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Column2011. 12. 1. 03:55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08921


올 가을에 나는 ‘백마일 걷기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는데, 띄엄띄엄 날을 잡아 20마일, 10마일, 15마일, 이런 식으로 계획을 성취할 수 있었다. 물론 매일 개를 끌고 산책을 하거나, 10마일 미만으로 걸은 거리는 계산에서 제외했다. 20마일이면 대략 32킬로미터를 상회하는 거리이다.

이전에 내가 하루 동안 걸은 최장 거리는 50킬로미터이다. 그날 열 시간이 넘도록 걸었는데, 동행 없이 혼자서 하루에 걷기에는 쉬운 거리가 아니라서 나 혼자 걷는 것은 하루 20마일로 잡고 걷고 있다. 혼자 나가서 20마일을 걸으려면 대략 여덟 시간은 잡아야 한다. 처음엔 빨린 걷지만 후반에 속도가 떨어지고, 중간에 휴식도 취해줘야 한다.
 
나의 걷기는 주로 포토맥 강변의 수로길(Chesapeake & Ohio Canal Road)에서 이뤄진다. 나는 이 수로의 시작점에서 68마일까지 두 발로 통과한 기록을 갖고 있다. 나의 소망이라면 워싱턴DC에서 오하이오까지 이르는 184마일 구간 전부를 내 두 발로 밟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하루에 20마일씩 걸으면 9일 혹은 10일 줄곧 걸으면 되겠다는 계산이 나오지만, 20마일마다 숙소가 나와 주는 것도 아니라서, 나 혼자 해내기에는 여러 가지로 무리다. 그래도 나는 언젠가 이 구간 전체를 걸어보리라는 꿈을 간직하고 있다.
 
지난 한 달 간 나는 새벽에 일어나서 내가 갖고 있는 영문 바이블을 베껴 적는 일을 해왔다. 새벽 네 시에 자명종 시계가 울리면 일어나서 간단히 씻고, 뜨거운 차 한 잔을 준비하고, 책상 앞에 붙어앉아 공책에 문장 하나 하나를 정확히 옮겨적었다. 물론 문장을 옮겨적기 위해서는 소리내어 읽어서 내용을 머리에 담은 후에, 그것을 펜으로 종이에 옮겨야 한다. 대략 한 시간 정도 그렇게 소리 내어 글을 읽고 공책에 베껴 적기를 하다 보면 하루에 한 챕터 정도를 적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28장이 되는 마태복음 베껴쓰기를 마치고, 요즘은 마가 복음을 베껴쓰는 중이다. 처음에는 문장 단위로 베껴적는 일이 시간이 많이 걸리더니, 요즘은 문장 전체를 한번에 읽고 옮겨 적는 일이 아주 수월해졌다. 비슷한 어휘와 비슷한 형식의 문장이 리듬감 있게 반복되므로 일단 문장과 내용에 익숙해지니 속도가 붙게 된 것이다. 그러다 뭔가 생각의 불꽃이 피어오르면, 멀리 장미 빛으로 동이 트는 창 밖을 내다보며 나의 생명과 구원의 문제 등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수 년 전 내가 미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첫 해에는 논리정연한 학자의 저널 몇 편을 골라서 수 차례 베껴적기를 한 적도 있다. 내가 한국에서 훈련받은 글쓰기 방법과 미국 대학원의 학문적 글쓰기 방법에는 차이가 있으므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미국 학자의 아주 깔끔한 저널을 직접 베껴적으면서 미국식 글쓰기 방법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려고 했었다. 이제 나는 내 삶에 집중하고 있고 같은 방법으로 바이블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새벽에 성경 베껴쓰기로 하루를 시작하고 시간날 때면 강변으로 나가서 지치도록 걷다가 돌아오는 것이 내 생활의 활력소인 셈인데 어쩌면 글 옮겨쓰기와 걷기에는 일맥 상통하는 원리가 있다. 비행기나 자동차로 여행을 하는 사람은 땅 위의 아주 세밀하고 은밀한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오직 걷는 사람 눈에 들어오는 세상이 있다. 글을 베껴적는 것 역시 속독이나 정독과는 다른 것이다. 글을 읽고 머릿속에 담아서 공책에 내 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글의 ‘체화(體化)’가 일어난다. ‘몸’으로 사색을 하는 경지가 되는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온 몸으로 길 위에 내 생명을 쓰는 것이고, 쓴다는 것은 온 몸으로 글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디지털의 속도로 이뤄지는 놀라운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느리게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일과 한 글자 한 글자 쓰는 일을 통해서, 나는 속도가 줄 수 없는 심연으로 깊이 들어선다. 나는 걷고, 나는 쓰고, 나는 웃는다.

