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나의 집으로 옮길 퀼트 작품 상자를 점검하다가 발견한 우리 엄마 유여사의 젊은날의 패치워크 작품. 세로가 내 키만하고 가로는 그보다 짧다. 대략 아기이불커버 정도되는 크기이다. 1970년대 초반에 엄마가 잡동사니 헝겊을 모아서 재봉틀질로 만드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이 작품이 50년이 넘은 것이구나) 우리가 성북구 하월곡동에 살던 시절 - 처음에 우리 부모님은 그 집의 단칸에 세를 살았고 (그래서 그 셋방에서 여섯식구가 살수 없었기때문에 나는 시골에 남겨졌던거다), 나도 초등학교 1학년때는 상경하여 그 단칸방에서 이리저리 포개져서 잠을자야 했고, 2학년때 우리부모님은 그 집의 안채로 들어가 세를 살았다 (그래서 안방과 건너방 이렇게 방 두개에서 살게 되었다). 그 이듬해 3학년때 우리 부모님은 그 집을 통째로 다 사가지고 안방, 건너방, 사랑방 이렇게 방 세개를 쓰게 되었고, 문간에 세주는 방이 있었는데 그 셋방에서 영훈이 아버지어머니가 '양장점'을 차리셨다. 그냥 정말 손바닥만한 방에서 손님들 칫수를 재서 옷을 만드는 일을 밤이나 낮이나 했다. 그 집에서는 자투리 헝겊이 많이 나왔는데, 버리기 아깝고 쓸데도 없으니까 그 자투리천을 '주인집 아주머니'인 우리 엄마에게 주었고, 엄마는 그 자투리천으로 이런 패치워크를 많이 만드셨다. 돌아보면 우리 부모님이 상경하여 단칸방에서 시작하여 단칸방에서 한 2-3년 사신것 같고 - 두칸방을 1년 살고 - 그리고 집을 사셨다. 상경하여 4-5년만에 집을 장만하셨다. 그리고 3년후에는 잔디가 깔리고 장미넝쿨이 담장을 덮고, 감나무 잎이 무성한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그 때는 그게 정석처럼 보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자란 나 역시, 가난한 청년과 결혼하면서도 별로 겁이 없었다. 몇 년 고생하면 집을 살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지금은 그게 힘들다고 한다.
어쨌거나, 저 연보라색 '전자파처럼 지글지글한 무늬' (위에서 둘째줄, 왼쪽에서 세번째)는 비단처럼 보이는 나이롱이었는데 1972년 우리 훈란이 고모 결혼식에 엄마가 입었던 한복감이다. 위에서 다섯째줄 가운데에 보이는 빨강 노랑 까망 사선 체크무늬 나이롱으로 엄마는 내게 리본이 달린 짧은 뽕소매 블라우스를 만들어 주셨다. 오른쪽 맨 끝줄 중간에 보이는 연두색 체크무늬는 고급 면 인데 나는 그 면으로 만들어진, 주름이 많이 잡힌 짧은 치마를 빨간 블라우스와 함께 입었다. 그 치마는 원래 대학에 다니던 우리 사촌언니들의 옷이었는데 대학생 언니들이 '미니스커트'로 입던 것을 물려받아 초등생인 내가 '치마'로 입던 것이다. 우리 사촌언니들은 김지미 엄앵란 시절보다 다소 어린 축이지만, 어쨌거나 신화적 시대를 살던 처녀들이었다. 그 대학생 언니들이 입으시던 주로 이대앞에서 맞춰 입었던 헌옷을 우리가 물려받아 초등학생때 입었다. 그들은 체격이 작았고, 나는 체격이 컸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우리 사촌언니들은 그당시 '준재벌'집 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입던 헌옷은 우리에겐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단, 문제는 처녀아가씨들의 상의의 경우 가슴이 불룩하게 재단이 되어 있었는데 - 어린 내가 그걸 입으면 어딘가 '장애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엄마는 개의치 않고 그런 것들을 '잘 맞네'하면서 입게 했다.
자주색 단풍무늬 얼룽덜룽한 천은 엄마가 오래 입으셨던 한복감이다. 하늘색 바탕에 꽃무늬는 영훈이네 집에서 자주 옷을 맞춰입던 '고급 요정' (요즘식으로 룸살롱쯤 되려나? 텐프로?)에 나가던 아가씨의 옷 감이다. 엄마가 재봉틀질을 하면서 '이 옷감은 어떤 아가씨가 맞춘 옷감'이라고 이야기를 하면 - 아빠는 눈살을 찌푸리시며 '그따위 물건을 왜 집안으로 끌어들이는가' 하며 언짢아 하셨다. 우리 골목에는 대학에 나가던 우리 아버지부터 술집에 나가는 아가씨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살았다. 뭐 그게 어쨌다는 말인가. 나는 들강아지처럼 쏘다니는 인생이었다.
내 집으로 가면, 나는 주말마다 엄마를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올것인데, 그래서 손님방 하나를 엄마의 취향으로 꾸미고 있다. 이 작품으로 벽 어딘가를 장식하려고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