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eums2009. 12. 27. 04:43

공식 홈페이지: http://www.asia.si.edu/

워싱턴 디씨의 모든 스미소니안계 박물관은 무료 입장입니다.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사진 촬영도 자유롭습니다.

 

 

 

 

프리어 미술관 (Freer Gallery of Art)는 연결되어 있는 쌔클러 미술관 (Sackler Gallery of Art)와 더불어 스미소니안 계열의 국립 박물관들 중에서 '아시아 미술' 전문 전시장입니다.  아래의 지도에서 보면,  붉은색 건물들이 스미소니안 국립 박물관들인데, 맨 아랫쪽 가장 외편의 네모난 건물이 프리어 미술관이고, 그 오른쪽에 직사각형 모양의 쌔클러 미술관 건물이 보입니다.  메트로 스미소니언 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워싱턴 디씨의 스미소니안 박물관들중에서 최초로 '기증된' 건물이기도 합니다. 이 박물관 건물과 소장품들을 기증한 사람이 Charles Lang Freer (1854-1919) 라는 미시건주 디트로이트 소재의 철도차량 사업가 입니다. 이 박물관 건물의 건축비만 당시에 1백만 달러가 들었다고 하는데, 전 경비를 프리어씨가 지불했고, 그가 평생 모은 미국, 아시아의 예술품들도 역시 기증했습니다.

 

 

 

프리어씨에게는 아내나 자식이 없었고, 취미삼아 예술품을 수집하게 되었는데, 후기에 그와 절친했던 미국출신 영국 미술가 James Aboot McNeill Whistler (휘슬러)의 조언에 따라서 아시아권 미술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했습니다. 그는 아시아권 미술품 수집을 위해 중국, 일본, 한국 (당시 조선)도 방문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프리어 미술관에 소장된 아시아권 작품들을 보면, 그 속에 있는 한국의 예술품들은 일단 숫자도 많지 않고, 열세라고 할 수 있지요.  아무리 우리나라 미술품이 대단하다고 해도, 몇작품 되지도 않는 청자나 백자가 어느 구석에 전시되어 있는 형편이라,  오히려 이런곳의 한국 전시물을 보고 나면 기분이 저조해지는 편입니다.  

 

 

 

 

 

 

특히나 프리어 미술관을 '미국미술과 아시아 미술 전시장'으로 소개하기도 하는데,  프리어가 '아시아 미술' 전시장임을 표방하면서도 미국미술 전시장이 여러군데에 있고, 이곳을 찾는 관객들이 많은 이유는, 이곳에 19세기말에 활약했던 미국 미술가들 Dewing, Whister, Sargent 등 당대의 걸출했던 작가들의 일련의 작품들이 이곳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에 보이는 전시장에는 Dewing (왼편벽) 과 Tyler (오른쪽 벽)의 작품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사실 이곳에 걸린 작품들은 프리어씨가 디트로이트 외곽에 지은 저택의 내부를 장식할 목적으로 제작된 것들이라고 합니다.  집을 지으면서 그 집을 장식할 작품들까지 주문제작을 한 듯 합니다.

 

 

 

 

아래는 '공작의 방 Peacock Room'으로 알려진 '방'입니다. 휘슬러가 영국의 어느 돈많은 사람의 주문으로 그 집 식당을 이런 식으로 꾸며 줬다고 하는데요, 뭐 휘슬러가 의뢰인의 부탁을 무시하고 멋대로 꾸몄다가 서로 옥신각신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후에 이 '식당' 내부 전체를 프리어씨가 사들여서 이 식당을 '뜯어'왔다고 하는데요, 최종적으로 프리어 미술관에 안착을 하게 됩니다.

 

 

 

 

이 방이 대단하다고 관객들이 많이들 찾아 오는데요. 제가 보기엔

(1) 우리나라 절집/혹은 무당집에 들어간듯한 느낌이 드는 금박무늬

(2) Princess from the land of porcelain 도자기나라에서 온 공주 그림은 딱 신전의 여신입니다. (이 의상, 일본 의상인가요?) 의상은 일본, 이목구비는 서양 여성입니다. 뭔가 '잡종적'이죠.

(3) 중국식당에 온 기분도 들고요

 

이래저래 '아시아'권의 관객인 제 눈에는 뭐랄까, 이도 저도 아닌 얼치기 인테리어 장식 같구만, 이거 만드느라고 돈 쳐들였을것이고, 이거 사온다고 또 돈 억수 들었을걸요. 아마.

 

(정작 주인공인 아시아 예술품에 대해서는 저는 생략하겠습니다. 그냥 미국미술에만 집중하려고요.)

 

프리어 미술관에 대한 소개는 이쯤으로 맺음하고, Dewing, Whistler, Sargeant 에 대해서는 따로 페이지를 만들어서 소개하겠습니다.

 

 

december 26, 2009.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3. 08:16



내가 미국에서 둘러본 미술관들 중에서 미국의 유명한 재벌이 직접 열었거나 혹은 혁혁하게 기여한 미술관들.  (참고: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Museums)

 

 

 

 미술관

 설립자 (기여자)

 비고

 뉴욕 현대 미술관 (MoMA)

http://americanart.textcube.com/80        

 

 Rockefeller 가문

 미국 최대 석유 재벌     

 구겐하임 미술관

(맨해턴 소재의 미술관 방문, 2008 )

 

 

 Guggenheim 가문

 광산, 금광

 디트로이트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94

 

 

 Ford 가문 (기여)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자동차

 카네기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159

 

 

 Carnegie 가문

 펜실베니아

피츠버그

철강업

 크라이슬러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190

 

 Chrysler 가문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자동차

 코코란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97

 

 

 Corcoran 가문

 광산

 필립스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35

 

 

 Phillips 가문

 광산

 Walters Art Museum (볼티모어) 무료입장

 

 

 Walter 가문

 재벌

 

Freeer Gallery http://americanart.textcube.com/225

 

 

 

Freer

미시간 디트로이트 철도 산업및 기차 제조 투자자

아내와 자식 없었음.

워싱턴 디씨에 최초로 스미소니언 산하 뮤지엄 건물을 기증함

그의 19세기-20세기 미국미술및 아시아 미술 소장품을 연방정부에 모두 기증

 

 

Sacler Gallery

Hirshhorn

Kreeger

 

                                                   

 

 

 

 

 

 

 



작은 재벌들의 개인 전시관 규모의 미술관은 제외하고 큼직한것 중에서 내가 직접 가 본 (크라이슬러는 조만간 방문 예정) 미술관들과 재벌들과의 관계를 표로 한번 만들어 본 것입니다.  록펠러의 현대미술관은 20달러쯤의 입장료를 받지만,  버지니아의 크라이슬러 미술관은 '무료 입장'입니다. (고마우셔라).  뉴욕 맨해턴에 있는 거의 모든 미술관들이 입장료를 듬뿍 받아 챙기는 편이고, 그 외의 도시의 미술관 입장료는 착하거나 (저렴) 혹은 너무 착한 (무료)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살면서 새로운 '재벌' 미술관을 방문하면 이 페이지를 업데이트 해 보겠습니다.

 

이런 미술관을 방문할때, 처음에 저는 그저 피상적으로  참 훌륭한 일을 하셨구나,  덕분에 내가 이렇게 세계적인 명품들을 무료로 혹은 약간의 돈을 내고 맘껏 볼수 있구나 뭐 이렇게 가볍게 생각을 하고 기쁜 마음으로 전시품들을 보는 정도 였습니다.  가끔은 '결국 문화라는 것도 돈 있는 사람들의 놀이이지. 돈 없으면 그림도 음악도 힘들지.  메디치가를 봐도 그렇고, 창작하는 사람들은 돈 가진 사람들의 도움을 받거나...결국 문화는 돈인거야..대충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촛점을 맞춰서, 피상적으로 대충 볼것이 아니라, 뭔가 주제를 정해서 파고 들어가보자 작정하고 미국미술을 들여다보니, 자연히 미국역사를 들여다보게 되고, 미국 역사속에서 재벌들이 어떤 노선을 취했는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이 아름다운것을 알고 있지만 (제가 뉴욕 맨해턴에 갔을때 처음 보고 반한 건물이 크라이슬러 건물이었습니다.)  크라이슬러 자동차 공장에서 노동자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카네기가 대단한 자선가라는 것은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카네기가 노동자들을 어떻게 탄압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화려하고 즐거운 정보에는 많이 노출되어 있지만, 슬프고 어둡고 아픈 역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생명가진 것들은 본래 어둡고 아픈것은 회피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것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결국, 이면으로 이면으로 파들어가게 되더란 것이지요.

 

나는 새삼스럽게 자선가로 알려진 재벌들을 비평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사회에 제공한 화려한 미술관 뒤에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 가끔은 들여다볼 생각입니다.  그래야 세상을 균형감있게 볼수 있고, 그래야 좀 어딘가 균형이 잡혀갈것 같습니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09. 12. 21. 21:52

 

2009년 12월 19일 (일) 자정부터 자정까지 온종일 내린 눈의 총량

 

 

 

 

 

 

 

 

 

 

 

 

 

2009년 12월 20일

 

아침에 깨어났을때, 창밖은 파란 하늘과, 파랗게 반사되는 쌓인 눈으로 눈이 부셨다.  뒷마당에 쌓인 눈은 식탁의자의 허리 부분을 이미 지나 있었고, 성인 남자의 무릎 높이보다 높았다.  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쌓인 눈을 평생 몇번이나 보았는가?' 물었는데,  내 희미한 기억으로, 어릴때,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시골집 마당에 이렇게 눈이 쌓인적이 있었는데, 그 어린 나이에 눈에 갖힌 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그 후에 눈이 이렇게 많이 쌓인 것을 본 적이 없는듯 했다.

 

우리집 왕눈이는 눈에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눈이 가볍게 쌓였을때는 나가서 겅중거리고 뛰어 놀줄도 아는 개 이지만, 눈이 제 키를 넘게 쌓이자 눈을 무서워했다. 

 

옛날에 시골에서 살때, 눈이 많이 쌓이면, 할아버지는 우리집과 이웃집 사이에 이렇게 길을 내 놓으셨었다. 날이 개이면 눈길은 사라지고 말지만,  이렇게 실핏줄같은 눈길이 마을의 집과 집을 이어주곤 했었다.

 

워싱턴의 모든 관공서는 월요일 (21일) 임시 휴무일로 정했고, 금주 수요일에 방학을 시작하려던 공립학교들은 일제히 방학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방학이 일찍 시작되었다고 환호하고...쌓인 눈은 하도 높이 쌓여 하루이틀에 녹을것 같지는 않고...

 

눈길을 걸어 동네 스타벅스에 나가서

뜨거운 라테랑, 아주 달아 미치겠는 케이크 한조각 주문해가지고 난롯가에 앉아 그것을 먹으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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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15. 01:28

 

 

Eastman Johnson

The Early Scholar (이른 아침 학교에 온 어린이)  c. 1865

2009년 12월 13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날씨가 쌀쌀하죠.  이런 날은 어릴때, 기온이 영하 5도 아래로 내려가길 '고대하며' 동동 걸음으로 찬바람을 맞으며 학교로 향하던 내 모습이, 그 풍경이 떠오릅니다.  아침에 나올때, 뭐 수업도 없고, 방학이니까, 편안한 옷에 '털신'까지 신었지요.  그 털신을 신고 앉아 생각해보니, 내가 어릴때 나는 한번도 '방한화'개념의 어떤 두꺼운 신발을 신어본 기억이 없어요.  털신이라니...내가 출세한거죠. 털이 보글보글한 폭신한 장화를 신고 앉아있으니.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땐, 영하 5도 이하로 기온이 내려가는날 난로를 피워줬지요. 고등학교에 가니까 영하 3도 이하로 조정되더군요.  그러니까 어릴땐 날씨가 영하 4도가 되면 난로 안때주고 영하 5도가 되면 난로를 쌔주니까, 영하 5도가 영하 4도보다 따뜻한거죠.

 

그리고, 초중고등학교 다니는 내내, 난로 관리는 반에서 제일 키 큰 친구들이 전담해서 했어요.  그러니까 조개탄 창고에가서 조개탄을 배급 받아 오는 일이나,  수업 마치고 난로 청소한후에 나머지 재를 들통에 담아서 내다 버리는 일이나, 이런 난로관련 업무는 반에서 제일 키 큰 서너명이 '큰 언니들'처럼 맡아서 했던거죠.  담임 선생님이 늘, 당연하다는 듯이 제일 꺽다리 애들을 지명하여 일을 지시했고, 그 꺽다리들도 마땅히 자신들이 해야할 일이라는 듯 믿음직하게 그 일을 했지요. 그 꺽다리들은 딱 큰언니 같았는데, 여자 중고등학교에서 그런 일을 하는 꺽다리들은 '오빠' 기능도 일부 담당했지요.  그냥 그 키 큰 애들을 무조건 따르는 애들도 있었으니까. 저는 또래 집단에서 큰 키에 속했지만, 제일 큰 꺽다리는 아니었으므로 주로 그런 꺽다리들하고 등등하게 어울리되 이런 어마어마한 일은 안하는. 어중간한 꺽다리과였죠.

 

 

 

한 꺽다리 친구가 생각나는군요.  그 꺽다리는 정말 '오빠'처럼 체격이 크고 늘씬하고, 성격도 무지 좋고, 공부는 그냥저냥 하는데, 뭐 인물 좋고 성격좋고, 선생님들이 허드레 일을 시키면 빙글빙글 웃으면서 척척 해내고, 우리들이 모두 그 꺽다리 '오빠'를 좋아했죠.  그런데 이 친구가 나를 예뻐했어요. 자기가 다니는 예배당에 행사 있다고 가자고 하기도 하고 (그러면 그냥 소풍가는 맛에 따라가고),  방과후에 학교앞 튀김가게에 함께 가지고 하면 따라가고, 미술 시간에 10년후의 나의 집을 그려보라는 선생님의 지시에 그애가 그린 집은, '10년후에 이아무개하고 나하고 함께 살 집.'  그 이아무개가 물론 소생이죠.  그 애는 왜 십년후에 나하고 함께 살 생각을 했을까?  나의 십년후는 달랐는데... 아무튼 그래서 그 친구가 그린 집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내 방 창문앞에는 사과나무를 심어줘. 그리고 꽃도 많이 심어줘" 뭐 이런 제안을 하면서 시시덕거렸죠.

 

 

요즘 이런 얘기를 하면 죄다 '동성애 코드'로 해석하는 분위기쟎아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동성애'가 뭔지도 몰랐어요 우리는.  그당시에도 '호모'라는 말이 가끔 돌아다녔지만, 그냥 동성끼리 서로 좋아하는게 '호모'인줄 알았죠.  우리 머리속에는 도대체 '섹스'라는 개념이 탑재가 안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누가 누구하고 같이 살고 싶대' 뭐 이런 말도, 누가 누구를 꽤나 좋아한다는 말과 동의어였죠.  그 외에 다른 뉘앙스를 잘 몰랐지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냐하면, 그 친구가 나를 너무 이뻐하고, 나를 강아지처럼 데리고 돌아다니러 들고, 아무튼 내게 너무 잘해줬기 때문에 처음에는 언니/오빠처럼 좋아서 따라다니다가 나중에는 귀챦아서 멀어진것 같아요.  언니/오빠는 언니/오빠의 영역을 벗어나면 안되는건데... 사람의 관계란 그렇죠. 어떤 영역이 있어요. 그 영역안에서만 머물러야 하는데 그 선을 깨버리면 그 관계가 일그러지지요.  그런데, 그 영역이란것이 사람마다 선이 다르니까 오해나 문제가 생기고 비극이 일어나기도 하고.  돌아보면, 누군가가 내가 정한 금을 넣어 왔다는 이유로 내가 회피한 경우가 종종 있고; 어쩌면 나 역시 금을 넘어갔다는 이유로 회피의 대상이 되었겠지요.

 

아, 난로담당 친구 얘기를 하다가 엉뚱한데로 얘기가 흘러가버렸는데...

 

 

Eastman Johnson 은 제가 언젠가 따로 페이지를 낼 화가인데요. 오늘은 어제 국립미술관에서 발견한 이 사랑스러운 그림 소개만 할게요.  The Early Scholar. 대략, 이른 아침에 학교에 도착한 생도라는 뜻인것 같죠.  뒤에 벤치들이 보여요. 초기의 교실 풍경같죠. 그리고 난로가 하나 있는데 이 꼬마친구가 불을 피우고 있는것 같아요. 아니면 선생님이 미리 피워놓은 난롯불을 쬐고 있거나. 난롯가에 커다란 장작 쪼가리 하나가 누워있는것도 보이고.

 

이렇게 일상의 어떤 풍경을 그리는 것을 장르 페인팅 (genre painting) 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냥 '풍속화'라고 해석하는 편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는거죠. Eastman Johnson 은 그런 풍속화가지요.

 

날씨가 추워서, 뭐 따뜻한 그림을 하나 올리고 싶어서 끄적끄적...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14. 23:23

National Archives

 

공식 홈페이지: http://www.archives.gov/

 

워싱턴 디씨에 있는 국립 문서 기록 보관소 (National Archives = Archives of the United State of American)는 이름 그대로 문서 기록을 보관하는 '창고'라고 할수 있습니다. 예전에 '국사'시간에 우리도 배운적이 있지요. 왕실의 기록을 조선땅 여기저기에 보관해 놓았다고 해서 그 장소를 달달 외운 기억이 있는데요, 그래서 외침으로 궁성이 여러차례 불 탔어도 조선왕조실록이니 하는 사료들이 잘 보관되어 전해졌다고 하지요.  워싱턴의 국립 문서 기록 보관소도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보관하는 장소이고,  미국의 각지에 이러한 보관소들이 있다고 합니다.  워싱턴디씨에 있는 보관소에는 특히나 영국의 권리장전, 미국의 독립선언문, 헌법초안, 헌번 개정안등의 원본에 대중들을 위해 전시되어 있어서,  이곳은 미국 전역의 중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으로 워싱턴을 방문할때 반드시 들르는 장소입니다.  저희집 아이들도 중학생때 플로리다에서 워싱턴까지 수학여행을 가서 이곳을 구경한 적이 있지요. (큰놈은 제법 이곳에서 판매하는 독립 선언서 카피본을 기념품으로 한장 사다가 제게 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어디 처박혀 있는지도 알수 없지만요.)

