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Life2018. 11. 20. 09:02

Christ on the Mount of Olives, by Josef Untersberger




어제, 새벽기도에 가서 (나는 늘 일찍 간다, 가서 예배가 시작하길 기다리는 편이다)  성경책을 읽고 있었다.  이른 시각이라 예배당안에는 입구 반대편 구석에 떨어져 앉은 나와 입구쪽에 구부리고 앉아있는 두 여인.  이렇게 셋이었다. 


그런데 문밖 현관에서 사람이 외치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잃어버린 사람을 찾기 위해 허공에 외치는 듯한 소리였다.  왜 새벽에 텅 빈 교회에 와서 저렇게 소리를 지르지? 조금 의아해하며 자리에 앉아 성경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그 사람의 소리가 갈수록 거칠어졌다.  뭐랄까, 누구든지 나오기만 하면 잡아 죽일것 같은 분노의 음성으로 누군가를 불러댔다.  (가정문제로 누군가 교회로 피신을 했는데, 저 사람이 쫒아와서 지금 행패인걸까?  머릿속으로 여러가지를 상상 중.)


조금 후 예배당 문이 열리더니 소리를 질러대던 주인공인 것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  멀쩡하게 생긴, 30-40대 젊은 남자.  노숙자로 보이지도 않고 말쑥한 차림인데 얼굴이 약간 붉그레 한 것이 밤새 어디서 술을 마신걸까 의심하게 만들었다.  내가 출입문 반대편 끝에서 그를 힐끗 쳐다보면서 물었다.


나: 뭐요? 

그: 약간 변태같인 기묘한 표정으로 빙글빙글 웃으며 손짓으로 오라는 표시를 한다. 

나: 당신 뭔데 새벽에 교회에 와서 소리를 질러?  경찰 부를까?  (교회 바로 옆집이 파출소임.  ㅋㅋ 소리를 지르고 있는 나)

그: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여전히 변태같이 빙글빙글 웃으며 그러지 말고 이리좀 오라고 손짓을 한다.

나: 왜 기도하는 교회에 와서 소리지르고 행패냐구! 안나가? 나가! (예배당이 쩡쩡 울리는 중)

그: 빙글빙글 웃음기가 가시더니 꾸벅 머리를 조아리고는 퇴장.  

(상황 끝)




사내가 이리 오라고 손짓 할 때 안가고 소리를 지른 이유: 내가 그에게 다가가면 

  1.  그는 술냄새를 풍기면서 돈이 떨어졌으니 차비 몇만원 달라고 할 것이다. (너한테 돈 주기 싫어)

  2.  바지를 내리고 바바리맨 공연을 하며 히죽거릴지도 모른다. (네 성기에 관심없어. 내가 기도하러 왔지 음란공연 보러 온게 아니야. ) 

  3.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이유없이 나를 찌를지도 모르지. (기도하러와서 사고당하면 예수님께 죄송한 일이야.)


사내를 내쫒고 예배당 전면의 십자가로 시선을 향했을때, 문득 우리 예수님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예수님: "얘야. 너 말야 너! 맨날 기도하러 오는 애!  내가 도대체 너때문에 살 수가 없구나.  왜 소리를 지르고 야단이야. 너좀 조용히 할 수 없니? 시끄러워서 못살겠다. 사람의 아들이 머리를 둘데가 없구나.  내 잠시 내 아버지의 집에 가서 한 숨 자고 오련다. 끙." 




음...영화 쿵후허슬에 나오는 소리지르기 아줌마, 사자후. 딱 그거였다.  어제 새벽에.  좀 잘 살아보겠다고 새벽에 눈비비고 와서 기도드리는 사람들한테 와서 왜 행패냐구. 인생 답답하면 너도 기도하면 되는거지. 술 마시고 얼굴 시뻘개져갖고 와서 어디서 행패냐구. 목사님들이나 이런 분들은 천사라서 이런 행패꾼에게도 점쟎게 대하시는 모양이지만, 난 목사가 아니거등. 너 오늘 임자 만난거야.  내 기도 방해하면 너는 국물도 없는거야...


내가 누군가에게서 띠엄띠엄 들은 목사님들 (직업적인 성직자들)의 애로사항 한가지가 뭐냐하면, 교회에 가끔 애기를 업고 나타난다거나, 아픈 표정으로 나타난다거나, 뭐 여러가지 슬픈 표정으로 나타나 신세한탄하면서 '돈 좀...' 달라거나 빌려달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 목사님들이나 전도사님들은 뻔히 이 사람이 거짓말하는 것을 알면서도 '오죽 힘들면 여기와서 앵벌이를 하는가...' 싶어서 그냥 속아주고 주머니를 털어 돈을 주고 만다는 것이다. 일-이만원은 애교이고, 애기 업고 와서 대담하게 십만원 이상을 뜯어가는 사례도 일어나는데, 이런 사람들도 이교회 저교회 돌아다니며 같은 시나리오로 드라마를 연출하니까, 가깝게 지내는 목사님들끼리 서로 정보를 주고 받기도 한다고.  그런데, 문제는 설령 이웃 교회 목사님이 "거기 이러저러한 사람이 애기 업고 나타나 이런 스토리로 드라마를 할 것이니, 아예 돈 주지 마시오. 여기서도 많이 털어갔소"하고 귀띰을 해 줘도, 막상 그 사람이 나타나 징징거리면 매정하게 내쫒지를 못 한다고. 직업 종교인(성직자)으로 살아가면서 마땅히 실천해야 할, 낮은 곳으로 향하는 사랑의 실천 뭐 그런것을 어길수가 없어서 그런 모양이다. 그래서 알면서도 속아주고 주머니를 털린다고 한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성직자들의 이런 '약점'을 이용해서 전문 앵벌이 짓을 하는 모양인데... 음...나는 자유롭지. 왜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아닌자의 자유. 교회 차려서 재벌되어서 자식한테 세습하는 '유능한' 목사님들도 있지만, 그보다는 박봉에 시달리며, 너무 사는게 힘들어 '자살'을 상상하며 간신간신히 살면서도 어려운 사람에게 주머니 탈탈털어 '보시'하는 그런 목사님들도 쌓이고 쌓였다. 덕분에 나도 편안한 마음으로 교회를 드나들고 있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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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1. 19. 17:26

위: 웹에서 빌려온 아름다운 노인 사진



주말에, 내가 좋아하는 'TV동물농장' 재방송을 보기 위해 케이블 채널을 생각없이 이리저리 돌리다 젊은 방송인들의 토크쇼 같은 것을 보게 되었다.  나도 잘 모르겠는 연예인들 너덧명이 모여 앉아서 두서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제목도 낯설고 나온 사람들도 낯설고. (웬만하면 나도 알텐데, 모르겠는 연예인들이었다). 


그들의 대화 내용은, '운세'를 봤다는 것인데, 누군가의 운세는 '노년에 늦복이 터지고 젊은 시절의 노력과 노고를 모두 돌려받을수 있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그 운세가 현실로 된다면 내가 보기에 참 부러운 운세다. 그런데 그 '노년 늦복'의 주인공은 툴툴댔다.


그의 요지는 이러하다: 늙어서 복이 터지는게 무슨 소용이야. (허리를 구부리고 입을 파파노인처럼 오무리고 기묘한 노인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늙어 꼬부라져가지고 복이 터져봤자 무슨 소용이람! 


그러자 주변의  젊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다는거다.  늦복 터진다는 연예인은 계속해서 망가지고 흉한 노인 흉내를 내면서 이렇게 살아봤자 다 소용없다고 신세한탄을 했다. 


그 순간, 내 스마트폰이 곁에 있었다면 나는 화면을 사진 찍어가지고 방송 심의 위원회,  방송윤리위원회에 신고를 했을 것이다. 전화기가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보이지 않아서 나는 채널을 돌려버리는 것으로 화풀이를 했다. 


저 위에 웃고 있는 노인들을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노인들이 모조리 사라진 사회를 상상해보라. 그런 세상을 바라는가?  노년이 끔찍하고 노인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면 그런 식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 아픈사람,  네 눈에 이상하게 생긴 사람, 네 맘에 안드는 사람, 모두 제거해버리고 젊고 싱싱한 '너희들끼리' 킬킬대며 살면 좋을까.  



늙은이, 혹은 노인은 그 철부지 남자 연예인이 희화한대로 구부정하고 입은 합죽하고 흔들흔들하며 잘 못듣고 잘 안보이고 그것만이 전부인건가? 노인에게는 복이 터져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건가?  노인이 젊은 시절 노력하고 수고한 것에 대한 보답을 받아 봤자 쓸모가 없는건가? 단지 늙었기 때문에? 늙으면 복도 받지 말고, 아무런 보답도 없이 그냥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하는가? 우리 할아버지는 백살 가까이 사셨지만 허리가 지금의 나보다도 꼿꼿하셨다. 죽을때까지. 매일 산에 뛰어 오르셨다. 죽을때까지. 텔레비젼에서 노인 흉내를 내며 킬킬대던 그 녀석보다 더 체격조건이 우수했다. 허약하고 구부정한 노인에 대하여 멋대로 킬킬대는 연예인들이 있고,  그것이 대낮에 버젓이 케이블 TV에서 방송되는 사회. 이런 사회는 노인에게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적 약자에게 비슷하게 행동한다. 정나미가 떨어진다. 



다시한번만 노인을 우스개로 만들고 흉내를 내면서 킬킬대는 연예인이 방송에 다시 나오기만 해봐라. 나는 스마트폰으로 그 장면을 캡쳐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것이다. 그 연예인이 그 결과에 대해서 어떤 상상을 해도 그 상상을 뛰어넘는 응징을 해 줄 것이다.  그 연예인, 그거 만든 프로듀서, 그거 틀어준 방송국, 그 회사 사장,  모조리 싸그리 엮어서 고소 고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인권위원회에 제소도 할 것이다.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이다. 


철없는 젊은이들이 -- 자신에게도 닥칠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포함하여 사회적 약자를 멋대로 갖고 노는 것을 그냥 가만히 앉아서 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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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1. 14. 10:26



영어클럽.


둘이 꼭 붙어다니던 남학생.여학생 커플이 있는데 여학생만 왔다.  본래 이 클럽에 가자고 먼저 꼬드긴 것은 남학생이고 남학생이 훨씬 열성적인 멤버인데 왜 여학생만 온 것일까?

네 짝지는 왜 안 왔냐고 물으니, 남학생은 바깥 로비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자신만 왔노라고 대답한다. 왜? 왜 안 들어오고 문밖 로비에서 기다리고 앉아 있는가?  여학생이 머뭇대다 털어 놓는 사연은, 남학생이 원어민급으로 영어를 하면서 영어가 서툰 자신을 자꾸만 놀리고 약을 올리고 그래서, 그 남학생과는 영어로 대화를 나누기가 싫고, 부담스럽고, 그래서 (둘이 사이좋은 친구사이이니까) 남학생이 클럽을 양보하고, 여학생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바깥에서 숙제를 하면서 기다리기로 했다고. 


이 여학생은 대학에 오기 전에 외국에서 '직장생활'까지 하던 영어 사용자인데, 남학생친구가 '발음'을 가지고 자꾸 놀려먹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오히려 영어에 주눅이 든 것 같다고.


여학생과 좀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몇가지 종류의 영어대화 파트너 중에서 누구를 선호하는가?



 1. 본인(영어를 대충하는 한국인) -- 영어원어민 (미국에서 온 미국학생) = 희망사항이다. 문제는 미국인 학생과 대화 할때 갑자기 영어가 생각이 안나고 어쩔줄을 모르겠다. 그래서 희망사항이긴 하지만 상대하는것은 피곤하다.


 2. 본인(영어를 대충하는 한국인) -- 영어를 원어민처럼 능숙하게 구사하는 한국학생 = 악몽같다. 나를 놀리거나 조롱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나를 주눅들게 한다. 


 3. 본인(영어를 대충하는 한국인) --  비슷한 수준의 한국학생어딘가 과연 좋은 대화 파트너일지 잘 모르겠다. 영어 대화를 나누기에 마음은 편하지만 이렇게 해서 영어가 늘지 의문이 든다. 원하는 상대는 아닌것 같다. 


여학생에게 물었다. 네 앞에 앉아있는 나는 1번이나 2번의 중간쯤 어딘가에 걸쳐진 사람 이고 '선생님'이고 너보다 한참 나이도 많고, 네게 부담스럽지 않니?  여학생의 대답은, 내게 영어를 할 때 부담도 없고, 부지불식간에 내 영어를 따라서 배우는 기분도 들고, 안전하고 편안해서 그래서 이 클럽에 계속나온다고 (심지어 남자친구를 밖에 기다리게 해 놓고). 


일반적으로 위의 예에서, 영어를 대충 하는 한국인들에게 1번은 선호대상이고, 2번은 한국 영어학습자들이 죽어라고 기피하는 (가장 대화하기 어려운) 대상. 3번은 신뢰받지 못하는, 사실은 아주 좋은 상대라고 할 수 있다. 




이 학생의 희망사항은 이번학기가 첫 학기이니까 이 영어클럽에서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키워서, 다음 학기에는 외국학생들과 짝이 되어 활동하는 클럽에서 놀고 싶다고.  올커니. 애초부터 그것이 이 클럽의 설립취지이긴 했지. 영어를 잘하건 못하건 기본적인 '자신감 결여'가 발목을 잡는 학생들에게 '자신감'과 '안정감'을 키워주는 것. 그래서 '영어'를 '모국어' 사용하듯 '자신감을 가지고' 사용하도록 키워내는 것. 외국에서 '영어'를 사용해서 어린 나이에 밥벌이까지 해결했던 사람이 영어 발음이 조금 후지다고 주눅이 들다니...또한 그를 주눅들게 하다니...



