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Life2023. 10. 25. 15:17

 

코바늘뜨기로 스웨터를 짰다. 한 일주일 쯤 걸렸다. 비교적 쉬운 뜨개질 패턴이고, 디자인도 단순해서 TV 보면서 금세 뜰 수 있었다.  비슷한 형태로 하나 더 짜볼까 생각중. 

 

 

크로셰 잘하시는 분이 만든 패키지를 사서 짠것이라서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도안도 상세히 잘 나와 있어서 내가 아무 생각없이 그냥 시키는대로 따라하기에 아주 좋았다.  평소에 머리를 쓰고, 내가 생각해서 판단하고 책임져야 할 일들이 많아서인지 - 아무 생각없이 남이 설명하는대로 따라서 뭔가 하는 일이 편안하고 즐겁다.  참 고마운 일이다. (참, 도안을 꼼꼼하게, 알아보기 쉽게 만드셨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21. 1. 2. 11:47

나는 2021년에 두가지를 실천하고자 한다.

 

1. 커피를 끊는다.

 

2. 매일 아침 눈을 떴을때, 제일 먼저 머리맡의 아이패드로 성경책을 약 10분간 읽는다. 

 

 

커피를 끊기로 한 것은,  지난 해 11월에 건강검진에서 위장을 잘 보호하지 않으면 문제에 빠질수 있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커피를 비롯한 자극적인 음식이나 과식등이 내게 치명적일수 있다는 판단에 - 일단 커피부터 중단하기로 하였다.  하여 이미 지난 12월 한 달 간 커피 없이 살았고, 뭐 그럭저럭 커피를 안마셔도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있다.  요즘 내가 집에 칩거하며 커피대신 마시는 것은 월마트 식품 매장에서 심심풀이로 몇가지 고른 (1) 민들레 뿌리 차 (2) 카모마일 차 (3) 민트 차 (4) 잠이 잘 오는 차 등으로 모두 카페인이 없는 순한 것들이다.  심심하면 종류별로 한가지씩 찻잔에 담아 먹다보면 하루가 간다. 

 

뭐, 커피 끊는것과는 관계가 없지만, 나의 소화기관의 건강을 위해서 내가 의식적으로 실천하는 또 한가지는 - 식후 한시간이내에는 절대 눕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나쁜 버릇중에 한가지는 저녁에 밥 먹자마자 소파로 가서 모로 누워서 TV 를보면서 조는 것이다. '위장'을 배려한다는 의미로 반드시 왼쪽으로 눕곤 했다.  내 이런 나쁜 버릇을 조장한 환경적 요인으로는 - 저녁 식사를 남편이 주로 차려주고 식후의 과일 준비며 뒷설거지등을 그가 자원봉사 차원에서 모두 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설겆이나 청소 걱정 없이 배불리 먹고 소파에 비스듬이 누워 과일이나 몇조각 먹다가 졸다가 자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 왈, 식후에 바로 누우면 역류성 식도염에 걸릴 수 있는데 내게도 그런 증상이 보인다고 한 것이다. (한숨).  그래서, 요즘은 밥 먹고 난 후에 소파로 가는 대신에 설겆이를 하거나 스텝퍼에 올라가서 가볍게 살살 몸을 움직여 준다거나 뭔가 자질구레한 집안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매일 아침 성경책을 보기로 정한 계기는 -- 지난 수요일 기도모임에서 한 참석자가  - 매일 아침 아내와 아이에게 성경책을 읽어 주며 가족의 신앙을 다져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도 내 하루를 성경으로 시작하겠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스쳤기 때문에 실천하기로 한 것이다.  며칠 안 되었지만 실천하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 머리맡의 아이패드에서 킨들에 담긴 NKJV 성경을 펼쳐서 '시편'을 읽어나가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코로나로 인해서 교회도 언라인으로 참석하고 기도회도 언라인으로 하고, 모든것이 언라인이다보니 나의 기도도 나태해지고 있다. 요즘 제대로 기도를 안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부터 (미국은 아직도 1월 1일이다)  최소한 하루 10분간 고요히 앉아 기도가 안되면 명상이라도 하면서 나를 버리고 나를 지우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20. 10. 26. 19:19

2020년 10월, 한국

 

2008년 12월, 플로리다, 왕눈이와

 

 

나는 맨발로 달린다

 

나의 하느님에 대하여 내가 새로 발견한 것.

 

예수님이 맹인들의 눈을 번쩍 뜨게 하셨다는 일화에 대하여 나는 격하게 공감한다.  그렇다! 그렇다고.  내가 최근에 알게 된 것은 이것이다.

 

하느님은 플로리다를 거쳐서 버지니아를 거쳐서 나를 한국으로 다시 돌려 놓으셨을때, 이미 내게 필요한 것,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준비해 놓으셨던 것이다.  그가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넘쳐흐르는 곳'에 나를 돌려보내셨는데, 내가 그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거나 깨닫는데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수년이 흐른 후에야 어느날 눈을 떠보니, 그것들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이런 것이다.  집에서 나가서 슬슬 산책하여 가다보면, 개울/강/호수/바다 같은 물가가 나오고, 숲이 이어지고, 동산이 펼쳐지고, 동물들이 뛰 놀고, 물고기들이 펄쩍펄쩍 뛰고 그런 정경이 펼쳐지는 곳.  그런 곳을 원없이 오래 오래 헤메기.  계절이 바뀌는 것을 매일 관찰하기.  슬슬 산책하여 가다보면 가게들이 있고, 내과 치과 이런 것들이 있고, 내가 필요한 모든 편의시설이 슬슬 산책하는 거리에 있기.  대학 도서관에 맘대로 드나들며 신간이나 고전을 맘대로 빼들고 읽기, 빌려다 쌓아 놓고 읽기.  카페. 음악. 걸어서 갈수 있는 음악당. 뭐 이런 것들. 이런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하느님은 내 앞에 펼쳐놓고 "얘야, 너 여기서 편히 잘 놀아라" 하셨는데 -- 나는 몇년이 흐른 뒤에야 그것들이 내 앞에 펼쳐져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느님은 내게 모든 것을 주셨다.  (내 잔이 넘쳐흐르게 선물 폭탄을 투하하셨다.) 

 

하느님은 내게 왜 이렇게 잘 해주시는걸까... 그걸 요즘 궁금해 하는 중이다.  제가 이걸 다 받아도 되는지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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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20. 9. 30. 13:42

청량산의 꽃무릇

 

흥륜사에서 보이는 내가 사는 섬. 

 

9월의 마지막 날이다.  내 9월은 내 인생에서 '맨발의 시대'를 열은 한달로 기억될 것이다.  섬의 가장자리 물가가 버지니아와 워싱턴 사이를 흐르는 포토맥 강을 닮았다 하여 나는 매일 아침 "포토맥에 간다"며 길을 나섰다.  그리고 맨발로 걷기 시작했고 (산책로가 황토로 덮여 있었으므로 누구나 맨발로 걷고 싶어 질 것이다), 그리고 맨발로 달리기 시작했다.  9월 한달동안, 이 섬을 세바퀴 돌았다 (한바퀴 21킬로미터).  아마, 이번주 토요일에도 나는 섬을 한바퀴 돌 것이다. 왜? 그냥 섬을 한바퀴 돌고 싶으니까.  

 

 

아무리 그 길이 좋아도, 매일 같은 길을 걸으면 뭔가 새로운 길을 찾고 싶다. 특히 연휴에는 뭔가 새로운 것을 하고 싶어진다. 휴가니까.  그래서, 아침 운동 나가는 시간에 차로 약 7킬로미터 거리의 다리건너 절에 갔다. 절은 청량산이라는 산 중턱에 있으므로 절 구경과 함께 산에도 오를수 있는 코스이다.  일곱 여덟살 어린이들도 군소리 않고 강아지 끌고 올라가는 나즈막한 산이다. 그래도 그 산 정상에 오르니 내가 살고 있는 섬 전체가 한눈에 조망이 되고, 내가 21킬로미터를 걷는 행로가 어떠한지 세밀하게 보인다. 아, 저 길을 개미만큼 작은 내가 네 다섯시간을 걸었던 거구나... 그런 것을 어림하며 작은 기쁨을 느낀다.  

 

 

평평한 평지를 걸을때, 나는 꽤 빠르다. 웬만한 남자들도 섣불리 나를 따라잡지 못 할 것이다. 나는 정말 걷기에 특화된 사람인것 같다.  그런데, 산에 오르는 일은 평지와는 전혀 다른 전혀 새로운 스포츠 같다.  나는 얼마 못 올라가서 헥헥거리고 온몸이 땀에 젖고 현기증까지 나는데, 그런 내 옆을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휙휙 날아가듯 지나간다.  하하하. 이거 뭐지?   평지를 걸을때, 나는 걷기계의 신 같다. 내가 작정하고 걸으면 날듯이 사람들을 휙휙 지나치는데, 산에 가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지나쳐서 휙휙 날아 올라간다. 무서운 종족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새로운 종족을 발견했다.  그들은 '날다람쥐 족'이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깨달았다.  세상에 만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구나. 내가 바닥이구나...  

 

 

 

다시 연구실 책상앞에 앉아있다.  오늘 할 일을 해야 한다.  그래도, 온라인으로 등산화를 한켤레 주문했다.  가끔은 날다람쥐님들을 구경하러 가까운 산으로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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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20. 9. 23. 12:48

www.canceransw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0

 

[달리기와 진화 3] 두꺼운 운동화 탈출, 맨발로 달려볼까? - 캔서앤서(cancer answer)

맨발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발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쿠션 좋은 운동화를 찾는 시대에 거꾸로 신발을 벗어던졌다는 것은 이례적이다. 그런데,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맨발

www.canceranswer.co.kr

 

오늘은 1교-2교-3교로 이어지는 약 2.5 킬로미터 거리를 맨발로 왕복했다. 5킬로미터 거리를 맨발로 통과 한 것은 내 평생에 처음이다 (어릴때 시골에서 자랄때 맨발로 논둑 밭둑 돌아다닌 것은 기록에서 제외하고 문명인으로 사는 동안만 생각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다른 신기록은, 내가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대학때 단축 마라톤 달려본 것을 마지막으로), 처음으로 약 2킬로미터를 '달리기'로 통과했다.  그러니까, 맨발로 통과한 5킬로미터중 1-2-3교로 가는길의 대부분을 달리기로 해 냈다는 것이지.  처음에 그냥 맨발로 걷다가, 기분이 좋아져서 -- 달려 볼까? 달리다 힘들면 걸으면 되니까 걱정이 없지 -- 이렇게 생각하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발과 몸이 가볍게 느껴져서 3교에 도착 할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달리면서 나도 놀라웠다. '어, 이상하다? 왜 달리기가 힘이 안들지? 왜 이렇게 발이 가볍고 몸이 가볍지?'  이런 느낌으로 반환점까지 갔다.

