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nry Ossawa Tanner (1858-1937)
Christ and His Disciples on the Sea of Galilee (ca. 1910)
Oil on artist's canvas board
2010년 5월 1일 Virginia Museum of Fine Arts (버지니아 미술관)에서 촬영
크기는 대략 가로 20센티 세로 15 센티 정도로 추측됨 (작은 그림이었음)



버지니아 미술관이 대대적인 증축공사를 마치고 재 개관식을 하던날 (2010년 5월 1일) 미술관 방문을 하였다가 발견한 헨리 오사와 태너의 소형 작품. 갈릴리 바다의 예수와 그의 제자들. 성서적인 지식이 일천하므로 간단히 상식선에서 배경 설명을 하자면, 예수가 제자들을 이끌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던중, 스승께서 잠시 낮잠을 즐기고 계시는 와중에 풍랑이 몰아치는지라... 어리석은 제자들이 풍랑에 겁이나서 "스승님, 배가 뒤집힐 판국에 잠이 오십니까? (내식으로 대략)" 성화를 하니까, 예수께서 잠에서 깨어나서 짐짓 짜증스러운 태도로 말씀하시다: "어리석은 제자들아, 내가 그동안 보여준 이적들을 보지 못했느냐?  내가 자는데 왜들 법석을 떠느냐.  풍랑이 그렇게 무섭다는 말이냐?"  예수께서 약간 성가신 표정으로 풍랑을 향하여, "시끄럽구나. 어리석은 내 제자들이 무섭댄다. 좀 조용히 해라" 하고 타이르시니 풍랑이 잠잠해지도다~

대략 이러한 일화가 전해지는 바, 그것을 태너가 화폭에 옮겼으리라 짐작된다.

헨리 오사와 태너는 유색인종이 인정을 못받는 미국의 풍토에서 흑인 화가로 성장한 사람인데, 종국에는 미국의 인종 차별에 진절머니가 난다며 유럽으로 건너가 버렸다 (1891년). 이 작품은 파리의 살롱전에서도 전시가 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던 빼어난 작품이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헨리 오사와 태너의 '수태고지'  대형작품이 걸려있는데... 오사와 태너의 미술세계를 종합적으로 정리할때 함께 소개하겠다.

이 작품은 딱히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그 일화를 음미할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가 고해와 같은 삶을 헤쳐나갈때, 풍랑이 몰아치고 배가 위험에 빠질때라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자세, 그런 성품을 키우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풍랑을 잠재우고 대양을 건너겠다는 자세로 하루 하루를 살아 나가고 싶은 것이다.








텍스트큐브가 '사실상' 서비스를 중단하겠다는 공지를 해서,
어떻게 할것인가 잠시 고민을 했다.
텍스트큐브를 블로그로 선택한 이유는,
조용하고, 눈에 안띄고, 그냥 조용히 혼자 놀기에 좋아보여서
그리고 구글이 관리한다니 데이타 잃어버릴 걱정을 안해도 될것 같아서.
지난해 5월에 만들어 놓고 있다가 8월부터 사용했으니까, 계정은 1년간 유지한 셈이다.

나는 이 블로그를 갖고 놀면서, 내 인생에서 힘든 오후의 한때를 무사히 건널수 있었다.
많이 아팠으나, 지금은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시간이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주긴 하지만,
텍큐에서 블로그질하면서 스스로 정신상담을 주거니 받거니 한 것도 도움이 되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으로 족하다.

미국미술 프로젝트를 아직 마치지 못했는데, 텍큐 쓰기가 애매해지고 말았다.
프로젝트를 마무리 할 때까지는 계속 작업은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래서
계정을 하나 만들어놓긴 했는데
이삿짐을 옮길지 말지는 좀더 두고 볼 것이다. 서두를 이유가 없으니까.
어디서 무엇을 하건, 그다지 미련을 느끼지 못한다. 아쉬움도 별로 없고.
완전 '유목민' 생활에 익숙해진 것도 같다.  :-)
어차피 나그네 아니던가.
아무튼, 시작한 일은 매듭을 지어놓고...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10. 5. 2. 12:51

공식홈페이지: http://www.vmfa.state.va.us/default.aspx

 

버지니아주의 행정수도 (주도)는 Richmond 리치몬드시이다. 이곳에 버지니아 미술관이 있었는데, 지난해초부터 증축 공사를 한다고 일부 폐쇄하다가, 전부폐쇄하고 본격적으로 공사를 한것으로 알고 있다.  소장품의 일부는 지역의 다른 미술관들을 돌며 순회 전시가 되기도 하고 그랬다.

 

그 버지니아미술관 (Virginia Museum of Fine Arts)이 오늘 (2010년 5월 1일) 증축을 마치고 개장식을 하면서 다양한 개장 행사를 온종일 진행했다. 나는 열한시쯤 도착하여 오후 네시까지 있다가 나왔지만, 오늘 자정까지 미술관이 열린다고 한다.

 

 

나는 증축 이전에 이 미술관에 가 본적이 없으므로 얼마나 새로 수리된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운데, 직접 가서 보니 제법 큰 규모였다.  미국의 국공립 미술관들중에서 10대 미술관 안에 손꼽히는 것이라는 설명을 듣기도 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견주면 규모가 작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외의 다른 미술관에 견주면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그러면 정말 미국의 십대 미술관중의 하나가 될수도 있겠다)

 

나는 큰 기대 안하고, 내가 평소에 보고싶어했던, 미국 미술가들의 작품을 보겠다는 '소박한' 생각을 갖고 리치몬드까지 120마일 길을 달려갔는데, 막상 가보니 내 예상보다 규모가 커서 '감동' 받았다 (이럴땐, 이 미술관의 모든 소장품이 내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개념미술의 창시자인 Sol Lewitt 의 작품이 '정다운 음악'처럼 서있다. (아이좋아, 아이좋아, 좋아서 깡충깡충 뛰게 된다. 예상치 못한 명랑하고 생동하는 작품을 만나서)

 

 

 

 

 

 

 

 

일단 전체 소장품중에 미국미술품들이 걸작들이 많이 있어서 '너무 너무' 행복했고

미국 미술품 외에도 유럽이나 아시아 작품들도 골고루 구비되어 있었다.

워싱턴의 NGA 국립 미술관보다는 규모가 작다고 할 수 있지만, 국립 미술관에서 찾아보기 힘든 알토란 같은 작품들도 많이 있다.

 

작품사진은 300장 가까이 세밀하게 찍어왔으므로 차근차근 풀어 놓기로 하고,

오늘 나를 감동시킨 또다른 요소는, 미술관 재 개장식을 하면서 미술관측이 관람객들에게 보인 남부의 친절함 (Southern Hospitality) 이라고 할 만하다.

 

Southern Hospitality 라는 표현이 있다. 미국 남부 사람들의 푸근한 인심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내가 살고 있는 북 버지니아는 미국의 '북부'쪽에 가깝지만, 버지니아의 수도인 리치몬드는 한때 남북전쟁 당시에 '남군'의 수도 였던 적도 있다. 남부의 '심장부'와 같은 곳이었다.  같은 버지니아 이지만, 내가 북버지니아에서 차를 몰고 120마일을 남쪽으로 달려 내려갔을때, 리치몬드에 펼쳐진 풍경은 워싱턴 인근 지역과는 사뭇 달랐다.  '플로리다'를 연상케하는 따뜻함, 느릿함, 여유로움, 순한 표정, 느릿한 발걸음, 그리고, 아아, 특유의 남부 액센트와,  여기저기 많이 보이는 흑인들.  워싱턴 인근 지역에서 흑인들을 많이 못봤는데, 리치몬드에 오니까 정겹고 순박한 흑인들이 여기저기 많이 보였다. (여기 남부 맞구나... 고향에 돌아온듯한 따뜻함.)

 

내가 Southern Hospitality 라는 표현을 떠올린 이유는,  이 미술관이 오늘 방문한 '모든' 관람객이 원하면 언제든지 먹고 마실수 있도록 음료와 간식을 '무한'으로 제공했다는 것이다.  미술관에는 카페테리아와 레스토랑, 스넥바 등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미술관 내부에 있는 카페테리아및 레스토랑, 스넥바, 그리고 코트야드에서 마치 호텔의 연회장같은 설비를 해놓고, 관객들에게 정중하고도 친절하게 음료와 가벼운 요깃거리를 온종일 제공을 한 것이다.

 

이들이 제공한 것은

  1.  각종 탄산음료수와 레모네이드를 얼음과 함께 유리잔에 담아주고, 빈 잔들을 즉시 치워서 항상 청결한, 준비된 상태를 유지했다 (그렇게 사람이 많는데...기다리는 줄도 없을정도로 기민했다)
  2. 카페테리아에서는 미국인들이 점심 대용으로 먹는 핫도그 (빵 사이에 소세지 낀것) 를 은박지로 포장해서 따뜻하게 해 두었다가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에게 제공했다.
  3. 여러가지 쿠키도 쌓아놓고 누구든지 집어가도록 했다.
  4. 감자칩 스넥도 원하는 만큼 봉지를 집어갈수 있었다.

아침 열시부터 자정까지, 쉼없이 제공되는 음료와 간단한 먹을거리들. 

 

나는 처음에는 '음료수 정도는 기념으로 무료로 주나보다' 생각하고, 점심 먹을거리를 찾기 위해서 카페에 들어갔는데, 가만보니, 아무도 돈내는 사람이 없는거다. 돈을 받는 사람도 없었다. 

  "이것이 뭔 일이다냐? "

나는 그만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2009년 1월이었나? 스미소니안 미국 역사 박물관이 보수를 마치고 재 개장을 했는데, 공식 개장전에 일부 인사들에게 미리 공개를 한 적이 있다.  그날 나도 구경을 갔었는데, 거기서도 음료와 가벼운 먹을거리를 제공했었다.  그때는 그냥, 음료와 스넥을 조금 나눠주나보다 생각했었다. 감동은 없었다.  오늘은, 음료와 식사를 제공하는 행사 담당 직원들, 혹은 일꾼들의 태도나 표정이 참 여유롭고 평화롭고, 느릿한 미소를 담고 있어서  미술관에 왔다는 느낌을 넘어서 '내가 참 복이 많구나. 이런 호사를 다 누리는구나' 뭐 이런 황송한 느낌까지.

 

그래서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을 접대할때는 이런 여유와 느긋함을 갖어야 하는거구나.  세밀하나 신경질적이지 않은, 남부 스타일의 친절함. 

 

오늘 개장일이라 끊임없이 미술관 여기저기서 각종 공연과 행사가 이어졌는데, 나는 미술체험 학습 코너 여러군데 중에서 스탬프 만들어 찍기를 해봤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종이에 연필로 스탬프 밑그림을 그린다

스티로폼 판 위에 밑그림을 올려놓고

연필심으로 선을 그려준다

스티로폼에 밑그림과 동일한 골이 패인다

 

 

스티로폼에 스탬프 잉크를 고르게 묻혀서

종이에 올리고

롤러로 꼭 눌러준다 (롤러가 없으면 두꺼운 책같은거 올려놓고 도장찍듯 압력을 가하면 된다)

 

 

완성.

 

 

 

 

오늘의 진정한 하일라이트는

  날으는 황금 퇴깽이

그리고

그리고

 

   내

 

호호호~

 

 

 

홈페이지를 보면 공식 그랜드오프닝 행사가 5월 1일과 2일로 잡혀 있으므로, 예측컨대 내일도 오늘과 같은 성대한 오프닝 행사가 펼쳐질것이다.  일생에 한번 볼수 있을까 말까한 '미술관 개관 행사'이다. 

 

 

 

Posted by Lee Eunmee

 

명색이 '미국 미술 블로그'인데, 그동안 미술 얘기가 뜸 했었지요. (-.-)

 

벚꽃놀이 구경 간 김에,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기념관에 설치된 George Segal (1924-2000)의 경제공황기 3부작 조형물을 사진기에 담아 왔습니다.  워싱턴 디씨를 관광할때, 아마도 디씨의 상징물처럼 화보에 소개가 되는 장소들로서는

 * 워싱턴 기념탑

 * 링컨 기념관

 * 호숫가의 흰 건물, 제퍼슨 기념관

 * 백악관

 * 국회의사당

뭐 이런 '하얀' 건물들일겁니다.

그런데,

호숫가의 제퍼슨 기념관, 그 눈에 띄는 하얀 기념관 건물에 가려진, 우중충한 색조의 '공원시설' 같은 장소가 있는데, 그곳이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기념관입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에 대해서 제가 상세히 아는 것은 아니고, 그에 대해 얼핏 떠오르는 사항들은

 * 미국역사상 유일한 3선 대통령

 * 경제 대공황을 구제하기 위한 뉴딜정책

 * 미국인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자'라고 알려진 대통령

이런 사항들입니다.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제퍼슨 대통령 기념관 인근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미국 미술사'책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시대적' 작품이 있습니다. 회화작업도 하고 현대적 개념의 조각 작업도 했던 George Segal 의 3부작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1) The Rural Couple : 시골 부부 : 경제공황때 고통받던 농민들

(2) The Breadline: 빵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 경제공황때 고통받던 도시 빈민들

(3) The Fireside Chats: 노변정담 (난롯가의 대화) : 1933-4 년 사이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30여차례에 걸쳐서 국민들을 대상으로 라디오 연설을 했던 일화를 이 작품에 실은듯 합니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한 사나이를 주인공으로 했습니다.

 

 

...작가인 George Segal 에 대한 이야기는 차차 들려드리겠습니다. 오늘은 FDR (루즈벨트 대통령 머릿글자만 부르는 약칭) 기념관에 서있는 이 세가지 작품들을 감상해주세요 (미니 카메라로 대충 찍은 사진이라, 사진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요...)

