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8. 12:31

워싱턴 디씨,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에, 미국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장이 몇개가 나란히 있는데, 그 중에 이런 방이 보일겁니다.  창이 두개가 있고요, 그 창사이에 그림 한장이 걸려있습니다.  그리고, 방 가운데에 푹신한 벨벳 의자가 있습니다. 거기 앉으세요. 그 의자에 앉아서 이 그림을 바라보는 겁니다.

 

 

 

 

 

 

 

 

가만히 앉아서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귀가 안들리는것 같아요.

그림속의 정적이 그림 밖으로 나와서 내 귓가에 맴돌아요.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안들리고

뺨을 스치는 눈바람을 느낄 뿐이지요.

'정적'이 이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런 '소음'이라고도 하지요

매일 포탄 터지고 총알 날아다니는 전쟁터에서 고통받던 사람이, 퇴역하여 고향에 돌아왔을때, 그 사람은 도통 무지무지한 소음때문에 귀가 아파서 견딜수 없었대요. 정적의 소리죠. Sound of Silence.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무지무지한 속도로 돌아가고 있고, 그 소리도 엄청나대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 귀가 청음가능한 음역대만 들을 뿐이죠.

 

이런 신비한 그림이 한 장 있어요.  여름에도 이 그림 앞에 앉으면 눈이 내리는 소리가 나요. 안믿겨지지요?  하지만, 한번 가보세요. 어쩌면 눈의 정적 뿐 아니라, 내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르죠. 안믿겨지죠?  후후.  믿어봐도 좋을텐데, 한번.  믿거나 말거나.

 

 

 

 

 

 

 

 

 

Round Hill Road (ca. 1890-1900)

John Henry Twachtman Born: Cincinnati, Ohio 1853 Died: Gloucester, Massachusetts 1902 oil on canvas 30 1/4 x 30 in. (76.8 x 76.2 cm.)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William T. Evans 1909.7.64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2nd Floor, East Wing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09. 12. 28. 07:52

공식 홈페이지: http://www.artic.edu/aic/

몇해전에, 시카고 지나는 길에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미술관에 들른적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에 뜨거운 한여름의 여행 이야기를 생각하니 따뜻한 기분이 드는군요.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승용차로 대략 1시간 달리면 시카고 도심이 나오고  미국의 5대호중에서 미시간호를 바로 끼고 있는 위치에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의 미술관이 있습니다. 흔히 시카고 미술대학 (시카고 미술학교)라고도 부르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는 미국의 미술대학중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명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래 사진 오른편에 청동사자 두마리 서있는 건물. 저곳이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미술관입니다. 미술관 바로 뒤로 미시건호가 펼쳐져있습니다.

 

 

 

 

위 사진과는 반대방향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사자 이쁘죠... 미술관 건물도 단아하죠...

 

 

 

 

사자가 올려다보는 하늘이 푸르고, 건물들이 예쁘네요. 시카고의 아름다운 고층 건물들입니다. '건축'을 공부하려면 시카고로 가라는 이야기가 있지요.

 

 

 

 

미술관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보면 안쪽에 이러한 코트야드가 보입니다. 레스토랑도 있어요. 레스토랑에서 뭔가 음식도 먹었었는데, 뭘 먹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미국 중서부 미술계를 대표하는 화가 Grant Wood 의 The American Gothic 이라는 작품이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사진 상태가, 요즘 인터넷 비속어로...대략...쩌는군요 -.-;;. 슬프죠... 아 그땐 똑딱이 시절이었거든요... )

 

 

 

 

에드워드 호퍼 아저씨의 작품도 큼직하게 걸려있었고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들이 무더기로 걸려있었는가 하면

 

 

 

 

조지아 오키프의 남편이었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기념 전시도 진행되고 있었지요.

 

 

아아, 제가 한때 미쳐있었던 메리 커셋 (Mary Cassatt)의 그림들도 여러점 있어서, 제가 황홀했었지요.  지금도 메리 커셋의 그림을 좋아하긴 하지만, 지금은 뭐랄까, 다른 분야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편이지요.

 

 

 

 

일본 판화의 영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그림. 역시 메리 커셋 작품.

 

 

 

아아, 동행이 없었으므로 사진을 찍어줄 사람도 없었지요. 누군가가 관객에게 부탁해서, 메리 커셋 그림 앞에서 기념촬영. 그 관객이 예술사진 전문이라 저를 아주 근사하게 찍어놨습니다.  그림 앞에서 유체이탈 일으키고 있는거죠.

 

 

 

 

내부 동선이 이러했고요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밀레니엄 파크 주변으로 한바퀴 전기 자전차 (세그웨이)를 타고 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보입니다. 저도 저거 타봤죠. 워싱턴에서. :)

 

 

 

이 밀레니엄 파크에서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가 당선자 연설을 했지요. 개표일 밤에.

 

 

시카고 도심을 벗어나면 펼쳐지는 끝없는 옥수수밭, 그리고 콩밭.  저는요 이 중서부지방의 콩밭을 상상할때마다 우리나라 대중가요 '칠갑산' 이 생각나요.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누나...'

 

있쟎아요. 미국의 중서부 평야지대에서 콩밭을 호미로 맬경우, 평생을 매도 다 못매요 하하하 (깔깔깔, 떼굴떼굴) 이런 상상하면 그냥 웃음이 나오고 말아요. 왜 그냥 허망한 유머중에 이런것 있쟎아요.  개미총각이 코끼리 처녀하고 결혼을 해서 살다가 코끼리가 죽었대요.  그러자 개미가 울면서 하는말, "아이고 아이고 저걸 언제 다 파묻어..."  하하하.  미국 중서부에서 호미들고 밭고랑을 파게 된다면, 우덜은 개미가 되는거죠. 아이고 아이거 저걸 언제 다 할거나...

 

아무래도 다음 페이지에서는 '그랜트 우드'를 소개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군요. :)

 

 

 

 

 

옛날에 옛날에, 전생에, 전전생에 시카고에 가 본적이 있지요.

 

2009년 12월 27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8. 04:53

토마스 윌머 듀잉

 

 

토마스 윌머 듀잉 (Thomas Wilmer Dewing 1851-1938) 은 매사추세츠주 보스톤 태생의 화가 입니다.  1876년부터 1879년까지 (그의 나이 25세부터 29세까지) 파리와 뮌헨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으며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Society of American Painters 그룹에 속하여 잡지 편집인이었던 Richard Watson Gilder의 살롱을 중심으로한 뉴욕 문화계에 어울리게 됩니다.  길더는 당시의 유명한 미술가, 작가, 재벌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이들과 '황금시대 Gilded Age'를 펼쳐 나갑니다.  미국미술사에서 '황금시대'는 말하자면 '돈'과 '예술'의 만남이었다고 할 만 하지요.