사실 이 여학생의 경우는 어떤 '상황'을 조금 확대해서 현미경으로 봤을때 보이는 현상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이런 상황은 국제대학이나 국제학교에서 지역 원어민과 국제 학생들이 어울려서 영어로 소통할 때 발생할만한 일반적인 현상이다.  대체로 상황을 잘 수습해가는데,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현상이 나타날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여학생의 경우, 자신의 영어 능력에 비해서 스스로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성향이 있고, 또한 이것을 극복해내려는 의지도 강한 편이다. (꾸준히 영어클럽에 자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 영어 클럽은 동네 카페처럼 오고 싶으면 오고 말고 싶으면 마는 곳이라서 오직 자신의 의지로만 지속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나는 곰곰 생각해보았다.  그러면, 나의 어떤 (클럽 운영의 어떤) 면이 이 학생에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는걸까?  장점을 더욱 살려서 더 많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을것이다.  이 클럽의 프로그램이나 운영 방식을 좀더 연구를 해야 한다. 운영자인 나의 장단점도 분석을 해 보고.  다음 학기부터는, 이 클럽의 이름도 좀더 그럴싸하게 짓고, 클럽을 위한 장소도 잘 만들어서, 정말로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학생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궁리중이다. 장소 확보를 위해서 프로포절을 아주 잘 써야 한다... 


'소크라테스 클럽'이란 것이 있었지. 동네 카페에서 철학을 논하던.  그런 개념에 '영어'를 첨가하면 될까...


아무튼 나는 현재, 일주일에 1회 신기루처럼 열리는 '영어 카페'의 '가오'마담인 셈이다. 하 하 하.  진짜 주인은 카페 이용객들이시다. (여기서 '가오'란 일본말 '얼굴'이라는 말이다. 센과 치히로에 나왔던 '가오나시'는 그래서 '얼굴 없는' 친구라는 말이다. 여기서 '나시'란 '소대나시'처럼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소대나시란 소매없는 옷을 말한다 ㅋㅋㅋ 죄다 일본어휘에서 빌려온 말인데, '얼굴마담'이란 말보다는 어딘가 '가오마담'이란 말에 어떤 '정서'가 배어있다.  '우덜이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이런 영화 대사에서도 이걸 '얼굴'로 바꾸면 맛이 안난다. 여기서 가오란 단순히 '얼굴'이 아니고 '얼굴'이 상징하는 어떤 정체성, 명예, 프라이드, 자부심 뭐 그런것을 의미할걸요 아마 ㅋㅋㅋ...)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1. 12. 12:14


내 가까운 친구는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어느 사립중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학교에서 주욱 근무하고 있다. 한 30년쯤 되었을 것이다. 그는 매일 똑같은 직장으로 출근해왔다. 30년 쯤.  내 가까운 친구는 어느 분야의 전문가이다. 그래서 그 쪽 전문분야의 일을 30년 넘게 주욱 해 왔다. 그 사이에 소속기관을 네군데쯤 옮겼지만, 그의 정체성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그의 삶을 돌아보며 내게 말했다, "직장을 세번이나 옮기고 이것이 네번째 직장이니...참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어..."


그를 따라 고개를 주억거렸다.  "직장을 옮기는 일은 배우자나 부모가 죽는것 만큼이나 큰 스트레스를 유발한다고 하는데, 참 파란만장했군...네번이나 직장을 옮겨야 했나니...." 


그의 파란만장한 삶에 비해서 내 삶은 너무나 평이해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내 삶을 돌아보니 나도 직장을 여러번 옮긴것 같았다. "그런데, 나도 직장을 여러번 옮긴것 같긴 해.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애매한 표정으로 말하자 그가 '너 따위가 무슨 그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겠니...'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어디 어디 다녔는데? 한번 세어봐." 


그래서 나도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헤아려보았다.  


음, 그러니까 말야... 음...아르바이트 한거 빼고, 개인적인 컨설팅 해 준것, 개인지도 해준것, 번역한것, 글 써서 팔은것  그런거 다 빼고, 정식 기관이나 회사에서 월급 받으면서 일한 것만 따질까봐.  

    1. 해외 유학 컨설팅 회사에서 유학서류 꾸며주고, 인터뷰 영어 가르치고 그런 일을 했지. 유학 가본적도 없이 말이지.
    2. 그 일이 영 하품나게 재미가 없어서 무역회사에 가서 명품 오더하고, 세관 서류 작성하고, 이중장부의 기술 이런거 전수 받다가, 역시 재미 없어서 그만두고
    3. 잡지 편집을 좀 했지. 재미있는 일이었어. 그런데 아무래도 그 잡지사가 영 희망이 없어서 잡지 편집하면서 다른 직장을 찾아보았지. (역시 그 잡지사는 내가 떠난 후 1년쯤 후에 문을 닫았어)
    4. 외국 제약회사에 들어갔지. 독일어와 영어를 사용하는 자리였는데, 내게 경영학 공부를 좀 해보라고 해서 경영학 공부를 조금 했지. 눈이 빠지게 회계서류를 봐야 했는데, 적어도 이 회사는 치사하게 이중장부 놀음은 안했지만, 리베이트라는것이 있었지. 약사들과 의사들에게 나가는 리베이트에 대해서 소상하게 배웠었지.  이 회사에서 몇 년 일했는데, 애 낳고 살림하려고 그만뒀지.  (그리고 애 낳고 살림을 했지.)
    5. 벨기에 필름회사에서 역시 국제 업무를 잠시 했고
    6. 모교에서 불러서 대학 영자신문 간사를 2년을 했지...까마득히 잊고 있었군...그당시, 출근 할때면 둘째를 업고, 첫째를 걸리고 달리는거지. 그러다가 넘어지면 청바지 무릎이 나가고 무릎에서 피가 흐르는데, 등에 업힌 애 다쳤을까봐 아기부터 들여다보고. 대단했어 하하하. 지금 하라면 못하지. 젊은피가 흐를때만 가능한 일이지. 
    7. 일간지 리포터로 필명을 날렸고
    8. 차례차례, 세개의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지. (초등학교 세개를 그냥 한가지로 칠게. 계산하기 성기시니까) 교사교육도 했지만, 그것도 그냥 여기에 포함시키고. 
    9. 중학교에서도 영어를 가르쳤고
    10. 미국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지. 그래서 한국의 초등-중등 영어에 이어 미국에서 '고등'까지초중고 영어를 섭렵했다고 할 수 있지. 
    11. 박사학위 마치고 처음 시작한 일이 대학원 과정 하나를 새로 만들어내는 일이었는데, 거기서 주임교수를 몇년 했지. 워싱턴과 미주리주를 오가며 강의를 했지. 
    12. 메릴랜드주의 몽고메리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세학기
    13. 그리고 버지니아의 모 주립대에서 강의를 하다가
    14. 한국으로 와서 섬마을 여선생으로 또 몇년 살았지




물론, 그냥 일회성 계약직이나 뭐 칼럼 쓰고 이런거는 헤아리지 않았어. 그냥 월급단위로 움직인것만 헤아려본것이지.  직장을 도대체 몇번을 옮긴거야?  아마 빠트린것이 있을거야.... 잘 모르겠어. 기억이 희미해서...한 학기동안 초등학교 1학년 미술 보조교사를 '자원봉사'로 했던 것이 인상적이야. 내 인생에 미술 보조교사라니.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매주, 아이들 미술작업 고안하고 준비하고,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지. 월급을 받지 않았으니 뭐 딱히 경력에 포함할 생각은 없지만, 나로서는 흐뭇한 경력이야.  나중에 할머니가 되어 그 비슷한 작업을 또 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만약을 위해서 '한국어 교육' 자격증도 따 놓았지... 혹시 모르니까, 언젠가 내가 어딘가로 가서 한국어를 가르치게 될지. 자격증이라면, 그것 말고도... 음...그것은 나중에....


내가 중얼중얼하면서 뭔가 좀더 회상하려고 하자, 직장을 세번이나 옮긴 파란만장한 삶을 자부하던 그이는 두 손을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해! 그만해!" 


입을 닥치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도 겸손하게 말했다, "뭐, 별거 없어. 손에 쥔게 아무것도 없는 모래와 같은 인생이야.... 끈질긴데가 없어, 쉽게 싫증이 나서 한군데 오래 붙어있을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러니까, 남편과 두 아들에 대해서 나는 책임이 있으니까, 그 책임은 죽을때까지 안고 가는거고, 나머지는 언제든 떠나거나 떠나 보낼수 있는것이지. 나를 한자리에 묶어두는 이는 남편과 두 아들 뿐이지.  그들을 위해서 돌아올 뿐, 나는 매일 길을 떠나는거야.    


언젠가, 우리 언니가 '내가 결혼이후에 몇 번이나 이사를 했냐면...' 하고 헤아리길래, 나도 옆에서 덩달아 손가락 셈을 했는데, 역시 우리 언니가 내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 막았다. "닥쳐! 그만해!"  내가 줄줄이 읊어대는 이사의 이력에 언니의 귀가 따가워졌던 것이다.  


가끔 나는 내가 수백년을 살은것 같은 피로를 느껴.  남들이 수백년동안 살아낼것을 한 생에서 살아낸것이 아닌가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하지.  그러니까, 난 언제 죽어도 별로 억울하지 않다는 생각이지.남들보다 아주 많이 살았거든.  앞으로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갈지 난 몰라. 우리 예수님만 아실일이지. 그래도, 예수님하고 같이 가는 길이니까 그다지 힘이 들지는 않겠지. 이 생의 끝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또 하루 사는거지 뭐. 어디쯤서 이 이야기는 끝이 나는걸까?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1. 9. 14:55

세상물정의 물리학, 김범준 지음

복잡한 세상을 꿰뚫어 보는 통계물리학의 아름다움


집에 있길래 읽었다 (우리 집에는 그냥 와서 쌓이는 책이 많으므로 독서 잡식이 용이하다. 내가 서점에 나가서 사온 책은 아니다.) 첫 장 '뒷담화를 권한다'가 인상적이라서, 대충 끝까지 읽었는데, 이 책은 물리학하고 상관없이 사는 보통 사람이 가방에 가지고 다니다가 전철에서 앉아 갈때 꺼내서 여기 저기 그냥 기분 내키는대로 읽기에 적당한 책이다. 챕터별로 토픽이 바뀌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읽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주제도 다양한데 공통점은, 세상의 잡다한 현상을 수식화 하거나 그래프로 설명을 해 준다.  '왜 그래프나 도표가 필요한가?' 저자에게 물으면 아마도 저자는 '그냥 궁금해서...'라고 대답할 것이 틀림없다. 


그냥 심심파적으로 읽다가 특히 내 눈길을 끈 것.


내 이름도 눈에 띈다. 빈도수가 높은 이름이니 좋게 말하면 '인기 있는, 선호하는 '이름이고, 나쁘게 말하면 '진부하고 흔해빠지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여자이름이라는 말이 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내 절친한 친구 두명은 60년대에 유행했던 이름이고, 내 이름은 그래도 70년대 이름이라는 정도.


크아, 저것이 밤하늘의 별자리라면, 내 이름은 어딘가 좀더 영롱하게 빛나는 것 같구나!  (자기도취) 


이 통계 물리학자가 남자이름은 조사를 안하고, 여자이름만 주무른 이유는 그가 딱히 페미니스트라서가 아니고, 한국 남성 이름은 '항렬'자를 따르는 경우가 많이서, 이름에 이떤 사회성의 변수가 들어있으므로 여자이름에 비해서 고유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했다.  지원, 은지, 민지, 바야흐로 '지'녀들의 이름이 이 도표에서 가장 최근 유행 패턴인듯 하다. 


음...물리학에서 별걸 다 들여다보는구나, 확인하는 정도.  아는만큼 보이는 법이니까 나는 일자무식이라 그냥 대충 봤다.  그래도 한가지 배운것이라면 -- 내가 가진 자료들도 그래프로 옮길수 있도록 데이타시스템을 만들고 살펴보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귀챦은 일이지만 의미있는 일임을 새삼 깨달았다.  


이름에 대하여 

며칠전 내 이름에 대하여 잠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나는 어릴때 내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딘가 밋밋하고 개성없고 힘도 없고 예쁘지도 않고 시시하고 한심해 보이는 이름이었다.  내 성까지 붙여서 내 이름을 읽거나 말하면 격한 소리가 없고 그냥 맹숭맹숭하다. 혜진이라던가 진주 뭐 그런 이름이 부러웠다. 내 이름은 영 맹숭맹숭했다.  나는 대학생 시절에도 그 이후에도 영 내 이름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내 이름에 대해서 내 시선이 긍정적으로 바뀐 시기가 언제 쯤일까? 나는 정말 내 이름이 나라는 사람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래서 일부러 '남자'를 연상시키는 별명까지 만들어서 사용하곤 했는데, 대학원 시절에 나의 지도교수께서 내 이름을 참 예쁘게 불러주셨다. 그분은 모든 외국인 학생들의 고유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였는데, 특히 미국인이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내 이름을 아주 정확하게 발음하며 내 이름을 불러줬다. 그리고 그이가 내이름을 부를때 내 이름이 참 곱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이가 40을 넘기면서 나는 개성없고, 기운없고, 싱겁고, 아무것도 아닌것 같은 내 이름의 '소리'가 슬슬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내 이름을 발음하면, 어딘가 뽀얀 우유 크림 같기도 하고, 은은하고, 부드럽고, 모가나지 않으며 튀지 않으며 태생부터 고귀한 것 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은은하고

우아하고

아름답고

고요하고

튀지 않으며

부드럽고


세상의 온갖 모든 부드럽고 은은하고 아름다운 요소들을 다 갖다 붙여도 모자라는 그런 소리를 내는 것 같다. "내 이름이 참 우아하지 않아?" 운전대를 잡은 내가 묻자 디오게네스 선생이 한숨을 푹 내 쉬며, 낙엽지는 창밖을 내다보며 혼잣말처럼 대꾸했다, "그렇지...그게 문제였지...그 이름에 깜빡 속은거지...."


그렇다, 그게 문제였다. 어릴때 내 불만처럼, 내 이름은 그 느낌이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간에 도통 나하고 안 어울린다.  