 

 

3교 다리 밑 (나의 반환점)에서 스쿼팅도 하고, 갈대 숲에서 고요히 기도도 올리고 뭐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돌아오는데, 그래도 돌아오는 길에는 달리기 하기에는 발에 무리가 생길것 같아서 그냥 씩씩하게 걸어왔다.  그래도 이제는 맨발로 걷는것과 운동화 신고 성큼성큼 걷거나 걷는 속도는 거의 일치하는 편이다. 

 

 

오늘 내 기록의 특별한 점은

  1.  난생처음 5킬로미터 쯤을 맨발로 걷거나 달렸다.
  2.  대학 졸업후 쉬지 않고 2킬로미터 거리를 달려본 것이 오늘이 처음이다. 그것도 2킬로미터를 맨발로!  놀라운 일이다. 

 

 

물론 나의 달리기는 - 나의 빠른 걸음 속도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나는 원래 달리기를 싫어하고, 달리기 하면 어지럽고, 달리기하고는 담을 쌓고 산 사람이다. 그대신 걷기는 다른 남자들이 슬슬 달리기 할때 속도를 맞추거나 추월할 정도로 빠른 편이다. 나의 걸음은 달리기만큼 빠르지만, 나는 달리기를 잘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달린다는 것은 나의 빠른 걸음 수준으로 '달리기 흉내'를 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도 내가 달리기 자세를 유지하고 천천히 2킬로미터 정도를 달렸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 다리에 대하여, 내 신체에 대하여 기쁨과 감사를 느낀다. 

 

 

내가 내가 하는 걷기에 대하여 이렇게 감격하고 감사한데는 이유가 있다.  본래 걷기 광신도였던 나는 한국으로 온 후에 일도 바쁘고, 주변 환경도 마땅치 않고, 미세먼지도 걱정되고, 그리고 나이가 갱년기를 통과해야 하는 시기가 되면서 이래저래 건강이 저하되었고, 야금야금 체중도 불었다.  그러면서 2년 전부터는 걷지도 않았는데 종아리에 통증이 오거나 쥐가 나거나, 머리가 자주 아프고, 늘 감기를 달고 사는 아주 허약 체질로 바뀌어갔다.  아마 나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 모든 것이 '갱년기 증상'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리불순을 겪지 않았으므로 갱년기하고 나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상상했고, 그냥 내 몸이 왜 이렇게 되는걸까 의아해 했다.  지난 6월에 버지니아 집에 있을때도 근처 아름다운 트레일로 나가곤 했는데 조금 신나게 걸으면 발목과 발바닥에 통증이 심하게 와서 생전 쓸줄도 모르던 '파쓰'라는 것을 발에 덕지 덕지 붙이곤 했다.  아들이 "우리 엄마도 이제 늙는구나..." 한숨을 쉬며 정성스럽게 내 발목을 파쓰로 감싸주곤 했다.  나는 쩔뚝거리며 집의 계단을 오르내리고 한숨 지었다.  이제 청춘은 가는구나. 맘놓고 걷지도 못하는구나... 걷기 광신도가 걷지를 못하게 되다니.  이것도 집안 내력인지 이미 우리 언니나 오빠가 몇해전부터 족저근막염이라고 병원다니고 이상한 신발을 신고 나타나고 하는 것을 보면서 -- "저이들은 왜 팔자 좋게 골프나 치고 다니면서 발이 아프다고 하는걸까?" 의아해 했는데 아무래도 내게도 그런 증상이 이미 오래전부터 자라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아프면 아픈가보다 하고 지나가므로 병원을 안가니 병명을 몰랐을 뿐이리라.  (나는 병원을 잘 안간다. 그래도 여태까지 잘 살아있다.)

 

 

7월에 귀국하여 자가격리를 하고 나왔을때, 내 몸은 정말 엉망이었다.  손 마디마디도 쑤시고 아팠고, 정말로 사람들이 '여성 갱년기' 증상이라고 일컫는 모든 증상이 나를 에워싸고 있는 듯 했다.  7월 말 쯤에 바람쐬러 대부도에 가서 구봉산 언덕길을 오를때 -- 나는 그야말로 10미터도 못 간채로 어지럽다거 멈춰서서 헉헉대고 있었다.  그랬었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았다. 내가 남처럼 낯설게 여겨졌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어디 가고 나를 닮은 흉한 괴물이 하나 둔갑을 하고 있는것 같았다. 기분이 아주 안 좋았다.  그래도 대부도 구봉도 숲길이 좋아서, 비오는 날에도 숲길에 갔고,  자꾸만 운전하여 대부도로 가다가 이렇게 마냥 휘발류 들이고 시간 들이고 거기까지 갈 수가 없겠다 싶어서 찾아낸 것이 8월 내내 내가 시간을 보낸 시내 공원길이었다.  알고 보니 내게 아주 딱 알맞는 - 산책하기에 좋은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8월 내내 나는 연꽃과 수련들을 보면서 걸었다.  그리고 9월, 시내 공원길이 지루하게 여겨져서 그냥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가 해안 산책로를 발견했고, 그 해안 산책로는 나를 이 섬의 모든 아름다운 산책로로 인도해 주었다. 그 사이에 종아리가 이유없이 아프거나, 밤에 죽일듯이 쥐가 나서 괴로워하거나 하는 일이 사라졌다.  족저근막염 같은 발바닥, 발목, 아킬레스건의 통증도 사라졌다.  그리고 내 발은 10년전에 내가 포토맥 강변을 걷던때보다 더 튼튼해졌다.  맨발로 걷고 달리는 요즘의 나의 발길은 10년전보다 더 가볍다.  놀라운 재생이다.  (체중은 10년전과 비교하면 5킬로그램 정도 차이가 난다. 그것도 1개월에 1킬로그램씩 정리하면 5개월 안에 최적 체중으로 돌아갈 것이다. )  거울속의 내 얼굴은 10년전보다 확실히 늙었다.  머리카락의 광채로 약해졌다.  그렇지만, 내 다리는 더 튼튼해지고, 나는 더욱 강인해 질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매일 아침에 맨발 달리기를 실천 할 것이고 점점 더 거리와 속도를 키워 나갈것이다.  내 희망은 (하하하) 맨발로 천하를 주유하는 아줌마로 <세상에 이런일이>에 출연하는 것이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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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20. 9. 22. 15:22

사진은 웹에서 빌려옴. (내 발이 아님) 

 

 

내가 아침 산책에서 '맨발로' 걷기 시작한지 3주가 지났다. 9월 부터 근처 해안선을 따라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따금 지나치는 분들 중에서 맨발로 걷거나 달리는 분들을 보고 나도 따라서 시작하게 된 것이다. 물론 전에도 바닷가 모래사장이나 개펄을 발견하면 끝도없이 맨발로 걷곤 했으므로, 기본적으로 맨발로 걸을 때의 그 신선한 촉감을 익히 알던 터였다.

 

 

처음에 양말을 벗고 맨발 걷기를 시도한 구간은 약 1.2 킬로미터 정도이다. 1교와 2교 사이를 걸어서 통과하였다. 며칠 해 보니 자신이 생겨서 약 2.5 킬로미터 거리 1교-2교-3교 이렇게 두 구간을 통과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주부터는 살살 달리기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차츰 차츰 맨발로 걷는 거리가 길어지고, 걷기에서 시작하여 달리기까지 하게 되는 발전을 보였다고 할 만하다. 단 3주 사이에. 

 

 

처음엔, 발이 땅을 밟을때마다 나의 모든 감각이 바짝 긴장을 했다. 따끔, 따끔, 이러다가 뾰족한 것을 밟아서 찔리거나 피가 나면 어떻게 하지?  이런 불안감도 있었고, 정말 미세한 돌멩이가 발바닥에 닿아도 느낌이 예민해졌다. 나의 감각이 이렇게 섬세하고 예민했다는 말인가? 아주 놀랍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맨발로 처음 걷는 느낌은 -- 낯선, 첫 키스의 느낌, 혹은 섹스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가질만한 놀라움 - 전신의 감각이 살아나는 듯한 그런 것들로 채워진다.  처음에는 1킬로미터만 걸어도 피로를 느낀다, 왜냐하면 전신이 긴장을 하고 '사뿐 사뿐'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여 하늘을 날듯이 걸어야 하니까.  자신의 몸을 솜털처럼 가볍게 하려는 의지가 발동하는 것이다. 발이 아플까봐 자연히 사뿐 사뿐 사아뿐~ 

 

 

그런데 이렇게 열흘 쯤 지나면, 발 바닥에 변화가 온다.  놀랍게도 건조하던 발바닥에 '기름기'가 돌면서 발바닥이 '두둑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걸 '굳은살이 박힌다'고 표현하기에는 어딘가 애매하다. 딱딱한 굳은살이 아니라, 두둑한 살이라는 표현이 맞는것 같다.  발바닥이 두둑해진다.  그러면서 예민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점점 발걸음에 내 체중이 실리게 된다.  나는 쿵쿵 소리를 내며 걷는다.  처음엔 사뿐 사뿐 조심 조심 걷느라 걸음 속도가 느려졌지만, 지금은 평소 걸음 속도대로 씩씩하게 쿵 쿵 걷는다.  그러면서 발이 - 발에 연결된 내 온몸이 굉장히 가볍게 느껴진다.

 

 

그래서, 내 몸이 가볍게 느껴지기 때문에 - 원래 '곰 족 (느리고 움직임이 무거운 족속)'으로 태어난 내가 '달리고 싶다'라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달려본다.  발이 점점 더 가벼워진다. 호흡도 훨씬 편안하다.  운동화 신고 달리는 것 보다 맨발로 달릴 때 몸이 더 가볍게 느껴진다. 오호!  

 

 

요즘 내 아침 운동에 이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아침 운동을 시작한지 60일 쯤 되었다.  그동안 4.2 킬로그램 (무려 고기 일곱근)이 빠졌다.  처음 한달동안은 하루에 100그램씩 쭉쭉 빠졌는데, 그 후로는 체중이 그리 쉽사리 빠지지는 않고 있다. 며칠에 100 그램 이렇게 빠지는 식이다.  아무래도 운동 시작 한 이후에 - 운동도 열심히 하지만 - 몸에 좋은 것도 잘 챙겨 먹어서 그럴 것이다.  단백질가루도 챙기고, 닭고기, 생선, 쇠고기 구이등도 매일 밥상에서 빠지지 않고 있다.  평소에 별로 안먹던 '남의살'까지 추가로 먹으면서 살을 빼려니 -- 체중 감량에는 속도가 붙지 않지만 나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 나 스스로 내 몸이 되살아나고 있으며, 내가 건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바디 체중계의 기록을 살펴보면 - 전체적인 건강지수가 높아졌다.  근육량도 많아지고, 수분도 높아지고, 지방은 감소하고 있고, 신체연령도 감소하고 있으며 - BMI도 내려가고 있고 전체적으로 아주 좋은 상승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 된다. 내가 미스코리아에 나갈것도 아니고, 패션 모델이 될 것도 아니고, 뼈만 남은 멋쟁이가 될 생각도 없다.  나의 꿈은 뭐 이런 것이다 -- 맨발 달리기 대회, 맨발 걷기 대회 뭐 이런 것에 참가하거나 맨발로 등산도 할 수 있는 그런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하하하.  나는 건강해지고 있다. 나는 가벼워지고 있다 -- 체중이 팍팍 줄어들지는 않지만, 체중과는 상관없이 내 몸놀림이 가볍고 활기가 차오른다. 참 신나는 9월이다. 