 

이곳에서 듀잉은 건축가이며 디자이너이기도 했던 Stanford White 와 친교를 맺게되는데 이들간의 돈독한 우정은 스탠포드 화이트가 죽을때까지 (1905년) 이어집니다. 스탠포드 화이트는 살해되었지요. 듀잉의 상심이 컸다고 합니다.  제가 듀잉 관련 페이지에 소개해드렸던 그의 작품들, 그 작품들이 '액자' 디자인은 모두 스탠포드 화이트의 작품입니다.

 

Gilder 의 살롱에서 듀잉은 그의 평생 아내가 되는 Maria Oakey (1845-1927)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고보니 듀잉보다 여섯살 연상이군요.  마리아 역시 화가였습니다. 마리아는 John La Farge 와 함께 미술 수업을 받았는데, 듀잉에게 화면을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조정해보라는 조언을 합니다.  듀잉이 Tonalist 로 나아간데는 아내의 역할이 지대했던 것이지요.

 

1890년부터 듀잉은 뉴 햄프셔의 스튜디오에 머무르며 초록색 계열의 이상화된 자연속의 여성들을 창조해냅니다. 1897년 그는 Society of American Painters 에서 탈퇴하여 Ten American Painters 모임에 합류하여 20여년간 이들과 함께 활동하게 됩니다.

 

The Ten (미국 인상주의 화가들) 뒤에 서있는 사람들중에서 오른쪽에서 두번째 콧수염 신사가 듀잉

Seated, left to right:

(1) Edward Simmons,  (2) Willard L. Metcalf, (3) Childe Hassam, (4) J. Alden Weir, (5) Robert Reid
Standing, left to right:

(6) William Merritt Chase, (7) Frank W. Benson, (8) Edmund C. Tarbell, (9) Thomas Wilmer Dewing, (10) Joseph Rodefer De Camp

 

그리고 1905년부터는 그간의 야외 풍경에서 벗어나 실내 중심의 작품 활동을 합니다. 그의 그림에서 실내는 부드럽게 채색되고, 색조(tone)가 통일되어 있습니다.  인물들은 하나 혹은 둘이 간결한, 대부분이 생략된 공간에 존재합니다.  남자를 찾아보기 힘든 그의 그림에서 여성 인물들은 손으로 다가가 잡을수 없는 거리에서, 이상적인 형태로 그리고 고요하게 존재합니다. 그의 그림에서 인물들의 숨소리나 체온을 느끼기는 힘듭니다. 마치 숨쉬는 풀잎들처럼 그들은 존재합니다.

 

듀잉은 미국의 인상주의 미술을 이끌었던 10인회의 회원이었으므로 미국 인상파 화가로 분류가 되기도 하지만,  좀더 국소적으로는 Tonalist (색조주의자) 군에 속합니다. Tonalism (색조주의)는 1880년경부터 1915년에 이르기까지 미국출신의 화가들이 풍경화를 그릴때 보였던 양상인데 George Inness 와 James McNeill Whister 가 그 대표적인 화가들입니다.  듀잉역시 화면의 전반적인 색조로서 화면의 분위기를 전달하는데 공을 들였지요.  이 색조주의는 미국에서 인상파 화풍이 우세해지면서 그 명맥을 잃게 됩니다.

 

듀잉은 미술가로서는 매우 행운아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미술사에서 '당대'의 인정을 받고 영예를 누리다가 죽어서도 여전히 대가로 인정받은 화가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참하게 살다가 인정도 못받고 죽은후에 사후에 인정받아 그림값만 하늘 높을줄 모르고 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그러하였고, 우리나라의 박수근 선생 역시 미군부대에서 양키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는 '노동'으로 간신히 연명할수 있었으며...  그런데 듀잉은 일찌감치 뉴욕의 보험업자였던 John Galletly 그리고 디트로이트의 철도차량 사업가였던 Freer (워싱턴의 프리어 갤러리를 기증한 사람)의 열렬한 애정과 지원을 받는 행운을 누립니다.  결국 Galletly 가 수집했던 작품들은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에, 그리고 프리어가 수집한 작품들은 스미소니안 프리어 갤러리로 옮겨지게 됩니다.

 

 

초록 안개의 꿈

 

http://americanart.textcube.com/234 페이지에서 우리는 몇장의 그림을 보고 듀잉 작품세계의 어떤 특징을 꼽아본 적이 있습니다. 해당 페이지의 내용을 옮겨 보겠습니다.

 

(1) 그림속의 주인공들이 모두 '여성'들입니다.  남자 안보이지요?  :)  '여름'과 '낭송'에서는 각각의 화면에 두명의 주인공들이 들어있습니다.  세폭 병풍같이 생긴 작품 속에는 한폭마다 한명의 여자가 그려져 있지요.

 

(2) 모두 유화이군요.

 

(3) 배경이 모두 초록색 계열이지요.

 

(4) 그리고 배경이 모두 '자연'입니다.  인공적인 '건물' 같은것은 안보이지요?

 

(5) 안개가 낀듯 화면들이 대개 '아슴프레'하지요?  사진사가 사진 실력이 없긴 하지만, 원래 작품이 이래요. 촛점이 어긋난것처럼 아슴푸레한 것이 이 세작품의 공통점입니다.

 

(6)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보이십니까? 아니지요? 팔은 가늘고 하체는 무척 길죠.  '이상화'된 여성의 체형인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단지 '몇 편'의 작품만으로도 듀잉의 이런 특징들을 발견해 낼수 있었는데요.  듀잉의 이야기들이 이어지면서 뭐가 새로 추가가 되었을까요?

 

(1) 그림하고는 상관이 없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의 '액자'가 모두 통일되어 있지요. 그것이 워싱턴에 있건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 있건 액자는 동일한 사람의 작품입니다. 그와 막역한 친구이기도 했던 건축가, 디자이너 Stanford White 가 디자인 한 것입니다.

 

(2) 일정한 색조를 유지하면서 그 색감 자체가 그림의 '주제'였다는 점에서 듀잉 활동당시 서로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 받았던 James McNeill Whistler (제임스 맥닐 휘슬러), George Inness (조지 이네스)의 Tonalism 을 그의 그림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3) 그가 후에 십인회에 가입하게 되는데, 십인회의 주요 멤버들이 미국미술사에서 '미국 인상파 화가들'로 자리매김 하게 됩니다.

 

(4) 1905년 이후에는 실내에서 여인들이 악기를 들고 있는, 실내 중심의 그림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제가 소개드린 작품들을 찬찬히 보시면, 이 블로그에 소개된 작품들 만으로도 듀잉의 활동이 '야외'에서 '실내'로 옮겨가게 된 것을 파악할수 있습니다.

