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1. 22. 04:05

http://americanart.textcube.com/149  이전 페이지에서 디트로이트 벽화를 그린 디에고 리베라에 대하여 간단히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이 페이지에서는 디트로이트 벽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는 이 벽화가 있는 곳은 'Rivera Hall'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벽화가 그려지기 전 원래 이곳은 내부 정원 (가든 코트 Garden Court)이었습니다.  미국의 큼직한 미술관에 가면 대개 크고작은 이런 형식의 '정원'이 있습니다.  본래 정원이었던 곳인데, 미술관장인 발렌티노가 '벽화'를 설치한다고 했을때 건물 설계자는 자신의 전체적인 건물 구상을 망쳐놓는다고 반대를 하기도 했답니다.  그렇지만 발렌티노의 벽화에 대한 의욕은 완고했고, 그는 어떠한 반대나 비난에도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지요.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벽화의 일부, 나무의 뿌리 부분 중심에 태아가 웅크리고 있는듯한 모습이 보입니다.  이것이 4면 벽화의 동쪽면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4면 벽화중에서 동쪽과 서쪽에는 다른 홀로 이어지는 '출입구'가 있으므로 온전한 큰 벽이 아닙니다.  남쪽과 서쪽벽은 온전한 벽입니다.  애초에 발렌티노가 리베라에게 주문한 것은 남쪽, 북쪽의 전면이었습니다.  그런데 리베라가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동쪽, 서쪽 벽 까지도 그림으로 채우고 싶어했고,  후원자였던 포드 (헨리 포드의 아들)도 이를 적극 지지하면서 4면 전체의 벽화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사진은 한번 클릭하시면 새창이 열리고, 그 상태에서 확장 표시를 클릭하시면 원래의 큰 사진이 열립니다.

 

 

벽화속에 내가 있다!

 

출입구로 들어가면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입니다. 마주 보이는 벽이 동벽. 오른쪽이 남벽, 왼쪽은 북벽.  천장부분에는 천창이 있어서 자연조명 역할을 합니다.  천장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리베라는 포드 자동차 공장을 그의 벽화의 주요 소재로 사용했습니다.  당시 (1932년) 디트로이트 지역의 주요 산업은 자동차, 의약, 화학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포드가에서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그의 벽화 작업에도 적극적으로 재정적 지원을 해 줬고, 리베라가 그림의 소재가 될만한 산업의 실재 현장을 확인해보고 싶어 했을때 이를 지원해준이도 포드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 작업이 진행되는 11개월간, 이 작업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의 여론이 만만치 않았는데,  종교적 신성모독과 관련된 비난도 있었고, 사회주의 사상이 엿보이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었고, 또한  디트로이트 미술관의 벽화를 왜 '포드' 공장으로 채우는가에 대한 불평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에대한 미술관장 발렌티노의 변론이 적절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도 관심도 없었고, 도와주지도 않았지 않은가. 오직 포드만 이 작업에 관심을 갖고 도와준것이 아닌가? 공장의 문을 열어 보여준것도 포드뿐이지 않았는가?  포드공장이 '주인공'으로 그려진 것에 대한 비난은 이런 논리로 잠재울수 있었다고 하는데,  단순히 짐작컨대 (1) 포드사의 재력이 다른 불만을 무마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대단했을 것 같고 (2) 포드 자동차관련 회사에 재직하는 디트로이트 시의 시민의 인구가 압도적이라서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랬을 것 같습니다.

 

리베라는 밑그림 작업을 한달가까이 했는데, 전문 사진사와 다니며 포드 자동차를 비롯한 디트로이트 지역의 다른 공장들의 작업 광경을 세밀하게 사진에 담았다고 합니다.  사진도 세밀하게 찍고, 그의 예술가적인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공장의 분위기도 관찰하고, 거기에 그의 맑시즘까지 가세하여 노동자들이 힘차게 일하는 광경을 생생하게 전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자동차 생산의 전 공정이 남쪽, 북쪽 벽화에 상세하게 실려있는데, 이 공정은 현장 실무자, 그리고 전문가들의 안목으로 봐도 정확하고, 사실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리베라는 대충 상상해서 아무렇게나 그린것이 아니라, 사실에 입각해서, 한치의 틈도 보이지 않고 성실하게 현장을 벽에 옮겨 담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리베라가 이 벽화 제작을 할 당시는 미국은 '대 공황'의 초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공황상태에서도 포드자동차 관련 공장에서 일하는 연인원이 십만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리베라는 그의 그림속에 경제대공황으로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보다는,  공장에서 활기차게 일하는 노동자들을 담는 것에 주력을 했지요. 그리고 단지 산업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 농경에서 산업화로 이어지고 과학사회로 나아가는 인류의 역사를 모두 이 벽화에 담아내려 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에 천지창조의 대 서사시를 담아냈다면, 리베라는 디트로이트 벽화에 인류 문명의 발전사를 담아 내려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벽화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을때 디트로이트의 시민들은 벽화속의 주인공들이 자기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공장노동자들이 주인공인, 민중인 주인공인 프레스코화가 탄생한 것이지요.

 

 

 

동쪽벽화

 

동쪽 벽화의 상단에는 오른쪽에 과일을 안고 있는 여인, 왼쪽에 곡물을 감고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여인들의 아랫쪽에는 미시간주에서 생산과는 과일과 채소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호박, 옥수수, 포도, 토마토, 배추, 가지, 버섯, 감자등이 소담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두 여인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왼쪽의 여인은 유럽계의 금발여인이고, 왼쪽은 남미계의 검은 머리 여인입니다. 몸집은 둥글둥글하니, 리베라가 즐겨그리는 풍만한 형태인데 풍요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중앙의 '태아' 가 그려진 그림을 살펴보면 태아를 중심으로 나무 뿌리들이 펼쳐져 있는데 그 뿌리들은 여러겹의 지층들 위에 존재합니다. 화석이 보이기도 하고요. 오래된 지구의 세월을 느끼게 해줍니다. 인간의 생명이 이렇게 지구와 자연속에 잉태되고 보호받고 성장한다는 자연친화적인 리베라의 생명관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태아 혹은 영아의 그림은 디에고와 그의 아내 프리다 칼로의 개인사 때문에 더욱 유명해집니다.  이들 부부가 디트로이트에 11개월간 머물며 벽화 제작을 하던 당시,  멕시코 출신의 칼로는 원래 건강도 안좋은 상태에서 추운 지방에 있자니 아주 괴로웠을겁니다.  이곳에서 칼로는 유산을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불구의 몸이었는데 어렵게 아이를 갖게 되었다가 유산이 되니 그 심정이 무척 괴로웠을겁니다.  디에고 리베라는 그들이 잃어버린 아이를 이 동벽에 그려서 영원히 기억하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디트로이트에서 잃어버린 아이이니까, 디트로이트에 영원히 남기고 싶었을것 같습니다.

 

 

 

 

 

 

 

 

 

 

서쪽벽화

 

돌아서서, 좀전에 지나쳐온 입구쪽 벽을 보면 서쪽벽이 보입니다.  서쪽을 향해서 섰을때 왼쪽이 남쪽, 오른쪽이 북쪽 벽입니다.

 

서쪽 벽화에는 여덟장의 그림에 항공, 항만, 에너지 관련 산업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리베라는 이 산업들의 '평화적'인 면과 '파괴적'인 면을 대비시키려 했습니다.

 

 

 

 

 

 

 

 

북쪽벽화

 

서쪽을 향한 상태에서 왼편 벽이 북쪽입니다. 북쪽 벽화 입니다. 남쪽벽화와 북쪽 벽화 상단에는 각각 두명의 거대한 인물과 거대한 손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랫쪽 큰 벽화에는 공장의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이 손들은 각기 '광석'을 쥐고 있으며 이 광물들이 나오는 '지층'에 대한 묘사가 바로 아래의 판에 그려져 있습니다.

 

 

 

이 북쪽벽화 오른편 구석쪽에 기묘한 그림이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 기독교의 예수 탄생 장면 같은데, 이 꼬마가 의학 연구실에서 주사를 맞고 있는듯한 광경입니다. 바로 아래에는 체내의 인간 태아의 생장 환경이 그려져 있습니다. 과학 혹은 생명과학이 인간의 생명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그림 때문에 당시 기독교계의 반발이 심했다고 전해집니다. 신성모독이라는 것이겠지요.  어떤 사안에 대하여 '신성모독'을 외치는 집단은 어디에나, 어떤 시기에나 있어왔습니다.  이들의 반발에 굴하지 않은 디트로이트 미술관측에 경의를 표합니다.

 

 

 

북쪽벽화의 왼쪽구석은 독가스 폭탄을 만들어내는 공장의 광경입니다.  과학기술이 생명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발전을 하기도 하지만 동일한 지식이 생명 살상의 방향으로 나아갈수도 있음을 고발하거나 경계하는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북쪽 벽화 중앙의 가장 큰 그림은 1932년 포드사의 자동차 공장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제작 공정은 그림의 왼편에서 시작하여 차례차례 다음단계에 대한 묘사고 진행되고, 맨 오른쪽에는 노동자들이 점심 식사를 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저야 '기계'쪽에 문외한이고 '공장'에서 일을 해본 경험이 없어서 모르지만, 자동차 공장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 그림 앞에서 리베라의 정확성에 감탄을 한다고 전해집니다.  그만큼 그는 공장의 전 공정을 세밀히 관찰했고,  사진 촬영도 세심하게 했고, 사실에 입각하여 그림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자동차 제작 관련 전문가가 이 그림을 본다면 저와는 다른 시각으로 관찰할것이고, 아마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줄지도 모르겠습니다.)

 

북쪽벽화에는 리베라 자신이 '까메오'로 출연을 하기도 했고요.  얼굴이 드러난 사람들중에 그의 조수라던가 실제 공장 노동자등 당시 리베라의 작업을 돕던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남쪽벽화

 

 

북쪽과 마찬가지로, 남쪽 벽화의 상단에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연상케하는 두명의 거대한 사람이 그려져 있고, 이들의 중앙에 역시 거대한 손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먹을 꽉 쥐고 있거나, 무엇을 잡을듯 벌리과 있거나 혹은 광물을 쥐고 있는 손들입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Space Odyssey 라는 1968년 영화 (http://www.imdb.com/title/tt0062622/)를 보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제목의 음악과 함께 그 왜 침팬지 같이 생긴 원시 인류가 뼈다귀를 갖고 놀다가 문득, '문득' 이를 '도구'로 사용하는, 어마어마한 인류의 도약 장면이 나오쟎아요.  아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북소리처럼 가슴이 쿵쿵 뛰는데요...이 손들을 보니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그 장면이 떠오르더라구요.  (아 생각난김에 그 영화나 빌려다 볼까....또다시 산만해지는....)  물론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다'라거나 '도구'사용이 인류 문명의 시초라고 보는 시각은 이미 있어왔지만,  리베라의 벽화에서 그 '손'에 대한 해석은 시각적인 '절정'에 달했다고 봅니다.  이만큼 사람의 '손'을 위대하게 표현한 작가가 또 있었을까요? (과문한 탓인지 저로서는 다른 작품이나 작가를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남쪽 벽화 상단 왼쪽 구석에는 '제약'관련 그림이 있습니다.  실제로 디트로이트 시에 있는 어느 제약회사의 공정이 묘사된 것이라고 합니다.  오른쪽 구석에는 화학제품 공장이 그려져있습니다. 독성이 강한 화학물질 때문인지 보호복을 입고 얼굴을 모두 가리고 일은 하는 노동자도 보입니다.

 

 

 

1933년 3월 21일 남쪽 벽화가 완성되어 공개되었을때, 이 그림에 묘사된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은 벽화에 그려진 자신들을 발견하고 놀라워 했습니다. 누구도 이 미술관의 벽화속에서 공장노동자들이 '주인공'이 될거라고는 상상을 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공장노동자로 살아가는 지역 주민들은 환호했고,  종교나 사상적으로 이 벽화들을 문제시 한 집단은 심한 반박에 나섰습니다. 1933년 3월 26일에는 일만 (10,000)명의 시민들이 이 벽화를 보기위해 몰려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이 벽화가 제작되고 있던 당시의 디트로이트의 분위기는 암담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1933년 1월부터 3월 사이에 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자동차 산업이 정지 상태였고, 2월에는 디트로이트의 금융계가 몰락했습니다. 미 전역이 대공황으로 접어드는 것과 맞물린 현상이었습니다.  이런 암담함 속에서 노동자를 중심에 세운 이 벽화는 당시의 노동자들에게는 작은 위안 혹은 희망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남쪽 벽화의 공장 노동자들 뒷편에 구경하는 무리들이 보입니다. 노동자복이 아닌 신사복을 입은 남자들,  정장 차림을 한 여성들이 보입니다.  그중에 두 여성은 가슴에 큼지막한 십자가 목걸이가 매달려있고, 손으로 네모난 물체를 안고 있지요.  손지갑이거나 성경책이거나...  이 귀부인들에 대한 리베라의 시각은 썩 유쾌해보이지 않습니다. 이 공장의 분위기와 안 어울리지요.  저는 이들을 '노동과 동떨어진 존재들'로 파악하는 편입니다. 

 

 

 

 

 

1933년 3월, 디트로이트 벽화를 완성한 리베라는 뉴욕의 록펠러 센터 벽화를 위해 디트로이트시를 떠나는데, 리베라가 록펠러 센터에 그린 벽화는 세상 빛을 보지도 못한채 완성직후 폐기되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리베라가 자신의 사상적 색채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완강히 버텼고 (벽화에 그린 레닌을 절대 지울수 없다고 우겼고), 록펠러가문으로서는 뉴욕 한복판에 소련 지도자의 초상이 그려진 벽화를 모셔둘수는 없는 입장이었으니까요.  (그 십수년후에 몰아친 매카시즘이라는 빨갱이잡기 놀이의 폭풍을 회상해본다면 록펠러가는 현명했던 것이지요. 하하하.)  Bill Bryson 이 그의 성장기 이야기를 담은 책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bolt Kid (http://americanart.textcube.com/166 )에도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당시, 뭐든 금기시되는것, 안좋은것, 이상한것은 '빨갱이'라는 말로 대치될 정도로, 엉뚱하게 사람 때려 잡을때 쓰던 말이 '빨갱이(communist)'라는 내용이 아주 코믹하게 나옵니다.  이를 미연에 방지한 록펠러가문이 역시 앞을 내다보는 눈이 있었다고 봐야지요.  (그래서 결국 우리는 어마어마한 리베라의 벽화를 볼 기회를 영원히 잃고 말았지만요.)   그런데 이 벽화보다 록펠러 센터의 벽화가 더 규모가 큰것이었다고 하는데, 얼마나 굉장한 그림이 그려졌을지,  무엇을 형상화 했을지, 그 묘사는 얼마나 사실적이고 치밀했을지 도대체 상상이 안가는데요.  아쉽군요. 파괴하기전에 상세한 화집이라도 ....남겨두시지... (웹이나 책을 뒤지면 부분적인 밑그림들이 나오긴 합니다.)

 

그리하여. 이 디트로이트 리베라 벽화가 미국에서 우리가 볼수 있는 유일한 리베라의 벽화라고 합니다.  디트로이트를 지나치면서 한나절 시간이 되신다면 이곳을 구경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RedFox  November 2009  (2009년 10월 31일에 방문하고, 11월 21일에 글 정리를 마치다.)

 

 

 

참고문헌:

 

 

 1. Diego Rivera: The Detroit Industry Murals, The Detroit Institute of Arts, 2006. Scala Publishers Ltd.

 2.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Frances K. Pohl, Thames & Hudson

 

 

관련 페이지:

 

 1. http://americanart.textcube.com/94  Detroit Institute of Art 방문기

 2. http://americanart.textcube.com/149 Diego Rivera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1. 16. 11:09

 

 

http://www.nps.gov/hafe/index.htm

 

Harpers Ferry National Historical Park 하퍼스 페리 국립 역사 공원이 웨스트 버지니아 (West Virginia)에 있는데 워싱턴에서는 대략 60마일 거리. 한나절 소풍길로 적당한 거리입니다.  이곳은 일주일 가까이 비가 내렸는데, 어제 토요일부터 조금씩 개이기 시작하더니 일요일인 오전 화창한 날씨가 열렸습니다.  사실은 버지니아 남부 해안도시인 Norfolk 에 있는 Chrystler Museum of Art (크라이슬러 미술관)에 가 볼 계획이었는데, 폭우 때문에 그 도시가 물에 잠겼다고 합니다. 미술관은 다음주에나 다시 연다고 하고.  그래서 시무룩하게 있다가 가까운 하퍼스 페리에 가볍게 다녀왔습니다.

