지금은 모 명문 주립대 교수이신 내 이웃친구'는 '당연히 누려야할 복지 서비스를 외면할수 없다'며 자녀들에게 무료점심을 받게 했다. 그 댁 자녀들 역시 누려야 할 복지를 누리는 것이 지당하다고 믿고 그다지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무료 급식 서비스를 누린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이 글의 저자는 중학교 (6학년)에 들어가서 자신이 무료급식자로 등록이 된것에 대하여 수치스러워하였고, 다른 친구들이 그것을 알아챌까봐 전전긍긍하고 괴로워한다. 그래서 제목도 '무료급식 Free Lunch' 이다.  '무료급식'은 여기서 - 미국 사회에서 '무료급식' 서비스를 신청할수 밖에 없는 보통 사람들의 헤어나기 힘든 상황 전체를 대변한다고 할 만하다. 

 

어찌보면 비참하고 슬픈 상황인데, 다행스럽게 책의 저자이며 화자이며 주인공인 렉스는 착하고 바르게 상황들을 헤쳐나간다. 해피엔딩이다. 그리고 그는 멋진 작가가 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미국에서 저자와 비슷한 또래로 성장한 내 두아들이 학교에서 겪었을 여러가지 장면들을 상상할 수 있었다.  큰아이 존이 가끔가다 그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웃기는 에피소드를 늘어놓으며 온가족이 포복절도 하곤 하는데, 녀석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써보라고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

렉스는 자기가 가난하고 해진 옷과 신발을 신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백인 아버지와 멕시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나 피부빛깔이 진하다는 이유로 영어선생님(우리나라에서 국어선생님)에게 차별을 당하고 있음을 직감한다. 자유롭게 읽기 시간에 그가 천페이지가 넘는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네가 그렇게 두꺼운 책을 어떻게 읽는다는거냐' (거의 다 읽어가는데요)  '네가 읽는다면 나쁜책이 분명하다, 네 엄마에게 알리겠다' (헌책방에서 엄마가 사준건데요) 이런 식의 노골적으로 경멸섞인 반응을 보인다.  하루는 단어 받아쓰기 시험을 봤는데, 분명히 모든 단어를 정확히 썼는데도 85점을 받았다. 선생님에게 가서 어디가 틀렸는가 묻자 선생님이 세개의 단어를 가리켰다. 'U'자로 쓴것이 'W'로 보인다는 것이다.  렉스가 '나는 분명히 철자를 알고 있다. 나는 잘 못 쓰지 않았다'고 항변하자 - 선생님은 95점으로 점수를 고쳐줬는데 - 5점 깎은 이유는 글씨를 헛갈리게 쓴것에 대한 징계라고 했다.  화가난 렉스는 "선생님, 이거 20개 문제를 내셔야 했는데 선생님은 19개의 문제만 내셨어요. 한문제 빠졌다구요.  그 한가지 빠진 단어를 제가 채워드리지요"라고 말하고 시험지에 PREJUDICE (차별) 이라고 적어 놓고 자리를 뜬다. 

 

이튿날, 렉스는 겁에 질려서 학교에 간다. 분통을 터뜨린것까지는 기분이 좋았으나 아무래도 선생님이 단단히 화가나서 자신을 응징할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수업시간에 렉스를 복도로 불러낸 선생님 - 벌벌 떨고 있는 렉스 -- 선생님은 렉스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며 용서를 빌었고 렉스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 정말 현실에서 이런 극적인 태도의 반전이 가능할까?  이야기에 재미를 더하기위한 장치가 아닐까? 읽으면서 생각을 해 봤는데, 뭐 사실이건 허구이건 간에 여기서 교훈은 'You should resist and speak up' 으로 정리 될 수 있겠다.  부당한 일이 진행될때, 가만히 있으면 바뀌는게 없다, 어느 순간에 결연히 맞서야 한다. 그래야 깨지거나 해결되거나 할 것이다. 사회가 정의롭지 않게 돌아갈때, 충돌 없이 바뀔수 있는게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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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스가 그보다 조금 부유한 친한 친구와 만나서 놀다가 식품점에 가게 된다. 그 친구가 목이 말라서이다. 렉스도 목이 마르지만 돈이 한푼도 없으므로 아무것도 살 수가 없다. 식품점에 간 친구는 계산도 하기 전에 차가운 음료수 하나를 꺼내서 마신다. '내가 계산도 안하고 음료수를 마시면 나는 잡혀갈텐데...' 하고 렉스는 상상한다. 

