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만들기 패키지를 언라인에서 주문을 해봤는데, 별로 질감도 좋아보이지 않는 대충 본뜬 헌겊과 부자재가 들어있었는데, 어떻게 만들라는 설명서가 없었다. (설명서는 넣어줘야 하는게 아닐까?)
그래서, 대충 만들려다가 그래도 유튜브를 열고 아무거나 '마스크만들기' 방법을 살펴보았다. 역시 '선수'들의 설명을 들으면 나도 아이디어가 생긴다. 단순한 것이지만 선수들의 사례를 참고하면 도움이 많이 된다. 고마운 인터넷.
온종일 마스크 착용하고, 자기 구역에서만 '실험상자 속의 쥐'처럼 맴돌며 머리를 쓰다가 저녁에 집에 오면 머리가 멍해진다. 뭔가 '육체적인 일'을 하고 싶어진다. 티브이 오락프로그램을 틀어놓고 대충 대충 삐뚤빼뚤 기분내키는대로 오랫만에 홈질. 보내준 분홍 바느질실이 마음에 쏙 든다. 색깔 자체가 기분을 좋게 만든다. 색깔치료, 동작치료. 기분이 평화로와지고 그냥 감미롭다.
그래서 한 세시간만에 앞면 뒷면 그림이 다른 양면 입체마스크를 만들었다. 윗부분을 2/3쯤 열어 놓았다. 필터 갈아 넣는 창이다. 줄도 끼었다 (생각보다 쉽네). 정전기청소포 필터를 집어 넣었다. 끝.
내가 생각해보니, 남편 안입는 고급 면소재 와이셔츠를 잘라서 아주 큼직한 마스크를 만들어야겠다. 남편것. '해지'천이 멋있을텐데. 찾아보자. 이제 나는 마스크를 사지 않겠다. 나의 아주 아주 먼지만하게 작은 애국의 방법이다.
오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복도에서, "어머! 마스크 이쁘다! 오모 오모! 직접 만드신거에요?" 우리들은 아주 작고 보잘것 없는것 한가지를 가지고 서로 기분좋게 웃었다. 사는거 뭐 별거 있나...별거 없다. 작은 일에 기쁘게 깔깔대고, 뭘 먹어도 기쁘게 맛있게 먹고, 서로 웃어주고. 뭐 별거 있나. 하느님이 하늘에 계시니 오늘도 기쁘다.
내가 마스크 필터를 만들어내어 매일 매일 잘 지내는 이후로 이상하게 내게 마스크 선물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요즘은 '마스크'가 귀한 우정의 표시가 되어버린듯 하다. 누가 내게 마스크를 선물로 내밀면, 나는 감사히 받아가지고 곧바로 아무나 내 앞에 나타나는 학생의 손이 쥐어준다. 귀한 자식이다. 학비를 해결하기 위해 동동거리며 뛰어다니는 아주아주 귀한 자식들이다. 즐겁다. 즐거운 인생. 어서 모두 떨치고 일어나시길. 무사하시길.
* 사실 2월초에 한국에 돌아온 후 나는 마스크를 딱 한 번 샀다. 약국에서 내것 남편것 딱 두장. 그 때 뭐 한장에 3,500원 하길래 기가 막혀서 그 이후로 안샀다. 내게는 비축분이 있었다. 미세먼지때문에, 작년에 언라인으로 한상자 (50장) 사 놓고 필요할때 쓰던것이 남아 있었다. 양말 서랍에 그냥 있었다. 그래서 그것 쓰다가, 뭐 구차스럽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마스크 한장에 3,500원인것이 말이 안돼서 그냥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이제는 심심할때마다 헌셔츠 잘라서 마스크나 만들어야지. 필터 갈아쓰면 되도록 만들면 된다. 재봉틀 사서, 막 만들어갖고, 막 여기저기 뿌리고 싶어진다마는, 일해야 한다. 수업 찍어야 한다. 아... 그런데 WHO 세계보건기구 의장, 그 사람 신뢰가 안간다. 이상한 사람같다. 그냥...나 그사람 티브이에 나오면 채널 돌린다. 아베나 시진핑 만큼이나 그 사람이 맘에 안든다. 이유는, 모르겠다.
(왼쪽부터) 방한용 헝겊 마스크, 정전기청소포 (2000원), 키친타월정전기 청소포를 마스크 크기에 맞춰 착착 접은후 키친타월로 착착 접어 감싼다.
키친타월로 접어서 청소포를 감싼 상태.얇은 솜이 안쪽에 들어있는 방한용 면마스크의 안쪽 한 편을 가위로 가른후 위에 접어 놓은 '필터'를 집어 넣는다. (끝)
뉴스를 보니까 지자체에서 헝겊 마스크에 정전기 부직포(?) 를 넣어서 임시변통으로 만들어낸 방역마스크가 인증 받은 마스크와 비슷한 효과가 있다고 해서 나도 머리를 써서 만들어보았다. '정전기 부직포(?)'를 따로 사야 하나? 고민하다가 내가 알고 있는 정전기를 이용한 청소용 티슈 생각이 나서 -- 정전기를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이소에서 정전기 청소포 사다가 만들어 보았다.
우리나라 군 장병들이 사용할 마스크까지 민간에 풀어야 한다는 뉴스를 보고 내가 약간 화가 났다. '군인'들이 우리나라 지키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 마스크를 빼앗아다 쓰면 어쩐다는 말인가? 그것은 안 될 말이라고 본다.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마스크를 안 사는 것이 마스크가 급히 필요한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이 될것이다. 우리 식구 것은 내가 이렇게 매일 갈아쓰면 되니까 (매일 저녁에 필터는 빼서 버리고 마스크는 깨끗이 빨아서 말리면 된다) 아무튼 다른 분들에게 먼지 만큼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군 장병에게 지급될 마스크를 빼앗으면 안된다. 군장병은 나라를 지키고, 나는 군에 있는 우리 아들/딸들을 지켜주고 싶다. 마스크는 노약자, 대구 경북 시민, 군장병들에게 먼저 가고 -- 후방의 대체로 평범한 나같은 소시민들은 마스크 사겠다고 줄 서지 말고 각자 만들어 쓰는거다. 이 난리통에 마스크 매점매석 해 놓고 실익을 챙기는 분들에게 '빅 엿'을 선물하고 싶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필터'를 차곡차곡 접어 만들어서 비닐봉지에 갖고 다니다가 하루에도 여러번 갈아 써도 되겠다. 뭐 청소포와 키친타월은 비싸지도 않으니까. 청소포는 다이소에서 사옴.
만약에 갖고 있는 헝겊 마스크가 홑겹이라면? 내가 그 문제도 생각을 해 봤다. 뭐 남편이 입던 헌 내의 (난닝구) 그거 잘라서 마스크 크기만큼 두세겹으로 접는다. 삼면을 바느질하여 헝겊 마스크 뒷면에 붙인다 (코/입에 닿는 부분). 꿰메지 않고 남겨 놓은 쪽으로 필터를 넣고 뺀다. 판매하는 헝겊 마스크를 사용하는 이유는, 헝겊 사서 마스크 본떠서 바느질하고 끈 달기 귀챦아서...헝겊 마스크는 구하기도 수월하고 한번 사면 매일 빨아서 쓸수 있으니 편하게 가자는거다. 편하게. (쉽죠? ㅎㅎㅎ ) 내가 수실이 있으면 마스크 겉면에 수도 놓아 쓰고 다니련만...음, 이러다 마스크 패션 만들어서 수출할라...
찬조출연: 내 손 -- 하도 자주 따뜻한 물에 비누칠해서 문질러대니 요즘 내 손이 거의 투명해진듯하다. 평소에도 이렇게 자주 닦고 살았어야 했는데. 소독제--비누로 씻기--핸드크림--소독제--소독제--비누--핸드크림 이런식의 무한반복이 하루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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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에 A형 독감 '확진' 받았던 날 생각이 난다 --나는 열나고 사지가 쑤시고 골치 지끈거리고 아주 죽을 맛이었는데 동네 내과에 가니 간호사가 열 재보고 "열 없네요" 이런다. 난 열이 나는데 열이 없단다. 의사선생님도 똑같은 말 하고. 열이 없으니 크게 문제가 안된단다. 그래서 내가 "아프니까 집에 있는 타이레놀 이런거 먹었으니까 열이 내린거 아닐까요?" 그랬더니 그제서야 "그래요? 그럴수도 있지요." 이러더니 뭐 독감 검사를 해 보잔다. 뭐 코로 길다란 대롱을 넣어서 콧물을 채취를 하는데 약간 무서웠지만 검사 결과는 바로 나오더라. "에이형 독감이군요. 기록보니 얼마전에 여기서 독감 예방접종 하셨네. 그래도 독감 걸릴 수 있어요." 뭐, 그러더니 감기증상 처방해주면서 타미플루 한판 (5일치 한판) 무조건 끝까지 먹으라고 하더라. 증상완화를 위해서는 감기몸살 처방약을 처방해주는데 '타미플루'는 증상완화보다는 '전염성을 방지하는' 목적의 약이라고 설명을 들었다. 그래서 증상이 없어져도 타미플루는 무조건 끝까지 먹으라고 (남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한다.) 그래서 남이 내게서 전염 되는 것을 막기위해 그 독한 약을 다 먹었다.
내가 염려하는 부분은 자기는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앓고 있으면서도 잘 모르고 지나가는 '건강한 앓는 사람들'과 내가 접촉 했을경우 나만 바가지 쓰는거지 뭐. 난 감기, 독감 센서가 아주 발달해서 감기에 취약한 편이고. 방어 방법은 손씻고 마스크 착용하고. 그것밖에 없다. 직장 생활을 안 할 수도 없고. 내 직업이 사람을 대면하는 일인데.
그러니 제발 좀 건강한 사람들도 남을 위해서 마스크를 착용했으면 좋겠다. 건강한 사람이야 코로나 걸려도 약먹고 금세 떨치고 일어나면 그만이지만, 약한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일수 있다. 나도 뭐 '걸리면 별 수 있나 아프고 지나가는거지' 하는 편이지만 남을 위해서도 최대한 방어를 해야 하는거다.
