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태산이라, 지난번 3차 '자가격리'가 마지막일거라는 기대를 품고 살아왔건만 아무래도 2022년 2월 한국으로 돌아갈때 다시 자가격리에 처해질 가능성이 작지 않은 가운데 다시 미국집으로 향해야 했다.
미국행 준비:
*지난번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코로나 항원 검사 결과 24시간내에 통보된 서류가 필요하다는 것. 그래서 오후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출발 당일 오전에 검사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검사 1시간후에 결과가 나와주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 (송도 이화웰봄소아과).
* 미국 질병관리청에서 요구하는 - 백신 접종 완료했다는 확인서에 싸인을 하고 지참해야 하는데, 온라인으로 처리하는 방법도 있고 그냥 온라인으로 하고 종이에 프린트도 하고 골고루 다 챙겼다.
위의 두 서류는 인천공항에서 비행기 티켓 받는 과정에서 직원들이 일일이 검사하고 체크하고 그런다. 미국에 도착하여 이민국 통과할때는 내밀어줘도 묻지도 보지도 않는다. (그래도 준비는 해 가지고 가는 것이 타당하다, 혹시 이민국 직원이 보자고 하는데 내밀지 않으면 낭패일테니).
미국에 도착하면 - '여기가 하루에 수만명씩 확진자가 나오는 땅인가?' 싶게 '자유천지'에 나온 느낌이 든다. 이렇게들 태평하니까 코로나가 전세계적으로 여전히 잡히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닐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인생이 피곤한 가운데 - 그러나 희망을 꼭 붙잡고...
11월의 마지막 목요일. 미국의 추수감사절이다. 학교에서는 캠퍼스에서 추수감사절 행사를 한다고 하는데, 나는 피곤해서 그냥 쉬기로 했다. 책이나 보다가 퇴근해야지. (코비드가 무서워, 사람 모이는데 가는 것은 피하고 본다.)
문득 5년 넘게 내 오피스에 걸려있는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2015년 추수감사절, 메릴랜드 오션시티 해변. 이 사진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날의 너무나 따스했던 햇살과, 텅빈 해변과 파도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내 삶의 한 순간이 영원처럼 박제된것 같은데 - 박제된 시간속에서 파도는 여전히 철썩철썩 소리를 내는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 시간에서 6년 멀어졌고, 그만큼 나이 들었고, 느려졌고, 거울속의 내 얼굴이 낯설게 느껴질만큼 하루하루 시들어가고 있다. 그래도 이 한장의 사진이 있어서 아직도 그날의 햇살과 파도소리를 간직할 수 있으니.
팬데믹의 여파로 Zoom 을 이용한 대화가 이제는 일상의 일부가 되어 버린듯하다. 특히 줌 수업을 해야하는 사람들은 카메라를 향한 시선처리가 중요하다. 가능하면 카메라를 응시하면서 대화를 해야 저쪽에서는 나와 눈맞춤 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런데 사실 깨알만한 카메라를 응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최근에 어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가 가르쳐 준 꿀팁. 노트북이나 컴퓨터 모니터나 하여튼 줌으로 대화를 하는 도구의 카메라 바로 뒤에 커다한 두개의 눈동자를 그려 붙이면 - 우리의 시선이 저절로 그 두개의 눈동자로 가게 되고 - 그러면 우리가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시킨듯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들어보니 그럴듯 해서, 잘생긴 남자 배우 얼굴 사진을 한장 큼지막하게 프린트하여 모니터 뒤의 벽에 붙여 놓았다. 줌 수업할 때 카메라 대신에 이 미남자와 눈을 맞추며 대화를 한다. 어차피 카메라도 켜지 않는 '검은 그림자' 같은 학생들. 그 검은 그림자들을 보면서 우울증에 걸리느니 잘생긴 미남 배우의 사진에 의지하여 수업에 활력을 불어 넣어 보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카메라를 켜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뭐 학생들을 나무랄수도 없고, 강제할 수도 없다. 얼굴 사진 하나 가지고 온갖 범죄를 생산해내는 기묘한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어쨌거나 잘생긴 이 @@ 씨가 우리를 돕고 계시다.
눈이 사슴 눈이라서. 하하하. (원래 내 취향은 아닌데. 요즘은 딱히 취향이란것이 없다.세상이 시들하고, 미남자들도 시들하고. 심심하다.) 일단 잘생기면 좋은거지 뭐.
'연탄은행'이라는 기관과 연계하여 '연탄 배달' 봉사활동을 하고 왔다. 우리 학교 학생, 교직원, 학장님까지 20여명이 1,600장의 연탄을 여덟 가구에 200장씩 배달하는 행사였다.
연탄은행에서 활동하시는 봉사자들이 우리 일행에게 팀을 짜서 일거리를 분담을 시켜주셨는데, 나는 연탄의 최종 배달지 창고에서 연탄을 받아 쌓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쌓여있는 연탄더미에서 연탄을 '지게'에 실어주는 팀 - 지게로 운반하는 팀 - 운반된 연탄을 창고 입구에서 받아서 쌓는 팀 - 대략 이런 식으로 역할 분담을 시키는 것 같았다. 나는 또다른 팀과 함께 창고 구석에서 연탄을 죽어라 쌓는 일을 한 것인데 그러니까 내 손으로 쌓은 연탄만 정확히 800장이다. (네 가구의 연탄광을 내가 채웠고, 다른 팀이 나머지 네가구를 채웠고.) 이 일을 딱 두시간에 끝내고 오후 한시쯤에는 학교로 돌아왔는데, 그 이후로 하루 반나절을 끙끙 앓았다. 하하하. 연탄 쌓는 일은- 그게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연탄을 사용해 본 나같은 사람이 연탄을 사용하기 편리하게, 쓰러지지 않게, 좁은 연탄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쌓을수 있는 것이다. 우리팀은 내가 쌓았고, 다른 팀은 '하필 연탄을 생전 구경도 못해본 우리 미국인 학장님'이 쌓아야 했는데 - 처음에는 이 사람이 '영문'도 모르고 '말귀'도 알아들을수가 없어서 내가 가서 설명을 해주고 와야했다. 우리 학장님이 나이가 내또래인데, 몸도 펼수 없는 낮고 좁은 공간에 쭈그려 앉아 연탄을 쌓아야 했으니 나보다도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그렇다. 연탄창고는 임시로 이리저리 막아놓은 뚜껑있는 상자 모양이어서 - 사람이 허리를 펼수도 없는 공간이었고, 연탄을 받아서 몸을 오그리고 그것을 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일은 그냥 체육관에서 웨이트트레이닝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힘쓰기'와 '근육'을 요하는 일이었다. 지금 목부터 온 몸이 쑤시고 있다. 그래도 몸살이 나지않고 허리 어디가 삐끗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감사하게 생각한다. 여기저기 쑤시는 부위에는 새로운 '근육'이 붙고 있을 것이니.
처음 연탄을 배달하러 간 집에서는 노신사가 살고 계셨는데, 우리가 열심히 연탄을 쌓는 동안 미닫이 문을 열고 나와 햇살 가득한 산기슭 그의 한뼘만한 마당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셨다. "저기 저 학생은 아주 먼데서 온 모양이야" 할아버지가 가리킨 학생은 미국에서 온 학생이었다. 그 학생은 한국어를 배우는 중이므로 노신사께 자기 이름도 말하고 인사도 하고 하였다. 노 신사는 우리가 작업을 다 마치고 다른 집으로 이동할 때까지 한뼘짜리 마당가에 서서 우리들과 대화를 나누셨다. "여기가 그린벨트야. 그래서 개발이 안돼. 기름보일라가 따뜻하지가 않아. 기름만 잡아먹지. 그래서 연탄으로 바꿨어. 아껴써서 하루에 여섯장이 들어가. 아주 아껴써서. 고맙지 이렇게 학생들하고 교수님하고 연탄을 쌓아주니."
아주 아껴써서 하루 여섯장이 든다면 연탄 이백장은 기껏 한달 쓸 분량이다. 난방을 해야 하는 기간은 12-1-2-3 이렇게 네달은 잡아야 하는데 그러면 720장은 필요하다. 한 사람이 아주 작은 연탄보일러에 연탄을 최소한으로 아껴서 쓸때 이런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쌓은 것은 딱 200장이었는데. 그것도 - "마침 연탄이 똑 떨어졌는데 오늘 쌓아주니 참 고마워" 뭐 이렇다. 맞다. 그의 연탄창고는 텅텅 비어있었다.
