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 돌리다 '스타다큐'라는 프로그램에 내가 아는 방송인이 나오면 - 그 사람 요즘 뭣하고 사는가? 궁금해져서 발길을 멈추곤 한다. 새카맣게 잊고 있었던 사람이 나오면 옛 친구처럼 반갑기도 하다. 그런데 어떤 스타가 나오건 간에 이 프로그램에는 어떤 공식이 있다. 단지 이 프로그램 뿐만이 아니다. 인간극장도 그러하고 하여간에 일반인이나 유명 연예인이나 그 사람의 일상의 모습을 스케치하는 프로그램에 빠지지 않는 '설정'이 한가지 있다. '멀리 있는 무덤'에가서 성묘를 하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한 개인이 특별히 조명이 될 때, 그 개인들이 꼭 보여주고 싶어하는 곳이 먼저 떠나신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나 영감님, 마나님 뭐 이런 가족의 묘지이다. 그 묘지에 시청자들을 끌고 가서 그 무덤앞에서 절을 하고 술잔을 뿌리는 것을 보여야 직성이 풀린다고나 할까? 내가 미국에서 이십년가까이 살면서 미국 테레비를 이잡듯이 뒤지며 봤어도, 어떤 사람 다큐멘터리에 자기 조상 산소에 끌고 가는 사람 별로 못 봤다. 유독 한국인들은 가족의 산소에 시청자들을 초대하는것을 즐기며, 그것을 어떤 성스러운 의무라고 생각하는 모양새다. 그러니까, 이런 심정인것 같다 - '내가 테레비에도 나올 정도로 뭔가 의미있는 존재가 되었을때, 이 사건에 대하여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은 사람이 바로 그 무덤속에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뭐, 나도 뭔가 내 삶에 의미있는 일이 발생했을때 나도 우리 조상님 산소에 갈 생각부터 한다. 최근에 승진을 했는데, 아직 산소에 가지를 못해서 금주중에라도 가려고 벼르고 있긴 하다. 한국인들의 '성묘' 문화는 유네스코에 등재할 문화가 아닐런지. ㅋㅋㅋ.
근데, 연예인들 조상 산소...그것 좀 생략하면 안될까? 테레비보다가 그런 장면 나오는 분위기가 되면, 그 때 나는 채널을 돌린다. 뭐 내가 남의 조상 산소까지 들여다볼 정도로 정감이 있고 푸근한 인간이 아니다.
지난 금요일 (2022.8. 12) 저녁에 아트센터인천에서 열린 문해원 재즈 콘서트에 다녀왔다.
나의 일상이 너무 일이 많고, 기운은 없고, 일박이일로 어디를 놀러갈 여건도 안되고 뭔가 특별한 휴식이 필요해서 별 생각없이 바람을 쐬러 나갔다.
음악은 좋았다. 노래도 잘 불렀다. 바닷가에 지어진 음악당도 좋았다.
그런데 '피로'와 '나가고 싶다'는 기분이 몇차례 들기도 했다. 그냥 건조하게 그 이유를 적어보겠다.
1) 물고기비늘같은 의상의 커다란 비늘들이 무대조명을 반사하면서 - 맨 앞줄에 앉은 내 눈을 막 찔러대서 가수를 쳐다볼수가 없었다.눈이 아팠다. 가수가 노래부르는 내내 나는 눈을 감거나 사선으로 무대 구석을 바라봐야 했다. 무대생활을 십년 넘게 했으면 객석에 앉은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게 아닐까? 관객의 눈을 찌르는 무대의상이라니.
2) 신세한탄: 글쎄 이것이 한국의 가수들의 '컨서트' 문화인지 아닌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내가 컨서트에 간것은 '음악'을 즐기기 위한 것이었는데 무대위의 가수가 '말이 너무 많았다.' 뭐 눈도 부셔서 바라볼수도 없는데 ...말을 하는데...그럼 그 말의 내용이 밝고 편안하고 즐거웠다면 좋았을 것 같다. 노래 한곡 소개하면서 '이곡은 제가 일본에서...제가...매니저도 없이..그 화살을 다 맞고...괴롭더라구요....' '제 선배님께서 돌아가셨는데....꿈에...선배님이....' 사실 그의 이야기가 늘어지고 있을때 그냥 나가고 싶었다. 맨앞 맨 가운데 자리라서 차마 나갈수가 없었다. 내가 재즈 컨서트에 쉬러 간건데 거기서 가수의 신세한탄이나 꿈자리 뒤숭숭한 얘기나 들어주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저 가수가 이런 컨서트홀에서 개인 이름을 걸고 컨서트를 할 정도면 업계에서는 그래도 프로페셔널이 아닐까? 그런데 왜 저런 이야기를 지루한줄 모르고 늘어 놓고 있는 것일까? 그의 팬들은 그의 '토크 콘서트'를 보기 위해서 모이는걸까? 아니면, 내가 이상한걸까? 나는 지금도 가수가 이상한것인지 그걸 이상하게 보는 내가 이상한 것인지 잘 알수가 없다. 원래 개인 재즈콘서트 분위기가 저런 것인지.
어쨌거나 그래서 내가 생각을 정리해봤는데, 내가 '무대'나 '강단'에서 사람들에게 어떤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할때, 나는 절대로 개인의 뒤숭숭한 개인사나 울적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런 실수를 해서는 안되겠다. 평소에도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하여 주의를 하긴 하는데, 그래도 더욱 주의를 해야겠다.
노래를 참 잘 하시던데, 관객의 시선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의상이나, 재즈 콘서트를 '재미없는 토크 콘서트'로 만들어버리는 무대매너를 개선하시면 더 좋은 무대를 만드실수 있을 것이다.
함께 연주하신 피아노, 기타, 베이스, 드럼 연주자분들 연주 훌륭했다. (말없이 이분들의 개인 연주 시간을 좀더 늘렸다면 좋았을것 같다.)
연령적으로 내 또래인 감독이라서일까 - 배경 노래인 정훈희의 '안개' 와 무심코 지나가는 '트윈폴리오'라는 송창식-윤형주 듀엣의 이름등 노스탤지어 대사와 색감이 나를 푹 잠기게 했다. 원래 유명한 그의 미장센이 특히 이번 영화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나비야,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내게 가져다줘' 라고 번역된 그녀의 진짜 말은 '심장'이 아니고 '마음'이었다고 그녀가 정정하고 -이와 비슷한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이 - 소통의 '애매함'을 여실히 보여주는데 언어학 적인 측면에서 분석해도 꽤 흥미로운 영화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어쩌면 언어학자는 언어학자대로, 철학자들은 철학자들대로, 심리학자들은 심리학자들대로, 영화비평가들은 그들 나름대로, 각자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이 영화를 들여다보며 곰씹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그냥 심심풀이로 '상받았다니 가서 봐줘야지. 우울한 영화 같던데, 기운이나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갔다가 - 영화에 깊이 깊이 푹 잠겨 있다가 나왔다. 송창식과 정훈희가 영화의 화룡점정이었다고 해도 되려나. 이들의 노래가 없었다면 영화의 완결미가 없었을것 같다.
박찬욱 감독 - 이것이 그의 영화의 '정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앞으로도 그는 좋은 영화를 만들어내겠지만, 이 영화 만큼의 깊이와 울림이 있는 작품을 또 탄생시킬수 있을까?
그런데 영화보는 내내 김승옥씨의 '무진기행'을 떠올렸다. 김승옥씨가 이영화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전혀 다른 스토리인데 어딘가 쌍둥이처럼 닮아 보인다는 말이지.
사랑에 대한 놀라운, 뜻밖의,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해석. 아...영화가 극장에서 내려지기 전에 또 가서 보고 싶어진다.
아주 오랫만에 메가박스에서 연달아 이틀에 걸쳐 영화 '탑건, 메브릭'과 한국영화 '비상선언'을 보았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두 영화 모두 '비행기' 소재의 작품들이었다.
'탑건'은 보는 내내 눈이 시원하고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한 느낌이 지배해서, 영화 관람료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비상선언'은 조조할인으로 봤고, 역시 불만은 없다. 탑건이 시원한 맛에 봤다면 '비상선언'에는 어딘가 블랙코미디 같은 사회비판적인 구석도 있어서, 그리고 뭐 재난 스릴러이므로 아슬아슬 속이 타면서도 - 한국식 신파조가 있는것으로 봐서 해피엔딩으로 끝나주겠지 했다. 송강호, 이병헌이 나오는 영화이니 믿고 봐도 된다고 생각했고, 내가 이름을 잘 모르지만 정말 빛나는 조연들도 나와줘서 나로서는 만족한다.
'탑건'은 내게는 - 나와 동갑쟁이인 탐크루즈가 늙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맛이 있었던 '노스텔지어' 영화 였고, '비상선언'은 장거리 비행 여행을 자주 하는 내게는 꽤나 실감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비행기를 탈때마다 나는 '혹시 내가 사고로 죽게되면...' 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한다. 뭐 죽으면 죽는거지...
나는 매일 - 오늘이 마지막인것처럼 산다. 아, 이렇게 사는거 참 힘든 일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들이 이렇게 살지 않을까?
"광클릭 전쟁이 날것 같아요. 저처럼 서툰 사람은 등록도 못 할것 같아요" - 어느 학생이 말씀하셨다. "주말이 아니고 평일로 잡혀서, 직장 다니시는 분은 참여가 힘드시겠네요" 라고 내가 염려를 하자 직장 때문에 늘 조금씩 지각하면서도 결석하지 않고 열심히 과정을 이수하고 계시는 청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월차 써야죠. 놓칠 수는없죠." 중국어문학 과정 종강식에 축하하러 갔을때 학생들이 보여준 반응. 내가 예상했던 것 보다 뜨거운 반응이다.
