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etch2020. 2. 8. 16:21

Food is all I am asking. Bus Pass - Just want to feel better and get back to camp

위 사진속의  패널은 피닉스 삼총사들의 숙소 (버스정거장) 근처에 그들이 놓아둔 것이다.  '음식을 부탁드립니다. 버스표도 있으면 주세요. 버스를 타고 기분전환을 하고 캠프로 돌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음식이나 버스표를 부탁하는 내용이다. 

 

 

 

아리조나 피닉스 (Phoenix)에서 얼마동안 지냈다. 버지니아가 한국의 '부산' 쯤 되는 겨울 날씨라면, 같은 시기의 아리조나 피닉스는 한국의 8월 말 혹은 9월 초순 정도 되는 덥거나 따뜻한 날씨이다.  긴팔 옷을 입거나 반팔 옷을 입은 사람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나를 마중 나온 친구도 반바지에 슬리퍼 (쓰레빠) 차림이었다. 한 겨울에, 피닉스에서.  (그가 슬리퍼 신은 꼴을 보고 나는 안도 했다. 전갈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군, 샌들 차림인 것을 보면. 

 

 

아리조나 피닉스는 사실 플로리다의 마이애미 일대 만큼이나 '노인'들이 퇴직후에 살고 싶어하는 곳이다. 사철 따뜻하고 습기도 많지 않으므로 (여름에 뜨거운거야 에어컨으로 해결 보면 되니까 겨울에 따뜻한 것이 중요하다).  노인들의 천국은 --- 집없는 사람들에게도 천국임을 의미한다.  버지니아에서도 이따금 교차로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지만, 피닉스에서는 이런 분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내가 아침마다 산책을 나가던 구역에도 세명의 홈리스가 있었다. 남자 두명, 여자 한명. 그들은 버스 정거장 (한국처럼 삼면이 막혀있고 벤치가 있어서 노숙하기에 용이하다)에서 잠을 잤다. 벤치 아래에 봉지 봉지 그들의 세간 살이를 채워 넣고, 벤치를 침대처럼 활용했다.  한명이 벤치에서 자면 두명은 벤치 아래에서 잤다.  나는 이들이 각자 혼자 따로따로 자는것보다 그렇게 셋이 모여서 자는 것이 안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날씨가 쌀쌀한 아침에는 길 건너 햇볕이 따뜻한 버스 정거장으로 이동해서 셋이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 꽃을 피우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어느날은 길 건너편 버스 정거장 벤치 가운데 여자가 고개를 한 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앉아있고, 양 옆의 바닥에 남자들이 앉은채로 그녀를 쳐다 보며 이야기를 하는 광경이 보였는데, 뭐랄까, 그 여성은 성모마리아, 관음보살, 혹은 여신처럼 보였고, 남자들은 신의 메신저처럼 보였다.  신비한 장면이었다.   이른 산책을 나가면 그들의 취침 시간이었고, 산책을 마치고 돌아올 즈음 그중 한  두명이 어디론가 자리를 비운 것이 보이기도 했다. 

 

 

터줏대감 같은 삼총사 외에도 운전하여 나가면 교차로 근처 이쪽 저쪽에 이분들이 서 있었다.  그들을 발견 할 때마다 1달러라도 주고 싶었지만 번번이 수중에 현금이 없었다. 우리들은 이제 지갑에 현금을 갖고 다니지 않는다.  카드가 있을 뿐이다. (미국에서는) 애플페이가 있을 뿐이다.  근처에 쇼핑하러 나가면서 현금을 챙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번번이 그들을 그냥 통과 해야만 했다. 

 

 

하루는 산책 나가는 길에 역시나 버스정류장에서 자고 있는 삼총사를 지나치며 생각했다. '저기 있는 그로서리 (일반 상점)까지 걸어가야지. 거기 가서 뭔가 먹을 것을 사야지. 저들에게 아침을 대접 해야지.'  누군가에게 아침을 대접한다는 생각만으로 갑자기 나는 기분이 좋아졌고,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상점에 갔을 때 뭘 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샌드위치는 냉장고에 있어서 너무 차가워보였다. 뭐든 냉장고에 준비된 음식은 차가웠다. 적절치 않았다. 상점을 몇바퀴 돌면서 고민고민 하다가 결국 방금 구운 머핀 여섯개 들이 한 상자, 그리고 그린티 음료수 여섯병들이 한 팩을 샀다.  따뜻한 머핀과 그린티를 먹으면 --나쁘지는 않을거야...

 

 

음료수가 조금 무거웠다. 그것들을 비닐봉지에 들고 돌아와보니 삼총사중에 둘은 아직도 숙면 중이시고, 한 사람이 인기척에 깨어나 쳐다본다. "Hey, I am Eunmee.  Here's your breakfast."  누워 있던 그는 몸을 일으켜 내가 내미는 비닐봉지들을 받았다. "Thank you. God bless you."  "Thank you. God bless you, too!"  우리들은 눈을 마주치며 웃어보였고 나는 자리를 떠났다.  다음에는 집에서 나갈 때 현금을 갖고 나가서 줘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를 다시 볼 수 없었다. 갑자기 한국으로 와야했다. 부랴부랴 비행기표를 바꾸고 피닉스를 떠나야 했다.  그를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너무 아쉬워, 현금을 챙겨 놓았다가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 하는 중에, 길가에 서있던 사람에게 현금을 건냈다.  "Thank you. God bless you!" 그가 말했다. "God bless you!" 나도 말했다.  (나는 단지 내가 1달러를 내밀었을 뿐인데 God bless you! 라는 축복의 말씀을 그에게서 들을 때, 그와 나 사이에 천사가 잠시 다녀간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1달러로 천사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다니!) 

 

 

 

피닉스를 떠나며 나는 생각했다. 앞으로 현금을 갖고 다니는 사람의 숫자는 현저히 줄어 들을 것이다. 그러면 길에서 현금을 구걸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건가? 나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금을 소지하지 않기 때문에, 길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에게 현금을 내 줄 수가 없다.  일달러, 혹은 이달러, 준다고 내게 축이나는 것도 아니니 자주 줄 수도 있지만, 현금을 소지 하지 않기 때문에 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현금 대신 전자 상거래를 하거나 다른 시스템이 현금을 대체하면서 이러한 새로운 시스템의 그늘에서 시스템을 따라잡기가 힘든 노인들이나 교육을 받지 못한 분들이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데, 길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문제에 빠지게 된다. 현금이 사라지고 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한푼 두푼의 현금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이들은 어떤 식으로 구걸을 하려나?

 

 

Posted by Lee Eunmee
Sketch2020. 2. 8. 16:10

35일간 미국에서 지내면서 나는 유배지의 삶 같은 생활을 한 듯 하다. 거기 있을 때는 몰랐는데 귀국하여 돌아보니 그 생활은 내가 선택한 유배지의 삶이었다. 

 

 

식료품 몇가지를 사기 위해 쇼핑몰에 들렀다. 지하 식품매장으로 가기 위해 1층 통로를 통과하면서 내 눈은 황홀했을 것이다. 새봄을 알리는 듯한 화사한 색상의 예쁜 옷들이 여기저기서 내게 손짓을 하고, 소리질러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모자며 마스크에 발목까지 오는 긴 패딩 오버로 온몸을 중무장하고 나갔던  전쟁 같은 살벌한 외출이었건만, 매장에 걸린 예쁜 색상의 옷들은 무서운 코로나조차 잊게 하는 환각성을 품고 있었다.  물론 내 발길은 멈추지 않고 휘리릭 매장들을 지나쳐 지하 식품매장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는데, 느리게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나는 문득 내 가슴에 찌르르 통증이 옴을 느꼈다.  찌르르...미세한 전류에 놀란 듯한 아주 여린 고통이었다.  그순간 미국집 내 창 밖으로 온종일 내다 보이던 목장과 순한 눈빛의 소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35일간, 나는 주로 창가에 붙어 살았다.  아침이면 일어나 한시간 기도를 드리고 (기도가 지겨우면 찬송가를 부르고, 찬송가가 지겨우면 성경을 읽으며 아무튼 한시간 기도 시간을 채웠다),  그리고 창가에서 글을 쓰거나, 글을 쓰기 위한 연구를 했다. 그것이 내 일상이었다. 

 

 

그 작은 마을은 워싱턴 덜레스 공항에서 차로 다섯시간을 꼬박 달려야 하는 버지니아 남단 구릉지에 있었다. 주변은 온통 목장이었다. 마을 한가운데로 기차길이 있어 화물열차가 하루에 두 세차례 통과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눈만 마주치면 웃으며 말을 걸어온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평생 한 마을에서 함께 살아온 사람처럼 말을 건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Where are you from?" 같은 상투적인 질문은 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들은 얼마든지 어떠한 화제로도 내게 말을 걸을 수 있었다.  두세살짜리 꼬마 아이도 방긋방긋 웃으며 "하이! 하이!" 외쳤는데, 그냥 사람이 반갑다는 뜻이었다.  사람이어서 그것이 좋아서 인사를 보내는 사람들. 그 마을은 그랬다. 그 마을에서 걸어서 갈수 있는 가게는 아무것도 없다.  물론 차로 10분 내에 타운 중심에 갈 수 있고, 그곳에 가면 월마트며 미국 중소도시에 가면 있을법한 상점들이 모여 있긴 했다.  하지만 여건상 걸어서 갈 수는 없었다. 미국에는 차도만 있으며 사람이 걸어다닐 인도가 없는 곳이 아주 많다. 걸어서 한시간 거리라 해도 맘놓고 걸을수는 없는 것이다. 시골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차가 없는 한 나는 집에서 공부하거나 글을 쓰거나, 요리를 하거나, 조그마한 마을을 한바퀴 도는 산책을 하거나, 고양이와 노는 것 외에 별로 할 것이 없었다.  나는 12월 말에서 1월 한달 내내 그렇게 살았다.  

 

 

물론 이따금 생필품이나 식료품을 사러 차를 운전하여 월마트에 갔다.  워싱턴에 살때는 거들떠도 안보던 월마트를 이 시골마을에서 나는 '놀이공원'처럼 다녔다.  그곳에서 요긴한 식료품을 사고, 방한 목적의 두툼한 겹바지도 하나 사서  내내 그것만 입었다. 그랬다. 그것이 내 유일한 외부 엔터테인먼트였다.  아-무-것-도 내 눈길을 끌만한 것은 없었다. 그냥 월마트에 전시된 생필품들을 보는 것이 오락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자족'을 발견했다.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식료품을 장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쇼핑이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 통장에 돈이 쌓여 있어서 어떤 명품도 척척 살만 한 수준이라 해도 그 시골마을에서는 그 따위 것들이 아무 소용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냥 채소와 이런 저런 것들을 사다가 요리를 해 먹으면 그것으로 족한 하루하루였다. 