 

요즘은 2.5 킬로미터 구간을 맨발로 걸은후, 돌아 올때는 운동화를 다시 신는데 -- 이 맨발 구간을 5 킬로미터로 늘릴까 생각하고 있다. 갈때-올때 , 다리 두개 지나가는 구간을 맨발로 돌면 된다.  (요즘 아침에 내가 걷는 거리는 12킬로미터 이다. 시속 6킬로미터 속도가 기록된다.) 

 

아침 운동 시작 이후 달라진 점:

  1. 체중 감량
  2. 의식적으로 닭가슴살, 생선, 쇠고기 스테이크등을 먹음 
  3. 과일 끊음 (나는 과일을 소처럼 먹던 사람이라, 이것은 애주가가 술을 끊거나 골초가 담배를 끊는 것과 같은 결기과 결단이다.)
  4. 채소...값이...태풍때문에 너무 올라가서...채소가 귀해져서--대안으로 매일 미역국을 끓여 놓고 먹고 있다.  시장기를 느끼면 미역국에서 미역 (건더기)을 한 공기 꺼내 담아놓고 밥처럼 먹는다.  하루에 필요한 채소의 양은 뭘 먹건 반드시 채우는데 요즘은 미역이 효도를 하고 있다. 값도 싸고 건강에도 아주 좋다. 
  5. 불면증이 사라졌다. 전에는 자다가 깨면 새벽 2-3시에 깨면 그 후로 잠을 못 이루고 고통스러웠는데, 요즘은 밤 열시쯤에 누우면 곧바로 잠이 들고 아침 다섯시면 귀신같이 깨어난다. 그리고 몸도 아주 가볍다. 그러니까 발딱 일어나서 아침 운동을 하러 해변으로 나갈수 있다.  불면증이 사라지고 숙면을 하며 깨어난후 몸이 가벼운 것이 얼마나 하루를 복되게 하는지. 매일 감격스럽다. 
  6. 두통이 사라졌다. 이틀에 한번 꼴로 타이레놀을 먹어야 했던 만성 두통이 사라졌다. 머리가 가볍고 몸도 가볍다. 

 

 

그런데, 이런 모든 변화의 근원에는 - 내가 '성경 통독'을 마라톤 하듯 열흘만에 해 치운 것이 있지 않았나 짐작한다. 성경통독을 한 후에 - 나는 몸을 돌봐야겠다고 자각하게 되었고, 아침 운동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겼고, 이를 매일 실천하는 힘이 생겼고 그렇다.  허물어져가던 내 몸을 살린것이 내 아침 운동이라면 -- 그 살리려는 의지를 일깨운 것은 내 하느님 이시다.  내 하느님께서 공원길에서, 해변길에서 나의 기도와 찬양이 울려퍼지길 기다리고 계셨다.  거기서 만자자고 매일 아침 나를 깨우셨다.  그것이 성경 통독을 한 내게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상상하는 편이다. 

 

2020년 9월 8일 (화) 아침.

멀리 자전거 바퀴 모양의 1교가 보이고, 왕관 모양의 2교가 보이고, 3교 아래 교각 그늘로 향하는 발길. 이 장면도 옛날처럼 여겨진다. 지금은 새처름 가볍게 걷거나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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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20. 9. 16. 12:37

 

지난 일요일은 근래의 내 운동 기록중에서 가장 긴 거리를 걸었던 날이다.  매주 토요일엔 엄마댁에 가서 엄마와 시간을 보내고 (그것이 엄마가 살아계시는 동안 내가 실천해야할 숙제 같은 것이다), 일요일엔 아침에 예배드리고 쉬거나 산책이 나의 일상인데, 지난 일요일엔 나갔다가 예배전에 와야지 하고 집을 나섰다가, 내가 살고 있는 국제도시-섬을 한바퀴 도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말았다. (덕분에 일요일 예배를 드리지 못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죄송한 중이다. 하지만, 주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을 내 발로 걸으며 찬송드렸으니 크게 노여워하지 않으실거라 생각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숙소에서 출발하여, 이 섬의 가장자리 (섬이니 결국 바다를 끼고 가장자리 길만 따라 도는 길)를 따라 한바퀴 돌아 다시 숙소로 돌아오니 대략 23 킬로미터 거리였다. 

 

 

일단 이 섬과 육지를 잇는 1교 2교 3교 4교가 있는데 4교에서 출발하여 4-1-2-3 순서로 일직선으로 해안선을 따라서 걷다가 - 길이 끊긴 지점에서 길을 찾아 내어 지난해에 롹 페스티벌이 열였다는 페스티벌 공원을 지나서, 섬의 저 반대쪽, 큰 바다를 마주하는 쪽으로 이동하여, 이 섬의 유일한 컨서트 홀의 뒷마당 해안 공원 카페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쉬다가, 다시 해안선을 따라 걷다보니 '솔찬공원'이라는 -- 큰다리를 지을때 그 다리 골조를 제작하던 장소라는 공원에 이르렀다. 이곳의 카페에서 간단히 커피와 크로아상으로 요기를 하고, 역시 해안선을 고집스럽게 따라 걸어 돌아왔다.  특히 1교에서 3교로 이어지는 약 2.5 킬로미터의 거리는 내가 맨발로 통과하는 붉은 흙길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시멘트 콘크리트로 둑을 덮고, 그 위에 황토를 깔아 놓은 구조라서 완전히 황토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맨발로 걸을때 흙의 탄력을 느낄수 있어서 맨발로 통과할 만한 곳이다. 

 

 

일단 투명한 가을 햇살 아래에서 (벼가 익기 좋은 투명하고 따가운 햇살이었다) 다섯시간 쯤 이 세상의 근심을 잊고 찬송하고 기도하며 걸었던 시간이 뿌듯하게 내 가슴에 남게 되었고 - 별 애정이 없던, 내가 임시로 거주하고 있는 이 섬에 대한 애정이 솟아 나오는 것을 느낀다.  나는 이제 섬의 어디에 어떤 보물이 숨겨 있는지, 오직 발로 걷는 사람만이 찾아낼수 있는 장소들을 잘 알고 있다.  

 

 

이제 내 머릿속에는 섬의 지도가 담겨 있어서 - 오늘은 어느 방향으로 어디까지 갔다 오면 좋겠다. 그 거리면 10킬로미터쯤 되겠구나 두시간이면 충분히 쉬엄쉬엄 다녀오겠구나, 이런 가늠을 하게 된다.  대개 내 걷는 속도는 한시간에 6킬로미터쯤 되고, 중간에 스쿼팅을 하거나, 새구경 꽃구경 지나가는 동물 구경하느라 멀거니 서 있을때도 있고, '기도 벤치'라고 내가 정해 놓은 벤치에서 약 5분간 고요히 기도도 하고 그런다.  섬의 가장자리로만 따라 걸으면 -- 별로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는다. 나는 마치 숲의 가장자리를 따라 자기 보호를 하며 걷는 야생동물 (여우, 야생 고양이등)처럼 세상의 가장자리 숲아래를 느리게 느리게 걸어서 지나간다.  이번 일요일엔 또 다른 섬의 가장자리를 걸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다. 

 

* 나는 유명 관광지는 가지 않는다.  사람 많은 곳은 코로나 시절 이전부터 늘 피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어딘가 변두리로만 돌고 있는 인생이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제주도' 역시 수십년전에 '교과서'처럼 남들이 다 신혼여행을 가던 시절에 신혼여행으로 가 본것이 전부인데, 그 당시에도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고, 요즘은 사람들이 가볍게 아무때나 다녀오는 휴양지로 너무나 익숙하여, 그냥 가보기도 전에 싫증이 나고야 말았다.  나는 변두리로 다닌다. 너무 평범하고 너무 심심하고 하품나게 지루한 길, 그래서 아무도 안다니는 길, 말 해 야 아무도 모르는 길 그런데로 간다.  그런 길을 걸을때 - 나는 낯선 별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 가 된듯한 느낌이 든다.  머리가 깨어나고 감각이 생생해지고, 모르는 길에서 아는 길을 발견할 때 희열을 느끼며, 그 아는 길이 낯설어 보이는 기묘한 체험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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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9. 3. 20. 17:54


나이 오십이 넘었으니, 이제 '사람 답게 사는 방향' 가겠다고 다짐하고 진행해온 전쟁이 무사히, 평화롭게, 조용히 마무리 되었다.  전쟁이 끝났다.  지난 12월 6일부터 시작된 전쟁이니 백일이 조금 지났다.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나의 고통은 세가지로 요약된다:

(1) 남들이 겪는 고통을 내가 똑같이 겪는 느낌이었는데, 그 남들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니까, 여러명의 고통에 개별적으로 공감하면서 내가 느끼는 고통이 극심했다.  내 가족들도 내가 겪는 고통의 유탄을 맞아야 했다. 그들도 역시 편치 못했다. 내가 편치 않았기 때문에.


(2) 내가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가? 나는 과연 이 전쟁을 합리적으로 잘 이끌고 있는가? 이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분명히 내게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정말 이들이 의지할만한 존재인지 스스로 자신감도 없었고, 나도 알 수 없었다. 


(3) 내가 괜한 전쟁에 끼어들었다는, 이제 놓아버리고 싶다는, 마음의 심연에서 올라오는 '이들을 팽개치고 도망가버리고 싶다는' 유혹과도 싸워야 했다.  그 유혹과 싸우기가 쉽지 않아서 힘들었다. 


최후까지도 나는 반신반의 하고 있었다. 정말, 우리가 뭔가를 바꿀수 있을까? 정말로?


나의 전사들이 잘 해냈다. 그들이 합리적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는 그저 심리적인 바람막이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전사들은 이 전쟁을 통해 '영웅'으로 거듭났다. 명예로운 승리였다. 조용한, 아무도 알지 못하고, 그래서 기억하지도 못 할 비밀스러운 전쟁이지만, 나는 이 비밀스러운 전쟁에서 영웅이 탄생하는 것을 목도했다. 


