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들어낸 한장의 그림

 

 

 

 

The Grand Canyon of the Yellow Stone, 1893-1901, oil on canvas

427.8 x 245.1 cm (대략 4.3 미터 x 2.5 미터)

Thomas Moran (1837-192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 가면, 엄청시리 커다란 풍경화 그림이 여기~ 여기~ 걸려있는데요. 저로서는 뭐 엄청나게 큰, 그것도 주로 바위로 이루어진 풍경화에 별 매력을 못 느끼므로, 막무가내로 통과~ 해버리는거죠. 이 엄청난 풍경화 앞을 지나면서 대략 '이름표'라도 볼라치면 Moran 이라는 이름이 눈에 띕니다. 

 

"모란?  이름이 모란이야?  성남의 모란 시장이 생각이 나는군. 거기 가면 강아지 팔고 그랬는데. 이름이 모란이면 모란꽃 뭐 그런거 그려야 하는거 아니야? 아 왜 바윗덩어리 산만 그려 놓은거냐구..." 

 

이렇게 중얼거리며 지나치는거죠. ㅎㅎㅎ.  그래가지고, 사실, 스미소니안을 라면집 드나들듯 드나든 저에게도 모란의 작품 사진이 별로 없습니다.  관심 없으니까 대충 지나간거죠.  아, 다음에 가면 제대로 작품 좀 들여다봐야지...

 

Thomas Moran (1837-1926)은 영국태생으로 어린 시절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와서 펜실베니아에서 성장한 화가입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 Hudson River School 의 원조 Thomas Cole 의 페이지에서 잠시 언급한대로 Thomas Moran 은 그가 미국의 자연 환경을 대형 화폭에 담았다는면에서 허드슨강변의 화가로 분류가 되기도 하고, 혹은 토마스 모란이 특히 로키 산맥, 옐로우스톤의 풍경에 골몰한데서 Rocky Mountain 화가로 분류가 되기도 합니다.

 

제가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찍어온 그의 대형 그림 사진속의 풍경이 대개 '노리끼리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림이 '노리끼리'로 일관하는 이유는, 그가 Yellow Stone (노란 바위) 지역의 화가라서 그런것이지요 (알고보니 뭐 단순하군요.헤헤).

 

토마스 모란은  형제들도 그림을 그렸고요, 어릴때부터 목공, 판화 등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1862년에 영국으로 그림을 배우러 갔을때 그곳에서 터너 (Turner, 1775-1851)의 웅장하고 숭고한 풍경화에 감화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8년 여름에 뉴욕 현대미술관에 갔을때, 마침 터너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지요.  스케일 큰 풍경화를 실컷 보기는 했는데, 저 자신이 사람 하나 안보이는 풍경화에 별 재미를 못느끼기는 했지요.  지금은, 풍경화를 보는 안목도 좀 생겨서, 코코란에서 현재 진행중인 터너에서 세잔까지의 기획전 http://www.corcoran.org/turnertocezanne/index.php 을  보러 갈 생각입니다.)

 

토마스 모란이 미 서부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1871년 Hayden Geological Survey (헤이든 지리 연구) 팀에 초대되어 40일간 미 서부 옐로스톤 일대를 탐사하게 되면서부터 입니다. 연구팀에는 사진가 Wiliam Henry Jackson도  있었는데, 토마스 모란과 잭슨이 현장 스케치를 남기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흑백 사진만 가능했으므로 현장의 생생한 풍경은 화가가 담을수 있었다고 합니다.

 

 

The Grand Canyon of the Yellow Stone, 1893-1901, oil on canvas

427.8 x 245.1 cm (대략 4.3 미터 x 2.5 미터)

Thomas Moran (1837-192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위의 그림은 아니지만, 같은 제목의, 비슷한 각도에서 본 그랜드 캐년 그림이 1872년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가 되는데 그 그림은 미 의사당의 상원에 팔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옐로우스톤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게 하는데 혁혁한 공헌을 하게 되지요. 이를 시발점으로 미 의회는 1916년 정식으로  '국립공원 National Park System'을 도입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여름 휴가철에 '미서부 관광'이나 '옐로우스톤 국립공원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이 지역을 관광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미국에서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 Yellowstone National Park 이고요,  이곳이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게 되었을때, 그 배후에 토마스 모란의 그림 한장이 있었던 것이지요.  흑백사진 기술조차 미미하던 시절, 오로지 스케치나 수채화와 같은 것으로 시각자료가 전해지던 시절, 한장의 대형 풍경화가 전하는 미지의 세계는 보는이들에게 충분히 감동을 선사했을 법 합니다.

 

 

토마스 모란은 때로 Thomas Yellowstone Moran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고요, 이따금 그는 서명할때 Thomas Y. Moran 이라고 적기도 했답니다. 가운데의 Y 는 yellowstone 의 Y 이지요. 그리고 토마스 모란이 '미 국립공원'의 지정과 개발에 기여한 것을 기념하여 http://en.wikipedia.org/wiki/Mount_Moran  모란 산 (Mount Moran)이라는 이름도 붙여졌다고 합니다.  한장의 그림이 미국 역사에, 미국 국립공원의 산파 역할을 했다니, 그림을 만만히 보면 안될 일이군요.  다음에 스미소니안에 가면 그의 대형 그림 사진들을 모두 찍어와야 할것 같습니다. :)

 

 

화면 왼편 그림: The Cahsm of the Colorado, 1873-1874, oil on canvas mounted on aluminium

367.6 x 214.3 cm (대략 3.6 미터 x 2.1 미터)

Thomas Moran (1837 - 192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아, 참고로, 저 전시실 가운데에 둥그런 평상같이 생긴 의자가 있는데요. 곰털 같은 털가죽이 덮여있습니다.  관객이 저기에 편히 앉아서 쉬면서 그림을 감상할수 있도록 설치 해 놓았는데요. 옐로우스톤에 가면 '곰'이 많이 나오지요.  옛날에 옛날에 1998년에, 제가 미국땅 처음 밟아본것이 '미서부 관광' 패키지 여행을 통해서였는데요, 그때 관광 안내원이 '곰'이 나올지 모르니 주의하라고 당부하던 일이 생각이 나는군요.   그러니까, 저 곰가죽같은 의자나 혹은 그림 옆에 세워 놓은 화분도, 이 전시장의 장치 입니다. 풍경화에 어울리는 소품을 제시하여, 관객이 '풍경'속에 들어와있는듯한 기분이 들도록 유도하는 것이지요.

 

 

 

2009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앞서서 Albert Bierstadt (http://americanart.textcube.com/361)  페이지를 열면서 코코란 미술관의 전시장을 보여드렸는데요.  오른쪽의 대형 그림이 비어시타드(1830-1902)의 '버팔로의 최후.' 왼편에 보이는 대형 그림이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의 나이아가라 입니다. 오늘은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1826-1900)의 그림을 보기로 하지요. 제가 두 사람의 생몰 년대를 적어놨는데 처치가 4년 먼저 태어났지만, 형제들처럼 한 시대를 함께 활동한 화가들로 봐도 되겠지요.  (이래서, 미술관에서 비어시타드와 처치가 늘 함께 붙어다니거죠.)

 

 

나이아가라 폭포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제가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라는 미국 화가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작품이 바로 이 '나이아가라 폭포'입니다. 2008년 5월 이른 아침에 코코란 미술관에 혼자 가서 열시의 개관 시간을 기다리던 일이 생각이 나는군요. 그 날 한가롭게 안내인의 안내를 받았는데, 이 그림 앞에 앉아서 제법 상세한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직접 가서 본 것은 2005년 8월의 일이었는데요,  가서 보고 깜짝 놀랐었죠.  당시에 주변에 있던 유학생 가족들도 여름에 아이들과 미 동부 여행을 다녀오곤 했는데, 저는 돈도 없고 공부도 바빠서 여행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가 여행 다녀온 사람들을 붙잡고 묻곤 했습니다.  "어디가 제일 좋았나?"  어른들은 뉴욕과 워싱턴이 인상깊었다고 얘기하고, 청소년들은 '나이아가라 폭포'가 너무너무 근사했다고 대꾸들을 했지요.  나이아가라 폭포야 그냥 폭포인데 그게 근사할게 뭐가 있나?  그냥 그러려니 했었는데, 막상 가보니 기가 막히더라구요.  나이아가라 관광하는 동안 정말 애들처럼 좋아 죽는줄 알았습니다. 신나서. 하하하

 

나이아가라는, 가서 봐야 하는거지, 영화 백날 봐 봤자, 현실감이 없죠. 

 

1700년대에 유럽인이 처음 나이아가라를 발견한 이래로,  유럽대륙에 나이아가라에 대한 환상이 자라났다고 합니다. 당시에 사진이 있었대도 흑백사진을 간신히 만들던 시절이라, 사진가지고 그 현장의 감동을 전하기는 어려웠을테고, 결국 그림이 가장 현실적인 수단이었겠지요.  그래서 프레데릭 처치 외에도 여러명의 화가들이 나이아가라 폭포 그림을 그렸습니다.

 

Niagara Falls, 1857, Oil on Canvas (42 1/2 x 90 1/2 inches)

2009년 10월 3일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이 그림이 처음 소개가 되었을때 유럽대륙에 없는, 오직 '신세계 New Worlld' 미국에만 있는 장관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남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이 나이아가라폭포는 제작년대를 보니 프레데릭 처치가 27세때 그린 작품이군요. 이 그림의 성공으로 프레데릭 처치는 미국의 풍경화가로서 탄탄 대로를 나아가게 됩니다.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은 커넥티컷주의 하트포드시에서 부유한 시계제조회사, 보험회사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선대가 부유하다보니 프레데릭 처치 자신은 먹고 살 걱정이 없었고, 그가 미술에 재능을 보이자 그는 일찌감치 허드슨 강변의 화가들 (Hudson River School)의 원조인 Thomas Cole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에게 연결되어 그의 제자가 됩니다.  그는 일찌감치 22세가 되던 해에 National Academy of Design 의 멤버가 되고 뉴욕에 정착하여 스케치 여행을 다니게 됩니다. 일년의 봄, 여름, 가을에는 여행을 다니고, 겨울에는 뉴욕으로 돌아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것이지요. 그는 1853년과 1857년에 남미 여행을 하기도 하면서 남미의 숲이나 풍경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후에는 유럽과 중동등 세계 여러나라를 돌면서 현지의 풍광을 스케치하고 대형 풍경화 작업을 했지요.  후기에는 그의 스승 토마스 콜과 마찬가지로 허드슨 강변에 대 저택을 짓고 정착하게 되지요.

 

 

아, 그런데 이 사람 이름이 특이하죠.  성이 Church 입니다. 예배당이 '처지' 쟎아요. 미루어 짐작컨대, 집안이 신앙심이 강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거죠. 미술 비평가들중에는 처치의 풍경화에서 어떤 '정신적인 spiritual' 면을 해석해내기도 합니다. 보편적으로 아름다운 자연 자체가 숭고성을 전하지 않나요? 어떤 사람에게 신앙이 있거나 없거나, 혹은 어떤 신앙이나 사상을 갖고 있거나 간에, 위대하고 장엄한 자연 풍경 앞에서는 스스로 옷깃을 여미고 풍경 너머의 어떤 의미를 사색하게 되쟎아요.  우리가 매일 보는 황혼이 어느날 유난히 붉을때, 혹은 달이 어느날 유난히 환할때, 별이 유난히 반짝일때도 우리는 그런 자연 현상에서 어떤 상징성을 찾고 싶어하지요. 설령 우리가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프레데릭 처치는 박물학자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 (1769-1859) 의 저서인 Cosmos 를 탐독하고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훔볼트는 남미 지역을 탐사하면서 식물 지리학이라는 분야를 개척했고,  다윈(1809-1882)은 비글호를 타고 남미를 탐험했지요.  처치 역시 이들의 영향을 받아 그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눈을 돌리고,  그의 분야, 풍경화를 통해 그가 본 것들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재미있어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지역을 돌면서, 어떤 사람은 박물학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진화론'이라는 경천동지할 가설을 탄생시켜서 우리의 사고체계를 확 뒤집어버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것을 화폭으로 옮겼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저는 누가 더 똑똑하고 잘났다는 얘기를 하기보다는,  사람마다 타고난 품성과 재능이 각자 다르므로 각자 자신의 재능과 취미대로 자신을 펼치면서 살면 인생이 재미있고 다채로워질거라는거죠.  우리 모두가 다윈이 될 필요도, 우리 모두가 화가가 될 필요도 없죠. (관객도 필요해요~ ).  그렇지만 우리 모두 각자 위대한 개인임은 분명하죠.

 

뉴포트 산 풍경

 

New Port Mountain, Mount Desert, 1851, Oil on Canvas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이 그림은 대형 작품은 아닙니다. (제가 게을러서 그림 사이즈를 정리를 안하고 이렇게 때우는군요.) 이 풍경은 뉴포트의 사실적인 풍경으로 보입니다.

 

 

 

오로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의 한 갤러리에 있는 작품인데요, 이 갤러리 앞을 지나갈때면, 어디선가에서 빛이 번쩍 나면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인상입니다.  이것이 오로라 인가봐요.  (저는 아직 오로라를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극지방에 가면 하늘에 오로라가 보인다고 하쟎아요).  오른쪽의 오로라 그림도, 왼편의 풍경화도 모두 프레데릭 처치의 작품입니다.  여기 의자가 있다는 얘기는, 이 의자에 앉아서 그림을 감상하시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 거리와 각도에서.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시면, 왼편 아랫쪽에 배하고, 썰매 팀이 작게 보이는데요, 이들은 탐험가 Issac Hayes 탐험팀입니다. 이들은 1860년에 북극 탐사를 했습니다. 그는 탐험 기록으로 많은 스케치를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미국에 돌아와보니 내전 (남북전쟁 1861-1865)으로 나라가 분열되어 있었지요. 기가 막힌 상황이었죠. 프레데릭 처치는 북극 탐사팀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탐사팀이 가져온 스케치와 이야기를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1865년, 이 오로라 그림을 완성시켰는데요. 스미소니안 미술관에서는 이 그림에 대해서 '암울한 국가적 갈등에 대한 불운한 전조'를 보여줬다는 식으로 설명을 하는데요, 관객인 제가 볼때 이 그림은 오히려, 희망의 상징처럼 보이거든요. 오로라는 신화에서 '새벽'의 여신인데, 1865년의 미국사와 '오로라'를 연결지어 본다면,  내전이 끝나고 새로운 역사가 동터오는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하는거죠.

 

 

Aurora Borealis, 1865, Oil on Canvas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

2009년 12월 29일 Smiethsonian American Art Museum 에서 촬영

 

 

 

안데스 산맥의 코토팍시 분화구

 

Cotopaxi, 1855, oil on canvas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

2009년 12월 29일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에서 촬영

 

프레데릭 처치가 남미를 여행하던 중에 봤던 풍경인것 같죠. 안데스 산맥의 코토팍시 산을 그린 것입니다.

 

 

 

 

 

빛의 강: 프레데릭 처치의 마지막 그림

 

 

 

기록에 의하면, 프레데릭 처치는 1877년 손 관절의 문제로 더이상 그림을 그릴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빛의 강'이 1877년에 제작된 것이므로 이 작품이 그의 거의 마지막 작품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자료를 찾아보면 1877년 이후에 발표된 작품을 만나기가 힘듭니다. 왜 1900년까지 생존한 사람의 작품이 1980년대에 끝나는가 의문을 가졌었는데, 신병때문에 이후에 작품 활동이 불가능해졌던 것 같습니다. (아, 전에 소개드렸던 Grandma Moses 의 경우에는 http://americanart.textcube.com/93  모세할머니가 수놓기를 즐기다가 눈이 어두워지고 손도 불편하여 수놓는걸 포기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출세을 했다고 하지요.사람 일은 알수가 없는거죠.)

 

 

 

El Rio de Luz (The River of Light), 1877, Oil on Canvas

213.7 x 138.1 cm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이 작품은 1857년 그가 남미를 여행했던 당시의 스케치와 기록과 기억을 바탕으로 20년 후인 1877년에 그린  것입니다. 51세가 된 화가가 31세때 여행했던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렸다고 것이지요.  그림을 들여다보면, 남미 열대기후에서 볼 수 있는 열대 식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고요 뽀얀 새벽안개 속의 물빛도 왠지 따뜻할것 같습니다.  '빛의 강'이라니 이 물에 잠겨 수영이라도 하면 극락일것 같지요.  이 그림을 보면, 처치의 세밀한 자연관찰력과,  자연과학 너머의 숭고한 정신세계 그 양면적인 것을 그대로 보여주지요.

 

제가 남미에는 아직 못가봤지만, 미국의 최 남단인 플로리다에서는 한 오년을 살았는데요, 바다에 가면, 바닷물이 따뜻해요. (겨울에도). 강이나 호수는 고요하고 역시 따뜻해요. 열대 식물들이 빼곡하고, 악어, 도마뱀들이 태평하게 돌아다니고.  돌아보면, 참, 내가 낙원에서 일생의 오년을 보냈구나...이런 생각이 들어요. 특히나 지금처럼 백년만의 폭설이라는 눈때문에 방에 갖혀서 꼼짝도 못하고 있을라치면, 내가 잃어버린 낙원이 미치도록 그리워지지요.