두번째 집은 젊은 신사분이 사시는 집이었다. 집 입구에 장애인용 전동의자차가 있었다. 내가 그 전동의자차를 발견하고 든 생각은 - '이 비좁고 울퉁불퉁하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이 전동의자차가 제대로 오르내릴수 있을까? 이 의자의 주인은 정말로 이걸 타고 이 골목길을 내려갈수 있을까?' 우리가 창고에 연탄을 쌓는 동안 딱 한번, 미닫이 문이 열리고, 젊은 신사분이 얼굴만 내밀고 우리에게 인사를 보내셨고 - 학생들도 씩씩하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보냈다.
아무도 없었던 세번째 집의 아주 작은 꽃밭에는 붉은 맨드라미가 있었다. 화분만한 아주 작은 꽃밭이었지만 '루비'처럼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네번째 집의 창고에는 자전거도 한대 세워져있었다.
집에 와서 - 도대체 내가 나른 연탄은 요새 한장에 얼마나 하는건가? 궁금한 생각이 들어 검색해보았다. 대략 650원 정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차가 닿지 않는, 리어카(손수레)도 다닐수가 없이 비좁고 꼬불꼬불한 언덕길 위에 연탄을 배달할때도 그가격일까? 배달료를 더 받는게 아닐까?
모르겠다. 일단 계산좀 해보자. 650x180=117,000x4=468000 한 사람의 최소한의 겨울 난방비가 이쯤 되려나보다.
옛날 생각이 난다. 옛날에, 내가 신혼일때 우리 시아버지도 연탄을 때셨는데, 연탄을 무지무지 아끼셨다. '불구멍을 막아 놓는다'고 - '죽은 놈 콧김 만큼도 못하다'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온기 없이 지내시다가, 내가 나타나면 불문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면 정말로 그 손바닥만한 방이 금세 따끈따끈해졌다. 내가 어쩌다 '시댁에서 자는 날'에는 냉골로 놓아두던 작은 방에 급히 연탄을 옮기고 불을 붙이셨다. 나는 그걸 보면서 '안때던 방에 연탄 불 때면 가스가 나올텐데, 내가 오늘밤에 연탄 가스로 저승으로 가는게 아닐까?' 그런 문제의식을 갖기도 했었다. 나는 그래도 신혼 생활을 기름보일러집에서 시작했는데, 나도 돈 아끼느라 그 기름보일러를 안쓰고 그냥 셋집 마루에 연탄난로를 들이고 연탄을 때면서 그 온기로 삼동을 보냈다. 그 이후로 연탄은 내 일상에서 사라진듯 하다. 그래도 겨울이면 한 트럭씩 연탄을 주문하여 연탄광을 꽉꽉 채우고 살던 어린시절, 겨울에 골목에서 놀다가 '연탄 왔다!' 엄마가 부르시면 모두들 달려가 연탄을 연탄광까지 옮기던 시절을 보냈으므로 연탄을 나르고 쌓는 일이 내게는 친근한 과거로의 회귀 같은 것이었다. 아직도 연탄을 때시는 우리 이웃의 아주 작은 꽃밭에도 햇살은 가득했고, 맨드라미는 빛났으며, 문을 열고 내다보는 젊은 신사도, 마당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주신 노신사도 모두 반짝반짝 빛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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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 활동에 대하여>
봉사활동은 내돈 내고 하는게 맞다.
대학 다닐때, 내 가까운 친구들이 여름이면 '대학생 농촌봉사활동'을 갈 때,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기만 하였다. 내게는 '농촌봉사활동'의 명분이 없었다. 왜냐하면, 여름이면 시골집에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농사일을 거드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제집 식구나 돕지 무슨 봉사냐' 뭐 이런 분위기를 거역하기 힘들었다. 집 안팎에 널린게 일거리인데 그것 놔두고 무슨 중뿔나게 남 돕는다고 돌아다니냐 이거다. 내가 대학생이던 당시에, 우리 외사촌오빠도 대학생이었는데, 어느해 여름에 물난리가 나서 경기도 일대의 논밭이 떠내려가고 쌀이 썩고 아주 난리가 났었다. 우리 외삼촌댁도 그 경기도 일원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래서 집이 난리가 났는데 - 우리 사촌오빠는 글쎄 학교에서 주최하는 '대학생 수재복구 봉사'를 하러 어디로 갔다는 것이다. 지네집에 난리가 났는데 무슨 남을 구제하러 갔다는 것이다. 그 때 우리는 킬킬거리며 그 오빠 흉을 봤다.
지금도 - 예컨대 어느 주부가 어디로 봉사활동 간다고 하면 - '제 집 꼴도 엉망인게 무슨 봉사라고 나돌아다니냐, 네 앞가림이나 똑바로 하라'는 냉소를 보내는 사람도 있다. 뭔가 '봉사'라면 팔자 좋은 사람들이 '취미' 정도로 해야 타당하다는 분위기이다. 혹은 위선적으로 살면서 무슨 봉사냐며 한 사람의 전인생을 평가하고 '봉사'를 할만한 사람과 봉사는 택도 안되는 사람으로 분류를 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봉사'에 대해서 마냥 따뜻한 시선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나는 '봉사'라는 것을 별로 해 본 적이 없다. 평생 살면서 '봉사'는 다섯손가락도 채우기 힘들 정도로 봉사를 안하고 살았다. 나는 '봉사'는 성인군자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남의집 봉사 다니느니 내집부터 돕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고, 돈 안되는 봉사보다는 돈 버는 일에 열중했다. 돈을 벌어야지 무슨 봉사냐구.
그런데 가물에 콩나듯, 어쩌다 봉사활동이라는 것을 한 번 하면 - 깨달아지는 것이 많다. 봉사의 장점을 말하자면 -- (1) 내 평소 생활권이 아닌 다른 곳, 낯선 곳에 가서 내가 평소에 만나지 않는 새로운, 낯선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마치 여행을 하는 것과 같다. (2) 여행과 같은데 경비는 별로 많이 안 든다. (3) 몸이 고단해지는데 마음은 가벼워지고 머리는 맑아진다. (4) 무조건 주어진 것에 감사하게 된다, (5) 내가 나에게 조금 너그러워진다, (6) 잠을 푹 잔다. '내 애플워치의 기록에 의하면 간밤에 나는 잠에서 깨지않고 8시간을 잤는데 올해들어서 그렇게 잠을 잔것이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자 봉사를 통해서 이렇게 많은 혜택을 얻게 된다. 그러니 봉사는 내 돈을 내고서라도 하는 것이 맞다. 봉사는 누군가 남을 도우려고 하는게 아니다. 자기 자신을 도우려고 하는거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이웃이 약간의 도움을 받을 뿐이다.
이쁘장하게 생긴 남자 배우의 몰락이 요즘 화제다. 그 배우는 내가 방학때 미국집에 있는 동안 넷플릭스를 통해서 봤던 '백일의 낭군님'인가 하는 드라마에 나왔던 '착한 남자'다. 나는 거기 나오는 주인공이 잘생겨서 그걸 열심히 보았다. 이 사람은 주인공은 아니고 조역이었는데, 만화책에서 방금 튀어나온듯한 미소년이어서 인상적이었다. 그 배우의 전 애인이 뭔가 '보복성'글을 언라인에 올렸고 뭐 그 때부터 상황은 엉망이 되어가고 있는듯 하다. 그 사람이 요즘 뜨는 대세배우였대서 놀랐고, 그가 별로 착한 남자가 아니었대서 조금 놀랐고, 뭐 그가 폭망하게 되었다고 해서 한숨이 나왔다. 일부함원이면 오월비상인데 그걸 몰랐구나 그 만화책 미소년이.
연구실 바닥에 먼지가 굴러다니길래 걸레질을 하면서 - 유튜브로 김광진의 '편지'를 틀어놓고 걸레질을 하고 하고 하고 또 하면서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사랑은 도대체 어떻게 된거냐고. 모두들 '한때는 사랑했는데...'라고 한다. 한때 사랑했지만, 지금은 사랑하지 않으니까 지금 그 사람이 망하는 꼴을 봐야 하는걸까? 나는 이 부분이 잘 수긍이 가지 않는다. 내가 사랑했고, 둘이 서로 사랑했고, 내가 버림받으면 (혹은 상대가 내게 싫증을 느끼고 도망을 가버리면) 그것으로 그 상황이 끝난다고 해도, 그래도 사랑은 거기 있으면 안되는가? 사랑은 거기 그냥 있으면 안되나?