 

하퍼스 페리는 남북전쟁 격전지로 알려져있고, 당시의 건물들이 아직도 남아있거나 재건되어 역사 유적지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포토맥강과 셰난도강 (존 덴버가 불렀던 Almost heaven, West Virginia, Blue Ridge mountains, Shanandoah River ...Country Road.. 바로 그 곳입니다)이 만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Bill Bryson이 A Walk in the Woods 라는 책을 썼는데, 그가 남북종단을 하려 했던 그 애팔라치아 산맥 트레일도 이곳에 이어져 있습니다. 이곳이 그 트레일의 가운데쯤 되는 곳입니다.  오하이오주에서 워싱턴 디씨까지 이어지는 운하길 역시 이곳에 이어져 있습니다. 이래저래 산도 아름답고 강도 아름답고, 아름다운 마을도 있어서 소풍장소로 좋은 곳인데,  뭐 제가 '풍수지리'를 잘 모르지만 들은 풍월로 읊어보자면, 이렇게 강물이 만나고 산길이 만나는 중심에 있는 마을에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라 할 만 합니다.

 

이곳에서 '사건'이 일어납니다.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 발발에 영향을 준 문학작품으로 Harriet Beecher Stowe 의 엉클 톰스 캐빈 (1852)이 유명합니다. 그런데 남북전쟁 발발에 영향을 준 또다른 인물 John Brown 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제가 존 브라운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알게 된 것도 최근의 일로, '미국 미술'을 혼자 공부한것이 그 계기였습니다.

 

Horace Pippin (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Horace%20Pippin) 이라는 미국 흑인 화가에 대하여 저는 몇페이지를 더 작성할 생각인데, 그가 그린 연작중에 John Brown 이 등장합니다. 그런가하면 앞으로 장차 소개하게될 Winslow Homer 라는 미국이 자랑하는 근대 화가의 그림에도 존 브라운이 등장합니다.  한편, 지난 8월에 저는 매사추세츠주의 콩코드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작은 아씨들'을 쓴 올코트의 집을 방문했을때에도 올코트 가문을 위시한 미국의 초절주의 (Transcendentalism) 철학자들 (Emerson, Thoreau)이 존 브라운을 지지했다는 기록을 읽은적이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존 브라운'이 등장하는데 정작 저는 그의 이름도 낯설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웹으로 '존 브라운'관련 정보를 찾다보니 내가 사는 곳 60마일 거리에 존 브라운 관련 유적지가 있다는 '정보'가 나와주는 겁니다. 하퍼스 페리가 바로 그곳입니다. 이곳은 존 브라운이라는 한 '백인'남자가 흑인 노예 해방을 외치며 폭동을 일으키고 저항하다가 미 해병대에 생포되어 처형된 곳입니다. 위키피디아의 페이지를 이곳에 링크하겠습니다.

 ( http://en.wikipedia.org/wiki/John_Brown_(abolitionist) )

 

존 브라운에 대한 평가는 좀 엇갈리는데, 광인이었다는 악평도 있고, 흑인 노예 해방을 위해 앞장선 백인 선구자라는 시각도 있고 그렇습니다.

 

 

http://www.nps.gov/hafe/index.htm

 

 

 

 

 

 

 

 

 

사실, 하퍼스 페리 마을에 도착하니 이 일대의 건물이나 기념물들이 거의가 존 브라운 사건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이 마을에는 존 브라운 뮤지엄이 있었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정면에 John Stuart Curry 가 그렸다는 그림의 사진이 걸려있습니다. 제목은 The Tragic Prelude (비극적 서문) 으로 캔자스에 실제로 있는 벽화라고 합니다.  John Stuart Curry 는 캔자스의 지역화가로, Benton, Wood 와 더불어 미국 사실주의 화풍에서 '지역주의 (Regionalism)'의 기수입니다. 

 

이제 제가 목도하거나 알고 있는 존 브라운 관련 그림을 그린 걸출한 화가들만해도 벌써 Homer, Pippin, Curry 이렇게 세명이나 되지요. 조금 더 들여다보면 더 나와줄것 같습니다.  (나중에 존 브라운 관련 그림들을 위한 페이지를 별도로 적어보겠습니다.)

 

 

 

 

 

 

 

 

 

존 브라운은 1859년 처형되고, 흑인 노예 해방을 위한 남북전쟁은 그로부터 2년후인 1861년에 발발합니다.  미국사에서 남북전쟁 관련 장을 읽어보면 남북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여러가지 정황이 복잡하게 나열됩니다. 그 여러가지 요소중에 존 브라운의 '광적인' 노예해방 운동도 어떤 기폭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 공부를 하면서, 무엇 때문에 무엇이 일어났다고 '단순하게' 정리하고 지나가지만, 그 이면에는 생략되거나 잊혀지거나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일화들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을텐데요.  존 브라운의 역사도 하퍼스 페리를 감싸고 양쪽에서 흐르는 셰난도강, 포토맥강과 함께 유유히 흐르겠지요.  하나의 강이 흐르기 위해 수많은 지류들이 모이듯, 커다란 역사의 물줄기를 만들기 위해 많은 지류들이 한방향으로 흐르는데요, 그렇게 해서 프랑스 대혁명이,  남북전쟁이 혹은 또 어떤 혁명이 탄생하고 흘러가겠지요.

 

 

 

 

 

 

 

이다리를 중앙 경계로 다리 왼쪽에서 셰난도강이 흘러내려와 다리 오른쪽의 포토맥강에 합류 합니다.


 

 

 

 

 

산골짜기라서 오후 다섯시가 되자 벌써 해가 기울고 황혼이 짙은데, 하늘에 비행기들이 바둑판을 그려놓은 것이 보였습니다.

 

 

 

아, 잊지 않게 숙제를 적어 놓겠습니다: 

(1) John Brown 관련 미국 화가들의 그림 모아서 엮기.

(2) 존 브라운에 대한 소개 페이지 따로 정리

 

실상은,  내가 하늘 아래, 강가를 걸어본지가 몇달만이지...일주일 내내 비가 온 덕분에 강이 무서운 소리를 내며 흘렀지... 난 아직 아무것과도 화해가 안된것같아. 나 자신과도. 그 무엇과도. 아무것도.  그저 세월만 흘러갔을 뿐이지...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09. 11. 13. 03:43

피츠버그에는 피츠버그 대학교와 카네기 멜론 대학이 있습니다. 이 두 대학의 건물들이 서로 엉켜있는 시내 중심부에 카네기 미술관이 있습니다.

 

 

미술관 공식 홈페이지: http://www.cmoa.org/

 

 

피츠버그에는 네가지의 카네기 박물관이 있습니다.

 1. 카네기 미술관

 2. 카네기 자연사박물관

 3. 앤디 워홀 미술관

 4. 카네기 과학관

 

http://en.wikipedia.org/wiki/Carnegie_Museums_of_Pittsburgh

 

 

이 네가지 카네기 박물관중에서 카네기 미술관과 카네기 자연사 박물관은 입장료 (성인 15달러)를 내면 두군데 모두 관람이 가능합니다.  두가지 박물관이 서로 동일한 건물동에 있어서 미술관과 자연사 박물관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곳에 두가지 박물관이 있다고 하면 어쩐지 모두 협소하고 작을것이라는 인상을 주는데, 막상 가보면 두가지 박물관 모두 규모가 크고 전시물들이 매우 값진 것들입니다.

 

 

카네기 미술관은 1896년 (한국에 강철왕 카네기로 알려진) Andrew Carnegie 가 설립 한 이래,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장을 하고 있는 피츠버그 소재의 미술관입니다. 아래 사진은 카네기 미술관 건물을 저녁에 찍은 것입니다.  일단 전시회장을 둘러보고 폐관 시간이 되어 나와서 찍은 사진이라 주변이 어둡습니다.

 

 

 

 

통유리 벽 낭에 (분수 너머에) 알록달록한 초상화 두점이 보입니다. 알록달록한 색깔가지고 장난을 치고, 동일한 인물의 초상화 두장이 나란히 걸려있는 것을 봐서, 작가가 누구인지 짐작이 가시겠지요?  (이것은 퀴즈로 남겨 둘까요?)

 

 

 

 

 

 

 

 

 

사실 카네기 뮤지엄에 도착하기 전까지, 이 박물관의 '규모'가 어떠할지 전혀 짐작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어딘가를 찾아 갈때에는 언라인으로 사전에 정보를 많이 찾아보고 짐작을 하고 가는 편인데, 이 박물관이 홈페이지에 제공한 정보는 어딘가 허술해보였습니다.  전시관 종류가 어떠한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페이지도 없었고요.  그래서 좀 '만만하게' 보고 갔었던 것인데, 일단 박물관에 가보니 '기대이상'으로 잘 짜여진 전시장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박물관이 제대로 홍보가 안되었구나. 홈페이지에 문제 있다' 이것이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이 미술관에는 세계 여러나라의 유수의 문화재들 예술작품들이 널려있습니다.  그리스의 조각품들도 있고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명품들도 많이 있습니다. 단 제가 '미국미술' 을 연구중이므로 다른 전시장들은 그냥 쓱쓱 지나치고 주로 '미국 회화' 쪽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편입니다.

 

 

이 미술관에서 아쉬웠던 점은, 아래 사진에 보이는 근대 유럽과 미국의 회화 전시장의 진열상태였습니다.  사실 이 벽에 널려있는 작품들이 간단한 작품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닥다닥 붙여놓은 데다가, 전시장 입구에 그냥 이 작품들의 작가와 제목등 간단한 정보가 들어있는 안내문 폴더 하나를 비치해 놓았습니다.  작품의 제목이나 작가가 궁금하면 그 폴더를 들여다보고 번호와 대조해서 확인을 하라는 것입니다.  폴더는 딱 한권 뿐이었습니다.  만약에 내가 그 폴더를 들고 돌아다니면서 찬찬히 작품감상을 한다면, 다른 사람도 그 폴더의 정보가 궁금하다면, 그는 내가 감상을 마칠때까지 기다려야 할 처지입니다.  이 명화들을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늘어놓고 정보도 제대로 제공을 안하다니! 

 

 

 

 

 

이 그림 무더기 속에 있었던 장 프랑소아 밀레의 '씨뿌리는 사나이' 그림입니다.  밀레의 그림은 대개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지요?  저도 어릴때 우리 시골집 안방 벽에 밀레의 '저녁종' 액자가 걸려있었서 아기때부터 그것을 보면서 성장했습니다. 밀레의 저녁종 그림은 내가 매일 먹는 엄마의 젖이나 할어니가 씹어서 먹이던 밥처럼 그렇게 내 삶의 일부였지요.  아마 우리들은 대개 이와 비슷하게 밀레를 만났을것 같습니다. 이발소나 식당이나 혹은 친척집 마루에 걸려있던 액자나...

 

장 프랑소와 밀레를 '성자'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의 그림은 어딘가 종교적인 느낌이 들지요. 종교가 어떠하건 관계없이 그의 그림에서는 삶의 엄숙함이 아름다운 종소리처럼 울려퍼집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가장 사랑하던 화가가 '밀레'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고흐는 공개적으로, 열광적으로 밀레를 칭송했습니다.  고흐는 이 씨뿌리는 사나이와 흡사한 구도로 그의 작품을 그린적이 있습니다.  밀레와 고흐의 화집을 들여다보면 고흐가 밀레의 그림을 자기식으로 재 창조해 낸 작품이 몇가지가 발견됩니다. 밀레와 고흐. 화풍은 달라도 서로 영혼이 통했던 작가들이었지요.

 

 

 

한가롭고 여유있는 전시장 내부입니다. 주말 오후에도 이정도 한가하다는 얘기는, 이곳이 늘 이정도로 한가할 거란 뜻이지요.

 

 

 

 

 

 

 

 

 

 

 

미술관 현관에 마침 가을이라서 그런지 Alex Katz 의1999년 작품 Autumn 이 걸려있었습니다. Alex Katz 는 (나중에 소개드리겠지만) 잭슨 폴락의 영향을 받다가 후에 자신만의 독특한 미술세계를 이룩한 현대 화가입니다. 이 그림 앞에 서면 내가 가을 속에 들어있다는 기분이 듭니다. 행복한 가을. (색깔치료 받는거지요).

 

 

 

미술관은 카네기 자연사 박물관으로도 연결됩니다. 공룡의 화석도 보이고, 펜실베니아의 광물을 소개하는 전시장도 있고, 고생물학 자료가 많이 있습니다. (미술 블로그이니까 자연사박물관 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만...)

 

 

 

 

이 미술관을 둘어본 후에 앤드루 카네기에 대해서 자료를 좀 살펴보았습니다.  뉴욕에 가면 카네기 홀이 있지요.  그 카네기가 이 카네기입니다. =).  피츠버그에 카네기 멜론 대학이 있습니다. 역시 카네기 입니다.  피츠버그에 카네기 박물관 소속 전시장이 네가지가 됩니다. 규모도 크고 알찹니다. 모두 그 대단하다는 재벌 '강철왕' 카네기가가 기증하고 후원한 것들입니다.  그러면 이 카네기 아저씨가 참 훌륭하고 대단한 분인것 같습니다.  워싱턴 디씨에는 '국립 대성당 (National Cathedral)'이 있습니다. 원래는 '성공회 Episcopal = Anglican Church' 소속이긴 하지만, 종교나 이념에 상관없이 누구나 들어와서 각자의 방식으로 기도하도록 공개된 곳입니다.  그런데 이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래스중에는  앤드루 카네기씨를 기념하는 작품도 있습니다.  정작 카네기는 '무신론자'였지만요.  :)  (카네기가 자연사 박물관을 후원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대단한 자선가, 박애주의자에 대해서 제가 새삼스럽게 삐딱선을 타고 삐딱하게 들여다 볼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력을 살피다보면, 그가 피츠버그에서 한 행적중에 매우 불행한 사태가 있었습니다.  그는 제철소로 급 성장을 했고, 피츠버그의 노동자들 대부분이 카네기 소유의 공장에서 일을 하고 살아갔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들 사이에서 노동운동이 일어났을때, 카네기는 '노조 탄압' 혹은 '노조 소탕' 쪽으로 가닥을 잡아갑니다. 노동자들은 노동운동 결과 오히려 임금이 삭감되거나 일자리를 잃거나,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아주 무시무시하고 철통같은 노조 탄압이 자행된 결과 였습니다. 카네기는 노조를 물리치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의 성공여부와 상관없이 당시 이 재벌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냉소'와 '멸시'로 가득찼다고 합니다. 그는 한때 피츠버그에서 제대로 얼굴도 들지 못하고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후 그는 자선가로 변신합니다. 막대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데 노력합니다. 그는 국립 대성당에서 그를 기념하는 스테인드 글래스를 만들정도로 '천사'같이 삶을 마감합니다.  그가 '한때의 실수'를 이런식으로 개선한 것일까요? 오늘날 카네기를 비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양상을 들여다보면서 저는 한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는 오늘날 오바마 정권에 대한 공화당의 비판, 혹은 중산층 미국인들이 오바마를 보는 시각과도 연결됩니다.

 

오바마가 의료개혁을 하고, 전국민 의료보험 정책을 시행하고 싶어하는데, 공화당과 미국 시민들은 이를 '사회주의 정책'이라고 비난합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이 세금을 조금 더 내는것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사회주의는 한국에서 빨갱이 라는 말처럼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한국에서 빨갱이 소리 들으면 삼족이 위험에 빠지듯, 미국에서는 아직도 사회주의가  반기독교 정신처럼 지옥에 빠질 개념입니다.)  미국 시민들은 '부의 재 분배'에 대하여 적대적입니다.  이들은 그 대신 '부의 사회환원'에 박수를 칩니다.

 

'부의 재분배'와 '부의 사회 환원'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부자가 세금을 많이 내고,  가난한 사람이 세금을 조금 내는 것은 --> 부의 재분배 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돈 많이 벌었는데, 왜 내가 일도 안해서 가난뱅이로 사는 저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위해 세금을 더 내야 한단 말인가?' 이런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극단적인 예입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사회 기금이나 자선행사에 돈을 왕창 기부하는것은 ==> 부의 사회 환원 입니다. 미국은 이런식의 사회 환원에 박수와 찬사를 보냅니다.

 

정리:

 

 그들의 개념  Socialism  Capitalism
 그들의 이해  수익(부)의 재분배  수익(부)의 사회환원  
 그들의 반응

 "빨갱이!"

 

오바마는 빨갱이다!

사회주의를 외치는 놈들은 죄다 빨갱이다!

 

 "자선가!"

훌륭하신 기업인!

사회 환원 하겠다는데 탈세좀 하면 어때?

재산좀 세습하면 어때? (탈세좀 봐주면 안되니?)

 

 

 

카네기는 어떻게 했는가? 제 단견이지만, 카네기는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근사하게 돈을 사회에 환원하고 죽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 위대합니다. 내가 상상할수도 없는 많은 돈을 사회에 주고 돌아갔으니까.  하지만 한번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카네기가 노동자를 탄압하는 대신에 그가 공장에서 벌어들인 돈을 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복지와 교육에 풀었다면? 노동자들에게 월급을 더 많이 주고 그들의 주거환경 개선에 좀더 힘썼다면? 그랬다면?  당시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윤택했겠지요. 그들은 카네기를 그들의 진정한 친구로 사랑하고 존경했겠지요.