 

처치가 후년에 대지를 사들여 저택을 지은 뉴잉글랜드 지방 허드슨 강변은 사실  겨울이면 엄청 추운곳입니다. 겨울엔 그런데서 살기 싫죠. 그래서 동부의 돈많은 갑부들이 플로리다에 겨울 별장을 마련해 놓고 즐기는거죠.  자,  손에 류머티즘이 와서 손도 불편하고, 날도 춥고, 어디 나가기도 불편한 겨울날, 오십대의 화가가 작업실에 앉아서 이 그림을 그리는 광경을 상상해봅시다. 그의 추억속의 남미, 빛의 강이 얼마나 그리울지, 얼마나 미적지근하고 습기로 끈끈하며 그의 시린 어깨를 녹여줄지.

 

그의 연보를 살피다가, 이 그림이 아마도 공식적으로 공개된 그의 작품으로는 최후의 작품인것을 발견하니 새삼, 그림을 다시 보게 됩니다. 프레데릭 처치는, 아마도 온화한 말년을 보냈을것 같아요. 그의 마지막 그림이 빛과 따뜻함에 감싸인 새벽의 강인것을 보면 - 그가 돌아간 세상도 이와 비슷할지 모르죠.

 

 

2010년 2월 7일 일요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일찌기 허드슨강변의 화가 Thomas Cole 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허드슨강변의 풍경화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에 대해 잠시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이제 그들중에서 대표적인 몇사람을 소개할 시간이 된것 같습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360 이전 페이지에서 알버트 비어시타드의 대형 풍경화를 소개했지요.  비어시타드도 허드슨강변의 화가로 분류되는 사람입니다.  다음은 코코란 미술관에서 발견한 그의 대형 그림인데요,  왼편에 보이는 것은 Frederick Edwin Church 라는 화가의 '나이아가라' 라는 작품이고요,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비어스타드의 '미국들소의 최후'라는 작품입니다.  프레데릭 처치 역시 허드슨 강변의 화가에 속하므로 비어스타드 페이지를 마치고나서  소개를 하겠습니다.  일단, 사진에서 보시듯이, 작품들이 크죠.

 

들소떼의 최후

 

 

(오른쪽 그림) The Last of the Buffallo, 1888,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그림의 제목이 '버팔로 (미국들소)의 최후'입니다. 1888년 작품인데 화가가 58세때 그린 것이므로 그의 화풍이 충분히 완성된 시기의 작품으로 봐야겠지요.  제목이 이미 어떤 비극성을 띄고 있지요.  최후라...

 

역사적으로 보면 1870년대에 미국의 평원지대에 살던 들소떼가 거의 멸종 상태에 달 할 정도로 무차별 사냥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들소의 가죽 때문이었지요.  그러니까, 들소 가죽을 얻기 위해서 들소를 죽인거죠 (마치 코끼리의 상아를 얻기 위해 코끼리를 죽이듯).  이 들소떼의 사냥에 적극적이었던 집단은 평원의 인디언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들 역시 살기 위해서, 백인들에게 들소 가죽을 넘기기 위해서 들소들을 몰살했겠지요.  그리고 그 인디언들 역시 비슷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결국, 이 그림은 어떤 면에서 미국대륙의 '원주민들'이었던 아메리칸 들소떼와,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최후를 그린 셈이지요.

 

 

The Last of the Buffallo, 1888,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부분: The Last of the Buffallo, 1888,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기개있게 피를 흘리며 싸우던 들소떼도

 

부분: The Last of the Buffallo, 1888,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창을들고 들소와 대적하던 인디언들도

 

 

The Last of the Buffallo, 1888,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저 들판을 질주하던 들소떼들도 이미 종적을 감추고 없었을겁니다, 비어시타드가 이 그림을 완성하던 1888 무렵에는.  이 그림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향수, 추억 같은 것이지요. 실재 상황을 실재 현장에 가서 스케치해서 그렸다기 보다는 비어시타드가 전에 본 일이 있던 풍경위에 그가 상상한 장면들을 덧입혀 그려낸 '상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비어스타드가 그의 경험과 상상력을 기반으로해서 탄생시킨 이 그림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현장의 역동성을, 우리가 약자들에게 자행한 살륙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지요.

 

 

이 그림 보면요, 어릴때 배운 미국 민요 '내집 가련다 들소들 거닐고~' 이 노래가 생각나요.

http://en.wikipedia.org/wiki/Home_on_the_Range 이 페이지에 여러가지 가사가 소개되는데요, 어쨌거나 이렇게 시작하죠

 

Oh, give me a home where the Buffalo roam
Where the Deer and the Antelope play;
Where seldom is heard a discouraging word,
And the sky is not cloudy all day
 

1870년대에 처음 불려진 기록이 있다는데요, 그때는 들소떼가 아직 남아 있었죠. 바로 그 1870년대에 들소 사냥의 열풍이 불어서 1880년대가 되었을때, 들소는 '추억'으로만 남게 된거죠.  사람들은 그가 지구의 어디에 있건 근본적으로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데요.  신생국 미국도 국가의 발전과 산업화와 함께, 이들이 잃어버린것이 많지요.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것들은 그리움으로 남아서 울리게 되지요.  제가 지금 버팔로의 최후 그림을 보면서 떠올리는 것은 들소떼가 사라져버린 미국의 어느 평원이 아니지요. 제 머릿속에는  아파트 개발로 사라진 내 고향마을이지요.  들소떼도 사라지고, 내가 멱감던 실개천도 사라지고... 모두 죽거나 사라지거나, 그런거죠.

 

 

 

 

 

 

 

 

에메랄드 호수

 

 

The Emerald Pool, 1870,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1월 29일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위의 들소떼의 최후나, 그 전 페이지에 소개가 되었던 시에라 네바다의 풍경이 '상상화'에 가깝다고 한다면, 이 풍경은 실재 풍경에 가깝다고 할 만 합니다.  1869년 뉴햄프셔주의 White Mountain 에 스케치 여행을 가서 습작을 그려 온 것이라고 하는데요, Mount Washington 에서 동쪽으로 수마일 가면 에머랄드 호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림 속에 멀리 희게 보이는 산이 Mount Washington 이라고 합니다.  동부에 실재하는 자연 풍광을 그린 이 작품은 허드슨 강변의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소재나 분위기를 여실히 전해주고 있지요.

 

 

The Emerald Pond, 1870,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1월 29일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루쩨른 호수, 스위스

 

 

 

Lake Lucerne, 1858

 

 

이 그림은 비어시타드가 28세때 그린, 청년기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스위스의 루쩨른 호수를 담았습니다.  아마도 스위스 여행중에 보았던 풍경이었을거라 짐작합니다.  대형이지요.  비어시타드는 이미 청년기부터 초대형 풍경화를 그렸던 것 같습니다. 

 

비어시타드는 1830년 독일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3세 되던 해에 그의 가족이 미국의 매사추세츠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23세가 되던 1853년부터 1857년까지 독일의 뒤셀도르프에서 미술 수업을 받고, 미술 지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1859년 미국으로 돌아와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그림 활동을 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이 루쩨른 호수 풍경은 그가 미국에서 활동하기 직전의 유럽 풍경을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Lake Lucerne, oil on canvas, 1858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9월 11일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1859년 그는 미국 정부의 후원을 받고 서부로의 여행을 떠납니다. 화가로서 그가 할 일은 서부의 풍경을 담아 오는 일이었지요. 그러니까 그 당시 미국 동부에서 볼때 서부는 아직 미개척의 땅이었고, 여러분야의 탐사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풍경을 스케치 할 화가도 탐사팀에 필요했겠지요.  비어스타드는 그 후에도 여러차례 동부에서 서부로 향하는 스케치 여행에 올랐고, 게다가 그는 그의 그림을 이용해 돈을 벌어들이는 재주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대형 미국의 풍경화는 그것이 진경이었건, 사실에 근거한 상상의 산물이었건 유럽 사람들의 신대륙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었습니다.  그는 살아 생전에 400점이 넘는 풍경화를 팔아 넘겼고, 그의 인기는 그의 사후에도 여전하다고 합니다.

 

비어시타드의 대형 풍경화가 저에게 그리 매력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갖는 역사성을 보면,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저는 학교에서 수업할때 'context' 읽기를 강조 할 때가 많습니다.  누가 어떤 발언을 했을때, 그 발언의 'context'가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떤 책의 누가 한 말을 인용할  때 역시 그 말이 나온 앞뒤 전후 사정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어떤 기자가 '잘못된 보도'를 해서 좀 시끄러웠는데요.  "자기 문제 자기가 해결할 능력이 있는 사람만 오라"고 어떤 사람이 말을 했다고 해서, 그 말 한 어떤 사람이 졸지에 '죽일놈'이 되었다가, 며칠 지나자 그런 잘못된 보도를 한 기자가 '죽일놈'이 되었다가 이리저리 뒤집어지고 시끄러웠습니다. 아니 뭐 지진이 난것만도 재앙인데, 그런 일 가지고 서로 죽이네 살리네 한다는 말입니까.  서로 협동해서 잘 해도 어려운 판인데요.  서로간에 여유와 아량이 필요한데요. 보도를 접하는 우리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이죠.  왜 며칠사이에 이사람, 저사람이 죽일놈이 되고 그러냐하면, 정확한 컨텍스트 없이 말이 이리저리 흘러서 그런 것이지요.

 

 

 

19세기 중반에 그려진, 지금으로부터 150여년전에 그려진 비어스타드의 대형 풍경화를 오늘날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사실 별것 아닙니다.  '좀 크군...' 하면 그만 입니다.  풍경이 뭐 스펙터클 하다 한들, 우리들은 이미 대형 스크린의 무지무지한 스펙터클에 익숙한 세대인걸요.  그런데요,  그 그림이 150년 전에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미지의 땅, 우리들이 한번도 가보지 못한 땅, 그 땅의 풍경을 실제크기처럼 어마어마하게 그린 그림.  말하자면, 비어스타드의 그림은 오늘날의 입체영화관에서 상영되는 3D 스펙터클 영화 만큼이나 당시 사람들에게 놀라운 경험이었을거란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 시대의 그림이 아닌, 백년 혹은 이백년 혹은 수백년 이전의 작품들이나 역사적 사실들을 볼때는,  현대적 안목으로 한번 살핀후에,  당시의 상황속에서 그것을 살펴보는 시각도 필요합니다.  현대적 안목으로는 별 것 아니지만, 당시에는 혁명적인 아디디어였을수도 있고요, 또 당시에는 별것 아닌것처럼 보였을지라도, 현대인의 안목으로 봤을때, 시대를 초월하는 획기적인 무엇이 들어 있을수도 있고요.

 

그래서요. 제가 요새 미술관 돌아다니며 여러 시대의 작품들을 한꺼번에 주루룩 살필 기회가 많은데요.  이렇게 한시대의 다양한 장르 혹은 여러시대의 명작들을 한꺼번에 훑다보니, 세상을 볼때도 조금 다른 시각이 자라나는 것을 느낍니다.  전후, 좌우를 살피는 습관이 들었지요.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다른 시각으로 생각해본다거나,  특히 내가 짜증나는 일이 있을때, 그 사건을 나의 시각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살펴본다거나 그런 시간이 많아졌지요.

 

세상 돌아가는 일을 '그림'처럼 보면,  관조하는 여유가 생기는것도 같아요.  컨텍스트를 들여다보고, 컨텍스트 바깥에서 들여다보고, 이리저리 사물의 다양한 면을 보는 것이지요. 누가 실수 했을때,  너무 나무라지 말고,  너무 몰아세우지 말고, 주의 주고, 반성할 시간 주고 좀 여유있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하게 됩니다. 

 

비어스타드의 풍경화가 내 눈에는 뭐 '좀 크네' 하는 정도이지만, 그렇지만, 그 당시엔 정말 대단했겠다. 그랬겠다 하고 다시 생각해보는것.  미술감상하다가 생긴 안목이지요.

 

 

 

 

Posted by Lee Eunmee

 

http://americanart.textcube.com/359  존 제임스 오드본의 페이지에서 잠시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 2층의 입구 풍경을 보여드렸는데요. 통로를 따라 이동하면 저 끝에, 커튼이 살짝 드리워진 방에 대형 풍경화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지요.  기왕에 발길 닿는대로 가는 인생,  이번에는 그 커튼 속의 대형 풍경화 이야기를 마저 해 볼까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19세기의 대형 풍경화의 시대를 전체적으로 다뤄야 할 것같아 뜸을 들이고 있었는데, 뭐 차근차근 진도 나가보죠.)

 

자, 발길을 따라 저와 이동을 해 보는겁니다.  이 통로를 따라 슬슬 걷다 보면

 

 

 

2010년 1월 31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자, 이런 방을 하나 만나는 겁니다. 이 방에는 기이하게도 커튼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풍경화가 있습니다.  방 가운데에 푹신한 벤치도 있습니다.  이제부터 이 벤치에 앉아서 그림을 보는겁니다.

 

 

 

2009년 1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그러면, 도대체, 이 방 입구에는 왜 커튼을 쳐 놓은 것일까요?

 

사연을 이야기 하기 전에.

 

제가 딴소리의 대가라는 것은 익히 아시지요? 늘 허접한 주변 얘기 하다가 본론을 잊고 마는 고질병이 있는데요.  '플란다스의 개' 이야기 아시지요?  저로서는 이세상에서 가장 슬픈 얘기, 너무 슬퍼서 심지어 테레비 어린이 만화 프로로 아로와와 네로가 행복하게 뛰어노는 장면이 보여도 그거 채널 돌리곤 했습니다. 결과를 다 아니까. 너무너무 슬픈 일이 결국 벌어질거니까. 절대 안본다 이거죠.  그렇지만, 줄거리 다 알거든요.  아무리 슬퍼도 몇번은 읽었으니까...  네로가 성당에 있는 그림을 무척 보고 싶어 하쟎아요.  이야기속에서는 그게 '루벤스'의 그림이었는데요.  그래서 저는 미술관에서 '루벤스'의 그림을 발견하면 엉뚱하게도 '플란다스의 개'를 떠올립니다.  "너 때문에 네로가 죽었단말야!" 뭐 이런 말도 안되는 심술을 루벤스의 그림을 향해 그려보는것입니다. 뭐 대단치도 않은 그림을 그리워하다가 네로가 죽고 말다니... 이런 심술도 나고요.  아무튼 네로때문에, 슬픈 이야기때문에, 저는 루벤스를 싫어합니다. (말 안되고 있죠?  루벤스는 억울하겠지만...)

 

그런데 그 플란더스의 개 이야기에 보면, 그 루벤스의 그림을 평소에 볼 수가 없쟎아요.  커튼으로 가려 놓아가지고, 특별한 행사때만, 혹은 돈을 내야만 그 그림을 볼수가 있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참 납득이 안가는데요, 그림에 커튼을 쳐 놓고 필요할때만 열어 보았다니요. 그런데 옛날엔 그랬다는군요.  그림에 먼지 탈까봐 그랬는지. 귀한거라 가려놓은것인지 알수 없지만.  아무래도 귀한것은 숨기고 싶은 법이라,  귀한 그림을 함부로 남이 볼수 없게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요, 또 이것이 납득이 가기도 해요. 뭐냐하면, 우리가 어디서 전시회 한다고 하면 돈내고 가서 보쟎아요.  요즘 한국에서 앤디 와홀전 한다는데 얼마 내고 보시나요? 못잡아도 만원은 넘게 낼거라고 추측하는데요. 뉴욕의 현대 미술관 입장료가 20달러도 넘으니까, 그림 보려고 이만원도 넘게 내고 들어가서 보는거쟎아요. 돈 없으면 그림 구경 하고 싶어도 못하는거죠.  물론 평생에 한번 볼까 말까한 명품들을 돈 일만원 이만원 내고 볼 수 있는것도 기쁜 일인데요, 하지만 돈 없는 사람에게 그 돈이 간단한 돈이 아니죠.  그러니까, 오늘날에 전시장에 돈 내고 들어가는 시스템이나, 옛날에 그림에 커튼 쳐 놓고 있다가 돈 받고 그림 구경 시켜준 시스템이나 뭐 큰 차이가 안나죠.  그렇게 생각하면 그림에 커튼치고 돈받고 구경시켜준 일도 납득이 간다는거죠.

 

 

 

 

 

 

 

미국이 18세기 중엽에 독립을 선포하고 독립전쟁도 하고 그랬지만, 그 당시에도 그리고 19세기 중반까지도 미국은 유럽에서 볼때는 낯선 곳이었지요.  그리고 미국이 독립하던 당시에 동부의 13개주만 참여했을뿐 나머지 지역은 아직 미 합중국에 속하지도 않았거든요.  미국은 독립당시에도 광활한 미개척의 땅이었던 것이지요.

 

이 그림은 미국의 풍경화가 Albert Bierstadt (알버트 비어시타드)의 작품인데, 그는 미국의 서부를 직접 여행하며 스케치를 하기도 했지만, 정작 그가 이 그림을 그린곳은 이탈리아 로마였습니다. 로마의 자신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완성하여 영국으로 보내 전시를 했지요.  전시장에 적절한 조명을 밝히고, 천막을 쳐서 그림을 가리고, 사람들에게서 입장료를 받은 후에 짜잔 하고 그림을 보여주는거죠. (서커스단에서 천막안에 진귀한것 갖다 놓고 돈받고 구경시켜주는것과 비슷했겠죠).  사진도, 인터넷도 없던시절,  유럽 사람들은 거대한 미국의 풍경화를 보면서 - 저곳은 신의 땅이 아닌가! 에덴동산이 아닌가!  경악하기도 하고, 이민의 꿈을 꾸기도 하고 그랬겠지요.

