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etch2019. 10. 31. 20:31

 

내가 '그 어떤 감리교회'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던 이유는 그 교회를 세웠다는 '원로목사'라는 분의 설교가 괴이쩍고 납득이 안갔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박근혜씨가 아직 대통령이던 시절, "세월호는 이제 그만 잊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그걸 문제삼아야 합니까" 이따위 소리를 해서, 내가 너무 화가 나서 '크리스마스 예배'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온 적이 있었다.  그는 동성애자들이 축제벌이는 곳에 '반대시위'를 하러 다니던 목회자였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설교 시간에 다시 설교 재료로 삼았다. 

 

내가 그따위 교회를 그래도 꾸역꾸역 다녔던 이유는 단 한가지, 그가 곧 정년퇴임을 하여 물러날 것이라는 지대한 희망 때문이었다.  그 원로목사님의 휘하에 두명의 부목사님들이 있었는데, 이분들은 극히 정상적이고 바른 분들처럼 보였다. 설교도 정상적이었고 원만해 보였다.  그래서 저 이상한 노인이 정년퇴직하여 교회를 나가면 저런 정상적인 부목사님들이 목사님이 될 것이고 교회는 정상적이 될거야라는 얄팍하고 순진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간에도 부목사님 한분이 잔뜩 불행한 표정으로 사역하다가 따로 살림차려 나갈때 (개척교회하러 떠날때), 나도 그쪽으로 옮길까 하고 흔들린적도 있었지만, 그냥 귀챦아서 그 노인이 나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게으른 인간이니까 조금 참아서 될 일이면 참는쪽으로 하는 편이다. 

 

드디어 올해 초에 고대하고 고대하던대로 그가 정년퇴임/은퇴를 하긴 했는데 '원로목사'라고 스스로 자기를 추대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달에 400만원의 원로목사 월급을 받아 간다고 한다. 은퇴후에 그의 얼굴을 한번도 교회에서 보지 못했지만 그는 한달에 400만원 생활비가 적다고 신경질을 부린다고 한다. 물론 그 월급은 그가 퇴직금조로 빼간 수억원과는 별도로 지급되는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듣고, 그 다음부터 그 교회에 돈을 안 내겠다고 작정했지....  에라이 날도둑 목사놈아. ) 그리고 교회는 엉망이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그 사층짜리 신축교회를 그대로 곱게 '남에게' 넘기고 물러날 생각이 추호도 없거니와,  교회는 (1) 지금 다른데서 목회를 하고 있는 그의 '아들'이 그 교회를 물려받는것이 마땅할 수도 있지 않겠냐는 일부 장로들과  (2)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 교회 세습은 말도 안된다, 부목사님이 일 잘하시니 그냥 그 분이 자리 넘겨 받으면 된다는 일부 장로들의 전쟁터가 된 것이다. 

 

그 노인이 자취를 감춘 후 6개월동안 교회는 '원로목사파'와 '부목사파'로 '분단국가' 처지가 된 것 같았는데 '국민투표'식으로 전교인 투표를 해봐도 70퍼센트가 '부목사'를 새로운 담임목사로 추대하자는 찬성표가 나왔지만, 그렇지만 국민투표고 지랄이고간에, 지방 감리교단이 '원로목사'의 수중에 있었다.  자취도 보이지 않는 원로목사 뜻대로 움직여지는 것 같았다.  결국 몇년 후에는 그의 아들이 그 교회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분분해졌다. 게다가 현재 부목사님은 '난'을 일으켰다고 징계를 먹는다나 뭐라나.   교회 사정에 밝은 전문가들에게 문의를 해보니, 교단이 원로들 수중에서 놀아나면 개혁이고 뭐고 없는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 지역 감리교단 자체가 완전히 썪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에잇.  어디가서 예수쟁이라는 말도 못하게 생겼다. 너무 부끄러워서.  예수님이 부끄러운게 아니라, 예수님을 팔아먹고 사는 목사라는 직업인들이 내 삶에 끼어들었다는게 챙피스럽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일단은 쫒겨나는 부목사님들이 손을 잡고 새로 세운다는 교회쪽으로 가서 예배를 볼까 생각하고 있다. 

 

내가 왜 이 썩어빠진 감리교단을 떠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1) 어차피 사방 눈씻고 찾아봐도 개신교 교단 전체가 썩어가고 있다. 희망이 없다. 의탁할 곳이 없다.

 

2) 천주교나 성공회에 간들 뭐 그들이라고 크게 다르겠는가?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인간의 후예들이 다 거기가 거기지. 사람 자체를 신뢰하면 안되는거다. 원래 나는 사람을 신뢰하지도 않는다. 

 

3) 그럼에도 나는 예수님께 의지하여 일평생 살기로 서약한 바, 어쨌거나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그래야 한다. 그러니 예배처에 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튼 예배를 계속 드리기 위한 방편으로 새로운 교회로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새로 교회를 세우느라 고생중이신 목사님께, '나는 당신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당신을 신뢰하지도 않소. 나는 단지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만을 믿을 뿐이오. 당분간 당신과 함께 예배를 보기로 했으니 한동안 좋은 길 동무가 되기를 희망하오' 뭐 이런 메시지만 보내놨다.  

 

미국 감리교는 '중앙에서 파송'하는 시스템이라서 목사들이 '이건 내가 세운 내 교회, 우리 아들 준다' 뭐 이따위 소리하는 작자가 없다. 공립학교 선생님들처럼 몇년 있다가 떠나면 새사람이 오고 그런다.  한국 감리교는 '이건 내교회, 내 아들에 아들에 아들에게 물려줄 내교회' 이따위 생각 가진 목사들이 넘치는 것 같다.  내가 다니던 미국 감리교가 새삼 그립다. 어쨌거나, 나는 오늘도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수님 손을 꼭 붙들고 살고 있다. 

 

한국에는 참 나쁜 목사놈들이 많다. 에라이... 나쁜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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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19. 10. 16. 12:25

이건, 아직 조국씨가 법무장관에 있고, 법무부와 검찰이 샅바 싸움을 하고 있던 시기에 내가 '정치 장기판'을 혼자 들여다보며 생각해 낸 것이다.  

 

안타깝지만 조국을 장기판에서 빼고,  법무장관에 윤석열을 갖다 꽂는거야. 그리고 윤을 제대로 한 번 써보는거지.  어차피 조가 여기저기 먼지가 묻어서 쓸수 없는 패라면, 윤이라는 칼을 제대로 한 번 쓰는거야.  한 번 쓸 칼이긴 하니까.  사냥개에게 제대로 사냥터를 열어주자 이거지 뭐.  본래 명견이나 명마는 주인을 가리는 법이다.  윤석열은 어떤 면에서 아직 '주인/파트너'를 못 만난 외로운 명마나 명견 같은데가 있다.  그래서 혼자 고삐 풀린 것처럼 저러고 있는거지.  그를 비난하면 안된다. 그를 잘 써야하는거지.   윤을 무조건 패 죽이려고 하면 우리가 가진 자원의 낭비다.  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의 쓰임새는 딱 거기까지라는거다.  

 

조가 이쁘다거나 윤이 이쁘다거나 그런 얘기가 아니야. 난 둘 다에 별 관심 없고, 누가 무슨 짓을 해도 심드렁한데, 내가  장기를 둔다면, 이 난국에 이런 수를 써볼 수 있다는거지. 하지만 뭐 누가 내 의견 따위에 귀를 기울이겠냐구.  멍멍.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19. 10. 16. 12:16

이틀전 (10월 14일) 오후에 동시에 발견했던 두가지 뉴스 

 1. 법무부장관 사퇴

 2. 설리 사망

 

이 뉴스는 어찌보면 동일한 내용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수업마치고 앉아서 쉬다가 문득). 

 

물론 법무장관이었던 조국은 죽지 않았다. 나는 그와 그의 가족이 안녕하기를 희망한다. 전두환과 그의 일가족도 잘 살고 있고, 역대 군사정권 앞잡이와 그 가족들도 한국에서 미국에서 떵떵거리고 잘 살고 있는 마당에 말이다. (내가 미국에서 살때, 내 친구가 성당에서 어떤이를 가리키며 저이가 정아무개 장군 여식이라고 알려준 적이 있다. 그들은 바퀴벌레들처럼 번식하며 잘 살고 있다.) 

 

설리는 죽었어도 그 죽은 사망기사에도 악플이 지속되고 있고, 조국은 장관 그만두었는데도 여전히 그에대한 악플이 범람하고 있다.  설리에 대해서 혹은 조국에 대해서, 그 일가족까지 포함하여 아주 부관참시라도 하려는 것 같다.  "이들이 한국사람 맞나?" 의문이 들 정도다.  정많고 한많은 한국인들이 아니었나? 나의 한에 비쳐 남의 한을 들여다보고 그러는것 아닌가?  조국이, 설리가 죽을 죄라도 진걸까?  너는 털면 아무것도 안 나올것 같은가?