 

산책을 하며 나는 종종 생각했다. '여기 참 좋아. 잡다한 것들이 다 사라지고 오직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게 돼.  예쁜 것을 찾으러 쇼핑몰에 가지 않아도 돼. 왜냐하면 쇼핑몰이 없으니까.  목장과, 하늘의 해와 달 별, 그리고 개울, 개울에 물을 먹으러 오는 소들과, 두마리 집 고양이들. 그것들로 이미 충만해. '

 

 

 

그렇게 산사의 스님처럼 살다가 -- 챨리의 초콜렛 팩토리 같은 마법의 성으로 돌아왔다. 한국의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마법의 성이다. 아웃렛이 있고, 공원식 쇼핑몰이 있고, 뭐든 근사한 것들이 눈앞에 펼쳐져있다. 눈이 닿는 곳 어디서나 예쁜 색상의 물건들이 나를 부른다. 나는 헉헉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이 전기 오른듯 쓰르르 울리며 미세한 통증을 느낀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렇게 물건으로 둘러싸인 이곳이 '참 아름다운 지옥' 같아.  '참 아름다운 감옥' 같아.  나는 예쁜 것들을 탐하며 동시에 그것들의 무용함을 안다. 그래서 가슴이 찌르르 아프다. 

 

 

창밖으로 소들이 순한 눈으로 풀을 뜯으러 올 때, 그리고 그 곁으로 검정 고양이 한마리가 느릿느릿 지날때, 그 검정고양이가 우리집 아기 고양이와 흡사하게 생겨서 -- 아하! 저 놈이 이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아기고양이의 어미구나! 깨달을 때 내 심장에서는 여리고 고운 클래식 기타 소리가 났었다.  그것으로 충만한 시간 그리고 공간.  하느님께서는 장차 나를 어디에 살게 하시려는지 그분께 묻고 싶어진다. 하느님, 저의 다음 행로는 어디인지요?

Posted by Lee Eunmee
Sketch2020. 2. 7. 21:15

숙명여대 성전환 합격자, 논란 끝에 "입학 포기"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하고 올해 대학 입시에서 숙명여자대학교에 합격한 A씨가 입학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A씨는 JTBC와의 취재에서 "합격 소식이 알려진 이후로 자신의 입학을 반대하는 움직임에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면서 "숙대 입학을 포기하는 대신 여대를 제외한 대학에 입학할 준비를 하겠다는 입장을 전했습니다. 앞서 숙명여대는 지난해 8월 태국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은 A씨를 최종 합격시켰고 이후로 학교 안팎에서는 찬반 논란이 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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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환하여 '여성'임을 법적으로 인정 받은 여성이 합법적으로 여자대학교에 입학 신청을 하여, 그 대학으로부터 적법하게 입학 허가를 받은 상황에서 '반대'의사를 표시하는 학생들 때문에 입학을 포기하였다고 하니 마음이 아프다.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나 역시 '여자대학'을 졸업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숙대생이라면 나는 그 사람 편에 설 것이다. 

 

 

관련 기사의 숙대생 대화방 내용도 조금 훑었는데, '여성의 파이를 왜 그런 사람이 나눠 먹는가'하는 불만을 표시한 숙대생도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음...뭐 파이좀 나눠 먹으면 안될까? 

 

 

음, 공포심을 느끼고 입학을 포기한 그분께 말씀 드리고 싶다.  여대 가지 마시라. 남자 여자가 섞여서 사는 세상에 뭐가 답답해서 대학 공부를 여대에서 하려 하는가? 남자 여자 섞여서 동등하게 서로 협력하고 나누는 문화에서 공부하는 것이 여자들만 우글거리는 곳에서 '파이'를 남에게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는 문화를 흡수하는 것 보다 훨씬 낫다. 

 

 

내 비록 내가 다닌 여자 대학에서 귀한 교육을 받았고, 귀한 친구들을 만났으며, 귀한 교수님 슬하에서 많이 크고 많이 도움받고 성장하였으나, 내가 다시 선택할 수만 있다면 나는 절대 자발적으로 여자대학에 입학하지는 않을 것이다. 옛날엔 왜 여자대학 들어갔나구? 아, 학비 대주는 아버지가 내 의사와 상관없이 여대로 입학원서를 들이 밀어서 -- 아버지 학비에 기대어 사는 내 신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냥 울면서 여대에 갔을 뿐이다. 

 

트랜스젠더의 여대 입학은 찬반 논란이 일었다. 숙명·덕성·동덕·서울·성신·이화여대 등 서울 지역 6개 여대의 23개 여성단체는 ‘여성의 권리를 위협하는 성별 변경에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해 A씨의 입학을 반대했다. 숙명여대 일부 동문은 A씨의 입학에 찬성하며 ‘성전환자로 숙명여대 최종 합격한 학생을 동문의 이름으로 환대한다’는 제목의 연서명을 온라인에 올려 해당 학생에게 응원을 보내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출처: 중앙일보] 박한희 변호사, ‘숙대 포기’ 트랜스젠더 위로 “함께 살아가자”

 

내가 졸업한 학교도 이따위 기사에 이름을 올린 것을 보고서 나는 정말 인생 최초로 내가 '여대 출신'이라는 것이 아주 챙피스러워졌다.  그전에는 그냥 아버지의 선택으로 여대 간것이 불만이었는데, 지금은 쪽팔린다 내가 저런 학교 출신이란 것이. 아...망했다... 트렌스젠더 여성이 여대에 들어오는 것이 '여성의 권리'를 위협한다고?  여성의 권리가 뭔데? 여성에게 권리란게 있었어?  나는 솔직히 남자로 태어나서 하필 여자로 바꾸는 사람이 이해가 안된다 왜냐하면 이따위 남근중심 사회에서 나도 가능하면 남자가 되고 싶은 판이었으니까. 근데 뭐가 답답해서 여자가 되냐구...그게 여성의 권리 침해가 돼? 응? 

 

그럼, 내가 여성의 진짜 권리가 뭔가 말해주겠다. 다른 누구도 침해 할 수 없는 여성의 권리는 -- 약자를 보듬어 주고, 슬픈자의 어깨를 감싸주고 그러는거다. 그게 우리가 가진 천부 권리이다. 사랑의 권리, 그것이 여성이 가진 최고의 권리이다.  그것은 남이 빼앗지 못한다. 좀 정신들 차리셔 여성 동지들. 우리가 가진 진짜 힘은 힘없이 쫒겨나가는 사람의 편에 서 줘야 하는거라구. 페미니즘은 늘 소수자와 연대해 왔다구, 그게 페미니즘의 근간이라구... 아이구. 

 

그러니까 그 분, 여대에서 공포심 느끼고 입학 포기한 그 여학생 -- 지금은 비극이지만 장차는 잘 된 일이다. 그냥 남녀공학 가서 뒤섞여서 사는 방법을 익히시는 것이 훨씬 좋다. 크게 보면 득이지 손해가 아니다. 

 

 

추신: 파이 부스러기조차 남들과 전혀 나눌 생각이 없는 숙명여자대학교 학생들 (그 중에서 트렌스 젠더 학생을 겁주어 쫒아낸 그 학생들) -- 그대들 앞의 그 대단한 파이나 꼭꼭 씹어 먹기 바란다. 배탈나지 않게 꼼꼼하게 씹어먹고 잘 살아내시길. 남의 고통따위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여성 지도자의 요람이시어.  (니네들 말야, 딱 거지가 다른 거지한테 거지 발싸개 쪼가리 빼앗길까봐 집단 린치 하는것으로 밖에 안보여. 그 잘난 거지같은 학교 나와서 대체 뭐 할건데?) 

 

 

Posted by Lee Eunmee
Books2019. 12. 24. 09:59

 

12월 19일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날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이 날은 무언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무얼까? 누굴까?  누군가의 생일이거나...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2019년 12월 19일은 어쨌거나 내 기억에 새로 각인된 의미있는 날이 될 것이다.  종강을 했고, 기말 성적처리를 모두 마쳤고, 학교에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도 모두 제출했고, 수퍼바이저 학장님과  한학기를 마무리하는 회의도 즐겁게 마무리 지었고, 모든 일을 18일까지 마무리 지었다. 19일에는 모처럼 서울에 나갈 패였다.  나는 이제 '섬마을 여선생'처럼 촌사람이 되어 서울에 가봐야 동서남북도 분간이 안된다.  뉴욕이나 워싱턴보다 서울이 내게 더 낯설다.  나를 맨해턴에 떨어뜨려놓아보라. 나는 천지사방 이리저리 신나게 돌아다니며 길잡이를 할 것이다. 워싱턴 디씨에 내리면 나는 하루종일 관광안내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울은 낯설다. 서울에서 성장하고 청춘을 보낸 나는 그 서울만큼 낯설것이다. 

 

버스가 언제 올지 예측 불가능하니 전철을 타라고 남편이 일러주었다. 전철을 한번만 갈아타면 홍대앞까지 편히 간다고. 그 다음에 합정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거나 그냥 한번 더 전철을 타거나 자신없으면 택시를 타라고 했다.  나의 선택은, 홍대앞에서 내려서 합정역까지 걷는것이었다. 1킬로미터만 걸으면 합정역이니까. 서울이 낯설지만 내게 익숙하거나 친근한 장소에서는 곧바로 옛기억이 되살아나니까. 

 

추운 날씨. 따뜻한 햇살. 경쾌한 걷기. 모든 것은 아주 좋아보였다. 한걸음 한걸음 걸을때마다 나의 20대가 되살아나는 듯 했다. 

 

출판사에서 내게 연락을 취한분은 여자분이었다.  얼핏 남자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자분이 맞아주었다. 좋은 징조이다. (나는 사실 낯을 가린다.  활달하게 남녀노소 누구와도 대화를 잘 하지만, 사실은 남자들을 경계하는 편이고 여자들과 놀 때 즐겁게 잘 논다. 여자들과 일도 더 잘한다. 남자는 좀 성가시고 답답하다는 느낌이다.)  남자분도 함께 회의실에 들어오셨다.  그분이 출판사 대표였다.  우리들은 서로 수인사를 하고 웃고, 그리고 다른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고, 나는 대표께서 가져온 계약서에 싸인을 했다.  계약금은 곧바로 입금되었다고 내 핸드폰이 알려주었다. 

 

출판계약을 했다.  전에 첫 책 출간을 할때 고생했던 기억이 있어서, 출판계약을 했다고해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거라는 지나친 기대는 하지 않는다. 고생을 좀 하겠지, 그리고 책이 나오겠지. 나 역시 초고를 보냈을 뿐이니까, 마무리 작업이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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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가 내 맥북이 너무 오래되었다고 미국 집에서  제 친구 제론과 함께 내게 맥북프로를 새로 사 준것은 2018년 8월이었다. 작년 여름 휴가때였구나.  그 전까지 나는 2012년에 샀던 맥북을 쓰고 있었는데, 그것은 멀쩡했다.  그냥 단지 찰리는 내게 새로운 기기를 사주고 싶어했을 뿐이다. 제론과 찰리는 컴퓨터 고수들 답게 내 맥북을 내가 가장 사용하기 쉽게 세팅을 완료해주었다. 그날 나는 컴퓨터긱들에게 기념사를 한마디 날렸다, "고맙구나, 이 것으로 내가 좋은 책을 많이 써내마." 