'신천지 교육장인지도 몰랐다' 는 기사를 보면서 깔깔 웃었다. (이 중차대한 시기에 웃으면 안되는데) 깔깔대다가 내린 결론 -그래, 외로우면 낚이는거다.
이 기사를 보면 신천지 사이비 집단이 멀쩡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어떻게 끌어들이는지 상세히 묘사가 되어 있는데, 주로 심리검사로 유인을 하여 고민도 들어주고, 연락을 자주 취하고, 자주 만나서 밥도 먹고 뭐 친절을 베풀다가 그냥 저도 모르게 끌어가는 구조인것 같다.
그러면, 이들이 나에게 접근하지 못 한 이유:
(1) 일단 나는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아예 눈도 안마주치고 그냥 지나치는 편이다.
(2) 가까운 사람에게도 고민을 토로하거나 마음을 털어놓지 않는다. 내 문제는 내가 안고 간다. (예수쟁이가 된 후에는 기도하면서 다 풀어 놓는데, 그거야 하느님과 나 사이의 문제이고, 다른 사람은 내 속을 알 수 없다.) 그러니 누군가 내 삶의 문제 틈바구니에 간교하게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다.
(3) 전화 받기를 싫어한다. 심지어 가족 전화도 잘 안받으므로 낯선자가 내게 전화 해 봤자 나하고 소통이 안된다. 친하다고 전화를 자주하면 아주 교제를 끊어버린다. 누군가 내 삶에 들어오는걸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더 싫어한다.
(4) 무슨 모임에 나가는걸 극도로 귀챦아 한다. 나는 내 일외에는 나 혼자 노는게 제일 재미있다. 그러므로 나를 만나기는 매우 어렵다.
(5) 나는 무슨 집단을 잘 신뢰를 안한다. 대개 '사기꾼 놈들'이라고 보는 편이다. 그래서 정당 가입도 안하고 살고 있다. 정당놈들도 내 눈에는 다 사기꾼 놈들이다.
(6) 나는 남의 말을 잘 안듣는다. 내가 예수쟁이 이지만, 성경끼고 앉아 홀로 공부하고 사색하고, 책보고 스스로 배워나가는 편이지 무슨 유명하다는 목사나 그런 사람들 설교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나와 하느님사이의 소통에 끼어드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우리 교회 목사님 말도 그냥 대충 흘려 듣는다. 그냥 반은 사기꾼이겠거니 하는 편이 속 편하다. 나도 사기꾼 너도 사기꾼이라는 입장이다. 내가 잘 난 사람이라는 생각도 없다. 너나 나나 사기꾼이니까 서로 가르칠 생각은 말자는거다. 하느님만 나를 가르칠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내가 지금 대단하다는 사람들 말도 콧등으로 흘려 듣는 판에 잘 알지도 못하는 이웃 아무개가 친한척 다가와서 낚싯밥을 던지면 물겠는가? 그런데, 성격상 Field Independent 혼자서 잘하고 혼자서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여럿이 모이길 좋아하는 사람 (Field Dependent) 도 분명 있다. 그분들 잘못이 아니다. 성격상 그런 분들이 낚이기 쉬운 구조이다.
이 참에 잘못된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을 다 잡아들이고, 고통받고 있는 사이비 교단의 선량한 시민들이 해방되길 빌어본다. 그분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미혹에 빠진 소시민들일 뿐이니. 거짓말 일삼고 소시민들을 바보로 만드는 저 수괴들을 발본색원 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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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한국 교회 이참에 매 좀 맞아도 싸다. 코로나 와중에 2월 초에 입국한 나는 입국 이후에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내가 하루 한시간 아침 예배와 기도를 실천하는 열혈 예수쟁이인데, 그래도 일요 예배에 벌써 몇주째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감기에 잘 걸리니까, 교회 예배에 갔다가 감기에 옮아가지고 오면 내가 조금이라도 교회를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평생 예수쟁이로 살다가 천국으로 갈 목숨인데, 뭐 교회 한두달 빠진다고 하느님이 나보고 뭐라고 하시겠는가? 하느님은 암말 안하신다. 매일 한시간씩 데이트 중인데 뭐. 뭐 이렇게 생각하고 예배에 빠져도 마음이 무겁지도 않다. 그리고 매일매일 가볍게 지내고 있다.
나는 교회 소모임 (속회)이런것도 안다닌다. 예배 드리고, 기도회 하면 가고, 새벽기도회도 나가고 뭐 그러긴 하는데 소모임으로 모여서 뭐 하는거는 안한다. 하고 싶으면 하지만 별로 하고 싶지도 않고 그럴 시간도 없다. 나도 바쁘다. 그래도 우리 교회 목사님들은 나를 잘 아시고, 나도 성실한 성도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어느날 카톡이 시끄러워서 봤더니 나도 모르게 내가 교회 소모임에 등록이 되어 카톡 단체방에서 뭐라고 뭐라고 대화가 오간다. 그냥 지워버리려다가 (나는 카톡도 그냥 지워버린다) 뭔가 봤더니, 소모임 회원들이 모임 장소 얘기를 하다가, 요즘 코로나 때문에 위험하니 당분간 소모임을 자제하자는 의견을 누가 냈고 대체로 수긍하는 내용이었다. 참 상식적인 분들이네, 안심하고 그냥 지워버렸다. 소모임 안하겠다 이거다. 그렇다, 내가 비록 참석하여 활동하지는 않지만, 교회에서 나를 집어 넣은 그 소모임 신도들은 상식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위험하니 소모임을 당분간 하지 말자는거다. 얼마나 상식적인가.
그런데, 왜 교회에서는 아무런 공지가 안뜨는거지? 이쯤 되면 교회에서도 "신도 여러분....그러하오니...일요 예배에 오시는 대신에 각자 가정에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예배를 하실것을 권해드립니다..." 뭐 이런 메시지가 와야 하느것 아닌가? 왜 일체 소식이 없지? 나는 언라인으로 십일조도 꼬박꼬받 내는데 왜 언라인으로 일자 소식이 없지? 이런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한국 교회 정신 차리라. 신도들에게서 헌금 받는것에만 할레루야 외치지 말고 좀 상식적으로 신도들을 이끄는 방식을 실천해 주기 바란다. 나는 나 혼자 생각하고, 중얼거리다가, 나의 길을 가면 된다. 어차피 인간에게 크게 기대 안한다. 종교지도자들에게도 크게 기대를 가지면 안된다. 각자가 하느님 앞에서 올바로 서서 하루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타당하다.
"Listen to your heart" 라는 표현이 있다. 네 마음이 진정으로 갈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면의 소리를 들으라는 것이다. 중요한 덕목이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이 경구를 스스로에게 혹은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 들려주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종종 "Do NOT listen to your heart" 를 혼자 중얼거리기도 한다.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의 반대방향으로 가는 것이 인생에서 정답일 때가 많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말하자면 -- 나는 아주 사악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다. 숲속의 여우처럼 늘 사방을 돌아보며 숨고, 눈치보고, 도망갈 준비를 하며, 썩은 고기건 뭐건 닥치는대로 내것으로 만들고 싶어진다. 그것이 내 본성이다. 나는 미세한 표정의 변화도 없이 거짓말을 할 줄도 안다. 아마 거짓말 탐지기도 내 거짓말을 감지하기는 어려우리라. 나는 한마디로 교활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다. 나는 내가 그런 인간임을 알기에, 내가 내 뜻대로 하면 정말 큰 일을 낼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어떤 판단을 해야 할 때, 그것이 순전한 나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사회가 연결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내 판단에 연결되어 있을 때, 그 때 나는 알고 있다. 내 마음이 쏠리는 '반대' 방향으로 선택을 하면 그것이 정답이다.
목사님들이 어디에 가 놓고서 안갔다고 발뺌을 하거나, 예배에서 수천명을 만났으면서 안만났다고 거짓말을 하는 동기가 무엇일까? 교회를 위해서? 신도를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그들이 거짓말을 하는가? 집단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배를 진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금 받는 날이라 돈 받기 위해서? 그들이 뭐라고 설명을 해도 내가 보기에는 거짓말이나 예배 강행의 이유가 '타인'이나 '사회'를 위한 판단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인것으로 보인다. 하느님을 팔아서 장사하려고 하는 것으로 밖에는 해석이 안된다. 어떤 핑계를 대도 내 눈에는 그들이 '돈'에 눈이 멀어 성전에서 사기를 치는 사람들로만 보인다. 내가 목회자라도 나는 돈에 눈이 멀을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유혹의 소리가 내 가슴에서 울릴때, 나는 내 말을 들으면 안된다. 내가 사악하게 속삭이는 말에 귀를 닫고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방법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 말을 들으면 안된다. 그럴때, 나는 하느님이 내게 미소 지으신다는 것을 감지한다. 나의 판단으로 내가 잠시 문제에 빠질수는 있으나 그것이 구원임을 나는 감지하는 것이다.
국내 대학들은 삼월 중순 혹은 사월 초까지 개강이 연기되고 있지만, 우리 대학은 이미 금주에 개강했다. 물론 입학식도 생략되고 많은 것들이 생략된 가운데, 언라인으로 임시 진행하는 방식으로 개강을 했다. 교수와 학생들은 서로 접촉할 수 없고 오직 언라인으로만 소통한다. 나는 매일 내 수업내용을 비디오로 촬영하여 올리고 있다. 오늘도 내일 수업 내용 비디오를 제작해야 한다. 내가 총감독이고, 출연자고, 다 한다. 내가 능력자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신입생들도 착실히 언라인으로 과제를 제출하고 있다. 역시 인터넷 세대 주인들이라서 응답이 빠르다. 걱정은 기우였다.
학교도 유령타운 처럼 적적하다. 달팽이들처럼 각자 연구실에 숨어서 일을 할 뿐이다.
