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ism/Ashcan School2009. 12. 7. 23:22

소년가장 슬로언

 

John French Sloan (1871-1951)은 펜실베니아 태생의 미국 사실주의 화가로 Henri 를 중심으로 모인 Ashcan (애시캔) 그룹과 The Eight (8인회)의 멤버로 활동하였습니다.  존 슬로언은 필라델피아에서 성장하였는데 그의 고등학교 동창중에 후에 The Eight 의 멤버가 되는 William Glackens를 만나게 됩니다.

 

1888년 그가 16세 되던해에 아버지가 정신질환으로 쓰러지면서 슬로언이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소년가장이 되고 맙니다. 그는 책방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책을 읽고 화집을 들여다보며 혼자 그림을 그리던중 정식으로 야간 미술 과정에 입문하게 되고 후에는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Thomas Pollock Anschutz 의 지도를 받게되며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Willaim Glackens 를 다시 만나게 되지요.

 

1892년 Robert Henri 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들의 연대가 시작됩니다. 슬로언는 The Philadelphia Press 의 미술부에서 삽화가로 일을 하며 미술 작업을 계속해 나갑니다.

 

슬로언의 아내

 

슬로언은 아내와의 관계도 '소설'적인데,  그의 아내 Anna Maria 를 술집에서 만나서 사랑에 빠져 1901년에 결혼하게 됩니다.  안나 마리아는 백화점 점원으로 일했지만 매춘 경력이 있으며 음주벽이 있고, 아마도 이러한 전력을 거친 여성들이 보일법한 히스테리컬한 우울증도 보였던 것 같습니다. 슬로언의 아내에 사랑은 지극정성이었고 한 의사의 제안으로 1906년부터 1913년까지 매일 매일 자기가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는지 일기를 쓰게 됩니다.  (이런 남자 또 한명 있죠, 삐에르 보나르... 삐에르 보나르는 수십년간 목욕탕에서만 지내는 특수한 병을 가진 여인을 돌보며 한세상을 보냈지요. 삐에르 보나르의 그림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목욕하는 여자, 삐에르의 평생의 연인.)  그의 부인은 1943년에 죽고, 슬로언은 이듬해에 새장가를 갔으며 슬로언 자신은 1951년에 운명합니다.

 

슬로언의 사회주의 운동

 

 

1912년 그는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잡지 The Masses 에 미술 편집인으로 참가하며 다른 사회주의 사상이 강한 매체인 Call, Coming Nation 지를 위해서도 삽화를 그려줍니다.  특히나 그가 그린 1914년 6월호 The Masses  표지화가 지금도 자주 인용되거나 소개되곤 하는데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페이지에 Ludlow 학살사건의 이야기가 잠깐 소개된바 있습니다.)  그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고 민중의 생존권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긴 했지만, 예술가로서 슬로언은 '선전 (propaganda)'의 '도구'로 미술 작업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회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에는 긍정하면서도 예술이 '극단적인 정치선전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할만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예술만을 위한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반문할수 있을텐데...제가 추측하기에, 슬로언은 아마도 그 주위의 '사회주의자'들의 어떤 행동들에 거부감을 가졌을법 합니다.  그 '어떤 사회주의자들'이 요구하는 '선전물'을 만들기 싫었겠지요.  그가 꿈꿨던 사회주의와 그가 속한 사회주의자의 무리들의 행동 양식이 일치하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과 거리를 두고 싶었을겁니다.  

 

서민속에 서있던 남자

 

존 프렌치 슬로언의 작품세계는 크게

 

(1) 뉴욕의 풍경

(2) 대중의 삶의 풍경

(3) 잡지,책의 삽화가로서 작업한 세밀한 판화 작품들

 

으로 정리 될수 있습니다. 일단 그가 삽화가로 일했으므로 대중 생활 관련 묘사 작품들이 많은데, 이런 성향은 이미 십대에서부터 생계형 청년 가장으로 세상에 나아갔던 그의 삶의 이력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가 즐겨그린 도시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 가령 도심의 창가에서 빨래를 너는 여인이나, 건물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들, 술집 풍경 역시 그의 삶과 밀착된 풍경이었을 겁니다.  특히나 20세기초의 뉴욕의 전철과 천철 주변 풍경은 그의 '전매특허'와 같은 주제라 할 수 있지요. 조지 벨로우즈 페이지에서 (http://americanart.textcube.com/198)  권투선수 그림을 즐겨그린 미국 화가가 누군가? 이런 퀴즈가 나오면 자동으로 '조지 벨로우즈'를 외치면 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미술관에서 '뉴욕 고가 기차' 풍경화가 멀리서 보일경우,  당신이 애인과 함께 미술관 구경중이라면 "저기 저 뉴욕 풍경속에 고가 기차 그림이 있는 저 그림 말야...저거 아마 존 슬로언이라는 화가의 그림일거야..." 하고 '아는체'를 해도 크게 실례가 안 될 것입니다.

 

 

 

뉴욕 고가 기차 (Elevated Train: EL)

 

The City from Greenwich Village (1922)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바라본 뉴욕
oil on canvas
overall: 66 x 85.7 cm (26 x 33 3/4 in.)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2009년 9월 촬영

이 그림은 비가 그친 겨울 저녁, 맨하탄 남단에서 바라본 맨하탄의 거리 풍경입니다. 고가기찻길 위로 기차가 불을 밝히고 지나가고 비에젖은 도로에 자동차의 불빛이 반사됩니다. 비가 갠것을 눈치채는 이유는 하늘이 부염하게 밝아 있다는 것이지요. 도시는 촉촉히 비에 젖어 있고 골목의 불빛은, 그것이 골목이라서 더욱 밝아 보입니다. 건물 옥상의 물탱크도 보이고, 다리미의 모서리같이 각진 고층 건물이 오른쪽에 보이는데, 건물에서는 불빛들이 새어나옵니다. 일층의 모든 창문은 손님들을 기다리는듯 환하게 불이 켜져있습니다.  옹기종기 걸어가는 행인도 몇명 보이지요. 그림의 전체적인 윤곽은 우리가 마치 몇층 건물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듯 합니다. 액자를 창틀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창밖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기분이 듭니다.

 

 

다음 그림은 워싱턴 필립스 콜렉션이 소장하는 Six O'clock, Winter (1912) 라는 또다른 고가 기차 (EL) 풍경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사진 파일이 상태가 안좋아서 웹에서 얻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속의 여섯시의 풍경은 오전일까요 오후 일까요? (제가 볼때는 오후 여섯이인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단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기로 하고요...  )  이 작품이 1912년작이고, '그리니치 빌지지에서 바라본 뉴욕'이 1922년 작품이므로, 두 그림 사이에는 10년의 세월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두 그림을 함께 놓고 보면, 1912년 작품은 고가기차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선이고, 1922년 작품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이지요.

 

 

 

 

http://www.phillipscollection.org/research/american_art/learning/sloan-learning.htm

 

 

 

무료 커피

 

The Coffee Line (1905)

무료 커피를 받기 위해 줄서있는 사람들

2009년 11월 7일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뉴욕에서 무료 커피를 받기 위해 긴 행렬을 이룬 실업자들을 발견한 슬로언이 그려낸 겨울 저녁의 풍경입니다. 길에는 눈이 쌓여 있지요. 슬로언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 어둡고 긴 행렬을 묘사 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빈곤의 문제가 그를 사회주의 사상으로, The Masses 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비가 들이치는 페리선

 

Wake of the Ferry, No. 1 (1907)

페리선의 물길

2009년 10월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지금도 뉴저지에서 맨하탄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중에 배(Water Taxi)로 강을 건너는 직장인들이 있습니다. 100여년전 뉴욕과 뉴저지를 왕래하는 페리선을  그린것은 당시로서는 '엉뚱한' 시선이었을겁니다.  비가 들이키고 물결이 거칠게 일고, 전체적으로 '내가 그 페리선을 탄듯' 심란한 기분이 드는 그림입니다.  오른쪽 구석에 서있는 여인도 그래서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요.

 

이 그림은 그림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 만큼이나 심상치 않은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슬로언은 1904년에 뉴욕으로 활동지를 옮겼는데, 그의 알콜중독자 부인은 이후로도 걸핏하면 필라델피아의 집으로 가버리곤 했던 모양입니다. 그의 아내가 필라델피아로 가기위해 이 페리호를 종종 이용했지요. 결국 이 그림속의 여인은 슬로언의 알콜중독자 아내의 뒷모습이었던 것인데요.  1907년에 슬로언이 그의 작업실에서 The Eight 전시회를 준비하기 위해 모임을 갖고 있었을때 부인이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남자 작업장에 여자가 허락도 안받고 나타난거죠, 아마 그렇겠죠.) 술도 몇잔 마셨겠다, 화딱지가 난 슬로언이 그 자리에서 의자를 집어던져가지고 이 그림이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래가지고,  나중에 이 그림을 또다시 그리게 되는데 그 (2)번 그림은 필립스 콜렉션에 소장되어 있고, 이 (1)번 그림은 슬로언이 (2)번 그림 그린후에 손을 봐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Beal 2002).  아무래도 이런 뒷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페리선의 풍경이 슬로언과 그의 아내의 풍경이었다 싶기도 하지요.

 

 

 

 

 

 

이상에서 보신바와 같이 대도시의 뒷골목의 삶의 풍경, 이런 풍경은 Henri 가 주도했던 Ashcan 일당들의 주요 소재라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각에서 '이런 그림이 뭐가 대단한가?' 의구심이 들 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그려진 1922년 미국 화단의 상황속에서 이 그림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각은 달라질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미술의 역사는 유럽에 비해서 '일천'할수밖에 없지요. 제가 에드워드 힉스나 조쥬아 존슨과 같은 초기의 '포크 아트' 작가들에 대하여 애정을 갖고 소개를 한 이유가 있는데요, 미국은 초기에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였고 유럽 문화권의 식민지이기도 했습니다. 미국 자생의 문화가 없었다고 봐야지요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를 제외하면).  그래서...Henri 를 위시한 '사실주의' 화가들의 탄생 이전의 미국 회화사는 '유럽 베끼기'의 연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장차는 미국의 인상주의나 그 이전의 풍광, 초상와 위주의 미술과 미술가들을 차례로 소개하겠지만, 제가 왜 이들부터 시작을 안하고 풍속화가 잠깐 건드리다가 '사실주의'로 점프를 해버렸는가하면,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들 이전의 작가들에게서 제가 별 매력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뭐 대략 사이비 유럽미술 냄새가 고약하게 난다는 느낌이 드니까요. 제가 감지하기에 미국의 사실주의 화파들부터, 미국의 미술은 자신의 정체성을 슬슬 세워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에서부터 미국의 풍경이, 미국의 서민이 화면의 중심에 슬슬 등장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슬로언의 전철 그림과 도심 그림이 매력적으로 비쳐지는 것이지요. (이것은 미국인이 아닌, 아시아 출신의 어느 외국인이 이방인의 시각으로 미국 미술을 보는 관점이긴 합니다.)

 

 

 

Yeats at Petitpas'

 

이 그림은 뉴욕 웨스트 사이드의 어느 하숙집에서 열린 파티 장면입니다.  Petitpas 는 프랑스 출신의 두 자매가 경영한 하숙집 이었습니다. 

 

이곳에 영국의 철학자이며 예술가였던 John Butler Yeats (존 버틀러 예이츠 1839-1922)가 머물렀는데, 그는 영문학도들에게 (그리고 교양 차원에서 영시를 읽은 사람들에게)  친근한 시인 William Butler Yeats(1865-1939) 의 아버지입니다.  존 버틀러 예이츠는 69세 되던 해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애시캔' 화가들과 친교를 맺었고, 결국 뉴욕에서 사망하여 뉴욕에 뼈를 묻었지요. 그러고보면, 그의 아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유럽'문화를 이상화 했는데, 아버지인 자신은 말년에 문화 불모지와 같은 뉴욕에 와서 세월을 보내다가 갔군요.

 

흰 턱수염의 노인이 존 버틀러 예이츠이고, 오른쪽 끝에 보이는 검은머리 남자가 존 슬로언이군요. 음식을 들고 서있는 이는 하숙집 주인이고요, 그이의 왼쪽에 모자를 쓴 여인이 슬로언의 부인이라고 합니다. 존 버틀러 예이츠가 이 하숙집에 머무는 동안 이곳은 당시 미술,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즐겨 모이는 장소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Yeats at Petitpas' (1910)

Oil on Canvas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2009년 10월 3일 촬영

 

 

 

해부학교실

 

존 슬로언은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서 Anschutz 선생의 지도를 받았는데, 다음 작품은 해부학 강의를 하는 안슈츠 선생을 에칭 판화로 묘사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Anshutz on Anatomy (1912)

해부학 교실의 안슈츠 선생

Etching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2009년 9월 19일 촬영

 

 

 

 

제 사진 상태가 좋지 못해서, 웹에서 좀더 선명한 이미지를 빌려 왔습니다.  강단아래에 안슈츠 선생이 서서 강의를 하고 있고,  강단위에 인간 골격이 서있고, 그 옆에 성기만 가린 남자 누드 모델이 서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둘러 앉거나 서서 해부학 강의를 듣고 있는데요. 학생들중에 여학생도 보입니다.  아마도 여학생들이 없었다면 남자 누드 모델이 성기를 가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1900년대 초반에 미국 미술 학교에서는 남녀학생이 함께 작업하는 곳에서는 누드 모델이 성기를 드러내면 안되었다고 하지요.

 

 

슬로언에 관심이 많아 자료를 많이 보긴 했는데, 막상 제가 가진 작품 사진 파일이 미미하여 그의 미술 세계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소개할수 없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저는 화집이 아닌 '내 눈'으로 본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기로 작정을 했거든요.  나중에라도 슬로언 작품들이 보이면 보이는대로 잘 갈무리하여 좀더 그에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화집에서 본, 제가 좋아하는 그의 작품들로는 그의 '빨래'관련 그림들인데요. 슬로언이 도심에서 빨래를 널거나, 걷거나 하는 여인들을 모티브로 그린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 참 아름답지요. 그래서 '빨래' 주제의 페이지를 하나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는데요, 이것 역시 훗날로 미루기로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1. http://www.nga.gov/fcgi-bin/tinfo_f?object=52079

 2. Sherry Babbit (2008). Philadelphia Museum of Art: Handbook of the Collections. Philadelphia, PA.

 3. Graham W. J. Beal (2002) American Beauty: Paintings from the Detroit Institute of Arts 1770-1920. Scala Publishers Ltd. London, UK.

 

 

 

 

2009년 12월 6일 red 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Ashcan School2009. 12. 6. 02:41

New York (1911)

George Bellows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워싱턴 국립미술관 (NGA)에서 촬영

 

사진은 클릭하시면 크게 확장시켜 보실수 있습니다.

 

뉴욕풍경

 

 

Goerge Bellows (1882-1925) 의  New York (1911)은 대략 100여년전의 뉴욕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자동차와 마차가 뒤섞여 있고, 고층 건물들과 그제나 이제나 여전한 인파가 보입니다.  사실 이 뉴욕의 풍경은 사진과 같은 실제 광경은 아니라고 합니다. 뉴욕의 여러 장면을 뒤섞어서 뉴욕의 분위기를 전달했다고 봐야겠지요. 얼핏 보면 타임 스퀘어 같기도 하고 얼핀 보면 펜스테이션 앞 같기도 하고, 어찌됐거나 우리가 한번쯤 가봤거나 혹은 영화나 그림을 통해서 지겹게도 많이 본 뉴욕 번화가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일백여년전의 풍경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복장이나 마차 장면을 제외하면 어느 화가가 며칠전에 그린 것이라고 해도 그럴싸해 보입니다.

 

조지 벨로우즈 (1882-1925)는 앞서 소개드린 The Eight (팔인회)나 Ashcan (애시캔) 그룹의 정식 회원으로 활동을 한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The Eight, Ashcan school 의 리더였던 로버트 헨라이 (Robert Henri 1865-1929)와 친분이 두터웠고, 헨라이의 미술관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의 작품들이 팔인회, 애시캔 회원들의 화풍과 통했기 때문에 조지 벨로우즈를 '애시캔'의 일원으로 평가하는 비평가들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의 작품들이 미국의 도시, 서민들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냈으므로 조지 벨로우즈를 애시캔 그룹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정리를 해보는 것입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오하이오(Ohio) 의 주도(행정수도)인 콜럼버스 (Columbus) 태생입니다. 이곳에 오하이오 주립대 (Ohio State University)가 있지요.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주로 야구선수와 교지 삽화가, 그리고 잡지의 삽화가로 활동했습니다.  오하이오 주립대에 한번 가본적이 있지요. 제 친구들이 그곳 수학과에서 공부를 했는데, 한 친구는 공부 마치고 수학자로 살고 있고, 또 한 친구는 아직도 거기서 공부중입니다. (글 쓰다가 친구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Robert Henri 역시 오하이오 출신인데 그는 신시내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조지 벨로우즈와 로버트 헨리가 고향이 가까웠다는 이유로 더욱 친근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스포츠맨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오하이오 주립대를 졸업한 후에 프로야구 선수가 될것인가 잡지 삽화가로 살것인가 고민하다가, 미술 수업을 받겠다고 작정하고 뉴욕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뉴욕 미술학교 선생으로 재직하는 로버트 헨라이를 만나게 되고 그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특히나 그의 권투경기 장면이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 합니다.  그의 도시 풍경이나 다른 그림들도 그 나름의 힘과 역동성이 느껴지지만, 단답형 상식 퀴즈 대회에서 '권투하는 그림' 내 놓고 '이거 그린 사람?'하는 퀴즈가 나온다면 자동으로 '조지 벨로우즈!'을 외칠만 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그림 세계를 단순무식하게 정리해본다면 대략 세가지 정도로 분류가 됩니다:

 

 (1) 그를 대표하는, 권투선수 시리즈

 (2) 도시 주변의 풍경과 서민의 삶

 (3) 일반 서민의 초상화

 

제가 미술관들을 돌면서 '사냥'한 그의 작품 사진들을 주제별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권투선수

 

Both Members of This Club (1909)

두 선수

Oil on canvas, 45 1/4 x 63 1/8 in. (115 x 160.5 cm)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흰색의 하일라이트가 들어간 왼쪽 선수, 얼굴에 피가 낭자합니다.  오른쪽 선수, 치고 들어가는 대각선 구도가 역동적이지요. 반대방향의 대각석 구도의 관객 풍경이 그림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피가 낭자한 가운데, 아래 중앙의 관객은 입을 벌리고 웃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권투선수가 피를 흘리거나 말거나, 관객의 입장에서는 링에서 피가 튀고 살점이 튀고 누군가 되게 쓰러지고 그래야 신이 나는 법입니다.

 

웹에서 조지 벨로우스 이미지를 찾아보시면 이와 유사한 다른 권투경기 장면 그림들을 많이 발견하실수 있습니다. 그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조지 벨로우즈의 권투경기 그림을 찾아 천지를 유랑하며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어릴때, 할아버지가 권투중계의 팬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권투중계의 일정을 일일이 표시해놓고, 그의 일기장에 적어놓고 절대 빼놓지 않고 들여다봤습니다. 아마도 돌아가실때까지 그러셨을겁니다. 단지 중계방송만 보신것이 아니고, 서울 우리집에 오시면, 어린 우리들을 이끌고 월곡천 건너, 시장통에 있는 '체육관'에 구경을 가곤 했습니다. '체육관'이 뭐하는데냐 하면 당시 무명 아마추어 선수들이, 혹은 권투선수 지망생들이 모여서 연습하는 '도장'이다 이거죠.  우리들은 거기서 밤이 이슥하도록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고, 혼자 줄넘기하거나 혼자 샌드백 치면서 훈련하는것을 구경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체육관에 따로 '탈의 시설'이 없었던것 같습니다. 가끔 우리는 잘생긴 '오빠'들의 (그때 나는 꼬맹이였으므로) 실한 엉덩이 구경도 할수 있었는데,  선수들이 체육관의 구석진곳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거든요. 그 구석진 곳이 하필 우리가 염탐하던 창가였으므로 그들이 창가쪽 구석에서 후다닥 바지를 내리고 체육복으로 갈아있거나, 체육복에서 평상복으로 탈바꿈하는 광경을 볼 수 밖에 없었지요. (일부러 그런게 아니고요 -.-;; )   아니...엉덩이밖에 안 봤습니다... 헤헤헤.