그래서 나는 알게 되었다. 인간의 역사는 --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쥐도 새도 모르는 작전들이 기초가 되어 굴러가는 것이다. 말할수 없거나 말해지지 않는 역사가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한다.  나의 전사들은 전쟁에 이겼어도 나가서 승전고를 울리며 자랑을 할 수가 없다. 알려져서는 안되는 일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이런 류의 전쟁이 아주 많이 진행된다는 사실에 새삼 눈을 떴다. 나의 세계관에 틈이 생기고 새로운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 비밀스런, 누설되어서는 안되는 승리에서 내가 찾는 의미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남들이 누리는 것보다 훨씬 복된 삶을 누리고 살면서 사회에 진 빚을 조금 갚았다는 것이다. 특히,  이 세상에 '딸/여자'로 태어나서 이러저리 치이고 무시당하고 함부로 건드려지는 보통 평범한 사람들이 억울함을 감내하며 구석에서 숨죽여 울고 분노할때, 내가 그 곁에 서서 함께 분노해줬다는 것에서 의미를 찾는다.  하느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실때 내 주신 숙제 수천가지 중에서 한가지를 했다는 선명한 느낌. 


하느님, 저 숙제 한가지 했습니다. 다음에 주시는 숙제가 뭔지 모르지만, 숙제를 주시면 저는 숙제를 해 낼겁니다. 당신 곁으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9. 2. 1. 22:35



요즘 한국에서도 셀프 주유 시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긴 한데, 미국에서는 극 소수 지역을 제외하면 (뉴 저지 주에서는 주유원이 주유를 해 준다) 셀프 주유가 일반적이다.  플로리다주 탤라하씨에서 발견한 주유소 주유서비스 표시. 


자세히 살펴보자. 휠체어를 탄 사람 표시와 유모차 표시가 있다. 신체장애가 있거나 혹은 유아를 데리고 있어서 스스로 주유하기가 힘든 형편에 있으면 이 버튼을 누르면 주유원이 와서 주유를 해 준다는 표시로 보인다. 서비스 시간대도 표시가 되어있다.  일요일에는 서비스를 안한다는데, 일요일에는 돌아다니지 말라는건가? 아니면, 일요일에는 가족들이 동반할수 있다고 보는건가?


어쨌거나, 몸이 불편한 상황에서는 차에서 나와서 주유를 하는것 자체도 난관일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겨울동안, 장애 학생들이 학교 생활을 좀더 편안하게 할 수 있는 방안들에 대한 공부를 하기로 했는데, 진척된 것이 없다. (공부를 하기 싫었을것이다. 내 일이 아니라서.) 공부 해야 하는데... 하느님, 저 좀 봐주세요. 하긴 하는데요. 저 좀 쉬게 해주세요. 아니면, 저에게 좀더 힘을 주시던가요.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9. 2. 1. 22:27


노스캐롤라이나 맥도날드에서 발견한 화장실 표시.  

  1. 남자화장실이며, 
  2. 휠체어 장애인이 화장실을 사용할수 있도록 설비가 되어 있고
  3. Baby Changing Station, 아기 기저귀를 갈수 있는 선반이 마련되어 있음

을 알리는 표시들이다. 

물론 모든 맥도날드 매장에 이런 표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눈에 띄길래 사진 기록을 남겼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9. 1. 31. 23:44

잘 모르는 사람들과의 식사자리. 날씨 얘기, 세상 돌아가는 얘기, 골프 얘기. 내가 골프 안 친다고 하자 골프 얘기는 중단되고, 다시 세상 돌아가는 얘기.  그러다가 강대국과의 외교 문제로 얘기가 돌아가면서, 한국은 왜 중국에 빌빌대고 미국에도 꼼짝 못 하면서 허구헌날 일본만 때리러 드냐고 묻는다.  


'한국이 일본을 때리기는 하는건가?' 의아해 하고 있는 사이에, 골프를 치지 않는 내가 별 말이 없자 그가 마저 이야기를 이어간다, "위안부 배상 문제가 벌써 언제 끝났는데 아직도 그거 가지고 일본을 물고 늘어지는건가, 외교고 뭐고 그냥 성질 내고 막 나가겠다는것이니 이런 무례가 또 어딨나!" 그는 제법 확신에 차 보인다.  나는 화장실에 가야 한다며 그 자리를 떴다. 그 자리에 계속 있으면 그날 저녁 식사 자리는 좋게 끝나기는 다 틀린거다.  초면에 얼굴 붉히고 사생결단으로 멱살잡이하기도 귀챦고. 내 역사 의식이 뭐 제대로 박힌것인지 자신하기도 어렵고.


나는 정치니 외교니 역사니 그런거 잘 모른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한가지는 분명하게 말 할수 있다.  



내가 어느 집구석 딸이다. 그런데 우리집 아비 어미가 지지리도 못나다보니, 이웃 집 남자들이 우리집을 만만히 보고, 나도 만만히 보고, 나를 훤한 대낮에 사거리에 끌고 나가서 사람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강간하고 윤간하고 폭행하고 만신창이를 만들어 놓고는 가버렸다.  마을에서 힘 좀 쓴다는 이웃들이 자기네들이 정의로운척 폼잡으며 뭐라뭐라 하니까, 그 이웃의 불한당이 내 아비 어미, 오래비와 협잡을 한다. 


"야, 불쌍해서 좀 만져준거야. 원래 먼저 꼬리친건 니네집 딸이야. 저도 좋아서 한거라구.  뭐 너네 신세가 딱한것 같아 보이니 내가 인정을 베풀어주마. 야 이거나 먹고 떨어져. 알았니? 잘 해 보자구. 좋은게 좋은거야."


그래서 그 아비 어미 오라비 놈이 불한당의 돈을 받아다가 썼다.  내 아비 어미 오라비 그 누구도 '당한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물론 이웃 놈들도 내게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우리집에서는 가끔 돈 떨어지면 이웃에게 과거를 팔아 돈을 갖다 썼고, 그 때마다 번번이 나를 내세웠다.  하지만 누구도 내게 무엇이 잘못된것인지 말하지도, 사과하지도, 위로하지도 않았다. 나를 팔아 제 배를 불릴 뿐이었다.  내가 언제 저들에게 돈 달랬나? 내가 언제 내 아비 어미에게 배상해달랬나? 나는 제대로 된 진심어린 사과를 받고 이 일 자체를 강물에 흘려버리고 싶을 뿐이다. 내가 언제 돈 달랬냐구?




나는 이것이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위안부'라는 문제의 핵심이라고 보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내 이웃이고, 내 아비이고 어미이고 오라비이고 뭐든 사람을 믿지 않는 편이다. '위안부'라는 이름의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위안'을 받을수 없다. 없을 것이다. 그저 한명 한명 한을 품은채 사라져 갈 뿐이다. 이웃에게서도 제집 식구들에게서도 제대로 존중 받지 못 한 채로. 너라면 네 여동생이 윤간당하고 버려졌는데, 네 동생은 여전히 길거리 매춘업자 취급을 당하고 있는데, 가해자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 그럼 너는 더 나쁜 가해자지. (비굴하고 치사한 놈이지.)  이제와서 뭘 어쩌란 말이냐구?  --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이 새끼들아?"



그래도 정말 몰라서 묻는거면 최소한 한가지는 일러주마. 너희들 역사책에 태평양전쟁중 일본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정확히 기술을 해. 한국및 다른 나라의 여성들을 강제로 잡아다가 성노예로 쓰고 버리고 죽이고 학대 했음을 반성하는 기술을 해. 너희들 미래세대가 더이상 이 일로 엮이지 않도록 하란 말이지. 과오에 대한 시인. 그것이 과오를 바로잡는 시작점이야. 그래야 제대로 털고 지나갈수 있는 거라구. 가해자에게도 이 일이 어려운데, 피해자가 그냥 넘어갈수가 있다고 생각하니? 힘으로 때리고 죽일수는 있어도, 힘으로 기억을 지울수는 없는거지. 안그래? 모두 죽어도 기억은 남는다구. 안그래?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9. 1. 17. 01:50

내 '눈 먼 고양이 폴'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제 외출하여 돌아와 문밖을 내다보니 저녁 늦게 폴이 문 밖 고양이 타워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내가 돌아와 밥을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얼른 고양이깡통과 마른먹이를 가져다 그릇에 담아주니 배가 고팠던 듯 허겁지겁 먹는다. 그 먹는 모습이 참 예뻤다. 눈 먼 고양이 폴이 문 밖에 와서 나를 기다리고 내가 주는 먹이를 먹는 모습이 내 가슴을 따뜻하게 했고, 내 심장은 기쁘게 고동쳤다.


"나비야, 나비야, 너는 그냥 살아있기만 하면 돼. 네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나는 너무 좋아!" 


밥을 먹고 있는 녀석의 잔등을 바라보며 나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우리가 생명가진 존재들, 내 가족이나 이웃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런 방식으로 대할 수 있는거구나. 


눈 먼 야생고양이의 삶은 고단하다. 그런데 '실용성' 면에서 보면 세상에 이렇게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도 없다. 눈이 멀었으니 간신히 인간이 제공하는 먹이나 먹으며 생존 할 뿐, 새나 다람쥐를 사냥하기도 어렵다. '실용성' 면에서 보면 도대체 이 동물이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 먹이만 축 낼 뿐이다. 


나는 내가 후원하고 있는 지적장애 아이 (내 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 애는 아무리 잘 입히고 잘 먹이고 잘 교육 시킨다고 해도 도대체 희망이란게 있을까? 평생을 건강하게 별 탈없이 살아온 내 입장에서 극한의 장애를 가진 아이에 대한 나의 시각이 이런 식이다. 그냥 하루하루 먹고, 배우고, 시간을 보내고 그냥 살아있을 뿐, 이 아이는 장래를 위해서 무얼 계획하고 실행할까?  나는 후원을 하면서도 난감한 편이었다. 밑빠진 독에 물 붓기 하듯 희망이 없는 곳에 뭔가 절망적으로 희망의 물을 붓고 있는 애매한 상황처럼 보였다. 


그런데, 내가 눈 먼 고양이 폴에서 속삭였던 독백에서 내가 갖고 있는 난감한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았다. 그냥 잘 살아있기만 하면 돼. 뭔가 위대한 일을 하지 않아도, 어른이 안되어도, 일꾼이 되지 않아도, 지능이 낮아서 뭔가 사회에 기여하는 구성원이 되지 않아도, 아무것도 안 해도 그냥 "네가 살아 있어서 세상이 더욱 눈부시게 빛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모든 생명이 그러할 것이다. 


살아있어 주기만 해. 네가 살아있다는 것이 내게 가장 큰 기쁨이다. 