 

친구는 점원이 바쁜 틈을 타서 진열대에 있는 과자 나부랑이들을 주머니에 집어 넣는다. 발각되지 않는다. 친구는 렉스에게도 어서 먹을것을 훔쳐서 옷에 숨기라고 한다. 하지만 렉스는 물건을 훔치지 않는다 '너희 아버지는 변호사라서 걸려도 별일 없겠지만, 나는 잡히면 교도소에 가게 될거야'하고 렉스는 생각한다.  여러가지 과자를 몸에 숨긴 친구는 자신이 마신 음료수의 빈캔을 계산대에 올려놓고 점원과 즐거운 대화를 하며 계산을 치르고 나온다. 그는 밝고 명랑하고 세련되고 그리고 점원들의 환대를 듬뿍 받는 귀공자. 그들이 상점에서 나오는데 점원이 렉스를 불러세운다. '너 옷속에 뭔가 숨겼지?' 점원이 렉스의 몸을 더듬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점원은 심지어 미안한 기색도 없이 그를 보낸다.  이를 보고 있던 친구는 깔깔대며 말한다, "내가 훔치는 동안 점원이 너를 감시했단 말이지. 우리 보석가게도 털러 가자. 네가 의심받는동안 내가 훔치면 되니까."   렉스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그런데 너는 부자이고 아버지도 변호사이고, 갖고 있는 돈도 많은데 왜 물건을 훔치는거지?" 렉스가 묻자 친구는 대답한다."그냥, 훔칠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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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중심의 미국사회에서 유색인종이나 이민자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백인들이 100퍼센트로 일을 할때, 나머지 우리들은 200퍼센트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간신히 그들이 누리는것에 근접할 수 있다. 하지만 설령 근접한다고 해도 동등한 혜택을 누린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비장애인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 시스템속에서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한 생산성과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비장애인보다 몇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현실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구조 속에서 여성이 남성이 누리는 것만큼을 누리기 위해서 역시 몇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것과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정치사회경제적인 힘을 갖고 태어난 자와, 그것을 갖고 태어나지 못한자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갖고 태어나지 못한자'들은 '갖고 태어난자들'에 비해서 힘들고 피곤한 삶을 살게 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그것은 자명한 일이고. 

이런 공공연한 문제를 사회 시스템을 개선하는 식으로 바꾸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 동시에 '개인'이 이것을 어떻게 대면할것인가의 문제도 동시에 생각해봐야 한다.  각자 잘 싸우고, 공동의 장에서 만나서 또 잘 싸우고. 서로 도와주고. 서로 위로해주고. (뻔한 소리). 

 

 

이민자들은 이것을 디폴트로 받아들이고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1. 29. 01:34

 

어릴때 (대학시절에) -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한글 번역서로 요즘 '먹방 선수'들이 한꺼번에 라면을 열다섯봉지씩 먹어치우듯이  그렇게 그냥 속도전을 하듯 방학동안에 하루에 한두권씩 책을 읽어 '치우던'시절 한번 읽고 지나갔던 책이었다.  그 당시에는 이 책을 읽으며 아무런 것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냥 이야기가 너무 끔찍하고, 그냥 대체로 끔찍하고 괴로운 '안네 프랑크의 일기'류의 무엇으로 대충 읽고 지나간 듯 하다.  그러니까 중학교 때 사회선생님의 스토리텔링으로 '안네의 일기'를 발견하여 - 그 책을 무슨 사서삼경처럼 모시고 읽었던 시절이 있었고, 이에 대한 역작용으로 머리가 굵어진 후 부터는 '이차대전과 유태인들 고통겪은 이야기'에 대하여 그냥 '지겨움'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후로도 내내 그런 기분이다. 홀로코스트의 끔찍함과, 유태인들의 고통과, 그들이 역사의 다른 장에서 펼치는 '만행'에 대한 삐딱한 시각이 여전한 가운데 - 얼마전 이 책이 눈에 들어왔고, 이제서야 왜 이 책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고 읽는것인지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으니 -- 나에게는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세월'과 '경험'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물론 내가 저자와 같이 끔찍한 고통을 겪지는 않았으므로, 여전히 그가 말하는 것의 심연까지 닿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지금은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이해하고, 공감한다.  이 사람의 이야기는  그대로 (내가 여전히 사색하고 있는 하박국 3장 17-19)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금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를 지옥에서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거룩한 책'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내가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에 소개된 '죽음의 수용소'와 같은 극한 상황의 경험치가 필요했을수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죽음의 수용소를 전전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2022년에 내가 처했던 상황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수용소와 다를바가 없었던 위급한 병동. 그 안을 돌아다니던 친절하거나 불친절했던 감시자들, 친위대원들, 늘 기웃대고 있던 죽음. 5분단위로 전해지던 코드블루.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  내가 유일하게 상황을 컨트롤 할 수 있었던 것은 - 성경책을 펼치고 시편을 필사하거나 조용히 기도하는 일이었다.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을때는 찬송가를 불렀다.  다른 사람이 있을때는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방해를 하면 안되므로.  조금 여유가 생기면 '수용소'가 마련해준 기도실에 가서 한시간쯤 기도를 드렸다.  '병동'과 '수용소'가 참 흡사하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발견했다. 