어느 여배우도 한때 둘이 어울려 연애했던(연애했다고 어느 한쪽이 주장하는) 정치인을 향해서 여러가지 '저주'를 공개적으로 퍼붓는다. 나는 어느쪽 편도 들 생각이 없지만, 여전히 생각한다, 둘이 서로 좋아서 교제하던 시절 그 시절은 그대로 폐기되어야 하는가 (만약에 둘이 연애했다면 말이다)?
나는 사랑의 추억을 간직하면서 사는 편이다. 나는 사람들을 사랑했다. 외사랑(짝사랑)일때도 있었고, 서로 사랑을 했을때도 있었다. 주로 내가 훨씬 더 많이 사랑을 했다. 주로 내가 더 많이, 더 오래 오래 사랑했다. 사랑을 퍼붓기도 했다. 나는 그 사랑의 기억을 가지고 산다. 그 사랑이 잘 못 되었건 어쨌건, 나의 죄는 하나님께서 판단 하실 일이고, 나는 사랑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산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아직도 내게 아주 소중하다. 그들 하나 하나가 아주 소중하며, 그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내가 '사랑'넘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사랑'의 속성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발끈하고, 보복하고, 망하기를 바라면서 한때라도 사랑했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이면 그렇게 못하지.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지. 사랑이 아니었던 것을 가지고 사랑이었다고 말하지는 말라. 사랑이 슬프다.
고등학교 한문 선생님이 어느날 한문 수업은 안하시고 - 우리들이 재미있는 얘기를 해 달라고 조르니까, 아마도 오늘같이 깊어가는 가을 오후였으리라, '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 이야기를 해 주셨다. 저자가 스테판 쯔바이크였다는 것은 내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그 책을 찾아 읽었을때 알게된 것이었고 - 한문 선생님은 참 청승맞게 그 이야기를 해 주셨다. 평소에도 말씀을 단정하게 천천히 조심스럽게 하시던 차분한 분이셨는데 이야기를 듣다보니 한문 선생님이 바로 그 여주인공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저를 알지 못하시는 당신에게... 이 짧은 소설의 끝은, 그런데 편지를 받은 그 남자는 도무지 이 여자가 기억이 나지 않더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럴것이다.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인터넷 시대에, 알고 싶지 않아도, 십년전에 헤어진 웬수도 검색 몇번만 하면 지금 어디서 뭘 먹고 사는지, 애는 몇이고, 몇번 이혼했는지 소상히 알수 있는 시대에, 고전적인 사랑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헤어져도 헤어질수가 없어 - 티브이 틀면 나오고, 카카오톡 열면 나오고, 어디서든 유령같은 그들이 살아서 돌아다니니까 잊고 싶어도 잊을수가 없어. 아마도 그래서 우리는 '가버린 사랑'을 잊을수도, 용서할수도 없는건가? 인터넷 시대에는 새로운 사랑의 방법 혹은 패러다임이 필요한걸지도 모른다.
근래에 아주 '좋은 책'을 만났다. 그 책은 지난 5년간 분명히 늘 내 '코 앞'에 있었다. 온집안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책 더미 속에 그 책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그는 '증정본'이었다. 내가 관심이 있어서 내 돈 내고 사 온 책이었다면 내가 그 책을 모를리가 없었다. 그 책은 그냥 우연히 흘러들어와 비좁은 우리집 방구석에서 얌전히 오년을 기다리고 있었던거다.
그런데 일단 무심코 '심심파적'으로 그 책을 집어든 나는 그자리에서 책을 읽다가 그 날 하루를 다 보냈다. 동시대의 '고민하는' 어떤 대학교수가 일반인이 읽기에도 무난하게 쓴 '사회 교양' 책이었다. 나는 그 책이 하도 맘에 들어서, 며칠 후 저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만약에 어느 대학 교수가 저자라면 - 대학에서 프로필을 찾으면 이메일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내가 이 책이 왜 마음에 들었는지 몇가지 적고, 좋은 책을 내 주셔서 감사하다는 - 저자에 대한 인사였다. (저자가 기뻐할 것 같았다. 저자들도 응원이 필요하다. )
그런데, 그냥 내가 내 흥에 취해서 보낸 이메일에 저자가 답을 보내셨다. 역시 나의 인사가 그를 기쁘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답신에 약간 '놀라운' 내용이 들어있었다. 사실 그는 그의 교수와 학자로서 그의 전공 분야 관련 연구 업적이 활발하고, 전공 관련 책도 여러권 출판을 하였다. 그런데 내가 읽고 반한 책은 그의 전공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일반 교양 수준의 책이었다. 그가 이런 '일탈 (전공과 관련 없는 글을 쓴 것)'을 하게된 계기가 놀라웠다. 그가 활발한 연구 활동을 하다가 연구년을 맞아 외국으로 나가려고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암'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암' 선고를 받았을때 - 내가 암에 걸리는게 당연하지 - 라는 생각이 스쳤다는 것이다. 그의 활발한 '업적'이 공짜로 얻어졌을리는 만무하고, 그의 삶이 '본질적인 것'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깨달음이 그를 내리쳤을것이다. 그 때 그는 '정말로 내가 쓰고 싶은 책을 써보고 싶어'라는 자각을 했다고 한다.
내가 읽고 반한 책은 - 한 학자가 생존을 위해서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며 '성곡적으로' '생존'하다가 암 선고를 받고 - '아 도대체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온거지? 회의를 품은 후 - 죽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이나 속시원히 해보자는 심정으로 쓴 책이리라.
그분은 그 후에도 소속한 학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책을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암을 잘 극복하신 듯 하다. 그런데 어쩌면 내가 읽고 반한 그 책이 그 사람을 '되살린' 책인지도 모른다. 그런 책이기에, 내가 읽고 반한 것이겠지. 아마도 그런 책이 5년이 넘도록 내 근처를 맴돌면서 이제야 나와 만난 것을 보면 - 이제 나도 다시 날개를 펼쳐야 할 때가 온 것인지도 모르지... 아, 내게도 마무리 해야 할 '숙제'가 있는 것이니.
목적: 도대체 내가 왜 대학원 진학을 하려는 것인지 명확히 한다. 잘 모르겠다구? 가지 마시라. 당신에겐 너무 비싼 놀이터가 아닐까?
학업성취도: 학점 관리를 제대로 한다. 학점은 평생 당신을 따라다니며 당신을 빛나게 하거나 괴롭힐것이다. 학점이 엉망이라구? 그런데 대학원은 뭣하러 가시나?
인간관계: 나를 위해서 추천서를 써줄 관계자 (교수, 직장 상사등) 두세명을 단단히 확보해 놓는다. 없다구? 대학다니며 뭐하셨는가?
경력관리: 학점은 만점에 가까운데 학점 잘 받은것 외에 딱히 쓸말이 없다구? 학점 높은것은 자랑이 아니다. 어차피 대학원 진학하는 학생들 학점은 대체로 높다. 학점 말고 내세울것이 뭐가 있는가? 없는가? 집어치우라.
한국 대학에서 대학원생들을 뽑는 계절이 돌아왔다. 한국의 유명 대학 대학원들은 대체로 10월 11월 사이에 원서를 받는다. 나는 수년간 미국과 한국의 대학원에 지원하는 졸업생들의 자문을 하고 있다. 이제는 지원자 얼굴만 봐도 이 사람이 희망하는 대학원에서 입학허가를 받을수 있을지 없을지 윤곽이 잡힌다. (내가 관상가도 아닌데...).
대학원 진학을 하고자 하나 진학 목적 자체가 애매해 보이는 졸업생의 경우 - 나는 진심으로 상담을 해주기도 한다 - 대학원에 반드시 가야할 이유를 잘 모르겠으면, 대학원 입학 신청 이런것으로 시간 낭비, 돈 낭비 하지 말고 그냥 아무것도 하지말고 , 뭘 해야 할지 고민을 더 하시라. 편의점 알바라도 하면서 밥벌이를 해도 좋고, 그냥 무위도식하면서 온종일 걸어 돌아다녀도 좋고. 집에서 눈칫밥 먹기 싫으면 나가서 뭐라도 시간제 일을 하면서 용돈벌이라도 하거나,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워봐도 좋을것이다. 대학원이 당신을 구원하지는 않을테니까. 이세상에 구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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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서를 써오라고 하는 추천인
가끔 한국 학생들에게서 듣는 전설 같은 이야기. 모 교수에게 추천서 부탁을 드리니 "네가 써오면 내가 싸인해주겠다. 잘 써오라"고 했다는. 이런 얘기는 뭐 수십년간 '추천서'관련 전해내려오는 전설 같은 얘기이다. 내가 대학원에 가기 위해서 추천서가 필요 했을 때, 나는 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방법으로 추천서를 받았다. 교수님들께 부탁드리고 그분들이 열심히 써주셨으며, 결과가 모두 좋았다. 석사 입학, 박사입학 모두. 내 석사때 지도교수님이었던 플라트 박사는 내게 박사 과정에 진학하라고 권하면서, "네 추천서 걱정은 하지 마라, 내가 써줄것이고 또 한 부는 *** 에게 내가 부탁해서 쓰라고 할게." 이정도로 열정적으로 나를 후원하셨다.