 

 

이렇게 일년 내내 많은 미국인들과 여행자들이 찾은 장소라서, 특히나 니콜라스 케이지가 출연했던 National Treasure 영화 시리즈 덕분에 이곳을 호기심을 갖고 꼭 보고싶어 하는 청소년들이 많은데요, 그래서 주말이나 휴일에 이곳을 보려면 몇시간씩 뙤약볕 아래서 줄서서 기다려야 합니다.  전에도 몇차례인가 이곳을 지나다가 기웃거려 봤지만 줄이 길어서 번번이 포기했지요 (줄서서 구경하고, 줄서서 식당 들어가고 그러는거 무척 귀챦아 하는 편이거든요. 줄 서라고 하면 그냥 딴거 하고 말죠).  마침 비오는 12월의 일요일.  비는 죽죽 내리는데 누가 이런데까지 마실을 오겠습니까. 날도 춥고.  지나는 길에 들여다보니 뭐 한가로와 보이길래 결국 잠시 들르게 되었습니다.

 

 

 

 

 

 

 

 

 

건물 왼편으로 들어가면 입구가 나오는데요, 입구를 통과하면 공항의 Security Check (물품검사대)과 같은 곳이 나타납니다. 소지품 모두 검사대를 통과해야 합니다. 사람도 검사를 받고요.  아무래도 국립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라서 경비가 엄한 편입니다.  입장료는 무료.  사진도 자유롭게 찍을수 있지만 플래시 사용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요즘 카메라들이 좋아서 플래시 없이도 잘 찍히죠)

 

 

 

 

 

 

 

검사대를 통과하여 지층의 '극장'에 가서 이곳을 소개하는 짧은 교육용 영화를 봅니다.  기록의 중요성, 기록의 활용 방법을 알려주는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영화관 시설도 아주 훌륭합니다.  그리고나서  중요 문서 (영국의 권리 대장전, 미국의 독립 선언서, 미국의 헌법초안, 미국의 헌법 개정안 원본들)들이 전시되어있는 로툰다 홀로 이동하여 구경을 합니다. 조명이 침침하여 원문을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가장 구경하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이 곳이지요)

 

로툰다홀에서 나온후에 교육 전시실이라는, 미국 역사 관련 전시물들을 둘러보고, 기념품가게에서 물건 구경하다가 나오면 됩니다.  이것이 단순히 '구경'하기 위해 들르는 절차이고요, 만약에 특정 문서나 기록을 열람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다면 해당 사무실로 찾아가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고문서 전시장 (Rotunda Hall)의 벽화

 

전시장의 왼편 벽화는 독립선언문 그림입니다. 벽화 아래에 독립선언문 원본이 전시 되어 있습니다.  오른쪽 벽화는 '헌법' 그림입니다. 그 아래에 역시 헌법 원문 (Constitution), 그리고 개정안(Bill of Rights)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벽화들을 그린 화가는 Barry Faulkner (베리 포크너 1881-1966) 입니다. 뉴 햄프셔 태생으로 하바드에서 수학하다 이탈리아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받고 벽화의 본고장 로마에서 실력을 인정받은후 1910년에 귀국합니다. 포크너는 국립 문서 기록 보관소의 벽화를 위임받고 1936년 이 두장의 벽화를 완성합니다.  이 벽화들은 캔바스에 유화로 제작한 것입니다.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한  그림인데, 완성후에 건물의 벽에 벽화로 설치가 된 것이지요.  전에 앤드루 와이어드의 생가를 방문했을때, 스튜디오에 있던 어마어마한 벽화 작품을 발견하고 http://americanart.textcube.com/44,  "저 그림을 어떻게 운반했는가?" 물었더니 캔버스를 둘둘 말아가지고 운송하여 벽에 붙인후에 미술가가 다시 세밀한 보수, 교정 작업을 했다고 가르쳐주더군요.  포크너 역시 캔바스에 유화로 그린 작품을 이리 옮겨다가 벽에 붙인후에 세밀한 완성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미국 역사상 독립 선언서가 공개된것을 1776년 7월 4일로 정하고 이날을 '독립 기념일'로 기념하는데요, Declaration of Independence 그림에는 독립 선언서 초안을 작성하는데 참가했거나, 최종 서명을 한 인물들이 담겨있습니다. 미국의 3대 대통령을 지낸 토마스 제퍼슨이 이 초안의 작성자로 알려져 있지요. 당시 그의 나이가 26세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그림에서 토마스 제퍼슨이 누구인지는 우리도 가늠할수 있겠지요.  그리고 우리에게도 친숙한 인물인 벤자민 프랭클린도 보입니다.  저도 거기까지는 알아맞출수 있었는데, 나머지는 설명을 봐야 알겠더라구요.

 

 

 

 

 

 

1776년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후에 1787년에 미국의 헌법이 발표가 되는데 (그러니까 11년이 흘렀군요) 이때 헌법에 동의한주가 동부의 13개주였다고 하지요. 이 그림속에는 헌법에 동의한다고 서명한 사람들과 서명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헌법 원문 맨 뒤에 보면 어느주의 대표가 싸인을 했는지 나와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중앙에 흰 옷을 입은 키가 남들보다 커보이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대충 감으로 맞추는거죠 뭐.  미국 역사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

 

 

 

 

 

베리 포크너는 로마에서 미술 수업을 받은 사람이고, 그곳에서 실력을 인정 받은 사람이라서 그의 벽화는 로마의 화풍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벽화속의 풍경은 '사실'과는 부합되지 않고 로마의 풍경속에 미국 역사상의 인물들을 그려 넣은 식이지요.   이 벽화가 1936년대에 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PWAP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Public%20Works%20of%20Arts%20Project ) 및 공공미술이 활기차게 진행된 시기이기도 하고, 미국 지방색이 강한 그림들이 제작되던 시기이기도 한데요, 이 벽화는 이런 흐름과는 달리 로마네스크 양식을 취하고 있지요.  이는, 미국, 특히 워싱턴 디씨 지역의 건축 양식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신생국 미국이 역사속에서 '모델'로 삼았던 것이 고대 그리스 로마의 건축 양식이었습니다.   초기 미국을 건설한 사람들은 유럽 사람들이죠. 하지만 유럽의 모델을 그대로 베껴다 쓰기에는 어딘가 껄끄럽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무엇을 모델로 할것인가? 고대(古代)로 돌아가야죠. 민주주의의 시원지라 할만한 그리스의 건축양식, 대제국이었던 로마의 건축양식을 가져와야죠. 대략 그러한 사연이 있었다 할수 있지요. 

 

제가 이 그림들 관련 자료를 찾다가 아주 재미있는 페이지를 발견했습니다.

http://teachingamericanhistory.org/convention/faulkner/

이 페이지에서 그림속의 인물에 커서를 갖다 대 놓고 클릭하면 해당 인물에 대한 안내가 상세하게 나옵니다.  누가 누구인지 궁금할때 이런 안내가 참 유용하지요.  워싱턴 디씨에 있는 벽화라면...국회도서관의 벽화를 빼놓을수가 없는데, 그곳은 모든 벽이 벽화라서, 아예 책이 별도로 나와있을정도이지요.  아아아, 어마어마한 작업이 될 것 같아서 후일로 마냥 미루고 있습니다.  나중에 그것도 안내해드릴게요.  =-)

 

 

2009년 12월 14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Ashcan School2009. 12. 12. 02:12

프랜더개스트의 얼굴없는 미녀들

 

 

 

Maurice Prendergast (모리스 프렌더개스트, 1859-1924)는 캐나다에서 출생하여 미국에서 성장한 화가입니다. 사실주의 화가 그룹이었던 The Eight (팔인회)의 멤버로 함께 전시회를 가진적도 있긴 하지만,  모리스 프렌더개스트가 남긴 그림들은  '8인회'를 표상하는 '도시' '서민의 삶'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이미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가 있었던 것이겠지요.

 

가족이민으로 세살때 보스톤에 온 프렌더개스트는 8학년 (중학교)을 마치고 14세의 나이에 '상회'에 취직을 하여 살아가면서 혼자서 그림을 그립니다.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혼자서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을 그리는 정도였겠지요. 20대때는 동생 Charles 와 함께 가축용 배에 몸을 싣고 유럽으로  가서 유럽 여행을 하기도 합니다.  유럽구경을 하고 돌아온 프렌더개스트는 그제서야 '미술공부'를 제대로 해보고싶다는 열정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결국 '액자' 사업을 하게 된 동생의 후원으로 나이 30에 파리에 입성하게 됩니다. (고호에게 그의 아우 테오가 있었던 프렌더개스트에게는 아우 찰스가 있었다고 할 만 하지요) 그는 파리의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학교에서는 '석고상'이나 '대리석상'과 같은것을 그려보라는 지시를 했지만, 그는 밖으로 나가 살아움직이는 사람들을 스케치하는 일에 몰두 했다고 합니다.

 

 

제가 미술관을 돌며 수집한 그의 작품들은 모두 '유채화'인데요, 그는 초기에 수채화를 주로 그렸고, 후기에 유채화로 선회했다고 합니다.  제가 본 작품들은, 다 똑같아 보일정도로 테크닉이 유사한데,  화집이나 언라인 자료를 찾아보면 점이나 짧은 선을 이용한 화법의 작품들이 많이 보입니다. (이렇게 경쾌할수가!)

 

카네기 미술관에 걸려있는 커다란 '소풍 (Picnic)'이란 작품은 얼핏 보기에는 수채화처럼 보입니다.  저는 사실 이작품을 '수채화'로 알고 보고 지나쳤었는데,  글을 쓰기 위해 자세히 들여다보니 유채화라고 나오는군요. Oil on Unsized Canvas 라는 설명문이 있길래, 이것은 무엇인가? 자료를 찾아 봤지요. 

 

우리가 남대문 미술상에 가면 다양한 사이즈의 나무틀에 짜여진 캔버스를 살수가 있고, 혹은 아예 두루마리 캔바스를 통째로 살수도 있는데요. 대부분 이렇게 판매되는 캔버스는 젯소 가공이 된 상태라고 합니다. 헝겊을 그림 그리기에 적합하게 가공을 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Unsized Canvas 란 말하자면 이런 밑가공을 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캔바스에 표면처리가 되지 않았으므로 페인트가 스며들면서 색다른 효과가 나올수 있겠지요.  그래서 이 유화가 얼핏 보기에 '수채화'같은 느낌이 들었던것 같습니다.

 

 

 

카네기 미술관 전시실 풍경

2009년 11월 촬영

 

 

Picnic (c.1914-1915)

소풍

Oil on Unsized Canvas

가공처리 되지 않은 캔바스에 유화

196x271cm

2009년 11월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Women at Seashore (1915)

Oil on Panel

43x81cm

2009년 11월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위의 피크닉이나 Women at Seashore 모두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것인데요. 풍경이나 등장인물들의 분위기가 유사합니다. 

 

 

 

 

 

Salem Cove (1916)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3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워싱턴 디씨의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에 걸려있는 프렌더개스트의 작품입니다.  한 소년이 아빠와 함께 손을 잡고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의 작품 구경을 하면서 슬슬 지나가다가  이 그림 앞에 서더니 아빠에게 뭐라고 종알종알 이야기를 합니다.  어린이의 눈길을 잡아끄는 그림이었던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 그림.  그래서 저도 그림 앞에서 기념사진 한장 찍어봤습니다. 저도 이런 그림 한장 갖고 싶어요.

 

 

 

 

 

Landscape with Figures (1921)

여러가지 모양이 있는 풍경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Landscape with Figures (1918-1923)

여러가지 모양이 있는 풍경

Oil on Canvas

2009년 10월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제가 가지고 있는 몇장 안되는 그림들을  제작 연도 순서대로 배열을 했는데요, 시간이 갈수록 그의 붓 터치가 세밀하고 조밀해지지요?  아무래도 수채화에서 유화로 넘어가면서, 그 이후로 그의 붓 터치가 깊이를 얻어간것도 같고요.  그럼에도, 그의 그림들에 등장하는 풍경이나 사람들이 마치 '동일한 그림'의 반복처럼 느껴질 정도로 유사해 보입니다.

 

이들 그림에 나타난 몇가지 공통적인 현상을 나열해볼까요?

 1.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것으로, 인물들의 얼굴에 이목구비가 생략되었습니다.

 2. 사람이나 나무나, 풍경 전체가 율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지된 풍경이 아니라 살아숨쉬는 여인의 가슴처럼 굴곡과 움직임이 있지요

 3.  드레스를 차려입고 소풍을 즐기는 남녀들이 나옵니다. (후기에는 동물들도 포함됩니다).

 4. 보시다시피, 모두 야외의 풍경이지요.

 

프렌더개스트의 전기 자료를 찾아보면, 프랜더개스트가 이탈리아 화풍의 영향을 입었다던가,  혹은 후기 인상파  점묘파 화가 쉬러(Seurat)의 영향을 받았다던가, 혹은 세잔느에 견주어지기도 하거니와, 나비파 보나르, 뷔야르의 영향도 제기가 되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당시의 유럽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거나 혹은 널리 알려진 화가들의 작품이, 혹은 그들과의 교류가  프렌더개스트의 예술세계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쳤을것은 자연스런 현상일수 있습니다.   그런데, 프랜더개스트는 단지 이쯤에서 주저않은 화가는 아닌듯 합니다.  그는 '자기 그림'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보입니다.  무슨 말씀인가하면,  누구의 어떤 화풍의 영향을 받았건 안받았건,  프랜더개스트는 이런 모든 '영향'을 초월하여 '이것은 프랜더개스트다'라고 할만한 화풍을 스스로 만들어 냈다고 하는 것이지요.

 

 

모리스 프랜더개스트는 1859년에 태어나 1924년에 사망했으므로 만 64년을 지구상에 머물렀다 할 수 있는데, 그는 평생 독신이었다고 합니다. 성격이 수줍고 조용하여 사교적이지도 않았고요.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나이 서른에 받기 시작한 이래로 죽을때까지 그림만 그렸으니 30여년간 미술가로 살다 간 셈인데, 그는 평생 '그림 생각'만 했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액자를 만들어 파는 일을 했던 그의 동생 찰스가 평생 그의 후원자가 되어주었지요.  결혼도 안하고, 사교적이지도 않고, 그림만 즐겨 그린 이 조용한 사람은 어쩌면 평생 '관찰자'로 살아간것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는 그의 성격은, 늘,  사람들을 어떤 풍경속의 일부로 파악을 했을것도 같고요.  그런 그에게 사람들의 이목구비, 사람들의 표정, 그런것들은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사람들'은 '풍경'으로 머물렀을겁니다.  그러니 그의 풍경화의 제목마저 Landscape with Figures (모양으로 이루어진 풍경화)라는 식으로 붙여졌겠지요.

 

미술평론가들은 이러한 그의 그림을 '사실주의'가 아닌 '추상적' 화법의 도입이라고 정리를 하기도 하는데요, 어쩌면 세잔느가 그러했듯 구체적인 관찰과 묘사, 혹은 인상(impression)을 넘어선 해체와 추상의 장으로 진입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엔 그냥 그의 삶이 그러하였던 것 같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다른 별에서 온 생명체가 멀찌감치서 풍경을 관찰하듯, 풍경속의 인물들도 풍경의 일부로 피상적으로 관찰을 했겠지요.

 

모리스 프랜더개스트는 1914년에 뉴욕으로 활동지를 정하고  The Eight 의 멤버였던 윌리엄 글랙슨즈의 윗층 (50 South Washington Square, New York)으로 이사를 합니다.  서로 이웃사촌으로 지냈다는 얘기지요. 

 

제 소견으로는 The Eight 의 멤버였던 William Glackens 는 '르누아르의 아류'에서 끝난 화가로 보이고, Maurice Prendergast는 유럽화풍도 공부했고, 유럽화풍의 영향권안에 있었지만, '프랜더개스트'만의 독특한 세계를 완성하고 떠난 화가로 보입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딱, 답이 나오쟎아요, 아! 프랜더개스트! 

 

 

 

2009년 12월 11일 redfox

 

 

후기: 모리스 프렌더개스트는, 사실, 저에게는 '듣보잡'과에 속하는 그림들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제가 무지한 관계로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을 발견했을때, 그냥 별 감흥없이 쓱쓱 지나쳤다는 것이지요. 미술관 이곳저곳에서 그의 그림을 보면서도, 프랜더개스트를 기억하기보다는 '저 그림 어디서 봤더라? 전에도 비슷한 것을 본적이 있는데...' 이정도로 생각하고 그냥 지나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The Eight 을 정리하느라 제가 갖고 있는 그림자료들을 정리하다보니, 어라? 이 사람  내가 제법 여기저기서 눈도장 찍은 사람이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어 그런데 그림 모아놓고 보니 매력있네!   뭔가 개성이 보이네!  이렇게 되더라구요.  그러니까,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더욱 매력이 느껴지더란 것이지요.  (모르고 죽었으면 억울할뻔 했네~ )

 

누군가를 새로 알아간다는 것은 참 흥미진진한 일입니다. 그것이 꼭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해도... 아니 어쩌면 그 대상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무엇을/누군가를 새로 알아가는 작업이 안전하고도 유쾌한 작업이 될지도 모릅니다.  산사람은, 알게되면 정들고, 혹은 싫증나고, 그러면 괴롭죠.  그냥 어떤 대상은 알면 알수록 유쾌해지지요. 싫증나면 떠나면 되고. 상처가 안남죠.   프랜더개스트도 혹시 그랬던걸까?  그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관조자, 관찰자로만 머물렀던걸까?

 

 

 

 

 

 

 

Posted by Lee Eunmee
Realism/Ashcan School2009. 12. 8. 01:15

 

William Glackens (1870-1938) 는 The Eight 의 멤버인 John French Sloan 과 고등학교 동창이고,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서도 함께 미술을 공부했으며, 슬로언의 소개로 로버트 헨라이와 만나게 되어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글랙슨 역시 슬로언과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매체에 '삽화'를 그리는 것으로 생계를 해결했습니다.  아무래도 대중적인 신문이나 잡지에 필요한 삽화를 그리는 작업이 이들을 사실주의적 화법으로, 대중의 삶에 다가가게 하는 요소가 되었을 것입니다.  

 

 

 

La Villette  (c. 1895)

2009년 11월 7일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1895년에는 헨라이, 슬로언을 위시한 미술가들과 함께 유럽 여행을 하기도 했고요, 헨라이와 함께 파리에서 일년간 머무르며 파리의 예술을 익히기도 합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을 가듯, 당시 미국의 미술가들은 파리나 다른 유럽의 도시로 미술을 공부하러 가는 것이 대세였습니다.  글랙슨 역시 헨라이의 영향으로 일상의 대중의 모습을 그려나가기도 했고 2008년 The Eight 전시회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그는 헨라이의 영향권 아래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르누아르와 같은 프랑스 인상파 화가의 화풍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La Villette 는 프랑스 파리의 풍경입니다. 강변에 사람들이 있고, 높은 구름다리도 보입니다. 1895년, 프랑스 파리에 처음 간 25세 청년의 작품입니다.  도시인의 풍경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있지요.

