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0. 2. 23. 20:19

영화 '작은아씨들 (2019)'에서 조가 원고를 늘어 놓는 장면

 

영화 '작은 아씨들(2019)'을 극장에 가서 조조할인으로 보았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황제 관람 모우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위에 올려 놓은, 조가 동생 베쓰를 잃은 후에 '작은아씨들'을 집필하면서 원고를 펼쳐 놓는 장면. 

 

 

다른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계몽사 세계명작동화에서 '작은아씨들'을 발견하여 처음 읽은 후, 거의 모든 에피소드를 다 외울 정도로 이 책을 좋아했다. 금성사 판에는 이야기의 전반이 실려 있었고, 계몽사판에는 전반 후반이 모두 실려 있었다. 금성사 판에서는 아버지가 아픈 베쓰를 보러 귀가하는데까지, 계몽사판에서는 베스의 죽음과 에이미, 조우의 결혼까지 모두 실려있었다. 

 

 

피닉스에 있을 때, 엄마의 취향 저격에 명수인 작은 아들이, "엄마 작은 아씨들 영화 해요. 보러 가실래요?" 제안 했을때 나는 '괜챦아. 별로 관심 없어'라고 대꾸했다.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다고 하지만 별 관심이 없었다. 며칠전까지도 나는 내가 너무나 사랑했던 이 이야기의 2019년판 영화에 아무 관심도 없었다. 앞서서 제작되었던 두편의 영화는 이미 여러차례 본 바있다. 나는 수잔 서랜던이 나왔던 1995년 판을 좋아하는데 그것 역시 지금은 별 관심이 없다 (내가 그런 것에 판타지를 갖기에는 너무 오래 살은 걸까?). 

 

 

그런데 내가 갑자기 이 영화를 보기로 결심한데는 이유가 있다. 언라인 칼럼에서 누군가 남자분이 쓴 글 때문이었다. 찾으면 나오겠지만 찾아서 링크를 걸고 싶지는 않다. 그분은 글에서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그는 '작은 아씨들'을 즐겨 읽었고, 베쓰의 죽음에서는 펑펑 울었다고 했다. 그는 부끄러움이 많은 소년이었는데 이야기 속의 베쓰와 자신을 동일시 했다고 한다. 그래서 베쓰의 죽음이 너무나 슬펐다고. 그가 '조'의 불만이나 여성들의 불만을 별로 의식하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자신이 '남성'이라서 '여성'들이 맞닥뜨리는 상황을 잘 이해할수 없었던 것 같다는 자성의 메시지도 있었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세상에 베쓰와 자신을 동일시 한 소년이 있었다니! 놀랍다!'는 느낌이 들었고 갑자기 영화를 한 번 봐야겠다는 흥미가 동했다. 

 

 

대체로 이 이야기를 읽던 소녀들은 '주인공 격'인 '조우'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 편이다. 나 역시 그랬다.  우리언니는 '작은 아씨들의 조우가 꼭 너 같다'고 말을 하기도 했었다. 글쓰기를 즐겨하고, 선머슴같이 돌아다니는 내 모습이 언니의 눈에 '조'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내가 '조'라면 우리 언니는 착한 큰 언니 '메그'와 비슷했다.  우리들은 그렇게 이 이야기에 동화되었었다.

 

 

나는 정말 이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어른이 된 후에 영어소설 읽기가 어렵지 않게 되었을 때 원서도 구해서 읽었다. 그리고 메사추세츠주 '콩코드'라는 도시에 있는 '작은아씨들의 집'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다. 저자 올코트가 살던 집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바로 그 집이 이 소설의 세팅이 되었다. 영화에도 그 집의 모양이 비슷하게 그려져있다. 사실 올코트의 삶을 들여다보면, '작은아씨들'에 그려졌던 인물들이 그 당시의 실존 인물들의 반영 같기도 하다.  올코트의 아버지는 실제로 조 마치의 아버지와 비슷한 성품이었고... 소설속의 조는 결혼하지만, 루이자 메이 올코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소설 속의 '조'의 남편이었던 '베어'교수의 모델이 '월든'의 저자 Henry David Thoreau 라는 설도 있다. 미국 동부를 여행한다면 사실 Concord 는 숨은 보석같은 작은 마을인데, 그곳 공동묘지에 미국 역사의 거장들이 모두 묻혀있다.  나는 보스톤보다 콩코드를 더 좋아한다. 어쩌면 내가 이 이야기를 너무나 사랑하고, 깊이 깊이 내면화 한 나머지, 이것을 '영화화 한 것'에 어떤 불안감이나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도 같다. 원작만큼 충실한 영화는 없다. 내 가슴속의 영화가 훨씬 절절한 것이다. 

 

 

그래도, '조'가 원고를 쓰면서 원고지를 다락방 방바닥에 줄세우는 장면에서, 그리고  책 출판계약 담판을 짓는 장면에서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쏟아졌다. 원고를 쓰면 그것을 프린트해서 줄을 세우는 것이 내 버릇인데, 조가 영화속에서 그러고 있었다. 조는 아직도 내 가슴속에서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기껏해야 가정교사, 그림 그리기, 수 놓기, 집에서 피아노치기, 글 쓰기로 한정되어 있던 시절. 그 시절을 살았던 여성들의 한없는 '답답함'이 제법 묘사가 되기도 했다.  '72년생 김지영' 영화에서도 '김지영'이 글을 쓰는 것으로 우울감에서 벗어나고 스스로의 실존을 확립해 나가는 장면에서 사실 나는 좀 울컥했다. 2019년에도 여전히 여자는 '글쓰기'외에는 다른 탈출구가 없는걸까? 그거야 말로 암담한 결말이 아닐까? 나 혼자 답답했었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돈이 되건 안되건 나는 글을 쓴다. 글쓰기는 나의 해방구이다. 돈이 된다면 더욱 좋고.  하지만, 글쓰기 외에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면, 글쓰기 재주나 글쓰기 취미가 없는 여성들은 무엇을 해야 하나? 

 

메릴 스트립의 연기가 가장 근사했다고 생각된다. (고모).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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