저녁에 한 학생이 내 연구실앞에서 들어오지도 못하고 기웃거린다. 중국인 학생이다. 들어오지는 않고 밖에 서 있다. 나 보러 온건가? 내가 운영하는 센터를 찾아 왔다. 물론 센터 서비스도 열지 않았다. 비상 상황이니까. 센터에는 아무도 없지만, "내가 센터다. 무슨 도움이 필요하지?" 언라인으로 모든 수업이 진행이 되니까 문제 상황이 많을거다. 그 학생은 프로그래밍 과제가 있는데 튜터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해서 왔다고 한다.
내 연구실에 들어와 소파에 앉게 하고 차를 한 잔 주었다. '잘 지내니?'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있어서 쓸쓸하다고 한다. 아직 교과서 주문한 것은 도착도 안했는데, 과제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난감한데 아무하고도 얘기를 하면 안된다고, 그래서 다른 학생들에게 가서 도움을 구할수도 없다고. 참 딱하다.
지금은 비상상황이고, 다른 방도가 없어 언라인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교수들 역시 이 상황이 학생들에게 매우 힘들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설령 네가 기한안에 과제를 다 수행하지 못해도, 네가 이러한 상황을 교수께 이메일로 전하면 교수께서 문제 해결 방법을 알려주실거다 -- 이렇게 설명을 해 주었다. 안심되는 눈치이다.
학생이 몇번이나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나간 후에 나는 손 소독제로 손을 문지르고 학생이 만졌던 펜과 이러저러한 것들을 소독했다. 그리고나서 동료교수에게 이메일을 쓴다 아무개가 이러저러한 문제로 상담을 하러 왔으니 그에게 적합한 방도를 구해 주시면 감사하겠나이다. 나는 불안하다. 하지만 불안한채로 마스크를 하고, 유령타운 같이 고요한 학교의 복도를 가로질러 내 연구실까지 학생이 찾아오면 그를 소파에 앉게 하고 차를 내어준다. "야! 마스크 쓰고 들어와!"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그가 귀에 마스크를 걸고 있으면. 하지만 마스크도 없이 오는 학생에게는 아무 말도 안한다. 대신 내가 마스크를 단단히 쓴다. 하여간 나는 학생들에게 따뜻한 차를 주고 그들의 당면한 문제를 들어주고 해법을 찾아 준다. 그러면서도 학생이 나가자마자 히스테리컬하게 손 소독제로 여기저기 문지르며 법석을 떤다.
자연인으로서의 나는 연구실 걸어 잠그고 아무도 상대하고 싶지 않다. 그나마 그것이 안전해 보이니까. 하지만 사회인인 나는 문을 열고 학생을 맞이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찾아가 의논할 상대가 나밖에 없어서 내게 온것이니까.
(아, 나의 사회적 자아는 내가 생각하는 나하고는 조금 다르구나 --- 손소독제를 히스테리컬하게 문지르며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어서 이 어두운 시간이 지나가고 모두가 휴식을 취할수 있기를.
영화 '작은 아씨들(2019)'을 극장에 가서 조조할인으로 보았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황제 관람 모우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위에 올려 놓은, 조가 동생 베쓰를 잃은 후에 '작은아씨들'을 집필하면서 원고를 펼쳐 놓는 장면.
다른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계몽사 세계명작동화에서 '작은아씨들'을 발견하여 처음 읽은 후, 거의 모든 에피소드를 다 외울 정도로 이 책을 좋아했다. 금성사 판에는 이야기의 전반이 실려 있었고, 계몽사판에는 전반 후반이 모두 실려 있었다. 금성사 판에서는 아버지가 아픈 베쓰를 보러 귀가하는데까지, 계몽사판에서는 베스의 죽음과 에이미, 조우의 결혼까지 모두 실려있었다.
피닉스에 있을 때, 엄마의 취향 저격에 명수인 작은 아들이, "엄마 작은 아씨들 영화 해요. 보러 가실래요?" 제안 했을때 나는 '괜챦아. 별로 관심 없어'라고 대꾸했다.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다고 하지만 별 관심이 없었다. 며칠전까지도 나는 내가 너무나 사랑했던 이 이야기의 2019년판 영화에 아무 관심도 없었다. 앞서서 제작되었던 두편의 영화는 이미 여러차례 본 바있다. 나는 수잔 서랜던이 나왔던 1995년 판을 좋아하는데 그것 역시 지금은 별 관심이 없다 (내가 그런 것에 판타지를 갖기에는 너무 오래 살은 걸까?).
그런데 내가 갑자기 이 영화를 보기로 결심한데는 이유가 있다. 언라인 칼럼에서 누군가 남자분이 쓴 글 때문이었다. 찾으면 나오겠지만 찾아서 링크를 걸고 싶지는 않다. 그분은 글에서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그는 '작은 아씨들'을 즐겨 읽었고, 베쓰의 죽음에서는 펑펑 울었다고 했다. 그는 부끄러움이 많은 소년이었는데 이야기 속의 베쓰와 자신을 동일시 했다고 한다. 그래서 베쓰의 죽음이 너무나 슬펐다고. 그가 '조'의 불만이나 여성들의 불만을 별로 의식하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자신이 '남성'이라서 '여성'들이 맞닥뜨리는 상황을 잘 이해할수 없었던 것 같다는 자성의 메시지도 있었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세상에 베쓰와 자신을 동일시 한 소년이 있었다니! 놀랍다!'는 느낌이 들었고 갑자기 영화를 한 번 봐야겠다는 흥미가 동했다.
대체로 이 이야기를 읽던 소녀들은 '주인공 격'인 '조우'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 편이다. 나 역시 그랬다. 우리언니는 '작은 아씨들의 조우가 꼭 너 같다'고 말을 하기도 했었다. 글쓰기를 즐겨하고, 선머슴같이 돌아다니는 내 모습이 언니의 눈에 '조'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내가 '조'라면 우리 언니는 착한 큰 언니 '메그'와 비슷했다. 우리들은 그렇게 이 이야기에 동화되었었다.
나는 정말 이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어른이 된 후에 영어소설 읽기가 어렵지 않게 되었을 때 원서도 구해서 읽었다. 그리고 메사추세츠주 '콩코드'라는 도시에 있는 '작은아씨들의 집'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다. 저자 올코트가 살던 집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바로 그 집이 이 소설의 세팅이 되었다. 영화에도 그 집의 모양이 비슷하게 그려져있다. 사실 올코트의 삶을 들여다보면, '작은아씨들'에 그려졌던 인물들이 그 당시의 실존 인물들의 반영 같기도 하다. 올코트의 아버지는 실제로 조 마치의 아버지와 비슷한 성품이었고... 소설속의 조는 결혼하지만, 루이자 메이 올코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소설 속의 '조'의 남편이었던 '베어'교수의 모델이 '월든'의 저자 Henry David Thoreau 라는 설도 있다. 미국 동부를 여행한다면 사실 Concord 는 숨은 보석같은 작은 마을인데, 그곳 공동묘지에 미국 역사의 거장들이 모두 묻혀있다. 나는 보스톤보다 콩코드를 더 좋아한다. 어쩌면 내가 이 이야기를 너무나 사랑하고, 깊이 깊이 내면화 한 나머지, 이것을 '영화화 한 것'에 어떤 불안감이나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도 같다. 원작만큼 충실한 영화는 없다. 내 가슴속의 영화가 훨씬 절절한 것이다.
그래도, '조'가 원고를 쓰면서 원고지를 다락방 방바닥에 줄세우는 장면에서, 그리고 책 출판계약 담판을 짓는 장면에서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쏟아졌다. 원고를 쓰면 그것을 프린트해서 줄을 세우는 것이 내 버릇인데, 조가 영화속에서 그러고 있었다. 조는 아직도 내 가슴속에서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기껏해야 가정교사, 그림 그리기, 수 놓기, 집에서 피아노치기, 글 쓰기로 한정되어 있던 시절. 그 시절을 살았던 여성들의 한없는 '답답함'이 제법 묘사가 되기도 했다. '72년생 김지영' 영화에서도 '김지영'이 글을 쓰는 것으로 우울감에서 벗어나고 스스로의 실존을 확립해 나가는 장면에서 사실 나는 좀 울컥했다. 2019년에도 여전히 여자는 '글쓰기'외에는 다른 탈출구가 없는걸까? 그거야 말로 암담한 결말이 아닐까? 나 혼자 답답했었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돈이 되건 안되건 나는 글을 쓴다. 글쓰기는 나의 해방구이다. 돈이 된다면 더욱 좋고. 하지만, 글쓰기 외에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면, 글쓰기 재주나 글쓰기 취미가 없는 여성들은 무엇을 해야 하나?
그러자 진 전 교수는 즉각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분의 오빠 일곱 명이 학교로 몰려와 사람 하나 묻는 걸 내가 똑똑히 지켜봤다"며 "그런데 우리 식구들 예쁘게 봐달래요"라는 말로 어이없어 했다. 그가 말한 일은 최성해 전 동양대 총장이 자리에서 물러난 일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날 이 대변인은 YTN라디오 '노영희의 출발 새아침'에서 진 전 교수 관련 질문을 받자 "진중권 교수 미학 책부터 굉장히 좋아했던 애독자로서, 존경했던 지식인이었다"고 운을 뗀 뒤 "민주당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좀 더 가혹해진 측면이 있어 보이는데 조금만 더 애정을 쏟아 주고 함께 개선할 지점, 같이 할 수 있는 일도 있을 것 같아 좀 예쁘게 봐달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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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발췌문의 앞 뒤 맥락을 보면 '이재정'은 '민주당을 예쁘게 봐 달라'고 요청했는데, 진중권은 '이분의 오빠 일곱명이...'라고 대응했다. '민주당원 아무개 일곱명이 이재정의 '오빠'인건가?' 한참 생각해 봤는데, 그것은 아닌 것 같고. 사실과 합리성을 중요시하는 진중권씨가 이재정 주위의 당원들에 대하여 '오빠'로 칭한 것으로 보인다. 여자 주변에 그 여자 보다 나이 많은 남자들이 있으면 그게 그 여자의 '오빠'인건가? 합리적인 진중권씨, 당신 부인 주면에 열명의 나이 많은 남자들이 있으면 그 자들이 당신 부인의 오빠들인건가? 당신 누나들의 주변에 서 있는 남자들도 '오빠'들 인건가? (진 전 교수에게는 여자가 누나 아니면 누이 동생인건가? 뭐랄까....부인에게서 여성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교육을 못 받은 듯 해 보인다.)
