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ism/Ashcan School2010. 1. 7. 02:52

 

The White Ballet (흰 발레) 1904

Oil on Canvas

Everett Shinn (1876-1953)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미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들 (The Eight 혹은 Ashcan School)중 한 사람인 Everett Shinn (이브릿 신: 1876-1953) 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제가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 갈때마다 지나치면서 눈길을 제대로 줘 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에 얼핏 보니까 '드가' 그림 같더라구요.  '드가 그림인가?' 생각하고 가서 들여다보면 엉뚱한 이름이 걸려 있는 겁니다.  그러면 '드가 흉내낸 그림이군...' 이러고 그냥 지나치고 마는거죠.  뭐 발레 그림을 드가만 그렸을까마는, 저의 짧은 지식으로는 발레 그림은 죄다 프랑스의 화가 드가 (Degas) 작품 같은거죠.  발레를 다른 사람이 그리면 드가를 모방한것 같다는 소리나 듣는거죠.  이래서, 뭔가 먼저 잡아서 시작한 사람이 이기는겁니다. 헤헤. (그런것 같죠?)  뭔가 소재를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한가지를 파들어가면,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이 되는거죠.  우리가 드가와 발레를 떼어놀수 없게 되는거죠.

 

아무튼 이 그림은 드가의 그림이 아니고 Everett Shinn 의 그림입니다.

 

만약에 제가 '미국미술을 공부하겠다'고 작정하고 차근차근 미국의 화가들을 찾아보는  취미생활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이 그림은 영원히 저의 무시를 당하고 지나갔을겁니다. (가짜 드가그림이라는 딱지를 안고).

 

 

 

 

Everett Shinn (1876-1953) 은 The Eight 화가들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고 하지요. 그리고 뭐 젊은나이에 잦은 이혼으로 '유명'해진 면도 있는것 같습니다. 프랑스를 여행하며 당시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고요.  제 안목으로는 '드가'의 소재를 빌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신문 잡지의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을 한 경력도 있습니다. (당시의 사실주의 화가들 대부분이 신문 잡지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생계를 해결하였으므로 짐작 할 만한 일입니다.)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 복도 전시장에 걸린 그림을 순서대로 보면

1. 왼쪽벽 - Henri,  맞은편 (오른쪽벽) - Everett Shinn

2. 왼쪽벽 - Rockwell Kent,  맞은편 (오른쪽) - Glackens

3. 왼쪽벽 - George Luks ....

 

이런 순서로 걸려 있는데요.  이곳에 The Eight 을 위시한 당시의 사실주의 화가들 작품이 차례대로 전시되었다고 할만하지요.   미술관에 전시물을 설치할때, 전시 기획자는 나름대로 어떤 '논리'를 가지고 그림을 설치했을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렇게 모아놓은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Everett Shinn 의 작품을 제가 자주 보지 못해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정리하려고 합니다.  Everett Shinn 에 대하여 기억할 만한 사항은

 1. The Eight 의 최연소 멤버였다는 점

 2. 따라서 다른 The Eight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뉴욕, 도시의 대중의 삶, 역동적인 장면을 잡아내어 그렸다는 것

 3. 유럽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이정도가 될것 같습니다.

 

다음에 그의 다른 작품을 '사냥'하면 페이지를 업데이트 하기로 하겠습니다.

 

2010년 1월 6일 RedFox

 

 

 

Backstage Scean (무대 뒤) 1900

Watercolor and Charcoal on Paper mounted on the Board (종이위에 수채와 목탄화)

2010년 1월 9일 델라웨어 미술관에서 촬영

 

 

1900년 작품이니까 Everett Shinn (1876-1953)이 스물네살 청년시절에 그린 그림입니다.  위에 소개한  발레 그림은 1904년 작품이고요.  두 작품 모두 그가 20대때 그린 것이군요.  두가지 작품의 공통점은,  모두 '극장' 풍경이라는 것이지요.  이를 통해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이브릿 신이 무대예술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극장 인테리어 작업도 했고,  나중에는 영화 감독도 했다고 합니다. 극장예술을 비롯, 예술의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화가였군요.

 

2010년 1월 18일 업데이트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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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료 추가했습니다.

    2010.01.18 23:50 [ ADDR : EDIT/ DEL : REPLY ]

Realism2010. 1. 1. 13:26

자화상 (1928)

목탄, 콘테, 연필, 종이

49.1 x 64.3 cm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2009년 12월 29일 촬영

 

 

 

미국 1930년대 지역주의 (Regionalism)의 대표적인 세명의 화가중의 하나인 존 스튜어트 커리 (John Steuart Curry 1897-1946)는 미 중서부 캔자스 주의 부유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그의 부모님들이 대학교육을 마치고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을 정도였으니까, 고학력의 부유한 집안이었음을 짐작해 볼수 있겠습니다. 그는 어릴때부터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며 미술 개인 교습을 받을수 있었고, 시카고 미술학교를 거쳐서, 펜실베니아의 제네바 컬리지에서도 미술 공부를 했습니다. 한때 그는 Boy's Life 를 위시한 잡지의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미술사를 들여다보면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한 화가들이 참 많아요. 사실주의 화가들은 대개 일러스트레이션을 생업의 수단으로 거쳐갔을 것으로 짐작 됩니다.)

 

당시의 화가 지망생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1926년에 파리로 건너가 일년간 유럽의 미술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는 특히 꾸르베와 도미에, 티티안과 루벤스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루벤스의 경우, 어릴때 그의 집에 루벤스의 그림 복제품이 장식되어 있어 그것을 보고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뉴욕과 커넥티컷에서 작품 활동을 하게 되는데, 1932년에는 아내 클라라가 사망합니다.  그 자신 역시 위스컨신 주립대에서 미술 교수로 재직하던 중 48세인 1946년에 심장마비로 요절을 하게 되는데요, 일찌기 부인을 잃고, 요절을 한 화가라서 그런지  그의 작품을 소장하는 미술관들이 많지 않군요. (웹에서 그의 작품들을 검색해보면 '아 참 좋다!'라고 감탄할 만한 그림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제가 가능하면 제 눈으로 본 작품만을 이야기하기로 정했기 때문에,...아쉽지만...음...)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미드웨스트의 농촌과 풍습, 그리고 가축들이 소재가 되었거나, 사회성 강한 주제, 반전 의식도 발견 됩니다. 중부에서 벌어진 흑인 학대나 린치에 대한 고발성 강한 작품들도 있고, 당시 중서부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를 했는데,  그래서, 오히려 그의 고향 캔자스나 다른 중서부 지방 사람들은 존 커리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가 그린 중서부의 삶의 모습이 어쩐지 자신들을 우스개로 만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지요. 가령, 캔자스에서 흑인 린치하는 것을 그려내면, 뉴욕의 관객들은 그 작품을 보면서 감탄을 하겠지만, 캔자스 사람들은 '우리들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타지 사람들에게 보여준다'고 괘씸하게 생각을 하겠지요.  그래서 존 커리는 최후까지도 고향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하며 살아가야 했다고 합니다. (그는 고향 캔자스가 아닌 위스콘신주에서 사망했어요.)

 

아이아스의 이중성

 

 

 

Ajax (1936-37) 아이아스

Oil on Canvas

122.5 x 92 cm

 

Ajax 라는 이 그림은 일견 평화로운 초원의 황소 한마리 그림처럼 보입니다. 저는 이 그림을 자주 지나치곤 했지만, 이 평화로운 그림이 왜 여기 걸려있는지, 왜 이 그림이 박물관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제게는 그냥 너무나 평화로워서 개성없고 지루한 그림처럼 보였으니까요.  그래서 늘 '무심코' 지나치다가 하필 이 그림의 작가가 John Stuart Curry 라서 (마침 그의 작품세계를 공부하던 중이라서) 관심을 갖고 들여다 보게 되었지요.  (모르면 봐도 모릅니다. 관심이 생겨서 들여다보면 뭔가 보이기 시작하는거죠).

 

그런데 그림 옆에 붙어있는 작품 설명을 보니, 이 그림은 너무나 평화로워서 지루한 그런 상황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그림이 특별한 이유는 그림에 달린 '제목'과  그림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 때문입니다.

 

제목 Ajaz (아이아스)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입니다. 트로이와 전쟁을 벌이던 그리스 장군중에 아이아스라는 장수가 있었는데, 그리스의 명장 아킬레스가 사망하자 그의 유품을 사이에 두고 오딧세우스와 아이아스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결국 아킬레스의 유품은 오딧세우스에게 넘어가고, 아이아스는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미쳐버려서 들판의 양떼를 오딧세우스와 그 부하들이라고 생각하고 몰살을 시켜버립니다.  그리고는 정신이 돌아온후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자살을 하고 말지요. 

 

그러면 '아이아스' 이야기와 이 한가로운 초원의 황소 한마리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요? 이 소가 아이아스란 말인가요?  그래서 뭐?  궁금증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그런데요, 미술관 복도에 있는 이 그림 바로 옆에 아래의 그림이 나란히 걸려있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Dust Bowl (흙먼지 폭풍)입니다. 1930년대  미국은 '대공황'이라는 경제적인 난국을 겪고 있었는데, 미국의 중부에서는 엎친데 겹친 격으로 평원지대를 뒤엎는 흙먼지 바람과 한파가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날이 건조해지니 흙먼지가 폭풍처럼 평원을 뒤덮고, 날은 더욱 가물어지고. 푸르던 평야가 하루 아침에 흙먼지로 뒤덮이며 사막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고. 1930년대에 이런 현상이 여러차례 중서부를 강타하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Dust Bowl 1933

Oil on Canvas

Alexandere Hogue

 

 

바로 이렇게 피폐해진 중서부 평야지대의 삶의 모습을 이 한장의 그림이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경제도 안좋고, 흙먼지 바람으로 농작물은 말라죽고, 죽어라죽어라 하는거죠. 미국인들에게 1930년대는 도시나 농촌이나 참혹했던것 같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저위의 '아이아스' 그림의 의미를 이해할수 있게 됩니다. 아이아스는 (1936-7)년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중서부 평원지대가 '사막'처럼 변화하는 것을 지켜본 화가는 신화속의 미친영웅 '아이아스'를 떠올렸나봅니다. 아이아스는 영웅이기도 했고, 미쳐 날뛰며 자기편 영웅들을 죽이려다가 가축들을 몰살시킨 인물입니다.  화가에게 미드웨스트의 평원은 평화롭고 순한 한마리 황소처럼 사람들에게 곡물과 풍요를 선사하기도 하지만, 그 소가 미쳐날뛰면 주위 모든이들을 해치게 됩니다. 흙먼지로 뒤덮여 사막처럼 변해버린 평원은 미쳐 날뛰는 아이아스의 모습이기도 하지요.

 

그러면 아이아스가 미쳐날뛰지 않게 사전에 달랠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작가는 아이아스의 비유를 들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여기서 저는 또다른 질문을 해보고 싶습니다. 똑같은 그림이 1930년대가 아닌 2000년대에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리는...저 순한 소를 화나게 하면 안되지요. 소가 평화롭게 살수 있도록 하는것이 우리 자신을 돕는 길일 것입니다. 이것은 제 생각이고요, 각자 자신의 해답을 찾기를 기대해봅니다.

 

 

그런데 토마스 하트 벤튼의 페이지에서 (http://americanart.textcube.com/252/trackback/ ) 아킬로스와 헤라클레스의 신화를 바탕으로 한 벤튼의 벽화를 소개한 바 있지요.  중부에 30년대에 강타한 흙먼지와 한발 사태를 보면 미조리강의 개발의 역사적 의미를 짐작할수 있게 됩니다. 반복적인 흙먼지와 가뭄으로 황폐해져가는 평원을 살리기 위한 방법이었던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보면 1937년에 그려진 커리의 Ajax에 등장했던 소가, 십년후 벤튼의 그림에서 '강의신'으로 새롭게 그려진것 같기도 하지요?  :)  음, 이 그림들이 이렇게도 연결이 되는군요... 

 

 

 

 

존 브라운은 광인인가 의인인가?

 

 

아래 그림은 원화가 아니고요, 제가 하퍼스 페리에 갔을때 존 브라운 기념관 입구에 설치된 실제 벽화 크기의 카피본을 사진 촬영한 것입니다. 제목은 The Tragic Prelude (비극적 서곡).  이 그림의 원본은 캔자스 Statehouse의 벽화라고 합니다. 벽화와 똑같은 크기의 카피본이 존 브라운 기념관에 설치되어 있고요.

 

 

존 브라운은 미국 남북전쟁 이전에 노예해방을 부르짖으며 정부군과 전쟁을 벌였던 사나이 입니다. 백인 입니다. 그는 종교적 신념에 불타서 흑인 노예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던 것인데요, 결국 하퍼스 페리에서 붙잡혀 사형에 처해지고 맙니다. 당시의 지식인들, 가령 콩코드 출신의 Emerson 이나 Thoreau 와 같은 초절주의 철학자들은 존 브라운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는데요, 미국 역사에서 그에대한 평가는 '광인'과 '의인'사이에서 갈팡질팡 합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노예해방을 위해 노력한 것은 가상하나, 그 방법이 적법하지 않았으므로 마냥 영웅으로 치켜주기가 위험한 것이지요.  이건 뭐 무장봉기, 폭동과도 같았으므로 이를 '영웅시'할 경우 국가의 법체계가 위협을 받게 되겠지요.  존 브라운에 대해서 제가 상세히 공부하지 않았으므로 더이상 논할경우 제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커지므로 존 브라운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접겠습니다.

 

존 브라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어떠하건, 존 스튜어트 커리에게 존 브라운은 영웅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손에 성경을, 한손에 장총을 들고 서서 호령하는 존 브라운의 모습은 마치 제가 어릴때 본 영화 '십계'속의 '모세' 할아버지를 연상케 합니다. :)  존 브라운이 혁명적으로 노예해방을 진두지휘하며 돌아다닌 구역이 캔자스, 미소리, 버지니아주였던 고로 캔자스주에서 그를 기념하는 벽화 작업을 했던 모양입니다.

 

 

 

The Tragic Prelude (1938-1940)

Kansas Statehouse 벽화

실제 벽화는 아니고,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하퍼스 페리에 있는 존 브라운 기념관 벽에 있던 복제 사진을 촬영 (2009년 11월 15일)

참고: http://americanart.textcube.com/176

 

 

 

 

 

 

 

 

반전인가 전쟁 옹호인가?

 

 

 

Our Good Earth (1942) 우리들의 위대한 대지

Water Color on Illustration Board

27.9 x 34 cm

2009년 12월 2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2차 대전 당시 '전쟁기금 모금'을 위한 홍보용 그림을 주문 받았을때 우리들의 커리가 그린 전쟁 홍보를 위한 그림이었다고 합니다. 한 농부가 밀밭 가운데에 우뚝 서있고, 한손에는 밀대를 한웅큼 쥐고 있고, 그의 곁에 소녀와 소년이 있습니다. 그의 왼손이 소년의 오른손을 꼭 쥐고 있군요.  농사를 짓는 일도 전쟁을 돕는데 아주 중요하다는 메시지라고 하는데요.  제가 스미소니안에서 발견한 이 작은 그림은 "Our Good Earth - Keep it Ours (우리들의 위대한 대지 - 우리의 땅을 지키자!)" 이런 선전문구를 새긴 포스터의 밑그림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 그림이 전쟁 지지를 위한 그림이었는지,  우리가 정말 해야 할 것은 전쟁이 아니라 '농사짓는일'이라는 메시지인지 헛갈리는 구석도 있습니다. 왜 제가 헛갈려하는가하면 여러 화집에서 발견한 또다른 그림 때문인데요.

 

Parade to War (1938)

 

미술사책을 들여다보면 존 스튜어트 커리와 관련된 장에서 주로 소개 되는 작품이 이 그림 입니다. 출전 행진 (Parade to War). 저는 실재 그림을 본 바 없고, 화집에서 본 것이 전부인데요. 전쟁터로 나가기 위한 군사들의 행진 장면입니다. 구경하는 아이들은 신이나서 달음질치는데, 흰 테이프들의휘날리는 가운데 줄을 서서 행진하는 군인들은 모두 유령같아 보입니다. 해골들이 옷을 입고 행진하는것처럼 보입니다.  그림 왼편의 어느 여인이 기도하듯 입을 가린채 걸어가는데, 마치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절망하는 어머니 같습니다.  이 그림은 유령의 도시 풍경 같기도 합니다. 1938년에 그려진 그림이라는데, 이 당시에 한국에서도 식민지땅의 조선인들이 조선의 청년들과 장년 남성들이 학도병으로, 징용으로 이렇게 끌려가 죽음을 맞이 했을 것입니다.  조선에서는 여성들도 정신대로 끌려갔지요.

 

이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반전' 그림입니다. 1938년에 이런 반전 메시지가 분명한 그림을 그린 존 커리가, 1942년에 전쟁 홍보용 그림을 위탁 받았을때, 그려 낸 그림이 '우리들의 위대한 대지' 그림입니다. 존 커리가 정말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 전쟁 홍보였을까요?  ...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존 스튜어트 커리는

1. 미드웨스트 농촌 농민, 서민의 풍경을 그렸으며

2. 역사적 사실을 주제로 한 그림들을 그렸고

3. 공공벽화작업도 활발히 하였으며

4. 신화와 역사의 만남을 시도했고

5. 일러스트레이션, 벽화, 일반 회화등 다양한 장르의 활동을 했음을 짐작할만하며

6. 반전  사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존 스튜어트 커리, 이 화가는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매력적인 작품들을 많이 갖고 있는데요, 제가 직접 눈으로 본 작품이 많지 않아 대략 이쯤서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상으로 미국의 지역주의 3대 화가로 알려진 Grant Wood, Thomas Hart Benton 그리고 John Steuart Curry 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다음엔 어디로 가나...과거로 갈까요 아니면 미래로 갈까요... 랄랄~

 

 

 

2009년 12월 31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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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ism2010. 1. 1. 02:14

미국의 1930년대 지역주의 (Regionalism) 3대 화가중 한명으로 알려진 토마스 하트 벤튼 (Thomas Hart Benton 1889-1971)은  Grant Wood 와 John Curry 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미드웨스트 (미조리 주)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와 하원의원, 숙부가 상원의원이었다니 유복한 정치인 집안의 귀공자였던 것 같습니다.  1907년 시카고 미술학교 (Chicago Institute of Art)에서 미술 수업을 한 후에 1909년 프랑스로 건너가 줄리엥 아카데미에서 미술 수업을 계속합니다.  미술 수업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소속으로 근무를 하고 1920년에 뉴욕으로 돌아가 미술 활동을 펼치면서, 당시에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하던 현대 추상미술을 등진채 사실주의 미술을 펼쳐 나갑니다.  설에 의하면 초기에 그는 추상미술 작업을 했지만, 도통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후에 그는 고향인 미조리주로 돌아가 신화와 사실주의가 만나는 미술 작업을 계속하게 됩니다.

 

자화상 (1927)

 

이 자화상은 벤튼이 아내와 자신을 직접 그린것입니다. 매사추세츠주의 South Beach 에 있는 작은 섬이었는데 이 한적한 곳에서 미술작업을 하면서 그가 잠시 관심을 보였던 현대 추상예술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사실주의적 작업으로 완전히 옮겨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선이 단순하면서 그만큼 '힘'이 느껴지지요. (남자가 좀,뭐랄까, 마초적인 인상을 주지만...뭐...내 남자도 아닌데, 멋대로 살게 내버려두지요..귀여운 마초랄까...) 그가 뉴욕을 기반으로 20여년간 활동하는 동안 그는 매년 여름마다 이 Matha's Vineyard 라는 휴양지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자화상 (아내 리타와 함께) 1922

National Portrait Gallery, Smithsonian 스미소니안 국립 초상화 박물관

(스미소니안 국립 초상화 박물관은 스미소니안 국립 미국미술 박물관과 함께 있습니다.

동일한 장소의 일부를 국립미술관으로 일부를 초상화 박물관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Chillmark and Matha's Vineyard (마사의포도원섬과 칠마크 마을)

 

 

1920년부터 1975년 그가 사망할때까지, 벤튼과 그의 아내는 여름이면 매사추세츠 남쪽의 Matha's Vineyard (마사의 포도원)이라는 이름의 섬에 있는 Chillmark (칠마크) 마을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아래의 그림 두장은 바로 그곳의 사람들과 풍경을 그린 것입니다.

 

People of Chilmark (Figure Composition) 칠마크 사람들 (인물구성) 1920

Oil on Canvas

2009년 12월 스미소니안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Matha's Vineyard (마사의 포도원) c.1925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디씨의 코코란 갤러리에서 촬영

 

 

File:Martha's Vineyard map.png

http://en.wikipedia.org/wiki/File:Martha%27s_Vineyard_map.png

 

 

 

농장 길

 

 

그는 Art Student League of New York 와 Kansas City Art Institute 등지에서 미술 교육을 하였습니다. 그가 키운 제자중에 훗날 스승을 능가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이룩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흩뿌리기'의 대가 잭슨 폴락 (Jackson Pollock) 입니다.  잭슨 폴락의 초기 작품중에 토마스 밴튼의 그림과 분위기가 비슷한 것이 발견됩니다.  토마스 벤튼이 유럽에서 현대 추상미술 사조의 영향을 입고 와서 추상화 작업을 하다가 집어치고 사실주의 작품들로 그의 그림을 완성시켰다면,  잭슨 폴락은 그러한 '스승'의 영향아래 사실주의적 미술로 시작을 하여 '어마어마하고 혼미하기까지 한' 자신만의 세상을 완성시킨후 지구를 떠났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상을 돌고 도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늘아래 새로운것은 없지만, 또한, 하늘아래 반복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늘 기존의 무엇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이 태어나고, 죽고, 그 바탕위에 또 새로운것이 태어나는 것이지요.

 

 

 

 

 

 

Plantation Road  (농장 길) 1944-45

Oil and Tempera on Canvas mounted on Plywood

2009년 11월 6일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잭슨 폴락의 그림

 

 

밀밭: 황금의 이상사회

 

 

 

Wheat (밀) 1967

53.3 x 50.8 cm (가로세로)

Oil on Wood

 

 

이 '밀밭' 작품이 걸려있는 전시장을 보여드리고 싶군요.  (아래의 사진에서) 폴락의 대형 벽화가 걸려있는 전시장, 그 벽화 왼편 으로 구석에 아주 자그마한 그림 하나가 걸려있지요. 그러니까 벽화와 창문 사이에 걸려있는 껌딱지 같이 작은 그림이요. 그것이 바로 이 '밀밭' 그림입니다. 그가 1971년에 사망했으니까, 그가 78세에 그린, 거의 말기의 작품이라고 할만한데요.  한세상 전투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취하여 공공미술적 벽화 작업도 하고, 뚜렷한 자기 주관을 펼치면서 살았던, 지역주의 화가의 기수로 알려진 이 화가가 '노년'이 되어, 78세의 나이에 그린 그림임을 감안하고 보시면 그림에서 뭔가 새로운 의미를 찾아 낼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림 하단에 보시면, (시골에서 농사지은분들 이 그림 보면 바로 답이 나옵니다. 특히, 벼 베고 그러신 분들), 낫으로 베어낸 밀의 밑둥이 고르게 남아있습니다. 기계로 베었는지 높이가 일정합니다. 사람이 낫으로 베면 밑둥 높이가 들쭉날쭉 하지요. 그리고 그 밑둥 사이로 밀싹이 새로 올라오는 것이 보입니다. 한 세대가 가면 또 한세대가 솟아 나오지요.

 

밀대를 보겠습니다. 밀은 한웅큼씩 무리를 지어 고르게 자라났습니다. 간혹 부러져 기울어진 밀이 보이기도 합니다만, 조금씩 무리를 지어서 비슷한 크기로 자라고 비슷하게 열매를 맺었습니다. 밀대 너머로 끝없이 반복되는 밀의 고랑이 보입니다.  이 그림은 매우 사실적으로,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그려졌으면서도, 사실 너머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줍니다.

 

항웅큼씩 모여서, 서로 의자하여 서 있는 밀들은 그 자체로 인간 사회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크거나 작거나간에 서로 무리를 지어서 살아갑니다. 우리 가족 이웃에 이웃의 가족이 있고, 우리 마을 이웃에 이웃마을이 있으며, 우리학교 이웃에 이웃학교가 있고, 우리 나라 이웃에 이웃나라가 있습니다.  무리무리는 서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 의지하고 서 있지요. 키도 비슷하고 생육조건도 비슷하고. 이것이 벤튼이 이상화했던 사회주의의 풍경이었을것 같습니다. 서로 평등하게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우면서 사는 인간사회. 한세대가 사라지면 새로운 세대가 다시 희망처럼 자라나는 사회. 그리고 끝없이 이어질 인간의 역사. 혹은 생명의 역사. 노년의 벤튼이 꿈꾼 인간 사회가 이런 황금 밀밭의 풍경은 아니었을지...