 

어릴때는 할아버지가 권투중계 보시는 것이 못마땅했는데요, (왜냐하면 내가 어린이 프로를 볼 수가 없으니까) 지금도 그런 스포츠 중계에 재미를 못느끼므로 여전히 볼 일이 없는데요, 하지만 이 그림은 제 맘에 듭니다.  조지 벨로우즈가 무슨 맘으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권투 장면을 그의 그림 소재로 잡았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신선한' 시도였고, 결국 그의 트레이드마크 (Signiture) 작품이 되고 말았지만, 그것 말고도,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인생 이렇게 치고 받고 맞다가 뻗는거지...하는 비감한 생각도 들고,  누구나 그런거지, 나만 유독 두드려 맞는것도 아니지, 이런 위안감이 든다니깐요, 글쎄.

 

 

 

2009년 12월 13일,  국립 미술관에 가서 조지 벨로우즈의 Both Members of This Club (1909)라는 작품을 다시 감상하고 있었는데요, 마침 미술관 도슨트(Docent 전문 안내원)가 사람들을 이쪽으로 안내해와서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더군요. 그래서 곁에서 귀동냥을 했지요. 새로 알게된 사실은,  1900년 초반 당시에는 상업적으로 복싱 경기를 하는것이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공개적인 복싱매치가 아니고, 남성들의 '음성적인' 클럽에서 진행된 경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목도 Both Members of This Club (이 클럽의 두 회원)이라는 식으로 달린 것이라고 하네요.  두 '선수'라고 하면 안되고, 그냥 클럽의 회원간의 친선경기같은.    그러면 이 클럽에서는 복싱만 했겠는가?  다소 '음성적인' 클럽이었으므로 그 안에서는 복싱 말고도 다른, 다양한, 그러나 저로서는 전혀 알수 없는, 남자들만의 '음성적'인 오락이 진행되었겠지요~

 

 

 

 

 

뉴욕 빈민가의 아이들

 

 

이 작품은 위의 권투선수 그림보다 2년 앞서서 그려진 것입니다.  뉴욕의 East River 강변에는 그 당시 가난뱅이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서울의 허술한 한강변 산동네를 연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제목이 Forty Two Kids (42명의 아이들) 인데요 제목의 'kid'가 단순한 '아이들' 이 아닙니다. 아이들이라는 영어 단어로는 Children 이 따로 있지요.  요즘 Kids라는 단어를 '아이들'이라는 의미로 흔히 사용하기는 하지만 백여년전 이 kid 라는 말은 '슬랭'으로 대개 이민자 아이들처럼 가난뱅이 아이들을 일컫는 표현이었다고 합니다. 그냥 아이들이 아니라...말하자면...'애새끼들'이라는 뉘앙스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

 

이 kids 라는 어휘를 저도 아주 조심해서 사용하는 편인데, 제가 교육을 전공했고, 학교에서 교사로도 일을했고, 그래서 대학원 수업을 들을때도, 온통 '아이들,' '학생들' 관련 이야기였지요. 그러니까 주로 사용하는 어휘가 students, children, ESL children, ESL students 뭐 이런 언저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무심코 지도교수와 논문 이야기를 하다가, "These ESL kids..." 뭐 이러고 말을 하니까 지도교수가 주의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학생을 존중해야 하는 교육자이다. students 나 children, learners 말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적합하지만 kids 라는 말은 부적합해보인다."  그러니까 그 kids 라는 어휘가 아직도 품위있는  어휘로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 kid의 원뜻은 염소새끼 입니다.)

 

자 우리들의 조지 벨로우즈 선수(?)가 그 가난뱅이 뉴욕 빈민가의 이민자의 '애새끼'들을 화폭에 담았다는 것인데요. 정말 42명인지 한번 헤아려 볼까요?

 

 

Forty Two Kids (1907)

42명의 아이들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촬영

 

 

이 작품이 1908년 어느 전시회에 소개가 되었을때 평단의 반응은 싸늘하고 조롱기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뭐 이따위 그림을 그림이라고 그렸냐 이거죠.  가난뱅이 애새끼들이 허술한 강변에서 노는 것이 무슨 그림의 소재가 되는가 씹었을겁니다.  하지만 평단의 싸늘한 반응과는 달리, 이 작품은 곧 개인 콜렉터에게 팔려나갔는데, 이것이 조지 벨로우즈가 최초로 개인 콜렉터에게 판매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워싱턴의 코코란 미술관에 있지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Bill Bryson 의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kid 의 일화중에서 전쟁이후 베이비붐 세대로 성장했던 작가 빌 브라이슨의 회고가 소개됩니다.  그가 과장되게 술회하기를, 전후 베이비붐 세대였던 자신들은, 어딜가나 애가 넘쳐나서,  그가 살던 아이오와 시 변두리의 강변에 가면 수천명의 아이들이 모여서 멱감기를 했다고 하는데요.  물론 조지 벨로우즈 그림속의 아이들은 1907년 8월의 아이들입니다.  베이비붐 세대보다 50년전에 '이민자 붐' 세대의 아이들이지요.

 

이 그림이 제게도 낯설지 않은 이유는, 비록 지구 정반대쪽 대륙에서 성장했지만, 저 역시 60년대 70년대 베이비붐 시대의 일원으로 변두리 가난뱅이 아이로 성장했다는 공통 분모 때문일것입니다.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의 회고로는 '네 오라비나 네가 태어나던 시절에는 어느 집에서나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어느집 여자나 배가 불러 다녔다. 애가 참 많이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 많은 애들이 뭘하고 놀았을까요.  사실 도심에서 성장했지만 저는 어린시절 골목에서 뭘 하고 놀은 기억이 별로 남아있지 않고,  즐겁게 논 기억은 모두 시골집에서였습니다.  여름 한철 시골 개울가에 가면 약속도 필요없이 아이들이 있었고, 우리들은 수영복도 없이 그냥 입은 옷을 벗어던지고 물에 들어가 놀았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저는 초등학교 2학년때까지 옷을 벗고  개울에서 물놀이를 했습니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아직 몰랐다는 것이지요) 여자아이나 남자아이나 그냥 물속으로 뛰어 드는 것으로 각자 부끄러운데를 가렸다고 생각하고 그냥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는 것이지요.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빤쓰라도 입고 물장구를 쳤고, 초등학교 5학년부터는 싸구려 나이롱 수영복을 입고 노는 '문명인' 반열에 들 수 있었지요.

 

제가 가끔 이런 저의 '야만적'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  서울이나 대도시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또래 친구들은 저를 '원시인' 쳐다보듯 바라보며 무슨 외계인이나 거짓말장이를 대하듯 휑한 표정으로 대합니다.  자기네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풍경속에 내가 있었다 이거죠.  하하하. 사람들은 자기가 처한 환경을 '평균적' 환경으로 인지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신의 경험 영역 바깥의 일은 외계의 일처럼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나'역시 피할수 없는 한계죠. 나 역시 그런 눈으로 남을 판단할 것이므로.  조지 벨로우즈가 '애정'을 갖고 변두리 아이들이 벌거벗고 노는 풍경을 그렸을때, 어떤이들은 '이것도 그림이냐'로 반응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럴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지구상에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거죠...

 

 

첨언:  그런데 위의 42명의 아이들 그림이...어쩐지 Thomas Eakins The Swimming Hole(1885) 라는 그림을 연상시킵니다.  토마스 이킨스 (1844-1916)는 미국 사실주의 미술가들의 '대부'쯤되는, 후에 활동하는 사실주의 화가들 (The Eight, Ashcan)에게 가장 영향을 끼쳤던 미국화가라 할 만 합니다.  조지 벨로우즈가 선배 대가인 이킨스의 그림을 염두에 두었는지 아닌지는 알수 없으나, 참 닮았단 말이지요...  ;-)

 

 

 

 

 

변두리의 푸른아침

 

멀리로 고층 건물들이 밀집한 것으로 보아 역시 뉴욕의 강변 풍경으로 보입니다. 역시 강변 부두에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고 누군가 불을 피웠는지 흰 연기도 솟아 오릅니다.  대략 어느 추운 겨울 아침 강변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으니까요. 추우면 웅크리쟎아요. 이들의 하루는 오늘도 고단하게 흐를것입니다.  이들의 곤고한 풍경과는 달리 푸른 색조가 아름답지요? 

 

 

Blue Morning (1909)

푸른 아침

Oil on Canvas

86.3 x 111.7 cm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다리밑 외딴 숙소

 

그림 오른쪽 구조물이나 그 위를 지나는 판으로 보아 이것은 다리(교각)의 일부 같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뉴욕시의 어느 커다란 다리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있고, 그림의 중앙에 6층짜리 건물이 똠방, 대똑하게 서있습니다.  이곳이 그림의 제목이 되는 '외딴 숙소'인것 같습니다.  'tenement' 라는 어휘를 언라인으로 검색해보면 이런 의미가 소개가 됩니다. (http://www.thefreedictionary.com/tenement)

 

1. A building for human habitation, especially one that is rented to tenants.
2. A rundown, low-rental apartment building whose facilities and maintenance barely meet minimum standards.

해석: (1)  세입자 임대용의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
        (2) 극히 기초적인 수준도 안되는 시설을 갖추고 있는  싸구려 아파트 빌딩

 

 

The Lone Tenement (1909)

외딴 숙소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그림 왼편에 사람들이 모여서 불을 쬐고 있는것 같지요?  멀리 강에 은은한 햇살이 비치는데, 다리밑의 사람들은 불가에 모여 서 있습니다. 웅덩이에 보이는 물은 살얼음이 얼었을것 같습니다.  이런 뉴욕의 풍경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해던 Georgia Totto O'Keeffe (November 15, 1887 – March 6, 1986) 가 그렸던 뉴욕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Georgia O'Keeffe
Cityscape with Roses
1932
oil
84 3/8 x 48 1/2 in.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the Georgia O'Keeffe Foundation

 

 

1932년이면 미국의 경제 암흑기 입니다. 그 당시 조지아 오키프가 묘사한 뉴욕은 장미빛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작가의 작업 취향이야 각자 자유이고 조지아 오키프가 매력적인 화가임에는 틀림없으나,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에 '사회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돈많은 사진가 스티글리츠의 사랑속에 경제적인 어려움도 모르고 예술에만 전념했겠지요.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만을 들여다볼때는 그의 작품에 감탄을 하다가도, 그 당시에 혹은 그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하던 작가들과 비교해보면, 어딘가 조지아 오키프의 미술세계가 '공허'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사람'한테 관심이 없었던 사람 같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러한 저의 비판적인 시각은, 사람이나 '세상'에 관심을 가진 저 자신의 취향에서 출발하는 것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냥 문득, 조지 벨로우즈의 뉴욕 풍경 그림을 보다가, 그 속의 가난뱅이 애새끼들이라던가, 빈민들의 풍경이 그려진 그림을 보다가 문득,  조지아오키프의 뉴욕 풍경이 떠오르면서...아하...이들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았던거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National Gallery of Art 에 조지 벨로우즈의 그림이 걸려있는 풍경입니다. 왼쪽부터 '권투선수' '푸른 아침' 그리고 '뉴욕' 그리고 '쓸쓸한 숙소'가 차례차례 보입니다.

 

 

 

초상화들

 

 

다음은 크라이슬러에서 '사냥'한 그의 '피아노 앞의 엠마' 입니다. 엠마는 그의 부인입니다. 뉴욕의 미술학교에서 만났는데 엠마는 그림을 그만두고 피아노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위의 Blue Morning 에 보였던 그 푸른 빛이 이 그림에서 좀더 뚜렷하게 표현됩니다. 아, 조지 벨로우즈는 이런 색감의 푸른빛을 좋아했구나 추측하게 됩니다.

 

 

Emma at the Piano (1914)

피아노 앞의 엠마

Oil on Canvas

94x73 (가로세로)

2009년 11월 29일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의 두 딸중 큰딸인 앤 입니다. 커튼과 허리 부분의 청색과 흰 드레스가 대조를 이루는데요. 역시 Blue Morning 이나 Emma at the Piano 에서 선보인 청색과 흰색의 대조가 이 그림에서도 나타납니다.

 

Anne in White (1920)

흰 드레스의 앤

147x108.9 cm

Oil on Canvas

2009년 11월 7일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는 엠마와 결혼한 이후로 두 딸의 아빠가 되었는데, 아내와 딸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그의 그림의 소재가 도시의 풍경에서 가정적인 것으로 변모합니다. 그래서 43년의 짧은 생에서 그의 후기에는 초상화 작품들이 그려집니다. 물론 그의 초상화 작품은 그의 아내 혹은 그가 살던 마을의 마을 사람들, 이런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서 삽화 작업도 계속했고, 시카고 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습니다.  그는 '맹장'이 터져서 그만 요절을 하고 맙니다.

 

 

2009년 12월 5일 redfox

 

 

그의 마지막 작품들

 

 

Ringside Seat (1924)

맨 앞줄 관람석

2009년 9월 24일 워싱턴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The Picnic (소풍) c. 1924

Oil on Canvas

2010년 1월 23일 볼티모어 미술관 미국화 갤러리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 (1882-1925)는 43세의 나이에 (우리나라식으로 따지면 44세가 되던 해에) 맹장이 터져서 요절한 화가인데요, 위의 두 작품들은 1924년, 그가 죽기 전 1년전쯤에 그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위의 경기장 장면이 좀 뿌옇지요?  제가 사진을 잘 못 찍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흐릿한 등불 아래의 장면을 묘사하듯 노리끼리하게 아슴프레 합니다.  제가 허시혼에 여러차례 들렀는데, 볼때마다 저 작품은 좀 어딘가 노란 안개속에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아래의 '소풍'역시 그가 죽기1년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요, 그림 분위기가 매우 독특합니다.  (그림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보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미술관에 갈때마다 본 편인데요. 그러니까 제가 조지 벨로우즈에 대해서 알기 전에도 이 작품을 알고 있었습니다.  작가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채로 분위기가 특이한 작품으로 기억을 한 거죠. 

 

제목이 '소풍'인데요, 전체적인 풍경이나 분위기는 암울하고, 음침하고, 곧 어디서 천둥 번개가 칠것같은 불안감을 줍니다. 갑자가 돌풍이 불것같기도 하고요. 물빛도 하늘빛도 심상치가 않아요. 구름조차도 예사롭지가 않고요.

 

가운데에는 소녀가 줄넘기를 들고 서 있고요, 그 아래에서 누군가가 마치 절벽에서 올라오는듯 손을 뻗치고 있죠. 낚싯대를 드리운 남자와, 피크닉 보자기를 펼친 여자가 왼편에 있는데, 오른편에는 한 남자가 사지를 벌리고 하늘을 향해 누워있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서 이태전에 아이들과 대화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림이 세기말 적이야. 뭐랄까...암담해... 저 줄넘기를 들고 있는 소녀 말야, 저 줄넘기 이미지는 살바도르 달리도 그린적이 있고... 영원의 상징이라고도 해. 영원은 죽음과도 통한다는 거 알아? 죽음은 영원하쟎아.  줄넘기가 그리는 원, 그 원의 끝없는 회전, 인연의 굴레를 벗어날수 없음을 상징할수도 있고.  하필 줄넘기를 들고 언덕 가장자리에 서있는건 또 뭐니. 불안해보이쟎아.  전체적으로 참 불안해보여."

 

이 그림을 보면 벨로우즈가 즐겨 그렸던 청색 색조와 흰색의 하일라이트도 여전히 보이는데요, 신비로우면서도 스산하죠?  어쩌면 이것이 그가 사랑하는 두 딸과, 아내와 가졌던 인생 최후의 소풍이었는지도 모르죠. 그는 화면 오른쪽에 자신의 주검까지 그렸던 것인지도 몰라요. 그 자신은 그걸 의식하지 못했겠죠.

 

우리는 가끔 그런 얘기 하쟎아요. 어떤 사람이 죽었을때, 그가 죽기전에 나눴던 이야기나 일화들을 떠올리면서, "죽을걸 알고 그랬나?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 뭐 이런 얘기 하죠.  뭐 마치 죽을 사람처럼 유언처럼 몇마디 한 것이 마지막 말이 되기도 하고요.  생명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안대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뿐 안다는거죠.  그래서 죽음을 예견하는 말이나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해요 (그런 설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냥 그런 관점에서 그는 이미 그의 죽음을 예견한 그림을 남긴것이 아니었을까....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다시 만났을때, 그리고 문득 그의 생몰연대와 그림의 제작 년대를 비교해보다가, 문득,  번개치듯 문득,  이런 쓸데없는 상상도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 상상을 하자, 이 그림이 품고 있던 신비로운 세기말적 느낌에 대한 해답을 얻은 기분이 드는겁니다.  그는...다가올...죽음을...그렸나봐...

 

 

2010년 1월 29일 내용 보충 Red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Ashcan School2009. 12. 5. 13:24

 

Snow in New York  뉴욕의 눈 (雪),  1902년

Robert Henri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워싱턴 국립 미술관에서 촬영

 

 

로버트 헨라이 (Robert Henri 1865-1929)는 미국 사회사실주의(Social Realism) 미술가들의 스승으로 알려진 화가 입니다.  이 사람의 가족력이 좀 흥미로운데, 본디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Cozad 였고 그래서 로버트 헨라이는 원래 Robert Henry Cozad 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웃 사람과 다투다가 총질을 하는 바람에 이웃사람게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야반도주를 하는 수 밖에요. 결국 가족들도 야반도주한 가장을 따라 도망을 가게 되었는데, 훗날 새로운 삶을 위해 성씨를 바꿔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이름이 졸지에 로버트 헨라이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아, 그는 미국출신으로 유럽에서 주로 활동했던 화가 Mary Cassett (메리 커셋)과도 친척이라고 합니다.  메리 커셋에 대한 소개는 다음으로 미루기고 하겠습니다.

 

헨라이는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서 수학했고, 당시의 미국 젊은이들이 그러하였듯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1891년 필라델피아로 다시 돌아온 헨라이는 1892년부터 미술 학교에서 미술 교육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당시 인쇄매체의 삽화가로 활동하던

 * William Glackens

 * Goerge Luks

 * Everett Shinn

 * John French Sloan

 

등과 어울리며  Ralph Waldo Emerson,  Walt Whitman, Henry David Thoreau 의 사회사상 관련 글을 읽습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미국의 '초절주의 (Transcendentalism)'와 'Self Reliance (자기 주체)' 정신으로 널리 알려진 철학자였고, 월트 휘트만은 미국 최초의 산문시인으로 풀잎과도 같이 강인한 대중들을 노래한 시인이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우리에게 월든호수 (Walden) 라는 작품으로 알려진 역시 Self Reliance 정신의 신봉자였던 인물입니다.