 

나는 심지어 이런 생각도 했었다.  '만약에 내가 장관 후보가 된다면,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을 내 사생아까지 찾아내어 내 품에 안겨줄것이고...  덕분에 나는 없던 딸자식까지 하나 덤으로 얻게 되는게 아닐까?  유명 남자배우가 내 연인으로 둔갑을 하는게 아닐까?  웬 떡이야 해야 할 판이겠다.'  그러나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장관 후보가 될 일이 없을테니 털릴 일도 없으니까.  미남 배우를 연인으로 갖게 될 일도 없어지는거지. (한숨). 옛날에 나는 안성기 오빠를 좋아했는데, 요즘은 딱히 좋아하는 배우도 없다... (또 한숨).  정우성님이 잘 생기신것 같다. (한숨.) 

 

한달에 일억씩 쳐 주고 입원해 있는 죄수는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는게 어떠한가? 지가 지 돈 쓰는데 내가 뭐랄건 없지만, 인심이 사나워지니 나도 물이 들어 인심 사나운 소리 한번 지껄인다. 쳇. 퉤퉤. 

 

아, 점심 먹으러 나가기 귀찮아서, 배는 고픈데, 잡설. 

 

 

 

 

 

 

 

 

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9. 10. 15. 19:34

설리

 

어제, 퇴근후 무심코 열어본 스마트폰 뉴스채널에서 두가지 뉴스를 동시에 발견했는데, 법무장관의 사표 소식과, 연예인 설리가 사망한것 같다는 보도였다.  내가 먼저 클릭한 것은 설리씨의 사망에 관한 뉴스였다.  아니, 그 꽃같이 예쁜 아가씨가 정말로 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인가?  

 

법무장관이야 누가 하거나 말거나, 결국 누군가 할 것이고, 세상은 뭐 이럴때도 있고 저럴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리'를 대체할 자가 누구란 말인가?  아무도 그를 대체할 수 없으니, 설리를 잃은 것은 참 슬픈일이다.

 

나는 이 사람에 대해서 잘 모른다. 이 사람이 한창 연예인으로 활동을 하던 시절에 나는 미국에서 내 터전을 쌓느라 분주했고, 내가 한국에 돌아왔을때 그는 왕성한 시기를 지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왕성한 가수 활동을 계속 했대도, 쇼프로를 보지 않는 내게는 결국 마찬가지로 눈에 안띄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가 내 눈길을 끈 것은, 어느 화장품 회사 모델로 나온 그의 모습이 너무나 독보적으로 상큼 발랄, 요정같이 산뜻해서 '저이가 누군가?' 궁금해하다가, 그의 이름이 '설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그것 외에 나는 그를 잘 모른다.  이따금 가십성 기사에서 그의 일상 사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는 정도였는데, 어쩌다 보이는 가십성 기사의 사진 속에서도 그는 '요정'처럼 여전히 아름다워서, '이렇게 요정 같이 산뜻, 풋풋한 아가씨라면 뭘 해도 사랑스럽겠다'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내가 평생에 처음으로 아주 빨간 (오리지날 빨강) 립스틱을 하나 마련한 것도 순전히 '설리'가 빨간 립스틱을 발랐을때 단지 그냥 립스틱만 바른 것 뿐인데도 그가 너무나 요정 같아 보여, 나도 모르게 홀려서 나도 빨간 립스틱을 집어 들었던 것이지.  물론 내가 설리의 빨간 립스틱을 아무리 바른대도 절대 절대 설리의 사랑스러움을 먼지만큼도 얻어 올 수 없음을 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이 상큼한 스물다섯 아가씨가 이 투명한 가을날, 그렇게 가볍게 세상을 떠나버리다니.  세상에서 다시 보기 힘든 꽃 한송이가 문득 사라진 것같아, 영 아쉽고 안타깝다.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래도 상실감이 문득 찾아온다.  그 예쁜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다니...  

 

그래서 나는 생각해보았다.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무조건, 무조건, 사람에게 친절하자.  그 사람이 나때문에 상처받지 않도록 조심하자.  그리고 무조건 응원해주자.  그가 내 응원에 마음을 돌이킬지도 모르지 않은가? 죽음에서 삶으로.  좀더 적극적으로 친절하고, 좀더 적극적으로 편이 되어주자.  너무 슬퍼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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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19. 10. 3. 13:27

 

 

요즈음 대통령의 아들이 자신에 대한 공격적인 뉴스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피드백을 보내고 있다.  역대 대통령 자식들과는 약간 다른 행동이다.  나는 누가 얼마나 정당하고 옳은지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어딘가 속이 후련한 기분이 든다는 것만 말하고 싶다. (어딘가 나의 한풀이를 하는 듯한 기분이다.)

 

 

물론 나는 유명인의 자식이 아니다. 내 아버지나 어머니가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의원이나 뭐 재벌이나 그런 대단한 사람들은 아니셨다.  그냥 평범하고 착한 이땅의 가장이며 부모로서 자식들을 열심히 키워내신 분들이다.  그런데, 설령 내 아버지가 '아무것도 아닌 어떤 사람/가장'이라고 해도 그에게도 분명 어떤 '직장'이 있었고, '직책'이 있었고 국가에서 주는 훈장도 받고 그러셨다.  아버지가 받으신 훈장이 뭐였더라?  한 개인이 어떤 전문분야에서 평생 일을 하면 정년기에 이르렀을때 국가가 그 노고를 인정하는 무슨 '꽃'이름이 들어간 훈장이다. 목련인지 무궁화인지 라일락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소시민인 내 아버지의 이름이 학교에 들어서는 순간 나를 따라다녔다.  어딜 가나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 "얘, 너희 아버지 *** 이시지?  내가 네 아버지하고 동기다 (친구다, 함께 근무했다, 등등) 너, 아버지를 많이 닮았구나. 한 눈에 알아보겠다. 공부 잘하지?"

 

 

어딜가나 그 모양이었다. 내가 '어딜가나' 할 때, 그게 기껏해야 학교 언저리이지 뭐 내가 어딜 돌아다녔겠는가.  어쨌거나 나는 아주 불편했다. 도처에서 '내가 네 아버지하고 잘 아는데....'하는 사람들이 나를, 나의 행동거지를, 내가 친구들에게 막 욕지거리 퍼부으면서 거칠게 놀고 있는 것을, 내가 지각하는 것을, 그 모든 것을 샅샅이 아버지에게 '고자질' 할 것 같은 께름칙한 느낌 속에서 초중고대학교 시절을 보냈다. 16년간의 나의 학교 생활은 늘 주변을 살피고, 누가 나를 보고 있는지 아닌지, 내가 하는 못된 행동이 아버지 귀에 들어갈 것인지 말것인지 늘 그걸 두려워하고 주눅들어 있었다. 

 

 

초중고등학교에 다닐땐, 내가 애국조회 시간에 단상에 올라가서 뭔가 근사한 상을 받는 '우수한 학생'이 아닌것이 아버지께 미안했다. 그는 별로 신경을 안쓰고 있었지만 말이다. (사실 아버지는 나 따위의 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도 없었다. 나 혼자 미안했을 뿐이다.)  대학은, 내가 가고 싶은 학교에 가지 못했는데, 아버지가 그리 가라고 해서 그냥 그리 갔다.  거기는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대학에는 도처에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이 쫙 깔려있었으니까. 나는 숨도 쉬기 어려웠다.  물론 숨도 쉬고, 웃고, 장난도 하고 그랬다. 하지만 자유로웠던적은 없었다.  나는 '착한 어린이'로만 살려고 노력했다.  그래봤자 우리 아버지는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지만 말이다. 

 

 

단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체면을 구기는 자식이 되고 싶지 않았다. 뭐라도 한마디도 실수를 해서 아버지의 명예에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전력을 다해서 아버지의 명예를 지켜드리려고 했다.  아버지는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지만 말이지. 

 

 

아버지는 내가 선택해서는 안되는 직장, 장소도 분명히 못을 박았다. 자신이 평생 일군 영역에 대해서는 그쪽으로 머리도 돌리지 못하게, 발 그림자도 들이지 못하게 못을 박았다.  애비 직장 근처에 자식이 기웃거리면 '불명예'이고 '쪽팔리는' 일임을 누누히 귀에 못이 박히게 주장하셨다.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아버지와 동일한 계통의 직업과는 38선 철책보다 무서운 담장을 쌓았다.  헹! 그 쪽으로는 기침도 안할테니 걱정 마시라!  이게 자존심 강한 나의 입장이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고 아직 살아계신다면 -- 나는 대학교수 직업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격렬하게 앞장서서 방해를 했을것임이 분명하니까. 

 

 

 

유명인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의 자식으로 사는 것은 -- 누군가에게는 '아빠 찬스' 패를 쓸수 있는 행운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족쇄'나 '수갑'같은 것일수도 있다.  생각해보자. 대통령의 자식도 그가 성인이면 이 나라의 시민일 뿐이다. 그는 직장도 가져야 하고, 일도 해야 하고,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생활인으로 살아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대통령의 아들이기 때문에, 며느리 이기 때문에, 딸이기 때문에 숨을 죽이고 할말도 못하고, 욕을 먹어도 엎드려 있어야 하고, 이런 사회라면 이게 정상적인 사회라고 할 만한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어느 아버지의 딸로 사는 동안에도 숨이 막혔다. 할말을 못했고, 기를 펴지 못했다.  아버지가 나 때문에 망신스러우면 안된다는 그 한가지 생각으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단 말이다.  