 

이 그림을 보자니, 엘리노어 파전의 '보리와 임금님'이라는 동화가 생각납니다. 우리 나라에는 '보리와 임금님'으로 번역 소개가 되었지만, 사실 원작에서는 밀밭 이었지요... (http://www.gulnara.net/main.php?pcd=6.7.&_vpg=view&uid=95) 제가 참 좋아하던 동화였는데, 지금도 이 동화를 찾아서 읽으면 공연히 눈물이 납니다.  어릴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사람을 잘 안변합니다. 왜 눈물이 나냐하면, 너무 아름다워서. 밀밭은, 여우가 어린왕자와 함께 있을때도 나오지요. 앞으로 황금물결치는 밀밭을 보면 네 머리카락이 생각날거라고 여우가 종알거지요.  가수 문정선이 노래한 옛날 노래가 있습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이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 (이야기가 걷잡을수 없이 딴길로 새고 있습니다...)

 

한세상 씩씩하고 전투적으로 살아낸 노 화가가 그린 말기의 작품이 너무나도 절제되어있고 사색적이라서, 이것이 인생을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게 다가오는 깨달음의 순간이었던 것일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황금 밀밭같이 풍요롭고 평등한, 인간의 세상. 저도 꿈꿔봅니다. 밀알은 각자 개성껏, 그러나 서로 의자하여, 미래의 싹을 간직한채, 영원히 살아남을겁니다. 하나의 밀알이 썩지 아니하면, 썩으면... 아아 성서적 은유인지도 모르겠군요.

 

이상으로 벤튼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다음은 존 커리를 기대해주시길.

 

2009년 12월 31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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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1.03 11:48 [ ADDR : EDIT/ DEL : REPLY ]

Realism2010. 1. 1. 00:50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 박물관 2층 전시실. Thomas Hart Benton (1889-1971)의 벽화가 걸려 있는 곳입니다 (오른쪽 벽).  2009년의 마지막 날, 그리고 2010년을 시작하는 이 시간을 헤라클레스와 아킬로스의 신화 이야기를 하면서 보내도 좋을 것 같아서 선정해 봤습니다.  길이가 7미터 가까이 되고 그림의 높이는 대략 160 센티 (여성들 보통 키 정도 되겠군요) 되는 그림입니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밝고, 건강하고 힘찬 벽화인데요.

 

이 그림의 제목은 '헤라클레스'와 '애킬로스'입니다. 캔자스 시티의 한 백화점을 장식한 벽화였다고 합니다.

 

 

 

Archelous and Hercules  (1947)

671x159.6 cm (길이 6.7 미터x 높이 1.6 미터)

Tempera and Oil on Canvas mounted on Plywood.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그림의 중심이 되는 것은 커다란 황소의 뿔을 쥐려고 대적하는 사나이. 황소는 정확히 적을 노려보고 있는데 사나이는 등을 보이고 있어 표정을 알 수 없으나, 그의 팔과 등의 근육이 이 남자의 표정을 읽게 해 줍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천하 장사로 알려져 있지요. 아킬로스는 '강'의 신이라고 합니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강의신 아에킬로스가 헤라클레스와 싸우던 장면을 이야기 해 주는데요, 헤라클레스와 씨름하다가 뱀으로 변하기도 하고, 황소로 변하기도 했는데 도무지 헤라클레스를 이기지 못했다고 술회 합니다. 헤라클레스가 '강의 신'과 대적하여 이겼다는 신화는 '자연'과 인간이 대적하여 인간이 자연을 '극복'한다는 해석이 가능하게 해주지요 (참고로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신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영웅입니다.)

 

신화에서는 헤라클레스가 황소로 변한 강의 신 아킬로스의 한쪽 뿔을 뽑아서 상대를 제압했다고 합니다. 그 뿔은 서양 문화에서 '풍요'의 상징이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이 있지만, 쇠뿔 자체는 큰 상징적 의미가 없지요. 그리스 신화에서 소로 둔갑한 강의 신의 뿔을 뽑아냈다는 말은 강이 제공해주는 풍요를 얻어 냈다는 상징을 갖게 됩니다.)

 

   *  참고로, 영문 표현중에 Take the bull by the horns 가 있지요. 쇠 뿔을  단단히 잡아라. 소와 씨름하려면 소와 정면으로 서서 소의 두 뿔을 단단히 잡아야 하죠. 결국 정면승부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서양에서도 '소'가 그리스 신화때부터 존재하던 짐승이었으므로 소와 관련된 우화나 속담이 많군요. (영어선생 제버릇 개 못줍니다. 꼭 티를 내죠 ^^)

 

그렇다면 이 그림에서 강의신 아킬로스는 황소이고, 이 황소와 대적하는 사람들 (여러사람이 그 황소를 잡기 위해 그림속에 등장하지요)이 헤라클레스가 되겠는데요, 벤튼은 이 그림으로 무엇을 전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미조리주에서 공공건설의 일환으로 미주리강 개발 사업이 진행된 적이 있습니다. 평원지대에 가뭄이 들어 흙먼지가 날리면 농작물들이 말라죽고 땅이 불모지가 되는가하면 반대로 홍수의 피해를 겪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군부대가 동원되어 댐도 만들고 수로도 만들고 둑도 쌓는 등의 강 개발이 사회주의사상을 가졌었고, 공공미술 벽화작업이 활발했던 벤튼에게 영감을 주었던것 같습니다.  신화속에서처럼 인간이 강을  길들여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했겠지요. 

 

 

 

 

 

저 옆에 여성 두명과 소년 하나가 앉아있거나 서 있는 흰 구조물이 보이시지요?  뿔이죠. 쇠뿔.  그 쇠뿔에서 과일과 곡식이 흘러 넘치고 있지요. 강을 잘 운영할때 인간에게 가져다 주는 풍요이지요.  그러고보면 여성이 들고 있는 빨간마후라도 뿔 모양이고요, 소년이 들고 있는 나발도 뿔 모양입니다.  (또 여기서 상상력을 발휘해보니, 여성신체의 여성기관중에 '나팔관'이라는 기관도 있지요. 그 나팔관도 뿔 모양이지요...여성의 돌출된 두개의 유방도 두개의 돌출된 뿔처럼 보입니다. 이쯤되면 세상 만물이 뿔처럼 보인다는 환상에 사로잡히게 되지요...하하하....)

 

 

 

 

 

소와 씨름하는 사나이들이 있는가하면,  한쪽에서는 수확을 하는 농민, 멀리 농장에서 '영농기계화'의 상징같은 농기계도 보입니다. 강을 잘 다스렸을때 우리에게 다가올 풍요를 이런 식으로 다양하게 그려냈습니다. 그러고보면, 사나이가 황소와 씨름하는 것을 중심으로, 그림의 왼편은 '황소와의 씨름'에, 그림의 오른편은 '다가올 풍요'가 그려진 것 같습니다.

 

 

 

 

자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저와 함께 시선을 이동시키는 겁니다.) 여기 그려진 사과를 보십시오. 사과며 다른 과일의 형태가 어떤가요?  사과가 오목볼록거울에 비쳐진듯 꾸불구불 하지요? 구불구불~~ 처음부터 사나이들의 등근육이며 모든것이 구불텅구불텅 구불구불 휘어졌다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심지어 사과마저 어디론가 빨려들어갈듯 휘어져 있습니다.  왜 이 그림속의 대상들은 빨려들어갈듯 휘어져 있는것처럼 보일까요?  왜 벤튼은 대상을 이런식으로 휘어지게 그렸을까요?

 

 

 

 

왜 모든것이 휘어져보이나?

 

벤튼은 살아있는 것들이 에너지가 넘쳐서 움직인다고 믿었던 걸까요? 사나이들의 등근육이나 소의 근육처럼 가시적인 '삶의 근육'뿐 아니라, '생의 에너지'가 갖는 움직임을 정체를 파악했던 것일까요?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근육'을 부여한 것일까요?  아, 마치 숨은그림 찾기 하듯, 뿔처럼 보이는 당근 무더기가 보이는군요.

 

 

 

소의 눈이 보이십니까? Bull's eye 이지요. Bull's eys 라고 하면, '과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소의눈을 연상시키는 것들이  소 곁에 또 있군요. 나무 둥치의 둥근 나이테도 소의눈을 연상시키고, 남자가 벗어놓은 모자역시 뿔을 닮은 소의 눈처럼 보입니다.

 

그림 전체에 흐르는 휘어짐, 구부러짐은 삶에 흐르는 에너지의 흐름같이 보이기도 하고, 그대로 휘어저 굽이쳐 흐르는 생명의 상징인 강물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그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씨름이 있습니다.

 

지난 2009년은 제게는 죽음의 강을 건너듯 아주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기쁨도 컸고, 슬픔도 컸으며, 과장된 절망감이나 우울감사이로도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주었습니다. 다가오는 한해동안 제가 해결해야할 과제들이 줄을 서있고, 그것들을 하나 하나 해결하다보면 한 해가 또 지나갈 것 같습니다.  소와 씨름하듯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소와 씨름할 더 많은 시간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생의 에너지가 남아있는 그 날까지 씨름은 계속 될것입니다. 

 

쇠뿔을 거머쥐고 '돌아온 헤라클레스'처럼 환하게 웃는 그런 날이 올테니까요.

 

복된 2010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p.s. 헤라클레스는 소의 뿔을 하나만 뽑았습니다. 두개 다 뽑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얻고 하나는 양보하는 것이지요. 서로 화합하는 방법입니다.  불핀치의 그리스 신화에서 뿔을 뽑힌 강의신 아에킬로스는 헤라클레스를 원망하기보다는 그가 얼마나 힘센 영웅인지 이야기를 합니다.  이들은 서로 반목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참고: http://classiclit.about.com/library/bl-etexts/tbulfinch/bl-tbulfinch-age-23-achelous.htm  불핀치의 신화중 아켈로스와 헤라클레스

 

 

2009년 12월 31일 RedFox

 

 

 

 

 

 

2010년 1월 31일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에서 촬영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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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ism2009. 12. 29. 11:12

아이오와에서 나고 자란 화가 Grant Wood (1891-1942)는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토마스 벤튼, 존 커리와 더불어 지역주의의 중심적인 인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22세부터 25세까지 (1913-1916) 일리노이주의 시카고 미술 학교 (Art Institute of Chicago)에서 야간 미술 수업을 받았는데, 그 이전까지는 목각, 금속, 보석 공예등 각종 공예시술을 연마하였습니다.  미술 수업을 마친후 1920년대에 그는 파리, 이탈리아, 독일등 유럽을 네차례 여행하였습니다. 그는 특히나 뮌헨에서 당시 유행하던 신 사실주의적 경향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또한 고대 신화나 성경의 이야기들을 당대의 세팅으로 재 해석하는 풍속화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터전인 아이오와로 돌아온 후에 그는 그의 그림속에 이를 펼치게 됩니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당시에 미국의 주류 화가들이 뉴욕에 모여들어 활동을 하거나 혹은 유럽으로 미술 수업을 하러 떠났다가 유럽에 정착을 하거나, 혹은 유럽에서 돌아와 뉴욕으로 활동지를 옮겼던데 비해서, 그랜트 우드는 그의 터전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한 유럽에서 서서히 활발해져가던 추상미술 사조를 거부하고 사실주의적 기법을 고집했다는 것입니다.

 

 

 

 

 

The Midnight Ride of Paul Revere (폴 레버의 한밤의 질주) 1931

76.2 x 101.6 cm

Oil on Masonite

2008년 7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촬영 (똑딱이 시절의 사진 -.-)

 

 

 

 

우드가 미술가로서 처음으로 대중들의 시선을 끌었던 계기가 된 것은 1930년에 그의 American Gothic 이 시카고 미술학교 주최 경쟁에서 메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시카고 미술학교의 소장품으로 팔려가는 영예까지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1931년에 "The Ride of Paul Revere (폴 레버의 한밤의 질주)"를 완성시킵니다.  폴 레버는 미국 독립사에 이름을 남긴 영웅인데요, 1775년 영국군이 공격 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밤새 말을 달렸다고 합니다.

 

 

둥글게 휘어지고 달빛이 비치는듯 (비현실적으로) 환한 길위를, 교회 앞을, 말을 탄 사람이 가고 있지요. 말을 탄 사람의 자세를 보면 그는 오른쪽에서 달려와 왼쪽을 향해 가고 있는듯 합니다. 화면에는 그가 여태까지 달려왔던 그 먼길이 구불구불 보이지요.  그리고 화면 왼쪽으로도 역시 구불구불한, 그가 가야할 먼길이 이어져 있습니다.  역시나 (앞서의 페이지에서 풍경화를 이야기 할때 언급했던대로) 언덕이나 나무는 둥글둥글하고, 사람이 지은 예배당이나 집들은 각이 지고 딱딱해 보입니다.  우리는 마치 레고로 마을 하나를 만들어서 바닥에 놓고 위에서 그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으로 이 풍경화를 보게 됩니다. 역시나 우리는 마치 전능한 관찰자처럼 공중 어딘가에서 이 풍경을 보는 입장이 되지요.

 

그런데요, 여태까지 온 길과, 앞으로 가야할 길을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랜트 우드가 즐겨 그렸던 들판 풍경과 패턴이 일치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랜트 우드의 들판을 보면 아주 작게 보이는 사람이 끝도 안보이는 평원을 느릿느릿 갈아엎는 장면이나 이와 유사한 장면이 종종 등장 합니다.  여태까지 살아온 시간과, 그리고 앞으로 살아나가야 하는 시간. 여태까지 흘린 땀과, 앞으로 흘려야 할 땀.  "저걸 언제나 다 매나?" 이런 한숨이 나올법도 한데, 그랜트 우드의 그림에서는 이런 '한숨'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그림에서도, 우리는 말을 타고 달리는 사나이의 얼굴도 분간할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가 밤새 잘 달려낼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구요? 그의 앞에 펼쳐져있는 저 구불구불한 길을 보십시오. 저 둥글게 이어지는 길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위험'이나 '죽음'따위를 근심할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그의 앞에 '죽음'이 기다린다 하여도 기수는 태평하게, 나직하게, 느릿느릿 노래를 부르며 그 죽음을 맞이 할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무엇에서 그런 느낌을 받나요?  구불구불한 저 길에서요. 구불구불 흐르는 개울과 구불구불한 저 언덕이 그런 노래를 불러주는 것 같습니다.

 

그의 길을 환하게 비쳐주는 것은 하늘의 달일지도 모르고요, 혹은 그의 안녕을 바라는, 그를 응원하는 우리들의 시선일지도 모르고요, 그랜트 우드 자신이 그의 영웅 폴 레버에게 보내는 빛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이 그림은 사실주의적이면서도 꽤나 몽환적이죠.  사실주의와 '신화적 신비'가 만나면 이런 그림이 탄생하겠지요.

 

 

 

아래 작품은 그랜트 우드가 작업한 Sinclair Lewis 의 Main Street 라는 작품의 일러스트레이션 입니다.  마을 공동 우물인 펌프가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고, 그 펌프로 물을 뜨러 오간 사람들의 발자욱이 만든 길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가만보면 눈위에 난 발자국도 있는데요. 어린아이의 발자욱일까요 아니면 강아지의 발자욱일까요? 이 장면을 보면 옛날에 제가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때,  네가구가 살던 무허가 판잣집의 가장 작은 방에서 우리집 여섯식구가 살았는데, 저녁이 되면 그 집에 살던 네가구의 주부들이 그 손바닥만한 마당의 가운데에 있던 수돗가에 나와서 서로 코를 맞대고 쌀을 씻고, 채소를 씻고 그랬어요. 겨울에는 그 수돗가가 수챗물로 꽝꽝 얼었는데, 그 꽝꽝언 얼음판 위를 지나 '변소'에 가야 했지요. 어린 마음에 변소도 무섭고, 변소에 가는 길도 무섭고, 변소에서 나와서 미끄러 떨어질까봐 그것도 무서웠고, 여러모로 심난했었지요. 이 그림을 보고 있자니 하필 그 시절이 떠오르고 마는군요.

 

 

 

Village Slums 1937

Charcoal, Pencil and Chalk on Paperboard (종이판에 목탄, 연필, 분필)

2009년9월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설에 의하면 그랜트 우드는 이 매이슨 교회에 다녔다고도 하고, 동성애자였다고 소개하는 미술사책도 있군요. 이 메이슨은 미국에서는 꽤나 애국적인 단체로 알려져 있지요. 벤자민 프랭클린도 소속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뭐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이 조직과 관계가 있다는 '설'도 돌고 그러지요. 저는 이 메이슨 단체의 정체성을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전에 살던 곳 가까이에도 온통 하얗게 칠해진 메이슨 단체 건물이 있었는데, 도무지 뭘 하는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인지 메이슨 관련, 소설같은 황당한 이야기들도 돌아다니곤 하지요. (프리메이슨은, 제가 전에도 자료를 찾아보곤 했는데, 도대체 정체를 잘 모르겠어요. 제가 좀더 공부를 해서 내용을 보충하기로 하지요. 누가 잘 아시면 가르쳐주세요. ^^). 아래의 그림은 그 메이슨 교회에 모여서 사중창을 부르는 남자들 이군요.

 

 

Shrine Quartet 1939

Lithograph

2009년 9월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촬영

 

 

아, 그랜트 우드가 왜  농부나 들판을 그릴때, 조망하는 듯한, 내려다보는 듯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그림을 그렸을까...지금 생각해보니, 농업에 대한 그의 경험이 '피상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랜트 우드는 분명 농부의 아들로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나이 열살에 농부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어머니와 형제들이 아이오와의 Cedar Rapids 라는 곳으로 이주를 하는데 그때부터 그랜트 우드는 농업하고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대요.  그러니까 어린시절 열살까지 시골에서 성장한 것이 전부이고, 그가 실제로 농사를 지은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 졸업할때까지 밭에서 일하고,뭐 허드레 농사일을 해봐서 아는데요.  정말 농사일을 한 사람이 농사장면을 그릴때는 그것이 꽤 현실적이지요. (아, 우리 엄마의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서 올려보고 싶군요.) 정말 농사를 생활화한 사람이 농사 그림을 그릴때는 주변 환경을 훨씬 구체적으로 그립니다. 풀잎, 흙, 풍경. 호미들고 김을 매다 올려다보는 하늘, 마을. 이런 시각으로 화면이 채워지지요.  그런데, 농사를 직접 짓지 않고, 남이 농사짓는것을 '구경'만 하는 사람은 그렇게 '구경꾼'의 입장에서 농사 풍경을 그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랜트 우드의 풍경은 그래서 대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각도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농사를 짓지 않는 그의 입장이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을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미술 비평에서 이런 논의까지는 아직 안 나왔겠죠? 제가 짧게라도 써서 발표를 해야 하는게 아닐까요?  헤헤헤.)

 

 

평생 그의 미술 활동의 본거지인 아이오와를 지켰던 그랜트 우드는 그의 집에서 간암으로 51세의 젊은 나이에 이승을 떠납니다. 영원속으로 간 것이지요.  그리고 그의 '우화'와도 같은 '신화'와도 같은 그림들이 우리곁에 남아있습니다.

 

이상으로 미국의 지역주의의 대표라 할만한 그랜트 우드 페이지를 마치겠습니다.

 

redfox 2009 년 12월 28일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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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는 그림을 보고 있자니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듭니다.
    멍~

    2009.12.29 15:03 [ ADDR : EDIT/ DEL : REPLY ]
    • 예, 좀, 사람을 혼미하게 하는 구석이 있지요. :)

      2009.12.30 07:35 [ ADDR : EDIT/ DEL ]
  2. 그랜드 우드의 그림과 소개 잘 봤습니다. 구도가 참 좋네요. 표현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명쾌하구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각(eye level)으로 표현되는 이야기임에도 현실적인 느낌과 비현실적인 느낌이 공존한다는 게 참 재밌습니다.

    아마도 eye level임에도 실제 피사체와 화가와의 거리는 훨씬 뒤에 있거나 앞에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거리를 느낄 수 없게 하는 구도때문에 그렇지 않나 싶기도 하네요.

    Red Fox님 어머님의 그림이 보고 싶어지네요. ^^

    2009.12.29 15:37 [ ADDR : EDIT/ DEL : REPLY ]
    • 극사실주의적인 묘사를 통해 신화적 신비감을 표현하는 것이 그랜트 우드가 추구한 표현법입니다. 두가지가 상충하는 개념인데, 그의 그림에서는 잘 어우러져 보이지요.

      2009.12.30 07:36 [ ADDR : EDIT/ DEL ]

Realism2009. 12. 29. 08:18

July Fifteenth 1938

Lithograph

2009년 9월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촬영

 

아이오와의 화가 그랜트 우드

 

 

제가 미국 워싱턴과 뉴욕을 위시한 동부의 큼직한 미술관에서 발견한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는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간신히 찾아낸 아래의 리토그라피 작품이 전부 입니다.  검색을 해보면 워싱턴의 국립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이 아름다운 우드의 풍경화를 다수 소장하고 있는데, 일반 관객에 공개 된 것은 한점도 없습니다.

 

(참고로, 미술관 자료를 검색해보면 Currently on View,  Currently Not on View 이렇게 표시가 나옵니다.  현재 볼수 있다 없다 알려주는 것이지요. 자료화가 잘 된 곳은 이런 표시가 나오고, 자료화가 안 된 곳에서는 무슨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지도 불분명 합니다. 심지어 자료화가 잘 된 곳으로 정평이 난 스미소니안 미술관에서도, 제가 가서 보고 찍어온 작품이 소장품 명단에 실려 있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너무나 아쉬운 마음에, 웹에서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 자료 몇점을 빌려 왔습니다.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가 어떤 것인지 꼭, 꼭, 보여드리고 싶거든요. (넌 미술관에서도 못봤다면서 그걸 어떻게 알지? 묻고 싶으시죠...  제가 심심풀이로 하는 짓이 책방에서 비싼 화집 들여다보는 일이거든요.  화집에서 발견한 명품을 보러 미술관으로 가기도 하고, 미술관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그림들을 화집에서 찾아보고 설명을 읽기도 하고요.)

 

 

그랜트 우드는 미국 중서부의 아이오와주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활동하다가 거기서 죽은 '진정한' 아이오와의 화가 입니다.  미국지도에서 아이오와를 찾아보면,  미국 가장 중심부에 네브라스카가 있고요, 그 동쪽에, 네브라스카와 일리노이 사이에 아이오와가 있습니다.

 

 

꿈의 구장

 

 

'아이오와' 하면 생각나는 것은?  만약에 미국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대개 '옥수수밭!'이라고 대꾸 할 겁니다. 중부 평야지대인 이곳은 그야말로 '가도 가도 가도 가도'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너 그걸 어떻게 알어? 가봤어?  묻고 싶으시죠... ) 제가 아이오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옛날에, 옛날에, 제가 미국땅을 밟아보기도 전에 한국에서 봤던 영화를 통해서였습니다.  당시 한창 미남 배우 명단을 진두지휘하던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했던 Field of Dreams (한국 제목, 꿈의 구장, 1989). 그 영화의 배경이 아이오와 평원이었습니다.  한 남자가 (케빈 코스트너) 그의 옥수수밭에서 바람소리같은 어떤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는... 그 남자는 별로 경영실적도 없어 망해가는 옥수수밭을 파헤치고, 그곳에 '야구장'을 만듭니다.  야구장이 생기자, 옥수수밭에서 야구선수들이 나와요. 왕년의 유명했던, 그러나 지금은 죽었거나 혹은 업종변경하고, 꿈을 포기한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야구장에 모여듭니다.  아, 꿈의구장 영화가 나온것이 벌써 20년이 지나는 것이군요.  그러면, 내가 그 영화를 본지도 20년 가까이 되었다는 뜻이군요.  아아...

 

 

 

꿈의 구장 영화 덕분에, 저에게는 아이오와의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과 그 하늘과, 바람소리가 아주 생생하게 각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옥수수밭에 찾아가면 내 잃어버린 꿈도 되찾을수 있을까?  이런 상상까지 하고야 마는 것이지요. (영화 아직 안보셨다면, 지금 보셔도 여전히  감동이 유효할것입니다.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이 될 만하죠.)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사랑과 이별, 그리고 쓸쓸함에 대하여

 

그리고나서, 또다시 아이오와를 만난것은, Bridges of Madison County (1995) 에서였습니다. 사실 원작 소설의 사상 초유의 히트를 쳤죠.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라는 제목으로 한국에도 번역 소개가 되고,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라디오 에프앰 틀어놓고 음악듣다보면, 연극인이면서 라디오 방송 진행도 했던 '손숙'씨가 그 차분하고 이지적인 목소리로 촉촉하게 깔면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읽어보셨나요?..." 뭐 이런 광고도 해대고 그랬습니다.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뭐 아무튼 연인들이 사랑의 선물로 주는 아이템중의 하나였다니까요.  심지어는 매우 완고하고 구식이며 남성중심주의적인 부산 사나이 우리 형부도 이 책을 우리 언니에게 선물 할 정도였으니까요. 부부가 이걸 같이 읽고 울고 짜고 장난이 아니었댑니다. 하하하.