 

 

 

Boys Sliding (미끄럼 타는 소년들) c. 1900

Oil on Canvas

2010년 1월 9일 델라웨어 미술관에서 촬영

 

색조는 대체적으로 '어두운' 편인데요, 이게 뭘까? 궁금해서 들여다보면 아슴프레한 가운데, 언덕에서 미끄럼을 타는 아이들과, 언덕 아래에서 줄넘기를 하고 노는 소녀들이 보입니다.  언덕위에서 신사 혼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군요.  같은 시기에 그려진 저 위의 풍경화와 분위기가 비슷하지요?

 

 

 

 

1904년 결혼한 글랙슨스는 파리로 신혼여행을 갔고, 그 이후로도 프랑스와 유럽의 도시들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파리의 룩상브르그 정원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프랑스의 중상류층 사람들이 한가롭게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장면입니다.

 

Luxembourg Garden (1906)

2009년 10월 3일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Beach Umbrellas at Blue Point (1915)

2009년 10월 3일 스미소니언 렌윅 갤러리 (미국 공예 박물관)에서 촬영

 

 

 

 

 

Bath Houses, (욕실들), c. 1915

Oil on Canvas

2010년 1월 9일 델라웨어 미술관에서 촬영

 

 

저 위의 스미소니언 소장 작품과 이 'Bath Houses'그림의 '장소'나 색감이 비슷하죠. 제작 시기도 비슷하고요. 극히 개인적인 소견입니다만, 위의 바닷가풍경은  함께 활동했던 프랜더개스트의 그림을 연상시키고,  이 욕실들 그림은 타히티 여인들을 즐겨 그렸던,  폴 고갱의 아름다운 색감을 연상시킵니다.

 

 

 

 

 

그의 1927년작 Promenade (산책)는 얼핏 루누아르의 화사함을 연상시키지요?

 

 

 

The Promenade (1927)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글랙슨스는 The Eight 전시회의 회원이었고, 애시캔 그룹으로 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평생 이들과 교분을 유지하였지만, The Eight 전시회 이후 헨라이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루누아르 풍에 가까운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 나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전시장에서 눈으로 직접 봤던 그의 작품들은 '미국화'같지가 않아 보였고, 얼핏 보기에 '유럽 인상파 화가 그림같다'는 느낌을 줍니다.  어찌보면 '이도 저도 아닌' 작품들 같기도 한데요.  그래서 미술사적으로 크게 주목받지는 못하지요.  화가의 '정체성'이 그래서 중요하지요. 미국인은 미국적인 그림을 그릴때 정체성이 뚜렷하고, 한국인은 한국적인 무엇을 다룰때 정통적으로 보이지요.

 

며칠전에 아들놈이 학교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습니다.  각자 주제를 선택하여 전문가적으로 발표를 해야 하는 프로젝트였는데, 처음에 아들놈이 담당교수한테 '럭비'에 대해서 발표를 하겠다고 했답니다. 럭비선수를 한적이 있거든요.  담당교수가 '뜨아'한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들놈이 마음을 바꿔서, 태권도에 대한 발표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태권도장에서 태권도 지도를 하는 유단자거든요). 그러자 담당교수가 '그것을 발표하라'고 흔쾌히 대꾸를 했다고 합니다.  아들놈에게는 '럭비'나 '태권도'나 모두 자신이 잘 설명할수 있는 분야였는데  교수가 볼때,  명백하게 '코리안'인 학생이 '럭비'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 보다는 '태권도'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훨씬 '전문가'처럼 보였을 것이지요.  아들녀석은 태권도복까지 갖춰 입고 프레젠테이션을 했고,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합니다.

 

교수를 '인종주의자'라고 탓 할 생각은 없습니다. 가령 '일본인'이 유도복을 입고 설명을 하면 어쩐지 그 사람이 유도의 전문가처럼 보이겠지만,  아프리칸이 유도복을 입고 설명하면 어쩐지...아닐것 같다는 느낌이 들테니까요.  그냥 '눈으로 보기에' 얼핏 그런 인상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정관념이라던가 '스테레오 타이핑' '인종주의'라고 비난만 할수는 없지요.

 

사람이 갖고 있는 인지구조는 본인 스스로도 통제가 잘 안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대개 이런 설명 불가능한 요소들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미국인 글랙슨스가 아무리 근사한 그림을 그려도, 그것이 어쩐지 이도 저도 아닌, 유럽화가의 작품같은 애매한 분위기를 갖기 때문에, 저와 같은 '미국화란 무엇인가' 들여다보는 이방인의 눈에는 그저 애매할 뿐이지요.  음...저의 글도 참 애매해지고 있군요...

 

 

2009년 12월 7일 redfox

 

 

 

The Purple Dress (보라색 드레스) 1908-10

Oil on Canvas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에서 촬영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글랙슨스의 보라색 드레스 그림을 발견했을때, 얼핏, '저 그림 내가 어디서 봤는데...' 이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림 파일들을 뒤져봤지요.  그리고, 제 느낌에 매우 유사해 보이는 그림을 발견했습니다.  저한테만 이런 느낌이 들지도 모르지만요.

 

Pierre Bonnard (1867년생-1947년 사망).

Misia on a Divan  ca. 1907-1914

 

 

William Glackens 는 1870년생 (1938사망).  Pierre Bonnard 는 1867 년 출생 (1947년 사망.) 두 화가 모두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비슷한 시기를 살던 사람들이지요. 보나르는 프랑스 태생이고, 글랙슨스는 미국 태생이지만, 두 사람 모두 파리에서 미술작업을 하면서 조우했습니다.  글랙슨스의 자료를 보면, 그가 프랑스에서 인상파 화가들 나비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나비파화가로 우리에게 친숙한 사람들이 뷔야르와 보나르 이지요.  이 두 사람은 미국의 큼직한 미술관에 가보면 늘 함께 붙어다닙니다. 보나르 그림 곁에 뷔야르 그림이 있습니다.  늘 함께 있습니다. 마치 오스트리아의 화가 클림트와 에곤 쉴레 두 사람의 그림이 짝짝꿍이 되어 붙어 다니는 것처럼. (클림트와 에곤 쉴레 역시 서로 불가분의 관계이지요. 클림트가 에곤 쉴레의 후견인, 스승이 되어주긴 했으나 이들의 관계가 일방적이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지요... 유럽 미술은 이쯤에서 ....) Nabis 는 '예언자'라는 뜻의 히브리 말이라고 합니다. 신비하고 독특한 붓의 터치와 색감을 유지 했는데요.  글랙슨스 역시 이들의 작품 세계를 인지하고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두 작품의 제작 연대도 거의 일치하지요.

 

뭐 두 여자 주인공들의 표정보다는, 그림 전체에 흐르는 붓의 터치와 전체적인 색감이 제게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제가 보나르의 '광팬'쯤 되는데... 제가 보나르를 좋아한다는 것을 ...우리 식구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제 남편은, '하고 많은 화가중에 왜 하필 그런 그림이 좋은가' 의아해 하지요. 제 남편은 보나르의 그림이 정신병적이라고 싫대요. 내 눈엔 이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데...  보나르가 좀 정신병적인 면이 있지요. 정신병자같은 여자를 수십년간 지성껏 돌보며 외톨이처럼 살다 간 화가거든요.  보나르의 그림에는 목욕하는 여자가 등장하고, 욕조 주변의 여자의 풍경이 다수인데 그 여자는 평생 욕조에서 살다 갔대요. 무슨 질환 때문에 그랬다는데, 보나르는 그 여자를 평생 돌봤고요.  저는 클림트의 그림을 보면 -- 차멀미같은 멀미를 느낍니다.  느끼해서 빙빙 도는것 같아요.  현기증이 날정도로 아름다우면서도 느끼하죠. 제가 클림트의 그림을 보면서 기분나빠하듯, 제 남편은 보나르의 그림이 기분 나쁜가봅니다.  아... 사람이 다 제각각이고, 각자 자기상처를 핥고 사는 짐승이라,  뭐 그렇다는거죠.)

 

 

화면 오른쪽에서 두번째 그림. 그것이 보라색드레스 그림입니다.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에서 촬영). 오른쪽의 발레 그림은 Everett Shinn,  왼쪽 풍경화는 Robert Henri, 왼쪽 설경 그림은 Rockwell Kent, 그 곁에 잘 안보이는 그림은 George Luks. 모두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입니다.

 

 

글랙슨즈 그림을 연대순으로 정리했는데요, 위에서부터 차례차례 내려오다 보면, 그의 그림이 초기에는 어두컴컴하다가 점차 밝고 화사해져 간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밝은 색감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어두운건...싫더라구요.  (나의 어둠만으로도 나는 지쳐있으므로...어둠에서 밝음을 지향하는거죠, 하하, 옛날에 우리나라 정보기관의 슬로건 아니었나요? 우덜은 어두운곳에서 밝음을 지향한다라던가 뭐라던가...저는 정보기관은 무조건 무서워요. 무서워요. 무서워요.~~ )

 

 

 

 

2010년 1월 4일 내용 보충 redfox.

2010년 1월 18일 내용 보충 red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Ashcan School2009. 12. 7. 23:22

소년가장 슬로언

 

John French Sloan (1871-1951)은 펜실베니아 태생의 미국 사실주의 화가로 Henri 를 중심으로 모인 Ashcan (애시캔) 그룹과 The Eight (8인회)의 멤버로 활동하였습니다.  존 슬로언은 필라델피아에서 성장하였는데 그의 고등학교 동창중에 후에 The Eight 의 멤버가 되는 William Glackens를 만나게 됩니다.

 

1888년 그가 16세 되던해에 아버지가 정신질환으로 쓰러지면서 슬로언이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소년가장이 되고 맙니다. 그는 책방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책을 읽고 화집을 들여다보며 혼자 그림을 그리던중 정식으로 야간 미술 과정에 입문하게 되고 후에는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Thomas Pollock Anschutz 의 지도를 받게되며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Willaim Glackens 를 다시 만나게 되지요.

 

1892년 Robert Henri 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들의 연대가 시작됩니다. 슬로언는 The Philadelphia Press 의 미술부에서 삽화가로 일을 하며 미술 작업을 계속해 나갑니다.

 

슬로언의 아내

 

슬로언은 아내와의 관계도 '소설'적인데,  그의 아내 Anna Maria 를 술집에서 만나서 사랑에 빠져 1901년에 결혼하게 됩니다.  안나 마리아는 백화점 점원으로 일했지만 매춘 경력이 있으며 음주벽이 있고, 아마도 이러한 전력을 거친 여성들이 보일법한 히스테리컬한 우울증도 보였던 것 같습니다. 슬로언의 아내에 사랑은 지극정성이었고 한 의사의 제안으로 1906년부터 1913년까지 매일 매일 자기가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는지 일기를 쓰게 됩니다.  (이런 남자 또 한명 있죠, 삐에르 보나르... 삐에르 보나르는 수십년간 목욕탕에서만 지내는 특수한 병을 가진 여인을 돌보며 한세상을 보냈지요. 삐에르 보나르의 그림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목욕하는 여자, 삐에르의 평생의 연인.)  그의 부인은 1943년에 죽고, 슬로언은 이듬해에 새장가를 갔으며 슬로언 자신은 1951년에 운명합니다.

 

슬로언의 사회주의 운동

 

 

1912년 그는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잡지 The Masses 에 미술 편집인으로 참가하며 다른 사회주의 사상이 강한 매체인 Call, Coming Nation 지를 위해서도 삽화를 그려줍니다.  특히나 그가 그린 1914년 6월호 The Masses  표지화가 지금도 자주 인용되거나 소개되곤 하는데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페이지에 Ludlow 학살사건의 이야기가 잠깐 소개된바 있습니다.)  그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고 민중의 생존권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긴 했지만, 예술가로서 슬로언은 '선전 (propaganda)'의 '도구'로 미술 작업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회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에는 긍정하면서도 예술이 '극단적인 정치선전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할만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예술만을 위한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반문할수 있을텐데...제가 추측하기에, 슬로언은 아마도 그 주위의 '사회주의자'들의 어떤 행동들에 거부감을 가졌을법 합니다.  그 '어떤 사회주의자들'이 요구하는 '선전물'을 만들기 싫었겠지요.  그가 꿈꿨던 사회주의와 그가 속한 사회주의자의 무리들의 행동 양식이 일치하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과 거리를 두고 싶었을겁니다.  

 

서민속에 서있던 남자

 

존 프렌치 슬로언의 작품세계는 크게

 

(1) 뉴욕의 풍경

(2) 대중의 삶의 풍경

(3) 잡지,책의 삽화가로서 작업한 세밀한 판화 작품들

 

으로 정리 될수 있습니다. 일단 그가 삽화가로 일했으므로 대중 생활 관련 묘사 작품들이 많은데, 이런 성향은 이미 십대에서부터 생계형 청년 가장으로 세상에 나아갔던 그의 삶의 이력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가 즐겨그린 도시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 가령 도심의 창가에서 빨래를 너는 여인이나, 건물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들, 술집 풍경 역시 그의 삶과 밀착된 풍경이었을 겁니다.  특히나 20세기초의 뉴욕의 전철과 천철 주변 풍경은 그의 '전매특허'와 같은 주제라 할 수 있지요. 조지 벨로우즈 페이지에서 (http://americanart.textcube.com/198)  권투선수 그림을 즐겨그린 미국 화가가 누군가? 이런 퀴즈가 나오면 자동으로 '조지 벨로우즈'를 외치면 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미술관에서 '뉴욕 고가 기차' 풍경화가 멀리서 보일경우,  당신이 애인과 함께 미술관 구경중이라면 "저기 저 뉴욕 풍경속에 고가 기차 그림이 있는 저 그림 말야...저거 아마 존 슬로언이라는 화가의 그림일거야..." 하고 '아는체'를 해도 크게 실례가 안 될 것입니다.

 

 

 

뉴욕 고가 기차 (Elevated Train: EL)

 

The City from Greenwich Village (1922)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바라본 뉴욕
oil on canvas
overall: 66 x 85.7 cm (26 x 33 3/4 in.)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2009년 9월 촬영

이 그림은 비가 그친 겨울 저녁, 맨하탄 남단에서 바라본 맨하탄의 거리 풍경입니다. 고가기찻길 위로 기차가 불을 밝히고 지나가고 비에젖은 도로에 자동차의 불빛이 반사됩니다. 비가 갠것을 눈치채는 이유는 하늘이 부염하게 밝아 있다는 것이지요. 도시는 촉촉히 비에 젖어 있고 골목의 불빛은, 그것이 골목이라서 더욱 밝아 보입니다. 건물 옥상의 물탱크도 보이고, 다리미의 모서리같이 각진 고층 건물이 오른쪽에 보이는데, 건물에서는 불빛들이 새어나옵니다. 일층의 모든 창문은 손님들을 기다리는듯 환하게 불이 켜져있습니다.  옹기종기 걸어가는 행인도 몇명 보이지요. 그림의 전체적인 윤곽은 우리가 마치 몇층 건물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듯 합니다. 액자를 창틀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창밖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기분이 듭니다.

 

 

다음 그림은 워싱턴 필립스 콜렉션이 소장하는 Six O'clock, Winter (1912) 라는 또다른 고가 기차 (EL) 풍경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사진 파일이 상태가 안좋아서 웹에서 얻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속의 여섯시의 풍경은 오전일까요 오후 일까요? (제가 볼때는 오후 여섯이인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단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기로 하고요...  )  이 작품이 1912년작이고, '그리니치 빌지지에서 바라본 뉴욕'이 1922년 작품이므로, 두 그림 사이에는 10년의 세월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두 그림을 함께 놓고 보면, 1912년 작품은 고가기차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선이고, 1922년 작품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이지요.

 

 

 

 

http://www.phillipscollection.org/research/american_art/learning/sloan-learning.htm

 

 

 

무료 커피

 

The Coffee Line (1905)

무료 커피를 받기 위해 줄서있는 사람들

2009년 11월 7일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뉴욕에서 무료 커피를 받기 위해 긴 행렬을 이룬 실업자들을 발견한 슬로언이 그려낸 겨울 저녁의 풍경입니다. 길에는 눈이 쌓여 있지요. 슬로언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 어둡고 긴 행렬을 묘사 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빈곤의 문제가 그를 사회주의 사상으로, The Masses 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비가 들이치는 페리선

 

Wake of the Ferry, No. 1 (1907)

페리선의 물길

2009년 10월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지금도 뉴저지에서 맨하탄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중에 배(Water Taxi)로 강을 건너는 직장인들이 있습니다. 100여년전 뉴욕과 뉴저지를 왕래하는 페리선을  그린것은 당시로서는 '엉뚱한' 시선이었을겁니다.  비가 들이키고 물결이 거칠게 일고, 전체적으로 '내가 그 페리선을 탄듯' 심란한 기분이 드는 그림입니다.  오른쪽 구석에 서있는 여인도 그래서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요.

 

이 그림은 그림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 만큼이나 심상치 않은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슬로언은 1904년에 뉴욕으로 활동지를 옮겼는데, 그의 알콜중독자 부인은 이후로도 걸핏하면 필라델피아의 집으로 가버리곤 했던 모양입니다. 그의 아내가 필라델피아로 가기위해 이 페리호를 종종 이용했지요. 결국 이 그림속의 여인은 슬로언의 알콜중독자 아내의 뒷모습이었던 것인데요.  1907년에 슬로언이 그의 작업실에서 The Eight 전시회를 준비하기 위해 모임을 갖고 있었을때 부인이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남자 작업장에 여자가 허락도 안받고 나타난거죠, 아마 그렇겠죠.) 술도 몇잔 마셨겠다, 화딱지가 난 슬로언이 그 자리에서 의자를 집어던져가지고 이 그림이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래가지고,  나중에 이 그림을 또다시 그리게 되는데 그 (2)번 그림은 필립스 콜렉션에 소장되어 있고, 이 (1)번 그림은 슬로언이 (2)번 그림 그린후에 손을 봐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Beal 2002).  아무래도 이런 뒷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페리선의 풍경이 슬로언과 그의 아내의 풍경이었다 싶기도 하지요.