 

고민을 좀 하다가, 8월에 귀국을 한 이후부터 한가지 주제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가을 연휴기간에도 나는 여행대신에 연구실에서 글을 썼다. 겨울이 오고 주변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발생하고, 나는 그 문제들을 들여다보느라 글을 쓸 여력이 없었다.  봄학기에는 예정에 없던 과목 하나를 갑자기 더 맡게 되어서 시난고난했다.  일을 하거나 아프거나 둘중에 한가지였다. 여름에 원고를 쓰려고 했으나 시난고난했다. 여름방학에는 산책만 하면서 보냈다. 

 

가을학기가 시작되었을때, 영문과교수가 제안을 했다. 교수들끼리 모여서 글쓰기 작업을 하자고 했다. 수업이 없는 매주 금요일 오전 세시간동안 강의실 하나에 모여서 각자 글쓰기를 하기로 했다.  마침 금요일에는 수업이 많지 않으므로 전망좋고 한적한 강의실이 우리차지가 되었다.  각자 강의실에서 가장 맘에 드는 코너 한군데를 정해놓고 세상에 오직 나 혼자 있는듯이 앉아서 각자 글을 썼다. 나는 통유리 밖으로 시내가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긴 강의책상 두개를 붙여놓고 책이며 이미 완성된 챕터별 원고지를 줄지어 놓고 작업을 했다.  우리들은 정해진 시간에 모이되 각자 철저히 혼자 시간을 보냈다. 여럿이 각자 따로, 그러나 함께.  

 

내가 시내를 조망하는 통유리창을 대면하고 앉아있을때, 어떤이는 구석 벽을 향했다 (자기는 창밖이 내다보이면 산만해진다는 것이다). 어떤이는 벽쪽에 등이 닿게 앉아 있기도 하고, 어떤이는 강의실 책상의 위치 그대로 칠판쪽을 보면서 글을 썼다.  가을학기 내내 매주 금요일 그 시간을 지킨이는 제안했던 영문과 교수와 나, 이렇게 둘 이었다. 다른 교수들은 사정상 늦거나 빠지거나, 중간에 나가거나,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제안자 영문과 교수는 '제안자'라는 책임감때문에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켰을것이고, 나는 책임자는 아니었지만, 나 스스로 '책임의식' 때문에 그 자리를 지켰을것이다.  열감기 때문에 고통을 겪을때에도 일찌감치 가서 글을 쓰다가 병원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 진료를 받고 다시 돌아와 마무리를 하기도 했다. 나는 늘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고 싶었을것이다. 

 

가을학기가 마무리되어가고, 금요 글쓰기 캠프도 마무리가 되어갈 무렵, 나의 초고 쓰기도 마무리를 향해갔다. 어느날 글쓰기 시간이 끝나고, 내 연구실로 돌아온 나는 글의 목차를 다시 정비하고, 출판제안서를 적어보았다. 어디론가 출판사에 보내야 책이 나올것 아닌가? 책 제목도 근사한 것으로 뽑아보고. 잡다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을 한것 같은데 저녁이 되었다.  그날 피곤하고 시장하여 학교앞 상가에서 저녁을 먹고 역시 학교앞 교보문고에 들러서 내가 쓴 원고와 동일한 주제의 신간이 쌓여있는 매대를 기웃거렸다. '어떤 출판사들이 매대에 책을 깔아 놓는가?' 나는 아이폰 메모장에 신간을 깔아놓은 출판사들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12월 첫 주, 수업을 마치고 시간이 날때마다 내가 이름을 적어온 출판사 홈페이지를 뒤져보고 그들의 이메일이나 혹은 원고제출칸에 내 초고와 출판제안서를 보냈다. 딱 열군데 잘나가는 출판사에 제안서를 보내보자.  [운좋은 출판사가 내 원고를 취할것이다. 그들은 대박이 날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 내 원고를 못 알아보는 출판사는 책을 모르는거나. 나를 놓치다니. 출판사 빌딩을 새로 지어줄 저자를 놓치다니 ]  

 

내 이메일 기록을 보면, 내가 원고를 보낸지 일주일만에 출판사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고, 연락받은지 일주일만에 만나서 출판계약을 했다.  오래걸리지 않았다.  [인물을 이렇게 빨리 눈치채고 알아보다니!] 

 

내 책을 편집하게될 편집자 선생은 마침  이런 책을 기획하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한지 일주일만에 내 원고가 날아와서  놀랐다고 했다.  음...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우연히 '하늘의 성근 망' 어딘가에서 조우하게 된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출판사에서 고민을 많이 하지 않고 곧바로 계약을 진행하게  되었으리라. 나 역시 '고민'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감이 통한다 싶으면 손을 잡는 편이다. 그렇다고 '허겁지겁'도 아니다.  나는 정공법을 택했다.  책방 매대에 신간을 깔아 놓을 마케팅 실력과 현실적 감각을 가진 출판사를 택한 것이니까. 늘 '정공법'이 최선이다. 

 

출판사 대표께서, 내게 '이러저러한 책을 써보시라'며 가제로 책 타이틀까지 줬다. 나는 그 책 타이틀이 맘에 들어서 메모를 해 놓았다. 내가 썼던 초고의 일부와 연관책 타이틀인데 재미있는 주제로 보인다. 집에서 검색을 좀 해보니 비슷한 타이틀의 비슷한 책이 이미 존재한다.외국서적 번역서이다.  그래서 그 타이틀은 포기해야 할 것 같고, 하지만 우리가 논의했던 토픽으로 글을 엮어 볼 생각이다. 그것이 겨울동안 눈을 기다리며 내가 해야 할 일이다. 

****

 

서울 나들이가 뭐라고, 열이 나고 온몸이 아파서 내과에 갔더니 코에 긴 빨대같이 생긴것을 넣어 '검사'를 하더니 '독감'이란다. 5일간 격리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타미플루'를 복용하며 집 밖에 나가지 말고 꼼짝 말고 있으라고. (남한테 전염시키지 말라는거다).  타미플루는 부작용이 없는지 걱정이 되어 검색을 해보니, 뭐 환각제같은 효과가 있을수도 있다고. 고층에서 뛰어내린다거나 뭐 그럴수도 있다고.  (어딘가 긴장되고, 내 생애 처음으로 환각 효과를 느껴보게되는걸까 상상도 했지만, 속이 울렁거리고 그냥 기운이 없을 뿐. 어딘가 환각제효과 따위는 없는것 같다. 아니면 내 체질이 환각이 잘되는 체질이 아닌지도 모른다. 낭패다. 음 난 수술을 위해서 전신마취를 했을때도 중간에 깨어서 아주 난처했던 적이 있었다 하하하. 난 그냥 '깨어있는자'로 태어난것이 아닐까? ㅋㅋㅋ 난 기도할때도 방언 이런것도 모르고, 뭐 기도하다가 쓰러진다거나 그런 체험도 없다.  난 그냥 늘 깨어있다. 잠자는 시간 빼고.) 

 

음. 이 독감이 나아야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가지. 집에 가야한다. 고양이들이 기다리는 버지니아 집으로. 

 

2019년 12월 19일은 내게 좋은 소식이 있던 날이었다고 기억하게 될 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19. 11. 22. 13:07

 

 

도무지 이 분 들은 제 손으로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게 없는 듯. 

우비도 '무수리'가 씌워드려야 하고,

잠바 쪼가리도 노인 둘이 모시고 입혀드려야 하고.

손이 아주 많이 가는 분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19. 11. 19. 19:04

자왈 ~

三人行 必有我師焉

 

 

이런 말씀이 있다. 셋이 함께 가다보면 그 중에 내 스승 될 만한 사람이 있다는 말씀이다. 중학교 한문 시간에 배웠다. 

 

 

학기 중에 서너명씩 팀을 이루어 연구 과제를 해 내야 하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팀을 짤때, 가능하면 대충 봐서 똘똘한 학생들을 한 팀당 한명씩 넣으려고 노력한다. 그들이 팀의 다른 학생들을 잘 이끌어서 팀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를 바래서이다.  물론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팀을 짜는데, 내가 개입할 틈을 보일때 슬그머니 그런 학생들을 '포석'을 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스스로 팀을 짜 내면, 내가 나서서 개입을 하지는 않는다.  자연스러운 것이 교육에도 좋으니까.  이렇게 최대한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내가 적극 개입하지 않고 팀을 짜다보면 똘똘한 학생들 여럿이 한팀에 들어가는가 하면, 정말 '걱정스러운' 학생들이 한팀에 모이기도 한다. 

 

 

이번학기에 정말 내가 한숨이 나오도록 걱정스러운 팀이 하나 있었다.  이 팀은 지난학기에 내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인데, 모두 점수가 신통치 않았다.  한팀에 적어도 (말하자면) A 성적을 받을만한 학생 한명이 들어가 줘야 어느 정도 수준이 유지가 될 터인데 문제의 이 팀은 조직원 모두가 약체였던 것이다.  뭐 착하고, 소심하고, 별로 소리를 안 내고, 그냥 존재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 '안보이는' 학생들이 한 팀이 된 것이다.  그 중에는 지각 결석이 잦은 학생도 있고, 이래저래 약체인데...

 

 

그런데, 참 사람의 조직은 신기하다.  이 약체가 약체이긴 하다.  날고 기는 학생들이 모인 집단에서 만들어내는 작품과 이 '약체팀'의 작품이 약간 차이가 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데, 또 신기하게도 내가 염려했던 것 만큼 큰 차이는 나지 않더라는 것이지. 

 

 

이 약체팀에는 숨은 '돌쇠'가 한명 있다.  굉장히 성실한 학생인데 그의 성실성에 그의 성적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열심히는 하지만 뭐 숙제나 시험이나, 프로젝트나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지각 결석 하는 법 없이 꾀부리지 않고 성실하다. 그 '돌쇠'는 사교성도 별로 없어서 늘 혼자 다니고, 늘 혼자 숙제하고, 늘 성실하고, 말이 없고, 그의 이름을 부르면 마지못해 빙긋 웃고 마는 성격인데...  그 '돌쇠'씨가 어쩌다 그 팀의 '리더'가 된 듯 하다. 그가 왜 리더가 되었는가 하면, 적어도 그는 지각, 결석 안하고, 주어지는 숙제는 무조건 다 하고, 그러다 보니까 팀 프로젝트도 팀원들이 하건 말건, 협조가 되건 말건 혼자서라도 그냥 꾸준히 해 내는 것이다.  그는 누가 했네 안했네 따지는 법도 없고, 내게 와서 불평을 하는 법도 없고, 그냥 꾸준히 내 연구실을 들락거리며 모르는 것을 묻고, 뭘 더하면 좋은지 묻고, 내 조언을 듣고, 그리고 말없이 나가서 꾸역꾸역 일을 한다.  그래서 '날고 기는 애들이 모인' 다른 팀만큼 월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평년작은 무난히 해 내더라는 것이다. 