 

이 그림은 유럽을 돌며 돈을 긁어모은 후에 미국으로 건너와 보스톤에서 전시가 되었는데, 당시에 이 그림을 뜯어본 비평가중에 이 그림이 실제 미국의 '진경 산수'가 아니라는것을 알아챈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미 서부의 풍경이라고 했지만 사실 실제 이런 장소는 없었지요. 비어시타드가 서부를 돌면서 스케치했던 이곳 저곳의 풍경 중에서 근사했던 것을 총 집합시켜서 하나의 풍경화에 '때려 넣은'거죠.   하지만, 이것이 '진경산수'가 아니고 그냥 이것저것 섞어서 만들어낸 가상의 풍경이라고 해도 미국의 장대한 자연을 제대로 연출해냈다는 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만약에 독자중에 실제로 스미소니안에 가서 이 그림을 보게 되는 분들은, 이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보시기를 권합니다.  저 의자가 괜히 저기 있는것이 아니고요.  저 의자가 놓여진 곳에 앉아서 이 풍경화를 볼때, 그때 화가가 의도한 가장 '완벽한' 각도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도에서 흘끔 보고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혹은 의자에 앉아도 되나 안되나 눈치 보지 마시고) 의자에 편히 앉아서 이 풍경속의 숲과, 동물과, 물과, 산 그런것들을 즐기시길. 

 

 

 

 

 

 

Among the Sierra Nevada, California, 1868, oil on canvas

183x305 cm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내킨김에 19세기의 대형 풍경화와 풍경화가들을 시리즈로 적어볼까요.  ... 누굴 추리나...(부시럭 부시럭.)

 

 

2010년 2월 6일 RedFox

 

* 참고로 Albert Beirstadt 는 독일 태생의 미국인인데요, 그 사람 이름을 독일식으로 읽으면 /알베르트 비어쉬타트/에 가깝거든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를 /비어시타드/라고 발음하는 편입니다. 저는 독일어도 배웠고, 현재는 미국어를 많이 쓰고 있는데, 이경우 갈등이 좀 생겨요. 비어쉬타트라고 읽어야 할지 비어시타드로 표기를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는 비어쉬타트 라고 읽고, 정작 표기할때는 비어시타드라고 합니다. (어렵지요. 어차피 남의 나라말. 남의 나라 이름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361 2편에서 계속...

 

 

Posted by Lee Eunmee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으로 올라가면 오른편에는 초상화 갤러리가 시작되면서  장군시절의 조지 워싱턴이 서 있고요 (거기서 오른편으로 향하면 초상화 갤러리로 가는 것이고), 그 자리에 서서 왼쪽을 보면 이런 통로가 보입니다.  이 사진은 조지 워싱턴 초상화를 보다가 카메라를 왼편으로 돌려서 찍은 것입니다. 

 

자 머리위로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이라는 표시가 보이지요.  통로 가운데에 미니어쳐 자유의 여신상이 서있고요, 그 뒤로 중앙에 새 그림이 붙어있습니다.  새 그림 뒤로 통로를 따라 가다 보면 저 뒤에 어두운 색조의 커튼이 드리워진 작은 방이 보이지요? 그 커튼이 있는 방에 풍경화가 한점 있습니다.  알버트 비어슈타드의 초대형 풍경화인데요.  이 통로를 따라서 전시실들이 늘어서 있는데 이곳을 따라 이동하다보면 미국의 식민지 시절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미술사를 눈으로 훑을수 있게 됩니다.

 

바로 그, 미국 미술사 전체를 보여주는 전시장 입구의 중앙을 장식하는 것이 John James Audubon 의 독수리 그림입니다.

 

 

 

2010년 1월 31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Washington Sea Eagle c. 1836-39

Oil on Canvas

John James Audubon 1785-1851

Born Les Cayes, Haiti, Died New York City (아이티 출생, 뉴욕에서 사망)

2010년 1월 31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미국에서 존 제임스 오드본 (1785-1851) 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Audubon 이라는 이름은 그다지 낯설지 않습니다.  미국의 아무 책방에나 가보면 아주 간단한 손바닥만한 책에서부터 두꺼운 하드커버 양장본 책에 이르기까지 '새 관찰'관련 책에 Audubon Society 라는 이름이 박히지 않은 책이 별로 없거든요.  Audubon 이 뭔지 알수 없으나 Audubon Society 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 National Audubon Society 라는 이름에 등장하는 Audubon 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오늘 짧게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요.  북미 지역에서 '새 그림' 그린 사람 - 하면 그냥 자동으로 오드본을 떠올려도 될 정도로 오드본은 '새'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남미의 아이티 (Haiti)에 발생한 지진으로 아이티나 한국이나 시끌시끌한데요, 존 제임스 오드본은 그 아이티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당시 아이티는 프랑스 식민지였지요.  존 제임스 오드본의 아버지는 이 아이티에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던 프랑스 출신의 선장이었는데요, 그와 아이티 원주민 여인과의 사이에서 존 제임스 오드본이 태어났습니다. 오드본의 생모는 출산 6개월 후에 사망하고, 오드본은 프랑스 낭트의 본가로 보내졌습니다. (그는 사생아였죠.) 프랑스의 본가에서 기다리던 프랑스인 어머니와의 사이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고, 그는 비교적 간섭받지 않는 자유로운 어린시절을 보냈던것 같습니다. 그는 주로 들로 산으로 나 돌아다니며 자연 관찰 하는 일을 즐기며 성장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18세 되던 1803년 그의 아버지는 나폴레옹의 징집을 피하기 위하여 오드본을 미국으로 보냅니다.  (징집 기피이군요).   그는 필라델피아 인근에 있던 아버지의 농장에서 살다가 이웃 처녀와 결혼을 합니다.  비록 혼혈 사생아로 태어나긴 했으나 부유한 아버지의 도움으로 사는데는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1819년 그가 파산을 하여 알거지가 되자, 그는 미시시피 강 연안을 따라 이동하면서 새 그림을 그리기로 작정합니다. 북미의 모든 새를 다 그리겠다는 포부였지요. 중간에 그가 그린 새 그림을 모두 유실하는 사태를 겪기도 했지만, 그의 노력은 영국의 Ryoal Society in London 에서 인정을 받았고 1827년부터 1838년 사이에 북미의 새 435장을 출판해 냈습니다.   1840년대 초반부터는 북미의 포유류를 모두 그리겠다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1851년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가 완성하지 못한 프로젝트는 그의 아들인 Victor Gifford Audubon 과 John Woodhouse Audubon 에 의해 완성 됩니다.

 

오드본의 새 그림의 특징은, 한정된 면 안에 새를 거의 실물 크기로 재현해 냈다는 것입니다.  새를 최대한 사실에 부합되도록 정확히, 생생하게 그려내기 위해서 오드번이 기울인 노력은,  한종류의 새를 다치지 않게 여러마리 사냥하여 그 새를 여러가지 각도로 핀으로 고정시켜놓고 스케치를 했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한장의 새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그는 여러마리의 동일한 종류의 새를 희생시켜야 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치밀한 관찰을 통해 그려진 그의 새 그림은 아직까지도 북미 지역의 새들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고요, 그의 이러한 철저한 관찰정신을 높이 사서 National Audubon Society (http://www.audubon.org/) 에서도 그의 이름을 기렸고요, 관련단체에서 새 관찰 관련 안내서들도 많이 나옵니다.

 

 

아이티의 지진 사태로 많은 희생자가 생겼고,  하필 이렇게 불행한 일로 인해 요즘 아이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요.  아이티에서 태어난 사람중에 미국의 대표적인 '새 그림 화가'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페이지를 만들어 봤습니다.  프랑스와 아이티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사생아 존 제임스 오드본.  그는 미국이 자랑하는 '새 그림 화가'로 성장하여 아직까지도 그의 독보적 미술세계와 시대를 앞서간 자연 관찰정신이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지요. 

 

혹시 나중에 책방에서 '북미의 새들, 오드본 소사이어티' 뭐 이런 책 표지를 발견하시면, 아이티에서 태어난 한 혼혈 소년을 떠올리시기를.

 

 

 

 

 

 

National Audubon Society Field Guide to North American Birds--E: Eastern Region - Revised Edition

 

 

 

 

National Audubon Society Field Guide to North American Birds--E: Eastern Region - Revised Edition

 

 

 

 

2010년 2월 6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Thomas Jefferson, oil on wood c. 1821

3대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

Gilbert Stuart (1755-1828)

2010년 1월 20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길버트 스튜어트의 토마스 제퍼슨 원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2달러 지폐

 

 

 

 

일찌기

 

http://americanart.textcube.com/34  조슈아 존슨 Joshua Johnson  (1763-1832)

 

http://americanart.textcube.com/289  미국의 초기 일반인 초상화

페이지에서 미국의 초상화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습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357 페이지에서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 이야기를 하면서 Gilbert Stuart (길버트 스튜어트 1755-1828) 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했으므로, 그에 대한 간단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길버트 스튜어트에 대한 이야기 전에 잠깐만 저 위의 조슈아 존슨 (1763-1832)과 길버트 스튜어트 (1755-1828)의 생몰년대에 주목해주시겠습니까?

 

길버트 스튜어트가 8년쯤 먼저 태어나긴 했는데요, 대략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했던 두 사람입니다.  조쥬아 존슨은 자유민이 된 흑인 노예 출신이었고, 그러므로 그림 공부란것을 전문적으로 해 볼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길버트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와 영국등지에서 제대로 미술 수업을 받은 사람입니다.  존슨은 스스로 그림을 익히다가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초상화를 그려주는 '민간 초상화가'였고,  스튜어트는 주로 미국의 상류층 (심지어 대통령)의 주문을 받고 초상화를 그려서 떵떵거리고 살다 간 화가입니다. 

 

워싱턴의 National Gallery of Art (국립 미술관)의 미국미술 관련 갤러리에 가 보면요, 길버트 스튜어트가 제작한 대형 초상화들이며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들이 으리으리하게 진열되어 있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으리으리한 초상화 갤러리가 재미가 없어서 쓱! 휙! 보고, 갤러리 풍경조차 사진에 안담고 휙! 나가버리곤 했는데요.  길버트 스튜어트 관련 자료를 찾다보면, 그의 주요 작품들을 많이 볼수 있는 미술관 명단의 상위에 '국립미술관'이 있지요. 여기에 그의 주요 작품들이 많이 있다 이거죠 (물론 스미소니안 국립 초상화 박물관도 주요 미술관중의 하나 입니다.).  뭐 한시대에 미국의 대통령급만 (초대부터 6대까지 무려 여섯명의 미국 대통령 초상화를 그가 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던 초상화가이니, 재주도 좋았을테고 명성도 높았을터이지요.

 

그런데요, 그보다는 뭐 눈에 잘 안띄지만요, 또다른 갤러리로 이동하면, 그쪽에, 스스로 그림을 익혀서 민간 초상화 업자로 돌아다니던 조슈아 존슨의 초상화 작품들도 번듯번듯하게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쩐지 제 발길은 거기서 맴맴 도는 형상이지요. 나는 왜, 서툰 민화 앞에서 맴맴도는것일까?  왜 잘 그려진 근사한 그림 앞을 쌩하고 그냥 지나치는 것일까?   저는 가끔 이 문제를 생각해보는데, 저 자신도 왜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길버트 스튜어트의 그림은 제게 아무런 매력이 없습니다.  죠슈아 존슨의 초상화에는 뭔가 저를 끄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한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미술사가들이나 미술관의 큐레이터들 역시 조슈아 존슨의 그림을 '걸어 놓을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평가를 한다는 것이지요.  걸릴만 하니까 걸린거고, 매력이 있으니까 제 발길을 잡아 끄는 것이겠지요.

 

길버트 스튜어트는 (1755-1828)는 로드아일랜드에서 스코틀랜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유한 방앗간집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 가서 미술 수업을 받다가 귀국하는데 1775년에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으로 건너가서 12년을 보냅니다.  영국에서 그는 Benjamin West (미국, 풍경화가) 등과 미술 수업을 받는데 이미 영국에서 그는 화가적 소질을 인정 받지요.  그런데 그는 그림재주는 있었으나 돈을 흥청망청 쓰는 버릇 때문에 파산을 맞이하고 이리저리 도망다니다가 1793년에 미국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1796년에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으로 신세가 활짝 피게 된 것이지요.

 

아래 작품이, 꽤나 걸작이라고 하는데요, 화집에 보면 왜 이것이 걸작인지 설명도 구구한데, 사실 저는 이 그림에 특별한 관심도 없거니와, 왜 이것이 걸작인지에 대한 구구한 설명에 대해서도 관심이 안 생깁니다.  그래서, 재미가 안나서 못 쓰겠어요... 뭐 딱히 제 식으로 평가하자면, 이 부인이 머리에 쓴 모자의 레이스 주름이나 리본 혹은 모자의 주름부분이 아름답게 그려진것 같고요, 비단 옷감의 하일라이트 처리가 잘 되어서 비단이 스치는 고운 소리가 나는 것 같고요.  그런데 일단 쳐다보는 저 부인의 시선이 별로 제 맘에 안들어요...  맘에 안드니까, 재미가 없지요. (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라...) 그래도 걸작이라고 하니까 독자들께서 눈요기라도 하시라고 사진을 올립니다.

 

그런데요,  장군시절의 조지 워싱턴을 그렸던 찰스 필은 미국의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인이었쟎아요.  길버트 스튜어트는 독립전쟁당시에 영국으로 '피난'을 가서 (말하자면) 적국인 '영국'에서 지내다가, 돈 떨어져서 미국으로 도망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 손으로 미국의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리고 떵떵거리고 살다 갔다하니, 뭐랄까, 기분이 명쾌하지가 않습니다. 저, 이 사람 별로 안좋아요.

 

 

 

아무래도, 길버트 스튜어트는 제 취향이 아니라서...조지 워싱턴이나 토마스 제퍼슨이나 죄다 '뽀샤시' 합성처리한 것 같아보여서... 아 당시의 사람들도 실물보다는 더 '환하고 부드럽고 보기 좋은' 초상화를 원했겠지요.  저 역시 누군가 제 초상화를 그린다면 얼굴의 주름도 좀 지워주시고, 뺨도 밝게 채색해주시고 뭐 그런걸 희망할것 같아요.  진실은 참혹하고, 뽀샤시만이 살 길 인거죠 헤헤헤.

 

 

 

아, 나가려다 말고,  미국출신 화가중에 John Singer Sargent  (존 싱어 싸전트)가 있는데요,  이 사람을 미국화가라고 불러야 할지 미국출신 화가라고 불어야 할지 애매합니다.  좀더 딴소리를 하자면, 미국 출신 화가중에 그를 '미국화가'라고 할지 '미국 출신 화가'라고 할지 애매한 사람들이 세사람이 있는데요

 1. John McNeill Whistler (휘슬러)

 2. Mary Cassatt (커셋)

 3. John Singer Sargetn (싸전트)

이렇습니다.

 

휘슬러는 미국태생인데 영국으로 건너가서 활동하다가 거기서 죽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기사작위도 갖고 있습니다. 미국 태생, 영국으로 귀화한 화가를 우리는 미국화가로 불러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커셋은 미국인으로 태어나 성장했는데 유럽으로 건너가서 활동하다가 유럽에서 죽었습니다.  존 싱어 싸전트는 미국인 부모님 슬하에서 태어났지만 유럽에서 태어났고 유럽에서 성장했고, 유럽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호적상 미국인이었지만 삶의 근거지가 유럽이었습니다. 그런데 싸전트는 특이해요. 영국에서 기자작위를 주겠다고 영국인으로 등록을 하라고 할때 이를 거절합니다. 자신은 미국인이기때문에 영국의 기사작위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지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태어나지도 않은 호적상 미국인이었던 싸전트는 결국 죽을때까지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킵니다.

 

자 우리는 이 사람들을 미국화가라고 해야 할까요 유럽화가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이 문제는 차차 의논하기로 하고요, 그 존 싱어 싸전트가 남긴 초상화가 아주 많습니다. 제가 보니까 유럽 화가들이요, 주로 부자들의 커미션(청탁)으로 초상화나 뭐 주문한 그림같은거 그려주고 그거 팔아서 연명을 했던것 같습니다.  부자들의 주문을 많이 받는 화가는 부유하게 살면서 조수까지 두고 '사장님' 노릇 하는거고 이런 주문 못받는 화가들은 가난하고 비참한 인생 살다가, 나중에 죽은 다음에나 운좋으면 영광을 누리기도 하는거고.  그런데 싸전트는 부자들의 초상화 주문을 많이 받은 화가였습니다. 그림이 좋으니까요.  그래서 싸전트도 초상화를 많이 그리긴 했는데, 그는 초상화 작업을 '너무 너무 너무' 싫어했답니다.  초상화를 그리는것을 뚜쟁이질(pimp)에 비유를 할 정도로 싫어했대요.  아주 지긋지긋해 했대요.  헤헤헤.

 

제가 뒤늦게 존 싱어 싸전트를 좋아하게 된 경위가 여기에 있지요

(1) 어? 기사작위를 주겠다는데도,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고국 미국을 버리지 않았다고?  사람 심지가 강하네...

(2) 어?  초상화질을 뚜쟁이질에 비유할 정도로 지긋지긋해 했다고?  그럼 그렇지. 초상화라는게 사실...그게..그렇지...(끄덕끄덕)

 

헤헤헤. 싸전트 얘기는 나중에 마저 하기로 하고요.  오죽 길버트 스튜어트 얘기를 쓰기가 싫었으면 엠한 딴소리로 페이지을 채울까요...