이재정은 '민주당'을 '예쁘게 봐 달라'고 한 것 같은데 진중권은 마치 이재정이 '오빠, 나 좀 예쁘게 봐줘'라고 말 한 것처럼 대응을 했다. 멋대로다.
그리고 이재정씨. 아무데서나 '예쁘게 봐 주세요' 이따위 말 좀 하지 마라. 역겹다. 어디서 그따위 천박한 말을 올린다는 말인가? 그래서 안된다는거야. 그래서 나도 이제 너희가 싫다는거야. 찍을데가 없다는거야. 아무도 찍어주고 싶지 않아졌다는거야. 희망이 안보인다는거다.
이 사람이 개인 자격으로 어떤 정당을 선택하건, 그건 그의 자유이다. 그렇지만 그가 '윤봉길 의사 손녀딸'이라는 이름으로 박정희-박근혜-로 이어진 당에 입당했다는 사실은 통탄 할 만한 일이다. 박근혜씨는 그 아버지 박정희씨의 정신이라도 계승하지 않았던가? (그의 효심은 개인 차원에서 인간적으로 가상한 면이 있다.) 당신은 도대체 뭐냐? 당신 할아버지가 왜인에게 물통 폭탄을 날리며 항거할 때, 그 손녀 딸이 장차 박정희 계보를 이어받은 정당에 낯짝을 디밀거라 상상이나 했을까?
당신 할아버지는 왜가 쏜 총알을 이마에 맞고 쓰러져 처형의 순간에까지도 이마에 '일장기'를 그리는 수치를 겪어야 했는데, 당신은 그 친일 후예들과 한가족?
Genre Painting 이라는 회화의 작은 분야가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풍속화'이다. 서민들의 일상적인 삶을 화폭에 옮긴 것이다. 이 '풍속화'가 의미있는 이유는 서양에서 회화를 비롯한 예술은 '가진자'들의 잔치였던 역사가 오랫동안 지배해 왔는데, (성당의 그림들, 왕족이나 귀족들의 초상화) 누군가가 돈내고 초상화를 부탁할 여유가 없는 '무지렁이' 가난뱅이 시민들의 '보잘것 없고 하품나는' 일상을 그림으로 남기기 시작한 것이다. 한마디로 '돈 있는 자들의 그림' 세계에 '돈 없는 자들'이 소재로 등장한 것이 '풍속화'의 의미라고 할 만하다.
지난 2월 9일, 모처럼 온 나라 사람들이 서로 환호하며 기뻐할 수 있었다. 봉준호 감독의 역작 '기생충'이 오스카상을 네개나 거머쥐면서 우리 가슴을 뜨겁게 해 주었다. 책상에 앉아서 이 뉴스를 검색하던 나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냥 기쁘고 좋았다. (사람은 왜 자기하고 아무 상관없는 일에 기쁠까? 나는 골똘히 그 문제를 생각했다. 봉준호가 나하고 아무 상관 없는데 나는 왜 그가 자랑스럽고 기쁘고, 그의 수상 장면을 보고 또 보고 할까? 아무튼 축하 드린다.)
그런데, 시상식장에 등장한 이분이 봉감독 영화의 후원자라는 것에도 나는 수긍했다. 그렇군, 그런 조력자들이 포진해 있었군. 백억이라는 돈이 프로모션에 사용되었군. 아..하...저런 물밑 작업도 이 영광의 밑밥으로 작용한거구나. 그러면 저 사람들이 프로모션에 백억을 안 썼다면, 그래도 기생충이 사관왕에 올랐을까? 이 대목에서 내 고개가 슬슬 오른쪽 왼쪽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한국 현대사를 살아오면서 나는 귀동냥으로 알고 있다. 한국이 아시안 게임이나 올림픽을 한국에 유치하기 위하여, 피파 월드컵을 유치하기 위하여 얼마나 물 밑 경쟁을 했는지. 그 쾌거 뒤에는 늘 '숨은 조력자' 혹은 '공개된 조력자' 재벌 총수들의 얼굴들이 등장했다. 그 미담을 이용해 국회의원이 된 자도 있었다. 아무튼 대박 소식 뒤에는 한국의 존경받아 마땅한 재벌들께서 돌보고 계셨다. '기생충'에도 기생충같이 살아가는 나는 알지 못하는 그들의 은혜의 손길이 있었던 모양이다. 좋아 다 좋아. 맘대로 해도 되는데. 늘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가진자들이 착하고 선하고 그런거니까.
그런데,
그런데,
이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자본주의 사회의 음지와 양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못 가진자들이 기생충처럼 꿈틀대며 희망도 없이 비굴하고 치사하게 살아가는 속내를 여실없이 보여준것인데, 이 영화가 세계적인 상을 받는 이면에는 여전히 재벌들의 고급취미가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이지. 재벌들은....기생충같은 서민을 팔아서 돈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셨다. 기생충은 영원히 기생충인데, 머리좋고 착한 재벌들은 기생충을 팔아 돈과 명예를 잡는다. 그게 이 경사스런 사건의 이면 같은거다. 달의 어둡고 추운 이면같은.
쟝르화의 소재는 '가난뱅이 서민들의 비루하고 하품나는 일상' 같은거다. 그럼 그걸 돈주고 주문한 사람은 누구냐하면, 돈 많은 사람들이다. 마리 앙뚜와네트가 호화스러운 궁전에서의 삶이 싫증나면 시골의 자그마한 궁전에 가서 즐긴것처럼, 황금에 질린 부자들이 소박한 서민들이 소재가 된 그림을 비싼 돈 주고 사가지고 거실을 장식하고 그랬다. 장르화의 비극은 그 소재가 되었던 사람들은 그 그림을 볼 기회도 없었다는 것이다.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네로는 루벤스의 그림을 간절히 간절히 보고 싶어했는데, 돈이 없어서 볼수 없었다는 것 아닌가...)
우리는 돈 내고 영화표 사가지고 극장에 가서 '기생충' 영화를 통해서 쟝르화 속의 주인공, 기생충인 자신을 관람하고, 재벌은 돈을 백억씩 써서 영화를 홍보하며 파티를 벌인다. 21세기 기생충 사회. 만세이.
취미 생활을 잘 하다 보면 그것이 생업이 되고 그로인해 '전문가' 반열에 오를 수도 있다.
아무개씨는 조국씨및 그 부인, 아들, 딸 까대기를 취미생활처럼 하시더니, 이제 본격적으로 그를 팔아 먹기 시작한 것 같다. 나 조국 싫다. 아무개씨 만큼이나 조국씨나 그 일가족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조국을 지키겠다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다른 취미 생활을 찾아 보시라'는 생각을 조금 하다 말았다. 각자 취미 생활은 존중해야 하니까. 태극기는 태극기대로 조국부대는 조국부대대로 각자 취미생활로 보는 편이다. 나의 취미 생활은 그냥 잡다하다.
그런데, 이분 요즘 아주 '조국' 팔아먹기로 그의 몸값을 올리고 있다. 조국을 그토록 싫어하기도 힘들것 같은데, 또 그만큼 단물을 빠는 사람도 드물어 보인다. 이거, 삶의 아이러니 같은거다. 그가 그토록 혐오하는 조국 가족을 팔아서, 그 구더기 들끓는 이름을 팔아 그가 그 구더기 피를 빨아먹고 사는것 처럼 보인다.
조국에서 벗어나 보시면 어떨까? 자기의 아젠다를 가지고 살아보면 어떨까? 뭐, 그것도 그가 사는 방법이므로 내가 뭐랄건 아니지만, 어쩐지 똘똘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이상하게 소비하고 있다는 묘한 느낌이 들어서 한마디.
Food is all I am asking. Bus Pass - Just want to feel better and get back to camp
위 사진속의 패널은 피닉스 삼총사들의 숙소 (버스정거장) 근처에 그들이 놓아둔 것이다. '음식을 부탁드립니다. 버스표도 있으면 주세요. 버스를 타고 기분전환을 하고 캠프로 돌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음식이나 버스표를 부탁하는 내용이다.
아리조나 피닉스 (Phoenix)에서 얼마동안 지냈다. 버지니아가 한국의 '부산' 쯤 되는 겨울 날씨라면, 같은 시기의 아리조나 피닉스는 한국의 8월 말 혹은 9월 초순 정도 되는 덥거나 따뜻한 날씨이다. 긴팔 옷을 입거나 반팔 옷을 입은 사람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나를 마중 나온 친구도 반바지에 슬리퍼 (쓰레빠) 차림이었다. 한 겨울에, 피닉스에서. (그가 슬리퍼 신은 꼴을 보고 나는 안도 했다. 전갈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군, 샌들 차림인 것을 보면.
아리조나 피닉스는 사실 플로리다의 마이애미 일대 만큼이나 '노인'들이 퇴직후에 살고 싶어하는 곳이다. 사철 따뜻하고 습기도 많지 않으므로 (여름에 뜨거운거야 에어컨으로 해결 보면 되니까 겨울에 따뜻한 것이 중요하다). 노인들의 천국은 --- 집없는 사람들에게도 천국임을 의미한다. 버지니아에서도 이따금 교차로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지만, 피닉스에서는 이런 분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내가 아침마다 산책을 나가던 구역에도 세명의 홈리스가 있었다. 남자 두명, 여자 한명. 그들은 버스 정거장 (한국처럼 삼면이 막혀있고 벤치가 있어서 노숙하기에 용이하다)에서 잠을 잤다. 벤치 아래에 봉지 봉지 그들의 세간 살이를 채워 넣고, 벤치를 침대처럼 활용했다. 한명이 벤치에서 자면 두명은 벤치 아래에서 잤다. 나는 이들이 각자 혼자 따로따로 자는것보다 그렇게 셋이 모여서 자는 것이 안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날씨가 쌀쌀한 아침에는 길 건너 햇볕이 따뜻한 버스 정거장으로 이동해서 셋이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 꽃을 피우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어느날은 길 건너편 버스 정거장 벤치 가운데 여자가 고개를 한 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앉아있고, 양 옆의 바닥에 남자들이 앉은채로 그녀를 쳐다 보며 이야기를 하는 광경이 보였는데, 뭐랄까, 그 여성은 성모마리아, 관음보살, 혹은 여신처럼 보였고, 남자들은 신의 메신저처럼 보였다. 신비한 장면이었다. 이른 산책을 나가면 그들의 취침 시간이었고, 산책을 마치고 돌아올 즈음 그중 한 두명이 어디론가 자리를 비운 것이 보이기도 했다.
