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mor2011. 10. 27. 05:11



2011년 10월 24일자, 그대의 블로그에서 캡쳐한 것이오~ (출처: http://blog.naver.com/equity1/ )


그대는 이 사람 저사람한테 무슨 백신을 쓰냐고 묻고, 죄다가 V3 쓴다는 답을 들은 후에 위와 같은 훈계성 질문을 휘다닥 던졌다고, 자랑질을 하느라 블로그에 올린것 같소이다.

세계적인 '노턴'이나 '맥카피' 를 안쓰고 V3 를 쓰는 이유가 '순전히 애국심'에 의존한 마케팅에 기반한 것이라고 그대는 우기고 싶은것이겠쥐.

난, 경험과 체험을 토대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오. 무식해서 긴말은 못하고, 내 경험에 입각한 소박한 진실만을 전할 뿐이오. 근데, 내가 대학원 시절에, 그대가 칭송해 마지 않는 '노턴'하고 '맥카피' 그거 돈내고 사서 써 봤거등. 어디서? 미국에서.  미국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노턴, 맥카피 써봤다 이거쥐. 

나한테도 물어봐주셔. 너 지금 백신 뭐쓰니?

이때 저의 대답은 V3 이옵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나는 노턴 백신 프로그램을 직접 베스트바이 매장에 나가서 직원한테 추천받아서 샀쥐.  난 백신이 뭔지도 모르는 무지렁이였으니깐.  그래서 직원이 제일 좋다고 말해주는것을 샀지.  그런데, 그 백신을 까니까, 컴퓨터가 한숨나오게 느려지누만.  아주 환장을 해. 나는 컴퓨터가 고장이 난 줄 알았어. 그런데 사람들이 그러는거야. "너 노턴 깔았니? 그거 깔면 안전한지 어쩐지는 모르겠는데, 부지하세월 주구장천 기다려야해. 노턴이 너무 무거워."



그런데, 나는 너무나 무식하고 순진한 학생이라. 그래도 그 노턴을 갖고 세월을 보냈어. 그러다가 노트북을 하나 새로 장만하면서, 이번에는 나도 약았어. 맥카피를 깔았어.  맥카피. 맥카피를 깔았단 말여. 근데, 맥카피는 노턴보다는 좀 덜 무거웠지. 노턴에 비하면 노트북 실행 속도가 좀 빨라졌어.  그래서 그럭저럭 만족하고 살았지.




그런데 이년쯤 후에, 한국에 갔거등. 한국에 갔더니 형제들이 나 돈없이 공부한다고 불쌍하다고 뭐 갖고 싶은지 말하라고 하길래, 노트북을 새로 하나 장만하고 싶다고 했쥐.  그랬더니 우리 오빠가 한국산 노트북 하나를 장만해주시면서, "야 필요한것 여기서 다 깔아가지고 가라." 이러시는거야.  그래서 백신도 깔고, 연구에 필요한 도구도 깔고, 신났지. 그때 컴퓨터 매장 직원님이 백신을 V3 를 깔아주시길래, "제가 미국에서는 맥카피를 썼는데요, 여기서는 V3 쓰나봐요..." 하고 그냥 물었지.  매장 직원님 말씀, "아이구 그 노턴이나 맥카피 그거 쓰시면 그 프로그램자체가 무거워서 속도가 안 날텐데요. V3가 가볍고 안전하고 좋아요~!"



나 그후로 5년 가까이 v3 로 살고 있는데, 여태까정 컴바이러스 문제 생긴적 없다네.