책임감을 막중하게 느끼고 - 현장 답사를 나갔는데, 현장에 도착하여 나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한국에서 활동한지 6년이 넘어가는데 왜 여태 여기 올 생각을 안했던고?" 나스스로가 의아할 지경이었다. 어쩌면, 홍보가 미흡했던것 아닐까? 아니면 관계자들이 '사람이 너무 많이 올까봐 홍보를 일부러 안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상상도 하게 된다. 그 정도로 백남준 아트센터는 아트센터 자체의 기능 외에 매력적인 요소가 많았는데, 그곳에 운전해서 가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 '위치 (location)'이 월등하다.
아트센터 건물과 외형 디자인이 독특하고 아름답다. 건물은 네모로 각이 져 있는데, 건물을 둘러싼 작은 돌맹이들이 길과 담을 곡선으로 흐른다. 그 곡선의 돌길과 담이 곡선의 (끝이 없어 보이는) 숲길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고속도로를 빠져 나왔을때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일단 하이웨이를 타고 가면 막힘없이 목적지까지 갈수 있다.
바로 이웃에, 잠깐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경기도 어린이 박물관과 경기도 박물관이 있다.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구상을 한걸까? 서초동 예술의 전당처럼, 경기도 박물관들의 클러스터 라고 할만하다.)
백남준 아트의 영감에 대해서는 아예 아무것도 적어선 안될것 같다. 그냥 머릿/가슴속에 간직을 해야지. 적으려면 이 휘저어진 생각들이 가라앉을 시간이 필요하다.
어제 오전에 잠깐 다녀왔는데, 잠을 설치고 있다. 눈앞에 백남준의 작품들이 오락가락한다. 가슴에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잔잔한 행복감이 떠나지 않는다. 마치 마약에 취한듯 잠깐 바람쐬고 구경한 예술에 취했다.
백남준아트센터는 백남준은 '백남준이 오래 사는집'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나도 오래오래 시간을 보내고 싶어졌다.
혼자서라도 미국미술사 공부를 한 보람을 느낀다. 혼자서 공부해서 전문가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는 가늠이 되고 전문가를 찾아 갈 줄은 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런 깜짝 놀랄만한 '아트 필드트립'을 기획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기획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아트가 된다. (왜냐하면 머릿속에 아트가 둥둥떠다니니까). 기획을 하면 - 나머지는 교육은 전문가에게 부탁을 드리면 된다.
고단한 삶 속에서 잠신 '반짝'하고 행복했던 날. 나는 오랫동안, 내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다. 살아 숨쉬고 있지만, 나는 이미 죽은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신촌에서 지내는 동안. 백남준의 빙글빙글 돌아가는 화면들이 내게 말했다 - 너는 살아있어. 그래 나는 아직 살아있다. 백남준 아저씨 땡큐!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내가 미국미술을 개인 프로젝트로 정하여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더라? 2009년쯤이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십 몇년이 흘렀고, 나의 미국미술 탐구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중지된것처럼 보인다. 전에는 빠삭하게 외우고 남들에게 설명할수 있던 것들도 지금은 '나도 기억이 안나고, 처음부터 알지도 못했던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가을에 나는 백남준을 만나러 간다. 경기도 용인에 백남준 아트홀이 있고, 나는 학생들을 이끌고 그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나는 백남준에 대한 강의를 하려한다. 물론 아트홀에 학예사들이 있으니 전문적인 강의는 그분들이 맡으시겠지만 - 프로그램을 만들어낸 나 역시 준비를 하기로 한다. 그래서 지금부터 슬슬, 그에 대한 공부를 다시 하고 강의 자료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나는 '예술'에 대하여 논할 정도로 전문가가 아니다. 잘 안다. 나는 예술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백남준의 신화를 얘기하게 될 것이다. 한국땅에서 태어나 어느 시점에 세계를 뒤 흔든 예술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미국인이 된 그의 작품에 숨어있던 한국인 유전자의 코드들을. 그를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 혼자 공부한 것이 아주 헛된 일은 아니었어. 이 수업을 위해서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미국의 미술관들을 쏘다니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라.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계획을 세우셨던 것인지 가끔 궁금해지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매일 책을 내다 버렸다. 장을 보러 갈때 끌고 나가는 바퀴달린 박스 - 그 플라스틱 박스 가득히 집에 쌓여 있는 책을 담아, 재활용폐기장에 내다 놓았다. 중고서점에 갖다 주면 돈을 좀 받겠지. 인근 도서관에서는 책을 기증해 달라는 현수막을 걸어 놓았지만, 내게는 책을 기증하러 돌아다닐 마음의 여유가 없다. 나는 극도로 피로하다. 기증하고 남과 나누고 이런 과정조차 내게는 힘드는 일이다. 그래서 그냥 재활용폐기장에 갖다 쌓아 놓았다. 많은 양이 빠져나가자 비좁던 거실이 다수 숨통이 트인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읽고 쌓아둔 책이 아니라, 그것이 빠져나간 빈 공간을 차지하는 '신선한 공기.' 어느날 재활용장 관리하시는 아저씨가 내가 내다 놓은 책에 대하여 뭐라고 불만을 표시한다. 폐지보다 처리하기가 어렵다고 툴툴댄다. 그 분과 상대하기도 귀챦아서 책을 내다 버리는 일을 멈춘다.
나는 매일 장을보러 갈때 끌고 나가는 바퀴달린 박스, 그 박스가득 헌 옷을, 아까워서 버리지 않고 쌓아두던 플라스틱 반찬통들, 굴러다니는 선물받은 텀블러등, 집안을 채우고 있는 물건들을 담아서 내다 버린다. 쓰레기 역시 발생하는 즉시 내다 버린다. 신촌살이 하는 동안 냉장고 안에서 서서히 곰팡이 슬어가던 것들도 이제 대체로 정리되었다. 그럼에도 매일 냉장고에서 폐기물들을 찾아낸다. 나를 기다리다 썩어버린 것들. 미안. 네 잘못이 아니다. 내가 집에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안녕 잘가라. 뭔가 집에서 끄집어 내다 내다버릴때 나는 한결 내 삶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이것도 스트레스 해소에 아주 좋은 것 같다. '도대체 이 많은 물건들을 왜 쌓아 놓은 것일까? 아무리 아무리 내다 버려도 왜 집은 여전히 비좁고 답답한가? 내가 정리를 잘 못해서인가?' 이런 생각에 빠지기도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나는 오늘도 뭘 내가 버릴것인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오늘은 기도하다 말고 연구실을 둘러본다. '내 저것들을 다 내다 버리리라' - 하며 몇가지 명백히 버려야 할 것들을 가늠해낸다.
내 집이 텅 빌때까지, 내 연구실이 텅 빌때까지, 나는 매일 뭔가 정리하여 내다 버릴 것이다. 그자리를 헛헛한 공기와, 그리움과, 기도로 채우고 나는 어느날 증발 되기를 바란다. (죽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아침이슬처럼 이 지상에서 사라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집을, 나의 연구실의 '기도의 집'으로 만들 생각에 잠겨있다.
Flipped. 케이블 tv 어딘가에서 이 영화를 방송해 주었다. 예고편도 봤기 때문에 기대를 안고 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그 날 너무 피곤해서 영화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잠이 들고 말았다. 영화를 놓치고 말았다. 내용이 궁금하여 검색을 해보니 원작 소설이 먼저 있었다고 하길래, 청소년 소설인 원작 소설을 ebook 으로 사서 단숨에 읽었다.
오호! 이렇게 쉽게 잘 읽히면서 재미있고 좋은 책이 있었다니!
책을 읽으면서 - 미국 남부에서 중학생 시절을 보낸 두 아들을 생각했다. 아들들이 보고 싶다. 하지만 올 여름엔 내가 자리를 뜰수가 없구나. 그래서 조금 슬프다. 한국에서 6월 7월을 보내기는 15년만이다. 그 6월이 고단하게 지나갔고 - 7월에는 쉬고 싶다.
* 책을 읽는 내내, 남자애 아버지 역할을 Steve Busemi 가 하면 잘 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 캐랙터 정말 특이하고 귀여웠는데 내 머릿속에서는 스티브 부세미의 표정이나 목소리가 뱅뱅 돌았었다. (영화 보고 싶다).
Ebook 으로 살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아무 생각없이 그냥 검색을 하다가 순전히 '제목'과 초록색 북커버 이미지에 꽂혀서 주문하여 읽은 책. '여름의 서정'적인 그런 소설이 아닐까 상상하고 골랐으므로 - 처음에는 '아, 앗. 이게 아닌데...웬 건축 이야기?' 이런 뜨악한 기분이 들었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고요한 늪'같은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면서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손에서 뗄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론은 - 책 제목과 북커버 이미지가 나를 속이지 않았다. '부합한다'는 것이다.
나의 고난의 시간을 위로해 준 책.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가 70% 된다는 느낌. 그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는 나의 상상속에서 빙글빙글 맴돌것이다. 바로 그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건축가가 정성껏 집을 지어놓았다 해도, 그 집을 완성시키는 것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일 것이다. 소설가가 정성껏 쓴 소설 역시, 그 소설을 완성시키는 것은 '독자의 상상력'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소설에 등장한 인물들이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서 뭔가 내게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한다. 가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리라.
신촌살이가 이어지고 있다. 새벽에 문득, 신촌 오거리 간이 매대에서 판매하는 '길거리 토스트'가 먹고 싶어져서, 새벽길을 슬슬 걸어나갔다. 창천동 감리교회 앞을 지나, 늙수구레한 아주머니가 졸고 앉아있는 '길거리 토스트' 매대를 지나서 신촌오거리로 간다. 졸고 앉아있는 아주머니가 만들어주는 토스트는 어딘가 유통기한이 지난 것으로 기름냄새 절은 것 같은 그런 맛이 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새벽에 뭔가 신선하고 따끈한 것을 먹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도 장사를 하려면 혹은 뭔가 세상에서 일을 하려면 늙수구레한 아주머니로 졸다가는 안되겠구나 라는 각성과 함께. 늙는것도 서럽고, 기운이 없어 졸리는 것도 서럽고, 우리는 그렇게 이울어가는 것이리라. 내일은 저 아주머니의 토스트를 하나 사리라. 맛이 없으면 버릴 각오를 하고.)