내가 난감해 하고 있는 신체적/지적 장애인에 대하여, 혼자서 살아가기 힘든 노인 인구에 대해서, 그 외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힘없는 이웃들에 대하여 나는 '해답'을 구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인생에 해답이란 없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을 뿐이다. 건설적이고 실용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어떤 '해답'을 찾기보다는 '현재' 태양아래에서 살아 숨쉬며 나와 동일한 시간과 공간을 나눠 쓰는 내 이웃에 대하여 나는 예의를 갖추고 따뜻한 말을 건네거나 하다못해 웃어주면 된다. 그러니까 절망 해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가 죽어야 하는 존재이므로 이미 절망을 안고 태어났으므로 그 이상의 절망은 옥상옥. 무의미할 뿐이다. 살아있는 동안은 살아 있음을 서로 축하해주면 된다.  어차피 우리는 다 죽는다. 잘난 사람이나 못 난 사람이나.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고학력자나 저학력자나. 남자나 여자나. 차이는 없다.  슬퍼할 일도 없다. 게임은 공정하다. 기뻐할 일이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9. 1. 17. 01:22


나는 대체로 방관자로 살아왔다. 정의와 개인의 안위 사이에서 늘 개인의 안위 쪽을 선택했다. 불편함과 편안함 사이에서 늘 편안함을 선택했다. 한푼이라도 이익이 되는 것과 손해를 보면서도 다른이를 돕는것 사이에서 한푼의 이익을 선택해 왔다. 



나는 비겁했으며, 겁에 질려 있었고, 도망가거나 회피하는데 익숙한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중학교 3학년 때 음악선생님이 방송실에서 나를 포옹 했을 때에도 도망을 쳤으며, 동일한 선생님이 내 친구를 내 앞에서 포옹하고 입을 맞추고 내 친구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를 때에도 나 혼자 살겠다고 벌벌 떨면서 도망을 쳤다.  나는 내게 행해지는 악덕에 대해서 입을 다무는 방식으로 악덕에 협조했고 악덕과 공생하려 애썼다.  나는 한번도 정의로운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나는 또다시 그러한 유구한 악덕의 물줄기 앞에 서 있고, 다행스러운(?)점은 피해자가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모른척 지나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내게 도움을 청했을때 나의 가장 현명한 선택은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방식으로 '바이스탠더 bystander, 방관자'가 되어서 입에 발린 말을 하면서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다. 



입에 발린 말이란 이런 것이다. 

"저런, 정말 나쁜 놈이구나. 그런 놈은 가만 놔두면 안돼.(끝)"

"저런, 정말 몸쓸 일을 겪었구나. 그러니 남자들은 믿으면 안돼. 여지를 주면 안돼. 네가 조심해야지 어쩌겠니 (한숨)"

"여자가 얼마나 단정치 못하면 그러겠니. 네가 좀더 처신을 잘 해야지. (비난)"

"할수 없지. 세상이 그렇단다. 법이라는게 우리편이 아니야. 입 다물고 다 잊어버려. (미래지향적 판단)" 



내가 알고 있는 선생님들이, 이웃의 나이들은 성인 여성들이 대체로 이렇게 코치를 했다. 수업시간에 여자 선생님들도 이런식으로 우리들을 가르쳤다. 미투 운동이 활발한 21세기의 오늘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신문에 방송에 크게 떠든다고 상황이 갑자기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판단력은 크게 진보하지 않는다. 숨기고 은폐하고 덮고 지나가고 아무일도 없었던듯 침묵하라고 회유하거나 강요한다. 



이제 나는 이런 사회정의와 규약에 협조할 생각이 없다. 나는 내 식대로 문제를 풀어 갈 것이다. 어쩌면 형편없고 치졸한 전략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다른 대안이 없으면 그렇게 하는 수 밖에 없다. 나는 말하고, 연대하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이끌어 낼 것이다. 물론 치사하게 SNS나 언론에 불어버리는 식은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명예훼손으로 소송당할수 있으니까. 그것보다는 좀더 규칙을 지키며 저항하되, 저항을 계속 할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저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에 양순하게 협조하면서 스스로를 '이만 하면 됐다. 나는 모범시민이다'라고 추켜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단 한번만이라도, 살면서 단 한번만이라도 나는 정의의 편에 서서, 휘어지고 망가진 것을 곧바로 펴고 고쳐놓고 싶다. 일회성이라고 해도.  죽을때, 딱 한번이라도 나는 정의로웠다고 회고하고 싶다. 죽을때 말이다. 나는 엉망진창의 인생을 대충대충 멋대로 비겁하게 살아왔지만 딱 한번은 정의로웠다고 회고하고 싶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2. 31. 11:52


버지니아 집에 도착하여 나흘간 관찰한 바로는, 현재 우리집을 '급식소'로 인지하고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고양이는 모두 여덟 마리이다. (밤사이에 여우나 어메리칸 라쿤이 왔다 갈 것이다.)


그 여덟 마리에 대하여, 아니 이곳을 다녀간 고양이들에 대하여  내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정리를 해보자.


어미고양이 (고양이 종족의 조상): 이 고양이는 내가 이 집에 오던 해에 처음 발견했을때에는 태어난지 1년도 안되는 작은 고양이었다. 흰 샴고양이와 오누이처럼 둘이 붙어다니는걸 가끔 지켜봤다.  어느날 심심해서 뒷문 밖에 고양이 먹이를 놓아주자 가끔 아무도 모르게 와서 밥을 먹고 갔다. 처음에는 밥을 놓아주고 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먹고 가서, 늘 빈 밥그릇에 밥을 채워주기만 했다.  2014년 어느 초가을 저녁에 그 낯익은 고양이가 새끼 두마리를 데리고 와서 밥을 먹는 것을 발견했다. 어느새 어미 고양이가 되어 있었다.  고양이는 새끼 두마리를 배불리 먹인후에는 달빛 아래에서 놀다가 사라지곤 했는데, 두마리 새끼중에 한 놈은 참 못생긴 놈이었고, 또 한놈은 참 예뻤다. 가을이 깊어졌을때, 어미고양이가 늘 새끼를 몰고 가는 덤불 입구에 가서 살펴보니 새끼고양이 한마리가 덤불속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런데, 눈에 문제가 있어보였다. 감염이 된 것 같았다. (태어날때 정상이었는데 감염된걸까?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던걸까?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막대기 끝에 맛있는 먹이를 꼬치처럼 꽂아서 덤불 안으로 살살 들여미니까, 경계를 하면서도 그 음식 냄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먹이를 얌전히 받아먹었다.  그때부터 온갖 종류의 맛있는 고양이 먹이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생 닭가슴살도 사다가 잘게 썰어 던져주기도 하고. 제발 먹고 살기만 하라고. 그해 겨울을 지내면서 우리집 뒷마당은 어미와 두 아기들의 보호소가 되었다. 추운 겨울, 새벽이면 애들이 추위에 얼어죽지나 않았는지 잠에서 깨자마자 내다보았고, 우유를 따뜻하게 데우고 진수성찬을 차려서 뒷마당에 내다 주었다. 어미고양이와 남매처럼 사이좋은 샴고양이, 그리고 새끼 두마리와 함께 그 겨울을 보냈다. 그 해 겨울은 내게도 혹독한 겨울이었다.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가능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백수'였다.  고양이들보다 내 가슴이 더 추웠을지도 모르지만, 고양이를 돌보는 재미로 우울증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샴고양이는 어미의 남편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냥 다정한 친구들이었다. 미끈하게 잘생긴 샴고양이는 후에 다른 수컷들의 등살에 고통을 겪다가 어디론가 영영 사라졌다. 고양이 수컷들은 어느날 사라진다. 


2014년 가을에 첫배 새끼를 낳은 어미 고양이는 2015년 봄에 두배째 새끼 다섯마리를 낳아서 잘 키우다가 여름 무렵에 모두 잃어버렸다. 내가 그 새끼들과 놀던 동영상도 남아있는데, 내가 추측하기에 여우가 한마리 한마리 잡아 먹었을것이다. 여우가 늘 고양이들의 덤불 근처를 기웃거렸다. 나는 새끼 고양이가 한마리 한마리 없어질때마다 가슴이 무너졌다.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다 말고도 울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 야생 고양이로 태어나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소리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다니! 하면서 울었다. 


2015년 가을에 어미는 세번째 새끼들을 낳았다. 몇마리를 낳았는지 모르지만 두마리를 데리고 나타났다. 새카만 고양이. 우리가 '장군'이라고 부르던, 흑표범을 닮은 크고 미끈한 검정고양이가 아범일 것이다. 그 후에 어미는 중성화 되었다. 그 후로 어미 고양이는 살이 찌기 시작했다.


못난이 피터: 어미고양이의 첫 새끼. 나는 처음에 이 새끼 고양이를 보고 '어머나 세상에 저렇게 못생긴 고양이는 처음봐!' 했다. 정말 못생긴 고양이였다. 나는 어미고양이의 두 새끼에게 '사도 바울'과 '베드로/피터'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눈이 먼 아기 고양이를 응원하기 위해서 - 일시적으로 눈이 멀었던 사도바울님의 이름을 붙여주었고, 그 형제에게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준 것이다. 피터는 호기심이 많아서, 내가 물고기 낚시 장난감 막대기로 살살 유혹하자 야금야금 우리집 거실로 들어왔다. 조금씩 조금씩.  결국 겨울사이에 피터는 우리집 거실을 드나드는 하이브리드 고양이 (야생이지만 인간과도 교제하는)로 성장했다.  피터. 피터는 나중에는 이따금 내 침대에서 자고 나갔다. 야생 고양이가 내 침대에 진드기나 독을 옮긴대도 개의치 않았다. 난 그런일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하이브리드 (반 야생) 사람이다. 피터는 2017년 여름에 내가 버지니아에 돌아왔을때까지도 이곳에 살아서 나를 반겼는데, 어느날 사라졌다.  어디론가 갔을것이다. 


눈먼 사도바울님: 어미고양이의 첫 새끼. 나는 이 고양이때문에 많이 한숨 짓고 많이 울고, 이 고양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에 대하여 많이 사색하고 깨닫게 되었다. 이 고양이는 진정한 야생 상태에서는 생존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이 눈먼 고양이가 유아기에 실명을 하거나 처음부터 뭔가 문제를 안고 태어났거나 간에 무사히 성장하여 네번의 혹한을 견디고 건강하게 살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의 곁에 어미와 형제들, 그리고 선량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2014년에는 내가 이 고양이 가족의 유일한 후원자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온 동네 사람이 모두 후원자였다고 해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 고양이들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았으며, 눈먼 고양이가 비틀거리며 이동하는 것이 보이면 모두들 멀리 길을 돌아가거나 비켜주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응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첫 해 겨울을 보낸 일이 영화 장면처럼 회상이 된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던 겨울날, 고양이들은 덤불에서 나올수가 없었다.  나는 눈이 녹기를 기다리며 덤불만 주시했고,  덤불가에서 고양이들이 이쪽을 향하여 오려고 시도하는 모습을 보고 안도 했다. 눈에 덮여 죽었을까봐 걱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들은 눈이 녹기를 기다려 어기적어기적 눈위를 걸어 우리집으로 먹이를 먹으러 왔다.  살아있어줘서 고마워. 


