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Column2011. 12. 21. 17:55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22490

매년 12월에 시사 주간이 타임 (Time)지는 ‘올해의 인물’을 선정하여 기사화하는 전통이 있다. 올해 12월 26일자 타임의 주인공은 ‘시위자들 (The Protester)’로 선정되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방송이나 신문에서 ‘다사다난했던’이란 표현으로 한 해를 정리하는데, 올 한해도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한국에서는 ‘무료 점심’ 투표에 이어진 ‘서울시장’ 선거로 올해 하반기가 거침없이 흘러주었고, 미국에서는 ‘월스트리트 점령’을 필두로 한 점령운동이 이어졌으며 현재 진행 중이다.

며칠 전에는 30년 넘게 북한을 통치한 최고 통치자의 사망 소식이 있었고, 그 지역에서는 3대에 걸친 세습이 이어질 모양이다. 일본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기도 하다.
 
이 많은 일 들 중에서 전세계적으로 발생하여 바이러스처럼 번져 간 한가지 현상을 타임지는 주목했다. 2011년은 전 세계의 압제 받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서 서로 생각이 통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뭉쳐서 독재자들을 몰아내거나, 진정한 민주주의의 발판을 만들기 위해서 연대했던 시간으로 기억되게 될 것이다.
 
그 발단은 튀니지에서 점화되었다고 타임은 설명한다. ‘모하메드 보와지지’라는 스물 여섯살의 청년은 튀니지의 작은 마을에서 길거리 행상으로 가족과 연명을 하며 살고 있었다. 1년 전 12월 중순, 길거리 단속에 나선 경관이 그의 저울을 빼앗고 그를 때린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단단히 화가 난 그는 관청에 찾아가 호소를 해보지만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는 몸에 인화물을 뿌리고 분신한다. 이 청년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청년은 1월4일에 운명했고, 그로 인한 튀니지의 시민 시위는 정점에 다다랐다. 그리고 튀니지의 대통령은 사우디 아라비아로 망명을 해야만 했다. 시민의 승리였다.
 
이집트에서도 칼레드 사이드라는 28세의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경찰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저항하여 일어난 시민들은 히잡을 쓴 여성들, 기독교인들, 무슬림들, 각계 각층의 빈부를 초월한 사람들이었다. 3주간 45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이는 14세 이상 이집트 전체 인구의 8%에 이른다는 통계이다. 시민들의 시위가 이어지는 동안 무바라크 대통령의 군사조직 조차 시위대에 총을 겨누지 않았다. 독재자의 실각이 이어졌다.
 
요르단, 바레인, 모로코, 알제리아, 시리아, 리비아에서 독재자들에 대항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스페인, 그리스, 이스라엘, 영국에서도 사회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마침내 7월에는 뉴욕의 경제 중심가에서 "Occupy WallStreet" 운동이 발화되기에 이른다. 이 운동은 아직도 겨울의 추위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타임지는 이 모든 시민의 저항 운동 속에서 인터넷이나, 페이스북, 트위터와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의 기능을 재조명 했다. 이전까지 인터넷은 사람들이 그저 개별적으로 음악을 찾아 듣고, 재미있는 동영상을 찾아 보고,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차단해버리는 도구로 사용했다면, SNS의 등장 이후, 사람들이 자신과 생각이 통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연대하고, 광장에 모여서 행동하도록 보조하는 도구적 역할을 해 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인터넷이 사람들을 골방으로 이끌었다면, 오늘날 SNS가 사람들을 광장에 모이게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이 세계의 민주화에 가장 기여한 것으로 미국이 개발해 낸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도구들일지도 모른다는 자평을 하고 있다.
 
사실 ‘개신교’에 해당하는 영어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인데 이는 구교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저항자들’, ‘시위자들’, 구시대의 가치나 이념에 의문부호를 달고 의견 개진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인류사는 발전을 거듭해왔다. 저항이나 시위라는 말에 어떤 ‘저항’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저항이나 시위 역시 역사 발전의 동력이며 과정임을 돌아보는 안목도 필요하리라.

2011,12,21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11. 12. 18. 21:11



http://www.imdb.com/title/tt1441912/

'순례자의 길'로 알려진 800 킬로미터에 달하는 산티아고 가는길이 영화에 담겨있다.  각자 다른 사연으로 순례자의 길에 오르는 사람들.  800 킬로미터라면, 내가 혼자 앉아서 따져 보니까, 하루에 30 킬로미터씩 27일을 꼬박 걸어야 한다. 중간에 며칠 쉬거나 일정이 늦어질경우 한달이 훌쩍 넘어 버릴수도 있는 여정이다.