매출력이나 혹은 마케팅 면에서 노턴이나 맥카피가 한국산 V3에 비해 우세 할 수는 있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V3의 질이 떨어진다고 말 헐수 있으까?  모든것을 계량화 수량화 해서, 수출을 잘해야 질이 높다고 판단하는 것이 그대의 명석한 셈법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노턴이 그렇게 잘 났으면 그대부터 컴퓨터와 노트북에 노턴 깔으셔. 그리고 잘 놀아보셔. 제발 제발 제발 노턴 까셔~ 강추혀~ !!! 노턴을 깔면 천국이 열릴걸세, 노턴  설치하시고 구원받으시게나 음하하하하  (근데 참고만 하셔, 그 노턴은 지우기도 아주 고역이더라구. 그 자체가 악성 바이러스처럼 제거가 잘 안되더라구~  )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약은데 애국심으로 개똥같은 것을 살거라고 상상을 하는건가? 응?  (넌 좀 이상해. 국산을 개똥으로 아는 것 같애. 그게 혹시 그 잘난  너예~ 하바드 법대 석사 자격 때문인거니?  내가 하바드 박사 한국인도 만나뵈었지만, 너같이 거들먹거리시는 걸 뵌적이 없단다. )  내가 애국심 때문에 v3 쓴다고?  나는 그냥 무료로 주는 V3 쓰면서 행복하다네. 노턴과 맥카피 돈주고 사서 쓰던 나일쎄마는. 내가 바보였던것이지~~ 

이사람아 트집을 잡을걸 잡으셔. 써보기나 해보고 비교를 하시던가.  그나저나 어쩐다. 명석한 두뇌를 엉뚱한 곳에서 낭비하는 자네가 안타까울 뿐이네. 그 좋은 머리를 좀 근사하게 써 보시게나. 자원낭비가 아닌가 말일쎄. 인생은 한방에 가는게 아닐쎄, 자네 인생은 끝난게 아니란 말이지. 무쪼록 정신 차리시고,  행운을 비네.  자포자기 하지 말게나, 자, 선물일세.



내가 안철수 팬이냐구?  아닐세. 난 안철수한테 별로 관심 없네. 나는 안성기씨 팬이지. 근데 이것 한가지는 분명해. 니가 생트집을 잡으면서 그를 물어뜯으러 들면, 나는 별 관심도 없는 안철수를 보호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단 말일세. 상식적으로 살자 이거지 뭐.




<나 이러다 너 씨리즈 쓸까봐 무섭다. 고마하자.>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11. 10. 27. 03:23
2011년 2월 19일 버지니아 미술관 (Virginia Museum of Fine Arts)에서, 사진 이은미



오션 파크 시리즈 22번, 1969년
"기질적으로 나는 늘 풍경화가였다."--디벤콘.
(버지니아 미술관 작품 설명에서)



2010년 12월 23일 허시혼 (Hirshhorn Museum http://hirshhorn.si.edu/ ) 지하 1층 전시장에서 촬영

리처드 디벤컨 (Richard Diebenkorn :1922-1993)  은 미국 미술사를 한눈으로 내려다 볼 때, 특별한 '서부지역' 작가로 자리매김을 하는 편이다. 삼백년도 안되는 신생 미국의 미술사를 들여다보면, 필라델피아와 뉴욕이 미술의 중심지로 화가들을 끌어 모았고, 그 이외의 지역에서 활동한 출중한 대가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지방 미술가들에게 모욕스러운 발언일수 있으나 대략 그러하다는 것이다.) American Regionalism 관련 페이지에 소개된 지역주의 화가들이 주목을 받는 이유도, 잊혀진 미국 중부 대륙을 대표했던 그 지방 화가들이라는데 있다. 20세기 미국 화단에서 먹고 살 만한 집 사람들은 유럽으로 유학을 갔고, 미국에서라면 필라델피아, 뉴욕에 화가들이 모였다.  한국에서 시골 젊은이들과 학생들이 보따리를 싸가지고 서울로 일터를 찾아서, 혹은 공부를 하러 올라가던 것과 흡사하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웨인 티보 (  http://americanart.tistory.com/957 ) 나 리차드 디벤컨은 미국 서부해안지역이 자랑할 만한 작가들이라고 할 수있다. (여기도 인물 있다! 이거다.).