일반 계란 토스트는 2500원. 치즈 토스트는 3000원. 인스턴트커피 500원. 치즈 토스트와 커피를 주문하고 사천원을 냈는데 거스름돈 오백원을 줄 생각을 안한다. '뭐지?' 의아해하다가 그냥 따끈한 토스트와 커피를 받아가지고 길거리 계단에 앉는다. 오백원 받으나 안받으나 내 인생이 달라져? 신경쓰지 말자.
토스트는 신선하고 따끈하고 맛있고, 커피도 맛있다. 토스트를 사가지고 가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길거리에 앉아 따끈한 토스트를 먹으며 - 주위를 둘러보며 내가 여행자 같다는 느낌이 든다. 뉴욕 거리에서 닭고기 꼬치를 우물거리며 돌아보는 세상이나 신촌 오거리에서 입에 맞는 토스트를 달게 먹으며 내다보는 세상이나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맨해턴이나 신촌이나, 참 비슷하다. 나는 여행을 하는 중이다.
편의점에서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하고, 요구르트 한개, 사과 한개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공용 정수기에서 나오는 얼음을 띄우면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된다. 기분이 좋아진다. 연세대 뒷산이 푸르다.
인간은 (혹은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완전히 절망하거나 완전히 기뻐하거나 하기는 힘든 존재인듯 하다. 암담한 상황속에서도 나는 평안하다. 그리고 여행자처럼 내가 처해진 상황이나 주변 상황들을 관찰한다. 그러면 재미있고 유쾌한 구석들이 보인다. 새벽 신촌 오거리에서 나는 맨해턴을 걷는다. 내가 직접 만들어먹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씻은 사과 (씻지 않고 바로 먹을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이런 것들이 나의 삶을 충분히 유쾌하게 만들어준다. 돌아보면 암담한 상황이 오기 전, 돌아보면 걱정 근심거리가 전혀 없던 시절에도 나는 인생이 재미없었고, 불만이 많았고 그랬다. 그때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지 않았다. 지금 나는 소용돌이 속에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리 암담하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나는 지금 여행중이다. 낯선 시간, 낯선 공간, 낯선 상황 이런 것들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친밀해지고. 아마도 이런 식으로 나의 여행은 계속 되겠지. 내가 어디로 흐르건 나는 흘러갈 것이다.
시민을 위한 평생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달라는 요청을 받아서, 봄학기부터 시범적으로 운영을 해보고 있다. 정해진 학점을 이수하면 명예학위증까지 나오는 프로그램이다. 1년간 진행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세부 강의 일정을 짜는 가운데, 나도 그 중에서 한과목을 현재 진행하고 있다. 역시 프로그램 기획자가 직접 수업을 진행해봐야, 시민들의 희망사항이나 수업에 대한 기대, 태도, 문제점 등을 세밀하게 파악하게 된다. 10대 후반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시민들이 모여서 듣는 대학 수업. 실제로 내가 수업중에 가르치는 동일한 자료를 가지고 수업을 한다. 실제 대학과 차이가 있다면 가르치는 내용은 동일하지만, 시험이나 과제의 비중에서 차이가 난다.
어느날 내 또래의 '가장'이신 중년 학생이 내게 질문을 했다 -"그런데, 이거 수료하면 수료증 나오는데 그 수료증을 어디다 써먹을수 있죠?" 좋은 질문이다. 내가 가르치는 과정을 수료했을때 무엇을 얻을수 있는가? 그 수료증이 어딘가에 내밀만한 실용성이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나는 이런 질문을 좋아한다. 구체적으로 어디다 써먹을지를 묻는 질문을 나는 좋아한다. (내 개인 취향이다.)
그래서 나는 답해줬다:
"제가요, 버지니아에 있을때, 어느 조그만 대학에서 교수로 일을 할 때 인데요. 월급도 신통치 않고, 전망도 흐릿하고, 한마디로 앞날이 막막하던 때가 있었거든요. 그 때 제가 그냥 지역에서 제공하는 '간병사' 교육을 받았어요. 그 교육을 이수하고 간단한 시험을 통과하면 '버지니아주'에서 제공하는 '간병사 자격증'이 나오거든요. 그냥 파트타임으로 간병사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도 주고 그러면 내 삶이 조금 더 의미가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한거죠. 한편으로는 그 조그만 대학에서 벗어나 큰 대학에서 제대로 대우받고 교수를 하겠다는 희망으로 끊임없이 미국 전역의 대학에 이력서를 보내고 있었지요. 한편으로는 대학에 자리를 알아보면서 한편으로는 파트타임으로 뭔가 할만한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제가 그 간병사 자격증으로 뭘 했을까요? 저는 간병사로 일을 해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간병사 자격증이 제게 큼직한 대학의 교수자리를 열어 주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된거냐구요? 제가 미국 전역의 주립대에 뿌린 이력서의 말미에, '특기사항'에 '버지니아주 간병사 자격증'이 적혀 있었는데 - 하필 바로 그것을 눈여겨 본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서는 '영어교육을 전공한 박사급 후보들 중에서 특히 간호사와 의사들에게 영어를 교육 할 수 있는 후보자가 필요했던 것인데, 제가 간병사 자격증이 있다니까 인터뷰를 하면서 "그러면 너는 기초적인 메디컬 영어를 잘 알고, 그것을 가르칠수 있겠니?" 하고 묻는 것입니다. 나는 무조건 'Of course!'하고 확답을 했습니다. 최소한 나는 four vital signs 라는둥 뭐, 극히 기초적인 '병원 용어'를 설명할 수 있으며, 필요하면 관련 자료를 찾아서 공부하고 가르칠 역량이 된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나는 아무튼 전문직 간호사들에게서 바로 그 교육을 받았으므로. 그리하여, 저의 아주 특별한 (별것도 아니지만, 그 영역에서는 독보적이라 할수 있는) 자격증 한가지로 인해, 다른 영어교육전공 박사들과 차이를 보였고, 그 덕분에 꿈에 그리던 주립대에 말뚝을 박게 되었지요.
자 그러니, 아무나 그냥 대충 60시간 정도 수업 들으면 딸 수 있는 '간병사 자격증' 그 별것도 아닌 것이 - 저의 꿈을 이루게 해주리라고는 저 자신도 상상도 못했다는 것이지요. 저도 그게 그렇게 될 줄을 몰랐어요. 그냥 막연히 뭔가를 배우고 싶었을 뿐.
이것이 저의 대답입니다. 제가 제공하는 과정은 '자격증' 과정도 아니고, 딱히 내세울 것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어떤 학생에게 이 과정은 디딤돌이 되거나 도약대가 될 지도 모르지요. 자, 이걸 어떻게 요리 할지는 선생님께서 직접 고민을 하셔야 하겠습니다."
사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그냥 지나쳤는데 - 나중에 회의 하는 자리에서 이 프로그램 얘기를 하다가 - 회의 참석자 누군가가 비슷한 질문을 하길래 -- 내가 수업시간에 그런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고 이야기를 하니 회의 참석하고 나가시던 어떤 분이 "그 간병사 이야기 말이에요. 놀라운 얘기네요. 늘 뵐때마다 저를 깜짝깜짝 놀래키시네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하시는거다. 그래서..그게 어떤 사람을 놀래킬만한 에피소드였던가? 그럴수도 있으려나? 생각하며 몇자 끄적.
요즘 유명한 사람의 부인 혹은 이름이 알려진 기혼여성에 대하여 '아무개씨'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아무개 여사님'과 '아무개 씨'라는 호칭 중에서 '아무개씨'라고 부르면 인권에 저해 된다는 주장을 하는 시민 단체마저 등장했다. 내가 살다가 이런 논란은 생전 처음 겪어서 흥미를 가지고 상황을 관조하고 있는 가운데, 내가 문제의 당사자라면 나는 '아무개씨'쪽을 환연하겠다.
우선 나는 그 문제의 '여사'라는 어휘가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궁금하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것이 아닐까 추측만 한다. (어딘가에서 왔겠지, 순수 한국어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여사'라는 호칭이 맘에 안든다. 여사, 여교수, 여의사, 여사장, 여류 시인, 여류 소설가 이런 '여'의 공통점은 어떤 사람을 일단 '여자'로 묶어 놓는다는 것이다. 사람이기 이전에 '여자'다. 이런 어휘나 호칭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거나 올바르지 못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일단 '여사'라는 호칭이 거슬린다.