하루 30 킬로미터가 어떤 거리냐 하면,  내가 지난 가을에 하루 20마일씩 몇차례 걸은적 있는데 (20마일은 대략 32 킬로미터 된다), 아이고, 이거 하루 걸으면 그 다음날은 그냥 뻗어버려야 할 판국이다. 다리가 뻗뻗하고, 발 바닥도 부르트고 그렇다.  하루 30 킬로미터를 줄창 걸어대는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 게다가, 등에 기본적인 생존 도구들을 짊어지고 걸어야 한다. 등짐 지고 하루 30 킬로미터는 간단한 행진이 아니다.  (그래서 요즘 나의 고민은,  내가 가볍게 산책 나갈때도 등짐을 지고 연습을 해야 하는가?  이런 것이다.)

이 산티아고 가는 길에 대해서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에 죽은 엄마가 넋두리 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소설가인 딸에게서 들었던 순례자의 길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려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 속에서 실종되어 구천을 떠도는 엄마가, 순례의 길에 올랐다는 해석을 했었다.

또 있다. "엄마 또 올게"라는 책이 있다.  정경화 라는 분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모하며 만들어낸 책이다. 그 어머니는 '인간극장'에 소개된적도 있는 분인데, 근래에 돌아가셨다. 나는 운좋게도 그 할머니 생존시에 나오신 인간극장을 한국에 갔을때 테레비로 본 적이 있다. 이것도 인연이다. 그 따님이 70이 다 되신 분인데, 그 순례의 길을 떠나신다. 늙으신 어머니는 딸이 떠나 있는 동안 자신이 죽을까봐, 자신이 세상 하직 할 때 딸이 없을까봐, 그 딸이 순례의길을 안 갔으면 좋겠다고 내심 생각하지만, 그 딸은 순례의 길에 오른다.  (할머니는 따님이 돌아온  후에 돌아가셨다.)  --> 이것은 소설이 아니고 실화이다.

그래서, 그 순례자의 길에 관심을 가져보긴 했는데,  영화에 그 풍광이며 문제상황까지 상세히 나와줘서, '나도 거기 가서 실컷 걸어보고 싶다'는 열망이 좀더 구체화 되었다.

이것도, 내 삶에서 꼭 해보고 싶은 것 리스트에 담아 두기로 하자.

2011, 12.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11. 12. 18. 04:39



모처럼 왕땡이를 데리고 조지타운에 산책을 나갔다. 왕눈이가 장거리 워킹을 한 지 오래되었고, 나이도 연로하셔서 잘 걸을지 약간 염려가 되었는데, 노익장!을 과시하듯 문제없이 가볍게 6마일 거리를 왕복을 했다.  헥헥거리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왕눈이가 장거리 걸을때 헥헥거린 이유는 날씨가 더워서 땀이 나서 그랬던 모양이다. 날씨가 쌀쌀하니까, 왕눈이 입장에서는 덥지가 않으니까 가볍게 잘 걷더라.

나 역시, 왕눈이를 위해서 왕눈이가 평소에 먹는 '과자'를 몇개 주머니에 갖고 나가서 약 1마일 걸을때마다 하나씩 꺼내 먹였다. 말하자면 그것이 왕눈이에게는 '에너지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군소리 않고 걸어주었으니까.





조지타운 컵케이크 가게에서 오랫만에 컵케이크 하나를 사 먹었다. 점심도 안 먹었고, 출출하고, 배고프면 걷기 힘드니까, 에너지 보충을 위해서.  역시 토요일 오후라서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5분쯤 기다리다가 가게에 들어갔다.  왕눈이는 가게앞 기둥에 묶어 놓았다.  밖에서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왕눈이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이 예쁘다고 쳐다보면서 보살펴 주었으므로. (줄서서 기다리다가, 개 한마리가 보이니까 덜 심심했을것이다.)



컵케이크 하나, 그리고 커피 작은것 한잔을 주문해서


착하게 기다려준 왕땡이와 컵케이크는 둘이 똑같이 노나 먹고,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달콤한 컵케이크와 뜨거운 커피는 이렇게 추운날에는 환상의 콤비이다.  조지타운 컵케이크는 내가 먹어본 중에서 오늘것이 가장 맛있었다.  배고프고 춥고 그런 상태에서 뜨거운 커피와 먹으니까 환상적이었을것이다.