 

하지만 카네기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까지 해가면서 그의 부를 키웠고,  그리고 폼나고 근사하게 학교 세우고 박물관 세우고 각종 자선기금 펑펑 내 놓은 후에 천사처럼 천국으로 향했습니다. 돈 참 폼나게 잘 썼습니다.  광나고 폼나는 일에 잘 썼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칭송을 하기도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카네기는 부의 재분배 대신에 부의 사회 환원을 선택한 머리 좋은 사람입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는것을 우리는 비난할수 없습니다.  하지만 정승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쓸줄 아는 사람이 더 훌륭한 사람일것입니다. 카네기는 개와 정승의 조합입니다.  (제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나마 정승처럼 써줘서 땡큐를 날립니다. 덕분에 저같은 사람도 박물관에 가서 좋은 것을 많이 볼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뒤에 피츠버그 노동자들의 고혈이 있음도 잊어서는 안될것입니다.

 

자기가 집에서 부리는 '일꾼'들에게는 '인색'하게 굴면서 밖에 돌아다니며 자선행사에 열중한다면?  하지만 세상은 이런 자선가들에게도 경의를 표합니다. (일단 내가 그 희생자가 아니라면 억울할 이유가 없으니까.)  "넌 왜 하필 그런것을 들여다보는거니 빨갱이처럼?"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할말이 없습니다. 그냥 궁금해진다는거지요. 그저 궁금할 뿐입니다.

 

 

 

 

2009년 11월 7일 토요일 방문.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09. 11. 12. 03:33

 

The Lost Art of Walking: The History, Science, and Literature of Pedestrianism

 

 

The Lost Art of Walking by Geoff Nicholson

 

 

이 책은, 하드커버일때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비싸다'이러고 돌아섰던 것인데, 근래에 페이퍼백이 나와줬다.  하드커버로 시작해서,  페이퍼백이 나왔단 얘기는 책이 잘 팔려나갔다는 것도 의미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포츠'는... (며칠전에 누군가가 묻길래 조금 생각해보고 대답했는데)...'걷기'이다. '걷기'라면 자신 있으니까.  안타깝게도 달리기는 잘 못한다.  걷기는 잘 한다. 걷기 잘하는데 달리기를 못한다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난 정말 잘 걷는다.  우리 언니는 내 말을 이해한다.  우리 언니는 정 반대이다. 우리 언니는 달리기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피로한줄 모르겠는데, 걷기는 오래 못하겠다는 것이다. 걸으면 지루하고 어지럽고 달리면 머리가 가볍다고 한다.  우리언니는 나와 정반대인데, 그래서 나를 이해한다고 한다.  난 달릴때 힘들고 어지럽고 걸을때 몸이 가볍고 좋은 생각이 많이 난다. (한때 미친듯이 걸었으나 지금은 통 걷지를 않는다...하지만 내가 이 깊은 삶의 수렁을 벗어나면...언젠가...다시 옛날처럼 웃으면서 활기차게 걷게 될지도 모른다.)

 

걷기 이외에 '수영'을 잘 하지는 못하지만 좋아한다. 특히 평온한 바다에서 하는 수영을 좋아한다. 바다에서 송장처럼 둥둥 떠 돌아다니는 일을 좋아한다. (플로리다에서 공부할때, 돈 안들이고 할수 있는 오락이 바다에 가서 둥둥 떠다니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잘 못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스포츠는 '마라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마라톤' 선수들의 몸매가 가장 아름답고 섹시한 몸매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최소한의 오직 필요한 근육만 붙어있는, 강인한.  (군더더기 장식적 근육에 대해서는 경멸하는 태도를 갖고 있는 편이다.)  나는 이봉주 선수를 좋아한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냥 그 사람이 믿음직하다.  그리고 또 좋아하는 스포츠는 '축구'이다. 왜 축구를 좋아하느냐 하면...축구니까 그렇다... 박지성 때문도 아니고 그냥, 공원에서 사람들이 축구하는 것을 멀리서 멀거니 쳐다볼때가 있다. 나는 그 사람들을 쳐다본다.

 

그외의 스포츠에 대해서 나는 별반 관심이 없다. 나는 국가대표가 누군지도 잘 모르고, 국제 행사에서 죽어라고 한국을 응원하는 일에도 별 관심이 없다.  스포츠가 스포츠지 뭐 별건가 싶기도 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는 (누군가 묻길래 조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걷기.'

 

언젠가...전처럼.. 하루에 몇시간씩 걷는 그런 나날이 오기를... 걷기를 하면 우울증이 사라진다는 설도 있지만, 그것도 속이 편할때, 배불러서 우울할때의 얘기이다.  만약에 걷기를 통해 우울증을 해결할수 있었다면,  노무현 대통령이 산책나갔다가 바위에서 점프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것이다. 정말 우울할땐, 걷기도 별 소용이 없다. 내가 요즘 걸으러 나가지 않는 이유는, 나 역시 걸으러 나갔다가 키브리지에서 그냥 점프하고 싶어질까봐...  내가 산 걷기전용 신발 두켤레는 먼지만 뒤집어쓴채 내 방구석에 버려져 있다.  점프하면...간단하지...  하지만 생을 그렇게 끝낼순 없는 일 아닌가...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09. 11. 9. 14:22

 

공식 홈페이지: http://www.warhol.org/

 

 

2009년 11월 7일 토요일. 화창한 늦가을 날씨였습니다.  워싱턴에서 펜실베니아주의 피츠버그 까지는 대략 250마일 거리.  중간에 주유, 휴식 시간까지 포함하면 편도 다섯시간을 예상해야 하는 거리입니다.  (하루에 열두시간도 뛰는데 편도 다섯시간정도야~  헤헤)

 

 

2009년 현재 입장료는 성인 15달러, 학생 8달러 입니다. 오전 10시에 열고 오후 다섯시에 닫습니다. '개인 미술관'의 경우 사진 촬영을 허요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앤드루 와이어드의 브랜디 와인 리버 뮤지엄 (http://americanart.textcube.com/43)에서도 그러하였고,  다른 대부분의 '개인 이름'을 딴 미술관들이 사진촬영을 금지합니다. 아무래도 '개인 미술관'의 협소성때문에 이런 방침을 취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한정된 소장품을 관람객들이 사진으로 다 찍어가버리거나,  이를 언라인으로 유포해버리면 미술관 소장품의 매력이나 신비감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진 촬영을 못하게 하면, 조금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사진을 '안찍어도 된다'는 안도가 느껴지면서, 숙제를 면제 받은 가벼운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냥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즐기다가 나오면 된다는 안도감.  기록하지 않아도 된다는 가벼움. 그래서, 덕분에 편안하고 쾌적한 미술관 구경이 되었습니다. 

 

미곳을 편안하게 보는 방법은, 일단 1층 입구에서 입장표를 산 후에 구석의 '와홀 소개 전시실'을 대충 살펴봅니다. 이 곳에는 와홀의 일생의 기록이 정리되어 있어서 앤디 와홀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략 그가 누구이고 무엇을 했는지 살펴볼만 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이미 앤디 와홀 관련 책 한권을 읽고 난 후라서 이 소개실은 대충 보고 자리를 떴습니다.  (책 한권 읽고, 관심이 생겨서 와홀 미술관을 찾은 것이니까요).

 

이제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 (맨 꼭대기층)으로 이동합니다. 7층에서부터 한층씩 내려오면서 전시회 구경을 하는 것입니다.  마침 제가 방문했을 때에는 이곳에서 Shepard Fairey 의 Supply and Demand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6층에서는 와홀의 작품전시와 함께 Super Trash 라는 제목의 '쓰레기같은 영화 포스터' 전시회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5층에서는 초기의 팝아트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는데,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실크스크린의 초상화 작품들, 그리고 꽃무늬 작품들,  그리고 그가 제작한 식품 상자 작품들등 친숙하면서도 정다운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4층에도 기획전과 와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3층에는 그의 타임 캡슐상자들과, 그 상자를 지키는 개 (박제개)가 있었습니다. 그의 Interview 잡지 표지들도 전시되어 있었고요. 2층도 와홀 전시실인데, 내부 전시 준비중이라 창고용 상자들만 쌓여있었습니다. 이것도 작품인가 싶어서 들여다봤지만 =) 그냥 상자였지요.

 

1층에는 매표소, 와홀 소개 전시장, 그리고 그의 설치 작품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입구쪽에 기념품 가게가 있군요.  지하에는 카페가 있습니다.

 

 

 

 

 

 

'미국 미술' 전문 블로그를 표방하고 있는 이 블로그를 꾸려나가면서, 앤디 와홀 얘기를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갈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심심할때마다 그를 소개하는 소책자를 한권 여러차례 통독을 한 바 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서 와홀 차례가 되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기로 하고, 기왕에 미술관을 방문했으니 그에 대한 간단한 소개만 해보겠습니다.

 

앤디 와홀 (1928-1987) 은 슬로바키아 출신의 이민자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바로 이 도시 피츠버그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며, 현재의 카네기 멜론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미술가인 셈입니다. 그는 맨해턴에서 상업화가로 성공한후 그의 천재성을 발휘하여 이런 저런 미술 작업을 시도하게 되지요.  한때는 미술 작업에서 은퇴한다고 선언하고 영화 작업에 몰두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매체를 통해 앤디 워홀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는데, 아마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마릴린 몬로'의 초상화가 아닐까 합니다.  반복되는 여배우의 이미지. 워싱턴에 와서 시내는 몇년간, 워싱턴및 뉴욕, 그리고 대도시의 유명 미술관들을 돌아다니다 보니 앤디 워홀의 작품도 흔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어딜가나 현대 미술 전시장에 가면 등장하는 깡통 그림, 여배우 그림, 때로는 하도 그의 작품이 '널려'있으니까 시시하게 보이기까지 하는데요.  관심이 생겨서 책을 찾아 보니 예술의 여러분야를 설레발을 치고 돌아다니며 작업을 해서 이 사람 예술세계는 정리하기도 쉽지가 않아 보입니다.  가령 '에드워드 호퍼' 이 사람 예술세계를 정리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평생 자기 스타일을 고수한 사람이라 오히려 평하기는 편하지요.  워홀은, 너무 여러가지 작업을 중구난방으로 해서, 대책이 없습니다. 피카소도 그런 편이지요.  뭐 심하게 말해서 '잡놈'기질이 있다 이것이지요. 그래서 조금 삐딱하게 말해서, '싸구려 미국 상업주의에 편승한 잡놈같은 예술가' 정도로 파악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카네기 미술관에 걸려있는 재클린 케네디 초상화 연작 (클릭하면 커집니다)

 

그런데, 앤디 워홀 뮤지엄에 가서 7층부터 차례차례 내려오는 사이에 저의 이런 시각에 큰 변화가 오고야 말았습니다.  앤디 워홀 뮤지엄을 나서면서 저는 깨끗이 그의 예술성과 천재성에 백기를 들고 말았지요. 그는 '대단한'  '잡놈'이었던 것입니다.

 

특히 제가 워홀에게 반한 대목은, 그의 '전투복 무늬' 연작에서였습니다.  미국의 여기저기 다니다보면 그의 '예비군복 무늬 (얼룽덜룽한 위장복 무늬)' 작품들이 보이는데,  저는 왜 그것이 '예술'이 되는지 이해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워홀 뮤지엄에는 이 전투복 무늬의 작품들이 여러점이 걸려있었는데, 조금씩 색깔이 변하면서 마지막에는 핑크색 주조의 전투복무늬가 되는 것입니다.  핑크색 얼룽덜룽한 전투복 무늬!  상상을 해보죠. 만약에 우리들이 전쟁터에 핫핑크, 형광 분홍색이 얼룩얼룩한 위장복을 입고 나가서 싸우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전쟁 하겠다는 겁니까? 하하)  워홀은 전쟁에 대하여 한마디도 안하면서, 평화를 역설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가 그린 모택동 초상화가 유명한데, 저는 그 모택동 초상화 볼때마다 기분이 안좋았죠. 아무튼 한국전 막바지에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온 중공군을 지휘하던 사람이니까.  그런데 워홀 뮤지엄에 걸린 모택동 초상화 연작을 보면, 그의 입술에 연분홍색이 칠해지고, 노란색도 칠해지고,  뭐랄까, 힘이나 폭력성이 거세된, 어린아이들 상상속의 평화로운 색감이 넘치더란 것이지요.  워홀이 꿈 꾼 세계는 장난과 쾌락이 가득찬, 가벼운, 심각하지 않은, 명랑한, 유치한, 폭력이 설 자리가 없는, 그런 세상처럼 보였습니다. 

 

 

카네기 미술관, 앤디 워홀의 Love

 

 

 

그래서, 15달러를 주고 앤디 워홀 뮤지엄 구경을 하고 나오면서, 그 돈 15달러가 억울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태까지 꽤나 많은 워홀의 작품들을 구경해왔지만, 그리고 그의 소개책자를 통독하면서 그에 대한 이해를 하려고 했지만, 내가 수긍하거나 발견할수 없었던 그의 천재성을 저는 그의 전시관을 층층이 둘러보며, 시기별로 분류 정리된 전시물들을 챙겨 보면서 문득,  사과가 툭! 하고 떨어지듯, 문득, 깨달았다고 할수 있지요.  워홀 뮤지엄에 가지 않았더라면, 저에게는 아직도 워홀이 그저 '싸구려 상업주의에 영합한 운좋은 잡놈' 정도에 불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저는 앤디 워홀을 사랑할수 밖에 없을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를 만나고 난 후에 제 기분이 많이 가벼워졌음을 실토합니다. 인생은 여전히 겨울외투처럼 무겁지만,  그러나 우리는 형광 분홍색처럼 가볍고, 유치하고, 유쾌할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가볍게, 유치하게, 밝게! 

 

 

 

 

 

 

뮤지엄 샵에서 15달러 주고 산 셔츠: I never fall apart because I never fall together. 나는 망가지지 않는다 (혹은 나는 실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망가질것이 없으니까.

 

 

이 셔츠의 문구를 봤을때, 문득, 음, 그렇지. 나 빈손으로 와서 한 세상 잘 놀았지...잘 놀고 있지...지금 사라진대도 내가 억울할 것은 없지 않은가... 깨달음 (환각과 같은 깨달음일지라도).

 

 

피츠버그의 '카네기 박물관' 소속 전시관이 네가지가 있습니다.

 1. 카네기 미술관

 2. 카네기 자연사 박물관

 3. 앤디 워홀 미술관

 4. 카네기 과학관

 

이중에서 제가 이날 가 본곳은 카네기 미술관과 자연사 박물관, 그리고 워홀 미술관이었지요.  다음에 피츠버그에 가면 카네기 과학관을 가보려고 합니다. 물론...미술관도 또 둘러보고 싶고요.

 

 

 

앤디 와홀 이야기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쓸 수 있을것 같아요. 지금 써야 할 작가가 많이 밀려있거든요 = )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09. 11. 5. 05:10

 

 

 

Detroit Museum of Art (=Detroit Institute of Art = DIA = 디트로이트 미술관)는 미국 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 (Detroit)시에 있는 미술관 입니다.  젊은이들에게는 Enimem 의 8 Mile 이라는 노래로 더욱 친근하게 여겨질만한 도시인데, 자동차로 달려 디트로이트 구역으로 들어서니 도로의 표지판에 8 Mild Road, 7 Mild Road 라는 표시가 보였습니다.  에미넴의 노래 8마일은 정말로 디트로이트에 존재하는 거리의 이름이었습니다.  디트로이트는 한때 포드 자동차를 위시한 화학, 제약 산업이 활발하게 성장하던 곳이었는데, 현재는 미국 산업의 몰락과 함께 도시 자체도 몰락의 길을 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최근에 마이클 무어가 발표한 영화 Capitalism, Love Story 라는 작품에도 미시건주의 자동차 산업의 몰락이 주민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디트로이트 미술관 (http://dia.org/) 은 1885년 설립된 이래 세계 여러나라의 명작을 비롯 현대 작품에 이르기까지 65,000 여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규모는 작겠지만, 내용면에서는 파리의 루브르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가서 볼만한 세계 명작, 혹은 명 작가들의 작품들을 골고루 다 갖추고 있다고 할 만합니다.)

 

제가 이 미술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멕시코의 작가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의 록펠러 건물 벽화사건이 하도 유명해서, 디트로이트에 가면 리베라의 벽화가 온전하게 보존된 것을 볼 수 있다길래,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 벽화가 보고 싶었거든요. 다른 작품들도 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사실 웬만한 작품들은 이미 큼직큼직한 미술관에서 작가별로 주요 작품들을 본 후라서 크게 매력적이지는 않았고,  오직 그 벽화 때문에 디트로이트로 차를 돌렸다고 할 수 있지요.

