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etch2019. 9. 27. 15:54

엄마 집에 있던 김치 냉장고가 작동을 멈췄다. 그 자리에 있은지 십년도 넘은 것이고, 형제 중에 누군가가 쓰던걸 엄마한테 넘긴 것이라고 하니, 수명이 다 할법도 할 것이다. 그 김치 냉장고는 내가 기억하는 한 고대의 시간부터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내 집에서 김치냉장고를 가져 본 적이 없어 그것이 왜 필요한지 그것도 잘 모른다.  김치를 많이 먹지도 않으니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이런 내 시선으로 볼 때, 엄마 집에서 김치 냉장고가 사라진대도 별로 상관이 없어 보였다.  엄마 집 냉장고는 우리집 냉장고보다 두배쯤 클 것이다.  사실 엄마의 김치 냉장고에 김치가 많이 들어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창고'처럼 이것저것 구겨 넣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래서, 그냥 그 김치냉장고를 내다버리고 덕분에 넓어진 주방을 향유하시면 되는 일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쩐지 엄마는 고장난 것이라도 그냥 끼고 살고 싶은 표정이었다.  노인들은 뭘 버리는 것을 무척 섭섭해하신다.  그래서 살살 달래며 이리저리 물어보니, 그 자리를 비게 놓아두면 안되고, 그러면 추석 명절에 자식들이나 손자 손녀들이 드린 용돈이 꽤 된다며 그것으로 김치냉장고를 하나 사면 되겠다고 하신다.  어딘가 마음이 아려온다.  엄마가 왜 돈이 없지? 엄마가 왜 손자 손녀들이 드린 용돈을 모아서 살림을 사실 생각을 하시는거지? 그렇게 돈이 없었어? 왜? 여러가지 의문이 든다. 엄마가 구차스럽게 살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형제들 사이에서 중론은, 지금 엄마 냉장고만해도 충분히 크니까 김치냉장고가 딱히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었다.  김치냉장고 내다 버리고 그냥 냉장고로 생활해도 불편할게 없다는 것이다. 내 생각도 동일했다. 

 

그런데, 

 

꼭 사지 않아도, 언라인으로 외국 유명 패션 브랜드의 신상품 카탈로그를 보거나 패션쇼를 보는 일은 눈요기만으로도 즐겁다. 그리고 그걸 구경하다보면 하나 사고 싶다는 허망한 욕망이 질기게 들러붙기도 한다. 모 패션브랜드의 가을 카디건 한장에 백만원도 넘는 것을 눈요기로 구경하다가 문득, 저게 한 오십만원이라면 내가 그냥 눈 질끈 감고 사지 않을까? 왜냐하면, 갖고 싶으니까.  백만원이 넘는 지갑 한개를 침 흘리며 들여다보다 생각한다 - 나 기분 내키면 저것도 지금 당장 살 수 있는데...

 

그러다 문득, 엄마의 김치냉장고 생각이 났다.  노인 살림에 어마무시한 김치냉장고도 필요없고, 엄마가 원하는것은 그냥 박스형 단촐한 것인데. 그거 얼마나 하나? 검색을 해보니 예쁘장한 것이 육십만원 정도면 되는 정도다. 

 

만약에 엄마가 어느 백화점 가방가게 앞을 지나치다가 이쁘장한 육십만원 짜리 가방을 가리키면서, "저것 이쁘구나. 나 저것 갖고 싶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나는 두 말 않고 그것을 사 드릴 것이다. 나라면 돈 아까워서 안 사도, 엄마가 사달라면 예쁜 가방 기꺼이 사드린다.  쓸데도 없는 가방을 말이다.  그런데, 엄마가 김치 냉장고를 내다버리고 나면 허전하니 그 자리를 김치냉장고 자그마한 것으로 채우고 싶다는데, 내가 왜 그것을 '필요하지 않다'고 단정지어 버린것인가?  예쁜 옷은 꼭 필요해서 사는가? 그냥 예쁘니까 산다.  내가 신발이 없어서 기십만원 짜리 구두를 사나? 아니 그냥 그 구두가 예뻐서 갖고 싶어서 산다.  명품 가방은 필요해서 사는가? 아니, 그냥 그게 갖고 싶어서 갖는거다.  그러면 김치냉장고는 반드시 필요해야만 사는가?  그것도 엄마가 갖고 싶다고 하면 사드리면 되는거다.  

 

그래서 나는 언라인으로 엄마가 갖고 싶어하시는 자그마한 김치냉장고를 주문하여 엄마 주소를 찍어 보냈다.  그러고나니까 머릿속이 맑아졌다. (사람이 돈을 쓰면 잠시 잠깐 마약 효과가 나는것 같다. 머리가 맑아지고 가벼워진다. 하하하.)  나는 왜 내가 좋아하는 패션 용품은 돈 아까운줄 모르고 사면서, 엄마의 생필품인 김치냉장고를 단지 '냉장고 넓으니 그것이 따로 왜 필요한가?' 이런 꼬리표를 달고 필요없다고 단정한건가?  

 

내가 무엇이 필요하다/불필요하다고 판단할 때, '실용성'의 측면이 아니라 '애장품'의 측면에서 바라보니 그림이 전혀 달라진다. 엄마 옷 오십만원짜리는 망설임없이 사 줄수 있으면서, 김치냉장고는 왜 그렇게 매몰차게 '필요없다'고 말하는가?  그걸 엄마가 좋아하는 옷이나 가방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인데.

 

그래서, "엄마, 곧 김치냉장고가 갈거야. 빨간색 예쁜 김치냉장고가 갈거야"하고 전화를 드리니 어린아이처럼 기쁘게 반기신다. 저렇게 좋아하시는걸 내가 그냥 지나칠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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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