 

 

(1) 시골부부

 

 

 

 

 

(2) 빵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이 작품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유쾌하고 발랄하게 작품 사이사이에 줄을 서며 깔깔대는 학생들 (고등학생들로 보였습니다.)

 

 

 

 

(3) 난롯가의 대화 : 루즈벨트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에 귀를 기울이는 한 사람.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10. 3. 19. 21:55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키브리지 왕복  (7마일)

오후 여덟시포토맥강 그리고 초승달

이사진 내가 봐도 참 좋다 :)

 

 

 

 

오후 일곱시 10분 Fletcher's Cove. 황혼

 

 

 

 

 

 

 

오후 여덟시 키브리지와 알링턴 시가지.

 

 

 

 

대략 왕복 7마일 거리  강변길 A 지점에서 출발 -- 키 브리지앞에서 반환

 

& 3월 15 : 2마일

& 3월 17:  2마일

 

 

한창 걷기 할때는, 매일 몇마일을 걸었는지 정리했었다. 올해는 이것이 가능할지 잘 모르겠다. (일이 분주하다...)  걸을때마다 정리는 해 놓겠다.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10. 3. 18. 23:35

http://www.brooklynmuseum.org/

 

뉴욕행 고속버스 왕복권을 예매했다.  이번 토요일에 부르클린에 있는 부르클린 미술관에 다녀올것이다.  내가 기획한 '미국미술' 프로젝트를 대충이라도 틀을 마무리 하려면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어쩐지, 이번에 안가면 부르클린 뮤지엄에 영 못가보게 될 것 같아서, 메트로폴리탄이나 휘트니를 나중으로 미루고 부르클린으로 향한다.

 

틀을 마무리 하기전에 내가 한번 더 가보려고 계획하는 곳은 맨하탄에 있는

 1. 메트로 폴리탄 뮤지엄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사진을 집중적으로 찍어갖고 오겠다...)

 2. 휘트니 아메리칸 아트 뮤지엄 (이곳에서는 사진 촬영이 불가해서 욕구불만이 쌓인다.)

 3. Jewish Museum (뉴욕의 쥬이시에 대한 내 부정적인 편견때문에 이곳을 경원시 했었는데, 뒷조사를 해보니 쥬이시 미술가들의 걸작들이 이곳에 있어서, 안 가볼수가 없다...)

 

이 세곳을 나중에 둘러보고 내 프로젝트를 일차 마무리 짓겠다. 4월중에 한번 더 다녀오면 되겠지.   (일을 질질 끌지 않겠다는 강력한 결단!)  아무튼, 내 현재 계획은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미국미술 프로젝트를 대충 마무리를 지어놓고...  한국에 다녀온 후에는 내 본래 연구쪽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결연한. 그러나. 나는 게으르다. (이것은 진리.)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10. 3. 15. 03:11

http://www.history.org/History/museums/abby_art.cfm

 

록펠러 재단에서 윌리엄스버그에 기증한 미술관 건물과, 소장품들.

 

 

 

윌리엄스버그에 위치한 록펠러 포크 아트 뮤지엄에는 이들이 수집한 미국 민화나 민속 공예 제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건물 한동의 절반은 Wallace Decorative Arts Musum, 그리고 절반은 Rockfeller Folk Art Museum 으로 사용된다.  1층의 절반에는 18세기 미국의 공립병원 시설의 흔적 일부가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서, 지하로 내려가면 뮤지엄샵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입장표를 판매한다. 성인 10달러. 윌리엄앤메리 대학 학생은 무료. 이 입장표로 이 건물에 있는 두가지 뮤지엄을 관람할수 있고, 그리고 인근의 Bassatt Hall (록펠러 부부가 별장으로 사용했던 집)을 구경할수 있다. 입장표는 명찰처럼 만들어져 있으므로 달고 다니면 출입이 자유롭고, 하루에도 여러차례 드나들수 있다.

 

 

내가 이 포크아트 뮤지엄을 찾은 이유는, Edward Hicks (http://americanart.textcube.com/184 ) 의 걸작들이 이 뮤지엄에 여러가지 소장되어 있는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순전히 에드워드 힉스의 그림들을 '사냥'하기 위해서 벼르고 있었던 곳인데, 가보니 에드워드 힉스 외에도, 미국의 민화 전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줄 작품들이 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미국 민화를 공부 하려면 이곳부터 들러야 하는거구나...  (내가 예상치 못했던 세상이 펼쳐져 있었음을 인정한다.)

 

록펠러 부부가 살았던 Bassett Hall 에도 민화들이 빼곡이 걸려 있었고, 이 뮤지엄에도 수백점의 민화가 걸려 있었는데,  나는 이 '서툰' 장난같은 민화를 수집했던 사람의 마음을 아직 잘 모르겠다. 그냥 돈이 많으니까 투자 차원에서 보이는대로 긁어모는걸까?  그게 아니고 민화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다면, 왜, 무엇이 그렇게 매력적이었을까?  그리고, 정작 나는 왜 민화에 끌리는걸까? 뭐 이런 고민같지 않은 고민도 생겼다.

 

 

민화 박물관에서 찍은 사진들을 그냥 두서 없이 올려본다. (에드워드 힉스나, 다른 주요 작품은 별도의 페이지에 정리하겠다.)

 

 

 

포크 아트 전시장 입구.  이 홀에 들어가면 왼편에 록펠러 주니어의 부인의 초상화도 걸려있다. 후덕한 인상의 귀부인이다. 노년에는 뜨개질을 하여 군 위문품으로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바로, 이 작품을 사냥하러 갔던 것인데, 이 외에도 아름다운 작품들을 많이 볼수 있었다. 에드워드 힉스의 평화의 왕국.

 

 

 

그냥 보고 있기만 하여도 행복해지는 그림.

 

식민지시절의 어느 저택(!)의 내부를 뜯어다 복원한 실내. 나무 벽에 변화도 그려넣고, 위의 장식도 그냥 그림으로 그린것이다.

 

 

 

동화와 민화의 만남. 어린이를 위한 미술작업실도 한구석에 있다. 오른편 벽의 말 조각품 아래의 풍경화 역시 에드워드 힉스의 작품.

 

 

 

 

 

에드워드 힉스가 '간판'그리는 일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도대체 어떤 간판을 그렸다는 것인지 내가 잘 이해할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당시의 '간판'들을 구경할수 있었다. 나무판에 그림으로 그린 간판들. 아하, 이런것을 그려주고 돈을 받았구나.

 

 

중앙 계단이 있는 홀.  가운데 보이는 것이 미국의 초상화가 Charles Pearle 이 그린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 (http://americanart.textcube.com/357 ) 스미소니안 초상화 박물관에 걸린 것과 동일한 초상화이다. 오른편에는 길버트 스튜어트가 그린 토마스 제퍼슨의 초상화도 걸려있다. 당시에는 '사진'을 여러장 인화하듯 동일한 초상화 작품을 수십점씩 복제하여 팔았다고 한다.

 

1층에 카페가 보인다.

 

 

 

 

 

시계와 의자 사이의 그림, 역시 에드워드 힉스의 작품이다.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10. 2. 21. 06:34

예, 여기가 바로 오늘 저의 천국이었습니다.

 

제가 The Eight 멤버들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을 인물별로 페이지를 열어서 이야기를 한적이 있는데요, 복습해볼까요. 왼편의 뉴욕 고가 기차그림: 이거 누구것일까요?  미국 사실주의 그림에서 뉴욕 고가 기차가 나오면 자동으로 떠올릴만한 화가가 한명 있지요.  맞은편의 (오른쪽 첫번째) 그림도 같은 작가의 작품입니다.

 

 

 

 

왼편에 보석을 박아놓은듯 아른아른하게 그린 작품. 이 작품의 작가는 누구일까요? 

(저한테 - "너 이방에서 가장 맘에 드는 작품 하나 가져가라" 하고 이 집 주인이 제안한다면, 저는 바로 이 작품을 가져오고 싶어요. 아름답고 행복해보이니까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나란히 걸려있지요.

 

 

저 건너방에 유리상자 안에 뭔가 전시되어 있는데요, 보석같이 아른아른한 색감의 화가가 그린 작품이 모셔져 있어요.

 

 

 

이렇게 앉아서 작품을 실컷 보는거지요.

 

 

 

호퍼 맞은편 벽에는 벽난로가 있고요. 벽난로 위에 Rockwell Kent 의 설원 풍경이 걸려있습니다.  (겨울이라 겨울작품을 걸은듯해요)

 

여기 걸린 구체적인 작품들은 별도로 정리를 할것입니다. 하나 하나. 보석을 들여다보듯.

 

뭐 돈도 없고, 가진것도 별로 없고. 그럭저럭 먹고 살수 있는 직장과, 공부 한 것이 밑천의 전부인데, 그래도, 내 기억속의 명작들과 내가 가진 사진 파일들을 생각하면 별로 남이 부럽지 않아요. 내가 제일 부자 같아요. 헤헤. (필립스 콜렉션, 이 집도 다 내집이다. 내가 가끔 가서 둘러보는 별장이다. 뭐 이렇게 상상하면 되는거죠.)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10. 2. 21. 05:38

필립스 콜렉션 입구입니다.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있죠.

이 사진에 나도 있어요. ^^

2010년 2월 20일

 

 

2010년 2월 6일부터 5월 9일까지 세달간 워싱턴 디씨의 필립스 콜렉션에서 조지아 오키프의 추상미술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미국의 대형 미술관을 돌며 오키프의 작품들을 꽤 많이 보고 지나쳤었는데요, 이번 전시회에서는 그이의 추상미술을 한눈에 휙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후원인이었다가 남편이 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에게 보낸 자필 편지며, 스티글리츠가 '애정'을 기울여서 찍은 오키프의 각종 사진들도 흥미를 불러일으킬만 한데요 (제가 미술전공생이 아니고 문학전공생이다보니, 작품의 예술성보다는 인물사적 에피소드에 오히려 솔깃하기도 합니다. )

 

대부분의 미술관에서 '특별 기획전'의 경우 사진 촬영을 허용하지 않지요. 그래서 전시장의 사진을 찍을수는 없었고요.  필립스가 자체소장하는 영구소장 작품들은 사진 촬영이 가능합니다. (그것들은 찍었습니다.) 오늘은 그냥 간단한 스케치만 전하고요, 조지아 오키프 관련 페이지를 따로 열었을때, 제가 '수집'한 작품 사진들을 풀어놓기로 하겠습니다.

 

 

필립스 콜렉션 영구 소장품, 뉴멕시코의 풍경화가 걸려있는것이 보이지요.

이 통로에서 (뒤로 돌아서면)  특별전시장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전시장부터는 사진을 못 찍지요.

 

 

전시장 입구에 관람객이 간단한 평을 남길수 있도록 공책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영어군요. 호호호.)

 

제가 얘기 했쟎아요.  오키프의 누드사진이 흥미로웠다고요. 저 안쪽에 보이지요...

 

 

제가...좀..이상한데서 집요해요 헤헤헤

통로 입구에서 안쪽이 보이는데요. 전시장 안에서 사진 찍는것은 금지 되어 있지만

전시장 바깥에서 뭐 사진 찍는것을 뭐라고 말할수는 없쟎아요. 

제 카메라 렌즈가 그래도 제법 쓸만한거거든요.

입구 통로에서 그냥 줌업을 해가지고 찍었죠 뭐.

왼쪽은, 오키프가 벌서듯이 팔을 올리고 있는데 겨드랑이 치모가 꽤 섹시하게 찍혔습니다.

오른쪽은 엉덩이 사진인데, 치모까지 드러나는 꽤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직접 사진을 보면 참 '예술'적으로 보입니다. 누구더라 그 '김기덕' 감독의 '섬' 마지막 장면같은.

한마디로, 오키프는 인물도 예술 인생도 예술이었다 이거죠 뭐. (부럽다  ^^).

 

 

 

 

저 리어왕같은 신사분과 저와는 아무런 관계가 아니에요~  헤헤

 

 

 

Posted by Lee Eunmee
Conceptual Art2010. 2. 18. 10:31

 

2008년 12월 4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촬영

 

 

 

새 학기들어서, 심기일전하여, 연구 작업에 충실해보려고

전에 사용하던 노트북을 꺼내서 데이타 파일들을 정비하던중 우연히 발견한 사진.

 

2008년 12월 4일.  나는 내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갔었는데요.  내 친구는 빽도 좋아서 거기를 무료 입장을 시켜주었지요. 차도 공짜, 입장료도 공짜. (만고의 김삿갓 놀음이었어요 랄라~  )

 

퀴즈:

 

(1) 저~만치 있는 왕따시 커다란 사진같은 초상화 (힌트, 사진같은 초상화)의 작가는 누구일까요?

(2) 이 가까이에 보이는 하얀 골재 네모탑, 이거는 누가 디자인을 했을까요?

 

제 최근 페이지들을 보셨다면 짐작이 가실겁니다.  (아아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씀, 그것은 진리~  )

 

(개강하는 첫주라서 정신이 없네요. 수업준비도 해야하고, 컨벤션 발표 자료도 만들어야 하고. )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10. 2. 11. 02:08

척 클로스 (Chuck Close, 1940년 출생)는 현재 생존하는 작가입니다. 미국의 큼직한 미술관에 가면, 영문을 알수 없는 큼직한 초상화를 만나게 되는데, 그 들중에 척 클로스의 작품이 끼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대략 아래와 같은 분위기의 작품들 입니다.