 

 

디트로이트 시내를 달려 미술관에 도착하면 로댕의 생각하는 남자가 생각에 잠긴채 우리를 반깁니다. 미국에 이 생각하는 남자가 15점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제가 직접 만나본 남자는 (1) 워싱턴 국립 미술관 (2) 메릴랜드 볼티모어 미술관 (3) 필라델피아 로댕 미술관 (4) 디트로이트 이렇게 넷입니다.  앞으로도 돌아다니며 이 남자가 잘 있는지 찾아 볼 생각압니다. 

 

 

 

 

 

 

건물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주차비가 저렴한 편입니다. 온종일 5달러) 주차장 입구로 나오면 이렇게 정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미시간의 가을도 펼쳐져 있군요.

 

 

 

 

 

입구에서 표를 살 수 있습니다. 성인 8달러. 다른 대도시의 미술관 입장료에 비해서 저렴한 편입니다. 별 불만없이 입장표 값을 지불했습니다.

 

 

 

 

 

시대별로, 지역별로 세계 여러나라의 명품들이 골고루 전시가 되어 있었지만, 제 블로그의 독자들께서 이미 아시는대로 제가 '미국미술'쪽에 정신을 팔고 있는지라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건성으로 보게 되는편입니다.  사진도 주로 미국미술, 현대미술 작품을 중심으로 찍게 되는군요. (물론 제가 아주 좋아하는 그림은 시대를 불문하고 정신 놓고 보기는 합니다만.)  뭐, 와홀이 잘난척하는  초상화 작품이 보이는군요. 

 

 

 

 

예,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작품을 발견한 순간, 잠시 제가 저의 우울을 잊을수 있었습니다.  아주 잠시 환각현상처럼 삶의 고통이나, 좌절감, 실의, 자기 연민이나 자기 혐오까지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브르헬 (Pieter Bruegel the Elder)의 혼인잔치 (The Wedding Dance  1566년 추정)를 만났기 때문에.  한번 꼭 보고 싶었던 작품이, 갑자기, 예고없이 문득 내 앞에 나타났기 때문에.   이 그림에서는 정말 '소리'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왁자지껄 웃으며 떠드는 소리, 풍악소리, 바람소리 뭐 이런 소리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와 나를 감싸는 듯한 기분이 드는 그림이었습니다.

 

 

 

 

뉴욕 맨해턴의 현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 MoMA)에 가면 노란 바지를 입은 사나이라는 제목의 이탈리아 작가 작품이 있습니다. Michaelangelo Pistoletto (미켈란젤로 피스톨레또)라는 작가인데, 이 사람은 그의 그림을 거울같은 스텐레스 판에 작업을 합니다.  그림을 보면, 거울같은 그림판에 내 모습도 있으므로 나도 그림의 주인공이 된듯한 기분도 들고, 착시 효과도 있고 그렇습니다.  반가워서 그림속에 내가 들어있는 사진을 찍어보았습니다.

 

 

 

 

 

제가 브르헬의 그림에, 그리고 다른 명품들에 혼이 반쯤 나가긴 했지만, 정신을 수습하고,  본래  이곳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작품은 멕시코 출신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의 대형 벽화 였습니다.  마침내, 가서, 내 눈으로 보았다는 것이지요.

 

 

틈틈이, 이 벽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사진은 클릭하시면 커집니다.

 

 

 

 

 

 

 

 

 

 

 

 

제가 서 있는 사진 뒷쪽의 벽화 부분을 자세히 보시면, 왼쪽 상단에, 일하는 공장 노동자들을 '구경'하는 관객들이 보이는데 - 가슴에 큼지막한 십자가를 매달은 '귀부인'들과 신사들과 그 아이들이지요. 미국자본주의의 상징, 돈과 그들만의 신교도적(?) 신앙심이 결합된...  저는 특히 그 부분을 상세히 써보고 싶어집니다.

 

이 사회주의사상이 강하게 스며든 벽화가 '디트로이트'에서 뭉개지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 만으로도 저는 디트로이트 시가 좋아집니다. 디트로이트는 이 벽화를 살려놓기를 잘 한 겁니다. 사람들은 이제 이 '벽화'를 보기위해 이곳에 오니까.

 

방문: 2009년 10월 31일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09. 10. 31. 06:22

 

 

어제 새벽에 출발하여 12시간만에 펜실베니아, 오하이오주를 거쳐 미시간주의 주도인 이스트 랜싱에 무사히 도착.  미시간 주립대에서 개최된 slrf 오프닝 참석.  오늘은 오전에 주제발표를 무사히 마치고, 다른 발표를 둘러보고 숙소로 일찌감치 돌아왔다.  어제는 천국의 가을 날씨. 오늘은 비. 따뜻한 비. 북부라서 단풍 색이 선명하고 짙다.

 

(잠을 못자서 조금 피곤한것 외에는 ...대체적으로 평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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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09. 10. 25. 06:55

 

Shanandoah National Park, Skyline Drive 홈페이지

http://www.nps.gov/shen/planyourvisit/driving-skyline-drive.htm

 

한반도의 척추가 태백산맥이라면, 북미 미국의 척추는 애팔라치아 산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애팔라치아 산맥의 정점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가 있다. Skyline Drive 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50마일 정도 달리면 Front Royal 이라는 소읍이 나오고 이곳에 스카이라인 드라이브의 입구 (셰난도 국립공원 입구)가 있다.  이 산맥의 등줄기에 올라 서쪽을 보면 굽이 굽이 이어진 산들이 보이는데 그렇게 한없이 가면 서부가 나온다. 이 산맥의 등줄기에서 동쪽을 보면 푸른 산자락 너머 너머에 대서양이 펼쳐진 형상이다. 수도 워싱턴에서 한시간 거리이므로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골치가 아프면 이 산맥의 등줄기에 올라 넓게 펼쳐진 국토를 내려다보며 상념에 잠기곤 한다고 한다.

 

버지니아로 온지도 2년이 넘었지만, 나는 가을 단풍 구경을 제대로 해 본적이 없었다.  오늘 하필 절정이라는 가을단풍 구경을 나섰는데,  날이 변화무쌍하여 흐리고, 비가 쏟아지다가, 개다가 다시 비가왔다.  난 비오거나 흐린 날도 분위기 있어서 좋다고 생각하므로...특히 요즘은 심적으로 우울한 관계로 맑은 날은 더 괴롭더라. 맑은날엔 세상 사람들이 모두 행복한 표정을 짓는것 같고, 나만 혼자 왕따된 기분이 들기도 하므로...  왜 나갔냐하면, 집에 있으면 우울해서 잠이나 잘까봐.  :-]  (난 나름대로 우울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오늘, 비오고 안개끼고 온갖 날씨의 쇼를 하는 가운데 단풍구경을 했는데,  하하하, 안개가 자욱하니까 단풍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보일때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유쾌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왜 사람들이 '단풍구경'을 가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난 여태 살면서 단풍구경을 해 본적이 없었다...)  단지 자연이 선사한 알록달록한 풍광속에 내가 흐르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색깔치료' 와 같은 위안을 받았다.  미국 미술사에서 21세기에 '추상표현'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Rothko 를 위시한 작가들이 '어마어마한' 캔바스에 색칠을 해 놓는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워싱턴의 미술관에 가면 21세기 추상표현주의 관련 작품들이 전시된 곳은 홀이 넓고 그리고 벽을 '압도'하는 대형 작품들이 걸려있다.  나는 이 전시장들을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그 어마어마한 작품 앞의, 어마어마한 색상 앞에서 앉아 쉬거나 서있을때, 색이 내게 스며드는 듯한 유쾌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색이 되고 색이 내가 되는듯한 느낌. 나는 그 느낌이 참 좋다.  그런데, 단풍 구경을 갔을때, 알록달록하게 물든 자연이, 혹은 뿌연 안개가,  흐려서 수묵화처럼 보이는 무채색의 풍경이 내 몸에 스며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몸이 자연과 동화가 된다는 느낌이 들면서,  '괜챦아, 괜챦아' 라는 기분이 들었다. 뭐가 괜챦은가하면...그냥... 견디기 힘든 시간이지만  그래도 괜챦다는.  이 시간을 용서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괜챦다는.  막막하지만 그래도 괜챦다는.  사람들은 색깔을 몸에 담기위해 단풍구경을 가나봐...했다.

 

 

 

 

이곳이 바로 애팔래치아 산맥 등줄기에서 내려다본 셰난도 골짜기. Grandma Moses 모세 할머니가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살던 곳. 모세 할머니가 즐겨그리는 풍경화의 구도와도 흡사하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Grandma%20Moses

 

 

 

 

 

 

 

 

 

 

 

 

 

 

 

 

 

 

 

 

 

 

 

 

 

 

 

어느 모르는 인도계 가족 일동이 하필 내 차 밖에 모여서서 사진을 찍길래 나도 차 안에서 이들을 찍어봤다.  비와 빨간우산과 가무잡잡한 피부와 그리고 선량한 가족이 그려낸 예쁜 그림.  이들이 행복해보여서 나도 좋았다.  모두 행복하시길.

 

 

 

 

 

돌아오는길 Apple House 라는 식당에서.  이들이 만들어 판다는 잼과 소스병을 찍어보았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동안.  이 식당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63년에 문을 열었다고 하는데 Front Royal 에서는 명소인것으로 보인다.  하이웨이와 지방도로가 만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서 나같은 소풍객들이나 이지역 주민들 모두가 편안하게 드나들수 있는 곳.  다양한 음식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고 있었는데, 음식이 소박하면서도 정감이 갔다.  난 3달러짜리 계란 샌드위치 (버터로 구운 식빵 사이에 얇은 계란부침 끼운것)를 먹었는데,  내가 내 식성에 맞춰서 집에서 만든것보다 더 바삭하고 기름기없는 맛이었다.  어쩌면 다음번에는 이 식당에서 계란샌드위치를 먹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이곳으로 달려갈지도 모르겠다.

 

 

 

 

 

 

Applie House 의 위치는 워싱턴에서 갈경우 하이웨이 66 서쪽방향으로 50마일쯤 달리다가 Exit 13 에서 나간다. 나가면서 셰난도 국립공원 안내판을 따라서 달리다보면 국도 55번상에서 주유소가 나타나고 주유소 옆에 빨간 건물이 나타날것이다.  이곳이다. Exit 13으로 정확히 나가면 쉽게 찾을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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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Realism/Ashcan School2009. 10. 24. 03:21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이전페이지,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에 대한 글에 이어, 해당 페이지에서 잠깐 소개한 The Eight (8인회)의 작품 성향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페이지를 하나 만들어봅니다. 2009년 10월 4일 (한국, 추석날)에 워싱턴 Corcoran Gallery of Art http://americanart.textcube.com/97  에 갔을때 마침 The Eight 화가들 작품이 한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어서 작품 사진들을 카메라에 담아 올수 있었지요.  분명 The Eight 을 타이틀로 한 전시이긴 했으나 8인회 멤버중에서 여섯명의 작품이 있었고, 그리고 역시 이들의 후배격인 다른 두명의 화가가 추가 되었습니다. 모두 8인의 그림이 소개가 되긴 했으나 그 중 두명은 8인회 소속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들이 20세기 초반에 Social Realist 사회 사실주의로서 활동할 당시의 그림 분위기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추가된 두명의 그림이 오히려 더욱 효과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코코란에서 찍어온 사진들을 나열하면서 간단히 스케치 하겠습니다.

 

일단, 기획전 안내판입니다. The Eight (8인회)와 The 14th Street School (14번가파)로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8인회 회원중 코코란이 소장하여 전시한 작품은 Luks 와 Shinn 을 제외한 여섯명의 그림들입니다.

 

 1. William Glackens (1870-1938)  윌리암 글래큰스

 2. Robert Henri (1865-1929) 로버트 헨라이 http://americanart.textcube.com/197

 3. Goerge Luks (1867-1933) 조지 럭스 (x) http://americanart.textcube.com/278

 4. Everett Shinn (1876-1953) 이브릿 쉰 (x) http://americanart.textcube.com/272

 5. John French Sloan (1871-1951) 존 프렌치 슬로언 http://americanart.textcube.com/201

 6. Arthur B. Davies (1862-1928) 아서 데이비스 http://americanart.textcube.com/279

 7. Ernest Lawson (1873-1939) 어니스트 로슨 http://americanart.textcube.com/281

 8. Maurice Prendergast (1859-1924) 모리스 프렌더개스트  http://americanart.textcube.com/205

 

14번가파의 작가들중

 1. Reginald Marsh (1898-1954)  레기날드 마시

 2. Raphael Soyer (1899-1987) 라파엘 소여

의 작품이 전시가 되었습니다.

 

(사진은 클릭하시면 커집니다)

 

전시장 풍경입니다.

 

 

 

안내판입니다.

 

 

 

위에 명시된 순서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1. William Glackens (1870-1938)  윌리암 글래큰스

 

 

 

 

2. Robert Henri (1865-1929) 로버트 헨라이  http://americanart.textcube.com/197

 

 

3. Goerge Luks (1867-1933) 조지 럭스  (x)  http://americanart.textcube.com/278

4. Everett Shinn (1876-1953) 이브릿 쉰  (x) http://americanart.textcube.com/272

 

 

5. John French Sloan (1871-1951) 존 프렌치 슬로언 http://americanart.textcube.com/201

 

 

6. Arthur B. Davies (1862-1928) 아서 데이비스 http://americanart.textcube.com/279

 

 

 

7. Ernest Lawson (1873-1939) 어니스트 로슨

 

 

 

 

8. Maurice Prendergast (1859-1924) 모리스 프렌더개스트 http://americanart.textcube.com/205

 

 

 

14번가화파

 

1. Reginald Marsh (1898-1954)  레기날드 마시

 

 

 

 

2. Raphael Soyer (1899-1987) 라파엘 소여

 

 

 

 

제가 일찌감치 퇴근을 해야 하는 이유로 '제목'과 같은 세부 사항은 추후에 추가하여 페이지를 완성시키겠습니다만,  얼핏 보기에 '무엇이 사회적 사실주의'라는거냐?  이 그림에서 도시, 빈민, 혹은 사회주의적 비판적 시선을 가진 그림이 몇점이나 되느냐?  이런것을 소위 사회적 사실주의 그림이라고 하는거냐?  이런 의문이 들수도 있을겁니다.  보따리 싸가지고 오피스를 나가기 전에,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 기획전 자체가 '사회적 사실주의'에 촛점을 맞춘것이기보다는 코코란이 소장하고 있는 The Eight 의 화가들, 14번가화가들의 '작품'을 내 건 것입니다. 그 작가들이 그린 그림중에 코코란은 이런 그림들을 갖고 있다는 뜻이지요.   레기날드 마시가 특히 뉴욕 뒷골목 빈민가 풍경을 암울한 색조로 잘 표현해 냈지요.  헨라이가 그린 아메리카 인디언 원주민의 초상도 '초상화'로서 크게 주목할 것은 없지만, 그가 '사라져가는 힘없는 사람'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도 들여다 볼 만한 대목입니다.  소여가 그린 터미널의 모습은, 지구 어디에서도 발견될 만한 대중들의 삶의 모습이지요.  이 그림 앞에 서면, "왜 터미널은 어딜가나 다 비슷한 풍경일까?"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딱딱한 의자, 어딘가 불편하고 낯선 대합실...외딴 시외버스 터미널이건, 기차역이건, 유명한 국제선 공항이건...

 

앞 페이지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사회 사실주의 작가군에 이름이 올랐다고 해도, 그 작가들의 그림이 모두 사회 사실주의적 그림은 아닙니다. 그들의 삶의 일정시간에 사회성 강한 그림을 그린 시절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이 페이지에서는 사회사실주의 화가군에 포함되는 '화가들'의 실제 그림을 잠깐 소개한 것으로 정리하고,  다음 페이지부터 주요 작가별로 그림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페이지의 세부 정보도 나중에 채우기로 하겠습니다...즐거운 주말....)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0. 23. 07:35

 

 

 

 

 

http://americanart.textcube.com/118 미국 사실주의 계보정리 페이지에서 대략  미국 회화에서의 사실주의를  (1) '사회적 사실주의'와 (2) '지역주의적 사실주의'의 두가지 부류로 나눠서 도표를 그려본 바 있습니다.  미국 회화에서 사회적사실주의 (social realism)를 논할때, 반드시 거론되는 사람이나 단체들로는 Henri (헨라이)를 중심으로 한 "Ash Can (쓰레기통)" 화가들, "The Eight (8인회)"등이 반드시 떠오르게 되는데,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Ash Can 이나 The Eight 멤버들이 조금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미국 사실주의 화풍을 논할때 이 두 그룹은 하나의 동일한 그룹으로 간단히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동일한 그룹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비슷한 구성원들이 비슷한 사회적 안목을 가지고 사회성 있는 작품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Ash Can 학파와 The Eight 구성원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화풍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겠습니다. Ashcan 혹은 Ash Can 이라고 알려진 이 미술그룹을 우리는 Ashcan School 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Robert Henri (로버트 헨라이)를 중심으로 그와 함께 그림 작업을 하거나, 혹은 그에게서 미술 수업을 들었던 사람들이 헨라이의 영향으로 '사회성'있는 그림을 그리면서 정체성을 만들어 갔기 때문입니다. Henri 의 동료나 제자중에서 애시캔 학파로 알려진 인물들로는 Henri, Glackens, Hopper, Shinn, Sloan, Luks, Bellows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 유럽 인상파화법의 영향을 받은 미국인상파 그림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뉴욕 뒷골목의 가난한 사람들, 소외받은 사람들의 풍경을 작품에 담아냈습니다.  (그러니까 ash can - 쓰레기통 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이겠지요).