터줏대감 같은 삼총사 외에도 운전하여 나가면 교차로 근처 이쪽 저쪽에 이분들이 서 있었다. 그들을 발견 할 때마다 1달러라도 주고 싶었지만 번번이 수중에 현금이 없었다. 우리들은 이제 지갑에 현금을 갖고 다니지 않는다. 카드가 있을 뿐이다. (미국에서는) 애플페이가 있을 뿐이다. 근처에 쇼핑하러 나가면서 현금을 챙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번번이 그들을 그냥 통과 해야만 했다.
하루는 산책 나가는 길에 역시나 버스정류장에서 자고 있는 삼총사를 지나치며 생각했다. '저기 있는 그로서리 (일반 상점)까지 걸어가야지. 거기 가서 뭔가 먹을 것을 사야지. 저들에게 아침을 대접 해야지.' 누군가에게 아침을 대접한다는 생각만으로 갑자기 나는 기분이 좋아졌고,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상점에 갔을 때 뭘 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샌드위치는 냉장고에 있어서 너무 차가워보였다. 뭐든 냉장고에 준비된 음식은 차가웠다. 적절치 않았다. 상점을 몇바퀴 돌면서 고민고민 하다가 결국 방금 구운 머핀 여섯개 들이 한 상자, 그리고 그린티 음료수 여섯병들이 한 팩을 샀다. 따뜻한 머핀과 그린티를 먹으면 --나쁘지는 않을거야...
음료수가 조금 무거웠다. 그것들을 비닐봉지에 들고 돌아와보니 삼총사중에 둘은 아직도 숙면 중이시고, 한 사람이 인기척에 깨어나 쳐다본다. "Hey, I am Eunmee. Here's your breakfast." 누워 있던 그는 몸을 일으켜 내가 내미는 비닐봉지들을 받았다. "Thank you. God bless you." "Thank you. God bless you, too!" 우리들은 눈을 마주치며 웃어보였고 나는 자리를 떠났다. 다음에는 집에서 나갈 때 현금을 갖고 나가서 줘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를 다시 볼 수 없었다. 갑자기 한국으로 와야했다. 부랴부랴 비행기표를 바꾸고 피닉스를 떠나야 했다. 그를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너무 아쉬워, 현금을 챙겨 놓았다가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 하는 중에, 길가에 서있던 사람에게 현금을 건냈다. "Thank you. God bless you!" 그가 말했다. "God bless you!" 나도 말했다. (나는 단지 내가 1달러를 내밀었을 뿐인데 God bless you! 라는 축복의 말씀을 그에게서 들을 때, 그와 나 사이에 천사가 잠시 다녀간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1달러로 천사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다니!)
피닉스를 떠나며 나는 생각했다. 앞으로 현금을 갖고 다니는 사람의 숫자는 현저히 줄어 들을 것이다. 그러면 길에서 현금을 구걸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건가? 나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금을 소지하지 않기 때문에, 길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에게 현금을 내 줄 수가 없다. 일달러, 혹은 이달러, 준다고 내게 축이나는 것도 아니니 자주 줄 수도 있지만, 현금을 소지 하지 않기 때문에 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현금 대신 전자 상거래를 하거나 다른 시스템이 현금을 대체하면서 이러한 새로운 시스템의 그늘에서 시스템을 따라잡기가 힘든 노인들이나 교육을 받지 못한 분들이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데, 길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문제에 빠지게 된다. 현금이 사라지고 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한푼 두푼의 현금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이들은 어떤 식으로 구걸을 하려나?
35일간 미국에서 지내면서 나는 유배지의 삶 같은 생활을 한 듯 하다. 거기 있을 때는 몰랐는데 귀국하여 돌아보니 그 생활은 내가 선택한 유배지의 삶이었다.
식료품 몇가지를 사기 위해 쇼핑몰에 들렀다. 지하 식품매장으로 가기 위해 1층 통로를 통과하면서 내 눈은 황홀했을 것이다. 새봄을 알리는 듯한 화사한 색상의 예쁜 옷들이 여기저기서 내게 손짓을 하고, 소리질러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모자며 마스크에 발목까지 오는 긴 패딩 오버로 온몸을 중무장하고 나갔던 전쟁 같은 살벌한 외출이었건만, 매장에 걸린 예쁜 색상의 옷들은 무서운 코로나조차 잊게 하는 환각성을 품고 있었다. 물론 내 발길은 멈추지 않고 휘리릭 매장들을 지나쳐 지하 식품매장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는데, 느리게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나는 문득 내 가슴에 찌르르 통증이 옴을 느꼈다. 찌르르...미세한 전류에 놀란 듯한 아주 여린 고통이었다. 그순간 미국집 내 창 밖으로 온종일 내다 보이던 목장과 순한 눈빛의 소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35일간, 나는 주로 창가에 붙어 살았다. 아침이면 일어나 한시간 기도를 드리고 (기도가 지겨우면 찬송가를 부르고, 찬송가가 지겨우면 성경을 읽으며 아무튼 한시간 기도 시간을 채웠다), 그리고 창가에서 글을 쓰거나, 글을 쓰기 위한 연구를 했다. 그것이 내 일상이었다.
그 작은 마을은 워싱턴 덜레스 공항에서 차로 다섯시간을 꼬박 달려야 하는 버지니아 남단 구릉지에 있었다. 주변은 온통 목장이었다. 마을 한가운데로 기차길이 있어 화물열차가 하루에 두 세차례 통과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눈만 마주치면 웃으며 말을 걸어온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평생 한 마을에서 함께 살아온 사람처럼 말을 건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Where are you from?" 같은 상투적인 질문은 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들은 얼마든지 어떠한 화제로도 내게 말을 걸을 수 있었다. 두세살짜리 꼬마 아이도 방긋방긋 웃으며 "하이! 하이!" 외쳤는데, 그냥 사람이 반갑다는 뜻이었다. 사람이어서 그것이 좋아서 인사를 보내는 사람들. 그 마을은 그랬다. 그 마을에서 걸어서 갈수 있는 가게는 아무것도 없다. 물론 차로 10분 내에 타운 중심에 갈 수 있고, 그곳에 가면 월마트며 미국 중소도시에 가면 있을법한 상점들이 모여 있긴 했다. 하지만 여건상 걸어서 갈 수는 없었다. 미국에는 차도만 있으며 사람이 걸어다닐 인도가 없는 곳이 아주 많다. 걸어서 한시간 거리라 해도 맘놓고 걸을수는 없는 것이다. 시골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차가 없는 한 나는 집에서 공부하거나 글을 쓰거나, 요리를 하거나, 조그마한 마을을 한바퀴 도는 산책을 하거나, 고양이와 노는 것 외에 별로 할 것이 없었다. 나는 12월 말에서 1월 한달 내내 그렇게 살았다.
물론 이따금 생필품이나 식료품을 사러 차를 운전하여 월마트에 갔다. 워싱턴에 살때는 거들떠도 안보던 월마트를 이 시골마을에서 나는 '놀이공원'처럼 다녔다. 그곳에서 요긴한 식료품을 사고, 방한 목적의 두툼한 겹바지도 하나 사서 내내 그것만 입었다. 그랬다. 그것이 내 유일한 외부 엔터테인먼트였다. 아-무-것-도 내 눈길을 끌만한 것은 없었다. 그냥 월마트에 전시된 생필품들을 보는 것이 오락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자족'을 발견했다.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식료품을 장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쇼핑이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 통장에 돈이 쌓여 있어서 어떤 명품도 척척 살만 한 수준이라 해도 그 시골마을에서는 그 따위 것들이 아무 소용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냥 채소와 이런 저런 것들을 사다가 요리를 해 먹으면 그것으로 족한 하루하루였다.
산책을 하며 나는 종종 생각했다. '여기 참 좋아. 잡다한 것들이 다 사라지고 오직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게 돼. 예쁜 것을 찾으러 쇼핑몰에 가지 않아도 돼. 왜냐하면 쇼핑몰이 없으니까. 목장과, 하늘의 해와 달 별, 그리고 개울, 개울에 물을 먹으러 오는 소들과, 두마리 집 고양이들. 그것들로 이미 충만해. '
그렇게 산사의 스님처럼 살다가 -- 챨리의 초콜렛 팩토리 같은 마법의 성으로 돌아왔다. 한국의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마법의 성이다. 아웃렛이 있고, 공원식 쇼핑몰이 있고, 뭐든 근사한 것들이 눈앞에 펼쳐져있다. 눈이 닿는 곳 어디서나 예쁜 색상의 물건들이 나를 부른다. 나는 헉헉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이 전기 오른듯 쓰르르 울리며 미세한 통증을 느낀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렇게 물건으로 둘러싸인 이곳이 '참 아름다운 지옥' 같아. '참 아름다운 감옥' 같아. 나는 예쁜 것들을 탐하며 동시에 그것들의 무용함을 안다. 그래서 가슴이 찌르르 아프다.