 

 

또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는데, 약체팀에서도 '리더'가 수면위로 올라오듯이, 반대로 '날고기는 애들 모인 집단'에서도 리더는 '하나'더라. 리더가 될만한 애들이 여럿이 모였을때, 그 중 하나가 리더 역할을 하고 나머지는 게으름을 핀달까? Social Loafing 이라는 사회학 용어가 있기는 한데, 리더들이 모이면 모두 리더가 되는게 아니라 하나만 리더가 되고 나머지는 그냥 '덩어리' 노릇을 하는 것이다.  아 이것은 무슨 아이러니인가.  

 

 

그래서 인생 별거 없다.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알고, 상황에 따라서 바보도 천재가 될 수 있고, 천재도 바보로 전락할 수 있다는 말이지. 내가 최근에 발견한 현상은 대충 이러한 것이다. 천재도 바보가 되고, 바보도 천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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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캠퍼스의 낙엽이 바스락바스락 부스러지는 소리가 재미있어서 낙엽 밟는 소리를 즐기며 산책하고 있는데 이메일이 날아왔다.  위의 팀 학생들이 연구보고서 초안에 대한 내 피드백을 받고 싶어서 연구실에 왔는데 안계시다고 언제 볼 수 있냐고.  그래서 바로 답을 했다. 지금 볼 수 있어. 1분안에 갈 수 있어.  밥 먹고 오는 길이지. 너희들 밥 먹었니?  나를 만나 보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애들 밥 사주고 피드백을 줬다.  참 보기 좋아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습은 참 보기가 좋다. 그것이 내 자식이건 내 학생이건 똑같다.  주어진 과제를 열심히 하는 학생을 보면, 무조건 다 해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옛날에 나를 가르치시던 은사님들도 그러셨겠구나. 이제야 그분들이 왜 나를 예뻐했는지 알것도 같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19. 11. 19. 17:37

내가 가끔 이리저리 채널 돌리다가 보게 된 '유재석'씨 나오는 연예 프로그램이 있다.  그 과정이 눈길을 끌어서, 우연히 그 사람이 나오면 보고, 보고, 보고, 그래서 대충 몇 회를 보게 되었다.

 

 

대충 줄거리는 유재석씨에게 유명한 트로트 음악계의 대가들 (작사가, 작곡가, 편곡자, 연주자, 코러스 전문)이 대거 모여들어서 '유재석'이라는 트로트 가수 하나를 탄생시키는 프로젝트이다.  거기에 정말 그야말로 '기라성'같은 트로트계의 숨은 고수들이 모두 출연한게 아닌가 싶다. 사실 그런 숨은 고수들을 보는 재미가 있어서 내가 그걸 보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얼마전에 보니까 곡 녹음까지 근사하게 완성을 시켰을거다.  완성 된것같다. 유재석씨가 노래 녹음 할 때 보니까, 어떤 반음의 차이를 몰라서 작곡자의 속을 썩이다가, 도저히 유재석씨가 음의 차이를 이해를 못하니까, 그냥 원곡자가 음을 유재석에 맞춰서 바꿔버리는 식으로 결론을 내더라.  그 장면을 보면서 -' 아 저사람 저 음의 차이도 모르는 음치이구나...' 했다.  그런데 그 사람에 맞춰서 음을 바꿔버려주는 걸 보니, 그제서야 내가 정신이 퍼뜩 나더라.  

 

 

 

세상에서 다시 모으기 어려운 전문가들을 다 모으면, '저런 음치도' 음반을 내고 가수 데뷔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현장을 똑똑히 목도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문득 화가 치밀었다.

 

 

 

저게 올 가을 온 나라를 들었다 놨다하고 사람들을 둘로 갈라 놓았던, 고위층 자녀 대학 입학 스펙 만들기 사건과 다른게 뭐지?

 

 

대충 음 분간도 못하는 평범한 음치 유재석이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대가들의 도움으로 음반을 내고 가수데뷔하는 것하고 에미 애비 잘 만난 부유층, 고위층 애들이 에미 애비 '빽' 이용해서 보통 사람들은 꿈도 못꾸는 스펙을 만들거나 위조하여 이름난 대학에 들어가는것하고 무슨 차이가 있지? (내 눈에는 그냥 똑같아 보였다.)

 

 

유재석은 음치인데도 대가들 도움 받아서 화려하게 가수 데뷔해도 되고,  아무개는 평범하지만 부모 도움 받아서 화려하게 대학 입학 하면 안되는건가? 왜 한쪽은 되는데 다른 한쪽은 안되나?  유재석이 누리는 것이 공정한 경쟁과 공정한 과정인가?  내 눈에는 공정치 않아 보였다는 것이지.  대학 입학이 아니니까 괜챦다는 건가?  혹은 입사시험이 아니니까 괜챦다는건가?  대학입학이나 회사 취업은 공정해야 하고, 유재석이 가수가 되는 것은 공정성하고 상관 없는건가?  학교나 회사가 아니니까 상관 없다는건가?  난 내가 가끔 미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나 지금 제정신인건가?' 이런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소크라테스에게 물어보고 싶어진다.  아무개 자식이 부모들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만든 스펙으로 대학들어가면 반칙이고, 유재석이 유명세 이용하여 유재석의 유명세 덕을 보려는 사람들 총 동원해서 만든 스펙으로 가수 데뷔하는건 '노-반칙'인건가?  소크라테스 할아버지는 내게 뭐라고 답을 해 주실까?

 

 

 

 

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9. 11. 19. 15:04

인턴 남학생이 머리를 금발로 물들이고 나타났다. 

나: "너 학기 마치고 군대가니?"

그: "네... (싱긋)"

 

학기가 끝나갈 즈음, 굉장히 고지식하고 평범하고 '저는 모범생입니다'라는 표를 온몸에 달고 다니던 남학생이 갑자기 머리를 알록달록하게 물들이거나 파마를 하고 나타난다면, 그는 99퍼센트 '난리'를 치고 있는거다.  군대 가기 전, 청춘의 마지막 몸부림이라고나 할까. 

 

특히 평소에 얌전하고 딴짓 안하던 모범생들이  이런 증상을 보이는 것 같다.  '*지랄* 총량의 법칙'을 여지 없이 증명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랄 총량의 법칙*이란 특히 아들 가진 부모들이 흔히 자조적으로 쓰는 말인데, 모범생이나 문제아나 결국 인간이 평균적으로 보이는 '지랄'은 다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어릴때 몰아서 하고, 어떤 사람은 뒤늦게 난리를 치고 그런 차이가 있을 뿐. 그래서 어릴 때 말썽 부리는 애들, 나중에 자라면 더 효도를 하기도 하고, 어릴 때 부모 속 썩이지 않던 자식들이 늙어서 부모 쓰러지게 만들기도 하고. 우리는 그저 그런 현상을 지켜 볼 뿐이다. (나는 내 '지랄'의 총량을 다 써먹은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새삼 이 나이에 지랄떨게 뭐 있나 싶은 것이지만....사람 일은 죽을 때까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니 늘 스스로를 조심해야 하리라.)

 

"야, 너 군대 가면 나 어떡해?" 

 

내가 슬픈 표정으로 신세한탄을 하자, 이 착한 모범생이 빙긋 웃는다, "안 갈까요, 그럼?" 

 

가라, 가, 군대는 얼른 갔다 와야 하는거지. 어서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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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19. 11. 17. 21:38

"내 강의를 들었다고 감상문을 올렸는데 그걸 올린 사람 아이디(ID)가 정경심이다. 그런데 읽어 보니 내가 그런 강의를 한 적이 없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아들의 동양대 인문학 강좌 감상문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조 전 장관 아들은 한영외고 재학 시절인 2013년, 동양대 인문학 강좌 프로그램 수료증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수강 후기를 인터넷 카페에 올렸는데 해당 글을 작성한 아이디 주인이 모친인 정경심 교수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911151013011#csidx55f851ec06f52d38610fd7d9e7e13e5 

 

 

 

모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진중권씨가 서울대 특강에서 위와 같은 말을 직접 했다면, 그는 교직을 떠나는 것이 옳다고 본다.  혹은 그는 적어도 교단에 서는 것을 그만 두는게 좋을 것 같다.  

 

의사는 자신이 진료한 환자의 진료기록을 함부로 떠들고 다니면 안되고, 교사는 자신이 가르친/가르치는 학생 관련 정보를 떠들고 다니면 안된다.  물론 의사도 사람이니까 식구끼리 밥상머리에서 밥 먹으면서, "오늘 내가 진료한 환자는 이러저러해서 내가 마음이 아팠어"라고 환자의 이름이나 신상을 밝히지 않은채로 극히 개인적인 소회를 밝힐 수는 있다.  또한 교사/교수도 밥상에서 "오늘 어떤 학생이 시험중 남의 것을 베껴 적다가 적발되었지. 속상했어"라고 말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것도 극히 제한적인 경우에만, 신원이 밝혀지지 않는 범위에서만 이해가 될 만한 것들이다. 

 

진중권씨가'조국의 아들'이 '정경심 아이디'로 글을 제출했다는 이야기를 특강이라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것도 사범대 -- 교사 키우는 대학에서) 떠들었다면, 그는 교사가 지켜야할 최소한의 도리를 망각했거나 몰랐을 것이다.  그가 망각했건, 몰랐건 어쨌거나 그는 강단에 서면 안 될 것 같다. 또 어떤 화제의 인물이 그의 학생일 경우 그가 무슨 소리를 떠들어댈지 알 수 없다. 그의 재기발랄한 입이 해당 학생의 명예 뿐 아니라, 그 자신을 문제에 빠뜨릴수 있다. 

 * 서울대 사범대에서 진중권씨가 저런 소리를 떠들을때, 참석교수나 학생이나 그들중 아무도 '학생관련 정보 떠들어대기'가 위법한 사항이라는 것을 지적한 자가 아무도 없다는 말인가?  거기 서울대 맞는가? 아니 서울대 수준이 원래 그정도였던건가?  하긴 진중권이나 조국이나 다 그자들이 거기 나온 자들이니 그밥에 그나물이긴 하다만. 

 

당신이 교단에 서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수업을 한시간을 들었건 백시간을 들었건 해당 학생이 한때나마 당신의 학생이었다면 -- 당신은 그 학생에 대해서는 입을 닥치는 것이 옳다.  그것이 교단에 서는 자의 도리이다.  그 입좀 다물라. 당신이 가르치는 학생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 알라. 