2011, 11, 30 (수)






오늘 아침에, 마가 복음 쓰기 마쳤다.  누가복음 쓰기 시작했다.  지난주 수요일에 시작했으니까, 마가복음은 일주일 걸렸다. 누가 복음은 꽤 내용이 많으니까 일주일에 마치기는 힘들것 같고,  하여튼 박선생께서 집에 오시기 전에는 누가복음까지 마치고, 함께 복된 크리스마스를 보내야지.  음...새벽에 앉아서 쓰기 시작하면 두시간이 금방 흘러간다. (두시간 쓰고도, 재미있어서 더 쓰고 싶지만 스스로 자제하고 다른 일을 한다.)  재미있는 놀이걸이를 찾은것 같애 아무래도... (나 원래 어려서부터 책 종류 베껴쓰는게 유희였다...책은 읽어도 재밌고, 베껴써도 재밌고, 심지에 베게로 써도 좋고...)

그냥 다른 생각 안하고, 골똘히 베껴적는 그 과정이 참 좋다. 이거 하다보면 사람이 말이 없어지고, 고요해지고, 태평해지고, 대체로 평화로워진다. 함박눈이 내 영혼에 내려 쌓이듯이 그렇게 고요하고 풍성해지는 기분. 세상 근심을 잠시 잊는다.

* 아, 서점에서 성경베껴적기용 공책을 판매를 한다. 그래서 그것 한권 구해서 쓰는데, 종이 질이 좋아서 양면으로 써도 잉크가 번지지 않고 편리하다. 세부사항 기록하기도 편리하다.

Posted by Lee Eunmee


Grandma Moses (1860-1961) <---101년을 사셨네~
Painted by Kristin Helberg (1948 -) in 1998
Acrylic on canvas attached on board

70대 중반에 류머티즘 때문에 수 놓는 일이 힘들어졌을때, 소일 삼아서 붓을 들었던 모세 할머니는 나이 80에 미국을 상징하는 할머니 화가로 떠오르면서 돌아가실때까지 영광의 나날을 보내셨다.

모세 할머니처럼 혼자 그림을 익힌 크리스틴 헬버그가 사진속의 모세 할머니를 자기 식으로 그렸다.  아마도 크리스틴에게 모세 할머니가 역할 모델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2011년 11월에 미국 미술관, 초상화 갤러리를 방문 했을때, 미국을 빛낸 위인들 초상화들 속에서 모세 할머니의 초상화를 발견 했다. 이 그림은 그린 화가는 작품 속에 모세 할머니의 작품 일부를 그려 넣었다. 애정 담긴 그림으로 보인다.

2011, 11, 이은미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11. 11. 25. 20:23

꽁지 아래 부분이 흰털로 덮여서 '흰꼬리 사슴'이라고 불리우는 사슴.



어제 하퍼스페리 숲길에서 오후내내 뻥뻥 울리는 총소리를 들었다.  아마도 사슴 사냥 계절이 온 모양이었다.  강변 길이라도 내가 주로 나가 걷는 워싱턴 인근에서는 총소리를 들을수가 없는데 (백악관이 지척에 있는 수도 중심에서 사냥질을 해댈수는 없겠지),  역시 웨스트버지니아 산골로 오니 사냥 총 소리가 난다.

처음에 어딘가에서 뻥!하고 총소리가 났을때, 나는 대포라도 터진줄 알았다.  깜짝 놀랄정도로 그 소리가 컸다. 정말 너무 깜짝 놀라서 가슴이 따가울정도였다. (체한것처럼 심장이 찌르르 찌르르 할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사슴 가족이 숲속에서 단체로 달려가는 것도 몇차례 봤다.  사슴이 쫒기고 있는가보다...

