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한가롭게 점심을 먹고, 따뜻한 햇살 아래를 슬슬 걸어서 식당 옆 '다이소'에 화분과 비료를 사러 가는 중이었다. 귀 뒤에서 따릉! 따릉!하는 자전거 따릉이 소리가 들려와서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누군가가 내 뒤에서 자건거를 타고 오고 있다면, 내가 서 있을테니 알아서 피해가라는 나의 몸짓이었다. 사실 길이 비좁아 달리 피할데가 없기도 했다. 그러니까 두사람이 함께 어깨를 마주하고 걷기에도 좁은, 그런 길이었으므로 어디로 피할데도 없었고, 뒷쪽에서 자전거 따릉 소리가 났으므로 나로서는 그 좁은 길의 우편으로 비켜 얼음땡을 하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바로 1초후에 얼음땡하고 서있는 나의 왼편으로 파란 잠바를 입은 중년의 사나이가 자전거에 탄채 느릿하게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가며 - - 나를 흘겨보면서 -- 동시에 나를 향해 '에이씨....' 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내 왼편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 나는 그 찰나가 '영원'처럼 기억된다. 왜냐하면 '그 중늙은이 녀석'이 나를 흘겨보면서 나를 향해 '에이씨'라고 뱉는 순간 -- 내 몸 어딘가에서 뭔가 화살 폭발같은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 나는 (아, 나는 오래전에 이걸 잊고 있었다...) 두 눈을 무시무시하게 뜨고 녀석을 노려보면서 곧바로 대꾸를 하고 있었다. "뭐라구요? 사람이 왜이렇게 무례해요? 지금 여기서 화를 내야 할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여기 사람 다니는 길이에요. 자전거 타고 싶으면 저 아래 차도로 가셔야지. 사람 다니는 길에서 자전거 타고 지나가면서 지금 나한테 무례하게, 어딜 감히 사람한테 무례하게!!!"
내가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그녀석이 가는귀를 먹었어도 시원하게 잘 들을수 있게 성심성의껏 목청을 다하여 녀석에게 이렇게 인생과 교통법과 예의범절과 인간에 대한 예의의 기본 상식에 대하여 논의를 하는 동안 녀석도 지지 않겠다는 듯 나를 노려보더니, 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그자리를 그냥 지나쳐가는 것이 아닌가. 이 녀석은 여전히 무례하군. 내가 말을 안 끝냈는데 자리를 뜨는군, 잘가란 말 한마디 없이. 그래서 녀석의 등뒤에다 가는귀 먹은자도 시원하게 들을 수 있는 명쾌한 음성으로 또박또박 외쳐주었다, "버르장머리가 없어, 도대체가!" 녀석은 멈칫 하는둥 하더니 그대로 가버렸다. 인사를 하고 가라니까!
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한 5년쯤 전인가? 그때는 내가 막 '갱년기'로 접어든 시기라서 정말로 아침 저녁으로 이유없이 화가 치밀때였다. 그날 나는 엄마를 모시고 파주로 해서 꽃구경을 시켜드리고 기분좋게, 하지만 지쳐서 집으로 돌아온 터였다. 아파트 앞 마당에서 차를 세우고 - 차 트렁크에 실려있던 엄마의 휠체어를 꺼내고, 거동이 불편하신 엄마를 조심조심 차에서 모셔나와가지고 휠체어에 태우던 중이었다. 아파트 마당 앞으로 차 한대가 지나가려고 하다가, 세워진 내 차때문에 통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가 오래 기다렸다면 나는 미안해 했을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이런 동작하는 것을 지켜보지도 않고, 오자마자 경적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빨리 차 빼라 이거지.
내가 그 무례한 녀석의 차를 흘끗 보니, 조수석에는 남자 노인이 타고 계셨고, 운전석에 내 또래의 중년 남자가 타고 있었다.녀석이 빵빵댄거지. 조수석의 남자 노인은 한가롭게 열린 창틀에 팔을 기대고 하늘의 구름을 내다 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태평하고 한가로운 광경이었다. '저녀석 뭐지? 저녀석도 갱년기야?'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휠체어에 탄 엄마를 아파트 안쪽으로 일단 옮겨야했다. 그런데 녀석이 다시 빵빵거렸다. 어쩌라구? 대체 어쩌라구? 너 눈깔 없어? 지금 상황이 니 눈에는 안보여?