 

 

 

 

 

 

이상에서 보신바와 같이 대도시의 뒷골목의 삶의 풍경, 이런 풍경은 Henri 가 주도했던 Ashcan 일당들의 주요 소재라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각에서 '이런 그림이 뭐가 대단한가?' 의구심이 들 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그려진 1922년 미국 화단의 상황속에서 이 그림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각은 달라질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미술의 역사는 유럽에 비해서 '일천'할수밖에 없지요. 제가 에드워드 힉스나 조쥬아 존슨과 같은 초기의 '포크 아트' 작가들에 대하여 애정을 갖고 소개를 한 이유가 있는데요, 미국은 초기에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였고 유럽 문화권의 식민지이기도 했습니다. 미국 자생의 문화가 없었다고 봐야지요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를 제외하면).  그래서...Henri 를 위시한 '사실주의' 화가들의 탄생 이전의 미국 회화사는 '유럽 베끼기'의 연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장차는 미국의 인상주의나 그 이전의 풍광, 초상와 위주의 미술과 미술가들을 차례로 소개하겠지만, 제가 왜 이들부터 시작을 안하고 풍속화가 잠깐 건드리다가 '사실주의'로 점프를 해버렸는가하면,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들 이전의 작가들에게서 제가 별 매력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뭐 대략 사이비 유럽미술 냄새가 고약하게 난다는 느낌이 드니까요. 제가 감지하기에 미국의 사실주의 화파들부터, 미국의 미술은 자신의 정체성을 슬슬 세워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에서부터 미국의 풍경이, 미국의 서민이 화면의 중심에 슬슬 등장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슬로언의 전철 그림과 도심 그림이 매력적으로 비쳐지는 것이지요. (이것은 미국인이 아닌, 아시아 출신의 어느 외국인이 이방인의 시각으로 미국 미술을 보는 관점이긴 합니다.)

 

 

 

Yeats at Petitpas'

 

이 그림은 뉴욕 웨스트 사이드의 어느 하숙집에서 열린 파티 장면입니다.  Petitpas 는 프랑스 출신의 두 자매가 경영한 하숙집 이었습니다. 

 

이곳에 영국의 철학자이며 예술가였던 John Butler Yeats (존 버틀러 예이츠 1839-1922)가 머물렀는데, 그는 영문학도들에게 (그리고 교양 차원에서 영시를 읽은 사람들에게)  친근한 시인 William Butler Yeats(1865-1939) 의 아버지입니다.  존 버틀러 예이츠는 69세 되던 해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애시캔' 화가들과 친교를 맺었고, 결국 뉴욕에서 사망하여 뉴욕에 뼈를 묻었지요. 그러고보면, 그의 아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유럽'문화를 이상화 했는데, 아버지인 자신은 말년에 문화 불모지와 같은 뉴욕에 와서 세월을 보내다가 갔군요.

 

흰 턱수염의 노인이 존 버틀러 예이츠이고, 오른쪽 끝에 보이는 검은머리 남자가 존 슬로언이군요. 음식을 들고 서있는 이는 하숙집 주인이고요, 그이의 왼쪽에 모자를 쓴 여인이 슬로언의 부인이라고 합니다. 존 버틀러 예이츠가 이 하숙집에 머무는 동안 이곳은 당시 미술,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즐겨 모이는 장소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Yeats at Petitpas' (1910)

Oil on Canvas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2009년 10월 3일 촬영

 

 

 

해부학교실

 

존 슬로언은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서 Anschutz 선생의 지도를 받았는데, 다음 작품은 해부학 강의를 하는 안슈츠 선생을 에칭 판화로 묘사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Anshutz on Anatomy (1912)

해부학 교실의 안슈츠 선생

Etching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2009년 9월 19일 촬영

 

 

 

 

제 사진 상태가 좋지 못해서, 웹에서 좀더 선명한 이미지를 빌려 왔습니다.  강단아래에 안슈츠 선생이 서서 강의를 하고 있고,  강단위에 인간 골격이 서있고, 그 옆에 성기만 가린 남자 누드 모델이 서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둘러 앉거나 서서 해부학 강의를 듣고 있는데요. 학생들중에 여학생도 보입니다.  아마도 여학생들이 없었다면 남자 누드 모델이 성기를 가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1900년대 초반에 미국 미술 학교에서는 남녀학생이 함께 작업하는 곳에서는 누드 모델이 성기를 드러내면 안되었다고 하지요.

 

 

슬로언에 관심이 많아 자료를 많이 보긴 했는데, 막상 제가 가진 작품 사진 파일이 미미하여 그의 미술 세계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소개할수 없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저는 화집이 아닌 '내 눈'으로 본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기로 작정을 했거든요.  나중에라도 슬로언 작품들이 보이면 보이는대로 잘 갈무리하여 좀더 그에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화집에서 본, 제가 좋아하는 그의 작품들로는 그의 '빨래'관련 그림들인데요. 슬로언이 도심에서 빨래를 널거나, 걷거나 하는 여인들을 모티브로 그린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 참 아름답지요. 그래서 '빨래' 주제의 페이지를 하나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는데요, 이것 역시 훗날로 미루기로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1. http://www.nga.gov/fcgi-bin/tinfo_f?object=52079

 2. Sherry Babbit (2008). Philadelphia Museum of Art: Handbook of the Collections. Philadelphia, PA.

 3. Graham W. J. Beal (2002) American Beauty: Paintings from the Detroit Institute of Arts 1770-1920. Scala Publishers Ltd. London, UK.

 

 

 

 

2009년 12월 6일 red 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Ashcan School2009. 12. 6. 02:41

New York (1911)

George Bellows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워싱턴 국립미술관 (NGA)에서 촬영

 

사진은 클릭하시면 크게 확장시켜 보실수 있습니다.

 

뉴욕풍경

 

 

Goerge Bellows (1882-1925) 의  New York (1911)은 대략 100여년전의 뉴욕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자동차와 마차가 뒤섞여 있고, 고층 건물들과 그제나 이제나 여전한 인파가 보입니다.  사실 이 뉴욕의 풍경은 사진과 같은 실제 광경은 아니라고 합니다. 뉴욕의 여러 장면을 뒤섞어서 뉴욕의 분위기를 전달했다고 봐야겠지요. 얼핏 보면 타임 스퀘어 같기도 하고 얼핀 보면 펜스테이션 앞 같기도 하고, 어찌됐거나 우리가 한번쯤 가봤거나 혹은 영화나 그림을 통해서 지겹게도 많이 본 뉴욕 번화가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일백여년전의 풍경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복장이나 마차 장면을 제외하면 어느 화가가 며칠전에 그린 것이라고 해도 그럴싸해 보입니다.

 

조지 벨로우즈 (1882-1925)는 앞서 소개드린 The Eight (팔인회)나 Ashcan (애시캔) 그룹의 정식 회원으로 활동을 한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The Eight, Ashcan school 의 리더였던 로버트 헨라이 (Robert Henri 1865-1929)와 친분이 두터웠고, 헨라이의 미술관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의 작품들이 팔인회, 애시캔 회원들의 화풍과 통했기 때문에 조지 벨로우즈를 '애시캔'의 일원으로 평가하는 비평가들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의 작품들이 미국의 도시, 서민들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냈으므로 조지 벨로우즈를 애시캔 그룹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정리를 해보는 것입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오하이오(Ohio) 의 주도(행정수도)인 콜럼버스 (Columbus) 태생입니다. 이곳에 오하이오 주립대 (Ohio State University)가 있지요.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주로 야구선수와 교지 삽화가, 그리고 잡지의 삽화가로 활동했습니다.  오하이오 주립대에 한번 가본적이 있지요. 제 친구들이 그곳 수학과에서 공부를 했는데, 한 친구는 공부 마치고 수학자로 살고 있고, 또 한 친구는 아직도 거기서 공부중입니다. (글 쓰다가 친구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Robert Henri 역시 오하이오 출신인데 그는 신시내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조지 벨로우즈와 로버트 헨리가 고향이 가까웠다는 이유로 더욱 친근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스포츠맨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오하이오 주립대를 졸업한 후에 프로야구 선수가 될것인가 잡지 삽화가로 살것인가 고민하다가, 미술 수업을 받겠다고 작정하고 뉴욕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뉴욕 미술학교 선생으로 재직하는 로버트 헨라이를 만나게 되고 그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특히나 그의 권투경기 장면이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 합니다.  그의 도시 풍경이나 다른 그림들도 그 나름의 힘과 역동성이 느껴지지만, 단답형 상식 퀴즈 대회에서 '권투하는 그림' 내 놓고 '이거 그린 사람?'하는 퀴즈가 나온다면 자동으로 '조지 벨로우즈!'을 외칠만 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그림 세계를 단순무식하게 정리해본다면 대략 세가지 정도로 분류가 됩니다:

 

 (1) 그를 대표하는, 권투선수 시리즈

 (2) 도시 주변의 풍경과 서민의 삶

 (3) 일반 서민의 초상화

 

제가 미술관들을 돌면서 '사냥'한 그의 작품 사진들을 주제별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권투선수

 

Both Members of This Club (1909)

두 선수

Oil on canvas, 45 1/4 x 63 1/8 in. (115 x 160.5 cm)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흰색의 하일라이트가 들어간 왼쪽 선수, 얼굴에 피가 낭자합니다.  오른쪽 선수, 치고 들어가는 대각선 구도가 역동적이지요. 반대방향의 대각석 구도의 관객 풍경이 그림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피가 낭자한 가운데, 아래 중앙의 관객은 입을 벌리고 웃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권투선수가 피를 흘리거나 말거나, 관객의 입장에서는 링에서 피가 튀고 살점이 튀고 누군가 되게 쓰러지고 그래야 신이 나는 법입니다.

 

웹에서 조지 벨로우스 이미지를 찾아보시면 이와 유사한 다른 권투경기 장면 그림들을 많이 발견하실수 있습니다. 그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조지 벨로우즈의 권투경기 그림을 찾아 천지를 유랑하며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어릴때, 할아버지가 권투중계의 팬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권투중계의 일정을 일일이 표시해놓고, 그의 일기장에 적어놓고 절대 빼놓지 않고 들여다봤습니다. 아마도 돌아가실때까지 그러셨을겁니다. 단지 중계방송만 보신것이 아니고, 서울 우리집에 오시면, 어린 우리들을 이끌고 월곡천 건너, 시장통에 있는 '체육관'에 구경을 가곤 했습니다. '체육관'이 뭐하는데냐 하면 당시 무명 아마추어 선수들이, 혹은 권투선수 지망생들이 모여서 연습하는 '도장'이다 이거죠.  우리들은 거기서 밤이 이슥하도록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고, 혼자 줄넘기하거나 혼자 샌드백 치면서 훈련하는것을 구경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체육관에 따로 '탈의 시설'이 없었던것 같습니다. 가끔 우리는 잘생긴 '오빠'들의 (그때 나는 꼬맹이였으므로) 실한 엉덩이 구경도 할수 있었는데,  선수들이 체육관의 구석진곳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거든요. 그 구석진 곳이 하필 우리가 염탐하던 창가였으므로 그들이 창가쪽 구석에서 후다닥 바지를 내리고 체육복으로 갈아있거나, 체육복에서 평상복으로 탈바꿈하는 광경을 볼 수 밖에 없었지요. (일부러 그런게 아니고요 -.-;; )   아니...엉덩이밖에 안 봤습니다... 헤헤헤.

 

어릴때는 할아버지가 권투중계 보시는 것이 못마땅했는데요, (왜냐하면 내가 어린이 프로를 볼 수가 없으니까) 지금도 그런 스포츠 중계에 재미를 못느끼므로 여전히 볼 일이 없는데요, 하지만 이 그림은 제 맘에 듭니다.  조지 벨로우즈가 무슨 맘으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권투 장면을 그의 그림 소재로 잡았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신선한' 시도였고, 결국 그의 트레이드마크 (Signiture) 작품이 되고 말았지만, 그것 말고도,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인생 이렇게 치고 받고 맞다가 뻗는거지...하는 비감한 생각도 들고,  누구나 그런거지, 나만 유독 두드려 맞는것도 아니지, 이런 위안감이 든다니깐요, 글쎄.

 

 

 

2009년 12월 13일,  국립 미술관에 가서 조지 벨로우즈의 Both Members of This Club (1909)라는 작품을 다시 감상하고 있었는데요, 마침 미술관 도슨트(Docent 전문 안내원)가 사람들을 이쪽으로 안내해와서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더군요. 그래서 곁에서 귀동냥을 했지요. 새로 알게된 사실은,  1900년 초반 당시에는 상업적으로 복싱 경기를 하는것이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공개적인 복싱매치가 아니고, 남성들의 '음성적인' 클럽에서 진행된 경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목도 Both Members of This Club (이 클럽의 두 회원)이라는 식으로 달린 것이라고 하네요.  두 '선수'라고 하면 안되고, 그냥 클럽의 회원간의 친선경기같은.    그러면 이 클럽에서는 복싱만 했겠는가?  다소 '음성적인' 클럽이었으므로 그 안에서는 복싱 말고도 다른, 다양한, 그러나 저로서는 전혀 알수 없는, 남자들만의 '음성적'인 오락이 진행되었겠지요~

 

 

 

 

 

뉴욕 빈민가의 아이들

 

 

이 작품은 위의 권투선수 그림보다 2년 앞서서 그려진 것입니다.  뉴욕의 East River 강변에는 그 당시 가난뱅이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서울의 허술한 한강변 산동네를 연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제목이 Forty Two Kids (42명의 아이들) 인데요 제목의 'kid'가 단순한 '아이들' 이 아닙니다. 아이들이라는 영어 단어로는 Children 이 따로 있지요.  요즘 Kids라는 단어를 '아이들'이라는 의미로 흔히 사용하기는 하지만 백여년전 이 kid 라는 말은 '슬랭'으로 대개 이민자 아이들처럼 가난뱅이 아이들을 일컫는 표현이었다고 합니다. 그냥 아이들이 아니라...말하자면...'애새끼들'이라는 뉘앙스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

 

이 kids 라는 어휘를 저도 아주 조심해서 사용하는 편인데, 제가 교육을 전공했고, 학교에서 교사로도 일을했고, 그래서 대학원 수업을 들을때도, 온통 '아이들,' '학생들' 관련 이야기였지요. 그러니까 주로 사용하는 어휘가 students, children, ESL children, ESL students 뭐 이런 언저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무심코 지도교수와 논문 이야기를 하다가, "These ESL kids..." 뭐 이러고 말을 하니까 지도교수가 주의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학생을 존중해야 하는 교육자이다. students 나 children, learners 말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적합하지만 kids 라는 말은 부적합해보인다."  그러니까 그 kids 라는 어휘가 아직도 품위있는  어휘로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 kid의 원뜻은 염소새끼 입니다.)

 

자 우리들의 조지 벨로우즈 선수(?)가 그 가난뱅이 뉴욕 빈민가의 이민자의 '애새끼'들을 화폭에 담았다는 것인데요. 정말 42명인지 한번 헤아려 볼까요?

 

 

Forty Two Kids (1907)

42명의 아이들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촬영

 

 

이 작품이 1908년 어느 전시회에 소개가 되었을때 평단의 반응은 싸늘하고 조롱기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뭐 이따위 그림을 그림이라고 그렸냐 이거죠.  가난뱅이 애새끼들이 허술한 강변에서 노는 것이 무슨 그림의 소재가 되는가 씹었을겁니다.  하지만 평단의 싸늘한 반응과는 달리, 이 작품은 곧 개인 콜렉터에게 팔려나갔는데, 이것이 조지 벨로우즈가 최초로 개인 콜렉터에게 판매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워싱턴의 코코란 미술관에 있지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Bill Bryson 의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kid 의 일화중에서 전쟁이후 베이비붐 세대로 성장했던 작가 빌 브라이슨의 회고가 소개됩니다.  그가 과장되게 술회하기를, 전후 베이비붐 세대였던 자신들은, 어딜가나 애가 넘쳐나서,  그가 살던 아이오와 시 변두리의 강변에 가면 수천명의 아이들이 모여서 멱감기를 했다고 하는데요.  물론 조지 벨로우즈 그림속의 아이들은 1907년 8월의 아이들입니다.  베이비붐 세대보다 50년전에 '이민자 붐' 세대의 아이들이지요.

 

이 그림이 제게도 낯설지 않은 이유는, 비록 지구 정반대쪽 대륙에서 성장했지만, 저 역시 60년대 70년대 베이비붐 시대의 일원으로 변두리 가난뱅이 아이로 성장했다는 공통 분모 때문일것입니다.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의 회고로는 '네 오라비나 네가 태어나던 시절에는 어느 집에서나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어느집 여자나 배가 불러 다녔다. 애가 참 많이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 많은 애들이 뭘하고 놀았을까요.  사실 도심에서 성장했지만 저는 어린시절 골목에서 뭘 하고 놀은 기억이 별로 남아있지 않고,  즐겁게 논 기억은 모두 시골집에서였습니다.  여름 한철 시골 개울가에 가면 약속도 필요없이 아이들이 있었고, 우리들은 수영복도 없이 그냥 입은 옷을 벗어던지고 물에 들어가 놀았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저는 초등학교 2학년때까지 옷을 벗고  개울에서 물놀이를 했습니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아직 몰랐다는 것이지요) 여자아이나 남자아이나 그냥 물속으로 뛰어 드는 것으로 각자 부끄러운데를 가렸다고 생각하고 그냥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는 것이지요.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빤쓰라도 입고 물장구를 쳤고, 초등학교 5학년부터는 싸구려 나이롱 수영복을 입고 노는 '문명인' 반열에 들 수 있었지요.

 

제가 가끔 이런 저의 '야만적'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  서울이나 대도시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또래 친구들은 저를 '원시인' 쳐다보듯 바라보며 무슨 외계인이나 거짓말장이를 대하듯 휑한 표정으로 대합니다.  자기네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풍경속에 내가 있었다 이거죠.  하하하. 사람들은 자기가 처한 환경을 '평균적' 환경으로 인지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신의 경험 영역 바깥의 일은 외계의 일처럼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나'역시 피할수 없는 한계죠. 나 역시 그런 눈으로 남을 판단할 것이므로.  조지 벨로우즈가 '애정'을 갖고 변두리 아이들이 벌거벗고 노는 풍경을 그렸을때, 어떤이들은 '이것도 그림이냐'로 반응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럴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지구상에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거죠...