 

 

Mrs. Richard Yates, oil on canvas, 1793-1794

2010년 1월 20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2010년 2월 6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10. 1. 24. 12:06

 

공식 홈페이지: http://artbma.org/

메릴랜드주의 항구도시 볼티모어에 있는 미술관

입장료 : 무료

 

워싱턴에서 대략 60마일 거리.  차로 한시간 반 안쪽에 도착할수 있는, 항구도시 볼티모어에서 가장 자랑할만한 미술관 입니다.  볼티모어 미술관이 특히 자랑할만한 것으로는, 북미에서 앙리 마티스의 주요 작품들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회화와 조각품이 오백점이 넘고, 그 밖의 마티스 작업 습작까지 합치면 그 숫자를 헤아리기 힘들정도라고 합니다.  소장품들에 대해서는 차근차근 소개 페이지들을 만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전에 필라델피아 미술관 페이지에서 소개한적이 있는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작품은 미국에 10점이 있는데, 볼티모어 미술관에 그중 하나가 있습니다. 제가 본 것은 (1) 필라델피아 미술관 (2) 디트로이트 미술관 (3) 볼티모어 미술관 이렇게 세곳의 작품입니다. (나머지도 언젠가 다 보고싶습니다.)

 

 

Locations of Original Monumental Size Bronze Casts

http://en.wikipedia.org/wiki/The_Thinker

United States

University of Louisville, Louisville, KY
Nelson-Atkins Museum of Art, Kansas City, MO
Stanford University, Palo Alto, CA
Philadelphia Rodin Museum, Philadelphia, PA
California Palace of the Legion of Honor, San Francisco, CA
Columbia University, NYC, NY
Baltimore Museum of Art, Baltimore, MD
Detroit Institute of Arts, Detroit MI
Cleveland Museum of Art, Cleveland OH (damaged)
Norton Simon Museum – Pasadena CA

 

 

 

 

 

 

 

 

생각하는 남자하고 악수 했어요.  저사람 왼손에 내 왼손을 넣고 잡는거죠.  아하, 생각하는 남자하고 나하고는 왼손잡이구나!  제가 나중에 따로 페이지 열고 보여드리겠지만, 이 작품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찍었는데, 아 정말 근사한(?)  남자였습니다...

 

 

그 유명한 The Kiss.  이것 며칠전에 '국립미술관'에 있던 작품 제가 보여드렸죠 (http://americanart.textcube.com/319) .  오늘 작품은 일단 덩치가 훨씬 크고요 세밀한 부분을 보면 약간 차이가 있어요.  역시 페이지 따로 열고, 이야기를 해 드리지요... (으흐흐. 너무 좋아서 으흐흐. 벌써 눈이 풀렸어요. 눈동자가 맛이 갔쟎아요 벌써. 하하하.)

 

 

뮤지엄 카페테리아가 넓고, 분위기 좋고, 그리고 가격도 정상적이에요. 뮤지엄 식당이라고 폭리를 남기는 것 같지 않아요. 뮤지엄 카페테리아라고 반드시 직물 테이블보를 덮어주는데요, 표면위에 흰종이를 한장 덮어줍니다.  식사 마치면 그것 치우고 새 종이를 덮는거죠. (걸레질하는 대신에. 테이블보를 새로 갈 필요도 없고요). 느낌이 청결하고 기분이 좋아요.  그리고, 테이블마다 작은 용기에 크레용을 몇개 담아놓습니다.  아이들이 심심하면 크레용으로 테이블에 낙서하면서 놀으라는거죠.  저 역시 낙서를 좋아하고.

 

식당은 야외 조각공원을 면하고 있는데, 제가 실내 전시물에 정신을 파느라 조각공원에 나가보지도 못했습니다.  겨울이라 일단 나가기가 싫지요.  이곳은 집에서 가까운 거리라서 제가 다섯번쯤 놀러왔습니다. 계절마다 분위기가 다르지요.  올때마다, 작품에 대한 느낌도 다르고요.  조각공원도 아름다운데, 나중에 날 따뜻해지면, 그때 다시 가보지요 뭐.

 

 

 

 

 

 

제가 요즘, 잭슨 폴락 한테 꽂혀있는 중이라, 폴락을 발견하면 '무조건 당신이 좋아요' 모우드로 변하고 맙니다. 뭘 제대로 알고 좋아하는것도 아니고, 그냥 좋아요... (위로받아요...  설명하기 힘들지만, 폴락 작품 보면, 가슴속에 바윗덩어리같이 누르고 있는 어떤...슬픔이 잠시 잊혀져요.  죽을때까지 갖고 가야할 슬픔을 잠시 잊을수 있어요. 그게 아마 미술작품의 치유력인지도 몰라요. )

 

 

오늘 제가 찍어온 작품 사진이 삽백장도 넘어요...  아아...부자가 된거죠... 아, 오늘 하루, 천국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고맙게 생각하고, 제 책임과 의무와 그리고 사명과...그런것들에 충실한 일주일을 맞이해야죠. 힘을 얻어갖고 온 하루였습니다.

 

 

 

 

Posted by Lee Eunmee
Books2010. 1. 22. 12:03

Isms: Understanding Art

 

아마존 링크 (2004년판)

 

 

동일한 저자의 동일한 책이지만, 내가 구입한 책의 실제 커버는 위의 아마존 링크 커버와는 차이가 난다. 내 책 커버가 더 따뜻해보이고 예쁘다. 내것은 2007년판

 

 

국립미술관 (NGA)에서 제값 다 주고 샀는데, 아마존에서 할인을 많이 한다 (하지만 내것은 최근 판이라구... ).  나같이 미술사/미술비평을  전공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이 잘 모르거나 헛갈려하는 각종 미술계의 '--이즘/주의' 에 대하여 간략한 소개를 잘 해놓았다.  서양미술 사조, 서양미술 흐름을 주제별로 살펴보기에도 좋다.  

 

이런책은, 운전자라면 차에 놓고, 어디서 차 세워놓고 사람 기다리고 그럴때, 그때 읽으면 기다리는 지루함도 날려버릴수 있고 좋다. 혹은, 화장실에 놓고 오가며 보거나... 최근에 담배 끊은 사람이 담배 생각나서 미치겠을때 펴봐도 위로가 되지 않을까? (헤헤 담배를 안 끊어봐서 그 고통을 잘 모른다...)  잠깐 잠깐 보기에 좋게 설계되어있다. 아무데나 펼쳐서 봐도 좋고.  만족.

 

redfox.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10. 1. 21. 09:51

National Gallery of Art 국립 미술관

 

말하자면, 오늘은 Museum Day (박물관 소풍날)이라고 할 만 합니다.  아침에 스미소니안 캐슬의 사무실에  인터뷰가 있었거든요.  인터뷰 끝내고, 놀았지요.

 

우선 지난 토요일에 갔었던 National Gallery of Art 에 갔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보고 싶던 것들을 제대로 다 못봤으니까. 전 보고 싶은 것을 못보면 꿈에도 아른거리고,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서...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 세상에는 내가 보고싶으나 볼수 없는 것들이 참 많다. 이 세상에는 내가 보고싶으나 볼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내가 가슴에 한이 맺힌 채로 죽을 것이다...  나는 결국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한 스러운 인생 살고 있으니까,  볼 수 있는것들은 가서 보기로 하자.  가서 보기로 하자. 가슴에 자꾸만 한을 쌓지 말자.]  그러니까, 어차피 나간김에 또 간거죠.

 

흠, 국립 미술관이 '홀랑' 뒤집어진 분위기 입니다. 익숙하던 것들이 엉뚱한 곳에 배치되어 있어 영 어색한데다가,  전에 내가 가서 보았던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의 그림 전시장이 싹 없어지고, 지금 공사중. 아이고 아이고. 보고싶은 내 그림들. 아이고. 곧 새단장을 하고 나타나길 바라는 수 밖에요.

 

National Gallery of Art, 2010년 1월 20일 촬영

휘슬러의 작품들이 모여있는 갤러리에서 도슨트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뭐 세계 명화들, 로댕의 작품들, 골고루 실컷 보고, 서관과 동관 사이의 카페테리아에서 간단히 점심도 사 먹고요. 음, 책도 샀어요.  무슨 무슨 'ism (이즘)'들에 관한 정보를 총망라해 놓은 책이군요. 하하. 미술 사조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책인데요. 한가지 실수. 책의 편집자가 영국인이고 영국에서 교육받고 활동하는 사람이라서,  미술사조에 대한 설명의 영국 미술 중심으로 하는겁니다.  예컨대 제가 미국의 social realism 에 관해서 요즘 쓰고 있쟎아요.  혹시나 싶어서 social realism 쪽을 찾아보니, 영국 미술사 쪽에서 설명을 해 놓은겁니다. 아차 싶었죠.  책 구입 영수증 갖고 있으니까, 카페테리아 옆의 책방에서 반납하고 다른 책 고를수도 있었지만,  기왕에 내 손에 들어온거, 제 안목을 넓히는 뜻에서 보기로 했습니다. (난 너무 미국 미술에 몰두해 있는 나머지, 세계 미술사의 흐름에 무감각해질수도 있어. 그러면 미국미술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안돼. 미국미술은 세계 미술의 일부이니까 말이지.) 

 

 

새로 장만한 책

 

 

점심으로 먹은 스트로베리 나폴레온과 커피. 국립미술관 서관과 동관을 잇는 지하 통로에 위치한 카페테리아. 삼각뿔 모양의 유리 천창으로 흘러들어오는 빛과 폭포. (왼편 구석쪽에 책방의 끝자락이 조금 보입니다.)

 

 

 

국립 미술관 동관 (East Building)은 현대미술관입니다.  제가 호레이스 피핀 페이지를 완결하려고 하는데요, 이 장면을 꼭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쟁쟁한 세계의 20세기 초 현대식 미술품으로 가득찬 동관 전시실에 당당하게 걸려있는, 딱 한점이지만 위풍당당한, 딱 한점이라서,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현저히 작아서 더욱 기품있어보이는 피핀의 작품입니다. 보세요. 국립미술관이 자랑하는 마티스 갤러리 입구쪽에, 그리고 잭슨 폴락, 로스코, 뉴만등이 기다리는 갤러리 초입에 걸려있는 그림입니다.  피핀이 동관 현대미술이 심장부 같은 지점에 오두마니 걸려있는겁니다.

 

관객들은 이 그림이 무엇인지, 왜 이것이 여기 걸려있는지 잘 알지 못하지요. 오직 '피핀'을 아는 사람만 그 의미를 아는거죠.  심지어 매일 이자리를 지키는 미술관 경비 아저씨 (흑인 경비아저씨)도 이걸 잘 몰라요.  오늘 제가 서서 그림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흑인 경비아저씨가 다가와 말을 걸더라구요. 그래서 피핀에 대해서 그에게 설명해줬죠.  "이 사람 마흔이 넘도록 자신이 화가인줄도 몰랐고, 아무도 신경도 안썼다. 이 사람이 화단에서 주목받기 시작했을때, 쟁쟁하던 당대의 화가들이 - 나도 저렇게 그릴수 있다면! 하면서 한탄을 할 정도였다. 이 작품이 괜히 여기 있는게 아니다..." 

 

 

일층의 프랑스 소품 갤러리에서도 제가 좋아하는 보석같은 작품들을 실컷 구경했습니다. (사진 편집하다가 에러가 자꾸 발생해서, 오늘은 포기.  다음에, 몇가지 보여드리지요. 오늘 왜 자꾸만 에러가 나는지 모르겠어요.)

 

 

 

 

동관 입구로 나와서 슬슬 자연사 박물관 방향으로 가는길이죠. 오른편에 보이는 건물이 국립미술관 서관 (현대 이전 작품들을 주로 전시하는 곳) 건물입니다.  워싱턴 마뉴먼트 오른편으로 둥근 지붕 보이는 곳이 자연사 박물관이지요 (스미소니안 자연사 박물관).

 

 

 

 

 

국립 미술관 조각공원

 

그런데 국립미술관 서관과 스미소니안 자연사 박물관 사이에는 '국립 미술관 조각공원'이 있어요.  오늘 사실 그 조각공원에 일부러 들렀는데요. 개념 미술의 창시자로 알려진 So Lewitt 의 조각작품이 거기 있거든요. 사진 찍었죠.  나중에 Sol Lewitt 소개할때, 그때 보여드릴게요.

 

조각공원에 2009년 하반기에 새로운 조각물이 들어왔나봐요. 근래에 새로 발견한 조각이거든요. 이 나무요. 스테인레스 나무에요.  지난 토요일에는 이 나무에 새 한마리가 앉아있는것도 봤거든요. 저새는 조각인가 아닌가? 궁금해서 한참 쳐다보고 있으니까 휙 날아가더라구요. 오늘은 새가 앉아있지 않아서 아쉬웠어요. (제목하고 작가, 나중에 적어 넣을게요.)

스미소니안 자연사 박물관

 

... 자연사 박물관 입니다.  박물관 입구 오른쪽에는 화석이 된, 바위같은 나무덩어리가 있구요, 왼편에는 줄무늬 철 바위가 있지요. 내 상상력으로는 다다르기 힘든 아주 오랜 세월의 역사를 보여주는 두가지, 천연 조형물들이라고 할만한데요 ...  그런데, 내 속에도 그렇게 아주 아주 아주 오래된 '유전자'가 있겠지요. 그 세월보다 더 오래된 유전자가 있으니까, 내가 여기 있는거쟎아요...

 

여기는 스미소니안 자연사 박물관입니다. 

 

 

 

 

 

 

 

스미소니안 캐슬

 

스미소니안 자연사 박물관에서 정면으로 건너다보는 스미소니안 캐슬 (인포메이션 센터) 입니다.  아침에 저곳 2층에서 스미소니안 직원을 만나 인터뷰를 했었지요....

 

 

 

 

Freer Gallery 프리어 갤러리

 

아시아권 예술품을 전시하는 스미소니안 프리어 갤러리에도 들렀습니다. 제가 일전에 이곳에 전시된 듀잉의 작품들을 소개한 적이 있지요.  이곳은 휘슬러의 작품 전시장입니다.  국립 미술관에서도 휘슬러 작품들을 사진기에 담았고, 이곳에서도 휘슬러의 작품들을 빠짐없이 사진기에 담았지요.  조만간 휘슬러 이야기를 쓰게 되겠지요?

 

 

 

스미소니안 메트로 역

 

그리고, 스미소니안 메트로 스테이션에서 메트로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저기 보이는 초록색 둥근 지붕의 건물. 저기가 스미소니안 자연사 박물관 입니다. 음...제가 좋아하는 곳이지요...

 

 

오늘, 미술관에서, 경비 아저씨들이 한가하고 심심하니까,  (하하) 저한테 말걸고, 얘기해주고 그래서  그들만이 알고 있는 별것 아닌 이야기를 듣고 그랬는데요... 가령, 잭슨 폴락의 No 1 (1번) 에 '바퀴벌레' '딱정벌레'가 화석처럼 물감을 뒤집어 쓰고 굳어버린채로 있는것을  경비 아저씨님이 몸소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보여주셨지요. 하하. 원래 담배꽁초도 붙어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안보인다며 "찾으러 들면 이상하게 안보이다가, 아무 생각 없을땐 잘보이더라" 하면서 혼자 한탄.  잭슨 폴락 작품에 바퀴벌레 붙은 화석, 사진 찍어왔거든요.  헤헤. 나중에 정리해서 보여드릴게요.  오늘, 이상하게 자꾸 에러가 나서 사진 정리를 잘 못하겠어요.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10. 1. 17. 22:50

 

국립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308)에 갔다가, 기념품을 샀는데

 

뭐 샀냐하면

 1. 모네의 The Artist's Garden of Vetheuil (1880) 판액자: 전시장에서 봤는데, 하도 따뜻해보여서

 2. 커셋 (아이들), 르동 (나비), 새 (오드번)의 그림 카드 : 엄마한테 카드 보내드리려고

 

그런데, 모네 그림 뒷판에서 발견한 것

 

 


 

이런 액자나 사진 사면, 반드시 작품 정보가 어딘가에 적혀 있게 마련인데, 이 작품에 대한 정보. 

작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제목 머라머라~  이탈리아 말~

 

이거이 모네 입니다요~  (헤헤)

그래서, 이것을, 그대로 영수증과 함께 갖고 있다가, 다음에 국립미술관 갔을때, 가서 환불받을까 말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림 정보 멋대로 아무렇게나 붙여놓으면 안되는거지요. 그것두 국립미술관에서.

 

(아무튼, 제목 편집증환자라서, 이런거 보면 잠이 안와요 잠이. 헤헤헤 하하. // 요놈아 편집증이면 살때부터 확인했어야지, 왜 나중에 발견해가지고 시비를 허느냐~   )

 

아, 모네의 저 그림, 전시장에서 보면, 세상이 다 나른해지고 좋더라구요.  눈부신 세상이 느껴져요.  우리 엄니한테 보여드리고 싶은 그림이에요.  (아, 우리 엄니가 여길 한번 오시면 참 좋겠다...)