 

당신이 조국 편 들 생각이 없듯이, 나 역시 조씨 편을 들 생각이 전혀 없다. 자기가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는 각자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당신이 지금 교육자로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자신이 과연 대학 강단에 설 자격은 있는지, 막 저런  '아무도 묻지 않는 것까지' 떠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또 다른  학생의 정보를 까발리고 다닐지 걱정되지 않는가? 스스로 걱정되지 않는가?  나는 가끔 내가 무섭더라. 그런 실수를 저지를까봐.  스스로 좀 부끄러운줄 알고 한 일년이라도 입닥치고 근신하는 자세라도 보여야 하는거 아닌가?  부끄럽지 않은가?  (나라면 챙피해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닐것 같은데, 정말 부끄러움을 모르는가?  일전에 진선생에 대해서 약간 변론을 하고 싶어졌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9. 10. 31. 20:31

 

내가 '그 어떤 감리교회'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던 이유는 그 교회를 세웠다는 '원로목사'라는 분의 설교가 괴이쩍고 납득이 안갔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박근혜씨가 아직 대통령이던 시절, "세월호는 이제 그만 잊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그걸 문제삼아야 합니까" 이따위 소리를 해서, 내가 너무 화가 나서 '크리스마스 예배'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온 적이 있었다.  그는 동성애자들이 축제벌이는 곳에 '반대시위'를 하러 다니던 목회자였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설교 시간에 다시 설교 재료로 삼았다. 

 

내가 그따위 교회를 그래도 꾸역꾸역 다녔던 이유는 단 한가지, 그가 곧 정년퇴임을 하여 물러날 것이라는 지대한 희망 때문이었다.  그 원로목사님의 휘하에 두명의 부목사님들이 있었는데, 이분들은 극히 정상적이고 바른 분들처럼 보였다. 설교도 정상적이었고 원만해 보였다.  그래서 저 이상한 노인이 정년퇴직하여 교회를 나가면 저런 정상적인 부목사님들이 목사님이 될 것이고 교회는 정상적이 될거야라는 얄팍하고 순진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간에도 부목사님 한분이 잔뜩 불행한 표정으로 사역하다가 따로 살림차려 나갈때 (개척교회하러 떠날때), 나도 그쪽으로 옮길까 하고 흔들린적도 있었지만, 그냥 귀챦아서 그 노인이 나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게으른 인간이니까 조금 참아서 될 일이면 참는쪽으로 하는 편이다. 

 

드디어 올해 초에 고대하고 고대하던대로 그가 정년퇴임/은퇴를 하긴 했는데 '원로목사'라고 스스로 자기를 추대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달에 400만원의 원로목사 월급을 받아 간다고 한다. 은퇴후에 그의 얼굴을 한번도 교회에서 보지 못했지만 그는 한달에 400만원 생활비가 적다고 신경질을 부린다고 한다. 물론 그 월급은 그가 퇴직금조로 빼간 수억원과는 별도로 지급되는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듣고, 그 다음부터 그 교회에 돈을 안 내겠다고 작정했지....  에라이 날도둑 목사놈아. ) 그리고 교회는 엉망이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그 사층짜리 신축교회를 그대로 곱게 '남에게' 넘기고 물러날 생각이 추호도 없거니와,  교회는 (1) 지금 다른데서 목회를 하고 있는 그의 '아들'이 그 교회를 물려받는것이 마땅할 수도 있지 않겠냐는 일부 장로들과  (2)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 교회 세습은 말도 안된다, 부목사님이 일 잘하시니 그냥 그 분이 자리 넘겨 받으면 된다는 일부 장로들의 전쟁터가 된 것이다. 

 

그 노인이 자취를 감춘 후 6개월동안 교회는 '원로목사파'와 '부목사파'로 '분단국가' 처지가 된 것 같았는데 '국민투표'식으로 전교인 투표를 해봐도 70퍼센트가 '부목사'를 새로운 담임목사로 추대하자는 찬성표가 나왔지만, 그렇지만 국민투표고 지랄이고간에, 지방 감리교단이 '원로목사'의 수중에 있었다.  자취도 보이지 않는 원로목사 뜻대로 움직여지는 것 같았다.  결국 몇년 후에는 그의 아들이 그 교회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분분해졌다. 게다가 현재 부목사님은 '난'을 일으켰다고 징계를 먹는다나 뭐라나.   교회 사정에 밝은 전문가들에게 문의를 해보니, 교단이 원로들 수중에서 놀아나면 개혁이고 뭐고 없는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 지역 감리교단 자체가 완전히 썪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에잇.  어디가서 예수쟁이라는 말도 못하게 생겼다. 너무 부끄러워서.  예수님이 부끄러운게 아니라, 예수님을 팔아먹고 사는 목사라는 직업인들이 내 삶에 끼어들었다는게 챙피스럽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일단은 쫒겨나는 부목사님들이 손을 잡고 새로 세운다는 교회쪽으로 가서 예배를 볼까 생각하고 있다. 

 

내가 왜 이 썩어빠진 감리교단을 떠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1) 어차피 사방 눈씻고 찾아봐도 개신교 교단 전체가 썩어가고 있다. 희망이 없다. 의탁할 곳이 없다.

 

2) 천주교나 성공회에 간들 뭐 그들이라고 크게 다르겠는가?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인간의 후예들이 다 거기가 거기지. 사람 자체를 신뢰하면 안되는거다. 원래 나는 사람을 신뢰하지도 않는다. 

 

3) 그럼에도 나는 예수님께 의지하여 일평생 살기로 서약한 바, 어쨌거나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그래야 한다. 그러니 예배처에 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튼 예배를 계속 드리기 위한 방편으로 새로운 교회로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새로 교회를 세우느라 고생중이신 목사님께, '나는 당신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당신을 신뢰하지도 않소. 나는 단지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만을 믿을 뿐이오. 당분간 당신과 함께 예배를 보기로 했으니 한동안 좋은 길 동무가 되기를 희망하오' 뭐 이런 메시지만 보내놨다.  

 

미국 감리교는 '중앙에서 파송'하는 시스템이라서 목사들이 '이건 내가 세운 내 교회, 우리 아들 준다' 뭐 이따위 소리하는 작자가 없다. 공립학교 선생님들처럼 몇년 있다가 떠나면 새사람이 오고 그런다.  한국 감리교는 '이건 내교회, 내 아들에 아들에 아들에게 물려줄 내교회' 이따위 생각 가진 목사들이 넘치는 것 같다.  내가 다니던 미국 감리교가 새삼 그립다. 어쨌거나, 나는 오늘도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수님 손을 꼭 붙들고 살고 있다. 

 

한국에는 참 나쁜 목사놈들이 많다. 에라이... 나쁜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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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19. 10. 16. 12:25

이건, 아직 조국씨가 법무장관에 있고, 법무부와 검찰이 샅바 싸움을 하고 있던 시기에 내가 '정치 장기판'을 혼자 들여다보며 생각해 낸 것이다.  

 

안타깝지만 조국을 장기판에서 빼고,  법무장관에 윤석열을 갖다 꽂는거야. 그리고 윤을 제대로 한 번 써보는거지.  어차피 조가 여기저기 먼지가 묻어서 쓸수 없는 패라면, 윤이라는 칼을 제대로 한 번 쓰는거야.  한 번 쓸 칼이긴 하니까.  사냥개에게 제대로 사냥터를 열어주자 이거지 뭐.  본래 명견이나 명마는 주인을 가리는 법이다.  윤석열은 어떤 면에서 아직 '주인/파트너'를 못 만난 외로운 명마나 명견 같은데가 있다.  그래서 혼자 고삐 풀린 것처럼 저러고 있는거지.  그를 비난하면 안된다. 그를 잘 써야하는거지.   윤을 무조건 패 죽이려고 하면 우리가 가진 자원의 낭비다.  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의 쓰임새는 딱 거기까지라는거다.  

 

조가 이쁘다거나 윤이 이쁘다거나 그런 얘기가 아니야. 난 둘 다에 별 관심 없고, 누가 무슨 짓을 해도 심드렁한데, 내가  장기를 둔다면, 이 난국에 이런 수를 써볼 수 있다는거지. 하지만 뭐 누가 내 의견 따위에 귀를 기울이겠냐구.  멍멍.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19. 10. 16. 12:16

이틀전 (10월 14일) 오후에 동시에 발견했던 두가지 뉴스 

 1. 법무부장관 사퇴

 2. 설리 사망

 

이 뉴스는 어찌보면 동일한 내용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수업마치고 앉아서 쉬다가 문득). 

 

물론 법무장관이었던 조국은 죽지 않았다. 나는 그와 그의 가족이 안녕하기를 희망한다. 전두환과 그의 일가족도 잘 살고 있고, 역대 군사정권 앞잡이와 그 가족들도 한국에서 미국에서 떵떵거리고 잘 살고 있는 마당에 말이다. (내가 미국에서 살때, 내 친구가 성당에서 어떤이를 가리키며 저이가 정아무개 장군 여식이라고 알려준 적이 있다. 그들은 바퀴벌레들처럼 번식하며 잘 살고 있다.) 

 

설리는 죽었어도 그 죽은 사망기사에도 악플이 지속되고 있고, 조국은 장관 그만두었는데도 여전히 그에대한 악플이 범람하고 있다.  설리에 대해서 혹은 조국에 대해서, 그 일가족까지 포함하여 아주 부관참시라도 하려는 것 같다.  "이들이 한국사람 맞나?" 의문이 들 정도다.  정많고 한많은 한국인들이 아니었나? 나의 한에 비쳐 남의 한을 들여다보고 그러는것 아닌가?  조국이, 설리가 죽을 죄라도 진걸까?  너는 털면 아무것도 안 나올것 같은가?

 

나는 심지어 이런 생각도 했었다.  '만약에 내가 장관 후보가 된다면,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을 내 사생아까지 찾아내어 내 품에 안겨줄것이고...  덕분에 나는 없던 딸자식까지 하나 덤으로 얻게 되는게 아닐까?  유명 남자배우가 내 연인으로 둔갑을 하는게 아닐까?  웬 떡이야 해야 할 판이겠다.'  그러나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장관 후보가 될 일이 없을테니 털릴 일도 없으니까.  미남 배우를 연인으로 갖게 될 일도 없어지는거지. (한숨). 옛날에 나는 안성기 오빠를 좋아했는데, 요즘은 딱히 좋아하는 배우도 없다... (또 한숨).  정우성님이 잘 생기신것 같다. (한숨.) 

 

한달에 일억씩 쳐 주고 입원해 있는 죄수는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는게 어떠한가? 지가 지 돈 쓰는데 내가 뭐랄건 없지만, 인심이 사나워지니 나도 물이 들어 인심 사나운 소리 한번 지껄인다. 쳇. 퉤퉤. 

 

아, 점심 먹으러 나가기 귀찮아서, 배는 고픈데, 잡설. 