 

 

첨언:  그런데 위의 42명의 아이들 그림이...어쩐지 Thomas Eakins The Swimming Hole(1885) 라는 그림을 연상시킵니다.  토마스 이킨스 (1844-1916)는 미국 사실주의 미술가들의 '대부'쯤되는, 후에 활동하는 사실주의 화가들 (The Eight, Ashcan)에게 가장 영향을 끼쳤던 미국화가라 할 만 합니다.  조지 벨로우즈가 선배 대가인 이킨스의 그림을 염두에 두었는지 아닌지는 알수 없으나, 참 닮았단 말이지요...  ;-)

 

 

 

 

 

변두리의 푸른아침

 

멀리로 고층 건물들이 밀집한 것으로 보아 역시 뉴욕의 강변 풍경으로 보입니다. 역시 강변 부두에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고 누군가 불을 피웠는지 흰 연기도 솟아 오릅니다.  대략 어느 추운 겨울 아침 강변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으니까요. 추우면 웅크리쟎아요. 이들의 하루는 오늘도 고단하게 흐를것입니다.  이들의 곤고한 풍경과는 달리 푸른 색조가 아름답지요? 

 

 

Blue Morning (1909)

푸른 아침

Oil on Canvas

86.3 x 111.7 cm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다리밑 외딴 숙소

 

그림 오른쪽 구조물이나 그 위를 지나는 판으로 보아 이것은 다리(교각)의 일부 같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뉴욕시의 어느 커다란 다리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있고, 그림의 중앙에 6층짜리 건물이 똠방, 대똑하게 서있습니다.  이곳이 그림의 제목이 되는 '외딴 숙소'인것 같습니다.  'tenement' 라는 어휘를 언라인으로 검색해보면 이런 의미가 소개가 됩니다. (http://www.thefreedictionary.com/tenement)

 

1. A building for human habitation, especially one that is rented to tenants.
2. A rundown, low-rental apartment building whose facilities and maintenance barely meet minimum standards.

해석: (1)  세입자 임대용의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
        (2) 극히 기초적인 수준도 안되는 시설을 갖추고 있는  싸구려 아파트 빌딩

 

 

The Lone Tenement (1909)

외딴 숙소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그림 왼편에 사람들이 모여서 불을 쬐고 있는것 같지요?  멀리 강에 은은한 햇살이 비치는데, 다리밑의 사람들은 불가에 모여 서 있습니다. 웅덩이에 보이는 물은 살얼음이 얼었을것 같습니다.  이런 뉴욕의 풍경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해던 Georgia Totto O'Keeffe (November 15, 1887 – March 6, 1986) 가 그렸던 뉴욕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Georgia O'Keeffe
Cityscape with Roses
1932
oil
84 3/8 x 48 1/2 in.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the Georgia O'Keeffe Foundation

 

 

1932년이면 미국의 경제 암흑기 입니다. 그 당시 조지아 오키프가 묘사한 뉴욕은 장미빛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작가의 작업 취향이야 각자 자유이고 조지아 오키프가 매력적인 화가임에는 틀림없으나,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에 '사회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돈많은 사진가 스티글리츠의 사랑속에 경제적인 어려움도 모르고 예술에만 전념했겠지요.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만을 들여다볼때는 그의 작품에 감탄을 하다가도, 그 당시에 혹은 그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하던 작가들과 비교해보면, 어딘가 조지아 오키프의 미술세계가 '공허'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사람'한테 관심이 없었던 사람 같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러한 저의 비판적인 시각은, 사람이나 '세상'에 관심을 가진 저 자신의 취향에서 출발하는 것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냥 문득, 조지 벨로우즈의 뉴욕 풍경 그림을 보다가, 그 속의 가난뱅이 애새끼들이라던가, 빈민들의 풍경이 그려진 그림을 보다가 문득,  조지아오키프의 뉴욕 풍경이 떠오르면서...아하...이들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았던거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National Gallery of Art 에 조지 벨로우즈의 그림이 걸려있는 풍경입니다. 왼쪽부터 '권투선수' '푸른 아침' 그리고 '뉴욕' 그리고 '쓸쓸한 숙소'가 차례차례 보입니다.

 

 

 

초상화들

 

 

다음은 크라이슬러에서 '사냥'한 그의 '피아노 앞의 엠마' 입니다. 엠마는 그의 부인입니다. 뉴욕의 미술학교에서 만났는데 엠마는 그림을 그만두고 피아노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위의 Blue Morning 에 보였던 그 푸른 빛이 이 그림에서 좀더 뚜렷하게 표현됩니다. 아, 조지 벨로우즈는 이런 색감의 푸른빛을 좋아했구나 추측하게 됩니다.

 

 

Emma at the Piano (1914)

피아노 앞의 엠마

Oil on Canvas

94x73 (가로세로)

2009년 11월 29일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의 두 딸중 큰딸인 앤 입니다. 커튼과 허리 부분의 청색과 흰 드레스가 대조를 이루는데요. 역시 Blue Morning 이나 Emma at the Piano 에서 선보인 청색과 흰색의 대조가 이 그림에서도 나타납니다.

 

Anne in White (1920)

흰 드레스의 앤

147x108.9 cm

Oil on Canvas

2009년 11월 7일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는 엠마와 결혼한 이후로 두 딸의 아빠가 되었는데, 아내와 딸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그의 그림의 소재가 도시의 풍경에서 가정적인 것으로 변모합니다. 그래서 43년의 짧은 생에서 그의 후기에는 초상화 작품들이 그려집니다. 물론 그의 초상화 작품은 그의 아내 혹은 그가 살던 마을의 마을 사람들, 이런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서 삽화 작업도 계속했고, 시카고 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습니다.  그는 '맹장'이 터져서 그만 요절을 하고 맙니다.

 

 

2009년 12월 5일 redfox

 

 

그의 마지막 작품들

 

 

Ringside Seat (1924)

맨 앞줄 관람석

2009년 9월 24일 워싱턴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The Picnic (소풍) c. 1924

Oil on Canvas

2010년 1월 23일 볼티모어 미술관 미국화 갤러리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 (1882-1925)는 43세의 나이에 (우리나라식으로 따지면 44세가 되던 해에) 맹장이 터져서 요절한 화가인데요, 위의 두 작품들은 1924년, 그가 죽기 전 1년전쯤에 그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위의 경기장 장면이 좀 뿌옇지요?  제가 사진을 잘 못 찍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흐릿한 등불 아래의 장면을 묘사하듯 노리끼리하게 아슴프레 합니다.  제가 허시혼에 여러차례 들렀는데, 볼때마다 저 작품은 좀 어딘가 노란 안개속에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아래의 '소풍'역시 그가 죽기1년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요, 그림 분위기가 매우 독특합니다.  (그림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보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미술관에 갈때마다 본 편인데요. 그러니까 제가 조지 벨로우즈에 대해서 알기 전에도 이 작품을 알고 있었습니다.  작가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채로 분위기가 특이한 작품으로 기억을 한 거죠. 

 

제목이 '소풍'인데요, 전체적인 풍경이나 분위기는 암울하고, 음침하고, 곧 어디서 천둥 번개가 칠것같은 불안감을 줍니다. 갑자가 돌풍이 불것같기도 하고요. 물빛도 하늘빛도 심상치가 않아요. 구름조차도 예사롭지가 않고요.

 

가운데에는 소녀가 줄넘기를 들고 서 있고요, 그 아래에서 누군가가 마치 절벽에서 올라오는듯 손을 뻗치고 있죠. 낚싯대를 드리운 남자와, 피크닉 보자기를 펼친 여자가 왼편에 있는데, 오른편에는 한 남자가 사지를 벌리고 하늘을 향해 누워있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서 이태전에 아이들과 대화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림이 세기말 적이야. 뭐랄까...암담해... 저 줄넘기를 들고 있는 소녀 말야, 저 줄넘기 이미지는 살바도르 달리도 그린적이 있고... 영원의 상징이라고도 해. 영원은 죽음과도 통한다는 거 알아? 죽음은 영원하쟎아.  줄넘기가 그리는 원, 그 원의 끝없는 회전, 인연의 굴레를 벗어날수 없음을 상징할수도 있고.  하필 줄넘기를 들고 언덕 가장자리에 서있는건 또 뭐니. 불안해보이쟎아.  전체적으로 참 불안해보여."

 

이 그림을 보면 벨로우즈가 즐겨 그렸던 청색 색조와 흰색의 하일라이트도 여전히 보이는데요, 신비로우면서도 스산하죠?  어쩌면 이것이 그가 사랑하는 두 딸과, 아내와 가졌던 인생 최후의 소풍이었는지도 모르죠. 그는 화면 오른쪽에 자신의 주검까지 그렸던 것인지도 몰라요. 그 자신은 그걸 의식하지 못했겠죠.

 

우리는 가끔 그런 얘기 하쟎아요. 어떤 사람이 죽었을때, 그가 죽기전에 나눴던 이야기나 일화들을 떠올리면서, "죽을걸 알고 그랬나?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 뭐 이런 얘기 하죠.  뭐 마치 죽을 사람처럼 유언처럼 몇마디 한 것이 마지막 말이 되기도 하고요.  생명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안대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뿐 안다는거죠.  그래서 죽음을 예견하는 말이나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해요 (그런 설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냥 그런 관점에서 그는 이미 그의 죽음을 예견한 그림을 남긴것이 아니었을까....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다시 만났을때, 그리고 문득 그의 생몰연대와 그림의 제작 년대를 비교해보다가, 문득,  번개치듯 문득,  이런 쓸데없는 상상도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 상상을 하자, 이 그림이 품고 있던 신비로운 세기말적 느낌에 대한 해답을 얻은 기분이 드는겁니다.  그는...다가올...죽음을...그렸나봐...

 

 

2010년 1월 29일 내용 보충 Red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Ashcan School2009. 12. 5. 13:24

 

Snow in New York  뉴욕의 눈 (雪),  1902년

Robert Henri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워싱턴 국립 미술관에서 촬영

 

 

로버트 헨라이 (Robert Henri 1865-1929)는 미국 사회사실주의(Social Realism) 미술가들의 스승으로 알려진 화가 입니다.  이 사람의 가족력이 좀 흥미로운데, 본디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Cozad 였고 그래서 로버트 헨라이는 원래 Robert Henry Cozad 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웃 사람과 다투다가 총질을 하는 바람에 이웃사람게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야반도주를 하는 수 밖에요. 결국 가족들도 야반도주한 가장을 따라 도망을 가게 되었는데, 훗날 새로운 삶을 위해 성씨를 바꿔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이름이 졸지에 로버트 헨라이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아, 그는 미국출신으로 유럽에서 주로 활동했던 화가 Mary Cassett (메리 커셋)과도 친척이라고 합니다.  메리 커셋에 대한 소개는 다음으로 미루기고 하겠습니다.

 

헨라이는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서 수학했고, 당시의 미국 젊은이들이 그러하였듯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1891년 필라델피아로 다시 돌아온 헨라이는 1892년부터 미술 학교에서 미술 교육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당시 인쇄매체의 삽화가로 활동하던

 * William Glackens

 * Goerge Luks

 * Everett Shinn

 * John French Sloan

 

등과 어울리며  Ralph Waldo Emerson,  Walt Whitman, Henry David Thoreau 의 사회사상 관련 글을 읽습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미국의 '초절주의 (Transcendentalism)'와 'Self Reliance (자기 주체)' 정신으로 널리 알려진 철학자였고, 월트 휘트만은 미국 최초의 산문시인으로 풀잎과도 같이 강인한 대중들을 노래한 시인이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우리에게 월든호수 (Walden) 라는 작품으로 알려진 역시 Self Reliance 정신의 신봉자였던 인물입니다.

 

이들은 이후에 활동의 본거지를 뉴욕으로 옮기게 됩니다. 헨라이는 뉴욕의 예술학교 (New York School of Art)에서 교편을 쥐게 되는데 이때 Edward Hopper, Rockwell Kent, George Bellow, Stuart Davis 등을 가르치게 되지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미국의 상황은, 사회적으로는 노동자들이 임금이나 작업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동조합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1904년에는 한해 동안 전국적으로 4,000 번의 파업이 진행되었다는 집계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노동운동은 주로 시카고, 디트로이트, 샌프란시스코, 뉴욕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미국의 고등학생등의 필독서중에 Upton Sinclair (업튼 싱클레어)의 The Jungle (정글, 1906)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고기 가공장에서 일하는 이민자 가족의 비극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이민자들은 Self Reliance (자기 주체) 정신으로 열심히 살아가려고 애쓰지만, 이들이 처한 노동 환경은 호락호락 하지가 않습니다. 약육강식의 정글이라는 얘기지요.  미국의 Self Reliance 라는 정신적 미덕도 통하지 않는 현상을 싱클레어는 고발하고 있는데요, 이와 같은 소설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나오고, 노동운동도 활발하게 진행되는 중심에 당시의 미술가들도 서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당시 미술가들은 사실적인 사회, 사람들의 풍경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런 흐름의 선두에 서 있던 집단이 헨라이를 위시한 애쉬캔 (Ashcan) 그룹이고, 이들이 후에 The Eight (8인회)로 거듭나게 되지요. 헨라이는 그의 친구들이나 제자들에게  주변의 사람과 삶의 풍경을 그리되, 이를 상대가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로 잽싸게 그리라는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Do it all in one sitting if you can," he advisded them. "In one minute if you can."  (Pohl, 2008) 

(해석: "그자리에서 한번에 그려버리게나," 헨라이는 그들에게 충고했다. "가능하다면 일분 안에." )

 

1902년 뉴욕에서 전시회를 가진 후 그는 풍경화를 접고 초상화를 주로 그리게 되었으며, 1908년에는 맥베스 갤러리에서 "The Eight (팔인회)" 전시회를 열게 됩니다. 사실 이 전시회를 열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마치 인상파 화가들이 프랑스의 살롱전에서 푸대접을 받은 후에 홧김에 인상파의 세기를 열었던 것처럼, Ashcan 화가들이 미국의 전시장에서 푸대접을 받자 미술비평가들과 정면으로 한판 단단히 붙은 후에 이 '팔인회' 전시회를 열게 된 것인데, 그 결과는 대중적으로나 비평계 모두 아주 호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헨라이는 사실 그의 미술 작품 보다는 그가 미국 사회사실주의 화가들의 지도자 역할을 잘 해냈고, 그리고 미술 교육에서 공로가 크다는 점에서 오히려 미술사적 인정을 받는 편입니다.

 

헨라이가 후기에 초상화로 돌아서긴 했는데, 그가 초상화 작업을 통해 사회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화폭에 담아보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미술관에서 발견한 그의 초상화 작품들은 악사, 소년, 인디안 소녀,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Gypsy with a Bandurria (1906)

반두리아를 들고 있는 짚시

Oil on Canvas

2009년 12월 29일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헨라이가 그린 작품입니다. (제가 헨라이에 큰 관심이 없다보니, 사진 상태가 성의가 없어보이지요? 예... 그래도 정성껏 찍을걸 하는 후회가 생깁니다.)  헨라이는 유럽의 '마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으로 소개가 되는데요, 이 그림 사진을 보니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과 비슷한 구도와 소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리부는 소년 창작 년도를 찾아보니 1866년이군요. 다리 모양 닮았죠?  전체적인 구도도...

 

 

Manet, The Fifer (1866)

 

 

 

 

 

 

The Beach Hat (1914)

비치 모자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Boy with Plaid Scarf (1916)

격자무늬 목도리를 한 소년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Indian Girl in White Ceremonial Blanket (1917)

제사용 담요를 휘감고 있는 인디안 소녀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이 작품은 헨라이가 뉴멕시코주의 산타페를 두번째 방문했을때 현지의 인디언소녀를 모델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소녀의 이름은 Julianita 로 San Ildefonso Indian 종족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아마도 제 그림 사진 파일을 뒤져보면 어딘가에 헨라이의 초상화 사진이 몇장 더 있을것 같습니다.  때로는 미술관에서 헨라이의 작품이 보일때,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한테 매력이 없어 보였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여기저기서 중구난방으로 봤던것들을 한페이지에 시간순서대로 정리하다보니 제가 미술관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도 됩니다. 그냥 하나 하나 볼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 예를 들자면 헨라이의 초상화의 소재가 된 인물들이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혹은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 인물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면서도 모두 닮아보인다는 것 (이는 헨라이의 표현 스타일에 일관성이 있어서 그러할 것이겠지요) 뭐 이러한 것들 입니다.  짚시 악사 그림과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 그림의 유사성도 미술관에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  사진을 쳐다보면서 생각한 것이고요.  그래서,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현상'을 관찰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미술관에서 미술작품을 눈으로 감상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후의 사색이나 반추 역시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

 

돌아보면, 저는 미술관에서 작품들을 구경하면서 '쾌락'을 느끼기도 하지만, 후에 사진들을 다시 정리하거나 관련 페이지를 적으면서,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사실들도 많은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의 '미국 미술 이야기' 블로그 프로젝트를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깨닫게 되는 것들이 페이지가 쌓일수록 늘어가니까요.

 

 

 

 

 

관련 페이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118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http://americanart.textcube.com/137

 

 

참고문헌:

 

1. Frances K. Pohl (2008),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Thames & Hudson; New York, NY

2. Suzanne Bailey (2001), Essential History of American Art, Parragon Publishing, Bath BA, UK

3. William G. Scheller (2008), America: A History in Art, The American journey told by painters, sculptors, photographers, and architects. Black Dog & Leventhal Publishers; New York, NY.

4. Marcha N. Hagood & Jefferson C. Harrison (2005) American Art at the Chrysler Museum: Selected paintings, sculpture, and drawings. Chrysler Museum of Art: Norfolk, VA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5. 09:45

http://www.claremontmckenna.edu/hist/jpetropoulos/arrow/holocaust/Franklin_Roosevelt.jpg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1882-1945)은 1932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래로, 죽을때까지 (1932-1945) 미국대통령직을 유지했다. 그는 미국에서 유일무이하게 4선 까지 이른 사람이며, 미국 대통령들중에서 3선 이상을 한 유일한 사람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이후로 대통령을 2선까지만 가능하게 하는 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미국이 어떤 지도자의 '독재'의 가능성에 눈을 뜨고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고안해낸 방법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2년도 넘는 기간동안 미국을 통치하였는데, 경제 대공황때 그가 취한 경제정책 (소위 뉴 딜 정책으로 알려져 있음)이 널리 알려져 있다. 세세한 내용까지는 차치하고라도, 그가  여러가지 국책사업을 펼치가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정책을 펼쳐서 경제난을 이겨내려 했다는 것은 중고등 학교 사회책이나 세계사책에도 소개되는 내용이다 (나는 중학교때 이런 내용을 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에서는 Social Security (사회복지) 제도가 있는데 이 사회복지법 (social security act)을 최종 승인하고 시행한 대통령이 바로 이 루즈벨트 대통령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기초생계를 보장하는 '사회복지'의 초석이 마련되었다고 한다면,  '의료복지'의 초석을 만들고자 하는 이가 현재의 '오바마' 대통령이다. (그가 미국 역사상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려고 하는 것인지...) 