남편의 지인 중에 유학 동기가 한분 계신다. 남편을 통해서 알게 된 분인데, 우리가 한때 같은 대학에 소속해 있었고, 먼 타국 생활을 하는 동안 같은 도시에서, 같은 캠퍼스에서 시간을 보냈다. 뭐 그것 뿐이다. 친하지도 않았고, 그냥 아는 사이 정도였으며 몇년 사이에 두세번 조우했을 뿐이다. 그냥 어쩌다 스치면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는 정도. 그분도 모대학 교수가 되었고, 나도 교수가 되었다. 교수 사회에서는 서로 '아무개 교수님'이라고 불러준다. 어느날 이분이 연구하는 일로 내게 뭔가 물어볼것이 있어서 연락을 취하셨는데 꼬박꼬박 내게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우리의 대화 주제가 연구자들 사이에서 나누는 연구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분은 내게 꼬박꼬박 '사모님'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나는 그 '사모님'이라는 경칭이 내 몸에 붙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왜냐하면 - 나는 그냥 내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길 바랬기 때문이다. '차라리 '아줌마'라고 불러라. 차라리 그게 낫겠다. 내 이름을 모르면 그냥 평범하게 '아주머니, 아줌마'라고 불러라' 말하자면 이런 입장이었다. '사모님'이란 어휘에는 '아무개의 부인'이라는 뉘앙스가 강한데 나는 '아무개의 부인'으로 칭해지는 것이 싫다. 나는 누구 부인 이전에 나다. 나는 누구 딸이기 이전에 나다. 나는 누구 엄마이기 이전에 그냥 나다. 나는 나다. 아무튼 몇차례 전화 통화를 하거나, 내 연구실까지 방문하여 나와 의논을 하는 동안 그는 내게 꼬박꼬박 '사모님'이라는 경칭을 썼는데 - 나는 그 '사모님'소리를 들을 때마다 점점 화가 났다. 남편의 지인만 아니었으면 벌써 사단이 났을것이로되, 남편 체면 생각해서 듣기 싫은 호칭을 꾹꾹 참고 들어주었다. 그러다가 남편에게 지나는 말로 한마디 했다 --"당신 그 후배 그분 말야, 꼬박꼬박 나보고 사모님이래. 아유 기분나빠..." 남편은 내가 뭘 기분나빠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그분에게 내가 기분나빠하고 있다고 알렸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분 설명으로는 '사모님' 호칭이 상대방을 가장 높여서 부르는 호칭이라서 내게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는 여성에 대한 극존칭이 '사모님'인 모양이었다. 그 후로 그분은 내게 아무런 호칭을 쓰지 않으면서 대화를 한다. 가령 그 전에 "사모님 안녕하세요!"라고 했다면, 이제는 그냥 "안녕하세요!" 한다. 그 '사모님' 소리 안들어서 그나마 나도 안도했다.
'여사님'이 '사모님'과 다른 한가지는 '사모님'에게 '남편'이 필요하다면 '여사님'은 홀로 여사일수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래도 '김여사 운전'의 예처럼 과연 '여사'가 존칭인지는 애매하다. 요즘 존칭이 대세라서 '여사님!'하고 부르는 상황이 다양하다. 집에 청소하러 와 주시는 도우미님게게도 '여사님'이고 뭐 그냥 전에 '아줌마'라고 부르는 상황에서 요즘은 '여사님'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그 여사라는 호칭이 정말 존칭이기나 한지 나는 헛갈린다.
그래서, 나는 '아무개씨'라는 호칭을 선호한다. "여사님", "사모님" 이런 이름 말고 그냥 "아무개씨", "아무개님" 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나를 얕보기 위해서 "아무개씨"라고 부른대도 나는 괜챦다. 그게 원래 내 이름이니까 말이다.
일주일 내내 창가에서 연세대 교정을 내려다 봤다. 정문에서부터 백양로, 독수리상을 지나 주욱 올라가다 저 낡고 오래된 건물 앞에서 왼쪽으로 구부러져 올라가는 길가에 '윤동주 시비'가 서 있고,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내가 드나들던 건물. 20년 전 봄에 나는 저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도 '청춘'이라고 말하기엔 나는 내가 너무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늘 내가 뭔가 새로 하기엔 나이를 많이 먹어버렸다고 상상했었다. 지금도 나는 내가 지금 '첼로'를 배우기엔 너무 나이가 많다고 생각한다. 첼로는 갖고 다니기에도 너무 벅차게 크고...(하지만 피아노보다 훨씬 작고, 조금 크지만 갖고 다니는데도 별 문제가 없지 않은가?)
창밖의 중앙도서관 앞 길을 내려다보면서 개미만하게 작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내려다보면서 "저 속에 20년전의 나도 있겠지. 나는 걸어가고 있겠지"하고 상상을 하기도 한다.
사람이 '청춘'을 말할때, 그는 이미 청춘이 아니다. 조망할때 그 때 모든 것이 뚜렷해진다. 전에는 병원에 들렀다가 '암병동' 간판만 봐도 뭐랄까 어린시절 '장례식장' 혹은 '장의사' 간판을 발견했을때처럼 간담이 서늘해지고 뭔가 무시무시한, '재수없는' 느낌이 들어서 아예 그리 시선도 돌리지 않았었는데 내가 그 '소굴'에 있다니 하하하. 있어보니 별게 아니더라... 해외여행보다 값진 경험이다. 하느님께서는 나에 대하여 여러가지 계획을 갖고 계심이 분명하다. 나는 매일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매일 연세대학교 교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늙그막에 찾아온 아름다운 시간과 풍경이었다. 하느님은 어쩌면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 주시려하시는지.
(일주일 전 사진이다. 그 후에 눈이 한 차례 펑펑 쏟아졌고, 그리고나서 봄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느 단체에서 내게 '장학생' 한명을 추천해 달라는 의뢰가 있었다. 성적이나 뭐 별다른 조건은 없고, 심지어 휴학중인 학생이어도 상관이 없다고 했다. 한가지 조건은 '공부하고자 하나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책값이라도 도움이 필요한 대학생'이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내가 추천하면 그냥 무조건 학생에게 장학금이 갈 수 있다고 했다.
내 머릿속에 번개치듯 떠오르는 한 학생이 있었다. 학기 내내 너무 힘들어보였다. 공부도 열심히, 공부 이외의 활동도 열심히. 봉사 활동도 열심히, 게다가 신앙생활도 타의 모범이 되게 열심히, 학비를 벌기 위하여 시간제 일도 열심히 - 모든 것을 성실하게, 열심히 꾸려나가느라 그 학생은 가끔 위경련을 일으켰고, 학기말에 번아웃을 겪기도 하였다. 그래서 막판에 다소 나를 실망시키기도 했으나 - 나는 그것이 그 학생의 불성실 때문이라기보다 너무 힘에 부치게 뭐든 열심히 하려는 그의 여러가지 선택들이 딱하게 느껴져 크게 실망하거나 질책조차 하지 않았다. 그 학생은 학기말에 실수한 것이 미안했던지 개학이 되어도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그 학생을 생각했다.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책값이라도 도움이 필요한 대학생. 바로 그 학생이었다. 나와 긴밀하게 일하면서 내 일을 많이 도왔던 학생이라 카톡으로도 연결되어 있었기에, 카톡을 뒤져보았다. 그 학생이 보이지 않았다. 카톡 대화 기록을 뒤져봐도 그 학생이 보이지 않았다. 카톡을 닫은 것일까? 아무튼 카톡에서 그 학생이 사라졌다. 전화를 걸수도 있지만 - 나는 학생들과 전화통화를 하지 않는다. 이메일을 뒤져보았다. 겨울 방학 동안에 내게 보낸 이메일이 한통 있었다. 학기말에 나를 실망시킨 것에 사죄하며 - 잠시 학교를 떠난다는 (휴학) 메시지와 함께, 그래도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주시면 곁에서 도와드리고 싶다는 예의바른 메일이었다. 그 당시에도 나는 약간 화가 나있던 중이라 이메일을 자세히 보지 않고 그냥 넘겨버렸기 때문에 그 학생이 휴학을 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휴학 했구나. 그래서 이 친구가 개강을 했는데도 내 앞에 안보였던것이구나. 학교에 있었다면 반드시 들러서 방긋거리며 인사를 했을텐데.
카톡을 뒤져본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이름이 지워진' 누군가와의 대화 기록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열심히 내 지시사항을 듣고 일 처리 결과를 알려오던 우리들만의 대화였는데 - 대화 상대가 그냥 이름 없는 모르는 사람으로 남아있다. 카톡을 지웠거나 아니면 나를 차단한건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는 긴밀한 대화 채널에서 스스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그 학생에게 연락하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추천 대상을 향한다. 네가 그자리에 그대로 있기만 했어도, 나는 너를 추천했을텐데. 너의 수고와 고민과 성실함을 너무나 잘 아니까. 너는 아주 훌륭한 학생인데.
그 학생과 내가 카톡으로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업무를 해결하기 위하여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었다는 것은 - 사실 별게 아닐수도 있다. 그 학생에게는 어쩌면 그냥 내가 별로 의미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찌 생각하면 - 일대일로 나와 긴밀한 소통 체계를 갖고 있던 그 학생에게 그 소통 채널은 '특권'이었을수도 있다. 나와 연결되는 특권. 뭔가 기회가 오면 내가 제일먼저 그 기회를 줄수 있는. (비록 내가 별것 없는 인생이긴 하지만.) 그런데 그 특권을 그 학생 스스로 포기했거나, 버렸거나, 차단했다.
나는 문득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했다.
내가 기도를 통하여, 명상을 통하여, 상념을 통하여, 시도 때도 없이 한숨 지으며 '주여...' 혼자 중얼거림을 통하여 하나님을 부를때 주님은 분명 거기 계신다. 설령 주님이 아무 말씀 안하시고, 내 메시지를 '씹'는 것 처럼 보일지라도, 여하튼 나의 메시지는 계속해서 주님께 가서 쌓인다. 그리고 주님도 알고 계신다, 내가 끝없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내가 주님을 잊거나, 차단하거나, 포기하거나, 아주 뒤돌아서 떠나버리면 - 그것은 내가 스스로 주님과 소통하는 채널을 포기하는 것이고, 주님과 소통하는 '특권'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내가 침묵하고 돌아 앉아있을때에도 - 주님은 문득 내 생각을 하시고 '요즘 이 아이가 왜 이렇게 조용한가? 어디가 아픈가?'하고 돌아보시게 될지도 모른다.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찬송의 노래를 부르고, '어디 계신가요? 한말씀만 하소서!'하고 내가 그를 부를때, 하나님은 들으신다. 나는 그 특권을 포기하면 안된다.
나는 이런 생각들을 갑자기 사라진 학생의 빈 카톡 계정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 하게 되었다.
지난 주 목요일에 원탁형 회의실에서 여러 대학 관계자들 (열명쯤)이 모여서 한시간 동안 회의를 했는데 - 회의 참석자 중에서 한명이 코비드 양성 판정을 받았다고 일요일 오후에 연락이 왔다.