나는 낡아서 버리려고 했던 커다란 후라이판을 고양이 가족의 먹이 그릇으로 사용했는데, 새벽이면 그 후라이판에 우유를 데우고, 마른 고양이 사료를 넣고, 그리고 캔도 따서 넣어 주었다.  그러면 후라이판에서 김이 설설 났는데, 밤새 추위에 지쳐있던 아기 고양이들은 덤빌듯이 다가와 추위와 허기를 녹였고, 어미는 새끼들이 배불리 먹고 난 후에야 겸손한 표정으로 다가와 마저 먹이를 먹었다.  어미는 늘 새끼들이 배를 채운후에야 마지못해 와서 먹는듯한 표정이었다. 어미고양이의 헌신은 눈물겨웠다. 가끔 나는 생닭다리나 가슴살을 이들에게 던져 먹이기도 했는데, 내가 먹이를 줄 때면 일부러 막대기로 후라이판을 탱탱탱탱 종치듯이 때렸다.  '파블로프의 개실험'처럼 탱탱탱 울리는 소리가 밥주는 소리임을 기억하게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내가 먹이를 주고 탱탱치면서 "나비야, 나비야! 밥먹어라!" 하고 외치면,  덤불에서 고양이들이 삐죽삐죽 얼굴을 내밀고는 냉큼 달려왔다.  고양이들은 분명히 내 목소리도 기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먹이를 먹이는 것 외에도 나는 대나무 막대기 끝에 내가 바느질하여 만든 '황금물고기'를 실에 꿰어 매달아 그것으로 고양이들에게 오락을 제공했다. 어린 피터는 특히 나와 이 놀이 하기를 좋아했다. 피터와 내가 친해진 이유는 먹이 외에도 이 장난감 때문이었다.  이 장난감으로 고양이들을 거실로 살살 유혹하는 것이 나의 특기이다.  피터는 하늘을 나르듯 휙휙 날랐다, 이 물고기를 잡기 위하여.  눈 먼 고양이 사도바울 역시 이 장난감을 좋아했다. 눈먼 고양이는 어떻게 하늘을 휙휙 나르는 낚싯대 물고기를 잡을까?  사도바울을 위해서 내가 고안해 낸 것은 낚싯대의 황금물고기를 잔디위로 살짝 살짝 부딪치거나 살짝 끄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물고기가 잔디에 부딪치거나 끌리는 소리를 탐색하여 이 장난을 즐겼다. 사도 바울은 어찌나 영특한지 단지 발소리만으로 다람쥐를 쫒아서 달리고, 그 다람쥐가 소나무 위로 올라가 버리면 소나무 아래에서 다람쥐가 도망간 윗쪽을 쳐다보며 30분도 넘게 기다리고 앉아있기도 했다.  그는 마치 눈을 뜬 고양이처럼 그대로 행동했다. 



봉숙이: 봉숙이는 2014년 겨울이나 2015년 어느날 어린 고양이일때 나타났다. 어미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 우리가 '짝퉁이'라고 부르던 큰 고양이와 나타난것 같은데 그 '짝퉁이'는 봉숙이를 제 새끼처럼 위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는 미스테리인채로 남았다.  봉숙이는 어미도 없고, 눈치꾸러기였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피터'를 따라다녔다.  피터를 자신의 의지처로 삼은것 같았다. 피터가 나의 꾀임에 넘어가서 우리집 거실로 들어오면 '봉숙이'도 피터오빠를 따라서 들어왔다. 피터는 분명 숫놈이었는데, 피터가 우리집 소파에 앉아 쉬고 있으면 봉숙이도 냉큼 피터 오빠의 품에 가서 피터의 젖을 빨았다.  피터의 젖을 빨았다고... 어쨌거나 숫놈도 젖꼭지는 있는 모양이었다. 피터는 조금 귀챦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봉숙이를 물리치지는 않았다.  피터는 뭐랄까 '쿨가이'였다. 늘 쿨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살가운데는 없었지만, 그래도 봉숙이에게는 엄마, 아빠 노릇을 해 준것같았다.  왜 봉숙이 이름이 봉숙이가 되었는가하면 -- 하필 그당시에 '장미여관'인가 하는 사람들의 '야 봉숙아 꿀발랐으났드나, 나도 함 먹어보자' 이런 얄궂은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그 '봉숙이' 이름이 코믹해서 봉숙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게 된 것이다.  봉숙이도 몇해를 뒷 숲에서 살다가 피터와 비숫한 시기에 사라졌다.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니고, 차례차례 어디론가 사라졌다.


짝퉁이: 짝퉁이는 2014년 겨울에 나타난 것으로 기억한다.  왜 짝퉁이냐하면, 북미의 흔한 회색고양이 (회색 줄무늬 고양이)인 '어미고양이'와 너무나 흡사하게 생겨서 처음에는 구별을 잘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 얼굴을 익히고 어미고양이와 구별할수 있게 되었을때 그녀의 이름을 '짝퉁이'라고 짓게 되었다. 어미고양이의 짝퉁이라는 뜻이니, 당사자는 억울할수도 있겠다.  본디 짝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닌데... 지금 생각하니 미안해진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2. 29. 00:30

버지니아 집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점검한 사항은, 집 뒤 덤불에 사는 고양이들 점호였다. 마침 햇볕 따사한 겨울 날씨. 고양이들이 덤불에 쌓인 낙옆 침대에 몸을 누이고 해바라기를 하며 쉬고 있었다. 


눈처럼 흰 고양이 한마리.  러시아 고양이 푸틴녀석의 새끼일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십대의 아직 덜 여문 자태. 다리를 살짝 저는 검정 흰색 알록이 고양이 한마리. 역시 늦은 봄에 태어난 녀석일 것이다.  나의 눈먼 고양이 사도 바울님은 어딨는가?  덤불 근처에서 '사도 바울! 사도 바울!' 부르며 고양이들에게 다가가니, 푸틴의 새끼와 알록이는 낯선이를 경계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저쪽으로 가면서 연신 나를 주시하는데; 덤불에서 털이 긴 꽤 비싼 고양이로 보이는 (고귀한 귀족 고양이) 어느 고양이와 서로 몸을 포개고 있던 나의 사도바울이 감은 눈 너머로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다른 고양이들은 저만치 가는데, 나의 사도바울은 그자리에 가만히 누운채 머리만 갸웃갸웃한다. 네가 내 목소리를 알아 보는구나. 네가 내 발자욱 소리를 기억하고, 너를 부르는 내 목소리를 기억하고, 그래서 경계를 풀고 누운채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구나. 네가 나 없는 동안 친구들을 사귀고 잘 지내고 있었구나. 


나의 눈 먼 고양이 사도바울에게는 도무지 길고양이로 보이지 않는 고귀한 혈통의 친구들이 새로 생겼고, 서로에게 기댄체 체온을 나누며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마음씨가 상냥하여, 어미가 새로 새끼를 낳으면 동생들을 제 새끼처럼 돌보며 데리고 다니곤 했는데 (눈먼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들을 이끌고 내 집 뒷마당으로 나타나곤 했지... 먹이 먹는 장소 교육), 어미가 더이상 새끼를 낳지 못하게 된 이후로 (길고양이 중성화작전), 자신도 새끼를 낳을수 없는 처지가 되었어도, 여전히 어디선가에서 중성화 되지 않은 암컷들이 새끼를 낳았고, 사도바울은 기꺼이 새 생명들의 언니, 보모가 되어 줬으리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얼마나 신비로우신가.  나의 눈먼 고양이는 이 마을에서 5년째, 다치지 않고, 사람에게 괄시당하지 않으며, 선량한 이웃 사람들의 무언의 보호 속에서 다른 고양이들과 어울려서 잘 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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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2. 7. 13:30




건강검진을 하니 혈압을 슬슬 조심해야 할 나이라고 한다. 평소보다 조금 높을 뿐인데 혈압을 조심하라니.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보다. 골치가 아픈 일이 많으니까, 혈압이 상승하는거 아닐까?

어제는 학생이 오케스트라에서 연주를 한다고 해서, 캠퍼스 강당에서 하는 것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음악 연주를 보러/들으러 갔다. 


소품 몇가지를 대학생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했는데,  마스카니의 까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 제목을 알건 모르건 대체로 다들 들어보고 좋아하는 이 곡이 흘러나왔다.  막내 아들의 학예발표회에 간 엄마의 심정으로 학생이 연주하는 것을 들여다보다가, 사람을 잊고 음악에 잠시 스며들어갔다.  


천연 환각제같은 음악에 잠시 취해 있다가 다시 나와서, 무대를 바라보며, 은은한 무대 조명 아래에서 몰입하여 연주하는 그 막내둥이 학생을 보면서 문득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보았거나, 깨달았으리라. 


나는 그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해보았다. 저 학생의 엄마나 아빠가 와서 이 광경을 봤다면 참 흐뭇했겠다. 그들이 잘 보살펴서 키워낸 아들이 무대위에서 광채에 휩싸여 첼로 연주에 몰입하고 있는 광경을 발견했다면 참 좋았겠다.  내가 그 빛을 대신 보는구나. 



오케스트라 연주나 혹은 청중을 몰입하게 하는 연주장에서, 가끔 '내가 없어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내가 지휘자 주변의 빛 속에 휩싸여 있거나, 단원들의 악기들이 움직이는 공기속에 떠도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음악소리가 되어 공기중에 떠도는 느낌.  깨어나면 여전히 무거운 육신을 가진 존재로 돌아오지만.  그런 찰나의 환상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연주회장에 가는 것이 아닐까?



이 음악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올때마다, 나는 무대위에서 신중한 표정으로 연주를 하다가 음이탈을 했는지 어색하게 생긋 웃고마는 아름다운 한 소년-청년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가 광채에 휩싸여 무대에 있던 것을 나는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의 일상은 지리하거나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아닐것이나, 그는 살면서 가끔 가끔 그렇게 반짝하고 빛날 것이다.  아마 나도 반짝일때가 있겠지. 누군가의 시선에 그 반짝임이 잡힐때도 있겠지. 아마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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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2. 4. 12:03


영화 '국가 부도의 날'에 나온 한 장면이 나를 아주 잠깐 '혼란'에 빠뜨렸다.  


하바리 출신의 재벌 막내 아들을 정부 요직에 있는 하바리 출신의 인사들이 초청해 놓고 새파랗게 젊은 재벌 막내가 나타나자 한참 나이 많은 '선배님'들이 일제히 기역자로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한다. "더 숙여 임마!" 이런 대사도 있었던 것 같고. 그러니까, '재벌'이 이 나라의 진짜 주인이고 정부 관리들은 그의 하수인처럼 보였다.  그 장면을 보면서 어리둥절, 처연했다. 



저...저...게 이 세상의 진짜 모습인걸까?



물론 허구로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서 '저게 진짜 모습인걸까?' 할 필요는 없다. 허구니까.  하지만 그게 정말 허구인가? 재벌과 밝게 미소짓던 여자 대통령, 그 여자 대통령을 탄핵하고 그자리에 오른 남자 대통령 역시 그 재벌과 밝게 미소짓지 않던가. 그것은 현실이지. 그 재벌은 무슨 짓을 해도 '솜방망이' 처벌을 이겨내고 늘 빙긋 웃는다.  내가 본 현실과 영화속의 장면이 왜 그렇게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가?