 

 

척 클소스는 미국대륙의 서쪽, 시애틀에서 태어나 워싱턴대학을 다녔고요, 후에 예일대학으로 옮겨 미술을 공부합니다. (예일 하니까, 가짜박사  파동을 일으켰던 신모씨가 그 이름을 팔았던 것이 생각나는군요). 1967년에 뉴욕에 입성한 클로스는 사진을 바탕으로 한 대형 초상화 작업으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이를 포토리얼리즘(photorealism)이라고 하는데, 사진을 바탕으로 뭔가 극대화 시키고 이를 회화에 옮기는 시도를 여러명의 현대 미국 미술가들이 했쟎아요. 리히텐스타인(Roy Lichtenstein) 도 그랬고, 로젠퀴스트 (Rosenquist) 도... 이 포토리얼리즘이 1970년대 미국미술에 선풍적이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척 클로스의 경우에는 '모눈종이'같은 작업을 했지요. 대충 보자면 - 사진에 모눈종이처럼 줄을 긋고요, 캔바스에도 모눈종이처럼 줄을 그어서 그 모눈들을 일치시키는 식으로 작업을 한거지요. (또 어떤이 (Kline)는 이미지를 프로젝터로 비쳐가지고, 그 비쳐진것을 그리는 식으로 확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클로스의 경우에는 이 '모눈종이' 기법이 그의 시그니처가 되고 말았는데요.

 

 

그런데, 척 클로스는 그의 이 독특한 기법도 눈에 띄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것은 그 사람의 인생 그 자체입니다. (척 클로스에 대해서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제가 미술 전공도 아니고 예술에 대해서 뭘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냥 어떤 사람의 아주 특별한 삶을 들여다보는 쪽이 저한테 더 어울릴지도 모르지요.)

 

 

척클로스의 이력을 보면 1988년의 '사건'이 눈에 들어오는데요. 어느날 모 미술 시상식장에 시상자로 참석을 하기 위해 집을 떠나던 그는 그의 신체에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의 나이 48세이군요). 몸이 갑자기 이상해진겁니다. 그는 서둘러 그 미술 시상식장에 도착해서 자기 차례를 앞당겨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그의 임무를 마치자마자, 단상을 간신히 내려와, 병원으로 실려갑니다. 그는 급작스럽게 경추 아래의 신경이 마비되어 꼼짝을 못하는 처지가 됩니다. 얼굴만 살아있고, 목 아래부터는 마비가 된 겁니다.  (재앙이죠). 아, 아마도 나였다면, 활발하게 잘 나가던 예술가가 어느날 이지경이 되었다면, 아마도 나라면, 그냥 콱 죽고 싶었을것 같아요... 그는 재활 훈련을 하여 가까스로 손을 조금 움직일정도로 회복했는데요, 그렇게 움직이게 된 손끝에 붓을 매달고, 고정시켜가지고는 회화 작업을 다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1988년 이후, 제가 허시혼에서 본 1994년 작품이나, 최근에 본 2006년 클린턴 대통령의 초상화의 특징이, 조그마한 모듈 (세로와도 같은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척 클로스는 마비가 된 그의 손으로 그 작은 모듈들을 하나하나 완성시키는 방식으로 작품 활동을 계속해나간거요. 어찌보면, 불구가 된 후에 그의 아이디어는 더 미친듯이 자라난것 같기도 합니다.  거의 전신마비의 경지에 이른 화가가 만들어낸 초대형 초상화, 그 초상화속에 감춰진 세포막과도 같은 작은 모듈들. 그 단세포들이 만들어낸 '인물'의 초상.

 

 

허시혼 미술관의 Roy 라는 작품을 들여다보면서, 그 네모네모속에 다채롭게 그려진 것들을 보면서, 저는 초등학교 5학년때, 처음으로 현미경속을 들여다보던 일을 떠올렸습니다.  제가 현미경을 통해 '세포'를 구경한것은 분명 초등학교 5학년 과학시간에서였습니다. 세포중에서 가장 보기가 쉽다는 양파의 속살 껍데기, 그것을 화학약품으로 처리하여 현미경에 대 놓고, 담임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차례차례 줄 서서 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현미경을 어떻게 들여다볼지 몰라서 당황하다가, 서서히 내 눈에 들어온 '세포'의 모양.  아, 세포라는 것이 이런 네모난 방 모양이구나.  이렇게 생긴거구나!  척 클로스의 '모듈'로 이루어진 초상화의 그 무수한 모듈들을 들여다보며 저는 '세포'들을 기억해냈지요.

 

 

 

척 클로스는 극히 제한된 그의 손끝의 작업으로 생명의 본질 혹은 우주의 본질에까지 다가가려 했던 것은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 작품들을 간단히 보실까요

 

 

 

 

 

 

 

1980년대: '그날' 이전의 작품들

 

 

 

Phil III, 1982, cast paper pulp

Chuck Close 1940-

2009년 12월 2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링컨 갤러리에서 촬영

작품사진 왼편에 알록달록하게 보이는 형광불빛은

백남준씨의 Electronic Highway (미국지도를 주제로 한 비디오작품)가 액자에 반사된것

사진 오른편의 알록달록하게 반사된 것은 Sean Scully의 작품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링컨 갤러리.

사진 가운데의 흑백액자가 위의 Cluck Close 의 작품 Phil III

가운데 파란 그림은 E.Kelly의 작품, 오른쪽의 대형 그림은 로젠퀴스트.

 

 

이 Phil III 이라는 작품을 저는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과 크라이슬러 미술관 이렇게 두군데서 보았습니다. 동일한 제목의, 동일한 년도에 만들어진 작품들이죠. 척 클로스가 왜 동일한 작품을 이런식으로 제작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다 수작업한 것인데요. 흑색에서 백색에 이르기까지 채도가 다른 펄프 조각을 배열하여 만든 작품으로 보입니다.

 

 

Phil III, 1982, Handmade paper

2009년 11월 29일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아래 작품은, 워싱턴의 국립 미술관 동관(East Building) 지하층의 전시실 입구 홀에 걸려있는 대형 작품입니다. 제가 적어놓았지만, 높이 260센티 폭 213센티의 초대형 얼굴이지요. 사진을 가지고 작업을 한 것이라는데, 이게 모두 척클로스가 손으로 물감을 찍어서 만든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그의 지문으로 이루어낸 대형 작품이라는것이지요. (사람이...참...별짓을 다해요~)

 

 

 

 

 

 

 

Fanny/Fingerpainting, 1885

oil on canvas

259.1 x 213.4 x 6.3 cm (대략 높이 260 센티, 너비 213 센티)

Chuck Close (1940-)

2010년 1월 16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1990년대- 현재, '그날' 이후의 작품들

 

 

Lucas/Woodcut, 1993

Color woodcut with stencil (pochoir)

2010년 1월 23일 볼티모어 미술관에서촬영. 대여하여 특별전시중이므로 다른 곳으로 옮겨갈것임.

 

이것은 기존의 척 클로스가 제작한 Lucas 의 초상화를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원작 초상화가 있습니다) 목판화 작업으로 옮긴 것입니다.

 

 

 

아래의 작품들은, 이제 척 클로스의 전형이 되어버린 세포모양의 모듈로 이루어진 초상화 작품들 입니다.

 

Roy II, 1994 Oil on canvas

259.1 X 213.4 CM

Chuck Close

2009년 9월 19일 Smithsonian Hirshhorn Museum of Art 허시혼미술관에서 촬영

 

 

 

 

 

 

 

William Jeffereson Clinton, 2006 (born 1946 )

oil on canvas

Chuck Close born 1940

http://americanart.textcube.com/348 해당 페이지

 

 

척 클로스는 아직 현역의 작가 입니다. 그의 미술 세계가 어디까지 갈지, 흥미진진하죠.

 

 

2010년 2월 9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Conceptual Art2010. 2. 11. 00:04

Serial Project, 1 (ABCD) 1966

Baked enamel on steel units over baked enamel on aluminium

50.8 x 398.9 x 398.9 cm

(대략, 4미터짜리 정사각형 위에 51센티 높이의 도형들)

Sol LeWitt 1928-2007

2009년 9월 29일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촬영

 

 

앞서서 Sol LeWitt (1928-2007) 의 페이지들을 열었는데요

 http://americanart.tistory.com/category/Conceptual%20Art

 

제가 단순히 그의 작품들을 대충 살피면서 몇가지 열거한 그의 특징들이 있었습니다.

 

1. 삼각형 (혹은 사면체), 사각형(혹은 육면체)들이 어떤식으로든 평면적으로 혹은 입체적으로 교 차한다

 2. 선과 면들이 평면적으로 어루러져서 입체감을 드러내거나, 혹은 입체면이 평면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3. 결국, 선과 선, 삼각형, 사각형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4. 단순하다 (군 말이 필요가 없다)

 5. 경쾌하다.

 6. 작가의 싸인이 없지만, 작가의 개성을 감추지는 못한다. (너무나도 개성이 돋보인다)

 

 

회화나 예술을 따로 전공하지 않는 평범한 관객의 시각에서 이렇게 눈에 보이는대로 열거를 해 본 것인데요, 어쩌면 이런것들이 솔 레윗의 평생의 예술을 대략 정리하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솔 레윗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그에 대한 설명으로 두가지가 나옵니다.

 1. 개념예술(conceptualism)이라는 '어휘'를 최초로 도입한 미국의 현대예술가다.

 2. 미니멀리즘 (minimalism) 작가다.

 

맞는것 같죠?  우리가 대충 살펴보면서 대강 짐작했던 사항들을 미술비평가들은 이렇게 두가지로 정리 해 놓는거죠: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 예술가.  예술을 '물리적인 대상'이 아닌 '아이디어' '개념'으로 시도했다는 면에서 개념예술가였던 것이고,  군말이 필요없이 단순한 형태를 추구했다는데서 미니멀리즘을 찾아볼수 있는거죠.

 

위의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된 Serial Project 관련 문건에 LeWitt 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고 합니다:

 

"The aim of the artist would not be to instruct the viewer but to give him information. Whether the viewer understands this information is incidental to the artist; he cannot foresee the understanding of all his viewers. He would follow his predetermined premise to its conclusion avoiding subjectivity. Chance, taste, or unconsciously remembered forms would play no part in the outcome. The serial artist does not attempt to produce a beautiful or mysterious object but functions merely as a clerk cataloging the results of his premise."

http://www.moma.org/collection/browse_results.php?criteria=O%3AAD%3AE%3A3528&page_number=3&template_id=1&sort_order=1  페이지에서 발췌했습니다.

 

"예술가의 목표는 관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관객에게 정보를 주는 것이다. 관객이 주어진 정보를 이해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예술가가 통제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는 모든 관객이 자신의 의도를 이해할거라고 예견해서는 안된다. 예술가는 주관성을 배제한채로 그 자신이 정한 전제가 결과에 이르도록 한다.  우연, 취향, 무의식적으로 기억된 형태들은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연작의 예술가는 아름다움이나 신비한 것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단지 그가 세운 전제의 결과들을 카탈로그로 만드는 직공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런데 솔 레윗을 미니멀리스트라고 부르지 않고 개념주의 예술가로 칭하는 이유는, 개념주의가 미니멀리즘보다 한 발 더 앞으로 나간 개념이라서 그럴것입니다.  미니멀리즘이 감정이 분출하는 군더더기들을 배제하고 극단적인 사물의 고유의 형태을 향해 나아갔다고 정리한다면,  개념예술은 이러한 미니멀리 즘적 예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술가의 '아이디어' 자체를 예술이라 보고, 그 아이디어가 시각적인 혹은 물리적인 것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에 개입되지 않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미니멀리스트가 자신의 작품을 직접 제손으로 제작했다면, 개념예술가들은 '아이디어'만 제시할뿐 내 손으로 만드는 행동조차도 배제하러 들었다는 것이지요.  위에 솔 레윗이 적은바와 같이 예술가 자신의 취향이나 우연성, 주관성등을 작품에서 배제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카탈로그'를 만드는 직공에 자신을 비유 한 것입니다.

 

"the idea itself, even if not made visual, is as much a work of art as any finished product." (Pohl, 2008, pp 495)

"비록 시각적으로 구체화되지 않는다 하더도,  아이디어 자체는 완성된 작품과 마찬가지의 작품이다." 이 말은 솔 레윗의 1967년 발언이라고 하는데요,  앞서의 페이지에서 본 것처럼 솔 레윗은 '작품에 대한 지시'만 한장 적어서 보내는 것으로 작품 활동을 했쟎아요 (작곡자의 악보처럼). 이에 대한 그의 설명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작품에 대한 지시사항, 그것이 완성된 작품과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지요.  때로는 그것이 구체적인 결과물을 낳지 못할때도 있지만 말이지요. (악보가 있는한, 그 음악은 언제든지 연주가 가능한거쟎아요.)

 

 

개념주의(Conceptualism)는 네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1. 예술작품은 아이디어나 컨셉(개념)이지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다.  예술작품을 형성하는 아이디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술작품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 자체를 시각적으로 보지 않아도 예술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다. (뭔 소리다냐? 할수도 있죠. 동의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 RedFox)

 

2. 개념예술에서 예술작품과 언어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집니다. 예술작품을 '아이디어'로 정의하므로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지요. '아이디어'는 언어로서 구체화 되는 것이므로.  솔 레윗이 그의 '아이디어'를 종이위에 몇줄의 문장으로 끄적거려주면, 그 지시사항에 따라서 누군가가 예술작업을 하지요 (우리가 그 지시사항대로 작업을 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솔 레윗과  그 작업을 하는 '나'의 해석이 이 예술의 본질을 구성하게 됩니다. 작가와 나와 아이디어의 결과물을 연결해주는 것은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 언어'죠.

