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5일, 식탁이 들어오는 것으로, 일단 나의 집에서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제 냉장고를 채우고 각종 양념등 요리를 해 먹을 재료들만 들이면 된다. 집 수리의 총책임자를 자원하고 시작부터 끝까지 세심하게 관리한 오빠가 집의 완성을 기념하기 위해 엄마를 모시고 오셨다. 내가 엄마를 위해서 신경써서 꾸민 방에서 엄마는 눈을 빛내며 기뻐하셨다. 엄마방은 반고흐의 '노란방'을 연상시키는 '노란방'이다. 우리집에는 피카소의 청동시대를 연상시키는 푸른 방도 있고, 아직 완성이 되지 않는 방들도 있다. 주방은 파랑과 노랑이 만나는 중간지대이다. 엄마는 '식탁이 굉장히 크다!'하고 놀라워하셨다. 오빠는 인덕션이 제대로 작동을 하는지 들여다보았다. 나는 아직 인덕션은 만져보지도 않았다. 정수기의 물을 딸아서 엄마와 오빠께 접대했을 뿐. 아직 내 부엌에 내가 익숙치가 않다.
남편은 이미 깨끗이 치워져 있는 집안을 돌아다니며 걸레질을 했고, 걸레질을 하는 내내 노래를 불렀다. 남편이 그렇게 오랫동안 흥겹게 노래하는 것을 아주 오랫만에 보았다. 지금 사는 숙소에서는 노래 한곡이 끝나기 전에 청소기가 꺼지는데, 우리집에서는 아주 한참 노랫소리가 들렸다.
2002년에 이 집을 떠났으니까 22년만의 귀향이다. 집 근처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오빠는 엄마를 모시고 가셨고, 남편과 나는 산책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 건너편에 구청이 있어서인지 도로변을 페추니아화분으로 단장을 해 놓아서, 우리집 입구는 페추니아와 장미로 뒤덮여 있었다. 많은 것이 변했고, 그 속에서 22년전과 마찬가지로 남아있는 것들도 있었다. 여전히 그자리를 지키는 나무들과 쇼핑몰 그런 것들을 발견하며 내가 집에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지난주에는 해변에 갔었다. 주말에는 사람이 많을것이기에 평일 오전에 도착하여 바다가 밀려 나가는 것과 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실컷 바라봤다. 오후에 우연히 그 해변에서 아이들과 함께 온 조카를 만났다. 그 조카는 우리 큰아들과 동갑쟁이이고 늘 함께 지냈으므로 조카의 아이들은 내 손주와 다를바가 없다. 조카보다도 어린 손주들을 우연히 만난것이 참 기뻤다. 조카의 아들은 이제 유치원에 다니는데 나를 '영어할머니'라고 부른다. 이녀석을 만난것도 2년만이다. 그래도 '영어할머니'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사이에 동생이 생겼다. 조카는 두아이의 아빠노릇을 의젓하게 잘 해내고 있었다. 조카는 내게 두 아이를 맡기고 아내와 근처로 산책을 갔다. 나는 두아이의 '엄마'가 되어 해변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놀았다. 옛날에 이렇게 어린 형제를 데리고 놀던 시절이 분명히 내게도 있었다. 그것이 30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나는 22년전에 떠났던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인천으로 돌아오기 위해 문닥속을 하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아버지, 이 집을 아버지의 집으로 사용하소서. 저도 이곳에서 쉬게하여 주시고, 아버지의 자녀들이 이 곳에서 위안과 평안과 치유를 얻게 허락하소서."
지금은 숙소에 돌아와있다. 주말이 되면 갈 것이고, 방학이 되면 가서 살것이다. 나는 여전히 나그네처럼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