창밖으로 소들이 순한 눈으로 풀을 뜯으러 올 때, 그리고 그 곁으로 검정 고양이 한마리가 느릿느릿 지날때, 그 검정고양이가 우리집 아기 고양이와 흡사하게 생겨서 -- 아하! 저 놈이 이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아기고양이의 어미구나! 깨달을 때 내 심장에서는 여리고 고운 클래식 기타 소리가 났었다. 그것으로 충만한 시간 그리고 공간. 하느님께서는 장차 나를 어디에 살게 하시려는지 그분께 묻고 싶어진다. 하느님, 저의 다음 행로는 어디인지요?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하고 올해 대학 입시에서 숙명여자대학교에 합격한 A씨가 입학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A씨는 JTBC와의 취재에서 "합격 소식이 알려진 이후로 자신의 입학을 반대하는 움직임에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면서 "숙대 입학을 포기하는 대신 여대를 제외한 대학에 입학할 준비를 하겠다는 입장을 전했습니다. 앞서 숙명여대는 지난해 8월 태국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은 A씨를 최종 합격시켰고 이후로 학교 안팎에서는 찬반 논란이 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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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환하여 '여성'임을 법적으로 인정 받은 여성이 합법적으로 여자대학교에 입학 신청을 하여, 그 대학으로부터 적법하게 입학 허가를 받은 상황에서 '반대'의사를 표시하는 학생들 때문에 입학을 포기하였다고 하니 마음이 아프다.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나 역시 '여자대학'을 졸업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숙대생이라면 나는 그 사람 편에 설 것이다.
관련 기사의 숙대생 대화방 내용도 조금 훑었는데, '여성의 파이를 왜 그런 사람이 나눠 먹는가'하는 불만을 표시한 숙대생도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음...뭐 파이좀 나눠 먹으면 안될까?
음, 공포심을 느끼고 입학을 포기한 그분께 말씀 드리고 싶다. 여대 가지 마시라. 남자 여자가 섞여서 사는 세상에 뭐가 답답해서 대학 공부를 여대에서 하려 하는가? 남자 여자 섞여서 동등하게 서로 협력하고 나누는 문화에서 공부하는 것이 여자들만 우글거리는 곳에서 '파이'를 남에게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는 문화를 흡수하는 것 보다 훨씬 낫다.
내 비록 내가 다닌 여자 대학에서 귀한 교육을 받았고, 귀한 친구들을 만났으며, 귀한 교수님 슬하에서 많이 크고 많이 도움받고 성장하였으나, 내가 다시 선택할 수만 있다면 나는 절대 자발적으로 여자대학에 입학하지는 않을 것이다. 옛날엔 왜 여자대학 들어갔나구? 아, 학비 대주는 아버지가 내 의사와 상관없이 여대로 입학원서를 들이 밀어서 -- 아버지 학비에 기대어 사는 내 신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냥 울면서 여대에 갔을 뿐이다.
트랜스젠더의 여대 입학은 찬반 논란이 일었다. 숙명·덕성·동덕·서울·성신·이화여대 등 서울 지역 6개 여대의 23개 여성단체는 ‘여성의 권리를 위협하는 성별 변경에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해 A씨의 입학을 반대했다. 숙명여대 일부 동문은 A씨의 입학에 찬성하며 ‘성전환자로 숙명여대 최종 합격한 학생을 동문의 이름으로 환대한다’는 제목의 연서명을 온라인에 올려 해당 학생에게 응원을 보내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출처: 중앙일보] 박한희 변호사, ‘숙대 포기’ 트랜스젠더 위로 “함께 살아가자”
내가 졸업한 학교도 이따위 기사에 이름을 올린 것을 보고서 나는 정말 인생 최초로 내가 '여대 출신'이라는 것이 아주 챙피스러워졌다. 그전에는 그냥 아버지의 선택으로 여대 간것이 불만이었는데, 지금은 쪽팔린다 내가 저런 학교 출신이란 것이. 아...망했다... 트렌스젠더 여성이 여대에 들어오는 것이 '여성의 권리'를 위협한다고? 여성의 권리가 뭔데? 여성에게 권리란게 있었어? 나는 솔직히 남자로 태어나서 하필 여자로 바꾸는 사람이 이해가 안된다 왜냐하면 이따위 남근중심 사회에서 나도 가능하면 남자가 되고 싶은 판이었으니까. 근데 뭐가 답답해서 여자가 되냐구...그게 여성의 권리 침해가 돼? 응?
그럼, 내가 여성의 진짜 권리가 뭔가 말해주겠다. 다른 누구도 침해 할 수 없는 여성의 권리는 -- 약자를 보듬어 주고, 슬픈자의 어깨를 감싸주고 그러는거다. 그게 우리가 가진 천부 권리이다. 사랑의 권리, 그것이 여성이 가진 최고의 권리이다. 그것은 남이 빼앗지 못한다. 좀 정신들 차리셔 여성 동지들. 우리가 가진 진짜 힘은 힘없이 쫒겨나가는 사람의 편에 서 줘야 하는거라구. 페미니즘은 늘 소수자와 연대해 왔다구, 그게 페미니즘의 근간이라구... 아이구.
그러니까 그 분, 여대에서 공포심 느끼고 입학 포기한 그 여학생 -- 지금은 비극이지만 장차는 잘 된 일이다. 그냥 남녀공학 가서 뒤섞여서 사는 방법을 익히시는 것이 훨씬 좋다. 크게 보면 득이지 손해가 아니다.
추신: 파이 부스러기조차 남들과 전혀 나눌 생각이 없는 숙명여자대학교 학생들 (그 중에서 트렌스 젠더 학생을 겁주어 쫒아낸 그 학생들) -- 그대들 앞의 그 대단한 파이나 꼭꼭 씹어 먹기 바란다. 배탈나지 않게 꼼꼼하게 씹어먹고 잘 살아내시길. 남의 고통따위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여성 지도자의 요람이시어. (니네들 말야, 딱 거지가 다른 거지한테 거지 발싸개 쪼가리 빼앗길까봐 집단 린치 하는것으로 밖에 안보여. 그 잘난 거지같은 학교 나와서 대체 뭐 할건데?)
12월 19일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날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이 날은 무언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무얼까? 누굴까? 누군가의 생일이거나...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2019년 12월 19일은 어쨌거나 내 기억에 새로 각인된 의미있는 날이 될 것이다. 종강을 했고, 기말 성적처리를 모두 마쳤고, 학교에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도 모두 제출했고, 수퍼바이저 학장님과 한학기를 마무리하는 회의도 즐겁게 마무리 지었고, 모든 일을 18일까지 마무리 지었다. 19일에는 모처럼 서울에 나갈 패였다. 나는 이제 '섬마을 여선생'처럼 촌사람이 되어 서울에 가봐야 동서남북도 분간이 안된다. 뉴욕이나 워싱턴보다 서울이 내게 더 낯설다. 나를 맨해턴에 떨어뜨려놓아보라. 나는 천지사방 이리저리 신나게 돌아다니며 길잡이를 할 것이다. 워싱턴 디씨에 내리면 나는 하루종일 관광안내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울은 낯설다. 서울에서 성장하고 청춘을 보낸 나는 그 서울만큼 낯설것이다.
버스가 언제 올지 예측 불가능하니 전철을 타라고 남편이 일러주었다. 전철을 한번만 갈아타면 홍대앞까지 편히 간다고. 그 다음에 합정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거나 그냥 한번 더 전철을 타거나 자신없으면 택시를 타라고 했다. 나의 선택은, 홍대앞에서 내려서 합정역까지 걷는것이었다. 1킬로미터만 걸으면 합정역이니까. 서울이 낯설지만 내게 익숙하거나 친근한 장소에서는 곧바로 옛기억이 되살아나니까.
추운 날씨. 따뜻한 햇살. 경쾌한 걷기. 모든 것은 아주 좋아보였다. 한걸음 한걸음 걸을때마다 나의 20대가 되살아나는 듯 했다.
출판사에서 내게 연락을 취한분은 여자분이었다. 얼핏 남자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자분이 맞아주었다. 좋은 징조이다. (나는 사실 낯을 가린다. 활달하게 남녀노소 누구와도 대화를 잘 하지만, 사실은 남자들을 경계하는 편이고 여자들과 놀 때 즐겁게 잘 논다. 여자들과 일도 더 잘한다. 남자는 좀 성가시고 답답하다는 느낌이다.) 남자분도 함께 회의실에 들어오셨다. 그분이 출판사 대표였다. 우리들은 서로 수인사를 하고 웃고, 그리고 다른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고, 나는 대표께서 가져온 계약서에 싸인을 했다. 계약금은 곧바로 입금되었다고 내 핸드폰이 알려주었다.
출판계약을 했다. 전에 첫 책 출간을 할때 고생했던 기억이 있어서, 출판계약을 했다고해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거라는 지나친 기대는 하지 않는다. 고생을 좀 하겠지, 그리고 책이 나오겠지. 나 역시 초고를 보냈을 뿐이니까, 마무리 작업이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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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가 내 맥북이 너무 오래되었다고 미국 집에서 제 친구 제론과 함께 내게 맥북프로를 새로 사 준것은 2018년 8월이었다. 작년 여름 휴가때였구나. 그 전까지 나는 2012년에 샀던 맥북을 쓰고 있었는데, 그것은 멀쩡했다. 그냥 단지 찰리는 내게 새로운 기기를 사주고 싶어했을 뿐이다. 제론과 찰리는 컴퓨터 고수들 답게 내 맥북을 내가 가장 사용하기 쉽게 세팅을 완료해주었다. 그날 나는 컴퓨터긱들에게 기념사를 한마디 날렸다, "고맙구나, 이 것으로 내가 좋은 책을 많이 써내마."
고민을 좀 하다가, 8월에 귀국을 한 이후부터 한가지 주제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가을 연휴기간에도 나는 여행대신에 연구실에서 글을 썼다. 겨울이 오고 주변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발생하고, 나는 그 문제들을 들여다보느라 글을 쓸 여력이 없었다. 봄학기에는 예정에 없던 과목 하나를 갑자기 더 맡게 되어서 시난고난했다. 일을 하거나 아프거나 둘중에 한가지였다. 여름에 원고를 쓰려고 했으나 시난고난했다. 여름방학에는 산책만 하면서 보냈다.