 

 

좀 엉겨붙지 좀 말라. 숨 좀 쉬게 내버려 두라.  행패부릴데가 그렇게 없는가? 정말로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들여다보고 고통겪는 사람들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고민해야 할 시간에, 기껏해야 별 것도 아닌 사람 하나에 올가미를 매려 드는게 온전한 것인가? 그게 국회의원이 할 짓인가?  정말 지긋지긋하다.  대통령의 자식도 할 말은 편안히 하고 사는, 그냥 편안한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내 아버지는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삼성장군도 아니셨지만, 내가 겪었던 고통으로 다른 자식들을 들여다본다. 

 

할말은 하고 살자. 당신/우리/나는 쥐새끼가 아니다. '사람의 새끼'이다.  쥐죽은 듯이 엎드려 있기보다는, 사람처럼 일어나서, '사람의 말'을 하고 살자. 

 

 

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9. 10. 2. 19:09

연구실에서 쌓인 일을 '전투 모우드'로 해 치우고 있는데, 이슥한 저녁, 여학생 한명이 찾아왔다. 내 연구실은 대체로 문이 반쯤 열려 있으니 와서 기웃거린다. 

 

"왜?" 

 

나는 마치 시골 가겟방을 지키는 아주머니가 무심한 표정으로, 문지방을 넘어 들어서는 동네 아이를 대하듯 묻는다. 

 

 

"교수님, 혹시 우산 있으세요? 밖에 비와요." 

 

비가 오겠지. 태풍 미탁이 상륙 했다고 하니, 밖에 비가 오겠지. 그 학생이 학교 근처 오피스텔에서 지내면서 걸어서 통학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운전하며 외출하는 길에,  걸어가는 그 학생을 몇차례 본 적도 있다.  나는 그냥 턱짓으로만 문앞 의자 옆에 세워져 있는 우산을 가리킨다. 

 

 

"저깄다."

 

"저 써도 돼요?"

 

"응" 

 

"그럼 교수님은 비오는데 어떻게 하세요?"

 

"난 그냥 비 맞으면 된다." 

 

"어머! 그러면 제가 못 빌리지요....전 교수님이 우산이 여러개 있는가 보러 왔지요." 

 

"너를 비를 맞게 하느니, 내가 비를 맞고 말지. 너는 나의 소중한 학생이니까." 

 

나는 빙글빙글 웃는다. (거짓부렁이라는 뜻이다.). 비가 온들, 나는 사실 비 맞는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나는 후드셔츠를 입고 있고, 내가 연구실에서 숙소로 달려가는 길은 정말 짧다. 비를 맞을 거리는 더 짧다.  그런 이유로 나는 우산을 세워 놓을 뿐, 웬만한 비는 그냥 맞고 돌아다닌다. 

 

 

학생은 내 우산을 들고 연구실을 떠났다. 

 

나는 다시 일을 한다.

 

문득, 비오는 날 내 생각을 해 낸 그 학생 얼굴이 떠오른다. 비가 올 때, 우산이 필요할 때, 나를 떠올렸다니 내가 그에게 영 나쁜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누군가에게 우산을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라면, 나 아주 실패한 인생은 아닌것도 같다.  우산을 빌리러 온 내 학생이 우산보다 더 큰 위안을 내게 준것도 같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명예라는 것도 없어진지 오래고, 시정잡배와 다를 바가 없는 오늘날의 대학교수라는 직업.  나는 감히 학생들이 나를 존경해주길 바라지 않는다.  내가 학생들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도 나 스스로 의문스럽다. (나는 엉망이다.  인정한다.)  그냥, 비가 오는 날 우산이 필요할 때, 혹은 손을 다쳐서 위로가 필요할 때, 그럴때, "교수님, 저 우산이 없어요. 교수님, 저 손을 다쳤어요" 뭐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일로 내게 말을 걸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내 사명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스무살 친구, 넌 내게서 우산을 얻었고; 나는 너에게서 위안을 얻었다. 

 

 

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9. 9. 27. 16:19

연세대학교 류석춘 교수가 사회학 강의중 '위안부'가 자발적 매춘 제도였다는 강의를 했다고 하는데  내가 역사 전공자도 아니고 사회학 전공자도 아니지만,  내 증언은 남길수 있다.

 

 

우리 엄마가 1935년생이다. 광복되던 해에 만 10세 어린이였다는 말씀이다. 육이오는 엄마가 15세에 발발했다. 엄마는 우리가 어릴 때, 당신의 어린 시절 '왜정'때 얘기며, '소학교' 다니던 시절 얘기며 '피란'가던 얘기를 아주 생생하게 들려주곤 하셨다. 엄마가 우리에게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하여 거짓부렁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엄마가 '왜정'때 겪은 얘기 중에 '정신대' 얘기도 있다.  지금은 '위안부 (Comfort Women)'으로 표기하지만 엄마는 왜정때의 말인듯 '정신대'라는 말을 쓰셨다.  엄마의 증언은 대략 이런 식이었다:

 

 "왜정때, 느이 이모 (너희 이모)도 일찍 시집을 갔어. 처녀들을 왜놈들이 정신대로 잡아갔거든. 그래서 처녀들 정신대로 끌려갈까봐 빨리 시집을 보내는 집에 많았어.  새댁들도 멀리서 왜놈 순사가 보이면 정신대 끌려갈까봐 얼굴에 검정 재를 칠하고, 여자들을 헛간에 숨기고 그랬어. 정신대 끌려가면 죽는거야.  어린 나도 느이 외할아버지가 '저기 순사온다!' 그러고는 얼굴에 재를 검게 묻혀가지고 숨기고 그랬지."

 

이것이 경기도에서 식민지 시절에 성장한 여성, 우리 엄마의 무한 반복되던 증언이다. 어릴때  '왜정' 얘기와 '육이오'얘기를 하도 실감나게 들어서 마치 내가 경험한 것 같은 공포를 느낄때도 종종 있었다. 

 

 

위안부가 자발적 매춘 행위였다고?  혹시 류모 교수 엄마나 가까운 가족분들이 자발적으로 일황에게 충성하기 위해서 몸을 바치셨던 드라마틱한 가족사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경기도 일원에서 성장한 사람들 얘기는 류모씨의 얘기와는 참 많이 동떨어져있다. 류교수라는 분은 혹시 개인적으로 가족사에 그런 그림이 있었던 것을 일반화 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진다.  만약에 그것이 류교수 가족의 문제였다면 자발적으로 일본에 애국하기 위해서 위안부의 길을 걸어간 그분들에 대하여 역시 슬프게 생각한다. 류교수 힘내고 당신 가족중에 그런 분들을 많이 위로하시라.  그러나 일반화는 하지 말기 바란다.  부끄러운줄 아시라.  아주 옘병을 해요, 옘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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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etch2019. 9. 27. 15:54

엄마 집에 있던 김치 냉장고가 작동을 멈췄다. 그 자리에 있은지 십년도 넘은 것이고, 형제 중에 누군가가 쓰던걸 엄마한테 넘긴 것이라고 하니, 수명이 다 할법도 할 것이다. 그 김치 냉장고는 내가 기억하는 한 고대의 시간부터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내 집에서 김치냉장고를 가져 본 적이 없어 그것이 왜 필요한지 그것도 잘 모른다.  김치를 많이 먹지도 않으니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이런 내 시선으로 볼 때, 엄마 집에서 김치 냉장고가 사라진대도 별로 상관이 없어 보였다.  엄마 집 냉장고는 우리집 냉장고보다 두배쯤 클 것이다.  사실 엄마의 김치 냉장고에 김치가 많이 들어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창고'처럼 이것저것 구겨 넣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래서, 그냥 그 김치냉장고를 내다버리고 덕분에 넓어진 주방을 향유하시면 되는 일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쩐지 엄마는 고장난 것이라도 그냥 끼고 살고 싶은 표정이었다.  노인들은 뭘 버리는 것을 무척 섭섭해하신다.  그래서 살살 달래며 이리저리 물어보니, 그 자리를 비게 놓아두면 안되고, 그러면 추석 명절에 자식들이나 손자 손녀들이 드린 용돈이 꽤 된다며 그것으로 김치냉장고를 하나 사면 되겠다고 하신다.  어딘가 마음이 아려온다.  엄마가 왜 돈이 없지? 엄마가 왜 손자 손녀들이 드린 용돈을 모아서 살림을 사실 생각을 하시는거지? 그렇게 돈이 없었어? 왜? 여러가지 의문이 든다. 엄마가 구차스럽게 살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형제들 사이에서 중론은, 지금 엄마 냉장고만해도 충분히 크니까 김치냉장고가 딱히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었다.  김치냉장고 내다 버리고 그냥 냉장고로 생활해도 불편할게 없다는 것이다. 내 생각도 동일했다. 