 

저는요, 그제나 지금이나, 잘난척하는 경향이 심해서, 남들이 다 근사하다고 그러면 괜히 아니꼬와서 쳐다보지도 않았지요. (헤헤헤). 쳇, 대중문화라니...하면서 속으로 빈정거리고 있었겠지요.  그러다 어느날 누군가가 이 잘난척하는 저를 위해 글쎄 교보문고에서 '수입원서'를 사다 준 겁니다. 참.. 내... 그래가지고, 매우 잘난척을 하면서 그 얇다란 영문소설책을 읽고야 만것이지요. 꼬부랑 글씨로 읽자하니 골치가 아파서 뭐 크게 감동을 받은것 같지도 않아요.  1995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님이 직접 메가폰을 잡으시고 주연까지 도맡으셨는데, 저는 그로부터 한 5년쯤 후에 비디오로 이 영화를 본것 같아요.  (소설에 별 감흥이 없었으므로 영화도 찾아다니며 볼 열정이 없었지요.)

 

 

 

 

제가 이 소설을, 혹은 영화를 인상깊게 봤던 아니건 간에, 그때의 이미지는 남아 있어요. 어떤 이미지냐하면, 이탈리아계 이민자 여성 프란체스카가 미국의 중부, 온종일 걸어가도 끝도 보이지 않는 막막한 평원지대의 농가의 아낙네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막막할까.  온가족이 모두 사랑해주지만, 행복한 아내이며 엄마이지만, 이 여자의 일상은 얼마나 지루하고 그리고....쓸쓸하고...그럴까...  프란체스카의 그 막막한 고립감에 공감을 했던 것이지요.  어쩌다 삶이 주는 축복 혹은 기회처럼 불꽃같은 정열을 불태우고 난후, 불꽃놀이가 끝난 밤하늘을 바라보듯 남겨진 그여자의 여생은 또 얼마나 쓸쓸했을까 뭐 그런 생각을 골똘히 하고 그랬죠.  그 메디슨 카운티는, 그리고 그 다리들은 아이오와에 실재로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아직 미국땅도 밟아본 적이 없던 제게 아이오와는 이렇게 영화와 소설속의 '끝없는 초록 평야' 그리고'막막함'으로 다가왔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어느날 화집을 통해 아이오와 출신의, 평생 아이오와에서 살다 죽었다는 그랜트 우드를 발견했을때, 머릿속에 갖고 있던 이미지들과 그랜트 우드가 전해주는 이미지들을 뒤섞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그랜트 우드는 제 곁에 다가왔습니다.

 

 

 

 

추억, 잊혀진 평원의 나라

 

 

 

제가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bolt Kid (http://americanart.textcube.com/166 ) 책을 읽은 것도, 빌 브라이슨이 워낙에 재미있는 글쟁이이기도 하지만, 아이오와주 태생이었던 그가 회상하는 아이오와의 삶이 어땠는지 궁금하기도 했어요. 빌 브라이슨은 현재 아이오와의 주도인 드 모인 태생이고, 드 모인과 그 변두리의 삶을 그려나갔지만, 그가 전하는 중서부 사람들의 정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요.

 

미국에서 사는 사람들 사이에 이런 농담이 있어요. "중서부에는 뉴스가 없다. 그러므로 중서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슨 말씀인가하면 미국의 역사를 봐도 그렇고 뉴스의 발원지가 되는 곳은 극히 한정적입니다. 미국의 동부 몇개 지역, 그리고 서부 캘리포니아 대도시.  그 외에 미국의 중부에 대해서 얼만큼 아시나요? 사실 우리가 상상하거나 인지하는 '미국'은 뉴욕, 워싱턴, 텍사스 목장,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뭐 그런 곳입니다. 미국 역사의 현장은 대개 동부에 몰려있고, 명문 대학들도 동부에 몰려있고... 그에 비해 미드웨스트는 그저 '옥수수밭'이나 '콩밭'으로 기억되는 그런 곳이지요.  (여담이지만, 제가 2년여전에 플로리다에서 공부를 마치고 버지니아로 왔을때, 버지니아의 학교에 전학한 저희 아이들이 학교에서 들은 농담: "플로리다에도 학교가 있어?" 헤헤헤 워싱턴이나 버지니아의 아이들에게 플로리다는 디즈니랜드의 나라, 돌고래의 나라, 사철 비치에서 놀수 있는 휴양지였던 것입니다. 거기에 학교가 있고 학생이 있다는 상상이 안된다는거죠.)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bolt Kid: A Memoir

 

그렇게 잊혀진 평원의 나라.  가도가도 옥수수밭 뿐인 나라. 그런나라에서 우리의 그랜트 우드는 태어나고 자라고, 활동하가다가 그곳에 뼈를 묻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미술가들은 모두 유럽 유학을 거쳐 뉴욕으로 몰려들던 시기에 미드웨스트에 짱박혀서 옹고집으로 미드웨스트의 풍경을 그린 화가 그랜트는 확실히 좀 독보적인 존재라 할 만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지역주의를 논할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자주, 가장 주목해서 그랜트 우드를 이야기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과 우주가 평원에서 만나다 Star Trek 2009

 

 

지난 봄에 Star Trek 2009년판이 극장에서 개봉했지요. 보셨나요? (재밌는데...)

 

그 영화 볼때요, 자세히 보시면, 아버지 없이 성장한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뭐 활개치고 돌아다니면서 우울감을 달래는데요, 그때, 이정표에 IOWA 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소년은 막막한 IOWA 평원에서 '우주 기지'를 발견해요.  실제로 아이오와에서 찍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영화에 IOWA 라는 찌그러진 이정표가 보이지요.

 

왜 하필 아이오와?  저야 모르죠. 스타트렉의 광팬이 아니라서요. 원작 소설이나 극에도 그런 설정이 있었는지 알수 없지요.  하지만, 아이오와가 뭐 꼭 동떨어어진 설정은 아니지요.  미국에서 UFO 봤다는 사람들 있고, UFO를 불러내겠다는 사람들 모임도 있고 그렇쟎아요.  그리고, 끝없는 초원에 이상한 무늬 만들고 그러는 사람들 있쟎아요. 아이오와가 평야지대이고 목초나 옥수수, 콩 이런거 한없이 펼쳐진 곳이라서 이 평원에 커다란 고무래 같은것을 끌고 돌아다니며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든다음에, 외계인이 만들고 갔다고 뻥(?)치고 그러는 사람들도 있지요.  :)  아이오와는 '우주기지'로서 아주 적당한 지역이지요.

 

그런데요, 우주가 별건가요...우리도 '우주인' 이쟎아요. 지구도 우주의 일부고, 우리도 우주의 일부이고. 우리는 영원속에 존재하는거죠.

 

 

 

그랜트 우드의 풍경속에는 '영원한 시간'이 존재한다...

 

 

아래의 이미지들은   제가 웹에서 빌려온 작품들 인데요.  이 글의 머리에 제가 사진 찍어온 작품과 아래의 풍경화들을 보시면서 이들에게 공히 보이는 어떤 특징들을 찾아 볼까요?  작품들을 찬찬히 보시지요.

 

 

 

 

Stone City 1930 (스톤 시)

 

 

Sprign Turning 1936 (봄이 오네)

 

 

Fall Plowing (가을의 쟁기질)

 

위의 풍경화들에게서 공히 보이는 요소들은

 

 1. 둥근, 곡선의 언던과 평야가 끝없이 겹쳐져 있어, 이런 평야가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죠.

 

 2. 시선은 어떤가요?  작가가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것 같은가요?  작가는 이 풍경을 아주 높은 산위나 고층건물 위에서 혹은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그러니까 이 구도는 현실적인 구도는 아니죠.  환상의 구도이지요.  (이를 영어로는 bird eye view 라고 합니다.)

 

 3. 나무들도 대개 둥글둥글 하고요 길도 곡선으로 흐르고 개울도 곡선으로 흘러요

 

 4. 그러면 곡선이 아니고 직선이거나 예각인것은?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구도입니다. 건물, 다리,  인간이 밭을 갈아놓는 형태 이러한 '인위적'인 것들은 직선이거나 예각이지요.

 

 5. 마찬가지로 '자연'과 '사람이 품을 들여서 일군' 농장이 공존합니다.

 

 6. 풍경속에 있는 사람은 굉장히, 굉장히 작아요.  온통 초록색인 Spring Turning 이라는 작품을 보셔요. 거기 보면 희게 보이는 것이 사람이 가축을 몰아 밭을 가는 모습인데요, 그 사람과 그 사람이 갈아야하는 밭의 크기를 비교해보셔요.  "저 밭을 언제 다 갈아, 엉엉엉" 한숨이 나오죠. 울음을 터뜨려도 이해해요. :)  하지만,  이 풍경화속에 슬픔이나 고통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은 태평하게 펼쳐져있고, 깨알같이 작은 인간은 그 태평한 땅을 영원히 영원히 갈아엎고 농사를 짓는 것이지요.  세상은 넓고 시간은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지만, 사람 역시 서두르지 않고 영원속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가다보면 밭은 갈리고, 씨앗은 뿌려지고, 옥수수는 익을것이며, 콩은 깍지를 터뜨리며 깔깔댈것입니다.

 

아 저는 사실,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를 화집에서 들여다볼때면 네덜란드의 풍속화가로 알려진 브르겔 (브르헬)의 아키로스의 추락 같은 그림이 떠오릅니다.

 

 

 

그림의 주제나 시사하는 바는 다르지만,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밭을 가는 브르겔 그림속의 농부와 그 구불구불한 밭의 모양이 그랜트 우드의 풍경과 많이 닮았거든요.  조망하는 듯한 작가의 시각도 똑같지요.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 (Grapes of Wrath)를 통해 묘사한 당대의 농부들의 현실은 비참한 수준이었는데요, 그랜트 우드는 이러한 시대적인 풍경과는 동떨어진채 위에 보이는 영원히 지속될것 같은 '낙원'의 풍경을 중서부의 풍경이라고 그려냈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사랑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류의 향수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영원히 돌아갈수 없는 낙원, 영원히 돌아갈수 없는 고향.  그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랜트 우드의 '우화'와도 같은 풍경화를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를 좋아하는 저 역시...

 

그리움때문에... 지금은 근사한 서울 근교 아파트 촌으로 변해버려 그 흔적조차 찾을수 없는 제 고향집과 우리 할아버지가 평생 갈고 씨를 뿌린 우리집 논, 밭, 과수원이, 우리집 앞 개울이, 그 고향마을이 어른이 된 후에 보면 작고 보잘것 없었지만, 어린 시절, 몸도 작고, 세상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 그 고향마을은 끝도 보이지 않는 평원이었으며, 온종일 걸어도 그 끝에 닿을 수 없는 왕국이었지요.  제 추억속에도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그리움이, 인종과 언어와 사회적 배경을 초월하여 어떤 그림에 함께 다가가게 만들지요. 그렇게 우드의 풍경화 속의 시간은 영원에 맞닿아 있는 것이지요.

 

 

내 카메라에 담아온 그랜트 우드의 우주

 

 

 

 

 

2009년 12월 2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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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ism2009. 12. 29. 01:10

우스개이지만,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집은 뭘까요?  워싱턴 디씨의 '백악관 White House'이겠지요.

그러면 미국에서 두번째로 유명한 집은 어디에 있는 무슨 집일까요?

 

 

American Gothic (1930)

Grant Wood

74.3 x 62.4 cm.

Oil on Beaverboard

어느해 팔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뮤지엄에서 촬영

위의 사진 상태가 하도 딱해서, 그냥 웹에서 다른 이미지를 얻어왔습니다. 자세히 보실수 있을겁니다.

 

 

 

(정답) 미국에서 두번째로 유명한 집은, 아이오와 (Iowa)주에 있는 이 집이라고 합니다.

 

File:2007-06-04-Gothic House.jpg

http://en.wikipedia.org/wiki/American_Gothic_House

 

 

아이오와 주의 어느 시골 마을에 있는 집인데요.  이 집이 1930년 Grant Wood가 발표한 American Gothic 의 실제 배경이 되어 주었던 집입니다. 창문모양하며, 일치하죠?  이 그림으로 그랜트 우드는 1930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주최한 미술대회에서 대상을 받고, 그리고 그의 그림역시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 팔려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미술관에 가시면 이 그림을 보실수 있습니다.

 

여자 모델은 Nan 이라는 이름의 그랜트 우드의 동생이었고, 남자 모델은 동네 치과의사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랜트가 훗날 간암으로 사망했을때 그의 전 재산이 이 여자분 Nan 에게 넘겨졌고, 그후에 그의 작품들이 모두 아이오와의 한 미술관에 기증되고 맙니다.  이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해서도 설이 분분합니다.  아버지와 노처녀 딸일것이라는 설도 있고, 노총각 노처녀로 늙어가는 오누이로 보인다는 설도 있고.  여성은 좀 뚱해보이고, 남성은 메마르고 고집스러워 보이지요.

 

 

이 '어메리칸 고딕'은 미국인들이 알고 있는 세계 3대 걸작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나머지 둘은?  모나리자의 미소, 그리고 휘슬러의 엄마 라는 작품인데요. :) 휘슬러의 엄마라는 작품은 영화 Bean (1997)의 소재가 되기도 했지요. 아직 안보셨으면 한 번 보셔도... 아무튼, 그정도로 이 아메리칸 고딕 이라는 작품이 유명합니다.  미국인의 상징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이 그림은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이 공존합니다. 교회의 첨탑을 연상시키는 수직의 뾰족한 지붕과 창문 모양, 남자가 들고 있는 날카로운 삼지창, 금테안경을 낀 장년의 성마른듯한 표정의 사나이. 남자가 입고 있는 검은 웃저고리와 그 안에 받쳐입은 흰 셔츠는 고집센, 성직자 같은 이미지를 줍니다. 그가 입고 있는 낡고 주름진 바지와 그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삼지창이 그를 중부의 농부라는 것을 일깨워주지요.

 

남자 옆에 딸인지 누이동생인지 혹은 아내인지 알수 없는채로 서있는 여자의 눈빛이나 굳게 닫은 입매가 무뚝뚝하고 꾸밈없으며, 도통 사교성이라고는 없어 보입니다. 역시 입고 있는 검정 드레스나, 흰 옷깃, 그리고 단정하게 매달고 있는 브로치는 이 여인에게 빈틈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가 입고 있는 느슨한 앞치마가 우리의 숨통을 틔워주며, 그녀의 황금빛 동그란 머리통의 윤곽이  그 뒤의 고딕식 지붕의 예리함을 누그러뜨려 줍니다. 역시나 여자의 머리통과 비슷하게 동글동글한 배경 숲이 예각의 지붕과 퉁명스러운 사람들의 표정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의 표정이나 고딕양식을 연상시키는 건물을 통해 그랜트우드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미국 중서부 평원지대에서 정직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건한 삶이라고 풀이하기도 합니다. 성자와 같이 경건하게 흙을 파고 경작하며 살아가는 미국 농민의 삶. 이것이야 말로 미국인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또다른 편에서는 그랜트 우드가 정말로 의도했던 것은 이런 삶에 대한 냉소적 풍자였다고도 합니다.  경건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미국인들의 도덕적 우월감 따위를 신랄하게 비꼬는 그림이라는 것이지요.  어느쪽 해석이 좀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시나요?

 

이 아메리칸 고딕은 미국의 정치인들이 선거전에서 이미지를 빌려다 쓰기도 했고, 유명한 텔레비전 드라마의 타이틀로도 사용되었으며, 유명 애니메이션에 출연하기도 합니다. 구글에서 American Gothic 이미지를 찾아보시면 다양한 변형들이 '무수하게' 나와줍니다. 작품의 예술성을 떠나서 이 작품은 '제목'과 '분위기'와 어느정도의 '행운'이 겹쳐서 미국의 '아이콘'이 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2009년 12월 2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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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ism2009. 12. 29. 00:00

 

 

미국 사실주의 속의 지역주의

 

http://americanart.textcube.com/118 이전 페이지에서 미국미술사에 나타나는 '사실주의' 흐름을 제가 대충 정리한 바 있습니다. (공부를 해 가면서 내용을 조금씩 손을 보게 되는군요. 잘 못 알고 있던 것은 바로잡고... 첨가도 하고..)

 

그 표를 다시 갖다 놓고 살펴보겠습니다. 아래 표가 제가 대충 잡은 윤곽인데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search/?search=ashcan  Ashcan 에 속했던 화가들을 소개한 적이 있쟎아요. 이분들이 미국 사실주의의 원조들이었다 할 만 합니다. 이들중에 Social Realist 로 분류가 될만한 화가도 있고, 아닌경우도 있고.  가령 Sloan 은 사회주의적 잡지 편집에도 관계했지만, 스스로는 사회주의와 거리를 두기도 했지요.  본격적인 사회 사실주의 화가로는 벤 샨 같은 작가들이 있지요. (벤샨은, 제가 꽤 흥미를 가진 화가 이기 때문에 오히려 페이지 정리하기가 어렵게 느껴집니다....)

 

이번에는 지역주의 (Regionalism) 작가군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삼총사'와 같은 작가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1930년대에 탄생하는 '지역주의 (Regionalism)'의 주요 작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 Grant Wood (1892-1942)

 * Thomas Hart Benton (1889-1975)

 * John Steuart Curry (1897-1946)

 

그러니까...가령...아주 유치한 미술 문제를 낸다고 가정해봅니다.

 

다음 화가들중에서 미국의 지역주의 화가가 아닌 사람은?

(1) 그랜드 우드 (2) 토마스 벤튼 (3) 조지아 오키프  (4) 존 커리

 

이런 문제가 나오면 답은 (3)번을 찍으셔야 한다는 것이지요 :)

 

 

지역주의의 탄생과 허상

 

 

 

그러면, 이 regionalism 이라고 명명된 지역주의는 어떤 배경에서 탄생 한 것일까요? 미술비평책마다 대동소이하거나 백과사전식의 설명을 하고 있는데요, 대략 '교과서'처럼 알려진 것은 이런 내용입니다. 우선 지역주의가 1930년대에 탄생하는데, 대공황과 맞물려 있지요.  그래서 미국인의 애국심을 고취 시키고자 하는 미술 운동이 일어났고, 유럽 일변도의 미술판에 저항하여 소외되어 있었던 미국의 중서부 지역에서, 신토불이의 미술이 탄생한거다 이런 내용이죠.  아 저역시 최근까지 이런 식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지역주의의 탄생에 대한 또다른 설명을 접할수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그 내용을 조금 정리하겠습니다.  American Visions: The Epic History of Art in America by Robert Hughes 책 내용을 대충 요약해서 옮기겠습니다.

 

 

1933년에, 캔자스 출신으로 뉴욕에서 미술거래상으로 활동하던 Maynard Walker 라는 사람이 캔자스 시티에서 35점의 그림을 걸어놓고 "American Painting Since Whistler 휘슬러이래의 미국 회화" 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엽니다.  전시회에 참가했던 화가들 중에 Thomas Hart Benton, John Steuart Curry, Grant Wood 가 있었던 것이지요. 당시 벤턴은 뉴욕에서 활동중이었고,  우드역시 이미 American Gothic 이라는 불후의 명작(?)으로 큰 상을 거머쥔 후였고, 커리역시 '휘트니 미술관'이 이미 그의 작품을 여러점 사들인 후였습니다.  나름대로 이미 미술계에서 어느정도 알려진 인물들이었지요.  그런데 이 세사람은 피차 서로 본적도 없고,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리고 뭐 Regionalism 같은 것도 생각도 못해냈겠지요.

 

그런데 전시회를 기획했던 Walker 가 Art Digest 라는 잡지에 이 전시소식을 전하면서 "real American art...which really springs from American soil and seeks to interpret American life (진정한 미국 미술...미국의 토양에서 태어나서 미국의 삶을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이런 선전을 했다고 합니다.  뭐 사실 당시 비평가들이나 콜렉터들은 이 전시회에 별 관심이 없었다는데, 워커가 제작한 카타로그가 Time 지의 중서부 담당자의 눈에 띄어서, 그것이 뉴욕의 본사로 보내집니다. 뉴욕 본사를 지키고 있던 타임지의 설립자 Henry Luce 는 미술 애호가였는데 이 별것도 아닌 소식을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그리고는...난리가 난거죠...  이제 진정한 미국의 세기 (The American Century) 가 돌아왔다는 식으로 해석을 한거죠.

 

그리하여 1934년 12월 24일판 타임지의 커버를 벤턴의 초상화가 장식하고, 커리, 우드, 그리고 Charles Burchfield, Reginald Marsh 등의 그림이 소개가 됩니다. 흙냄새 물씬 풍기는 중서부 출신의 작가들이 불러일으킨,  진정한 미국화의 탄생! 지역주의가 이런식으로 탄생을 한거죠.

 

헌데 Robert Hughes 의 설명으로는 이런식의 미국의 Regionalism 은 사실과는 상관없는 '허구'라는 것이지요.  가령 벤튼, 커리, 우드가 지역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널리 선전이 되었지만, 벤튼과 우드는 피차 서로 일면식도 없었고, 지역주의 화가로 알려진 화가들중에 정말 '중서부'에 뿌리를 내리고 활동한 화가는 그랜트 우드 뿐이라는 것이지요.  커리는 커넥티컷에서 활동했고, 벤튼의 스튜디오는 뉴욕에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이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이 '지역주의'라는 어떤 판타지가 미국의 대중들에게 비현실적인 향수와 꿈을 주었다는 것이지요. 경제 대공황으로 도시와 농촌등 전 지역이 고통을 겪고 있을때, 그랜트 우드가 보여준 풍경화는 '잃어버린 낙원'이었지요.  존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Grapes of Wrath)를 1939년에 발표하면서, 몰락한 미국 농민들의 참상을 여실히 서술한 바 있는데, 이에 비해서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는 '몽환적'이기 까지 합니다.

 

후에 벤튼은 이 허구성이 강한 지역주의 운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평을 합니다. " 이미 각본은 씌어졌고, 우리를 위한 무대장치는 만들어졌다. 그랜트 우드는 전형적인 아이오와 소읍 사람이 되었고, 존 커리는 전형적인 캔자스의 농부가 되었으며, 그리고 나는 중서부 (미조리조)의 촌뜨기가 되었다. 우리는 우리 역할을 받아들였다."

 

예. 미국의 지역주의 운동이 대충 이러한 얼개로 탄생하였고, 미국미술사에서 나름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주의 삼인방에 대한 소개는 Wood, Benton, Curry 순으로 페이지를 열어나가겠습니다.

 

2009년 12월 2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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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ism/Ashcan School2009. 12. 12. 02:12

프랜더개스트의 얼굴없는 미녀들

 

 

 

Maurice Prendergast (모리스 프렌더개스트, 1859-1924)는 캐나다에서 출생하여 미국에서 성장한 화가입니다. 사실주의 화가 그룹이었던 The Eight (팔인회)의 멤버로 함께 전시회를 가진적도 있긴 하지만,  모리스 프렌더개스트가 남긴 그림들은  '8인회'를 표상하는 '도시' '서민의 삶'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이미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가 있었던 것이겠지요.

 

가족이민으로 세살때 보스톤에 온 프렌더개스트는 8학년 (중학교)을 마치고 14세의 나이에 '상회'에 취직을 하여 살아가면서 혼자서 그림을 그립니다.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혼자서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을 그리는 정도였겠지요. 20대때는 동생 Charles 와 함께 가축용 배에 몸을 싣고 유럽으로  가서 유럽 여행을 하기도 합니다.  유럽구경을 하고 돌아온 프렌더개스트는 그제서야 '미술공부'를 제대로 해보고싶다는 열정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결국 '액자' 사업을 하게 된 동생의 후원으로 나이 30에 파리에 입성하게 됩니다. (고호에게 그의 아우 테오가 있었던 프렌더개스트에게는 아우 찰스가 있었다고 할 만 하지요) 그는 파리의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학교에서는 '석고상'이나 '대리석상'과 같은것을 그려보라는 지시를 했지만, 그는 밖으로 나가 살아움직이는 사람들을 스케치하는 일에 몰두 했다고 합니다.

 

 

제가 미술관을 돌며 수집한 그의 작품들은 모두 '유채화'인데요, 그는 초기에 수채화를 주로 그렸고, 후기에 유채화로 선회했다고 합니다.  제가 본 작품들은, 다 똑같아 보일정도로 테크닉이 유사한데,  화집이나 언라인 자료를 찾아보면 점이나 짧은 선을 이용한 화법의 작품들이 많이 보입니다. (이렇게 경쾌할수가!)