(이름의 느낌)    vs  (사람의 느낌)

은은하고   ... 거칠고

우아하고  ... 시끄럽고

아름답고 ... 무섭고 

고요하고 ... 번잡스럽고 

튀지 않으며 ... 튀고, 충동적이며 

부드럽고 ... 불같이 성을 내고 


뭐, 디오게네스가 가까이에서 살아보면서 경험한 실제 사람에 대한 주관적/객관적 평가가 이러할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사기결혼을 당한 것 같다는거다. 사기 친 사람은 없다. 자신이 속았을 뿐. 하하하. 


사실 디오게네스가 인지하는 내가 실제 나의 본질에 가깝다. 싱크로율 백퍼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을 해 보았다. 본래 이러한 사람에게 왜 '이따위 (이렇게 우아한)' 이름을 지어준걸까?  이것이 혹시 '악마의 한수' 혹은 '신의 한수'가 아닐까? 이런 밑도 끝도 없고 타당성도 없는 생각을 혼자 해 보게되었다. 


내가 본래 '청룡'의 운명을 띄고 태어난 존재인데, 내 '청룡'의 운명을 내 '이름'으로 결박지어놔서, 내가 승천을 못하고 지금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 상태로 숨을 헐떡이고 있는 모양새가 아닌가?  (역학관 성명풀이 선생들이 아마 나를 요렇게 꼬셔댈지도 모른다. 비싼돈 들여서 이름을 바꾸면 장차 이나라의 황제가 될 운명을 타고 났다고.)


상상가능한 가설 (1) 내 이름을 지으신 내 아버지가 여러가지를 보는 눈이 있어가지고, 내 팔자가 사나울까봐 부드럽고 유약한 이름으로 거친 운명을 눌러 놓으셨다.  (2) 내 이름 때문에 청룡의 운명을 타고난 내가 숨을 제대로 못쉬고 끙끙 앓고 있다.  (3)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 당장 이따위 농담을 집어 치우라!


만약에 내 이름이 내 남자형제들과 동일한 항렬자를 붙여서 '희열'이나 '강열'이나 뭐 그랬다면, 나는 조금 다른 인생을 살았을까? 알수 없는일.  하여간 내 이름의 분위기와 나는 참 다르다.  (그것이 디오게네스의 주장이다) 하지만, 혹시 모르지 내가 은은하고 고요하고 아름답고 부드럽고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나이 오십을 넘긴 나는 내 이름이 무척 맘에 든다. 은은하고 고요하고 아름답고 부드럽고 착하고... 내가 청룡의 운세를 타고 났다면 나는 청룡으로 살아가겠지.  그렇지 않아도 일년에 몇차례씩 태평양 상공을 날아서 오가며 살고 있으니 원하건 원치 않건간에 하여간에, 기운차게 살고 있는 것이니. ㅋㅋㅋ. 


이름 얘기가 나왔으니, 호칭을 논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나를 부르는 다양한 호칭이 있다. 학위를 부르기도 하고, 직함을 부르기도 하고, 우리 두 아들이 부르는 내 이름은 '옴마옴마'다.  얘들은 꼭 두번씩 부른다. 그래서 그들에게 내 이름은 '옴마옴마'다.  엄마 한번 부르는 것으로 뭔가가 부족한 모양이다. 숨넘어가게 두번 부르는 옴마옴마가 내 이름이다. 디오게네스는 나를 '벤쳐'라고 부른다. 나 자신이 그에게 필생의 벤쳐라고 한다. 아주 성공적인 벤쳐모델이라고 한다. 혹은 나를 '갑'이라고 부른다. 벤쳐이며 갑이다. 그는 '을'의 신세를 면하겠다고 노래를 부르지만 어딘가 을의 입장을 즐기는 것 같은 자학모우드로 보인다.  돌아다니면서 '갑'의 '갑질'을 고자질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취미생활로 보인다. 내 친구들은 다정하고 상냥하게 내 이름을 불러준다. 


내가 싫어하는 호칭도 있다.  시장에서 '아가씨, 이리와 보셔. 이것좀 사셔' 뭐 이럴때, 뻔한 중년 아줌마한테 아가씨라는 천박한 호칭을 쓸때, 나는 절대 그 쪽을 안 쳐다본다.  뻔한 아줌마한테 왜 아가씨라고 희롱을 하는가?  '아줌마'라는 호칭은 중립적이다. 그리 싫지도 좋지도 않다. 아줌마라고 불러도 별 상관이 없다.  교회에서 나를 '집사님' 혹은 '권사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꼭 정정을 해 준다, "저 그냥 성도에요." 일반 교회 다니는 사람을 '성도'라고 부른다. 신도라는 말이다.  혹은 자매님 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참 정겹다. 자매님.  참 정겨운 호칭이다.  나를 잘 지도해주시는 우리교회 목사님은 내게 꼭 ***자매님이라고 부르신다.  그 외에 집사, 권사, 장로 이런거는 어떤 직위이다.  나는 그런 직위체계 밖에 있으니까 그냥 성도다.  그런데 내 나이를 짐작하고 자기네 맘대로 그 나이때쯤 되는 아줌마들이 가질만한 집사나 권사 이런 이름을 내게 붙이러 드는 사람도 있다.  얼마전에는 교회의 최고 대장 목사님이 내가 감사헌금 낸것을 보고는 "*** 권사님"이라고 읽더라.  짜증나서, 그 다음에 감사헌금 낼때 헛갈리지 말라고 "***성도"라고 적었다.  제 멋대로 막 이름 붙이지 말라는 뜻이다.  


나보고 '보살님'이라는 사람도 있다. 짜증나는거지. 그게 절에서 내 또래 아줌니들에게 막 붙이는 이름이니까. 게다가 난 절에도 안다닌단말이지. 권사나 집사보살이나 그냥 내 허락도 안받고 자기네들 맘대로 갖다 붙이는 이름이다. 어딘가 나를 '조롱'한다는 느낌이 든다.  왜 나를 조롱하지? (나 승질나면 앞뒤 안가리고 불같이 화를 낼 수도 있는데, 이분들이 내 승질을 잘 모르시는거지...)   그냥 차라리 '아줌마'라고 불러주는게 낫겠다. 난 아줌마니까 아줌마라는 호칭이 싫지 않다. 적어도 권사, 집사, 보살보다 낫지. 그렇다고 집사, 권사, 보살님이 나한테 성낼필요는 없다. 나는 집사도, 권사도, 보살도 아니니 정확한 호칭이 아니므로 거부한다는 것이다.  


난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한테 '이모님' 이라거나 '이모' 뭐 이런 호칭 안쓴다. 그들은 내 이모가 아니니까. 남의 어머니한테 '어머님'이런 호칭 잘 안쓴다. 그 '어머니' 막쓰라는 호칭 아니다. 제 딸 강간하고 죽인 범인을 가리키면서 '그 삼촌이...' 그냥 이웃 남자가 왜 삼촌인가?  클래스메이트가 왜 '오빠'인가?  기묘한 현상이다.  전국민의 가족화 현상이 맘에 안드니까 난 그 호칭 안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들여다보고 그에 걸맞게 불러주는 것이 내게는 중요하다. 그 사람이 듣기에도 거북스럽지 않은, 다정하고 예절바른 그런 호칭에 대해서 고민을 하곤 한다 


성질 대단하다. 절대 우아하고 착하고 아름답고 부드러운  내 이름하고 안 맞는거 사실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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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1. 5. 17:54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이중표 역해




이 책은 '법륜스님의 금강경' 책을 읽고 있는 나를 위하여 내 귀한 친구가 일부러 비교해보며 읽어보라고 보내주신 책이다. 'Don't look a gift horse in the mouth' 라는 서양 격언이 있다. 선물받은 말의 이빨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직역할수 있는데, 말의 이빨을 들여다보는 이유는 말의 이빨 상태를 점검해보면 나이나 건강상태 이런 것들을 확인할수 있기 때문이다. 남이 호의로 선물을 했으면 그 선물을 점검해보고 좋네 나쁘네 따지면 안된다는 말씀이다. 


내 소중한 친구가 선물을 보내 주셨으면 나는 그 선물에 대하여 무조건 감사해야 할 일이지 이렇네 저렇네 따지는 것은 참 오만방자하고 무례도 그런 무례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랴...나는 내 친구에게 무례를 저질러야 하는 운명인것을. 


뭐랄까, 이 책은 오랫동안 불교공부에 심취해 있는 내 친구가 선뜻 보내줄만큼 좋은 책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미 머릿말에서부터 돌에 걸려 넘어지는 형국이다. 





저자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 머릿말만 읽어보면, 나는 여기서 멈추고 더이상 이 책을 읽지 않을 것같은 분위기이다. 


저자는 과거에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였던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나라가 되었고, 가장 염치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되었고, 가장 고통스러운 땅이 되었다고 단언한다. 나도 모르게 '오 마이 갓' 탄식을 하게 된다.  만약에 저자가 정말로 오늘의 한국의 현실을, 한국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풀이한다면, 나는 이런 시각을 가진 사람이 설명한 '금강경'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내 눈에 비친 이 나라는 역동적이고 잘 커나가고 있으며 이 땅의 사람들은 저땅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름답고 선량하기 때문이다. 


자살율이 세계 1위인 나라? Are you sure?

https://ko.wikipedia.org/wiki/%EC%9E%90%EC%82%B4%EB%A5%A0%EC%97%90_%EB%94%B0%EB%A5%B8_%EB%82%98%EB%9D%BC_%EB%AA%A9%EB%A1%9D


자살율이 높지...하지만 세계 1위라고 하시면 그건 사실이 아니지.


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 

https://ko.wikipedia.org/wiki/%EC%B6%9C%EC%82%B0%EC%9C%A8%EC%88%9C_%EB%82%98%EB%9D%BC_%EB%AA%A9%EB%A1%9D


과장하신것이지. 


청소년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

전세계 26개  OECD국가중에서 그나마 일본, 호주, 뉴질랜드, 아이슬란드 빼고, 22개국 중에서 최하위.  그런데 이 세상에는  OECD국가만 있는게 아니므로 이 역시 정확한 말씀이 아니고.


데이타를 아전인수격으로 자신의 세계관에 맞게 대충 편집하여 설명을 하신듯 한데... 만약에 금강경을 그런식으로 설명하신다면 나는 사실 확인도 할 수가 없고...



우리의 '삶과 전통'이 '무참하게 파괴되었다'고 그는 역설하나, 정말 우리의 과거가 현재보다 좋았는가? 조선 시대가 대한민국 시대보다 더 살기 좋았는가?  절대적 비교를 할수는 없지만, 지금이 훨씬 낫다. 여권 신장이나 인간 평등문제 이런 저런 것을 비교해봐도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곳에서 있었던 '억압'과 '구속'에 비하면 지금이 훨씬 살기 좋다. 


이분의 세계관이 이런 식이라면, 이런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설명하는 '금강경'은 또 얼마나 한반향으로 치닫을 것이며, 금강경을 잘 모르는 나는 이 사람이 설명하는대로 끌려갈수밖에 없는게 아닌가?  이런 의구심이 든다는 것이지.  한마디로...이분의 머릿말은 어딘가,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ㄲㄷ'를 연상시킨다. 음...법륜스님의 설명에서 내가 커다랗게 '물음표'를 달았던 곳은 없었다.... 전형적인 '곰방대' 물고 앉아서 '세상이 엉망이고, 모든것이 패륜이며, 말세가 왔다'고 떠들어대는 뒷방 어르신적 어투인데, 어딘가 복고적 유머는 될지언정 오늘날의 화법에서는 한참 멀어져 있다. 





이걸 어쩌나... 하지만 이 책은 내 친구가 선물한 책이니 나는 끝까지 읽을 것이다.  문제는 이미 내가 이 저자에 대해서 어떤 거부감이 슬슬 들고 있으므로 과연 그의 본의를 제대로 파악할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


그건 그렇고,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인데, 그럼 '니까야'는 뭘까? 사실 책의 머리에 있는 설명을 읽어봐도, 심지어 구글 써치를 해봐도 '니까야'가 뭔지가 잘 잡히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추측컨대, 석가세존이 사용한 언어 (팔리어)로 정리된 불경. 그러니까 말하자면 '원전'인것 같다.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경전을 제대로 읽기 위해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이런 것을 익혀서 원전에 다가가려고 애쓰듯이, 불교에서도 석가의 제자들이 직접 적었던 인도의 원전에 다가가려는 노력이 있을 것인데, 이 책이 그 원전을 바탕으로 해석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자현'스님이라고, 불교사 강의를 잘 하시는 발랄한 스님이 있는데, 이분 설명에 의거하면, 불교의 발원지는 인도이지만, 불교를  성문화, 역사화한것이 '중국'이라는 평이다. 중국인들이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할 때, 문제는 인도어를 중국어로 정확히 옮기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어느 언어든지 정확히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국인들은 최선을 다해서 번역작업을 하되, 여전히 남아 있는 빈틈을 그대로 놓아두었다고 한다.  그 빈틈은 -- 불교적 상상력으로 각자 채워 넣을수 있도록.  그리고는 자신들이 번역한 불경에 의거하여 공부와 수행을 해 나갔다고 한다. 일단 번역을 마친 후에는 원전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불교'를 세계화 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중화사상'을 유지한 셈이다.  그래서, 불교를 알건 모르건 한국의 대중들도 대체로 한문으로 씌어진 불경에 익숙하고, 절에 가도 온통 한문으로 씌어진 글귀를 볼 수 있다.  이런 문화적인 이유로 내게 '니까야'라는 말 조차 생소했을 것이다. 역시 자현스님의 설명에 기대어 내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한국 사람들이 이제 먹고 살 만해졌기 때문에 한문으로 씌어진 불경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원전도 들여다보고 더 잘 배우려고 노력하게 되었다고 할 만하다. 다시 말해서 -- 한국이 먹고 살만해져서 일반 대중이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도 접하고 그러는 것이다. 한국이 저자의 말대로 지상 최악의 망가진 나라라면 저자가 쓴 '니까야 금강경' 같은것을 들여다볼 사람도 없다. 현실 파악을 똑바로 하셔야 할 듯 하다.  (하지만, 내가 불교에 대해서 일자무식이니 그의 깊은 뜻을 어찌 알랴, 저렇게 말할땐 저럴만한 혜안이 있으실지도 모른다.)