내가 은사님들의 하늘같은 은혜를 입었으니 - 나는 그것이 정석인줄로만 알고 내 학생들이 추천서를 부탁해올때 성심성의껏 추천서를 작성한다. (그러길래 사람은 제가 보고 배운대로 남들에게도 하는 것이고,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이 베푸는 방법도 아는 것이다.). 그러데 몇해전에 대학원 입학 지도를 하는 가운데 어느 학생에게서 그 전설같은 사례를 들었다. 스위스의 모 대학원에 입학신청을 위하여 지도 교수께 추천서를 부탁드리니 "네가 써오면 내가 싸인해주마" 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고 지나갔다. 그 교수는 '미국인'이었다.
얼마전에도 대학원 지원하는 학생을 상담해주는데 '추천서'얘기를 꺼낸다. 전공교수나 전공 관련 과목 교수나 혹은 인턴으로 일했던 부서의 디렉터나 뭐 그런 '학업이나 직무관련' 인사의 추천서를 받아야 한다고 코치를 해 줬는데 - 그래서 그 학생이 접촉한 인사가 역시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영문 추천서가 필요하면 네가 영문으로 작성하고, 한국어 추천서가 필요하면 네가 한국어로 작성해서 가져오면 내가 싸인해 주겠다." 그 학생이 내게 의논을 한 것은 '그러니 영문 추천서가 유리할까 한국어 추천서가 유리할까' 내가 판단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답을 해 줬다. '영문이건 한국어이건 아무쪽을 써도 상관없다면 그것은 영문이건 한국문이건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다. 내용을 보겠다는거다. 추천서에 쓸만한 내용이 있는지 그걸 보겠다는거다. 그 쓸만한 내용을 '추천인'이 잘 모를수 있으니 오히려 추천서가 필요한 본인이 알아서 잘 쓰는것이 아무래도 좀더 생생하겠지. 그래서 그 추천인은 아마도 그러 선의를 가지고 써오라고 했겠지.' 나를 위한 추천서를 진심으로 작성할만한 사람이 주위에 없다면 - 이제 앞으로는 주위에 내 편이 되어줄 성실한 조력자를 세울 궁리를 하는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 조력자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1년 혹은 2년간 공을 들여야 하는거다. 그러한 인간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 어디에 가서도 '일꾼'이 되기는 쉽지 않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나를 돕고 내가 도울 나의 네트워크를 내가 만들어 나가야 한다.
나는 캠퍼스에서 생활한다. 일하는 건물과 숙소 건물은 약 300 미터쯤 떨어져 있다. 늘 캠퍼스에서 지내다보면 불편한 점이 한가지 있는데 - 나의 삿적인 영역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 숙소의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부터 '공인'이다. 늘 '정상적인 어른'처럼 행동을 해야 한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
며칠전에는 내 숙소 입구로 들어서려는데 어떤 곱다란 학생이 마스크를 쓴채로 반갑게 나와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했다, "Oh! Professor 000!" 놀랍고 반갑다는 빛이 역력하다. 그래서 나는 상대가 누구인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역시 눈을 빛내며 반갑다고 멍멍멍 해 주고 그 자리를 지나쳤다.
현장을 지나치고나서 나는 중얼거렸다, --"그런데 누굴까? 아마도 내 학생인가본데..."
필시 내 학생일 것이다. 내가 채용한 인턴인지도 모른다. 학생 아니면 학생 인턴이겠지. 그런데 그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다.
왜 이런일이 벌어지는가? 코로나 때문이다. 그리고 '마스크'때문이다.
아, 정말 지겹다. 벌써 4학기째 학생들 얼굴을 못 보고 수업을 하고 있다. '줌' 수업을 할 때 카메라를 켜는 학생의 수는 매우 제한적이다. 학생들은 카메라 켜기를 주저한다. 그리고 나는 카메라를 켜라고 강제할 수 없다. 나는 카메라 켜는 것을 학생들의 판단에 맡겼다. 자발적으로 카메라를 켜는 학생도 간혹 있지만 대체로 카메라를 켜지 않는 분위기 이다.그러니 나는 검은 바탕에 학생이름만 적힌 것을 보면서 토론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강의를 한다.
커뮤니케이션 수업에서는 오디오/비디오 발표 숙제를 지속적으로 내 준다. 카메라 앞에 앉아서 비디오로 발표하는 영상을 찍어 올리는 과제를 할 때조차 '마스크'를 쓰고 하는 학생들도 있다. 분명히 자기방에서 영상 녹화를 하면서도 마스크를 쓰고 한다. 얼굴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다는 뜻이리라. 나는 얼굴도 모르는 학생들을 만나서 대화를 하고, 토론을 하고, 그들의 과제를 채점한다. 나는 내 학생들의 얼굴을 잘 모른다. 내 학생들은 카메라 앞에서 '원맨쇼'를 하는 나를 들여다보며 킥킥 웃기도 하고 - 그런 식으로 나를 만난다.
나는 마치 카메라 앞에서 혼자 쇼를 하는 사람 같다. 학생들은 나의 얼굴을 기억하고, 내 표정이나 목소리나 몸짓을 기억할것이다. 수업내내 카메라앞에서 활발하게 '쇼'를 하니까. 그는 아마도 멀리서도 나를 알아 볼 것이다. 설령 내가 마스크를 껴도 그들은 멀리서도 나를 알아 볼 것이다. 나는 그들 앞에서 내내 원맨쇼를 하는 사람이니까. 반면에 나는 검은 화면을 보면서 이야기를 한다. 나는 열심히 떠들고 질문하고 대꾸한다. 상대방의 얼굴도 보지 못하면서, 검은 화면을 향해웃고 떠든다.
그래서 - 내가 한번도 본적이 없는 학생이 먼저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할 때,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 역시 반갑다고 인사를 한다. (그를 실망시킬수 없으니까.) 학생들은 자신들이 내게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다는 것을 아마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을것이다.
이건 마치 내가 '스타'가 된 것 같다. 길가다가 친근한 영화배우나 탤런트나 가수를 만난다면 - 나는 '아 저 사람이 가수 000씨구나!'하고 반가워하겠지만 - 그 가수가 나를 알 리는 없다.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반가울뿐이다. 얼굴을 모르는 학생이 내게 반갑다고 인사를 할 때 - 나는 내 학생을 기억하지 못해도 역시 반가워해줘야 한다. 실망 시킬수없는 것이다.
돋보기 안경을 가지러 침실로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문득, 얇은 이불을 상체에만 덮은채 아기처럼 나비잠 (두 팔을 어깨위로 펼치고 누워서 자는 잠)을 자는 초로의 남편이 눈에 들어온다. 그 옆에는 내가 덮고 자던 가슬가슬한 홑이불이 아무렇게나 '뱀껍질'처럼 방치되어 있다. 남편의 '나비잠'이 보기에 좋아서 조금 더 들여다보다 나온다.
남편과 애틋하게 포옹을 하거나 입맞춤을 한것이 언제이던가? 십년도 넘은 일인 것 같다. 우리 부부가 한 침대를 쓴다는 것을 신기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다. 여태 그렇게 의가 좋냐고. 집에 침대가 하나밖에 없어서 한 침대를 쓴다고 무연하게 답하곤 한다. 침대가 여럿이라도 아마도 우리 부부는 한 침대를 계속 쓸것이다. 남편은 잠 버릇이 얌전하다. 오히려 이불을 똘똘 말거나 이리저리 험하게 자는 쪽은 나다. 둘이 잘 때 불편을 느끼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남편일 것이다. 남편은 내가 자면서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이불을 '똘똘말이' (이불을 혼자서 다 씀)를 하고, 남을 막 밀어댄다고 투덜대긴 하지만 그는 절대로 나와 떨어져 잘 생각은 없는 듯 하다. 오랜 '기러기' 생활을 견디며 그는 '혼자 지냄'의 쓸쓸함을 익히 안다. 그래서 그는 내가 근처에 있기만 해도 안도하고 즐거워 하는 편이다. 내가 그를 성가시게 구는 것이 내가 아예 근처에 없는것보다 훨씬 좋다는 것을 그는 체험으로 알았을 것이다. 나는 좀 만사가 무연한 편이다. 나는 아무데나 처박혀서 자면 되기 때문에 내가 누군가와 같은 침대를 쓰거나 혼자 자거나 별로 문제가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도 쭈욱 늙어서 한 쪽이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날때까지는 한침대에서 자고 일어날 것이다.