 

카네기 미술관에 걸려있는 커다란 '소풍 (Picnic)'이란 작품은 얼핏 보기에는 수채화처럼 보입니다.  저는 사실 이작품을 '수채화'로 알고 보고 지나쳤었는데,  글을 쓰기 위해 자세히 들여다보니 유채화라고 나오는군요. Oil on Unsized Canvas 라는 설명문이 있길래, 이것은 무엇인가? 자료를 찾아 봤지요. 

 

우리가 남대문 미술상에 가면 다양한 사이즈의 나무틀에 짜여진 캔버스를 살수가 있고, 혹은 아예 두루마리 캔바스를 통째로 살수도 있는데요. 대부분 이렇게 판매되는 캔버스는 젯소 가공이 된 상태라고 합니다. 헝겊을 그림 그리기에 적합하게 가공을 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Unsized Canvas 란 말하자면 이런 밑가공을 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캔바스에 표면처리가 되지 않았으므로 페인트가 스며들면서 색다른 효과가 나올수 있겠지요.  그래서 이 유화가 얼핏 보기에 '수채화'같은 느낌이 들었던것 같습니다.

 

 

 

카네기 미술관 전시실 풍경

2009년 11월 촬영

 

 

Picnic (c.1914-1915)

소풍

Oil on Unsized Canvas

가공처리 되지 않은 캔바스에 유화

196x271cm

2009년 11월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Women at Seashore (1915)

Oil on Panel

43x81cm

2009년 11월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위의 피크닉이나 Women at Seashore 모두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것인데요. 풍경이나 등장인물들의 분위기가 유사합니다. 

 

 

 

 

 

Salem Cove (1916)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3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워싱턴 디씨의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에 걸려있는 프렌더개스트의 작품입니다.  한 소년이 아빠와 함께 손을 잡고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의 작품 구경을 하면서 슬슬 지나가다가  이 그림 앞에 서더니 아빠에게 뭐라고 종알종알 이야기를 합니다.  어린이의 눈길을 잡아끄는 그림이었던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 그림.  그래서 저도 그림 앞에서 기념사진 한장 찍어봤습니다. 저도 이런 그림 한장 갖고 싶어요.

 

 

 

 

 

Landscape with Figures (1921)

여러가지 모양이 있는 풍경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Landscape with Figures (1918-1923)

여러가지 모양이 있는 풍경

Oil on Canvas

2009년 10월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제가 가지고 있는 몇장 안되는 그림들을  제작 연도 순서대로 배열을 했는데요, 시간이 갈수록 그의 붓 터치가 세밀하고 조밀해지지요?  아무래도 수채화에서 유화로 넘어가면서, 그 이후로 그의 붓 터치가 깊이를 얻어간것도 같고요.  그럼에도, 그의 그림들에 등장하는 풍경이나 사람들이 마치 '동일한 그림'의 반복처럼 느껴질 정도로 유사해 보입니다.

 

이들 그림에 나타난 몇가지 공통적인 현상을 나열해볼까요?

 1.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것으로, 인물들의 얼굴에 이목구비가 생략되었습니다.

 2. 사람이나 나무나, 풍경 전체가 율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지된 풍경이 아니라 살아숨쉬는 여인의 가슴처럼 굴곡과 움직임이 있지요

 3.  드레스를 차려입고 소풍을 즐기는 남녀들이 나옵니다. (후기에는 동물들도 포함됩니다).

 4. 보시다시피, 모두 야외의 풍경이지요.

 

프렌더개스트의 전기 자료를 찾아보면, 프랜더개스트가 이탈리아 화풍의 영향을 입었다던가,  혹은 후기 인상파  점묘파 화가 쉬러(Seurat)의 영향을 받았다던가, 혹은 세잔느에 견주어지기도 하거니와, 나비파 보나르, 뷔야르의 영향도 제기가 되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당시의 유럽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거나 혹은 널리 알려진 화가들의 작품이, 혹은 그들과의 교류가  프렌더개스트의 예술세계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쳤을것은 자연스런 현상일수 있습니다.   그런데, 프랜더개스트는 단지 이쯤에서 주저않은 화가는 아닌듯 합니다.  그는 '자기 그림'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보입니다.  무슨 말씀인가하면,  누구의 어떤 화풍의 영향을 받았건 안받았건,  프랜더개스트는 이런 모든 '영향'을 초월하여 '이것은 프랜더개스트다'라고 할만한 화풍을 스스로 만들어 냈다고 하는 것이지요.

 

 

모리스 프랜더개스트는 1859년에 태어나 1924년에 사망했으므로 만 64년을 지구상에 머물렀다 할 수 있는데, 그는 평생 독신이었다고 합니다. 성격이 수줍고 조용하여 사교적이지도 않았고요.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나이 서른에 받기 시작한 이래로 죽을때까지 그림만 그렸으니 30여년간 미술가로 살다 간 셈인데, 그는 평생 '그림 생각'만 했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액자를 만들어 파는 일을 했던 그의 동생 찰스가 평생 그의 후원자가 되어주었지요.  결혼도 안하고, 사교적이지도 않고, 그림만 즐겨 그린 이 조용한 사람은 어쩌면 평생 '관찰자'로 살아간것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는 그의 성격은, 늘,  사람들을 어떤 풍경속의 일부로 파악을 했을것도 같고요.  그런 그에게 사람들의 이목구비, 사람들의 표정, 그런것들은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사람들'은 '풍경'으로 머물렀을겁니다.  그러니 그의 풍경화의 제목마저 Landscape with Figures (모양으로 이루어진 풍경화)라는 식으로 붙여졌겠지요.

 

미술평론가들은 이러한 그의 그림을 '사실주의'가 아닌 '추상적' 화법의 도입이라고 정리를 하기도 하는데요, 어쩌면 세잔느가 그러했듯 구체적인 관찰과 묘사, 혹은 인상(impression)을 넘어선 해체와 추상의 장으로 진입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엔 그냥 그의 삶이 그러하였던 것 같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다른 별에서 온 생명체가 멀찌감치서 풍경을 관찰하듯, 풍경속의 인물들도 풍경의 일부로 피상적으로 관찰을 했겠지요.

 

모리스 프랜더개스트는 1914년에 뉴욕으로 활동지를 정하고  The Eight 의 멤버였던 윌리엄 글랙슨즈의 윗층 (50 South Washington Square, New York)으로 이사를 합니다.  서로 이웃사촌으로 지냈다는 얘기지요. 

 

제 소견으로는 The Eight 의 멤버였던 William Glackens 는 '르누아르의 아류'에서 끝난 화가로 보이고, Maurice Prendergast는 유럽화풍도 공부했고, 유럽화풍의 영향권안에 있었지만, '프랜더개스트'만의 독특한 세계를 완성하고 떠난 화가로 보입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딱, 답이 나오쟎아요, 아! 프랜더개스트! 

 

 

 

2009년 12월 11일 redfox

 

 

후기: 모리스 프렌더개스트는, 사실, 저에게는 '듣보잡'과에 속하는 그림들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제가 무지한 관계로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을 발견했을때, 그냥 별 감흥없이 쓱쓱 지나쳤다는 것이지요. 미술관 이곳저곳에서 그의 그림을 보면서도, 프랜더개스트를 기억하기보다는 '저 그림 어디서 봤더라? 전에도 비슷한 것을 본적이 있는데...' 이정도로 생각하고 그냥 지나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The Eight 을 정리하느라 제가 갖고 있는 그림자료들을 정리하다보니, 어라? 이 사람  내가 제법 여기저기서 눈도장 찍은 사람이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어 그런데 그림 모아놓고 보니 매력있네!   뭔가 개성이 보이네!  이렇게 되더라구요.  그러니까,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더욱 매력이 느껴지더란 것이지요.  (모르고 죽었으면 억울할뻔 했네~ )

 

누군가를 새로 알아간다는 것은 참 흥미진진한 일입니다. 그것이 꼭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해도... 아니 어쩌면 그 대상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무엇을/누군가를 새로 알아가는 작업이 안전하고도 유쾌한 작업이 될지도 모릅니다.  산사람은, 알게되면 정들고, 혹은 싫증나고, 그러면 괴롭죠.  그냥 어떤 대상은 알면 알수록 유쾌해지지요. 싫증나면 떠나면 되고. 상처가 안남죠.   프랜더개스트도 혹시 그랬던걸까?  그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관조자, 관찰자로만 머물렀던걸까?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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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료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

    2009.12.14 09:20 [ ADDR : EDIT/ DEL : REPLY ]

Realism/Ashcan School2009. 12. 8. 01:15

 

William Glackens (1870-1938) 는 The Eight 의 멤버인 John French Sloan 과 고등학교 동창이고,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서도 함께 미술을 공부했으며, 슬로언의 소개로 로버트 헨라이와 만나게 되어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글랙슨 역시 슬로언과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매체에 '삽화'를 그리는 것으로 생계를 해결했습니다.  아무래도 대중적인 신문이나 잡지에 필요한 삽화를 그리는 작업이 이들을 사실주의적 화법으로, 대중의 삶에 다가가게 하는 요소가 되었을 것입니다.  

 

 

 

La Villette  (c. 1895)

2009년 11월 7일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1895년에는 헨라이, 슬로언을 위시한 미술가들과 함께 유럽 여행을 하기도 했고요, 헨라이와 함께 파리에서 일년간 머무르며 파리의 예술을 익히기도 합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을 가듯, 당시 미국의 미술가들은 파리나 다른 유럽의 도시로 미술을 공부하러 가는 것이 대세였습니다.  글랙슨 역시 헨라이의 영향으로 일상의 대중의 모습을 그려나가기도 했고 2008년 The Eight 전시회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그는 헨라이의 영향권 아래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르누아르와 같은 프랑스 인상파 화가의 화풍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La Villette 는 프랑스 파리의 풍경입니다. 강변에 사람들이 있고, 높은 구름다리도 보입니다. 1895년, 프랑스 파리에 처음 간 25세 청년의 작품입니다.  도시인의 풍경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있지요.

 

 

 

Boys Sliding (미끄럼 타는 소년들) c. 1900

Oil on Canvas

2010년 1월 9일 델라웨어 미술관에서 촬영

 

색조는 대체적으로 '어두운' 편인데요, 이게 뭘까? 궁금해서 들여다보면 아슴프레한 가운데, 언덕에서 미끄럼을 타는 아이들과, 언덕 아래에서 줄넘기를 하고 노는 소녀들이 보입니다.  언덕위에서 신사 혼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군요.  같은 시기에 그려진 저 위의 풍경화와 분위기가 비슷하지요?

 

 

 

 

1904년 결혼한 글랙슨스는 파리로 신혼여행을 갔고, 그 이후로도 프랑스와 유럽의 도시들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파리의 룩상브르그 정원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프랑스의 중상류층 사람들이 한가롭게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장면입니다.

 

Luxembourg Garden (1906)

2009년 10월 3일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Beach Umbrellas at Blue Point (1915)

2009년 10월 3일 스미소니언 렌윅 갤러리 (미국 공예 박물관)에서 촬영

 

 

 

 

 

Bath Houses, (욕실들), c. 1915

Oil on Canvas

2010년 1월 9일 델라웨어 미술관에서 촬영

 

 

저 위의 스미소니언 소장 작품과 이 'Bath Houses'그림의 '장소'나 색감이 비슷하죠. 제작 시기도 비슷하고요. 극히 개인적인 소견입니다만, 위의 바닷가풍경은  함께 활동했던 프랜더개스트의 그림을 연상시키고,  이 욕실들 그림은 타히티 여인들을 즐겨 그렸던,  폴 고갱의 아름다운 색감을 연상시킵니다.

 

 

 

 

 

그의 1927년작 Promenade (산책)는 얼핏 루누아르의 화사함을 연상시키지요?

 

 

 

The Promenade (1927)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글랙슨스는 The Eight 전시회의 회원이었고, 애시캔 그룹으로 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평생 이들과 교분을 유지하였지만, The Eight 전시회 이후 헨라이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루누아르 풍에 가까운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 나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전시장에서 눈으로 직접 봤던 그의 작품들은 '미국화'같지가 않아 보였고, 얼핏 보기에 '유럽 인상파 화가 그림같다'는 느낌을 줍니다.  어찌보면 '이도 저도 아닌' 작품들 같기도 한데요.  그래서 미술사적으로 크게 주목받지는 못하지요.  화가의 '정체성'이 그래서 중요하지요. 미국인은 미국적인 그림을 그릴때 정체성이 뚜렷하고, 한국인은 한국적인 무엇을 다룰때 정통적으로 보이지요.

 

며칠전에 아들놈이 학교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습니다.  각자 주제를 선택하여 전문가적으로 발표를 해야 하는 프로젝트였는데, 처음에 아들놈이 담당교수한테 '럭비'에 대해서 발표를 하겠다고 했답니다. 럭비선수를 한적이 있거든요.  담당교수가 '뜨아'한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들놈이 마음을 바꿔서, 태권도에 대한 발표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태권도장에서 태권도 지도를 하는 유단자거든요). 그러자 담당교수가 '그것을 발표하라'고 흔쾌히 대꾸를 했다고 합니다.  아들놈에게는 '럭비'나 '태권도'나 모두 자신이 잘 설명할수 있는 분야였는데  교수가 볼때,  명백하게 '코리안'인 학생이 '럭비'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 보다는 '태권도'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훨씬 '전문가'처럼 보였을 것이지요.  아들녀석은 태권도복까지 갖춰 입고 프레젠테이션을 했고,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합니다.

 

교수를 '인종주의자'라고 탓 할 생각은 없습니다. 가령 '일본인'이 유도복을 입고 설명을 하면 어쩐지 그 사람이 유도의 전문가처럼 보이겠지만,  아프리칸이 유도복을 입고 설명하면 어쩐지...아닐것 같다는 느낌이 들테니까요.  그냥 '눈으로 보기에' 얼핏 그런 인상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정관념이라던가 '스테레오 타이핑' '인종주의'라고 비난만 할수는 없지요.

 

사람이 갖고 있는 인지구조는 본인 스스로도 통제가 잘 안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대개 이런 설명 불가능한 요소들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미국인 글랙슨스가 아무리 근사한 그림을 그려도, 그것이 어쩐지 이도 저도 아닌, 유럽화가의 작품같은 애매한 분위기를 갖기 때문에, 저와 같은 '미국화란 무엇인가' 들여다보는 이방인의 눈에는 그저 애매할 뿐이지요.  음...저의 글도 참 애매해지고 있군요...

 

 

2009년 12월 7일 redfox

 

 

 

The Purple Dress (보라색 드레스) 1908-10

Oil on Canvas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에서 촬영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글랙슨스의 보라색 드레스 그림을 발견했을때, 얼핏, '저 그림 내가 어디서 봤는데...' 이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림 파일들을 뒤져봤지요.  그리고, 제 느낌에 매우 유사해 보이는 그림을 발견했습니다.  저한테만 이런 느낌이 들지도 모르지만요.

 

Pierre Bonnard (1867년생-1947년 사망).

Misia on a Divan  ca. 1907-1914

 

 

William Glackens 는 1870년생 (1938사망).  Pierre Bonnard 는 1867 년 출생 (1947년 사망.) 두 화가 모두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비슷한 시기를 살던 사람들이지요. 보나르는 프랑스 태생이고, 글랙슨스는 미국 태생이지만, 두 사람 모두 파리에서 미술작업을 하면서 조우했습니다.  글랙슨스의 자료를 보면, 그가 프랑스에서 인상파 화가들 나비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나비파화가로 우리에게 친숙한 사람들이 뷔야르와 보나르 이지요.  이 두 사람은 미국의 큼직한 미술관에 가보면 늘 함께 붙어다닙니다. 보나르 그림 곁에 뷔야르 그림이 있습니다.  늘 함께 있습니다. 마치 오스트리아의 화가 클림트와 에곤 쉴레 두 사람의 그림이 짝짝꿍이 되어 붙어 다니는 것처럼. (클림트와 에곤 쉴레 역시 서로 불가분의 관계이지요. 클림트가 에곤 쉴레의 후견인, 스승이 되어주긴 했으나 이들의 관계가 일방적이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지요... 유럽 미술은 이쯤에서 ....) Nabis 는 '예언자'라는 뜻의 히브리 말이라고 합니다. 신비하고 독특한 붓의 터치와 색감을 유지 했는데요.  글랙슨스 역시 이들의 작품 세계를 인지하고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두 작품의 제작 연대도 거의 일치하지요.

 

뭐 두 여자 주인공들의 표정보다는, 그림 전체에 흐르는 붓의 터치와 전체적인 색감이 제게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제가 보나르의 '광팬'쯤 되는데... 제가 보나르를 좋아한다는 것을 ...우리 식구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제 남편은, '하고 많은 화가중에 왜 하필 그런 그림이 좋은가' 의아해 하지요. 제 남편은 보나르의 그림이 정신병적이라고 싫대요. 내 눈엔 이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데...  보나르가 좀 정신병적인 면이 있지요. 정신병자같은 여자를 수십년간 지성껏 돌보며 외톨이처럼 살다 간 화가거든요.  보나르의 그림에는 목욕하는 여자가 등장하고, 욕조 주변의 여자의 풍경이 다수인데 그 여자는 평생 욕조에서 살다 갔대요. 무슨 질환 때문에 그랬다는데, 보나르는 그 여자를 평생 돌봤고요.  저는 클림트의 그림을 보면 -- 차멀미같은 멀미를 느낍니다.  느끼해서 빙빙 도는것 같아요.  현기증이 날정도로 아름다우면서도 느끼하죠. 제가 클림트의 그림을 보면서 기분나빠하듯, 제 남편은 보나르의 그림이 기분 나쁜가봅니다.  아... 사람이 다 제각각이고, 각자 자기상처를 핥고 사는 짐승이라,  뭐 그렇다는거죠.)

 

 

화면 오른쪽에서 두번째 그림. 그것이 보라색드레스 그림입니다.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에서 촬영). 오른쪽의 발레 그림은 Everett Shinn,  왼쪽 풍경화는 Robert Henri, 왼쪽 설경 그림은 Rockwell Kent, 그 곁에 잘 안보이는 그림은 George Luks. 모두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입니다.

 

 

글랙슨즈 그림을 연대순으로 정리했는데요, 위에서부터 차례차례 내려오다 보면, 그의 그림이 초기에는 어두컴컴하다가 점차 밝고 화사해져 간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밝은 색감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어두운건...싫더라구요.  (나의 어둠만으로도 나는 지쳐있으므로...어둠에서 밝음을 지향하는거죠, 하하, 옛날에 우리나라 정보기관의 슬로건 아니었나요? 우덜은 어두운곳에서 밝음을 지향한다라던가 뭐라던가...저는 정보기관은 무조건 무서워요. 무서워요. 무서워요.~~ )

 

 

 

 

2010년 1월 4일 내용 보충 redfox.

2010년 1월 18일 내용 보충 redfox.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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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가 왜 RedFox님의 글에 관심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문득 보니... 알겠어요.
    전 그림이 그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이 꿈 중 하나였던것 같은데...

    그래서 인지... 제 딸아이 둘은 그림을 좋아하나 봅니다.

    이젠 그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제가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하는데... 세상의 굴레 속에서 헤어나오질 못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암튼... 그림은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생각을 풍성하게 하기 때문이 아닌지...

    좋은 주말 되시길... (_ _)

    2009.12.12 21:45 [ ADDR : EDIT/ DEL : REPLY ]
    • 저도 '화가'가 되는것이 어릴적에 품었던 여러가지 소망중에 한가지였지만, 지금은 제가 화가가 못된것에 대하여 아무런 아쉬움도 없습니다. 그려봤는데, 뭐 내길이 아닌것 같았고요. 엄니가 아마추어로 열심히 그리시는데, 엄니 하시는것 보니까, 역시 난 아닌것 같아요.

      하지만, 여전히 뭔가 '그리기 장난'은 즐기는 편인데요. 간단한 만화같은 장난들. 그런데 이런 취미역시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해주지요. 일을 할때, 이런 끄적대는 취미가 역시 도움이 되고요. 프레젠테이션을 한다거나 기획서를 작성할때도 '시각적'으로 효과적인 것에 대해서 고민을 하는 편이고요. 역시 '시각효과'가 있는 뭔가를 잘 만들어내는 편이고요.

      그러므로, 꼭 미술가가 되지 않는다해도, 우리들이 갖고 있는 미술취미는 삶의 다른 양식으로 표출되므로 역시 즐거운 일이지요. 그래서 저는 제 두눈이 건강한것을 참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세상을 두눈으로 볼수 있다는것 참 기쁜 일이거든요.

      그별님은 좋은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시쟎아요~ =)

      2009.12.14 08:55 [ ADDR : EDIT/ DEL ]
    • 비밀댓글입니다

      2009.12.14 23:15 [ ADDR : EDIT/ DEL ]
  2. 내용 보충했습니다. (그림 두장 추가)

    2010.01.05 07:08 [ ADDR : EDIT/ DEL : REPLY ]
  3. 내용 보충했습니다, 그림 두장 추가

    2010.01.19 00:19 [ ADDR : EDIT/ DEL : REPLY ]

Realism/Ashcan School2009. 12. 7. 23:22

소년가장 슬로언

 

John French Sloan (1871-1951)은 펜실베니아 태생의 미국 사실주의 화가로 Henri 를 중심으로 모인 Ashcan (애시캔) 그룹과 The Eight (8인회)의 멤버로 활동하였습니다.  존 슬로언은 필라델피아에서 성장하였는데 그의 고등학교 동창중에 후에 The Eight 의 멤버가 되는 William Glackens를 만나게 됩니다.

 

1888년 그가 16세 되던해에 아버지가 정신질환으로 쓰러지면서 슬로언이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소년가장이 되고 맙니다. 그는 책방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책을 읽고 화집을 들여다보며 혼자 그림을 그리던중 정식으로 야간 미술 과정에 입문하게 되고 후에는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Thomas Pollock Anschutz 의 지도를 받게되며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Willaim Glackens 를 다시 만나게 되지요.

 

1892년 Robert Henri 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들의 연대가 시작됩니다. 슬로언는 The Philadelphia Press 의 미술부에서 삽화가로 일을 하며 미술 작업을 계속해 나갑니다.

 

슬로언의 아내

 

슬로언은 아내와의 관계도 '소설'적인데,  그의 아내 Anna Maria 를 술집에서 만나서 사랑에 빠져 1901년에 결혼하게 됩니다.  안나 마리아는 백화점 점원으로 일했지만 매춘 경력이 있으며 음주벽이 있고, 아마도 이러한 전력을 거친 여성들이 보일법한 히스테리컬한 우울증도 보였던 것 같습니다. 슬로언의 아내에 사랑은 지극정성이었고 한 의사의 제안으로 1906년부터 1913년까지 매일 매일 자기가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는지 일기를 쓰게 됩니다.  (이런 남자 또 한명 있죠, 삐에르 보나르... 삐에르 보나르는 수십년간 목욕탕에서만 지내는 특수한 병을 가진 여인을 돌보며 한세상을 보냈지요. 삐에르 보나르의 그림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목욕하는 여자, 삐에르의 평생의 연인.)  그의 부인은 1943년에 죽고, 슬로언은 이듬해에 새장가를 갔으며 슬로언 자신은 1951년에 운명합니다.

 

슬로언의 사회주의 운동

 

 

1912년 그는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잡지 The Masses 에 미술 편집인으로 참가하며 다른 사회주의 사상이 강한 매체인 Call, Coming Nation 지를 위해서도 삽화를 그려줍니다.  특히나 그가 그린 1914년 6월호 The Masses  표지화가 지금도 자주 인용되거나 소개되곤 하는데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페이지에 Ludlow 학살사건의 이야기가 잠깐 소개된바 있습니다.)  그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고 민중의 생존권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긴 했지만, 예술가로서 슬로언은 '선전 (propaganda)'의 '도구'로 미술 작업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회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에는 긍정하면서도 예술이 '극단적인 정치선전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할만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예술만을 위한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반문할수 있을텐데...제가 추측하기에, 슬로언은 아마도 그 주위의 '사회주의자'들의 어떤 행동들에 거부감을 가졌을법 합니다.  그 '어떤 사회주의자들'이 요구하는 '선전물'을 만들기 싫었겠지요.  그가 꿈꿨던 사회주의와 그가 속한 사회주의자의 무리들의 행동 양식이 일치하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과 거리를 두고 싶었을겁니다.  