나는 리차드 도킨스의 역저 '이기적유전자' 책을 굉장히 싫어한다.  굉장히 싫어하지만 그 책은 현대인이 반드시 읽어야하는 좋은 책이라고 믿는다. 책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별개이고 그 책이 인류사에 차지하는 비중만큼은 높이 사는 것이다. 내가 그 책을 굉장히 싫어하는 이유는, 그 책에 설명되는 유전자의 무한확장하고자 하는 무시무시한, 끝 모르는 욕망과 그 생존 원리에 수긍을 하면서도 그 생존원리에 강한 거부감을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론이 매우 정교하게 수립되었다는 것을 부정할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 책을 싫어하지만 그 역저는 존경한다. 



이 책의 경우는...일단 머릿말이 이미 정나미가 떨어지는데, 과연 이것이 역저일지 긴가민가.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안보고 손톱의 때만 들여다보는 어리석음을 범하면 안되니...그의 정수를 들여다보려고 노력하겠지만, 이미 사고체계나 세계관이 다른 사람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니, 약간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긴 하다. 하지만 뭐, 내 친구가 좋다는 책이니까 읽으면 좋을것이다. 

October 24, 2018





1독후기 (November 5, 2018


글을 쓸때 주의 해야 할 사항: 자신이 전문적으로 잘 아는 것에 대해서만 논하는 것이 유익하다. 내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여 설명하기 위하여 내가 잘 아는 이것과 내가 피상적으로만 아는 '저것'을  논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전문가들이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하여 설득력있는 글을 쓰다가 자칫 실수하는 대목이, 자신의 전문 분야를 벗어나서 비 전문 분야에 대한 평을 할때이다. 촘스키 선생도 그의 저작에서 아시아 혹은 한국 문제를 논할때 삑사리를 내셨고, 개미 선생 에드워드 윌슨도 그의 전공인 생물학에서 벗어나 아시아의 문화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역시 삑사리를 내곤 했다. 왜냐, 그쪽엔 또 그쪽 전문가가 있는 법이니까.


이중표 선생은 335페이지에서 '선법이란 법이 아닌것'을 논하면서 엉뚱하게 기독교에 대한 평을 한다. 그의 기독교에 대한 평은 이러하다. 

기독교의 경우 선과 악은 모순 대립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이 세상을 선과 악이 대립하고 있다고 본다. 천사와 악마, 여호와와 사탄, 이 둘은 영원히 대립 투쟁하는 존재다. 천사는 악마가 될 수 없고, 악마는 천사가 될 수 없다. 악은 싸워서 없애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공존할 수 없다. 기독교에서 선법은 신이 내린 율법이다. 십계명이 곧 선법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를 용납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 평화는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이 세상에서 몰아내고 기독교가 온 세상을 지배할 때 가능하다. 


 자, 내가 별로 깊게 공부하지 않은 예수쟁이인데, 그러니까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말이다.  내가 거의 십년 가까이 예배당 드나들면서 성경공부도 하고 이것저것 공부했지만, 기독교에서 '선/악'의 모순 대립에 대하여 논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성경의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는지 모르겠다. 


천사는 악마가 될수 없고, 악마는 천사가 될수 없다고? 일단 '타락천사' Lucifer가 있다. 대천사 (하느님의 오른팔과 같은 큰 천사)였는데 타락을 해서 사탄이 되었다던가? 그러니까 일단 문서상으로 천사는 악마가 될 수 없다는 단언은 틀렸다. 악마가 천사가 된 케이스는 들어보지 못했다.  악을 싸워서 없애야 할 대상이라고 어디에 적혀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내가 몇차례 통독한 성경 구약/신약을 통틀어서 하느님이나 예수님이나 '악'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으신듯하다.  하느님이 뭐가 답답해서 '악'과 싸우시는가?  여호와와 사탄은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다.  여호와하고 사탄이 동일 선상에서 경쟁하는 구도가 아니다. 욥기에 사탄이 등장하는데, 사탄이 욥을 상대로 내기를 거는 장면에서도 하느님은 태평이시다. 상대가 되어야 대립이 되는거지. 사람하고 개미하고 대립이 성립하는가?  이중표선생하고 구더기 한마리하고 대립이 성립되는가? (대립을 원하시면 그건 개인 취향의 문제이고)  사탄도 '불가식으로 표현하면 -- 방편'쯤으로 해석될만하다. 여호와의 권능 안에 존재하는 피조물이라는 얘기다. 


불교에서 선악에 대한 관념이 명확히 자대고 죽 그은 것이 아니라 연기의 법칙에 의거한다는 설명을 하기 위해서, 있지도 않는 듣도 보도 못한 기독교의 어떤 '있지도 않는' 개념을 막 끌어다 대시면 안된다.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하여 논하지 않으셔도 된다. 그냥 아는 말씀만 하시라.


기독교에 십계명만 있는줄 아는가? 그거보다 더 높은 법이 있는데 (더 높다고 할 수는 없고...어우러지되 으뜸이 되는 법이 있는데) '사랑'이다.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내 놓고 세우신 '전 인류에 대한' 사랑. 그것이 법이다. 선법이고 악법이고 떠나서 절대법이다. 언제 예수님이 이 세상의 모든 종교를 몰아내야만 평화가 온다고 했는가? 예수님은 사람의 개별적인 가슴 가슴에 이미 천국이 있다고 가르치셨다. 그것이 기독교다.  마치 불가에서 인생 인생에 불성이 심어져 있다고 설파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가슴 가슴에 천국이 왔다고 하셨다.  피상적인 기독교의 어떤 일면만 보고 '이것이 기독교다'라고 자신의 '불교'책에 막 써대는 것은 전문가의 태도로 보이지 않는다. 


그냥 제발, 자신이 잘 설명할 수 있는 분야에 대해서만 논하시면 좋을 것이다. 똑같은 이유로, 나는 기독교 목사님들이 불경공부 한번 제대로 하지도 않은 주제에 피상적으로 불교는 어떻고 저떻다. 그래서 기독교가 최고다라고 떠드는 걸 볼때 뒤통수를 한대 쥐어 박고 싶다. (그냥, 니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말하지마....내가 챙피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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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깊이 사색하게 만든 대목은 두가지이다. (책을 읽고 났을때 내가 혼잣말로 정리한 것이 화엄경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일체유심조'이고 금강경은 '무주상보시'  그리고 금강경에서 내게 다가온 두가지는 '무쟁'과 '업은 있되 사람은 없다'는 말.)


무쟁. 다툼이 없는 경지에 오를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무쟁, 그거 예수님도 설파하신거임...왜냐, 그분이 '사랑'인데 다툼이 있을수가 없지 않은가?), 업은 남되 사람은 남지 않는다는 논의는 내가 사회생활을 할 때, 어떤 사건이나 문제 상황에 대하여, 인간적인 변수를 가능하면 배제하고, 문제 그 자체를 들여다보고 분석하도록 동기화 하는데도 좋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도 아마 그 업은 남되 사람은 남지 않는다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게서 떠나지 않았던 근본적인 '고민' 혹은 '의문'이 따로 있다.  좋다. 무주상보시도 좋고, 뭐 나와 타인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가 한 몸이고 뭐 다 좋다. 다 좋은 말씀이다. 그런데 내 근본적 의문은 이거다 -- 그런데 실제 삶에서 정말로 이대로 실천을 하는 이가 있는가?  소설 '겨울여자'에서 주인공 이화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가족 이기주의'가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내 가족 우선, 내 자식 우선 그런 인간적 이기심에서 그녀는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냥 구별하거나 차별하는 마음없이 사랑을 주고 싶은것이다.  이화의 태도가 좀더 보살도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금강경을 읽고, 외고 가르치는 사람들 중에서 정말로 이런 보살도를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선 나부터 좋은 옷 입고, 내 가족부터 좋은 아파트에 살아야 하고, 내 아이들이 좋은 학군에 가야하고, 가능한 좋은 차 타고 가능한 폼나게 살면서 무주상보시를 행동화 할수 있는가?  무주상보시는 그냥 '이상'이고 그리 가려고 조금조금 노력하면 되는건가?  자기 잇속은 다 따지면서 무주상보시를 매일 왼다면 무주상보시는 악세사리인가?  내 삶을 좀더 우아하게 보이게 하는 치장물?  (기독교인들이 목에 걸고 다니는 비싼 보석 십자가목걸이 같은것?)  뭐 이런 회의감이 자꾸만 들어서 생각이 분산되곤 했다.  그런데,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해를 읽을때는 이런 잡념이 별로 들지 않았다. 그이가 좀더 설득력 있게 내게 설명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밑줄 긋고, 따로 적어 놓은 부처님의 아름다운 말씀이 많이 있으니, 귀한 책이다. 


내가 이 책 읽으면서 새삼 발견한 사실. 챕터가 넘어갈수록 기시감이 들면서, 이거 아까 한 말씀 또하네. 비슷한 말씀 또하네...그러니까 어떤 '나선형'처럼 논의가 되풀이되면서 깊어지고, 다시 아까 그 얘기로 돌아갔다가 방향이 바뀌고 그런다. 성철스님이 자꾸만 반복하고 설명하고 반복하면서 조금 다른 얘기 하시고, 그러는 화법이 기이하게 여겨졌는데 금강경 인도어 원전에 바로 그런식으로 논의가 이어진다. 나선형 구조의 말씀집이다. 새로운 구조적 발견이랄까. (이런 구조로 소설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기시감이 들긴 하는데 조금 다른 이야기, 조금 다른 전개, 그러면서 이야기는 이어지는). 


법륜스님과 이중표님의 금강경 해설집을 차례차례 읽고나서 두 책을 비교해보면 (이것은 무식한 독서가의 극히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평가인데), 법륜스님은 '승'으로서 그가 들여다 본 보통 사람들의 실질적인 삶과 금강경을 통찰하여 설명을 한것처럼 보이고, 이중표님은 불교 이론가로서 불경에 대하여 공부한 것을 설명한것처럼 보인다. 삶을 꿰뚤어보는 통찰력은  법륜스님쪽이 돋보이는것으로 평가된다 (극히 주관적인 평가이다). 학문적인 어프로치는 내가 어차피 학문적으로 불경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므로 잘 알 수 없다. 단 이중표님은 그냥 불경얘기만 하시는 것이 안전해 보인다. 그가 불경 외에 다른 것을 끌어올때 대개 삑사리가 난다.  그리고, 물리학 이론 함부로 종교경전에 갖다 붙이고 해설하러드는것 역시 위험해보인다. 안그래도 된다. 아는것만 말하는 것이 좋다. 말할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 (비트겐슈타인). 


김용옥선생의 금강경 강해는 어떨지 슬슬 호기심이 인다. 나중에 심심하면 그 때 읽어봐야지. 


그래서 내가 생각해 본 것인데, 금강경이라던가 불교라던가 혹은 다른 종교 (기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예컨대 동일한 '금강경'이라는 경에 대한 설명을 하는 자세 혹은 내용을 전개하는 방식을 보면, '법륜'스님은 이걸 사골 우리듯이 푹 푹 우려서 진국을 충분히 끌어낸 후에, 적당히 소금 치고 후추치고 뭐 파송송 얹고 해서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쌀밥과 더불어 상을 차려 허기진 사람에게 조촐한 한상을 내 주는 것처럼 여겨진다면 (참고로 나는 사골국 같은 고깃국 못 먹는다. 아주 타고난 중이지 ㅋㅋ_)  vs. 이중표교수님의 금강경은 어딘가 뭐랄까 사골을 비싼걸 사다 끓이긴 하는것 같은데, 요리에 정성도 많이 들어간 것 같은데 어딘가 설 끓고, 후추 소금 이런 간도 잘 안 맞는데 거기다가 아스파라거스나 뭐 이런걸로 장식을 시도하기도 하고 뭔가 소문난 식당인데 맛은 그저그런. 


왜 그런가?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은 '불교'라는 집에서 편안히 살면서 자유자재로 들락거리는데 (본래 집이란 거기서 살면서 들락거리는것이지 집 안에서만 지내라는게 아니지.), 어떤 사람은 '불교'라는 집에 갖혀 지내는 모양이라. 바깥세상이 어떠한지도 모르는 가운데 제 집이 최고라고 창밖에 소리를 지르는 형상이라. 집에 갖혀 지내는 그 사람이 그 집의 구조나 모양새 장판지 이음새나 벽지 무늬에 대해서 소상히 알수는 있을지언정 그이는 집의 지붕이나 집 주위의 나무나 지붕위에 내려 앉은 새나 이웃집 사람들이나 도통 알수 없는거라. 


극단적으로 종교에 갖혀 지내는 자들이 '사이비교'에 들어가 정신 못차리고 패가망신하거나 남을 패가망신 시키거나. 