 

 

아아, 미술관에서 세계 여러나라의 명화들을 보고 오면,  '아, 나는 왜 미국미술 블로그를 열어가지고 ... 저런 아름다운 다른 나라 명화들 얘기를 안하고 마는가' 이런 한탄이 나올때가 있거든요.  근질근질 한거죠, 황홀한 작품들 사진을 올려놓고 '자랑질'을 하고 싶어서.  하지만, 꾹 참고, 미국미술만... 안그러면 그 넓은 미술의 대양에서 이리저리 떠돌다 빠져죽을게 뻔하므로.  뭔가 한가지 주제로만 가야 한다는 결론이긴 한데

 

아 그렇지만 가끔 미치게 좋은 세계의 작품들 사진을 슬슬 올리면서 '자랑질'을 해야만 할것도 같아요. 하하하.  약올리는 차원에서 하하.  (난 너무 산만한게 문제야. 산만해. 정신을 차려야만 해...)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10. 1. 17. 22:05

 

Delaware Art Museum 에서 활동하는 미술 안내인

 

 

박물관이나 미술관등, 공공 전시장을 다니다보면, 자원봉사로 전시 안내를 해주시는 분들을 만날수 있다.  이런분들을 미국에서는 Docent (도슨트)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이런 분들은 대개 미술관이나 해당 전시관에 자원 봉사자로 등록을 하고, 관련 교육을 받은후 활동을 하는 것이다.  어떤 전시장을 찾을때, 전시장 전반에 관한, 혹은 특정 전시 행사에 대한 안내를 받고 싶다면, 사전에 홈페이지를 검색하여 어떤 안내 프로그램이 있는지, 무료인지 유료인지, 미리 예약해야 하는지, 시간 맞춰가면 누구나 안내 받을수 있는 것인지 살펴보고 일정에 포함시킬것인지 결정하면 된다.

 

만약에 해외 여행중에 어떤 전시장을 찾을때, 이런 '전문 안내인'의 안내를 받을 기회가 생긴다면,  그리고 해당 언어를 익히 알고 있거나 즐겁게 배우는 입장이라면, 꼭 이런분들의 안내를 받을 것을 권한다. 가령, 영어공부 하는 사람이 미국에서 이런 도슨트의 안내를 받을 기회가 생기면, 기꺼이 따라 다니며 구경하고 들으시면 좋을것이다. (영어 듣기 공부 해결되면서 교양도 ~  ^^).  이런분들은 '자원봉사'로 하는 분들이 대부분이므로 사명감에 불타서 굉장히 성실하고 정성껏 활동을 하실 뿐 만 아니라 '팁'을 바라거나 받지도 않으므로 그냥 열심히 들어드리고 고개 주억거리고, 눈맞추고 흥미를 보이는 것으로 그분들께 '보람'을 선사할수 있다.

 

내가 워싱턴 바닥에서 '백수질' 을 하던 시절, 오갈데가 없어서 심심하던 시절, 허구헌날 포토맥강에 가서 피지도 못하는 담배만 작살내다간 '백수'에서 '폐인'으로 스킬 상승하는건 시간문제다 싶어, 겁이 덜컥나서 차비만 있으면 문제 해결되는  스미소니안 국립 박물관들을 하나하나 섭렵하는 것으로 미치겠는 실업자 시절의 강을 용케 건넜는데,  뭐 할일도 없고 한가하니 이런 '전문안내인'들의 안내도 착실히 받으면서 '국립박물관'들이 주는 온갖 '무료' 서비스의 혜택을 두루 섭렵을 한바 있다.

 

그러다보니 별별 도슨트님을 다 겪어 본 것이지...  (백수질도 이렇게 하면 신선노름이었을것이다...) 이리저리 겪은 결과 내가 파악하게 된 '전문 도슨트'가 갖춰야 할 덕목 몇가지를 스스로 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물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다.)

 

 1. 도슨트의 덕목중의 '왕중왕'급,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시간을 정확히 지킨다'이다.  한시간짜리 프로그램이면 죽어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한시간인거다.  50분에 끝내면 용서가 되지만, 61분에 끝내면 용서가 안된다. 무슨 말씀인가하면 규정된 시간안에 모든'설법'을 끝장을 내 줘야 한다는거다. (너무 아는것이 많아서 할 말이 많으면 따로 시간내고 사람 모집해서 특강을 하던가,  할말 많은것도 시간안에 정리해서 끝내줘야 하는거다.)

 

 2. '수다를 늘어놓지 않는다.' : 별것도 아닌 자기 삿적인 일화를 들이대며 귀한 시간을 보내서는 안된다.  자신이 안내해야 하는 것의 요점을 정확히 숙지하고 이를 수행해야 한다. (내가 경험한바, 1번 안 지키는 사람이 2번도 안지킨다. 최악이다).

 

 

 

 3. 제대로 공부해 가지고 와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 도슨트가 무료 자원봉사이건 아니건간에 기왕에 다른 사람들을 안내를 하겠다고 왔을때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정보를 정확히 숙지해야 한다.  사실 내가 도슨트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슨 석박사급 전문 지식은 아니다. 그냥 평이한 안내만 해줘도 고맙다. 내가 잘 모르는 평이한 내용을 그가 전해주면 내게는 아주 도움이 된다.  그런데, 가끔 나는 도슨트가 '허당을 짚는' 것을 발견한다.  제목이 없는 작품을 가리키면서 '재료'부분 명시된 것을 '제목'이라고 설명한다던가,  그림에 앨범이 그려져있는데 그것을 책이라고 설명한다던가.   이런 사소한 실수를 저지를때,  미리 들여다보고 사진기에 담아서 자료 확보하고, 그러느라 안내지까지 상세히 읽었던 나같이 세밀한 사람에게는 그런 실수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의 실수를 공개리에 반박하지는 않는다.  사소한 실수는 지나가도 무방하다고 판단하므로.  (죽을일은 아니니까...).  그냥, 좀, 사실 확인도 정확히 안해보고 사람들을 안내하는 일이 안타깝다는 생각은 한다. (좀 미리 기본 안내문이라도 읽고 와서 설명을 하시지...)

 

 

 

이 세가지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번,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2번,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이 3번이다.  사실 3번항목, 도슨트가 사소한 정보를 잘 못 전달하고, 잘 못 알고 그러는 문제는 1번 2번이 잘 지켜질경우 용서가 된다.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어떻게 다 아는가? 틀릴수도 있는것이지. 뭐 그낭 컨디션이 안좋으면 생각이 안날수도 있고.  그러나 1번 2번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 하는 중대한 사항이다.  1번 2번에서 망가지면 제아무리 똑똑해서 하늘을 날아도 이미 그는 차라리 없는게 나은 존재가 되고 만다.

 

내가 만났던 도슨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분:

 

코코란 미술관에 처음 가던날, 나혼자 미술관 문여는 시간에 맞춰서 일찌감치 가서 전시물들을 세밀하게 살피고 그리고 시간이 되어 안내를 받으러 갔는데, 아시아계의 멋쟁이 중년 여성이 나와서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코코란 미술학교 졸업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는 "한시간 안에 이 좋은 것들을 다 어떻게 안내를 하나..." 하면서 '너무 좋은게 많은데 시간은 너무 짧음'을 안타까워 하였다. 중국계 여성이었는데,  중국계의 영어 액센트였지만 아주 발랄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우리들을 안내했다. 그의 손에는 몇장의 카드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미리 준비된 동선에 따라서, 우리들을 편안하게 의자에 앉도록 배려를 해 가면서 그림 안내를 해 주었다. 그는 손목시계와 준비된 카드들을 번갈아보면서 시간을 체크하고 전달해야 할 내용을 체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물이 흐르듯 유연했다.

 

이 사람은 미술 석사 학위까지 갖고 있는 전문가였고, 그리고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정해진 시간안에 많은 새로운 정보로 나를 기쁘게 해 주었다.  (내가 또 한편 기뻤던 요소는,  비록 한국인은 아니지만 나와 비슷한 아시아계, 머리 다 커서 미국에 입국하여 공부하고 그리고 미국 본바닥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으로서  그가 아주 좋은 롤모델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때 함께 안내를 받았던 사람들은 미국 백인들, 미국 각지에서 온 고등학교 미술선생님들이었었다.).

 

 

나는 대부분 도슨트들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고, 안내가 끝났을때 감사하다는 인사를 반드시 한다. 가르쳐줘서 고마우니까.  가끔, 이게 아니다 싶으면 바람 새듯 그냥 그자리를 빠져나가는 편이다.  (그래도 된다.).  그러니까, 이게 아니다 싶으면 안내 받다 도망가버리는거고, 맘에 들면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입장이니까, 끝까지 자리를 지켰을땐 만족했다는 뜻이고, 그러니 감사 인사도 해야 하는 것이고.  내가 위의 세가지 덕목을 왜 블로그에 적는가하면, 혹시라도, 미술관 안내를 하려는 분이 있다면 참고해주십사 하는 것이다.  그러면 관객이 고마워할거라는 것이다.

 

언젠가, 미술관에서 혼자 노는데, 누군가가 "한국분이시죠?"하고 반색을 한다. "네..."  그는 반가워하면서 자신이 이제 곧 여기서 한국어로 안내를 하게 되어있다며 안내 받으러 왔냐고 물었다. '아닌데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를 무조건 반가워하니까 나도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네..." 이러고는 그 한국인의 한국어 안내를 받게 되었다.  이거 내 계획에 없던건데... 하지만 저렇게 반색을 하니 빠져나가기가 애매하네... (항복. 아 난 얼마나 마음이 약한가).

 

그분은 아름다운 모국어로 (아, 영어에만 둘러싸여 있다가 한국어로 설명 들으니 귀가 다 행복하구나~ 달콤하여라~) 아주 친절하게 안내를 시작하셨다... 내가 모르던 내용도 많이 알려주셨다. 친절하고 박학하고, 열정이 넘치고, 여러가지로 장점이 많은 분이었다.  하지만 내가 학교에서 학생들 프레젠테이션을 평가하는 방식으로 그분의 안내를 평가하게 된다면 그분은, 좋은 점수를 기대할수 없을 것이다. 

 

 

 1. 시간을 지켰는가?  한시간짜리 프로그램을 1시간 45분만에 끝냈다.  오 마이 갓  (다리 아프실텐데...)

 2. 가족 얘기를 많이 하셨다.  (난 그분의 가족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

 3. 내가 나름 존경하는 한국의 원로 석학에 대하여 '미국책 베껴서 발표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함부로 이야기를 했다. 그 학자는 미술하고 상관도 없는데 갑자기 왜 상관도 없는 주변지식을 논하는가?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망각한걸까?  미술관 안내인이면 미술관 안내에 촛점을 맞춰주셔야 하는데...촛점 상실. 내가 만약에 그 남의책 베껴먹기 했다는 학자의 조카나 동생이었으면 어쩌려구?  그것이 얼마나 실례인지 모르는가... ).

 4. 기본 정보 착각 내지는 망실 (이것은 앞의 사항이 지켜질경우 내가 별로 신경 안쓰는 부분이다...내 수업에서는 얄짤없이 점수 깎지만,  뭐 여기는 미술관이니까.)

 

나는 그래서 그분의 안내자세와,  거기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자리를 떠나지도 못하고 지키고 있어야 했던 나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곰곰 해보다가 문득 이런 상상을 해보았다: "만약에 내가 일정이 촉박한 대통령부인인데, 혹은 대통령인데, 내가 시간을 내어 미술관에 갔다고 쳐보자.  그리고 그분이 한국 대통령인 나를 안내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분이 한국 대통령인 나를 안내할때도 오늘과 같은 안내를 하셨을까?   아닐걸.  아닐걸.  그분은 시간 정확히,  동선 정확히 그려가면서 아주 체계있는 안내를 해 내셨을거다."

 

그러면, 답은 나오네.  미술관 안내인은, 그것이 직업이건 자원봉사이건 뭐건 간에, 유능한 안내인으로 존경을 받으려면, 그가 안내하는 평범한 관객들을 마치 국가정상이나 다른나라에서 온 국가정상을 안내하듯, 존경하는 마음으로, 치밀하게 계획세워서 정확하게 자신의 일을 수행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내 안내를 받는 사람을 '최고의 관객'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안내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안내 받는 사람들을 앞에 세워놓고 무슨 '훈장질'하려는듯 세월아 네월아 멋대로 흘러라 이러면서 갈팡질팡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나의 결론:

 

(1) 내가 혹시 나중에 누군가를 안내할 일이 있을때

(2) 내가 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할때

 

나는

 

(1) 나의 청중을 '국가원수'를 대하듯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며, 국가원수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듯 빈틈없이 준비를 하며  (상대가 누구이건 차별없이)

(2) 청중이 나로부터 '존중받았다'는 느낌이 들도록

행동해야 한다. 이래야만 내가 프로페셔널의 세계에서 살아남을수가 있다.

 

 

 

또한가지, 그러면 그 한국어로 안내 하신분이 개선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그분은 한번 돌아봐야 한다, 혹시 그분이 미국인들을 상대로 영어로 안내를 하실때도 시간 초과하고 안내 내용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늘어 놓으시는지. 나는 그분이 미국인/국제적인 관객들 상대로 영어로 안내할때는 시간도 잘 지키고 잡담도 별로 안하실거라는 상상을 한다.  아마도 '모국어'로 '한국인/한국계' 사람들을 안내하다보니 정서적으로 좀더 친밀감을 느끼면서 좀더 속의 말을 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함정'이다.  그것이 그분의 '문제'일수 있다.  자제하셔야 한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한국어권 관객을 상대로 푹~ 퍼지시면 실격이다.  푹 퍼지지 말고 미국인이건 국제인이건 동등한, 동질의 관객으로 한국인을 대해야한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은 미술관에서 안내를 하는 것이다. 그 안내에 촛점을 맞추셔야 한다. 나머지 하고 싶은 말은 안내 끝나도, 아쉬워서 자리 못떠나는 정 넘치는 관객들이 있다면 그분들과 따로 시간을 내서 하시면 된다.  안내인은 안내인의 본분에만 충실해주면 된다.  시간 정확히 엄수하고, 잡담의 욕망도 자제하고, 미리 짜여진 계획에 따라 정확히 안내를 하고, "안내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이 다 되었사오니 오늘 일정은 여기서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각자 관람을 즐겨주시고, 혹시 제게 따로 질문이 있으신 분?  "  이렇게 마무리 해주셔야 한다. (나 안내인 교육 받은적 없지만...상식적으로 생각할때 이러하다는 것이다. 그냥 상식선에서만 정리가 되어도 나는 감사해 할 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10. 1. 17. 09:12

 

흐리고 포근한 겨울, 토요일 아침.

국립 미술관으로 소풍을 갑니다.

 

 

 

 

 

 

워싱턴 마뉴먼트 앞에 차를 세워놓고, 씩씩하게 걸어서 갑니다.

가는 길에 조각공원 연못에서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나도 작년엔 여기서 스케이트를 탔었지...)

멀리, 중앙에 보이는 허시혼 현대 미술관, 그리고 그 앞에 리히텐쉬타인의 '리본같이 생긴' 노란 조각작품도 보입니다.

 

 

 

 

 

 

 

 

 

걷다가 지쳐서, 미술관에 도착하자마자 카페테리아에서 도시락을 먹습니다. 유부초밥과 뜨거운 차한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오늘의 목표 지점은 '현대미술'이 모여있는 국립 미술관 동쪽 빌딩.  서쪽 빌딩 입구로 들어간후 지하 통로를 통해 동관으로 가는데요. 이곳은 빛의 길 입니다. 지하 통로입니다.  SF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지요.

 

 

 

 

 

 

 

몇가지 현대미술 특별 기획전이 있어서 보러 왔는데,  아쉽게도, 특별전 작품들은 모두 '사진 촬영 금지'라서 눈으로만 구경을 해야 했습니다.  여전히 칼더의 대형 모빌이 반깁니다.  멀리 벽에 보이는 색종이같이 조각조각 붙어있는 것은 Kelly 의 작품입니다.

 

 

 

 

 

몇달만에 가본 것인데, 연말 사이에 미술관 전체 전시장이 대대적으로 새로 조직된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서관에 있던 것들이 동관으로 이동했고, 변화가 심하군요. 심지어 이곳에 몇해동안 들락거린 도슨트 조차 이렇게 확 바뀐줄 몰랐다며 정신없어 합니다. (몇해동안 조용하더니 어떤 변화를 모색하는듯 하군요.)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 작품을 모아놓은 전시실인데요 (서관에 있던것들이 동관으로 대거 이동). 중앙에 보이는 큰 그림이 모네의 그림이지요. 

 

 

 

 

 

인상파 그림 이어집니다. 오른편에 보이는 것이 모네이고요.  저 안쪽에 보이는 작품들은 세잔느.

 

 

 

 

 

 

제가 좋아하는 영국의 표현주의 작가 작품인데요.  왜 이 작가의 그림을 좋아하는가하면,

   열정이 끓어 넘쳐서, 액자 안에 얌전히 있을수 없어서, 액자 전체를 그림판으로 활용한, 그 파격이 매력적이라 그렇습니다.  이글이글 끓는 난로속의 조개탄 같기도 하고,  수박 같기도 한, 전체적으로 열정적인 분위기가 힘차고 좋습니다.

 

 

 

 

 

벽면 전체, 통유리창. 그 유리창 밖의 워싱턴 디씨 풍경, 그 자체가 예술이라는 것이겠지요.

 

 

 

 

 

 

 

 

 

Sol Levit 이라는 개념미술의 창시자가 있거든요. 그 작가의 벽화 작품입니다.  제가 이 작가를 소개하고 싶어서 근질근질 한데요. 때가 되면 짠짜잔~  하고 소개해드리지요.

 

 

 

 

 

 

자, 앤디 와홀과, 리히텐스타인과 로젠퀴스트가 있군요.