평화롭게 나비잠을 자는 남편의 모습이 나를 흐뭇하게 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잠이 줄어들고 새벽 네시면 자동시계처럼 눈이 떠지는데, 저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잠도 잘 자네. 좋겠다. 일년에 두번 내가 미국의 아이들 집에 가서 노는 동안 나를 기다리며 지낼때 그의 잠이 저리 편하지는 못했으리라. 내가 지금 그의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부부는 유년의, 사춘기 이전의 오누이처럼 되는것 같다. 서로 의지하고 서로 없으면 쓸쓸한. 사이좋은 오누이 같은. 각자 덮을 이불을 아무렇게나 덮고 각자 따로 이리저리 구르면서도 여전히 한 침대를 쓰는. 두마리 강아지처럼 그렇게 평화로워지나보다. 문득, 내 곁을 변함없이 충성되게 지켜주는 이 오라비의 존재에 대하여 하나님께 깊이 깊이 감사하게 된다. 하나님 제 곁을 지켜주는 저렇게 착한 사람을 저에게 보내 주신 것을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멘.
모더나는 1차 접종 4주후에 2차 접종을 한다. 1차 접종 3주차에 들어섰을 때, 왼쪽 허벅지 윗쪽부터 뭔가 미세한 전기 지렁이가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 처럼 찌리릿 찌리릿 하는 증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내가 살면서 처음 느낀 통증이다. 그러니까 다리가 아프다 그러면 대개 운동이나 생활 동작으로 다리 근육이 피곤해져서 근육통이 온다. 특히 종아리 부분에 쥐가 난다거나 뭐 근육통, 그것은 나도 안다. 그런데 허벅지 윗부분이나 종아리가 아닌 정강이에는 근육이 별로 없으니까 아플일도 별로 없다. 그런데 바로 그 근육이 없는 곳에서 뭔가 전류가 지나가듯 찌릿찌릿하고 통증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오른쪽 다리는 멀쩡하고, 가끔 일어나는 '전기지렁이가 내 혈관을 타고 지나가는 듯한 기묘한 통증'이 왼쪽다리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나는 매일 적어도 30분씩은 집근처 개울가를 산책하는둥 규칙적으로 운동을 했고 비교적 건강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 이 기묘한 다리 통증은 이따금 쥐가 나듯 발생하곤 했다.
그런데, 이 통증은 앉아있거나 서있을때 발생하는 편이고, 통증을 완화하는 방법은, 그자리에 누워서 다리를 높게 해주는 것이다. 그냥 아파서 쩔쩔매다가 그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도 통증이 찾아왔는데, 그 때마다 텅텅빈 옆자리 덕분에 에 다리를 의자에 올리고 쭉 뻗고 있으면 통증이 가라앉았다. 귀국후에는 이런 통증이 찾아오지 않았다. 지나간 것 같다. 그러니까 모더나 2차 접종 이후 약 2주간 빈번히 이런 통증을 느끼다가 이제 접종 후 3주가 지난 지금 이것도 이제 사라진 듯 하다. 이것이 모더나 접종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내게 어느날 문득 찾아온 '신경통'인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일년에 두번 정도 찾아 보는 '나무' 와 '숲' 이야기.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 - 식물 (풀과 나무)의 대화법을 알고 싶어진다. 그러려면 아마 화학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 여러가지 화학기호들에 익숙해지고, 식물들이 서로 어떤 화학 물질들을 교환하는지 파악할수 있어야 할것이다.
전에는 '동물학' 책을 보며 신기해 했는데, 요즘은 '식물'관련 책이나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많이 간다.
이에 서울대는 “청소 노동자들이 근무하는 장소 특성상 유학생들이 많아 적절한 응대를 위한 교육이었다”라는 해명을 내놓았다.
서울대 학생처장의 변명이 납득하기 힘들다. 고인이 근무하시던 곳에 국제 학생이 많아서 '적절한 응대를 위한' 서비스 차원의 부가적인 기능이 필요할 수는 있겠다. 그런데, 나 역시 '유학생'이던 경험에 입각해서 보면 -- 내가 미국 대학에서 유학할 때, 나를 위해서 미국 대학의 어느 누구도 '유학생'인 나의 입장을 고려하여 '한국어' 서비스를 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미국의 주요 언어가 영어이니 내가 영어를 더 잘 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어가 주요 언어인 미국'에서 영어를 못하는 청소 노동자들도 아주 많았다. 미국 대학의 청소 용역 하시는 분들 중에는 '히스패닉'계가 많고, 영어가 잘 안되고 스페인어로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것도 종종 목도한다. 그래도 문제가 안 되는 게, 학생과 청소 노동자가 서로 말을 섞을 상황이 별로 없는 것이다. (아니 미국에서도 청소부가 영어 못해도 청소 잘 하고 사는데, 한국에서 왜 청소부가 영어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하지? 한국에 있는 외국계 회사나 대사관도 아니고, 그냥 한국의 대학인데 말이다.)
청소 노동자는 청소만 잘하면 된다. 당신은 청소 노동자에게 뭘 더 요구하는가? 부가적인 서비스? 그것이 노동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가? 서울대학교에서 청소 하려면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일어 또 뭐 이런 저런 외국어의 기본을 익혀야 하는가? 당신들은 과연 유학생들과 소통을 잘 하고 있는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데 - 청소하는 사람에게 외국어를 요구하다니, 이것이 한국이 지향하는 '세계화' 이런건가? 그런가? 이 기묘한 세계화의 논리는 시골 장터에서 옥수수를 내다 파는 할머니에게도 '옥수수를 영어로 뭐라고 하는지 써보시오'라고 시험을 실시한 후에야 옥수수를 팔 것을 허용하려는가?
서울대학교에서 유학하는 학생들은 외국학생들일 것이다. 그들은 한국에 왜 유학을 왔나? 그들이 강의를 영어로 듣건 뭐로 듣건, 한국의 대학에서 공부를 한다면 기본적인 한국어 구사가 가능해야 한다. 청소노동자와 서울대 유학생이 소통할때 영어가 왜 필요한가? 유학생이 한국어로 소통하는 것이 마땅한 것 아닌가? 우리가 미국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토플 시험으로 기초적인 영어 실력 검증을 한다. 서울대학교에 유학하는 인재 학생들이 입학할 때 기본적인 한국어 실력 검증도 없이 '영어만 잘하면 어서 옵시오!!!!!' 인가 혹시? 그런 건가? 한국어 한마디 못해도 서울대학교 입학 가능? 청소노동자까지 나서서 영어로 '어서 옵시오!!!!' 해야 하는 건가?
유학생들 살뜰히 살피는 그 정신으로 당신 대학 구석구석 쓸고 닦는 청소 노동자를 살뜰히 살필수는 없는가? 어떤 슬픈 상황이 발생해서 비판을 받을 때는 그 순간만이라도 반성의 태도를 보이고, 재발 방지를 위한 고민을 하는 시늉이라도 하여 조금이라도 상황을 개선시키는 것이 우리의 일상을 먼지만큼이라도 의미있게 하는게 아닐까? 우리가 왜 사나...위로하고 미안해하고 뭔가 개선의 움직임을 보이는것이 우리 삶을 좀 더 가치있게 하는게 아닐까? (정치인이 뭐라고 하건 말건, 정치적으로 이용하건 말건, 그런 부차적인 것 말고 본질을 들여다본다면 -- 당신이나 나나,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하여 미안하고 슬퍼해야 하는게 아닌가? 그것이 지식인의 몫이 아닌가?)
4주 전에 모더나 백신 1차 접종을 했고, CDC 접종 카드에 7월 8일에 2차 접종 받으러 오라고 표시를 해줘서 오늘 아들과 함께 지난번 1차 접종을 했던 월마트 약국으로 가서 2차 접종을 완료했다. 약국 한쪽 구석 간이 주사실에서 주사 맞고, 월마트 약국 매장 앞 Post Vaccination Area라고 표시가 된 의자에 15-20분 앉아 있다가 약국 직원이 이제 가도 좋다고 해서 자리를 떴다. 현재 주사 맞은 지 5시간 흘렀는데 왼쪽 팔 주사 맞은 부위가 약간 열감이 있고 욱신거리는 느낌. 지난번 1차 때에도 그다지 눈에 띄는 심각한 증상이 없어서 타이레놀 한알도 안 먹고 지나갔던 터라서 크게 걱정은 안 하고 평소대로 책상 앞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다.