종교는 갖혀지내는 교도소나 무덤이 아니라, 사람이 편안히 살도록 지어진 집이니 창문도 내고, 출입문도 내고, 이웃과 소통하는 오솔길도 내고, 시루떡도 노나먹고 그래야 하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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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1. 5. 13:29



팔순이 훌쩍 넘긴 유여사가 지난 번에 독감 예방 주사를 맞으러 내과에 다녀 오는 길에 길을 잃고 두어시간 가까이 고생을 했다고 한다.  노인학교라던가, 아파트 주변의 공원등 매일 왕래를 하는 곳은 아무 문제가 없지만, 건물들이 즐비한 전철역 근처 내과에라도 들를경우, 방향을 잘 못 잡을경우 엉뚱한 곳에 가서 길을 잃을 소지가 크다.  길을 잃고 당황을 하니 갑자기 아파트 이름도 생각이 안나고 주소도 생각이 안나서 누가 도와주려고 해도 방법이 없고.  그래서 고생을 하셨다고. 젊은 사람들도 이따금 방향을 잘 못 잡으면 헤메기 일쑤이니 큰 문제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그래도, 유여사의 기억력이나 인지 능력이 예전보다 많이 약해진 것도 사실이다. 산수 뺄셈을 시켜보거나 몇가지 점검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늘, '아직은 그래도 괜챦으셔...'하고 스스로 위안을 삼지만, 세월에 장사 있는가. 누구나 비슷한거지. 아직 정신이 말짱하신 것이 고마울 뿐이지.


유여사가 그 길 잃어버린 얘기를 자꾸만 하길래, 산토끼 노래에 주소를 넣어서 노래를 외우게 했다.  예를 들면, 종로구 혜화동 꿈에 그린 아파트, 901동 201호 나의집 이지요.  뭐 이런식으로 (여기 나오는 주소는 그냥 만든 것이다. 유여사하고는 상관이 없다).  "엄마, 이 노래가 골수에 박히게 외워.  그러면 길 잃어버려도 노래를 부르면 마음 착한 사람이 길을 찾아 줄거야." (물론 엄마 가방에는 커다란 이름표가 들어있다. 주소, 연락처, 가족 연락처가 적힌). 


이걸 산책하는 내내 연습시키고 따라부르게 하고, 그랬는데, 외우는것 자체를 힘들어 하셨다. 재미도 없고. 나는 짜증이 폭발할 지경이고. (머리 명석한 대학생들 상대하다가 뇌세포가 노화된 노인을 상대하는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짜증이 터지려고 할 때마다 내가 나에게 "Calm down, calm down...be a good girl..."


내가 결심한 것은 이것이다.  내가 엄마 얼굴을 보고 웃지 않을거면 엄마를 대하지 말라.  엄마에게 무조건 웃어주고 희망을 주고, 칭찬해주고, 함께 있는 짧은 시간이 '기쁨의 시간'이기만 할것.  잔소리하거나 가르치러 들지 말것. 


수십번을 함께 노래를 했는데도, 유여사가 어딘가에서 막히곤 한다.  밤이 되었다. 나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  내가 제안을 했다.


"엄마, 내가 산토끼 노래를 부를테니까, 엄마가 대답을 하는거야. 엄마가 토끼야. 내가 엄마에게 묻는거야.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총깡총 뛰어서 어디를 가느냐? 내가 이렇게 물으면 엄마가 노래로 대답을 해. 응?"


내가 엄마에게 "엄마가 깡충깡충 토끼야"라고 말을하자, 유여사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내가 어디로 가느냐고 노래를 부르자, 유여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노래로 자신의 주소를 읊는다. 그리고 하는 말, "재밌다! 재밌다!"


유여사에게 공책을 갖다 주고 주소 가사를 적어보라고 했다. 물론 아직 글 쓰기는 잘 하신다. 또박또박 잘 적으신다.  그 옆에다가 내가 달려가는 토끼 한마리를 그려주고, "이게 엄마야. 엄마가 토끼야"하니 아주 기뻐하신다. 자신이 토끼라는게 아주 맘에 드시는 모양이다. 


유여사가 내게 묻는다, "그런데, 내가 토끼쟎어. 그런데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너는 뭐니?"  토끼의 상대가 누구냐고 물으신다.  "응, 곰이야. 곰이 묻는거야" 나는 대답과 함께 공책에다가 곰 (테디베어)을 그려 넣었다. 엄마가 아주 기뻐하신다.


그러더니, 내가 '어디로 가느냐' 노래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 큰 목소리로 자신의 주소지로 화답을 한다. "재밌다. 재밌어!" 딱 서너살때 우리집 애들 같다. 뭔가 이야기를 지어내서 설명을 해주면 눈을 빛내던 내 자식들.  이제 유여사가 그 서너살짜리 아이들같은 동심을 드러낸다. 이것이 재미있다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시다니... 



치매노인들에 대한 '음악치유'효과에 대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작고한 올리버 색스도 인터뷰에 응했고),  노인 요양센터에서 '식물'처럼 멀거니 앉아있는 노인들에게 그들에게 친숙하거나 친밀한 음악을 틀어주거나, 특히 그들이 즐겨 듣던 음악을 MP3에 담아서 헤드폰으로 들려주자, 이들중 다수가 눈을 빛내며 몸을 움직이기도 했고, 극히 정상적인 반응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연출했다.  친숙한 음악이 기억장치를 자극하여 활달히 뛰놀던 '자아'를 복구하는 것 같았다. 유여사도  친숙한 '동요'와 토끼, 곰과 같은 친밀한 동화적 장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유여사의 서서히 약화되는 뇌세포를 활성화 시킬수 있는 장치들이 무엇이 있을지 연구를 해 보아야 한다. 


매주 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유여사.  나도 똑같이 늙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민.'  우리 모두 늙을것이라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한자들, 쉽게 부스러질 것들, 작고 초라한 것들, 그런 사람들에 대한 연민. 


어느 누구도 한 밤에 길거리에서 이유도 없이 괴한에게  두드려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죽어서는 안된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1. 3. 05:34


프레디 머큐리 오빠가 돌아왔다!


영화 보는 내내 현실을 잊었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 앉아 있을수도 없었다. 목을 길게 빼고 앞으로 앞으로 스크린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  



못살아, 못살아, 내가 못살아...이 장면을 그대로 재현해 내다니. 어쩔려구 아이고 아이고... 난닝구 오빠. 오랫만에 성감대 자극받다. 다 필요없어. 퀸만 있으면 그뿐. 


이 세상에는 두종류의 인간이 있을 뿐이다.  프레디를 아는 인간과 그를 모르는 인간. 그를 알면서 그를 사랑하지 않을순 없다.  그러므로  그를 아는 인간과 그를 모르는 인간 사이의 소통은 거의 불가능하다. ㅋㅋ



카셋트테이프 두개에 담긴 퀸의 노래들을,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고 또 듣던 시절의 기억이 되돌아 와서 귓가에 맴돌았다. 옛날처럼, 퀸의 노래를 틀어놓고, 아리조나를 네바다 모하비 사막을 달려주겠어.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1. 3. 00:00

자현 스님의 조금 특별한 불교이야기



자현스님이 인도에서 태생한 불교가 더운나라 인도라는 지리적 사회 문화적 환경에서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 고타마 싯타르타가 어떻게 당시의 상업문화와 연결되는지, 책의 부제에서 보여주듯 '자본'과 종교 혹은 '권력과 종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 관계를 중심으로 불교사를 대충 정리해 주었다.  이 책에는 인도에서 서방으로 그리고 중국으로 불교가 전승되고 중국에서 불교가 어떤 양상으로 전파되었는지까지 대충 설명해준다. 한국이나 일본으로 건너간 불교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아쉬웠다. 쓰다가 만 책 같기도 하고....용두사미 같기도 하다. (처음에는 재미있게 읽기 시작했는데, 뒤로 가면서 뭔가 저자가 쓰기가 귀챦아졌는지 허둥지둥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의 무식의 소치일수도 있다.) 게다가 결론 부분에 가서는 -- 아니 왜 이러시나?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한 느낌이 들고마는 성급하고도 거친 맺음이었다.  뭔가, 글로 써서 정리하고 설명하기보다는 강의를 더 잘하시는 분인지도 모르지. (강의는 잘 하신다.)




우선 불교와 상업자본이 당대의 한 흐름이었음을 설명하신 부분은 내게는 새로운 배움이었다.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했다. 상업-교류의 가치나 효과에 대해서 내가 그동안 눈을 감고 있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과문한 탓인지, 새로 배운것 또 한가지.  브라만교의 카스트제도. 그것을 단순히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 의 4계급 정도로 상식적인 수준에서 대충 알고 있었는데, 이 표를 보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인종적으로 다른 사람들이었다.  농경민-원주민-흑인등이 그들이 말하는 '불가촉 천민' 들이었다.


돌아보면 한국, 조선 땅에서도 '농자천하지대본야'라고 띄워주긴 했으나 정말로 농경민이 제대로 사람대접 받고, 사회의 지배계층이던 시기가 있었는가?  권력은 항상 '골품'에 기반한 귀족층과 무력을 가진자들, 그리고 돈을 가진자들이 나눠먹고 있었고 농민들은 늘 그들이 수탈해도 되는 만만한 개살구아니었던가.  나는 이런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고타마 싯타르타도 그것을 꿰뚫어보았다. 놀라운 혜안이다. 그가 신분제를 척결하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이 신분제도 자체를 타파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잘 알수 없다.  그는 일단 브라만교의 신분제도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은것 같은데,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그것을 타파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인으로서의 한계였을지도 모르지. 역시 잘 모르겠다. 




이 자명한 이치를, 나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도대체 세상을 어떻게 살아온건가? 어리둥절해진다. 


현대사회에 와서 '불교'만이 살아갈 해법이고, '순종'이나 '예속'을 표방하는 다른 종교 (기독교)는 인간의 행복에 도움이 안된다고 그는 책을 마치며 설파한다. 그 부분이 어딘가 책쓰다가 피곤해서 대충 쓰고 지나간 부분처럼 보인다. 


현대인인 나는 불교를 제법 많이 공부하고 그 쪽길을 가다가 기독교도로 전향을 했는데, 나는 기독교에서 그가 말하는 '해탈' '열반'의 실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빗방울'의 비유를 들어서 -- 하나의 빗방울이 대해에 들어가 '대해'가 되는가, 아니면 하나의 빗방울이 대해에 들어가 빗방울 가운데에 대해를 품는가하는 문제로 불교의 종파를 이렇게 저렇게 구분지었는데, 어쨌거나 빗방울이 대해에 스며들건 아니면 대해를 빗방울에 품건, 그러한 길로 가기위해 내가 선택한 것이 기독교라는 것이지. 


자현스님과 내가 생각을 달리 하는 부분은 근본적으로, 종교는 도구인가 목적인가 하는 점이다. 자현스님은 이 책에서 '종교'를 '행복하기 위한 도구'라고 정의했다. 내가 불교의 테두리 안에서 살때는 나도 비슷한 생각을 가진 것 같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되었을때 종교는그것이 궁극적으로 내 삶의 목적인지 아닌지는 아직 잘 모르겠으나 내 삶의 도구는 아니더라는 것이다.  한가지 추측해 볼 수 있는것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것을' 말로 전하는 과정에서 그는 '도구'라는 용어를 취했을지 모른다. 


또 한가지, 자현스님의 관점에서 보면 불교도는 '자아가 독립'적으로 열반을 향해 수행해 나가는데, 유일신교(예, 기독교)에서는 유일신에 '예속'되는 것이므로 자아가 독립적이지 못하다는 구분을 한다. 이 때 나는 빙긋 웃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주 모르지 않는다. 기독교도 입장에서 설명을 하자면, 내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때,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 예속된 것인가? 자식은 부모에게 예속된 것인가?  자식이 부모에게 예속 隷屬되었다면 그것이 노예 奴隸와 다를것이 무엇인가?  내가 일부러 한자표기도 했는데, 그 '예'자가 동일하다. 기독교에서 하느님과 나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다.하하하. 어쨌거나 책의 서두에 기독교의 역사적 발전 양상을 구약시대의 폭군적이고 무서운 하느님에서 -- 신약시대의 사랑의 하느님으로의 변모에 대한 설명은 놀라운 통찰이었다. 나도 여태 모르고 있었다. 


자현스님이 조금 더 정교하게 불교이야기를 마저 해주신다면 좋겠다. 중국불교까지 훑으셨으니 이제 한국과 일본에 어떻게 흘러갔는지 설명도 해주셔야.  아주 재미있는, (내게 새로운) 관점들을 많이 소개해주셨으므로 즐거운 책읽기였다.  그렇지, 불교에도 이야기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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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0. 29. 09:44

https://www.bartleby.com/145/ww331.html

          


What though the radiance which was once so bright

          Be now for ever taken from my sight,

              Though nothing can bring back the hour

          Of splendou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In the primal sympathy

              Which having been must ever be;

              In the soothing thoughts that spring

              Out of human suffering;

              In the faith that looks through death,

          In years that bring the philosophic mind.



한때 밝았던 광휘가 이제 영원히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해도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는 그 시간을 돌아킬수 없다해도

슬퍼하지 않으리. 남아있는 것에서 힘을 찾으리니 

태초부터 영원까지 이어질 본래의 동정심으로부터,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샘솟는 위안의 상념으로부터

세월속에 무르익는 철학적 이성이 가져오는, 죽음을 통찰하는 믿음으로부터 

 

...


       The Clouds that gather round the setting sun

          Do take a sober colouring from an eye

          That hath kept watch o'er man's mortality;

          Another race hath been, and other palms are won.

          Thanks to the human heart by which we live,

          Thanks to its tenderness, its joys, and fears,

          To me the meanest flower that blows can give

          Thoughts that do often lie too deep for tears.

                                                         

지는 해 주위로 모여드는 구름은

인간의 유한함을 지켜봐 온 눈(태양의 은유)으로부터 음울한 빛으로 물들어간다. 

또 하나의 경주가 끝났고 (죽음을 의미), 종려관(승리의 상징)을 얻었도다.

우리가 의지해 살아가는 이 마음 덕분에

그 부드러움, 흥겨움, 두려움등으로 해서 

흩날리는 하챦은 꽃이라 할지라도, 

너무나 깊은 상념들을 내게 보내노니, 눈물조차 흘릴 수 없어라. 



