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2019. 12. 24. 09:59

 

12월 19일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날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이 날은 무언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무얼까? 누굴까?  누군가의 생일이거나...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2019년 12월 19일은 어쨌거나 내 기억에 새로 각인된 의미있는 날이 될 것이다.  종강을 했고, 기말 성적처리를 모두 마쳤고, 학교에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도 모두 제출했고, 수퍼바이저 학장님과  한학기를 마무리하는 회의도 즐겁게 마무리 지었고, 모든 일을 18일까지 마무리 지었다. 19일에는 모처럼 서울에 나갈 패였다.  나는 이제 '섬마을 여선생'처럼 촌사람이 되어 서울에 가봐야 동서남북도 분간이 안된다.  뉴욕이나 워싱턴보다 서울이 내게 더 낯설다.  나를 맨해턴에 떨어뜨려놓아보라. 나는 천지사방 이리저리 신나게 돌아다니며 길잡이를 할 것이다. 워싱턴 디씨에 내리면 나는 하루종일 관광안내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울은 낯설다. 서울에서 성장하고 청춘을 보낸 나는 그 서울만큼 낯설것이다. 

 

버스가 언제 올지 예측 불가능하니 전철을 타라고 남편이 일러주었다. 전철을 한번만 갈아타면 홍대앞까지 편히 간다고. 그 다음에 합정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거나 그냥 한번 더 전철을 타거나 자신없으면 택시를 타라고 했다.  나의 선택은, 홍대앞에서 내려서 합정역까지 걷는것이었다. 1킬로미터만 걸으면 합정역이니까. 서울이 낯설지만 내게 익숙하거나 친근한 장소에서는 곧바로 옛기억이 되살아나니까. 

 

추운 날씨. 따뜻한 햇살. 경쾌한 걷기. 모든 것은 아주 좋아보였다. 한걸음 한걸음 걸을때마다 나의 20대가 되살아나는 듯 했다. 

 

출판사에서 내게 연락을 취한분은 여자분이었다.  얼핏 남자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자분이 맞아주었다. 좋은 징조이다. (나는 사실 낯을 가린다.  활달하게 남녀노소 누구와도 대화를 잘 하지만, 사실은 남자들을 경계하는 편이고 여자들과 놀 때 즐겁게 잘 논다. 여자들과 일도 더 잘한다. 남자는 좀 성가시고 답답하다는 느낌이다.)  남자분도 함께 회의실에 들어오셨다.  그분이 출판사 대표였다.  우리들은 서로 수인사를 하고 웃고, 그리고 다른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고, 나는 대표께서 가져온 계약서에 싸인을 했다.  계약금은 곧바로 입금되었다고 내 핸드폰이 알려주었다. 

 

출판계약을 했다.  전에 첫 책 출간을 할때 고생했던 기억이 있어서, 출판계약을 했다고해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거라는 지나친 기대는 하지 않는다. 고생을 좀 하겠지, 그리고 책이 나오겠지. 나 역시 초고를 보냈을 뿐이니까, 마무리 작업이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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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가 내 맥북이 너무 오래되었다고 미국 집에서  제 친구 제론과 함께 내게 맥북프로를 새로 사 준것은 2018년 8월이었다. 작년 여름 휴가때였구나.  그 전까지 나는 2012년에 샀던 맥북을 쓰고 있었는데, 그것은 멀쩡했다.  그냥 단지 찰리는 내게 새로운 기기를 사주고 싶어했을 뿐이다. 제론과 찰리는 컴퓨터 고수들 답게 내 맥북을 내가 가장 사용하기 쉽게 세팅을 완료해주었다. 그날 나는 컴퓨터긱들에게 기념사를 한마디 날렸다, "고맙구나, 이 것으로 내가 좋은 책을 많이 써내마." 

 

고민을 좀 하다가, 8월에 귀국을 한 이후부터 한가지 주제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가을 연휴기간에도 나는 여행대신에 연구실에서 글을 썼다. 겨울이 오고 주변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발생하고, 나는 그 문제들을 들여다보느라 글을 쓸 여력이 없었다.  봄학기에는 예정에 없던 과목 하나를 갑자기 더 맡게 되어서 시난고난했다.  일을 하거나 아프거나 둘중에 한가지였다. 여름에 원고를 쓰려고 했으나 시난고난했다. 여름방학에는 산책만 하면서 보냈다. 

 

가을학기가 시작되었을때, 영문과교수가 제안을 했다. 교수들끼리 모여서 글쓰기 작업을 하자고 했다. 수업이 없는 매주 금요일 오전 세시간동안 강의실 하나에 모여서 각자 글쓰기를 하기로 했다.  마침 금요일에는 수업이 많지 않으므로 전망좋고 한적한 강의실이 우리차지가 되었다.  각자 강의실에서 가장 맘에 드는 코너 한군데를 정해놓고 세상에 오직 나 혼자 있는듯이 앉아서 각자 글을 썼다. 나는 통유리 밖으로 시내가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긴 강의책상 두개를 붙여놓고 책이며 이미 완성된 챕터별 원고지를 줄지어 놓고 작업을 했다.  우리들은 정해진 시간에 모이되 각자 철저히 혼자 시간을 보냈다. 여럿이 각자 따로, 그러나 함께.  