 

The Eight (8인회)는 사실 딱 한번, 1908년 뉴욕의 맥베쓰 갤러리 (Macbeth Gallery)에서 여덟명이 합동 전시회를 한것에서 비롯된 명칭입니다. 이 8인회 전시회에 참여했던 작가들은

 

 1. William Glackens (1870-1938)  윌리암 글래큰스 : http://americanart.textcube.com/202

 2. Robert Henri (1865-1929) 로버트 헨라이 : http://americanart.textcube.com/197

 3. Goerge Luks (1867-1933) 조지 럭스 : http://americanart.textcube.com/278

 4. Everett Shinn (1876-1953) 이브릿 쉰 : http://americanart.textcube.com/272

 5. John French Sloan (1871-1951) 존 프렌치 슬로언 : http://americanart.textcube.com/201

 6. Arthur B. Davies (1862-1928) 아서 데이비스 http://americanart.textcube.com/279

 7. Ernest Lawson (1873-1939) 어니스트 로슨  http://americanart.textcube.com/281

 8. Maurice Prendergast (1859-1924) 모리스 프렌더개스트 : http://americanart.textcube.com/205

 

The Eight Member가 아닌 Ahscan School 멤버였던

  *. George Bellows (1882-1925) 조지 벨로우즈  http://americanart.textcube.com/198

 

이상입니다. 이들중 다수가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삽화가'로 활동한 경력이 있습니다.  특히 The Masses 라는 사회주의 사상이 강한 잡지의 편집이나 삽화에 관여한 화가들이 여럿 있습니다.  위에 올린 이미지는 John French Sloan 이 1914년 6월호 The Masses 표지화로 그린 작품입니다.  1914년 4월 20일에 미국 콜로라도주의 광산에서 광부들의 파업이 있었습니다. '자선가'로 널리 알려진 록펠러 (Rockefeller) 집안이 운영하던 광산이었습니다. 콜로라도 국방수비대가 이들을 공격하여 어린이 11명이 포함된 20여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이 잡지는 이 사건을 표지로 실은 것입니다.  표지 그림이 생경하고 과격해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은 더욱 처참하고 과격했겠지요.  (미국 구경을 하고 돌아간 내 조카아이들의 상상속의 미국사 속에  이런 모습은 없을 것입니다. 록펠러는 하늘이 보낸 천사는 아니었겠지요).

 

물론 미국의 사회-사실주의 작가들이 모두 이런 그림을 그렸다고 상상하시면 안됩니다.  이 표지화 작업을 한 존 슬로언 역시 '예술지상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사회성이 담긴 그림을 그리되, 사회적인 이념이 '예술'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니지요. 그래서 과격한 '사회주의'라는 이념으로부터는 어느정도 거리를 유지한 편입니다. 미국의 대부분의 사회-사실주의 화가들이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와는 일정 거리를 유지한 가운데 회화 작업에 몰두했다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들 여덟명의 미술가들중에서 슬로언에 관심이 많지만, 일단 이들의 '대장'격인 Robert Henri 부터 간단히 소개하고 그 뒤를 이을 생각입니다.  헨라이는 작품보다는 그가 이끌었던 애시캔, 8인회 때문에 미국 미술사에 자신의 이름 '석자 (?)'를 박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Henri 는 '헨라이'라고 발음합니다.  Hopper 관련 책에서 읽었는데 그가 자기의 이름을 반드시 '헨라이'로 발음해줄것을 극구 강조했다는 일화가 나옵니다. 그러니 그의 희망에 따라서 '헨라이'로 소개합니다.  (제 글의 독자들이 막 - 무척 똑똑해지고 교양이 업그레이드 되는 소리가 들립니다 헤헤헤.  미술 관련 글중에 헨라이 이름을 제대로 표기한 한글 페이지 찾아보기가 힘드실걸요. 헤헤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걸어놓은 곳이다.

왼쪽 가까이에서부터: Henri, Kent, Luks 의 그림들이 차례대로 보이고

오른쪽 가까이에서부터: Everett Shinn, William Glackens 가 보인다

저 너머에 Benton 의 그림이 있다...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09. 10. 18. 12:23

How Starbucks Saved My Life: A Son of Privilege Learns to Live Like Everyone Else

 

 

사람이 사는데 별로 의욕이 없고, 공부도 하기 싫을때, 전공책도 보기 싫을때, 그럴때가 있는데, 사람마다 이런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제각각일 것이다.  전에 나는 답답하면 몇시간씩 산책을 다녔다. 현재 나는 상태가 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어서, 산책을 나가는 대신에 주로 잠을 자거나, 평소에 안읽던 '진부해 보이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죽인다.'  요즘 나는 시간을 '살아나가는 것'이 아니고 '죽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견디기 위해서 그냥 뭔가 하는데, 몸을 움직이기 싫으니까 '눈운동'만 열심히 하는 상황. 책보다 잠이 오면 자고, 잠이 깨면 다시 책을 보고. 

 

찬홍이가 책을 사다달라길래 서점에 가서 The Crucible 이라는, 아서 밀러의 드라마를, 내가 대학교때 읽었던 책을 찾아 들고 그냥 책방에 온김에 어정거리다가 이 책이 눈에 띄어서 집어 들었다.  이거 스타벅스에 가면 매장에 보이던 책인데. 그래서 스타벅스 홍보용 책인가보다고 늘 지나치기만 했었는데. 내가 왜 이 책을 집어든 것일까?  쉽게 읽힐것 같아서, 머리 식히기 좋아보여서, 혹은 스타벅스의 성공 비결이 뭔가 궁금해서...

 

막상 읽어보니 내 예상과 다른 엉뚱한 책이었는데...

 

온종일 읽는 내내, 내 삶과 연결지어 여러가지 생각을 해 볼수 있었다. 우선, '바닥'으로 수직하강한 한 사나이가 생존하기 위한 노력이 생생하게 전달되었고, 그리고 곁두리로, 스타벅스의 지침도 내게는 의미있었다.  내가 요즘 내 우울감때문에 학교에서 좀 침울하게 행동했고, 내 학생들에게 충분한 교육환경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고, 가령 '내 학생이 나로부터 -  학생으로서 받아야 할 애정이나 존중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을까?' 생각해보니, 내가 부족했던 것 같고.  내가 좀 신경을 쓰고 내가 능동적으로 나를 바꿔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개인적인 실패는 개인의 문제이고, 그것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쳐서는 안되는 것이니까.  내가 나 자신을 컨트롤을 잘 해야 하는 것이지.

 

스타벅스의 장점들이 많이 열거되어, 결국 스타벅스 홍보에도 한 몫 했겠지만,  이를 부정적으로 볼 생각은 없다.  이 책에 그려진 스타벅스 매장의 아름다운 면을 나는 내 직장에 도입해야 하고, 내 가정에 도입하면 좋을 것이다. 내 삶은...이 책의 저자처럼, 나의 상실감이나 실패감 같은 것 역시 내가 치유하는 수 밖에.

 

이제, 나도 '앞으로' 나아가야 (move on) 하는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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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09. 10. 18. 11:50

Letters to Sam: A Grandfather's Lessons on Love, Loss, and the Gifts of Life

 

집의 책꽂이에 꽂혀 있길래 심심풀이로 집어들었다가, 설득력이 있어서 끝까지 본 책.  목소리는 잔잔하나 울림은 깊다.  이 책이 호소력이 있는 이유는, 저자가 나보다 더 심한 고통을 겪어내고 희망을 갖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페이소스를 주므로 힘이 있는 것이지.  내가 느끼는 고통에도 페이소스란 것이 있을까?  책을 읽는 동안은 위로를 받았다.  그가 제안한대로, 때로 사람은 그냥 시간이 해결해주길 기다리며 흘러가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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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0. 16. 03:35

Man Ray (Artists of the 20th Century)

 

 

뒤샹의 초상화를 만 레이가 작업한 것이 있어서, 그를 알게 되었는데, 뉴욕 현대미술관에 가니 그의 작품들이 몇 점 눈에 띄어서 그에게 약간 관심이 생겼다. 다다이스트 (dadaist) 작가로 분류되는 예술가. 미국 태생이지만 주로 파리에서 활동했고 그곳에서 인정 받았으며 2차 대전중에 난리를 피해서 LA로 옮겨가 작업을 했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하자 다시 파리로 가서 활동하다가 그곳에서 사망.

 

일단, 그가 남긴 '회화'들은, 분위기가 대체적으로 맘에 든다. 피카소와 같은 큐비즘 계열의 회화들을 남기기도 했으나 그의 회화들은 예각이 두드러지지 않으므로 내가 보기에도 편안한다.  회화 이외의 여러가지 작업들은, 글쎄...분명 예술작업 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예술품을 보는 시선이 무척 고루한 편이라, 튀는 영감은 느껴지지만 낯설고 멀게 느껴진다.

 

가령,

 

갖고 싶은 작품인가 아닌가?  나는 미술관에서 작품들 볼때 이런 질문을 내게 던지곤 한다.  보니까 특이하다. 영감이 느껴진다. 멋있다. 이렇게 느낄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이거 주면 가질래?" 하고 자문해본다.  이런 자문에 대해서 나 스스로 도리도리질을 하거나 고개를 갸우뚱할때가 종종 있다.  좋지만 갖고 싶지는 않은 작품들도 분명 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꿈에 볼까 무서운 끔찍스렁 작품들도 있다.  나는 '멋있고 예술적이지만 갖고 싶은 생각은 없는' 작품들을 '미술관 전용' 작품들이라고 부르는 편이다.  만 레이는 주로 '미술관 전용' 혹은 '콜렉터의 창고'에 들어갈만한 작품들을 많이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평범한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에는 실패 했다는 뜻일것이다.  하지만, 원래 앞서가는 사람은 고독한 법이므로, 내가 알아주지 않는다해서 그의 예술성에 상처를 입는 일은 없을 것이다.  (회화는, 좋았어요 만 레이님.)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0. 15. 08:45

Jackson Pollock (Artists of the 20th Century)

 

잭슨 폴락 디비디가 도서관에 보이길래 빌려다 보았다.  내가 미술관을 다니면서 본 폴락의 작품은 그의 후기 (완성기)의 작품들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초기의 그의 습작부터 점진적으로 변화해가는 전 과정을 살필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는, 혹은 내가 좋아하는 그의 대작들은 '완성기'에 해당하는 것들인데, 그 이전에 그가 시도했던 과정중의 작품들은, 사실 내 취향이 아니다 (내 취향이 변할지도 모르지만, 현재는 그러하다).  잭슨 폴락은 피카소의 큐비즘의 영향을 받았고, 그 영향으로 미국땅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마스크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을 그의 그림에 등장시키기도 한다.

 

미술관들을 소풍삼아 돌아다니다 보니, 근래에 미술작품에 대한 내 취향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나는 (1) 사실주의화 (2) 색깔위주의 극단적 추상화 앞에서 안도하고  오랜 시간을 머물지만, 큐비즘 계열의 그림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지나쳐 버린다는 것이다.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모델' 같은 작품을 비롯한, 피카소나 브라크의 입체파 작품들은 내게는 '피곤하다.'  예각으로 면을 분할하여 조각조각 내 놓은듯한 화면을 보면 나는 골치가 아파지고, 그리고 '분노' 같은 것을 느낀다.  그리고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혹은 창녀들)의 그림에 나타나는 아프리카 가면같은 괴이쩍은 얼굴 모양도 내 맘에 안든다. 그림속에 샤머니즘적 무시무시하거나 괴상한 가면같은 얼굴이 등장하거나 흩어져 있으면 나는 외면하고 얼른 지나치는 편이다.  왜 그것이 싫은가 묻는다면 따로 설명 할 길이 없다.  이는 고기를 잘 못먹는 내게 '왜 고기를 못 먹는가?' 하고 묻는 것과 같을 것이다.  "너 왜 소세지를 못먹지?" 하고 물으면 난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냥 안먹는거다.  "너 왜 그 대단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그림이 싫은가?" 물으면 난 할말이 없다. 그것이 미술사적으로 얼마나 획기적인 사건인가는 논리적으로 알고 있고, 설명도 잘 해낼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림이 싫다.  프랑스계 미국 미술가인 브르주아의 작품들도, 설명할 길이 없어 난감하지만 기분나쁘고 싫다.  미술적 가치를 설명하라면 마지 못해 설명을 할 수는 있지만, "너 가질래?" 그러면 나는 "나 주면 내다 팔을래" 하고 대꾸할것이다.

 

그래서 잭스 폴락의 그림 세계를 시기별로 살피면서, 내 맘에 들었던 작품들은 초기의 사실주의적 화풍을 유지하던 작품들, 그리고 말기의 추상화들이다.  나는 폴락이 피카소를 흉내내던 시절에 요절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결국 여러가지 실험을 거쳐서 자기 세계를  찾는데 성공 했으니까.  하지만, 또 한가지 내가 깨달은 것은,  내가 좋아하는 그의 말기의 작품들 속에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그의 '각종 실험적' 요소들이 기저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큐비즘적인 요소, 혹은 원시 샤머니즘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 없이 폴락이 정상에 오를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 점을 나는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내가 내 삶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나 역시 실험적인 노력들을 기울여야 하는데, 때로는 설령 그것이 고통이거나, 일탈이거나, 혼돈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지...  터널의 끝에, 빛의 세계가 있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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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0. 14. 02:53

 

 

Andrew Wyeth와 Edward Hopper 페이지들을 대략 마무리 짓고 나니,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들의 계보가 대략 머릿속에 정리가 된다. 신생국가 미국의 미술은 유럽의 미술사와는 약간 시기적으로, 성격적으로 차이가 나게 진행되었다.  예컨대 유럽에서 19세기 중반, 후반에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적 색체가 강한, 혹은 사회 비판적인 사실주의 화풍이 휩쓸고나서 '인상파' 화가들이 새로운 작법을 가지고 등장하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오히려 인상파 작법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속에서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사실주의적 작법이 공존하게 된다.  사회비판적인 사회 사실주의적 화풍은 오히려 미국의 인상파 화풍이 물러나면서 1930년대에 꽃피게 된다.

 

19세기말, 20세기초부터 진행되던 미국의 사실주의는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경제대공황으로 인한 빈민층 증가와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공공미술 프로젝트 등으로 사회성 메시지가 강한 미술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된다. 이 사회성이 강한 미술의 일부는 '사회주의 사상'과 무관하다고 할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소련의 공산주의를 지지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미국적 토양위에서 자생한 미술사조로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도시빈민의 문제, 혹은 노동의 문제등 사회 문제를 그림으로 옮긴 화가들의 모임중 '애시캔 (Ashcan)' 학파, 이들과 정체성에 차이가 없는 '8인회 (The Eight)'이 유명하다.   이들을 Social Realist (사회 사실주의자)라고 통칭한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역시 공공 미술 프로젝트의 영향권 안에서 '미국의 풍경'을 통해 미국의 '정체성'을 살리자는 취지의 회화운동이 미국의 중서부 화가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들을 지역주의자 (Regionalist)라고 부른다. 위의 사회사실주의적 화가들이 '진보적' 성향의 인물들이었다면,  '미국의 풍경'에 역점을 둔 '지역주의 화가'들은 다소 보수적인 색채를 띄고 있었다 할 수 있다. 대표적인 화가로 Grand Wood, Benton 등이 있다.

 

Edward Hopper 는 사회사실주의의 기수라 할 수 있는 Henri (헨라이-로 발음한다)의 제자였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혹자는 Edward Hopper 를 애쉬캔 (Ashcan) 학파의 일원으로 분류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에드워드 호퍼 자신이 이런식의 분류를 싫어했다. 호퍼는 스스로 자신이 어떤 사상적 그룹에도 속하지 않으며 미술가로서 이런 사상적 색채를 띈다는 것 자체가 유치한 짓이라는 입장을 평생 관철했다.