 

그런데, 

 

꼭 사지 않아도, 언라인으로 외국 유명 패션 브랜드의 신상품 카탈로그를 보거나 패션쇼를 보는 일은 눈요기만으로도 즐겁다. 그리고 그걸 구경하다보면 하나 사고 싶다는 허망한 욕망이 질기게 들러붙기도 한다. 모 패션브랜드의 가을 카디건 한장에 백만원도 넘는 것을 눈요기로 구경하다가 문득, 저게 한 오십만원이라면 내가 그냥 눈 질끈 감고 사지 않을까? 왜냐하면, 갖고 싶으니까.  백만원이 넘는 지갑 한개를 침 흘리며 들여다보다 생각한다 - 나 기분 내키면 저것도 지금 당장 살 수 있는데...

 

그러다 문득, 엄마의 김치냉장고 생각이 났다.  노인 살림에 어마무시한 김치냉장고도 필요없고, 엄마가 원하는것은 그냥 박스형 단촐한 것인데. 그거 얼마나 하나? 검색을 해보니 예쁘장한 것이 육십만원 정도면 되는 정도다. 

 

만약에 엄마가 어느 백화점 가방가게 앞을 지나치다가 이쁘장한 육십만원 짜리 가방을 가리키면서, "저것 이쁘구나. 나 저것 갖고 싶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나는 두 말 않고 그것을 사 드릴 것이다. 나라면 돈 아까워서 안 사도, 엄마가 사달라면 예쁜 가방 기꺼이 사드린다.  쓸데도 없는 가방을 말이다.  그런데, 엄마가 김치 냉장고를 내다버리고 나면 허전하니 그 자리를 김치냉장고 자그마한 것으로 채우고 싶다는데, 내가 왜 그것을 '필요하지 않다'고 단정지어 버린것인가?  예쁜 옷은 꼭 필요해서 사는가? 그냥 예쁘니까 산다.  내가 신발이 없어서 기십만원 짜리 구두를 사나? 아니 그냥 그 구두가 예뻐서 갖고 싶어서 산다.  명품 가방은 필요해서 사는가? 아니, 그냥 그게 갖고 싶어서 갖는거다.  그러면 김치냉장고는 반드시 필요해야만 사는가?  그것도 엄마가 갖고 싶다고 하면 사드리면 되는거다.  

 

그래서 나는 언라인으로 엄마가 갖고 싶어하시는 자그마한 김치냉장고를 주문하여 엄마 주소를 찍어 보냈다.  그러고나니까 머릿속이 맑아졌다. (사람이 돈을 쓰면 잠시 잠깐 마약 효과가 나는것 같다. 머리가 맑아지고 가벼워진다. 하하하.)  나는 왜 내가 좋아하는 패션 용품은 돈 아까운줄 모르고 사면서, 엄마의 생필품인 김치냉장고를 단지 '냉장고 넓으니 그것이 따로 왜 필요한가?' 이런 꼬리표를 달고 필요없다고 단정한건가?  

 

내가 무엇이 필요하다/불필요하다고 판단할 때, '실용성'의 측면이 아니라 '애장품'의 측면에서 바라보니 그림이 전혀 달라진다. 엄마 옷 오십만원짜리는 망설임없이 사 줄수 있으면서, 김치냉장고는 왜 그렇게 매몰차게 '필요없다'고 말하는가?  그걸 엄마가 좋아하는 옷이나 가방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인데.

 

그래서, "엄마, 곧 김치냉장고가 갈거야. 빨간색 예쁜 김치냉장고가 갈거야"하고 전화를 드리니 어린아이처럼 기쁘게 반기신다. 저렇게 좋아하시는걸 내가 그냥 지나칠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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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or2019. 9. 25. 08:59

공 작가는 "그의 요청으로 동양대에 강연도 갔었다"고 진 교수와의 친분을 언급하면서 그에 대해 평가했다. "실은 고생도 많았던 사람이었다. 좋은 머리도 아닌지 그렇게 오래 머물며 박사도 못 땄다"는 것이 공 작가의 평가다. 이어 그는 "사실 그(진 교수)의 논리라는 것이 학자들은 잘 안 쓰는 독설"이라며 "그의 단정적인 말투와 거만한 가르침을 보며 똑똑한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고 깎아내렸다.

[출처: 중앙일보] 공지영, 진중권에 독설 "좋지 않은 머리···돈주면 개자당 갈듯"

 

 

심했다. ABD라고해서, All But Dissertation - 과정은 모두 마쳤는제 학위 논문을 아직 쓰지 못한 상태를 가리키는 타이틀이 있다.  박사학위 공부를 모두 마치고, 마지막 관문인 학위 논문을 해결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많이 있다. 문제의 '진교수'도 아마도 그런 분들중 한분일 것이다.  그러면, 그분들이 '좋은 머리가 아니라서' 박사학위를 마치지 못한걸까?  소설가라는 분이라면 소설적 상상력으로 뭔가 한 사람이 학위를 마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기발한 상상도 할 수 있으련만, '머리가 좋지 않아서'라니. 이건 너무 심심하고 단순하지 않은가? 

 

 

내가 박사학위 공부 할 때, 내 주위에는 온통 '천재'들만 있는 것 같았다. 왜 아니겠는가. 대체로 본국에서 '국비장학생'으로 미국에 와서 공부하던 아주 젊은 친구들이었는데다가, 정말 머리들이 좋아서 학술저널 한번 쓱 보고는 수업중 토론할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나는 오직 '시간'을 들여서 사전 찾고, 읽고, 또 읽고, 줄치면서 읽고, 요약해보고, 그래도 정작 수업에 들어가면 생각이 잘 안나서 천재같은 동기생들이 교수와 진지하게 토론 하는 것을 옆에서 침 삼키며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 잘난 내가 그랬단 말이다.)

 

 

나는 정말 내 동기생들을 존경했다. 진심으로.  그래서 그들을 졸졸 따라다녔다. 똑똑한 천재들 속에 끼어 보려고.  물론 그들은 기꺼이 나를 '친구'로 인정해 줬는데, 그것은 내가 인심 좋게 가끔 한국식 김밥도 싸가지고 가서 나눠먹고, 순전히 '아줌마' 특기로 그들의 환심을 사거나, 그들이 아직 어려서 '창의력'이 부족한 부분을 나의 '관록'과 '이력'과 '경력'으로 채워서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거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평범한 아이큐의 소지자였고 (딱 대한민국 평균 아이큐이다), 그들은 국가대표 천재급 신동들이었다.  내가 석사로 들어갔을때, 그들은 박사학위과정으로 입학을 했다. (유펜 이런 명문대에서 석사 마치고 옮겨오고 그랬다.) 그러면 내가 출발선이 그들보다 한단계 늦지 않은가?

 

 

그런데 학위는 내가 제일 먼저 땄다. 나는 석박사 하는데 4년 걸렸고, 내 동기생들은 박사 하나 하는데 5년 이상 걸렸다. 내가 그들보다 머리가 월등하게 좋아서가 아니었다.  머리는 그들이 나보다 훨씬 좋았다. 영특했다. 나는 항상 그들을 존경했다. 

 

 

내가 머리 한참 좋은 내 동기들보다 진도를 빨리 뺄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간절함이다. 간절함. 간절함. 간절함.  목숨걸고 공부를 해 내는 간절함 같은게 내 삶을 지배해서다. 그냥 그 간절함으로 주변을 움직여 나간것 뿐이다.  오직 학점과 내 연구 과제에 촛점을 맞추고, 거의 모든 시간을 도서관에서 살면서, 그냥 공부와 연구작업만 들이 판 결과다. 

 

 

머리 좋은 내 동기생들이 방학이면 고국에 가서 쉬다 온다거나, 라스베가서, 뭐 비행기타고 미국 '명승지'에 놀러다닐때, 나는 텅빈 도서관에서 공부만 했다. 천재같은 동기들과 '경쟁'을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나보다 잘났다. 경쟁 대상이 아니다.  그 대신 나는 시간과 경쟁을 하고 있었다. 빨리 학위를 마치고, 나를 기다리는 가족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절실함. 그것만이 나를 지배했다. 

 

 

내가 존경하던 내 친구들은 미국의 이름있는 주립대의 교수로 가서 활동을 잘 하고 있다.  나도, 먼 길을 돌았지만 결국 내가 향하던 곳에 이르렀다.  나도 내 계획대로 잘 지내고 있다. 

 

 

나는 지금도 나보다 한참 어린 내 동기들을 존경한다. 그들이 박사학위를 나보다 길게 한참 한 것은 그들이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었다. 나는 절실했고, 내 논문에 필사적이었고, 그들은 넓게, 깊게 학문의 바다에서 헤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니, 그들의 학문의 깊이가 나보다 훨씬 깊었을 것이다. 

 

 

지향성의 문제다. 어떤 사람은 학위논문까지 가지 않기도 한다. '이만하면 족하다'고 스스로 그 쯤에서 정리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사람 '머리가 안좋아서'라고 말 할수는 없다. 박사공부에 입문했으나 학위를 마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각자 이유가 있다.  정말로 재수가 없어서 이상한 지도교수 아래에서 고생만 죽어라 하다가 물러 났을수도 있고,  혹은 중한 병에 걸려서 퇴장을 하기도 한다. 그냥 어디쯤서 힘이 빠져서 학위 논문 대신에 다른 길을 선택 할 수도 있다. 이 사람들이 모두 '머리가 안좋아서' 그런 길을 가게 된 것은 아니다. 