 

3. 개념예술은 예술의 상업성에 비판적 시각을 견지합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예술은 돈많은 사람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오죽하면 '플란더스의 개'에서 얘기했듯, 가난뱅이는 그 잘난 예술 작품을 '구경'하기도 어려웠겠습니까.  대우그룹의 총수였던 김우중씨가 세계적인 콜렉터였다고 하는데요, 그분이 나라에 갚아야 하는 빚이 엄청나다는데요, 미술 경매인들이 김우중씨 몰락했다고 하니까, 그 미술품좀 시장에 내 놓으라고 회유를 했다는데, 그래도 그는 꿈쩍도 안 했다고 합니다.  저는 다른 정치적인 논의를 할 생각은 없고요, 이게 무슨 말인가하면, 예술이 '아름다움'이네 '인류 문화'어쩌네 해봤자, 이게 언제부터인가 돈놓고 돈먹기식의 축재수단, 투자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아이오와 주립대가 2007년 홍수로 물에 잠겼을때,  그 대학 미술관 소장품이었던 잭슨 폴락의 작품을 팔아서 미술대를 살리자는 의견도 나왔다고 하쟎아요.  작품 하나 살리면 대학 살림이 피는거죠. 이게 다 뭐란 말입니까? 정말 한장의 그림에 그러한 가격이 매겨지는 것이 합리적인 것일까요?  단지 잭슨 폴락의 싸인이 들어있으면 걸레쪼가리도 비싼값에 팔려나가고, 뭐, 이게 온당한걸까요?   개념예술가들은 바로 이런 현상에 강한 물음표를 제기하는거죠.  작곡자의 '악보'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연주되쟎아요. 그 악보를 누군가 혼자서 독점 할수는 없는거죠.  개념예술가의 '아이디어'역시 누군가가 독점을 할수는 없는거죠.  이들의 아이디어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4. 물리적으로 만들어진 예술작품보다 그 작품의 '아이디어'를 더 중시한 개념예술가들은 예술작품의 소유가 불러오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서도 비판적입니다. 3번과 같은 맥락인데요, 미국에서도 그랬고, 현재 세계여러나라에서, 사람들이 돈 좀 벌면, 작품 사들이죠. 마치 우리가 보통 고급 학력으로 자신의 포장하듯, 가질거 다 갖추고 돈이 너무 많아서 골치 아픈 사람들이 가는 곳이 미술품 시장인데요, 그래서 대개 재벌집 여사님들이 고급 옷으로 치장을 하고 보석도 모을만큼 모은 다음에 서로 누구네집에서 뭐 사들였다더라 경쟁하듯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들을 수집하쟎아요. 제가 미국에서 돌아다니면서 구경한, 재벌들의 후원으로 세워진 박물관의 소장품들이 따지고 보면 다 서로 이렇게 경쟁하고 뭐 그런 결과인데요. 예술작품에 대한 이해보다는, 누가 누구의 것을 몇점이나 가졌다더라 식의 악세사리로서의 예술품. 혹은 끼리끼리 사이에서 '없으면 지는거다' 라던가 '너는 피카소 없지? 난 피카소가 열점이나 있단다'식의 문화 권력 놀이. 이런 현상에 대해서 이들은 비판적이었습니다.

 

 

솔 레윗(1928-2007)은 러시아 출신의 유태인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고향은 커넥티컷주의 하트포드시. 한국전에도 참전했던 사람입니다. (아, 한국하고도 인연이 있던 분이군요...) 1960년대에 Jasper Johns, Robert Rauchenberg, Frank Stella 등과 어울리며 활동을 했습니다. (쟁쟁한 이름들이지요!)  예술에서 Conceptualism (개념주의)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입니다. 제가 앞서서 소개한 그의 작품들이 대개 그의 개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들입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가서 찍어와야 할 작품이 있는데, 나중에 업데이트해드리겠습니다.

 

 

개념예술은...제가 잘 모르던 분야였는데, 이것에 대해서 공부하면 할수록, 이것참, 혁명적인 아이디어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술의 권력화...이것은 사실은 예술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것이쟎아요.  2002년에 사망한 프랑스의 사상가 브르드외가 프랑스 시골출신의 수재가 1960년대에 파리에서 공부하면서 발견 한 것이 언어/문화의 권력화 현상이었거든요. 문화가, 혹은 언어가 '차별'의 수단이 되고, 문화/언어가 사회적 권력의 수단이 되더라는 것을 이 촌뜨기 수재 청년이 직시하고 직감했는데요.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솔 레윗이라는 러시아 유태인계 이민자의 아들도 '미술'이 미술의 본질에서 벗어나 상업주의와 결탁하고, 미술품이 권력의 악세사리가 되는것을 문제시한 것이지요. 각기 다른 대륙에서, 각기 다른 분야에서, 비슷한 연령의 청년들이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세상과 부딪쳐 나간것도 같군요.

 

 

사실 저 위에 제가 올려놓은 작품 사진, 저 사진 찍을때, 저는 솔 레윗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요즘 솔 레윗 들여다보다가 문득, "아, 전에 이 사람 이런 작품 어디서 봤는데..." 하다가 찾아보니 나오더라구요. 지금은 저 작품이 왜 저기 놓여있는지, 저것이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인지 대충 알지요.  아이고, 아는만큼 보이는거죠...

 

 

 

 

 

참고자료:

 

http://www.moma.org/collection/browse_results.php?criteria=O%3AAD%3AE%3A3528&page_number=3&template_id=1&sort_order=1

 

Frances K. Pohl (2008),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New York, NY: Thames & Hudson

 

Stephen Little (2007). ...isms: Understanding Art.New York, NY: Universe Publishing

 

 

Posted by Lee Eunmee
Conceptual Art2010. 2. 10. 13:10

2009년 9월 19일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촬영

 

2009년 가을, 햇살 좋던날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갔었지요.  사실 저는 여기서 앤디 와홀의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비극의 주인공 재클린이 보이지요.

 

 

 

2009년 9월 19일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촬영

 

그런데 재클린의 푸른색의 비극이 보이던 건너편에, 이번에는 불길한 붉은색, 푸른 색조의 뭔가가 보이는겁니다. 다가가서 보니 역시 앤디 와홀의 '전기의자'였습니다. 사형수들이 앉는다는 전기의자 말이지요.  재클린의 비극만큼이나 이 전기의자, 불길하죠...  불길한데, 충격적이죠.  그리고, 사람들은, 어떤 '충격'에서 쾌감을 느끼기도 하지요. (사람, 참 복잡해요...).

 

그렇게 제가 '앤디 와홀'님의 불길하고 충격적인 작품에 눈독을 들이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 이 파란 천장입니다. "뭐냐 이거, 동그라미, 세모, 네모, 가위표 다 있네 이거...천장에다가도 별 짓을 다 했어요..."  뭐 별일이다 싶어서 사진도 찍고, 그렇게 그냥 지나쳤던 것인데요.

 

 

 

 

 

Wall drawing #351, 1981

Chalk and latex paint on plaster

 

On a blue ceiling, eight geometric figures: circle, trapezoid, parallelogram, rectangle, square, triangle, right triangle, x.

 

Sol Lewitt (1928-2007)

2009년 9월 19일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촬영

 

 

벽화 351번으로 알려진 이것은 1981년작 입니다.  물론 이 천장화를 그리기 위해서 솔 레윗이 직접 미술관에 온것은 아닙니다. 그는 그저 그의 '지시 노트'만 보냈을 뿐입니다.

 

파란색 천장에, 여덟가지의 기하학적 도형: 동그라미, 사다리꼴, 평행사변형,  직사각형, 정사각형, 삼각형, 정삼각형. 가위표.

 

 

솔 레윗의 지시에 따라서,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어느 돔형 천장에 이런 천장화가 완성되었고,  그렇게 천장화가 탄생했습니다. 솔 레윗은 작업을 감독하러 나타나는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은 솔 레윗이 이탈리아의 아씨씨(Assissi) 지방에 있을때 창작해 낸 것이라고 하지요.  돔형 천장은 르네상스기의 성당 천장을 연상시키지요.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성당 벽화도 이런 둥근 천장에 그려진 것이지요. 르네상스기의 천장과 21세기의 개념미술이 만나면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천장화와 같은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지요.

 

제가  이전 페이지를 통해서 솔 레윗의 작품 사진을 올리고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런데, 미술 미평책을 들여다 볼 필요도 없이,  솔 레윗의 작품들을 그냥 시대 무시하고 주루룩 살펴보니 이들이 갖고 있는 어떤 속성이 보입니다.   어느 시기의 어떤 형식의 작품이건 간에 솔 레윗의 작품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면들은:

 1. 삼각형 (혹은 사면체), 사각형(혹은 육면체)들이 어떤식으로든 평면적으로 혹은 입체적으로 교차한다

 2. 선과 면들이 평면적으로 어루러져서 입체감을 드러내거나, 혹은 입체면이 평면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3. 결국, 선과 선, 삼각형, 사각형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4. 단순하다 (군 말이 필요가 없다)

 5. 경쾌하다.

 6. 작가의 싸인이 없지만, 작가의 개성을 감추지는 못한다. (너무나도 개성이 돋보인다)

 

그러니까, 이 솔 레윗의 개념미술 작품의 재미있는 점이 뭔가하면, 작가가 작품에 직접 개입하지도 않고 악보 던져주듯 개념만 던져주는 식으로, 자신의 창작품에서 한발짝 물러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고안해낸, 혹은 개념화한 작품은, 그 사람의 스타일을 고스란히 전달하면서 작품 자체가 그 사람의 시그니처 (signature)가 되더라는 것이지요.

 

이런 현상을 놓고, 우리의 소비 행태를 생각해보면요,

 

가령, 청소년들이나 젊은이들, 혹은 이제 명품에 눈을 뜬 사람들은 - '나는 명품이오'하는 물건들을 삽니다. 가방에 그 회사의 상징 무늬를 크게 새긴다거나 혹은 무늬가 확실히 눈에 띄는 브랜드의 물건을 사지요. 멀리서만 봐도, 그 무늬만 봐도 이것이 얼마나 비싼(!) 물건인지 알아봐줘야 하는거죠.

 

그런데, 웬만한 명품브랜드들을 섭렵했거나 혹은 돈이 지천으로 깔려서 딱히 돈 많다는것 티 낼 필요도 없는 진짜 선수들...이런 선수들은 '눈에 띄는 브랜드'를 잘 안쓰죠.  오히려 브랜드가 뭔지 도무지 짐작이 안되는 물건들을 두르고 돌아다닙니다. 헤헤헤.

 

개념미술 작품에는 작가의 서명이 없습니다. 하지만, 알만한 '선수'들은 서명도 없는 그 '명품'을 알아보고 잘난척을 하지요.  사실 아무런 표시를 안해도, 어떤 물건의 '개성' 자체를 감추기는 힘들지요. 솔 레윗이 작가 싸인을 안해도 그 작품 자체가 작가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개념미술 작가들은 '작가'가 '작품'에 개입하는 것에 의문을 품고, 작가가 작품으로부터 한발 떨어지는 시도를 했지요만,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작품 자체가 갖는 작가 고유 컨셉의 정체성은 작가에게서 아주 분리될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페이지에서 Sol LeWitt 의 예술, 그리고 개념 미술이 무엇인지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2010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Conceptual Art2010. 2. 10. 11:40

 

 

2010년 1월 20일 National Gallery of Art, Sculpture Garden

 

 

건널목 너머로 보이는 것이 워싱턴 디씨 내셔널 몰에 있는 국립미술관의 야외 조각공원입니다.  제가 사진을 찍는 이쪽은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의 서관(서쪽 건물) 앞이지요.  저만치에 워싱턴 마뉴먼트가 보이지요.  은색 밴이 서있는 뒷쪽으로 보이는 세모모양이 솔 레윗의 '피라미드' 작품이 있는 조각공원 입니다.  이 조각공원의 중앙에 분수대(연못)가 있고요. 봄, 여름, 가을에는 분수가 피어오르지만, 겨울에는 이곳이 스케이트장이 되지요.

 

조각공원을 지나 계속 가면, 자연사 박물관 (Smithsonian Museum of Natural History)이 나오지요.  그 자연사 박물관 입구에는 화석처럼 변한 아주 오래된, 거대한 나무형상이 있고요, 그리고 쇠가 중간중간에 무늬를 이룬 아주 오래된 쇠바위가 입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자연사 박물관...의...소장품들은...지구가 만들어낸 예술품들이지요.  그리고 그 예술품을 가장 잘 안내할수 있는 사람은, 과학자들이지요. 

 

 

 

 

 

 

 

Four Sided Pyramid (4면의 피라미드)

First Installation 1997, Fabricated 1999

Concrete Blocks and Mortar

458.2 x 1012.2 x 970.9 cm

 

 

자, 여기 솔 레윗의 피라미드 뒷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국립 미술관 서관(West Building)입니다.

 

 

2010년 1월 20일 촬영

 

 

 

그러니까, 저의 극히 개인적인 취향인데, 저는 로댕 이외의 조각가나 조각작품에 대해서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요.  오죽하면 제가 '미국미술' 블로그를 열어놓고서는 평면적인 회화만 들여다보겠습니까.  저는 조각작품에 대해서 그냥 별 관심을 못 느낍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 조각공원을 오가며 들를때에도 그냥 상식차원에서 부르조아의 거미라던가, 리히텐스타인의 작품을 쓱~ 보고 지나치는 정도였고요, 특히나 이런, (혹은,...이따위)  블럭으로 세워놓은 피라미드 따위, 관심도 없었다고 봐야지요.  헤헤헤.