왕눈이는 겁에 질려서 사방을 둘러보다가 유리문 안의 나를 발견하고는 앙앙거리고 짖어댔다.  왕눈이는 늘 그런다.  사람들이 나를 부러운듯 쳐다봤다. 모두들 왕눈이를 만져보고 싶어했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은 남의 개를 만져볼때는 사람들이 반드시 "May I pat your puppy?" 하고 먼저 승락을 받는 편이다.  그러니 개 주인인 내가 제왕이 된 기분이 드는 것이다.  :-)




컵케이크를 사이좋게 노나먹고, 다시 강변을 걸어서 돌아오는길



예정대로 였다면, 지금쯤 왕땡이는 자기를 세상에서 가장 예뻐하는 '아부지'의 품에서 놀고 있었겠지만, '아부지'께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휴가를 반납한 관계로, 불쌍한 왕눈이가 되었다.



조지타운 왕복 산책로 중간 지점쯤에 이런 벤치가 하나 있다. 이곳을 지날때면 왕땡이는 습관적으로 이 벤치위에 냉큼 올라가서 다리 쉼을 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의자를 '왕눈이 의자'라고 이름 지었다. 오늘도 왕눈이는 이 의자에서 하염없이 수로의 물을 바라봤다.









왕눈이가 정정해서 다행이다. 겨울 동안에는 워킹 나갈때 왕눈이도 데리고 다녀야겠다.  왕눈이를 데리고 나가면 카페나 책방에 들르기가 어려위지지만, 그러니만큼, 시간 낭비 안하고, 돈도 안쓰고 걷기만 하게 된다. 그러니 좋은 일일 것이다.  왕눈이를 운동을 많이 시켜서 날씬하고 건강한 상태를 유지를 해야, 이 친구도 내곁에서 오래 오래 살게 될 것이다.  요즘은 내가 왕눈이를 돌봐주는 것이 아니고, 왕눈이가 나를 돌봐 준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우리들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들일 것이다.

2011, 12, 17, 토, 흐린 날.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2. 15. 05:00

        오늘은 수요일이다. 그리고 1992 1월부터 20여 년 간 매주 수요일이면 모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미 10년 전부터 이 모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집회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고, 매주 그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오늘이 이들의 천 번째 모임의 날이다. 본래, 서울의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작되어 진행된 이모임의 천 번째를 기념하기 위하여, 워싱턴 DC에서도 일본 대사관 앞에서 사람들이 모인다. 오늘 정오, 1000차 일본 종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세계 연대 시위 수요 집회가 열리는 것이다.

        2차 대전 중 일본에 의해 종군 위안부로 끌려 갔던 여성은 대략 20만 명으로 추산이 된다고 한다. 국적도 다양하여, 한국, 일본, 중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다양한데, , , 일 출신의 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했으며 그 중 한국여성이 52퍼센트, 중국여성 36 퍼센트, 일본 여성 12 퍼센트 정도 된다는 자료도 있다.  과반수가 한국에서 끌려간 소녀들 이었다는 것이다.

 
      
종군 위안부를 영어로는 ‘Comfort Women’이라고 쓰기도 하고, 좀더 정확하게는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일본군 성 노예)’라고 표기 하기도 한다. 나로서는 성 노예라는 표현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Comfort Women’이 위안부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자리를 잡은 것도 같다.

  
     
자료를 찾아보면 태평양 전쟁 말기에 12세 이상의 소녀들과 여성들을 정신대명목으로 데려다가 공장에서 일을 시키거나 위안부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1935년생인 나의 어머니도 소학교 (초등학교) 꼬마였을 때의 일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일본 순사가 처녀들을 잡아간다는 소문이 돌아서 집안의 여자들을 감추거나 얼굴에 숯검정을 칠하기도 했다고 한다.

 
      
미국의 한국계 소설가 노라 옥자 켈러 (Nora Okja Keller) 1997년에 발표한 소설 ‘Comfort Woman (위안부)’은 우리들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 세대에서 겪었던 조선인 위안부들의 처절했던 삶을 스케치 하고 있다. 취직을 하는 줄 알고 따라 나섰던 소녀는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어 먼 나라로 떠돌며 짐승 같은 대우를 받는다.