내가 알기로 버지니아 메릴랜드 웨스트버지니아 일대에서는 겨울 일정 기간에 사슴 사냥 허용을 해서, 대책없이 늘어나는 사슴의 개체수를 조정한다고 한다. 사슴 사냥철이 왔을것이다.  어느 댁에 가면 거실과 집안 곳곳에 자신이 사냥한 사슴의 머리며 곰을 박제를  해서 전시를 할 정도로 사냥 애호가가 있기는 한데, 나로서는 합법적으로 이루어지는 살륙에 대해서 뭐라고 반감을 가질 건덕지는 없다.  사슴이 사랑스럽다고 무한정 늘어나게 방치 할 수만도 없는 노릇일것이다. 게다가 미국인들중에 사슴을 혐오하는 사람들도 많다. '라임병'에 걸려본 사람들이라면 사슴을 아주 골치아픈 존재로 안다.  아무튼, 현실적으로 각자 입장이 다를수 있는데,  나는 뭐 그냥 대책이 없는 사람이고, 사슴 숫자가 넘치거나 말거나 사슴은 사랑스러운 존재일 뿐이고.  쫒기는 사슴은 나를 슬프게 한다.

사냥이 신나는 스포츠라도, 어쩔수 없다고 해도, 나는 사냥이 슬프다. (먹을거 많쟎아. 왜 취미로, 생명을 죽이는가?)

내가 기껏 해 줄수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을 보고 달아나는 사슴을 향해서, "사슴아, 멀리 멀리, 사람이 안보이는데로 달아나!!!"

하지만, 이세상에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어디있는가.  사슴이 숨을데가 없는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11. 11. 25. 10:24

올가을 프로젝트,  장거리 여러번 해서 백마일 걸어보겠다고 생각한 것을 오늘 마칠수 있었다.  원래는 20마일 걷기를 다섯번 해서 백마일 채우는 것이 목표였는데, 그렇게는 못했고, 20마일은 세번, 나머지는 10, 15 뭐 이런 식으로 했다.  오늘 찬홍이와 20마일 할 생각이었지만, 찬홍이가 학교에서 풋볼하다가 무릎을 다쳤다고 엄살을 떨어서,  그냥 무리하지 않고 15마일로 마무리 했다.

오늘 코스는 하퍼스 페리 시내에 차를 세워놓고, 다리 건너서 61마일 지점에서 68 마일 지점까지 왕복 (7x2=14)하고 다시 하퍼스 페리 시내로 돌아가는 15마일 거리였다.

이로써 나는 체사피크 오하이오 수로길을 워싱턴 디씨의 시작점에서부터 68마일 거리까지 내 두발로 걸은 셈이다. 지난 봄에 50킬로미터 걷기의 마지막 지점이 하퍼스 페리였기 때문에, 그 이후의 길이 늘 궁금했었는데, 오늘 드디어 그 '너머' '미지의 세계'를 가 볼수 있어서 소원 한가지를 풀은 기분이었다.  나는 여태 몰랐는데, 하퍼스 페리 너머, 북쪽으로 올라 갈수록 수로변 강의 풍경이 절경이 되더라....  기가 막히는 절경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전 열시반에 하퍼스페리에 도착하여 걷기 시작.  오후 다섯시에 다시 차 세워 둔 곳에 돌아왔다.  중간에 앉아서 다리쉼도 하고, 여유있게 걸었다.



(아래)  셰난도어 강과 포토맥강이 만나는 지점 (하퍼스 페리가 두 강이 만다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여기서 오늘의 걷기 출발.



하퍼스페리의 상징과도 같은 철교를 지나 (저 건너 하퍼스페리 마을이 보인다)




반마일쯤 가다보면, 이런 수로변 마일 표시를 만나게 된다. 61마일.


지난 며칠간 날이 흐리고 비가 왔기 때문에 강에 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파도소리같은 물소리가 났다.  흑탕물같은 강물이 거침없이 막 쏟아져내리는 풍경을 보면서 --- 아, 아이스 카페라테 같구나...했다.





62마일 포스트.



그런데 상류로 올라가면 강이 호수처럼 고요해진다.
내가 발견한 현상.  강이 호수처럼 고요해보이는데, 강물에 나무기둥 떠내려가는 것을 보면 내가 달리기하는 속도보다 더 빨리 떠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니 물이 흐르는 속도가 엄청 빠른 것인데, 육안으로는 마치 고여있는 호수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 고요해보이는 강을 한참 내려다보고 걸으며 생각했다. 