그리고 디벤콘의 대표적인 작품이 위에 소개된 Ocean Park 씨리즈라고 할 만하다. 그러니까, 디벤콘이 어떤 작가인지 잘 모르더라도, 미술관에서 위의 작품과 비슷한 것을 발견하게 되면 -- 아마 디벤컨 일걸? 하고 추측해도 대강 정답에 가깝다. 기하학적인 추상화 같은데, 가만 보면, 비행기 타고 가다가 내려다보는 미국 대륙을 닮기도 하였다. 지도를 무한 단순화 작업을 하면 이와 비슷한 형태의 지도가 탄생 할지도 모른다.

위의 작품이 1978년 작품이고, 111번 번호가 붙었다. 그는 오션 파크로써 그의 미술 세계 하나를 새로 탄생 시킨 셈이다. 


어릴 때 부터 미술에 흥미를 보였던 디벤콘, 그의 아버지는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사실 아들이 그림쟁이 되겠다고 할 때 이를 반기는 부모가 얼마나 되겠는가). 디벤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1940년 스탠포드 대학 일반계열에 진학한다.  2차 대전이 시작되고, 3년후 그는 해병대 장교 훈련을 받으러 버지니아로  떠난다. 청년 디벤콘은 워싱턴 디씨의 미술관등지에서 현대 미술품들을 보면서 미술에 대하여 새로 눈을 뜨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제대한 그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San Fransisco Art Institute 에 입학한다.

1947년 그는 이 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하는데 당시에 Clyfford Still 역시 교수진에 있었고, Mark Rothko 는 1947년에서 1948년 사이에 잠시 이 학교에 머무르기도 했다.  후에 그는 University of New Mexico 에서 미술 석사 과정을 밟는다. 그가 1953년 샌프란시스코 미술학교에 다시 돌아올 무렵, 그는 이미 그의 추상 표현주의 미술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후 잠시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구상주의 미술 운동에 참여하기도 한다. 1966년 UCLA 에 자리를 얻는 그는 산타 모니카 인근의 Ocean Park 에 스튜디오를 장만한다. 그리하여 1967년부터 Ocean Park 시리즈가 탄생하게 되는데, Ocean Park 는 25년간, 그가 죽을 때 까지 그의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디벤콘의 오션 파크 시리즈및 그의 풍경화를 보는 방법은, 나 자신을 헬리콥터나 비행기에 태웠다고 생각하면 된다. 천미터쯤 상공에서 내려다보이는 해안가 풍경은 어떠할 것인가? 그 풍경을 얀간 단순화 한다면?  그러면, 도로가 보이고, 바다가 보이고, 혹은 푸른 초원이 보일 것이다.

아래에 보이는 작품은 1962년, 그의 오션 파크 스타일의 풍경화가 나오기 전에 그려진 작품이다. 이 작품을, 조금더 단순화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아마도 무채색의 기하학적 구성이 가능해 질 것이다. 구체적인 풍경이면서, 장차 등장할 오션파크 시리즈의 구도를 담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한 작가의 작품들을 시간 순서대로 배열해서 들여다 보는 일도 재미가 있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1층, 2011년 10월 이은미 촬영




 

 




아래 콜로라도 시리즈는 모두 1970년 작품으로, 허시혼 미술관 소장품들이다. (2010년 12월 23일 이은미 사진).










 

 





 

 






2011년 10월 26일. 이은미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0. 26. 18:27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286809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10월30일까지 ‘렘브란트와 예수의 얼굴’이라는 주제로 특별 전시회를 하고 있다. 이 전시회는 프랑스의 루브르와 필라델피아, 그리고 디트로이트 미술관이 합동 기획 한 것으로 루브르에서는 올해 4월부터 7월까지 전시 되었고, 필라델피아에서는 8월부터 10월 말까지 전시가 되며, 11월부터 내년 2월까지는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열리게 된다.
 