 

이들은 이후에 활동의 본거지를 뉴욕으로 옮기게 됩니다. 헨라이는 뉴욕의 예술학교 (New York School of Art)에서 교편을 쥐게 되는데 이때 Edward Hopper, Rockwell Kent, George Bellow, Stuart Davis 등을 가르치게 되지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미국의 상황은, 사회적으로는 노동자들이 임금이나 작업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동조합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1904년에는 한해 동안 전국적으로 4,000 번의 파업이 진행되었다는 집계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노동운동은 주로 시카고, 디트로이트, 샌프란시스코, 뉴욕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미국의 고등학생등의 필독서중에 Upton Sinclair (업튼 싱클레어)의 The Jungle (정글, 1906)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고기 가공장에서 일하는 이민자 가족의 비극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이민자들은 Self Reliance (자기 주체) 정신으로 열심히 살아가려고 애쓰지만, 이들이 처한 노동 환경은 호락호락 하지가 않습니다. 약육강식의 정글이라는 얘기지요.  미국의 Self Reliance 라는 정신적 미덕도 통하지 않는 현상을 싱클레어는 고발하고 있는데요, 이와 같은 소설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나오고, 노동운동도 활발하게 진행되는 중심에 당시의 미술가들도 서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당시 미술가들은 사실적인 사회, 사람들의 풍경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런 흐름의 선두에 서 있던 집단이 헨라이를 위시한 애쉬캔 (Ashcan) 그룹이고, 이들이 후에 The Eight (8인회)로 거듭나게 되지요. 헨라이는 그의 친구들이나 제자들에게  주변의 사람과 삶의 풍경을 그리되, 이를 상대가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로 잽싸게 그리라는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Do it all in one sitting if you can," he advisded them. "In one minute if you can."  (Pohl, 2008) 

(해석: "그자리에서 한번에 그려버리게나," 헨라이는 그들에게 충고했다. "가능하다면 일분 안에." )

 

1902년 뉴욕에서 전시회를 가진 후 그는 풍경화를 접고 초상화를 주로 그리게 되었으며, 1908년에는 맥베스 갤러리에서 "The Eight (팔인회)" 전시회를 열게 됩니다. 사실 이 전시회를 열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마치 인상파 화가들이 프랑스의 살롱전에서 푸대접을 받은 후에 홧김에 인상파의 세기를 열었던 것처럼, Ashcan 화가들이 미국의 전시장에서 푸대접을 받자 미술비평가들과 정면으로 한판 단단히 붙은 후에 이 '팔인회' 전시회를 열게 된 것인데, 그 결과는 대중적으로나 비평계 모두 아주 호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헨라이는 사실 그의 미술 작품 보다는 그가 미국 사회사실주의 화가들의 지도자 역할을 잘 해냈고, 그리고 미술 교육에서 공로가 크다는 점에서 오히려 미술사적 인정을 받는 편입니다.

 

헨라이가 후기에 초상화로 돌아서긴 했는데, 그가 초상화 작업을 통해 사회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화폭에 담아보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미술관에서 발견한 그의 초상화 작품들은 악사, 소년, 인디안 소녀,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Gypsy with a Bandurria (1906)

반두리아를 들고 있는 짚시

Oil on Canvas

2009년 12월 29일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헨라이가 그린 작품입니다. (제가 헨라이에 큰 관심이 없다보니, 사진 상태가 성의가 없어보이지요? 예... 그래도 정성껏 찍을걸 하는 후회가 생깁니다.)  헨라이는 유럽의 '마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으로 소개가 되는데요, 이 그림 사진을 보니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과 비슷한 구도와 소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리부는 소년 창작 년도를 찾아보니 1866년이군요. 다리 모양 닮았죠?  전체적인 구도도...

 

 

Manet, The Fifer (1866)

 

 

 

 

 

 

The Beach Hat (1914)

비치 모자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Boy with Plaid Scarf (1916)

격자무늬 목도리를 한 소년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Indian Girl in White Ceremonial Blanket (1917)

제사용 담요를 휘감고 있는 인디안 소녀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이 작품은 헨라이가 뉴멕시코주의 산타페를 두번째 방문했을때 현지의 인디언소녀를 모델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소녀의 이름은 Julianita 로 San Ildefonso Indian 종족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아마도 제 그림 사진 파일을 뒤져보면 어딘가에 헨라이의 초상화 사진이 몇장 더 있을것 같습니다.  때로는 미술관에서 헨라이의 작품이 보일때,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한테 매력이 없어 보였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여기저기서 중구난방으로 봤던것들을 한페이지에 시간순서대로 정리하다보니 제가 미술관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도 됩니다. 그냥 하나 하나 볼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 예를 들자면 헨라이의 초상화의 소재가 된 인물들이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혹은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 인물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면서도 모두 닮아보인다는 것 (이는 헨라이의 표현 스타일에 일관성이 있어서 그러할 것이겠지요) 뭐 이러한 것들 입니다.  짚시 악사 그림과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 그림의 유사성도 미술관에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  사진을 쳐다보면서 생각한 것이고요.  그래서,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현상'을 관찰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미술관에서 미술작품을 눈으로 감상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후의 사색이나 반추 역시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

 

돌아보면, 저는 미술관에서 작품들을 구경하면서 '쾌락'을 느끼기도 하지만, 후에 사진들을 다시 정리하거나 관련 페이지를 적으면서,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사실들도 많은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의 '미국 미술 이야기' 블로그 프로젝트를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깨닫게 되는 것들이 페이지가 쌓일수록 늘어가니까요.

 

 

 

 

 

관련 페이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118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http://americanart.textcube.com/137

 

 

참고문헌:

 

1. Frances K. Pohl (2008),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Thames & Hudson; New York, NY

2. Suzanne Bailey (2001), Essential History of American Art, Parragon Publishing, Bath BA, UK

3. William G. Scheller (2008), America: A History in Art, The American journey told by painters, sculptors, photographers, and architects. Black Dog & Leventhal Publishers; New York, NY.

4. Marcha N. Hagood & Jefferson C. Harrison (2005) American Art at the Chrysler Museum: Selected paintings, sculpture, and drawings. Chrysler Museum of Art: Norfolk, VA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5. 09:45

http://www.claremontmckenna.edu/hist/jpetropoulos/arrow/holocaust/Franklin_Roosevelt.jpg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1882-1945)은 1932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래로, 죽을때까지 (1932-1945) 미국대통령직을 유지했다. 그는 미국에서 유일무이하게 4선 까지 이른 사람이며, 미국 대통령들중에서 3선 이상을 한 유일한 사람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이후로 대통령을 2선까지만 가능하게 하는 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미국이 어떤 지도자의 '독재'의 가능성에 눈을 뜨고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고안해낸 방법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2년도 넘는 기간동안 미국을 통치하였는데, 경제 대공황때 그가 취한 경제정책 (소위 뉴 딜 정책으로 알려져 있음)이 널리 알려져 있다. 세세한 내용까지는 차치하고라도, 그가  여러가지 국책사업을 펼치가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정책을 펼쳐서 경제난을 이겨내려 했다는 것은 중고등 학교 사회책이나 세계사책에도 소개되는 내용이다 (나는 중학교때 이런 내용을 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에서는 Social Security (사회복지) 제도가 있는데 이 사회복지법 (social security act)을 최종 승인하고 시행한 대통령이 바로 이 루즈벨트 대통령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기초생계를 보장하는 '사회복지'의 초석이 마련되었다고 한다면,  '의료복지'의 초석을 만들고자 하는 이가 현재의 '오바마' 대통령이다. (그가 미국 역사상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려고 하는 것인지...) 

 

 

 

바로 이러한 '국책사업,' '국가 주도의 경제정책,'  사회복지 정책등을 이유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을 '사회주의자'라 평하는 이들도 있다.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군에 속하는 '최장기 대통령직'을 수행한 대통령이 '사회주의자'라고?  우리는 이런 의문을 품을수도 있다.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대략 간단하게는 사회 통치 시스템의 측면에서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사회주의'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다수가 동등한 권리를 누리면서 동등하게 통치하는 시스템이 '민주주의'라면,  소수의 '통치집단'이 사회 운영을 관장하고 계획을 세우고 시민들에게 각자의 역할을 분담시키는것이 '사회주의'적 통치체제라 할수 있다.  경제 구조적으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서로 상반된 방식으로 굴러가는데, 대개 민주주의적 방식과 자본주의 체제가 서로 궁합이 맞아보이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체제가 상통해보이므로 우리가 흔히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뒤섞어서 인지하기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우는 '대통령제'를 탄생시킨 미국, 자유 경제와 자본주의의 꽃으로 알려진 미국땅에서 미국을 부흥시킨 존재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거론되고, 하필 그의 정책과 관련하여 그를 '사회주의자라 부른다니 이것은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사회주의는 이것이고 민주주의는 저것이다 라던가, 자본주의는 이것이고 공산주의는 저것이다라는 양분법식 생각에서 한걸음 물러설 필요가 있어 보인다.  루즈벨트는 국가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노력했고,  사회주의적 방식이라  일컬어진 뉴딜정책은 소기의 효과를 발휘했으며, 뉴딜정책의 발판 위에서 미국은 다시 '민주주의'와 '자유경제' '자본주의'의 꽃을 활짝 피울수 있었던 것이니...

 

 

 

http://americanart.textcube.com/65

스미소니안 국립 초상화 박물관에 걸린 벤샨의 루즈벨트 대통령 초상화

 

 

 

(미국미술 공부하다 잠시 생각) 2009년 12월 4일 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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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4. 09:58

 

Mrs. Abraham White, Jr. and Daughter Rose c. 1808-1809

Oil on Canvas

64.8 x 76.2 cm

2009년 11월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http://americanart.textcube.com/34  페이지에서 소개해드린대로 Joshua Johnson (조슈아 존슨 1763-1824) 은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태생의 흑백 혼혈 초상화가 입니다.  일설에 따르면 조슈아 존슨은 당대의 미술가였던  Charles Wilson Peale 과 함께 미술 수업을 받았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림속의 주인공은 이 초상화를 그린 직후에 30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을 했다고 합니다.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반쯤 열려있는 책, 그리고 아이의 손에 들려있는 들딸기는 조쥬아 존슨이 즐겨 그리는 스타일이었다고 합니다. 앞서의 페이지에 소개된 그림들보다 나중에 그려진 그림이라서 그런지 그림도 좀더 세련되어 보입니다.

 

크라이슬러 미술관 소장품입니다.

 

 

2009년 12월 3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EdwardHopper2009. 12. 4. 09:15

Edward Hopper (1882-1967)

New York Pavement (1924 or 1925)

뉴욕의 보도

Oil on Canvas

75.6 x 62.9cm (가로 x 세로)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월척'을 낚은 기분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1924년이나 1925년 작품으로 추측되므로 그가 42세때, 아직 세상이 '대가'의 출현을 알아보지 못하던 시기의 그림이라 할 만 합니다.  '뉴욕의 보도'라는 제목처럼 뉴욕 시내의 어떤 건물 앞 풍경을  맞은편 건물 2층이나 3층 혹은 옥상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각도로 잡아 놓았습니다.  얼핏 수녀복을 입은듯한 여인이 유모차를  밀며 걸어가는데 이 여인의 머리 두건이 펄럭거리는 것으로 보아 바람이 휙 부는듯 합니다.  도심의 골목길 앞을 지날때 문득 불어오는 골바람일지도 모르지요.

 

여인의 나부끼는 머리두건이나 그의 방향성에서 어떤 움직임이 느껴지지만, 그외의 모든 장치들은 요지부동으로 꼼짝도 않겠다는 태도로 무겁게 버티고 있습니다. 회색돌로 이루어진 건물과 역시 같은 색조의 보도에는 어떤 틈새도 보이지 않습니다.  유모차속의 아이의 얼굴도 보이지 않습니다.  건물의 창 안쪽으로 노란 블라인드가 드리워져 있고, 가운데 창은 커튼도 열려있지만, 커튼 안은 캄캄하기만 할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수녀처럼 보이는 이 사람의 검은 옷과, 유모차의 검정빛, 그리고 건물 입구나 유리창 안의 검정색은  노란 블라인드와 대조를 이루면서 더욱 어둡게 느껴집니다.

 

저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엄마, 아버지, 아이들' 이런 '가족'이 어우러진 풍경을 본 적이 없고, 아이들이나 아기를 본 적도 없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 그림이 '아기'가 등장하는 유일한 그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조차 '아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아기'의 존재를 추측할 뿐. 

 

우리에게 호퍼의 그림이 외롭거나, 쓸쓸하거나, 혹은 을씨년 스러워 보이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의 그림에 '미래'를 상징하는 '아이'가 없어서 그런것은 아닌지...  문득, 유모차를 끌고가는 검은 제복의 유모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어머니와 아기의 관계가 아닌 을씨년 스러운 제복을 입은 (저승사자 같아보이는) 유모의 보호를 받는 이 아기가 행복할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그림이 아주 암담해보이지 않는 이유는 아기를 덮고 있는 붉은 천,  유모의 붉은 뺨, 건물 2층 부분에 보이는 붉은 벽돌 일부, 그리고 창문 블라인드의 햇빛같이 고요한 연노란색이 여기저기서 '생기'를 보내기 때문인데요, 이런 미묘한 생기 때문에 우리들은 호퍼의 쓸쓸맞아 미치겠는 그림앞에서 아쉬운듯 아쉬운듯 떠나지 못하고 맴돌게 되는 것 같습니다.

 

 

2009년 12월 3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4. 08:43

http://americanart.textcube.com/184  에드워드 힉스가 꿈꾼 평화의 나라 페이지에서 퀘이커 교도였던 힉스가 즐겨 그린 소재 두가지를 소개한바 있습니다. 한가지는 미국 정착사를 바탕으로 한 '평화의 왕국' 주제이고, 또 한가지는 성서를 바탕으로 한 '노아의 방주' 주제입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190 버지니아 남부 해안도시인 Norfolk 에 위치한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는 에드워드 힉스의 또다른 역사화를 두 점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Washington at the Delaware  c. 1849

델라웨어의 워싱턴

Oil on Canvas

90.2cmx71.1cm (가로 세로)

 

 

이 그림은 훗날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조지 워싱턴이 미국 독립전쟁 당시 영국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역사적인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힉스가 독창적으로 창작했다기 보다는 현재 보스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Thomas Sully 의 Passage of the Delaware (1819)  525.8cm x 372.2cm 를 본떠서 그린 것입니다.

 

Thomas Sully 의 그림

 

 

남의 그림을 그대로 베껴 그린것이 뭐가 대단하다고 박물관에 모셔 놓는가?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에드워드 힉스가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바 없고, 그자신이 순수 예술가라기보다는 마차를 장식하거나 표지판을 잘 만들어내는 '기술자'였고,  혼자서 익힌 그림 재주가 뛰어나서 다른 사람의 그림이 맘에 들때 이를 베껴그리거나 이런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거나 팔면서 살았다는 측면을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를 '풍속화가'로 분류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퀘이커 교도들이 '평화주의자'들이므로 전쟁을 거부하고, 그래서 병역도 거부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열렬한 퀘이커 교도였던 에드워드 힉스가 워싱턴의 역사적인 '전쟁'을 즐겨 그렸다고 하는 것이지요.  에드워드 힉스는 워싱턴과 독립군을 '신의 대리인'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의 애국심이 그의 종교관에도 영향을 끼친 것인데,  '호국불교' 정신하고도 비슷하군요 =) .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776   c.1840-1845

1776년 독립선언

Oil on Canvas

74.3cm x 65.4 cm (가로세로)

 

 

1776년 독립선언을 묘사한 이 그림의 이마에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776 이라고 새겨진 것이 보입니다.  힉스가 '표시판' 만드는 기술자였다는 대목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에드워드 힉스를 '순수 미술'의 차원에서 보기는 힘들고, 오히려 '생활속의 장인'의 측면에서 해석할때 그의 정체성에 생생하게 다가갈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때로 저는 이렇게 서툰 환쟁이들을 좋아합니다. 우리 엄마의 그림과 많이 닮았거든요.)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09. 11. 30. 00:48

 

크라이슬러 미술관 홈페이지: http://www.chrysler.org/

이 페이지의 사진들은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주 남단의 해안도시 Norfolk시에 크라이슬러 미술관이 있습니다.  1933년 Norfolk 지역의 자연, 미술 박물관 (Norfol Museum of Arts and Sciences) 으로 처음 문을 열었던 이곳은 1971 Walter P. Chrysler Jr. 가 그가 선대로부터 상속받았거나 그 자신이 수집했던 미술품들을 한꺼번에 기증하면서 '크라이슬러 미술관'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Walter P. Chrysler Jr. 는 크라이슬러 자동차를 탄생시킨 Walter P. Chrysler 의 아들입니다. 

 

워싱턴에서 Norfolk까지는 대략 200마일 거리. 자동차로 네시간 거리입니다. (왕복 여덟시간). 아침 여덟시쯤 출발하면 정오쯤에 넉넉히 도착하고, 오후 다섯시까지 한가롭게 미술관과 인근 지역 구경을 하다가 저녁을 먹고 여유있게 운전을 해도 집에 밤 열시나 열한시에 도착하게 되므로 크게 부담스러운 거리는 아닙니다.

 

이곳은 입장료 무료입니다. 특별전시를 할 경우 특별전시장 입장료만을 별도로 부과하기도 하고,  자발적으로 푼돈을 입구의 모금함에 넣을수도 있습니다. 관람객들의 자발적 기여를 유도하기는 하지만, 강제적이지 않으므로 편안하게 드나들수 있습니다.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면 코트야드 (안마당) 천장 유리를 통해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천장에 휘늘어진 색깔보자기 설치물은  Sam Gilliam 의 Norjolk Keels (1998)이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파란 하늘이 내다보이는 철제 프레임과 알록달록하게 펄럭이듯 늘어진 보자기들 전체를 묶어서 볼때 작가의 의도가 드러납니다.  철제프레임과 파란 하늘과, 펄럭이는듯한 보자기들은 마치 푸른 하늘아래/혹은 파란 바닷물결 위에 둥실둥실  떠있는 노폭(Norfolk)앞바다의 배 같기도 하지요.

 

 

 

이것은 2층 전시실 복도에서 다른 각도로 잡아 본 것입니다.  눈부시게 환한 입구가 보입니다. 그 입구 바깥에 파란 바닷가 펼쳐져 있어서 그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물결 그림자가 미술관 벽에 반사가 되기도 하는데, 실내에 잡히는 바닷물결 그림자를 보는 기쁨도 큽니다.

 

 

 

 

 

크라이슬러 가문이 재벌답게 세계 여러나라의 귀한 미술품들을 골고루 수집하였고, 1층에서는 이집트 특별전도 진행되고 있었는데요, 아시다시피 제가 '미국미술'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므로 아프리카나 아시아 그밖의 고대 문화재등은 건성으로 보고 지나간 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회화나 비슷한 시기의 유럽회화 쪽 전시장에서 보냈습니다.  이곳은 2층의 미국 건국 초기의 작품들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벽에 걸려 있는 회화 작품 중에는 얼마전에 소개되었던 Edward Hicks 의 그림도 보입니다. (찾아보시겠습니까?  이미지가 작아서 찾기 힘드시겠지만...)

 

 

 

 

풍경화가 Bierstadt (비어슈타드) 의 대형 풍경화가 왼쪽에 보이는군요.

 

 

미국이 강세를 보이는 현대 미술 전시실입니다. 칼더의 모빌 작품도 보이고, 오른쪽에는 리히텐시타인의 작품도 보이지요.

 

 

 

 

아하,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이곳에 백남준씨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Hamlet Robot (1996) 이라는 작품입니다. 열세개의 모니터에서 각기 다른 이미지들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왕관을 쓰고 있고요. 오른속엔 긴 칼, 왼손엔 해골이 들려있습니다.  (백남준씨 페이지는 따로 열 생각인데, 그때 그의 작품들에 대해서 좀더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1층 구석에 단아한 카페가 있었는데,  저는 간단히 아이스티를 주문해서 마셨습니다. 음료수 가격이 스타벅스 커피 가격보다 저렴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깔끔한 테이블, 정중하고 정다운 써빙, 깨끗한 유리잔 이런 것들이 어우러진 상태에서 스타벅스 커피값보다 싼 음료수라... 이정도면 이 미술관의 카페는 최고점수를 주고 싶어집니다.