-- 정말 너르고 큰 강은, 물이 아무리 거칠고 세게 흘러도 저렇게 호수처럼 평온해보이는구나.  수로쪽 개울은 얕은데도 돌돌돌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데 저 큰강은 오히려 물이 깊고 넓고 빨리 흐르면서도 소리가 없구나.   저렇게 크게 움직이면서도 고요할수 있는 인품을 키운다면 좋겠다.  어떤 일에도 호수처럼 고요할수 있는 평정심을 키우면 좋겠다.







수문 근처에는 반드시 수문 관리인의 사택이 있는데, 물론 지금은 인적이 없는 기념물에 불과하다.  나는 이 빈집을 지나칠때면 늘 똑같은 생각을 한다: "저 집에서도 한때는 온가족이 모여서 웃고, 떠들고, 저 안에서 애도 태어나고, 누가 죽기도 하고 그랬을텐데...."  늘 같은 생각에 잠겨서 수문관리인 주택을 지나치게 된다.

수로 근처에는 이렇게 버려진, 혹은 허물어져가는 건물들이 남아있는데,  빈집이나 허물어져가는 건물의 흔적들이 보이면 쉽게 시선을 떼지 못한다.  나는 허물어져가는 것들에 대해서, 강박증적인 집착을 보이는것도 같다.  거기 살던 사람들이 웃음소리가 들리는것도 같고.  자꾸만 슬픈 기분이 드는 것이다.






68마일 포스트에서 반환.




저기, 아직 내가 걷지 못한 길이 이어져 있고, 저기 길이 남아 있어서 나는 안심이 된다.



아까 지나쳤던 작은 집 앞 계단에서 쉬면서 뜨거운 커피.




물에 허리까지 잠긴 강변의 나무들.



오늘 나의 동행이 되어준 나의 귀냄이.




산골에는 저녁이 빨리 찾아온다. 저만치 철교가 보인다. 저 다리를 건너 다시 하퍼스페리 시내로



추수감사절 휴일이라, 가게가 문을 열지 않아 텅빈 유령의 도시 같이 고요했던 하퍼스페리.



오늘 날씨가 참 화창하고 따뜻하고 좋았다.  그래서 얇은 겨울 잠바 입고 간것도 벗고 나중에는 그냥 스웨터만 입고 온종일 걸었다. 선물같은 아주 예쁜 하루였다.  :-)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1. 23. 20:52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04740

내가 태어나 성장한 용인의 고향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의 일이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 마을 사람들은 저녁이면 남포나 호롱에 불을 밝혔고, 불을 때서 밥을 짓고, 쇠죽을 끓이며 살았다. 이곳이 집성촌이었으므로, 마을 사람 대개가 일가붙이였고,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내게 ‘시누님, 우리 아기씨’라는 호칭을 쓰기도 했다.
 
우리 바로 윗집에는 우리 할머니와 비슷한 시기에 이 마을에 시집와서 평생 자매처럼 지낸 할머니가 살았다. ‘응굴’에서 시집와서 ‘응굴댁’인 그 할머니는 어쩌다 댁에서 미역국을 끓이는 날이면, 새벽이거나 저녁이거나, ‘언제나’ 미역국 한 그릇을 두 손으로 감싸안고 우리 집 안채로 달려와서 할머니를 찾았다. “정렬이 할무니, 오늘 우리 막내 생일이라 고기 좀 넣고 미역국을 끓였어유. 이것 맛이나 보시라고.” 할머니가 어느 날 그 미역국의 사연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어느 해, 만삭으로 돌아다니던 응굴댁이 며칠 보이지 않아 올라가 들여다보니, 며칠 굶은 산모는 혼자 애를 낳아 제 손으로 탯줄을 끊어 애를 안고 누워있는데, 먹을 것이 없어 다 죽어가는 얼굴이라. 내가 얼른 미역 한 꼬리를 갖다가 국을 끓이고, 쌀을 퍼다 쌀밥을 지어 뜨거운 국물에 먹이니 산모가 그제서야 살아나더라. 그 후로는 저이가 수 십 년을 미역국만 끓이면 이렇게 한 그릇 떠갖고 내려온다.” 지금은 내 할머니도, 응굴댁 할머니도 모두 고인이 되셨지만, 두 분은 천국에서도 서로 오가며 미역국을 나누실 것이다.