 

서민속에 서있던 남자

 

존 프렌치 슬로언의 작품세계는 크게

 

(1) 뉴욕의 풍경

(2) 대중의 삶의 풍경

(3) 잡지,책의 삽화가로서 작업한 세밀한 판화 작품들

 

으로 정리 될수 있습니다. 일단 그가 삽화가로 일했으므로 대중 생활 관련 묘사 작품들이 많은데, 이런 성향은 이미 십대에서부터 생계형 청년 가장으로 세상에 나아갔던 그의 삶의 이력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가 즐겨그린 도시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 가령 도심의 창가에서 빨래를 너는 여인이나, 건물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들, 술집 풍경 역시 그의 삶과 밀착된 풍경이었을 겁니다.  특히나 20세기초의 뉴욕의 전철과 천철 주변 풍경은 그의 '전매특허'와 같은 주제라 할 수 있지요. 조지 벨로우즈 페이지에서 (http://americanart.textcube.com/198)  권투선수 그림을 즐겨그린 미국 화가가 누군가? 이런 퀴즈가 나오면 자동으로 '조지 벨로우즈'를 외치면 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미술관에서 '뉴욕 고가 기차' 풍경화가 멀리서 보일경우,  당신이 애인과 함께 미술관 구경중이라면 "저기 저 뉴욕 풍경속에 고가 기차 그림이 있는 저 그림 말야...저거 아마 존 슬로언이라는 화가의 그림일거야..." 하고 '아는체'를 해도 크게 실례가 안 될 것입니다.

 

 

 

뉴욕 고가 기차 (Elevated Train: EL)

 

The City from Greenwich Village (1922)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바라본 뉴욕
oil on canvas
overall: 66 x 85.7 cm (26 x 33 3/4 in.)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2009년 9월 촬영

이 그림은 비가 그친 겨울 저녁, 맨하탄 남단에서 바라본 맨하탄의 거리 풍경입니다. 고가기찻길 위로 기차가 불을 밝히고 지나가고 비에젖은 도로에 자동차의 불빛이 반사됩니다. 비가 갠것을 눈치채는 이유는 하늘이 부염하게 밝아 있다는 것이지요. 도시는 촉촉히 비에 젖어 있고 골목의 불빛은, 그것이 골목이라서 더욱 밝아 보입니다. 건물 옥상의 물탱크도 보이고, 다리미의 모서리같이 각진 고층 건물이 오른쪽에 보이는데, 건물에서는 불빛들이 새어나옵니다. 일층의 모든 창문은 손님들을 기다리는듯 환하게 불이 켜져있습니다.  옹기종기 걸어가는 행인도 몇명 보이지요. 그림의 전체적인 윤곽은 우리가 마치 몇층 건물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듯 합니다. 액자를 창틀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창밖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기분이 듭니다.

 

 

다음 그림은 워싱턴 필립스 콜렉션이 소장하는 Six O'clock, Winter (1912) 라는 또다른 고가 기차 (EL) 풍경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사진 파일이 상태가 안좋아서 웹에서 얻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속의 여섯시의 풍경은 오전일까요 오후 일까요? (제가 볼때는 오후 여섯이인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단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기로 하고요...  )  이 작품이 1912년작이고, '그리니치 빌지지에서 바라본 뉴욕'이 1922년 작품이므로, 두 그림 사이에는 10년의 세월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두 그림을 함께 놓고 보면, 1912년 작품은 고가기차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선이고, 1922년 작품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이지요.

 

 

 

 

http://www.phillipscollection.org/research/american_art/learning/sloan-learning.htm

 

 

 

무료 커피

 

The Coffee Line (1905)

무료 커피를 받기 위해 줄서있는 사람들

2009년 11월 7일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뉴욕에서 무료 커피를 받기 위해 긴 행렬을 이룬 실업자들을 발견한 슬로언이 그려낸 겨울 저녁의 풍경입니다. 길에는 눈이 쌓여 있지요. 슬로언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 어둡고 긴 행렬을 묘사 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빈곤의 문제가 그를 사회주의 사상으로, The Masses 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비가 들이치는 페리선

 

Wake of the Ferry, No. 1 (1907)

페리선의 물길

2009년 10월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지금도 뉴저지에서 맨하탄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중에 배(Water Taxi)로 강을 건너는 직장인들이 있습니다. 100여년전 뉴욕과 뉴저지를 왕래하는 페리선을  그린것은 당시로서는 '엉뚱한' 시선이었을겁니다.  비가 들이키고 물결이 거칠게 일고, 전체적으로 '내가 그 페리선을 탄듯' 심란한 기분이 드는 그림입니다.  오른쪽 구석에 서있는 여인도 그래서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요.

 

이 그림은 그림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 만큼이나 심상치 않은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슬로언은 1904년에 뉴욕으로 활동지를 옮겼는데, 그의 알콜중독자 부인은 이후로도 걸핏하면 필라델피아의 집으로 가버리곤 했던 모양입니다. 그의 아내가 필라델피아로 가기위해 이 페리호를 종종 이용했지요. 결국 이 그림속의 여인은 슬로언의 알콜중독자 아내의 뒷모습이었던 것인데요.  1907년에 슬로언이 그의 작업실에서 The Eight 전시회를 준비하기 위해 모임을 갖고 있었을때 부인이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남자 작업장에 여자가 허락도 안받고 나타난거죠, 아마 그렇겠죠.) 술도 몇잔 마셨겠다, 화딱지가 난 슬로언이 그 자리에서 의자를 집어던져가지고 이 그림이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래가지고,  나중에 이 그림을 또다시 그리게 되는데 그 (2)번 그림은 필립스 콜렉션에 소장되어 있고, 이 (1)번 그림은 슬로언이 (2)번 그림 그린후에 손을 봐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Beal 2002).  아무래도 이런 뒷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페리선의 풍경이 슬로언과 그의 아내의 풍경이었다 싶기도 하지요.

 

 

 

 

 

 

이상에서 보신바와 같이 대도시의 뒷골목의 삶의 풍경, 이런 풍경은 Henri 가 주도했던 Ashcan 일당들의 주요 소재라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각에서 '이런 그림이 뭐가 대단한가?' 의구심이 들 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그려진 1922년 미국 화단의 상황속에서 이 그림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각은 달라질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미술의 역사는 유럽에 비해서 '일천'할수밖에 없지요. 제가 에드워드 힉스나 조쥬아 존슨과 같은 초기의 '포크 아트' 작가들에 대하여 애정을 갖고 소개를 한 이유가 있는데요, 미국은 초기에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였고 유럽 문화권의 식민지이기도 했습니다. 미국 자생의 문화가 없었다고 봐야지요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를 제외하면).  그래서...Henri 를 위시한 '사실주의' 화가들의 탄생 이전의 미국 회화사는 '유럽 베끼기'의 연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장차는 미국의 인상주의나 그 이전의 풍광, 초상와 위주의 미술과 미술가들을 차례로 소개하겠지만, 제가 왜 이들부터 시작을 안하고 풍속화가 잠깐 건드리다가 '사실주의'로 점프를 해버렸는가하면,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들 이전의 작가들에게서 제가 별 매력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뭐 대략 사이비 유럽미술 냄새가 고약하게 난다는 느낌이 드니까요. 제가 감지하기에 미국의 사실주의 화파들부터, 미국의 미술은 자신의 정체성을 슬슬 세워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에서부터 미국의 풍경이, 미국의 서민이 화면의 중심에 슬슬 등장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슬로언의 전철 그림과 도심 그림이 매력적으로 비쳐지는 것이지요. (이것은 미국인이 아닌, 아시아 출신의 어느 외국인이 이방인의 시각으로 미국 미술을 보는 관점이긴 합니다.)

 

 

 

Yeats at Petitpas'

 

이 그림은 뉴욕 웨스트 사이드의 어느 하숙집에서 열린 파티 장면입니다.  Petitpas 는 프랑스 출신의 두 자매가 경영한 하숙집 이었습니다. 

 

이곳에 영국의 철학자이며 예술가였던 John Butler Yeats (존 버틀러 예이츠 1839-1922)가 머물렀는데, 그는 영문학도들에게 (그리고 교양 차원에서 영시를 읽은 사람들에게)  친근한 시인 William Butler Yeats(1865-1939) 의 아버지입니다.  존 버틀러 예이츠는 69세 되던 해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애시캔' 화가들과 친교를 맺었고, 결국 뉴욕에서 사망하여 뉴욕에 뼈를 묻었지요. 그러고보면, 그의 아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유럽'문화를 이상화 했는데, 아버지인 자신은 말년에 문화 불모지와 같은 뉴욕에 와서 세월을 보내다가 갔군요.

 

흰 턱수염의 노인이 존 버틀러 예이츠이고, 오른쪽 끝에 보이는 검은머리 남자가 존 슬로언이군요. 음식을 들고 서있는 이는 하숙집 주인이고요, 그이의 왼쪽에 모자를 쓴 여인이 슬로언의 부인이라고 합니다. 존 버틀러 예이츠가 이 하숙집에 머무는 동안 이곳은 당시 미술,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즐겨 모이는 장소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Yeats at Petitpas' (1910)

Oil on Canvas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2009년 10월 3일 촬영

 

 

 

해부학교실

 

존 슬로언은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서 Anschutz 선생의 지도를 받았는데, 다음 작품은 해부학 강의를 하는 안슈츠 선생을 에칭 판화로 묘사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Anshutz on Anatomy (1912)

해부학 교실의 안슈츠 선생

Etching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2009년 9월 19일 촬영

 

 

 

 

제 사진 상태가 좋지 못해서, 웹에서 좀더 선명한 이미지를 빌려 왔습니다.  강단아래에 안슈츠 선생이 서서 강의를 하고 있고,  강단위에 인간 골격이 서있고, 그 옆에 성기만 가린 남자 누드 모델이 서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둘러 앉거나 서서 해부학 강의를 듣고 있는데요. 학생들중에 여학생도 보입니다.  아마도 여학생들이 없었다면 남자 누드 모델이 성기를 가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1900년대 초반에 미국 미술 학교에서는 남녀학생이 함께 작업하는 곳에서는 누드 모델이 성기를 드러내면 안되었다고 하지요.

 

 

슬로언에 관심이 많아 자료를 많이 보긴 했는데, 막상 제가 가진 작품 사진 파일이 미미하여 그의 미술 세계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소개할수 없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저는 화집이 아닌 '내 눈'으로 본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기로 작정을 했거든요.  나중에라도 슬로언 작품들이 보이면 보이는대로 잘 갈무리하여 좀더 그에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화집에서 본, 제가 좋아하는 그의 작품들로는 그의 '빨래'관련 그림들인데요. 슬로언이 도심에서 빨래를 널거나, 걷거나 하는 여인들을 모티브로 그린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 참 아름답지요. 그래서 '빨래' 주제의 페이지를 하나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는데요, 이것 역시 훗날로 미루기로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1. http://www.nga.gov/fcgi-bin/tinfo_f?object=52079

 2. Sherry Babbit (2008). Philadelphia Museum of Art: Handbook of the Collections. Philadelphia, PA.

 3. Graham W. J. Beal (2002) American Beauty: Paintings from the Detroit Institute of Arts 1770-1920. Scala Publishers Ltd. London, UK.

 

 

 

 

2009년 12월 6일 red fox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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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ism/Ashcan School2009. 12. 6. 02:41

New York (1911)

George Bellows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워싱턴 국립미술관 (NGA)에서 촬영

 

사진은 클릭하시면 크게 확장시켜 보실수 있습니다.

 

뉴욕풍경

 

 

Goerge Bellows (1882-1925) 의  New York (1911)은 대략 100여년전의 뉴욕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자동차와 마차가 뒤섞여 있고, 고층 건물들과 그제나 이제나 여전한 인파가 보입니다.  사실 이 뉴욕의 풍경은 사진과 같은 실제 광경은 아니라고 합니다. 뉴욕의 여러 장면을 뒤섞어서 뉴욕의 분위기를 전달했다고 봐야겠지요. 얼핏 보면 타임 스퀘어 같기도 하고 얼핀 보면 펜스테이션 앞 같기도 하고, 어찌됐거나 우리가 한번쯤 가봤거나 혹은 영화나 그림을 통해서 지겹게도 많이 본 뉴욕 번화가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일백여년전의 풍경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복장이나 마차 장면을 제외하면 어느 화가가 며칠전에 그린 것이라고 해도 그럴싸해 보입니다.

 

조지 벨로우즈 (1882-1925)는 앞서 소개드린 The Eight (팔인회)나 Ashcan (애시캔) 그룹의 정식 회원으로 활동을 한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The Eight, Ashcan school 의 리더였던 로버트 헨라이 (Robert Henri 1865-1929)와 친분이 두터웠고, 헨라이의 미술관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의 작품들이 팔인회, 애시캔 회원들의 화풍과 통했기 때문에 조지 벨로우즈를 '애시캔'의 일원으로 평가하는 비평가들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의 작품들이 미국의 도시, 서민들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냈으므로 조지 벨로우즈를 애시캔 그룹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정리를 해보는 것입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오하이오(Ohio) 의 주도(행정수도)인 콜럼버스 (Columbus) 태생입니다. 이곳에 오하이오 주립대 (Ohio State University)가 있지요.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주로 야구선수와 교지 삽화가, 그리고 잡지의 삽화가로 활동했습니다.  오하이오 주립대에 한번 가본적이 있지요. 제 친구들이 그곳 수학과에서 공부를 했는데, 한 친구는 공부 마치고 수학자로 살고 있고, 또 한 친구는 아직도 거기서 공부중입니다. (글 쓰다가 친구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Robert Henri 역시 오하이오 출신인데 그는 신시내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조지 벨로우즈와 로버트 헨리가 고향이 가까웠다는 이유로 더욱 친근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스포츠맨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오하이오 주립대를 졸업한 후에 프로야구 선수가 될것인가 잡지 삽화가로 살것인가 고민하다가, 미술 수업을 받겠다고 작정하고 뉴욕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뉴욕 미술학교 선생으로 재직하는 로버트 헨라이를 만나게 되고 그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특히나 그의 권투경기 장면이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 합니다.  그의 도시 풍경이나 다른 그림들도 그 나름의 힘과 역동성이 느껴지지만, 단답형 상식 퀴즈 대회에서 '권투하는 그림' 내 놓고 '이거 그린 사람?'하는 퀴즈가 나온다면 자동으로 '조지 벨로우즈!'을 외칠만 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그림 세계를 단순무식하게 정리해본다면 대략 세가지 정도로 분류가 됩니다:

 

 (1) 그를 대표하는, 권투선수 시리즈

 (2) 도시 주변의 풍경과 서민의 삶

 (3) 일반 서민의 초상화

 

제가 미술관들을 돌면서 '사냥'한 그의 작품 사진들을 주제별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권투선수

 

Both Members of This Club (1909)

두 선수

Oil on canvas, 45 1/4 x 63 1/8 in. (115 x 160.5 cm)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흰색의 하일라이트가 들어간 왼쪽 선수, 얼굴에 피가 낭자합니다.  오른쪽 선수, 치고 들어가는 대각선 구도가 역동적이지요. 반대방향의 대각석 구도의 관객 풍경이 그림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피가 낭자한 가운데, 아래 중앙의 관객은 입을 벌리고 웃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권투선수가 피를 흘리거나 말거나, 관객의 입장에서는 링에서 피가 튀고 살점이 튀고 누군가 되게 쓰러지고 그래야 신이 나는 법입니다.

 

웹에서 조지 벨로우스 이미지를 찾아보시면 이와 유사한 다른 권투경기 장면 그림들을 많이 발견하실수 있습니다. 그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조지 벨로우즈의 권투경기 그림을 찾아 천지를 유랑하며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어릴때, 할아버지가 권투중계의 팬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권투중계의 일정을 일일이 표시해놓고, 그의 일기장에 적어놓고 절대 빼놓지 않고 들여다봤습니다. 아마도 돌아가실때까지 그러셨을겁니다. 단지 중계방송만 보신것이 아니고, 서울 우리집에 오시면, 어린 우리들을 이끌고 월곡천 건너, 시장통에 있는 '체육관'에 구경을 가곤 했습니다. '체육관'이 뭐하는데냐 하면 당시 무명 아마추어 선수들이, 혹은 권투선수 지망생들이 모여서 연습하는 '도장'이다 이거죠.  우리들은 거기서 밤이 이슥하도록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고, 혼자 줄넘기하거나 혼자 샌드백 치면서 훈련하는것을 구경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체육관에 따로 '탈의 시설'이 없었던것 같습니다. 가끔 우리는 잘생긴 '오빠'들의 (그때 나는 꼬맹이였으므로) 실한 엉덩이 구경도 할수 있었는데,  선수들이 체육관의 구석진곳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거든요. 그 구석진 곳이 하필 우리가 염탐하던 창가였으므로 그들이 창가쪽 구석에서 후다닥 바지를 내리고 체육복으로 갈아있거나, 체육복에서 평상복으로 탈바꿈하는 광경을 볼 수 밖에 없었지요. (일부러 그런게 아니고요 -.-;; )   아니...엉덩이밖에 안 봤습니다... 헤헤헤.

 

어릴때는 할아버지가 권투중계 보시는 것이 못마땅했는데요, (왜냐하면 내가 어린이 프로를 볼 수가 없으니까) 지금도 그런 스포츠 중계에 재미를 못느끼므로 여전히 볼 일이 없는데요, 하지만 이 그림은 제 맘에 듭니다.  조지 벨로우즈가 무슨 맘으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권투 장면을 그의 그림 소재로 잡았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신선한' 시도였고, 결국 그의 트레이드마크 (Signiture) 작품이 되고 말았지만, 그것 말고도,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인생 이렇게 치고 받고 맞다가 뻗는거지...하는 비감한 생각도 들고,  누구나 그런거지, 나만 유독 두드려 맞는것도 아니지, 이런 위안감이 든다니깐요, 글쎄.

 

 

 

2009년 12월 13일,  국립 미술관에 가서 조지 벨로우즈의 Both Members of This Club (1909)라는 작품을 다시 감상하고 있었는데요, 마침 미술관 도슨트(Docent 전문 안내원)가 사람들을 이쪽으로 안내해와서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더군요. 그래서 곁에서 귀동냥을 했지요. 새로 알게된 사실은,  1900년 초반 당시에는 상업적으로 복싱 경기를 하는것이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공개적인 복싱매치가 아니고, 남성들의 '음성적인' 클럽에서 진행된 경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목도 Both Members of This Club (이 클럽의 두 회원)이라는 식으로 달린 것이라고 하네요.  두 '선수'라고 하면 안되고, 그냥 클럽의 회원간의 친선경기같은.    그러면 이 클럽에서는 복싱만 했겠는가?  다소 '음성적인' 클럽이었으므로 그 안에서는 복싱 말고도 다른, 다양한, 그러나 저로서는 전혀 알수 없는, 남자들만의 '음성적'인 오락이 진행되었겠지요~

 

 

 

 

 

뉴욕 빈민가의 아이들

 

 

이 작품은 위의 권투선수 그림보다 2년 앞서서 그려진 것입니다.  뉴욕의 East River 강변에는 그 당시 가난뱅이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서울의 허술한 한강변 산동네를 연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제목이 Forty Two Kids (42명의 아이들) 인데요 제목의 'kid'가 단순한 '아이들' 이 아닙니다. 아이들이라는 영어 단어로는 Children 이 따로 있지요.  요즘 Kids라는 단어를 '아이들'이라는 의미로 흔히 사용하기는 하지만 백여년전 이 kid 라는 말은 '슬랭'으로 대개 이민자 아이들처럼 가난뱅이 아이들을 일컫는 표현이었다고 합니다. 그냥 아이들이 아니라...말하자면...'애새끼들'이라는 뉘앙스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

 

이 kids 라는 어휘를 저도 아주 조심해서 사용하는 편인데, 제가 교육을 전공했고, 학교에서 교사로도 일을했고, 그래서 대학원 수업을 들을때도, 온통 '아이들,' '학생들' 관련 이야기였지요. 그러니까 주로 사용하는 어휘가 students, children, ESL children, ESL students 뭐 이런 언저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무심코 지도교수와 논문 이야기를 하다가, "These ESL kids..." 뭐 이러고 말을 하니까 지도교수가 주의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학생을 존중해야 하는 교육자이다. students 나 children, learners 말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적합하지만 kids 라는 말은 부적합해보인다."  그러니까 그 kids 라는 어휘가 아직도 품위있는  어휘로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 kid의 원뜻은 염소새끼 입니다.)

 

자 우리들의 조지 벨로우즈 선수(?)가 그 가난뱅이 뉴욕 빈민가의 이민자의 '애새끼'들을 화폭에 담았다는 것인데요. 정말 42명인지 한번 헤아려 볼까요?

 

 

Forty Two Kids (1907)

42명의 아이들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촬영

 

 

이 작품이 1908년 어느 전시회에 소개가 되었을때 평단의 반응은 싸늘하고 조롱기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뭐 이따위 그림을 그림이라고 그렸냐 이거죠.  가난뱅이 애새끼들이 허술한 강변에서 노는 것이 무슨 그림의 소재가 되는가 씹었을겁니다.  하지만 평단의 싸늘한 반응과는 달리, 이 작품은 곧 개인 콜렉터에게 팔려나갔는데, 이것이 조지 벨로우즈가 최초로 개인 콜렉터에게 판매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워싱턴의 코코란 미술관에 있지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Bill Bryson 의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kid 의 일화중에서 전쟁이후 베이비붐 세대로 성장했던 작가 빌 브라이슨의 회고가 소개됩니다.  그가 과장되게 술회하기를, 전후 베이비붐 세대였던 자신들은, 어딜가나 애가 넘쳐나서,  그가 살던 아이오와 시 변두리의 강변에 가면 수천명의 아이들이 모여서 멱감기를 했다고 하는데요.  물론 조지 벨로우즈 그림속의 아이들은 1907년 8월의 아이들입니다.  베이비붐 세대보다 50년전에 '이민자 붐' 세대의 아이들이지요.

 

이 그림이 제게도 낯설지 않은 이유는, 비록 지구 정반대쪽 대륙에서 성장했지만, 저 역시 60년대 70년대 베이비붐 시대의 일원으로 변두리 가난뱅이 아이로 성장했다는 공통 분모 때문일것입니다.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의 회고로는 '네 오라비나 네가 태어나던 시절에는 어느 집에서나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어느집 여자나 배가 불러 다녔다. 애가 참 많이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 많은 애들이 뭘하고 놀았을까요.  사실 도심에서 성장했지만 저는 어린시절 골목에서 뭘 하고 놀은 기억이 별로 남아있지 않고,  즐겁게 논 기억은 모두 시골집에서였습니다.  여름 한철 시골 개울가에 가면 약속도 필요없이 아이들이 있었고, 우리들은 수영복도 없이 그냥 입은 옷을 벗어던지고 물에 들어가 놀았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저는 초등학교 2학년때까지 옷을 벗고  개울에서 물놀이를 했습니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아직 몰랐다는 것이지요) 여자아이나 남자아이나 그냥 물속으로 뛰어 드는 것으로 각자 부끄러운데를 가렸다고 생각하고 그냥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는 것이지요.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빤쓰라도 입고 물장구를 쳤고, 초등학교 5학년부터는 싸구려 나이롱 수영복을 입고 노는 '문명인' 반열에 들 수 있었지요.

 

제가 가끔 이런 저의 '야만적'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  서울이나 대도시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또래 친구들은 저를 '원시인' 쳐다보듯 바라보며 무슨 외계인이나 거짓말장이를 대하듯 휑한 표정으로 대합니다.  자기네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풍경속에 내가 있었다 이거죠.  하하하. 사람들은 자기가 처한 환경을 '평균적' 환경으로 인지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신의 경험 영역 바깥의 일은 외계의 일처럼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나'역시 피할수 없는 한계죠. 나 역시 그런 눈으로 남을 판단할 것이므로.  조지 벨로우즈가 '애정'을 갖고 변두리 아이들이 벌거벗고 노는 풍경을 그렸을때, 어떤이들은 '이것도 그림이냐'로 반응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럴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지구상에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거죠...

 

 

첨언:  그런데 위의 42명의 아이들 그림이...어쩐지 Thomas Eakins The Swimming Hole(1885) 라는 그림을 연상시킵니다.  토마스 이킨스 (1844-1916)는 미국 사실주의 미술가들의 '대부'쯤되는, 후에 활동하는 사실주의 화가들 (The Eight, Ashcan)에게 가장 영향을 끼쳤던 미국화가라 할 만 합니다.  조지 벨로우즈가 선배 대가인 이킨스의 그림을 염두에 두었는지 아닌지는 알수 없으나, 참 닮았단 말이지요...  ;-)

 

 

 

 

 

변두리의 푸른아침

 

멀리로 고층 건물들이 밀집한 것으로 보아 역시 뉴욕의 강변 풍경으로 보입니다. 역시 강변 부두에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고 누군가 불을 피웠는지 흰 연기도 솟아 오릅니다.  대략 어느 추운 겨울 아침 강변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으니까요. 추우면 웅크리쟎아요. 이들의 하루는 오늘도 고단하게 흐를것입니다.  이들의 곤고한 풍경과는 달리 푸른 색조가 아름답지요? 