 

 

 

 

 

 

 

 

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9. 10. 15. 19:34

설리

 

어제, 퇴근후 무심코 열어본 스마트폰 뉴스채널에서 두가지 뉴스를 동시에 발견했는데, 법무장관의 사표 소식과, 연예인 설리가 사망한것 같다는 보도였다.  내가 먼저 클릭한 것은 설리씨의 사망에 관한 뉴스였다.  아니, 그 꽃같이 예쁜 아가씨가 정말로 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인가?  

 

법무장관이야 누가 하거나 말거나, 결국 누군가 할 것이고, 세상은 뭐 이럴때도 있고 저럴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리'를 대체할 자가 누구란 말인가?  아무도 그를 대체할 수 없으니, 설리를 잃은 것은 참 슬픈일이다.

 

나는 이 사람에 대해서 잘 모른다. 이 사람이 한창 연예인으로 활동을 하던 시절에 나는 미국에서 내 터전을 쌓느라 분주했고, 내가 한국에 돌아왔을때 그는 왕성한 시기를 지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왕성한 가수 활동을 계속 했대도, 쇼프로를 보지 않는 내게는 결국 마찬가지로 눈에 안띄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가 내 눈길을 끈 것은, 어느 화장품 회사 모델로 나온 그의 모습이 너무나 독보적으로 상큼 발랄, 요정같이 산뜻해서 '저이가 누군가?' 궁금해하다가, 그의 이름이 '설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그것 외에 나는 그를 잘 모른다.  이따금 가십성 기사에서 그의 일상 사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는 정도였는데, 어쩌다 보이는 가십성 기사의 사진 속에서도 그는 '요정'처럼 여전히 아름다워서, '이렇게 요정 같이 산뜻, 풋풋한 아가씨라면 뭘 해도 사랑스럽겠다'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내가 평생에 처음으로 아주 빨간 (오리지날 빨강) 립스틱을 하나 마련한 것도 순전히 '설리'가 빨간 립스틱을 발랐을때 단지 그냥 립스틱만 바른 것 뿐인데도 그가 너무나 요정 같아 보여, 나도 모르게 홀려서 나도 빨간 립스틱을 집어 들었던 것이지.  물론 내가 설리의 빨간 립스틱을 아무리 바른대도 절대 절대 설리의 사랑스러움을 먼지만큼도 얻어 올 수 없음을 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이 상큼한 스물다섯 아가씨가 이 투명한 가을날, 그렇게 가볍게 세상을 떠나버리다니.  세상에서 다시 보기 힘든 꽃 한송이가 문득 사라진 것같아, 영 아쉽고 안타깝다.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래도 상실감이 문득 찾아온다.  그 예쁜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다니...  

 

그래서 나는 생각해보았다.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무조건, 무조건, 사람에게 친절하자.  그 사람이 나때문에 상처받지 않도록 조심하자.  그리고 무조건 응원해주자.  그가 내 응원에 마음을 돌이킬지도 모르지 않은가? 죽음에서 삶으로.  좀더 적극적으로 친절하고, 좀더 적극적으로 편이 되어주자.  너무 슬퍼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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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19. 10. 3. 13:27

 

 

요즈음 대통령의 아들이 자신에 대한 공격적인 뉴스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피드백을 보내고 있다.  역대 대통령 자식들과는 약간 다른 행동이다.  나는 누가 얼마나 정당하고 옳은지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어딘가 속이 후련한 기분이 든다는 것만 말하고 싶다. (어딘가 나의 한풀이를 하는 듯한 기분이다.)

 

 

물론 나는 유명인의 자식이 아니다. 내 아버지나 어머니가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의원이나 뭐 재벌이나 그런 대단한 사람들은 아니셨다.  그냥 평범하고 착한 이땅의 가장이며 부모로서 자식들을 열심히 키워내신 분들이다.  그런데, 설령 내 아버지가 '아무것도 아닌 어떤 사람/가장'이라고 해도 그에게도 분명 어떤 '직장'이 있었고, '직책'이 있었고 국가에서 주는 훈장도 받고 그러셨다.  아버지가 받으신 훈장이 뭐였더라?  한 개인이 어떤 전문분야에서 평생 일을 하면 정년기에 이르렀을때 국가가 그 노고를 인정하는 무슨 '꽃'이름이 들어간 훈장이다. 목련인지 무궁화인지 라일락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소시민인 내 아버지의 이름이 학교에 들어서는 순간 나를 따라다녔다.  어딜 가나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 "얘, 너희 아버지 *** 이시지?  내가 네 아버지하고 동기다 (친구다, 함께 근무했다, 등등) 너, 아버지를 많이 닮았구나. 한 눈에 알아보겠다. 공부 잘하지?"

 

 

어딜가나 그 모양이었다. 내가 '어딜가나' 할 때, 그게 기껏해야 학교 언저리이지 뭐 내가 어딜 돌아다녔겠는가.  어쨌거나 나는 아주 불편했다. 도처에서 '내가 네 아버지하고 잘 아는데....'하는 사람들이 나를, 나의 행동거지를, 내가 친구들에게 막 욕지거리 퍼부으면서 거칠게 놀고 있는 것을, 내가 지각하는 것을, 그 모든 것을 샅샅이 아버지에게 '고자질' 할 것 같은 께름칙한 느낌 속에서 초중고대학교 시절을 보냈다. 16년간의 나의 학교 생활은 늘 주변을 살피고, 누가 나를 보고 있는지 아닌지, 내가 하는 못된 행동이 아버지 귀에 들어갈 것인지 말것인지 늘 그걸 두려워하고 주눅들어 있었다. 

 

 

초중고등학교에 다닐땐, 내가 애국조회 시간에 단상에 올라가서 뭔가 근사한 상을 받는 '우수한 학생'이 아닌것이 아버지께 미안했다. 그는 별로 신경을 안쓰고 있었지만 말이다. (사실 아버지는 나 따위의 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도 없었다. 나 혼자 미안했을 뿐이다.)  대학은, 내가 가고 싶은 학교에 가지 못했는데, 아버지가 그리 가라고 해서 그냥 그리 갔다.  거기는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대학에는 도처에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이 쫙 깔려있었으니까. 나는 숨도 쉬기 어려웠다.  물론 숨도 쉬고, 웃고, 장난도 하고 그랬다. 하지만 자유로웠던적은 없었다.  나는 '착한 어린이'로만 살려고 노력했다.  그래봤자 우리 아버지는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지만 말이다. 

 

 

단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체면을 구기는 자식이 되고 싶지 않았다. 뭐라도 한마디도 실수를 해서 아버지의 명예에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전력을 다해서 아버지의 명예를 지켜드리려고 했다.  아버지는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지만 말이지. 

 

 

아버지는 내가 선택해서는 안되는 직장, 장소도 분명히 못을 박았다. 자신이 평생 일군 영역에 대해서는 그쪽으로 머리도 돌리지 못하게, 발 그림자도 들이지 못하게 못을 박았다.  애비 직장 근처에 자식이 기웃거리면 '불명예'이고 '쪽팔리는' 일임을 누누히 귀에 못이 박히게 주장하셨다.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아버지와 동일한 계통의 직업과는 38선 철책보다 무서운 담장을 쌓았다.  헹! 그 쪽으로는 기침도 안할테니 걱정 마시라!  이게 자존심 강한 나의 입장이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고 아직 살아계신다면 -- 나는 대학교수 직업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격렬하게 앞장서서 방해를 했을것임이 분명하니까. 

 

 

 

유명인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의 자식으로 사는 것은 -- 누군가에게는 '아빠 찬스' 패를 쓸수 있는 행운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족쇄'나 '수갑'같은 것일수도 있다.  생각해보자. 대통령의 자식도 그가 성인이면 이 나라의 시민일 뿐이다. 그는 직장도 가져야 하고, 일도 해야 하고,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생활인으로 살아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대통령의 아들이기 때문에, 며느리 이기 때문에, 딸이기 때문에 숨을 죽이고 할말도 못하고, 욕을 먹어도 엎드려 있어야 하고, 이런 사회라면 이게 정상적인 사회라고 할 만한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어느 아버지의 딸로 사는 동안에도 숨이 막혔다. 할말을 못했고, 기를 펴지 못했다.  아버지가 나 때문에 망신스러우면 안된다는 그 한가지 생각으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단 말이다.  

 

 

좀 엉겨붙지 좀 말라. 숨 좀 쉬게 내버려 두라.  행패부릴데가 그렇게 없는가? 정말로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들여다보고 고통겪는 사람들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고민해야 할 시간에, 기껏해야 별 것도 아닌 사람 하나에 올가미를 매려 드는게 온전한 것인가? 그게 국회의원이 할 짓인가?  정말 지긋지긋하다.  대통령의 자식도 할 말은 편안히 하고 사는, 그냥 편안한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내 아버지는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삼성장군도 아니셨지만, 내가 겪었던 고통으로 다른 자식들을 들여다본다. 

 

할말은 하고 살자. 당신/우리/나는 쥐새끼가 아니다. '사람의 새끼'이다.  쥐죽은 듯이 엎드려 있기보다는, 사람처럼 일어나서, '사람의 말'을 하고 살자. 

 

 

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9. 10. 2. 19:09

연구실에서 쌓인 일을 '전투 모우드'로 해 치우고 있는데, 이슥한 저녁, 여학생 한명이 찾아왔다. 내 연구실은 대체로 문이 반쯤 열려 있으니 와서 기웃거린다. 

 

"왜?" 

 

나는 마치 시골 가겟방을 지키는 아주머니가 무심한 표정으로, 문지방을 넘어 들어서는 동네 아이를 대하듯 묻는다. 

 

 

"교수님, 혹시 우산 있으세요? 밖에 비와요." 

 

비가 오겠지. 태풍 미탁이 상륙 했다고 하니, 밖에 비가 오겠지. 그 학생이 학교 근처 오피스텔에서 지내면서 걸어서 통학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운전하며 외출하는 길에,  걸어가는 그 학생을 몇차례 본 적도 있다.  나는 그냥 턱짓으로만 문앞 의자 옆에 세워져 있는 우산을 가리킨다. 

 

 

"저깄다."

 

"저 써도 돼요?"

 

"응" 

 

"그럼 교수님은 비오는데 어떻게 하세요?"

 

"난 그냥 비 맞으면 된다." 

 

"어머! 그러면 제가 못 빌리지요....전 교수님이 우산이 여러개 있는가 보러 왔지요." 

 

"너를 비를 맞게 하느니, 내가 비를 맞고 말지. 너는 나의 소중한 학생이니까." 

 

나는 빙글빙글 웃는다. (거짓부렁이라는 뜻이다.). 비가 온들, 나는 사실 비 맞는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나는 후드셔츠를 입고 있고, 내가 연구실에서 숙소로 달려가는 길은 정말 짧다. 비를 맞을 거리는 더 짧다.  그런 이유로 나는 우산을 세워 놓을 뿐, 웬만한 비는 그냥 맞고 돌아다닌다. 

 

 

학생은 내 우산을 들고 연구실을 떠났다. 

 

나는 다시 일을 한다.