가을학기가 시작되었을때, 영문과교수가 제안을 했다. 교수들끼리 모여서 글쓰기 작업을 하자고 했다. 수업이 없는 매주 금요일 오전 세시간동안 강의실 하나에 모여서 각자 글쓰기를 하기로 했다. 마침 금요일에는 수업이 많지 않으므로 전망좋고 한적한 강의실이 우리차지가 되었다. 각자 강의실에서 가장 맘에 드는 코너 한군데를 정해놓고 세상에 오직 나 혼자 있는듯이 앉아서 각자 글을 썼다. 나는 통유리 밖으로 시내가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긴 강의책상 두개를 붙여놓고 책이며 이미 완성된 챕터별 원고지를 줄지어 놓고 작업을 했다. 우리들은 정해진 시간에 모이되 각자 철저히 혼자 시간을 보냈다. 여럿이 각자 따로, 그러나 함께.
내가 시내를 조망하는 통유리창을 대면하고 앉아있을때, 어떤이는 구석 벽을 향했다 (자기는 창밖이 내다보이면 산만해진다는 것이다). 어떤이는 벽쪽에 등이 닿게 앉아 있기도 하고, 어떤이는 강의실 책상의 위치 그대로 칠판쪽을 보면서 글을 썼다. 가을학기 내내 매주 금요일 그 시간을 지킨이는 제안했던 영문과 교수와 나, 이렇게 둘 이었다. 다른 교수들은 사정상 늦거나 빠지거나, 중간에 나가거나,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제안자 영문과 교수는 '제안자'라는 책임감때문에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켰을것이고, 나는 책임자는 아니었지만, 나 스스로 '책임의식' 때문에 그 자리를 지켰을것이다. 열감기 때문에 고통을 겪을때에도 일찌감치 가서 글을 쓰다가 병원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 진료를 받고 다시 돌아와 마무리를 하기도 했다. 나는 늘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고 싶었을것이다.
가을학기가 마무리되어가고, 금요 글쓰기 캠프도 마무리가 되어갈 무렵, 나의 초고 쓰기도 마무리를 향해갔다. 어느날 글쓰기 시간이 끝나고, 내 연구실로 돌아온 나는 글의 목차를 다시 정비하고, 출판제안서를 적어보았다. 어디론가 출판사에 보내야 책이 나올것 아닌가? 책 제목도 근사한 것으로 뽑아보고. 잡다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을 한것 같은데 저녁이 되었다. 그날 피곤하고 시장하여 학교앞 상가에서 저녁을 먹고 역시 학교앞 교보문고에 들러서 내가 쓴 원고와 동일한 주제의 신간이 쌓여있는 매대를 기웃거렸다. '어떤 출판사들이 매대에 책을 깔아 놓는가?' 나는 아이폰 메모장에 신간을 깔아놓은 출판사들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12월 첫 주, 수업을 마치고 시간이 날때마다 내가 이름을 적어온 출판사 홈페이지를 뒤져보고 그들의 이메일이나 혹은 원고제출칸에 내 초고와 출판제안서를 보냈다. 딱 열군데 잘나가는 출판사에 제안서를 보내보자. [운좋은 출판사가 내 원고를 취할것이다. 그들은 대박이 날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 내 원고를 못 알아보는 출판사는 책을 모르는거나. 나를 놓치다니. 출판사 빌딩을 새로 지어줄 저자를 놓치다니 ]
내 이메일 기록을 보면, 내가 원고를 보낸지 일주일만에 출판사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고, 연락받은지 일주일만에 만나서 출판계약을 했다. 오래걸리지 않았다. [인물을 이렇게 빨리 눈치채고 알아보다니!]
내 책을 편집하게될 편집자 선생은 마침 이런 책을 기획하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한지 일주일만에 내 원고가 날아와서 놀랐다고 했다. 음...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우연히 '하늘의 성근 망' 어딘가에서 조우하게 된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출판사에서 고민을 많이 하지 않고 곧바로 계약을 진행하게 되었으리라. 나 역시 '고민'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감이 통한다 싶으면 손을 잡는 편이다. 그렇다고 '허겁지겁'도 아니다. 나는 정공법을 택했다. 책방 매대에 신간을 깔아 놓을 마케팅 실력과 현실적 감각을 가진 출판사를 택한 것이니까. 늘 '정공법'이 최선이다.
출판사 대표께서, 내게 '이러저러한 책을 써보시라'며 가제로 책 타이틀까지 줬다. 나는 그 책 타이틀이 맘에 들어서 메모를 해 놓았다. 내가 썼던 초고의 일부와 연관책 타이틀인데 재미있는 주제로 보인다. 집에서 검색을 좀 해보니 비슷한 타이틀의 비슷한 책이 이미 존재한다.외국서적 번역서이다. 그래서 그 타이틀은 포기해야 할 것 같고, 하지만 우리가 논의했던 토픽으로 글을 엮어 볼 생각이다. 그것이 겨울동안 눈을 기다리며 내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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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나들이가 뭐라고, 열이 나고 온몸이 아파서 내과에 갔더니 코에 긴 빨대같이 생긴것을 넣어 '검사'를 하더니 '독감'이란다. 5일간 격리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타미플루'를 복용하며 집 밖에 나가지 말고 꼼짝 말고 있으라고. (남한테 전염시키지 말라는거다). 타미플루는 부작용이 없는지 걱정이 되어 검색을 해보니, 뭐 환각제같은 효과가 있을수도 있다고. 고층에서 뛰어내린다거나 뭐 그럴수도 있다고. (어딘가 긴장되고, 내 생애 처음으로 환각 효과를 느껴보게되는걸까 상상도 했지만, 속이 울렁거리고 그냥 기운이 없을 뿐. 어딘가 환각제효과 따위는 없는것 같다. 아니면 내 체질이 환각이 잘되는 체질이 아닌지도 모른다. 낭패다. 음 난 수술을 위해서 전신마취를 했을때도 중간에 깨어서 아주 난처했던 적이 있었다 하하하. 난 그냥 '깨어있는자'로 태어난것이 아닐까? ㅋㅋㅋ 난 기도할때도 방언 이런것도 모르고, 뭐 기도하다가 쓰러진다거나 그런 체험도 없다. 난 그냥 늘 깨어있다. 잠자는 시간 빼고.)
음. 이 독감이 나아야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가지. 집에 가야한다. 고양이들이 기다리는 버지니아 집으로.
이런 말씀이 있다. 셋이 함께 가다보면 그 중에 내 스승 될 만한 사람이 있다는 말씀이다. 중학교 한문 시간에 배웠다.
학기 중에 서너명씩 팀을 이루어 연구 과제를 해 내야 하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팀을 짤때, 가능하면 대충 봐서 똘똘한 학생들을 한 팀당 한명씩 넣으려고 노력한다. 그들이 팀의 다른 학생들을 잘 이끌어서 팀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를 바래서이다. 물론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팀을 짜는데, 내가 개입할 틈을 보일때 슬그머니 그런 학생들을 '포석'을 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스스로 팀을 짜 내면, 내가 나서서 개입을 하지는 않는다. 자연스러운 것이 교육에도 좋으니까. 이렇게 최대한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내가 적극 개입하지 않고 팀을 짜다보면 똘똘한 학생들 여럿이 한팀에 들어가는가 하면, 정말 '걱정스러운' 학생들이 한팀에 모이기도 한다.
이번학기에 정말 내가 한숨이 나오도록 걱정스러운 팀이 하나 있었다. 이 팀은 지난학기에 내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인데, 모두 점수가 신통치 않았다. 한팀에 적어도 (말하자면) A 성적을 받을만한 학생 한명이 들어가 줘야 어느 정도 수준이 유지가 될 터인데 문제의 이 팀은 조직원 모두가 약체였던 것이다. 뭐 착하고, 소심하고, 별로 소리를 안 내고, 그냥 존재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 '안보이는' 학생들이 한 팀이 된 것이다. 그 중에는 지각 결석이 잦은 학생도 있고, 이래저래 약체인데...
그런데, 참 사람의 조직은 신기하다. 이 약체가 약체이긴 하다. 날고 기는 학생들이 모인 집단에서 만들어내는 작품과 이 '약체팀'의 작품이 약간 차이가 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데, 또 신기하게도 내가 염려했던 것 만큼 큰 차이는 나지 않더라는 것이지.
이 약체팀에는 숨은 '돌쇠'가 한명 있다. 굉장히 성실한 학생인데 그의 성실성에 그의 성적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열심히는 하지만 뭐 숙제나 시험이나, 프로젝트나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지각 결석 하는 법 없이 꾀부리지 않고 성실하다. 그 '돌쇠'는 사교성도 별로 없어서 늘 혼자 다니고, 늘 혼자 숙제하고, 늘 성실하고, 말이 없고, 그의 이름을 부르면 마지못해 빙긋 웃고 마는 성격인데... 그 '돌쇠'씨가 어쩌다 그 팀의 '리더'가 된 듯 하다. 그가 왜 리더가 되었는가 하면, 적어도 그는 지각, 결석 안하고, 주어지는 숙제는 무조건 다 하고, 그러다 보니까 팀 프로젝트도 팀원들이 하건 말건, 협조가 되건 말건 혼자서라도 그냥 꾸준히 해 내는 것이다. 그는 누가 했네 안했네 따지는 법도 없고, 내게 와서 불평을 하는 법도 없고, 그냥 꾸준히 내 연구실을 들락거리며 모르는 것을 묻고, 뭘 더하면 좋은지 묻고, 내 조언을 듣고, 그리고 말없이 나가서 꾸역꾸역 일을 한다. 그래서 '날고 기는 애들이 모인' 다른 팀만큼 월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평년작은 무난히 해 내더라는 것이다.
또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는데, 약체팀에서도 '리더'가 수면위로 올라오듯이, 반대로 '날고기는 애들 모인 집단'에서도 리더는 '하나'더라. 리더가 될만한 애들이 여럿이 모였을때, 그 중 하나가 리더 역할을 하고 나머지는 게으름을 핀달까? Social Loafing 이라는 사회학 용어가 있기는 한데, 리더들이 모이면 모두 리더가 되는게 아니라 하나만 리더가 되고 나머지는 그냥 '덩어리' 노릇을 하는 것이다. 아 이것은 무슨 아이러니인가.