 

 

 

 

 

 

아, 드디어 국립미술관 소장의 Horace Pippin 을 만났습니다!~  제가 호레이스 피핀의 페이지를 진작 만들어 놓고도 마무리를 못한 이유가, 이 작품을 제 눈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거든요.  이걸 꼭 본후에 마무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작품을 마티스 전시실 옆에서 발견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지요...선구적인 20세기 현대미술 속에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호레이스 피핀! 오, 저는 이 전시장을 기획한 큐레이터님을 무조건 존경하기로 했습니다...

 

 

 

 

 

 

왼쪽부터 클라인, 스틸, 잭슨폴락 두점이 보입니다.

 

 

 

 

 

 

마티스 색종이 오려서 만든 작품 전시실 입구입니다. 마티스의 싸인도 근사해보이지요? 마티스의 명랑한 색감을 좋아합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요.  오늘, 덕분에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워싱턴 디씨,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 동관 (East Building) 에서

 

2010년 1월 16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10. 1. 11. 23:18

하워드 파일 전시실, 델러웨어 미술관, 2010년 1월 9일 사진 촬영

 

 

 

 

미국의 19세기 삽화가 (illustrator) 하워드 파일 (Howard Pyle 1853-1911)은 미국 델러웨어주의 주도(수도)인 윌밍턴 태생입니다.  델라웨어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288) 과 인근의 Brandywine River Museum (http://americanart.textcube.com/43 ) 에 하워드 파일의 전시관들이 있습니다.  브랜디와인 뮤지엄에서는 전시물 사진을 찍을수가 없어 자료 소개를 할수가 없고, 델라웨어 미술관에서는 영구 소장품에대한 사진 촬영이 허용이 되어 이곳에서 하워드 파일의 일러스트레이션 작품들을 사진에 담아올수 있었습니다.

 

 하워드 파일은 아직 사진이 보편화되지 않던 당시, 청소년을 위한 각종 이야기책의 일러스트레이션및 정기간행 인쇄매체를 위한 삽화가로 활동하던 화가입니다.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앤드루 와이어드를 소개할때, 그의 아버지가 미국 삽화계의 거물이었다는 (http://americanart.textcube.com/44 )이야기를 한적이 있는데요, 그 N C Wyeth (1882-1945) 보다 더 큰 거물이 Howard Pyle 이었다고 할만합니다. 하워드 파일이 N C Wyeth 의 스승이었지요.  하워드 파일은 직접 미술학교를 열어 운영을 한 적도 있고요, 후에 N C Wyeth 가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후진 양성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 하워드 파일과 N C 와이어드및 그 후학들을 일컬어 브랜디와인 리버 그룹 (Brandywine River School)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사진 클릭하시면 커집니다. 영문자료 읽기 원하시면 두번클릭하여 큰화면으로 읽으시면 편안하실겁니다.

2010년 1월 9일 델러웨어 미술관에서 사진 촬영 (전시장 입구, 안내문)

 

 

 

하워드 파일은 '로빈후드'와 같은 이야기의 삽화뿐 아니라, 그 자신이 직접 이야기를 짓고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워드 파일이 작업을 할때나 후진양성을 할때, 그가 역설한 '삽화의 원칙'은 -- "글에 씌어진 내용을 삽화로 재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책에 씌어진것은 이미 독자도 알고 있으므로 그림으로 반복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행간의 장면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말로 '행간을 읽으라'는 표현이 있고, 영어로 "Read between the lines"라고도 하는데요, 글에 명시되지 않은, 그러나 그 속에 간직된 것을 파악하고 포착하여 재현해 내라는 것이지요.  글에 씌어진 내용을 재현하기도 어려운데, 행간의 내용을 상상하여 그리기 위해서, 삽화가는 글을 철저히 이해하고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워드 파일에게 있어서 삽화는 단순히 글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뛰어넘어 한단계 높여 놓는 완성작업이었겠지요.  삽화가에게 이정도의 프로페셔널리즘이 있어야 이야기의 삽화가 진정으로 살아서 독자에게 다가갈수 있을 것입니다.

 

 

 

 

 

인어공주

 

 

The Mermaid (인어공주)

 

하워드 파일은 1911년 이탈리아의 피렌체 (플로렌스)로 벽화 공부를 하러 갔다가, 그곳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던중 신장병으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그의 플로렌스 작업실에 세워져 있었던 미완성 작품입니다.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델라웨어 미술관이 파일 전시장 입구에 이 그림과, 이 그림이 세워져있던 그의 작업실 그림이 이젤에 세워져 있습니다

 

한스 안델센의 '인어공주'이야기를 대개 알고 있지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이 인어공주 이야기를 '망쳐 놓아버려서, 어쩌면 오늘날의 청소년들은 '엉뚱한' 인어공주 이야기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제가 어릴때 읽은 안델센의 인어공주 이야기는 가슴이 아파서 책장을 넘기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어릴때,  양장판, 일러스트레이션이 환상적인 동화책 (필시 일본책 번역한것)속의 인어공주 이야기를 한 번 읽은후에, 그 이야기가 너무 가슴이 아파서, 일부러 그 부분을 얼른 지나치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그 부분은 책을 절대 안 열어보는거죠. 왜냐하면, 가슴이 아프니까 피해가는거죠.  그렇게 가슴아파서 피해갔던 이야기가 인어공주 이야기하고, 플란더스의 개 마지막 장면.

 

돌아보면, 어릴땐 두가지를 무서워했어요.

 1. 영국 동화책에 나온 아일랜드의 '반시'라는 무서운 요정 -- 무섭게 생겼으니까

 2. 인어공주의 마지막 장면과 플란더스의 개 마지막 장면

저는 이 두가지 '공포'와 '슬픔'을 피해다니면서 책장을 넘겨야 했습니다. 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무섭습니다... 저에게는 삶이 아직도 어두운 숲처럼 무섭고, 이세상에 슬픈일이 일어나는것이 슬픕니다.

 

그림속의 장면은 인어공주가 인간세상을 구경하러 왔다가, 배가 난파되어 물에 빠진 왕자를 구해내는 장면인것 같죠. 왕자는 의식이 없고, 공주는 자신이 구해낸 그 인간의 왕자에게 반하고 말지요... 인어공주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절대 한마디 말도 해서는 안되고, 사랑하는 왕자를 찔러 죽일수도 없고, 결국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택할수밖에 없는데. 그 인어공주의 침묵을 생각하면, 어릴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가슴이 무너집니다. 이 세상에 여러가지 형벌이 있는데, 그중에 한가지가 침묵의 형벌일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이 그림 앞에 하염없이 서서,

내가 어릴때나, 성인이 된 지금이나, 인생은 여전히 무섭고 슬프고 고통스러운거구나, 그리고 아름답기도 한거구나 이런 생각을 두서없이 했겠지요.  이 그림앞에 서면 파도소리가 들리고요, 그리고, 한숨이 나옵니다. 한숨이...  말할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침묵해야 만 하는 것에 대하여.

 

 

 

카리브해의 해적

 

자, 독자 여러분

혹은,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이 그림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The Buccaneer was a Picturesque Fellow (그 해적은 특이한 친구였다) 1905

1905년 12월 월간지 Harpers Monthly Magazine 에 하워드 파일이 실은 '보물 마을의 운명' 삽화

Oil on Canvas

 

 

 

델라웨어 미술관에 '어린이' 관객들이 단체로 올때면 전문 안내인이 어린이들을 이끌고 이 해적 그림 전시실로 안내를 한다고 합니다. "뭐가 보이나요?"하고 물으면 꼬마들이 "조니 뎁!" 이라고 외친대요. 영화 카리브해의 해적에 Jack Sparrow 연기를 한 Johnny Depp 을 아이들이 떠올리는 것이지요.

 

 

영화 '카리브해의 해적'을 제작할때, 제작진은 당시의 해적의 복장이나 장면의 자료와 고증을 위하여 델러웨어 미술관을 찾아와 협조를 구했다고 합니다. 하워드 파일의 해적 그림들의 많은 부분이 영화에 등장하는 해적들의 복장이나 장면에 반영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화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때 Delaware Art Museum 도 올라간다고 합니다.

 

 

 

 

 

 

 

 

Which Shall be Captain? (누가 캡틴이 될것인가?) 1911

Oil on Canvas

 

이 그림은 1911년 1월 Harper's Monthly Magazine 에 실린 작품으로 'The Baccuneers (해적)'라는 시의 삽화로 그려진 것입니다. (*참고로, Baccuneer는 해적중에서도 17세기 서인도 쪽에서 활약하던 해적들을 일컫습니다.)  그림 아랫쪽에 보시면 삽이 있고, 보물상자로 보이는 상자가 드러나있지요. 그리고 두명의 해적이 서로 맞장을 뜨고 있습니다. 결국 해적들중에서 가장 힘이 센 이 두명중에 이기는 사람이 캡틴이 되고 저 보물상자에서 나오는것중에서 가장 많은 몫을 차지하게 되겠지요.

 

당시 해적들은 마치 군대조직과 같이 '나름대로 법과 질서가 분명'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다투기는 하되 한사람이 죽을때까지 싸우는것은 아니고, 둘중에 하나가 항복하면 그것으로 게임 오버라고 합니다. 일단 캡틴이 정해지면 질서가 잡히는것이고요.  그 당시 해적선을 탔던 사람들은 일단 크게 한건 하면 그것을 서로 약속한대로 분배한 다음에 각자 자신의 고향으로 가서 집사고 땅사서 살았다고 합니다. (물론 다시 해적질을 하러 돌아오는 사람도 있었겠지만요).  해적이 되기 위해서 배에 오를때, 이들은 계약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만약에 '작업(?)' 도중에 팔을 하나 잃으면 얼마, 다리 한짝 잃으면 얼마, 눈을 하나 잃으면 얼마, 목숨을 잃으면 얼마 이런식으로 '보험' 들어두듯 보상금 계약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수입'이 생겼을때 그런 보상 계약이 철저히 지켜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해적을 연구한 사람들은, 해적의 시스템이 꽤나 계약적인, 그리고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혁신적인 시스템이었다는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해적들이 해적질을 하긴 했지만, 그 조직이나 수익 분배구조는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투명했다고 하는 것이지요.

 

아 이그림은 1911년에 그려진 것이쟎아요. 하워드 파일이 이탈리아 플로렌스에서 1911년에 사망하쟎아요. 이 작품이 그의 마지막 해적 그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The Flying Dutchman (날으는 네덜란드인) 1900

Oil on Canvas

 

제 블로그 이웃친구인 나로 (http://wowchan.textcube.com/) 님이 설명을 덧붙여주셨습니다.
***

검색해보니


[음악에서 'Flying Dutchman'은 '방황하는 네덜란드 인(Der fliegende Holländer)'를 뜻합니다. 바그너가 작곡한 곡입니다.

폭풍우를 만나 난항 중에 있던 네덜란드인 선장이 구출된 뒤, 다시는 배를 타지 않겠다고 신에게 맹세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맹세를 저버리고 다시 바다로 나가 배를 타고 항해합니다. 신은 이렇게 맹세를 지키지 않은 벌로써, 그는 유령선을 타고 영원히 7대양을 헤매도록 합니다. 그러다가 만 7년째가 되자 단 한 번 상륙이 허용되지요. 그러다가 한 여성에 의해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고, 북유럽에 떠돌고 있던 전설에 기초한 것입니다. 즉 한 네덜란드 선장이 신에게 저주를 받아 영원히 희망봉 근처를 맴돈다고 하는 것이지요.

Flying Dutchman은 이 전설 속의 유령선이나 그 유령선의 선장을 일컫는 말입니다.]

라고 돼 있네요! 이종격투기선수중에 플라잉 젠틀맨이라는 별명을 가진 레미본야스키 라는 네델란드 흑인이 있지요... 흠.

 

예 위의 그림은 1900년 12월 8일 Collier's Weekly 에 실린 전설의 일러스트레이션입니다.  위에 나로님이 옮겨주신대로, 동인도해를 항해하던 네덜란드 배의 선장이 희망봉 근처에서 풍랑을 만났다고 합니다. 이때 그 네덜란드인 선장이, 내가 설령 인류 최후의 날 (Judgement Day 죽을때까지)까지 항해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 곳을 통과하겠노라고 장담을 했답니다.  사탄이 이것을 듣고 그 선장과 선원들에게 저주를 내렸지요.  그래서 이들은 끝없이 영원히 항해를 하는 저주를 받았다고 합니다. 오직 7년에 한번 뭍에 오를수 있는데, 이때 순정한 여인을 만나 영원한 사랑을 약속받으면 저주가 풀릴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 그림은 해적선이라기보다는 '유령선'이야기라고 할만하죠.  그런데 해적선과 유령선 이야기는 늘 함께 손잡고 다니죠. 유럽의, 항해를 많이 해야했던 해양국가들 문화에 이런 유령선이나 해적선 이야기가 많겠지요.

 

그런데, 저 선장님, 참 근사해보이지요. 아무리 풍랑이 쳐도 절대 무릎꿇지 않겠다는 자세이쟎아요. 허만 멜빌의 해양소설 'Moby Dick (백경)'에서 선장 Ahab (에이합)이 바로 그런 인물이지요. 절대 굴하지 않는.  그 캡틴 에이합의 이미지가 헤밍웨이의 The Old Man and the Sea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하는데요.  악마의 저주를 받을망정 절대 굴복하지 않는 그 자세에 우리는 매료되지요. (음,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우리는 굴종하고, 타협하고... 아마 그런 인간의 유약함때문에 이런 전설적인 인물에 더욱 매력을 느끼는 것이겠지요.)

 

 

 

 

 

Marooned (유배된 해적) 1909

OIl on Canvas

 

 

제목 그래도 유배된 해적입니다.  위에 적은바와같이 해적 사회가 조직과 질서가 잡혀 있었고, 나름대로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유지가 되었는데, 해적들 내부의 규칙을 어길경우, 이렇게 외딴곳에 버리거나 유배시키는 식으로 처벌을 했다고 합니다. 이 해적은 뭔가 잘못을 저지르고 외딴섬에 버려졌는데요, 그림을 확대시켜서 자세히 보시면 물통 하나가 보입니다. 물 한통. 옷가지. 그리고 사방에서 넘실대는 파도와 물새들.  최소한 저 물새라도 잡아먹으면 며칠 연명할수 있겠네요.

 

이러고 있다가 해적선이 다시 돌아와 배에 실어주기도 하고, 혹은 운 좋으면 다른 지나가는 배를 얻어타고 뭍으로 갈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식의 처벌은 '잘못했으나 죽여버리겠다'는 식의 무법천지식 해법이 아니라 고립시켜서 고립감을 맛보게 하거나, 버리되 연명할 최소한의 물은 주고 가는 식으로 인정을 보였다는 것이지요.  해적의 세계가 도적놈들이 사회였을망정 무법천지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아아, 버려진 해적처럼 쓸쓸하구나~"  외로울땐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그림속의 파도소리를 떠올려도 좋겠네요.

 

 

 

 

 

 

세일럼의 늑대

 

 

A Wolf Had Not Been Seen in Salem for Thirty Years (세일럼에서는 30년간 늑대가 나타난적이 없었다) 1909

1909년 12월 하워드 파일 자신이 Harpers Monthly Magazine 에 실은 이야기,

The Salem Wolf (세일럼의 늑대)와 그 삽화

Oil on Canvas

 

 

이 늑대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 

 

세일럼은 뉴잉글랜드 지방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보스톤 인근의 항구도시 입니다.  이곳에서 실제로 마녀사냥의 아픈 역사가 있었고, Arthur Miller 의 The Crucible 이라는 희곡도 그 마녀사냥의 일화를 그린 것인데요.  저는 2009년 8월에 그 세일럼이라는 도시에 가본적이 있습니다. 한여름이었는데도, 세일럼에 도착하자 도시 전체에 안개가 낮게 깔리고 으스스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지요 -- 아 하, 이런 자연환경이기때문에 세일럼에 마녀이야기가 많고, 사람들이 어떤 안개 자욱한 상상을 했겠구나.

 

 

이것은 그때 세일럼 시내에서 찍은 공동묘지 사진입니다. 마녀 박물관이라던가 해적 박물관도 있고요, 시내 전체가 마녀의 도시처럼 보이지요. 일부러 그런 분위기를 관광상품으로 개발해서 관광도시로 먹고 사는것 같았습니다. 물론 항구도시이기도 하지만요.

 

 

자 이런 안개낀 으스스한 항구도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교회 집사의 딸이었던 미리암은 마을 청년과 혼인을 하기로 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마녀 할멈의 마법에 걸려서 그만 늑대로 변하고 맙니다.

늑대로 변한 미리암은 자신의 가족들을 공격하게 됩니다.

미리암의 약혼자였던 청년이 그 늑대에게 상처를 입혀 몰아냅니다. 

그런데 아침이 되어 인간으로 되돌아온 미리암에게 상처가 있는것이 발견됩니다.

청년은 자신이 늑대에게 입힌 상처와 미리암의 몸의 상처가 똑같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결국 미리암은 그 상처로 인해서 죽음을 맞이하고, 미리암의 가족들은 저주에서 풀려납니다.

 

 

슬픈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 어디서 들어본것 같지 않은가요? 