 

문득, 비오는 날 내 생각을 해 낸 그 학생 얼굴이 떠오른다. 비가 올 때, 우산이 필요할 때, 나를 떠올렸다니 내가 그에게 영 나쁜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누군가에게 우산을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라면, 나 아주 실패한 인생은 아닌것도 같다.  우산을 빌리러 온 내 학생이 우산보다 더 큰 위안을 내게 준것도 같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명예라는 것도 없어진지 오래고, 시정잡배와 다를 바가 없는 오늘날의 대학교수라는 직업.  나는 감히 학생들이 나를 존경해주길 바라지 않는다.  내가 학생들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도 나 스스로 의문스럽다. (나는 엉망이다.  인정한다.)  그냥, 비가 오는 날 우산이 필요할 때, 혹은 손을 다쳐서 위로가 필요할 때, 그럴때, "교수님, 저 우산이 없어요. 교수님, 저 손을 다쳤어요" 뭐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일로 내게 말을 걸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내 사명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스무살 친구, 넌 내게서 우산을 얻었고; 나는 너에게서 위안을 얻었다. 

 

 

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9. 9. 27. 16:19

연세대학교 류석춘 교수가 사회학 강의중 '위안부'가 자발적 매춘 제도였다는 강의를 했다고 하는데  내가 역사 전공자도 아니고 사회학 전공자도 아니지만,  내 증언은 남길수 있다.

 

 

우리 엄마가 1935년생이다. 광복되던 해에 만 10세 어린이였다는 말씀이다. 육이오는 엄마가 15세에 발발했다. 엄마는 우리가 어릴 때, 당신의 어린 시절 '왜정'때 얘기며, '소학교' 다니던 시절 얘기며 '피란'가던 얘기를 아주 생생하게 들려주곤 하셨다. 엄마가 우리에게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하여 거짓부렁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엄마가 '왜정'때 겪은 얘기 중에 '정신대' 얘기도 있다.  지금은 '위안부 (Comfort Women)'으로 표기하지만 엄마는 왜정때의 말인듯 '정신대'라는 말을 쓰셨다.  엄마의 증언은 대략 이런 식이었다:

 

 "왜정때, 느이 이모 (너희 이모)도 일찍 시집을 갔어. 처녀들을 왜놈들이 정신대로 잡아갔거든. 그래서 처녀들 정신대로 끌려갈까봐 빨리 시집을 보내는 집에 많았어.  새댁들도 멀리서 왜놈 순사가 보이면 정신대 끌려갈까봐 얼굴에 검정 재를 칠하고, 여자들을 헛간에 숨기고 그랬어. 정신대 끌려가면 죽는거야.  어린 나도 느이 외할아버지가 '저기 순사온다!' 그러고는 얼굴에 재를 검게 묻혀가지고 숨기고 그랬지."

 

이것이 경기도에서 식민지 시절에 성장한 여성, 우리 엄마의 무한 반복되던 증언이다. 어릴때  '왜정' 얘기와 '육이오'얘기를 하도 실감나게 들어서 마치 내가 경험한 것 같은 공포를 느낄때도 종종 있었다. 

 

 

위안부가 자발적 매춘 행위였다고?  혹시 류모 교수 엄마나 가까운 가족분들이 자발적으로 일황에게 충성하기 위해서 몸을 바치셨던 드라마틱한 가족사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경기도 일원에서 성장한 사람들 얘기는 류모씨의 얘기와는 참 많이 동떨어져있다. 류교수라는 분은 혹시 개인적으로 가족사에 그런 그림이 있었던 것을 일반화 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진다.  만약에 그것이 류교수 가족의 문제였다면 자발적으로 일본에 애국하기 위해서 위안부의 길을 걸어간 그분들에 대하여 역시 슬프게 생각한다. 류교수 힘내고 당신 가족중에 그런 분들을 많이 위로하시라.  그러나 일반화는 하지 말기 바란다.  부끄러운줄 아시라.  아주 옘병을 해요, 옘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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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9. 9. 27. 15:54

엄마 집에 있던 김치 냉장고가 작동을 멈췄다. 그 자리에 있은지 십년도 넘은 것이고, 형제 중에 누군가가 쓰던걸 엄마한테 넘긴 것이라고 하니, 수명이 다 할법도 할 것이다. 그 김치 냉장고는 내가 기억하는 한 고대의 시간부터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내 집에서 김치냉장고를 가져 본 적이 없어 그것이 왜 필요한지 그것도 잘 모른다.  김치를 많이 먹지도 않으니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이런 내 시선으로 볼 때, 엄마 집에서 김치 냉장고가 사라진대도 별로 상관이 없어 보였다.  엄마 집 냉장고는 우리집 냉장고보다 두배쯤 클 것이다.  사실 엄마의 김치 냉장고에 김치가 많이 들어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창고'처럼 이것저것 구겨 넣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래서, 그냥 그 김치냉장고를 내다버리고 덕분에 넓어진 주방을 향유하시면 되는 일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쩐지 엄마는 고장난 것이라도 그냥 끼고 살고 싶은 표정이었다.  노인들은 뭘 버리는 것을 무척 섭섭해하신다.  그래서 살살 달래며 이리저리 물어보니, 그 자리를 비게 놓아두면 안되고, 그러면 추석 명절에 자식들이나 손자 손녀들이 드린 용돈이 꽤 된다며 그것으로 김치냉장고를 하나 사면 되겠다고 하신다.  어딘가 마음이 아려온다.  엄마가 왜 돈이 없지? 엄마가 왜 손자 손녀들이 드린 용돈을 모아서 살림을 사실 생각을 하시는거지? 그렇게 돈이 없었어? 왜? 여러가지 의문이 든다. 엄마가 구차스럽게 살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형제들 사이에서 중론은, 지금 엄마 냉장고만해도 충분히 크니까 김치냉장고가 딱히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었다.  김치냉장고 내다 버리고 그냥 냉장고로 생활해도 불편할게 없다는 것이다. 내 생각도 동일했다. 

 

그런데, 

 

꼭 사지 않아도, 언라인으로 외국 유명 패션 브랜드의 신상품 카탈로그를 보거나 패션쇼를 보는 일은 눈요기만으로도 즐겁다. 그리고 그걸 구경하다보면 하나 사고 싶다는 허망한 욕망이 질기게 들러붙기도 한다. 모 패션브랜드의 가을 카디건 한장에 백만원도 넘는 것을 눈요기로 구경하다가 문득, 저게 한 오십만원이라면 내가 그냥 눈 질끈 감고 사지 않을까? 왜냐하면, 갖고 싶으니까.  백만원이 넘는 지갑 한개를 침 흘리며 들여다보다 생각한다 - 나 기분 내키면 저것도 지금 당장 살 수 있는데...

 

그러다 문득, 엄마의 김치냉장고 생각이 났다.  노인 살림에 어마무시한 김치냉장고도 필요없고, 엄마가 원하는것은 그냥 박스형 단촐한 것인데. 그거 얼마나 하나? 검색을 해보니 예쁘장한 것이 육십만원 정도면 되는 정도다. 

 

만약에 엄마가 어느 백화점 가방가게 앞을 지나치다가 이쁘장한 육십만원 짜리 가방을 가리키면서, "저것 이쁘구나. 나 저것 갖고 싶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나는 두 말 않고 그것을 사 드릴 것이다. 나라면 돈 아까워서 안 사도, 엄마가 사달라면 예쁜 가방 기꺼이 사드린다.  쓸데도 없는 가방을 말이다.  그런데, 엄마가 김치 냉장고를 내다버리고 나면 허전하니 그 자리를 김치냉장고 자그마한 것으로 채우고 싶다는데, 내가 왜 그것을 '필요하지 않다'고 단정지어 버린것인가?  예쁜 옷은 꼭 필요해서 사는가? 그냥 예쁘니까 산다.  내가 신발이 없어서 기십만원 짜리 구두를 사나? 아니 그냥 그 구두가 예뻐서 갖고 싶어서 산다.  명품 가방은 필요해서 사는가? 아니, 그냥 그게 갖고 싶어서 갖는거다.  그러면 김치냉장고는 반드시 필요해야만 사는가?  그것도 엄마가 갖고 싶다고 하면 사드리면 되는거다.  

 

그래서 나는 언라인으로 엄마가 갖고 싶어하시는 자그마한 김치냉장고를 주문하여 엄마 주소를 찍어 보냈다.  그러고나니까 머릿속이 맑아졌다. (사람이 돈을 쓰면 잠시 잠깐 마약 효과가 나는것 같다. 머리가 맑아지고 가벼워진다. 하하하.)  나는 왜 내가 좋아하는 패션 용품은 돈 아까운줄 모르고 사면서, 엄마의 생필품인 김치냉장고를 단지 '냉장고 넓으니 그것이 따로 왜 필요한가?' 이런 꼬리표를 달고 필요없다고 단정한건가?  

 

내가 무엇이 필요하다/불필요하다고 판단할 때, '실용성'의 측면이 아니라 '애장품'의 측면에서 바라보니 그림이 전혀 달라진다. 엄마 옷 오십만원짜리는 망설임없이 사 줄수 있으면서, 김치냉장고는 왜 그렇게 매몰차게 '필요없다'고 말하는가?  그걸 엄마가 좋아하는 옷이나 가방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인데.

 

그래서, "엄마, 곧 김치냉장고가 갈거야. 빨간색 예쁜 김치냉장고가 갈거야"하고 전화를 드리니 어린아이처럼 기쁘게 반기신다. 저렇게 좋아하시는걸 내가 그냥 지나칠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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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Humor2019. 9. 25. 08:59

공 작가는 "그의 요청으로 동양대에 강연도 갔었다"고 진 교수와의 친분을 언급하면서 그에 대해 평가했다. "실은 고생도 많았던 사람이었다. 좋은 머리도 아닌지 그렇게 오래 머물며 박사도 못 땄다"는 것이 공 작가의 평가다. 이어 그는 "사실 그(진 교수)의 논리라는 것이 학자들은 잘 안 쓰는 독설"이라며 "그의 단정적인 말투와 거만한 가르침을 보며 똑똑한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고 깎아내렸다.

[출처: 중앙일보] 공지영, 진중권에 독설 "좋지 않은 머리···돈주면 개자당 갈듯"

 

 

심했다. ABD라고해서, All But Dissertation - 과정은 모두 마쳤는제 학위 논문을 아직 쓰지 못한 상태를 가리키는 타이틀이 있다.  박사학위 공부를 모두 마치고, 마지막 관문인 학위 논문을 해결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많이 있다. 문제의 '진교수'도 아마도 그런 분들중 한분일 것이다.  그러면, 그분들이 '좋은 머리가 아니라서' 박사학위를 마치지 못한걸까?  소설가라는 분이라면 소설적 상상력으로 뭔가 한 사람이 학위를 마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기발한 상상도 할 수 있으련만, '머리가 좋지 않아서'라니. 이건 너무 심심하고 단순하지 않은가? 