 

 

그런데요, 제가 2010년 1월에 국립미술관 동쪽 빌딩에 있던 솔 레윗의 작품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난 후에, 며칠후에 이 조각공원 앞을 지나치는데, 이 피라미드가 눈에 띄는겁니다.  그리고는, 거의 본능적으로 혼자서 중얼거렸던 것이지요. "저거, 저거..저것은...솔 레윗인가봐..."

 

역시나, 다가가서 확인해보니 솔 레윗의 작품이었던 겁니다.

 

 

저는 사실, 이것을 보고 나 자신이 왜 솔 레윗을 떠올렸던것인지도 스스로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솔 레윗의 어떤 본질을 파악하고 나자, 길거리에 서있던, 내가 무시하고 지나치던 이 피라미드가 문득, 소리를 내는 겁니다.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그래서 저절로 알아지는거죠. 

 

제가 http://americanart.textcube.com/371  페이지에서, 허시혼의 벽화를 통해 솔 레윗의 매력을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적은 적이 있는데요. 사각형 안의 삼각형. 2003년 작품. 사실 이것은 어찌보면 피라미드이지요.  그리고 조각공원의 사면체 피라미드 작품은 1997년 작품인데요. 이 두 작품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요, 두 작품 모두 '피라미드'를 표현한 것인데, 하나는 색깔로, 하나는 입체로 표현한 것이죠. 두가지 모두 사각형과 삼각형의 조화라는 면에서는 상통하죠.  그러니까, 제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허시혼 벽화에 햇살처럼 표현된 피라미드 형상을 기억하던 저는, 솔 레윗에 대해서 좀더 알게 된 후에, 길거리에서 이 피라미드를 보면서, 부지불식간에 이 조각물의 정체를 파악한거겠지요.

 

'부지불식'이라는 표현이 있쟎아요.  이것을 인지심리학적으로 풀이하지면 '암묵적 지식'이지요. 내가 안다고 인지하지도 못하면서 알고 있는 상황.  나는 허시혼의 솔 레윗 벽화와  조각공원의 솔 레윗 피라미드를 의식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했지만, 암묵적으로 파악을 한거죠.  (사람의 인식 체계는 우리 자신이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신비하기까지 해요.)  그래서 '저것은 솔 레윗인가봐'하고 다가가서 확인해보는 순간, 아, 솔 레윗이었던거죠.

 

 

그런데요,  무조건 '감'으로만 무엇을 파악하는것으로 끝내서는, 지식의 탑을 세울수가 없지요. '감'이 맞아떨어질때, 혹은 막연히 무언가를 느끼거나 안다고 생각할때, 그때 우리는 논리적인 자세로 '공부'를 해야 하지요.  수업중에 저는 종종 "지금 그 개념을 당신의 언어로 설명해보라"고 요구할때가 있습니다.  학생들은 대개 얼버무리며 "알지만 설명을 못하겠다"고 하지요.  "알면 왜 설명을 못하는가? 설명을 못한다면 당신은 정확히 안다고 할수 없다"고 저는 좀 쌀쌀맞게 대응하는 편입니다.  대충, 아는척 하지 말라는 주문인 것이지요.  뭔가 희미하게 파악은 하되, 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면, 안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학교에서는 학문을 해야 하므로.   그렇지만, 제가 어떤 사람의 '감'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암묵적인 어떤 인지 과정이 분명 있지요.  그런데 학문에서는 이것을 구체화하고 논리화해야 하는 것이지요.

 

평소에 무심코 지나치던, 별 재미 없어보이던 '피라미드'가 갑자기 눈에 들어오고, 어떤 감이 잡힐때, 내가 저절로 무엇을 알게 되었다는 것에 흥분하고 기뻐하는 것도 좋지만, 어떻게 해서 나는 그것을 저절로 알게 되었을까?  파악해보려는 노력도 필요하죠.  음, 그것이 제가 사는 방식인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처럼 그렇게 앞뒤 논리를 따져보고 그래야 해?  그것이 과학적이기나 한거야?  이런 반론을 제기 하고 싶은 독자도 있으실겁니다.  모든 사람이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그냥, 그것이 제가 사는 방식이라는 것이지요. 모두 다 똑같다면 이세상 사는 재미가 없겠지요.)

 

 

 

솔 레윗이 그렇게 제게 다가와 둥지를 틀었습니다.

 

 

2010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Conceptual Art2010. 2. 10. 10:43

(사진에서 왼쪽의 벽)

Wall Drawing #65,

Lines not short, not straight, crossing and touching, drawn at random using four colors, uniformly dispersed with maxim density, covering the entire surface of the wall.

First installation, 1971

 

red, yellow, blue, and balck color pencil

2001.9.25.

 

Drawn by Hidemi Nomura, Kalisma, Kristin Holder, and Kathryn Morales

 

(번역)

 

벽화 65번

선은 짧거나 직선이어서는 안되며, 서로 교차하고 닿아야 한다, 네가지 색깔로 무작위로 그려야 하며, 벽 전체에 걸쳐서 최대한 조밀하게 그러나 균등하게 분포해야 한다.

최초의 설치는 1971년에 있었다.

 

빨강, 노랑, 파랑, 검정 색연필이 사용되었다.

2001년 9월 25일 작업하였다.

 

작업자는 히데미 노무라, 칼리스마, 크리스틴 홀더, 캐스린 모랄레스.

2010년 1월 16일 워싱턴 국립 미술관 동관 (East Building, National Gallery of Art)에서 촬영

 

 

 

 

 

워싱턴의 국립 미술관 1층 (혹은 지하층)의 현대미술관에서 발견한 솔 레윗의 작품입니다.  그런데요, 사람들은 이것이 '작품'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그냥 지나갑니다. 제가 함께 갔던 동행에게 물어봤거든요, "솔 레윗의 벽화, 봤어?"   대체로... 몰라요... 몰라도 문제 될 것은 없죠. 어차피 모르고 지나가는거니까요.  사람들이 작품 앞에서 기념사진 찍고 그러거든요. 이 앞에서는 안찍어요.  그냥 '벽'처럼 보이니까요.  그런데 이 벽을 들여다보면 색연필로 이러한 낙서를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솔 레윗의 작품입니다. 그냥 평범한 벽처럼 보입니다. (아는 사람 눈에만 보여요~)  (아니, 사실 벽 구석에 자그마한 이름표가 붙어있으니까 들여다보면 이것이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러니까,  미술가 솔 레윗 (1928-2007)은  위에 제가 대충 번역한 분홍색 '지시사항' 이것만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만을 창조해 낸 것이지요. 그리고, 이 개념을 바탕으로 정말 이 벽화의 작업을 한 사람들은 히데미, 칼리스마, 홀더, 모랄레스 이렇게 네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2001년에 바로 이 벽에 바로 이 미술 작업을 하던 이 네사람이 하루종일 무엇을 했는지 관찰을 했다는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거든요.  그냥 미술학도로 보이는 네 사람이 오전에 나타나더니, 하루종일 네자루의 '색연필'을 가지고 이 벽에 이런 '낙서'를 했대요. 그리고 저녁때가 되자 작업을 모두 마치고는 손을 털고 자리를 떠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벽화의 원작자로 알려진 솔 레윗 (1928-2007)은 워싱턴에 나타나지도 않았고요, 솔 레윗의 지시사항과 네가지색 색연필만 가지고 나타난 네명의 사람들이 (아마도 솔 레윗의 문하생이거나, 뭐 미술학도들 이었겠지요) 미술관에 나타나서 온종일 지시사항대로 작업을 하는 것으로 이 벽화는 탄생했고,  미술품의 값은 솔 레윗이 챙겼겠죠 :) 헤헤.

 

이는 마치, 작곡자가 오선지위에 음표로써 음악을 창조해 내면, 연주자가 그 악보를 바탕으로 연주를 하는 식인거죠.  작곡자가 반드시 연주까지 할 필요는 없는거쟎아요.  연주는 연주자가 하는건데, 연주자의 역량에 따라서 아름다운 음악이 될 수도 있는거고, 괴상한 음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베에토벤의 교향악 악보는 동일하겠지만, 그것을 해석하고 연주하는 방식은 조금씩 차이가 나쟎아요.  지휘자에 따라서 교향악단의 역량이나, 그날의 분위기, 청중의 반응, 혹은 개별적인 연주자의 그날의 상황에 따라서 그 음악은 천상의 하모니가 되기도 하고,  들어주기 괴로워서 중간에 모두들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불협화음이 될수도 있고요.  솔 레윗의 미술은, 작곡자의 악보와 같았던 것이지요. 연주자의 변수를 인정해주되, 악보는 영원한거죠.  이런식의 회화에 대한 시각은, 이전의 전통적인 회화, 미술에 대한 시각과는 조금 차이가 나죠?

 

예, 그래서 이런 식의 예술을 개념 예술 (Conceptual Art)이라고 하는데, 솔 레윗이 이 '개념 예술'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예술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요,  우리들도 솔 레윗의 '지시사항'에 따라서 네자루의 색연필을 잡고 작업을 하여 우리의 방 벽 일부를 꾸몄다고 한다면, 우리는 솔 레윗의 벽화를 우리식으로 '연주'해 낸것이지요.  별거 아닌거같죠? 사실 별거 아닐수도 있는데요. 그 별 것 아닌 것을 '처음' 생각해 낸 것 자체는 참 별스러운 것이었죠.  그렇죠?  콜롬부스의 달걀이죠.  별것 아닌데, 그 사람이 그걸 생각해낸거죠...

 

 

 

 

 

Objectivity, 1962, oil on canvas

127 x 127 x 24.8 cm

2006년 1월 16일 National Gallery of Art, East Building 에서 촬영

 

 

 

 

 

 

 

Wall Drawing #681 C:

A wall divided vertically into four equal squares separated and borderd by black bands. Within each square, bands in one of four directions, each with color ink washes superimposed. 1993.

(벽은 네개의 정사각형과 검정 선으로 분할된다. 네개의 정사각형 내부는 각기 네가지 방향중의 한가지를 택하여 색깔막대를 채운다. 색깔 잉크들은 겹쳐진다.)

Colored ink washes

image (size of installed drawing): 1127.8 x 304.8 cm (대략 11미터 x 3 미터)

Sol LeWitt 1928-2007

2010년 1월 16일 National Gallery of Art, East Building 에서 촬영

 

즐겁죠?  이런 작품을 보면 '명랑'이란 어휘가 생각나요. 기분이 아주 명랑해져요.  저절로 웃음이 나요.

 

 

'지시사항'을 솔 레윗이 적을때, 그의 머릿속에는 어떤 이미지가 있었던 것일까요? 그가 머릿속에 떠올린 이미지와, 이 지시사항대로 어떤 다른 사람이  작업을 한 결과는 일치하는 것일까요?  작업을 한 사람은 어떤 의도를 갖고 작업을 했을까요?  그리고 이 작품앞에서 희희낙락 유쾌하게 사진을 찍는 내가 이 작품을 해석하는 방법과, 작업자의 의도와,  이 작품의 설계자(솔 레윗)의 의도는 일치할까요?  아닐걸요.  솔 레윗도 예술 작품의 이러한 한계, 이러한 속성을 꿰뚫어본것이겠지요.

 

 

2010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Conceptual Art2010. 2. 10. 07:15

 

이미지는 클릭하면 커집니다.

 

2009년 9월 24일 스미소니안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워싱턴 디씨에는 참 매력적인 장소가, 많지요.  '제국'의 행정수도답게 모든 국립 박물관들을 무료로 개방해 놓고, 아무나 편히 느나들라는 여유를 부리는 덕에, 차비만 있으면 사실 일년 내내 백수질 하면서 쏘다닌대도 싫증이 안날만한 곳이지요.  워싱턴 디씨의 이런 무료입장 가능한 박물관들 중에서, 제가 열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좋아하는 장소가 바로 이곳, Hirshhorn 미술관안에서도 바로 이곳이지요.

 

이곳이 들어서면 개념미술 (Conceptual Art)의 창시자로 알려진 Sol Lewitt 의 큼직한 벽화가 그려져있고, 그리고 중앙에 전망좋은 유리벽과, 앉으면 침대처럼 편히 뒤로 젖혀지게 되는 무지무지 푹신하고 편안한 소파가 있지요.  이 소파의 품에 기대어 유리벽 밖을 내다보면 워싱턴에서 가장 아름다워보이는, 내셔널몰의 아름다운 박물관 건물들이 줄지어 보이지요.  자연사박물관도 보이고.  뭐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허시혼을 지나칠때면, 그러다 잠시 그곳에 들를때면, 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윗층으로 이동하여 전시장 한바퀴를 빙 돌다가 이 푹신한 소파에 기대누워서 긴 한숨처럼 다리를 펴고 창밖을 내다보기를 좋아하지요.

 

 

 

 

Wall Drawing #1113: On a wall, a triangle within a rectangle, each with broken bands of color 2003, acrylic

Drawn by Patrick Burns, Stevens Jay Carter, Larry Colbert, Megan Dyer, Joy Hayes, Thomas Ramberg, and  Michelle Talibah

 

Sol LeWitt 1928-2007

2009년 9월 24일 스미소니안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이 그림의 작가가 Sol LeWitt 이라는 사람인데요,  이 사람 이름 Sol 을 말할때마다 '햇님'을 연상하게 됩니다.  오 솔레 미오 - 오 밝은 태양 너 참아름답다!  우리가 고등학교때 '필수적'으로 불렀던 이탈리아 가곡 오 솔레미오에서 그 솔이 햇님이라쟎아요.  그래서 솔~ 하면 눈부신 햇님이 연상이 되는거지요.  하필, 제가 솔 레윗이라는 작가의 존재에 대해서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된 작품도 바로 이 작품, 햇살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이리저리 반사하는 색채같은 이 눈부신 작품이거든요.  이 작품과 솔 레윗이라는 이름이 참 잘 어울려요. 