렘브란트(1606-1669)는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기에 활동했는데 그의 인물화와 판화가 유명하며, 그의 판화기술은 독보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회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렘브란트가 그린 예수님의 얼굴과 예수님의 일대기 관련 유화, 그리고 판화작품과 판화를 위한 밑그림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렘브란트의 화실에서 제자로 활동했던 작가들의 그림도 전시 되고 있다.
 
지난 주에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갔는데, 미술관 입구에 루브르 소장품인 ‘엠마오의 예수 (Christ at Emmaus, 1648)’가 커다란 걸개 그림으로 걸려 있었다. 이 작품이 전시회의 대표적 작품인 셈이다. 엠마오와 관련된 이야기는 누가복음, 마가복음에 소개가 된다. 예수 사망 후 제자 클레오파스와 또 다른 제자가 슬퍼하며 길을 가고 있는데 이 때 모르는 나그네가 합류한다.

날이 저물어 엠마오에 도달하였을 때 나그네는 그냥 가려고 하는데, 제자들은 날이 저물었으니 함께 마을로 들어가서 저녁을 먹자고 그를 초대한다. 저녁을 먹기 위해 나그네가 빵을 자를 때 제자들은 그 나그네가 스승님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일화다.
 
렘브란트의 그림에는 자그마한 식당의 테이블 정면에 예수님이 앉아 있고, 그의 양 옆에 두 명의 제자가 앉아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른편에 웨이터가 시중을 들기 위해 서있다. 정면의 예수님의 시선은 어딘가 위 쪽을 향해 있고, 양 옆의 제자들의 시선은 예수님 얼굴 쪽을 향한다.

웨이터는 테이블 쪽에 시선을 내려 보내고 있다. 예수님은 왼손으로 길쭉한 빵을 받치고 있고, 오른 손으로 빵을 잘라내고 있다. 이 빵은 유태인들의 전통적인 빵으로 아직도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 빵을 손으로 자를 때 버석거리는 소리가 난다고 한다. 바로 그 빵을 자를 때 빵이 버석거린 그 순간, 문득, 제자들은 이 나그네가, 돌아가신 스승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깨달음은 빵을 자르는 순간 번개치듯 찾아왔다. 이는 불가에서 석가세존이 연꽃을 들었을 때 제자 가섭이 혼자서 그윽하게 미소를 지었다는 이심전심, 불립문자의 경지와 흡사하다. 인간의 언어로서는 전달이 안 되는 세계. 깨달음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우리의 허를 치듯 찾아와 둥지를 튼다.
 
곁에 서있는, 지금 이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르는 채로, 자신의 눈 앞에 구세주가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서있는 웨이터는 이 극적인 장면을 더욱 고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을 때 이를 눈치 채지 못하는 이가 이 사람뿐이겠는가? 그림 앞에 선 나는 눈앞에 진리가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내 일에만 열중하는 나 자신의 초상화를 그 식당 종업원에게서 발견한다.
 
이 전시회에서 새로 알게 된 것은 렌툴러스(Lentulus)의 편지라는 것으로, 렌툴러스라는 사람이 예수를 만나 그의 용모를 상세히 서술한 것이 15세기에 유럽에 알려졌다는 것이다. 이 편지의 저자는, 예수의 얼굴에 상처가 없으며 뺨은 홍조를 띠었고, 소리내어 웃지 않되 밝은 표정이었으며, 곧 눈물을 터뜨릴 듯한 눈빛이었는데 세상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얼굴을 처음 본다고 적었다.

이 서신은 근본을 알 수 없는 위서로 평가가 되지만, 중세 암흑기를 거친 당시의 인본주의 화가들은 편지에 적힌 인간적인 예수님의 용모를 재현하려고 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 예수님을 보러 필라델피아에 갔던 나는 미술관에서 무지하고 깨닫지 못하는 내 얼굴 하나를 발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딱한 내 얼굴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축복 넘치는 깨달음이었으리라.