 

이 책의 저자가 기술한 것을 보면 - '수용소'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현명하게 상황에 대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죽음을 넘어서는 무엇이 간절히 필요하던 시기에 나는 죽음을 넘어서는 존재와 함께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위로 받았고, 내가 왜 하박국의 노래에 매달려 있는지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 다시 삶을 들여다보면 - 이 책이 아직도 유효한 이유는 - 결국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빠져나가기 힘든' 수용소를 살고 있는 셈이다. 이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잘 보낼것인가. 저자는 고통의 이야기를 하며 스피노자의 윤리학 일부를 소개하는데 (대략 내 말로 설명하자면 )-- '고통을 객관적으로 관조할 때, 고통이 삶의 의미로 다가온다, 곧 우리는 고통의 심연에서 벗어난다는 것인데 -- 이는 불교에서도 역시 동일한 가르침이 있고, 나는 고통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훈련을 '수용소'에 있을때 받았던 것같다.  그 당시 나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지금도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안다. 

 

 

이 책에 소개되는 '테헤란의 죽음' 이야기는 작가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어느 부잣집의 머슴이 어느날 '저승사자'를 맞닥뜨렸다. 깜짝 놀란 모슴은 부자 주인에게 저승사자로부터 도망치기 위하여 테헤란으로 도망가려하니 말 한필을 달라고 한다.  부자는 머슴을 살리기 위하여 가지고 있던 말중에서 가장 빠른 말을 그에게 주고 빨리 도망가게 해준다. 참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머슴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저승사자가 서 있었다.  당신은 왜 우리 머슴을 놀라게 한거요? 하고 주인이 묻자 저승사자가 답했다, "놀래키려고 한것은 아니고, 내가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직 여기 있길래 내가 그만 깜짝 놀랐지 말입니다."  결국 머슴은 사력을 다하여 예정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거다.  그러니 우리는 '운명'을 회피하려고 노력해봤자 소용이 없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상황'에 대하여 회피의 가능성이 없을때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그는 말하고 싶어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황에 대하여 속수무책일때 (가령, 갑자기 죽을병 선고를 받았을때, 갑자기 사고로 인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재난을 겪고 있을때, 구약의 욥과 같이 모든것을 잃고 괴로움에 빠졌을때, 그 재난에는 내 잘못도, 합리적인 원인도 그 무엇도 없을때. 내가 속수무책일때)  그때, 나의 자세에 대하여 - 저자는 바로 그때 삶의 의미를 들여다보고 방향을 잡으라는 조언을 하고 있다, 그의 경험에 의거하여.  그는 운좋게 살아남았지만, 설령 가스실에 끌려가 죽음을 당해야 했던 사람들중에도 성자들이 있었고, 선한 사람들이 있었고, 악당들이 있었다.  살아남을 운명이라 살아남았듯, 죽을 운명이라 죽었을 뿐이다. 그 운명에 어떤 설명을 기대해선 안된다.  이런 면에서 '운명'과 '우연'은 동일한 뜻으로 보인다.  그저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회피하건 환영하건 일은 무심하게 일어난다. 이 때 이것을 대하는 나의 자세만큼은 내가 선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 이유없이 수용소에 끌려와서 아무런 잘못도 없이 죽어가면서 한 소녀가 창밖에 간신히 보이는 밤나뭇가지를 매일 내다보는데 소녀는 나뭇가지가 말을 거는 듯한 상상에 빠진다, 나무는 이렇게 말한다고, "나 여기 있어. 나 여기있어. 나는 영원한 생명이야. 그러니까 너도 괜챦아." -- 언젠가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저자의 뜻을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삶이 고통스러운가? 이 책이 어떤 위로나 혹은 해법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좋은 책이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1. 27. 17:16