 

 

작품 제목이 길죠. 벽화 번호 1113. 사각형 안에 삼각형. 각 삼각형은 끊어진 색깔막대로 이루어져 있음. 말하자면 이것이 제목이기도 하고, 그리고 이것이 이 작품의 '개념'이기도 해요.  제목 아래에 Drawn by ... 아무개들이 그렸다는 메시지가 적혀 있지요.  그러니까 이 작품의 개념(제목, 지시사항)을 만들어낸 작가는 솔 레윗이고, 이 개념에 따라서 직접 벽화작업을 한 사람들은 바로 저기에 이름적힌 저 사람들이지요. 작가가 직접 와서 그림을 그리고 칠을 한것이 아니고, 작가는 '개념'만 적어줬고,  그걸 저 사람들이 와서 지시사항대로 구현해 낸 것이지요.  작가는 손하나 까딱 안했다구요.  이 작품에는 솔 레윗의 싸인도 없고, 그의 흔적도 찾아볼수 없어요.  단지 작품이 거기 존재할 뿐이죠.  이것이 말하자면 '개념미술'의 성격입니다.

 

 

 

 

 

Wall Drawing #356BB: Cube within a cube 2003, acrylic on wall surface

Drawin by Patrick Burns, Stevens Jay Carter, Larry Colbert, Megan Dyer, Joy Hayes, Thomas Ramberg, and  Michelle Talibah

 

Sol LeWitt 1928-2007

2009년 9월 24일 스미소니안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2009년 9월 24일 스미소니안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2009년 9월 24일 스미소니안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2009년 9월 24일 스미소니안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이곳은 제가 워싱턴 디씨에서 좋아하는 장소중에 열 손가락 안에 꼽는 곳입니다. 이 소파에 기대 앉으면, 참 푹신하고 편안하고 좋아요.  게다가 사람도 별로 안오는 곳이라서 하루종일 이대로 있을수도 있어요.  이곳에 누군가와 함께 와 본적은 없습니다. 어쩐 일인지 이곳에 오게 될땐 늘 혼자였습니다.  이곳은 워싱턴을 겉핥기로 하루이틀에 지나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는 편입니다.  그러니까, 아는 사람만, 한가로운 사람만, 백수만, 심심해 미치겠는 사람만 오는 곳이지요. 이곳에 들어서면 오늘처럼 흐리고 눈이 뿌리는 날에도 햇살이 쨍쨍 내리 쬐는 기분이 들것입니다. 솔 레윗의 그림이 있으니까.

 

 

2010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10. 2. 10. 03:47

Mississippi Boatman 1850, oil on canvas

George Caleb Bingham (조지 케일럽 빙엄) 1811-1879

 

 

 

 

조지 케일럽 빙엄(1811-1879)는 버지니아주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지만 아버지의 투자 실패로 삶의 근거지를 중서부 미조리주로 옮기는데 성년이 되어 유럽을 여행한 것을 제외하고는 미주리주에서 평생을 지내게 됩니다.  빙엄은 뒤셀도르프에서 미술 수업을 한적도 있지만, 이는 그가 성년이 된 후에 후원을 입고 뒤늦게 수업을 들은 셈이고, 미술사가들은 빙엄을 '독학 (self-taught)'하여 입신한 화가로 평가하는 편입니다.  그러니까, 어릴때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스스로 그림을 익혔는데, 그의 그림에 대한 평가가 좋아지고 그의 입지가 단단해질 무렵에 그에게 그림 수업을 받을 기회가 주어진 것이지요.

 

빙엄은 목공예 기술을 익힌적도 있는데 그러면서 회화에 눈을 떴으리라 짐작하게 됩니다. 그보다 한세대 먼저 펜실베니아에서 활동했던 '평화의 왕국'의 화가 Edward HIcks 가 마차 장식이나 표시판 기술자로 일하면서 스스로의 화풍을 익히면서 퀘이커 교도로서 설교를 하러 다니기도 했었는데요, 빙엄 역시 목공예를 하면서 미술 작업을 하는 틈틈이 법률가가 될것인지  목사가 될것인지 고민을 하기도 했고요, 설교를 하러 돌아다니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변호사도 목사도 되지 않았고 초상화 주문을 받아 그려주는 것으로 생계를 해결하게 되었는데요.  정작 그의 예술성이 인정을 받게 된 분야는 그가 미조리주, 미시시피강변의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풍속화에서였습니다.

 

 

빙엄이 즐겨 그린 '미시시피강변의 사람들' 소재가 위의 그림에서도 나타나는데요.  미시시피강은 북미에서 가장 긴 강이지요. 미국의 중앙 북단에서 흘러내려 뉴올리안즈까지 이어지는 대동맥과도 같은 강입니다. 저는 뉴올리언즈에서 본 미시시피강 하구의 증기선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허클베리핀의 모험을 쓴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회고록 Life on the Mississippi (1883년 출판)을 대학 시절에 읽은 기억이 납니다. 마크 트웨인이 어린시절 증기선을 타고 미시시피강을 오르내리던 기억을 담은 이야기들인데요.  그의 '허클베리핀의 모험'에서도 뗏목을 타고 흑인노예 짐과 함께 강을 따라 이동하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저에게 미시시피강은 '마크 트웨인'의 책속에 흐르는 강이지요. 그래서 빙엄의 미시시피강 연안의 풍경을 볼때도, 허클베리핀의 모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아이들, 악당들, 우매한 군중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림속의 미시시피 보트맨은 아마도 그가 배로 운반한 물건들을 강변에 부려놓고 짐을 지키고 앉아있는 것 같죠. 그의 등뒤로 강가에 대어놓은 그의 납작한 배가 보입니다.  풀기라고는 없는 그의 옷처럼, 이제 젊음이 지나가버린 이 늙수그레한 사나이는 곰방대를 빨면서 관객을 응시하고 있는데요. 이 사람이 앉아서 쳐다보는 방향은 강의 상류일까요, 하류 일까요? 

 

저는 이 그림속의 시각이 오후 네시쯤의 황혼이 다가오는 시각이라고 봅니다. 분위기상.  그런데 햇살이 이 사람의 오른쪽에서 비치지요. 해가 서쪽에 있고, 오른쪽이라면, 이 사람은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지요. 미시시피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니까, 이 사람은 상류에서 내려와서 짐을 내리고 남쪽을 향해 한가롭게 앉아있다고 봐야겠지요.   내일쯤, 이 사람은 그의 자그마한 배에 새로운 짐을 싣고 북쪽으로 올가가겠지요. 이 사람의 그림에서 저는 왜 황혼을 읽는 것일까요?  빛의 분위기가 어쩐지 황혼을 닮았지요. 이울어져가는 태양의 기운 잃은 노란색, 그 노란 색조가 화면 전체를 압도하지요.  곰방대를 물고 있는 사나이의 표정도 기우는 해처럼 무심하죠. '노스탈지아 nostalgia'의 색은 무슨 색일까요?  빙엄의 그림을 보면 노스탈지아의 색은 '노란색'인것 같습니다.

 

이 그림은 1850년에 그려졌는데요, 1850년 당시만해도 미시시피 강에 뗏목이나 자그마한 배들이 여전히 운행을 하긴 했지만, 강의 운송수단의 대세는 증기선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노를 저어 운송하는 수단은 이제 사양의 길로 접어들었거나, 혹은 찾아보기가 드물어졌다고 하지요.  빙엄은 말하자면, 사라져가는 혹은 사라진, 풍경을 담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사라지고 이울어져가는 풍경을 담았던 빙엄은 미국 미술사에 '오래' 남게 된 것이지요.

 

빙엄은 풍속화, 초상화, 그리고 몇점의 역사화들을 남겼는데, 기록에 따르면 빙엄의 작품은 '모두' 미국에 있다고 합니다. 해외의 소장자가 없다고 해요.  해외에 안 알려진 화가라는 얘기죠.  워싱턴에서도 그의 작품의 수가 극히 미미하거니와 전시장에서 찾아보기도 힘듭니다.  그의 활동 기반이 미조리주였기 때문에 미조리주에 그의 작품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그의 걸작이 있다는데요, 가서 보고 와야지요.

 

 

 

 

아래의 그림은 버지니아 남단 해변도시에 있는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발견한 빙엄의 역사화입니다.  델러웨어강을 건너는 조지워싱턴을 그린것입니다. 뒤셀도르프에서 함께 수학하기도 했던 미국화가 Emmanuel Leutze 가 1851년에 그렸던 동명의 작품과 매우 흡사한 구도인데요,

 

Washington Crossing the Delaware, 1856-1871

oil on canvas, 146 x 93 cm

George Caleb Bingham 1811-1879

2009년 11월 29일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http://americanart.textcube.com/190

 

 

Emmanuel Leutze, Washington Corssing the Delaware 1851

 

 

이 그림의 제작년대가 1856-1871까지 표시가 되어있지요. 작품을 완성하는데 무려 15년이 걸렸다고요. 그 사연인즉, 빙엄이 이 그림의 초안을 잡아놓고 미조리주에서 이 그림을 사주기를 희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문을 받아서 돈을 받고 이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대요.  그래서 완성을 하지 않고 주문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다가 세월을 보낸 모양입니다. 결국 그는 주문도 받지 못하고 그림을 완성했다고 하는데요, 그가 죽을때까지 이 그림이 팔리지 않았대요. 나중에 빙엄의 유가족이 이 그림을 경매에 내놨을때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그런 사연이 있는 그림입니다.

 

 

 

 

 

Washington Crossing the Delaware 가 걸린 전시장 풍경,

(오른쪽 하단에 걸려있는 작품), 크라이슬러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190

바로위에 에드워드 힉스 http://americanart.textcube.com/193 의 조지 워싱턴 그림이 보입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빙엄의 작품은  미국 바깥에는 한점도 없다고 합니다. 오직 '미국'에서만 만날수 있는 작가이지요.  미시시피 강변의 노란 노스탈지아의 풍속화가.  미국 미술관을 순례하시다가 노란 색조의 강풍경이나 배를 탄 사람들이 노를 젓거나 배위에서 춤을 추거나 하는 풍경이 보이시면 누가 그렸는지 화가 이름을 한번 살펴 보십시오.  그가 빙엄일지 모르니까요.

 

2010년 2월 9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The Girl I Left behind Me, 1870-75, oil on canvas

Eastman Johnson 1824-190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2008년 5월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제가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 처음 가본것은 2008년 5월의 일입니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은 내셔널 몰 지역에서 조금 외떨어진 곳에 있지요.  메트로 스미소니안 역에서 내리면 양쪽에 줄줄이 서있는 스미소니안 박물관들과 국립 박물관, 그밖의 전시장들을 보는 것으로도 세월이 마냥 흘러가기 때문에, 신경써서 가지 않으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은 잊혀지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다른 미술관들에 비해서 한가한 편입니다. 출입구에서 안전검색도 하지 않고요.  저도 워싱턴으로 이사한지 거의 일년이 다 되어갈때 그곳에 처음 가본 셈이지요.  그날 처음 '미국미술관'에 가서 반했던 작품중에 하나가 바로 이스트만 존슨의 이 그림입니다. The Girl I Left Behind Me 내가 뒤에 남겨두고 온 여인 (소녀 혹은 처녀).  내가 뒤에 남겨두고 온 여인이라... 그림도 심상치가 않거니와, 거기다 제목까지.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의 심상에 따라서 그림도 다르게 해석될수 있지만,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기다리면서 살아가지 않나요?  아니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두고서 먼길을 떠나지 않나요?  나는, 떠나는 쪽이라기보다는 기다리는 쪽인것 같습니다.  내가 떠나기 보다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 떠난것도 같고요 (혹은 이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서 그런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늘 제자리에 있는데,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났다는 이런 상실감을 갖고 사는 사람이 이 그림을 볼때는, 관객 자신이 언덕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한없이 서서 기다리는 저 여인의 입장이 될 겁니다.  누군가를 버리고 떠난 사람은 돌아서서 이 여자를 쳐다보는 입장이 되겠지요. 나는 이 그림을 볼때, 내가 언덕위에 서서 바람을 맞고 서있는 입장이었던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이 그림이 참 인상적이었던지라, 그림 앞에서 사진도 찍고, 미술관 책방에서 이 그림을 표지로 한 미국미술사책도 한권 사고 그랬지요. 2008년 5월 어느날.  그날의 내 그림자는 아직도 저 그림앞을 서성일지도 모르지요.

 

이 그림은 미국 남북전쟁 (Civil War: 1861-1865)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남자들은 전쟁터로 떠나고, 여인들은 남아서 사랑하는 남편이, 애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게 되었지요.  남자들이 전쟁터로 가건, 영장을 받고 입대를 하건, 사랑하는 남자를 보내야 하는 여성들 (애인, 아내, 어머니등) 역시 떠나는 사람 만큼이나 애절해집니다. 바람은 심상치 않게 불고, 백척간두같은 언덕위에 서 있는 여인은 바람을 정면으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가슴에 들고 있는것은 성경책이겠지요 아마도. 신념과 사랑에 의지하여 저 여인은 힘겨운 세월을 저렇게 고집스럽게 버틸것입니다.