2011,10,26 이은미


Posted by Lee Eunmee
Pop Art2011. 10. 24. 06:32

Cakes (1963) oil on canvas
Wayne Thibaud (1920- presently working)
사진. National Gallery of Art 동관 1층 2010년 1월 16일 이은미 촬영



집으로 날아온 Smithsonian Magazine 2011년 2월 호에 Wayne Thibaud 특집 기사가 실렸다.
http://www.smithsonianmag.com/arts-culture/Wayne-Thiebaud-is-Not-a-Pop-Artist.html
기사를 재미있게 읽고, 내가 갖고 있는 사진파일을 뒤져서 들여다본다.


Wayne Thiebaud (1920 - )   --'웨인 티보' 라고 발음한다-- 는 현재 91세의 현역 화가이다. 2차 대전후의 미국의 현대 미술을 주도했던, 앤디 워홀, 프란츠 클라인, 윌렌 드 쿠닝, 리히텐 스타인등 굵직 굵직한 인물들이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다.  오늘에서야 그의 이름 Thibaud 를 '티보'라고 읽을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이유는 아마도 그의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잘 몰라서였을것이다.  정확한 발음을 모를경우 기억하기가 힘들다. (이제는 아마 잊지 않을것도 같다.)

미국의 현대 회화를 지나치다보면 '반드시' 큼직하게 그려진 파이 그림을 만나게 된다. 동글동글한 파이가 모여있거나, 하나가 있거나, 아이스크림을 아주 크게 그려놓거나, 캔디볼이 있거나 이런 그림들이 보인다. 큼직한 미술관에서 이런 그림을 한점 봤다면 '웨인 티보'라고 아는척을 해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것이다.

이 다양한, 그러나 반복적인 케익 그림은 앤디 워홀의 '갭벨 수프 깡통' 그림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다. '상품'을 그림에 담아 놓은 스타일이 비슷해서일 것이다. 산업사회에서 대중적인 상품들이 가지는 '미적 가치'를 워홀만큼 신나게 대변한 이가 또 있을까. 티보의 케익 그림 역시 이런 스타일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나는 일단 티보의 케이크 그림을 '팝 아트'에 끼워 넣기로 한다. 

그러나, 티보를 팝 아티스트라고 규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가 팝 아트만 한 사람이 아니므로, 그가 팝아트적 작품들로 유명해졌고, 널리 알려진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진행중인 그의 예술세계는 팝아트를 넘어서 다채로운 시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스미소니안 기사에서는 (혹은 wayne thiebaud paintings 이미지 검색을 해보면) 그의 매우 매력적인 풍경화들이 소개가 된다.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하던 Richard Diebenkorn (1992-1993)의 풍경화 기법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는 티보의 풍경화는 간략하면서도 세밀하고 깊다.

스미소니안 기사를 읽어보면, 티보는 '만화가,' '광고미술가' 등의 이력을 거쳐 뒤늦게 본격 회화의 길에 입문하였다. 그의 이력을 보면 그는 나이 서른이 넘어서 미술 학사와 석사를 받았다. 그 자신, 헐리우드에서 광고나 영화 광고 쪽에서 활동하면서 돈을 많이 버는 일에 열중했다고 한다. 앤디 워홀 역시 상업 미술 분야에서 독보적으로 성장을 했다. 아무래도, 동부에서 앤디 워홀이 상업미술로 돈방석에 오르고 있을 즈음, 서부에서 웨인 티보가 비슷한 이력을 쌓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는 만화, 광고 일러스트레이션, 광고제작등의 이력을 거쳐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열어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의 그림의 소재들이 가게 진열대의 달콤한 케익, 사탕 항아리, 아이스크림, 오락기등인 것을 보면 광고쟁이로서의 그의 전력이 여전히 그의 회화의 밑거름이 되고 있지 않은가. 광고쟁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제품'들을 회화로 구현해 낼 생각을 했을까 말이다.