 

 

Blue Morning (1909)

푸른 아침

Oil on Canvas

86.3 x 111.7 cm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다리밑 외딴 숙소

 

그림 오른쪽 구조물이나 그 위를 지나는 판으로 보아 이것은 다리(교각)의 일부 같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뉴욕시의 어느 커다란 다리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있고, 그림의 중앙에 6층짜리 건물이 똠방, 대똑하게 서있습니다.  이곳이 그림의 제목이 되는 '외딴 숙소'인것 같습니다.  'tenement' 라는 어휘를 언라인으로 검색해보면 이런 의미가 소개가 됩니다. (http://www.thefreedictionary.com/tenement)

 

1. A building for human habitation, especially one that is rented to tenants.
2. A rundown, low-rental apartment building whose facilities and maintenance barely meet minimum standards.

해석: (1)  세입자 임대용의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
        (2) 극히 기초적인 수준도 안되는 시설을 갖추고 있는  싸구려 아파트 빌딩

 

 

The Lone Tenement (1909)

외딴 숙소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그림 왼편에 사람들이 모여서 불을 쬐고 있는것 같지요?  멀리 강에 은은한 햇살이 비치는데, 다리밑의 사람들은 불가에 모여 서 있습니다. 웅덩이에 보이는 물은 살얼음이 얼었을것 같습니다.  이런 뉴욕의 풍경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해던 Georgia Totto O'Keeffe (November 15, 1887 – March 6, 1986) 가 그렸던 뉴욕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Georgia O'Keeffe
Cityscape with Roses
1932
oil
84 3/8 x 48 1/2 in.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the Georgia O'Keeffe Foundation

 

 

1932년이면 미국의 경제 암흑기 입니다. 그 당시 조지아 오키프가 묘사한 뉴욕은 장미빛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작가의 작업 취향이야 각자 자유이고 조지아 오키프가 매력적인 화가임에는 틀림없으나,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에 '사회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돈많은 사진가 스티글리츠의 사랑속에 경제적인 어려움도 모르고 예술에만 전념했겠지요.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만을 들여다볼때는 그의 작품에 감탄을 하다가도, 그 당시에 혹은 그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하던 작가들과 비교해보면, 어딘가 조지아 오키프의 미술세계가 '공허'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사람'한테 관심이 없었던 사람 같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러한 저의 비판적인 시각은, 사람이나 '세상'에 관심을 가진 저 자신의 취향에서 출발하는 것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냥 문득, 조지 벨로우즈의 뉴욕 풍경 그림을 보다가, 그 속의 가난뱅이 애새끼들이라던가, 빈민들의 풍경이 그려진 그림을 보다가 문득,  조지아오키프의 뉴욕 풍경이 떠오르면서...아하...이들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았던거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National Gallery of Art 에 조지 벨로우즈의 그림이 걸려있는 풍경입니다. 왼쪽부터 '권투선수' '푸른 아침' 그리고 '뉴욕' 그리고 '쓸쓸한 숙소'가 차례차례 보입니다.

 

 

 

초상화들

 

 

다음은 크라이슬러에서 '사냥'한 그의 '피아노 앞의 엠마' 입니다. 엠마는 그의 부인입니다. 뉴욕의 미술학교에서 만났는데 엠마는 그림을 그만두고 피아노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위의 Blue Morning 에 보였던 그 푸른 빛이 이 그림에서 좀더 뚜렷하게 표현됩니다. 아, 조지 벨로우즈는 이런 색감의 푸른빛을 좋아했구나 추측하게 됩니다.

 

 

Emma at the Piano (1914)

피아노 앞의 엠마

Oil on Canvas

94x73 (가로세로)

2009년 11월 29일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의 두 딸중 큰딸인 앤 입니다. 커튼과 허리 부분의 청색과 흰 드레스가 대조를 이루는데요. 역시 Blue Morning 이나 Emma at the Piano 에서 선보인 청색과 흰색의 대조가 이 그림에서도 나타납니다.

 

Anne in White (1920)

흰 드레스의 앤

147x108.9 cm

Oil on Canvas

2009년 11월 7일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는 엠마와 결혼한 이후로 두 딸의 아빠가 되었는데, 아내와 딸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그의 그림의 소재가 도시의 풍경에서 가정적인 것으로 변모합니다. 그래서 43년의 짧은 생에서 그의 후기에는 초상화 작품들이 그려집니다. 물론 그의 초상화 작품은 그의 아내 혹은 그가 살던 마을의 마을 사람들, 이런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서 삽화 작업도 계속했고, 시카고 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습니다.  그는 '맹장'이 터져서 그만 요절을 하고 맙니다.

 

 

2009년 12월 5일 redfox

 

 

그의 마지막 작품들

 

 

Ringside Seat (1924)

맨 앞줄 관람석

2009년 9월 24일 워싱턴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The Picnic (소풍) c. 1924

Oil on Canvas

2010년 1월 23일 볼티모어 미술관 미국화 갤러리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 (1882-1925)는 43세의 나이에 (우리나라식으로 따지면 44세가 되던 해에) 맹장이 터져서 요절한 화가인데요, 위의 두 작품들은 1924년, 그가 죽기 전 1년전쯤에 그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위의 경기장 장면이 좀 뿌옇지요?  제가 사진을 잘 못 찍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흐릿한 등불 아래의 장면을 묘사하듯 노리끼리하게 아슴프레 합니다.  제가 허시혼에 여러차례 들렀는데, 볼때마다 저 작품은 좀 어딘가 노란 안개속에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아래의 '소풍'역시 그가 죽기1년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요, 그림 분위기가 매우 독특합니다.  (그림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보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미술관에 갈때마다 본 편인데요. 그러니까 제가 조지 벨로우즈에 대해서 알기 전에도 이 작품을 알고 있었습니다.  작가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채로 분위기가 특이한 작품으로 기억을 한 거죠. 

 

제목이 '소풍'인데요, 전체적인 풍경이나 분위기는 암울하고, 음침하고, 곧 어디서 천둥 번개가 칠것같은 불안감을 줍니다. 갑자가 돌풍이 불것같기도 하고요. 물빛도 하늘빛도 심상치가 않아요. 구름조차도 예사롭지가 않고요.

 

가운데에는 소녀가 줄넘기를 들고 서 있고요, 그 아래에서 누군가가 마치 절벽에서 올라오는듯 손을 뻗치고 있죠. 낚싯대를 드리운 남자와, 피크닉 보자기를 펼친 여자가 왼편에 있는데, 오른편에는 한 남자가 사지를 벌리고 하늘을 향해 누워있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서 이태전에 아이들과 대화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림이 세기말 적이야. 뭐랄까...암담해... 저 줄넘기를 들고 있는 소녀 말야, 저 줄넘기 이미지는 살바도르 달리도 그린적이 있고... 영원의 상징이라고도 해. 영원은 죽음과도 통한다는 거 알아? 죽음은 영원하쟎아.  줄넘기가 그리는 원, 그 원의 끝없는 회전, 인연의 굴레를 벗어날수 없음을 상징할수도 있고.  하필 줄넘기를 들고 언덕 가장자리에 서있는건 또 뭐니. 불안해보이쟎아.  전체적으로 참 불안해보여."

 

이 그림을 보면 벨로우즈가 즐겨 그렸던 청색 색조와 흰색의 하일라이트도 여전히 보이는데요, 신비로우면서도 스산하죠?  어쩌면 이것이 그가 사랑하는 두 딸과, 아내와 가졌던 인생 최후의 소풍이었는지도 모르죠. 그는 화면 오른쪽에 자신의 주검까지 그렸던 것인지도 몰라요. 그 자신은 그걸 의식하지 못했겠죠.

 

우리는 가끔 그런 얘기 하쟎아요. 어떤 사람이 죽었을때, 그가 죽기전에 나눴던 이야기나 일화들을 떠올리면서, "죽을걸 알고 그랬나?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 뭐 이런 얘기 하죠.  뭐 마치 죽을 사람처럼 유언처럼 몇마디 한 것이 마지막 말이 되기도 하고요.  생명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안대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뿐 안다는거죠.  그래서 죽음을 예견하는 말이나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해요 (그런 설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냥 그런 관점에서 그는 이미 그의 죽음을 예견한 그림을 남긴것이 아니었을까....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다시 만났을때, 그리고 문득 그의 생몰연대와 그림의 제작 년대를 비교해보다가, 문득,  번개치듯 문득,  이런 쓸데없는 상상도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 상상을 하자, 이 그림이 품고 있던 신비로운 세기말적 느낌에 대한 해답을 얻은 기분이 드는겁니다.  그는...다가올...죽음을...그렸나봐...

 

 

2010년 1월 29일 내용 보충 RedFox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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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료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2009.12.14 09:43 [ ADDR : EDIT/ DEL : REPLY ]
  2. 그림 추가, 내용 추가 되었습니다.

    2010.01.30 09:09 [ ADDR : EDIT/ DEL : REPLY ]

Realism/Ashcan School2009. 12. 5. 13:24

 

Snow in New York  뉴욕의 눈 (雪),  1902년

Robert Henri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워싱턴 국립 미술관에서 촬영

 

 

로버트 헨라이 (Robert Henri 1865-1929)는 미국 사회사실주의(Social Realism) 미술가들의 스승으로 알려진 화가 입니다.  이 사람의 가족력이 좀 흥미로운데, 본디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Cozad 였고 그래서 로버트 헨라이는 원래 Robert Henry Cozad 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웃 사람과 다투다가 총질을 하는 바람에 이웃사람게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야반도주를 하는 수 밖에요. 결국 가족들도 야반도주한 가장을 따라 도망을 가게 되었는데, 훗날 새로운 삶을 위해 성씨를 바꿔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이름이 졸지에 로버트 헨라이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아, 그는 미국출신으로 유럽에서 주로 활동했던 화가 Mary Cassett (메리 커셋)과도 친척이라고 합니다.  메리 커셋에 대한 소개는 다음으로 미루기고 하겠습니다.

 

헨라이는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서 수학했고, 당시의 미국 젊은이들이 그러하였듯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1891년 필라델피아로 다시 돌아온 헨라이는 1892년부터 미술 학교에서 미술 교육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당시 인쇄매체의 삽화가로 활동하던

 * William Glackens

 * Goerge Luks

 * Everett Shinn

 * John French Sloan

 

등과 어울리며  Ralph Waldo Emerson,  Walt Whitman, Henry David Thoreau 의 사회사상 관련 글을 읽습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미국의 '초절주의 (Transcendentalism)'와 'Self Reliance (자기 주체)' 정신으로 널리 알려진 철학자였고, 월트 휘트만은 미국 최초의 산문시인으로 풀잎과도 같이 강인한 대중들을 노래한 시인이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우리에게 월든호수 (Walden) 라는 작품으로 알려진 역시 Self Reliance 정신의 신봉자였던 인물입니다.

 

이들은 이후에 활동의 본거지를 뉴욕으로 옮기게 됩니다. 헨라이는 뉴욕의 예술학교 (New York School of Art)에서 교편을 쥐게 되는데 이때 Edward Hopper, Rockwell Kent, George Bellow, Stuart Davis 등을 가르치게 되지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미국의 상황은, 사회적으로는 노동자들이 임금이나 작업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동조합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1904년에는 한해 동안 전국적으로 4,000 번의 파업이 진행되었다는 집계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노동운동은 주로 시카고, 디트로이트, 샌프란시스코, 뉴욕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미국의 고등학생등의 필독서중에 Upton Sinclair (업튼 싱클레어)의 The Jungle (정글, 1906)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고기 가공장에서 일하는 이민자 가족의 비극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이민자들은 Self Reliance (자기 주체) 정신으로 열심히 살아가려고 애쓰지만, 이들이 처한 노동 환경은 호락호락 하지가 않습니다. 약육강식의 정글이라는 얘기지요.  미국의 Self Reliance 라는 정신적 미덕도 통하지 않는 현상을 싱클레어는 고발하고 있는데요, 이와 같은 소설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나오고, 노동운동도 활발하게 진행되는 중심에 당시의 미술가들도 서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당시 미술가들은 사실적인 사회, 사람들의 풍경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런 흐름의 선두에 서 있던 집단이 헨라이를 위시한 애쉬캔 (Ashcan) 그룹이고, 이들이 후에 The Eight (8인회)로 거듭나게 되지요. 헨라이는 그의 친구들이나 제자들에게  주변의 사람과 삶의 풍경을 그리되, 이를 상대가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로 잽싸게 그리라는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Do it all in one sitting if you can," he advisded them. "In one minute if you can."  (Pohl, 2008) 

(해석: "그자리에서 한번에 그려버리게나," 헨라이는 그들에게 충고했다. "가능하다면 일분 안에." )

 

1902년 뉴욕에서 전시회를 가진 후 그는 풍경화를 접고 초상화를 주로 그리게 되었으며, 1908년에는 맥베스 갤러리에서 "The Eight (팔인회)" 전시회를 열게 됩니다. 사실 이 전시회를 열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마치 인상파 화가들이 프랑스의 살롱전에서 푸대접을 받은 후에 홧김에 인상파의 세기를 열었던 것처럼, Ashcan 화가들이 미국의 전시장에서 푸대접을 받자 미술비평가들과 정면으로 한판 단단히 붙은 후에 이 '팔인회' 전시회를 열게 된 것인데, 그 결과는 대중적으로나 비평계 모두 아주 호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헨라이는 사실 그의 미술 작품 보다는 그가 미국 사회사실주의 화가들의 지도자 역할을 잘 해냈고, 그리고 미술 교육에서 공로가 크다는 점에서 오히려 미술사적 인정을 받는 편입니다.

 

헨라이가 후기에 초상화로 돌아서긴 했는데, 그가 초상화 작업을 통해 사회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화폭에 담아보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미술관에서 발견한 그의 초상화 작품들은 악사, 소년, 인디안 소녀,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Gypsy with a Bandurria (1906)

반두리아를 들고 있는 짚시

Oil on Canvas

2009년 12월 29일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헨라이가 그린 작품입니다. (제가 헨라이에 큰 관심이 없다보니, 사진 상태가 성의가 없어보이지요? 예... 그래도 정성껏 찍을걸 하는 후회가 생깁니다.)  헨라이는 유럽의 '마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으로 소개가 되는데요, 이 그림 사진을 보니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과 비슷한 구도와 소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리부는 소년 창작 년도를 찾아보니 1866년이군요. 다리 모양 닮았죠?  전체적인 구도도...

 

 

Manet, The Fifer (1866)

 

 

 

 

 

 

The Beach Hat (1914)

비치 모자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Boy with Plaid Scarf (1916)

격자무늬 목도리를 한 소년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Indian Girl in White Ceremonial Blanket (1917)

제사용 담요를 휘감고 있는 인디안 소녀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이 작품은 헨라이가 뉴멕시코주의 산타페를 두번째 방문했을때 현지의 인디언소녀를 모델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소녀의 이름은 Julianita 로 San Ildefonso Indian 종족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아마도 제 그림 사진 파일을 뒤져보면 어딘가에 헨라이의 초상화 사진이 몇장 더 있을것 같습니다.  때로는 미술관에서 헨라이의 작품이 보일때,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한테 매력이 없어 보였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여기저기서 중구난방으로 봤던것들을 한페이지에 시간순서대로 정리하다보니 제가 미술관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도 됩니다. 그냥 하나 하나 볼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 예를 들자면 헨라이의 초상화의 소재가 된 인물들이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혹은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 인물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면서도 모두 닮아보인다는 것 (이는 헨라이의 표현 스타일에 일관성이 있어서 그러할 것이겠지요) 뭐 이러한 것들 입니다.  짚시 악사 그림과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 그림의 유사성도 미술관에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  사진을 쳐다보면서 생각한 것이고요.  그래서,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현상'을 관찰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미술관에서 미술작품을 눈으로 감상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후의 사색이나 반추 역시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

 

돌아보면, 저는 미술관에서 작품들을 구경하면서 '쾌락'을 느끼기도 하지만, 후에 사진들을 다시 정리하거나 관련 페이지를 적으면서,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사실들도 많은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의 '미국 미술 이야기' 블로그 프로젝트를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깨닫게 되는 것들이 페이지가 쌓일수록 늘어가니까요.

 

 

 

 

 

관련 페이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118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http://americanart.textcube.com/137

 

 

참고문헌:

 

1. Frances K. Pohl (2008),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Thames & Hudson; New York, NY

2. Suzanne Bailey (2001), Essential History of American Art, Parragon Publishing, Bath BA, UK

3. William G. Scheller (2008), America: A History in Art, The American journey told by painters, sculptors, photographers, and architects. Black Dog & Leventhal Publishers; New York, NY.

4. Marcha N. Hagood & Jefferson C. Harrison (2005) American Art at the Chrysler Museum: Selected paintings, sculpture, and drawings. Chrysler Museum of Art: Norfolk, VA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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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ism/EdwardHopper2009. 12. 4. 09:15

Edward Hopper (1882-1967)

New York Pavement (1924 or 1925)

뉴욕의 보도

Oil on Canvas

75.6 x 62.9cm (가로 x 세로)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월척'을 낚은 기분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1924년이나 1925년 작품으로 추측되므로 그가 42세때, 아직 세상이 '대가'의 출현을 알아보지 못하던 시기의 그림이라 할 만 합니다.  '뉴욕의 보도'라는 제목처럼 뉴욕 시내의 어떤 건물 앞 풍경을  맞은편 건물 2층이나 3층 혹은 옥상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각도로 잡아 놓았습니다.  얼핏 수녀복을 입은듯한 여인이 유모차를  밀며 걸어가는데 이 여인의 머리 두건이 펄럭거리는 것으로 보아 바람이 휙 부는듯 합니다.  도심의 골목길 앞을 지날때 문득 불어오는 골바람일지도 모르지요.

 

여인의 나부끼는 머리두건이나 그의 방향성에서 어떤 움직임이 느껴지지만, 그외의 모든 장치들은 요지부동으로 꼼짝도 않겠다는 태도로 무겁게 버티고 있습니다. 회색돌로 이루어진 건물과 역시 같은 색조의 보도에는 어떤 틈새도 보이지 않습니다.  유모차속의 아이의 얼굴도 보이지 않습니다.  건물의 창 안쪽으로 노란 블라인드가 드리워져 있고, 가운데 창은 커튼도 열려있지만, 커튼 안은 캄캄하기만 할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수녀처럼 보이는 이 사람의 검은 옷과, 유모차의 검정빛, 그리고 건물 입구나 유리창 안의 검정색은  노란 블라인드와 대조를 이루면서 더욱 어둡게 느껴집니다.

 

저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엄마, 아버지, 아이들' 이런 '가족'이 어우러진 풍경을 본 적이 없고, 아이들이나 아기를 본 적도 없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 그림이 '아기'가 등장하는 유일한 그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조차 '아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아기'의 존재를 추측할 뿐. 

 

우리에게 호퍼의 그림이 외롭거나, 쓸쓸하거나, 혹은 을씨년 스러워 보이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의 그림에 '미래'를 상징하는 '아이'가 없어서 그런것은 아닌지...  문득, 유모차를 끌고가는 검은 제복의 유모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어머니와 아기의 관계가 아닌 을씨년 스러운 제복을 입은 (저승사자 같아보이는) 유모의 보호를 받는 이 아기가 행복할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그림이 아주 암담해보이지 않는 이유는 아기를 덮고 있는 붉은 천,  유모의 붉은 뺨, 건물 2층 부분에 보이는 붉은 벽돌 일부, 그리고 창문 블라인드의 햇빛같이 고요한 연노란색이 여기저기서 '생기'를 보내기 때문인데요, 이런 미묘한 생기 때문에 우리들은 호퍼의 쓸쓸맞아 미치겠는 그림앞에서 아쉬운듯 아쉬운듯 떠나지 못하고 맴돌게 되는 것 같습니다.

 

 

2009년 12월 3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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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ism/Ashcan School2009. 10. 24. 03:21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이전페이지,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에 대한 글에 이어, 해당 페이지에서 잠깐 소개한 The Eight (8인회)의 작품 성향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페이지를 하나 만들어봅니다. 2009년 10월 4일 (한국, 추석날)에 워싱턴 Corcoran Gallery of Art http://americanart.textcube.com/97  에 갔을때 마침 The Eight 화가들 작품이 한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어서 작품 사진들을 카메라에 담아 올수 있었지요.  분명 The Eight 을 타이틀로 한 전시이긴 했으나 8인회 멤버중에서 여섯명의 작품이 있었고, 그리고 역시 이들의 후배격인 다른 두명의 화가가 추가 되었습니다. 모두 8인의 그림이 소개가 되긴 했으나 그 중 두명은 8인회 소속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들이 20세기 초반에 Social Realist 사회 사실주의로서 활동할 당시의 그림 분위기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추가된 두명의 그림이 오히려 더욱 효과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코코란에서 찍어온 사진들을 나열하면서 간단히 스케치 하겠습니다.

 

일단, 기획전 안내판입니다. The Eight (8인회)와 The 14th Street School (14번가파)로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8인회 회원중 코코란이 소장하여 전시한 작품은 Luks 와 Shinn 을 제외한 여섯명의 그림들입니다.

 

 1. William Glackens (1870-1938)  윌리암 글래큰스

 2. Robert Henri (1865-1929) 로버트 헨라이 http://americanart.textcube.com/197

 3. Goerge Luks (1867-1933) 조지 럭스 (x) http://americanart.textcube.com/278

 4. Everett Shinn (1876-1953) 이브릿 쉰 (x) http://americanart.textcube.com/272

 5. John French Sloan (1871-1951) 존 프렌치 슬로언 http://americanart.textcube.com/201

 6. Arthur B. Davies (1862-1928) 아서 데이비스 http://americanart.textcube.com/279

 7. Ernest Lawson (1873-1939) 어니스트 로슨 http://americanart.textcube.com/281

 8. Maurice Prendergast (1859-1924) 모리스 프렌더개스트  http://americanart.textcube.com/205

 

14번가파의 작가들중

 1. Reginald Marsh (1898-1954)  레기날드 마시

 2. Raphael Soyer (1899-1987) 라파엘 소여

의 작품이 전시가 되었습니다.

 

(사진은 클릭하시면 커집니다)

 

전시장 풍경입니다.

 

 

 

안내판입니다.

 

 

 

위에 명시된 순서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1. William Glackens (1870-1938)  윌리암 글래큰스

 

 

 

 

2. Robert Henri (1865-1929) 로버트 헨라이  http://americanart.textcube.com/197

 

 

3. Goerge Luks (1867-1933) 조지 럭스  (x)  http://americanart.textcube.com/278

4. Everett Shinn (1876-1953) 이브릿 쉰  (x) http://americanart.textcube.com/272

 

 

5. John French Sloan (1871-1951) 존 프렌치 슬로언 http://americanart.textcube.com/201

 

 

6. Arthur B. Davies (1862-1928) 아서 데이비스 http://americanart.textcube.com/279

 

 

 

7. Ernest Lawson (1873-1939) 어니스트 로슨

 

 

 

 

8. Maurice Prendergast (1859-1924) 모리스 프렌더개스트 http://americanart.textcube.com/205

 

 

 

14번가화파

 

1. Reginald Marsh (1898-1954)  레기날드 마시

 

 

 

 

2. Raphael Soyer (1899-1987) 라파엘 소여

 

 

 

 

제가 일찌감치 퇴근을 해야 하는 이유로 '제목'과 같은 세부 사항은 추후에 추가하여 페이지를 완성시키겠습니다만,  얼핏 보기에 '무엇이 사회적 사실주의'라는거냐?  이 그림에서 도시, 빈민, 혹은 사회주의적 비판적 시선을 가진 그림이 몇점이나 되느냐?  이런것을 소위 사회적 사실주의 그림이라고 하는거냐?  이런 의문이 들수도 있을겁니다.  보따리 싸가지고 오피스를 나가기 전에,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 기획전 자체가 '사회적 사실주의'에 촛점을 맞춘것이기보다는 코코란이 소장하고 있는 The Eight 의 화가들, 14번가화가들의 '작품'을 내 건 것입니다. 그 작가들이 그린 그림중에 코코란은 이런 그림들을 갖고 있다는 뜻이지요.   레기날드 마시가 특히 뉴욕 뒷골목 빈민가 풍경을 암울한 색조로 잘 표현해 냈지요.  헨라이가 그린 아메리카 인디언 원주민의 초상도 '초상화'로서 크게 주목할 것은 없지만, 그가 '사라져가는 힘없는 사람'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도 들여다 볼 만한 대목입니다.  소여가 그린 터미널의 모습은, 지구 어디에서도 발견될 만한 대중들의 삶의 모습이지요.  이 그림 앞에 서면, "왜 터미널은 어딜가나 다 비슷한 풍경일까?"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딱딱한 의자, 어딘가 불편하고 낯선 대합실...외딴 시외버스 터미널이건, 기차역이건, 유명한 국제선 공항이건...