내가 부스터샷까지 맞은 상태이기 때문에, 우선 자가 검사키트로 검사를 시행하여 음성이 나오면 일상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고, 이틀 후에 다시 자가검사를 시행하여 음성이 나오면 안심해도 좋다는 안내를 받았다. 동네 편의점이나 약국에 가면 검사 키트를 구할수 있다는 안내에 따라서 편의점에 가서 검사키트 두개를 사왔다 (일인당 5매까지 살수 있다고 하는데, 진열대에 세개가 남아있어서 두개만 샀다. 누군가 나처럼 급히 필요하면 가져갈수 있도록). 결과는 음성. 결과 사진을 찍어서 담당자에게 증거로 보내고 - 나는 조심하며 일상을 이어간다.
(내가 밀접접촉자로 분류가 되었어도 크게 근심하지 않은 이유는 - 그 분은 내게서 가장 먼 위치에 - 내 옆에 옆에, 마주보지 않는 곳에 - 있었고, 우리들은 모두 94마스크를 단단히 착용하고 있었고 - 나는 그분과 회의중에 멀리서도 한마디도 직접 나눈바 없이 회의를 마치기 전에 다른 회의를 위하여 현장에서 빠져 나간 상황이었다. 밀접 접촉자로 분류되긴 하나, 이는 마스크 쓰고 길가다가 3미터 저 만치 지나간 사람이 양성 결과 나온 것과 비슷한 모양이다.) 그분께 '아무쪼록 쾌차하시길 빕니다' 라는 메시지를 보내 위로해 드렸다.
오늘 개강이다. 봄학기 첫날 - 대면 수업이다. 2년만에 교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이다. 신입생들. 그들에게는 오늘이 대학생활의 첫 날이다. 비록 음성 결과가 나왔지만, 최대한 학생들과 거리를 유지하고, 돌아다니며 접촉면을 늘리는 일 없이 혼자서 섬처러 한군데 붙박혀서 수업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연구실 문에도 '밀접 접촉자.노크하지 마시오. 위험하오' 이런 메시지를 붙여놨다. 이렇게 해 놓고 보니,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아서 일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진다. (원래, 내 연구실은 온동네 사람들이 드나드는 참새 방갓같 같은 곳이다. 동료들은 이런 저런 구실로 나를 '즐겨찾기'로 지정해 놓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저는 두려움없이 상황을 맞이하고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감사합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대로 저는 흘러갈것이오니 성령께서 저를 인도하셔야만 합니다. 아멘.'
자가격리에서 풀려나자마자 집으로 가는 대신에 내가 향한 곳은 '보건소'였다. 지난달 1월부터 '해외 코비드 백신 접종자 등록'에 관한 문건이 웹에 흘러다니기 시작했고, 연수구 보건소 웹페이지에도 이와 관련된 상세한 안내문이 올라왔다. 공항에서 입국 할때도 누군가가 '보건소에서 백신 접종 등록하세요' 하고 지나가는 말로 알려주기도 했다. 격리기간에 보건소에 전화해보니 담당공무원이 "네! 여권하고 신분증하고 백신 맞았다는 서류 갖고 오시면 됩니다!" 하고 매우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코로나 난리통이라 보건소는 출입도 매우 까다로워서, 점심시간에 도착했을때 입장이 안되었고 오후 1시까지 밖에서 기다렸다가 직원의 안내에 따라서 해당부서로 갈 수 있었다.
내가 제시한 것은 미국 CDC에서 백신 맞은 사람에게 주는 접종 기록 카드 (명함 만한 크기에 간호사가 손으로 백신 종류, 번호, 날짜를 쓴다), 여권, 그리고 운전면허증. 원래는 그냥 접종증명서와 여권만 가져오면 된다고 했는데 - 내가 창구에서 "운전면허증도 있어요" 하니까, "예, 그거 주시면 작업하기도 편해요" 하고 반겼다.
담당자가 내 서류를 전산시스템에 입력하는 사이에, 나는 창구에 안내된대로 COOV 앱을 다운받아 깔아놓았다. 담당자가 내가 깔아놓은 앱에 쓱싹쓱싹 몇가지 입력사항을 넣고, 이 모든 작업은 5분도 안되어 완료 되었다. 만세! 할렐루야! 담당자님 설명으로는 대체로 coov 를 다운받을줄 모르는 분들이 많고 그래서 자신이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려면 시간이 걸리는데 나는 그걸 미리 해 놓아서 자신이 하는 일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고.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서로 감사했다.
이 외에도 종이로 된 접종 증명 서류도 한장 떼어주면서 "이것 얼른 핸드폰으로 사진 찍어 놓으세요"하고 일러준다. "왜요?" 물으니, "종이서류도 갖고 계시고요. 만약에 종이 서류 잃어버리시면 사진서류를 이용하세요. 그리고 인터넷 안되는 곳에 출입할때 쿠브를 열수 없는 상황일때는 사진 찍어 놓은 서류를 내 보이시면 됩니다." 차~암, 친절하신 선생님이시다. 연수구 해외백신등록 담당자님 화이팅!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내가 너무너무 기뻐서 몇번이나 "감사합니다" 하니까 담당자도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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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이것 때문에 쌓인 울분과 한이 많았다. 내가 착하게 '나랏돈 들이지 않고' 미국 예산으로 밖에 나가서 백신 접종까지 모두 완료 했는데 나는 한국에서 돌아다닐때는 번번이 '백신 미 접종자'로 분류 되었다. 왜냐하면, 외국 접종자 등록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부터 해외 접종자 등록을 받아준다고 했지만 그것도 단서가 있었다. 외국에서 한국 영사관에 접종기록을 보내어 거기서 자가격리면제 서류를 받고 온 사람에 한해서만 등록을 받아줬다. 작년 여름에 나는 접중 이후 2주일 경과후에만 자가격리 면제 신청이 가능하다는 조항때문에 자가격리 면제 신청을 못하고, 그래서 격리 면제도 못받고 등록도 못하고 그랬다. 나로서는 참 답답한 상황이었다. 지난 10월에야 '장차 외국 백신자들 등록 시스템도 만들겠다'는 논의가 나왔고, 그것이 올해 1월에야 실현된 것이다.
정작 적법하게 등록하는데 5분도 안걸릴 일이었지만, 그 시스템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참 일각이 여삼추의 세월이었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피치못하게 해외를 들나들어야 하는 분들이 백신을 이중으로 맞고 그랬다. 외국에서 완료한 사람들이 한국에서도 불편하지 않기 위하여 (시스템에 입력되기 위하여) 그 백신을 또 맞은 것이다. 나도 그렇게 할까 고민도 많이 했는데 - 부작용을 예측하기 어려워 포기했었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 결과 이중접종 하지 않고 시스템에 들어가게 되었다.
과연 이 시스템이 해외에서 들어오는 외국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까? 그것은 나도 모르겠다. 일단 나는 한국국적이니까 아무 문제없이 쿠브 시스템을 사용할수 있다. 그런데 봄학기에 입국하는 내 동료 미국인들 (미국에서 백신 맞은)은 나와 똑같이 이것을 누릴수 있을까? 아니면 뭐 다른 경로를 통해서 같은 시스템을 누리게 될까? 그것은 일단 나로서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내가 '시스템'안에 적법하게 들어간 것에 대하여 감사한다.
* 내 주위 사람들은 모두 나라에서 지시하는대로 고분고분 백신을 맞으라는대로 맞았고 그래서 이 쿠브앱을 소지하고 있다. 내 남편도 이것을 갖고 있고 미국에 입국할때도 혹시나 그것 보자고 할까봐 영문판으로 열어서 언제든지 보여줄 준비를 했었다. (뭐 보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쿠브앱을 갖고 있는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이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혹은 '의당 가질수 있는' 무엇일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유에서건 남들처럼 접종을 완료하고도 이것을 가지지 못하고 '미접종자'로 분류되어 원귀가 되어 구천을 떠도는 나같은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매우 특별한, 아름다운, 인싸이더가 되는 열쇠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느 사회에난 인싸이더가 있고 아웃사이더가 있고, 때로는 한 개인이 동질적인 사회안에서 살면서도 시시각각으로 인싸-아웃싸의 파도를 타기도 한다. (아 이것은, 내가 이 주제로 뭔가 연구를 하고 싶어서 메모를 남긴다.)
15시간여의 비행을 마치고 인천 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여, 정해진 자가격리 숙소로 왔다. 지난 여름에 자가격리했던 동일한 장소이다.
Day 2, 2022년 2월 5일 (토) PCR 검사
마침 일출이 아름답다. 20층. 눈앞에 오이도 빨간 등대가 보이고, 대부도 능선이 한 눈에 담긴다.
오전 9시에 보건소에 도착하여 줄 서서 기다리다 PCR 검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도착일 포함 7박 8일간 지내다가 나가면 된다. 도착후 1회, 퇴소전 1회 이렇게 두차례 음성 판정을 받으면 다음주 금요일 12시 (정오)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Day 3, 2022년 2월 6일 (일) 주일
오전에 - 어제 받은 PCR 검사가 문자로 왔다. 음성이다.
자가격리자의 최고의 친구는 '쿠팡 프레시'가 아닐까. 도착하는 날 저녁에 '방울토마토,' '비비고 김치볶음 소포장 5개들이,' '떠먹는 요거트,' 와 '샴푸/린스'를 주문해 보았다. 새벽에 도착 메시지가 울렸다. '할렐루야!'을 외쳤다.
사실 이전의 3차례의 자가격리 기간에는 남편이 드나들며 내 생필품과 먹고 마실것,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조달해 주었으므로 갇혀 지낸다는 것 외에는 불편함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남편도 아이들 보러 함께 나갔다가 왔기 때문에 함께 자가격리 신세가 되었다. 원래는 한국에서 부스터샷까지 맞은 내국인은 하루만 자가격리 한다는 방침이었는데 2월 4일 부터 '예외 없이 모두 7박 8일 자가격리' 방침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 우리가 준비 할 틈이 없었다.