티보의 그림들을 들여다보면서, 그의 그림 소재가 된 것들의 일관성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생각해본다. ...음...문방구에 가서 문방구에 쌓인 것들을 사진기에 담아서 연작으로 그려보면 어떨까. 문방구 풍경, 문방구 안의 아이들, 문방구 앞의 전자 오락기 앞에 앉아서 노는 아이들, 그 앞에 쌓인 장난감 뽑기 껍데기, 그 알록달록한 껍데기 뭐 그런것만 시리즈로. 

티보는 UC Davis 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70에 은퇴를 했는데, 그 후에도 지금까지 명예교수로 미술 특강을 하는데 여전히 학생들이 몰려 온다고 한다. 나이 90에 현역을 달리는 화가. 참 복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나를 사로잡은 그림은 아래의 풍경화. 제목 Brown River, 2002. 그림이 빛에 반사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내 책상 밑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었는데도 아래 부분이 반사가 되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지도'와 같다. 헬리콥터나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장면 같은 풍경.  그런데 그림을 들여다보면 그림자의 방향이 일관성이 없고, 그리고 색상이 참 다채롭고 깊다.  그림자의 방향이 왜 일관성이 없을까?  예컨대 왼쪽 상단 구석의 푸른 나무 그림자를 보면 태양이 그 뒷쪽에서 비치는 것 같은데, 강 오늘쪽 굽이진 강둑의 나무 그림자는 오른쪽 위에서 태양이 빛나는 것 처럼 보인다.  어린 아이라 하더라도 빛과 그림자의 이치만 안다면 금세 알아차릴 이런 방향의 불일치를 화가가 몰랐을까?  알았다고 봐야한다. 그러면 그는 왜 이런 장난을 했을까? 이 자도안에 모든 '시간성'을 다 집어 넣고 싶었던걸까? 

 

이렇게 아름다운 '지도' 그림을 보면, 나는 가슴이 쿵쿵 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아, 얼마나 매혹적인가.






아래의 그림은 Man in Tree (나무의 남자).  티보가 1978년부터 그리기 시작하여 아직도 작업을 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30년이 넘게 그의 품에서 색을 입어가고 있는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채색이 꽤나 깊다.  그래서인지 화면에서 보석같은 색감이 불빛처럼 흘러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아 찾았다!

http://americanart.si.edu/images/2004/2004.30.4_1b.jpg
티보의 풍경화가 어딘가 눈에 익어서 뒤져보니, 내가 그의 풍경화를 본 적이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 1층.  에드워드 호퍼와 조지아 오키프 그림이 있는 전시장 왼쪽에 이 커다란 풍경화가 걸려있다. 나는 이 그림 앞에서 한참을 이유도 모른채 서성이곤 했었다.  이 '지도'같은 그림 앞에서면, 뭔가 그리워진다. 자동차를 몰고 이 풍경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위) 2011년 1월 25일 작성


(아래) 2011년 2월 12일 (토) 방문,  작성 (사진 촬영: 박찬홍)
본 페이지 맨 위에 소개된 작품. National Gallery of Art 1층에 전시된 작품. (카메라가 바뀌어서 색감도 조금 차이가 난다). 대략 사람과 비교하여 이정도 규모의 작품.




같은날,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 이작품을 보려면 에드워트 호퍼의 Cape Code Morning 이 전시된 뒷편으로 가면 된다.

위의 이미지를 보면 강물이 연분홍처럼 보이는데, 전시장에가서 원화를 보니 내 카메라에 담긴 이미지가 좀더 원화의 색감에 가까웠다. 강물이 노리끼리한 분홍빛에 가까웠다 (얼핏 노란 탁류를 연상시키는 색감이었다).