 
      
소설에 그려진 일화 중에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병들어 죽어가는 조선인 위안부를 일본인 병사들이 막대기로 입을 통과시켜 하체까지 꿰어서 마치 사냥한 짐승을 잡아 옮기듯 내다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생지옥을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 전쟁 이후의 삶 역시 편안하지 않았다. 그들은 존중 받지 못했고, 보상 받지 못했고, 위로 받지 못했다.

  
     
이러한, 역사의 오점을 바로 잡기 위한 작은 몸짓이, 바로 그 20년간 지속 되어온 수요일의 집회이다. 이들이 일본 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일본이 역사적으로 저지른 반 인간적 범죄를 시인하고, 진상을 낱낱이 밝히고, 사과 하고, 관련자를 처벌하고, 피해자에게 보상하고, 일본 역사 교과서에 이 일을 사실대로 정리하여 재발을 방지 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진정으로 참회하라는 것이다.

 
      
현재 당시의 참상을 증언 해 줄 생존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도 않다. 지난 20년간 많은 분들이 위안부라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안은 채 한 많은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 사이에 일본 정부는 이들의 시위와 요구에 대하여모르쇠로 일관 하고 있다. 희생자들이 모두 사라지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집회, 20년간 매 주 진행된 질기디 질긴 집회,‘일본 종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 집회는 사실 너무 오랫동안 진행되어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집회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제 그 1000회를 맞이하여, 워싱턴 DC에서도 이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인다. 날씨가 추운들 어떤가? 위안부 할머니들은 노구를 이끌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본 대사관 앞에 서지 않았는가?  오늘, 나도 피켓 하나를 들고 그 자리에 서리라. 우리들이 힘을 모아, 이제 그만 이 슬픈 집회가 끝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011, 12, 14, 수 이은미




간 길에 영사관에 들러서 재외국민 투표 등록도 했다. 몸은 미국에 있지만, 나도 대한민국 국민이니까, 투표 해야 하는거다.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의무이며 권리이다.


워싱턴 일본 대사관 앞에서 당일 정오에 시작된 집회



정각에 맞춰서 도착했는데, 이미 단체 버스로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에서 오신 한인 단체 어르신들이 집결해 계셨고, 주로 어르신들이 많으시다보니, 내가 이나이에 '꽃띠'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젊은 축이라서, 기록 사진사들이 나를 세워놓고 사진을 많이 찍었다 (나에게 사진이 배달이 되지는 않겠지만, 기꺼이 모델이 되어 드렸다.) 젊은 친구들은 다들 생업이 바빠서 오기가 힘들었을거라고 추측한다.

마침, 영상 카메라를 세워놓고 열심히 취재를 하는 젊은기자가 있었는데, 이 친구가 '자랑스러운 나의 제자'이다.  대학원 코스 아직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지역 방송국에 취직하여 열심히 기자와 피디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다. (테레비에도 나온다는데, 내가 테레비를 안보는 관계로 녀석을 테레비로 본적은 없고, 취재 현장에서 활동하는 것을 발견하고, 내 자식을 만난듯 반갑고 자랑스러웠다.)






참여자가 대개 한인들이었지만, 간혹, 한인이 아닌 분들도 보였다.  왼편에 '나꼼수' 후드티를 입은 분이 보인다. 나꼼수 후드티 입은 분을 여럿 발견했다.


굳게 닫힌채 미동도 않는 일본 대사관 문.  앞에 계시는 어르신은, 내가 자문해드리는 영어프로그램 담당 선생님이신데, 이자리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 프로그램에 계시는 선생님들이 모두 나오셨다고 한다.



보상하라, 사과하라, 역사에 기록하라 이런 구호들을 외치고, 애국가, 아리랑, 울밑에선 봉선화 노래도 함께 부르고, 이 조직의 대표자가 대표로 일본 대사관에 들어가서 요구문을 전달하는 것으로 이 모임은 파했다.  너무나도 대견하고, 기특하고, 자랑스러운 내 제자와 한장 찍었다. "얘가 제 제잡니다!"하고 자랑을 꽤나 했다.   이 친구가 곱상해도, 태권도가 4단이라 태권도 사범도 하고, 학보사 출신이고, 내 제자이기도 하니 팔방미인이라서 개국하는 지역 방송에서 두말 않고 좋은 조건으로 채용을 해줬다. (성격도 좋아서, 어디에 가나 성실하게 일하고 사랑을 많이 받을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2. 8. 00:44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13380
1970년대 초반, 매섭게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의 겨울 밤이었다. 서울 변두리의 단칸 셋방에서는 네 명의 아이들이 이리저리 포개진 채 잠이 들어있었다.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한 아낙은 숨겨뒀던 꾸러미를 꺼냈다.