 

 

 

 

기념품가게에 예쁘장한 물건들이 많이 보입니다만,  특별히 뭘 사지는 않고 구경만 하게 됩니다.  그래도 예쁜 물건들 구경하면 기분이 좋아지쟎아요.  저는 - 늘 그러하듯, 이곳에서 '미국미술화집'을 한권 샀습니다. 이 미술관이 소장하는 미국미술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깃들여져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거의 폐관 시간이 다 되어 미술관을 나와 바깥 구경을 했습니다. 이곳은 노폭의 'Historic Site (역사 유적지)'입니다. 그래서인지 '유럽'의 마을을 연상시키는 고풍스런 예쁜 집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이 집들중에는 역사 유적지로 보존되고 관람객들에게 공개가 되는 곳도 있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직접 방문하지는 못했습니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인근의 역사 박물관이나 고가들을 구경하러 다녀도 재미있을것 같습니다.

 

 

 

오후 다섯시의 햇살.   박물관 정문 앞에서는 안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두개의 붉은 지붕 건물이 보입니다. 파란 바닷물이 찰랑거리지요. 이 물이 저녁햇살에 반사되어 미술관 안의 벽에 그림자가 집니다.  저는 이 파란바다보다, 흰 벽에 찰랑거리던 그 '그림자'가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무엇에 매혹될때, 우리는 가끔 실체가 아닌 '그림자'에 빠지기도 하는데,  때로는 그것이 '그림자'인줄 알면서도 그것을 사랑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림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지요.  그것은 인간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상상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상상력을 버리고 현명해지기보다는, 어리석은채 상상력을 간직하는 쪽이, 더 재미있을지도 모르지요...

 

 

 

 

 

 

이곳에서 감상했던 작품들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것은, 이 것이었습니다.

 

 

Paul Gauguin 폴 고갱의 The Loss of Virginity (처녀성의 상실) (1890-1891).  누워있는 여자의 오른손에는 시든 꽃 한송이가 보이고 (전통적인, 처녀성 상실의 이미지) 왼쪽 가슴에는 여우 한마리를 안고 있습니다.  발끝은 서로 모아져있고, 발치 아래의 바위는 남근 모습과 꽤나 닮아있습니다.  그런데 저 언덕아래의 사람들은 왜 그려 놓은 것일까?  문득 이런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다 알겠는데, 저 언덕아래 사람들은 뭔가? 작가는 왜 그들을 그려 놓은 것일까?  관망자? 혹은 결혼식 하객들인가?  이 그림은 우울해보이지도, 명랑해보이지도, 초현실적으로 보이지도 않고...그냥...눈길을 끌면서 사람의 발걸음을 꽉 움켜쥐는군요.  이 그림에서 한참동안 떠나지 못하고 기웃거리고 기웃거리다, 전시실들을 한바퀴 다 둘러본후에 또 가서 들여다보고...그랬습니다.  우울하지도, 명랑하지도,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데 꽤 매혹적인 그림입니다.

 

 

 

 

 

석고 조각작품실에 스케치북과 미술도구가 놓여져 있었다. 아무나 그림 그리고 싶으면 그리라고.

 

 

 

 

 

2009년 11월 28일 밝고 따뜻한 토요일에 방문.

Posted by Lee Eunmee
Books2009. 11. 30. 00:38

American Art at the Chrysler Museum: Selected Painting, Drawing, and Sculpture

 

 

American Art at the Chrysler Museum

: Selected Painting, Drawing, and Sculpture (Hardcover)

Margaret Jarman Hagood (Author)

 

http://americanart.textcube.com/190 미술관샵에서 샀다. 편집이나 색상 모두 마음에 꼭 든다.  작품사진 상태가 선명하고, 작가 설명, 작품 설명을 상세하게 잘 정리해 놓았다.  45달러.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1. 26. 06:39

Edward Hicks 관련 페이지를 두개를 열었습니다.

 

1. http://americanart.textcube.com/184

2. http://americanart.textcube.com/185

 

해당 페이지 관련 간단한 '확인' 퀴즈 입니다. (앞으로 어떤 주제의 글을 한꼭지 마치면 퀴즈 페이지를 하나 만들기로 했습니다 = )  )

 

 

1. Edward Hicks 가 즐겨그린 주제가 두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가)

   나)

 

 

2. Edward Hicks가 속했던 종교집단은 무엇인가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

 

 

3. Edward Hicks 의 그림속에 등장하는 동물 이름 다섯가지를 적어보세요

 

  1. _____________________

  2. _____________________

  3. _____________________

  4. _____________________

  5. _____________________

 

 

 4. Edward Hicks 가 남긴 그림들중 생각나는 작품 제목이 있습니까? 제목이 무엇인가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나요?

 

  1. 제목: ______________________

  2. 내용: ______________________

 

 

 

 

수고하셨습니다. 정답은 해당 페이지에서 찾아 보셔요.  =)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1. 24. 13:10

19세기 미국의 풍속화가 Edward Hicks (http://americanart.textcube.com/184)페이지를 열었는데, Edward Hicks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퀘이커 교도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지금 보이는 것은 미국의 식품 매장 어디에 가나 흔히 보이는 '퀘이커'라는 식품 브랜드 입니다.

 

 

 

 

퀘이커에서 만들어내는 것으로는 오트밀, 시리얼, 각종 곡물이 들어간 식사대용 '영양바,'  쿠키 등이 있습니다. 저역시 가끔 뜨거운 물에 타서 먹는 오트밀로 점심을 때우기도 합니다.  퀘이커는 한국의 '삼양라면'처럼 미국의 일반 서민들의 생활 깊이 스며든 식품이라 할 만 합니다. (제가 삼양라면이나 혹은 퀘이커를 광고할 의도는 없습니다. 그냥 비유컨대 그렇다는 것이지요.)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난 Edward Hicks 는 본디 부모님이 '영국국교 (성공회 = Anglican)' 소속이었지만,  성장과정에서 힉스를 친아들처럼 돌봐준 아주머니의 영향으로 퀘이커교도가 됩니다. 그 아주머니가 퀘이커 교도였다고 합니다.

 

퀘이커 교단이 미국 문화사에서 어떤 위치인가 잠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미국에 메이플라워를 타고 처음 온 사람들은 '필그림'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어떤 교파였습니다. 이들은 당시의 영국국교(Anglican)에 반대하여 종교적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건너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후에 뉴잉글랜드 지역에 '퓨리턴 (puritan = 청교도)'들이 역시 영국국교에 반대하여 종교적 자유를 찾아 들어옵니다.  퓨리턴들인 매사추세츠에서 시작하여 뉴잉글랜드 지역을 장악하게 됩니다.

 

한편 뉴잉글랜드의 남쪽,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는 '영국국교회' 앵글리칸들이 정착을 합니다. 그리고 뉴잉글랜드와 버지니아의 중간쯤에 위치한 펜실베니아에 퀘이커교도들이 정착을 합니다.  펜실베니아에 영국식민지를 처음으로 개척한 사람이 바로 Edward Hicks 의 풍속화 Peaceable Kingdom (평화의 왕국)에 등장하는 William Penn 입니다. 그는 퀘이커 교도였습니다.  윌리엄 펜은 영국국교에 반대하는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옥스포드 대학에서도 추방을 당한 사람입니다.

 

퀘이커교단에서는 '모든 인간은 신과 직접 대할수 있다'는 사상을 갖고 있으며 교회조직이나 직업적인 성직자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개인의 양심과, 묵상을 통한 신과의 대화를 귀하게 생각합니다. 이들은 전쟁을 거부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옷을 입는 일이나 삶을 꾸미는 일에 대해서도 소박함을 유지하려 하였습니다.  이들이 영국에서 박해를 받다가 신대륙의 펜실베니아 지역에서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이미 영국에서 종교적 이유로 박해를 받은 경험이 있었던 펜은 그가 개척한 식민지를 '모든 종교적 박해를 받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도록 노력을 합니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 영국인뿐 아니라 유럽의 여러나라 이민자들이 몰려옵니다.  Edward Hicks 의 그림에 묘사된대로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안들과도 협정을 맺고 서로 평화롭게 협력하고 사업을 해 나갔습니다. 

 

자 미국 초기 역사에서 각기 다른 기도교 교파들이 미국의 어떤 지역을 토대로 성장했는지 간단히 정리해볼까요?

 

 

 1. Pilgrims (필그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플리머스 항에 도착하여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생존에 성공했던 사람들 입니다. 이들이 가을 추수후에 하늘에 감사하고, 선량한 이웃이었던 인디언들에게 잔치를 베풀며 함께 기쁨을 나눴던 것이 미국의 Thanks Giving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2. Puritans : 그런데 필그림들은 후에 주도 세력이 되는 Puritan (청교도) 들에게 밀려나거나 흡수되고 맙니다.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3. 한편 버지니아 남단에 King James 식민지가 개척되는데, 이곳에는 영국 국교 (Anglican = Episcopal = 성공회)신도들이 정착합니다. 버지니아에 앵글리칸 교회들이 많이 보입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일 것입니다.

 

 4. 그리고 뉴잉글랜드와 버지니아 사이의 중부, 펜실베니아에 퀘이커 교도들이 자리를 잡아서 City of Brotherly Love = 필라델피아를 일으키는데, 이곳에는 종단이나 교파에 상관없이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이주민들이 몰려와 자리를 잡게 됩니다.

 

미국사에서 '퀘이커'의 위치를 살펴보면 퀘이커 교도였던 Edward Hicks의 풍속화에 그려지는 미국의 풍경, 노아의 방주 그림등에 대하여 좀더 생생하게 이해할수 있게 되지요.  (아, 그런 배경이 있는 그림이구나, 아하!)  윌리엄 펜이 펜실베니아를 일으킨것은 17세기의 일이지만 19세기의 에드워드 힉스에게는 살아있는 영웅이었을겁니다. (다른 페이지에서, 엉클 톰스 캐빈 이야기를 잠깐 적은 적이 있는데요.  흑인 노예들이 자유를 찾아 도망을 칠때, 이들을 보호해주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퀘이커 교도들이었지요.  그 소설에서 처음 퀘이커교도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기 때문에 제게는 이들이 아주 '착한' 사람들로 각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참고문헌:

 

1. 앙드레 모로아. (1991)  미국사. 신용석 옮김. 기린총서. 기린원. 5장 (pp 46-55)

2. 청솔역사교육연구회. 이야기 미국사. 청솔출판사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1. 24. 11:05

미국에서 일년중 11월의 네번째주 목요일은 우리나라의 추석과 흡사한 추수감사절 (Thanksgiving Holiday)입니다.  각급 학교나 회사, 공공기관들은 추수감사절 전날인 수요일부터 공식적인 휴일에 들어가서 수, 목, 금요일 공식 휴일을 갖습니다. 토요일 일요일에는 원래 일을 안하는 사회이니까,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5일간 휴가를 갖는 셈입니다. 

 

그 추수감사절이 금주로 다가와서, 이와 관련 그림을 소개할까 합니다.  추수감사절 관련 그림이야 다양한 화가들이 그려냈지만, 저는 펜실베니아 출신의 풍속화가 에드워드 힉스 (Edward Hicks 1780-1849)의 그림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사진을 클릭하여 확장시키면 큰 화면을 보실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제가 워싱턴 디씨의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에서 찍은 힉스의 Peaceable Kingdom (평화의 왕국) (c.1834)이라는 유화입니다.  제가 이 작품의 제작년도를 c.1834 라고 표기했지요? circa 1834 혹은 그냥 c.1834 라고 적은 것은 '대략, 짐작컨대' 1834 년쯤으로 추정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역사적 사실을 표기할때 영문으로 circa (c.)  표시가 있으면 이는 '대략 추정된다'는 뜻입니다. (참고하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이 그림의 주인공들은 누구일까요?  크게 두가지로 나눠 볼 수 있는데 (1) 사람들 집단, 그리고 (2) 동물들이 보이지요. 우선 사람들을 들여다 볼까요?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잘 알수 없지만, 짐작컨대, 서양사람들과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모여서 뭔가 하고 있는것 같지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거래'가 되는것 같습니다. 유럽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상자에서 뭔가 꺼내어 인디언들에게 보여주고 있지요. 선채로 뭔가 설명을 하는 유럽사람이 보입니다.  이들의 거래의 장면이 평화로워 보입니다.

 

 

 

동물들이 모여있는 광경을 볼까요? 사자, 호랑이, 양, 소, 송아지... 육식동물과 초식동물들이 태평하게 어울려 있습니다. 천사처럼 보이는 아이들이 이 동물들과 어울려 있습니다.  한마디로 '천국'에서나 가능한 풍경이겠지요?

 

 

에드워드 힉스가 꿈꾸던 '평화의 왕국'은 이렇게 신생국 아메리카에 정착하러 들어온 사람들과 이 터전에서 이미 살아온 인디언들이 서로 자신들이 가진것을 나누고 공유하는 사회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Thanksgiving Day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초기 미국 정착민들에게 도움을 준 아메리카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식사대접을 하고 잔치를 한것에서 비롯됩니다.

 

 

아래의 그림은 제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찍어온 것입니다. 제목은 Penn's Treaty with the Indians (윌리암 펜과 인디안의 협정) 입니다. 창작년도는 c.1830-1835.  대략 1830년에서 1835년 사이에 그려졌을거라 추정된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을 들여다보세요. 위의 그림속의 사람들과 약간 차이가 나지만 거의 동일한 구도로 비슷하게 그려냈습니다. 단 특별한 차이가 있다면, 가운데 서 있는 남자가 위의 그림에서는 그냥 두 팔을 펼치고 있는데, 아래의 그림에서는 그의 왼손이 펼쳐진 두루마리의 어떤 부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두루마리'가 새로 등장했다는 것 외에는 사람들 풍경이 위아래 비슷해 보이지요? (물론 위 아래의 그림을 나란히 놓고, 그림에서 서로 다른것이 무엇인지 찾아가면서 시간을 보내도 심심풀이가 될것 같습니다.)

 

 

액자에 Penn's Treaty 라고 적혀진 것으로 보아, 두루마리에는 미국정착민들과 인디안들 사이의 협정서가 적혀 있는것 같습니다.

 

 

 

 

 

 

 

 

자 여기서 제가 독자여러분께 한가지 '질문'을 던져 보고 싶습니다.

 

앞서 소개한 '평화의 왕국' (c. 1834) 과 후에 소개한 '윌리엄 펜의 협정' (c. 1830-1835) 두장의 그림은 각기 대략 1834년 추정, 1830-1835년 추정 이렇게 표시가 되어 있는데요. 그림속의 사람들의 모습과 주변 풍경을 보면 어느 그림이 역사적으로 선행되는 그림일까요?   (여우야, 여우야 네가 평화의 왕국 그림을 앞에 소개했고, 윌리엄펜의 협정을 뒤에 보여줬으니까 그 순서가 아니겠니?  --이런 추측을 하실수도 있을겁니다.)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제가 그림을 들여다보듯 저의 독자도 제 시선을 따라 그림을 읽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서 입니다.  (저는 지금 제 애인한테 그림 설명해주는 기분으로 그림을 읽고 있으니까요.)  평화의 왕국 그림 배경은 그냥 '자연'입니다. 강이 흐르고, 숲이 있고,  퀘이커 교도들을 연상케하는 복장을 한 사람들과 미국 원주민들이 모여서 물물교환을 하는듯한 풍경이지요.  윌리엄펜의 협정 그림 배경 풍경에는 '인간 문명'이 포함됩니다.  (아마도 델러웨어 강일것인데) 강에 배들이 떠있고, 건물들도 보입니다.  그리고 어떤 '조약문'이 적혀있을 두루마리가 등장을 합니다. 역사적으로 '후'에 일어난것으로 추측되지요.  그렇지만 위의 두 그림중 어떤 그림을 에드워드 힉스가 먼저 그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미술사가들도 잘 알수가 없기에 circa 표시를 했을것인데, 제가 추측하기에는 위의 평화의 왕국을 1834년에 그렸다면, 윌리엄펜의 협정 그림은 그 이후가 될것 같습니다. (추측일 뿐입니다.)

 

에드워드 힉스 (1780-1849)는 펜실베니아의 유복한 영국교 (성공회)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18개월 되던해에 어머니가 사망합니다. 그 이후로는 어머니와 절친했던 친구들의 보호속에 자라났는데 그들이 퀘이커 교도였습니다.  힉스는 마차 장식 그림에 재미를 붙여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마차장식이나 표지판등을 그리는 것으로 돈벌이를 하게 됩니다. 그가 퀘이커 교단에 입문한것은 그가 20대 청년시절 부터였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에드워드 힉스는 마차장식그림이나 표지판 그림을 그리는 일에 열중하면서 퀘이켜 교단의 설교자도 하게 됩니다. 그는 신과의 내면적 대화를 강조하는 퀘이커 교단의 교리에 심취했던듯 합니다.

 

에드워드 힉스는 1820년대부터 그가 사망하기까지 대략 30여년간 그의 '평화의 왕국'을 그려냈는데, 현존하는 작품만도 60여점에 이른다고 합니다.  제가 워싱턴의 국립미술관에서 찍어온 작품도 이 60여점 중의 하나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미술사책을 들여다보면, 시기별로 평화의 왕국 그림 내용이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래 이미지는 제가 웹에서 얻어온 것인데요 (조만간 윌리엄스버그에 가서 작품을 보고 올 생각입니다) 이것은 액자 자체까지 그림작품입니다.  액자에 새겨진 문구까지 힉스가 모두 선택하여 새겼다는 뜻입니다.  (힉스가 마차 장식과 표시판 제작을 했던 경력을 여기서 확인할수 있지요. 그림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까지도 '말'로 새겼습니다.

 

The wolf shall also dwell with the lamb,

and the leopard shall lie down with the kid

and the calf and the young lion and the fatling together

and  a little child shall lead them.

 

늑대가 또한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염소새끼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할것이며

한 아이가 이들을 이끌것이라

 

(이사야 11:6)

 

 

 

 

 

이 그림은 The Peaceable Kingdom of the Branch (c.1825-1830) (95.9x81.9 cm) 으로 그의 평화의 왕국 연작중에서 초기의 작품이라 할수 있습니다.  본래 이 '평화의 왕국' 시리즈는 영국의 Richard Westall 이라는 화가의 동명의 작품이 있었는데, 구약성서를 바탕으로한 Westall 의 그림세계에 크게 감화를 받은 힉스가 자신의 스타일로 그의 신앙심을 그가 그가 가장 잘 할줄아는 '그림'의 세계에 접목을 시켰다고 할수 있지요.  그림의 배경은 실제로 버지니아에 존재하는 '천연 다리 (Natural Bridge)' 입니다.  일치하지요?  저도 이곳을 지나친적이 있는데, 이 풍경이 힉스의 그림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지요.  그른 상상력을 발휘하여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림에 옮기거나, 혹은 역사적 사실을 그렸지만, 분명히 상상에 기반한 미술작업을 했지만 그러나 그림의 배경에 그는 그가 관찰하거나 목도했던 풍경들을, 역사적 사실에서 벗어나지 않는 풍경들을 그림의 배경으로 그렸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을 시기별로 보면서 당시 역사의 전환이나 풍경의 전환을 살펴보는 일도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림을 제대로 읽으려면, 관련 역사도 좀 알아야 하고, 그러다보면 그림 들여다보다가, 책들여다보다가, 도끼자루가 썩지요...)