 

앞 페이지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사회 사실주의 작가군에 이름이 올랐다고 해도, 그 작가들의 그림이 모두 사회 사실주의적 그림은 아닙니다. 그들의 삶의 일정시간에 사회성 강한 그림을 그린 시절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이 페이지에서는 사회사실주의 화가군에 포함되는 '화가들'의 실제 그림을 잠깐 소개한 것으로 정리하고,  다음 페이지부터 주요 작가별로 그림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페이지의 세부 정보도 나중에 채우기로 하겠습니다...즐거운 주말....)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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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ism/EdwardHopper2009. 10. 12. 12:05

Morning Sun
1952
Oil on canvas
28 1/8 x 40 1/8 inches
Columbus Museum of Art, Ohio

 

 

 

Edward Hopper 의 그림에서 찾을 수 없는 것들은?

 

(1) 호퍼의 그림에는 아이가 안보인다. 성인 남자, 여자들이 존재하지만 아동이 보이지 않는다. 단란한 가족의 풍경이 보이지 않는 것 과도 상통한다. 

 

(2) 호퍼의 그림에는 대화가 없다.  인물들이 여럿이 나와도 이들이 소통하는 것 같지가 않다. 각기 떠도는 별 들처럼 두사람이 서로 감정이 교류되거나 일치된 듯한 장면을 찾아보기 힘들다.  호퍼가 그린 인물들에 눈동자가 생략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해진다.  관객들조차 호퍼 그림속의 인물들과 '소통'이 불가능하다.

 

호퍼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크게 두가지로 정리 될 수 있는데 (1)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보이는 세상과 같이 속도감 있게 보는 방식 (2)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 장면처럼 클로즈 업 하거나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하고 조망하는 식으로 보는 방식이다. 이 자동차 유리를 통해 보거나 극장의 스크린에 비쳐지는 혹은 영상 카메라에 비쳐지는 것을 보거나, 에드워드 호퍼이 세상보는 방식은 '거리를 유지하는 관찰자' 방식이라는 것이다.

 

대학원의 석사과정이나 박사과정에서는 '연구방법론'을 듣게 된다. 그 연구방법론 시간에 여러가지 방법이 논의 되는데, 크게는 통계처리 중심의 양적 방법론, 그리고 장시간 관찰이나 면담등을 통한 질적 방법론이 논의된다. 실험실의 관찰이 아닌 사회현상, 교육 현장을 관찰할때 크게 두가지 방법이 있다. (1) 관찰자가 관찰 대상과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고, 마치 벽에 붙은 파리 (Fly on the Wall)처럼 관찰하는 것이다.  범죄 영화 보면 수사관들이 피의자를 심문할때 심문실에 커다란 거울이 있고, 그 거울너머에서 수사관들이 관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렇게 아예 자신을 감추고 저쪽에서 일어나는 일만을 관찰하는 방법이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2) 그런하하면 관찰자가 관찰대상과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관찰 방법도 있다. 사회학 연구자가 어떤 현장에서 직접 봉사활동을 하거나, 사람들과 일상적으로 서로 협력하면서 그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 하는 수도 있다. 교육현장에서 교사가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어떤 변화를 관찰하는 식으로 연구를 할때, 관찰자는 참여자가 되기도 한다. 이를 참여적 관찰이라고 할 수 있다.  에드워드 호퍼가 그림을 그릴때, 그는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며, 벽에 붙은 파리 같은 입장에서 사물을 관찰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세상을 '관찰자'로서 살폈다.  그는 소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이런 소통단절은 그의 그림속의 등장인물들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발견된다. 그보다 30여년 후에 태어난, 한세대 이후의 역히 외톨이 사실주의 화가라 할 수 있는 앤드루 와이어드 (Andrew Wyeth)는 호퍼와는 정반대의 관찰자였다. 그는 그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그렸다. 그는 활발하게 소통하고, 친구가 된 후에야 대상을 그림에 옮겼다. 앤드루 와이어드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가 그가 잘 알고 지내는 마을 사람들, 혹은 십수년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그림에 옮긴 사람들이다. 소통을 통해 그림의 대상에게 다가갔고, 그래서 앤드루 와이어드의 풍경이나 사람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속삭인다. 반면에 호퍼의 그림은 '접근'을 불허하고, '상상'을 정지시킨다.  앤드루 와이어드는 소통을 통해, 호퍼는 소통정지를 통해 '영원'으로 가려고 시도했을지도 모르겠다.

 

 

 

여행자의 눈에 들어오는 풍경

 

이 그림은 1940년작 '주유소'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1940년이면 지금부터 대략 70년전의 그림이다. 1940년이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식민지 시절을 견디고 있었고, 윤동주 시인이 아직 연희전문 (현재 연세대) 학생이던 시간이다. 나는 중학교때, 시간을 거꾸로 되짚어 올라가서 윤동주 시인이 살던 시절로 돌아가서 그의 애인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  연세대 문과대 왼편 언덕길에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있다. (지금 왜 갑자기 윤동주 얘기냐구, 이 천치야...) 지금도 거기 그것이 있을까?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이것이 70년전의 풍경 같지가 않다.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에서 보통 여행자가  집을 떠나 하이웨이를 타게 되면 누구나, 어디서나 이 그림속의 풍경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주유소의 규모가 크거나 작거나 차이는 있겠으나, 미국의 어느 주에 가도 우리가 만나게 되는 곳. 주유소. 그리고 주유소에 달려있는 가게. 그 가게에서 커피를 사고, 빵이나 과자를 사고, 생필품이 있나 기웃거리기도 하고, 화장실에 가서 급한 용무를 해결하고, 그리고 휙 떠나면 잊혀지는 곳.  어딜 가는 비슷한 하이웨이. 지역에 따라서 가로수의 품종이 달라지긴 하지만, 가장 흔한 것은 멋대라기 없이 키만 큰 소나무들.  그리하여. 지금도 미국의 하이웨이 풍경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길이 있고, 멋대가리 없는 가로수가 있고, 주유소가 있고, 주유소에 딸린 '공중변소'가 있고, 끝없이 이어진 길과 하늘이 있을 뿐이다.

 

 

 

 

Gas (1940)

66.7x`102.2 cm

Museum of Modern Art

 

 

호퍼의 풍경화를 보면 세밀한 묘사가 생략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전 페이지에서 Andrew Wyeth 의 그림들을 살핀적이 있는데,  앤드루 와이어드가 사과 나무를 그릴때 직접 나무의 사과를 세어보고 그릴 정도로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면,  호퍼의 풍경화속의 나무나 숲, 길은 달리는 차창 밖으로 비쳐지는 것처럼 쓸려 지나가는 것 처럼 보인다.  휙휙 지나가는 풍경의 일부같은 숲, 도로.  그 속에 '영원'처럼 혹은 '박제'처럼 서있는, 표정없는 인물들.  소통두절.

 

 

영화관 스크린에 비친듯 한 풍경

 

 

Nighthawks (1942)

84.1 x 152.4 cm (33 1/8 x 60 in.)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Museum

 

 

내가 에드워드 호퍼를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그의 그림을 처음 접한 것이 바로 이 Nighthawks 였다. 대학교 1학년, 교양과목으로 '예술의 이해'라는 과목을 수강할때,  교재에 실려있던 이 그림을 신기하게 들여다봤었다.  내 눈에는 이것이 '그림'으로 보인 것이 아니고 미국영화의 한 장면, 혹은 길거리 극장 영화간판 같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이런 그림도 '예술책'에 포함이 된다는 것이 신기했었다.  (아직 철없던 내게 '명화'란 르노아르나 고흐 뭐 그런 스타일의 유럽 그림들이었다.)  그림 설명으로 '도시인의 고독' '어쩌구' 뭐 이런 식이었는데,  내 눈에는 고독이고 뭐고 딱 영화 간판이구만... (그 후로 학년이 올라가면서 나는 한국미술의 이해, 동양 미술의 이해, 서양 미술사, 서양 미술의 이해등 미술 관련 교양과목들을 하나 하나 이수해 갔는데, 그 과목들을 이수한 주요 이유는, 미술대 교수들이 학점을 잘 줘서... 흐헤헤... 예술대 학생들이 주로 수강하던 과목들이었는데, 예술대 학생들은 너무나 예술 지상주의자들이라서 학점 따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나는 학점에 신경을 바짝 쓰는 인문대생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예술지상주의자들 속에서 '학점'에 신경을 쓴 소수가 점수를 잘 받지 않았겠는가.  (^^)

 

내가 이 작품의 '맛'을 제대로 알아본것은 극히 최근 2년 사이의 일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미국에서 약 5년간 사는 동안에도 미국은 낯 선 땅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버지니아로 왔을때, 그래서 미국미술 박물관들을 쏘다니면서 미국미술 작품들을 두루 섭렵한 후에나 나는 왜 '미국이 낯 선 땅'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미국은 나에게만 낯 선 땅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낯 선 땅이다.  미국은 누구에게나 낯설다. 미국인에게도.

 

미국의 하이웨이를 달려보면, 차창밖에 휙휙 지나치는 풍경들은 모두 똑같아 보이면서도 동시에 모두 낯설어 보인다. 왜 모두 낯설어보일까?  그것은 도로의 폭이 넓고, 하이웨이의 폭이 넓고, 주변의 나무들이 모두 크고, 그리고 뭐든 크고 넓고 멀다. 쇼핑몰은 휑하니 크고, 진열품은 한산하다. 쇼핑몰의 주차장도 휑하다.  뭐든 크고 휑하다. 풍경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풍경이 휑하다. 작은 카메라 각도 안에 인물과 풍경이 적절히 조화롭게 들어가지를 못한다.  미국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자꾸만 zoom-in (줌-인)을 한다거나, 인물 표정 위주로 찍거나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풍경이 너무 한산하고 큼직해서 조화롭게 화면 안에 다 담을수가 없기 때문이다.  '뉴욕 맨해턴'에 가면 사람 많고 복잡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뉴욕이나 시카고, LA 등 극 소수의 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들이 휑하고, 썰렁하고, 도시를 제외한 지역은 사람도 많지 않고 한적하다. 맨해턴과 같은 대도시를 제외하고 웬만한 도시에서 한밤에 술한잔 걸치기도 쉽지 않다. 상점들은 저녁이면 문을 닫는다.  맥도널드가 24시간 영업을 하기도 하지만, 이런 심야 업소를 찾기는 쉽지 않다.  어딜가나 휑하고, 썰렁하고, 아스팔트가 깔려있고, 그리고 대개 한산하다.

 

이것은 나만 느끼는 현상은 아니다.  미국 텔레비전의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보면 실내 인테리어 전문 케이블도 보이는데, 한때 심심풀이로 집 고치는 프로를 줄 창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실내 인테리어나 혹은 정원 설계 같은, 집 관련 디자이너들이 평을 할때, 가장 자주 던지는 영어가 'detail (세심한 부분처리)'이 살아있다는 말이었다.  디테일.  내가 내린 결론 - 미국 사람들 '디테일'이라고 하면 아주 넘어가는구나. 

 

미국문화가 유럽식에 비해 신생국가이고 건물들이며 생활속의 디자인이 단순하고 소박한 편이다. 공장에서 찍어나오는 트레일러 하우스들도 많고. 대체적으로 상자모양의 멋대가리 없는 건축물들. 휑한 공간.  이런 식이다보니까, 실내나 외벽에 뭔가 오밀조밀한 장식 한가지만 붙여도 '디테일'이 산다고 노래를 부른다.

 

Nighthawks의 그림을 살펴보자.  심야의 식당이나 바처럼 보인다. 창백한 형광등 불 빛 아래, 바텐더의 흰 옷이 춥고 스산해보인다. 그의 등 뒤로 보이는 기구는 커피 내리는 기구 같아보인다. 식당용 스툴 (둥근 높은 의자)이 일곱개가 전면에 배치되어 있고, 그중 하나를 양복입은 신사가 차지하고 앉아있다.  저만치 남자, 여자 한쌍이 앉아있다. 거리는 텅 비어있고, 그야말로 쥐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는다.  식당에서 나오는 불빛으로 유리창 너머의 보도가 희게 빛난다.  PHILLIES 라는 단어가 보이고 그 옆에 시가 모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필리스 시가 광고같기도 하고, 식당 이름 간판같기도 하고.  이 가게의 벽에 흔한 그림한장, 메뉴 설명서 한장 붙어 있지 않다. 꽤나 썰렁하다.

 

썰렁함.  내가 체감하는 미국은 바로 그 '썰렁함'이다. 나는 이 썰렁함을 '낯설음'으로 받아들였었다.  스산함. 새로 열었다는 커다란 식당에 기대에 차서 들어갔는데, 손님도 없고 종업원도 시들하고,  그럴때가 있다.  그럴때 우리는 직감적으로 '아차, 잘 못 들어왔다. 다른데로 갈것을' 이런 느낌이 들때가  가끔 있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특히나 이리저리 떠돌며 여행을 하다 보면 우리는 이런 스산함, 휑함, 썰렁함과 익숙해지게 된다.

 

이 그림을 보면 어떤 음악이 떠오르는가? 나에게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쿨 재즈 트럽펫 연주의 낮고 음산한 음악이 떠오른다.  주인공들은 각자 상념에 잠겨 있고,  저 편에 앉아있는 남녀는 연인사이로 보이지 않는다.  좀 전에 바에서 만난 낯 선 타인들 같아보인다. 이들이 갈 곳은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이 아니고, 인근의 모텔이 될 것 같아 보인다. 이 그림속에는 '드라마' 가 있는 것 같다.  하필 이 그림이 현재 시카고 미술대 미술관에 걸려있는 관계로, 혼자 앉아 있는 양복쟁이 남자는 '시카고 갱단'의 중간 보쓰쯤이 아닐까 상상해보게 된다.  (이 그림의 본래 배경은 맨하탄이었다고 한다). 

 

평생 영화를 즐겨 본 호퍼는 그의 그림에서 영화속에서나 잡힐만한 구도의 그림들을 많이 선보였고, 또한, 영화계에서는 호퍼의 그림을 영화 속에서 다시 연출하는 일도 있었고, 호퍼와 영화는 이렇게 상호 교류하며 발전했다고 한다. 이 그림의 장면은 영화 Sting 에서 차용했다고도 하고, http://americanart.textcube.com/39  페이지에 소개된 대로 House by Railroad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역시 히치코크 감독의 작품에서 응용되었다.

 

 

몰래카메라에 잡힌 사람들

 

밤의 사무실 풍경은 특히나 '성적인' 어떤 '드라마'를 암시하는 작품으로 논의가 되는 작품이다. 여성의 성적 매력은 '가슴'과 '엉덩이'에서 두드러지는데, 그림속의 여성은  몸을 비틀어서 가슴과 엉덩이를 적절히 '관객'에게 드러내고 있다. 이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는 마치 파리의 눈과 같이 작은 몰래카메라가 이쪽 천장이나 벽의 윗쪽에 달라붙어 실내를 내려다보는 형식이다. 아니면 건물의 이쪽 벽에 창문이 있고,  이 창문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맞은편 창에서 내려다 보는 형국일지도 모른다.

 

 

 

 

 

Office at Night
1940
Oil on canvas
22 1/8 x 25 inches
Walker Art Center, Minneapolis, Minnesota

 

 

 

 

현대미술관 소장의 '밤의 창문들'에는 '훔쳐보기' 혹은 '몰래카메라'식으로 들여다보기 기법이 좀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열려진 창으로 커튼이 나부끼는데, 옷을 갈아입으려는지 여성이 짧은 드레스 혹은 속은 차림으로 구부정하게 서있다. 여자의 머리는 보이지도 않아 통통한 뒷태가 더욱 두드러진다.

 

Night Windows

1928.

Museum of Modern Art

Oil on canvas, 29 x 34" (73.7 x 86.4 cm). Gift of John Hay Whitney

 

 

에드워드 호퍼는 이런 식으로 낯선사람,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의 풍경을 많이 그렸다. 물론 Jo와 결혼 한 이후 40년이 넘도록 그가 그림 작업을 하는 동안, 그의 그림에 그려진 '모든' 여성의 모델은 그의 아내 Jo 였다.  젊은 여성이거나 늙은 여성이거나, 뒷태가 예쁜 여성이거나, 창녀이거나, 시들은 여성이거나 '모두'가 그의 아내가 모델이었으므로 호퍼가 정말로 누군가를 '훔쳐봐 가면서'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속에는 이렇게 '훔쳐보기' 식으로 잡은 전라의 혹은 반라의 여성들이 많이 등장한다.  물론 여성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고 남성도, 남자와 여자도 등장한다.

 

나는 이것을 '훔쳐보기'라고 말하지만,  호퍼가 정말로 대상을 '훔쳐봤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대상'을 관찰 했을 것이다. 창문이 보이면 창문을 관찰 했을것이고, 창밖에 풍경이 보이면 풍경을 관찰 했을 것이다.  열려진 창문으로 보이는 옷벗은 여자의 뒷태를 그는 그저 관찰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 그것이 거기에 있고, 내 눈에 보이니까.  이는 마치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의 어린 내가 혼자 유원지 숲속에서 놀다가, 나무 그늘 어둠침침한 곳에서 젊은 남녀가 아랫도리만을 내리고 뭔가 자신들만의 장난을 하는 장면을 그저 심심해서 무심코 관찰하던 것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나는 훔쳐본것이 아니고 그냥 본 것이다. 하지만,  관찰되는 대상에게는 이것이 '훔쳐보기'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사실 호퍼의 그림에서 '훔쳐보기'적 요소를 찾아내는 것은 관객들의 몫일 것이다. 실은 우리들이 '훔쳐보기' 놀이를 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호퍼의 그림을 통해서.  호퍼는 무심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그림을 던져주고, 우리는 열심히 그림을 훔쳐본다. 훔쳐보는 우리는 영원히 그림속의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한다. 그것이 훔쳐보는 이들의 운명이다.

 

 

사물에 대한 그의 애정 표현의 방식

 

호퍼는 어릴때부터 수줍음을 많이 탔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고 전해지며, 그의 이러한 성품은 늙어 죽을때까지도 변치 않았다. 40년넘게 결혼생활을 유지했던 그의 아내 Jo가 아마도 가장 가까운 친구였을 것이고, 그나마 호퍼가 가장 편안하게 대화 할 수 있는 존재 였을 것이다. 이들은 해로 했지만, 이들 결혼생활의 절반 이상은 싸움과 으르렁거리기 였다고도 한다.  서로 으르렁거리고 상처주면서도 헤어지지는 않았던.  내가 생각하기에 호퍼가 아내 조와 허구헌날 으르렁대면서도 헤어지지 않았던 이유는...그의 일관된 성품 때문일 것이다.  그가 죽을때까지 40년이 넘도록 서민 아파트를 떠나지 않고 살았던 바로 그런 이유로 그는 아내와 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호퍼를 만나서 별도로 인터뷰를 한 적이 없지만,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한번 정하면 그냥 끝까지 가는거다.  뭐 자질구레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좋건 싫건 끝까지 가는거다. 

 

호퍼에게는 자신만의 애정 표현 방식이 있었다.  호퍼가 아내에게는 어떤 식으로 애정 표현을 했을지 잘 모르겠으나, 그가 세상에 애정표현을 하는 방식을 나는 알고 있다.  그는  드러내지 않고 애정 표현을 한다. 가령 이런식이다.

 

이 그림은 '일요일 이른 아침 (Early Sunday Morning)'이라는 1930년 작품이다. 뉴욕 휘트니 미국 미술관 소장품이다. 2008년 여름에 이 작품을 보고 참 반가웠었다.  이 그림은 호퍼의 다른 작품들에서 자주 보이는  '휑하고' '썰렁한' '고립된' 듯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제목이 '일요일 이른 아침'인데, 나는 이런 풍경이 낯설지 않다.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포토맥강을 건너 산책하다 보면 조지타운 거리가 나온다. 조지타운대학 인근의 거리인데 초기 미국 역사를 담고 있는 역사적인 도시라서 나지막한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다.  이곳에 토요일이나 일요일 이른아침에 산책을 나가면 길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안보인다. 적막감만이 감돈다. 그래도 그 거리를 산책하면서 쓸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게의 쇼윈도우마다 각기 다른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어 조용하고 한가로운 거리를 나 혼자 편안하게 걷는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곧 이 적막한 거리가 주말 인파로 넘쳐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림속의 거리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그가 살던 뉴욕 맨해턴의 어디쯤, 낮은 건물들이 모여있는 어느 골목 일 것이다. 붉은 벽돌의 이층 건물. 1층에는 상점들이 있고, 2층은 주거지 일 것이다.  일층 상점들 중에서 두군데의 햇볓 가리개가 노란 색이다. 2층에는 열개의 창문이 보이는데, 그중 여섯개의 햇볕가리개가 노란색이다. 햇볕 가리개들의 높이가 제각기 다르다. 검정색 가리개도 있다. 커튼이 쳐진 곳도 있고, 창이 일부 열린 곳도 있다. 열개의 창문은 동일한 창문이면서도 커튼이나 볕가리개가 이 창문들에 각기 다른 개성을 부여한다.  이 창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개성으로 볕가리개를 올리거나 내리거나, 커튼을 치거나, 창을 열거나 했을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는 '디테일'을 대충 무시하고 선 굵게 그림을 그린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무작정 '디테일'을 뭉개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디테일'을  선사할 줄 알았다. 그는 각기 다른 창문의 풍경만으로도 사람들의 각기 다른 삶의 방식, 개성, 삶의 이야기를 표현 할 줄 알았다.

 

 

Early Sunday Morning
1930
Oil on canvas
35 x 60 in.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일요일 이른 아침'이라는 작품으로 나는 에드워드 호퍼의 이야기를 마치기로 한다.  내가 이 작품을 마침표로 소개하는 이유는, 이 작품속에 그의 '개성'이 모두 함축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행자의 시선에 무심히 스쳐 지나갈 '어느 거리'의 풍경이 될 것이다.  이 그림에는 사람 하나 등장하지 않지만, 우리는 각기 다른 창문들 속에 사람들이 여러가지 드라마를 연출하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건물은 그 자체로 '우리 읍내 (Our Town)'가 될 수도 있고, 우리는 그 속의 마을 사람 갑, 을, 병이 되어 갑자기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며 대사를 날리게 될 지도 모른다.  이 풍경은 연극의 무대가 되기도 하고, 영화의 세팅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관객은 상상속에서 무대위의 배우가 된다.  우리는 텅빈 거리를 걸으며 가게의 유리를 기웃거리거나 2층 창문 속에 어떤 이들이 있을까 상상하며 목을 빼고 열려진 커튼 너머를 유심히 살피기도 한다.  우리는 거리를 걷는다. 그러나 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관객인 나 만 그 풍경을 보고 있을 뿐이다.  나는 어쩌면 이 햇살 가득한 텅빈 거리의 아무데나 앉아 해바라기를 하며 다리 쉼을 할지도 모르겠다. 

 

풍경속에 아무도 없다.  이 풍경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최초의 어떤 사람

혹은 관객.

 

호퍼의 그림에는 '어린이'가 등장하지 않는다.  어린이는 '생장' '변화'의 상징일 것이다.  영원처럼 적막한 호퍼의 풍경은 '어린이'의 무궁한 변화와 성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호퍼 그림속의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 이들은 영원과 대화한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시간성을 뛰어 넘은 영원의 세계에서 이들은 숨을 쉰다.  그러므로 설령 호퍼의 그림을 보다가 내가 박제가 된다해도 슬퍼할 일은 아닐 것이다.

 

 

 

눈치 채셨는가?  이 페이지의 맨 위의 Morning Sun  창밖으로 벽돌 건물의 꼭대기가 보인다.  Nighthawks 의 이웃 건물이 낯익지 않은가?  혹은 Night Windows 의 차양이 노란색인 것이 눈에 띄지 않는가?  에드워드 호퍼가 어떤 대상이나 사물을 사랑하는 방식은 이런 식이다.  말없이, 그러나 늘 화폭 한켠에 담아 두는 것.  영원처럼.   그래서, 호퍼 그림 속의 주인공들  혹은 풍경은 과거의 어떤 시점에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대로 존재하며, 미래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공감을 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을 그렸으므로. 그는 미국에서  미국을 그렸지만, 그의 그림은 미국에만 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대상의 본질에 다가 섰으므로.  사물의 본질에 국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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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술 맛나게 드셨어요?^^

    좋아했던 어떤 여성이 윤동주의 시를 외우곤 했어요.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은 밤비가 속살거리는데..ㅎㅎ'
    호퍼의 그림을 종종 보게 되긴 해요.. 시간이 정지된 듯 하면서도, '생략'을 통해 요즘 유행하는 말인 '엣지있는' 그림으로 만드는, 인상적인 풍경으로 만드는 배경에는 그의 내면 그림이 많은 사람에게 공감하게 하니까 그러는 거겠죠. 인정하기 싫은 우리 속의 어둡고 작은 방.