꾸러미에서 나온 것은 아동용 초록색 벙어리 장갑 한 켤레. 짝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줄로 연결되어 목에 걸고 다닐 수 있게 만들어진 그 벙어리 장갑을 그이는 낮에 월곡천 건너 시장에서 샀다. 막내둥이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큰 아이들에게도 장갑은 없었다. 하지만 네 명의 아이에게 장갑을 사 줄 형편이 못되었던 아낙은 다섯살박이 막내의 장갑 한 켤레를 샀다. 그래도 내일이 ‘크리스마스’니까. 그리고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돌아다닌다고 하니까. 아낙은 막내 아이에게만이라도 산타 할아버지를 선물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낙이 장갑을 들여다 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일곱 살짜리 셋째가 잠이 깨어 두리번거렸다. “엄마, 그게 뭐야?” 아낙은 얼른 자신의 집게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고 속삭였다. “쉿, 막내가 깨면 안돼! 이것은 막내에게 주는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이야.”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셋째가 물었다. “엄마, 산타 할아버지가 누군데?”
 
아낙은 빙긋 웃으며 설명을 해줬다. “있어, 그런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선물을 준대. 세상에 그런 할아버지가 어디 있겠니. 다 만들어낸 얘기지. 하지만, 우리 막내가 산타 할아버지한테서 선물을 받으면 얼마나 좋아하겠니. 그러니까, 너는 모른 척 해야 해, 알았지?”
 
그날 밤 나는 이 세상에 ‘산타 할아버지’라는 경이로운 존재가 있다는 것과 그것이 ‘순거짓부렁’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한꺼번에 알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 막내둥이가 머리맡에 놓여진 초록색 장갑과 ‘산타 할아버지’의 존재감에 놀라워할 때 나는 막내의 포근한 장갑을 쳐다보며 혼자 애늙은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산타 할아버지 따위…’ 나에게도 달콤한 솜사탕 같은 ‘환상’은 필요했는데, 그것은 내게는 허용되지 않는 사치였을 것이다.
 
최근 시카고의 폭스 뉴스에서 한 여성 앵커가 “산타 클로스는 없다”고 말했다가, 사람들로부터 항의를 받고 사과방송까지 하는 일이 벌어졌다. 온가족이 다 함께 보는 뉴스 시간에 부주의한 발언을 하여 어린이들의 마음 상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사과였다. 글쎄, 산타 할아버지가 없으니까 없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과를 할 정도의 발언이었을까? 하지만 사회적인 분위기나 정서는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12월이 되면 미국의 쇼핑몰이나 공공장소에서 산타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쇼핑몰의 한 구석에서 아이들이 산타 할아버지의 무릎에 안겨서 그와 사진을 찍고 그에게 어떤 선물을 갖고 싶은지 소원을 빌기도 하고 그런다. 사진사도 있어서 그 자리에서 기념 사진을 찍기도 한다. 이곳을 지나칠 때면 성인인 나도 산타 할아버지한테 가서 소원을 빌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설령 산타 할아버지가 없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 영국에서는 산타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을 때의 주의사항을 각급학교에 배포를 했다고 한다. 가급적이면 산타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지 말 것이며 혹시 앉더라도 무릎 끝 쪽에 걸치기만 하라는 것이다. 어린이 성추행 방지를 위한 대책처럼 보인다. 이쯤 되면 산타 할아버지 품에 한번 안겨 보고 싶다는 나의 망상은 접어야 할 것도 같다.
 
산타 할아버지가 있거나 없거나, 매년 12월에 크리스마스는 온다. 1년 중 가장 추운 때, 그래서 인정의 불꽃이 가장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구세군의 종이 울리고 교회나 각종 사회단체에서 도시 인근의 가난한 청소년,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모으고 있다. 나는 워싱턴 DC 빈민가의 어린이들을 위한 선물을 마련하는 것으로 12월을 시작했다. 산타 할아버지가 그 선물을 잘 전달해주길 바라면서.

산타 할아버지가 있거나 없거나, 인정과 나눔은 우리 삶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어 줄 것을 믿는다.

2011,12,07, 수, 이은미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