 

박사학위...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미국이건 한국이건 간에 박사학위는 빼어나고 영특한 지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좀 평균 수준의 아이큐를 가지고, 꾸준하고 성실하게 공부와 연구를 하고, 마지막 관문인 논문만 써내면 되는 것이다.  박사학위 논문 안쓰고 수료만 하신 분들중에 정말로 머리가 뛰어난 분들 많다.  그래서 나는 가끔 '박사학위'를 가지고도 나는 왜 이것밖에 못하고 사나? 이런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학위 논문을 잘 써내는 '성격'의 사람이 있고, 두루 넓게 공부하는 '성격'의 사람도 있고 그런 것이다. 

 

 

진교수가 박사학위가 있는지 없는지 나는 알지 못했지만, 우리집에도 그가 지은 미술 교양서적이 많이 있다. 대체로 잘 쓴 책 들이다. 그거면 족하지 않은가? 그렇게 좋은 책들을 써낸 사람을 향해서 '머리가 안좋아서'라고 말한다면, 도대체 책 한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리지 못한 사람들은 다 나가서 죽으란 말인가?  머리는 왜 들먹이는가? 비난하고 싶으면 좀 우아하게 하면 좋을텐데.

 

 

그나저나, 진교수 요새 죽을 맛 이겠다. 이분은 소속 정당에서 나가고 싶을 뿐 아니라, 소속 직장에서도 나가고 싶으실것 같다. 아예 지구를 떠나고 싶을 것도 같다. 참 ... 이게 뭐냐 싶으시겠다.  그 한심스러운 상황에 깊이 공감한다.  어지러운 세상이다. 

 

* 진교수, 영어 되시면 나도 내 클래스에 특강 부탁드려보고 싶다.  영어 강의만 가능한 곳이라서, 난관이 있긴 한데...그냥 유창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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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etch2019. 9. 16. 13:07

 

 

어느장관의 자녀로 인해 대한민국 수시입학과, 힘있고 돈있는 이 사회의 부모들의 넘치는 후계자 사랑이 도마위에 올라있다. 뭐,  장관 따님의 입학 서류는 5년 기한이 지나 모두 폐기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검찰이 알아서 조사할 일이고, 사실 그 일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다.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그냥, 좀, 궁금해진다.  최근 5년 사이에 한 해를 정해서, 그 한해에 서울대학교에 수시 입학한 학생들 서류를 싹 다 조사를 하여, 특히 학계, 재계, 언론계, 정계, 관계, 기타 힘쓰는 부모들 슬하의 자녀들 중심으로 이들의 스펙이 서로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연구를 하는거다. 빅 데이타 연구자들 몇 명 투입하면, 관계도가 나오지 않겠는가? 

 

문제가 발견되면, 5년 데이타 다시 조사하고, 각 '인기있는 대학'으로 조사를 확대해 나가는거다. 자식가진 죄인으로 넘쳐나는 기묘한 사회.  힘없는 부모를 가진 청소년들도 공평하게 기회를 가질수 있는 사회를 구축하는 일이 참 요원해보인다. 

 

나 역시 자식 가진 죄인이니 뭐라고 입도 뻥긋 하지 못할 처지이긴 한데, 그래도...나는...내가 근무하는 대학에서, ESL 프로그램 책임자로 있으면서도, 가끔 자식 데려다가 학교 일도 막 시켜 먹었으면서도,  내 자식 인턴 따위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하러들면 왜 못하겠나.  상장도 만들어 주러들면 왜 못하겠나.  하지만, 그건 참 비루하고, 염치없고,  남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걸 그렇게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할 수 있다니...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다. 그냥 바보로 남기로 하자, 기왕에 이렇게 된거.)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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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9. 5. 21. 12:24

 

Daniel Pink 의 'When' 이라는 책을 보면, 미래시제가 분명한 언어권 (예: 영어, 한국어)의 사람들과, 미래시제가 분명치 않아서 (예, 중국어) 현재 시제가 상황에 따라서 미래로도 해석이 가능한 언어권 사람들이 행동 패턴에 약간 차이가 보인다고 한다.  핑크는 '언어'가 행동 패턴에 영향을 끼친다기보다는 그들 문화권의 행동 패턴이 '언어'에도 반영된다는 식으로 그 상관 관계를 설명했다.  (언어가 행동을 결정하는가  환경이 언어에 영향을 끼치는가는 해묵은 언어학계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어쨌거나.)

 

 

이 '미래시제'의 있고 없고가, 그 언어권 사람들이 '미래'를 준비하는 행동 패턴에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얼핏 생각하기에 '미래시제'가 있는 언어권에서 '미래'에 대한 준비를 체계적으로 준비 하는게 아닐까 그런 상상을 했었는데 (내가 책 읽을때 그런 상상을 했었다), 결과는 정 반대였다.  현재시제 안에 미래시제까지 뒤섞인 (미래 시제가 분명치 않은) 언어권의 사람들이 그들의 '노후대책'에 더 열심이라는 통계치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언어속에서 현재와 미래가 혼재되어 있는 문화권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먼 남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라는 것이다.  미래를 '미래'의 일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언어권 사람들이 미래 계획에 방심 한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현재 닥친 일이 아니니까. 

(예수님은 내일 일은 염려하지 말아라. 오늘 하루의 근심으로 족하다 뭐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고민에 빠진 나.)

 

흔히 '비단이 장수 왕서방'은 '돈을 밝히는 사람'으로서의 중국인을 칭하고, '중국인들은 현실적이다'라는 통념도 있는 편인데, 아마 이들의 '현실적인 사고방식'이 '재물을 축적하는 것에 열심인' 태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에게 '미래'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말이 잊었노라 노래 할 수 있는 먼 훗날이 아니고, 현재의 일이므로, 미래의 현재를 위해서는 지금 당장 돈을 아끼고 돈을 모아 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또다시, 사고를 확장시켜 생각을 해본다.

 

 

죽음을 미래의 별개의 사건으로 상정하고 오늘 하루를 사는 사람과, 오늘 하루 '죽음'을 함께 사는 사람의 삶의 패턴도 다를 것이다.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과, 죽음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이 사는 사람은 분명 다른 삶을 살 것이다.  나는 어떤가?  나는 미래에 대한 준비도 별로 안하고 오늘 하루 살고 마는데, 왜냐하면 내일 아침에 내가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에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는데 왜 내일 걱정을 해야 하는가?  이런 사고 방식은 뭐지?  내 하루에는 죽음이 깃들어 있는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9. 5. 19. 06:06

내가 세례받은 미국 감리교 예수쟁이이긴 한데, 다닐곳이 마땅치 않아서 고민고민하다가 괴상한 한국 감리교에 다니고 있기는 한데, 결국 내가 늘 갸우뚱하며 회의적으로 쳐다보던 그 교회에서 일이 터졌다. 

 

내가 소속한 교회를 '괴상한 한국 감리교회'라고 말하는 나도 내가 한심하다.  왜 그런델 다니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한국 교회 거기서 거기이고, 눈 씻고 찾아봐도 다 거기서 거기라서, 에라 모르겠다 나는 기도하고 예배 드릴 '장소'가 필요하니 '기도'하고 '예배'드리러 간다는 차원에서 다니고 있다는 변명을 늘어 놓을 수 밖에 없다.

 

지난해 연말에는 나보고 착실하고 성실하게 다닌다고 (매일 새벽예배 나가고, 일요일 예배에 빠짐없이 나가고 헌금도 착실히 하니까) '집사' 안수를 준다나 뭐라나 하는데, 내가 "I am fine, thank you." 이러고 '고사'하고 말았다.  심리적으로 나는 그 교회와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인데, 내가 그 교회와 거리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구체적인 이유는 - 그 교회를 세운 목사님이 떠억하니 자기 사진을 교회 앞 입간판에 걸어놓고 무슨 가겟집 주인아저씨 같이 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촌스러운 교회를 다닐수 밖에 없는 이 불쌍한 성도를 예수님 굽어 살피소서).  나는 그 가겟집 주인아저씨 같은 목사님이 보기 싫어서, 그분이 설교하지 않는 일요일 이른 아침 시간에 (젊고 정직한 부목사님이 설교하는 시간에) 예배드린다. 그게 내 생존 전략이다. 

 

내가 그래도 그 교회를 다니는 이유는, 조만간 가겟집 주인아저씨같은 초대 목사님이 은퇴한대서, 그러면 물갈이가 되려나, 나도 좀 제대로 예배드릴수 있게 될까 (목사를 피해다니는 것도 피곤한 일이니까) 뭐 그런 희망을 가지고 참을성 있게 기다려 온 것이지. 그래서, 아무튼 얼마전에 그 가겟집 주인아저씨같은 목사님이 명목상 은퇴라는걸 교회법에 따라서 하긴 했는데, 뭐 곳간 열쇠를 여태 틀어쥐고 내 놓지를 않는다고 한다. (내가 너 그럴줄 알았다. 아 처음부터 맘에 안들더라...뭐 이러고 만다.) 