 

 

 

 

http://cache.virtualtourist.com/3060528-NATURAL_BRIDGE_VIRGINIA-Natural_Bridge.jpg

 

 

 

 

다음 그림 역시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사진 찍은 것으로 제목은 Noah's Arc (노아의 방주) 입니다. 1840년 작품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기독교 경전에 실린 일화입니다.  동물들 표정이 참 순하고 착해보이죠?  아이들과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발견한다면, "무슨 동물이 있나 찾아보자"하고 놀이를 해도 좋을것 같습니다. 영어교육에 관심이 있다면 영어로 동물 이름을 불러봐도 좋겠지요. 혹은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들려줘도 좋을것 같습니다.

 

 

 

 

 

 

 

 

에드워드 힉스는 그의 신앙심 (성서)을 기반으로 한 사람과 동물의 평화로운 공존의 주제

 (1) 평화의 왕국

 (2) 노아의 방주

를 시리즈로 그렸지만, 그가 그린 풍경화도 남아있습니다.  다음은 워싱턴 국립미술관에서 사진찍은 작품입니다.

 

 

 

The Cornell Farm (1848)

oil on canvas

 

 

이 작품은 Edward Hicks (1780-1849)가 68 세쯤에 그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남긴 최후의 몇점에 해당하는 그림이겠지요? 

 

(어디엔가에 기록을 한 적이 있는것 같은데, 저는 어떤 작품을 볼때, 그것이 미술작품이건 혹은 문학작품이건, 어떤 작품을 들여다볼때는 이것이 사회, 문화, 역사적으로 어떤 배경이 있는지, 이 작품을 창작할때 작가는 대략 몇살쯤이었는지 이런 상황을 들여다보는 편입니다. 이 작품의 연도를 들여다보고 그의 생몰년내를 들여다보니, 어쩐지 이 그림이 색다르게 다가오더란 말이지요.)

 

 

이 풍경화 속에는 다양한 무늬의 소와 말이 한데 어우러져있고, 돼지, 양도 있군요. (이들이 비록 가축들이긴 하지만, 여전히 평화의 왕국이나 노아의 방주 시리즈에서 보이는 동물들의 평화가 감지 되지요?),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반듯하게 줄지어 서있는 나무들이나 길, 그리고 집들이 전체적으로 조화롭고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원시림의 시대가 아닌, 정돈된 인간 문명의 시대가 그의 말기 작품에 담겨져 있습니다.

 

 

에드워드 힉스의 그림들은 '풍속화 (Folk Art)'로 분류됩니다.  무엇이 풍속화이고 무엇이 그냥 '미술'인가?  엄밀한 분류기준이 있어보이지는 않습니다. 에드워드 힉스는 정규 미술 수업을 한 사람이 아니고, 마차장식 '기술자'쯤으로 그림 그리는 일을 시작했고, 이렇게 실용적으로 시작된 그의 그림 이력이 평생 그와 함께 했습니다.  전에 정리했던 Grandma Moses (모세할머니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Grandma%20Moses ) 역시 미술수업을 받은적이 없는 풍속화가로 분류 됩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우리는 한가지 의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떻게 미술 전문 교육을 받지도 않은 사람들이 미술 전문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능가하는 일이 발생하는가? 왜 서툰 그림이 이따금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것일까? 왜 서툴고 조악해 보이는, 균형도 안맞고 엉뚱한 그림이 국립 미술관의 전시실을 차지하는 일이 발생하는것일까?  여기서 더 나아가서, 그러면 '교육'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까지도 가능해집니다.

 

 

이 질문에 누군가 전문가가 뭐라고 조언을 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혹은 제가 계속 공부를 해 나가다가 어느날 어떤 실마리에 도달하면, 다시 이 페이지로 돌아와 이야기를 마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드워드 힉스의 그림은 저를 빙긋 웃게 만듭니다.  그의 그림속의 동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바보 사자처럼, 얼간이 표범처럼, 이빨빠진 늑대처럼 빙긋 웃게 됩니다.

 

즐거운 추수감사절 되시길.

 

 

참고문헌:

 

1. 앙드레 모로아. (1991)  미국사. 신용석 옮김. 기린총서. 기린원. 5장 (pp 46-55)

2. Philadelphia Museum of Art: Handbook of the Collections (2008) Philadelphia Museum of Art

3. Frances K. Pohl  (2008)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Thames & Hudson: New York, NY.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1. 22. 08:51

 

Tasha Tudor (1915-2008)은  우리나라에 삼일운동(1919)이 일어나기 4년전인 1915년에 출생하여 지난해인 2008년까지 생존했던 미국의 삽화가이며 미술가입니다.  제가 우리나라의 삼일운동 얘기를 왜 하느냐하면,  타샤가 태어나 성장하던 시절 한국은 어떤 상황이었는지 돌아봄으로써 좀더 구체적으로 이를 기억하기 위해서이지요 (^^)  피상적인 어떤 '시간'을 좀더 구체적인 사항와 연결지어 생각하면 나중에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  삼일운동하면, 저는 33인보다는 유관순 '누나'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요. 생각해보니, 타샤 튜더는 우리 할머니와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열 여덟에 시집을 와서 열아홉에 우리 아버지를 낳으셨는데, 우리 아버지의 생년을 헤아려서 우리 할머니의 생년을 거꾸로 헤아리면 대충 우리 할머니와 타샤 튜더의 나이가 비슷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이 페이지의 사진들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타샤 튜더와 나

 

 

 

타샤 튜더는 동화의 '삽화'를 그리거나 자신이 직접 글과 그림을 그린 삽화가이면서 동화작가이기도 하고, 미술가이기도 했던 여성입니다.  제가 이분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한권의 책 때문이었습니다. 책이 하도 아름다워서 이 책을 산것이 2006년 12월의 일이군요.

 

 

The Private World of Tasha Tudor

 

 

다음은 2006년에 책을 다 읽고 간단히 메모했던 독후감입니다.

타샤 튜더 할머니의 그림 세계를 보면,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하여, 꽃 구근을 많이 사기 위하여 그림을 그려서 판다고 말할정도로 매우 현실적이다. 그의 현실성은 그의 그림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직접 자신이 관찰한 내용을 그린다. 모형을 갖다 놓고 그걸 그리는것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것들을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런 면에서 신사임당의 그림과도 많이 닮았다. 늘 맨발의 그녀는 육체노동을 마다하고 그림만 그리는 사람도 아니다. 스스로 노동하고, 자투리 시간을 그림을 그려서 그림을 팔아 살림에 보태고 스스로 먹고 사는것이다. 언제부터 화가가 전업화가이고 철학자가 전업철학자였던가. 언제부터 오로지 그림만 그리는 사람을 프로페셔널이라고 일컫고 생활속에서 살면서 그림 그리는 사람을 아마추어라고 부른것일까? 전업=프로페셔널이라는 이 잘못된 신화를 타샤 튜더 할머니는 맨발로 간단히 일축하고 마는지도 모른다. 상업화가이건 순수화가이건 사실 그건 구분의 요소라고 할수 없을지도 모른다. 보는 사람이 보고 '좋다' 이런 말이 나오면 된다는것이지. 좋다. 이 한마디가 얼마나 어려운것인가.

 

그래가지고, 당시에 약간 '헤까닥'해서 공부 하다말고 자투리 천 사다가 이런 놀이고 하고 놀았습니다. 요것이 말하자면 타샤 튜더 스타일의 앞치마인데, 손바느질로 탄생시킨 '어마어마한!' 작품이었지요... 사실 그 후에도 조각보를 만든다거나, 뜨개질로 이불을 세개나 짜내는 '괴력'을 발휘하기도 했는데, (하하하), 조각이불 세개중에서 가장 근사하게 만들어진 최종 작품은 한국의 우리 엄니한테 갖다 드렸고, 하나는 제가 현재 사용하고 있지요. 그것도 지금 돌아보면 공부 스트레스때문에 약간 '돌아가지고' 저지른 '난동'이었다고나 할까요.  아아 곱게 미쳤던 것인지도 몰라요. 어쩌면 인생 자체가 그냥 한바탕 꿈같기도 하고...

 

 

 

 

ChristmasGift.jpg

 

 

앞치마를 입은 모습입니다. 앞의 털복숭이는 우리 강아지 (아무리 늙어도 영원한 강아지)

ChristmasGift_006.jpg

 

 

 

타샤 튜더 할머니는 본업이 삽화가, 미술가이긴 하지만, 그가 우리나라에까지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도 한국에도 번역소개 된 '타샤 튜더의 정원'류의 그의 삶을 모습을 닮은 책들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환경문제가 전지구적인 화제로 대두 되고, 웰빙 바람이 불면서 미국에서 친자연적으로 살아가는 화가의 삶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그 분위기가 일본과 한국에도 흘러 들어오면서 타샤 튜더가 일약 유명인사가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에 소개한 책 외에도, 도서관에서 아래의 책들을 빌려 올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탸샤 튜더 관련 책들이 많이 있지요.

 

 

탸샤 튜더의 어린시절

 

타샤는 매사추세츠주의 보스턴 (Boston)에서 1915년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건축 설계자였고, 어머니는 미술가였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좋아했는데, 여주인공 이름인 나타샤를 딸에게 붙여주었는데 결국 '타샤'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튜더라는 성은 어머니의 성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어린 딸을 데리고 친구를 만날때, "여기 튜더의 딸이 왔노라"하고 말하길 좋아했으므로, 타샤는 자신의 이름이 타샤 튜더인줄로 알았다고 하는데요,  공식적으로는 아버지의 성을 갖고 살다가 첫 남편과 결혼한후 남편의 성을 사용했고, 그 남편과 이혼 하면서부터 '튜더'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로 결정 했다고 합니다.  (타샤 튜더는 두번 결혼하고 두번 이혼했습니다.)

 

'나로'님이 타샤 튜더에게 한국인 며느님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셔서 웹 검색을 해보니 그분이 쓰신 시어머니 타샤 튜더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곳에 나옵니다. (내용이 좋으니까 여러 블로거들이 스크랩을 한것으로 보입니다.)  그 중에 http://kr.blog.yahoo.com/jjssslee/15  페이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시어머님은 학교교육을 8학년까지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트에 관한 한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지식과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약간, 타샤 튜더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것 같습니다. 타샤 튜더의 교육 관련 자료를 찾다 보면 그가  Boston Museum School of Fine Arts (http://en.wikipedia.org/wiki/School_of_the_Museum_of_Fine_Arts,_Boston) 에서 수학했다는 내용이 있고, 그 외에도 미술가들로부터 개인 지도를 받았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타샤 튜더가 이 학교의 어떤 과정에서 몇해동안 수학했는지 알 수 없고, 이 학교에서 8학년 과정까지 공부를 했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만, 타샤 튜더가 성장하던 시기 (1915년생 미국 소녀가 성장하던 시기)에 미국 여성들중 정규 대학 교육을 받은 고학력 인구가 얼마나 될지 상상해 본다면 타샤 튜더의 8학년까지의 교육 이력이나 혹은 그의 미술학교 수학 이력이  교육적으로 열악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타샤 튜더의 어머니도 미술가였고,  어머니와 교류하던 절친한 사람들도 미술가였던 점, 그리고 그가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거나 미술가들로부터 개인지도를 받았음을 볼때, 그는 미술가가 될만한 교육을 충분히 받았다고 봐야 마땅할 것입니다. (당시 조선의 소녀였던 우리 할머니는 소학교도 못다닌 농가의 규수였지만, 아무도 우리 할머니를 학교 교육도 못받은 불학무식한 처자로 보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교육제도는 오늘날과 달랐으므로.  똑같은 이유로 타샤 튜더가 설령 8학년까지만 학교를 다녔다해도, 오늘날의 기준으로 그의 교육을 가늠하면 곤란하다는 것이지요.

 

 

타샤 튜더의 부모님은 타샤가 9세가 되던 해에 이혼을 합니다. 타샤는 엄마와 함께 뉴욕의 예술가들의 거리에서 살면서 성장하다가 후에는 커넥티컷주에 있는 엄마 친구의 집에서 지내면서 이따금 엄마를 만나게 됩니다.  아래의 지도는 미국 영토중에 우리가 '뉴잉글랜드'라고 말하는 지역의 지도입니다.  이 뉴잉글랜드 지도를 왜 소개하는가 하면 '미국사'혹은 '미국 문화사'에서 뉴잉글랜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기 때문이고,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타샤 튜더가 전생애를 이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지냈으며 뉴잉글랜드의 전통 문화를 평생 지키며 살다간 사람이기 때문 입니다.

 

뉴잉글랜드

 

 

Map of New England.

https://americancoloniesdana.wikispaces.com/Economy+-+New+England+Colonies

 

 

우리나라에서 호남, 영남 뭐 이런 식으로 지역을 구분하듯이 미국에서도 땅덩어리를 몇개의 구역으로 나눠서 이름을 붙이는데, 중서부도 있고, 서부도 있고, 여러가지 갈래중에 '뉴잉글랜드'라는 갈래가 있습니다. 

 

 * Connecticut 커넥티컷

 * Rhode Island 로드 아일랜드

 * Massachusetts 매사추세츠

 * New Hampshire 뉴 햄프셔

 * Vermont 버몬드

 * Maine 메인

 

이상의 여섯개 주가 뉴잉글랜드 문화권에 속합니다.  며칠후에 미국에 추수감사절 (Thanks Giving Holidays)이 다가오는데, 이 추수감사절은 이 뉴잉글랜드에 미국 건국초기에 정착했던 사람들이 인디언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식사접대를 한것에서 유래합니다.  뉴잉글랜드는 말하자면 신생국가 '미국'이 태어나 태를 묻은 곳과  같은 곳입니다. 뉴잉글랜드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영국'을 기리는, 영국의 문화가 많이 스며든 곳이기도 하지요. 

 

뉴잉글랜드에서 결혼 생활 그리고 동화책 작업

 

 

 

뉴잉글랜드의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난 타샤는 부모 이혼후에 뉴욕에서 지내다가 커넥티컷주의 농가에서 아름다운 농가 생활에 반하게 됩니다.  타샤는 아름다운 전원생활을 일찌감치 꿈꾸게 되지요. 1938년 타샤는 Thomas Leighton McCready, Jr. 와 결혼하여 코넥티컷의 '어머니의 농가'에서 살림을 시작합니다 (어머니가 과테말라로 미술 여행을 떠나서 집이 비어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남편쪽 조카를 위해서 Pumpkin Moonshine 이라는 그림 동화를 그려서 출판하게 되는데, 이 작품이 좋은 반응을 얻어 그후로 타샤 튜더는 직접 자신의 그림동화책을 만들어내거나 삽화를 그리는 일로 평생을 보낼수 있게 됩니다.  Pumpkin Moonshine 은, 미국에서 호박속을 파낸후 호박등을 만드는 전통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어린 소녀가 호박밭에 가서 아주 큰 호박을 하나 발견하는데 그 호박이 제 멋대로 띠굴띠굴 굴러다니면서 사고를 치다가 결국 잡혀서 호박등이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호박등은 매년 10월 마지막날인 할로윈데이 (만성절 이브)에 많이 만들지요.  이 작품이 그이의 출세작이었다 할 만 합니다.

 

 

 

 

 

1945년에는 그가 삽화를 그린  Mother Goose (전통 동요 모음집)로 Caldecott 상 (http://en.wikipedia.org/wiki/Caldecott_Honor ) 을 받기도 하고, 그의 동화와 삽화작업은 그에게 각종 상과 훈장을 불러옵니다.

 

 

 

 

 

 

1945년에는 그가 삽화를 그린  Mother Goose (전통 동요 모음집)로 Caldecott 상 (http://en.wikipedia.org/wiki/Caldecott_Honor ) 을 받기도 하고, 그의 동화와 삽화작업은 그에게 각종 상과 훈장을 불러옵니다.

 

 

 

 

 

 

 

 

 

 

 

이들 부부는 뉴햄프셔주로 이사하여 자신들의 집과 농장을 갖게 되는데, 이곳에서 이들의 네명의 아이들이 태어나 자랍니다. 이들 부부는 1961년 이혼합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성을 비롯 자녀들의 성을 모두 '튜더'로 정하게 됩니다.  1971년 타샤는 뉴햄프셔주의 집을 팔고 버몬트주로 이사하는데, 이곳에는 그의 아들 Seth가 이미 와서 정착하여 있었습니다. 아들 Seth는 이웃으로 이사 온 어머니를 위해 직접 '손'으로 농가주택을 지어냅니다. 그것이 타샤 튜더가 2008년 작고하기까지 살게되는, 오늘날 남아 있는 집입니다.

 

 

1971년은 타샤 튜더가 '버몬트'주로 이사한 해 이기도 하지만, 그의 대표작이라 할수 있는 Corgiville Fair 가 출판되어 널리 알려진 해 이기도 합니다. Corgi는 타샤 튜더가 아끼는 개 종류이지요. 영국 여왕이 사랑하는 종류의 개라서 '여왕의 개'라고 알려져 데요.  이 개를 의인화하여 코기마을을 하나 탄생시키고 코기종의 개를 비롯하여 다양한 동물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는 배경입니다.  이야기도 삽화도 모두 타샤의 창작물인데, 배경을 보면 식민지시절 (미국 초기 시절)의 뉴잉글랜드 마을의 풍경이 세밀하게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주인공들이 개나 고양이 혹은 작은 들짐승이지만 배경에는 미국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지요.  저는 지난 여름에 이 뉴잉글랜드 지역을 여행 한 적이 있는데, 타샤 튜더 그림책속의 마을 모습과, 내가 눈으로 확인했떤 전통적인 마을의 모습이 여전히 일치했지요.  이 책이 크게 성공했기 때문에 이후로 Cogville 시리즈가 출판되기에 이르릅니다.  (타샤는 그림을 팔아 꽃뿌리를 샀겠지요.)

 

 

 

 

 

 

 

 

고집쟁이 타샤

 

버몬트에서 정원과 농장을 가꾸며, 미국 식민시절의 삶의 스타일 (복장이나 삶의 방식)을 고집하고 살면서 그림을 그리거나 동화책을 만들어 돈벌이도 하던 타샤 튜더.  그는 그림과 동화 작가라는 전문 영역과,  정원가꾸기와 농장 돌보기라는 또다른 영역을 함께 일궈냈다고 할 만 합니다.  한가지도 이루기 힘든데 두가지를 한 것이지요.  그의 결혼 생활을 보면 1938년에 첫남편과 결혼하여 1961년에 이혼했으니 첫 결혼은 23년간 지속되었고, 후에 또 한번 누군가와 결혼 했는데 오래 가지 못하고 다시 이혼했다고 합니다. 이혼 사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짐작하기에 타샤 튜더는 자기 세계가 확고한, 고집스러운 사람이었을 겁니다.  고집스럽게 세상 문명을 등지고 역사의 어느 시기, 그가 '이상화 했던' 어떤 시기의 삶을 고집하고, 그 시기의 라이프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우리나라의 안동이나, 이와 유사한 '역사적인' 마을에 가면 아직도 조선시대의 양반 복장을 고집하고, 당시의 풍습대로 제사지내고 당시의 풍습을 고집하는 분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분들에게는 자신이 지켜야 할 어떤 이상향이 있을 것입니다. 타샤 튜더 역시 이런 '자신만의 이상향'을 추구하고 고집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옳다 그르다를 논할 이유는 없지만, 아무튼 평범하지는 않은 것이지요.  그렇게 살아간다는 일이 간단하지 않지요. 

 

타샤 튜더 관련 책들 (사진으로 도배가 된 환상적인 책들)을 보면 이분의 삶의 풍경이 천국처럼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가꿔내기 위해서 타샤가 얼마나 열심히, 부지런히 일 했는지 우리는 잘 가늠할수 없습니다. 삶의 한 장면은 아름다울수 있지만, 그 장면 뒤에 숨겨진 노고는 사진에 잘 드러나지 않지요.