 

Edward Hopper 보다 한세대 이후에 탄생한 Andrew Wyeth 를 '지역주의자' 무리에 포함시키는 미술사가도 가끔 보인다. 그런데 이또한 무리스러운 노릇이, Wyeth 역시 예술지상주의자인지라 어떤 '이데올로기'와 자신의 그림을 연결짓는 것을 싫어했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때문에, 나는 미국의 사실주의 미술가 계보에서 Edward Hopper 와 Andrew Wyeth 를 '외톨이'들로 분류하는 편이다. 나는 외톨이들을 좋아한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내가 미국미술사를 정리하면서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앞부분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우선 할 일은, 사회 사실주의자들 중에서 내 맘에 다가오는 (혹은 잘생긴) 화가들을 정리하고, 그리고 지역주의자들을 정리하는 일 일 것이다. (물론 이러다 기분 내키면 식민시절의 풍속화가를 갑자기 소개하게 될지도 모른다.)

 

연결: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09. 10. 14. 01:49

 

느지막하게 아침겸 점심을 먹고,  책가방을  차에 싣고, 차를 출발하려다 생각하니 문간까지 나를 따라와 '잘 다녀와라'하고 말해줄 왕눈이가 안보이는거다.  아침에 시무룩하게 내 침대 발치에 있던 것 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그후로 왕눈이를 본 기억이 없었다.   집안 구석구석, 옷장까지 뒤져봤으나 왕눈이는 없었다.

 

뒷문을 통해서 나간 모양이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게 등을 돌리고 하나 하나 사라져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게서 멀어져 사라져간다. 세상의 모든 별들이 급속한 속도로 하나하나 꺼져가는 듯한 환각.

 

왕눈이는 동네 어떤 집 마당에 묶여 있었다.  한시간도 넘게 혼자 어슬렁거리고 있길래, 차에 치일까봐 묶어 놨다고.

 

왕눈이는 자박자박 소리를 내면서 내 방으로 뛰어온후에 기쁜 표정으로 내게 덤벼들었다. 사실 세달 가까이 나는 왕눈이를 산책도 시키지 않고, 거의 버려두다시피 했다. 산책도, 목욕도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왕눈이를 돌보는 것은 다른 식구들 차지가 되어 버렸고,  그래도 왕눈이는 내 발치에 와서 내게 붙어서 잠이 들곤 했었다.

 

감기가 다 낳으면, 제일 먼저 할일은, 왕눈이를 동네 지정병원에 가서 종합적으로 체크업을 해주고, 밀린 예방접종도 다 맞춰주고, 그리고, 털을 예쁘게 깍아주는 일이다. 그것부터 해주자.  나는 왕눈이에게 너무 무책임했다.  무책임하면 안된다. 개 한마리라도, 무책임하면 안된다.

 

왕눈이가 돌아와서 다행이다.

왕눈이가 다칠까봐 묶어놓고 주인이 오기를 기다린 착한 이웃이 있어서 다행이다.  (친절함이란 이런 것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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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Realism/EdwardHopper2009. 10. 12. 12:05

Morning Sun
1952
Oil on canvas
28 1/8 x 40 1/8 inches
Columbus Museum of Art, Ohio

 

 

 

Edward Hopper 의 그림에서 찾을 수 없는 것들은?

 

(1) 호퍼의 그림에는 아이가 안보인다. 성인 남자, 여자들이 존재하지만 아동이 보이지 않는다. 단란한 가족의 풍경이 보이지 않는 것 과도 상통한다. 

 

(2) 호퍼의 그림에는 대화가 없다.  인물들이 여럿이 나와도 이들이 소통하는 것 같지가 않다. 각기 떠도는 별 들처럼 두사람이 서로 감정이 교류되거나 일치된 듯한 장면을 찾아보기 힘들다.  호퍼가 그린 인물들에 눈동자가 생략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해진다.  관객들조차 호퍼 그림속의 인물들과 '소통'이 불가능하다.

 

호퍼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크게 두가지로 정리 될 수 있는데 (1)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보이는 세상과 같이 속도감 있게 보는 방식 (2)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 장면처럼 클로즈 업 하거나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하고 조망하는 식으로 보는 방식이다. 이 자동차 유리를 통해 보거나 극장의 스크린에 비쳐지는 혹은 영상 카메라에 비쳐지는 것을 보거나, 에드워드 호퍼이 세상보는 방식은 '거리를 유지하는 관찰자' 방식이라는 것이다.

 

대학원의 석사과정이나 박사과정에서는 '연구방법론'을 듣게 된다. 그 연구방법론 시간에 여러가지 방법이 논의 되는데, 크게는 통계처리 중심의 양적 방법론, 그리고 장시간 관찰이나 면담등을 통한 질적 방법론이 논의된다. 실험실의 관찰이 아닌 사회현상, 교육 현장을 관찰할때 크게 두가지 방법이 있다. (1) 관찰자가 관찰 대상과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고, 마치 벽에 붙은 파리 (Fly on the Wall)처럼 관찰하는 것이다.  범죄 영화 보면 수사관들이 피의자를 심문할때 심문실에 커다란 거울이 있고, 그 거울너머에서 수사관들이 관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렇게 아예 자신을 감추고 저쪽에서 일어나는 일만을 관찰하는 방법이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2) 그런하하면 관찰자가 관찰대상과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관찰 방법도 있다. 사회학 연구자가 어떤 현장에서 직접 봉사활동을 하거나, 사람들과 일상적으로 서로 협력하면서 그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 하는 수도 있다. 교육현장에서 교사가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어떤 변화를 관찰하는 식으로 연구를 할때, 관찰자는 참여자가 되기도 한다. 이를 참여적 관찰이라고 할 수 있다.  에드워드 호퍼가 그림을 그릴때, 그는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며, 벽에 붙은 파리 같은 입장에서 사물을 관찰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세상을 '관찰자'로서 살폈다.  그는 소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이런 소통단절은 그의 그림속의 등장인물들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발견된다. 그보다 30여년 후에 태어난, 한세대 이후의 역히 외톨이 사실주의 화가라 할 수 있는 앤드루 와이어드 (Andrew Wyeth)는 호퍼와는 정반대의 관찰자였다. 그는 그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그렸다. 그는 활발하게 소통하고, 친구가 된 후에야 대상을 그림에 옮겼다. 앤드루 와이어드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가 그가 잘 알고 지내는 마을 사람들, 혹은 십수년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그림에 옮긴 사람들이다. 소통을 통해 그림의 대상에게 다가갔고, 그래서 앤드루 와이어드의 풍경이나 사람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속삭인다. 반면에 호퍼의 그림은 '접근'을 불허하고, '상상'을 정지시킨다.  앤드루 와이어드는 소통을 통해, 호퍼는 소통정지를 통해 '영원'으로 가려고 시도했을지도 모르겠다.

 

 

 

여행자의 눈에 들어오는 풍경

 

이 그림은 1940년작 '주유소'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1940년이면 지금부터 대략 70년전의 그림이다. 1940년이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식민지 시절을 견디고 있었고, 윤동주 시인이 아직 연희전문 (현재 연세대) 학생이던 시간이다. 나는 중학교때, 시간을 거꾸로 되짚어 올라가서 윤동주 시인이 살던 시절로 돌아가서 그의 애인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  연세대 문과대 왼편 언덕길에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있다. (지금 왜 갑자기 윤동주 얘기냐구, 이 천치야...) 지금도 거기 그것이 있을까?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이것이 70년전의 풍경 같지가 않다.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에서 보통 여행자가  집을 떠나 하이웨이를 타게 되면 누구나, 어디서나 이 그림속의 풍경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주유소의 규모가 크거나 작거나 차이는 있겠으나, 미국의 어느 주에 가도 우리가 만나게 되는 곳. 주유소. 그리고 주유소에 달려있는 가게. 그 가게에서 커피를 사고, 빵이나 과자를 사고, 생필품이 있나 기웃거리기도 하고, 화장실에 가서 급한 용무를 해결하고, 그리고 휙 떠나면 잊혀지는 곳.  어딜 가는 비슷한 하이웨이. 지역에 따라서 가로수의 품종이 달라지긴 하지만, 가장 흔한 것은 멋대라기 없이 키만 큰 소나무들.  그리하여. 지금도 미국의 하이웨이 풍경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길이 있고, 멋대가리 없는 가로수가 있고, 주유소가 있고, 주유소에 딸린 '공중변소'가 있고, 끝없이 이어진 길과 하늘이 있을 뿐이다.

 

 

 

 

Gas (1940)

66.7x`102.2 cm

Museum of Modern Art

 

 

호퍼의 풍경화를 보면 세밀한 묘사가 생략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전 페이지에서 Andrew Wyeth 의 그림들을 살핀적이 있는데,  앤드루 와이어드가 사과 나무를 그릴때 직접 나무의 사과를 세어보고 그릴 정도로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면,  호퍼의 풍경화속의 나무나 숲, 길은 달리는 차창 밖으로 비쳐지는 것처럼 쓸려 지나가는 것 처럼 보인다.  휙휙 지나가는 풍경의 일부같은 숲, 도로.  그 속에 '영원'처럼 혹은 '박제'처럼 서있는, 표정없는 인물들.  소통두절.

 

 

영화관 스크린에 비친듯 한 풍경

 

 

Nighthawks (1942)

84.1 x 152.4 cm (33 1/8 x 60 in.)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Museum

 

 

내가 에드워드 호퍼를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그의 그림을 처음 접한 것이 바로 이 Nighthawks 였다. 대학교 1학년, 교양과목으로 '예술의 이해'라는 과목을 수강할때,  교재에 실려있던 이 그림을 신기하게 들여다봤었다.  내 눈에는 이것이 '그림'으로 보인 것이 아니고 미국영화의 한 장면, 혹은 길거리 극장 영화간판 같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이런 그림도 '예술책'에 포함이 된다는 것이 신기했었다.  (아직 철없던 내게 '명화'란 르노아르나 고흐 뭐 그런 스타일의 유럽 그림들이었다.)  그림 설명으로 '도시인의 고독' '어쩌구' 뭐 이런 식이었는데,  내 눈에는 고독이고 뭐고 딱 영화 간판이구만... (그 후로 학년이 올라가면서 나는 한국미술의 이해, 동양 미술의 이해, 서양 미술사, 서양 미술의 이해등 미술 관련 교양과목들을 하나 하나 이수해 갔는데, 그 과목들을 이수한 주요 이유는, 미술대 교수들이 학점을 잘 줘서... 흐헤헤... 예술대 학생들이 주로 수강하던 과목들이었는데, 예술대 학생들은 너무나 예술 지상주의자들이라서 학점 따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나는 학점에 신경을 바짝 쓰는 인문대생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예술지상주의자들 속에서 '학점'에 신경을 쓴 소수가 점수를 잘 받지 않았겠는가.  (^^)

 

내가 이 작품의 '맛'을 제대로 알아본것은 극히 최근 2년 사이의 일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미국에서 약 5년간 사는 동안에도 미국은 낯 선 땅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버지니아로 왔을때, 그래서 미국미술 박물관들을 쏘다니면서 미국미술 작품들을 두루 섭렵한 후에나 나는 왜 '미국이 낯 선 땅'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미국은 나에게만 낯 선 땅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낯 선 땅이다.  미국은 누구에게나 낯설다. 미국인에게도.

 

미국의 하이웨이를 달려보면, 차창밖에 휙휙 지나치는 풍경들은 모두 똑같아 보이면서도 동시에 모두 낯설어 보인다. 왜 모두 낯설어보일까?  그것은 도로의 폭이 넓고, 하이웨이의 폭이 넓고, 주변의 나무들이 모두 크고, 그리고 뭐든 크고 넓고 멀다. 쇼핑몰은 휑하니 크고, 진열품은 한산하다. 쇼핑몰의 주차장도 휑하다.  뭐든 크고 휑하다. 풍경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풍경이 휑하다. 작은 카메라 각도 안에 인물과 풍경이 적절히 조화롭게 들어가지를 못한다.  미국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자꾸만 zoom-in (줌-인)을 한다거나, 인물 표정 위주로 찍거나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풍경이 너무 한산하고 큼직해서 조화롭게 화면 안에 다 담을수가 없기 때문이다.  '뉴욕 맨해턴'에 가면 사람 많고 복잡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뉴욕이나 시카고, LA 등 극 소수의 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들이 휑하고, 썰렁하고, 도시를 제외한 지역은 사람도 많지 않고 한적하다. 맨해턴과 같은 대도시를 제외하고 웬만한 도시에서 한밤에 술한잔 걸치기도 쉽지 않다. 상점들은 저녁이면 문을 닫는다.  맥도널드가 24시간 영업을 하기도 하지만, 이런 심야 업소를 찾기는 쉽지 않다.  어딜가나 휑하고, 썰렁하고, 아스팔트가 깔려있고, 그리고 대개 한산하다.

 

이것은 나만 느끼는 현상은 아니다.  미국 텔레비전의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보면 실내 인테리어 전문 케이블도 보이는데, 한때 심심풀이로 집 고치는 프로를 줄 창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실내 인테리어나 혹은 정원 설계 같은, 집 관련 디자이너들이 평을 할때, 가장 자주 던지는 영어가 'detail (세심한 부분처리)'이 살아있다는 말이었다.  디테일.  내가 내린 결론 - 미국 사람들 '디테일'이라고 하면 아주 넘어가는구나. 

 

미국문화가 유럽식에 비해 신생국가이고 건물들이며 생활속의 디자인이 단순하고 소박한 편이다. 공장에서 찍어나오는 트레일러 하우스들도 많고. 대체적으로 상자모양의 멋대가리 없는 건축물들. 휑한 공간.  이런 식이다보니까, 실내나 외벽에 뭔가 오밀조밀한 장식 한가지만 붙여도 '디테일'이 산다고 노래를 부른다.

 

Nighthawks의 그림을 살펴보자.  심야의 식당이나 바처럼 보인다. 창백한 형광등 불 빛 아래, 바텐더의 흰 옷이 춥고 스산해보인다. 그의 등 뒤로 보이는 기구는 커피 내리는 기구 같아보인다. 식당용 스툴 (둥근 높은 의자)이 일곱개가 전면에 배치되어 있고, 그중 하나를 양복입은 신사가 차지하고 앉아있다.  저만치 남자, 여자 한쌍이 앉아있다. 거리는 텅 비어있고, 그야말로 쥐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는다.  식당에서 나오는 불빛으로 유리창 너머의 보도가 희게 빛난다.  PHILLIES 라는 단어가 보이고 그 옆에 시가 모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필리스 시가 광고같기도 하고, 식당 이름 간판같기도 하고.  이 가게의 벽에 흔한 그림한장, 메뉴 설명서 한장 붙어 있지 않다. 꽤나 썰렁하다.

 

썰렁함.  내가 체감하는 미국은 바로 그 '썰렁함'이다. 나는 이 썰렁함을 '낯설음'으로 받아들였었다.  스산함. 새로 열었다는 커다란 식당에 기대에 차서 들어갔는데, 손님도 없고 종업원도 시들하고,  그럴때가 있다.  그럴때 우리는 직감적으로 '아차, 잘 못 들어왔다. 다른데로 갈것을' 이런 느낌이 들때가  가끔 있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특히나 이리저리 떠돌며 여행을 하다 보면 우리는 이런 스산함, 휑함, 썰렁함과 익숙해지게 된다.

 

이 그림을 보면 어떤 음악이 떠오르는가? 나에게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쿨 재즈 트럽펫 연주의 낮고 음산한 음악이 떠오른다.  주인공들은 각자 상념에 잠겨 있고,  저 편에 앉아있는 남녀는 연인사이로 보이지 않는다.  좀 전에 바에서 만난 낯 선 타인들 같아보인다. 이들이 갈 곳은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이 아니고, 인근의 모텔이 될 것 같아 보인다. 이 그림속에는 '드라마' 가 있는 것 같다.  하필 이 그림이 현재 시카고 미술대 미술관에 걸려있는 관계로, 혼자 앉아 있는 양복쟁이 남자는 '시카고 갱단'의 중간 보쓰쯤이 아닐까 상상해보게 된다.  (이 그림의 본래 배경은 맨하탄이었다고 한다). 

 

평생 영화를 즐겨 본 호퍼는 그의 그림에서 영화속에서나 잡힐만한 구도의 그림들을 많이 선보였고, 또한, 영화계에서는 호퍼의 그림을 영화 속에서 다시 연출하는 일도 있었고, 호퍼와 영화는 이렇게 상호 교류하며 발전했다고 한다. 이 그림의 장면은 영화 Sting 에서 차용했다고도 하고, http://americanart.textcube.com/39  페이지에 소개된 대로 House by Railroad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역시 히치코크 감독의 작품에서 응용되었다.

 

 

몰래카메라에 잡힌 사람들

 

밤의 사무실 풍경은 특히나 '성적인' 어떤 '드라마'를 암시하는 작품으로 논의가 되는 작품이다. 여성의 성적 매력은 '가슴'과 '엉덩이'에서 두드러지는데, 그림속의 여성은  몸을 비틀어서 가슴과 엉덩이를 적절히 '관객'에게 드러내고 있다. 이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는 마치 파리의 눈과 같이 작은 몰래카메라가 이쪽 천장이나 벽의 윗쪽에 달라붙어 실내를 내려다보는 형식이다. 아니면 건물의 이쪽 벽에 창문이 있고,  이 창문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맞은편 창에서 내려다 보는 형국일지도 모른다.