 

이스트만 존슨은 실제로 1862년에 버지니아의 마나싸쓰 (Manassas)에서 전쟁을 치렀고, 당시의 전쟁의 경험과, 전쟁 당시 젊은이들이 부르던 아일랜드 민요에서 이 그림의 제목을 따왔다고 합니다:

My mind her full image retains

Whether asleep or awaken'd

I hope to see my jewel again

For her my heart is breaking

내 마음은 그녀의 모습으로 가득찼네

잠을 잘때나 깨어있을때나

보석과도 같은 내 사랑을 다시 볼수 있기를

그녀 생각에 가슴이 무너진다네

 

혹시나 싶어서 유튜브 뒤져보니 노래가 있군요...

 

 

 

 

이스트만 존슨 (1824-1906)은 우리가 이전 페이지들에서 살펴보았던 19세기의 대형 풍경화가들 Thomas Moran, Frederick Edwin Church, Albert Bierstadt 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고 활동했던 화가 입니다.  그런데 그는 장르가 달랐죠.  이스트만 존슨을 얘기할때는 그를 '장르 화가'로 칭하는 일이 많습니다. 장르 미술 (Genre Painting)은 한국어로 옮길때는 '풍속화'라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입니다. 서민, 민중의 삶의 풍경을 화폭에 담는 것을 말하지요.  인류의 역사에 '회화'가 등장한 이래로, 회화는 주로 귀족층들이 누리던 예술 분야였습니다. 특히 서양미술을 살펴보면 르네상스 이전이나 그 이후에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왕가의 인물들, 귀족들, 부유한 사람들 혹은 역사, 풍경등이었지요.  서민들의 삶을 화폭에 옮긴 화가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화가들은 대개 부유한 사람들의 '주문'을 받고 그림을 그리는 식으로 생활을 꾸려 나갔는데, 가난뱅이 서민이 화가에게 돈을 주고 그림을 주문을 할 일이 없었다고 봐야죠.  르네상스 이후에 서양 예술에서 서서히 민중의 삶에 눈을 돌린 화가들이 나타나는데  부르겔이나 베르미어등이 바로 그런 화가들이었습니다.  밀레의 저녁종이나 혹은 반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 같은 빈농의 삶의 풍경, 그러한 것들이 바로 이런 '풍속화'의 범주에 들어가지요.

 

미국에도 이렇게 '풍속화'를 즐겨 그린 화가들이 존재하는데, 이스트만 존슨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풍속화의 얄궂은 운명이 뭔고하면,  풍속화의 소재는 '가난한 서민들'이쟎아요. 그런데 이런 그림을 향유한 층은 여전히 부유층이었다는 것이죠.  사람이 고기만 먹다보면 김치도 먹고 싶어지쟎아요.  말하자면, 고급 가구로 잘 차린 집의 거실이나 서재에 이런 풍속화를 한점 걸고, '소박하고,' '목가적인,' 삶을 찬미하는 취미를 가진 미술 애호가들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뭐 일부러 해진 옷 같은거 - 빈티지 스타일이라고, 돈 많이 주고 다 떨어진 옷 사입고 폼 잡는 것도 비슷한 행동이긴 하죠. 그것도 멋이고 자랑이다 이거죠.)  아무튼, 이런 풍속화는 돈많은 사람들의 또다른 수집 취미의 대상이었다고도 합니다.

 

 

이스트만 존슨은 메인주의 유복한 정치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6세가 되던 1840년에 보스톤의에서 리토그래프 판화를 배우고, 1849년에는 독일의 뒤셀도르프로 가서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받습니다. 그후에 헤이그, 파리등지를 돌며 역시 유럽 미술을 배우게 됩니다.  1853년에는 그의 아버지가 워싱턴 디씨의 정부 고위 공무원으로 발령받아 워싱턴으로 이주하여 백악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살게 됩니다. 1855년에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1859년 뉴욕시에 작업실을 열고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는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당시의 서민들의 삶을 그리는가하면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1872년 2월 20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개관할때 공동 설립자로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헬렌 켈러가  '만약 내가 단 하루 시력을 갖게 된다면  보고 싶은 것'들중에 포함되기도 하는 미국 최대의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스트만 존슨이 이 미술관의 설립에 앞장을 섰던 인물이군요.

 

자 이제 그의 따뜻하고 정겨운 풍속화 작품들을 살펴볼까요.

 

이 수련따는 그림은, 밀레의 이삭줍는 여인들과 비슷한 모티브로 보이죠?

Gathering Lilies (수련따기) 1865, oil on board

Eastman Johnson 1824-1906

2009년 12월 13일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The Early Scholar, c1865, oil on academy board on canvas

Eastman Johnson 1824-1906

2009년 12월 13일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이 꼬마 학생에 대해서는 http://americanart.textcube.com/210  이전에 관련 페이지를 적은 적이 있습니다.

 

 

 

Fiddling His Way, 1866, oil on canvas

Eastman Johnson 1824-1906

2009년 11월 29일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이 그림은 1866년에 그려진 것으로 보아, 노예해방 이후에 자유민이 된 흑인이 악기 연주를 하며 떠도는 풍경을 그린것으로 보입니다.  백인의 중산층 가족으로 보이는데요,  여인이 안고 있는 아기까지 포함하여 아이가 여섯이나 되는군요.  흑인이 악기를 연주하고,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턱을 받치고 있는 아이도 보입니다.  빗자루 막대기에 기댄채 잠시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여인의 모습도 편안해 보이지요.  비록 그림이지만, 그림 한구석에서 미국의 깽깽이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는 것 같습니다.

 

 

아래의 그림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발견하여 사진을 찍은 것인데, 조명이 하도 어두워서 사진 상태가 흐릿합니다. 이 그림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여러장 찍었는데 쓸만한 사진이 한장도 없더라구요. 아쉽습니다. 참 사랑스러운 그림인데요. 시골 농가의 헛간에 아이들이 한가롭게 앉아 있어요. 설령 이 가로대에서 떨어진다해도 아래에는 건초더미가 쌓여 있으므로 다칠 일도 없습니다. 아이들은 가로대에 나란히 앉아 종알거리고 노래를 부르거나, 그러다가 말다툼이 벌어져서 하나가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릅니다.  아기를 무릎에 안고 있는 언니도 보이지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아이들이 제비새끼들처럼 지지배배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화가도 이 그림의 제목을  '헛간의 제비들'이라고 붙였을겁니다.

 

 

Barn Swallows, 1878, oil on canvas

헛간의 제비들

Eastman Johnson 1824-1906

2009년 9월 19일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촬영

 

 

간단히 Eastman Johnson (1824-1906)의 풍속화들을 몇 점 살펴보았는데요,  이스트만 존슨에 대해서 요점정리를 해보자면

 

 1. 그는 풍속화가로 알려져 있으며, 서민들의 일상의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2.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공동 설립자이다

 3. 그는 19세기 대형 풍경화가들이 활동하던 비슷한 시기에 풍속화를 그렸던 사람이다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잠깐 퀴즈. 그런데...풍속화 (genre painting)가 뭐죠?  :)

 

 

2010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Diary2010. 2. 9. 13:01

워싱턴 일대는 눈폭탄에 함락되었다. 

 

아이들은 눈을 치우지 않은 뒷마당에 요새를 구축했다.

왕눈이는 북극곰이 되었다.

 

눈은 또 쏟아질것이고

우리들은 '삽질'외에는 대책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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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Niagara 1889,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여

(2층, 비어시타드의 대형 풍경화 근처 통로에 있음)

 

뽀안 안개의 나이아가라가 내게 말을 걸다

 

 

 

Thomas Cole 과 허드슨 강변의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 (1801-1848)를 엮다보니

 * Thomas Moran http://americanart.textcube.com/364 (1830-1902)

 * Frederick Edwin Church: http://americanart.textcube.com/363 (1826-1900)

 * Alber Bierstadt: http://americanart.textcube.com/361 (1830-1902)

 

등과 같이 허드슨 강변의 화가들로 알려진 19세기의 대형 풍경화의 대가들을 살펴 보게 되었는데요.  이들과 더불어 George Inness (1825-1894)를 잠시 소개를 해야 할 것 같군요. 제가 차례차례 화가들의 생몰년대를 명시 해 놨는데요 토마스 콜이 대략 한세대 이전의 대가이고  토마스 모란이나, 프레데릭 처치, 비어시타드는 나이도 몇살 차이 안나는 동시대의 사람들입니다.   이 페이지의 주인공 조지 이니스도 이들과 동시대를 산 화가이고요.

 

19세기 풍경화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대략 정리를 할 생각이라서 이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허드슨강변 화가들의 '대부'격인 토마스 콜이 미국 동부의 허드슨 강변에서 실제 풍경화를 그리거나 유럽 여행을 통해서 풍경화를 익히며 상상의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던 미국 풍경화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사람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1. 토마스 모란은 미 서부의 풍경을 동부의 사람들에게 전한, 옐로우 스톤의 화가라고 할수 있고요,

2. 프레데릭 처치는 미국및 남미, 유럽등을 돌면서 세계 여러나라의 자연 환경을 관찰하고 그림으로 옮긴이로, 훔볼트나 다윈의 과학적 자연 이해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던 미국의 화가였습니다.

3. 알버트 비어시타드는 미 서부를 돌며 미국의 대자연을 스케치하고 관찰했지만, 그가 그린 미국의 풍경은 유럽 알프스산의 풍경까지 뒤섞인, 이상화된 풍경을 대형 화폭에 담았던 화가였습니다.

 

그러면 비슷한 시기의 조지 이니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미술사가나 평자에 따라서 조지 이니스를 허드슨강 화파에 포함시키는이가 있는가하면, 그가 허드슨 화파와는 다른 풍경화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평하는 이도 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화가'라는 측면에서 그를 허드슨 풍경화파에 대충 때려 넣는 경우도 있고,  그를 좀더 세밀히 연구하는 사람이 볼때는 이런 '때려넣기'는 어불성성일수 있지요.  무슨 말씀인가하면, 어떤 역사를 단순하게 처리할때 - 이런 상반된 시각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 자신 조지 이니스를 '허드슨 파'에 포함시킬것인가 말것인가 조금 고민을 했는데요,  저로서는 그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발견했고, 그의 그림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좋아하므로, 그를 별도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조지 이니스를 '발견'하게 된 그림은, 저 위에 올려 놓은 '나이아가라'라는 그림에서였습니다.  국립 미술관급의 미술관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보면 보이는 것이 명작이요, 역사적인 기념비들인데,  명작 아닌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들이 있게 마련인데요.  풍경화에 별 관심이 없었던 제 눈에 띄었던 것이 그의 1889년작 '나이아가라'였습니다.  나이아가라는 앞서의 페이지에 소개된 바와 같이 프레데릭 처치가 대형으로 그려서 선보이기도 했는데요. 아래에 프레데릭 처치의 나이아가라 그림을 옮겨다 놨습니다. 

 

Niagara Falls, 1857, Oil on Canvas (42 1/2 x 90 1/2 inches)

Frederick Church

2009년 10월 3일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물론 크기에서도 처치의 작품이 압도적이긴 한데요,  처치의 그림이 '압도적'이라는 느낌을 줬다면,   그보다 32년후에 그려진 조지 이니스의 나이아가라는 물안개가 걷히지 않는 나이아가라의 또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조지 이니스의 안개속의 나이아가라를 좋아했지요. 그런데요, 이 나아이가라를 발견했을때, 저는 조지 이니스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보면서 떠올린 화가는 Thomas Wilmer Dewing 이었습니다. 저는 아슴푸레한 초록 안개속의 풍경과 여인들을 그린 미국 화가 Dewing 을 알고 있었거든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236 )    어떤가요. 저 초록 안개에 싸인 나이아가라 그림과, 아래의 듀잉의 그림의 분위기가 흡사하지 않은가요?

 

 

Before Sunrise (해뜨기 전) 1894-95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갤러리에서 촬영

 

 

그래서 저는 '나이아가라'를 '듀잉'이 그렸을거라고 상상했는데, 다가가보니 '조지 이니스'의 이름표가 붙어 있었단 것이지요.   '두 사람 그림이 참 분위기가 비슷하다 ...'  혼자서 이런 생각을 가끔 했었는데요.  어느날 공부하다가 이 두사람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풀렸습니다.

 

미국 회화사에 Tonalism (색조주의)이라는 미술 화법이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잠시 떠오른 적이 있는데요,  회화의 구체적인 이미지보다는 회화가 전하는 '색조'와 '빛' '분위기'를 중시 여기는 화법입니다.  바로 그 Tonalism 의 주요 화가로 알려진 이들이

 1. George Inness (1825-1894)

 2. 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

 3. Thomas Wilmer Dewing (1851-1938)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제가 이니스의 그림을 보면서 '듀잉'의 그림일거라고 짐작했던 이유는, 바로 이들의 '색조주의적' 개성 때문이었을겁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지금은 책상 앞에 앉아 슬슬 적고 있지만,  이러한 사실들을 접하거나, 혼란스러워하거나,  궁금해하거나 혹은 책을 찾아보고 뭔가 발견하고 그러면서 흘러간 세월은 두해쯤 되는거죠.  그 사이에 시간이 많이 흘러간 것이지요....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뒤지면서, 지금도 여전히 뭔가 새로 알아가고 있는 중이고요.)