 

(5) 당시에 미국이나 유럽 화가들을 사로 잡았던 '일본화' '일본화풍'이 듀잉에게도 영향을 끼친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6) 그는 당대에 '부자들의 후원'을 듬뿍 받은 운좋은 화가였지요. 그는 산업의 폭발적 발전으로 신흥대국이 된 미국의 재벌들의 '돈'과 유럽등지에서 예술 공부를 하고 돌아온 미국의 예술가들이 어울려 이뤄낸 '황금시대'의 아이였고, 수혜자였던 것이지요.  금박으로 떡칠을 하여 백악관에 기증한 스타인 피아노의 장식이나, 디트로이트 재벌 프리어의 실내 장식이나 장식용 그림을 제작해내면서, 그는 예술을 위해 배를 곯거나 화구를 사기위해 막노동을 할 필요가 없는 '아름다운' 세월을 보낼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하여, 듀잉의 그림에서 우리는

'안개속을 걷는듯한 상쾌하고 촉촉한,'

'몽환적인,'

'어디선가 아름다운 멜로디가 들려오는 듯한,'

'사람의 숨소리나 땀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선녀들같이 아름다운 여인들이 가볍게 춤을 추는'

'연두색 물감이 이러저리 스며들다 내 영혼에까지도 스며들듯한' 

이러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프리어 갤러리의 듀잉 전시실에 가면 호흡도 고요해지고, 마음도 잠시 편안해집니다.

 

 

영혼의 부재

 

그렇다면, 이토록 아름다운 작품들이, 왜 미국 미술사 책에서, 미국 미술 비평 앤솔로지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듀잉의 이름이 세계적인 화가 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미국 미술의 언저리에서 희미하게 맴돌다 마는 것일까요?

 

이전페이지에서 저는 이를 간단히 '페이소스 (pathos)가 안보인다'로 정리한 바 있습니다. 듀잉의 색조는 우리 영혼에까지도 스며들것같이 부드럽고 습기가 있으며 정제되어 있지만, 그토록이나 아름답지만,  안타깝게도 듀잉의 여인들에게서 우리는 영혼을 느낄수 없습니다. 사람의 숨소리나 땀냄새가 나지 않으므로 관객인 우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천상에만 존재하는 주인공들 곁에 우리는 다가갈수 없습니다.  다가갈수 없으므로 공감이 불가능해집니다.  저들은 관객인 나와 공감하지 않습니다. 나의 고통을 들어주지도 않고, 나의 신음소리를 듣지도 못합니다.  나는 그림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낍니다.

 

이런 재미있는 설이 있는데요. 백화점 판매직원이 '너무나도 아름다우면' 오히려 매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수 있다고 하지요.  내가 물건 사는 사람이고 판매원은 내게 도움을 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너무 근사하고 잘생기면 오히려 손님인 내가 의기소침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너무 잘난 판매원은 오히려 물건을 잘 못 판대요. (믿거나 말거나). 

 

듀잉의 그림속에는 '관객 (비평가들이나 미술사가 모두 포함)'들이 동감하거나 공감할 삶의 고통이 보지지 않습니다. 부조리함이나 비뚤어짐, 망가짐 같은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극복해야할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팔자 늘어진 어떤 사람들이 식후에 페퍼민트 한잔으로 느끼함을 지우려하듯, 딱 고만큼의 아름다움만이 존재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름다운 그림들은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가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리고 지워지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화가 듀잉의 몫인것 같습니다.

 

듀잉이 만약에 물감을 사기위해 막노동을 해야 했거나,  캔바스를 새로 장만할수 없어 그림위에 또다시 그림을 그려야 했던 상황속에서 고민하고 고통을 겪었더라면, 이 아름다운 선녀들은 우리에게 좀더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줬을지도 모릅니다.  (미술가는 배부르면 안돼? 꼭 고생하다 죽어야 미술이 완성돼? 이렇게 반문하고 싶으시죠?  영화 누리면서 떵떵거리다가 세상 하직한 대가들도 여럿 있죠.  듀잉의 예술은 거기까지도 미치지 못했겠지요.)

 

저는 듀잉의 그림들을 좋아합니다. 편안하고 좋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페이지를 여섯개씩이나 만들면서 상세하게 그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동시에 안타까움도 느낀다는 것이지요...  안개처럼 희미하게 사라지고 만 그의 예술세계가 안타까운 것이지요.

 

인생은...고통스럽지만...고통을 견디면...나는 조금 더 사람 냄새를 풍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고통을 견뎌야 하는 이유 같은것을 이렇게라도 찾게 되는군요.) 나를 불후의 명작으로 만들수 없다해도, 죽는 순간까지는 불후의 명작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해야겠지요 뭐...

 

2009년 12월 27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23:59

 

 

스미소니안 국립 미국미술 박물관, 듀잉의 작품 전시실 입니다. 2009년 7월 13일에 촬영한 것들인데요. 보시다시피...사진상태가 여엉 '아니올시다' 입니다. DSLR 갖고 다니기 전에 소형 디지털카메라로 대충대충 찍었던 사진들이라서.  (조만간 다시 들러서 작품사진들을 담아 오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에 전시되고 있는 이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스타인웨이 피아노사의 창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미국 백악관에 기증할것을 목적으로 제작된 것인데 Theodore Roosevelt 대통령 재임시 (1903) 듀잉이 '장식'을 담당한 것입니다.  이 피아노는 스타인웨이가 제작한 피아노중에서 십만번째 작품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도 이 피아노를 연주한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 피아노는 태프트, 윌슨, 하딩, 쿠어리지, 후버, 그리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임기까지 백악관에 있었다고 합니다.

 

 

 

흰 바탕에 금박으로 장식을 하고, 뚜껑 안쪽에 열명의 고운 아가씨들이 있는데요, 맨 왼편의 아가씨는 의자에 앉아있고, 나머지 아홉명은 원무를 추듯 서있는데요. 스타인웨이가 듀잉에게 작품을 의뢰하면서 America Receiving the Nine Muses (아홉명의 뮤즈들을 맞이하는 아메리카)라는 고전적 주제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아홉명의 뮤즈는 제우스와 네모신 (Mnemosyne) 의 아홉명의 딸들을 가리키는데 예술의 상징으로 서양 고전물에 많이 등장하지요.  듀잉은 뮤즈들을 그리면서 미국 건국 초기의 여성들의 옷차림을 한 여인들을 그려넣음으로써 서양 고전화에서 살찍 비껴갔다고 합니다. 뮤즈를 그리더라도 미국식으로 그리겠다는 자존감의 표현이었는지 알수 없으나 이를 애국적인 시각에서 해석하는 평자도 있습니다.

 

 

 

 

 

 

 

 

아래 작품은 In the Garden, 정원에서 (1892년) 작품입니다.

 

 

 

 

 

2009년 7월 13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23:59

 

프리어 갤러리의 듀잉과 타이론 전시실.  왼편에 있는 작품들이 듀잉. 오른쪽 벽에 걸린 작품들이 타이론의 풍경화들입니다.