 

 

타샤 튜더의 아름다운 삶이 가득한 사진집 속의 어느 미국 할머니 (타샤)를 보고 있으면 그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조선땅에서 태어나 조선인, 한국인으로 살다가 타샤보다 몇 해 일찌 저승으로 떠나신 우리 할머니의 삶이 포개집니다.

 

 

 

 

 

특히나 아래에 보이는 풍경속의 타샤는 우리 할머니와 참 닮았습니다.  집도 풍경도, 사람 모습도 우리 할머니의 풍경과는 다르지만, 쌓인 눈과, 겨울 나무와, 좁다란 길을 걷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우리 할머니 같습니다.  튜더의 정원, 튜더의 아름다운 실내장식보다는 저것을 가꾸기 위해 저 노인이 기울였을 노력, 한낮의 현기증, 한겨울의 추위, 가을의 소슬바람, 이런 것들이 이제 제 눈에 들어옵니다.

 

"너 타샤 튜더처럼 살고 싶은가?" 누군가 묻는다면 저는 아마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 것입니다. 일단 저는 매우 게으르고, 농사짓는것 힘들다는것 잘 알고...  게으른 주제에 이런 아름다운 삶을 탐하면 안되겠지요. 그대신 평생 내 힘으로 일하고 내 밥벌이 내가 하고, 가능하면 남 도와주면서 사는 인생, 불평안하고, 남 탓 안하는 인생. 그런 인생은 희망하는 편입니다.  그렇게 살다 죽으며 좋을것 같습니다만 ... 아 그것도 요원하군요 저야말로 잘되면 내탓 안되면 모두 남의탓으로 돌려버리고 이불 뒤집어쓰고 신세한탄하기 일쑤이므로. ㅎㅎㅎ.

 

 

 

 

 

 

 

 

 

 

 

미국 미술사 속의 세명의 할머니

 

제가 알거나 기억하는 범위 안에서, 미국 미술계에서 '눈에 띄는' 할머니 셋을 고르라면  저는

 

(1) 모세 할머니 Grandma Moses (1860-1961)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Grandma%20Moses

(2)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fe (1887-1986)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Georgia%20O%27Keeffe

(3) 타샤 튜더 Tasha Tudor (1915-2008)

 

이렇게 세명을 꼽고 싶습니다.  (조지아 오키프 페이지도 차근차근 만들겠습니다.) 뭐, 적어도 '할머니' 소리를 들으려면 90가까이 살면서 활동을 해야겠지요.  =)

 

이 세사람중에 (1) 모세 할머니는 가난한 농가의 딸로 태어나 평생 평범한 농가의 안주인으로 남편과 해로하다가, 남편이 사망한 후에 눈이 침침해서 (!) 뭐 심심풀이로 그림 그렸다가 대박! 터진 천재였고요. (2) 조지아 오키프는 엘리트 미술 교육 과정을 거쳐 미술계의 별이 된 화가였고요, (3) 타샤 튜더는 삽화와 동화 분야에서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다가, 막판에 (?) 그의 라이프 스타일로 더욱 유명해진 분입니다. 각자 삶의 이력이나 그림의 분야가 다르지만,  '장수한 미국 미술가'라는 공통점도 있고, 다들 개성있고 매력적인 여성이었다는 공통점도 있지요.  =) 참 매력적인 할머니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나는 우리 할머니가 가장 힘있고 매력있는 할머니였다고 생각해요. 내 할머니 이니까~  나를 키워준 할머니이니까요. (무조건인거죠)

 

 

 

 

 

 

 

정리 2009년 11월 21일 RedFox

 

 

 

http://www.tashatudorandfamily.com/index.html  : 2008년 작고한 타샤 튜더 할머니의 가족이 운영하는 홈 페이지.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1. 22. 04:05

http://americanart.textcube.com/149  이전 페이지에서 디트로이트 벽화를 그린 디에고 리베라에 대하여 간단히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이 페이지에서는 디트로이트 벽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는 이 벽화가 있는 곳은 'Rivera Hall'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벽화가 그려지기 전 원래 이곳은 내부 정원 (가든 코트 Garden Court)이었습니다.  미국의 큼직한 미술관에 가면 대개 크고작은 이런 형식의 '정원'이 있습니다.  본래 정원이었던 곳인데, 미술관장인 발렌티노가 '벽화'를 설치한다고 했을때 건물 설계자는 자신의 전체적인 건물 구상을 망쳐놓는다고 반대를 하기도 했답니다.  그렇지만 발렌티노의 벽화에 대한 의욕은 완고했고, 그는 어떠한 반대나 비난에도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지요.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벽화의 일부, 나무의 뿌리 부분 중심에 태아가 웅크리고 있는듯한 모습이 보입니다.  이것이 4면 벽화의 동쪽면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4면 벽화중에서 동쪽과 서쪽에는 다른 홀로 이어지는 '출입구'가 있으므로 온전한 큰 벽이 아닙니다.  남쪽과 서쪽벽은 온전한 벽입니다.  애초에 발렌티노가 리베라에게 주문한 것은 남쪽, 북쪽의 전면이었습니다.  그런데 리베라가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동쪽, 서쪽 벽 까지도 그림으로 채우고 싶어했고,  후원자였던 포드 (헨리 포드의 아들)도 이를 적극 지지하면서 4면 전체의 벽화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사진은 한번 클릭하시면 새창이 열리고, 그 상태에서 확장 표시를 클릭하시면 원래의 큰 사진이 열립니다.

 

 

벽화속에 내가 있다!

 

출입구로 들어가면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입니다. 마주 보이는 벽이 동벽. 오른쪽이 남벽, 왼쪽은 북벽.  천장부분에는 천창이 있어서 자연조명 역할을 합니다.  천장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리베라는 포드 자동차 공장을 그의 벽화의 주요 소재로 사용했습니다.  당시 (1932년) 디트로이트 지역의 주요 산업은 자동차, 의약, 화학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포드가에서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그의 벽화 작업에도 적극적으로 재정적 지원을 해 줬고, 리베라가 그림의 소재가 될만한 산업의 실재 현장을 확인해보고 싶어 했을때 이를 지원해준이도 포드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 작업이 진행되는 11개월간, 이 작업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의 여론이 만만치 않았는데,  종교적 신성모독과 관련된 비난도 있었고, 사회주의 사상이 엿보이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었고, 또한  디트로이트 미술관의 벽화를 왜 '포드' 공장으로 채우는가에 대한 불평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에대한 미술관장 발렌티노의 변론이 적절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도 관심도 없었고, 도와주지도 않았지 않은가. 오직 포드만 이 작업에 관심을 갖고 도와준것이 아닌가? 공장의 문을 열어 보여준것도 포드뿐이지 않았는가?  포드공장이 '주인공'으로 그려진 것에 대한 비난은 이런 논리로 잠재울수 있었다고 하는데,  단순히 짐작컨대 (1) 포드사의 재력이 다른 불만을 무마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대단했을 것 같고 (2) 포드 자동차관련 회사에 재직하는 디트로이트 시의 시민의 인구가 압도적이라서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랬을 것 같습니다.

 

리베라는 밑그림 작업을 한달가까이 했는데, 전문 사진사와 다니며 포드 자동차를 비롯한 디트로이트 지역의 다른 공장들의 작업 광경을 세밀하게 사진에 담았다고 합니다.  사진도 세밀하게 찍고, 그의 예술가적인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공장의 분위기도 관찰하고, 거기에 그의 맑시즘까지 가세하여 노동자들이 힘차게 일하는 광경을 생생하게 전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자동차 생산의 전 공정이 남쪽, 북쪽 벽화에 상세하게 실려있는데, 이 공정은 현장 실무자, 그리고 전문가들의 안목으로 봐도 정확하고, 사실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리베라는 대충 상상해서 아무렇게나 그린것이 아니라, 사실에 입각해서, 한치의 틈도 보이지 않고 성실하게 현장을 벽에 옮겨 담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리베라가 이 벽화 제작을 할 당시는 미국은 '대 공황'의 초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공황상태에서도 포드자동차 관련 공장에서 일하는 연인원이 십만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리베라는 그의 그림속에 경제대공황으로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보다는,  공장에서 활기차게 일하는 노동자들을 담는 것에 주력을 했지요. 그리고 단지 산업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 농경에서 산업화로 이어지고 과학사회로 나아가는 인류의 역사를 모두 이 벽화에 담아내려 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에 천지창조의 대 서사시를 담아냈다면, 리베라는 디트로이트 벽화에 인류 문명의 발전사를 담아 내려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벽화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을때 디트로이트의 시민들은 벽화속의 주인공들이 자기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공장노동자들이 주인공인, 민중인 주인공인 프레스코화가 탄생한 것이지요.

 

 

 

동쪽벽화

 

동쪽 벽화의 상단에는 오른쪽에 과일을 안고 있는 여인, 왼쪽에 곡물을 감고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여인들의 아랫쪽에는 미시간주에서 생산과는 과일과 채소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호박, 옥수수, 포도, 토마토, 배추, 가지, 버섯, 감자등이 소담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두 여인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왼쪽의 여인은 유럽계의 금발여인이고, 왼쪽은 남미계의 검은 머리 여인입니다. 몸집은 둥글둥글하니, 리베라가 즐겨그리는 풍만한 형태인데 풍요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중앙의 '태아' 가 그려진 그림을 살펴보면 태아를 중심으로 나무 뿌리들이 펼쳐져 있는데 그 뿌리들은 여러겹의 지층들 위에 존재합니다. 화석이 보이기도 하고요. 오래된 지구의 세월을 느끼게 해줍니다. 인간의 생명이 이렇게 지구와 자연속에 잉태되고 보호받고 성장한다는 자연친화적인 리베라의 생명관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태아 혹은 영아의 그림은 디에고와 그의 아내 프리다 칼로의 개인사 때문에 더욱 유명해집니다.  이들 부부가 디트로이트에 11개월간 머물며 벽화 제작을 하던 당시,  멕시코 출신의 칼로는 원래 건강도 안좋은 상태에서 추운 지방에 있자니 아주 괴로웠을겁니다.  이곳에서 칼로는 유산을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불구의 몸이었는데 어렵게 아이를 갖게 되었다가 유산이 되니 그 심정이 무척 괴로웠을겁니다.  디에고 리베라는 그들이 잃어버린 아이를 이 동벽에 그려서 영원히 기억하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디트로이트에서 잃어버린 아이이니까, 디트로이트에 영원히 남기고 싶었을것 같습니다.

 

 

 

 

 

 

 

 

 

 

서쪽벽화

 

돌아서서, 좀전에 지나쳐온 입구쪽 벽을 보면 서쪽벽이 보입니다.  서쪽을 향해서 섰을때 왼쪽이 남쪽, 오른쪽이 북쪽 벽입니다.

 

서쪽 벽화에는 여덟장의 그림에 항공, 항만, 에너지 관련 산업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리베라는 이 산업들의 '평화적'인 면과 '파괴적'인 면을 대비시키려 했습니다.

 

 

 

 

 

 

 

 

북쪽벽화

 

서쪽을 향한 상태에서 왼편 벽이 북쪽입니다. 북쪽 벽화 입니다. 남쪽벽화와 북쪽 벽화 상단에는 각각 두명의 거대한 인물과 거대한 손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랫쪽 큰 벽화에는 공장의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이 손들은 각기 '광석'을 쥐고 있으며 이 광물들이 나오는 '지층'에 대한 묘사가 바로 아래의 판에 그려져 있습니다.

 

 

 

이 북쪽벽화 오른편 구석쪽에 기묘한 그림이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 기독교의 예수 탄생 장면 같은데, 이 꼬마가 의학 연구실에서 주사를 맞고 있는듯한 광경입니다. 바로 아래에는 체내의 인간 태아의 생장 환경이 그려져 있습니다. 과학 혹은 생명과학이 인간의 생명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그림 때문에 당시 기독교계의 반발이 심했다고 전해집니다. 신성모독이라는 것이겠지요.  어떤 사안에 대하여 '신성모독'을 외치는 집단은 어디에나, 어떤 시기에나 있어왔습니다.  이들의 반발에 굴하지 않은 디트로이트 미술관측에 경의를 표합니다.

 

 

 

북쪽벽화의 왼쪽구석은 독가스 폭탄을 만들어내는 공장의 광경입니다.  과학기술이 생명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발전을 하기도 하지만 동일한 지식이 생명 살상의 방향으로 나아갈수도 있음을 고발하거나 경계하는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북쪽 벽화 중앙의 가장 큰 그림은 1932년 포드사의 자동차 공장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제작 공정은 그림의 왼편에서 시작하여 차례차례 다음단계에 대한 묘사고 진행되고, 맨 오른쪽에는 노동자들이 점심 식사를 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저야 '기계'쪽에 문외한이고 '공장'에서 일을 해본 경험이 없어서 모르지만, 자동차 공장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 그림 앞에서 리베라의 정확성에 감탄을 한다고 전해집니다.  그만큼 그는 공장의 전 공정을 세밀히 관찰했고,  사진 촬영도 세심하게 했고, 사실에 입각하여 그림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자동차 제작 관련 전문가가 이 그림을 본다면 저와는 다른 시각으로 관찰할것이고, 아마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줄지도 모르겠습니다.)

 

북쪽벽화에는 리베라 자신이 '까메오'로 출연을 하기도 했고요.  얼굴이 드러난 사람들중에 그의 조수라던가 실제 공장 노동자등 당시 리베라의 작업을 돕던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남쪽벽화

 

 

북쪽과 마찬가지로, 남쪽 벽화의 상단에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연상케하는 두명의 거대한 사람이 그려져 있고, 이들의 중앙에 역시 거대한 손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먹을 꽉 쥐고 있거나, 무엇을 잡을듯 벌리과 있거나 혹은 광물을 쥐고 있는 손들입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Space Odyssey 라는 1968년 영화 (http://www.imdb.com/title/tt0062622/)를 보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제목의 음악과 함께 그 왜 침팬지 같이 생긴 원시 인류가 뼈다귀를 갖고 놀다가 문득, '문득' 이를 '도구'로 사용하는, 어마어마한 인류의 도약 장면이 나오쟎아요.  아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북소리처럼 가슴이 쿵쿵 뛰는데요...이 손들을 보니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그 장면이 떠오르더라구요.  (아 생각난김에 그 영화나 빌려다 볼까....또다시 산만해지는....)  물론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다'라거나 '도구'사용이 인류 문명의 시초라고 보는 시각은 이미 있어왔지만,  리베라의 벽화에서 그 '손'에 대한 해석은 시각적인 '절정'에 달했다고 봅니다.  이만큼 사람의 '손'을 위대하게 표현한 작가가 또 있었을까요? (과문한 탓인지 저로서는 다른 작품이나 작가를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남쪽 벽화 상단 왼쪽 구석에는 '제약'관련 그림이 있습니다.  실제로 디트로이트 시에 있는 어느 제약회사의 공정이 묘사된 것이라고 합니다.  오른쪽 구석에는 화학제품 공장이 그려져있습니다. 독성이 강한 화학물질 때문인지 보호복을 입고 얼굴을 모두 가리고 일은 하는 노동자도 보입니다.

 

 

 

1933년 3월 21일 남쪽 벽화가 완성되어 공개되었을때, 이 그림에 묘사된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은 벽화에 그려진 자신들을 발견하고 놀라워 했습니다. 누구도 이 미술관의 벽화속에서 공장노동자들이 '주인공'이 될거라고는 상상을 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공장노동자로 살아가는 지역 주민들은 환호했고,  종교나 사상적으로 이 벽화들을 문제시 한 집단은 심한 반박에 나섰습니다. 1933년 3월 26일에는 일만 (10,000)명의 시민들이 이 벽화를 보기위해 몰려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이 벽화가 제작되고 있던 당시의 디트로이트의 분위기는 암담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1933년 1월부터 3월 사이에 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자동차 산업이 정지 상태였고, 2월에는 디트로이트의 금융계가 몰락했습니다. 미 전역이 대공황으로 접어드는 것과 맞물린 현상이었습니다.  이런 암담함 속에서 노동자를 중심에 세운 이 벽화는 당시의 노동자들에게는 작은 위안 혹은 희망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남쪽 벽화의 공장 노동자들 뒷편에 구경하는 무리들이 보입니다. 노동자복이 아닌 신사복을 입은 남자들,  정장 차림을 한 여성들이 보입니다.  그중에 두 여성은 가슴에 큼지막한 십자가 목걸이가 매달려있고, 손으로 네모난 물체를 안고 있지요.  손지갑이거나 성경책이거나...  이 귀부인들에 대한 리베라의 시각은 썩 유쾌해보이지 않습니다. 이 공장의 분위기와 안 어울리지요.  저는 이들을 '노동과 동떨어진 존재들'로 파악하는 편입니다. 

 

 

 

 

 

1933년 3월, 디트로이트 벽화를 완성한 리베라는 뉴욕의 록펠러 센터 벽화를 위해 디트로이트시를 떠나는데, 리베라가 록펠러 센터에 그린 벽화는 세상 빛을 보지도 못한채 완성직후 폐기되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리베라가 자신의 사상적 색채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완강히 버텼고 (벽화에 그린 레닌을 절대 지울수 없다고 우겼고), 록펠러가문으로서는 뉴욕 한복판에 소련 지도자의 초상이 그려진 벽화를 모셔둘수는 없는 입장이었으니까요.  (그 십수년후에 몰아친 매카시즘이라는 빨갱이잡기 놀이의 폭풍을 회상해본다면 록펠러가는 현명했던 것이지요. 하하하.)  Bill Bryson 이 그의 성장기 이야기를 담은 책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bolt Kid (http://americanart.textcube.com/166 )에도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당시, 뭐든 금기시되는것, 안좋은것, 이상한것은 '빨갱이'라는 말로 대치될 정도로, 엉뚱하게 사람 때려 잡을때 쓰던 말이 '빨갱이(communist)'라는 내용이 아주 코믹하게 나옵니다.  이를 미연에 방지한 록펠러가문이 역시 앞을 내다보는 눈이 있었다고 봐야지요.  (그래서 결국 우리는 어마어마한 리베라의 벽화를 볼 기회를 영원히 잃고 말았지만요.)   그런데 이 벽화보다 록펠러 센터의 벽화가 더 규모가 큰것이었다고 하는데, 얼마나 굉장한 그림이 그려졌을지,  무엇을 형상화 했을지, 그 묘사는 얼마나 사실적이고 치밀했을지 도대체 상상이 안가는데요.  아쉽군요. 파괴하기전에 상세한 화집이라도 ....남겨두시지... (웹이나 책을 뒤지면 부분적인 밑그림들이 나오긴 합니다.)

 

그리하여. 이 디트로이트 리베라 벽화가 미국에서 우리가 볼수 있는 유일한 리베라의 벽화라고 합니다.  디트로이트를 지나치면서 한나절 시간이 되신다면 이곳을 구경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RedFox  November 2009  (2009년 10월 31일에 방문하고, 11월 21일에 글 정리를 마치다.)