내가 사용하던 Iphone Xs가 사용 시작한지 5년도 넘는데, 나는 아무 문제없이 사용하고 있었으나 아들들이 '이제 교체할 때가 되었다'고 충고를 해서 한국오기 전날 애플매장에 가서 하나 새로 샀다. 내가 새로 산 것은 iphon 15 max pro 라는 것이다. 사전에 내가 꼼꼼히 조사를 한것도 아니고 그냥 매장에 가서 전시된 것 중에서 '가장 가격이 높은것'을 고르니까 마지막 단계에서 저장용량을 묻길래 '테라 바이트'라고 한마디 하는 것으로 간단히 구입을 했다. 거기다가 보호용 필름 옵션으로 하니까 1,770달러가 나오더라 (세금 포함). 

 

 

아이폰 사용자가 미국에서 아이폰 기계를 사서 한국에서 사용할때 - 요즘 약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내 경우 uSIM 에서 eSIM으로 갈아타기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도 못알아먹겠던거다.  그래서 일단 웹을 검색해보니 별 문제가 아닌듯 해서 타이슨스 애플매장에가서 '한국가서 쓸거니까 unlocked 기기로' 하니까 다 알아서 해 주었다. 심지어 지금 당장 사용할수 있도록 자료 이전도 다 해줄수 있다고 해서 '애플 매장에서 이런거 서비스 해주는 직원들 정말 매너 좋다'  앉아서 서로 이야기나누며 모든것을 다 셋업 했는데 - 단한가지가 막히더라.  한국에서 사용하는 KT 전화 서비스가 미국 현장에서 셋업하는데 장애가 있어보였다.  그래서 '그건 내가 한국가서 해결할게 걱정하지마'하고 '마침표'를 찍어주지 못해서 애석해하는 직원을 위로해주고 자리를 떴다.

 

 

그러니까, 미국 매장에서 아이폰 사면, 내가 사용하던 아이폰에서 모든 설정이나 자료를 그대로 카피하여 전달받을수 있다 (심지어 trade-in 하면 기종에 따라서 140달러까지 절약도 가능하다). 바로 현장에서 새 아이폰으로 거의 모든것이 다 가능해지는데 (이메일 체크나 카톡이나 뭐 거의 모든앱이 가능하다) - 전화와 은행관련 앱이 해결이 안된다. 

 

 

어제 귀국하여, 오늘 가까운 KT 플라자 매장에 방문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사전에 전화로 내가 방문하려는 목적, 문제사항을 설명하니 직원이 내 전화번호를 물은후에 친절하게 응대해주었다. 전화기를 가지고 현장에 방문하니, 내 전화문의를 받았던 분이 바로 나를 알아보고 다른 직원에게 'usim 에서 esim 으로 넘어가는게 엉킨것 같아 그것만 해결하면 돼'하고 지시를 했고, 내 전화기와 신분증을 주자 한 10분 만에 전화 불통하던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eSIM 비용 2750원이 청구된다고 했다. OK. 

 

 

그다음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 - 은행앱(금융앱) 활성화이다. 다른 일반적인 앱과는 달리 '현금 자산'이 걸려있는 금융앱은 새 기기로 갈아탈 경우 새로 인증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집에서 약 10분간 여러가지 인증을 하고 이것을 해결했다.  이제 완전히 옛기기에서 새기기로 옮겨졌다. 

 

 

결론, 미국 아이폰 매장에서 'unlocked' 폰을 사면 한국에서 사용하는데 아무런 장애도 발생하지 않는다. 단 uSIM 전화기에서 eSIM으로 갈아탈때 약간 장애가 발생할수 있는데, 이경우에는 근처 KT 플라자에 가면 친절한 서비스 직원들이 금세 해결해주신다.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