 

제가 어릴때요, 아주 아주 어릴때요, 영화관에서 '나자리노'라는 영화를 했거든요. 그 나자리노라는 영화의 주제곡이 참 슬프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꽤 인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 가수가 그 곡을 번안해서 불렀습니다. 제가 그 노래 가사를 기억해요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그대 음성 들릴듯한데

왠일인지 보이지 않은 그대모습 사랑합니다

나나나나 나나나나나 ~~

 

그 나자리노 영화를 제가 안봐서 모르지만, 대략 이야기는, 뭐 마을의 어떤 아이가 태어났는데, 늑대가 될 운명이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청년으로 성장한 후에 늑대가 되었다가 사람이 되었다가 뭐 변신을 했던것 같습니다.  그러니 비극적이었겠지요.  이 늑대 이야기를 만나니 그 나자리노라는 영화 이야기가 생각이 나는군요.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여우'가 변신을 하는데 북미나 남미에서는 '늑대'가 인간으로 변신을 하거나 인간이 늑대로 변신을 하거나 그런것 같지요?  약혼한 청년한테 맞아 죽을 운명의 아가씨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죽게 만든 청년이나, 참 딱하군요.

 

 

달의 요정

 

 

달의 요정 삽화 1895

Oil on Board

 

 

 

 

그의 삽화가 담긴 책

 

 

 

하워드 파일의 주요 일러스트레이션 작품들을 몇 가지 들여다 보는 것으로 미국의 일러스트레이션의 역사에 남은  큰 별의 자취를 살펴봤습니다.  미국에서 일러스트레이션 대가들의 작품을 볼 기회가 많은데요, 그때마다 어릴적 생각이 나곤 합니다.  제가 성장할 당시에는 '전국민'이 모두 가난했으므로, 제가 가난하게 성장했다고해도 그게 특별히 고생스럽지는 않았는데요, 어린시절 딱 한자기 아쉬운것은 읽을 책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었지요.  어쩌다 손에 들어오는 칼라 명작 동화집의 삽화들은 얼마나 근사하던지!  아, 온종일 그런 책들속으로 파고 들어가고 싶었지요.  글씨와 그림과 이야기가 어우러진 그 환상의 세계에 아주 빠져서 현실로 돌아오기가 싫었지요.  그러나 읽을 책은 한정되어 있었고, 집에 있는 책이나 달달 외우는 수밖에...  아, 그 어린시절, 내가 이런 삽화의 원화들을 볼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 그 어린시절 내게 이런 삽화가 가득한 세계명작동화책이 많았다면 나는 얼마나 좋았을까, 뭐 그런 아쉬움이 든다는 것이지요.  책을 많이 안사주신 부모님에 대한 원망보다는, 어릴때 책이 보고 싶은데, 차마 부모님한테 책 사달라는 소리도 할수 없었던,  아무도 감히 부모님께 무엇을 사달라고 졸라본적이 없었던 그 어린시절의 풍경이,  정성들여 그려진 삽화위에 겹쳐지더란 것이지요.  가능하면, 시간을 조작할수 있다면, 이 아름다운 이야기들과 이런 대가가 정성껏 그린 삽화들을 -- 어린시절의 나에게 가져다 주고 싶어요.  그러면 어린 나는 얼마나 행복해할것인지...

 

아, 어린 내가 아닌, 오늘날의 어린이들에게 아름다운 이야기와 책을 선사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저는 동화의 삽화가들이 어마어마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요. 아이들에게, 어른들에게, 우리들에게 꿈을 주쟎아요. 고맙습니다 삽화가님.

 

2010년 1월 10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Books2010. 1. 11. 06:59

 

The Pre-Raphaelites: Romance and Realism (Abrams Discoveries)

 

The Pre-Raphaelites: Romance and Realism  by Lawrence Des Cars

 

 

델라웨어 미술관은 (http://americanart.textcube.com/288) 미술관 관계자의 주장에 따르면, 세계에서 프리라파엘 미술품을 가장 방대하게 소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프리라파엘예술은 영국에서 18세기 중엽과 말기에 일어난,  르네상스 이전의 예술로 복귀하고자하는 운동이었는데요, 종교, 미술, 문학등 다양한 측면에서 이런 '복고적' 운동이 펼쳐졌습니다. 왜 이런 운동이 일어났는가하면, 우리는 세계사시간에 르네상스를 고대로의 복귀, 인간성의 회복으로 배우고 지나갔지만, 어떤 사람들은 르네상스 이후에 인간세상이 타락했다고 본것이죠. 특히 영국에서 산업혁명과 도시화로 사람들의 삶이 더욱 곤궁해지고 피폐해진 면이 있고, 시골 처녀들이 도시로 가서 하녀나 창녀로 전락을 하기도 했고, 이런 현상에 대해서 희의하면서 중세의 '가치'나 아름다움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지요.

 

그래서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를 비롯한 일련의 화가 작가들이 활동을 펼쳤는데, 프리라파엘 (라파엘로이전의 예술) 운동은 단기간의 어떤 현상에 그치고 말았지요.

 

그런데 영국에서 한때, 소수가 활발하게 펼쳤던 이 프리라파엘예술 작품들을  어떻게 미국의 델러웨어 미술관에서 다수 소장하게 되었는가하면, 미국인 Bancroft 라는 사업가가 친구의 조언으로 프리라파엘 예술 작품만 수집을 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는 그의 수집품을 델라웨어 미술관에 기증을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프리라파엘 작품들을 미국의 델라웨어 미술관에서 감상할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도 미술사책을 훑거나, 가끔 미술관에서 신비하고 환상적인 이런 그림들을 스치면서도 이것의 정체를 정확히 알수 없었는데요, 델라웨어 미술관에서 프리라파엘 예술의 정체를 확실히 알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술관 안내인의 설명도 들었고, 미술관에 상세히 정리해 놓은 안내문도 읽었고, 작품들도 거의 모두 사진기에 담았고, 그리고 간단한 안내서도 한권 샀습니다. 이 책입니다. 그냥 작은 안내서인데요, 그것으로도 제가 알고자 하는 내용은 충분한것 같습니다.

 

미국미술은 아니지만, 나중에 혹시 시간이 되면 프리라파엘 예술에 대하여, 작품 설명과 함께 족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프리라파엘 운동을 이해하면, 이것이 미국의 어떤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는지도 가늠이 됩니다. 제가 미국 미술관에서 본 작품들중에도 이런 분위기의 작품들이 다수 있었으니까요.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10. 1. 10. 22:07

 

델라웨어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288) 의 전문 안내인 (docent) 에게서 들은 이야기 입니다. 미국이 영국이나 유럽 열강의 식민지에서 출발하여 1776년 독립선언을 하고 신생국으로 성장해 나가쟎아요.  그러니까 그 당시 미국의 문화는 척박했지요.  그야말로 근본은 유럽땅이고, 이들은 식민지의 주민들이니까요.  이 식민지에서 살던 부유층은 자녀들을 유럽으로 보내 교육을 받게 했고,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미국땅에서 어떻게든 자력으로 살아나가야 했는데요, 유럽에서 교육받지도 못하고, 미국 내에서도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도 못한, 스스로 기술을 연마한 '미술가'들도 있었겠지요. 

 

제가 소개한적이 있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활동했던 조슈아 존슨 (Joshua Johnson http://americanart.textcube.com/34 )역시 독학으로 그림을 익힌 초상화가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속의 아이들이 어쩐지 '어른의 이목구비'를 하고 있는 '대갈장군 아이들'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서툴게 혼자 익힌 그림이므로 아이들 얼굴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비례는 어떠해야 하는지 잘 알수 없었던 것이지요.  초기의 초상화가가 조슈아 존슨 뿐만은 아니었고요, 화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채 그냥 집안의 가보로 전해내려오던 초상화들도 많았지요.  그래서 미술관을 산책하다보면 미국 건국 초기의 민간 초상화중에서 '작자미상' 작품이 종종 보입니다.  서툴고, 어설픈.

 

델라웨어 미술관 전문 안내인의 설명은 이러합니다. 당시 (식민지시절과 건국 초기 당시)에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이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초상화 주문을 받았대요.  그래서 이들을 Tinker (땜쟁이)에 비유를 하더군요. 옛날에 제가 어릴때는 정말 솥단지 깨진고 그런것 땜질해주는 '땜쟁이'가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냄비나 솥단지를 수리해줬거든요. 미국에서도 그러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초상화쟁이(?)들이 이집저집 다니며 초상화를 주문받을때, 이들이 주문받아 그린것은 오직 '얼굴과 머리통'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뭐 오늘날의 포토샵과 비슷하다고 할만한데요, 미리 화판에 몸과 배경을 다 그려가지고 다니는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신사가 초상화를 주문하면 '신사몸통'을 미리 그려놓은 화판을 꺼내어 거기다가 그 주문한 신사의 얼굴만 그려 넣는 겁니다. 결혼한 여자가 주문을 하면 결혼한 여자의 몸이 그려진 화판에다가 역시 주문자의 얼굴만 그려 넣고요, 아이의 초상화를 주문받으면, 아이의 몸통이 그려진 화판에다가 주문한 아이의 얼굴만 더 그리는겁니다.  그러니까 머리를 제외한 다른 부분은 이미 기성품을 만들어서 가지고 다녔다는 것이지요.  사람 몸이야 사회적 신분에 따라서 의상만 다를뿐 비슷비슷 하니까 그냥 대충 몸과 배경을 완성해놓고, 거기다가 사람 얼굴만 비슷하게 맞춰서 그리는 것이지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 어릴적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구식' 결혼식을 하셨습니다. 우리 어머니 친정집 마당에서 전통식으로 혼례를 치른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부모님 결혼 기념 사진은 우리가 폐백드릴때 맞춰 입는 그 전통복장의 흑백 사진입니다.  어머니는 또래 친구들중에서 '흰 웨딩드레스'을 입고 결혼 사진을 찍은 것을 무척 부러워하셨습니다. 엄마 소원이 그 흰 서양식 드레스를 입어보는 것이었지요. 제가 초등학교 2학년때였나, 아직도 우리집이 셋방살이를 할때였는데,  어느날 우리집에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면사포를 뒤집어 쓴 우리 엄니와, 양복을 입은 우리 아버지의 웨딩사진 액자'가 하나 생겼습니다.  어린 저는 잘 몰랐지만, 그당시에 집집이 돌아다니면서  아무거나 맘에드는 사진을 주면 그 사진을 서양식 웨딩 사진에 합성을 하여 액자를 만들어다 주는 서비스를 하는 사진쟁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엄마는 그렇게해서라도 웨딩드레스를 입은 사진을 갖고 싶었었겠지요.  뭐, 얼굴은 우리 엄마, 우리 아빠이니까, 철없는 우리들은 그 사진을 보면서 신기해했습니다. 분명 우리 엄마, 우리 아빠이니까요.   하지만, 그날 저녁에 우리 엄니는 완고한 우리 아버지한테 무섭게 '야단'을 맞았죠 뭐. 하하하.  "결혼식을 번듯하게 잘 해놓고, 뭐가 답답해서 이따위 남의 몸뚱이에 얼굴을 붙여놓고 좋아하는건가. 이게 도대체 뭔가?  (뭐 애들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인가, 기타등등)" 하하하. 

 

엄마는 단지...웨딩드레스 입은 사진이 한장 갖고 싶었을 뿐인데...

 

아무튼 그 사진은 그 이후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민간 초상화쟁이들이 그런식으로 초상화를 그려주러 가가호호 돌아다녔다고 하는군요. 물론 이런식의 초상화일망정...가난뱅이는 아예 엄두도 못냈을것이고, 먹고살만한 부유층에서나 가질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부가 따로따로 초상화를 주문할경우, 여자는 왼쪽을 보고있을것이고, 남자는 오른편을 보고 있겠지요. 몸뚱아리는 이미 기성품으로 만들어져있고, 거기에 얼굴만 새로 그렸겠지요.

 

 

 

 

덧붙여서. 미국의 국부로 알려진 조지 워싱턴. 이 사람 초상화도 여기저기 많이 있거든요.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 작가로는 길버트 스튜어트가 가장 유명한데요, 그런데 길버트 스튜어트의 조지워싱턴 초상화 원본은 세가지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그 세가지를 '카피'한 것이라고 합니다. 

 

 

Anna Walraven (애나 워레븐)  c. 1850

작자 미상, Oil on Board

2010년 1월 9일 델러웨어 미술관에서 촬영

 

이 소녀의 초상화 배경으로 테이블에 책이 널려있쟎아요. 저것은 그 소녀의 집안 배경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뭐 일단 글을 읽고 쓸줄 아는 집안이라는 것이지요. 옛날에는 책도 귀했으니까, 집에 책이 저렇게 널려있다는 것은 먹고살만하고 교육도 잘 받았다는 뜻이겠지요. :)

 

이 델라웨어의 소녀 애나가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은 초기 '은판 사진' (daguerreotype - '다기어리어'는 프랑스의 사진술 발명가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입니다. 이 사진은 미국에서 1845년과 1855년 사이에 유행을 했고, 지금 남아있는 은판 사진들이 대개 그당시의 것이라고 합니다. 이 사진이 작자미상이고 연대를 알수 없지만, 소녀가 들고 있는 은판사진을 보면, 그림의 제작년대가 대략 어느정도라고 짐작할만 한것이지요. 이 사진이 초기 은판사진임을 알수 있는 단서는, 당시 은판사진이 대개 이러한 프레임에 담겨 있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도상학'이라는 학문이 있고, '서양화 읽는법' 이라는 책도 한국에 소개된것이 있고, 미국의 미술책 코너에 가 봐도 여러권 발견할수 있는데요. 그림속에 그려진 대상들을 조합해서 그림을 해석해 나가는 것인데요.  가령 비너스가 보고있는 '거울'은 헛된 허상을 의미한다던가, 해골은 '메멘토 모리' 포도는 '풍요와 다산' '개'는 충성 뭐 이런식으로 풀어가는 것인데요.  이런 '상징적 의미'외에도 그림에 나타나는 어떤 역사적 단서를 통해 그림의 배경을 이해하는 방법도 있지요.  그래서, 심심할때 그림을 들여다보면, 수수께끼를 풀어가는것처럼 재미있기도 해요.  아마 그래서 제가 그림 들여다보는 것을 싫증을 안내고 계속하는 것이겠지요.

 

 

 

 

 

 

2010년 1월 9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Ashcan School2010. 1. 7. 02:52

 

The White Ballet (흰 발레) 1904

Oil on Canvas

Everett Shinn (1876-1953)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미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들 (The Eight 혹은 Ashcan School)중 한 사람인 Everett Shinn (이브릿 신: 1876-1953) 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제가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 갈때마다 지나치면서 눈길을 제대로 줘 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에 얼핏 보니까 '드가' 그림 같더라구요.  '드가 그림인가?' 생각하고 가서 들여다보면 엉뚱한 이름이 걸려 있는 겁니다.  그러면 '드가 흉내낸 그림이군...' 이러고 그냥 지나치고 마는거죠.  뭐 발레 그림을 드가만 그렸을까마는, 저의 짧은 지식으로는 발레 그림은 죄다 프랑스의 화가 드가 (Degas) 작품 같은거죠.  발레를 다른 사람이 그리면 드가를 모방한것 같다는 소리나 듣는거죠.  이래서, 뭔가 먼저 잡아서 시작한 사람이 이기는겁니다. 헤헤. (그런것 같죠?)  뭔가 소재를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한가지를 파들어가면,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이 되는거죠.  우리가 드가와 발레를 떼어놀수 없게 되는거죠.

 

아무튼 이 그림은 드가의 그림이 아니고 Everett Shinn 의 그림입니다.

 

만약에 제가 '미국미술을 공부하겠다'고 작정하고 차근차근 미국의 화가들을 찾아보는  취미생활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이 그림은 영원히 저의 무시를 당하고 지나갔을겁니다. (가짜 드가그림이라는 딱지를 안고).

 

 

 

 

Everett Shinn (1876-1953) 은 The Eight 화가들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고 하지요. 그리고 뭐 젊은나이에 잦은 이혼으로 '유명'해진 면도 있는것 같습니다. 프랑스를 여행하며 당시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고요.  제 안목으로는 '드가'의 소재를 빌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신문 잡지의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을 한 경력도 있습니다. (당시의 사실주의 화가들 대부분이 신문 잡지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생계를 해결하였으므로 짐작 할 만한 일입니다.)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 복도 전시장에 걸린 그림을 순서대로 보면

1. 왼쪽벽 - Henri,  맞은편 (오른쪽벽) - Everett Shinn

2. 왼쪽벽 - Rockwell Kent,  맞은편 (오른쪽) - Glackens

3. 왼쪽벽 - George Luks ....

 

이런 순서로 걸려 있는데요.  이곳에 The Eight 을 위시한 당시의 사실주의 화가들 작품이 차례대로 전시되었다고 할만하지요.   미술관에 전시물을 설치할때, 전시 기획자는 나름대로 어떤 '논리'를 가지고 그림을 설치했을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렇게 모아놓은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Everett Shinn 의 작품을 제가 자주 보지 못해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정리하려고 합니다.  Everett Shinn 에 대하여 기억할 만한 사항은

 1. The Eight 의 최연소 멤버였다는 점

 2. 따라서 다른 The Eight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뉴욕, 도시의 대중의 삶, 역동적인 장면을 잡아내어 그렸다는 것

 3. 유럽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이정도가 될것 같습니다.

 

다음에 그의 다른 작품을 '사냥'하면 페이지를 업데이트 하기로 하겠습니다.

 

2010년 1월 6일 RedFox

 

 

 

Backstage Scean (무대 뒤) 1900

Watercolor and Charcoal on Paper mounted on the Board (종이위에 수채와 목탄화)

2010년 1월 9일 델라웨어 미술관에서 촬영

 

 

1900년 작품이니까 Everett Shinn (1876-1953)이 스물네살 청년시절에 그린 그림입니다.  위에 소개한  발레 그림은 1904년 작품이고요.  두 작품 모두 그가 20대때 그린 것이군요.  두가지 작품의 공통점은,  모두 '극장' 풍경이라는 것이지요.  이를 통해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이브릿 신이 무대예술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극장 인테리어 작업도 했고,  나중에는 영화 감독도 했다고 합니다. 극장예술을 비롯, 예술의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화가였군요.