 

듀잉의 작품, 왼쪽부터 (1) The Four Sylvan Sounds, (2) Before Sunrise, (3) After Sunset, (4) The Blue Dress 가 차례차례 보입니다.  대강 전시실이 이러한 분위기이고, 전시실에 걸린 작품들의 실제 크기가 이정도 된다는 '감'을 독자들께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사진에 찍힌 전시물외에도 입구쪽에, 그리고 다른 전시실에 작품들이 있으므로, 제가 프리어에서 '사냥해온' 작품들을 차례차례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전시된 작품은 '모두/깡그리' 찍어왔습니다 ^^)  <--- 이 돌쇠식 열정~ (아이참...사진 기술을 좀 익혀야 하는데...제가 게을러서요...전 아무래도 선생님이 필요해요...게으른 사람들에게는 '교실'이나 '선생님'이 동기가 되지요.  이 대충주의를 버려야 하는데...

 

 

 

이 전시실에 걸린 작품들은 디트로이트에 기반한 독신 사업가 프리어씨가 디트로이트 외곽에 저택을 지으면서 실내 장식을 목적으로 주문한 것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File:Charles Lang Freer House.jpg

디트로이트시에 1887년 세워진 프리어씨의 저택

 

이 집이 지어진 19세기 말 (1887년)은 미국이 남북전쟁 (Civol War, 1861-1865)을 넘어서서 산업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황금 시대를 구가하던 때 입니다. 그래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까지의 시기를 황금시대 (Gilded Age)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요. 이 Gilded Age 는 '허클베리핀의 모험'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미국의 '진정한 소설가, 이야기꾼' 마크 트웨인 (Mark Twain)이 처음 소개한 표현입니다.  피츠버그의 카네기와 록펠러, 디트로이트의 헨리 포드와 그리고 철도용 기차 사업가였던 프리어등 모두 당대의 재벌들이었지요. 이 신흥 산업국가 미국의 재벌들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걸신들린듯) 유럽의 명품들이나 아시아의 명품들을 사냥하고 포획하고 서로 자랑하는 것으로 삶의 기쁨을 누렸던 듯 합니다.  (제 표현이 너무 냉소적으로 느껴지신다면...죄송합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뭐 돈갖고 해볼거 다해보고 더이상 할게 없어서 이런게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돈이 있어야 문화고 뭐고 있는거니까. 특히, 문화는 돈이 없으면 끝장이 나고 맙니다... )  저야 그저 부자들의 이런 취미 덕분에 그거 헐값에 구경하는 은혜를 누리고 있으므로 불평의 여지가 없지요~ ~   앗참, 2009년 8월에 코넥티컷주 하트포드에 있는 마크 트웨인의 저택을 구경했는데요, 이 아저씨도 집안을 무슨 '중세 사원'처럼 금박으로 장식을 했더라구요.  아주 금칠갑을 했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마크트웨인에게 실망을 하고 돌아서고 말았지요.)

 

 

그래서 이렇게 황금시대를 구가하던 미국인들이 20세기 초반을 지나면서 1930년대 대공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인데요.

 

 

 

그림으로 가지요.  =)

 

'화환 Garland'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도대체 어디에 화환이 있다는거야?"하고 나름 두리번거리게 만드는 제목입니다. 여자의 왼손끝에 뭔가 희미한것이 보이실텐데요. 아주 작고 희미한 꽃줄입니다. 그 꽃줄을 시계차듯이 손목에 감지요. 그 보일락말락한 희미한 꽃줄을 그림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미술사가들은 Thomas Wilmer Dewing (1851-1938)이 1920년 이후에는 그림 작업을 하지 않았다고 전하기도 하는데요 (그러고보니 1920년대와 그 이후에 제작된 그림이 안보이는군요. 안그렸다는 뜻인가봐요) 그런 견지에서 보자면 1916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그의 말기작에 해당된다 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프리어씨의 저택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것은 아니고 후에 프리어씨가 사들인 것입니다.

 

여인이 앉아있는 의자나 테이블의 다리가 아주 가늘고 간결하지요? 테이블위의 도자기의 딱딱함과 반지르르함이 간결한 화면과 조화를 이룹니다. 여성의 자세나 표정도 '조각상'처럼 정제되어 있고 '고요'합니다. 오직 살아있는 생명체는 여성의 손에 들린 꽃줄 뿐인것 같습니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그러나 화면의 정 중앙에 배치한 꽃줄이 화면 전체에 고요한 '생기'를 불러일으키는듯 해 보입니다.

 

 

The Garland (화환) c. 1916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갤러리에서 촬영

 

 

 

이 피아노라는 작품은 1891년 프리어가 듀잉에게서 사들인 최초의 작품입니다. 듀잉이 작업하던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발견하여 사들였다고 합니다. 당시에 프리어는 그가 새로지은집의 치장에 열중해 있었고, 실내 일부를 듀잉이 맡아서 치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듀잉이 실내장식을 맡은 방에 듀잉의 작품을 걸은 것이지요 (아 돈있는 사람들은 이러고 노는군요 헤헤헤.  난 돈 없으니까, 내가 실내장식 하고, 내가 내 그림 걸고 그러면 되는거지요 하하하.  우리는 셋방에 살아도 재벌과 다를게 없습니다. 내가 내 공간을 장식하고 내 작품을 그려 붙이고, 내가 나를 부려먹고, 내가 나의 명령을 받고, 뭐 혼자서 다 하면 됩니다.)

 

화면이 여전히 간결하죠?  절제되어있고, 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같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림을 보고, 음, 편안하고 좋구나 이러면 되겠지요. 그래서 듀잉의 그림은 어릴때 침을 흘리며 들여다보던 아슴프레한 요정들의 세계 그림 같아요. 그냥 보면 좋은거죠. 편안하고, 아늑하고...

 

The Piano (피아노) 1891

Oil on Wood Panel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네가지 숲의 소리'는 듀잉이 뉴햄프셔주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한 것입니다. 뉴햄프셔는 뉴잉글랜드 지방의 일부입니다. 저도 지난 여름 (2009년 8월)에 뉴햄프셔주의 농가 (시인 Robert Frost 가 살았던 농장)를 가본적이 있는데요, 뉴잉글랜드의 여름의 숲의 정경이 바로 이 그림속에 스며있다고 할 만 하지요. 그림을 제작하던 당시 듀잉이 프리어와 주고받은 편지에 이런 사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I wish you could be here taking in this cool fresh air filled with bird notes and scents of flowers... 당신이 이곳에 와서 새들의 노래와 꽃향기 가득한 이 차고 상쾌한 공기를 마실수 있다면 좋을텐데요."

 

 

저는 듀잉의 이와같은 서술이 '사실'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뉴잉글랜드 지방까지 갈것도 없이 제가 살고 있는 버지니아, 워싱턴 지역만해도 강변의 숲길이나 호숫가 숲으로 가면 바로 이런 몽환적인 초록색의 숲에 몸을 잠기게 됩니다. 특히나 이른 봄, 겨울나뭇가지에 새순이 돋기 시작할때부터 녹음이 우거질때까지, 매일 매일 나가서 숲길을 걷다보면 그 연초록이 짙은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색조의 변화가 서서히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워싱턴에서 듀잉을 발견하고, 그 이듬해 봄 내내 숲길을 산책하면서 제가 깨달았던것 - "아하, 듀잉의 그림은 근원지가 미국이었구나. 그는 환상의 세계가 아닌, 그가 눈으로 본 아름다운 세상을 화폭에 옮긴것이구나."  물론,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주인공 여성들은 모두 환상의 세계에 살법한 뮤즈들처럼 보이지만, 그의 작품들의 배경은 뉴잉글랜드 지방의 초록색 풍경이었던 것이지요.