오후에 주사 맞고 돌아오는 길에 근처 맥도날드에 들러서 생선살 햄버거 (Filet-O-Fish)와 감자튀김 그리고 아이스티 한 세트 사 가지고 와서 얼음 동동 아이스티 벌컥벌컥 - 집에 1 갤론 생수통에 가득 마련해 놓은 루이보스티 벌컥벌컥 - 주로 카페인 없는 차 종류를 벌컥벌컥 먹어주고 있다. 그냥 동물적 직감으로 물 (수분)을 많이 섭취하면 좋을 것 같아서 (독성분은 빨리 나가 줄 것이고 순환은 잘 될 것 같고). 하루 수분 권장량이 대체로 1.5-2 리터이고. 미국에서 판매하는 생수는 갤런 (3.8 리터)이고. 내가 하루에 1갤런을 마시면 하루 권장량의 두배 정도 마시는 건가? 뭐 그냥 열심히 노카페인 차나 마시면서 이 시기를 통과해야겠다.
접종 후 20시간 경과: 어제 오후에 접종하고 밤이 지나 이튿날 오전 10시. 어젯밤에 선선한 밤공기 속을 아들과 30여 분간 동네 산책하고 나는 자정쯤에 잠자리에 들었고, 아들은 잠이 안 오는지 늦게까지 TV 소리가 들렸다. 새벽에 잠이 깨어,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자다 깨다 빈둥댔는데 아들이 '엄마 괜찮으신가' 묻는다. 나는 그냥 주사 맞은 왼팔 주변 어깨까지 좀 욱신욱신하는 정도인데 아들은 '아이고 죽겠다'는 표정으로 종합감기약 '애드빌'을 먹고 쉬겠다고 한다. 나는 아직까지는 뭐 별로 특별한 통증은 못 느껴서 책상 앞에 앉아서 밀린 일이나 하겠다고 생각한다. 역시 젊은 사람이 백신에 더욱 활발한 반응을 보이고 나는 신체가 노후하여 별 반응을 안 보이는 것인가?
접종 후 24시간 경과: 온몸이 몽둥이로 사정없이 두드려 맞은것처럼 아프다. (몽둥이로 맞아본 적이 없으니 적절한 비유는 아닐것이다). 온몸의 마디마디가 바늘로 콕콕 쑤시는 것처럼 아프다. 온몸에 열감이 느껴지고, 동시에 오한이 찾아와 몸은 불덩이 같은 느낌인데 손발이 시리고 덜덜 떨린다. 그래서 얇은 패딩을 갖다 껴 입는다. 그리고 애드빌을 한 알 먹는다. 애드빌 약기운에 의지하여 한 숨 자면 고통도 잊고 증상도 완화되지 않을까 싶은데 잠도 안온다. 몸이 아픈 상태에서 뜬 눈으로 이리뒤척 저리뒤척 시간이 어서 가기만을 기다린다.
접종 후 30시간 경과: 애드빌 한알을 다시 먹는다. 손발 시리고 온몸의 마디마디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찌릿찌릿한 통증이 조금 완화된 상태이다. 엉금엉금 기어나와 냉장고에 있던 식혜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식혜를 끼니 삼아 벌컥벌컥. 오한 통증이 완화되었지만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문득 내 몸이 '생체실험'을 당하고 있다는 기묘한 느낌이 든다. (아, 어쩌다 인류가 이런 전 지구적 문제에 봉착한 것인가?) 영화 Avatar 를 꺼내 보았다. 잠이 들었다.
접종후 40시간 경과: 일곱시간의 깊은 잠에서 깨었다. 온몸을 찌르는 듯한 예리한 통증은 사라졌다. 오한도 사라졌다. 두통도 사라졌다. 아침 산책을 나가도 좋을것 같다. 아들이 일어나 내 증상을 묻는다. 아들은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한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의 백신 반응이 더 활발해서 그럴 것이다. 그는 아직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다. 나는 이제 일어나 평소대로 일을 한다. 백신 2차 생체실험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는 듯 하다. 인생은 롤러코스터처럼 한고개 넘어가면 또 다른 고개가 기다리고. 몸이 고단하니 사는게 왜 이리 힘든가 싶다. (둘째는 어제 화이자 2차 접종을 완료했다. 둘째에게 오늘 힘든 시간이 찾아 올지도 모른다. 음료수와 해열제를 준비 해 놓으라 일렀다).
접종후 48시간 경과: 아들과 나 모두 별 고통 느끼지 않고 평소에 하던 일을 하고 있다. 폭풍우가 지난 것 같다. 일단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내가 부엌으로 나가서 부엌을 치우고 냉장고를 뒤져 쇠고기 다짐육을 가지고 햄버거를 만들었다. "아들아! 엄마가 햄버거 만들었다 내려와 먹어라!!!" 아들을 불러도, 아들은 내려오지 않았다. 나도 햄버거를 만들긴 했지만,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안들어서 - 기왕에 부엌에 들어온 김에 부스럭부스럭 냉장고를 뒤져 국물 멸치와 새우, 해산물을 찾아내어 '잔치국수'를 만들었다. 고춧가루도 넣어 얼큰하고 멸치 육수 맛이 향기로운 잔치국수. 또 2층의 아들에게 외쳤다 "야, 아들아! 잔치국수 했다! 내려와라!" 아들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햄버거도 만들어 놓았고, 잔치국수도 만들었는데 너 뭐부터 먹을래?" 내가 물으니 잔치국수부터 먹겠단다. 사람이 몸이 아프고 지칠때 먹는 음식 - 그 음식이야말로 '고향' 같은 '위안'을 주는 영혼의 음식이 아니겠는가. 한국보다 미국에서 살아온 시간이 더 오래된 아들은 몸이 아플때 햄버거와 잔치국수 두가지 선택지중에서 '잔치국수'를 선택했다. 그렇지, 내 아들은 한국에서 병역의무까지 마친 한국 사람이다. 그의 '잔치국수' 선택이 그가 본래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니 너의 이곳의 생활은 얼마나 고단한 것인가. 설령 본인 스스로도 잘 감지하지 못한다 하여도.)
2차 접종 후유증의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 어제의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증명하려는 듯 입안과 콧속의 피부가 헐었다. 나는 몸살기운이 있거나 피곤이 극에 달하면 입이나 콧속의 피부가 붓거나 헌다. 내 몸이 잘 싸워낸 듯 한다.
한국은 확진자 숫자의 증가로 초비상 상황이 되는 모양새라 걱정이 된다. 백신 접종 받은 분들도 경계를 늦추지 말고 평소대로 마스크 착용하고 접촉을 최소화하며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것이 최고의 대책이 아닐까. 백신을 접종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조금 안심이 되는 상황이니 - 아직 접종받지 않은 가족이나 이웃들을 위해서 답답해도 거리두기와 마스크를 계속 유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비록 내가 모더나 1-2차 접종을 완료했지만 나는 백신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좀 더 인내심을 갖고 모두가 안심할 수 있을 때까지 서로 협조해야 한다. 한국의 내 또래 친구들과 이웃들은 아직도 백신 차례가 되지 않았고,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그런 형편을 생각하면 내가 다 송구스럽다. 내가 돕는 길은 위생을 철저히 하고, 철저한 마스크, 거리두기를 통해서 내가 감염경로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주에 영주권 만료 6개월을 앞두고 온라인으로 재발급 신청을 마쳤는데 (6월 15일), 오늘 우편으로 신청 접수 완료되었다는 우편물 두장이 도착했다. 편지 한통은 단순하게 *접수가 되었다 * 전에 사용했던 지문이나 서류를 다시 사용하겠다 뭐 대충 이러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아, 잘하면 지문 날인 다시 할 것 없이 그냥 카드가 날아 올수도 있는거구나.)
아래 폼의 내용은 영주권 카드가 만료 되는 시점까지 영주권 카드 재발급이 안될 경우 이 서류를 소지하면 만료일부터 1년까지 미국 출입국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료된 영주권 카드와 이 서류를 소지하면 된다). 만약에 만료된 영주권카드를 소지 하지 않을 경우 (예컨대 분실했다던가...) 별도로 승인 스탬프를 받아라 뭐 그런 안내이다. 그러니까 이 서류는 영주권과 함께 소지할 필요가 있다 (만약 만료 이전에 새 카드가 온다면 아무 상관없다.)