워즈워드의 시는, 나이를 먹을 수록 그 맛이 깊어진다. 이런 뜻을 내가 스무살에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도 괜챦은 일이다. 우리에게 워즈워드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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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0. 27. 12:01




개화(開花)

  이 호우 



꽃이 피네, 한 잎 두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0. 26. 10:30


도대체가 꽃봉오리 맺히고 한달이 넘도록 필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이름도 모르는 이 친구가 요즘은 조금씩 조금씩, 고추가 익어가듯 붉은 물이 들기 시작하더니, 오늘 아침에는 꽃받침에 해당하는 부분이 꽃에서 살짝 떨어진 것이 보인다. 곧 꽃이 피려나보다.  내가 오피스를 비운 사이에 피면 내가 섭섭할텐데. 그렇다고 가는 곳 마다 강아지처럼 안고 다닐수도 없고. 


이름을 찾아 낼 때까지, 너의 이름은 '기다리' 

기다리게 만들어서

기다려야 하니까.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succulent 이미지를 검색하니 이 친구의 조상이나 친구들이 곧바로 등장.  음, 너의 이름은 Cotyledon Pendens 다.  





톰 티트토트 네 이름은 톰 티트토트

계몽사 영국동화집에서, 게으른 아가씨가 거짓부렁으로 왕비가 되는데, 매일 한필의 비단을 짜야 했는데, 도깨비가 나타나서, 하루에 세개씩 이름을 말해서 한달안에 그 도깨비 이름을 알아 맞히면 한달간 비단을 짜 줄것이고, 만약에 한달이 끝나도록 이름을 못 맞추면 도깨비의 색시가 되어야 한다는 '거래'를 하게 되었다.  아가씨는 설마 한달안에 그걸 못 맞힐소냐...했지만,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마지막 날 왕이 밥먹다 깔깔대고 웃으며 하는말 -- 낮에 사냥을 갔다가 숲속에서 노랫소리가 들려 그리 가보니 나무 동굴 속에서 도깨비가 비단을 짜면서 '내 이름은 톰 티트토트 내 이름은 톰 티트토트' 우스꽝스러운 노래를 부르더라고. 너무 웃겼다고. 결국 마지막 날 밤에 게으른 아가씨는 '네 이름은 톰티트토트~  약오르지롱~' 하고 왕과 행복하게 살았다는 기묘한 결말. 어린이 동화이지만 권선징악도 아니고, 운좋은 자가 승리한다는.  그거 읽을때마다 뭔가 부당하다, 도깨비가 불쌍하다 생각했는데 -- 아아, 영국 어린이들은 이미 어릴때부터 인생은 부당할수도 있다는 것을 배우는구나.  


http://www.sacred-texts.com/neu/eng/eft/eft02.htm

참 멋진 세상이다. 문득 생각이 나서 tom tit tot로 구글 검색을 해보니 곧바로 원문이 떠 준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0. 23. 14:16

속임수의 심리학: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김영헌 지음


지은이는 현직 검찰청 수사과장님이라고 한다. 어릴때부터 '수사반장'을 즐겨봤고, 범죄 관련 다큐, 드라마, 시사프로 이런것을 심심파적으로 보는 처지인데, 증정본으로 들어왔길래 집어 들었다가 킬킬 웃어가면서 휘리릭 읽었다. 저자는 기업형 큰 사기 사건이건 개인적 작은 사기사건이건 간에 사기치기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은 개인의 '욕망' '아는 사람에 대한 신뢰'  그리고 '불안'이라고 규정한다. 사건 뉴스에 많이 나오는 크고 작은 '사기사건'을 유형별로 사례별로 소개하는데 대개 낯익은 예들이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닥칠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를 방지하는 길은 우선 이러저러한 사기행각이나 사기 사건의 유형을 미리 인지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려면 뉴스를 보고 주변의 사기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좋겠다. 



내가 운 좋게도 크게 사기를 당하지 않고 사는 이유는 일단 내가 사기꾼의 '타겟'이 된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운이 좋았다는 얘기다. 형사님이나 이런 전문가들 말씀으로는, 사기꾼이 작정하고 사기치려고 덤벼들면 베테랑 형사도 넘어간다고 한다. 사기꾼을 체포하여 넘긴 형사님도 나중에 그 사기꾼에게 전재산 다 털린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사기꾼을 안 마주치는 것이 우선일것이다. 



그 외에 성격적으로 사기꾼과 거리를 유지하는 밑천은, 우리 할머니 슬하에서 살면서 '사람이 제가 노동하지 않고 거저 먹으려고 들면 안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씨 뿌리고 거두는것만 진짜다' 뭐 이런 '농사꾼'의 철학을 뼛속깊이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흙은 믿어도 남의말은 절대 믿어서는 안되고, 남이 가진것 넘보지 않고, 그냥 맨땅에라도 헤딩하는 정신으로 살면 - 사기꾼이 가까이 오기 힘들다. 재미가 없으니까.  보시다시피 내게 사기쳐서 얻어갈게 없으니까. 난 흙도, 재산도 없으니깐. (그들이 원하는게 돈 아닌가? 하하하) 난 차도 없어. 집도 없어. 그냥 다 빌려서 사는 인생이다. 하하하. 피싱사기를 칠려고 덤벼도 내가 전화를 안받아. ㅋㅋㅋ. 



가볍게 휙 읽기에 좋은 책이다. 저자께서 아주 성실하게 글을 쓰셨다. 




아래 내용은, 내가 하는 연구와 관련된 내용이라 참고문헌을 찾아보려고 한다. 





https://www.dgu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22716



Posted by Lee Eunmee
Diary/엄마2018. 10. 22. 13:25


유여사가 창고 정리좀 해 달라고 하셔서 잠시 '머슴놀이'를 하다가 발견한 유여사의 작품.  액자까지 만들어 놓았는데, 아무도 이 그림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한다. 개인전 할때도 전시하지 않았던 그림이다.  유여사 왈, "하도 많아서 다 걸지도 못했어..."



몇해전 전시회 할때, 내가 작품 골라냈었는데, 그 때 내 눈에 띄었다면 이 작품을 꼭 눈에 띄는 곳에 전시 했으련만. 아무튼 창고에 처박혀 있던 그림이다. 



이곳은 수원 아주대 앞, '원천호수'이다.  지금은 아파트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 흔적을 찾기도 힘들지만, 내가 어릴때는 그냥 탁트이고 고요한 저수지 호수였다. 가운데 머리 긴 소녀는 우리 언니다. 왼쪽의 노란 모자 꼬마는 내 오래비 동생이고, 오른쪽에 서 있는 선머슴이 나다. 빨간 빵모자는 엄마가 짜 준 것이다. 실제 모습이다. 사진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엄마가 그냥 내 글을 읽고 그 장면을 그린 것이다. 




창고에 처박혀 잊혀져 있던 것을 발굴해 냈으니, 일단 내가 '찜'을 했다.  "내가 그림 값 갖고 와서 그림 가져갑니다" 했더니 통 큰 유여사, 돈은 필요 없다며 그냥 가져가란다.  물론 대개 그냥 가져간다. 하지만 이 작품은 특히 맘에 들어서 작품값을 지불하겠다는 것이지. 은행에 가서 빠닥빠닥한 만원짜리 혹은 오만원짜리 돈을 많이 달라고 해가지고 빠닥빠닥한 신권으로 가져다가 '그림값'이라고 드리면 -- 엄마는 스스로 무척 자랑스러운 기분이 드시겠지.  상고머리에 빵모자, 아무렇게나 허름한 옷. 그림의 구석자리.  그것이 엄마 가슴속의 나의 위치이다.  아름다운 장면이다. 주변인으로 존재하는 내 모습이 꽤 맘에 든다. 옛날에 나는 '주목받지 못하고' 늘 변두리 인생같은 내 위치가 서럽기도 하고, 인생이 시들했다.  그런데, 지금은, 구석자리 안보이는 곳, 주목받지 않는 변두리 삶이 더 좋다. 구석 어딘가에 내 자리 하나 있으면 만족한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0. 22. 13:11


강원도 지방의 설화 몇가지를 소설가 오정희씨가 그녀의 언어로 다시 엮은 이야기 책이다.  김소월의 시 '접동새'의 모티브가 된 아홉 오라비와 누이동생 이야기를 포함한 몇가지 이야기가 들어 있다.


책방에서 읽어도 금세 읽을만한 작은 이야기 책이다. 증정본으로 읽었다.  


소설가 오정희씨는, 내가 만약 소설을 쓴다면 이 사람처럼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작가이다. 그녀의 '중국인 거리' 스케치 '새의 선물'은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인천의 차이나타운에 가서 골목 골목을 걸을 때에도 나는 소설가 오정희씨의 발자취를 상상했었다.  최근에 발간된 오정희 전집도 증정본으로 한질 갖고 있었는데, 오정희에 푹 빠진 형제에게 양도했다. 아무래도 내가 소설책을 들여다 볼 것 같지가 않아서.  나중에 다시 '나의 소설의 시대 (소설책에 미쳐 지내는 시대)'가 온다면 그 때 다시 달라고 하면 돌려 줄 것이다. 



여러개의 이야기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첫 작품.  누이(구렁이)와 인간 오래비의 이야기.  본디 구렁이였던 누이는 쌍둥이같은 인간 오래비를 극진히 돌보고, 온 힘을 다하여 죽은 오래비까지 살려내는데, 오래비 녀석은 제 삶에 취해서 누이와의 약속을 간단히 잊어버리고 만다. 뒤늦게 기다리는 누이를 생각해내고 딱 하루 늦게 집으로 돌아가니....(마지막 장면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누이는 여기저기 풀이 듬성 듬성 난, 인적 없는, 방 가운데 앉아서 명주 한필로 오래비 녀석의 옷을 한벌 짓고는, 다시 뜯어서, 다시 바느질하고, 그걸 반복하며 늦게 당도한 오래비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더란다.  이 부분이 꽤 매혹적이었다.  음, 이 작품 하나 때문이라도 이 책을 소장할 이유가 있을 것도 같다. 책을 사도 좋으리라. 



두번째 작품도 구렁이아들 (아들을 낳았는데 구렁이) 얘기인데 -- 이 이야기는 어딘가 전세계의 설화가 갖는 보편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다.  막내딸이 '괴물'에게 시집가서 잘 사는 것을 보고 언니들이 시기심에 막내의 행복을 망가뜨리고, 막내는 자신의 실수로 인해 사랑을 잃고, 문제에 빠지고, 결국 고생고생 끝에 사랑을 되 찾는 그런 얘기. 



뭐니뭐니해도 '구렁이 누이'얘기가 나의 상상력을 찌르르하게 자극했다.  구렁이의 헌신은 인간이 되지 못하고 구렁이로 태어나 사내녀석을 사랑한 구렁이가 어차피 사랑을 이루지 못하니 헌신적으로 그를 돌보고 그에게 어여쁜 아내까지 만들어다 주는 것으로 그러니까 에로스적 사랑을 아가페적 사랑으로 치환한 것인데,  그렇지만 ....  사랑은 어쩔수가 없는것이지...  명주 한필로 사내녀석의 옷을 짓고, 뜯고, 다시 짓고 하면서 단 한번만이라도 그의 사랑을 확인할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으리라. 오정희씨도 이제 할머니가 되셨구나...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0. 18. 20:09



2013년 번역 초판 발행



1883년 발간된 Social Problems 의 한국어 번역판.



145년전에 미국에서 출판된 책인데, 밑 줄 친 부분을 읽어보면, '방금 어제 나온 책' 같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가?


나는 요즘 배신감을 느낀다. 그 겨울에 촛불 들고 나가서 천식환자처럼 기침을 해 대면서도 뭔가 역사 발전에 필요한 '숙제'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대통령도 바뀌었는데 그 대통령 역시 이재*님을 모시고 북한에도 가고, 도대체 뭐가 바뀐것인지 알수가 없다.  바뀐것은 그냥 '대통령 얼굴'이라는 생각만 든다.  그리고 노회찬씨가 이 세상에 없다. 뭔가 세상이 이상해. 


"대중은 개혁을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이나 정당을 바꾸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헨리 조지는 말한다.  헨리 오빠, 그게 아니구요. 대중은 시스템 변화를 위해서 노력했는데요, 번번히 바뀌는 것은 '가오마담'일 뿐이더라구요.  마담 얼굴 바뀐다고 시스템이 바뀌는게 아니더라구요.





문재인 대통령, 섭섭하게 들리실지 모르겠는데요. 저도 섭섭해요. 도대체 이 사진들에 무슨 차이가 있는거죠?



제가 볼땐 똑같아요. 공주님은 철창안에 갇혀 지내시는데 무도회에서 함께 춤춘 젊은 왕자님은 남북한을 활보하며 여전히 파티중이시지요. 이 사진들을 보면 '진짜 권력'이 어디있는지 가늠을 해보게 되지요.  가오마담 뒤에는 진짜 물주가 있는거거등요. 그런건 학교 많이 안 다닌 사람들도 대충 다 알아요. 그죠 오빠. (참고로 가오마담의 파트너로는 '바지사장'도 있어요. 물주는 따로 있다는 말이지요. 헤헤헤.) 오빠, 저 사람 근처에 계시면 위험해요. 공주님을 보면 알 수 있죠.  





나는 조국의 덕을 톡톡히 누리고 사는 사람이니 불만이 있을것이 없다. 그러나, 나만 잘 살면 남이 고통 받는 것은 상관없는 문제가 아니다. 



'미국 전역에 걸쳐 국민에 의한 정부는 강자와 악당에 의한 정부로 변질되어 왔으며 지금도 변질되고 있는 중이다' 라는 145년전 미국에 대한 평가가 왜 그것을 '현재 미국'으로 바꿔도, '현재 한국'으로 바꿔도 그럴듯 하게 여겨지는가?  이것이 이 책의 놀라운 점이다.  