그...그..그러니까...내가 여태 그걸 몰랐을 뿐, 세상은 저런것이었나보다.



내가 내 오십여 인생을 돌아보니, 극단적으로 가난하지도 않았고, 떵떵거리는 부자인적도 없고, 성실하게 평생 월급쟁이로 남들만큼 노력하고, 남들만큼 고민하면서 굶어죽지 않고, 도태되지 않고 도란도란 살면서,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재벌 따위 남의 일이니 신경 안써도 되었고, 재벌이 크게 부럽지도 않았고 (어차피 부러워한다고 될일도 아니니 마음 접었고), 내 인생 재벌과 상관없이 충분히 잘 살아내고 있다는 상상 속에서 살아온 것 으로 보인다. 재벌이 내 앞에 있어도 내가 고개 숙이고 허리 숙이고 인사 해야 할 이유도 없고, 너는 너 나는 나 상관없는 존재였을 뿐이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내 삶 역시 저들의 '마수' 안에서 요리되고 기획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여태 멍청하게 살아온게 아닌가 슬슬 회의가 든다. 



좋아. 니네들은 너희들의 게임의 규칙에 충실하게 살아라. 나는 다행히 큰 화를 당하지 않고 눈치껏 소시민으로, 방관자로, 치사하게, 비굴하게, 양심껏, 적당히 회유되고, 적당히 굴복하면서 연명해왔다. 



그런데 말야.  이제 내가 오십이 넘었거든.  별로 가진것이 없지만, 그렇다고 굶어 죽을것으로 보이지도 않아요. 지금 가진것만으로도 그냥 대충 먹고 살면 근근히 남한테 손 안벌리고 살다 죽을수 있을것도 같거든.  정 안되면 바닷가에 가서 조개 줍고 굴 따고, 미역 따서 쌀밥에 국 끓여 먹다 죽어도 우짜든동 살아 낼 수 있을것 같거든.  그런 계산이 서자, 평생 비굴하고 소심하게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해하면서 사회 정의보다는 방관자로 돈 한푼이라도 알뜰하게 절약하고 챙기면서 살아온 내 앞에 다른 계산이 서기 시작한다.



내가 여태, 이 세상에서, 크게 손해보지 않고, 연탄가스에 크게 시달리지도 않고, 고시원 생활도 한번 해 본적 없이 떵떵거리고 잘 살아왔는데, 그것은 내 덕분이 아니라 그냥 운이 좋아서, 내가 비굴하게 굽신거리며 산 결과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까, 이제부터는 나도 '사람'처럼 살고 싶어진단 말이지.  사람처럼 살고 싶어.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한번쯤은 나도 모든 것 내려놓고 '사람'으로 살다가 가야 하는거쟎아. 딱 한번 만이라도 '사람'의 행동을 하고 싶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많이 살았어. 편히 잘 살았어. 남들이 고통을 겪을 때 내 잇속만 챙기며 잘 살아냈어.  그러니 이제 한번쯤은, 딱 한번만이라도 '사람'의 행동을 해야 하지 않겠어? 나는 이제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  오늘 살다 내일 죽어도 '사람'으로 죽겠어. 



나이 먹은 아줌마는 무서운게 없어지면서, 슬슬, 탈바꿈을 하고 싶어진다. 먹을 만큼 먹었고, 살만큼 살았어. 나는 평생 충분히 비굴했고 충분히 비정했으며 충분히 무책임했고 충분이 제 밥벌이에 급급했어. 마이 무따. 고마하자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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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1. 30. 12:31




What is Name Calling Propaganda?

Name calling propaganda occurs when complementary or pejorative words are used by governments, individuals, or the media to describe another person or group. The purpose is to subliminally manipulate or influence public opinion in order to generate conformity with the opinions of those producing the propaganda.


https://soapboxie.com/us-politics/Name-Calling-Propaganda-Terrorist-or-Freedom-Fighter




'name calling' 혹은 'name-calling' 이라는 선전선동술 (propaganda)이 있다.  한국어로는 어떻게 번역이 되거나 통용되는지 잘 모르겠다. "영희야! 철수야!" 이렇게 이름을 부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평이하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이름/별명'으로 부르는 것'이라는 뜻이다. 의도를 가지고 어떤 사람들이나 특정 집단에 대해서 '나쁜 별명'을 붙이는 것이다.



무슨 예가 있을까? 호남지방 사람들을 '홍어'라고 부른다거나 '절라디안'이라고 칭하는 것을 가끔 웹에서 보는데, 그걸 볼 때마다 기분이 아주 나빠진다. '개쌍도'라는 말도 있다. 역시 불쾌한 말이다. 또 요즘 웹에 보이는 나쁜 별명들이 뭐가 있더라?  맘충, 급식충, 틀딱, 좌빨, 빨갱이들, 종북, 태극기부대, 개독 (개같은 기독교라는 말인가보다), 기레기 (기자+쓰레기)  뭐 그런것. 어떤 대상에 대해서 비난과 조롱의 뜻을 담아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이 name calling 이다.



미국에서 red-neck은 남부지방의 저소득 노동자 계급 백인 남자들을 일컫는다.  태양아래에서 일하다보면 못 뒷덜미가 붉게 타니까 이런 조롱섞인 별명이 붙었나보다 추측한다. 



여자들에 대해서 보통사람들이 별 생각없이 하는 말 중에서 '김여사'는 운전이 서툰 중년 여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줌마'는 본디 아름다운 말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아줌마'에 부정적인 의미가 덕지덕지 붙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 우연히 목격한 TV프로그램 장면. 그냥 스치면서 화면 돌리다가 발견하여 약 3분쯤 시청하다 끄고 나왔다. 프로그램은 '마녀사냥'이고 주제는 '내 남친은 젊은 아줌마'다.  수컷 몇 사람이 나와서 수다작렬. 이들은 아주 교양넘치고 선량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 누구에게도 악의는 없어보인다. 



내용을 보니, 어떤 여자가 사연을 보냈는데, 남자친구가 남의 결혼식 부페 식당에서 음식을 챙기는 둥 '아줌마' 같은 행동을 해서 챙피하다는 것이고, 여기 모인 수컷 신사분들은 점쟎을 빼면서 사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중이었다. 뭐 심각하게 여혐, 여자 조롱 얘기를 한 사람은 없다.  문제는 마녀사냥 제목 아래에 붙은 타이틀이었다 "내 남친은 젊은 아줌마." 



여기서 이들이 '아줌마'라고 칭할때 그 아줌마는 어떤 사람일까? 이들이 언급을 했던 안했건 숨은 뜻은 이런거다:

    1. 부페식당에서 봉지에 음식 담아가는 뻔뻔한 기혼녀 (주로 중년, 그래서 중년이 아니면 젊은 아줌마)
    2. 부끄러운줄 모르고 민폐를 끼치는 기혼녀 
    3. 함께 있기 괴로운 존재
    4. 함께 있으면 창피한 존재 (그래서 남자친구의 행동을 --젊은 아줌마 행동으로 정의한다).


좀 따져보자. 이 프로그램에서 화제의 주인공은 -- 교양없고, 경우없이, 뻔뻔하게 민폐를 끼친 사람은 아직 미혼인 젊은 남자. 그런데 그 녀석이 '젊은 아줌마'로 둔갑을 한다. (여기서 내가 열폭을 하는거다)  저들은 젊은 남자가 미친을 할 때 '미친년'이라고 욕을 한다. 실제로 웹에서 보면 수컷들끼리 서로 얕잡아서 욕을 해 댈때, 상대가 남자인대도 ''이 들어간 욕을 한다. '놈'소리 들을 자격도 없는 '년'이라는 뜻이리라. '년'들은 이렇게 평가절하된다.   


난 어떤 놈이 내 허벅지를 쓰다듬는 것 보다도 이렇게 생각없이 방송에서 막 떠들어대는 저 인간들에 대해서 더 분노를 느낀다. 왜냐하면, 어떤 새끼가 내 허벅지를 쓰다듬으면 손목아지를 비틀어가지고 경찰서로 끌고 가면 되지만, 생각없이 연예인들이 막 뱉어내는 방송 언어는 내가 손목아지를 비틀어 패대기를 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주 교묘하고 음습하며 뻔뻔하다. '내 남친은 젊은 아줌마'라는 표현이 사연 보낸 젊은 여자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그 여자는 지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건지 똑바로 교육받아야 한다.  혹은 저따위 문구를 창조해 낸것이 방송 작가이고 그것이 여자라면 역시 같은 여자로서 정신 차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남자 방송작가가 저렇게 썼다면 역시 교양을 좀더 키우라고 말해주고 싶다. 프로듀서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 귀하신 분이시여, 니 대가리는 악세사리야? 프로듀서라는게 찍어서 내기만 하면 되는거니?  니 부하직원들이 실수하면 니가 다 책임져야지, 안그래?




말 나온김에 '아줌마'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 긍정적인 이미지를 정리해보자.

부정적:
    1. 버스나 전철에서 빈자리 나오면 가방부터 던지고 몸을 날리는 부끄러움 없는 동물
    2. 제 가족을 위해서라면 악다구니로 싸우는 전사들
    3. 제 가족만 챙기고 남은 짓밟는 뻔뻔한 동물들
    4. 뚱뚱하고, 못생기고, 냄새나고, 패션감각 없고
    5. 교양없고, 뻔뻔하고, 아무데나 기웃대고, 아무데서나 떠들고 
    6. 운전은 죽어라 못하고 도로에서도 민폐끼치는 운전자이고
    7. 부페식당에서 음식 죽어라 챙기고 (도대체 누가?)

긍정적:
    1. 남의 아기도 잘 안아주고 달래주고
    2. 폭력적이지 않으며
    3.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고
    4. 노인이나 어린아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며
    5. 자원봉사를 많이 하고
    6. 가족을 위해 전전긍긍하느라 자신을 돌보지 않으며
    7. 우리나라 교통사고 유발자 통계를 보면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이 사고를 내고 사고내서 사람 쳐죽이고, 음주운전으로 사람 죽이는데도 불구하고 운전 못한다고 욕먹어도 군소리 안하며
    8. 가족들의 고민에 귀를 기울이며
    9. 이웃의 고민에도 귀를 기울이며
    10. 동네 강아지나 고양이도 거둬먹이며


본래 아줌마, 혹은 아주머니는 아름다운 어휘였을것이다. 내가 자라던 용인의 시골에서는 서로를 아줌마나 아주머니라고 부를때 서로 존중하는 정서가 있었다. 우리 집안에서는 고모도 '아줌마'라고 불렀다. 그래서 나보다 일곱살 많은 초등학교 다니는 고모에게도 내가 '아줌마!'하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 집성촌이었으므로 나보다 한살 많은 집안의 남자가 내게 '아줌마!'라고 부르기도 했다.  항렬상 조카뻘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 아름다운 어휘가 오늘날 방송에서 '뻔뻔하고 무교양한 행동을 하는 미혼 청년'의 행동을 설명하며 '젊은 아줌마'라고 규정하였다. 그게 왜 젊은아줌마 행동인가? 뻔뻔한 청년의 행동이지.