(아래) 2011년 10월에 이 전시장에 방문 했을때, 위의 LeVee Farms 가 걸려 있던 자리에 새로운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티보를 보러 가볼까...'하고 갔는데 새로운 작품이 걸려 있어서 예기치 않았던 선물을 받은듯 그렇게 반갑고 기뻤다.
이러한 풍경화는 동시대에 같은 지역에서 활동을 한 리차드 디벤콘 (Richard Diebenkon http://americanart.tistory.com/1400  )의 풍경화와 많이 닮아있다.  그래서 두사람의 풍경화를 비교해서 보는 일도 재미있다.






(아래) 2011년 4월 12일, 대학원생들과 함께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에 필드트립을 갔던 날, 3층 링컨 갤러리에서 찍은 사진.  이 작품의 제작 년대가 1962년으로 표시 되어 있다. 미국에 앤디 워홀을 위시한 팝아트 운동이 불길처럼 퍼져갈때의 팝아트 작품으로 분류 될 만하다.  팝 아트 페이지에서 간단하게 적은 바 있듯이, 이미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어 나온 대상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그냥 열심히 그렸다. 앤디 와홀은 스프 깡통이나 포장 상자를 그대로 베끼듯이 그려 댔고, 웨인 티보는 알록달록한 컵케이크들을 그려댔고. 그 와중에 이런 잭폿 기계도 그렸을 것이다.

2011년 4월 12일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 링컨 갤러리.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11. 10. 21. 08:15



구글에서 Rileys Lock House 를 검색하여 주소를 찾아냈다. 약 40분 걸리는 거리. Seneca Creek Aqueduct 를 찾아가도 된다.

지난번에 저기 보이는 라일리의 집을 구경해 본 적이 있고, 여기서 조금 더 가면 23마일 포스트가 나온다. 이 23마일 포스트에서 33마일 포스트까지 왕복하는 것이 오늘의 목표. 10마일 갔다가 다시 돌아 오는 거리.

오전 10시 30분부터 걷기 시작하여 오후 1시 30분에 10마일 지점에 도착 (3시간)
다시 반환하여 오후 5시에 원점에 도착했다 (3시간 반)
중간에 앉아서 쉰적이 없다. 내내  걸으면서 사과와 주먹밥을 먹었다. 캔커피를 반환점에서 기념으로 마셨고, 물은 먹지 않았다. 날이 쌀쌀하고 (땀을 많이 흘리지 않고), 사과를 먹었으므로 그것으로 수분 보충은 충분 했던 것 같다.

오전에는 길에서 사람을 아무도 못 만났다. 강변 숲속길에 오직 나와 다람쥐, 새들 뿐이었다. 오후에는 다섯사람을 길에서 스쳤다.  33마일 지점까지 가는 길에 마일 포스트에  도착할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증명사진.)

























도착!!!  33마일 지점!!!







33마일 지점 도착 기념으로 가방에서 캔커피를 꺼내서 기념식~


마셔 주시고~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 가는 길.


혼자 온종일 걸으면 심심하지 않는가?  뭐 음악이라도 들으면서 걷는가? 묻는 분도 있다. 난 별로 심심하지 않다. 그저 즐거운 생각을 할 뿐이다.  그런데 슬슬 심심해지면, 가방에서 킨들을 꺼내어 주로 마태복음을 읽는다.  오늘은, The Beautitudes 를 읽으며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길에 아무도 없으니까, 그냥 이걸 꺼내어 소리내어 읽으면서 걸어도, 발에 걸리는 것도 없고, 어느정도 외워지면, 킨들을 가방에 다시 넣고, 대강 생각나는 구절들에 대해서 사색을 하면서 걷는다.

오늘 나는 이 The Beautitudes 의 '순서'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색을 해 보았다.  순서에 대해서 사색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전체를 외우게 된다.  그리고, 피로를 잊게 된다.