 

 

 

 

 

Office at Night
1940
Oil on canvas
22 1/8 x 25 inches
Walker Art Center, Minneapolis, Minnesota

 

 

 

 

현대미술관 소장의 '밤의 창문들'에는 '훔쳐보기' 혹은 '몰래카메라'식으로 들여다보기 기법이 좀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열려진 창으로 커튼이 나부끼는데, 옷을 갈아입으려는지 여성이 짧은 드레스 혹은 속은 차림으로 구부정하게 서있다. 여자의 머리는 보이지도 않아 통통한 뒷태가 더욱 두드러진다.

 

Night Windows

1928.

Museum of Modern Art

Oil on canvas, 29 x 34" (73.7 x 86.4 cm). Gift of John Hay Whitney

 

 

에드워드 호퍼는 이런 식으로 낯선사람,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의 풍경을 많이 그렸다. 물론 Jo와 결혼 한 이후 40년이 넘도록 그가 그림 작업을 하는 동안, 그의 그림에 그려진 '모든' 여성의 모델은 그의 아내 Jo 였다.  젊은 여성이거나 늙은 여성이거나, 뒷태가 예쁜 여성이거나, 창녀이거나, 시들은 여성이거나 '모두'가 그의 아내가 모델이었으므로 호퍼가 정말로 누군가를 '훔쳐봐 가면서'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속에는 이렇게 '훔쳐보기' 식으로 잡은 전라의 혹은 반라의 여성들이 많이 등장한다.  물론 여성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고 남성도, 남자와 여자도 등장한다.

 

나는 이것을 '훔쳐보기'라고 말하지만,  호퍼가 정말로 대상을 '훔쳐봤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대상'을 관찰 했을 것이다. 창문이 보이면 창문을 관찰 했을것이고, 창밖에 풍경이 보이면 풍경을 관찰 했을 것이다.  열려진 창문으로 보이는 옷벗은 여자의 뒷태를 그는 그저 관찰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 그것이 거기에 있고, 내 눈에 보이니까.  이는 마치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의 어린 내가 혼자 유원지 숲속에서 놀다가, 나무 그늘 어둠침침한 곳에서 젊은 남녀가 아랫도리만을 내리고 뭔가 자신들만의 장난을 하는 장면을 그저 심심해서 무심코 관찰하던 것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나는 훔쳐본것이 아니고 그냥 본 것이다. 하지만,  관찰되는 대상에게는 이것이 '훔쳐보기'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사실 호퍼의 그림에서 '훔쳐보기'적 요소를 찾아내는 것은 관객들의 몫일 것이다. 실은 우리들이 '훔쳐보기' 놀이를 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호퍼의 그림을 통해서.  호퍼는 무심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그림을 던져주고, 우리는 열심히 그림을 훔쳐본다. 훔쳐보는 우리는 영원히 그림속의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한다. 그것이 훔쳐보는 이들의 운명이다.

 

 

사물에 대한 그의 애정 표현의 방식

 

호퍼는 어릴때부터 수줍음을 많이 탔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고 전해지며, 그의 이러한 성품은 늙어 죽을때까지도 변치 않았다. 40년넘게 결혼생활을 유지했던 그의 아내 Jo가 아마도 가장 가까운 친구였을 것이고, 그나마 호퍼가 가장 편안하게 대화 할 수 있는 존재 였을 것이다. 이들은 해로 했지만, 이들 결혼생활의 절반 이상은 싸움과 으르렁거리기 였다고도 한다.  서로 으르렁거리고 상처주면서도 헤어지지는 않았던.  내가 생각하기에 호퍼가 아내 조와 허구헌날 으르렁대면서도 헤어지지 않았던 이유는...그의 일관된 성품 때문일 것이다.  그가 죽을때까지 40년이 넘도록 서민 아파트를 떠나지 않고 살았던 바로 그런 이유로 그는 아내와 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호퍼를 만나서 별도로 인터뷰를 한 적이 없지만,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한번 정하면 그냥 끝까지 가는거다.  뭐 자질구레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좋건 싫건 끝까지 가는거다. 

 

호퍼에게는 자신만의 애정 표현 방식이 있었다.  호퍼가 아내에게는 어떤 식으로 애정 표현을 했을지 잘 모르겠으나, 그가 세상에 애정표현을 하는 방식을 나는 알고 있다.  그는  드러내지 않고 애정 표현을 한다. 가령 이런식이다.

 

이 그림은 '일요일 이른 아침 (Early Sunday Morning)'이라는 1930년 작품이다. 뉴욕 휘트니 미국 미술관 소장품이다. 2008년 여름에 이 작품을 보고 참 반가웠었다.  이 그림은 호퍼의 다른 작품들에서 자주 보이는  '휑하고' '썰렁한' '고립된' 듯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제목이 '일요일 이른 아침'인데, 나는 이런 풍경이 낯설지 않다.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포토맥강을 건너 산책하다 보면 조지타운 거리가 나온다. 조지타운대학 인근의 거리인데 초기 미국 역사를 담고 있는 역사적인 도시라서 나지막한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다.  이곳에 토요일이나 일요일 이른아침에 산책을 나가면 길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안보인다. 적막감만이 감돈다. 그래도 그 거리를 산책하면서 쓸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게의 쇼윈도우마다 각기 다른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어 조용하고 한가로운 거리를 나 혼자 편안하게 걷는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곧 이 적막한 거리가 주말 인파로 넘쳐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림속의 거리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그가 살던 뉴욕 맨해턴의 어디쯤, 낮은 건물들이 모여있는 어느 골목 일 것이다. 붉은 벽돌의 이층 건물. 1층에는 상점들이 있고, 2층은 주거지 일 것이다.  일층 상점들 중에서 두군데의 햇볓 가리개가 노란 색이다. 2층에는 열개의 창문이 보이는데, 그중 여섯개의 햇볕가리개가 노란색이다. 햇볕 가리개들의 높이가 제각기 다르다. 검정색 가리개도 있다. 커튼이 쳐진 곳도 있고, 창이 일부 열린 곳도 있다. 열개의 창문은 동일한 창문이면서도 커튼이나 볕가리개가 이 창문들에 각기 다른 개성을 부여한다.  이 창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개성으로 볕가리개를 올리거나 내리거나, 커튼을 치거나, 창을 열거나 했을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는 '디테일'을 대충 무시하고 선 굵게 그림을 그린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무작정 '디테일'을 뭉개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디테일'을  선사할 줄 알았다. 그는 각기 다른 창문의 풍경만으로도 사람들의 각기 다른 삶의 방식, 개성, 삶의 이야기를 표현 할 줄 알았다.

 

 

Early Sunday Morning
1930
Oil on canvas
35 x 60 in.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일요일 이른 아침'이라는 작품으로 나는 에드워드 호퍼의 이야기를 마치기로 한다.  내가 이 작품을 마침표로 소개하는 이유는, 이 작품속에 그의 '개성'이 모두 함축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행자의 시선에 무심히 스쳐 지나갈 '어느 거리'의 풍경이 될 것이다.  이 그림에는 사람 하나 등장하지 않지만, 우리는 각기 다른 창문들 속에 사람들이 여러가지 드라마를 연출하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건물은 그 자체로 '우리 읍내 (Our Town)'가 될 수도 있고, 우리는 그 속의 마을 사람 갑, 을, 병이 되어 갑자기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며 대사를 날리게 될 지도 모른다.  이 풍경은 연극의 무대가 되기도 하고, 영화의 세팅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관객은 상상속에서 무대위의 배우가 된다.  우리는 텅빈 거리를 걸으며 가게의 유리를 기웃거리거나 2층 창문 속에 어떤 이들이 있을까 상상하며 목을 빼고 열려진 커튼 너머를 유심히 살피기도 한다.  우리는 거리를 걷는다. 그러나 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관객인 나 만 그 풍경을 보고 있을 뿐이다.  나는 어쩌면 이 햇살 가득한 텅빈 거리의 아무데나 앉아 해바라기를 하며 다리 쉼을 할지도 모르겠다. 

 

풍경속에 아무도 없다.  이 풍경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최초의 어떤 사람

혹은 관객.

 

호퍼의 그림에는 '어린이'가 등장하지 않는다.  어린이는 '생장' '변화'의 상징일 것이다.  영원처럼 적막한 호퍼의 풍경은 '어린이'의 무궁한 변화와 성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호퍼 그림속의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 이들은 영원과 대화한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시간성을 뛰어 넘은 영원의 세계에서 이들은 숨을 쉰다.  그러므로 설령 호퍼의 그림을 보다가 내가 박제가 된다해도 슬퍼할 일은 아닐 것이다.

 

 

 

눈치 채셨는가?  이 페이지의 맨 위의 Morning Sun  창밖으로 벽돌 건물의 꼭대기가 보인다.  Nighthawks 의 이웃 건물이 낯익지 않은가?  혹은 Night Windows 의 차양이 노란색인 것이 눈에 띄지 않는가?  에드워드 호퍼가 어떤 대상이나 사물을 사랑하는 방식은 이런 식이다.  말없이, 그러나 늘 화폭 한켠에 담아 두는 것.  영원처럼.   그래서, 호퍼 그림 속의 주인공들  혹은 풍경은 과거의 어떤 시점에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대로 존재하며, 미래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공감을 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을 그렸으므로. 그는 미국에서  미국을 그렸지만, 그의 그림은 미국에만 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대상의 본질에 다가 섰으므로.  사물의 본질에 국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09. 10. 12. 03:36

 

 

 

 

해마다 가을이면 버지니아에서는 인근 과수원으로 소풍을 간다. 사과밭을 찾아가 실컷 사과를 따가지고 값을 치르고 오면 되는 것이다.  과수원도 제각각이라 '기업형'으로 크게 과수원을 열고 손님을 맞이하는 곳도 있고, 그냥 시골 과수원에서 광고도 없이, 동네 사람이 오면 사과를 파는 곳도 있고 그렇다.  전에 플로리다에서 살때는, 초가을에 포도를 따러 다녔고, 가을이 오면 시월이 되면 단감을 따러 가서 배가 터지도록 단감을 따 먹고 들통 가득 사가지고 오곤 했었다.  돈없는 유학생들에게도 그 단감이 가격이 매우 싸서, 주말에 감밭에 가면 인근의 학생들이 모두 모여 그자리에서 단합대회를 할 수도 있었으니까... 지금도 플로리다에 가면 학생들이 단감을 따며 깔깔 댈 것이다. 그 감밭이 그립지만, 버지니아에서는 감밭을 찾을 수가 없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남겨두고...우리는 흘러간다.

 

지난 두해 가을동안 나는 웨스트 버지니아의 큼직한 사과밭에 가서 사과를 따 왔었다. 사과알이 크고 탐스러웠고, 하루 소풍장소로 좋을 만큼 다른 오락시설을 갖춘 곳이기도 했다.  올해에는 학교에서 학생이 새로운 장소를 알려준다. 시골 할아버지네 과수원인데, 약도 안치고 비료도 안주고 그냥 자연상태에서 사과가 열리는 곳이라 알이 작지만 단단하고 그리고 아주 달다고 가르쳐준다.  사과 값도 한참 싸다고,  학생이 맛보라고 갖다준 사과가 하도 싱싱하고 달길래, 주소를 받아놨다가 오늘 가 보았다.  집에서 65마일 거리. 천천히 운전해도 한시간 반이면 되겠다.

 

 

주소지를 찾아가보니 별유천지 비인간 (別有天地非人間)이었다. 한마디로, 사람이 없었다.  일요일 오전이라 주인은 예배당에 갔는지 농장이 텅 비어있는채로 안채의 문이 잠겨있고, 창고문은 그대로 열려있다. 창고문에 사과따는 도구가 나란히 세워져있고, 볕이 가득한 창고 안에는 사과상자도 놓여있고.  내학생이 내게 이르기를 사과는 배가 터지게 먹어도 되고, 사과를 상자에 담아가면 되는데, 많건 적건 한상자에 14달러라고 했었다. 기웃거리며 주인을 기다리다가 도통 인적이 없길래, 차를 마당에 세운채로 작대기와 들통을 들고 사과밭에 가서 사과를 땄다.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 산중답속인(山中答俗人)


문여하사서벽산(問余何事棲碧山) 왜 푸른 산중에 사느냐고 물어봐도
소이부답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 대답없이 빙그레 웃으니 마음이 한가롭다.
도화유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 복숭아꽃 흐르는 물따라 묘연히 떠나가니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인간세상이 아닌 별천지에 있다네.

 

임자는 어디가고 창고 문만 환하게 열려있는 사과농장

 

 

(사진들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내집처럼 창고에서 들통 하나를 꺼내 들고, 사과 작대기 세워 놓은 것 하나 들고, 사과를 따러가세 사과를 따러 가세, 태초의 아담처럼 사과를 따러가세, 태초의 이브처럼 사과를 따러가세

 

 

 

 

사과나무들이 줄지어 선 언덕

 

 

뜰앞에는 코스모스도 피어있고요~

 

 

 

무농약, 무공해, 버지니아 사과를 팔아요, 사과를 팔아요~

An apple a day keeps a doctor away~

하루에 사과 한알을 먹으면 병원에 갈 필요가 없어요, 버지니아 사과를 사세요~

 

 

 

 

시월의 햇살아래 익다 지친 사과는 툭~ 툭~  떨어져 쌓이고

 

사과밭 할아버지는 언제쯤 돌아오시려는지

 

 

정원에 굴러다니는 바구니를 문간에 갖다 놓고, 거기에 10달러 지폐를 하나 눌러놓고 사과밭을 떠나다.  한상자 다 안채웠으니까, 10달러만 놓고 갈래요~

 

 

 

 

피천득 선생의 시에 '꽃씨와 도둑'이 있다.

 

꽃씨와 도둑

 

마당에 꽃이

많이 피었구나

방에는

책들만 있구나

가을에 와서
꽃씨나 가져 가야지

 

아무도 없는 사과밭에서 사과를 따 먹고, 사과를 따 모으고 놀다가 역시 빈 사과밭을 떠나며 피천득 선생의 시를 혼자 중얼거렸다. 가을에 와서 사과나 가져가야지...

 

집에 도착하여 메모지에 적힌 사과밭 전화번호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할머니가 받으신다.  "내가 사과밭에 갔더니 아무도 없길래 잘 놀고, 사과 따가지고 오면서 10달러를 놓고 왔는데 보셨나요?"  전화가 너머에서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나고, 뭐라뭐라 묻는다.  버지니아 농민들의 사투리가 들린다. 아, 이분들 평생 이곳에서 사셨구나.  할아버지가 "Ten dollar?" 하고 외치는 소리가 난다. "Yes! I found it!" 그가 저만치서 외치는 소리가 난다.

 

할머니는 내 예상대로 아침에 예배당에 갔다가 조금 전에 왔다고 집이 빈 사정을 설명하고, 나는 덕분에 잘 놀았다고 인사를 한다.  시월 어느 일요일, 버지니아 셰난도 골짜기의 그 사과밭은 온전히 내 것이었다.  하느님이 나를 위해 열어놓은 에덴동산이었다.

 

p.s. 셰난도 골짜기는 모세 할머니가 18년간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살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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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Realism/EdwardHopper2009. 10. 10. 20:48

 

하숙생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길에

정일란 주지말자 미련일란 주지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간다

 

이런 노래가 있다. 제목이 '하숙생'이다. 우리 아버지가 인생 제대하기 전에 말년에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헤어질 무렵이면 이 노래를 부르셨다고 한다. 난 이 노래의 제목이 '인생은 나그네' 혹은 '나그네'인 줄로 알았는데 제목은 노래가사에도 없는 '하숙생'이라고 한다. (하하).

 

하숙생이란 말은 '나그네'라는 말과는 느낌이 사뭇다르다. 왜 다른가하면, 나그네는 그냥 줄창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존재같고, 하숙생은 그래도 어딘가 적을 두고 살다가 때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하숙'을 하다가 또 떠나고 그럴것 같다는 말이지.  어딘가에 적을 두긴 하지만 거기가 자기 집은 아니고 그냥 남의집 한귀퉁이 빌려 살다가 때되면 떠나는 존재. 하숙생들이 먹는 음식은 하숙집이 제공하는 하숙집밥, 집 주변 함바집, 기사식당, 혹은 편의점 주먹밥, 컵라면 뭐 이런것이 아니겠는가. 하숙생들은 소지품도 많지 않고, 갖고 있는 옷도 많지 않다. 왜냐하면 이리저리 하숙을 하며 돌아다니기 때문에 늘 일정량의 물건만을 소지 할 뿐이다.  하숙생은 공동 화장실을 쓰고, 공동 수돗가에 모여서 양치질을 할 것같고, 뭐 그것이 홈, 스위트 홈이 될 수는 없는 어중간한 주거공간을 점유할 것이다.