 

 

 

여기까지는 제가 이니스를 처음 발견하던 일에 대해서 정리했고요,  이제부터는 제가 갖고 있는 그림 파일들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고 조지 이니스의 발자취와 미술의 흐름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국립 미술관 (NGA): 이니스의 초기 풍경화들

 

 

조지 이니스 (1825-1894)는 뉴욕주의 한 농부의 열세명의 아이들중에서 다섯번째 아이로 태어납니다. 다섯살때 가족이 뉴저지의 뉴왁으로 이주하고요. 십대때 그는 뉴욕시에서 지도 판화 작업을 배우게 됩니다. 1940년대에는 National Academy of Design 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그당시 Thomas Cole, Asher Durand 등 당대의 쟁쟁한 화가의 지도를 받게 되지요.  1851년에 그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로마로 가서 미술 수업을 받게 되는데 로마에서 1년넘게 머무는 동안 Swedenborginism 이라는 스웨덴의 신흥 종교운동과 접하게 되어 정신적인 영향을 입게 됩니다. 로마에서 파리로 건너간 그는 이곳에서 '바르비종 (Barbizon)'화가들의 작업을 보게 됩니다.  '바르비종' 화가들은 19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바르비종, 폰텐블루 숲에서 전원을 찬미하는 그림을 그렸었지요. 우리들에게 가장 친숙한 화가로는 장 프랑소와 밀레가 있지요. 밀레의 풍경화를 떠올리시면 바르비종 화파의 대강의 분위기를 짐작하실수 있을겁니다.

 

하여, 전체적으로 조지 이니스의 미술세계에 영향을 끼친 요소들로는

 1. 스승 토마스 콜의 허드슨강 화파의 풍경화

 2. 프랑스 바르비종 화파의 낭만적 풍경화

 3. 신성이 속세에도 반영될것이라고 봤던 스웨덴 신흥 종파의 세계관

등이라고 할 만 합니다.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돌아온 이니스는 델라웨어 철도 부설 사업자로부터 철도 사업을 기록하고 홍보할만한 그림을 위탁받아 작업을 합니다. 아래의 라카와나 골짜기의 그림이 바로 당시 위탁받아 그린 작품중의 하나입니다. 언덕위에서 내려다보는 기찻길, 달리는 기차, 기차역은 우리에게 '그리운' 혹은 '아쉬운'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키지 않나요?  그 기차에서 누군가 그리운 사람이 내려주었으면 좋겠지요. 이런 우리의 일반적인 정서와는 달리, 이 그림은 기록성, 홍보성에 목적을 둔 작품입니다.  물론 작가가 주문자의 의도를 얼마나 반영했을지는 알수 없지만요.

 

 

The Lackawanna Valley 1855,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10년 1월 20일 워싱턴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에서 촬영

 

 

 

 

 

 

View of the Tiber Near Perugia 1874, oil on canvas

페루지아 인근에서 바라본 티버강 풍경

George Inness 1825-1894

2010년 1월 20일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이 그림은 이탈리아 페루지아의 티버강 그림이군요. 그가 당시 여행을 가서 그린것인지, 아니면 과거를 회상하며 그린것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아래, 갤러리 풍경 사진에서 프레데릭 처치의 대형 그림 옆에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입니다.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전시장. 왼편의 대형 그림이 Frederick Church 의 '빛의 강'

그 오른편에 조지 이니스의 풍경화가 보임.

2010년 1월 20일 NGA 에서 촬영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이니스의 완숙기의 풍경화들

 

 

 

September Afternoon 1887,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1층,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뒷쪽 갤러리 중앙에 걸려있음)

 

 

1885년에 조지 이니스는 뉴저지주의 Mont Claire 에 정착하게 됩니다.  완숙기에 들어선 그의 그림에서 선의 경계가 부드러워지거나 흐릿해지지요.  특히, 앞서 지적한 바 있지만, 이 '나이아가라' 그림에서 그의 선과 경게가 해체가 된듯한 느낌이 듭니다. 사물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해체되고 오직 색감과 분위기만 안개 입자처럼 떠돌지요. 

 

그런데, 얼마전에 스미소니안에 갔을때, 안내인이었던 Judith 할머니가 이런 얘기를 들려주시는 겁니다. 그 할머니는 나이아가라 인근에서 태어나고 자랐기때문에 늘 나이아가라를 봤대요.  고향을 떠난 지금도 그의 귓가에는 나이아가라 폭포 소리가 들리겠지요.  사람들은 이니스의 나이아가라 폭포 그림을 가리키면서, '이 그림이 인상주의적인 그림이다, 이니스는 인상파였다' 뭐 이런 설명을 하는데 자신은 이 그림을 인상파 그림으로 보지 않는대요.  이 그림은 '인상'이 아니라는거죠.  저는 그 사람의 말귀를 알아 들었습니다.  그래서 되물었죠:

 

 "You mean that, it's not the impression of Niagara, it's, the reality?"

 (이 그림은 나이아가라 '인상'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인가?)

 Judith: Yes, that's what I mean!

 (그래, 바로 그것이지!)

 

주디스 할머니의 예술관은 여기까지 이지요.  인상파 화가들은 '인상'을 스케치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을 잡으려고 했던 것인데.  인상파화가들은 현장에서 내 눈으로 직시하는 '바로 그 순간, 그 것'을 잡으려고 했던 것인데. 그것이 그들에겐 Reality 였던 것인데...  주디스 할머니는 인상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셨던것도 같은데...하지만 그가 내게 말하고 싶어했던 것은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이 나이아가라 그림은 '상상속의 어떤 이미지'가 아니라 '사진'같이 정확한 사실이라는 것이지요.  나이아가라를 가슴에 품고 있는 주디스 할머니에게 이 아슴푸레한 풍경은 더욱 생생한 사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Reality 란 무엇인가?  이 논의는 훗날로 미루기로 하지요, 저로서는 너무 어려운 주제이니까요.)

 

 

 

Niagara 1889,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여

(2층, 비어시타드의 대형 풍경화 근처 통로에 있음)

 

 

 

코코란, 델라웨어: 말년의 황혼

 

 

 

Early Autumn, Montclaire 1891,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10년 1월 9일 델라웨어 미술관에서 촬영

 

 

이니스의 작품 사진들을 시간 순서대로 늘어놓고 보니, 그의 그림의 변화가 눈에 들어오지요. 그의 말기의 작품들은 경계의 해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빛과 어둠을 들여다보는 영역으로 나아갑니다.  이전에 이니스가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했다면, 말기에 그는 빛의 세계로 나아가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코코란 미술관에 소장하는 '숲속의 황혼' 작품은 황혼이 내리는 숲속에 한줄이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나무 기둥에 신비할 정도로 환한 빛으로 어룽대지요.  가끔 이런 광경을 볼때가 있어요.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빛과 어둠의 대비. 이런 풍경을 대면할때, 우리는 설령 우리가 무신론자일지라도 어떤 신성, 초자연적인 숨결을 상상하게 됩니다. 

 

 

 

Sunset in the Woods, George Inness, 1891

출입문 왼편에 면한 벽에 Frederick Church 의 Niagara Falls, 그리고 Albert Bierstadt 의 '들소의 최후'가

나란히 걸려있다.

 

 

 

Sunset in the Woods 1891, oil on canvas

70 x 48 inches

George Inness 1825-1894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촬영

 

 

 

 

자, 조지 이니스의 미술 세계를 다시 한번 정리해볼까요?

 1. 토마스 콜에게서 사사 받았고, 혹자는 그를 허드슨 강 화파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2. 프랑스 바르비종 미술 운동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3. 스웨덴에서 일어난 새로운 종교운동의 영향으로 신성이 세속에 투영된다는 시각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그는 미국의 Tonalist 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미국 미술사에서 크게는 그를 허드슨 화파, 혹은 인상주의 화가로 분류를 하기도 하는데요, 어찌보면 그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 화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2010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역사를 만들어낸 한장의 그림

 

 

 

 

The Grand Canyon of the Yellow Stone, 1893-1901, oil on canvas

427.8 x 245.1 cm (대략 4.3 미터 x 2.5 미터)

Thomas Moran (1837-192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 가면, 엄청시리 커다란 풍경화 그림이 여기~ 여기~ 걸려있는데요. 저로서는 뭐 엄청나게 큰, 그것도 주로 바위로 이루어진 풍경화에 별 매력을 못 느끼므로, 막무가내로 통과~ 해버리는거죠. 이 엄청난 풍경화 앞을 지나면서 대략 '이름표'라도 볼라치면 Moran 이라는 이름이 눈에 띕니다. 

 

"모란?  이름이 모란이야?  성남의 모란 시장이 생각이 나는군. 거기 가면 강아지 팔고 그랬는데. 이름이 모란이면 모란꽃 뭐 그런거 그려야 하는거 아니야? 아 왜 바윗덩어리 산만 그려 놓은거냐구..." 

 

이렇게 중얼거리며 지나치는거죠. ㅎㅎㅎ.  그래가지고, 사실, 스미소니안을 라면집 드나들듯 드나든 저에게도 모란의 작품 사진이 별로 없습니다.  관심 없으니까 대충 지나간거죠.  아, 다음에 가면 제대로 작품 좀 들여다봐야지...

 

Thomas Moran (1837-1926)은 영국태생으로 어린 시절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와서 펜실베니아에서 성장한 화가입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 Hudson River School 의 원조 Thomas Cole 의 페이지에서 잠시 언급한대로 Thomas Moran 은 그가 미국의 자연 환경을 대형 화폭에 담았다는면에서 허드슨강변의 화가로 분류가 되기도 하고, 혹은 토마스 모란이 특히 로키 산맥, 옐로우스톤의 풍경에 골몰한데서 Rocky Mountain 화가로 분류가 되기도 합니다.

 

제가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찍어온 그의 대형 그림 사진속의 풍경이 대개 '노리끼리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림이 '노리끼리'로 일관하는 이유는, 그가 Yellow Stone (노란 바위) 지역의 화가라서 그런것이지요 (알고보니 뭐 단순하군요.헤헤).

 

토마스 모란은  형제들도 그림을 그렸고요, 어릴때부터 목공, 판화 등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1862년에 영국으로 그림을 배우러 갔을때 그곳에서 터너 (Turner, 1775-1851)의 웅장하고 숭고한 풍경화에 감화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8년 여름에 뉴욕 현대미술관에 갔을때, 마침 터너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지요.  스케일 큰 풍경화를 실컷 보기는 했는데, 저 자신이 사람 하나 안보이는 풍경화에 별 재미를 못느끼기는 했지요.  지금은, 풍경화를 보는 안목도 좀 생겨서, 코코란에서 현재 진행중인 터너에서 세잔까지의 기획전 http://www.corcoran.org/turnertocezanne/index.php 을  보러 갈 생각입니다.)

 

토마스 모란이 미 서부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1871년 Hayden Geological Survey (헤이든 지리 연구) 팀에 초대되어 40일간 미 서부 옐로스톤 일대를 탐사하게 되면서부터 입니다. 연구팀에는 사진가 Wiliam Henry Jackson도  있었는데, 토마스 모란과 잭슨이 현장 스케치를 남기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흑백 사진만 가능했으므로 현장의 생생한 풍경은 화가가 담을수 있었다고 합니다.

 

 

The Grand Canyon of the Yellow Stone, 1893-1901, oil on canvas

427.8 x 245.1 cm (대략 4.3 미터 x 2.5 미터)

Thomas Moran (1837-192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위의 그림은 아니지만, 같은 제목의, 비슷한 각도에서 본 그랜드 캐년 그림이 1872년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가 되는데 그 그림은 미 의사당의 상원에 팔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옐로우스톤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게 하는데 혁혁한 공헌을 하게 되지요. 이를 시발점으로 미 의회는 1916년 정식으로  '국립공원 National Park System'을 도입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여름 휴가철에 '미서부 관광'이나 '옐로우스톤 국립공원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이 지역을 관광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미국에서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 Yellowstone National Park 이고요,  이곳이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게 되었을때, 그 배후에 토마스 모란의 그림 한장이 있었던 것이지요.  흑백사진 기술조차 미미하던 시절, 오로지 스케치나 수채화와 같은 것으로 시각자료가 전해지던 시절, 한장의 대형 풍경화가 전하는 미지의 세계는 보는이들에게 충분히 감동을 선사했을 법 합니다.

 

 

토마스 모란은 때로 Thomas Yellowstone Moran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고요, 이따금 그는 서명할때 Thomas Y. Moran 이라고 적기도 했답니다. 가운데의 Y 는 yellowstone 의 Y 이지요. 그리고 토마스 모란이 '미 국립공원'의 지정과 개발에 기여한 것을 기념하여 http://en.wikipedia.org/wiki/Mount_Moran  모란 산 (Mount Moran)이라는 이름도 붙여졌다고 합니다.  한장의 그림이 미국 역사에, 미국 국립공원의 산파 역할을 했다니, 그림을 만만히 보면 안될 일이군요.  다음에 스미소니안에 가면 그의 대형 그림 사진들을 모두 찍어와야 할것 같습니다. :)

 

 

화면 왼편 그림: The Cahsm of the Colorado, 1873-1874, oil on canvas mounted on aluminium

367.6 x 214.3 cm (대략 3.6 미터 x 2.1 미터)

Thomas Moran (1837 - 192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아, 참고로, 저 전시실 가운데에 둥그런 평상같이 생긴 의자가 있는데요. 곰털 같은 털가죽이 덮여있습니다.  관객이 저기에 편히 앉아서 쉬면서 그림을 감상할수 있도록 설치 해 놓았는데요. 옐로우스톤에 가면 '곰'이 많이 나오지요.  옛날에 옛날에 1998년에, 제가 미국땅 처음 밟아본것이 '미서부 관광' 패키지 여행을 통해서였는데요, 그때 관광 안내원이 '곰'이 나올지 모르니 주의하라고 당부하던 일이 생각이 나는군요.   그러니까, 저 곰가죽같은 의자나 혹은 그림 옆에 세워 놓은 화분도, 이 전시장의 장치 입니다. 풍경화에 어울리는 소품을 제시하여, 관객이 '풍경'속에 들어와있는듯한 기분이 들도록 유도하는 것이지요.

 

 

 

2009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