그래서 인생 별거 없다.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알고, 상황에 따라서 바보도 천재가 될 수 있고, 천재도 바보로 전락할 수 있다는 말이지. 내가 최근에 발견한 현상은 대충 이러한 것이다. 천재도 바보가 되고, 바보도 천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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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캠퍼스의 낙엽이 바스락바스락 부스러지는 소리가 재미있어서 낙엽 밟는 소리를 즐기며 산책하고 있는데 이메일이 날아왔다. 위의 팀 학생들이 연구보고서 초안에 대한 내 피드백을 받고 싶어서 연구실에 왔는데 안계시다고 언제 볼 수 있냐고. 그래서 바로 답을 했다. 지금 볼 수 있어. 1분안에 갈 수 있어. 밥 먹고 오는 길이지. 너희들 밥 먹었니? 나를 만나 보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애들 밥 사주고 피드백을 줬다. 참 보기 좋아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습은 참 보기가 좋다. 그것이 내 자식이건 내 학생이건 똑같다. 주어진 과제를 열심히 하는 학생을 보면, 무조건 다 해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옛날에 나를 가르치시던 은사님들도 그러셨겠구나. 이제야 그분들이 왜 나를 예뻐했는지 알것도 같다.
내가 가끔 이리저리 채널 돌리다가 보게 된 '유재석'씨 나오는 연예 프로그램이 있다. 그 과정이 눈길을 끌어서, 우연히 그 사람이 나오면 보고, 보고, 보고, 그래서 대충 몇 회를 보게 되었다.
대충 줄거리는 유재석씨에게 유명한 트로트 음악계의 대가들 (작사가, 작곡가, 편곡자, 연주자, 코러스 전문)이 대거 모여들어서 '유재석'이라는 트로트 가수 하나를 탄생시키는 프로젝트이다. 거기에 정말 그야말로 '기라성'같은 트로트계의 숨은 고수들이 모두 출연한게 아닌가 싶다. 사실 그런 숨은 고수들을 보는 재미가 있어서 내가 그걸 보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얼마전에 보니까 곡 녹음까지 근사하게 완성을 시켰을거다. 완성 된것같다. 유재석씨가 노래 녹음 할 때 보니까, 어떤 반음의 차이를 몰라서 작곡자의 속을 썩이다가, 도저히 유재석씨가 음의 차이를 이해를 못하니까, 그냥 원곡자가 음을 유재석에 맞춰서 바꿔버리는 식으로 결론을 내더라. 그 장면을 보면서 -' 아 저사람 저 음의 차이도 모르는 음치이구나...' 했다. 그런데 그 사람에 맞춰서 음을 바꿔버려주는 걸 보니, 그제서야 내가 정신이 퍼뜩 나더라.
세상에서 다시 모으기 어려운 전문가들을 다 모으면, '저런 음치도' 음반을 내고 가수 데뷔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현장을 똑똑히 목도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문득 화가 치밀었다.
저게 올 가을 온 나라를 들었다 놨다하고 사람들을 둘로 갈라 놓았던, 고위층 자녀 대학 입학 스펙 만들기 사건과 다른게 뭐지?
대충 음 분간도 못하는 평범한 음치 유재석이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대가들의 도움으로 음반을 내고 가수데뷔하는 것하고 에미 애비 잘 만난 부유층, 고위층 애들이 에미 애비 '빽' 이용해서 보통 사람들은 꿈도 못꾸는 스펙을 만들거나 위조하여 이름난 대학에 들어가는것하고 무슨 차이가 있지? (내 눈에는 그냥 똑같아 보였다.)
유재석은 음치인데도 대가들 도움 받아서 화려하게 가수 데뷔해도 되고, 아무개는 평범하지만 부모 도움 받아서 화려하게 대학 입학 하면 안되는건가? 왜 한쪽은 되는데 다른 한쪽은 안되나? 유재석이 누리는 것이 공정한 경쟁과 공정한 과정인가? 내 눈에는 공정치 않아 보였다는 것이지. 대학 입학이 아니니까 괜챦다는 건가? 혹은 입사시험이 아니니까 괜챦다는건가? 대학입학이나 회사 취업은 공정해야 하고, 유재석이 가수가 되는 것은 공정성하고 상관 없는건가? 학교나 회사가 아니니까 상관 없다는건가? 난 내가 가끔 미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나 지금 제정신인건가?' 이런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소크라테스에게 물어보고 싶어진다. 아무개 자식이 부모들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만든 스펙으로 대학들어가면 반칙이고, 유재석이 유명세 이용하여 유재석의 유명세 덕을 보려는 사람들 총 동원해서 만든 스펙으로 가수 데뷔하는건 '노-반칙'인건가? 소크라테스 할아버지는 내게 뭐라고 답을 해 주실까?
학기가 끝나갈 즈음, 굉장히 고지식하고 평범하고 '저는 모범생입니다'라는 표를 온몸에 달고 다니던 남학생이 갑자기 머리를 알록달록하게 물들이거나 파마를 하고 나타난다면, 그는 99퍼센트 '난리'를 치고 있는거다. 군대 가기 전, 청춘의 마지막 몸부림이라고나 할까.
특히 평소에 얌전하고 딴짓 안하던 모범생들이 이런 증상을 보이는 것 같다. '*지랄* 총량의 법칙'을 여지 없이 증명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랄 총량의 법칙*이란 특히 아들 가진 부모들이 흔히 자조적으로 쓰는 말인데, 모범생이나 문제아나 결국 인간이 평균적으로 보이는 '지랄'은 다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어릴때 몰아서 하고, 어떤 사람은 뒤늦게 난리를 치고 그런 차이가 있을 뿐. 그래서 어릴 때 말썽 부리는 애들, 나중에 자라면 더 효도를 하기도 하고, 어릴 때 부모 속 썩이지 않던 자식들이 늙어서 부모 쓰러지게 만들기도 하고. 우리는 그저 그런 현상을 지켜 볼 뿐이다. (나는 내 '지랄'의 총량을 다 써먹은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새삼 이 나이에 지랄떨게 뭐 있나 싶은 것이지만....사람 일은 죽을 때까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니 늘 스스로를 조심해야 하리라.)
"야, 너 군대 가면 나 어떡해?"
내가 슬픈 표정으로 신세한탄을 하자, 이 착한 모범생이 빙긋 웃는다, "안 갈까요, 그럼?"
"내 강의를 들었다고 감상문을 올렸는데 그걸 올린 사람 아이디(ID)가 정경심이다. 그런데 읽어 보니 내가 그런 강의를 한 적이 없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아들의 동양대 인문학 강좌 감상문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조 전 장관 아들은 한영외고 재학 시절인 2013년, 동양대 인문학 강좌 프로그램 수료증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수강 후기를 인터넷 카페에 올렸는데 해당 글을 작성한 아이디 주인이 모친인 정경심 교수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모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진중권씨가 서울대 특강에서 위와 같은 말을 직접 했다면, 그는 교직을 떠나는 것이 옳다고 본다. 혹은 그는 적어도 교단에 서는 것을 그만 두는게 좋을 것 같다.
의사는 자신이 진료한 환자의 진료기록을 함부로 떠들고 다니면 안되고, 교사는 자신이 가르친/가르치는 학생 관련 정보를 떠들고 다니면 안된다. 물론 의사도 사람이니까 식구끼리 밥상머리에서 밥 먹으면서, "오늘 내가 진료한 환자는 이러저러해서 내가 마음이 아팠어"라고 환자의 이름이나 신상을 밝히지 않은채로 극히 개인적인 소회를 밝힐 수는 있다. 또한 교사/교수도 밥상에서 "오늘 어떤 학생이 시험중 남의 것을 베껴 적다가 적발되었지. 속상했어"라고 말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것도 극히 제한적인 경우에만, 신원이 밝혀지지 않는 범위에서만 이해가 될 만한 것들이다.
진중권씨가'조국의 아들'이 '정경심 아이디'로 글을 제출했다는 이야기를 특강이라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것도 사범대 -- 교사 키우는 대학에서) 떠들었다면, 그는 교사가 지켜야할 최소한의 도리를 망각했거나 몰랐을 것이다. 그가 망각했건, 몰랐건 어쨌거나 그는 강단에 서면 안 될 것 같다. 또 어떤 화제의 인물이 그의 학생일 경우 그가 무슨 소리를 떠들어댈지 알 수 없다. 그의 재기발랄한 입이 해당 학생의 명예 뿐 아니라, 그 자신을 문제에 빠뜨릴수 있다.
* 서울대 사범대에서 진중권씨가 저런 소리를 떠들을때, 참석교수나 학생이나 그들중 아무도 '학생관련 정보 떠들어대기'가 위법한 사항이라는 것을 지적한 자가 아무도 없다는 말인가? 거기 서울대 맞는가? 아니 서울대 수준이 원래 그정도였던건가? 하긴 진중권이나 조국이나 다 그자들이 거기 나온 자들이니 그밥에 그나물이긴 하다만.
당신이 교단에 서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수업을 한시간을 들었건 백시간을 들었건 해당 학생이 한때나마 당신의 학생이었다면 -- 당신은 그 학생에 대해서는 입을 닥치는 것이 옳다. 그것이 교단에 서는 자의 도리이다. 그 입좀 다물라. 당신이 가르치는 학생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 알라.
당신이 조국 편 들 생각이 없듯이, 나 역시 조씨 편을 들 생각이 전혀 없다. 자기가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는 각자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당신이 지금 교육자로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자신이 과연 대학 강단에 설 자격은 있는지, 막 저런 '아무도 묻지 않는 것까지' 떠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또 다른 학생의 정보를 까발리고 다닐지 걱정되지 않는가? 스스로 걱정되지 않는가? 나는 가끔 내가 무섭더라. 그런 실수를 저지를까봐. 스스로 좀 부끄러운줄 알고 한 일년이라도 입닥치고 근신하는 자세라도 보여야 하는거 아닌가? 부끄럽지 않은가? (나라면 챙피해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닐것 같은데, 정말 부끄러움을 모르는가? 일전에 진선생에 대해서 약간 변론을 하고 싶어졌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대목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