영주권 재발급은 기초 영어 독해와 인터넷으로 자신과 관련 된 기본 정보를 기입하는 정도의 지식이 있고, 인터넷 기본이 가능한 사람이면 변호사 도움없이 혼자 스스로 충분히 해결할 만하다.
지난 월요일에 DMV에 가서 운전면허 갱신 (주소 변경과 2월에 만료된 면허증 복구) 신청을 했는데 - 이튿날 '우편으로 부쳤다'는 메시지가 왔고, 오늘 (금요일) 우편함에 새 면허증이 도착했다.
새 면허증은 Real ID라고 해서 optional (내가 원하면 하고 원치 않으면 안해도 되는) 이라고 했는데 나는 15달러 더 내고 신청을 했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일단 신청을 했다). 이미 만료된 이전의 면허증과 새것을 비교해보니 디자인이나 내용 구성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 단 한가지 오른쪽 상단 모서리에 '별'표가 새겨져 있었다. 그 '별'표시가 미 연방정부의 아이디라는 표시로 보인다.
그래서 도대체 이것이 기존의 면허증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 이제사 DMV 설명을 읽어보았다. 그러니까 아직까지 별 차이는 없고, 2023년이 되면 기존의 면허증가지고는 미국내에서 국내선 탈 때 사용할수가 없다는 모양이다.
What are the benefits of having a REAL ID compliant license or ID card?
Holders of licenses and ID cards that meet federal requirements will be able to use their Virginia DMV-issued credentials as identification to access federal buildings, including military installations, and board domestic flights.
Do I have to get a REAL ID compliant license or ID card when I renew my credential?
No, obtaining a REAL ID compliant license or ID card when you renew is voluntary. Current Virginia driver's license and identification card holders may choose at renewal whether they would like a REAL ID compliant credential or a standard Virginia credential. If a customer chooses not to apply for a REAL ID compliant credential, the customer’s renewal process remains the same as in previous years. If you are a renewal customer and want to upgrade to REAL ID, you can start your REAL ID application online. This easy and efficient process will also help you select which documents to bring to DMV.Start your application now.
Can I use my current driver's license or ID card to board a domestic flight?
Yes, until May 3, 2023. Your current Virginia credential may be used to board a domestic flight through May 2, 2023. On May 3, 2023, the federal government will require all domestic air travelers to present a REAL ID compliant driver’s license or ID card or another federally approved form of identification.
내가 여름을 보내는 버지니아 시골 마을. 주변이 목장 지대로 둘러싸여 있어 집앞에 실개천이 흐르는데 나는 이 개울가를 아침 저녁으로 산책을 한다.
요즘 개울가를 뒤덮고 피어있는 아주 자그마한 파란 꽃들. 꽃들을 들여다보며 '이것이 혹시 물망초 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집에 와서 웹검색을 하여 대조해보니 이것이 말로만 듣던 그 '물망초'이다. 기쁘다. '날잊지 말아요, 내 맘에 맺힌 그대여' 노래속의 그 물망초가 이것이었구나!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가 되어 이제야 '물망초' 꽃을 시냇가에서 발견하다.
사람에게는 '암묵적 (implicit)' 지식 혹은 기억이란 것이 있다. 모르지만 아는것. 그것이 암묵적 기억이다.
가령 이 물망초꽃처럼 - 나는 평생 '이것이 물망초다'라고 내 눈으로 알고 본 적이 없다. 그저 노래로 듣고, 시냇가에 피는 꽃이라는 정도의 정보만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무엇이 물망초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이 자잔한 파란 꽃이 무리지어 피어난 것을 보고 '저것이 물망초가 아닐까' 추측을 한 배경에는 나도 설명하기 어려운 '기억장치'들이 있는 것이다. (전에 책이나 혹은 티브이나 인터넷에서 이 물망초를 봤을 것이다.)
20여년전에 내가 플로리다에서 생활을 시작했을때, 어느날 산책길에 '로드킬' (road kill) 교통사고로 죽은 동물의 시체를 발견했다. 난생 처음 보는 동물이었다. 양서류, 악어같이 생기고, 등이 둥글고, 도마백 같이도 생겼고. 미국 남부에서나 사는 (한국에서는 아예 서식하지 않는) 그 동물의 사체를 들여다보며 나는 문득 종알거렸다 - 이게 '아마딜로'인건가? 나는 내 입으로 '아마딜로'라고 말을 하면서도 도무지 내 입에서 왜 '아마딜로'라는 말이 나온 것인지 알수 없었다. '아마딜로'라는 말 자체도 내 머릿속에 있었던 것 같지가 않았으니까. 그런데, 웹검색으로 아마딜로를 찾아보니 정말 그 동물 그림이 나오더라.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컬러학습대백과'나 '동물의 시간' 그런데서 아마도 나는 아마딜로를 여러차례 봤을것이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암묵적 기억'이다.
역시 20여년 전 플로리다에서 살때의 일이다. 어느날 욕실 캐비닛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쥐 같은것이 내는 소리였다. 캐비닛에 쥐가 있나보다. 그런데 어딘가 함정에 빠진 쥐가 발버둥치는 것 같은 그런 소리이다. 캐비닛 문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괴상한 외계 생명체'가 들어있었는데 날개짓을 하는것도 같고, 내 평생 한번도 본적이 없는 그야말로 '외계생명체'였다. 내 등뒤에 숨어서 관찰하던 당시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내 아들들도 아무런 생각이 안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기괴한 장면의 중심에 선채로 (내가 아이들 엄마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자리에서 도망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였기 때문에 나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건.....박쥐 인가봐...."
내가 평생에 박쥐를 본적이 있었는가? 물론 없었다. 그리고 박쥐라면 암굴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 혹은 밤하늘을 갈짓자로 날아다니는 것이여야 한다. 그런데 박쥐가 왜 내 욕실 캐비닛에 들어 있겠는가? 말도 안된다....하지만...그래도 이것은 혹시 박쥐가 아닐까?
일단 '박쥐'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웹을 뒤져 박쥐를 찾아냈고 - 바로 그 괴생명체가 '박쥐'임이 밝혀졌다. 그날, 그리고 그 며칠 후, 우리는 여러마리의 박쥐들을 생포하여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박쥐가 화장실의 환기구를 타고 실내로 들어와 캐비닛 안에 들어온 후에 퇴로를 찾지 못해서 발생한 일이었다. 아, 밖으로 박쥐를 살려서 내보냈는데도 그 중에 몇놈은 고집스럽게 우리집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 앞에서 집으로의 침투를 시도했는데 참 괴이한 일이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 한국에서는 박쥐가 '복'을 가져오는 길한 짐승이라는 것이고 - 그래서 그 괴이쩍은 상항에 대하여 '우리집에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려나봐'하고 아이들을 달랬다. (영 기분이 나빴으니까.) 그렇게 기괴한 박쥐와의 조우 이후로 나는 박쥐를 잘 식별한다. 플로디아에서 버지니아로 이주한 후에도 저녁 산책길에 술취한듯 갈짓자로 날아다니는 새들을 발견하면 그것이 '새'가 아니라 '박쥐'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니까 생전 본적도 없고, 절대 그 자리에서 발견할거라고 예상할수 없는 - 전혀 연결이 안되는 생명체를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내게 '박쥐'라는 답을 준 것은 바로 그 '암묵적' 기억이다.
나는 우리아들에겐 걸어다니는 '클래식 음악 사전'이다. 아들이 뭔가 흥얼거리며 "엄마 이 곡이 뭐죠?"하고 물으면 나는 그냥 아무 생각없이 내 입에서 나오는 내 말소리를 듣는다.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그것이 정답일 때가 많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그리고 종알거린다.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런 기억력이 그다지 신통하지 않지만.)
이름모르는 꽃을 발견하고 '이것이 물망초인가봐' 추측한 내가 신통해서 '암묵적 기억'에 대해서 헛소리를 해 봤다.
한국에는 아스트라제네카, 얀센(존슨앤존슨), 그리고 화이자가 풀려있고 아직 '모더나'는 풀리지 않은 것 같은데 - 나는 모더나를 맞았으니 후일 다른 분들이 참고하시라고 기록을 남겨본다.
버지니아주 우리 동네 순박한 미국인들이 서로 모여서 한 얘기 하고, 한 얘기 또 하는 (그냥 사람 만나서 대화 나누는 것 자체가 기쁘고 흥겨워서 한얘기 하고 또 하는) 상황에서 나눈 후기:
(1) 모더나건 화이자건 1차 접종은 아무것도 아니다 2차때 이틀정도 끙끙 앓는다. 각오하라 (각오하라지만 별것 아니라고 킬킬댄다).