내가 스스로 챙긴것은 한국에서부터 짐에 챙겨 넣었던 라면 포트, 켈로그 즉석 오트밀, 홍차 등이었고, 미국집에서 떠나기 직전에 '밥그릇 두개'와 '숫가락' 두개를 챙긴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내게는 계획이 서 있었는데 쿠팡 프레시로 주문하면 꼭 필요한 것들은 조달이 될 것이라는 믿음. 역시 쿠팡은 나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오늘 나는 물과 사과, 즉석밥, 구운계란 등을 주문하였다. 이정도 있으면 불편하이 없다. 나는 배달음식은 주문하지 않는다. 편견 같은것은 없는데 이곳에서 살면서 음식 배달을 시켜본적이 없다. 그래서 배달앱도 설치도 안했고, 그냥 햅반, 오트밀, 라면, 과일, 게란 이런것만 먹어도 일주일 사는데 별로 지장이 없다.
나처럼 거의 의무적으로 일년에 두차례 이상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친구 한 명은 지난 여름에 미국에서 코비드 백신 2차를 완료하고 한국에 돌아온 후에 다시 한국의 코비드 백신 2차를 완료했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뉴스에 소개가 되기도 했다). 이유는, 한국에서 미국의 백신 완료자를 한국백신 완료자와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가을 오미크론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까지 잠시 동안 한국에서 백신 2차 완료한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들은 귀국후 자가격리가 면제가 되었다. 한국에서 백신 완료한 사람들이 누리는 일종의 특혜였다. 그러니까, 미국 백신이 인정을 못 받으니까, 그냥 한국 백신도 완료를 해버린 것이다. 나도 이렇게 할까 한참 고민했었다. 어쨌거나 나도 의무적으로 드나들어야 하는데 자유롭게 드나들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데 백신 사고도 일어나고 해서, 나도 어떤 부작용을 겪기도 했고 해서 나는 중복으로 백신 맞는 것을 포기했다. 그대신 자가격리 면제 서류를 꼼꼼히 챙겨서 미국에 있는 동안 한국영사관을 통해 격리 면제 신청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미크론이 터졌고, 영사관을 통한 격리면제 신청도 중지되었다. 그리고, 오미크론 사태가 더욱 심각해지자 한국 정부는 2월 4일부터 한국에서 부스터샷까지 맞은 사람이라도 무조건 해외에서 귀국하면 7박8일 자가격리를 하는 쪽으로 방침을 정했다. 그래서 남편이 자가격리를 하게 된 것인데 -- 남편은 난생처음 하는 자가격리를 이미 자가격리에 도가 튼 대 선배인 나와 함께 하는 것을 부담없이 받아들였다. 혼자 집에서 나를 기다리며 나를 챙기는것보다 함께 있는 편이 그에게는 더 편한듯 하다. 딱하게 된 것은 이중으로 백신을 맞은 분들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이중으로 백신을 맞았는데 - 그래도 자가격리를 해야만 한다. 억울하겠다...
Day 4, 2022년 2월 7일 (월) 광어회, 고등어구이, 명태회
저녁 뉴스에서 '자가격리 앱' 을 취소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언제부터 시행된다는 내용은 찾아 볼수가 없다. 나는 앱이 있건 없건 교과서대로 하는 편이므로, 내게는 별다른 변화가 없을것이다. 나는 하루에도 서너차례 오전 오후에 생각날때마다 자가격리 앱을 켜고 리포트를 하는 편이다 (심심하니까). 남편도 내가 할때마다 하도록 했는데 - 남편의 앱은 거의 십분마다 벨이 울리고 '격리장소를 이탈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떴다.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왜 자꾸 이런 메시지가 오는가? 신경이 쓰인 남편은 담당공무원에 여러차례 전화를 걸어가지고 '도무지 신경이 쓰여서 살수가 없다'고 호소를 했다. 앱을 지우고 다시 깔라는 제안에 그렇게 했더니 더 자주 미친듯이 벨이 울렸다. 뭔가 앱에 문제가 있다. 결론은, 그냥 그것 지우고 '부인님' 리포트할대 비고란에 남편 사항 기재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오전에 실내 만보걷기 운동하고 있는데 담당 공무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 그냥 늘 그런 지침 안내였다. 자가격리자를 위한 식량 발송을 원하는가 묻길래 보내달라고 했다. 시일이 걸릴거란다. 그러면 금요일 격리 해제우헤 내가 떠난 후에 오는거냐고 물었더니 그 전에 도착하도록 노력해보겠단다. (이걸 그냥 보건소에 가서 자가격리자들 소독제 받아올때 그 때 한상자씩 줬으면 좋았지.)
그 자가격리자를 위한 보급품은 내 자가격리 1차에는 받았고 2차에는 안 받았다. 다 끝나갈 즈음에 배달되는데다 내가 먹을수 있는게 없어서 두번째때는 안 받은 것이다 (카레, 사골국, 스팸 뭐 이런거 고기 들어간거 나는 못 먹는다). 그런데 나중에 남편이 '세금 내고 받는건데 거절할게 뭐 있냐. 주는것은 받아오라'고 하길래 3차때는 받았다. 그리고 4차때도 받기로 했다. 내가 격리 마친 후에 배달되면 내 다음에 여기 머무는 사람이 받아서 잘 먹으면 될것이다.
쿠팡 프레시로 광어회 한접시, 고등어 구이, 명태회를 주문하여 맛있게 잘 먹었다. 아...이런 거구나.. 돈만 있으면 평생 문밖에 안나가도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구나...
Day 5, 2022년 2월 8일 (화) 생일
간밤에 우리 오빠가 카톡으로 뭔가 딸기케이크 선물 쿠폰을 보내셨다. 아! 내 생일인가? 부랴부랴 음력 날짜를 찾아보니 오늘이 내 생일이다. 내 생일이구나. 그러면 내일은 남편의 생일이겠다. (내일 새벽에 미역국이 도착하로록 주문을 넣어야지. ㅎㅎㅎ)
나는 평생 내 생일을 특별히 축하하지 않고 살고 있다. 어릴때 엄마는 내생일을 잊고 건너뛰기가 일쑤였고 (이웃 친척 아주머니가 일깨워줘서 저녁에 미역국을 얻어먹은적도 있고), 뭐 그것이 슴성이 되니까 내가 독립한 후에도 내 생일에 크게 의미 부여를 하지 않게 되었다. 생일 뿐 아니라 거의 모든 '기념일'에 대하여 나는 무감각하다. 이런 성향은 어릴때부터 제사나 어른 생신이나 그런 행사가 엄마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행사로 보여서 그런 부정적인 장면이 내면화가 되어서 그런것도 같다. "내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겠냐"는 식의 노인들의 '생일타령'은 어머니 대에서 끝난게 아니라, 결혼 했을때 아직 회갑도 안된 시아버지, 시어르신들의 생일에서도 카피 페이스트로 답습이 되었는데 나는 그런 풍경이 영 거슬렸다. 대체로 제사와 어르신 생신에 대해서 히스테리를 부리는 집안일수록 그거 차리는 사람의 생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내 생일을 기억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조상과 자신들의 생일상을 기대했다. 나는 그분들의 기대에 충실히 따랐고 이제 내가 주도적으로 판단할 시기가 왔을때 '그 모든 것을 폐한다'로 결정하였다. 나는 명절과 제사 그밖의 인사치례등 모든 것을 철폐하였다.
그런데 이제 성인이 된 미국에 있는 두 아들은 설 차례상과 추석 차례상의 기억을 아름답게 추억한다. 작은 놈은 심지어 "엄마가 차려주던 설 차례상을" 자기 약혼자와 재현해 내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들은 결혼하면 그런 상 차려서 축하를 하겠다고 한다. 그들이 원하면 나도 차례상 차리는 것을 도와줄 용의는 있다. 좋아서 하고 싶다니까. (얘들은 그걸 좋아서 하는구나. 좋은 세상이야.)
내 생일이다. 자정이 넘은 시각. 멀리 밤바다위로 반짝반짝 불빛들이 비친다. 이 풍경은 하나님께서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준비하신 선물. 내 일생에서 가장 아릉다운 생일 선물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나를 위해서 준비 해 놓으신 나의 하나님. 땡큐.
최소한으로 살기 (로빈슨크루소 놀이)
자가격리 상황은,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시간동안 최소한으로 사는 경험을 제공한다. 두사람이 한공간에서 7박8일간 지내는것을 상정하고 미국에서 내가 챙긴 것은 참 부실하기 짝이없다.
1. 한국에서부터 챙겨간 라면포트 (사실 이것도 기숙사에 누군가 버리고 간것을 주워다가 잘 쓰고 있는 것이다.)
2. 코렐 밥그룻 두개와 숫가락 두개 (아들 살림에서 빼 온것)
3. 인스턴트 오트밀
4. 델타 타고 오면서 식사시간에 주던 냅킨, 일회용 플라스틱 포크, 나이프, 숫가락, 물 몇병, 과자류.
이 외에 현재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들은 모두 쿠팡으로 주문한 것들이다. (라면, 햅반, 물, 요거트, 비누, 샴푸, 린스 등등등).
우리는 햅반이나 컵국수, 요거트등을 먹으면서 발생하는 포장재는 모두 깨끗이 씻어서 볕좋은 창가에 말린다. 델타에서 제공한 질좋은 종이 냅킨은 벌써 며칠째 실내 청소용 걸레로 사용하고 있다. 요거트나 햅반 용기는 물컵, 티컵으로 사용한다. 플라스틱 칼로 사과를 썰어먹기도 한다. 음식물 쓰레기가 발생하지 않도록 깨끗이 먹어치운다. 그리고 뭐든 바싹바싹 말려 놓는다. (뭐 별로 할일이 없으니까 심심풀이로) 정리 정돈을 하고 하고 또 한다.