 

뭐 최근에는 민주적 직선제 시스템으로 교회 신도들이 '국민투표' 형식으로 차기 담임목사님 선출을 위한 선거를 했는데, 70퍼센트 이상 득표한 부목사님에 대한 목사 승인 절차가 교회 인사위원회에서 부결이 되었다고 교회가 난리가 났다. 당회 한다고 나오라고 해서 가봤더니 싸움이 벌어졌다. 간단히 원로목사파와 원로목사가 사라지기를 희망하는 계파간에 전쟁이 난 모양이다. 나야 처음부터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며 예수님께 기도드리러 교회를 드나들던 사람이라 그냥 건성으로 구경을 하는 편인데, 전체적인 구도를 보면 - 그 가겟방 주인아저씨 품격의 초대 목사님이 아무래도 '이걸 내가 어떻게 세운 교회인데!!!' 뭐 이런 미련을 가지고 몽니를 부리고 자빠져 있는 형상이다. 

 

그래도 상황이 좀 딱해서, 70퍼센트 이상의 득표를 하고도 구석에 얌전히 찌그러져 있는 부목사님에게 내가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드렸다. 대략,

 

"목사님 기뻐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시라고 하셨으니 기뻐하십시오. 일단 70퍼센트 이상 득표하신것을 기뻐하십시오. 결국 한때 빛나던 목회자였을 저 노인께서 온갖 치졸한 방법으로 스스로의 명예를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있으니, 성난 신도들이 그동안 참고 봐주고 넘겼던 그의 비행을 하나하나 백일하에 드러내놓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빤쓰까지 다 털리고 쫒겨나게 되는 형국인데, 저분만 그걸 모르니 딱한 지경입니다.  저 가련한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할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대로 정의를 세우시게 되겠지요. 관전평." 

 

교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나는 새벽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매일 갈때마다 감사헌금 봉투에 헌금을 담아 가는데 (얼마나 착한가. 하느님 사탕이라도 잡수시라고 매일 사탕값이라도 갖고 가는 것이다. 착한 손녀딸처럼), 며칠전부터 나는 텅빈 헌금 봉투에 이러한 메시지를 적어서 낸다. 

 

"저 타락한 원로목사님이 내가 낸 감사헌금과 십일조 이런거 다 털어서 퇴직금이니 위로금이니 온갖 명목으로 다 뜯어가고, 게다가 월 350만원씩 꼬박꼬박 원로목사님 월급으로 챙겨간다니, 그 돈 다 회수할때까지 --하느님 저는 한푼도 헌금 못합니다. 하느님 드시라고 사탕값 드렸더니 하느님께서 엉뚱한 놈한테 주시다니요. 저 삐졌습니다."

 

 

우리 하느님, 나한테 암말도 못하신다. 하느님, 그러니까 교회를 바로 세워 놓으십시오. 제가 안심하고 하느님 사탕값 갖다 드릴수 있도록.  나는 여전히 새벽기도에 나가고 예배에 나간다. 이건 우리 하느님과 나 사이의 '약속'이니까. 목사놈이 무슨 지랄을 하건 말건 개의치 않는다. 처음부터 '목사'는 내 신앙체계에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오직 하느님/예수님과 나의 관계에만 치중할 뿐이다.  나머지는 다 악세사리. 없어도 그만이다. (착한 교회에서 착한 목회자의 인도를 받는것은 좋은일이지만, 없어도 할 수 없는거지 뭐. 개의치 않는다.)  그래도, 지금은 어떤 책임 의식도 있는데, 내가 착한 목사님들을 좀 돕고, 고민하는 이웃을 위하여  대범하고 쿨하게 행동하는 것도 좋을 것 이다. 그러나 그것또한 부수적인 장치이다.  예수님과 손잡고 가면 된다. 다정한 연인들처럼. 예수님하고 나하고. 

 

 

 

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9. 5. 18. 18:20

대학 근처에 있는 남자고등학교 학생들과 여자 고등학교 학생들이 지원한 '대학 체험' 프로그램.  30여명 안팎의 두 학교 학생들이 토요일 오전에 모여서 두시간 가량 '커뮤니케이션' 주제의 수업을 듣는다.

 

2시간씩 네 차례에 걸쳐서 진행되는 워크숍에서 내가 계획한 내용들은

 

  1. What is communication?   What is intrapersonal communication?
  2. What is interpersonal communication?
  3. What is intercultural communication?
  4. What is mass communication? 

 

워크숍이니 만큼, 일방적 강의보다는 주로 짝이나 팀 중심으로 주어진 과제를 수행해나가며 스스로 주제에 대한 답을 찾거나 정의를 내리는 작업 위주로 진행한다. 오늘은 사람들 사이의 소통이라는 주제로 작업을 진행하는 날이라서, 몇가지 Information Gap 과제를 진행했는데 눈부실 정도의 장면들이 많이 연출 되었다. 

 

여자고등학교, 남자고등학교에서 온 학생들이라 남학생과 여학생들은 남과 북처럼 따로 떨어져 앉아 있었는데, 나는 간단히 여학생에게 1부터 15까지 번호를 주고, 남학생에게도 동일하게 번호를 준 후에 동일한 번호끼리 짝을 지어 앉도록 하는 식으로 전혀 모르는 남/녀 학생들을 짝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합심하여 오직 '영어 말하기'로만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는 과제를 주었다.  (대학원 시절부터 주욱 해오는 작업이기도 하다).  서로 전혀 모르는 동급생 여학생 남학생이 짝이 되어 함께 뭔가를 하려니 쑥스럽기도 할 것이다. 어떤 팀은 과제가 주어지자 마자 평생 알고 지냈던 친구들처럼 서로 눈을 마주치며 열심히 문제 해결을 했고, 어떤 팀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것이 영어의 문제인지 개인 성격 (낯가림, 수줍음)의 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두번째 과제를 주었을 때는 망설이는 사람없이 모두들 잘 해 낸것으로 보아 '낯가림'을 잘 극복해 낸 것이 아닐까 추측하게 된다. 

 

짝을 지어 의사소통 작업을 열심히 해 낸 학생들을 이번에는 네명씩 소그룹으로 묶어서, 각 팀별로 'What kind of skills do we need to make our interpersonal communication successful?'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라고 했다.   강의실 벽에 넓직한 보드들이 삼면에 부착되어 있으므로 학생들은 팀별로 보드 앞에 모여서서 리스트를 작성하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일단 낯선 여학생 남학생이 짝을 이루어 몇가지 작업을 한 후, 이들을 소그룹으로 묶어주자, 이들은 '미래세대' 답게 별다른 저항감 없이 기민하게 서로 마주보며 토론을 하고 리스트를 만들어 갔다.  그리고 주저함 없이 발표를 해 나갔다. 씩씩하게, 용감하게, 막힘없이. 

 

그들이 작성한 리스트에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 책에서 볼 수 있을만한 내용들이 총 망라 되어 있었다.  예컨대

 

 

  1. Respect
  2. Empathy
  3. Rapport
  4. eye contact
  5. Don't interrup
  6. Listen carefully
  7. Speak clearly
  8. Double check
  9. Speak loud enough
  10. Understand culture
  11. gesture
  12. ask again
  13. agree
  14. polite
  15. smile
  16. remember name of the person

 

 

나올만한 것 다 나왔다. 

 

 

영어가 유창한 학생들도 있고, 머뭇대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영어' 강의를 듣고 이해하고, 영어로 말하는데 큰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아마도 영어를 대하고 사용하는 강사(나)가 편안해 보여서 그랬을 수도 있는데, 이들이 다른 상황에서 어떻게 영어 구사를 할지는 미지수이다. 대체로 학생들은 내 앞에서 영어 사용하는 것을 편안해 하는 편이다. 나는 '저 사람하고 영어 하면 무섭지 않아'하는 대상으로 이미 특화되어 있을 것이다. 어느새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는듯 하다. (나는 어쩌면 나에 대한 연구도 해야 할지 모른다. 나는 어떻게 편하게 영어를 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을까?) 

 

 

처음만난 남학생 여학생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최선을 다해서 영어로 정보를 교환하고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장면들이 내 눈에는 보석처럼 빛나고 아름다웠다. 고등학생들이지만 내가 가르치는 대학생들과 별 실력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아무래도 소속한 고등학교에서 스스로 자원해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토요일에 모 대학에 온 것이고, 그러므로 수업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서 인지도 모른다.  그들만큼이나 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나도 즐겁다.  이들이 최대한 의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수업 계획을 치밀하게 짜는 것이 힘든 일이긴 하지만, 힘든 만큼 보람도 있다.  어느 십대 청소년들의 빛나는 순간속에 내가 있는 것이다. 아주 잠시나마. 그것이 아주 잠시나마 즐거움의 원천이 된다.  