나는 일단 엄마를 아파트앞 나무그늘, 안전한 곳에 모셔다 놓고 와서 내 차에 타려다가 차 앞에 선채, 내 차 뒤에서 연신 빵빵대는 녀석을 향해, '미친년'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빵빵대는건데? 눈없어요?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는지 안보여요? 이럴때 사람은 성가셔도 그냥 좀 기다리주는게 예의에요! 지금 당신이 뭔데 나하고 우리엄마한테 무례하게 빵빵대는건데? 안보여? 안보여?"
내가 게거품을 물고 사람을 내 눈빛으로 죽일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듯 무섭게 노려보며 소리소리를 지르자 - 그 남자는 말없이 맞장뜨고 나를 노려보았는데, 그자는 운전석에서 창을 열고 앉아있었고, 나는 내 차 운전석에 타려다가 타지않고 몸을 돌려 선채로 녀석을 향해 침을 튀겨가며 소리소리 지르며 죽일듯이 노려보고 있었던것인데 - 그 때 나는 세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생각나지 않았다. 오직 내가 노려보는 그녀석의 눈알 - 그눈알을 내 시선으로 후벼파버리고 말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을것이다. 녀석은 창을 올리더니 슬금슬금 내 차를 피해서 내 차 옆으로 빠져나갔다. (빠져나갈수 있었던거쟎아. 왜 빵빵대고 지랄을 했던거야 대체?)
....
나는 이제 나이가 들었고, 여러가지로 상황이 고단하고, 많이 풀이 죽었고, 나른하며, 기운도 없고, 걸핏하면 감기몸살로 몸져 눕곤 한다. 나도 이렇게 변해버린 내가 낯설지경이다. 그래서 대체로 나는 조용하다. 별로 말을 안하고, 길을 다닐때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며,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짓거나 예절을 지키려 노력한다. 그래야 세상 사는게 편하니까. 그러니까 나같은 사람은 누가 건드리지 않는 한 매우 평화롭게 그리고 협조적으로 살아갈수 있는 종류의 사회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가만보면, 세상은 조용한 평화주의자를 만만히 보러들거나 자기네가 무례해도 괜찮은 존재라고 상상하는 것 같다. 아까 그 남자, 비좁은 인도에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며 길걷는 사람에게 무례했던 그 남자 -- 그 남자는 그래서는 안되는거였다.
그 남자는 자전거에서 내려서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거나, 그래도 자전거에서 내리기가 싫었다면 - 비좁은 인도에서 길가는 누군가에게 폐를 끼칠때는 '아이쿠 이거 죄송합니다' 이렇게 한마디 하면서 지나쳐야 했던거다. '죄송합니다'하고 지나가도 시원치가 않은 판인데 - 제 눈으로 보기에 만만한 '아줌마'하나가 제 통행을 방해한다고 생각하고 - 길가는 '아줌마'에게 무례하게 행동했던 거다. 그래서는 안되는거다. 그러니까 나로서는 이렇게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나도 이제 환갑이 지난 할머니라구! 나이를 먹었어도 내가 더 먹었고, 말싸움을 해도 내가 더 윗길이고, 힘으로 싸워도 네 녀석따위 내가 무섭지 않거든! 쌍욕으로 붙어도 내가 너 피떡을 만들어줄수 있어. 맞장 떠 이 녀석아!) 을 '계몽' 시킬 필요가 있었던거다.
이 세상을 평화롭게 살아가는 방법 -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게 굴면 안된다. 과오가 있으면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구 죄송합니다' 하면 된다. 그 말이 그렇게 어려운가? 그 말을 못하니까 니가 집에서도 마누라나 자식들한테 외면당하고 어딜가도 늘 그꼴인거다.
빈 화분과 비료 한봉지를 사서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오며 나는 생각했다. '나의 어디에 이런 분노가 숨어있었던거지?.... 나는 왜 그렇게 화를 냈던걸까? 사람을 죽일듯 노려보는 내 눈빛이 아직도 살아있었던거구나....' (나 아직 안죽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