 

 

내가 박사학위 공부 할 때, 내 주위에는 온통 '천재'들만 있는 것 같았다. 왜 아니겠는가. 대체로 본국에서 '국비장학생'으로 미국에 와서 공부하던 아주 젊은 친구들이었는데다가, 정말 머리들이 좋아서 학술저널 한번 쓱 보고는 수업중 토론할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나는 오직 '시간'을 들여서 사전 찾고, 읽고, 또 읽고, 줄치면서 읽고, 요약해보고, 그래도 정작 수업에 들어가면 생각이 잘 안나서 천재같은 동기생들이 교수와 진지하게 토론 하는 것을 옆에서 침 삼키며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 잘난 내가 그랬단 말이다.)

 

 

나는 정말 내 동기생들을 존경했다. 진심으로.  그래서 그들을 졸졸 따라다녔다. 똑똑한 천재들 속에 끼어 보려고.  물론 그들은 기꺼이 나를 '친구'로 인정해 줬는데, 그것은 내가 인심 좋게 가끔 한국식 김밥도 싸가지고 가서 나눠먹고, 순전히 '아줌마' 특기로 그들의 환심을 사거나, 그들이 아직 어려서 '창의력'이 부족한 부분을 나의 '관록'과 '이력'과 '경력'으로 채워서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거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평범한 아이큐의 소지자였고 (딱 대한민국 평균 아이큐이다), 그들은 국가대표 천재급 신동들이었다.  내가 석사로 들어갔을때, 그들은 박사학위과정으로 입학을 했다. (유펜 이런 명문대에서 석사 마치고 옮겨오고 그랬다.) 그러면 내가 출발선이 그들보다 한단계 늦지 않은가?

 

 

그런데 학위는 내가 제일 먼저 땄다. 나는 석박사 하는데 4년 걸렸고, 내 동기생들은 박사 하나 하는데 5년 이상 걸렸다. 내가 그들보다 머리가 월등하게 좋아서가 아니었다.  머리는 그들이 나보다 훨씬 좋았다. 영특했다. 나는 항상 그들을 존경했다. 

 

 

내가 머리 한참 좋은 내 동기들보다 진도를 빨리 뺄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간절함이다. 간절함. 간절함. 간절함.  목숨걸고 공부를 해 내는 간절함 같은게 내 삶을 지배해서다. 그냥 그 간절함으로 주변을 움직여 나간것 뿐이다.  오직 학점과 내 연구 과제에 촛점을 맞추고, 거의 모든 시간을 도서관에서 살면서, 그냥 공부와 연구작업만 들이 판 결과다. 

 

 

머리 좋은 내 동기생들이 방학이면 고국에 가서 쉬다 온다거나, 라스베가서, 뭐 비행기타고 미국 '명승지'에 놀러다닐때, 나는 텅빈 도서관에서 공부만 했다. 천재같은 동기들과 '경쟁'을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나보다 잘났다. 경쟁 대상이 아니다.  그 대신 나는 시간과 경쟁을 하고 있었다. 빨리 학위를 마치고, 나를 기다리는 가족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절실함. 그것만이 나를 지배했다. 

 

 

내가 존경하던 내 친구들은 미국의 이름있는 주립대의 교수로 가서 활동을 잘 하고 있다.  나도, 먼 길을 돌았지만 결국 내가 향하던 곳에 이르렀다.  나도 내 계획대로 잘 지내고 있다. 

 

 

나는 지금도 나보다 한참 어린 내 동기들을 존경한다. 그들이 박사학위를 나보다 길게 한참 한 것은 그들이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었다. 나는 절실했고, 내 논문에 필사적이었고, 그들은 넓게, 깊게 학문의 바다에서 헤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니, 그들의 학문의 깊이가 나보다 훨씬 깊었을 것이다. 

 

 

지향성의 문제다. 어떤 사람은 학위논문까지 가지 않기도 한다. '이만하면 족하다'고 스스로 그 쯤에서 정리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사람 '머리가 안좋아서'라고 말 할수는 없다. 박사공부에 입문했으나 학위를 마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각자 이유가 있다.  정말로 재수가 없어서 이상한 지도교수 아래에서 고생만 죽어라 하다가 물러 났을수도 있고,  혹은 중한 병에 걸려서 퇴장을 하기도 한다. 그냥 어디쯤서 힘이 빠져서 학위 논문 대신에 다른 길을 선택 할 수도 있다. 이 사람들이 모두 '머리가 안좋아서' 그런 길을 가게 된 것은 아니다. 

 

박사학위...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미국이건 한국이건 간에 박사학위는 빼어나고 영특한 지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좀 평균 수준의 아이큐를 가지고, 꾸준하고 성실하게 공부와 연구를 하고, 마지막 관문인 논문만 써내면 되는 것이다.  박사학위 논문 안쓰고 수료만 하신 분들중에 정말로 머리가 뛰어난 분들 많다.  그래서 나는 가끔 '박사학위'를 가지고도 나는 왜 이것밖에 못하고 사나? 이런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학위 논문을 잘 써내는 '성격'의 사람이 있고, 두루 넓게 공부하는 '성격'의 사람도 있고 그런 것이다. 

 

 

진교수가 박사학위가 있는지 없는지 나는 알지 못했지만, 우리집에도 그가 지은 미술 교양서적이 많이 있다. 대체로 잘 쓴 책 들이다. 그거면 족하지 않은가? 그렇게 좋은 책들을 써낸 사람을 향해서 '머리가 안좋아서'라고 말한다면, 도대체 책 한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리지 못한 사람들은 다 나가서 죽으란 말인가?  머리는 왜 들먹이는가? 비난하고 싶으면 좀 우아하게 하면 좋을텐데.

 

 

그나저나, 진교수 요새 죽을 맛 이겠다. 이분은 소속 정당에서 나가고 싶을 뿐 아니라, 소속 직장에서도 나가고 싶으실것 같다. 아예 지구를 떠나고 싶을 것도 같다. 참 ... 이게 뭐냐 싶으시겠다.  그 한심스러운 상황에 깊이 공감한다.  어지러운 세상이다. 

 

* 진교수, 영어 되시면 나도 내 클래스에 특강 부탁드려보고 싶다.  영어 강의만 가능한 곳이라서, 난관이 있긴 한데...그냥 유창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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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9. 9. 16. 13:07

 

 

어느장관의 자녀로 인해 대한민국 수시입학과, 힘있고 돈있는 이 사회의 부모들의 넘치는 후계자 사랑이 도마위에 올라있다. 뭐,  장관 따님의 입학 서류는 5년 기한이 지나 모두 폐기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검찰이 알아서 조사할 일이고, 사실 그 일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다.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그냥, 좀, 궁금해진다.  최근 5년 사이에 한 해를 정해서, 그 한해에 서울대학교에 수시 입학한 학생들 서류를 싹 다 조사를 하여, 특히 학계, 재계, 언론계, 정계, 관계, 기타 힘쓰는 부모들 슬하의 자녀들 중심으로 이들의 스펙이 서로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연구를 하는거다. 빅 데이타 연구자들 몇 명 투입하면, 관계도가 나오지 않겠는가? 

 

문제가 발견되면, 5년 데이타 다시 조사하고, 각 '인기있는 대학'으로 조사를 확대해 나가는거다. 자식가진 죄인으로 넘쳐나는 기묘한 사회.  힘없는 부모를 가진 청소년들도 공평하게 기회를 가질수 있는 사회를 구축하는 일이 참 요원해보인다. 

 

나 역시 자식 가진 죄인이니 뭐라고 입도 뻥긋 하지 못할 처지이긴 한데, 그래도...나는...내가 근무하는 대학에서, ESL 프로그램 책임자로 있으면서도, 가끔 자식 데려다가 학교 일도 막 시켜 먹었으면서도,  내 자식 인턴 따위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하러들면 왜 못하겠나.  상장도 만들어 주러들면 왜 못하겠나.  하지만, 그건 참 비루하고, 염치없고,  남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걸 그렇게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할 수 있다니...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다. 그냥 바보로 남기로 하자, 기왕에 이렇게 된거.)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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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etch2019. 5. 21. 12:24

 

Daniel Pink 의 'When' 이라는 책을 보면, 미래시제가 분명한 언어권 (예: 영어, 한국어)의 사람들과, 미래시제가 분명치 않아서 (예, 중국어) 현재 시제가 상황에 따라서 미래로도 해석이 가능한 언어권 사람들이 행동 패턴에 약간 차이가 보인다고 한다.  핑크는 '언어'가 행동 패턴에 영향을 끼친다기보다는 그들 문화권의 행동 패턴이 '언어'에도 반영된다는 식으로 그 상관 관계를 설명했다.  (언어가 행동을 결정하는가  환경이 언어에 영향을 끼치는가는 해묵은 언어학계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어쨌거나.)

 

 

이 '미래시제'의 있고 없고가, 그 언어권 사람들이 '미래'를 준비하는 행동 패턴에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얼핏 생각하기에 '미래시제'가 있는 언어권에서 '미래'에 대한 준비를 체계적으로 준비 하는게 아닐까 그런 상상을 했었는데 (내가 책 읽을때 그런 상상을 했었다), 결과는 정 반대였다.  현재시제 안에 미래시제까지 뒤섞인 (미래 시제가 분명치 않은) 언어권의 사람들이 그들의 '노후대책'에 더 열심이라는 통계치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언어속에서 현재와 미래가 혼재되어 있는 문화권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먼 남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라는 것이다.  미래를 '미래'의 일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언어권 사람들이 미래 계획에 방심 한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현재 닥친 일이 아니니까. 

(예수님은 내일 일은 염려하지 말아라. 오늘 하루의 근심으로 족하다 뭐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고민에 빠진 나.)

 

흔히 '비단이 장수 왕서방'은 '돈을 밝히는 사람'으로서의 중국인을 칭하고, '중국인들은 현실적이다'라는 통념도 있는 편인데, 아마 이들의 '현실적인 사고방식'이 '재물을 축적하는 것에 열심인' 태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에게 '미래'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말이 잊었노라 노래 할 수 있는 먼 훗날이 아니고, 현재의 일이므로, 미래의 현재를 위해서는 지금 당장 돈을 아끼고 돈을 모아 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또다시, 사고를 확장시켜 생각을 해본다.

 

 

죽음을 미래의 별개의 사건으로 상정하고 오늘 하루를 사는 사람과, 오늘 하루 '죽음'을 함께 사는 사람의 삶의 패턴도 다를 것이다.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과, 죽음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이 사는 사람은 분명 다른 삶을 살 것이다.  나는 어떤가?  나는 미래에 대한 준비도 별로 안하고 오늘 하루 살고 마는데, 왜냐하면 내일 아침에 내가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에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는데 왜 내일 걱정을 해야 하는가?  이런 사고 방식은 뭐지?  내 하루에는 죽음이 깃들어 있는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