 

 

 

바로 이러한 '국책사업,' '국가 주도의 경제정책,'  사회복지 정책등을 이유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을 '사회주의자'라 평하는 이들도 있다.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군에 속하는 '최장기 대통령직'을 수행한 대통령이 '사회주의자'라고?  우리는 이런 의문을 품을수도 있다.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대략 간단하게는 사회 통치 시스템의 측면에서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사회주의'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다수가 동등한 권리를 누리면서 동등하게 통치하는 시스템이 '민주주의'라면,  소수의 '통치집단'이 사회 운영을 관장하고 계획을 세우고 시민들에게 각자의 역할을 분담시키는것이 '사회주의'적 통치체제라 할수 있다.  경제 구조적으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서로 상반된 방식으로 굴러가는데, 대개 민주주의적 방식과 자본주의 체제가 서로 궁합이 맞아보이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체제가 상통해보이므로 우리가 흔히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뒤섞어서 인지하기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우는 '대통령제'를 탄생시킨 미국, 자유 경제와 자본주의의 꽃으로 알려진 미국땅에서 미국을 부흥시킨 존재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거론되고, 하필 그의 정책과 관련하여 그를 '사회주의자라 부른다니 이것은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사회주의는 이것이고 민주주의는 저것이다 라던가, 자본주의는 이것이고 공산주의는 저것이다라는 양분법식 생각에서 한걸음 물러설 필요가 있어 보인다.  루즈벨트는 국가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노력했고,  사회주의적 방식이라  일컬어진 뉴딜정책은 소기의 효과를 발휘했으며, 뉴딜정책의 발판 위에서 미국은 다시 '민주주의'와 '자유경제' '자본주의'의 꽃을 활짝 피울수 있었던 것이니...

 

 

 

http://americanart.textcube.com/65

스미소니안 국립 초상화 박물관에 걸린 벤샨의 루즈벨트 대통령 초상화

 

 

 

(미국미술 공부하다 잠시 생각) 2009년 12월 4일 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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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4. 09:58

 

Mrs. Abraham White, Jr. and Daughter Rose c. 1808-1809

Oil on Canvas

64.8 x 76.2 cm

2009년 11월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http://americanart.textcube.com/34  페이지에서 소개해드린대로 Joshua Johnson (조슈아 존슨 1763-1824) 은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태생의 흑백 혼혈 초상화가 입니다.  일설에 따르면 조슈아 존슨은 당대의 미술가였던  Charles Wilson Peale 과 함께 미술 수업을 받았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림속의 주인공은 이 초상화를 그린 직후에 30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을 했다고 합니다.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반쯤 열려있는 책, 그리고 아이의 손에 들려있는 들딸기는 조쥬아 존슨이 즐겨 그리는 스타일이었다고 합니다. 앞서의 페이지에 소개된 그림들보다 나중에 그려진 그림이라서 그런지 그림도 좀더 세련되어 보입니다.

 

크라이슬러 미술관 소장품입니다.

 

 

2009년 12월 3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EdwardHopper2009. 12. 4. 09:15

Edward Hopper (1882-1967)

New York Pavement (1924 or 1925)

뉴욕의 보도

Oil on Canvas

75.6 x 62.9cm (가로 x 세로)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월척'을 낚은 기분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1924년이나 1925년 작품으로 추측되므로 그가 42세때, 아직 세상이 '대가'의 출현을 알아보지 못하던 시기의 그림이라 할 만 합니다.  '뉴욕의 보도'라는 제목처럼 뉴욕 시내의 어떤 건물 앞 풍경을  맞은편 건물 2층이나 3층 혹은 옥상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각도로 잡아 놓았습니다.  얼핏 수녀복을 입은듯한 여인이 유모차를  밀며 걸어가는데 이 여인의 머리 두건이 펄럭거리는 것으로 보아 바람이 휙 부는듯 합니다.  도심의 골목길 앞을 지날때 문득 불어오는 골바람일지도 모르지요.

 

여인의 나부끼는 머리두건이나 그의 방향성에서 어떤 움직임이 느껴지지만, 그외의 모든 장치들은 요지부동으로 꼼짝도 않겠다는 태도로 무겁게 버티고 있습니다. 회색돌로 이루어진 건물과 역시 같은 색조의 보도에는 어떤 틈새도 보이지 않습니다.  유모차속의 아이의 얼굴도 보이지 않습니다.  건물의 창 안쪽으로 노란 블라인드가 드리워져 있고, 가운데 창은 커튼도 열려있지만, 커튼 안은 캄캄하기만 할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수녀처럼 보이는 이 사람의 검은 옷과, 유모차의 검정빛, 그리고 건물 입구나 유리창 안의 검정색은  노란 블라인드와 대조를 이루면서 더욱 어둡게 느껴집니다.

 

저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엄마, 아버지, 아이들' 이런 '가족'이 어우러진 풍경을 본 적이 없고, 아이들이나 아기를 본 적도 없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 그림이 '아기'가 등장하는 유일한 그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조차 '아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아기'의 존재를 추측할 뿐. 

 

우리에게 호퍼의 그림이 외롭거나, 쓸쓸하거나, 혹은 을씨년 스러워 보이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의 그림에 '미래'를 상징하는 '아이'가 없어서 그런것은 아닌지...  문득, 유모차를 끌고가는 검은 제복의 유모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어머니와 아기의 관계가 아닌 을씨년 스러운 제복을 입은 (저승사자 같아보이는) 유모의 보호를 받는 이 아기가 행복할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그림이 아주 암담해보이지 않는 이유는 아기를 덮고 있는 붉은 천,  유모의 붉은 뺨, 건물 2층 부분에 보이는 붉은 벽돌 일부, 그리고 창문 블라인드의 햇빛같이 고요한 연노란색이 여기저기서 '생기'를 보내기 때문인데요, 이런 미묘한 생기 때문에 우리들은 호퍼의 쓸쓸맞아 미치겠는 그림앞에서 아쉬운듯 아쉬운듯 떠나지 못하고 맴돌게 되는 것 같습니다.

 

 

2009년 12월 3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4. 08:43

http://americanart.textcube.com/184  에드워드 힉스가 꿈꾼 평화의 나라 페이지에서 퀘이커 교도였던 힉스가 즐겨 그린 소재 두가지를 소개한바 있습니다. 한가지는 미국 정착사를 바탕으로 한 '평화의 왕국' 주제이고, 또 한가지는 성서를 바탕으로 한 '노아의 방주' 주제입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190 버지니아 남부 해안도시인 Norfolk 에 위치한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는 에드워드 힉스의 또다른 역사화를 두 점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Washington at the Delaware  c. 1849

델라웨어의 워싱턴

Oil on Canvas

90.2cmx71.1cm (가로 세로)

 

 

이 그림은 훗날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조지 워싱턴이 미국 독립전쟁 당시 영국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역사적인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힉스가 독창적으로 창작했다기 보다는 현재 보스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Thomas Sully 의 Passage of the Delaware (1819)  525.8cm x 372.2cm 를 본떠서 그린 것입니다.

 

Thomas Sully 의 그림

 

 

남의 그림을 그대로 베껴 그린것이 뭐가 대단하다고 박물관에 모셔 놓는가?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에드워드 힉스가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바 없고, 그자신이 순수 예술가라기보다는 마차를 장식하거나 표지판을 잘 만들어내는 '기술자'였고,  혼자서 익힌 그림 재주가 뛰어나서 다른 사람의 그림이 맘에 들때 이를 베껴그리거나 이런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거나 팔면서 살았다는 측면을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를 '풍속화가'로 분류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퀘이커 교도들이 '평화주의자'들이므로 전쟁을 거부하고, 그래서 병역도 거부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열렬한 퀘이커 교도였던 에드워드 힉스가 워싱턴의 역사적인 '전쟁'을 즐겨 그렸다고 하는 것이지요.  에드워드 힉스는 워싱턴과 독립군을 '신의 대리인'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의 애국심이 그의 종교관에도 영향을 끼친 것인데,  '호국불교' 정신하고도 비슷하군요 =) .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776   c.1840-1845

1776년 독립선언

Oil on Canvas

74.3cm x 65.4 cm (가로세로)

 

 

1776년 독립선언을 묘사한 이 그림의 이마에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776 이라고 새겨진 것이 보입니다.  힉스가 '표시판' 만드는 기술자였다는 대목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에드워드 힉스를 '순수 미술'의 차원에서 보기는 힘들고, 오히려 '생활속의 장인'의 측면에서 해석할때 그의 정체성에 생생하게 다가갈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때로 저는 이렇게 서툰 환쟁이들을 좋아합니다. 우리 엄마의 그림과 많이 닮았거든요.)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09. 11. 30. 00:48

 

크라이슬러 미술관 홈페이지: http://www.chrysler.org/

이 페이지의 사진들은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주 남단의 해안도시 Norfolk시에 크라이슬러 미술관이 있습니다.  1933년 Norfolk 지역의 자연, 미술 박물관 (Norfol Museum of Arts and Sciences) 으로 처음 문을 열었던 이곳은 1971 Walter P. Chrysler Jr. 가 그가 선대로부터 상속받았거나 그 자신이 수집했던 미술품들을 한꺼번에 기증하면서 '크라이슬러 미술관'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Walter P. Chrysler Jr. 는 크라이슬러 자동차를 탄생시킨 Walter P. Chrysler 의 아들입니다. 

 

워싱턴에서 Norfolk까지는 대략 200마일 거리. 자동차로 네시간 거리입니다. (왕복 여덟시간). 아침 여덟시쯤 출발하면 정오쯤에 넉넉히 도착하고, 오후 다섯시까지 한가롭게 미술관과 인근 지역 구경을 하다가 저녁을 먹고 여유있게 운전을 해도 집에 밤 열시나 열한시에 도착하게 되므로 크게 부담스러운 거리는 아닙니다.

 

이곳은 입장료 무료입니다. 특별전시를 할 경우 특별전시장 입장료만을 별도로 부과하기도 하고,  자발적으로 푼돈을 입구의 모금함에 넣을수도 있습니다. 관람객들의 자발적 기여를 유도하기는 하지만, 강제적이지 않으므로 편안하게 드나들수 있습니다.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면 코트야드 (안마당) 천장 유리를 통해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천장에 휘늘어진 색깔보자기 설치물은  Sam Gilliam 의 Norjolk Keels (1998)이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파란 하늘이 내다보이는 철제 프레임과 알록달록하게 펄럭이듯 늘어진 보자기들 전체를 묶어서 볼때 작가의 의도가 드러납니다.  철제프레임과 파란 하늘과, 펄럭이는듯한 보자기들은 마치 푸른 하늘아래/혹은 파란 바닷물결 위에 둥실둥실  떠있는 노폭(Norfolk)앞바다의 배 같기도 하지요.

 

 

 

이것은 2층 전시실 복도에서 다른 각도로 잡아 본 것입니다.  눈부시게 환한 입구가 보입니다. 그 입구 바깥에 파란 바닷가 펼쳐져 있어서 그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물결 그림자가 미술관 벽에 반사가 되기도 하는데, 실내에 잡히는 바닷물결 그림자를 보는 기쁨도 큽니다.

 

 

 

 

 

크라이슬러 가문이 재벌답게 세계 여러나라의 귀한 미술품들을 골고루 수집하였고, 1층에서는 이집트 특별전도 진행되고 있었는데요, 아시다시피 제가 '미국미술'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므로 아프리카나 아시아 그밖의 고대 문화재등은 건성으로 보고 지나간 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회화나 비슷한 시기의 유럽회화 쪽 전시장에서 보냈습니다.  이곳은 2층의 미국 건국 초기의 작품들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벽에 걸려 있는 회화 작품 중에는 얼마전에 소개되었던 Edward Hicks 의 그림도 보입니다. (찾아보시겠습니까?  이미지가 작아서 찾기 힘드시겠지만...)

 

 

 

 

풍경화가 Bierstadt (비어슈타드) 의 대형 풍경화가 왼쪽에 보이는군요.

 

 

미국이 강세를 보이는 현대 미술 전시실입니다. 칼더의 모빌 작품도 보이고, 오른쪽에는 리히텐시타인의 작품도 보이지요.

 

 

 

 

아하,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이곳에 백남준씨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Hamlet Robot (1996) 이라는 작품입니다. 열세개의 모니터에서 각기 다른 이미지들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왕관을 쓰고 있고요. 오른속엔 긴 칼, 왼손엔 해골이 들려있습니다.  (백남준씨 페이지는 따로 열 생각인데, 그때 그의 작품들에 대해서 좀더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1층 구석에 단아한 카페가 있었는데,  저는 간단히 아이스티를 주문해서 마셨습니다. 음료수 가격이 스타벅스 커피 가격보다 저렴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깔끔한 테이블, 정중하고 정다운 써빙, 깨끗한 유리잔 이런 것들이 어우러진 상태에서 스타벅스 커피값보다 싼 음료수라... 이정도면 이 미술관의 카페는 최고점수를 주고 싶어집니다.

 

 

 

 

기념품가게에 예쁘장한 물건들이 많이 보입니다만,  특별히 뭘 사지는 않고 구경만 하게 됩니다.  그래도 예쁜 물건들 구경하면 기분이 좋아지쟎아요.  저는 - 늘 그러하듯, 이곳에서 '미국미술화집'을 한권 샀습니다. 이 미술관이 소장하는 미국미술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깃들여져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거의 폐관 시간이 다 되어 미술관을 나와 바깥 구경을 했습니다. 이곳은 노폭의 'Historic Site (역사 유적지)'입니다. 그래서인지 '유럽'의 마을을 연상시키는 고풍스런 예쁜 집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이 집들중에는 역사 유적지로 보존되고 관람객들에게 공개가 되는 곳도 있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직접 방문하지는 못했습니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인근의 역사 박물관이나 고가들을 구경하러 다녀도 재미있을것 같습니다.

 

 

 

오후 다섯시의 햇살.   박물관 정문 앞에서는 안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두개의 붉은 지붕 건물이 보입니다. 파란 바닷물이 찰랑거리지요. 이 물이 저녁햇살에 반사되어 미술관 안의 벽에 그림자가 집니다.  저는 이 파란바다보다, 흰 벽에 찰랑거리던 그 '그림자'가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무엇에 매혹될때, 우리는 가끔 실체가 아닌 '그림자'에 빠지기도 하는데,  때로는 그것이 '그림자'인줄 알면서도 그것을 사랑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림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지요.  그것은 인간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상상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상상력을 버리고 현명해지기보다는, 어리석은채 상상력을 간직하는 쪽이, 더 재미있을지도 모르지요...

 

 

 

 

 

 

이곳에서 감상했던 작품들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것은, 이 것이었습니다.

 

 

Paul Gauguin 폴 고갱의 The Loss of Virginity (처녀성의 상실) (1890-1891).  누워있는 여자의 오른손에는 시든 꽃 한송이가 보이고 (전통적인, 처녀성 상실의 이미지) 왼쪽 가슴에는 여우 한마리를 안고 있습니다.  발끝은 서로 모아져있고, 발치 아래의 바위는 남근 모습과 꽤나 닮아있습니다.  그런데 저 언덕아래의 사람들은 왜 그려 놓은 것일까?  문득 이런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다 알겠는데, 저 언덕아래 사람들은 뭔가? 작가는 왜 그들을 그려 놓은 것일까?  관망자? 혹은 결혼식 하객들인가?  이 그림은 우울해보이지도, 명랑해보이지도, 초현실적으로 보이지도 않고...그냥...눈길을 끌면서 사람의 발걸음을 꽉 움켜쥐는군요.  이 그림에서 한참동안 떠나지 못하고 기웃거리고 기웃거리다, 전시실들을 한바퀴 다 둘러본후에 또 가서 들여다보고...그랬습니다.  우울하지도, 명랑하지도,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데 꽤 매혹적인 그림입니다.

 

 

 

 

 

석고 조각작품실에 스케치북과 미술도구가 놓여져 있었다. 아무나 그림 그리고 싶으면 그리라고.

 

 

 

 

 

2009년 11월 28일 밝고 따뜻한 토요일에 방문.

Posted by Lee Eunmee
Books2009. 11. 30. 00:38

American Art at the Chrysler Museum: Selected Painting, Drawing, and Sculpture

 

 

American Art at the Chrysler Museum

: Selected Painting, Drawing, and Sculpture (Hardcover)

Margaret Jarman Hagood (Author)

 

http://americanart.textcube.com/190 미술관샵에서 샀다. 편집이나 색상 모두 마음에 꼭 든다.  작품사진 상태가 선명하고, 작가 설명, 작품 설명을 상세하게 잘 정리해 놓았다.  45달러.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1. 26. 06:39

Edward Hicks 관련 페이지를 두개를 열었습니다.

 

1. http://americanart.textcube.com/184

2. http://americanart.textcube.com/185

 

해당 페이지 관련 간단한 '확인' 퀴즈 입니다. (앞으로 어떤 주제의 글을 한꼭지 마치면 퀴즈 페이지를 하나 만들기로 했습니다 = )  )

 

 

1. Edward Hicks 가 즐겨그린 주제가 두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가)

   나)

 

 

2. Edward Hicks가 속했던 종교집단은 무엇인가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

 

 

3. Edward Hicks 의 그림속에 등장하는 동물 이름 다섯가지를 적어보세요

 

  1. _____________________

  2. _____________________

  3. _____________________

  4. _____________________

  5. _____________________

 

 

 4. Edward Hicks 가 남긴 그림들중 생각나는 작품 제목이 있습니까? 제목이 무엇인가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나요?

 

  1. 제목: ______________________

  2. 내용: ______________________

 

 

 

 

수고하셨습니다. 정답은 해당 페이지에서 찾아 보셔요.  =)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1. 24. 13:10

19세기 미국의 풍속화가 Edward Hicks (http://americanart.textcube.com/184)페이지를 열었는데, Edward Hicks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퀘이커 교도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지금 보이는 것은 미국의 식품 매장 어디에 가나 흔히 보이는 '퀘이커'라는 식품 브랜드 입니다.

 

 

 

 

퀘이커에서 만들어내는 것으로는 오트밀, 시리얼, 각종 곡물이 들어간 식사대용 '영양바,'  쿠키 등이 있습니다. 저역시 가끔 뜨거운 물에 타서 먹는 오트밀로 점심을 때우기도 합니다.  퀘이커는 한국의 '삼양라면'처럼 미국의 일반 서민들의 생활 깊이 스며든 식품이라 할 만 합니다. (제가 삼양라면이나 혹은 퀘이커를 광고할 의도는 없습니다. 그냥 비유컨대 그렇다는 것이지요.)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난 Edward Hicks 는 본디 부모님이 '영국국교 (성공회 = Anglican)' 소속이었지만,  성장과정에서 힉스를 친아들처럼 돌봐준 아주머니의 영향으로 퀘이커교도가 됩니다. 그 아주머니가 퀘이커 교도였다고 합니다.