예를들어서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는 수백년이 지나도 유효할 것이다. 우리의 보편적 감성을 만져주니까. 하지만 150년전의 과학기술은 어딘가 '사이비 과학'처럼 여겨질수 있다. 그 사이에 엄청난 발전과 변화가 따랐으니까. 150년전의 사회학책도 어딘가 '구태의연한' 냄새가 나는것이 당연할 것 같은데, 헨지 조지의 사회학책은 방금 어제 시사프로에 나온 얘기 같다. 그가 '현상'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투표를 통해서 시스템을 바꿀수 있다는 환상을 이제 폐기해야 하는건가?  그럼 뭐지?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착하게 투표하고, 착하게 행동하면 세상이 개선될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런데 어딘가가 '상한 생선'같은 냄새가 난다. 


***

pp68

기차가 출발해서 천천히 움직일 때는, 한 발짝만 내디뎌도 올라탈 수 있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면 그 때 발을 내딛지 않은 사람들은 숨 가쁘게 달려도 그 기차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기차가 출발할 때는 탑승한 사람들이 쉽게 탔다고 해서 최고 속도로 달리고 있는 기차에 올라 타는 것도 수월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터무니없다. 


pp76

사람들이 불평등한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은 타고난 불평등, 즉 사람들이 원래부터 갖고 있던 힘과 역량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pp 84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적게 벌고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도 많이 버는 이유는 대개 전자가 만드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후자에게 흘러가서 그들의 소득을 부풀리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생들이 우스개소리로 '장래희망은 건물주'라고 한다.  그들의 일부는 이미 건물주이기도 하다. 그들이 노력해서  건물주가 된 것이 아니라 조상을 잘 만나서 그리 되었다. 그들은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이 열심히 일해서 수입의 일부를 '월세'로 갖다 바칠때 그것을 받아서 쓰고, 남은돈으로 다시 건물을 살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그렇게 사는 것이 현명하다고 가르친다.  자기계발서에서 부유롭게 사는 법에 대한 설명을 대개들 이렇게 한다, '네가 일해서 돈을 벌려고 하지 말고 네 돈이 네가 자고 있을때도 스스로 알아서 돈을 벌어들이게 하라. 진짜 부자들은 그들이 해외여행을 즐기는 순간에도 여전히 재산이 쌓여가고 있음을 명심하라.'  내가 아직 철이 안들었을땐 그것이 맞는 말인줄 알았다. 알고 보니 이들이 젊은이들을 죄다 '도둑놈'으로 키우고 있는자들이었다. 


pp 85

만일 각 사람이 자신이 만든 것을 모두 자기 집으로 가져갈수 있다ㅕㄴ, 사람들은 더 근면하고 도덕적인 존재, 더 좋은 노동자, 더 좋은 시민이 될 것이다. 


pp89-90

정치란 누가 정권을 잡느냐의 문제일 뿐이고, 실제로 나라를 지배하는 건 기업들이며 이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니까 기업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바보라는 것이다. "국민들? 그들이 뭘 알고, 뭘 신경쓰겠습니까? 언론이 국민을 지배하고, 자본이 언론을 지배합니다. 토끼 편에 서서 사냥감이 되기보다는 개 편에 서서 사냥하는 게 낫습니다." 그의 말이다. 


pp 99.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사회적 질병이 있다. 범죄자, 빈민, 창녀, 자기 자식을 버리는 여자,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서 목숨을 끊는 사람, 거지와 도둑이 넘쳐나는 것은 아무리 일해도 정직하고 여유있게 살기가 힘든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pp102

우리모두가 부자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인간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은 항상 존재할수밖에 없다고 선언하는 사람들과 논쟁을 시작하려고 한다. (----헨리 조지는 이러한 것이 잘못된 신화라고 설파한다)


pp103-105

우리는 일찍부터 1등은 잘 대우해서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또 가난하면 안된다는 것도 일찍부터 배운다. 빈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부자가 되기를 갈망한다.

...

그러나 빈곤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면, 정신없이 벌이는 생존 경쟁은 끝날 것이다. 

....

누구든지 자기 주위를 돌아보기만 하면, 빈곤은 자연의 인색함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역을 해도 간신히 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지는 것을 창조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 아니면 신성모독이다.


일부 사람들이 가진것이 충분치 않아서 품위있게 살 수 없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필요이상으로 많이 갖기 때문이 아닐까?



pp 121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정의가 도덕의 발달 단계에서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 첫번째 가치라는 사실이다. 정의보다 높은 가치는 정의에 기초해야 하고, 정의를 포함해야하며, 정의를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 


pp124-125

억압당하는자, 몰락하는자, 짓밟히는 자들이 해방되고 지위가 높아지는 것은 언제나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그들보다 형편이 좋았던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 때문이었다. 자연적 권리를 빼앗기면 빼앗길수록 그것을 되찾을 수 있는 힘은 더 약해지기 때문이다. 도움이 많이 필요한 사람일수록 스스로 돕기는 어렵다.

어떤 사회 정의 실현이나 개혁의 이면에는 그것의 이해당사자들뿐 아니라 주변의 선량한 사람들의 노력과 헌신이 있음을 그는 지적하고 있다. 가령 미국의 노예해방도 노예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노예를 가질수도 있었던 사람들 (더 부유하고 더 많은 것을 누리고 더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당시의 노예들이 그들의 삶을 순순히 받아들여서가 아니다. 헨리 조지는, 억압당하는 자들은 저항의 '힘'마저 서서히 잃기 때문에, 억압당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 협조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봐도,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갔던 사람이 '모세'였는데, 모세는 비록 이스라엘 족속이었지만 이집트의 왕자로 성장하였던 사람이다. 종살이로 큰 것이 아니라 왕자로 성장했으므로 그가 비록 이스라엘 족속이었으나 그의 비전이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에 대해서도 나는 비슷한 해석을 하는 편이다. 오바마는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둘다 학력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이었다. 노예출신의 미국 흑인이 아니었다. 오바마의 유전자에는 '노예'의 기억조차 없다. 석가모니가 샤카족의 왕자 출신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민중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원동력 역시 '더 많이 가진자가  약자들을 돌아보는' 것와 상통한다. 나의 예수님 역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지 않았던가.  약자들이 손 놓고 앉아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요지는, 억압받는 사람들이 그들의 현실에 짓눌려 꿈도 꾸지 못할때는,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그들을 돌보고 응원하고 개혁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살면서 선택할 수 있는 일 가운데,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사회 상태를 개선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좀더 완전하고 고상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비교할만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pp 200

노예제도의 본질은 노동을 강탈하는데 있다. 즉, 사람들에게 일을 강요하고는 노동생산물 중에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만큼을 뺀 나머지를 모조리 빠앗는것이 노예제도의 본질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미국 시민들' 중에서 이미 많은 사람이 노예로 전락했다. 앞으로 그렇게 될 사람도 많다. 

내가 보기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노예인데도 스스로는 '중산층'이라고 착각을 하고 다른 노예들을 멸시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노예'로 사는 것에 대하여 그것을 당연시하거나 현대 사회에 노예는 없다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 헨리 조지는 얘기한다. 미국 노예해방 이후에 노예출신 사람들의 삶은 더 고통스러워졌는데 - 주인들이 노예가 늙어 죽을때까지 먹여주던 책임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주인들은 이전에는 노예들의 여생을 먹여살렸는데, 해방 이후에 인부들을 돈주고 부리면서 오히려 경비가 절감된 측면이 있는 것이다.  현대판 노예들에게 아무도 '노예'라고 부르지 않으니까, 세상은 더 좋아진 것 같은데  현대판 노예들의 삶은 더욱 고단해진 것이다. 


pp248

우리의 근본 실수는 토지를 사유재산으로 취급한데 있다.


pp 263

...불평등을 용인해야 하는걸까? 소수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공동유산을 독점하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걸까? 결고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pp 303-306

사회개혁은 고함과 아우성으로, 불평과 비난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정당을 결성하고 혁명을 도모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생각의 각성과 사상의 진보를 통해 달성된다.  올바른 생각이 없으면 올바른 행동이 나올수 없고, 올바른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올바른 행동이 나온다. 힘은 항상 대중의 손에 있다. 대중을 억압하는 것은 그 자신의 무지와 근시안적 이기심이다. 

...

누구든 자신이 영향력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생각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 어떤 처지에 있든 빛이 되고 힘이 될 수 있다. 

...

인간이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서는 행복해질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진 것처럼, 개인이나 각 계급은 타인이나 다른 계급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누릴수 없다는 것이 사물의 이치인것 같다. 

,,,

그가 책을 마무리한 마지막 말:

노동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배려해야 할 사람들, 투쟁을 통해 도와줘야만 할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를 돕고 스스로를 위해 투쟁할 힘이 가장 약한 사람들, 재산도 숙련도 지성도 전혀 갖지 못한 사람들, 사회의 계급 구조에서 제일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이들에게 평등한 권리를 보장할 때 비로소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권리를 보장할 수 있다. 


마치니가 말 한 것처럼 사람들은 인권을 쟁취하려고 할 때 이기심의 깃발이 꽂혀 있는 곳이 아니라 의무감 (원본을 찾아봐야겠다. 의무감이 아니라 책임감 혹은 소명의시이 아니었을까?)의 깃발이 꽂혀 있는 곳으로 모여든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명하실 때 하나님이 품고 있었던 깊은 뜻을 발견한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문명을 전진시킬 힘은 바로 그와 같은 정신에서 나온다. 




놀라운 책이었다. 우연히 만나서 읽게 되었는데, 내 삶은 어쩌면 이 책을 읽기 전과 후로 나뉘는게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주위의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분배의 문제 정의의 문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등 술자리 안주같은 얘기를 할때 "넌 왜 늘 그따위 식으로 생각을 하느냐, 너나 잘 살면 되지 왜 다른 사람들 삶까지 들여다보느냐" 이런 지적에 대해서 내가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 것들의 대답을 헨리 조지의 글에서 다 찾아 냈다.  사람이 왜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는지, 사람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정확한 방향을 제시했다.  막연하게 내가 '그것은 옳지않다, 온당치 않다'고 생각하던 사안들에 대하여 그것이 왜 온당치 않은 것인지 그가 설명해줬다. 그러므로 내 오래된 쳇증이 싹 내려간 기분이 든다.



내 주위에는 평생 나름대로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살아온 신사가 있다. 그의 삶은 저항과 투쟁으로 점철되었으며 한 때 정치인을 꿈꾸기도 해서 선거운동으로 알량한 재산마저 날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투사였고 나는 그의 삶이 어딘가 멋있어보였다. 나같은 버러지 같은 (딱 책벌레) 삶에 비해서 그의 삶은 혁혁해보였다. 그가 가난해도 그는 풍족해보였고, 그가 돈한푼 없는 개털이어도 그는 멋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그는 어마어마한 갑부가 되어 나타났다. 머리를 써서 한채남은 경기도 변두리 집을 잡혀서 '투자'를 한 것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물론 수년간 그가 기업동향을 분석하고 연구하고 판단한 결과이다. 그는 절친한 친구들을 초대하여 해외여행을 함께 떠나기도 하고 '선량하고 인정많은 부자' 놀이를 하며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가 부자가 되었으니 우리는 이제 그의 생계에 대해서 염려하거나 한숨 짓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나는 '디오게네스'씨에게 말했다, "그 사람하고 너무 자주 어울리지 마시오. 어딘가 개운치가 않소. 나는 잘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이 과연 그에게 좋은 것인지 아닌지 그것도 헷갈리고, 전체적으로 헷갈리는 시추에이숑이라고 할 만하오."

이제 나는 내가 메우 헷갈려한 문제의 핵심을 알게 되었다. 그가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회적 상황이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다. 




조현*이라는, 제 기분내키는대로 아무한테나 물벼락을 날리는 재벌집 따님이 최근에 '무죄'선고를 받았다. 왜 무죄선고를 받았냐하면, 피해당사자들이 입을 다물고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이 안난다거나 혹은 별로 피해를 입은적이 없다는 애매하고도 '가해자'를 기꺼이 사랑으로 감싸는 증언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해보았다. 이름있는 광고회사에서 일하며 대기업 임원들과 회의를 진행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사회에서도 엘리트에 속하고, 지금 일하는 회사가 아니라 다른데라도 얼마든지 가서 일할수 있을텐데... 꼭 그 직장이 아니어도 밥 굶지 않을텐데... 하지만 그들은 '직장'을 유지하기 위해 모욕을 감수했다.  이것은 스스로 선택한 '노예의 길'이다. '노예의 길.'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스스로 '노예의 길'을 선택하고, 재벌들의 왕국은 더욱 공공해진다. 내가 노예의 길을 선택하면 나로 끝나는게 아니다. 내 옆사람도 나를 따른다.  내가 노예의 길에서 벗어나면, 내 옆사람도 노예의 길을 벗어난다. 길은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제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돈, 명예, 직위, 이런 '세상의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진리, 자유, 정의)을 경배하면 나는 자유로워진다. 그것이 헨리 조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0. 17. 13:24





하느님께서, 내가 겉으로 태연하나 속으로 옹졸하게 삐질것을 미리 예견하시고, 휘하의 천사들을 보내어 위로해 주시다.  금강경도 보내주시고.  (이참에 김용옥 버전도 구하고, 온갖 금강경 해설집을 싸그리 읽어볼수도 있겠지...) 


고구마나 먹으라고 고구마도 한상자 (동그란 조선호박과 고추나물은 써비스로 ㅋㅋㅋ) 보내주시고.  원래 대학시절부터 필체가 왕휘지 안진경 구양순이 울고갈 필체더니 여전히 일필휘지다. ( 이친구는 글씨 자체가 시였다). 시는 안쓰고, 어르신께서 힘들여 농사지은 고구마나 빼돌리고 있는게 아닌지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다. 배달해준 우체국 직원이 훤칠한 미남 청년이어서 더욱 고구마가 멋있게 느껴졌다. 






하느님, 천사들을 보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도 약간 삐진 상태이니 다른 천사들도 보내소서. ㅋㅋ. 