 

내가 시내를 조망하는 통유리창을 대면하고 앉아있을때, 어떤이는 구석 벽을 향했다 (자기는 창밖이 내다보이면 산만해진다는 것이다). 어떤이는 벽쪽에 등이 닿게 앉아 있기도 하고, 어떤이는 강의실 책상의 위치 그대로 칠판쪽을 보면서 글을 썼다.  가을학기 내내 매주 금요일 그 시간을 지킨이는 제안했던 영문과 교수와 나, 이렇게 둘 이었다. 다른 교수들은 사정상 늦거나 빠지거나, 중간에 나가거나,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제안자 영문과 교수는 '제안자'라는 책임감때문에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켰을것이고, 나는 책임자는 아니었지만, 나 스스로 '책임의식' 때문에 그 자리를 지켰을것이다.  열감기 때문에 고통을 겪을때에도 일찌감치 가서 글을 쓰다가 병원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 진료를 받고 다시 돌아와 마무리를 하기도 했다. 나는 늘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고 싶었을것이다. 

 

가을학기가 마무리되어가고, 금요 글쓰기 캠프도 마무리가 되어갈 무렵, 나의 초고 쓰기도 마무리를 향해갔다. 어느날 글쓰기 시간이 끝나고, 내 연구실로 돌아온 나는 글의 목차를 다시 정비하고, 출판제안서를 적어보았다. 어디론가 출판사에 보내야 책이 나올것 아닌가? 책 제목도 근사한 것으로 뽑아보고. 잡다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을 한것 같은데 저녁이 되었다.  그날 피곤하고 시장하여 학교앞 상가에서 저녁을 먹고 역시 학교앞 교보문고에 들러서 내가 쓴 원고와 동일한 주제의 신간이 쌓여있는 매대를 기웃거렸다. '어떤 출판사들이 매대에 책을 깔아 놓는가?' 나는 아이폰 메모장에 신간을 깔아놓은 출판사들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12월 첫 주, 수업을 마치고 시간이 날때마다 내가 이름을 적어온 출판사 홈페이지를 뒤져보고 그들의 이메일이나 혹은 원고제출칸에 내 초고와 출판제안서를 보냈다. 딱 열군데 잘나가는 출판사에 제안서를 보내보자.  [운좋은 출판사가 내 원고를 취할것이다. 그들은 대박이 날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 내 원고를 못 알아보는 출판사는 책을 모르는거나. 나를 놓치다니. 출판사 빌딩을 새로 지어줄 저자를 놓치다니 ]  

 

내 이메일 기록을 보면, 내가 원고를 보낸지 일주일만에 출판사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고, 연락받은지 일주일만에 만나서 출판계약을 했다.  오래걸리지 않았다.  [인물을 이렇게 빨리 눈치채고 알아보다니!] 

 

내 책을 편집하게될 편집자 선생은 마침  이런 책을 기획하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한지 일주일만에 내 원고가 날아와서  놀랐다고 했다.  음...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우연히 '하늘의 성근 망' 어딘가에서 조우하게 된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출판사에서 고민을 많이 하지 않고 곧바로 계약을 진행하게  되었으리라. 나 역시 '고민'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감이 통한다 싶으면 손을 잡는 편이다. 그렇다고 '허겁지겁'도 아니다.  나는 정공법을 택했다.  책방 매대에 신간을 깔아 놓을 마케팅 실력과 현실적 감각을 가진 출판사를 택한 것이니까. 늘 '정공법'이 최선이다. 

 

출판사 대표께서, 내게 '이러저러한 책을 써보시라'며 가제로 책 타이틀까지 줬다. 나는 그 책 타이틀이 맘에 들어서 메모를 해 놓았다. 내가 썼던 초고의 일부와 연관책 타이틀인데 재미있는 주제로 보인다. 집에서 검색을 좀 해보니 비슷한 타이틀의 비슷한 책이 이미 존재한다.외국서적 번역서이다.  그래서 그 타이틀은 포기해야 할 것 같고, 하지만 우리가 논의했던 토픽으로 글을 엮어 볼 생각이다. 그것이 겨울동안 눈을 기다리며 내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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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나들이가 뭐라고, 열이 나고 온몸이 아파서 내과에 갔더니 코에 긴 빨대같이 생긴것을 넣어 '검사'를 하더니 '독감'이란다. 5일간 격리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타미플루'를 복용하며 집 밖에 나가지 말고 꼼짝 말고 있으라고. (남한테 전염시키지 말라는거다).  타미플루는 부작용이 없는지 걱정이 되어 검색을 해보니, 뭐 환각제같은 효과가 있을수도 있다고. 고층에서 뛰어내린다거나 뭐 그럴수도 있다고.  (어딘가 긴장되고, 내 생애 처음으로 환각 효과를 느껴보게되는걸까 상상도 했지만, 속이 울렁거리고 그냥 기운이 없을 뿐. 어딘가 환각제효과 따위는 없는것 같다. 아니면 내 체질이 환각이 잘되는 체질이 아닌지도 모른다. 낭패다. 음 난 수술을 위해서 전신마취를 했을때도 중간에 깨어서 아주 난처했던 적이 있었다 하하하. 난 그냥 '깨어있는자'로 태어난것이 아닐까? ㅋㅋㅋ 난 기도할때도 방언 이런것도 모르고, 뭐 기도하다가 쓰러진다거나 그런 체험도 없다.  난 그냥 늘 깨어있다. 잠자는 시간 빼고.) 

 

음. 이 독감이 나아야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가지. 집에 가야한다. 고양이들이 기다리는 버지니아 집으로. 

 

2019년 12월 19일은 내게 좋은 소식이 있던 날이었다고 기억하게 될 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