 

 

 

참고문헌:

 

 

 1. Diego Rivera: The Detroit Industry Murals, The Detroit Institute of Arts, 2006. Scala Publishers Ltd.

 2.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Frances K. Pohl, Thames & Hudson

 

 

관련 페이지:

 

 1. http://americanart.textcube.com/94  Detroit Institute of Art 방문기

 2. http://americanart.textcube.com/149 Diego Rivera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1. 16. 11:09

 

 

http://www.nps.gov/hafe/index.htm

 

Harpers Ferry National Historical Park 하퍼스 페리 국립 역사 공원이 웨스트 버지니아 (West Virginia)에 있는데 워싱턴에서는 대략 60마일 거리. 한나절 소풍길로 적당한 거리입니다.  이곳은 일주일 가까이 비가 내렸는데, 어제 토요일부터 조금씩 개이기 시작하더니 일요일인 오전 화창한 날씨가 열렸습니다.  사실은 버지니아 남부 해안도시인 Norfolk 에 있는 Chrystler Museum of Art (크라이슬러 미술관)에 가 볼 계획이었는데, 폭우 때문에 그 도시가 물에 잠겼다고 합니다. 미술관은 다음주에나 다시 연다고 하고.  그래서 시무룩하게 있다가 가까운 하퍼스 페리에 가볍게 다녀왔습니다.

 

하퍼스 페리는 남북전쟁 격전지로 알려져있고, 당시의 건물들이 아직도 남아있거나 재건되어 역사 유적지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포토맥강과 셰난도강 (존 덴버가 불렀던 Almost heaven, West Virginia, Blue Ridge mountains, Shanandoah River ...Country Road.. 바로 그 곳입니다)이 만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Bill Bryson이 A Walk in the Woods 라는 책을 썼는데, 그가 남북종단을 하려 했던 그 애팔라치아 산맥 트레일도 이곳에 이어져 있습니다. 이곳이 그 트레일의 가운데쯤 되는 곳입니다.  오하이오주에서 워싱턴 디씨까지 이어지는 운하길 역시 이곳에 이어져 있습니다. 이래저래 산도 아름답고 강도 아름답고, 아름다운 마을도 있어서 소풍장소로 좋은 곳인데,  뭐 제가 '풍수지리'를 잘 모르지만 들은 풍월로 읊어보자면, 이렇게 강물이 만나고 산길이 만나는 중심에 있는 마을에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라 할 만 합니다.

 

이곳에서 '사건'이 일어납니다.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 발발에 영향을 준 문학작품으로 Harriet Beecher Stowe 의 엉클 톰스 캐빈 (1852)이 유명합니다. 그런데 남북전쟁 발발에 영향을 준 또다른 인물 John Brown 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제가 존 브라운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알게 된 것도 최근의 일로, '미국 미술'을 혼자 공부한것이 그 계기였습니다.

 

Horace Pippin (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Horace%20Pippin) 이라는 미국 흑인 화가에 대하여 저는 몇페이지를 더 작성할 생각인데, 그가 그린 연작중에 John Brown 이 등장합니다. 그런가하면 앞으로 장차 소개하게될 Winslow Homer 라는 미국이 자랑하는 근대 화가의 그림에도 존 브라운이 등장합니다.  한편, 지난 8월에 저는 매사추세츠주의 콩코드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작은 아씨들'을 쓴 올코트의 집을 방문했을때에도 올코트 가문을 위시한 미국의 초절주의 (Transcendentalism) 철학자들 (Emerson, Thoreau)이 존 브라운을 지지했다는 기록을 읽은적이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존 브라운'이 등장하는데 정작 저는 그의 이름도 낯설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웹으로 '존 브라운'관련 정보를 찾다보니 내가 사는 곳 60마일 거리에 존 브라운 관련 유적지가 있다는 '정보'가 나와주는 겁니다. 하퍼스 페리가 바로 그곳입니다. 이곳은 존 브라운이라는 한 '백인'남자가 흑인 노예 해방을 외치며 폭동을 일으키고 저항하다가 미 해병대에 생포되어 처형된 곳입니다. 위키피디아의 페이지를 이곳에 링크하겠습니다.

 ( http://en.wikipedia.org/wiki/John_Brown_(abolitionist) )

 

존 브라운에 대한 평가는 좀 엇갈리는데, 광인이었다는 악평도 있고, 흑인 노예 해방을 위해 앞장선 백인 선구자라는 시각도 있고 그렇습니다.

 

 

http://www.nps.gov/hafe/index.htm

 

 

 

 

 

 

 

 

 

사실, 하퍼스 페리 마을에 도착하니 이 일대의 건물이나 기념물들이 거의가 존 브라운 사건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이 마을에는 존 브라운 뮤지엄이 있었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정면에 John Stuart Curry 가 그렸다는 그림의 사진이 걸려있습니다. 제목은 The Tragic Prelude (비극적 서문) 으로 캔자스에 실제로 있는 벽화라고 합니다.  John Stuart Curry 는 캔자스의 지역화가로, Benton, Wood 와 더불어 미국 사실주의 화풍에서 '지역주의 (Regionalism)'의 기수입니다. 

 

이제 제가 목도하거나 알고 있는 존 브라운 관련 그림을 그린 걸출한 화가들만해도 벌써 Homer, Pippin, Curry 이렇게 세명이나 되지요. 조금 더 들여다보면 더 나와줄것 같습니다.  (나중에 존 브라운 관련 그림들을 위한 페이지를 별도로 적어보겠습니다.)

 

 

 

 

 

 

 

 

 

존 브라운은 1859년 처형되고, 흑인 노예 해방을 위한 남북전쟁은 그로부터 2년후인 1861년에 발발합니다.  미국사에서 남북전쟁 관련 장을 읽어보면 남북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여러가지 정황이 복잡하게 나열됩니다. 그 여러가지 요소중에 존 브라운의 '광적인' 노예해방 운동도 어떤 기폭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 공부를 하면서, 무엇 때문에 무엇이 일어났다고 '단순하게' 정리하고 지나가지만, 그 이면에는 생략되거나 잊혀지거나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일화들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을텐데요.  존 브라운의 역사도 하퍼스 페리를 감싸고 양쪽에서 흐르는 셰난도강, 포토맥강과 함께 유유히 흐르겠지요.  하나의 강이 흐르기 위해 수많은 지류들이 모이듯, 커다란 역사의 물줄기를 만들기 위해 많은 지류들이 한방향으로 흐르는데요, 그렇게 해서 프랑스 대혁명이,  남북전쟁이 혹은 또 어떤 혁명이 탄생하고 흘러가겠지요.

 

 

 

 

 

 

 

이다리를 중앙 경계로 다리 왼쪽에서 셰난도강이 흘러내려와 다리 오른쪽의 포토맥강에 합류 합니다.


 

 

 

 

 

산골짜기라서 오후 다섯시가 되자 벌써 해가 기울고 황혼이 짙은데, 하늘에 비행기들이 바둑판을 그려놓은 것이 보였습니다.

 

 

 

아, 잊지 않게 숙제를 적어 놓겠습니다: 

(1) John Brown 관련 미국 화가들의 그림 모아서 엮기.

(2) 존 브라운에 대한 소개 페이지 따로 정리

 

실상은,  내가 하늘 아래, 강가를 걸어본지가 몇달만이지...일주일 내내 비가 온 덕분에 강이 무서운 소리를 내며 흘렀지... 난 아직 아무것과도 화해가 안된것같아. 나 자신과도. 그 무엇과도. 아무것도.  그저 세월만 흘러갔을 뿐이지...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09. 11. 13. 03:43

피츠버그에는 피츠버그 대학교와 카네기 멜론 대학이 있습니다. 이 두 대학의 건물들이 서로 엉켜있는 시내 중심부에 카네기 미술관이 있습니다.

 

 

미술관 공식 홈페이지: http://www.cmoa.org/

 

 

피츠버그에는 네가지의 카네기 박물관이 있습니다.

 1. 카네기 미술관

 2. 카네기 자연사박물관

 3. 앤디 워홀 미술관

 4. 카네기 과학관

 

http://en.wikipedia.org/wiki/Carnegie_Museums_of_Pittsburgh

 

 

이 네가지 카네기 박물관중에서 카네기 미술관과 카네기 자연사 박물관은 입장료 (성인 15달러)를 내면 두군데 모두 관람이 가능합니다.  두가지 박물관이 서로 동일한 건물동에 있어서 미술관과 자연사 박물관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곳에 두가지 박물관이 있다고 하면 어쩐지 모두 협소하고 작을것이라는 인상을 주는데, 막상 가보면 두가지 박물관 모두 규모가 크고 전시물들이 매우 값진 것들입니다.

 

 

카네기 미술관은 1896년 (한국에 강철왕 카네기로 알려진) Andrew Carnegie 가 설립 한 이래,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장을 하고 있는 피츠버그 소재의 미술관입니다. 아래 사진은 카네기 미술관 건물을 저녁에 찍은 것입니다.  일단 전시회장을 둘러보고 폐관 시간이 되어 나와서 찍은 사진이라 주변이 어둡습니다.

 

 

 

 

통유리 벽 낭에 (분수 너머에) 알록달록한 초상화 두점이 보입니다. 알록달록한 색깔가지고 장난을 치고, 동일한 인물의 초상화 두장이 나란히 걸려있는 것을 봐서, 작가가 누구인지 짐작이 가시겠지요?  (이것은 퀴즈로 남겨 둘까요?)

 

 

 

 

 

 

 

 

 

사실 카네기 뮤지엄에 도착하기 전까지, 이 박물관의 '규모'가 어떠할지 전혀 짐작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어딘가를 찾아 갈때에는 언라인으로 사전에 정보를 많이 찾아보고 짐작을 하고 가는 편인데, 이 박물관이 홈페이지에 제공한 정보는 어딘가 허술해보였습니다.  전시관 종류가 어떠한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페이지도 없었고요.  그래서 좀 '만만하게' 보고 갔었던 것인데, 일단 박물관에 가보니 '기대이상'으로 잘 짜여진 전시장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박물관이 제대로 홍보가 안되었구나. 홈페이지에 문제 있다' 이것이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이 미술관에는 세계 여러나라의 유수의 문화재들 예술작품들이 널려있습니다.  그리스의 조각품들도 있고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명품들도 많이 있습니다. 단 제가 '미국미술' 을 연구중이므로 다른 전시장들은 그냥 쓱쓱 지나치고 주로 '미국 회화' 쪽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편입니다.

 

 

이 미술관에서 아쉬웠던 점은, 아래 사진에 보이는 근대 유럽과 미국의 회화 전시장의 진열상태였습니다.  사실 이 벽에 널려있는 작품들이 간단한 작품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닥다닥 붙여놓은 데다가, 전시장 입구에 그냥 이 작품들의 작가와 제목등 간단한 정보가 들어있는 안내문 폴더 하나를 비치해 놓았습니다.  작품의 제목이나 작가가 궁금하면 그 폴더를 들여다보고 번호와 대조해서 확인을 하라는 것입니다.  폴더는 딱 한권 뿐이었습니다.  만약에 내가 그 폴더를 들고 돌아다니면서 찬찬히 작품감상을 한다면, 다른 사람도 그 폴더의 정보가 궁금하다면, 그는 내가 감상을 마칠때까지 기다려야 할 처지입니다.  이 명화들을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늘어놓고 정보도 제대로 제공을 안하다니! 

 

 

 

 

 

이 그림 무더기 속에 있었던 장 프랑소아 밀레의 '씨뿌리는 사나이' 그림입니다.  밀레의 그림은 대개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지요?  저도 어릴때 우리 시골집 안방 벽에 밀레의 '저녁종' 액자가 걸려있었서 아기때부터 그것을 보면서 성장했습니다. 밀레의 저녁종 그림은 내가 매일 먹는 엄마의 젖이나 할어니가 씹어서 먹이던 밥처럼 그렇게 내 삶의 일부였지요.  아마 우리들은 대개 이와 비슷하게 밀레를 만났을것 같습니다. 이발소나 식당이나 혹은 친척집 마루에 걸려있던 액자나...

 

장 프랑소와 밀레를 '성자'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의 그림은 어딘가 종교적인 느낌이 들지요. 종교가 어떠하건 관계없이 그의 그림에서는 삶의 엄숙함이 아름다운 종소리처럼 울려퍼집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가장 사랑하던 화가가 '밀레'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고흐는 공개적으로, 열광적으로 밀레를 칭송했습니다.  고흐는 이 씨뿌리는 사나이와 흡사한 구도로 그의 작품을 그린적이 있습니다.  밀레와 고흐의 화집을 들여다보면 고흐가 밀레의 그림을 자기식으로 재 창조해 낸 작품이 몇가지가 발견됩니다. 밀레와 고흐. 화풍은 달라도 서로 영혼이 통했던 작가들이었지요.

 

 

 

한가롭고 여유있는 전시장 내부입니다. 주말 오후에도 이정도 한가하다는 얘기는, 이곳이 늘 이정도로 한가할 거란 뜻이지요.

 

 

 

 

 

 

 

 

 

 

 

미술관 현관에 마침 가을이라서 그런지 Alex Katz 의1999년 작품 Autumn 이 걸려있었습니다. Alex Katz 는 (나중에 소개드리겠지만) 잭슨 폴락의 영향을 받다가 후에 자신만의 독특한 미술세계를 이룩한 현대 화가입니다. 이 그림 앞에 서면 내가 가을 속에 들어있다는 기분이 듭니다. 행복한 가을. (색깔치료 받는거지요).

 

 

 

미술관은 카네기 자연사 박물관으로도 연결됩니다. 공룡의 화석도 보이고, 펜실베니아의 광물을 소개하는 전시장도 있고, 고생물학 자료가 많이 있습니다. (미술 블로그이니까 자연사박물관 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만...)

 

 

 

 

이 미술관을 둘어본 후에 앤드루 카네기에 대해서 자료를 좀 살펴보았습니다.  뉴욕에 가면 카네기 홀이 있지요.  그 카네기가 이 카네기입니다. =).  피츠버그에 카네기 멜론 대학이 있습니다. 역시 카네기 입니다.  피츠버그에 카네기 박물관 소속 전시장이 네가지가 됩니다. 규모도 크고 알찹니다. 모두 그 대단하다는 재벌 '강철왕' 카네기가가 기증하고 후원한 것들입니다.  그러면 이 카네기 아저씨가 참 훌륭하고 대단한 분인것 같습니다.  워싱턴 디씨에는 '국립 대성당 (National Cathedral)'이 있습니다. 원래는 '성공회 Episcopal = Anglican Church' 소속이긴 하지만, 종교나 이념에 상관없이 누구나 들어와서 각자의 방식으로 기도하도록 공개된 곳입니다.  그런데 이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래스중에는  앤드루 카네기씨를 기념하는 작품도 있습니다.  정작 카네기는 '무신론자'였지만요.  :)  (카네기가 자연사 박물관을 후원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대단한 자선가, 박애주의자에 대해서 제가 새삼스럽게 삐딱선을 타고 삐딱하게 들여다 볼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력을 살피다보면, 그가 피츠버그에서 한 행적중에 매우 불행한 사태가 있었습니다.  그는 제철소로 급 성장을 했고, 피츠버그의 노동자들 대부분이 카네기 소유의 공장에서 일을 하고 살아갔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들 사이에서 노동운동이 일어났을때, 카네기는 '노조 탄압' 혹은 '노조 소탕' 쪽으로 가닥을 잡아갑니다. 노동자들은 노동운동 결과 오히려 임금이 삭감되거나 일자리를 잃거나,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아주 무시무시하고 철통같은 노조 탄압이 자행된 결과 였습니다. 카네기는 노조를 물리치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의 성공여부와 상관없이 당시 이 재벌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냉소'와 '멸시'로 가득찼다고 합니다. 그는 한때 피츠버그에서 제대로 얼굴도 들지 못하고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후 그는 자선가로 변신합니다. 막대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데 노력합니다. 그는 국립 대성당에서 그를 기념하는 스테인드 글래스를 만들정도로 '천사'같이 삶을 마감합니다.  그가 '한때의 실수'를 이런식으로 개선한 것일까요? 오늘날 카네기를 비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양상을 들여다보면서 저는 한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는 오늘날 오바마 정권에 대한 공화당의 비판, 혹은 중산층 미국인들이 오바마를 보는 시각과도 연결됩니다.

 

오바마가 의료개혁을 하고, 전국민 의료보험 정책을 시행하고 싶어하는데, 공화당과 미국 시민들은 이를 '사회주의 정책'이라고 비난합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이 세금을 조금 더 내는것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사회주의는 한국에서 빨갱이 라는 말처럼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한국에서 빨갱이 소리 들으면 삼족이 위험에 빠지듯, 미국에서는 아직도 사회주의가  반기독교 정신처럼 지옥에 빠질 개념입니다.)  미국 시민들은 '부의 재 분배'에 대하여 적대적입니다.  이들은 그 대신 '부의 사회환원'에 박수를 칩니다.

 

'부의 재분배'와 '부의 사회 환원'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부자가 세금을 많이 내고,  가난한 사람이 세금을 조금 내는 것은 --> 부의 재분배 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돈 많이 벌었는데, 왜 내가 일도 안해서 가난뱅이로 사는 저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위해 세금을 더 내야 한단 말인가?' 이런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극단적인 예입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사회 기금이나 자선행사에 돈을 왕창 기부하는것은 ==> 부의 사회 환원 입니다. 미국은 이런식의 사회 환원에 박수와 찬사를 보냅니다.

 

정리:

 

 그들의 개념  Socialism  Capitalism
 그들의 이해  수익(부)의 재분배  수익(부)의 사회환원  
 그들의 반응

 "빨갱이!"

 

오바마는 빨갱이다!

사회주의를 외치는 놈들은 죄다 빨갱이다!

 

 "자선가!"

훌륭하신 기업인!

사회 환원 하겠다는데 탈세좀 하면 어때?

재산좀 세습하면 어때? (탈세좀 봐주면 안되니?)

 

 

 

카네기는 어떻게 했는가? 제 단견이지만, 카네기는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근사하게 돈을 사회에 환원하고 죽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 위대합니다. 내가 상상할수도 없는 많은 돈을 사회에 주고 돌아갔으니까.  하지만 한번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카네기가 노동자를 탄압하는 대신에 그가 공장에서 벌어들인 돈을 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복지와 교육에 풀었다면? 노동자들에게 월급을 더 많이 주고 그들의 주거환경 개선에 좀더 힘썼다면? 그랬다면?  당시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윤택했겠지요. 그들은 카네기를 그들의 진정한 친구로 사랑하고 존경했겠지요.

 

하지만 카네기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까지 해가면서 그의 부를 키웠고,  그리고 폼나고 근사하게 학교 세우고 박물관 세우고 각종 자선기금 펑펑 내 놓은 후에 천사처럼 천국으로 향했습니다. 돈 참 폼나게 잘 썼습니다.  광나고 폼나는 일에 잘 썼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칭송을 하기도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카네기는 부의 재분배 대신에 부의 사회 환원을 선택한 머리 좋은 사람입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는것을 우리는 비난할수 없습니다.  하지만 정승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쓸줄 아는 사람이 더 훌륭한 사람일것입니다. 카네기는 개와 정승의 조합입니다.  (제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나마 정승처럼 써줘서 땡큐를 날립니다. 덕분에 저같은 사람도 박물관에 가서 좋은 것을 많이 볼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뒤에 피츠버그 노동자들의 고혈이 있음도 잊어서는 안될것입니다.

 

자기가 집에서 부리는 '일꾼'들에게는 '인색'하게 굴면서 밖에 돌아다니며 자선행사에 열중한다면?  하지만 세상은 이런 자선가들에게도 경의를 표합니다. (일단 내가 그 희생자가 아니라면 억울할 이유가 없으니까.)  "넌 왜 하필 그런것을 들여다보는거니 빨갱이처럼?"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할말이 없습니다. 그냥 궁금해진다는거지요. 그저 궁금할 뿐입니다.