 

 

이 네폭 병풍은 듀잉이 '일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1895년 듀잉은 파리에서 작업하고 있던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화실에서 일본화와, 휘슬러가 작업하던 일본풍 작품들을 발견하고 일본화 기법에 감탄을 하게 되지요. 듀잉이 이 네폭 작품 작업을 하던 당시에 프리어 역시 여러점의 일본 병풍작품들을 사들이고, '일본화'의 영향이 듀잉의 그림세계에도 스며들었다 할만하지요.

 

 

 

The Four Sylvan Sounds (네가지 숲의 소리) 1896-97

Oil on Wood Panel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Before Sunrise 작품 작업을 하고 있을때 듀잉은 일본을 방문중이던 프리어로부터 일본화를 한묶음 전달 받습니다. 그리고 일본화의 매력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Kitakawa Utamaro 의 작품들에 열광하였고, 그의 작품에도 일본식 등불이 등장하게 됩니다. Before Sunrise 화면 뒷쪽의 작은 여자가 들고 있는 것이 일본식 랜턴입니다. 심지어 그는 이 작품을 Dedicated to Utamaro (우타마로에 헌정함)이라는 제목으로 부르기도 했다는 군요.  그리고 그의 작품을 거는 방에 우타마로의 작품도 함께 전시를 하여 두 작품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보여주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우타마로의 작품을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 (이제부터 18금) 흠...켁...춘화 작품도 엄청시리 많십니다...ㅋㅋ.  아무튼, 앞으로도 여러차례 논의가 되겠으나 근대에 일본화가 서양미술가들에게 끼친 영향을 '막대'합니다. (orz)  입맛이 씁쓸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죠 뭐...

 

 

 

 

 

Before Sunrise (해뜨기 전) 1894-95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갤러리에서 촬영

 

 

 

 

After Sunset 은 Before Sunrise 와 같은 크기의 그림입니다. 해뜨기전에 붉게 물든 하늘이 보였는데, 해가 지고 난 후에는 저 숲 가장자리에 기웃이 보이는 것은 저녁달 일까요?  이 작품은 듀잉이 'The Pink Dress'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다음에 보이는 그의 The Blue Dress'와 짝을 이루고 있지요. 분홍 드레스의 아가씨와 푸른 드레스의 아가씨의 포즈가 일치합니다.

 

 

 

After Sunset (해가 진 후) 1892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듀잉은 프리어 저택의 방에 전시된 그의 작품들 중에서 특히 이 작품을 사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The Blue Dress (푸른 드레스) 1892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다음에 소개되는 작품들 역시 프리어의 소장품들입니다.  악기를 들고 있거나 연주하는 세명의 아가씨들이 각각 그림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림 속의 악기, 연주는 시각적인 예술과 청각적 예술의 조화를 가능케하지요.  우리는 그림을 보면서 상상속에서 악기의 소리, 울림, 곡조를 듣고 흥얼거리게 됩니다.  참, 예술지상주의적인 작품들이지요.  듀잉의 작품들속에는 인간사회라는 것이 존재하는것 같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아름다운 여인들과, 아름다운 악기.

 

이것이 듀잉의 세계입니다.  아마도...듀잉이 미술사가들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사람들의 삶의 양태로부터 동떨어진 너무나 예술지상주의적인 듀잉의 미술에 대한 태도가 아마도 비평가들이나 미술사가들에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도대체 '이슈'가 없쟎아요.  부자들의 눈을 기쁘게 하는 장식물로 적당했을뿐...  한마디로, 그에게는 페이소스 (pathos)가 없었다는거죠.

 

(계속...)

 

 

 

Girl with Lute (류트와 소녀) 1904-1905

Oil on Wood Panel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Lady Playing the Violincello (바이올린 첼로를 연주하는 숙녀) ca. 1908

Oil on Wood Panel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An Artist (예술가) ca. 1906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08:19

 

 

Lady in Black and Rose (검정색과 장미색 드레스를 입은 숙녀) c. 1905-1909

Oil on Panel

44 x 55 cm (가로 세로)

2009년 11월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Morning Glories (나팔꽃) c. 1900

Oil and Canvas on Three Panel Boards

183 x 164 cm (세폭 전체 크기)

2009년 11월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이전 페이지, 디트로이트 미술관 ( http://americanart.textcube.com/234 )소장 듀잉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논의했던 듀잉 작품의 특징들이 이곳에서도 여전히 발견됩니다.

 

그런데, 이전 페이지에 이어서 뭔가 새로운것을 발견 하셨는지요?

 

음...'액자' 디자인이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고 있지요? 일단 금박이고, 액자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액자에 새겨진 무늬들이 일정합니다. 한 사람의 작품처럼 보이지요? 어쩐 일인지 알 수 없으나 듀잉의 작품들을 감싸고 있는 액자들은 모두 '동일범'(?)의 소행처럼 보입니다.

 

이 액자들을 디자인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퀴즈로 남겨 둬 볼까요?)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07:58

 

음, 제가 갖고 있는 토마스 윌머 듀잉의 작품 사진 파일이 많은 편입니다.  이것들을 어떻게 정리할까 고민하다가,  미술관별로 그림 소개를 하고 그리고 전체적인 정리를 하는 것이 이 아름다운 그림들을 감상하는데 도움이 될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듀잉의 그림은,  설명보다는, 그냥 그림이 전해주는 '느낌'을 받아들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듀잉의 그림속에 어떤 사회, 문화, 정치, 역사적인 '메시지'가 있는것도 아니고  화면가득한 '색채'와 색깔의 각기 다른 깊이 (tone)이 주는 것을 관조하는 것이 그림 감상의 포인트라고 봅니다.

 

습자지에 먹물이 번져가는 것을 지켜보듯, 그냥 편안하게요...  듀잉의 그림중에는 '악기'를 들고 있는 여인들, 혹은 악기 제목의 작품들도 많이 보이는데, 같은 맥략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타줄이 퉁 하고 울릴때, 잔잔하고 길게 퍼지는 소리... 딩.....이런 소리는 소리가 '들린다'기보다는 소리가 스며들죠. 