다시 출발지점 라일리즈 록 하우스.


반다나 (머리에 두르는 면 스카프)가 꽤나 유용하다는 사실을 오늘 알게 되었다. 목에 두르고 갔는데, 오늘 바람이 몹시 불었다. 후드자켓을 입고 갔으니 그 후드를 뒤집어 쓰면 되었는데, 써보니 몸이 불편했다. 자꾸만 목을 움추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것이 성가셔서 벗어버리고, 목에 둘렀던 반다나를 머리에 썼다. 의외로 간편하고 바람도 잘 막아줬다.  이것이 그러니까 만능 스카프였군.

오전에는 후드자켓 위에 카디건까지 입고 출발 했는데, 걸으면서 점점 몸이 뜨거워져서, 차례차례 벗고 마침내 셔츠만 남았다. 운동의 매력은, 몸이 공장처럼 막 뜨거워진다는 것이다. 몸이 뜨거워지는 그 기분이 좋아서 자꾸만 나가고 싶어지는 것도 같다.

지난번에 등산화를 신고 나갔을때는 신발이 무거워서 좀 피로했지만, 발 상태는 아주 좋았었다. 뭐 아무런 피로 증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워킹화를 신고 나가니 이미 반환점 부터 발바닥 엄지 발가락 아랫부분, 아치가 시작되기 직전, 힘을 가장 많이 받는 부분이 슬슬 따가워지기 시작하더니 자꾸만 아파왔다. 집에 와서 보니 물집이 생겨 있었다. 두발 모두.  물집이 심한 것은 아니고, 약간. (내일 나갈수 있으려나 조금 걱정이 된다.)

역시 장거리 숲길  워킹에는 등산화가 더 좋은 것으로 판결이 났다.


중간에 주먹밥을 두번 먹어줘서 그런지, 워킹을 마쳐도 배가 고프지 않고, 피로하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지난번의 운동 효과도 있고, 어제도 몸 풀어주기 위해서 나가서 8마일 걸어줬고, 이래저래 몸이 가벼워진것 같다. 몸도 피로하지 않고, 걷기 기록도 향상되었다.  어제 온종일 비가 왔기 때문에 강물이 불어서 소리를 내며 흘렀고, 숲길도 물에 젖어 촉촉했기 때문에 걷기가 아주 좋았다.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흙길이 이어졌으므로.  그래서 아마 덜 피로했을 것이다.

오전에는 맑고 바람이 몹시 불었고, 오후부터는 날이 흐려졌다. 그래도 춥지는 않아서 걷기에 좋았다. 축복받은 또 하루였다.






그러니까, 아래의 지도에서, 맨 아래, 조지타운에서 시작되는  0마일--> 3.5 마일 구간은, 평소에 내가 워킹 나가면 걷는 곳이다.  3.5 에서 13.5 마일까지는 3년전 가을에 온가족이 왕복 한 적이 있다. Great Falls 까지 다녀오는 20마일 거리이다.

며칠전에는 12.3 마일부터 23마일 구간을 왕복을 하였다.

오늘은 23 에서 33까지 왕복 하였다.

33마일부터 60마일 구간은 지난 봄에 50킬로미터 걷기 행사에서 걸은 구간이다. 그날 화이츠페리에서 출발하여 워싱턴 방향으로 걷다가 다시 돌아 거슬러 올라갔었다. 마일리지를 정확히 채우기 위해서.  그러니까, 오늘 33마일까지 채움으로써, 60마일 지점까지는 내 발로 모두 걸어준 셈이다.  이후에는 하퍼스페리에 가서 걷기를 해야 한다.  집에서 하퍼스 페리까지 차로 힌시간 반 정도 걸릴텐데... 걷고 오는 길에 장시간 운전하는게 고역이겠다.  :-)

광개토대왕이 되어 내가 정복한 땅의 지도를 보고 있는듯한 기분이 든다 :-)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