    2009.10.12 10:16 [ ADDR : EDIT/ DEL : REPLY ]
  2. 아, 어찌됐건 호퍼 이야기를 끝내 버렸으므로 이제 가볍게 다른 그림들로 옮겨갈 수가 있게 되었군요. 너무 거인이라 씨름하기가... 야호~ = )

    2009.10.12 12:27 [ ADDR : EDIT/ DEL : REPLY ]
  3. 미술에 대해서 만큼은 생선눈깔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저이기에 글을 읽는 순간순간이 더 없이 좋은 배움의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ㅋㅋ
    레고로 리메이크 된 Nighthawks를 먼저 접한 저에게는 반갑기도 하고, 살짝 충격적이기도 한 포스팅이예요^^ 개인적으론 대체로 정적인 분위기답지 않게 그림자 만큼은 매우 다이나믹하게 표현된 것 같아서 재미있네요.
    호퍼는 republican이었을까요? ㅎㅎ

    2009.10.16 12:55 [ ADDR : EDIT/ DEL : REPLY ]
  4. 빛이 점유하는 공간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도 좋아하고, 같은 이유로 호퍼를 좋아합니다.

    그의 그림은 나는 그림 바깥에 있다는 의식이 명징하게 드러납니다. 말씀하신 것 처럼, 관찰자의, 여행자의 시선이 있습니다. 그의 그림이 따뜻하거나 정서적으로 푸근하지는 않지만, 저는 이러한 건조한 시선이 좋습니다. 마치 구스 반 산트의 <아이다호>를 회화로 보는 느낌이랄까요.

    요즘 코맥 매카시의 <모두가 이쁜 말들>을 읽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호퍼의 그림이 연상되는 소설입니다.

    좋은 글 덕분에 많이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2009.10.26 08:51 [ ADDR : EDIT/ DEL : REPLY ]
    • 느림보님이 마그리뜨의 '빛의 제국'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나도 좋아하는데) 기분이 좋아서 지난 9월에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찍어온 '빛의 제국 2' 사진을 올려봅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144

      빛의 제국 1은 아직 실물을 못봤지만, 2편을 발견하고 정말 기뻤지요. 가끔 제가 사는 곳의 강변길을 걸을때, 하늘은 아직 파란데 숲은 어둡고, 숲가의 오두막에서 불빛이 깜빡일때, 그 광경을 보면서 '빛의 제국'이 환상이 아니었구나. 정말 그런 공간이 존재하는구나...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지요. 빛의 제국은 거짓 환상이 아니라 엄존하는 '사실'이었던 것이지요.

      호퍼의 세계를 저보다 더 정확한 언어로 설명하는 분이 geolopei님말고도 또 계시는군요. (아 호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은가보다...)

      2009.10.26 14:30 [ ADDR : EDIT/ DEL ]
  5. 종로의 대형 서점 원서 코너에서 호퍼의 스케치만 모은 화집을 발견하고선 (십수만원이 넘었더랬지요) 근 한시간을 부르르 떨면서 지르느냐 마느냐를 고민했습니다. 결국은 포기. 제 지갑은 왜 이리 얇은지요. T.T;;

    2009.10.26 22:00 [ ADDR : EDIT/ DEL : REPLY ]

Realism/EdwardHopper2009. 10. 10. 20:48

 

하숙생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길에

정일란 주지말자 미련일란 주지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간다

 

이런 노래가 있다. 제목이 '하숙생'이다. 우리 아버지가 인생 제대하기 전에 말년에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헤어질 무렵이면 이 노래를 부르셨다고 한다. 난 이 노래의 제목이 '인생은 나그네' 혹은 '나그네'인 줄로 알았는데 제목은 노래가사에도 없는 '하숙생'이라고 한다. (하하).

 

하숙생이란 말은 '나그네'라는 말과는 느낌이 사뭇다르다. 왜 다른가하면, 나그네는 그냥 줄창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존재같고, 하숙생은 그래도 어딘가 적을 두고 살다가 때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하숙'을 하다가 또 떠나고 그럴것 같다는 말이지.  어딘가에 적을 두긴 하지만 거기가 자기 집은 아니고 그냥 남의집 한귀퉁이 빌려 살다가 때되면 떠나는 존재. 하숙생들이 먹는 음식은 하숙집이 제공하는 하숙집밥, 집 주변 함바집, 기사식당, 혹은 편의점 주먹밥, 컵라면 뭐 이런것이 아니겠는가. 하숙생들은 소지품도 많지 않고, 갖고 있는 옷도 많지 않다. 왜냐하면 이리저리 하숙을 하며 돌아다니기 때문에 늘 일정량의 물건만을 소지 할 뿐이다.  하숙생은 공동 화장실을 쓰고, 공동 수돗가에 모여서 양치질을 할 것같고, 뭐 그것이 홈, 스위트 홈이 될 수는 없는 어중간한 주거공간을 점유할 것이다.

 

자취생하면 뭐랄까 좀더 건설적이고 독립적이며, 하하, 나만의 어떤 공간 점유가 가능해보인다. 그런데 하숙생은 이도저도 아닌 묘한 상황이란 말이지.

 

 

낯가림이 심한 가겟집 아들 에드워드 호퍼

 

에드워드 호퍼는 뉴욕주의 나이액 (Nyack)에서 태어났다. 대서양에 면해있는 이 도시는 당시 요트를 많이 제작하는 곳으로도 알려져있다. 호퍼의 부모는 중산층 집안의 사람들이었고 나이액에서 상점을 운영했다.  그런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던 호퍼의 아버지는 사업수완이 좋지 못했고, 가세는 점점 기울어져 간 것으로 보인다. 호퍼는 성장하면서 아버지 가게일을 돕거나 경리직 일을 거들기도 했다. 당시 호퍼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가게는 '공산품 가게 (Dry Goods Store)'로 알려져 있다. 꽃이나 야채, 생선과 같은 생생한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주로 공장에서 만들어진 물건들을 취급하는 가게였다.  오늘날에도 미국의 동네 가게를 살펴보면 크게 두종류로 나눠지는데 신선한 과일, 우유, 야채, 생선등이 취급되는 '그로서리 (grocery)' 가게가 있는가하면,  이런것을 제외한 물건들, 문구류, 생필품, 의약품,  그리고 이런곳에서 식품을 판다면 공장에서 만들어진 과자, 빵, 썩지않는 음료수 이런 것들을 주로 취급한다.

 

오늘날, 시카고와 같은 대도시의 도시 빈민 생활문제를 사회학자들이 지적할때, 도심에 사는 빈민들이 '신선한 음식'을 사먹을수 없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신선한 식품을 제공하는 '그로서리'에서는 식품 운송 및 보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점점 대형 회사들이 취급하게 되고, 도심의 작은 상점들은 이런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그로서리'를 포기하고 '공산품'만을 취급하게 된다.  그런데 도심의 빈민들은 '자동차'도 없다. 이들이 신선한 야채를 사려면 멀리 떨어진 곳으로 쇼핑을 가야 하는데 드문드문 오는 시내버스에 의지해서 장을 보려면 하루 온종일이 걸리고 만다. 결국 도시 빈민들은 집 근처의 공산품 가게에서 제공하는 빵, 과자, 음료수, 그리고 패스트푸드 전문점에 의지하여 생계를 해결하게 되고, 그 결과 이들의 건강이나 생계는 더욱 악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혹은 우리들이 매일 밥상에서 김치나 다른 야채를 먹을수 있다면, 우리는 하늘에 감사해야 한다. 신선한 야채를 먹고 싶어도 사먹을수도 없는 도시 빈민들도 많이 존재 한다는 것이다. 경제 대국인 미국에서조차.

 

에드워드 호퍼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상점은 바로 이런 '마른 물건'만 판매하는 공산품 가게였다.  웹에서 'Dry Goods Store' 를 검색해보니 1910년 펜실베니아의 어떤 마을의 Dry Goods Store  사진이 나온다. 잠시 빌려다 소개해본다.

 

 

에드워드 호퍼의 소개 책자들을 보면, 비사교적이고 혼자 그림그리기를 즐겨했던 소년 호퍼는 아버지의 가게일을 돕는 것을 매우 따분해 했다고 한다. 나는 소년 에드워드 호퍼가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을 돕는 광경을 상상해본다.  그는 사람도 별로 안오는 상점을 지키고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르고, 어쩌다 손님이 와서 뭔가 물으면 마지못해 대꾸를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도 소년 호퍼와 같은 시절이 있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잠시 농토를 남의 손에 맡기고 수원으로 이사를 나와서 한길가에 가게를 열고 상회를 운영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몇해동안 상점을 착실히 운영하여 한살림을 장만한 후에 다시 귀향을 하셨다. (사업에 재능이 있는 분들이었나보다).  나는 상경한 우리 가족들과 떨어져서 수원의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서 1년을 보냈는데, 그 당시 나는 '원천상회' 집 아이로 통했다.  사람들은 내 이름을 몰라도 좋았다. 나는 '원천상회' 아이였으므로.  한길 건너에 우리 상회보다 더 큰 상회가 자리잡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동네 사람들이나 인근의 유원지를 찾는 사람들, 그리고 논 건너 공장에서 일하던 직공들은 우리 상회에 들르기를 좋아했다.  우리 할머니가 사람이 싹싹하고 부지런하고, 나이가 어린 사람이나 많은 사람이나 공평하게 싹싹하게 대했으므로 사람들이 우리 할머니를 좋아 했었던 것 같다.  우리 할아버지는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나 역시, 어미 아비에게 버림받은 새새끼처럼 풀이 죽은 꼬마였으므로,  사람들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도 않았고, 누군가가 귀엽다며 내 머리를 건드려도 성난 개처럼 으르렁거리며 도망치곤 했었다.  나는 골난 표정으로 동네 골목골목을 쏘다니며 혼자 놀았고,  나는 골목골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풍경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사람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고 싹싹하게 인사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림자처럼 혼자 떠돌았지만, 자유롭게 사람들이 사는 풍경을 관찰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제법 어른들도 모르는 비밀스런 풍경을 구경하기도 했었다.  나는 유원지 숲에 데이트를 나온 공작 직공들이 옷을 반쯤 내리고 몸을 부딪치며 아픈듯 흐느끼는 광경을 멀거니 보기도 했고, 풀숲에서 포개져있던 사람들을 보기도 했다.  내 눈에 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갔고, 나는 판단력도 없이 이상스럽거나 우스꽝스러운 풍경들을 관찰했다.  

 

가겟방을 지키고 앉아있어야 했던 수줍은 소년 호퍼는 따분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는 길거리를 지나는 많은 사람을, 혹은 가게에서 내다보이는 맞은편 건물이나 가게들의 풍경을 세세하게 관찰 했을 것이다. 진열대에는 평생 썩지 않을 물품들이 말라가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마른 물건들로만 이루어진 공산품 가게가 평생 호퍼의 삶을 지배했을 거란 생각을 한다.

 

 

호퍼 삼락 (三樂)

 

맹자 빼갈먹고 가라사대, 선비에게 세가지 기쁨이 뭔고 하니 (1) 부모형제 건강하시고 (2) 세상에 부끄러운 일 좀 덜하고 (3) 남의자식 잘 가르치고 뭐 대략 이러한 것이다. 내가 가만 보니까, 나는 두가지는 되는데 한가지가 안되어서 제대로 된 선비질을 못하고 있다. 부모형제 건강하시고, 남의자식 열심히 가르치고, 대략 거기까지는 그럭저럭 되는데 하늘을 우러러 땅을 우러러 여러가지고 부끄러운 것이 많아... 나는 죽어도 군자가 못되겠네...

 

 

호퍼는 위의 내가 적은 '하숙생'같은 인생을 살다간 사람이다.  일단 호퍼는, 나이악 고향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후 뉴욕으로 가서 통신과정으로 미술공부를 좀 하다가, 일러스트레이션 (삽화) 공부 도 하고, 미술학교에 정식 입문하여 당시의 대가인 Thomas Eakens, Henri 와 같은 화가 밑에서 공부하는 과정도 거친다.  (펜실베니아 미술관에서 Eatens 작품을 무더기로 사냥하여 왔으므로 언젠가 그의 페이지가 만들어질 것이다).  궁색한 형편이었지만 예술인들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파리에 가서 머물며 그곳의 분위기를 살피기도 한다.  그런데 그는 파리에 머무는 동안 화단의 인사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혼자 미술관 구경하고, 뒷골목 구경하고, 혼자 스케치하며 떠돌았다고 한다. 그는 피카소한테도 관심이 없었고,  도통 미술계 인사들과 어울리러 들지를 않았다.  그가 당시 파리를 지배하던 인상파 화풍이나 뒤를 잇는 후기인상파의 작풍을 아주 몰라라 하지는 않았으나 이런 흐름을 자신의 그림세계로 받아들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영향은 받았을 수 있으나 그것이 호퍼의 그림 세계를 지배할 수는 없었다는 뜻이다.

 

미국에서 호퍼는 1920년대와 30년대를 지배하던 사실주의의 양대 사조 (1) 지역주의 Regionalism 과 (2)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Social Realism) 에도 속하지 않았는데,  지역주의는 경멸했고,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대해서는 다소 공감하나 자신을 그 틀에 가두려 하지 않았다. 그는 우파도 좌파도 아닌 '미술파'의 길을, 아니 미술파도 아닌 그저 '호퍼'의 길을 갔을 따름이다.

 

사십대 후반까지 호퍼는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린 화가였다.  그 이전까지는 그럭저럭 '삽화가'로 생계를 해결했고, 삽화의 연장으로 작업한 '에칭'판화 작업으로 판화업계의 대가가 되기는 했으나 그 역시 생계의 연장이었다. 그는 미국이 대공황(Great Depression)에 접어들던 싯점부터 오히려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미술계에 등단하여 난생처음으로 차를 사고, 그리고 매사추세츠주의 아름다운 해변 휴양도시인 Cape Cod 에 스튜디오를 장만하여 그의 '문패'를 다는 기쁨을 누리게 되기도 하는데 이는 40대 후반의 일들이었다.  그 때까지 그는 그저 가난뱅이 그림쟁이였을 뿐이다.  Cape Cod의 스튜디오 외에 그들이 주로 생활한 곳은 뉴욕의 자그마한 아파트 서민용 아파트.  이곳은 방한칸, 작은 싱크대가 부착된 미니부엌이 달린 스튜디오였는데  그는 죽을 때 까지 공동 화장실, 공동 샤워시설을 사용했다.  따로 작업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두 부부가 살았으므로,  호퍼가 그림 작업을 할때면 방에 분필로 금을 그어놓고 아내 '조'가 금을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Gas (1940)

Museum of Modern Art, NY

 

 

인생의 초반 50년 가까이를 가난뱅이로 살았고, 그 후에 명성을 얻고 그림이 비싸게 팔려나가 생활이 풍족한 이후에도 가난뱅이의 습관을 그대로 유지한 채 검소하게 살았던 호퍼는 주로 세가지 취미 생활에 돈을 썼다고 한다:

 

(1) 책

(2) 여행

(3) 극장

 

 

호퍼 부부는 옷을 사면 다 떨어질때까지 입었고, 호사스런 가재도구를 사 모으는데 취미가 없었다. 호퍼의 아내는 요리 따위를 즐기지도 않았다. 호퍼의 아내가 가장 즐겨 한 요리는  깡통을 따서 깡통에 담긴 음식을 밥상에 차리는 일.  그것으로 요리 끝. 즐거운 인생.  이들은 아무데서나 살 수 있는, 수십년이 지나도 변치도 않을 깡통음식을 주로 먹었고,  혹은 동네의 싸구려 음식집에서 끼니를 해결 했을 것이며, 이들이 자동차를 끌고 미국의 여기저기를 떠 돌때는 자동차를 세워놓고 아무때나 드나들수 있는 자판기 음식점 (automat), 주유소, 여관의 식당,  길거리 심야 카페등에서 그들의 주린 배를 채우면 되었을 것이다.  심심하면 극장에 가서 사람들 속에 섞여 영화를 봤을 것이고, 집에 오면 각자 상념에 잠겨 자신의 일에 몰두 했을것이다. 

 

 

호퍼의 삼락으로 내가 정리한 책, 여행, 극장 이 세가지 요소는 일관되게 호퍼의 그림 세계에 반영된다.  책읽기, 여행. 극장 구경등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이 모든것은 '관찰자'의 작업이다.  책 읽기는 외부와 내면으로의 여행이고, 여행은 실제 세상에 대한 스치는 관찰이다. 그리고 영화는 우리의 훔쳐보기 욕구를 극대화하여 충족시켜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책읽기, 여행, 영화구경은 비사교적인 사람들이 혼자서 얼마든지 즐길수 있는 놀이이기도 하다. 책읽을때 옆사람하고 종알거릴 필요 없다. 여행할때 혼자 자동차를 끌고 돌아다니다가 주유소에서 개솔린 넣고, 주유소 점방에서 아무거나 사 먹고,  길거리 모텔 아무데서나 하룻밤 자고 다시 떠나는 동안 아무하고도 말을 섞을 필요도 없다. 영화 볼때 옆사람하고 '회의'하면서 떠들면 주위의 눈총을 받는다. 영화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지만, 우리는 그다지 소통하지 않는다.  호퍼는 아무하고도 소통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관찰하고 이를 내면화하거나 화폭에 담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산품 가겟집 아들이었던 호퍼는 평생 공산품 가게에서 살 수 있는 깡통 음식 혹은 자판기 음식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으며 생활하면서, 가겟방 너머, 가게 유리창 너머의 세상을 내다보듯 자동차 유리 너머, 극장 화면너머의 세상을 관찰하고 훔쳐봤으며, 별로 가진것 없이 수십년간 공동화장실을 써야 하는 작은 아파트를 주거지 삼아 이리 저리 떠돌아 다니다, 가볍게 우리 곁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를 '미국의 풍경을 그린 가장 미국적인 화가'로 꼽지만, 그는 그가 경멸했던 '미국적인 그림을 그리자는 지역주의자'도 아니었고, 사회적인 문제를 화폭에 담은 진보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말하자면 Regionalist 도, Social Realist 도 아닌 Hopperist 였던 것이니,  가장 미국적인 풍경을 그렸다는 호퍼의 그림들이 오늘날 미국 국경을 넘어서서 세상 사람들에게 마술적으로 다가간다.  우리가 오늘날 호퍼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미국'이 아니다. 그 속에 '하숙생'과 같이 스치고 지나가는 '나'의 모습 혹은 '우리'의 모습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호퍼가 관찰 한 것은 '미국' 혹은 '미국인'이 아닌, '인간'이었던 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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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ism/EdwardHopper2009. 10. 9. 05:03

에즈워드 호퍼는 (July 22, 1882 – May 15, 1967) 19세기말에 태어나 20세기 후반까지 85년을 살다간 미국 화가이다. 내가 가급적이면 작가들의 생몰 연대를 언급하는 이유는, 작가들의 활동과 그들이 살다간 지역사, 세계사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살다 간 동안 한국에서는 한일합방이 일어나고 삼일운동이 일어나고, 광복을 맞고, 그동안 세계사적으로는 세계 1차, 2차 대전이 지나가고, 한국에서는 육이오, 혹은 한국전쟁을 겪고, 419 혁명이 일어나고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우리 아빠 엄마가 결혼을 하고 우리 오빠가 태어나고, 언니가 태어나고...

 

85년을 살다간 이 화가에게 몇차례의 그림 매체의 변화가 있었다. 첫번째로, 그는 밥벌이를 위해 '삽화가'로 활동을 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예 삽화에 중요 도구가 되는 '에칭'기법을 스스로 익혀 '에칭' 활동을 열심히 하던 시절이 있었고,  미술학교에서 만나 잠시 알던 여학생 Jo와 40대에 다시 만나게 되어 그로부터 수채화를 권유받아 수채화 활동을 열심히 하던 시절이 있었다. (결국 Jo와 결혼하여 해로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 유화작업에 주력하게 된다.

 

마침 내 사진파일에 내가 '사냥'한 (나는 이를 사냥이라 부른다. 어줍지 않은 사진이지만, 내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 것들이므로) 작품들이 있어 이 세가지 매체의 작품들을 소개해본다.

 

(1) 삽화와 에칭판화 시절

(2) 수채화 시절

(3) 유화 시절

 

 

*** ***

 

 

(1) 에칭 판화: 1921년 Night Shadows (밤의 그림자).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2009년 9월 찍은 사진이다.

 

 

 

 

 

(2) 수채화: White River at Sharon (샤론의 흰 강) 1937년 작품으로 그해 9월 버몬트 (Vermont)주의 친구를 방문했을 때 그 곳의 풍경을 담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유화: 그리고,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국립 미술관, 허시혼 미술관, 코코란 미술관에서 '사냥'한 작품들

 

 

스미소니안 아메리칸 아트 뮤지엄 (Smithsonian National Museum of American Art) 1층에 2009년에 걸린 호퍼의 작품들. 왼편은 Cape Cod Morning. 오른편은 Ryder's House

 

 

 

 

 

 

 

 

 

국립 미술관에 걸린 Cape Cod Evening.  위에 있는 것은 케이프 코드의 아침.  아래의 작품은 같은 장소의 저녁.

 

 

 

 

코코란 미술관에 걸린 Ground Swell (1939)

 

 

 

 

음...2008년 여름에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미술관에서 찍은 Night Hawk 가 그의 '상징'처럼 널리 알려진 작품인데, 그 때 사진 상태가 비참하다...제대로 찍지 못했다...

 

Cape Cod Morning 이라는 작품으로 그의 작품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다음회에...)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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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ism/EdwardHopper2009. 10. 9. 02:52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소장, 자화상




Edward Hopper 가 소년 시절에 습작으로 그린 바다 그림을 보면, 바다에 커다란 배가 한척 떠 있는데 그림 구석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Alone, alone, all, all alone,
Alone on a wide wide sea !

홀로, 홀로, 홀로 있다네
이 넓고 넓은 바다에 나 혼자 뿐이라네!

이것을 보고 그 부모님이 기겁을 했다고 하는데, 호퍼는 어릴때 갑자기 키가 훌쩍 커버리는 바람에 주위의 아이들과 동화를 못하고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혼자 그림이나 끄적이며 소일했다. 그가 어린 시절 그림 구석에 끄적여놓은 이 구절은 Samuel Taylor Coleridge 의 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 (노 수부의 노래) 에 나오는 것이다. 대개 한국 대학의 영어영문학과에 다니는 학생들이라면  워즈워드와 쿠어리지의 '낭만주의'를 시작으로 영문학에 입문하게 될 것이다. Coleridge 는 워즈워드와 함께 영국 낭만주의의 문을 열어제낀 시인이었다.



어린시절 쿠어리지의 시를 베껴적던 소년 에드워드가 성인이 되어 즐겨읽던 작가들이 랄프 왈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헨리 데이비드 써로우 (Henry David Thoreau)였다고 한다.  이들은 미국의 초절주의 (transcendentalism) 철학자, 문인들이었다. 미국의 초절주의는 영국의 낭만주의 (Romanticism)와 칸트 철학을 배경으로 탄생한 철학으로  에머슨의 자기독립 (Self Reliance) 정신으로 꽃을 피우게 되는데, 에머슨의 Man is his own star (인간은 그 스스로 자신의 별이다) 라는 선언에서 보이는 '자아'를 주체로한 삶의 철학은 근대 미국의 정신적 근간이 되기도 한다.  그가 소년시절 쿠어리지의 시에서 성인이 되어 에머슨이나 써로우로 옮겨간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런 현상처럼 보인다. 그는 외톨이 소년이었고, 그러나 그는 혼자서 제발로 서기를 겁내지 않았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은 그것이 아무리 밝게 채색되어 있어도 어쩐지 스산하고 쓸쓸하다. 그런데 그 썰렁한 그림앞에 일단 서면 우리는 쉽게 발을 떼지 못한다.  무언가 음산하고 스산한 바람이 우리 귓가와 뺨을 맴돌면서 우리를 떠나지 못하게 잡는다.

에드워드 호퍼는 어린시절 습작에 써갈긴 싯귀처럼 평생, '외톨이'로 살아간 미국 화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에게는 절친한 친구들도 있었고, 결혼하여 평생 해로한 부인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외톨이'라 부른다. 그는 평생 넓고 넓은 바다를 홀로 떠돌듯 자기만의 그림 세계를 개척해나갔고, 그의 신념을 지키다 여행자처럼 지상에서 사라져버렸으므로.

그런데, 우리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면서 스산함이나 썰렁함, 고립감을 느끼면서도 그의 그림에서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공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이도 내가 느끼는 쓸쓸함을 느꼈구나. 나도 저이의 쓸쓸함을 느낀다. 우리는 공감한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이런 '공감'. 누군가 슬퍼서 울고 있으면 곁에서 함께 울어주는 것이 위안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에드워드 호퍼는 쿠어리지의 고립감에 공감했고, 호퍼의 그림을 읽는 사람들은 호퍼의 고립감에 공감한다. 그 순간 만큼은 'alone, alone, all, all alone 이 '무효'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예술의 마술적 힘 일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세계,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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