 

 

Summer (여름) 1893

Oil on Canvas

디트로이트 미술관 소장

2009년 10월 31일 사진촬영

 

 

 

Classical Figures (고전적 형상) 1898

Oil on Panel

디트로이트 미술관 소장

2009년 10월 30일 촬영

 

 

 

 

The Recitation (낭송) 1891

Oil on Canvas

디트로이트 미술관 소장

2009년 10월 31일 촬영

 

 

 

 

자, 위의 세작품에 보이는 듀잉화의 공통점들을 찾아볼까요?  제가 미술 전문가가 아니고 그저 '교양인' 수준으로 미술품을 '구경'하는 차원이라서, 뭐랄까, 미학적 분석보다는...음...텍스트 분석하듯 하는 점이 있는데, 그냥 미술을 '읽는' 저의 개성이라고 해두지요. 네, 인정합니다. 저 미술가 아닙니다. 미술 비평가도 아닙니다. 저는 텍스트(언어)를 주로 분석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만물을 텍스트 읽듯 들여다보는 편입니다. 이제 그림을 있는 그대로 그냥 들여다보는겁니다.

 

세 작품의 공통점으로 어떤것이 있을까요?

 

(1) 그림속의 주인공들이 모두 '여성'들입니다.  남자 안보이지요?  :)  '여름'과 '낭송'에서는 각각의 화면에 두명의 주인공들이 들어있습니다.  세폭 병풍같이 생긴 작품 속에는 한폭마다 한명의 여자가 그려져 있지요.

 

(2) 모두 유화이군요.

 

(3) 배경이 모두 초록색 계열이지요.

 

(4) 그리고 배경이 모두 '자연'입니다.  인공적인 '건물' 같은것은 안보이지요?

 

(5) 안개가 낀듯 화면들이 대개 '아슴프레'하지요?  사진사가 사진 실력이 없긴 하지만, 원래 작품이 이래요. 촛점이 어긋난것처럼 아슴푸레한 것이 이 세작품의 공통점입니다.

 

(6)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보이십니까? 아니지요? 팔은 가늘고 하체는 무척 길죠.  '이상화'된 여성의 체형인것처럼 보입니다.

 

 

자 이런 공통점 외에 다른 특징을 혹시 찾아내셨는지요?  찾아내셨으면 제게도 알려주십시오.  :)

 

이 그림들을 보면 어떤 음악이 떠오르시나요? Secret Garden 의 몽환적인 음악이 잘 어울릴것 같지 않은가요?  (예...제가 꽤 촌스러운 사람이라서...헤헤.)

 

 

 

 

 

다음페이지로 넘어가겠습니다.

 

2009년 12월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06:32

 

 

 

 

2007년 워싱턴 지역으로 이사온 후에 워싱턴의 각종 국립 미술관들을 들락거리는 동안, 제 눈에 띄면서도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화가가 Thomas Wilmer Dewing (1851-1938) 일것입니다.  듀잉의 작품을 자주 대하면서도 제가 관심있게 들여다보거나 주목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무래도 제가 과문한 탓으로 이 작가의 이름이 낯설었고, 따라서 미술사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작가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제가 이름을 알고 있는 미국미술가가 별로 많지도 않았지요)

 

그리고, 제가 듀잉의 아름다운 작품들을 '제끼고' 지나치곤 했던 이유는, 이 작품들이 한편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이 너무나 '동화적'으로 아름답고, 풍경역시 동화책속의 풍경처럼 몽환적으로 느껴져서, 어쩐지 '심각해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편. 듀잉의 초록색이 스며든 환상적인 작품들이 전시된 곳을 지나칠때면 저는 혼자서 '푸른 옷소매'라는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는데요.  푸른 옷소매 (Green Sleeves)라는 영국의 민요곡은 우리에게도 꽤나 친숙합니다.  많은 음악가들이 이 곡을 연주했고, 노래를 했지요. 유튜브를 검색해봐도 다양한 연주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신비한 민요의 '가사'를 정확히 알고, 노래부를수 있게 된것은 대략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해에 클래식 기타를 처음으로 가슴에 안고, 대학에서 클래식기타를 가르치는 음악교수로부터 개인지도를 받기 시작했지요.  그해에, 그러니까, 제가 온갖 경제적 빈곤함을 벗어나 슬슬 용돈벌이를 시작했는데, 그렇게 용돈벌이를 시작하는 기념으로, 첫 월급으로는 뭐 싸구려 동남아산 독일제 오디오세트를 들여놨고, 그 다음으로 클래식 기타를 산 후에 한동네에 살고 있는 선생님을 만나 기타를 튕기기 시작했지요. 카르카시 기타곡집을 연습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부교재로 영화음악곡을..."하고 우물우물 제안을 하니까,  스승께서는, 아무거나 영화음악곡집을 가져 오라고 했지요. 서점에서 영화음악 기타곡집을 하나 샀는데, 그 책에 Green Sleeves 곡과 가사가 들어있었던 겁니다.  (무슨 영화에 나왔던 곡이었을까?)

 

물론 초보자용으로 편곡된 아주 간단한 곡이었기때문에 혼자서 독학으로 그 곡을 마스터했지요. 가사도 함께.  Alas, my love, you do me wrong to cast me off discourteously...  푸른 옷소매는...어떤 이름모를 아가씨가 입고 있었던 드레스의 옷소매가 아마도 초록색이었겠지.  그래서 이름도 모르는 그 아가씨를 '초록색 옷소매'라 부르는것이겠지.  혼자 상상하다보면 생전 가본적도 없는 영국의 초록색 초원과, 안개와, 신비한 물방울과, 뭐 그런 것들이 연상이 되곤 했지요.

 

10년도 전에 익힌 그 기타곡은 지금 손가락이 굳어 기억이 안나는데... (하지만 책을 꺼내서 악보를 보면 다시 칠수 있어요...)  노래만큼은 지금도 생생하게 부를수가 있습니다.  정작 Dewing 의 그림속의 여인들은 대개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초록색 옷소매는 보이지 않는데, 여인들이 담겨있는 풍경이 온통 초록색이라 이 여인들이 모두 초록 옷소매의 아가씨들처러 보이는데요. 미국미술사에서 토마스 윌머 듀잉의 존재는 '미미'합니다. 미국 미술사책을 여러권 갖고 있는데, 그의 이름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책도 있고요, 그의 이름이 등장한대도 수백페이지짜리 책에서 그저 한두줄 정도 입니다.  그렇지만, 워싱턴 디씨나 인근 대도시의 미술관에 가면 듀잉의 작품이 많이 걸려있지요.  아마도 그는 미술품 수집가들이나 대중들에게는 사랑을 받았지만, 미술 비평가들에게는 그리 인정을 못받은 그런 화가였던것 같습니다.

 

노래 '초록 옷소매' (우리나라에서는 푸른 옷소매로 널리 알려진 곳)의 가사는 헨리 8세가 앤 볼린을 위해 지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영화 '천일의앤'으로도 알려져 있는 앤 볼린. 헨리 8세는 앤볼린과 결혼하기 위해 '영국교회'를 선포한 인물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변덕이 많았던 헨리 8세는 앤 볼린 역시 사형장으로 보내버립니다. 그 앤볼린이 낳은 딸 하나가 살아남아서 엘리자베쓰 1세로 등극하지요. 처녀여왕 엘리자베스 1세. 미국의 버지니아주는 그 처녀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헌정된 이름입니다.