 

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9. 5. 18. 09:46

성경의 예수님 일화 중에서, 귀신들린 사나이에게서 귀신들을 몰아내자, 그 악귀들이 갈데를 몰라 고민하다가 들판의 돼지떼에게로 옮겨간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종종 농담삼아서 'ㅇㅇ 총량의 법칙' 이야기를 한다.  가령, 청소년기에 얌전하던 사람이 늦바람이 난다거나 뒤늦게 사고를 치고 돌아 다닐때, 종종 '지랄 총량의 법칙' 얘기를 하며 웃기도 한다.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별 짓 다하고 사는건데, 누구나 실수하고 뻘짓하고 엉뚱한 짓 하다가 철이 드는 것인데, 결국 그것을 피해가기는 어려워서 어렸을 때 얌전했던 사람이라면 뒤늦게라도 결국 뻘짓을 하고야 만다는 자조적이며 인생을 관조하는 시각이기도 하다.  어린 아이들이 사고를 치고 돌아다닐땐, "저러다 크면 안그런다" 고 위로할 수 있고,  다 늦게 사고를 치는 멀쩡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릴때 안그러더니 기어코 할 짓은 다 하는구나" 그러나 '지랄'에도 총량이 있으니 저러다 말겠지 하고 위로하게 되는 것이다.

 

 

지랄 뿐일까.  선도 악도 결국 총량이 있는게 아닐까?  (사랑은 무한하다고 가정하기로 하자. 상상이라도). 

 

얼마전에 어떤 분이 자녀 문제로 고민이 심각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반에서 힘 센 녀석의 '셔틀'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을 한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은, 엄마가 직장에 다니는 분이어서, 그 아이를 이웃의 동급생 아이와 친하게 지내게 하고 그 이웃 엄마에게 아이 돌보는 일을 종종 부탁했는데, 바로 그 집 아이가 '대장질'을 하고 아이를 괴롭힌 것이다. 난감한 처지였다.  믿고 부탁한 것인데 결과가 좋지 못했다.  고민고민 끝에 그냥 내가 아이 키우던 시절의 이런 저런 난감했던 상황이나, 내가 성장기에 자행했던 '악행'과 내가 당했던 악행들을 회고하며,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나쁜짓도 하고 나쁜짓의 희생자가 되기도 하고 그런것 아니겠는가 이야기를 했었다. 그냥, 다른 방도가 없으니 "저는 기도해 드릴게요 하느님께" 라고 하고 말았다.

 

얼마후 상황을 물으니, 아이 엄마가 기민하게 대처하여 아이의 문제는 해결 되었는데, 그 '대장질'하던 아이가 대상을 다른 아이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 '대장질' 녀석은 여전히 못되게 굴고 있는데 셔틀을 더 만만한 상대로 바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얘기를 듣고 내가 실소를 하며, "악은 소멸 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론가 옮겨가는 것 같군요" 했더니, 옆에 앉아계시던 젊은 목사님이 문득, "성경에도 악이 돼지떼에게로 옮겨가쟎아요"하고 성경 얘기를 꺼내셨다.  아...그렇구나..그냥 이사를 가는 것이구나.

 

그래서 생각을 해 보았다.  마음속에 고통이나 우울감, 악한 기운 그런 것들은 항상 존재한다. 그 심상이 상황에 따라서 이리저리 옮겨 갈 뿐이다. 언제나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날것인가.  사랑도, 그리움도, 미움도 모두 모두 대상이 바뀔뿐 바람처럼 늘 내 주위에 맴돈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9. 3. 20. 17:54


나이 오십이 넘었으니, 이제 '사람 답게 사는 방향' 가겠다고 다짐하고 진행해온 전쟁이 무사히, 평화롭게, 조용히 마무리 되었다.  전쟁이 끝났다.  지난 12월 6일부터 시작된 전쟁이니 백일이 조금 지났다.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나의 고통은 세가지로 요약된다:

(1) 남들이 겪는 고통을 내가 똑같이 겪는 느낌이었는데, 그 남들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니까, 여러명의 고통에 개별적으로 공감하면서 내가 느끼는 고통이 극심했다.  내 가족들도 내가 겪는 고통의 유탄을 맞아야 했다. 그들도 역시 편치 못했다. 내가 편치 않았기 때문에.


(2) 내가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가? 나는 과연 이 전쟁을 합리적으로 잘 이끌고 있는가? 이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분명히 내게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정말 이들이 의지할만한 존재인지 스스로 자신감도 없었고, 나도 알 수 없었다. 


(3) 내가 괜한 전쟁에 끼어들었다는, 이제 놓아버리고 싶다는, 마음의 심연에서 올라오는 '이들을 팽개치고 도망가버리고 싶다는' 유혹과도 싸워야 했다.  그 유혹과 싸우기가 쉽지 않아서 힘들었다. 


최후까지도 나는 반신반의 하고 있었다. 정말, 우리가 뭔가를 바꿀수 있을까? 정말로?


나의 전사들이 잘 해냈다. 그들이 합리적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는 그저 심리적인 바람막이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전사들은 이 전쟁을 통해 '영웅'으로 거듭났다. 명예로운 승리였다. 조용한, 아무도 알지 못하고, 그래서 기억하지도 못 할 비밀스러운 전쟁이지만, 나는 이 비밀스러운 전쟁에서 영웅이 탄생하는 것을 목도했다. 


그래서 나는 알게 되었다. 인간의 역사는 --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쥐도 새도 모르는 작전들이 기초가 되어 굴러가는 것이다. 말할수 없거나 말해지지 않는 역사가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한다.  나의 전사들은 전쟁에 이겼어도 나가서 승전고를 울리며 자랑을 할 수가 없다. 알려져서는 안되는 일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이런 류의 전쟁이 아주 많이 진행된다는 사실에 새삼 눈을 떴다. 나의 세계관에 틈이 생기고 새로운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 비밀스런, 누설되어서는 안되는 승리에서 내가 찾는 의미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남들이 누리는 것보다 훨씬 복된 삶을 누리고 살면서 사회에 진 빚을 조금 갚았다는 것이다. 특히,  이 세상에 '딸/여자'로 태어나서 이러저리 치이고 무시당하고 함부로 건드려지는 보통 평범한 사람들이 억울함을 감내하며 구석에서 숨죽여 울고 분노할때, 내가 그 곁에 서서 함께 분노해줬다는 것에서 의미를 찾는다.  하느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실때 내 주신 숙제 수천가지 중에서 한가지를 했다는 선명한 느낌. 


하느님, 저 숙제 한가지 했습니다. 다음에 주시는 숙제가 뭔지 모르지만, 숙제를 주시면 저는 숙제를 해 낼겁니다. 당신 곁으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9. 2. 28. 10:57


이 만평이 왜 문제인가?  (뭐가 문젠데? 하며 뒷통수를 긁적이는 당신. 조금 사색을 해 보시고 다시 생각해 보시면 좋겠다.)


육체노동 정년이 60세에서 65세로 상향 조정되었다.  일희 일비 한다고 한다.

기쁜쪽은 정년 앞둔 남편이고, 짜증나는 쪽은 취업 앞둔 아들이라고 한다. 가운데서 일희일비 하는이는 중년 아줌마다. 


정년 앞둔 아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취업 앞둔 딸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것 처럼 보인다.  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존재가 유독 중년 아줌마인 이유가 뭔가?  중년여자는 정년 앞둔 남편과 취업 앞둔 아들 사이에서 '삼종지도'를 지켜야 하는 여성의 표상인건가?


이 세상엔 아버지와 아들과 중간자로서의 아내/엄마만 존재하는가? 경제 주체로서의 여성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때가 어느때인데 주요 일간지 만평이 이따위인가? (그림 그린이가 남자겠지. 그리고 그는 꼰대이리라. 그에게는 딸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림속의 여성은 그의 아내일지도 모른다. 그의 아내는 전업주부일 가능성이 크다. 설령 그의 아내가 직장인이라고 해도 그의 아내는 철저하게 전업주부 역할까지 할지도 모른다. 내가 꼰대랑 살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는 내가 꼰대일 가능성이 크다. )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9. 2. 1. 22:35



요즘 한국에서도 셀프 주유 시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긴 한데, 미국에서는 극 소수 지역을 제외하면 (뉴 저지 주에서는 주유원이 주유를 해 준다) 셀프 주유가 일반적이다.  플로리다주 탤라하씨에서 발견한 주유소 주유서비스 표시. 


자세히 살펴보자. 휠체어를 탄 사람 표시와 유모차 표시가 있다. 신체장애가 있거나 혹은 유아를 데리고 있어서 스스로 주유하기가 힘든 형편에 있으면 이 버튼을 누르면 주유원이 와서 주유를 해 준다는 표시로 보인다. 서비스 시간대도 표시가 되어있다.  일요일에는 서비스를 안한다는데, 일요일에는 돌아다니지 말라는건가? 아니면, 일요일에는 가족들이 동반할수 있다고 보는건가?


어쨌거나, 몸이 불편한 상황에서는 차에서 나와서 주유를 하는것 자체도 난관일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겨울동안, 장애 학생들이 학교 생활을 좀더 편안하게 할 수 있는 방안들에 대한 공부를 하기로 했는데, 진척된 것이 없다. (공부를 하기 싫었을것이다. 내 일이 아니라서.) 공부 해야 하는데... 하느님, 저 좀 봐주세요. 하긴 하는데요. 저 좀 쉬게 해주세요. 아니면, 저에게 좀더 힘을 주시던가요.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9. 2. 1. 22:27


노스캐롤라이나 맥도날드에서 발견한 화장실 표시.  