이러면서 우리가 발견한 것: 우리가 일상에서 참 생각없이 많은 쓰레기를 배출하고 있구나. 사람이 맘만 먹으면 일회용 플라스틱 포크 하나로도 일년을 살수 있는거구나.
지금 우리의 작은 목표는, 여기서 두사람이 7박8일 생활을 마치고 나갈때, 조그만 (가게에서 물건 팔때 주는) 봉지 하나에 쓰레기를 담아 갖고 나간다는 것이다. 가능해보인다 (아직 작은 실내용 쓰레기통이 절반도 차지 않았다.) 삶을 간소화 하는 방법을 더 찾아봐야겠다.
감옥살이하면서 부티나는 델타 에어 간식 만들기
남편이 어딘가 출출하다고 하길래 내가 만들어서 제공한 간식:
코렐 그릇에 사과 한개와 구운 계란 한개를 썰어 담는다 (플라스틱 일회용 나이프로), 그 위에 떠먹는 요거트를 붓는다. 델타 1회용 플라스틱 숫가락과 포크와 함께 제공한다. 헤헤헤. (이것은 이코노미 클래스는 안되고 드러누워 가는 계급만 맛볼수 있는 것이다. 하하하)
사실 우리들의 삼시세끼에서 가장 친근한 아이템은 '떠먹는 요거트'이다.
Day 6, 2022년 2월 9일 (수) 남편 생일
남편의 생일이다. 쇠고기 무우국과 쇠고기 육전을 쿠팡 프레시로 주문했으므로, 새벽에 도착 할 것이다. (남편에게는 비밀이다. ㅎㅎㅎ).
내 숙소 볕 좋은 창가에는 떠먹는 요거트 용기와, 햅반 용기와, 컵국수/라면 용기와, 2리터들이 페트병들이 질서정연하게 쌓여있다. 우리가 이것들을 잘 모은후에 여기서 나가기 전에 사진을 찍어보자고 얘기를 하였다.
어제 새벽에는 '곤도 마리에'의 '정리의 기술'이라는 책을 이북으로 사서 단숨에 읽었다. 그냥 읽기만 한 것은 아니고, 책을 보다가 책의 설명대로 옷을 개켜보고, 가방 정리부터, 좁은 실내이지만 정리를 해 보았다. 그러니까, 여기가 내 집이 아니고 임시 숙소이므로 별로 정리할 것도 없고, 여행가방을 뒤집어 다시 정리하는 수준이라서 오히려 최소단위로 '실습'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지금 옷장에는 내 옷과 남편 옷들이 네모 반듯반듯하게 접혀져 줄세워져 있다. 물을 마셔도 물병을 아무렇게나 놓지 않고 반듯하게 놓는다.
사실 나는 살림 실력이 별로 없다. 그나마 한창 살림할때는 제법 각잡고 뽀득뽀득 윤기나게 했는데 그것은 내가 전업주부였을때 얘기이고, 내가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거나 - 하여튼 전업주부가 아닌 후부터는 살림은 늘 대충이었다. 내 공부, 내 일 외에는 신경을 안쓰면서 여태 살았다. 젊을때는 늘어놓고 살다가도 맘먹고 치우러들면 하루에 다 뒤집어 치우고 놀러나가곤 했는데, 나이가 드니 정리 정돈 청소가 만만치가 않다. [정리의 기술] 책을 읽으니 정리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점점 행동이 느려지고 기운이 떨어지는 나의 현재 상황을 고려해볼때, 주변 정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집에 가면 옷장을 비롯하여 차근차근 정리를 하겠다고 마음 먹는다. (1년이상 건드리지 않은 옷들은 이참에 다 정리해야지).
나는 유튜브에서 실내 걷기 운동이나 여러가지 정보의 도움을 받는 편이다. 요즘은 '명상' 관련 유튜브를 찾아내어 명상 호흡, 짧은 명상을 하는 중이다. 일단 명상/요가 호흡이 꽤 도움이 된다고 생각된다. 오른 손의 검지 중지를 세우고 셋째 넷째 손가락을 접은후 엄지로 오른쪽 콧구멍 막고 들이쉬고, 접힌 넷째 손가락으로.... 뭐 이런식으로 오른쪽 콧구멍으로 들이쉬고, 왼콧구멍으로 내쉰후 들이쉬고, 오른쪽 콧구멍으로 내쉬고 들이쉰후... 그것이 원활해지면 그 사이에 숨을 참았다가 들이쉬고, 참았다가 내쉬는 무슨 000 호흡법이라는데 이름은 기억 안나고 - 하여튼 이 호흡법이 재미있다. 왼콧구멍 오른콧구멍의 들숨날숨이 화통하면 참 좋은 것인데, 대체로 한쪽이 약간 막힌듯 하다가 뚫리고 그런다.
명상도 좋다. 요가 강사하시는 분이 명상을 이끄는데 - 대체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긍정적 에너지가 흐르는 코멘트를 하고 나를 고요한 명상의 세계로 이끈다. Singing Bowl 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릇같이 생긴 종인데 그것을 치는 것으로 명상에 들어가고 그 종소리를 들으며 명상에서 나온다.
복식호흡도 유튜브에서 배웠다. 복식호흡을 하면서 강사의 인도에 따라 명상에 들어가고 10분후에 명상을 마치는 연습을 몇차례 유튜브를 보면서 따라해보니 머리도 맑아지고, 일단 마음이 안정되고 좋았다. 그래서 이 10분 명상법을 이용하여 '기도'를 해 보았다. 10분간 명상시간에 나는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이다. 마침 내게 중보기도를 부탁한 가족이 있어서 그 가족을 위하여 깊이 깊이 명상에 빠지듯 기도를 드린다. 이렇게 하니까 기도가 흔들림없이 더 잘 된다. 딴생각도 덜하게 되고 기도에 좀더 집중할수 있게 된다.
App Store 에서 singing bowl timer 를 검색해보니 몇가지가 보인다. 유료, 무료 있는데 무료는 광고가 많이 뜨고, 유료는 살생각이 없고, 무료중에서 아주 간단하고 광고가 안뜨는 앱을 하나 찾아냈다. 사실 아이폰 타이머와 별 차이가 안난다. 한가지 차이라면 'singing bowl' 소리가 있다는 것. 어쨌거나,좀 더 집중하여 기도하는 방법을 한가지 찾아낸 기분이다. 마음이 흐트러지고 기도에 집중이 잘 안될때는 이런 방법으로라도 기도하는 것이 나로서는 좋다고 생각한다.
Day 7, 2022년 2월 10일 (목) 자가격리 해제를 위한 2차 PCR 검사
오전에 검사소에 가서 PCR 검사를 받고 - 음성 확인이 되면 내일 정오 (12시)에 여기서 나가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우리나라 자가격리 시스템에 어딘가 구멍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며칠전에는 2차 검사를 보건소 옆의 임시 검사소에 와서 받으라는 문자 메시지가 오더니, 어제는 아무데나 검사소에 가서 받으면 된다는 메시지가 왔다. 근처에 걸어서 갈수 있는 검사소가 있어서 그리 가도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보건소에 전화를 아무리 걸어도 받지를 않는다. 바쁜것은 이해 하지만 - 메시지가 오락가락하는 것이 불안하다. 내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 번호로 나도 질문 메시지를 보냈으나 답이 없다. 바쁜것은 아해하지만 - 답답하다.
자가격리앱에 '담당공무원' 연락처가 있고 직접 통화가 가능하다. 그래서 자가격리앱에 연결된 전화를 걸어보았다. 어떤 친절한 분이 전화를 받으시는데 내 이름을 묻더니 자기 담당이 아니라고 한다. 내 앱에 있는 번호인데 무슨 말이냐 했더니 아무튼 자기는 담당이 아니란다. 그분은 친절하셨다. 내게 다른 번호들을 가르쳐주시며 문의를 하라고 하셨다. 이 앱도 엉터리인건가?
자가격리 구호품은 보내준다더니 6일째 되는날까지 도착하지 않았다. 오늘 오려나? 자가격리 다 끝나는 마당에 오려는가? 어쩌면 내가 나간 후에 올지도 모르지. 그럴거렴 구호물자는 왜 보내고 예산낭비 하는지. 바쁜것은 이해하지만 뭔가 두서가 없어 보인다.
매일 업데이트되는 뉴스를 봐도 뭔가 정보는 쏟아져나오는데 - 그래서 어쩌란건가? 따져보면 구체적인 시행 단위에서 구체성이 없다. 예컨대 '자가격리앱'은 이제 안쓴다는 뉴스가 엊그제 나왔다. 언제부터? 나는 지금 자가격리 앱에 꼬박꼬박 리포트를 하고 있는데 그것을 하라는거야 말라는거야? 정말 '난리통' 같다. 다들 힘드실것이다.
Day 8, 2022년 2월 11일 (금) 귀가
어제 오전에 PRC 검사를 받았고, 오늘 오전 8시에 음성 결과 문자 통보를 받았다. 이것으로 네번째 자가격리를 무사히 마치고 이제 나의 집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한 300미터 거리에 있는 나의 보금자리).
그나마 15일에서 10일 --> 8일로 줄어들은 것을 감사한다. 2020년 여름과 겨울, 그리고 2021년 여름에는 고스란히 2주를 감옥살이를 했는데 절반으로 줄어드니 감지덕지. (해외에서 가능한 자가격리 면제 신청이 중지가 되는 바람에 또다시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자가격리이길... 매번 그것이 마지막 자가격리라 생각하고 견뎠는데, 과연 이것이 마지막인지 지금으로서는 예측하기가 어렵다. 시계제로. 창밖에 우윳빛으로 가득한 안개처럼, 현재 상황은 예측불허이다. 어쨌거나 희망을 갖고 견디고 살아내는 수 밖에.