 

2010년 1월 18일 업데이트

 

Posted by Lee Eunmee
Books2010. 1. 4. 11:36

 

 

Smithsonian Q & A: American Art and Artists: The Ultimate Question & Answer Book

 

지난 2009년 12월 29일에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책방에서 이 책을 샀다는 글을 적은적이 있습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250 )  심심할때 짬짬이 들여다보고 있지요.

 

오늘은 토마스 콜에 대한 페이지를 정리하면서 이 책을 참고삼아 보았는데요, 이 책에 실린 토마스 콜의 그림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그림은 제가 토마스 콜의 그림을 소개할때 이야기를 조롱조롱 들려드렸지요. 해골바가지가.... 메멘토 모리가...종알종알....

 

위의 책 (38 페이지)에 소개된 그림은 제목도, 제작년대도 아래의 작품과  일치하는 동일한 그림입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 참고) 위의 작품과 아래의 작품은 동일해 보입니다.

 

하지만, 미세한 차이가 있지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책의 그림과, 제가 액자까지 찍어온 그림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예, 아마 찾으셨을겁니다.  해골바가지의 위치를 보시면 그 차이를 알수 있지요.  위의 책속의 사진에는 해골바가지가 그림의 맨 바닥에 있고, 제가 찍은 원화에는 해골바가지가 조금 윗쪽에 있습니다.  아마도 책속의 그림 사진은 사진 편집 과정에서 아랫부분 일부를 잘라낸것처럼 보입니다.  그림의 아랫부분이 잘려나갔다는 뜻인데요.   물론 이 그림에서 아래부분 약간 잘라낸다고 뭐 주제가 바뀌고 그런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토마스 콜은 해골바가지를 그림의 바닥에 그려넣지 않았습니다....  아무렇게나 잘라낸 그림은 이미 원화를 훼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원화를 사진기로 찍고 다듬으면서 원화의 저역시 원화의 색감을 멋대로 훼손시켰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제가 아무리 육안으로 본 것의 기억을 고집하려 해도 재생에는 한계가 있지요). 재생의 한계를 인정한다 해도 원화의 구도마저 훼손시킨다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스미소니안이 자체 이름까지 걸고 만들어낸 책에서 스미소니안 소장 작품에 멋대로 칼질을 하여 원화를 편집을 했다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이거 정말 프로페셔널 정신을 가지고 만들고 감수한것인지.... 앞서의 페이지에서 (http://americanart.textcube.com/269 ) 미술책의 오류 가능성과, 인간의 오류가능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제가 미술관 산책하면서 '액자'까지 통째로 작품 사진을 찍는다거나, 혹은 미술관 풍경을 스케치하거나, 작품 사진 앞에 사람들이 서있는 광경을 집어 넣는 이유는,  그림의 실제 모습, 그 그림의 실제 크기, 혹은 그 그림이 전시된 전시장의 생생한 풍경을 통해 제 미술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께 한발짝이라도 다가가는 생생한 미술을 선물하기 위해서인데요.

 

미술책 편집하시는 분들, 이런 세밀한 것에도 신경을 쓰셔야 할텐데요. ...

 

책--믿으면 편하죠. 하지만 믿으면 안되죠.

 

책은 (전에도 이야기한바 있지만) '지도'같은 것입니다. 지도속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지도를 가지고 가늠하고, 찾아가는 것이지요. :)

 

 

2010년 1월 3일

 

 

 

Posted by Lee Eunmee
Books2010. 1. 4. 11:02

2009년 9월에 스미소니안 미국미술 박물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65)에 갔을때, 이 책을 한권 샀습니다. Essential History of American Art (by Suzanne Bailey).

 

 

 

 

 

이 책의 198-199페이지 입니다.

 

 

오른쪽의 파란색 작품의 작가는 Ellsworth Kelly 이고, 제목은 Blue on White (1961) 흰색위의 파랑 이지요.  그리고 그 아래에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Washington , DC 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2008년 5월에 제가 이 그림 앞에서 서 있는 모습입니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3층, 링컨 갤러리에 있는 작품 앞에서, 2008년 5월

 

 

제가 이 그림을 선명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림 앞에서 이런 포즈로 사진을 찍으면서, "이거 말풍선 같아. 이 파란색에 뭐라 뭐라 적으면 그대로 말풍선이다" 뭐 이런 농담을 했었거든요.

 

자 이제 저 맨위의 사진을 다시 살펴보시길....  (발견하셨습니까?)

 

^^* 그냥 한번 웃자고, 유머 차원에서 올려봤습니다. 뭐 책 편집하다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는것이지요. 특히나 방향이 애매한 추상미술은, 누구라도 실수하기 십상이죠. 제가 미술관 순례하면서도 추상미술 작품 사진을 찍을땐 작품의 방향까지 정확히 기억하려 애 씁니다.  세워 놓을것을 눕혀 놓는다던지, 거꾸로 놓아서는 안되니까요. 

 

그리고, 학교에서 학생들 지도할때도 학생들에게 주의를 주곤 합니다. 특히 학생이 뭔가 주제 연구 발표를 할때, "발표 내용을 어디서 구한 것인가? 어떤 책에서 찾은 것인가?  누가 말 한것인가?  혹시 저자가 잘 못 알고 있는것은 아닌가? 어떻게 확신하는가?" 이런 기본적인 사항들을 묻고, 학생들이 대충 얼버무리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것인지 확인합니다.

 

학생들에게 당부하는 사항:

 1. 책에 씌어있다고 무조건 믿지 말라. 만약에 책 내용에 수긍할수 없거나 의심이 간다면 다른 자료를 찾아보거나 그 진위를 조사해보라.

 2. 가르치는 선생인 나를 믿지 말라. 내가 모든것을 다 알수 없으며, 나도 모르고, 착각하고, 그리고 얼버무린다. 그러니 선생인 나를 믿지 말라.

 3. 오로지 공부하는 자신의 판단력에 의거하여 사색하고 공부하고 그리고 확인하라.

 

책을 무조건 믿으면 - 편하죠.

선생을 무조건 믿으면 -편하죠.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편하지가 않습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동물이고, 오류의 가능성은 늘 열려있으며, 내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나와 내 주변은 늘 오류를 일으킵니다.  스스로 회의하고, 사고하고, 그리고 공부를 해야만 단단한 기반위로 나아갈수 있지요. 죽을때까지 우리는 실수, 잘못, 오류에서 벗어날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해야 하지만, 동시에 오류의 가능성을 최소화 하기위한 노력도 기울여야 하는 것이지요.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 링컨 갤러리 (중앙에 Blue on White)

2009년 12월 29일 촬영

 

 

 

2010년 1월 3일 꽁꽁언날. 발 시려운날. redfox.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10. 1. 4. 09:18

 

 

 

http://americanart.si.edu/luce/ : 공식 홈페이지.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 루스센터 (Luce Foundation Center)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 홀에 들어가면 1층, 2층, 3층의 공간이 있는데, 1층에는 교육실 회의실, 그리고 관객을 위한 테이블들이 놓여있고요, 계단을 따라서 2층 3층을 올라가면 그곳에 '미술품 창고'가 있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주로 '회화'쪽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이 소장하는  미술의 전분야에 해당되는 작품들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데요, 이곳은 말하자면, 전시장과 창고 두가지 기능을 하는 곳입니다. 창고처럼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명품들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해가 바뀌면 이곳에 있던 작품들이 본래 전시장의 넓은 공간으로 옮겨가기도 하고, 혹은 반대로 전시장에 있던 작품이 이쪽에 와서 쉬기도 하지요. 저는 실제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주 전시장에서 루스센터 전시실로 옮겨온 것을 목격한적도 있지요. 그러니까, 이곳에 있다고 '별볼일 없는' 작품도 아니랍니다.  가령 조슈아 존슨의 페이지  http://americanart.textcube.com/34 에 소개된 소녀의 초상화도 이 루스센터 진열장 안에 있지요.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을 어쩌다 관광하는 차원에서 짧게 지나치는 분들이라면, 여기까지 기웃거릴 시간이 없겠지만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을 볼 여유가 있거나, 이곳을 자주 찾을수 있는 거리에 계시는 분들은 루스 센터도 잊지 말고 찾아보시길.  이곳의 좁다란 통로를 돌면서 숨어있는 작품들을 구경하다보면 '보물찾기'를 하는듯한 긴장감도 느껴지고요, 혼자 있어도 재미가 쏠쏠하여 시간가는줄 모릅니다.  나만의 숨겨진 놀이터에 들어선 기분이 들지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잘 모르니까. 그리고 이곳에 걸작들이 숨어있으니까).

 

 

 

 

 

 

 

 

 

 

 

 

 

 

아, (위) 가운데의 사나이 얼굴 그림, 그것이 벤샨의 작품이고요

 

 

 

왼편의 두부부의 초상화가 George Bellows 의 그림이랍니다.  조지 벨로우즈 페이지에 추가로 내용을 올리려고 생각하고 있지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198

 

2010년 1월 3일 몹시 추운날  redfox.

 

Posted by Lee Eunmee

19세기 미국미술: 토마스 콜 과 허드슨강 미술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263  이전 페이지에서 토마스 콜의 '인생' 시리즈를 살펴 봤습니다.

 

 

19세기 미국 미술가인 Thomas Cole (1801-1848. 토마스 콜)은 미국의 풍경화가로 널리 알려져있으며, 그의 이름 옆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허드슨강 미술가들 (Hudson River School)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1918년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합니다. 오하이오에 정착했던 그는 후에 펜실베니아 미술 학교를 거쳐서 1825년에는 뉴욕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당시에 미국의 지식인들이나 꿈을 가진 화가들이 거쳤던 노선이기도 하지요. 펜실베니아를 거쳐 뉴욕으로 가는 노선.

 

당시 뉴욕주의 허드슨 밸리 (Hudson Valley)라는 지역이 빼어난 자연경관으로 이름이 있었고 그래서 토마스 콜을 위시한 '미술학도'들이 이곳에서 풍경화를 그리거나 익혔습니다.  미국 건국 초기의 미술이라야 '초상화' 아니면 '풍경화'였다고 할만하지요.  후에 그는 이탈리아에 가서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허드슨 밸리의 Catskill 에서 결혼하여 죽을때까지 그곳에서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토마스 콜을 위시하여 허드슨강 기슭에서 풍경화 작업을 하거나, 토마스 콜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미국 풍경화가들을 일컬어 허드슨강 미술가들 (Hudson River School)이라 칭하게 됩니다.

 

허드슨강 미술가들은, 대개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미국의 풍경들을 그렸고 (말하자면 진경산수라고 할만하죠),  때로는 이상화된 풍경들도 그렸습니다. 이 허드슨 미술가들에 의해 '거대한 미국의 풍경'들이 유럽사회에 알려지게 되기도 했고요.

 

허드슨강 미술가들중에 널리 알려진, 제가 장차 페이지를 열어 소개를 하고자 하는 화가들은

 1. Albert Bierstadt (알버트 비어슈타트) : http://americanart.textcube.com/361

 2. Frederic Edwin Church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 http://americanart.textcube.com/363

 3. Thomas Moran (토마스 모란) http://americanart.textcube.com/364

등인데요.

 

이 주요 화가들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장차 허드슨강 미술가들 특징을 좀더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토마스 콜의 풍경화, 그 속에 담긴 우화들

 

 

토마스 콜은 풍경화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풍경화속에 성서적 우화들을 담기를 즐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 작품의 제목은 The Subsiding of the Waters of the Deluge 인데요.  '노아의 홍수 뒤에 차분해진 물결'로 해석이 됩니다.  Deluge 는 홍수, 범람을 의미하는 어휘인데, 성서에서 the Deluge 라고 하면 노아의 홍수를 가리킵니다.  "After me, the deluge!"  나 이후에 홍수가 오건 말건 상관없다는 뜻이지요. 나 살아생전에만 무사하면 된다 이거죠. 좀 무책임한 발상이죠. (내가 알게 뭐람).

 

그림의 제목만 보면 토마스 콜은 성서에 담긴 노아의 홍수, 그 이후의 평화를 그린것으로 풀이됩니다만, 또다른 해석도 가능해집니다. 미술관의 그림 안내지에 담긴 내용을 옮기자면, 토마스 콜은 이 그림을 통해 신생국가 미국을 찬양했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민자였던 토마스 콜 자신의 삶의 관점을 보여준것은 아니었을까요?)

 

노아의 홍수가 뜻하는 것은 묵은것의 청산, 죄악과 오류의 청산.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지요. 신생국 아메리카가 유럽의 영향권에서 독립을 하는것 역시 새로운 시작일수 있고, 유럽에서 이민 온 토마스 콜에게도 미국에서의 삶은 새로운 시작일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 깊고 어두운 동굴을 통과하여 저 멀리 노오랗게 햇살이 비치는 평화의 바다로, 신세계로 나아간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제가 사진 사이즈를 줄여놔서 잘 안보이시겠지만, (사진 두번 클릭하시면 커집니다), 사진 하단의 중앙의 바위 옆에 보시면 희끄무레한 조그만 것이 보이실겁니다. 해골바가지 입니다.  해골바가지.  이 해골바가지는 왜 그려넣은 것일까요?

 

 

노아의 홍수 이후, 새로운 에덴을 향하여

The Subsiding of the Waters of the Deluge 1829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서양 그림을 감상하실때, 서양 그림에 '해골바가지'가 자주 등장한다는 것을 감지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나라를 막론하고 유럽 화가들은 '해골'을 그려넣기를 즐겼습니다. 이를 Memento Mori (메멘토 모리: 우리가 모두 죽어야 할 생명들이라는 것을 기억함) 이라는 용어로 정리를 하기도 합니다. Memento (Remember, 기억하라), Mori (mortal,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아리따운 여인이 한손을 해골에 얹고 있는 그림은 어떤 식의 해석이 가능할까요?  인간은 유한하고, 처녀의 아름다움도 유한하다는 메시지이지요.  책상위에 모래시계와 해골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 있다면,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지지요. 시간은 흘러가고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는 죽을거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 그림에 담긴 해골은 어떤 상징을 담고 있을까요?  우리 모두 죽을거다?  뭐 그보다는.... 어떤 것의 종말을 상징할수도 있지요.  구시대는 끝났다. 이 해골을 넘어서서 저 평화로운 신천지로 나아간다는 뜻일수 있지요. 신세계 미국은 New Eden 새로운 에덴동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토마스 콜에게.

 

2003년 겨울에 (아 벌써 아주 오래전의 일이구나, 어제 같은데...) 뉴올리안즈에 간적이 있습니다. 태풍 카트리나가 강타하기 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던 곳이었지요. 뉴올리언즈 시가지에 타로 점쟁이 할머니가 앉아있길래, 난생처음으로 길거리에서 타로점을 쳐봤습니다.  아, 제 일기에 그당시 사진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그때 제가 고른 패중에 '해골'이 그려진 패가 있었거든요. 크리스마스 휴가로 간 여행이라 '신년운세'를 본것인데, 뭐 해골 패가 나왔던겁니다.  그런데 점쟁이 할머니가 제 패를 들여다보더니 설명을 해주더라구요. 이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죽음'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넌 새해에 큰 행운을 맞이할것인데, 그것을 얻기 위해 고통이나 노력이 필요하다. 잘 해내길 바란다. (히히, 점쟁이가 아닌 나 라도 그런 설명은 하겠다) 아 뭐 점쾌가 하도 안좋아서 나를 위로하려고 이러시나 했지요.

 

 

 

2003년 12월 뉴올리언즈의 타로 점쟁이 할머니와 나.

 

그런데, 그 이듬해에 저로서는 인생의 큰 전환점이 왔지요. 아주 힘든 시험도 쳤고, 새로운 관문으로 들어섰지요.  죽음은 곧 탄생이다. 새로운 탄생이다.  점쟁이 할머니의 아름다운 설명이 고마웠죠. 결국 인생 이리저리 해석하기 나름인데...

 

아, 예, 그래서 토마스 콜의 그림에 담긴 저 해골은, 죽음, 그러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구시대, 구습의 죽음, 신생국가의 새로운 에덴동산을 희구하는.

 

 

 

아래의 두편의 그림들은 십자가의 순례라는 타이틀의, 기독교 우화 연작의 일부로 보입니다. 그가 1848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 작품들이 1847년 1848년에 그려진 것이고보면 이것들이 토마스 콜의 최후의 작품들이었던것 같은데요. 그 자신이 생의 마지막에 다다랗다고 느꼈던 것일까요? 

 

시작은 끝과 통하고, 끝은 새로운 시작과 닿아있고...

 

한해를 시작하는 요즈음, 묵은것들을 털어 내시고, 또 새로운 종말을 향해 여행을 떠나야할 때이지요.  올해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수 없으나, 길을 떠나보는거죠.

 

 

 

The Pilgrim of the Cross at the End of His Journey

십자가의 순례, 그 여행의 끝 (십자가와 세상이라는 연작 시리즈를 위한 준비화)

(Study for the series; The Cross and the World) 1846-1848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The Pilgrim of the Cross at the End of His Journey (about 1847)

십자가의 순례,그 여행의 끝.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그리고 올해의 마지막날,  아름다운 한 해였노라...라고 술회 할수 있기를.

 

2010년 1월 3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