 

 

어쨌거나, 미국의 미술관을 헤메이다가 신비로운 초록색의 풍경속에 선녀같은, 혹은 요정같은 여인들이 긴 드레스 자락을 끌고 날아다니듯, 떠다니듯 서 있는 그림을 발견하신다면,  함께 간 친구에게 자신있게 말해줘도 됩니다. "음...듀잉의 그림이군..."  백발백중이죠. 잘난척 하셔도 됩니다.   :)

 

듀잉 페이지 이어지겠습니다.  december 2009 redfox.

 

 

 

 

 

 

 

 

 

(poss. Henry VIII of England, 1500's.)

Alas, my love, you do me wrong,
To cast me off discourteously.
For I have loved you well and long,
Delighting in your company.

아아, 내 사랑이여 나를 이렇게도 무참하게 버리다니

그대를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하였건만, 그대와 함께 있는것이 그토록이나 기뻤건만.


Chorus:
Greensleeves was all my joy
Greensleeves was my delight,
Greensleeves was my heart of gold,
And who but my lady greensleeves.

초록색 옷소매는 나의 기쁨, 즐거움이었거늘.  초록색 옷소매는 내 순정, 오직 나만의 연인이었거늘.


Your vows you've broken, like my heart,
Oh, why did you so enrapture me?
Now I remain in a world apart
But my heart remains in captivity.

당신은 약속을 깨뜨려, 내 가슴도 무너졌다네. 오, 어찌하여 그대는 나를 사로잡았는가?

나는 무너진 세상에 남겨졌지만 내 심장은 아직도 포로로 잡혀있다네


chorus

I have been ready at your hand,
To grant whatever you would crave,
I have both wagered life and land,
Your love and good-will for to have.

늘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 해주기 위해 당신의 곁을 지켰거늘

당신의 사랑과 호의를 갖기 위해 내 목숨과 영토를 모두 걸었거늘


chorus

If you intend thus to disdain,
It does the more enrapture me,
And even so, I still remain
A lover in captivity.

당신이 나를 물리칠수록 나는 더욱이나 당신에게 빠져드네, 나는 여전히 당신의 포로라네


chorus

My men were clothed all in green,
And they did ever wait on thee;
All this was gallant to be seen,
And yet thou wouldst not love me.

나의 기사들도 당신의 시중을 들기 위해 모두 초록색 옷을 입었는데 이토록이나 늠름하여도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네


chorus

Thou couldst desire no earthly thing,
but still thou hadst it readily.
Thy music still to play and sing;
And yet thou wouldst not love me.

 

그대는 속세의 재물에 관심이 없으나 당신이 원한다면 모두 당신것

당신은 여전히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지만,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네



chorus

Well, I will pray to God on high,
that thou my constancy mayst see,
And that yet once before I die,
Thou wilt vouchsafe to love me.

신께 기도드리오니 내가 눈을 감기전에 그대가 나를 사랑하게 되기를

 


chorus

Ah, Greensleeves, now farewell, adieu,
To God I pray to prosper thee,
For I am still thy lover true,
Come once again and love me.

 

아, 초록 옷소매의 그대여 지금은 안녕, 안녕.

신께 기도드리오니 당신이 안녕하시길

나는 아직도 당신의 순정한 사랑이오니

내게 다시와 나를 사랑해주시길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09. 12. 27. 06:15

공식 홈페이지: http://www.asia.si.edu/

프리어 갤러리 (http://americanart.textcube.com/225) 와 함께, 스미소니안 아시아 미술관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미소니언에서 제공하는 공식 홈페이지는 프리어, 새클러를 함께 묶어서 소개합니다.

 

역시 무료입장. 프리어 갤러리와 통로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Arthur M. Sackler 라는 분이 기증한 기금으로 건물이 지어졌고, 그가 소장하던 아시아 미술품들도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 관심분야가 미국미술 이라서, 이곳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이쯤으로 줄이겠습니다.)

 

 

 

 

아래 지도에서 봤을때 하단의 성채같은 건물 그림 아래의 왼편에 Sackler Gallery 라는 이름표가 보이지요?  이곳입니다.

 

 

 

이곳이 지도에 보이는 성채의 실제 건물입니다. 스미소니안 성 (Smithsonian Castle) 이라고도 불리우며 Smithsonian Information Center 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신생국 미국에 어마어마한 개인 재산을 남긴 영국인 Smithson 씨를 기념하는 건물이기도 하여, 이 건물에 스미손씨의 수집품들도 전시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진은 내셔널몰에서 봤을때는 '뒷편'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이곳은 스미소니안 성채의 뒷마당에 해당되는 곳이고 저 너머 앞문쪽에 내셔널몰이 있습니다. 이 뒷마당의 왼편에 Sackler Gallery 가 있고, 오른편에는 스미소니안 아프리카 미술 박물관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미술 박물관 역시 지하로 프리어나 새클러 미술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1층 현관에 커다란 요술거울이 있는데, 뭐 울룩불룩 일그러진 겨울이라서 이런 재미있는 그림이 나옵니다. 구석에 보이는 검은사람이 redfox 입니다.

 

 

 

 

 

 

 

미술관 현관에 설치된 이 재미난 대형 거울은, 우리에게 '우리는 늘 왜곡된 형상을 볼 뿐이다'라고 일깨워주는것 같기도 합니다. 

 

2009년 12월 redfox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09. 12. 27. 04:43

공식 홈페이지: http://www.asia.si.edu/

워싱턴 디씨의 모든 스미소니안계 박물관은 무료 입장입니다.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사진 촬영도 자유롭습니다.

 

 

 

 

프리어 미술관 (Freer Gallery of Art)는 연결되어 있는 쌔클러 미술관 (Sackler Gallery of Art)와 더불어 스미소니안 계열의 국립 박물관들 중에서 '아시아 미술' 전문 전시장입니다.  아래의 지도에서 보면,  붉은색 건물들이 스미소니안 국립 박물관들인데, 맨 아랫쪽 가장 외편의 네모난 건물이 프리어 미술관이고, 그 오른쪽에 직사각형 모양의 쌔클러 미술관 건물이 보입니다.  메트로 스미소니언 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워싱턴 디씨의 스미소니안 박물관들중에서 최초로 '기증된' 건물이기도 합니다. 이 박물관 건물과 소장품들을 기증한 사람이 Charles Lang Freer (1854-1919) 라는 미시건주 디트로이트 소재의 철도차량 사업가 입니다. 이 박물관 건물의 건축비만 당시에 1백만 달러가 들었다고 하는데, 전 경비를 프리어씨가 지불했고, 그가 평생 모은 미국, 아시아의 예술품들도 역시 기증했습니다.