  1. 남자화장실이며, 
  2. 휠체어 장애인이 화장실을 사용할수 있도록 설비가 되어 있고
  3. Baby Changing Station, 아기 기저귀를 갈수 있는 선반이 마련되어 있음

을 알리는 표시들이다. 

물론 모든 맥도날드 매장에 이런 표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눈에 띄길래 사진 기록을 남겼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9. 1. 31. 23:44

잘 모르는 사람들과의 식사자리. 날씨 얘기, 세상 돌아가는 얘기, 골프 얘기. 내가 골프 안 친다고 하자 골프 얘기는 중단되고, 다시 세상 돌아가는 얘기.  그러다가 강대국과의 외교 문제로 얘기가 돌아가면서, 한국은 왜 중국에 빌빌대고 미국에도 꼼짝 못 하면서 허구헌날 일본만 때리러 드냐고 묻는다.  


'한국이 일본을 때리기는 하는건가?' 의아해 하고 있는 사이에, 골프를 치지 않는 내가 별 말이 없자 그가 마저 이야기를 이어간다, "위안부 배상 문제가 벌써 언제 끝났는데 아직도 그거 가지고 일본을 물고 늘어지는건가, 외교고 뭐고 그냥 성질 내고 막 나가겠다는것이니 이런 무례가 또 어딨나!" 그는 제법 확신에 차 보인다.  나는 화장실에 가야 한다며 그 자리를 떴다. 그 자리에 계속 있으면 그날 저녁 식사 자리는 좋게 끝나기는 다 틀린거다.  초면에 얼굴 붉히고 사생결단으로 멱살잡이하기도 귀챦고. 내 역사 의식이 뭐 제대로 박힌것인지 자신하기도 어렵고.


나는 정치니 외교니 역사니 그런거 잘 모른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한가지는 분명하게 말 할수 있다.  



내가 어느 집구석 딸이다. 그런데 우리집 아비 어미가 지지리도 못나다보니, 이웃 집 남자들이 우리집을 만만히 보고, 나도 만만히 보고, 나를 훤한 대낮에 사거리에 끌고 나가서 사람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강간하고 윤간하고 폭행하고 만신창이를 만들어 놓고는 가버렸다.  마을에서 힘 좀 쓴다는 이웃들이 자기네들이 정의로운척 폼잡으며 뭐라뭐라 하니까, 그 이웃의 불한당이 내 아비 어미, 오래비와 협잡을 한다. 


"야, 불쌍해서 좀 만져준거야. 원래 먼저 꼬리친건 니네집 딸이야. 저도 좋아서 한거라구.  뭐 너네 신세가 딱한것 같아 보이니 내가 인정을 베풀어주마. 야 이거나 먹고 떨어져. 알았니? 잘 해 보자구. 좋은게 좋은거야."


그래서 그 아비 어미 오라비 놈이 불한당의 돈을 받아다가 썼다.  내 아비 어미 오라비 그 누구도 '당한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물론 이웃 놈들도 내게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우리집에서는 가끔 돈 떨어지면 이웃에게 과거를 팔아 돈을 갖다 썼고, 그 때마다 번번이 나를 내세웠다.  하지만 누구도 내게 무엇이 잘못된것인지 말하지도, 사과하지도, 위로하지도 않았다. 나를 팔아 제 배를 불릴 뿐이었다.  내가 언제 저들에게 돈 달랬나? 내가 언제 내 아비 어미에게 배상해달랬나? 나는 제대로 된 진심어린 사과를 받고 이 일 자체를 강물에 흘려버리고 싶을 뿐이다. 내가 언제 돈 달랬냐구?




나는 이것이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위안부'라는 문제의 핵심이라고 보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내 이웃이고, 내 아비이고 어미이고 오라비이고 뭐든 사람을 믿지 않는 편이다. '위안부'라는 이름의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위안'을 받을수 없다. 없을 것이다. 그저 한명 한명 한을 품은채 사라져 갈 뿐이다. 이웃에게서도 제집 식구들에게서도 제대로 존중 받지 못 한 채로. 너라면 네 여동생이 윤간당하고 버려졌는데, 네 동생은 여전히 길거리 매춘업자 취급을 당하고 있는데, 가해자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 그럼 너는 더 나쁜 가해자지. (비굴하고 치사한 놈이지.)  이제와서 뭘 어쩌란 말이냐구?  --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이 새끼들아?"



그래도 정말 몰라서 묻는거면 최소한 한가지는 일러주마. 너희들 역사책에 태평양전쟁중 일본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정확히 기술을 해. 한국및 다른 나라의 여성들을 강제로 잡아다가 성노예로 쓰고 버리고 죽이고 학대 했음을 반성하는 기술을 해. 너희들 미래세대가 더이상 이 일로 엮이지 않도록 하란 말이지. 과오에 대한 시인. 그것이 과오를 바로잡는 시작점이야. 그래야 제대로 털고 지나갈수 있는 거라구. 가해자에게도 이 일이 어려운데, 피해자가 그냥 넘어갈수가 있다고 생각하니? 힘으로 때리고 죽일수는 있어도, 힘으로 기억을 지울수는 없는거지. 안그래? 모두 죽어도 기억은 남는다구. 안그래?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9. 1. 17. 01:50

내 '눈 먼 고양이 폴'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제 외출하여 돌아와 문밖을 내다보니 저녁 늦게 폴이 문 밖 고양이 타워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내가 돌아와 밥을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얼른 고양이깡통과 마른먹이를 가져다 그릇에 담아주니 배가 고팠던 듯 허겁지겁 먹는다. 그 먹는 모습이 참 예뻤다. 눈 먼 고양이 폴이 문 밖에 와서 나를 기다리고 내가 주는 먹이를 먹는 모습이 내 가슴을 따뜻하게 했고, 내 심장은 기쁘게 고동쳤다.


"나비야, 나비야, 너는 그냥 살아있기만 하면 돼. 네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나는 너무 좋아!" 


밥을 먹고 있는 녀석의 잔등을 바라보며 나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우리가 생명가진 존재들, 내 가족이나 이웃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런 방식으로 대할 수 있는거구나. 


눈 먼 야생고양이의 삶은 고단하다. 그런데 '실용성' 면에서 보면 세상에 이렇게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도 없다. 눈이 멀었으니 간신히 인간이 제공하는 먹이나 먹으며 생존 할 뿐, 새나 다람쥐를 사냥하기도 어렵다. '실용성' 면에서 보면 도대체 이 동물이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 먹이만 축 낼 뿐이다. 


나는 내가 후원하고 있는 지적장애 아이 (내 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 애는 아무리 잘 입히고 잘 먹이고 잘 교육 시킨다고 해도 도대체 희망이란게 있을까? 평생을 건강하게 별 탈없이 살아온 내 입장에서 극한의 장애를 가진 아이에 대한 나의 시각이 이런 식이다. 그냥 하루하루 먹고, 배우고, 시간을 보내고 그냥 살아있을 뿐, 이 아이는 장래를 위해서 무얼 계획하고 실행할까?  나는 후원을 하면서도 난감한 편이었다. 밑빠진 독에 물 붓기 하듯 희망이 없는 곳에 뭔가 절망적으로 희망의 물을 붓고 있는 애매한 상황처럼 보였다. 


그런데, 내가 눈 먼 고양이 폴에서 속삭였던 독백에서 내가 갖고 있는 난감한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았다. 그냥 잘 살아있기만 하면 돼. 뭔가 위대한 일을 하지 않아도, 어른이 안되어도, 일꾼이 되지 않아도, 지능이 낮아서 뭔가 사회에 기여하는 구성원이 되지 않아도, 아무것도 안 해도 그냥 "네가 살아 있어서 세상이 더욱 눈부시게 빛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모든 생명이 그러할 것이다. 


살아있어 주기만 해. 네가 살아있다는 것이 내게 가장 큰 기쁨이다. 


내가 난감해 하고 있는 신체적/지적 장애인에 대하여, 혼자서 살아가기 힘든 노인 인구에 대해서, 그 외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힘없는 이웃들에 대하여 나는 '해답'을 구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인생에 해답이란 없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을 뿐이다. 건설적이고 실용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어떤 '해답'을 찾기보다는 '현재' 태양아래에서 살아 숨쉬며 나와 동일한 시간과 공간을 나눠 쓰는 내 이웃에 대하여 나는 예의를 갖추고 따뜻한 말을 건네거나 하다못해 웃어주면 된다. 그러니까 절망 해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가 죽어야 하는 존재이므로 이미 절망을 안고 태어났으므로 그 이상의 절망은 옥상옥. 무의미할 뿐이다. 살아있는 동안은 살아 있음을 서로 축하해주면 된다.  어차피 우리는 다 죽는다. 잘난 사람이나 못 난 사람이나.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고학력자나 저학력자나. 남자나 여자나. 차이는 없다.  슬퍼할 일도 없다. 게임은 공정하다. 기뻐할 일이다.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