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Column2012. 3. 8.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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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철의 여인 (The Iron Lady)’이 한참 전에 개봉했음에도 여태 안 본 이유는, 영화의 실제 인물인 ‘마가렛 대처 (Margaret Thatcher)’에 대해서 어딘가 내키지 않는 구석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이는 12년간 영국의 총리를 지낸 인물로 영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성 총리이기도 하고 영국은 아직도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런데 인물이나 역사물을 즐기는 내가 이 영화를 안보고 지낸 이유는 좀 엉뚱한데 있다.

 
대처가 총리를 지낸 1979년부터 1990년 그 12년 사이의 한국의 현대사는 어떠하였는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가 쏜 총에 사망했고, 이어서 1980년에는 광주 민주화 항생이라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리고 전두환, 노태우의 잇따른 집권.

 
보수주의자 대처가 영국의 총리로 국제무대에서 화려한 명성을 쌓는 동안 한반도에서 한창 자라나던 나는 걸핏하면 수업이 중단되거나 휴교령이 내려지던 대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돌아보기에도 씁쓸하고 암울했던 시절. 그래서 나는 동시대를 살았던 대처의 세월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메릴 스트립이 이 영화로 2012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영화를 지나쳐버렸을 것이다.

 
영화 ‘철의 여인’은 노년에 쇠락해가는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잡화상의 딸이었던 한 사람. 결혼을 하더라도 남성의 품에 기대있기보다는 사회활동을 하고 싶었던 사람. 그가 마침내 이룬 영광의 세월과 그리고 이어지는 노년과 상실의 시간.

 
대처의 보수적 정치 노선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그가 느꼈을 갑갑함에는 깊이 공감하는 편이다. 이 영화에는 남녀가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식사를 마치자 남성들은 남성들끼리, 그리고 동반하여 온 여성들은 여성들끼리 따로 자리를 옮긴다. 이 때 어쩐지 쫓겨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는 젊은 날의 대처. 나는 그이의 그 좌절감에 깊이 공감했다.

 
나는 부부동반 모임을 좋아하지 않으며 잘 가지도 않는다. 남편이 싫어서가 아니다. 남편과 나는 사이 좋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부부동반 모임에 가면 나는 부속품 신세로 변모한다. 한국인들의 경우 부부동반으로 초대를 받아가도 대개 남자는 남자들끼리, 여자는 여자들끼리 모여 앉는다. 남자들은 서로 술을 주고 받으며 직장이야기나 사회, 정치 이야기를 하고, 동반한 부인들은 자녀교육 얘기나 식탁에 차려진 요리를 어떻게 한 것인지 이야기를 한다. 어느 때는 맥없이 기다리는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그 시간에 책을 읽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부부싸움을 한 적도 있다, 내가 꼭 필요하지도 않은 자리에서 막연히 남자들의 파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못 된 여자가 아닌가 하는 죄책감도 드는 것이다.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던 여자, 결혼을 하더라도 집에서 살림만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는 젊은 날의 대처를 보며 나는 위안을 받았다. 대처의 곁에는 그가 정치인으로 쑥쑥 자라도록 착실히 외조 했던 남편이 있었다.

 
대처의 시대는 갔다. 한국에서도 신 군부의 시대는 갔고, 혁혁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한국에도 대처를 방불케 하는 여성 지도자들이 정계에 많이 등장했다.


제일 야당대표인 한명숙씨도 있고, 대권 주자라는 박근혜씨도 있다. 진보의 아이콘 이정희씨와 심상정씨가 있고, 서울 시장 후보에 올랐던 나경원씨도 있다. 독신인 박근혜씨를 제외하면, 이들 여성 정치인들은 모두 남편의 착실한 외조를 받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이들의 정치적 노선은 각기 다르지만 오늘날 한국의 정치 판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사실이고, 개인적인 친밀도와는 상관없이 나는 이들 여성 정치인들의 활약을 보면서 기쁨을 느낀다. 이들은 한국 정치의 장에서 아직까지도 여건이 척박한 여성들의 몫을 넓히는 철의 여인들인 것이다. 이제 좀 더 많은 여성 인재들이 철갑 옷이 아닌 본성의 부드러움으로 한국 정치의 폭을 넓혀주기를 기대해 본다.


2012,3,7 이은미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