버지니아 타이슨스 코너에 있는 '우래옥'은 워싱턴 디씨 지역의 명소이다. 이곳에는 힐러리 클린턴도 다녀가는 둥 미국인에게는 가볼만한 한국식당으로 알려져있고, 한국에서 대통령이 미국 방문을 한다거나 국회의원을 위시한 '잘 나가는 사람들'이 워싱턴 나들이를 할때면 대개 그 수행원들이나 관련자들이 이곳에서 연회를 하거나 잔치를 하거나 미팅을 하거나 그러기도 한다. 내가 살던 곳이 이곳과 가까운데 있어서 나도 '유붕자원방래'하면 이곳에서 식사 대접을 하곤 했다.
하루는 오하이오에서 젊은 부부 친구가 워싱턴에 들렀다가 연락을 하길래 이곳에서 저녁 약속을 잡았다. 그분들은 부부가 수학자들이었다. 언젠가 내가 오하이오에 들렀을때 나를 극진히 환대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평소에 먹기 힘든 모듬전이며 한상 차려서 잘 먹고 있는데, 마침 이곳에서 열린 어떤 '모임'에 참석했던 남편이 '화장실'에 가다가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나는 남편에게 친구들을 소개하고 그렇게 노닥거리고 있었는데, 역시 마침 '화장실'에 가던 어떤 '관계자'께서 남편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그 관계자는 꽤 유복한 사람이었나보다. 그가 다가오더니 "아, 사모님이시군요"하며 나를 무척 반가워하셨다. 우리는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그들은 본래 있던 연회 장소로 갔을 것인데, 우리가 명랑하게 밥을 먹고 있는 자리에 남편이 다시 나타났다. 남편은 내게 식당의 영수증을 보여주었다. 사연인 즉 -- 그 유복해보이는 어떤 '관계자'께서 너무나 친절하시게 '사모님'인 나의 테이블 밥값을 잽싸게 지불했는데 -- 눈치가 빠른 남편이, 뒤 쫒아가서 그 관계자의 크레딧 카드 지불을 '취소' 시키고 자신의 카드로 내 밥값을 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내 밥값을 내 줬는데 송곳같이 꼬장을 떠는 남편이 득달같이 가서 '내 마누라 밥값을 왜 당신이 내는가?' 따지고 자신이 지불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누군가 내 테이블의 밥값을 내줬다는 사실에 약간 '돈 굳었다'고 기분이 좋아지려 했다가 -- "이 사람아 공짜 밥이 청산가리야. 남편 망치고 싶으면 남이 사주는 밥 얻어먹어라. 죽은거는 나니까!~ " 이런 남편의 비아냥거림에 등골이 오싹해진 적이 있다. 아...이런게 청산가리같이 위험한 거였구나.
이 송곳 선생은 언젠가는 (뭐 추석이나 설날이겠지 ) 누군가 무슨 선물을 보내왔는데 너무 비싼거라고 그걸 그대로 다시 돌려보내기도 했고, 혹은 무슨 대기업에서 유력하지도 않은 시시한 사람들에게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고 선심쓰듯 내미는 선물도 거절을 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이 사람 참 답답하게 산다'는 느낌이 들곤 했는데, '뭐 어쩌겠어 그게 천성이라는데 내버려두자. 공돈을 바랄게 아니라 내가 나가서 더 벌면 되지 뭐' 뭐 이런 생각으로 나 역시 공돈 바라지 않고 그저 개미같이 일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요즘 대통령 선거판을 보면 , '공짜 밥' 그거 남이 준다고 척척 받아 먹는거, 그게 얼마나 '청산가리'인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평생 꼬장부리고 사는 남편 덕분에, 사람들 앞에서 고개 숙일일도 없으니 그것도 내 복이다. 내 복이 넘친다.
위 사진속의 도구들과 물건들이 내일 퇴소를 앞두고 있는 7일간의 자가격리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7일간 2리터들이 생수를 10병 마셨고, 내일 정오에 나갈때까지 합산하면 12병 정도가 될 것이다. 델타 항공 기내용 작은 물병 두개도 있고, 커다란 야쿠르트 세병도 있다. (포장은 재활용을 위하여 모두 제거한 상태이다). 물은 내가 매일 마시는 티백 (루이보스티, 페퍼민트, 민들레뿌리차 등)을 두개정도 넣어서 '냉침'으로 밤에 서늘한 창가에 두어서 우려내어 매일 마셨다. 앞으로도 집에 가서도 차를 따로 끓여 마실게 아니라 이렇게 2리터 물병에 넣어서 그냥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햅반은 16개를 먹었고, 떠먹는 요구르트 (불가리스)는 총 25개를 먹었다. (사진에는 23개가 포개져있는데, 나머지 두개는 화장실에서 비누그릇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일 나가기 전에 요거트 5개 남은것 다 먹을 생각이다. 총 30개를 먹고 나가게 된다. 그중에 10개는 남편, 20개는 내가 먹은것이 될 것이다.
북어국 작은 포장 3개 (부부가 북어국 한개를 나눠먹으면 된다. 간이 짠 편이라서 물을 많이 붓고 한개를 둘이 먹었다). 컵쌀국수 5개.
* 창가 오른쪽에 엎어놓은 두개의 코렐 그릇은 미국집에서 스텐 숫가락과 함께 가져온 것.
스텐 숫가락 두개와 나무젓가락 (와리바시)는 미국 집에서 나올때 그냥 아무거나 두개 집어 온 것이고, 나머지 1회용 플라스틱은 델타항공에서 밥먹고 내가 챙겨 온것. 저 플라스틱 칼로 사과를 썰어 먹기까지 했다.
햅반이나 요거트 용기는 다채롭게 사용되었다. 접시도 되었고 물컵도 되었고 필요에 따라서 갖다 쓰면 되었고, 사용후에는 깨끗이 씻어서 말렸다. 커다란 국수 그릇도 방울토마토를 씻을때는 바구니처럼 사용되었다. 일회용품이지만 사실 이것들은 거의 영구적으로도 사용이 가능한 것들이다. (우리는 '로빈슨크루소 놀이'를 한다며 이 도구들을 소중히 다뤘고 사랑하였다.)
우리가 평소에 아무 생각없이 한번 쓰고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매일 정성껏 씻어서 햇볕에 말려서 사용하니 일주일이 지나도 여전히 튼튼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물자를 버리고 산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조개탕 재료를 주문하여 끓여 먹은적도 있다. 조개 껍데기도 깨끗이 씻어서 햇볕에 바짝 말렸다. 구운계란도 주문하여 먹고 있는데, 역시 계란 껍데기도 씻어서 바짝 말린다. 이것들은 학교에 내가 관리하는 나의 작은 정원의 화분들을 위해서 따로 모아 놓은 것이다. 비료가 되어 줄 것이다.
아래는 일주일간 발생한 쓰레기이다. 뭐든지 냄새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은 무조건 깨끗이 씻어서 말렸다. 레토르트 국봉지도 씻어서 말렸다. 그러므로 쓰레기이지만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내일 나가기 전에 쓰레기를 꼭꼭 눌러 담으면 노란 이마트 봉지에 다 들어갈 것이다.
외부에서 가족이나 누군가의 도움 없이 그냥 필요한 것을 온라인 주문하여 공급받으며 자력으로 부부가 자가격리를 하는 경험을 통하여, 최소한으로 살아가는 방법, 그리고 물자를 아끼고 활용하는 방법에 대하여 소소한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쓰레기를 줄이려면 얼마든지 줄일수 있다는 것을 체험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막 살아왔는지도.
물론 집으로 돌아가면 여태까지의 습관대로 막 살게 되겠지만, 지난 일주일간의 체험을 통한 깨달음이 먼지 만큼이라도 내 삶에 반영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성산동에 사는 아주 착한 내 친구는 어느날 길에 사는 아기 고양이를 입양하여 '까루'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 이후에 노량 고양이 한마리도 입양하여 이제 두마리가 되었다.
친구가 보내준 고양이 동영상을 캡쳐하여 그림으로 그려보았다. 친구(와 그의 착한 두딸)가 매우 기뻐하였다.
우리 고양이 토마스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아직 완성을 못했다. 많이 그리지 않았지만, 겨울 사이에 내가 아이패드에 심심풀이로 그린 그림을 살펴보면 '연습'이 실력이라고, 그냥 혼자 그리는 그림인데도 그리면 그릴수록 색감이 깊어지고 세밀해지고 그렇게 된다. 연습이 실력.
사실 내게는 구형 아이패드가 있다. 멀쩡하다. 주로 쓰임새는 킨들책이나 국내 전자책 다운받아 읽거나 검색용이므로 5년이 지난 것인데도 멀쩡하다. 그런데, 그것은 구형이라서 '아이펜슬' 기능이 없다. 지난 여름방학때 둘째아들 찰리에게 "엄마도 아이펜슬로 그림 그리고 싶어" 했더니 찰리가 군말 않고 신형 아이패드와 펜슬을 사 보내줬다. 정작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겨울이다. 찰리가 명품가방 선물해 준다길래 "엄마 옷장에 명품 가방이 너무 많아서 내가 팔아도 한 재산 될것 같아. 이제 늙어서 명품도 다 필요없어. 나 아이패드 프로 화면 왕따시 큰것 사줘. 눈이 침침해서 화면이 큰것이 좋아" 했더니 바로 사 보낸다길래 그것은 나중에 사달라고 했다. 나중에... 지금 가진 아이패드도 새것인데. 하나님께서 퍼부어주시는 은혜가 넓고도 깊어서 나는 지금 가진것만으로도 넘친다. 아들이 두말않고 커다란 프로급을 사준다길래 -- 마음이 이미 그것을 받은듯 풍요러워졌다. 말씀이 고맙다.
(그래서 내가 쓰던 6년도 넘은 구형 아이패드는 남편이 사용한다. 그는 주로 내가 사들인 킨들책이나 전자책을 읽는다. 남편은 뭐든 돈 주고 사는것을 극구 사양하고, 늘 내가 쓰던것을 쓴다. 그는 도무지 돈을 쓸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