(2) 주사 맞은 부위가 얼얼하고 아플것인데 - 통증을 예방하려면 팔을 많이 움직여주는것이 좋다고 한다. 이것이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지 민간처방인지는 모르겠는데 뭔가 그러는게 좋을것 같아서 나도 주사 맞고 온날 오후에 팔 운동 열심히 했다. 딱히 운동이랄것도 없이 그냥 아령 운동하듯이 팔을 올렸다 내렸다, 춤추듯 팔을 이리저리 돌리고 휘젓고 ... 그냥 밑도 끝도 없이 팔을 움직여주는거다. 그래서인지 통증이 막 심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아들도 마찬가지로 (젊은 사람이 통증이 더 심하다는 설도 있지만) 그다지 통증이 없어 보였다. 이 친구는 정기적으로 근력운동도 하고 아주 건강한 젊은이인데 - 노인이 되어가는 나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통증을 겪지 않았다.
I think I should report my case that I've got my 1st shot of Moderna vaccine on Thursday, June 10 in Virginia, and the bleeding after menopause began on Sunday, June 13 (it began about 72 hours after the inoculation). At first I took it as the 'ordinary' symptom that most middle aged women experience 'in the final process' of menopausal period (irregular bleeding in several months) and today I've noticed some online news reports on the same cases that other women across the world experience after the covid-vaccination.
I do not take it seriously and I am not a bit concerned of this situation as I have regularly consulted with my gynecologist for her advice on my menopausal symptoms and my recent medical check-up with her tells me that my 'women organ' does not show any irregularity.
I am purely curious and I think it deserves scientific investigation on the 'causal relation' between the Moderna Vaccine (or covid-19 vaccines) and post-menaupasal bleeding.
--Moderna, Virginia, US
모더나 백신 1차 접종 후 7일째 되는 날이다. 새벽에 잠이 깨어 이런저런 온라인 뉴스를 리뷰하던중 재미있는 기사를 발견. 모더나나 다른 코비드 백신을 맞은 폐경기 여성들 중에서 '생리'를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오호!~ 이것이 나만 겪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나도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생리가 불규칙적이 되고 전형적인 '갱년기 증상'에 시달리던 나머지 지난 봄부터는 근처 산부인과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갱년기 증상 완화 치료도 받고 상담도 하며 지내왔다. (나의 갱년기 증상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무기력감 이었다. 무기력감. 다행스러운 것은 이 무기력감이 '우울증'과는 다른 것으로 그냥 신체적으로 깊이 깊이 늪속에 빠져들어가는 느낌. 정말 깊고 깊은 무덤속에 갖혀있는데 숨만 쉬고 있을 뿐 빠져나갈 기력이 없는 상태. 매일 기도하므로 마음은 평안하고 흔들림이 없는데 신체가 무덤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기묘한 상황. 그래서 마침내 의사를 찾아갔던 것이고, 그럭저럭 잘 견뎌내고 있었다. 이런 깊이를 알수 없는 무기력감 속에서도 - 나는 내 정신이나 마음 혹은 영혼이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
갱년기 치료를 받는 중간에도 어쩌다 '잊혀진 옛사랑의 그림자가 얼핏 지나치듯' 한두차례 출혈이 있기도 했는데, 이것은 종이에 손가락을 베었을때 약간 피가 나다 마는것 같이 아주 경미한 일이었고 나의 의사 선생님도 별일 아니라고 친절한 조언을 해 주신바 있다. 내 여성기관은 '정상'이고 암이나 다른 이상 증상은 없이 멀쩡한 상태이다.
그런 상황이므로, 버지니아 집에 와서 모더나 백신을 맞고 그리고 3일후 (만 72시간 경과후)생리가 (폐경 이전과 같이 건강하고 왕성한 생리가) 다시 시작되었을 때 - '이거 뭐지? 아! 내가 스트레스 많던 학기 일을 다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며칠 푹 쉬니까 생리가 돌아온건가? 결국 이러다 끝나겠지.' 대충 이렇게 정리를 한 바있다. 그런데, 이것이 코비드 백신을 맞은 많은 여성들에게 일어나는 증상이라니, 놀랍다. 코로나 백신의 부작용 중에 '혈전'이나 뭐 그런것이 문제가 되는 모양인데 결국 이것도 '혈액'과 관련된 문제인걸까? 그래서, 내 케이스도 일단 공개한다. 영문으로 써놔야 혹시 연구자들이 발견할지도 몰라서 영문으로도.
이걸 내가 정말로 '생리'로 받아들인것은 정말로 생리전 증후군 (갑자기 뭔가 식욕이 올라가서 뭔가 자꾸 뒤져 먹게 되고, 배가 빵빵해지고 --나의 생리전 증후군)이 있었고, 안색이 안 좋아지고, 약간 오싹한 기분이 들어서 (생리 전에 손발이 시려지고 그런다) 얇은, 한 여름에도 꺼내 입는 얇은 패딩 점퍼를 입고 줌으로 회의도 하고 그랬다. 그러고 나면 출혈은 이어지는데 온몸이 따뜻해지고, 나른하고 포근한 잠이 쏟아지기도 하는 - 그냥 평소 생리를 할 때 겪는 달콤한 증상들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순전히 '과도한 업무에서 벗어나 휴식을 즐기므로 일어나는 일시적이고 즐거운 신체적 변화'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에...에...그, 그런데... 그러니까, 가령, 뭐, '비아그라' 그 약이 원래는 무슨 고혈압인가 뭔가 치료제 개발중에 실수로, 우연히 기가막힌 증상이 나와서 그것이 '발기부전' 치료제로 개발되었다는 것 아닌가? 그러면 코비드 백신의 어떤 무언가는 장차 '폐경기 여성 치료제'로 개발 될 수 있는것 아닐까? 이런 엉뚱하고도 즐거운 '상상'을 해 보게 된다. 하하하. (알게 뭐람. 재미있는 인간계).
확실히 지난 겨울, 백신이 아직 본격적으로 풀리기 전의 미국과 백신이 대중들에게 풀리고 맞을 사람은 대체로 맞은 (아예 안맞겠다고 작정한 고집쟁이들을 제외한 말 잘 듣는 사람들은 다 맞은) 미국의 풍경이 확연히 다르다.
공항 입국심사대를 통과할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의 일상과 별 차이를 못 느꼈다. 비행기에서 삼엄하게 마스크를 해야했고, 이민국을 통과 할 때까지도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쓴 상황이었다. 그런데 공항을 빠져 나오자 거리의 모습은 '코비드 이전'으로 돌아간 듯, 마스크 쓴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식당에 들러도 마찬가지. 마스크를 꽁꽁 쓰고 있는 나와 내 아들이 '튀는 존재'처럼 여겨졌다.
이 동네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만날수 있는 '월마트'에서는 50:50 정도로 마스크를 쓴 사람과 쓰지 않은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어제 DMV (자동차 관련 관공서)에 갔을때는 출입구에서 경비가 '코비드 관련 질문 (열 있냐, 2주 안에 코비드 환자와 접촉한 적 있냐' 뭐 그런 일상적인 질문을 했고 내가 '도리도리'하는 것을 보면서 경비아저씨는 '묻는 내가 미안하구나' 하는 표정으로 싱긋 웃었다. 그런데 사전 예약으로 '통제'된 인원만 출입이 가능했던 DMV에 들어가보니, 실내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마스크를 쓴 사람은 나와 어느 노인 부부 뿐이었고, 창구에서 일하는 직원들이나 일을 보러 온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지 않은 상태였다. 관공서인데 '직원'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는 것을 보면 -- 예방 접종 완료자들이라는 뜻인걸까? 대충 예방접종 완료를 한 사람들인가보다 짐작하고 내 일을 마무리 했다.
마을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중에도 마스크를 쓴 아이들은 없다. 개를 끌고 가다 길에 서서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모두 마스크 없이 마주서서 미소를 보낸다. 뭔가 지난 겨울에 비해서 사회적 공기가 가벼워진듯 하다. 이곳이야 목장으로 둘러싸인 그야말로 '초원의집' 같은 동네이고 사람들도 별로 없으니 그렇다 치고 - 대도시에서도 이런 식이라면 과연 백신 접종을 완료 했다는 것 만으로 안심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어제 저녁에는 나도 산책을 나갈때 마스크 없이 나섰다. 한국에서 '사람 얼굴'을 보기 어려웠던 길거리 풍경에 익숙해 있다가, '사람 얼굴'과 그들의 미소를 그대로 볼 수 있는 풍경을 보니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아, 이제는 정말 사람이 그립다. 마스크 없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