 

퀘이커 교단이 미국 문화사에서 어떤 위치인가 잠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미국에 메이플라워를 타고 처음 온 사람들은 '필그림'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어떤 교파였습니다. 이들은 당시의 영국국교(Anglican)에 반대하여 종교적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건너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후에 뉴잉글랜드 지역에 '퓨리턴 (puritan = 청교도)'들이 역시 영국국교에 반대하여 종교적 자유를 찾아 들어옵니다.  퓨리턴들인 매사추세츠에서 시작하여 뉴잉글랜드 지역을 장악하게 됩니다.

 

한편 뉴잉글랜드의 남쪽,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는 '영국국교회' 앵글리칸들이 정착을 합니다. 그리고 뉴잉글랜드와 버지니아의 중간쯤에 위치한 펜실베니아에 퀘이커교도들이 정착을 합니다.  펜실베니아에 영국식민지를 처음으로 개척한 사람이 바로 Edward Hicks 의 풍속화 Peaceable Kingdom (평화의 왕국)에 등장하는 William Penn 입니다. 그는 퀘이커 교도였습니다.  윌리엄 펜은 영국국교에 반대하는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옥스포드 대학에서도 추방을 당한 사람입니다.

 

퀘이커교단에서는 '모든 인간은 신과 직접 대할수 있다'는 사상을 갖고 있으며 교회조직이나 직업적인 성직자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개인의 양심과, 묵상을 통한 신과의 대화를 귀하게 생각합니다. 이들은 전쟁을 거부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옷을 입는 일이나 삶을 꾸미는 일에 대해서도 소박함을 유지하려 하였습니다.  이들이 영국에서 박해를 받다가 신대륙의 펜실베니아 지역에서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이미 영국에서 종교적 이유로 박해를 받은 경험이 있었던 펜은 그가 개척한 식민지를 '모든 종교적 박해를 받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도록 노력을 합니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 영국인뿐 아니라 유럽의 여러나라 이민자들이 몰려옵니다.  Edward Hicks 의 그림에 묘사된대로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안들과도 협정을 맺고 서로 평화롭게 협력하고 사업을 해 나갔습니다. 

 

자 미국 초기 역사에서 각기 다른 기도교 교파들이 미국의 어떤 지역을 토대로 성장했는지 간단히 정리해볼까요?

 

 

 1. Pilgrims (필그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플리머스 항에 도착하여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생존에 성공했던 사람들 입니다. 이들이 가을 추수후에 하늘에 감사하고, 선량한 이웃이었던 인디언들에게 잔치를 베풀며 함께 기쁨을 나눴던 것이 미국의 Thanks Giving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2. Puritans : 그런데 필그림들은 후에 주도 세력이 되는 Puritan (청교도) 들에게 밀려나거나 흡수되고 맙니다.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3. 한편 버지니아 남단에 King James 식민지가 개척되는데, 이곳에는 영국 국교 (Anglican = Episcopal = 성공회)신도들이 정착합니다. 버지니아에 앵글리칸 교회들이 많이 보입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일 것입니다.

 

 4. 그리고 뉴잉글랜드와 버지니아 사이의 중부, 펜실베니아에 퀘이커 교도들이 자리를 잡아서 City of Brotherly Love = 필라델피아를 일으키는데, 이곳에는 종단이나 교파에 상관없이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이주민들이 몰려와 자리를 잡게 됩니다.

 

미국사에서 '퀘이커'의 위치를 살펴보면 퀘이커 교도였던 Edward Hicks의 풍속화에 그려지는 미국의 풍경, 노아의 방주 그림등에 대하여 좀더 생생하게 이해할수 있게 되지요.  (아, 그런 배경이 있는 그림이구나, 아하!)  윌리엄 펜이 펜실베니아를 일으킨것은 17세기의 일이지만 19세기의 에드워드 힉스에게는 살아있는 영웅이었을겁니다. (다른 페이지에서, 엉클 톰스 캐빈 이야기를 잠깐 적은 적이 있는데요.  흑인 노예들이 자유를 찾아 도망을 칠때, 이들을 보호해주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퀘이커 교도들이었지요.  그 소설에서 처음 퀘이커교도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기 때문에 제게는 이들이 아주 '착한' 사람들로 각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참고문헌:

 

1. 앙드레 모로아. (1991)  미국사. 신용석 옮김. 기린총서. 기린원. 5장 (pp 46-55)

2. 청솔역사교육연구회. 이야기 미국사. 청솔출판사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1. 24. 11:05

미국에서 일년중 11월의 네번째주 목요일은 우리나라의 추석과 흡사한 추수감사절 (Thanksgiving Holiday)입니다.  각급 학교나 회사, 공공기관들은 추수감사절 전날인 수요일부터 공식적인 휴일에 들어가서 수, 목, 금요일 공식 휴일을 갖습니다. 토요일 일요일에는 원래 일을 안하는 사회이니까,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5일간 휴가를 갖는 셈입니다. 

 

그 추수감사절이 금주로 다가와서, 이와 관련 그림을 소개할까 합니다.  추수감사절 관련 그림이야 다양한 화가들이 그려냈지만, 저는 펜실베니아 출신의 풍속화가 에드워드 힉스 (Edward Hicks 1780-1849)의 그림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사진을 클릭하여 확장시키면 큰 화면을 보실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제가 워싱턴 디씨의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에서 찍은 힉스의 Peaceable Kingdom (평화의 왕국) (c.1834)이라는 유화입니다.  제가 이 작품의 제작년도를 c.1834 라고 표기했지요? circa 1834 혹은 그냥 c.1834 라고 적은 것은 '대략, 짐작컨대' 1834 년쯤으로 추정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역사적 사실을 표기할때 영문으로 circa (c.)  표시가 있으면 이는 '대략 추정된다'는 뜻입니다. (참고하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이 그림의 주인공들은 누구일까요?  크게 두가지로 나눠 볼 수 있는데 (1) 사람들 집단, 그리고 (2) 동물들이 보이지요. 우선 사람들을 들여다 볼까요?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잘 알수 없지만, 짐작컨대, 서양사람들과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모여서 뭔가 하고 있는것 같지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거래'가 되는것 같습니다. 유럽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상자에서 뭔가 꺼내어 인디언들에게 보여주고 있지요. 선채로 뭔가 설명을 하는 유럽사람이 보입니다.  이들의 거래의 장면이 평화로워 보입니다.

 

 

 

동물들이 모여있는 광경을 볼까요? 사자, 호랑이, 양, 소, 송아지... 육식동물과 초식동물들이 태평하게 어울려 있습니다. 천사처럼 보이는 아이들이 이 동물들과 어울려 있습니다.  한마디로 '천국'에서나 가능한 풍경이겠지요?

 

 

에드워드 힉스가 꿈꾸던 '평화의 왕국'은 이렇게 신생국 아메리카에 정착하러 들어온 사람들과 이 터전에서 이미 살아온 인디언들이 서로 자신들이 가진것을 나누고 공유하는 사회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Thanksgiving Day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초기 미국 정착민들에게 도움을 준 아메리카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식사대접을 하고 잔치를 한것에서 비롯됩니다.

 

 

아래의 그림은 제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찍어온 것입니다. 제목은 Penn's Treaty with the Indians (윌리암 펜과 인디안의 협정) 입니다. 창작년도는 c.1830-1835.  대략 1830년에서 1835년 사이에 그려졌을거라 추정된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을 들여다보세요. 위의 그림속의 사람들과 약간 차이가 나지만 거의 동일한 구도로 비슷하게 그려냈습니다. 단 특별한 차이가 있다면, 가운데 서 있는 남자가 위의 그림에서는 그냥 두 팔을 펼치고 있는데, 아래의 그림에서는 그의 왼손이 펼쳐진 두루마리의 어떤 부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두루마리'가 새로 등장했다는 것 외에는 사람들 풍경이 위아래 비슷해 보이지요? (물론 위 아래의 그림을 나란히 놓고, 그림에서 서로 다른것이 무엇인지 찾아가면서 시간을 보내도 심심풀이가 될것 같습니다.)

 

 

액자에 Penn's Treaty 라고 적혀진 것으로 보아, 두루마리에는 미국정착민들과 인디안들 사이의 협정서가 적혀 있는것 같습니다.

 

 

 

 

 

 

 

 

자 여기서 제가 독자여러분께 한가지 '질문'을 던져 보고 싶습니다.

 

앞서 소개한 '평화의 왕국' (c. 1834) 과 후에 소개한 '윌리엄 펜의 협정' (c. 1830-1835) 두장의 그림은 각기 대략 1834년 추정, 1830-1835년 추정 이렇게 표시가 되어 있는데요. 그림속의 사람들의 모습과 주변 풍경을 보면 어느 그림이 역사적으로 선행되는 그림일까요?   (여우야, 여우야 네가 평화의 왕국 그림을 앞에 소개했고, 윌리엄펜의 협정을 뒤에 보여줬으니까 그 순서가 아니겠니?  --이런 추측을 하실수도 있을겁니다.)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제가 그림을 들여다보듯 저의 독자도 제 시선을 따라 그림을 읽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서 입니다.  (저는 지금 제 애인한테 그림 설명해주는 기분으로 그림을 읽고 있으니까요.)  평화의 왕국 그림 배경은 그냥 '자연'입니다. 강이 흐르고, 숲이 있고,  퀘이커 교도들을 연상케하는 복장을 한 사람들과 미국 원주민들이 모여서 물물교환을 하는듯한 풍경이지요.  윌리엄펜의 협정 그림 배경 풍경에는 '인간 문명'이 포함됩니다.  (아마도 델러웨어 강일것인데) 강에 배들이 떠있고, 건물들도 보입니다.  그리고 어떤 '조약문'이 적혀있을 두루마리가 등장을 합니다. 역사적으로 '후'에 일어난것으로 추측되지요.  그렇지만 위의 두 그림중 어떤 그림을 에드워드 힉스가 먼저 그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미술사가들도 잘 알수가 없기에 circa 표시를 했을것인데, 제가 추측하기에는 위의 평화의 왕국을 1834년에 그렸다면, 윌리엄펜의 협정 그림은 그 이후가 될것 같습니다. (추측일 뿐입니다.)

 

에드워드 힉스 (1780-1849)는 펜실베니아의 유복한 영국교 (성공회)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18개월 되던해에 어머니가 사망합니다. 그 이후로는 어머니와 절친했던 친구들의 보호속에 자라났는데 그들이 퀘이커 교도였습니다.  힉스는 마차 장식 그림에 재미를 붙여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마차장식이나 표지판등을 그리는 것으로 돈벌이를 하게 됩니다. 그가 퀘이커 교단에 입문한것은 그가 20대 청년시절 부터였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에드워드 힉스는 마차장식그림이나 표지판 그림을 그리는 일에 열중하면서 퀘이켜 교단의 설교자도 하게 됩니다. 그는 신과의 내면적 대화를 강조하는 퀘이커 교단의 교리에 심취했던듯 합니다.

 

에드워드 힉스는 1820년대부터 그가 사망하기까지 대략 30여년간 그의 '평화의 왕국'을 그려냈는데, 현존하는 작품만도 60여점에 이른다고 합니다.  제가 워싱턴의 국립미술관에서 찍어온 작품도 이 60여점 중의 하나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미술사책을 들여다보면, 시기별로 평화의 왕국 그림 내용이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래 이미지는 제가 웹에서 얻어온 것인데요 (조만간 윌리엄스버그에 가서 작품을 보고 올 생각입니다) 이것은 액자 자체까지 그림작품입니다.  액자에 새겨진 문구까지 힉스가 모두 선택하여 새겼다는 뜻입니다.  (힉스가 마차 장식과 표시판 제작을 했던 경력을 여기서 확인할수 있지요. 그림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까지도 '말'로 새겼습니다.

 

The wolf shall also dwell with the lamb,

and the leopard shall lie down with the kid

and the calf and the young lion and the fatling together

and  a little child shall lead them.

 

늑대가 또한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염소새끼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할것이며

한 아이가 이들을 이끌것이라

 

(이사야 11:6)

 

 

 

 

 

이 그림은 The Peaceable Kingdom of the Branch (c.1825-1830) (95.9x81.9 cm) 으로 그의 평화의 왕국 연작중에서 초기의 작품이라 할수 있습니다.  본래 이 '평화의 왕국' 시리즈는 영국의 Richard Westall 이라는 화가의 동명의 작품이 있었는데, 구약성서를 바탕으로한 Westall 의 그림세계에 크게 감화를 받은 힉스가 자신의 스타일로 그의 신앙심을 그가 그가 가장 잘 할줄아는 '그림'의 세계에 접목을 시켰다고 할수 있지요.  그림의 배경은 실제로 버지니아에 존재하는 '천연 다리 (Natural Bridge)' 입니다.  일치하지요?  저도 이곳을 지나친적이 있는데, 이 풍경이 힉스의 그림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지요.  그른 상상력을 발휘하여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림에 옮기거나, 혹은 역사적 사실을 그렸지만, 분명히 상상에 기반한 미술작업을 했지만 그러나 그림의 배경에 그는 그가 관찰하거나 목도했던 풍경들을, 역사적 사실에서 벗어나지 않는 풍경들을 그림의 배경으로 그렸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을 시기별로 보면서 당시 역사의 전환이나 풍경의 전환을 살펴보는 일도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림을 제대로 읽으려면, 관련 역사도 좀 알아야 하고, 그러다보면 그림 들여다보다가, 책들여다보다가, 도끼자루가 썩지요...)

 

 

 

 

http://cache.virtualtourist.com/3060528-NATURAL_BRIDGE_VIRGINIA-Natural_Bridge.jpg

 

 

 

 

다음 그림 역시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사진 찍은 것으로 제목은 Noah's Arc (노아의 방주) 입니다. 1840년 작품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기독교 경전에 실린 일화입니다.  동물들 표정이 참 순하고 착해보이죠?  아이들과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발견한다면, "무슨 동물이 있나 찾아보자"하고 놀이를 해도 좋을것 같습니다. 영어교육에 관심이 있다면 영어로 동물 이름을 불러봐도 좋겠지요. 혹은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들려줘도 좋을것 같습니다.

 

 

 

 

 

 

 

 

에드워드 힉스는 그의 신앙심 (성서)을 기반으로 한 사람과 동물의 평화로운 공존의 주제

 (1) 평화의 왕국

 (2) 노아의 방주

를 시리즈로 그렸지만, 그가 그린 풍경화도 남아있습니다.  다음은 워싱턴 국립미술관에서 사진찍은 작품입니다.

 

 

 

The Cornell Farm (1848)

oil on canvas

 

 

이 작품은 Edward Hicks (1780-1849)가 68 세쯤에 그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남긴 최후의 몇점에 해당하는 그림이겠지요? 

 

(어디엔가에 기록을 한 적이 있는것 같은데, 저는 어떤 작품을 볼때, 그것이 미술작품이건 혹은 문학작품이건, 어떤 작품을 들여다볼때는 이것이 사회, 문화, 역사적으로 어떤 배경이 있는지, 이 작품을 창작할때 작가는 대략 몇살쯤이었는지 이런 상황을 들여다보는 편입니다. 이 작품의 연도를 들여다보고 그의 생몰년내를 들여다보니, 어쩐지 이 그림이 색다르게 다가오더란 말이지요.)

 

 

이 풍경화 속에는 다양한 무늬의 소와 말이 한데 어우러져있고, 돼지, 양도 있군요. (이들이 비록 가축들이긴 하지만, 여전히 평화의 왕국이나 노아의 방주 시리즈에서 보이는 동물들의 평화가 감지 되지요?),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반듯하게 줄지어 서있는 나무들이나 길, 그리고 집들이 전체적으로 조화롭고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원시림의 시대가 아닌, 정돈된 인간 문명의 시대가 그의 말기 작품에 담겨져 있습니다.

 

 

에드워드 힉스의 그림들은 '풍속화 (Folk Art)'로 분류됩니다.  무엇이 풍속화이고 무엇이 그냥 '미술'인가?  엄밀한 분류기준이 있어보이지는 않습니다. 에드워드 힉스는 정규 미술 수업을 한 사람이 아니고, 마차장식 '기술자'쯤으로 그림 그리는 일을 시작했고, 이렇게 실용적으로 시작된 그의 그림 이력이 평생 그와 함께 했습니다.  전에 정리했던 Grandma Moses (모세할머니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Grandma%20Moses ) 역시 미술수업을 받은적이 없는 풍속화가로 분류 됩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우리는 한가지 의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떻게 미술 전문 교육을 받지도 않은 사람들이 미술 전문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능가하는 일이 발생하는가? 왜 서툰 그림이 이따금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것일까? 왜 서툴고 조악해 보이는, 균형도 안맞고 엉뚱한 그림이 국립 미술관의 전시실을 차지하는 일이 발생하는것일까?  여기서 더 나아가서, 그러면 '교육'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까지도 가능해집니다.

 

 

이 질문에 누군가 전문가가 뭐라고 조언을 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혹은 제가 계속 공부를 해 나가다가 어느날 어떤 실마리에 도달하면, 다시 이 페이지로 돌아와 이야기를 마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드워드 힉스의 그림은 저를 빙긋 웃게 만듭니다.  그의 그림속의 동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바보 사자처럼, 얼간이 표범처럼, 이빨빠진 늑대처럼 빙긋 웃게 됩니다.

 

즐거운 추수감사절 되시길.

 

 

참고문헌:

 

1. 앙드레 모로아. (1991)  미국사. 신용석 옮김. 기린총서. 기린원. 5장 (pp 46-55)

2. Philadelphia Museum of Art: Handbook of the Collections (2008) Philadelphia Museum of Art

3. Frances K. Pohl  (2008)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Thames & Hudson: New York, NY.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1. 22. 08:51

 

Tasha Tudor (1915-2008)은  우리나라에 삼일운동(1919)이 일어나기 4년전인 1915년에 출생하여 지난해인 2008년까지 생존했던 미국의 삽화가이며 미술가입니다.  제가 우리나라의 삼일운동 얘기를 왜 하느냐하면,  타샤가 태어나 성장하던 시절 한국은 어떤 상황이었는지 돌아봄으로써 좀더 구체적으로 이를 기억하기 위해서이지요 (^^)  피상적인 어떤 '시간'을 좀더 구체적인 사항와 연결지어 생각하면 나중에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  삼일운동하면, 저는 33인보다는 유관순 '누나'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요. 생각해보니, 타샤 튜더는 우리 할머니와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열 여덟에 시집을 와서 열아홉에 우리 아버지를 낳으셨는데, 우리 아버지의 생년을 헤아려서 우리 할머니의 생년을 거꾸로 헤아리면 대충 우리 할머니와 타샤 튜더의 나이가 비슷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이 페이지의 사진들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타샤 튜더와 나

 

 

 

타샤 튜더는 동화의 '삽화'를 그리거나 자신이 직접 글과 그림을 그린 삽화가이면서 동화작가이기도 하고, 미술가이기도 했던 여성입니다.  제가 이분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한권의 책 때문이었습니다. 책이 하도 아름다워서 이 책을 산것이 2006년 12월의 일이군요.