내려다보고 계시던 하느님의 혼잣말: 내가 쟤 때문에 살수가 없어, 살수가....(아이고 허리야...)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0. 11. 11:02



전체 32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하루에 한 챕터씩 천천히 읽어도 32일이면 읽을수 있다.  속독을 하는 편이지만, 이 책의 경우에는 '인내심'을 발휘해서, 하루에 딱 한챕터씩만 읽었다.  읽고, 생각 좀 해보고 일부러 천천히. (성질 급한 사람은 '천천히'가 잘 안된다).


어느날 불교방송에서 한 스님이 금강경 강의를 하는 것을 보았는데 내용이 놀라웠다. 그래서 '금강경'을 좀 읽어봐야지 생각했다. (나는 심심하면 불교방송-천주교방송-기독교방송 세 채널 사이를 오가며 설법이나 설교를 듣는다.) 


법화경의 일부를 지금도 암송 할 수 있으므로, 불경을 읽는 것이 내게는 전혀 낯설지 않다.  뜻을 잘 몰라도 한문으로 씌어진 것을 대충은 읽을수도 있고, 대강 뜻을 해독할 수는 있다.  그래도 대강 떠듬거리며 간신히 해독하는 것과 '뜻을 이해하며 읽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서, 금강경을 잘 설명해 놓은 책이 뭐가 있을까 책방을 뒤져 찾아보았다.  


우선은,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를 읽어볼까 생각했는데, 책을 들여다보니 만만치가 않았다. 뭐 원문만 늘어놓고 강의하는 식이다. 


다른 불교계에서 나온 책들은 어딘가 설명이 구태의연하고, 잘 다가오지 않았다. 법륜승이 쓴 빨간 하드커버의 이 책이 내 맘에 꼭 들었다. 



이유는

    1.  각 챕터 (장)별로 한문 원전을 적고, 바로 아래에 '한글표기'를 해 놓아서, 한문을 따라 읽다가 내가 모르는 글자가 나왔을때 한글로 어떤 소리가 나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내게는 아주 편리하다.
    2.  바로 옆 페이지에는 이 한문원전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실어 놓았다. 역시 고맙다.
    3.  그렇게 첫 두페이지가 지나가면 '내용'이 나오는데 법륜승이 쉬운 한국어로 몇가지 중요한 불교용어를 설명해 주었고, 개념도 그의 평이한 언어와 에피소드로 설명을 해 준다.  
    4.  부록으로 금강경 전문과 바로 아래 '한글표기'도 함께 실어주었다.  만약에 금강경을 암송하고 싶다면 매일 한두차례 이 부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내어 읽으면 된다. 그러면 아마 한 백일쯤 소리내어 읽으면 경이 입에 붙을거다. (경험상). 
    5.  역시 부록으로 금강경 전문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도 실어 주었다. 

이렇게 내 맘에 쏙 들게 편집을 해 주다니. 감사한 노릇이다. (책을 잘 만들었다).



금강경에서 가장 자주 나온 표현은? (틀릴지도 모르지만 내가 감지하기에는) 하이고何以故 이다.  (내가 전문적으로 한문을 배운 사람이 아니라서 단언할수는 없지만) '그것은 어떤 연고인고 하니...' 이런 뜻일 것이다. 책의 번역 페이지에는 '왜냐하면'으로 해석했다.  이 '하이고'를 볼 때마다, '하이고 (아이고).....' 한숨섞인 홋잣말을 떠올리곤 했다.  '그 하이고가 이 아이고가 된건가?' 이런 잡다한 상념.





금강경은 '가을'에 읽기에 참 좋은 경이다.  다른 경들도 아마 가을에 읽기에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해가 이울어가는 계절이기 때문에, 만물이 유전하며, 사라지며, 뭐 그런 현상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성서의 '전도서'가 불경과 참 닮았다. 전도서를 꺼내 읽듯이 금강경을 꺼내 읽어도 좋으리라.  이 아름다운 글을 외울수 있으면 더 좋으리라.


'너는 예수쟁이'라며 금강경을 외겠다고? 미쳤니? -- 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내 대답은 이렇다. 나는 예수쟁이가 되었고, 예수쟁이로 죽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상 숭배를 하지 말라'고 하셨지 불경 읽지 말라고 말씀하신바 없다.  예수쟁이도 수학 공부하고, 과학 공부하고, 철학 공부하고, 컴퓨터 공부한다. 불경 공부를 해서 안될 이유나 근거가 없다.  하느님을 좀 제대로 알으려면 그가 주재하시는 모든 것을 통찰해야 한다.  


최근에 내가 읽은 몇몇 뇌과학 책을 보면, 인간의 '뇌'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상황에 따라서 속고, 속이며, 의견을 바꾸기도 하고, 변화무쌍하다고 한다. 만물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 '나' 조차도 '일념삼천대계'를 찰나에 오가는 것이니 나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불교 경전의 말씀과 일맥상통 하는 대목이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0. 9. 16:26


Pain and Prejudice

보이지 않는 고통

What science can learn about people who do it

캐런 메싱 지음, 김인아 김규연 김세은 이현석 최민 번역


원제 Pain and Prejudice 는 얼핏 Jane Austin 의 소설 'Pride and Prejudice'를 연상시킨다.  '오만과 편견'에 대비해서 '고통과 편견'으로.  번역서 제목 '보이지 않는 고통' 도 탁월해보인다.


'보이지 않는 고통' 제목은 어딘가 중의적이다. 

(1) 내가 보이지 않아서 내가 보이지 않는 고통 -- 예컨대 내가 매일 마주치는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그 사람은 매일 마주치면서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지나가는 행인으로 간주한다. 그에게 나는 보이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이다. 그러면 나는 내가 그 사람에게 보이지 않아 고통스럽다.


(2) 말 그대로 invisible pain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고통. 타인들이 겪는 고통이 눈앞에 있어도 내 눈에 띄지 않는다. 


작가가 의도했건 안했건, 번역서의 타이틀을 지은 사람이 의도했건 안했건, 이 책은 위 두가지 '고통'에 대해서 현상의 목소리를 토대로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을 꿰뚫는  key word 는 'empathy gap (공감 격차)'이다. 


어떤 정책 결정자들이 정책을 결정할 때 정말로 그 정책의 영향권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실생활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있을까? 정말로 그 정책이 그들의 삶을 개선해줄만한 정책일까?  선거철만 되면 시장으로 달려가서 시장상인들과 악수하고, 어묵을 먹는 사진을 찍는 그들이 정말로 서민의 삶을 알까?  우리는 의심한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스마트폰, 그 아름다운 기계를 만드는 공정에 대해서 우리가 알 필요는 없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기계에 필요한 작업을 하다가 원인불명의 질환에 시달리다 죽는다면, 그 사건은 우리와도 관련이 된 것이 아닐까?  그것은 그의 책임이고 우리는 이미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아무 상관이 없는걸까?


갓 군대를 제대한 청년이 물류창고 컨베어벨트 아래에서 감전사 당했을때, 그것이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문제인걸까? 오늘도 내 문앞에 택배기사가 상자 하나를 던져놓고 종종 걸음쳐 급히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는데. 


책에서 저자가 말한 '공감격차'는 단지 책속에 소개되는 '노동현장'에만 적용되는 내용은 아니다. 사회의 곳곳에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안보고, 몰라서 못보고, 외면하고, 기피하고, 못들은척, 안 본척 하면서 산다.  


사실 나는 직장에서 마주치는 청소하시는 분에게 꼬박꼬박 예절바르게 인사를 한다. 하지만 한번도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본 적이 없다. 매일 마주치고 매일 인사하지만 나는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단지 예절바르게 인사만 할 뿐이다. 나는 그에게 정말 예의 바른가?


책의 저자는 평생 교수로 일했고, 평생 학술지에 올려서 이름을 드러낼 글만 열심히 써대다가 마침내 삶의 황혼기를 맞이하여 '진짜' 글을 쓰기로 작정했다. '학술지'에서 실어주지 않지만, '모두'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세세한 에피소드와 문제의식 앞에서 내가 자꾸만 작아진다.  그렇지 않아도 자의식이 밑바닥인데 이런 분들 만나면 어딘가 안보이는데로 숨고 싶어진다.  그래도 한 편 다행이다. 이 세상에는 나의 '스승'이 아주 많은 것이다. 


http://americanart.tistory.com/2828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김승섭교수가 추천사를 썼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10. 8. 09:05




My brain has its own head

Mein hirn hat seigen eigenen kopf

나의 뇌에는 다른 '머리'가 있다 (내 뇌를 움직이는 또다른 뇌가 있다).



Stumbling on Happiness 의 Daniel Gilbert,  Phantom in the Brain의 Ramachandran 이 내게는 아주 유쾌한 책읽기였는데 장동선 박사의 책을 읽으며 줄곧 길버트나 라마찬드란의 유머러스한 설명이 떠올랐다. 꽤 이야기를 잘 풀어나가는 인지과학자가 나타난듯 하다. 2017년 한국 발행.  


장동선 박사의 개인적 삶이 꽤 특이한데, 우선 부모님이 남한출신/북한출신의 조합이신듯 하고 (설마 책에서 농담한것은 아니었겠지), 그러니까 남북한계 한국인부모 슬하에서 독일에서 출생했으며 한국에서 고교시절을 보냈고... 뭐 이런 저간의 사정으로 그의 책이 독일어로 출간되고 한국어로 번역되게 된 모양이다. 


책에서 특히나 바이링구얼(2중 언어)로 성장하는 어린이들의 언어 발달에 관한 사항을 눈여겨 봤고, 2중언어자들의 '문화에 대한' 열린 태도에 대해서 역시 공감했다. 


커피광고 관련 에피소드는 -- 어딘가 작위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가기 위해서 뭔가 조미료를 친것 같다는 애매한 느낌. 


특히 기억에 남는것

1. 보톡스 시술을 받으면 그것이 근육마비제라서 근육이 제대로 기능을 못하기때문에 얼굴 표정이 둔해진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내 얼굴 근육이 마비되어서 내가 미세한 표정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면 -- 다른 사람의 미세한 표정에 대한 공감 능력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슬픈표정을 짓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슬픈표정에도 제대로 공감하지 못할수 있다는 것이다. (미러세포 관련 책에서 본것도 같은데, 그래도 놀라웠다.)


2. 보톡스 관련, 정반대의 상황.  나이들면 미간 (눈썹과 눈썹 사이)에 주름이 생기는데 그 주름이 사람을 '우울하게' 보이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고민이 있거나 우울할때 자신도 모르게 미간사이에 주름이 생기는 표정 (인상을 찌푸리는)을 연출하기 때문에, 일부러 인상을 찌푸리지 않아도 미간에 주름잡힌것 자체가 어느정도 우울감을 불러 올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미간에 주름이 많이 잡힌 사람이 보톡스 시술을 해가지고 미간주름을 어느정도 제거를 하면, 그 사람의 기분이 좋아질수 있다고 한다. 사라진 미간 주름과 함께 우울감도 사라지는 것이다. (어느정도). 


3. 뇌를 속이는 문제는 라마찬드란 박사가 가장 전문가가 아닐까? 이 책에도 내가 내 뇌를 속일수 있는 몇가지 트릭이 제시된다. 재미있는 내용이었다. 


4. 유아기에 (언어발달 실험용으로 비디오를 틀어줬을때) 혼자 비디오를 시청할때와, 단체로 비디오를 시청할 때 그 효과에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예로 들어서 사람은 '사회적'으로 행동할 때 행동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좀더 공부를 해봐야겠다.  (역시 나의 연구 프레임인 비고츠키가 소개되기도 했다.) 


4. 평생 자기 마을을 떠나지 않은 사람 (평생 한직장에 다닌 사람)과 이리저리 떠돌며 사는 사람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독일어로 저술하고 한국어로 번역한 책인데, 책 내용중에 전문용어는 '영어'로 표기해놓았다. 덕분에 내가 읽기에는 수월하고 고맙기까지 했는데, 원본에도 괄호 쳐 놓고 영어로 표기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며칠전 읽은 '탈출하라' 책에서는 캐나다에 사는 영국인이 '비용'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영국파운드와 캐나다달러로 표시를 했을때, 미국달러에 익숙한 나로서는 약간 짜증이 났었다. 이게 얼마쯤 되는지 가늠이 안 되어 검색해봐야 하니까.  (한국어 번역에서 한국어 단위로 괄호쳐서 설명을 하던지, 그런 친절함도 없었는데).  소장가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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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나서 문득 떠오른 생각인데,

토마셀로도 그렇고 장동선박사도 그렇고 독일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연구하는 학자들과, 미국의 학자들 사이에 어떤 '철학적' '다름' 혹은 '접근방법'의 '다름'이 감지된다.



장동선박사의 글이 내게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 그가 '뇌'를 얘기하면서도 인간의 '사회성'에 주목했다는 것이다. '뇌'과학자들이 '뇌'와 관련된 '현상'을 풀이하는 방식이 '다니엘 대닛'을 위시한 미국 학자들은 어딘가 '개인성'에 주목을 하는것처럼 여겨지고, 토마셀로나 장동선 같은 사람들은 '사회성'에 주목한다.  미국의 철학을 짧게 정리하자면 Self-reliance에 기반한 Pragmatism이라고 나는 파악하는 편인데, 그 Self-reliance 정신이 미국의 학자들에게도 그대로 반영되는게 아닐까?  뇌를 보면 그냥 뇌만 본다.(미국학자들은). 그런데 독일학자들은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의 뇌'는 인간의 사회성에 기반하여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점을 본다. 



미국은, 미국 교육은 '팀 워크 (Team Work)'를 강조하고, 그들의 '미식축구 American Football'에 열광하기도 하고 얼핏 '사회성'에 기반한 사회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미세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이들은 '개인이 성공하기 위해서' 팀워크를 하는 것일뿐이다. 팀워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각자 단세포들이 된다. (말하자면 그렇다).  그런데 유럽은 미국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가서 생활해보지 못했으므로 알수 없으나, 유럽의 학자들은 그들이 과학자건 철학자건 간에 인간이 다른 인간과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것에 집중하는것처럼 보인다.  그런면에서 보면 미국은 대체로 아직도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한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