좀 생각을 해보자. 그건 그 녀석이 교양이 없어서 그런거고 혹은 뭐 말못할 사정이 있어서 꼭 그래야만 해서 그랬는지 모른다. 그게 젊거나 늙거나 아줌마하고 무슨상관인건가?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저 마녀사냥이라는 프로그램의 제작자가 누군지 조사를 하여, 항의를 하고 시정을 요구하고, 관계기관에 연락을 취하여 저따위 못되 처먹은 언어를 방송에서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저정도 프로그램 프로듀서를 하려면 교육도 제법 받았을 것인데,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어떤 파급효과를 불러올지는 전혀 관심없이, 그냥 모여서 수다떨면서 웃기기만 하면 되는건가? 그것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피해를 당하는데도? 




니가 아줌마가 아니라 무감각하고 무신경하고 상관 없지?  나 아줌마야. 이건 내 문제야. 반드시 비속어나 누가 보기에도 저급함 '맘충, 틀딱' 뭐 이런 어휘만 문제가 되는게 아니다. 이런 어휘들은 오히려 그 선명한 저열함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아줌마'라는 평이한 어휘에 음습하게 스며든 온갖 부정적인 딱지들, 그리고 그런 부정적인 딱지를 붙인 어휘가 방송 화면에 버젓이 드러나는 것 그런 현상이 사실 더 위험하고 문제가 더 깊다. 개선되어야 하고, 책임자는 책임을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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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1. 27. 13:15


'스킨답서스' 혹은 '신답서스'라고 불리우는 식물.  설령 이 식물의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한다해도 누구나 한 번쯤 집 구석에서 혹은 공공장소에서 쉽게 볼만한 식물이다.  값도 비싸지 않고, 죽는 일 없이 잘 살고.  공기정화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식물은 줄기를 아무데나 잘라서 물병에 꽂아 주면 뿌리를 내리는데, 그걸 화분에 옮겨 심으면 잘 자란다. 그러니까 꺾꽂이도 가능한, 돌쇠같이 강인한 식물이다. 내게도 이 신답서스 화분이 있는데, 처음 섬마을 학교에 부임했을때, 학교 현관에 넝쿨이 늘어진 것을 보고 그냥 줄기를 잘라다 물병에 꽂는 것으로 그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뿌리가 생겼길래, 자그마한 화분에 심어서 또 한참을 보냈다. 이 식물은 늘 그자리에 있는듯 없는듯 군소리 하는 법 없이 물을 많이 주거나 안주거나 불평하는 법 없이 곁에 있었다.  


지난 초가을 무렵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내가 인근 다이소에 가서 천원짜리 플라스틱 화분이며 비료흙이며, 그냥 한무더기 사 온적이 있다. 그리고 일괄적으로다가 콩알 만한 작은 화분들에 심겨진 조그만 화초들을 조금씩 큼직한 화분으로 옮겨 심어주었다. 숨좀 쉬고 살으라고.


그런데, 콩알만한 작은 화초들을 몸집이 큰 화분에 옮겨 심어주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이 작은 화초들이 무섭게, 왕성하게, 미친듯이 몸집을 늘리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신답서스만 하더라도, 뱀처러 길게 길게 자라기만 하던 녀석이, 큼직한 화분과 기름진 흙이 제공되자 갑자기, 잎새 모퉁이마다 새롭게 가지치기를 하고 막 이리저리 새로운 가지를 뻗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어휴,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만했다. 완전 -- 식물 도깨비를 보는것 같았다.) 


그러니까 마치, 좁디 좁은 상자 속에서 가만히 옹그리고 있던 생명체들이 갑자기 기지개를 켜면서 활개를 치며 자라나는 것 같았다. 


놀라워서 웹 검색을 해보니, 화분에 담겨진 식물은, 뿌리의 센서가 자신이 뻗어나갈 한계를 가늠하고, 딱 주어진 환경 사이즈 만큼만 몸집을 유지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화초를 작은 화분에 담으면 그 화초는 작게 자라고, 큰 화분에 담으면 크게 자란다는 것이다.  그 원리를 이용한 것이 '분재'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도깨비'처럼 한도 끝도 없이 자라날것만 같은 나의 신답서스 화분을 들여다보면서 생각하곤 한다.  식물도 제 처지를 가늠하고 성장을 멈추거나 느리게 하는데, 사람은 안 그렇겠나?  사람도 어릴적부터 '넌 요만큼이다.  아예 꿈도 꾸지 말아라. 넌 딱 요만큼이다'라는 저주를 듣거나, 혹은 아무도 신경 안써줘서 제가 갇힌 골방이 온 세상이라고 상상하고 자라거나 그러면, 그러면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겠나. 


또 한편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은 화분에 심겨진 식물이 아니니까, 설령 한정된 상황속에서 살아간대도, 곁에 누군가가 좋은 선생님이나, 좋은 언니나, 친구가 있다면, 궁벽하고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사랑을 쏟아주는 좋은 부모가 있다면, 그 아이는 큰 화분같이 좋은 환경으로 옮겨졌을때 대성 할수도 있겠지. 아니, 최소한 큰 꿈을 꿀수도 있겠지.  환경을 개선하려 노력을 할 수도 있겠지...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아이들에게 기름지고 커다란 화분같은 좋은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고, 설령 불행한 환경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나아갈수 있도록 응원해줘야 하는 것이다. 식물은 가만히 웅크리며 기다려야 하지만, 발 달린 사람은 환경을 좀더 적극적으로 개선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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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1. 20. 17:14


미국의 중등학교와 대학교 학생들은 글쓰기 과제를 할 때 어떤 '포맷'을 유지하도록 교육 받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주로 MLA (Modern Language Association) 스타일을 영어(그들의 국어)시간에 익히고, 대학에 들어가면 전공 분야에 따라서 각기 다른 스타일을 사용하게 되는데, 문학, 창작 쪽에서는 MLA, 과학 분야에서는 APA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그리고 사회학이나 역사학 쪽에서는 Chicago 스타일을 대체로 사용한다. 


내가 하는 수업중에는 각기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이 세가지 스타일을 학생들이 제대로 맞춰서 사용하고 그 기준에 부합하는 수준의 글을 써내도록 하는 과정도 포함된다. 내 학생들은 내가 이 헷갈리는 괴물같은 '스타일'들에 대해서 바른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지하고 있다. 


밤사이에 학생에게서 '글쓰기 관련해서 급히 상담할 것'이 있으니 아침에 뵐 수 있느냐는 이메일이 와 있었다. OK 답을 보냈더니, 이른 아침에 두명의 학생이 나타났다. 이들이 머뭇대면서 제기하는 문제:



학생:  "저번에 수업에서 시카고 스타일 글쓰기 배웠쟎아요...." 

나: 응, 전에 한번씩 훑었지. 자료는 언라인 자료실에 다 올려 놓아서 언제든지 볼 수 있쟎아. 뭐, 이해 안되는게 있나?

학생: 그런데....교수님이 시카고 스타일 샘플로 주신 자료가 암만봐도 이상해요...

나: 그래?

학생: (프린트된 자료를 내보이며) 이 샘플은 시카고 스타일 샘플이 아니라 APA스타일 샘플같아요 (우물우물)

나: (휙 보고) 어! 이건 APA인데! 내가 이걸 시카고 샘플이라고 그랬어? 자료실에 그렇게 올렸어? 아이고, 내가 실수했네!

학생: (우물쭈물) 아니요. 교수님이 아니고요, 우리 교수님이 (우물우물)...


몇번의 질문을 거쳐서 파악한 내용은, 전공 교수께서 텀 페이퍼 과제를 내주면서 '시카고 스타일'로 쓰라고 지시를 했고, 학생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샘플 에세이까지 자료실에 올려 주셨는데, 두 학생이 함께 공부하며 아무리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것은 시카고 스타일 샘플이 아니더란 것이다.  그래서 혼란스러워가지고, 밤에 둘이 공부하다가 -- 낼 아침에 글쓰기 선생, 그여자 (--> 나)한테 가서 확인을 해보기로. 


전공학과 교수님이 엉뚱한 자료를 올려주셔서 학생들이 혼란에 빠진것이군. 


그래서 내가 학생들에게 설명을 해 줬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나도 수업중에 단어를 틀리게 적는다거나 엉뚱한 소리하고 그러지 않는가.  교수들이 머리가 핑핑돌게 힘든 사람들이야. 수업만 하고 노는게 아니라 할 일이 아주 많아요. 그러다보면 실수를 할 때도 있지. 이것은 교수님이 좋은 자료 올려준다고, 안해도 될 일을 하시면서 실수를 하신거지.  그러니 자네들이 좀 이해를 해 줘야 하네.  내가 APA 샘플과 Chicago 샘플을 프린트 해서 자네들이 사용할 것과, 그 교수님이 사용할 것을 줄테니, 그 교수님께는 나를 만났다는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올려주신 자료에 착오가 있는것 같습니다. 이것이 맞는것이 아닌지요 묻고, 이것을 드리게나.  교수님이 좀 당황스럽고 미안하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덕분에 착오를 바로잡을수 있는거니까.  자네들의 꼼꼼하고 세심함이 다른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지. 전공 교수께도 도움을 드리는 것이고.  어차피 학문의 장에서는 교수 학생이 서로 도우면서 가는거라네.  나한테 다녀왔다는 얘기는 절대 하지 말고 (그러면 추후에 내가 아주 난처해지니까), 둘이 가서 이야기를 잘 마무리 짓기를 바라네. 문제를 지적했다고 화를 내거나 삐질 교수님이 아니시니 안심하고 가서 말씀을 드리게. 건투를 비네. 


학생들이 굉장히 수줍음이 많고, 말을 우물우물하는데 공부는 정말 열심히 한다. 그러니 그 밝은 눈에 착오가 보였겠지.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용기를 내어 교수의 착오를 매너있고 세련되게 지적하고 바로잡는 것이다. 


나도 수업중에 학생들이 의문이나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 학생의 지적이 타당하다고 생각되면 그를 인정해준다. 원리는 간단하다. 나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수업 준비에 만전을 기한다. 그렇지만 가끔 나도 실수를 하는데, 내 실수를 내가 인정하면 된다. 내 실수 때문에 학생들이 나를 거부하면 거부 당하는거고, 무시하면 무시 당하는거다. 나는 솔직하게 살면 된다. 내 능력밖의 일을 한다 싶으면 능력에 맞는 일을 찾아보면 되는거고. 이제부터 죽을때까지 나는 '가짜'로 살지 않기로 했다. 그냥 내모습 그대로. 허위나 위선을 최소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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