 

 

The Private World of Tasha Tudor

 

 

다음은 2006년에 책을 다 읽고 간단히 메모했던 독후감입니다.

타샤 튜더 할머니의 그림 세계를 보면,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하여, 꽃 구근을 많이 사기 위하여 그림을 그려서 판다고 말할정도로 매우 현실적이다. 그의 현실성은 그의 그림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직접 자신이 관찰한 내용을 그린다. 모형을 갖다 놓고 그걸 그리는것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것들을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런 면에서 신사임당의 그림과도 많이 닮았다. 늘 맨발의 그녀는 육체노동을 마다하고 그림만 그리는 사람도 아니다. 스스로 노동하고, 자투리 시간을 그림을 그려서 그림을 팔아 살림에 보태고 스스로 먹고 사는것이다. 언제부터 화가가 전업화가이고 철학자가 전업철학자였던가. 언제부터 오로지 그림만 그리는 사람을 프로페셔널이라고 일컫고 생활속에서 살면서 그림 그리는 사람을 아마추어라고 부른것일까? 전업=프로페셔널이라는 이 잘못된 신화를 타샤 튜더 할머니는 맨발로 간단히 일축하고 마는지도 모른다. 상업화가이건 순수화가이건 사실 그건 구분의 요소라고 할수 없을지도 모른다. 보는 사람이 보고 '좋다' 이런 말이 나오면 된다는것이지. 좋다. 이 한마디가 얼마나 어려운것인가.

 

그래가지고, 당시에 약간 '헤까닥'해서 공부 하다말고 자투리 천 사다가 이런 놀이고 하고 놀았습니다. 요것이 말하자면 타샤 튜더 스타일의 앞치마인데, 손바느질로 탄생시킨 '어마어마한!' 작품이었지요... 사실 그 후에도 조각보를 만든다거나, 뜨개질로 이불을 세개나 짜내는 '괴력'을 발휘하기도 했는데, (하하하), 조각이불 세개중에서 가장 근사하게 만들어진 최종 작품은 한국의 우리 엄니한테 갖다 드렸고, 하나는 제가 현재 사용하고 있지요. 그것도 지금 돌아보면 공부 스트레스때문에 약간 '돌아가지고' 저지른 '난동'이었다고나 할까요.  아아 곱게 미쳤던 것인지도 몰라요. 어쩌면 인생 자체가 그냥 한바탕 꿈같기도 하고...

 

 

 

 

ChristmasGift.jpg

 

 

앞치마를 입은 모습입니다. 앞의 털복숭이는 우리 강아지 (아무리 늙어도 영원한 강아지)

ChristmasGift_006.jpg

 

 

 

타샤 튜더 할머니는 본업이 삽화가, 미술가이긴 하지만, 그가 우리나라에까지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도 한국에도 번역소개 된 '타샤 튜더의 정원'류의 그의 삶을 모습을 닮은 책들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환경문제가 전지구적인 화제로 대두 되고, 웰빙 바람이 불면서 미국에서 친자연적으로 살아가는 화가의 삶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그 분위기가 일본과 한국에도 흘러 들어오면서 타샤 튜더가 일약 유명인사가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에 소개한 책 외에도, 도서관에서 아래의 책들을 빌려 올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탸샤 튜더 관련 책들이 많이 있지요.

 

 

탸샤 튜더의 어린시절

 

타샤는 매사추세츠주의 보스턴 (Boston)에서 1915년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건축 설계자였고, 어머니는 미술가였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좋아했는데, 여주인공 이름인 나타샤를 딸에게 붙여주었는데 결국 '타샤'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튜더라는 성은 어머니의 성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어린 딸을 데리고 친구를 만날때, "여기 튜더의 딸이 왔노라"하고 말하길 좋아했으므로, 타샤는 자신의 이름이 타샤 튜더인줄로 알았다고 하는데요,  공식적으로는 아버지의 성을 갖고 살다가 첫 남편과 결혼한후 남편의 성을 사용했고, 그 남편과 이혼 하면서부터 '튜더'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로 결정 했다고 합니다.  (타샤 튜더는 두번 결혼하고 두번 이혼했습니다.)

 

'나로'님이 타샤 튜더에게 한국인 며느님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셔서 웹 검색을 해보니 그분이 쓰신 시어머니 타샤 튜더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곳에 나옵니다. (내용이 좋으니까 여러 블로거들이 스크랩을 한것으로 보입니다.)  그 중에 http://kr.blog.yahoo.com/jjssslee/15  페이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시어머님은 학교교육을 8학년까지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트에 관한 한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지식과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약간, 타샤 튜더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것 같습니다. 타샤 튜더의 교육 관련 자료를 찾다 보면 그가  Boston Museum School of Fine Arts (http://en.wikipedia.org/wiki/School_of_the_Museum_of_Fine_Arts,_Boston) 에서 수학했다는 내용이 있고, 그 외에도 미술가들로부터 개인 지도를 받았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타샤 튜더가 이 학교의 어떤 과정에서 몇해동안 수학했는지 알 수 없고, 이 학교에서 8학년 과정까지 공부를 했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만, 타샤 튜더가 성장하던 시기 (1915년생 미국 소녀가 성장하던 시기)에 미국 여성들중 정규 대학 교육을 받은 고학력 인구가 얼마나 될지 상상해 본다면 타샤 튜더의 8학년까지의 교육 이력이나 혹은 그의 미술학교 수학 이력이  교육적으로 열악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타샤 튜더의 어머니도 미술가였고,  어머니와 교류하던 절친한 사람들도 미술가였던 점, 그리고 그가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거나 미술가들로부터 개인지도를 받았음을 볼때, 그는 미술가가 될만한 교육을 충분히 받았다고 봐야 마땅할 것입니다. (당시 조선의 소녀였던 우리 할머니는 소학교도 못다닌 농가의 규수였지만, 아무도 우리 할머니를 학교 교육도 못받은 불학무식한 처자로 보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교육제도는 오늘날과 달랐으므로.  똑같은 이유로 타샤 튜더가 설령 8학년까지만 학교를 다녔다해도, 오늘날의 기준으로 그의 교육을 가늠하면 곤란하다는 것이지요.

 

 

타샤 튜더의 부모님은 타샤가 9세가 되던 해에 이혼을 합니다. 타샤는 엄마와 함께 뉴욕의 예술가들의 거리에서 살면서 성장하다가 후에는 커넥티컷주에 있는 엄마 친구의 집에서 지내면서 이따금 엄마를 만나게 됩니다.  아래의 지도는 미국 영토중에 우리가 '뉴잉글랜드'라고 말하는 지역의 지도입니다.  이 뉴잉글랜드 지도를 왜 소개하는가 하면 '미국사'혹은 '미국 문화사'에서 뉴잉글랜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기 때문이고,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타샤 튜더가 전생애를 이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지냈으며 뉴잉글랜드의 전통 문화를 평생 지키며 살다간 사람이기 때문 입니다.

 

뉴잉글랜드

 

 

Map of New England.

https://americancoloniesdana.wikispaces.com/Economy+-+New+England+Colonies

 

 

우리나라에서 호남, 영남 뭐 이런 식으로 지역을 구분하듯이 미국에서도 땅덩어리를 몇개의 구역으로 나눠서 이름을 붙이는데, 중서부도 있고, 서부도 있고, 여러가지 갈래중에 '뉴잉글랜드'라는 갈래가 있습니다. 

 

 * Connecticut 커넥티컷

 * Rhode Island 로드 아일랜드

 * Massachusetts 매사추세츠

 * New Hampshire 뉴 햄프셔

 * Vermont 버몬드

 * Maine 메인

 

이상의 여섯개 주가 뉴잉글랜드 문화권에 속합니다.  며칠후에 미국에 추수감사절 (Thanks Giving Holidays)이 다가오는데, 이 추수감사절은 이 뉴잉글랜드에 미국 건국초기에 정착했던 사람들이 인디언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식사접대를 한것에서 유래합니다.  뉴잉글랜드는 말하자면 신생국가 '미국'이 태어나 태를 묻은 곳과  같은 곳입니다. 뉴잉글랜드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영국'을 기리는, 영국의 문화가 많이 스며든 곳이기도 하지요. 

 

뉴잉글랜드에서 결혼 생활 그리고 동화책 작업

 

 

 

뉴잉글랜드의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난 타샤는 부모 이혼후에 뉴욕에서 지내다가 커넥티컷주의 농가에서 아름다운 농가 생활에 반하게 됩니다.  타샤는 아름다운 전원생활을 일찌감치 꿈꾸게 되지요. 1938년 타샤는 Thomas Leighton McCready, Jr. 와 결혼하여 코넥티컷의 '어머니의 농가'에서 살림을 시작합니다 (어머니가 과테말라로 미술 여행을 떠나서 집이 비어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남편쪽 조카를 위해서 Pumpkin Moonshine 이라는 그림 동화를 그려서 출판하게 되는데, 이 작품이 좋은 반응을 얻어 그후로 타샤 튜더는 직접 자신의 그림동화책을 만들어내거나 삽화를 그리는 일로 평생을 보낼수 있게 됩니다.  Pumpkin Moonshine 은, 미국에서 호박속을 파낸후 호박등을 만드는 전통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어린 소녀가 호박밭에 가서 아주 큰 호박을 하나 발견하는데 그 호박이 제 멋대로 띠굴띠굴 굴러다니면서 사고를 치다가 결국 잡혀서 호박등이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호박등은 매년 10월 마지막날인 할로윈데이 (만성절 이브)에 많이 만들지요.  이 작품이 그이의 출세작이었다 할 만 합니다.

 

 

 

 

 

1945년에는 그가 삽화를 그린  Mother Goose (전통 동요 모음집)로 Caldecott 상 (http://en.wikipedia.org/wiki/Caldecott_Honor ) 을 받기도 하고, 그의 동화와 삽화작업은 그에게 각종 상과 훈장을 불러옵니다.

 

 

 

 

 

 

1945년에는 그가 삽화를 그린  Mother Goose (전통 동요 모음집)로 Caldecott 상 (http://en.wikipedia.org/wiki/Caldecott_Honor ) 을 받기도 하고, 그의 동화와 삽화작업은 그에게 각종 상과 훈장을 불러옵니다.

 

 

 

 

 

 

 

 

 

 

 

이들 부부는 뉴햄프셔주로 이사하여 자신들의 집과 농장을 갖게 되는데, 이곳에서 이들의 네명의 아이들이 태어나 자랍니다. 이들 부부는 1961년 이혼합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성을 비롯 자녀들의 성을 모두 '튜더'로 정하게 됩니다.  1971년 타샤는 뉴햄프셔주의 집을 팔고 버몬트주로 이사하는데, 이곳에는 그의 아들 Seth가 이미 와서 정착하여 있었습니다. 아들 Seth는 이웃으로 이사 온 어머니를 위해 직접 '손'으로 농가주택을 지어냅니다. 그것이 타샤 튜더가 2008년 작고하기까지 살게되는, 오늘날 남아 있는 집입니다.

 

 

1971년은 타샤 튜더가 '버몬트'주로 이사한 해 이기도 하지만, 그의 대표작이라 할수 있는 Corgiville Fair 가 출판되어 널리 알려진 해 이기도 합니다. Corgi는 타샤 튜더가 아끼는 개 종류이지요. 영국 여왕이 사랑하는 종류의 개라서 '여왕의 개'라고 알려져 데요.  이 개를 의인화하여 코기마을을 하나 탄생시키고 코기종의 개를 비롯하여 다양한 동물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는 배경입니다.  이야기도 삽화도 모두 타샤의 창작물인데, 배경을 보면 식민지시절 (미국 초기 시절)의 뉴잉글랜드 마을의 풍경이 세밀하게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주인공들이 개나 고양이 혹은 작은 들짐승이지만 배경에는 미국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지요.  저는 지난 여름에 이 뉴잉글랜드 지역을 여행 한 적이 있는데, 타샤 튜더 그림책속의 마을 모습과, 내가 눈으로 확인했떤 전통적인 마을의 모습이 여전히 일치했지요.  이 책이 크게 성공했기 때문에 이후로 Cogville 시리즈가 출판되기에 이르릅니다.  (타샤는 그림을 팔아 꽃뿌리를 샀겠지요.)

 

 

 

 

 

 

 

 

고집쟁이 타샤

 

버몬트에서 정원과 농장을 가꾸며, 미국 식민시절의 삶의 스타일 (복장이나 삶의 방식)을 고집하고 살면서 그림을 그리거나 동화책을 만들어 돈벌이도 하던 타샤 튜더.  그는 그림과 동화 작가라는 전문 영역과,  정원가꾸기와 농장 돌보기라는 또다른 영역을 함께 일궈냈다고 할 만 합니다.  한가지도 이루기 힘든데 두가지를 한 것이지요.  그의 결혼 생활을 보면 1938년에 첫남편과 결혼하여 1961년에 이혼했으니 첫 결혼은 23년간 지속되었고, 후에 또 한번 누군가와 결혼 했는데 오래 가지 못하고 다시 이혼했다고 합니다. 이혼 사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짐작하기에 타샤 튜더는 자기 세계가 확고한, 고집스러운 사람이었을 겁니다.  고집스럽게 세상 문명을 등지고 역사의 어느 시기, 그가 '이상화 했던' 어떤 시기의 삶을 고집하고, 그 시기의 라이프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우리나라의 안동이나, 이와 유사한 '역사적인' 마을에 가면 아직도 조선시대의 양반 복장을 고집하고, 당시의 풍습대로 제사지내고 당시의 풍습을 고집하는 분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분들에게는 자신이 지켜야 할 어떤 이상향이 있을 것입니다. 타샤 튜더 역시 이런 '자신만의 이상향'을 추구하고 고집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옳다 그르다를 논할 이유는 없지만, 아무튼 평범하지는 않은 것이지요.  그렇게 살아간다는 일이 간단하지 않지요. 

 

타샤 튜더 관련 책들 (사진으로 도배가 된 환상적인 책들)을 보면 이분의 삶의 풍경이 천국처럼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가꿔내기 위해서 타샤가 얼마나 열심히, 부지런히 일 했는지 우리는 잘 가늠할수 없습니다. 삶의 한 장면은 아름다울수 있지만, 그 장면 뒤에 숨겨진 노고는 사진에 잘 드러나지 않지요.

 

 

타샤 튜더의 아름다운 삶이 가득한 사진집 속의 어느 미국 할머니 (타샤)를 보고 있으면 그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조선땅에서 태어나 조선인, 한국인으로 살다가 타샤보다 몇 해 일찌 저승으로 떠나신 우리 할머니의 삶이 포개집니다.

 

 

 

 

 

특히나 아래에 보이는 풍경속의 타샤는 우리 할머니와 참 닮았습니다.  집도 풍경도, 사람 모습도 우리 할머니의 풍경과는 다르지만, 쌓인 눈과, 겨울 나무와, 좁다란 길을 걷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우리 할머니 같습니다.  튜더의 정원, 튜더의 아름다운 실내장식보다는 저것을 가꾸기 위해 저 노인이 기울였을 노력, 한낮의 현기증, 한겨울의 추위, 가을의 소슬바람, 이런 것들이 이제 제 눈에 들어옵니다.

 

"너 타샤 튜더처럼 살고 싶은가?" 누군가 묻는다면 저는 아마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 것입니다. 일단 저는 매우 게으르고, 농사짓는것 힘들다는것 잘 알고...  게으른 주제에 이런 아름다운 삶을 탐하면 안되겠지요. 그대신 평생 내 힘으로 일하고 내 밥벌이 내가 하고, 가능하면 남 도와주면서 사는 인생, 불평안하고, 남 탓 안하는 인생. 그런 인생은 희망하는 편입니다.  그렇게 살다 죽으며 좋을것 같습니다만 ... 아 그것도 요원하군요 저야말로 잘되면 내탓 안되면 모두 남의탓으로 돌려버리고 이불 뒤집어쓰고 신세한탄하기 일쑤이므로. ㅎㅎㅎ.

 

 

 

 

 

 

 

 

 

 

 

미국 미술사 속의 세명의 할머니

 

제가 알거나 기억하는 범위 안에서, 미국 미술계에서 '눈에 띄는' 할머니 셋을 고르라면  저는

 

(1) 모세 할머니 Grandma Moses (1860-1961)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Grandma%20Moses

(2)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fe (1887-1986)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Georgia%20O%27Keeffe

(3) 타샤 튜더 Tasha Tudor (1915-2008)

 

이렇게 세명을 꼽고 싶습니다.  (조지아 오키프 페이지도 차근차근 만들겠습니다.) 뭐, 적어도 '할머니' 소리를 들으려면 90가까이 살면서 활동을 해야겠지요.  =)

 

이 세사람중에 (1) 모세 할머니는 가난한 농가의 딸로 태어나 평생 평범한 농가의 안주인으로 남편과 해로하다가, 남편이 사망한 후에 눈이 침침해서 (!) 뭐 심심풀이로 그림 그렸다가 대박! 터진 천재였고요. (2) 조지아 오키프는 엘리트 미술 교육 과정을 거쳐 미술계의 별이 된 화가였고요, (3) 타샤 튜더는 삽화와 동화 분야에서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다가, 막판에 (?) 그의 라이프 스타일로 더욱 유명해진 분입니다. 각자 삶의 이력이나 그림의 분야가 다르지만,  '장수한 미국 미술가'라는 공통점도 있고, 다들 개성있고 매력적인 여성이었다는 공통점도 있지요.  =) 참 매력적인 할머니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나는 우리 할머니가 가장 힘있고 매력있는 할머니였다고 생각해요. 내 할머니 이니까~  나를 키워준 할머니이니까요. (무조건인거죠)

 

 

 

 

 

 

 

정리 2009년 11월 21일 RedFox

 

 

 

http://www.tashatudorandfamily.com/index.html  : 2008년 작고한 타샤 튜더 할머니의 가족이 운영하는 홈 페이지.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