 

자취생하면 뭐랄까 좀더 건설적이고 독립적이며, 하하, 나만의 어떤 공간 점유가 가능해보인다. 그런데 하숙생은 이도저도 아닌 묘한 상황이란 말이지.

 

 

낯가림이 심한 가겟집 아들 에드워드 호퍼

 

에드워드 호퍼는 뉴욕주의 나이액 (Nyack)에서 태어났다. 대서양에 면해있는 이 도시는 당시 요트를 많이 제작하는 곳으로도 알려져있다. 호퍼의 부모는 중산층 집안의 사람들이었고 나이액에서 상점을 운영했다.  그런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던 호퍼의 아버지는 사업수완이 좋지 못했고, 가세는 점점 기울어져 간 것으로 보인다. 호퍼는 성장하면서 아버지 가게일을 돕거나 경리직 일을 거들기도 했다. 당시 호퍼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가게는 '공산품 가게 (Dry Goods Store)'로 알려져 있다. 꽃이나 야채, 생선과 같은 생생한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주로 공장에서 만들어진 물건들을 취급하는 가게였다.  오늘날에도 미국의 동네 가게를 살펴보면 크게 두종류로 나눠지는데 신선한 과일, 우유, 야채, 생선등이 취급되는 '그로서리 (grocery)' 가게가 있는가하면,  이런것을 제외한 물건들, 문구류, 생필품, 의약품,  그리고 이런곳에서 식품을 판다면 공장에서 만들어진 과자, 빵, 썩지않는 음료수 이런 것들을 주로 취급한다.

 

오늘날, 시카고와 같은 대도시의 도시 빈민 생활문제를 사회학자들이 지적할때, 도심에 사는 빈민들이 '신선한 음식'을 사먹을수 없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신선한 식품을 제공하는 '그로서리'에서는 식품 운송 및 보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점점 대형 회사들이 취급하게 되고, 도심의 작은 상점들은 이런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그로서리'를 포기하고 '공산품'만을 취급하게 된다.  그런데 도심의 빈민들은 '자동차'도 없다. 이들이 신선한 야채를 사려면 멀리 떨어진 곳으로 쇼핑을 가야 하는데 드문드문 오는 시내버스에 의지해서 장을 보려면 하루 온종일이 걸리고 만다. 결국 도시 빈민들은 집 근처의 공산품 가게에서 제공하는 빵, 과자, 음료수, 그리고 패스트푸드 전문점에 의지하여 생계를 해결하게 되고, 그 결과 이들의 건강이나 생계는 더욱 악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혹은 우리들이 매일 밥상에서 김치나 다른 야채를 먹을수 있다면, 우리는 하늘에 감사해야 한다. 신선한 야채를 먹고 싶어도 사먹을수도 없는 도시 빈민들도 많이 존재 한다는 것이다. 경제 대국인 미국에서조차.

 

에드워드 호퍼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상점은 바로 이런 '마른 물건'만 판매하는 공산품 가게였다.  웹에서 'Dry Goods Store' 를 검색해보니 1910년 펜실베니아의 어떤 마을의 Dry Goods Store  사진이 나온다. 잠시 빌려다 소개해본다.

 

 

에드워드 호퍼의 소개 책자들을 보면, 비사교적이고 혼자 그림그리기를 즐겨했던 소년 호퍼는 아버지의 가게일을 돕는 것을 매우 따분해 했다고 한다. 나는 소년 에드워드 호퍼가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을 돕는 광경을 상상해본다.  그는 사람도 별로 안오는 상점을 지키고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르고, 어쩌다 손님이 와서 뭔가 물으면 마지못해 대꾸를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도 소년 호퍼와 같은 시절이 있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잠시 농토를 남의 손에 맡기고 수원으로 이사를 나와서 한길가에 가게를 열고 상회를 운영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몇해동안 상점을 착실히 운영하여 한살림을 장만한 후에 다시 귀향을 하셨다. (사업에 재능이 있는 분들이었나보다).  나는 상경한 우리 가족들과 떨어져서 수원의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서 1년을 보냈는데, 그 당시 나는 '원천상회' 집 아이로 통했다.  사람들은 내 이름을 몰라도 좋았다. 나는 '원천상회' 아이였으므로.  한길 건너에 우리 상회보다 더 큰 상회가 자리잡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동네 사람들이나 인근의 유원지를 찾는 사람들, 그리고 논 건너 공장에서 일하던 직공들은 우리 상회에 들르기를 좋아했다.  우리 할머니가 사람이 싹싹하고 부지런하고, 나이가 어린 사람이나 많은 사람이나 공평하게 싹싹하게 대했으므로 사람들이 우리 할머니를 좋아 했었던 것 같다.  우리 할아버지는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나 역시, 어미 아비에게 버림받은 새새끼처럼 풀이 죽은 꼬마였으므로,  사람들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도 않았고, 누군가가 귀엽다며 내 머리를 건드려도 성난 개처럼 으르렁거리며 도망치곤 했었다.  나는 골난 표정으로 동네 골목골목을 쏘다니며 혼자 놀았고,  나는 골목골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풍경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사람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고 싹싹하게 인사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림자처럼 혼자 떠돌았지만, 자유롭게 사람들이 사는 풍경을 관찰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제법 어른들도 모르는 비밀스런 풍경을 구경하기도 했었다.  나는 유원지 숲에 데이트를 나온 공작 직공들이 옷을 반쯤 내리고 몸을 부딪치며 아픈듯 흐느끼는 광경을 멀거니 보기도 했고, 풀숲에서 포개져있던 사람들을 보기도 했다.  내 눈에 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갔고, 나는 판단력도 없이 이상스럽거나 우스꽝스러운 풍경들을 관찰했다.  

 

가겟방을 지키고 앉아있어야 했던 수줍은 소년 호퍼는 따분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는 길거리를 지나는 많은 사람을, 혹은 가게에서 내다보이는 맞은편 건물이나 가게들의 풍경을 세세하게 관찰 했을 것이다. 진열대에는 평생 썩지 않을 물품들이 말라가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마른 물건들로만 이루어진 공산품 가게가 평생 호퍼의 삶을 지배했을 거란 생각을 한다.

 

 

호퍼 삼락 (三樂)

 

맹자 빼갈먹고 가라사대, 선비에게 세가지 기쁨이 뭔고 하니 (1) 부모형제 건강하시고 (2) 세상에 부끄러운 일 좀 덜하고 (3) 남의자식 잘 가르치고 뭐 대략 이러한 것이다. 내가 가만 보니까, 나는 두가지는 되는데 한가지가 안되어서 제대로 된 선비질을 못하고 있다. 부모형제 건강하시고, 남의자식 열심히 가르치고, 대략 거기까지는 그럭저럭 되는데 하늘을 우러러 땅을 우러러 여러가지고 부끄러운 것이 많아... 나는 죽어도 군자가 못되겠네...

 

 

호퍼는 위의 내가 적은 '하숙생'같은 인생을 살다간 사람이다.  일단 호퍼는, 나이악 고향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후 뉴욕으로 가서 통신과정으로 미술공부를 좀 하다가, 일러스트레이션 (삽화) 공부 도 하고, 미술학교에 정식 입문하여 당시의 대가인 Thomas Eakens, Henri 와 같은 화가 밑에서 공부하는 과정도 거친다.  (펜실베니아 미술관에서 Eatens 작품을 무더기로 사냥하여 왔으므로 언젠가 그의 페이지가 만들어질 것이다).  궁색한 형편이었지만 예술인들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파리에 가서 머물며 그곳의 분위기를 살피기도 한다.  그런데 그는 파리에 머무는 동안 화단의 인사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혼자 미술관 구경하고, 뒷골목 구경하고, 혼자 스케치하며 떠돌았다고 한다. 그는 피카소한테도 관심이 없었고,  도통 미술계 인사들과 어울리러 들지를 않았다.  그가 당시 파리를 지배하던 인상파 화풍이나 뒤를 잇는 후기인상파의 작풍을 아주 몰라라 하지는 않았으나 이런 흐름을 자신의 그림세계로 받아들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영향은 받았을 수 있으나 그것이 호퍼의 그림 세계를 지배할 수는 없었다는 뜻이다.

 

미국에서 호퍼는 1920년대와 30년대를 지배하던 사실주의의 양대 사조 (1) 지역주의 Regionalism 과 (2)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Social Realism) 에도 속하지 않았는데,  지역주의는 경멸했고,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대해서는 다소 공감하나 자신을 그 틀에 가두려 하지 않았다. 그는 우파도 좌파도 아닌 '미술파'의 길을, 아니 미술파도 아닌 그저 '호퍼'의 길을 갔을 따름이다.

 

사십대 후반까지 호퍼는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린 화가였다.  그 이전까지는 그럭저럭 '삽화가'로 생계를 해결했고, 삽화의 연장으로 작업한 '에칭'판화 작업으로 판화업계의 대가가 되기는 했으나 그 역시 생계의 연장이었다. 그는 미국이 대공황(Great Depression)에 접어들던 싯점부터 오히려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미술계에 등단하여 난생처음으로 차를 사고, 그리고 매사추세츠주의 아름다운 해변 휴양도시인 Cape Cod 에 스튜디오를 장만하여 그의 '문패'를 다는 기쁨을 누리게 되기도 하는데 이는 40대 후반의 일들이었다.  그 때까지 그는 그저 가난뱅이 그림쟁이였을 뿐이다.  Cape Cod의 스튜디오 외에 그들이 주로 생활한 곳은 뉴욕의 자그마한 아파트 서민용 아파트.  이곳은 방한칸, 작은 싱크대가 부착된 미니부엌이 달린 스튜디오였는데  그는 죽을 때 까지 공동 화장실, 공동 샤워시설을 사용했다.  따로 작업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두 부부가 살았으므로,  호퍼가 그림 작업을 할때면 방에 분필로 금을 그어놓고 아내 '조'가 금을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Gas (1940)

Museum of Modern Art, NY

 

 

인생의 초반 50년 가까이를 가난뱅이로 살았고, 그 후에 명성을 얻고 그림이 비싸게 팔려나가 생활이 풍족한 이후에도 가난뱅이의 습관을 그대로 유지한 채 검소하게 살았던 호퍼는 주로 세가지 취미 생활에 돈을 썼다고 한다:

 

(1) 책

(2) 여행

(3) 극장

 

 

호퍼 부부는 옷을 사면 다 떨어질때까지 입었고, 호사스런 가재도구를 사 모으는데 취미가 없었다. 호퍼의 아내는 요리 따위를 즐기지도 않았다. 호퍼의 아내가 가장 즐겨 한 요리는  깡통을 따서 깡통에 담긴 음식을 밥상에 차리는 일.  그것으로 요리 끝. 즐거운 인생.  이들은 아무데서나 살 수 있는, 수십년이 지나도 변치도 않을 깡통음식을 주로 먹었고,  혹은 동네의 싸구려 음식집에서 끼니를 해결 했을 것이며, 이들이 자동차를 끌고 미국의 여기저기를 떠 돌때는 자동차를 세워놓고 아무때나 드나들수 있는 자판기 음식점 (automat), 주유소, 여관의 식당,  길거리 심야 카페등에서 그들의 주린 배를 채우면 되었을 것이다.  심심하면 극장에 가서 사람들 속에 섞여 영화를 봤을 것이고, 집에 오면 각자 상념에 잠겨 자신의 일에 몰두 했을것이다. 

 

 

호퍼의 삼락으로 내가 정리한 책, 여행, 극장 이 세가지 요소는 일관되게 호퍼의 그림 세계에 반영된다.  책읽기, 여행. 극장 구경등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이 모든것은 '관찰자'의 작업이다.  책 읽기는 외부와 내면으로의 여행이고, 여행은 실제 세상에 대한 스치는 관찰이다. 그리고 영화는 우리의 훔쳐보기 욕구를 극대화하여 충족시켜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책읽기, 여행, 영화구경은 비사교적인 사람들이 혼자서 얼마든지 즐길수 있는 놀이이기도 하다. 책읽을때 옆사람하고 종알거릴 필요 없다. 여행할때 혼자 자동차를 끌고 돌아다니다가 주유소에서 개솔린 넣고, 주유소 점방에서 아무거나 사 먹고,  길거리 모텔 아무데서나 하룻밤 자고 다시 떠나는 동안 아무하고도 말을 섞을 필요도 없다. 영화 볼때 옆사람하고 '회의'하면서 떠들면 주위의 눈총을 받는다. 영화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지만, 우리는 그다지 소통하지 않는다.  호퍼는 아무하고도 소통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관찰하고 이를 내면화하거나 화폭에 담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산품 가겟집 아들이었던 호퍼는 평생 공산품 가게에서 살 수 있는 깡통 음식 혹은 자판기 음식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으며 생활하면서, 가겟방 너머, 가게 유리창 너머의 세상을 내다보듯 자동차 유리 너머, 극장 화면너머의 세상을 관찰하고 훔쳐봤으며, 별로 가진것 없이 수십년간 공동화장실을 써야 하는 작은 아파트를 주거지 삼아 이리 저리 떠돌아 다니다, 가볍게 우리 곁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를 '미국의 풍경을 그린 가장 미국적인 화가'로 꼽지만, 그는 그가 경멸했던 '미국적인 그림을 그리자는 지역주의자'도 아니었고, 사회적인 문제를 화폭에 담은 진보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말하자면 Regionalist 도, Social Realist 도 아닌 Hopperist 였던 것이니,  가장 미국적인 풍경을 그렸다는 호퍼의 그림들이 오늘날 미국 국경을 넘어서서 세상 사람들에게 마술적으로 다가간다.  우리가 오늘날 호퍼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미국'이 아니다. 그 속에 '하숙생'과 같이 스치고 지나가는 '나'의 모습 혹은 '우리'의 모습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호퍼가 관찰 한 것은 '미국' 혹은 '미국인'이 아닌, '인간'이었던 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Realism/EdwardHopper2009. 10. 9. 05:03

에즈워드 호퍼는 (July 22, 1882 – May 15, 1967) 19세기말에 태어나 20세기 후반까지 85년을 살다간 미국 화가이다. 내가 가급적이면 작가들의 생몰 연대를 언급하는 이유는, 작가들의 활동과 그들이 살다간 지역사, 세계사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살다 간 동안 한국에서는 한일합방이 일어나고 삼일운동이 일어나고, 광복을 맞고, 그동안 세계사적으로는 세계 1차, 2차 대전이 지나가고, 한국에서는 육이오, 혹은 한국전쟁을 겪고, 419 혁명이 일어나고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우리 아빠 엄마가 결혼을 하고 우리 오빠가 태어나고, 언니가 태어나고...

 

85년을 살다간 이 화가에게 몇차례의 그림 매체의 변화가 있었다. 첫번째로, 그는 밥벌이를 위해 '삽화가'로 활동을 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예 삽화에 중요 도구가 되는 '에칭'기법을 스스로 익혀 '에칭' 활동을 열심히 하던 시절이 있었고,  미술학교에서 만나 잠시 알던 여학생 Jo와 40대에 다시 만나게 되어 그로부터 수채화를 권유받아 수채화 활동을 열심히 하던 시절이 있었다. (결국 Jo와 결혼하여 해로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 유화작업에 주력하게 된다.

 

마침 내 사진파일에 내가 '사냥'한 (나는 이를 사냥이라 부른다. 어줍지 않은 사진이지만, 내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 것들이므로) 작품들이 있어 이 세가지 매체의 작품들을 소개해본다.

 

(1) 삽화와 에칭판화 시절

(2) 수채화 시절

(3) 유화 시절

 

 

*** ***

 

 

(1) 에칭 판화: 1921년 Night Shadows (밤의 그림자).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2009년 9월 찍은 사진이다.

 

 

 

 

 

(2) 수채화: White River at Sharon (샤론의 흰 강) 1937년 작품으로 그해 9월 버몬트 (Vermont)주의 친구를 방문했을 때 그 곳의 풍경을 담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유화: 그리고,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국립 미술관, 허시혼 미술관, 코코란 미술관에서 '사냥'한 작품들

 

 

스미소니안 아메리칸 아트 뮤지엄 (Smithsonian National Museum of American Art) 1층에 2009년에 걸린 호퍼의 작품들. 왼편은 Cape Cod Morning. 오른편은 Ryder's House

 

 

 

 

 

 

 

 

 

국립 미술관에 걸린 Cape Cod Evening.  위에 있는 것은 케이프 코드의 아침.  아래의 작품은 같은 장소의 저녁.

 

 

 

 

코코란 미술관에 걸린 Ground Swell (1939)

 

 

 

 

음...2008년 여름에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미술관에서 찍은 Night Hawk 가 그의 '상징'처럼 널리 알려진 작품인데, 그 때 사진 상태가 비참하다...제대로 찍지 못했다...

 

Cape Cod Morning 이라는 작품으로 그의 작품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다음회에...)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