 1984년 겨울, 휴가를 나온 박 상병은 이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나 가난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충치로 고생이었지만, 변변한 치과 치료를 받아본 적도 없었다. 부대에서도 고통을 호소하면 진통제나 처방해 주는 정도였다. 너무나 괴로웠던 박상병은, 집 근처, 어느 치과에 들어섰다. 그는 무작정 충치 치료를 부탁하며, 자신에게는 돈이 한 푼도 없다고 설명했다.

휴가 며칠간 그는 치과에 드나들며 오랫동안 그를 괴롭히던 충치 치료를 받았다. 휴가가 끝나갈 무렵 서둘러 치료를 마친 치과의사가 박상병에게 말했다. “건강하게 잘 지내게. 내게 치료비 갚을 생각은 하지 말고, 나중에 어려운 사람 보이거든 도와주게.” 지금은 중년이 된 그 사람은, 가끔 그 치과 의사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이 글썽해진다. 이따금 듣는 똑같은 이야기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도 모두 운다. 박 상병이었던 그 사람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못 지나치는 나의 큰 시동생이다.
 
6년 전, 플로리다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이었다. 개미에게 발가락을 물렸는데, 물린지 30분도 안되어 얼굴과 몸이 붓고, 현기증이 나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가 갑자기 죽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놀란 나의 아이들이 한달음에 달려간 곳은, 마을에 살고 있었던 어느 한국인 아저씨 댁이었다. 아이들은 무작정 그 댁 문을 두드리고 “우리 엄마가 죽어요!” 하고 알렸고, 아이들의 설명을 들은 그는 한달음에 우리 집으로 왔다. 그의 손에 알러지 치료제가 한 뭉치 들려 있었다.

그는 약 한 움큼을 내게 먹이고, 급성 알러지 현상으로 보이니 이 약을 먹고 차도가 보이면 계속 약을 먹고, 차도가 보이지 않으면 응급차를 부르겠다고 했다. 그는 개미 독으로 죽은 사람도 보았다고 했다. 그는 처치 약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한참을 기다려 내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내 생명을 살렸고 졸지에 고아가 될뻔한 내 아이들과 가족을 살렸다. 그분은 자신이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을 지금 기억할까?

 내일은 ‘땡스기빙 데이 (Thanksgiving Day)’. 우리 주위에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 내가 오늘 온전히 살아 있음은, 이 세상 사람들의 사랑과 베풂이 있어 가능한 것이리라.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내가 잊고 지내던 고마우신 분들께, 예쁜 꽃 카드라도 정성껏 만들어 부쳐드리리라 하고 다짐을 해본다.


2011,11,23 (수) 이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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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응굴댁 할머니와 관련된 에피소드 한가지 추가:

그 응굴댁 할머니는 평생동안 우리집을 자기집처럼 임의롭게 드나드셨는데,  웃기는 일이 뭔가하면, 우리집에서 기르는 개들이 응굴댁 할머니만 대문에 들어서면 으르렁대고 짖어댔다.  우리집 개들은 대대로 사랑채에 있는 바깥대문 앞 나뭇광이 침실이었다. 거기 짚을 쌓아주면 포근한 짚에서 지낼수 있으니까.  그런데 요놈들이 대문 앞을 지키고 살면서 응굴댁 할머니만 나타나면 사납게 으르렁댔다.  그러면 응굴댁 할머니는 개의 목줄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개를 피해서 지나곤 했다.

우리집 개들은 대대로, 서울 식구가 어쩌다가 나타나도 좋아서 퍽펄 뛰곤 했다.  그러니까 일년에 서너차례 내가 나타나도 나를 보면 좋아서 이리뛰고 저리 뛰면서 나를 핥고 난리를 떨었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나는 일년에 몇차례 나타났다 사라지는 '손님'이고, 응굴댁 할머니는 늘 그곳을 드다느는 식구같은 존재이건만.  개는 '내식구'와 '남의식구'를 정확히 구별해서 행동했다.

우리집 개들은 어떻게 그렇게 어쩌다 한번 오는 식구들을 알아서 반기고, 아웃사촌들을 '남'으로 규정을 하게 된 것일까?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