 

 

 

 

2009년 11월 7일 토요일 방문.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09. 11. 12. 03:33

 

The Lost Art of Walking: The History, Science, and Literature of Pedestrianism

 

 

The Lost Art of Walking by Geoff Nicholson

 

 

이 책은, 하드커버일때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비싸다'이러고 돌아섰던 것인데, 근래에 페이퍼백이 나와줬다.  하드커버로 시작해서,  페이퍼백이 나왔단 얘기는 책이 잘 팔려나갔다는 것도 의미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포츠'는... (며칠전에 누군가가 묻길래 조금 생각해보고 대답했는데)...'걷기'이다. '걷기'라면 자신 있으니까.  안타깝게도 달리기는 잘 못한다.  걷기는 잘 한다. 걷기 잘하는데 달리기를 못한다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난 정말 잘 걷는다.  우리 언니는 내 말을 이해한다.  우리 언니는 정 반대이다. 우리 언니는 달리기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피로한줄 모르겠는데, 걷기는 오래 못하겠다는 것이다. 걸으면 지루하고 어지럽고 달리면 머리가 가볍다고 한다.  우리언니는 나와 정반대인데, 그래서 나를 이해한다고 한다.  난 달릴때 힘들고 어지럽고 걸을때 몸이 가볍고 좋은 생각이 많이 난다. (한때 미친듯이 걸었으나 지금은 통 걷지를 않는다...하지만 내가 이 깊은 삶의 수렁을 벗어나면...언젠가...다시 옛날처럼 웃으면서 활기차게 걷게 될지도 모른다.)

 

걷기 이외에 '수영'을 잘 하지는 못하지만 좋아한다. 특히 평온한 바다에서 하는 수영을 좋아한다. 바다에서 송장처럼 둥둥 떠 돌아다니는 일을 좋아한다. (플로리다에서 공부할때, 돈 안들이고 할수 있는 오락이 바다에 가서 둥둥 떠다니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잘 못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스포츠는 '마라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마라톤' 선수들의 몸매가 가장 아름답고 섹시한 몸매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최소한의 오직 필요한 근육만 붙어있는, 강인한.  (군더더기 장식적 근육에 대해서는 경멸하는 태도를 갖고 있는 편이다.)  나는 이봉주 선수를 좋아한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냥 그 사람이 믿음직하다.  그리고 또 좋아하는 스포츠는 '축구'이다. 왜 축구를 좋아하느냐 하면...축구니까 그렇다... 박지성 때문도 아니고 그냥, 공원에서 사람들이 축구하는 것을 멀리서 멀거니 쳐다볼때가 있다. 나는 그 사람들을 쳐다본다.

 

그외의 스포츠에 대해서 나는 별반 관심이 없다. 나는 국가대표가 누군지도 잘 모르고, 국제 행사에서 죽어라고 한국을 응원하는 일에도 별 관심이 없다.  스포츠가 스포츠지 뭐 별건가 싶기도 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는 (누군가 묻길래 조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걷기.'

 

언젠가...전처럼.. 하루에 몇시간씩 걷는 그런 나날이 오기를... 걷기를 하면 우울증이 사라진다는 설도 있지만, 그것도 속이 편할때, 배불러서 우울할때의 얘기이다.  만약에 걷기를 통해 우울증을 해결할수 있었다면,  노무현 대통령이 산책나갔다가 바위에서 점프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것이다. 정말 우울할땐, 걷기도 별 소용이 없다. 내가 요즘 걸으러 나가지 않는 이유는, 나 역시 걸으러 나갔다가 키브리지에서 그냥 점프하고 싶어질까봐...  내가 산 걷기전용 신발 두켤레는 먼지만 뒤집어쓴채 내 방구석에 버려져 있다.  점프하면...간단하지...  하지만 생을 그렇게 끝낼순 없는 일 아닌가...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09. 11. 9. 14:22

 

공식 홈페이지: http://www.warhol.org/

 

 

2009년 11월 7일 토요일. 화창한 늦가을 날씨였습니다.  워싱턴에서 펜실베니아주의 피츠버그 까지는 대략 250마일 거리.  중간에 주유, 휴식 시간까지 포함하면 편도 다섯시간을 예상해야 하는 거리입니다.  (하루에 열두시간도 뛰는데 편도 다섯시간정도야~  헤헤)

 

 

2009년 현재 입장료는 성인 15달러, 학생 8달러 입니다. 오전 10시에 열고 오후 다섯시에 닫습니다. '개인 미술관'의 경우 사진 촬영을 허요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앤드루 와이어드의 브랜디 와인 리버 뮤지엄 (http://americanart.textcube.com/43)에서도 그러하였고,  다른 대부분의 '개인 이름'을 딴 미술관들이 사진촬영을 금지합니다. 아무래도 '개인 미술관'의 협소성때문에 이런 방침을 취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한정된 소장품을 관람객들이 사진으로 다 찍어가버리거나,  이를 언라인으로 유포해버리면 미술관 소장품의 매력이나 신비감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진 촬영을 못하게 하면, 조금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사진을 '안찍어도 된다'는 안도가 느껴지면서, 숙제를 면제 받은 가벼운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냥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즐기다가 나오면 된다는 안도감.  기록하지 않아도 된다는 가벼움. 그래서, 덕분에 편안하고 쾌적한 미술관 구경이 되었습니다. 

 

미곳을 편안하게 보는 방법은, 일단 1층 입구에서 입장표를 산 후에 구석의 '와홀 소개 전시실'을 대충 살펴봅니다. 이 곳에는 와홀의 일생의 기록이 정리되어 있어서 앤디 와홀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략 그가 누구이고 무엇을 했는지 살펴볼만 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이미 앤디 와홀 관련 책 한권을 읽고 난 후라서 이 소개실은 대충 보고 자리를 떴습니다.  (책 한권 읽고, 관심이 생겨서 와홀 미술관을 찾은 것이니까요).

 

이제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 (맨 꼭대기층)으로 이동합니다. 7층에서부터 한층씩 내려오면서 전시회 구경을 하는 것입니다.  마침 제가 방문했을 때에는 이곳에서 Shepard Fairey 의 Supply and Demand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6층에서는 와홀의 작품전시와 함께 Super Trash 라는 제목의 '쓰레기같은 영화 포스터' 전시회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5층에서는 초기의 팝아트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는데,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실크스크린의 초상화 작품들, 그리고 꽃무늬 작품들,  그리고 그가 제작한 식품 상자 작품들등 친숙하면서도 정다운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4층에도 기획전과 와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3층에는 그의 타임 캡슐상자들과, 그 상자를 지키는 개 (박제개)가 있었습니다. 그의 Interview 잡지 표지들도 전시되어 있었고요. 2층도 와홀 전시실인데, 내부 전시 준비중이라 창고용 상자들만 쌓여있었습니다. 이것도 작품인가 싶어서 들여다봤지만 =) 그냥 상자였지요.

 

1층에는 매표소, 와홀 소개 전시장, 그리고 그의 설치 작품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입구쪽에 기념품 가게가 있군요.  지하에는 카페가 있습니다.

 

 

 

 

 

 

'미국 미술' 전문 블로그를 표방하고 있는 이 블로그를 꾸려나가면서, 앤디 와홀 얘기를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갈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심심할때마다 그를 소개하는 소책자를 한권 여러차례 통독을 한 바 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서 와홀 차례가 되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기로 하고, 기왕에 미술관을 방문했으니 그에 대한 간단한 소개만 해보겠습니다.

 

앤디 와홀 (1928-1987) 은 슬로바키아 출신의 이민자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바로 이 도시 피츠버그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며, 현재의 카네기 멜론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미술가인 셈입니다. 그는 맨해턴에서 상업화가로 성공한후 그의 천재성을 발휘하여 이런 저런 미술 작업을 시도하게 되지요.  한때는 미술 작업에서 은퇴한다고 선언하고 영화 작업에 몰두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매체를 통해 앤디 워홀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는데, 아마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마릴린 몬로'의 초상화가 아닐까 합니다.  반복되는 여배우의 이미지. 워싱턴에 와서 시내는 몇년간, 워싱턴및 뉴욕, 그리고 대도시의 유명 미술관들을 돌아다니다 보니 앤디 워홀의 작품도 흔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어딜가나 현대 미술 전시장에 가면 등장하는 깡통 그림, 여배우 그림, 때로는 하도 그의 작품이 '널려'있으니까 시시하게 보이기까지 하는데요.  관심이 생겨서 책을 찾아 보니 예술의 여러분야를 설레발을 치고 돌아다니며 작업을 해서 이 사람 예술세계는 정리하기도 쉽지가 않아 보입니다.  가령 '에드워드 호퍼' 이 사람 예술세계를 정리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평생 자기 스타일을 고수한 사람이라 오히려 평하기는 편하지요.  워홀은, 너무 여러가지 작업을 중구난방으로 해서, 대책이 없습니다. 피카소도 그런 편이지요.  뭐 심하게 말해서 '잡놈'기질이 있다 이것이지요. 그래서 조금 삐딱하게 말해서, '싸구려 미국 상업주의에 편승한 잡놈같은 예술가' 정도로 파악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카네기 미술관에 걸려있는 재클린 케네디 초상화 연작 (클릭하면 커집니다)

 

그런데, 앤디 워홀 뮤지엄에 가서 7층부터 차례차례 내려오는 사이에 저의 이런 시각에 큰 변화가 오고야 말았습니다.  앤디 워홀 뮤지엄을 나서면서 저는 깨끗이 그의 예술성과 천재성에 백기를 들고 말았지요. 그는 '대단한'  '잡놈'이었던 것입니다.

 

특히 제가 워홀에게 반한 대목은, 그의 '전투복 무늬' 연작에서였습니다.  미국의 여기저기 다니다보면 그의 '예비군복 무늬 (얼룽덜룽한 위장복 무늬)' 작품들이 보이는데,  저는 왜 그것이 '예술'이 되는지 이해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워홀 뮤지엄에는 이 전투복 무늬의 작품들이 여러점이 걸려있었는데, 조금씩 색깔이 변하면서 마지막에는 핑크색 주조의 전투복무늬가 되는 것입니다.  핑크색 얼룽덜룽한 전투복 무늬!  상상을 해보죠. 만약에 우리들이 전쟁터에 핫핑크, 형광 분홍색이 얼룩얼룩한 위장복을 입고 나가서 싸우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전쟁 하겠다는 겁니까? 하하)  워홀은 전쟁에 대하여 한마디도 안하면서, 평화를 역설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가 그린 모택동 초상화가 유명한데, 저는 그 모택동 초상화 볼때마다 기분이 안좋았죠. 아무튼 한국전 막바지에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온 중공군을 지휘하던 사람이니까.  그런데 워홀 뮤지엄에 걸린 모택동 초상화 연작을 보면, 그의 입술에 연분홍색이 칠해지고, 노란색도 칠해지고,  뭐랄까, 힘이나 폭력성이 거세된, 어린아이들 상상속의 평화로운 색감이 넘치더란 것이지요.  워홀이 꿈 꾼 세계는 장난과 쾌락이 가득찬, 가벼운, 심각하지 않은, 명랑한, 유치한, 폭력이 설 자리가 없는, 그런 세상처럼 보였습니다. 

 

 

카네기 미술관, 앤디 워홀의 Love

 

 

 

그래서, 15달러를 주고 앤디 워홀 뮤지엄 구경을 하고 나오면서, 그 돈 15달러가 억울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태까지 꽤나 많은 워홀의 작품들을 구경해왔지만, 그리고 그의 소개책자를 통독하면서 그에 대한 이해를 하려고 했지만, 내가 수긍하거나 발견할수 없었던 그의 천재성을 저는 그의 전시관을 층층이 둘러보며, 시기별로 분류 정리된 전시물들을 챙겨 보면서 문득,  사과가 툭! 하고 떨어지듯, 문득, 깨달았다고 할수 있지요.  워홀 뮤지엄에 가지 않았더라면, 저에게는 아직도 워홀이 그저 '싸구려 상업주의에 영합한 운좋은 잡놈' 정도에 불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저는 앤디 워홀을 사랑할수 밖에 없을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를 만나고 난 후에 제 기분이 많이 가벼워졌음을 실토합니다. 인생은 여전히 겨울외투처럼 무겁지만,  그러나 우리는 형광 분홍색처럼 가볍고, 유치하고, 유쾌할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가볍게, 유치하게, 밝게! 

 

 

 

 

 

 

뮤지엄 샵에서 15달러 주고 산 셔츠: I never fall apart because I never fall together. 나는 망가지지 않는다 (혹은 나는 실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망가질것이 없으니까.

 

 

이 셔츠의 문구를 봤을때, 문득, 음, 그렇지. 나 빈손으로 와서 한 세상 잘 놀았지...잘 놀고 있지...지금 사라진대도 내가 억울할 것은 없지 않은가... 깨달음 (환각과 같은 깨달음일지라도).

 

 

피츠버그의 '카네기 박물관' 소속 전시관이 네가지가 있습니다.

 1. 카네기 미술관

 2. 카네기 자연사 박물관

 3. 앤디 워홀 미술관

 4. 카네기 과학관

 

이중에서 제가 이날 가 본곳은 카네기 미술관과 자연사 박물관, 그리고 워홀 미술관이었지요.  다음에 피츠버그에 가면 카네기 과학관을 가보려고 합니다. 물론...미술관도 또 둘러보고 싶고요.

 

 

 

앤디 와홀 이야기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쓸 수 있을것 같아요. 지금 써야 할 작가가 많이 밀려있거든요 = )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09. 11. 5. 05:10

 

 

 

Detroit Museum of Art (=Detroit Institute of Art = DIA = 디트로이트 미술관)는 미국 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 (Detroit)시에 있는 미술관 입니다.  젊은이들에게는 Enimem 의 8 Mile 이라는 노래로 더욱 친근하게 여겨질만한 도시인데, 자동차로 달려 디트로이트 구역으로 들어서니 도로의 표지판에 8 Mild Road, 7 Mild Road 라는 표시가 보였습니다.  에미넴의 노래 8마일은 정말로 디트로이트에 존재하는 거리의 이름이었습니다.  디트로이트는 한때 포드 자동차를 위시한 화학, 제약 산업이 활발하게 성장하던 곳이었는데, 현재는 미국 산업의 몰락과 함께 도시 자체도 몰락의 길을 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최근에 마이클 무어가 발표한 영화 Capitalism, Love Story 라는 작품에도 미시건주의 자동차 산업의 몰락이 주민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디트로이트 미술관 (http://dia.org/) 은 1885년 설립된 이래 세계 여러나라의 명작을 비롯 현대 작품에 이르기까지 65,000 여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규모는 작겠지만, 내용면에서는 파리의 루브르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가서 볼만한 세계 명작, 혹은 명 작가들의 작품들을 골고루 다 갖추고 있다고 할 만합니다.)

 

제가 이 미술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멕시코의 작가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의 록펠러 건물 벽화사건이 하도 유명해서, 디트로이트에 가면 리베라의 벽화가 온전하게 보존된 것을 볼 수 있다길래,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 벽화가 보고 싶었거든요. 다른 작품들도 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사실 웬만한 작품들은 이미 큼직큼직한 미술관에서 작가별로 주요 작품들을 본 후라서 크게 매력적이지는 않았고,  오직 그 벽화 때문에 디트로이트로 차를 돌렸다고 할 수 있지요.

 

 

디트로이트 시내를 달려 미술관에 도착하면 로댕의 생각하는 남자가 생각에 잠긴채 우리를 반깁니다. 미국에 이 생각하는 남자가 15점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제가 직접 만나본 남자는 (1) 워싱턴 국립 미술관 (2) 메릴랜드 볼티모어 미술관 (3) 필라델피아 로댕 미술관 (4) 디트로이트 이렇게 넷입니다.  앞으로도 돌아다니며 이 남자가 잘 있는지 찾아 볼 생각압니다. 

 

 

 

 

 

 

건물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주차비가 저렴한 편입니다. 온종일 5달러) 주차장 입구로 나오면 이렇게 정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미시간의 가을도 펼쳐져 있군요.

 

 

 

 

 

입구에서 표를 살 수 있습니다. 성인 8달러. 다른 대도시의 미술관 입장료에 비해서 저렴한 편입니다. 별 불만없이 입장표 값을 지불했습니다.

 

 

 

 

 

시대별로, 지역별로 세계 여러나라의 명품들이 골고루 전시가 되어 있었지만, 제 블로그의 독자들께서 이미 아시는대로 제가 '미국미술'쪽에 정신을 팔고 있는지라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건성으로 보게 되는편입니다.  사진도 주로 미국미술, 현대미술 작품을 중심으로 찍게 되는군요. (물론 제가 아주 좋아하는 그림은 시대를 불문하고 정신 놓고 보기는 합니다만.)  뭐, 와홀이 잘난척하는  초상화 작품이 보이는군요. 

 

 

 

 

예,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작품을 발견한 순간, 잠시 제가 저의 우울을 잊을수 있었습니다.  아주 잠시 환각현상처럼 삶의 고통이나, 좌절감, 실의, 자기 연민이나 자기 혐오까지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브르헬 (Pieter Bruegel the Elder)의 혼인잔치 (The Wedding Dance  1566년 추정)를 만났기 때문에.  한번 꼭 보고 싶었던 작품이, 갑자기, 예고없이 문득 내 앞에 나타났기 때문에.   이 그림에서는 정말 '소리'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왁자지껄 웃으며 떠드는 소리, 풍악소리, 바람소리 뭐 이런 소리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와 나를 감싸는 듯한 기분이 드는 그림이었습니다.

 

 

 

 

뉴욕 맨해턴의 현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 MoMA)에 가면 노란 바지를 입은 사나이라는 제목의 이탈리아 작가 작품이 있습니다. Michaelangelo Pistoletto (미켈란젤로 피스톨레또)라는 작가인데, 이 사람은 그의 그림을 거울같은 스텐레스 판에 작업을 합니다.  그림을 보면, 거울같은 그림판에 내 모습도 있으므로 나도 그림의 주인공이 된듯한 기분도 들고, 착시 효과도 있고 그렇습니다.  반가워서 그림속에 내가 들어있는 사진을 찍어보았습니다.

 

 

 

 

 

제가 브르헬의 그림에, 그리고 다른 명품들에 혼이 반쯤 나가긴 했지만, 정신을 수습하고,  본래  이곳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작품은 멕시코 출신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의 대형 벽화 였습니다.  마침내, 가서, 내 눈으로 보았다는 것이지요.

 

 

틈틈이, 이 벽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사진은 클릭하시면 커집니다.

 

 

 

 

 

 

 

 

 

 

 

 

제가 서 있는 사진 뒷쪽의 벽화 부분을 자세히 보시면, 왼쪽 상단에, 일하는 공장 노동자들을 '구경'하는 관객들이 보이는데 - 가슴에 큼지막한 십자가를 매달은 '귀부인'들과 신사들과 그 아이들이지요. 미국자본주의의 상징, 돈과 그들만의 신교도적(?) 신앙심이 결합된...  저는 특히 그 부분을 상세히 써보고 싶어집니다.

 

이 사회주의사상이 강하게 스며든 벽화가 '디트로이트'에서 뭉개지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 만으로도 저는 디트로이트 시가 좋아집니다. 디트로이트는 이 벽화를 살려놓기를 잘 한 겁니다. 사람들은 이제 이 '벽화'를 보기위해 이곳에 오니까.

 

방문: 2009년 10월 31일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09. 10. 31. 06:22

 

 

어제 새벽에 출발하여 12시간만에 펜실베니아, 오하이오주를 거쳐 미시간주의 주도인 이스트 랜싱에 무사히 도착.  미시간 주립대에서 개최된 slrf 오프닝 참석.  오늘은 오전에 주제발표를 무사히 마치고, 다른 발표를 둘러보고 숙소로 일찌감치 돌아왔다.  어제는 천국의 가을 날씨. 오늘은 비. 따뜻한 비. 북부라서 단풍 색이 선명하고 짙다.

 

(잠을 못자서 조금 피곤한것 외에는 ...대체적으로 평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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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