 

 

 

프리어씨에게는 아내나 자식이 없었고, 취미삼아 예술품을 수집하게 되었는데, 후기에 그와 절친했던 미국출신 영국 미술가 James Aboot McNeill Whistler (휘슬러)의 조언에 따라서 아시아권 미술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했습니다. 그는 아시아권 미술품 수집을 위해 중국, 일본, 한국 (당시 조선)도 방문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프리어 미술관에 소장된 아시아권 작품들을 보면, 그 속에 있는 한국의 예술품들은 일단 숫자도 많지 않고, 열세라고 할 수 있지요.  아무리 우리나라 미술품이 대단하다고 해도, 몇작품 되지도 않는 청자나 백자가 어느 구석에 전시되어 있는 형편이라,  오히려 이런곳의 한국 전시물을 보고 나면 기분이 저조해지는 편입니다.  

 

 

 

 

 

 

특히나 프리어 미술관을 '미국미술과 아시아 미술 전시장'으로 소개하기도 하는데,  프리어가 '아시아 미술' 전시장임을 표방하면서도 미국미술 전시장이 여러군데에 있고, 이곳을 찾는 관객들이 많은 이유는, 이곳에 19세기말에 활약했던 미국 미술가들 Dewing, Whister, Sargent 등 당대의 걸출했던 작가들의 일련의 작품들이 이곳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에 보이는 전시장에는 Dewing (왼편벽) 과 Tyler (오른쪽 벽)의 작품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사실 이곳에 걸린 작품들은 프리어씨가 디트로이트 외곽에 지은 저택의 내부를 장식할 목적으로 제작된 것들이라고 합니다.  집을 지으면서 그 집을 장식할 작품들까지 주문제작을 한 듯 합니다.

 

 

 

 

아래는 '공작의 방 Peacock Room'으로 알려진 '방'입니다. 휘슬러가 영국의 어느 돈많은 사람의 주문으로 그 집 식당을 이런 식으로 꾸며 줬다고 하는데요, 뭐 휘슬러가 의뢰인의 부탁을 무시하고 멋대로 꾸몄다가 서로 옥신각신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후에 이 '식당' 내부 전체를 프리어씨가 사들여서 이 식당을 '뜯어'왔다고 하는데요, 최종적으로 프리어 미술관에 안착을 하게 됩니다.

 

 

 

 

이 방이 대단하다고 관객들이 많이들 찾아 오는데요. 제가 보기엔

(1) 우리나라 절집/혹은 무당집에 들어간듯한 느낌이 드는 금박무늬

(2) Princess from the land of porcelain 도자기나라에서 온 공주 그림은 딱 신전의 여신입니다. (이 의상, 일본 의상인가요?) 의상은 일본, 이목구비는 서양 여성입니다. 뭔가 '잡종적'이죠.

(3) 중국식당에 온 기분도 들고요

 

이래저래 '아시아'권의 관객인 제 눈에는 뭐랄까, 이도 저도 아닌 얼치기 인테리어 장식 같구만, 이거 만드느라고 돈 쳐들였을것이고, 이거 사온다고 또 돈 억수 들었을걸요. 아마.

 

(정작 주인공인 아시아 예술품에 대해서는 저는 생략하겠습니다. 그냥 미국미술에만 집중하려고요.)

 

프리어 미술관에 대한 소개는 이쯤으로 맺음하고, Dewing, Whistler, Sargeant 에 대해서는 따로 페이지를 만들어서 소개하겠습니다.

 

 

december 26, 2009.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3. 08:16



내가 미국에서 둘러본 미술관들 중에서 미국의 유명한 재벌이 직접 열었거나 혹은 혁혁하게 기여한 미술관들.  (참고: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Museums)

 

 

 

 미술관

 설립자 (기여자)

 비고

 뉴욕 현대 미술관 (MoMA)

http://americanart.textcube.com/80        

 

 Rockefeller 가문

 미국 최대 석유 재벌     

 구겐하임 미술관

(맨해턴 소재의 미술관 방문, 2008 )

 

 

 Guggenheim 가문

 광산, 금광

 디트로이트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94

 

 

 Ford 가문 (기여)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자동차

 카네기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159

 

 

 Carnegie 가문

 펜실베니아

피츠버그

철강업

 크라이슬러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190

 

 Chrysler 가문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자동차

 코코란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97

 

 

 Corcoran 가문

 광산

 필립스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35

 

 

 Phillips 가문

 광산

 Walters Art Museum (볼티모어) 무료입장

 

 

 Walter 가문

 재벌

 

Freeer Gallery http://americanart.textcube.com/225

 

 

 

Freer

미시간 디트로이트 철도 산업및 기차 제조 투자자

아내와 자식 없었음.

워싱턴 디씨에 최초로 스미소니언 산하 뮤지엄 건물을 기증함

그의 19세기-20세기 미국미술및 아시아 미술 소장품을 연방정부에 모두 기증

 

 

Sacler Gallery

Hirshhorn

Kreeger

 

                                                   

 

 

 

 

 

 

 



작은 재벌들의 개인 전시관 규모의 미술관은 제외하고 큼직한것 중에서 내가 직접 가 본 (크라이슬러는 조만간 방문 예정) 미술관들과 재벌들과의 관계를 표로 한번 만들어 본 것입니다.  록펠러의 현대미술관은 20달러쯤의 입장료를 받지만,  버지니아의 크라이슬러 미술관은 '무료 입장'입니다. (고마우셔라).  뉴욕 맨해턴에 있는 거의 모든 미술관들이 입장료를 듬뿍 받아 챙기는 편이고, 그 외의 도시의 미술관 입장료는 착하거나 (저렴) 혹은 너무 착한 (무료)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살면서 새로운 '재벌' 미술관을 방문하면 이 페이지를 업데이트 해 보겠습니다.

 

이런 미술관을 방문할때, 처음에 저는 그저 피상적으로  참 훌륭한 일을 하셨구나,  덕분에 내가 이렇게 세계적인 명품들을 무료로 혹은 약간의 돈을 내고 맘껏 볼수 있구나 뭐 이렇게 가볍게 생각을 하고 기쁜 마음으로 전시품들을 보는 정도 였습니다.  가끔은 '결국 문화라는 것도 돈 있는 사람들의 놀이이지. 돈 없으면 그림도 음악도 힘들지.  메디치가를 봐도 그렇고, 창작하는 사람들은 돈 가진 사람들의 도움을 받거나...결국 문화는 돈인거야..대충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촛점을 맞춰서, 피상적으로 대충 볼것이 아니라, 뭔가 주제를 정해서 파고 들어가보자 작정하고 미국미술을 들여다보니, 자연히 미국역사를 들여다보게 되고, 미국 역사속에서 재벌들이 어떤 노선을 취했는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이 아름다운것을 알고 있지만 (제가 뉴욕 맨해턴에 갔을때 처음 보고 반한 건물이 크라이슬러 건물이었습니다.)  크라이슬러 자동차 공장에서 노동자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카네기가 대단한 자선가라는 것은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카네기가 노동자들을 어떻게 탄압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화려하고 즐거운 정보에는 많이 노출되어 있지만, 슬프고 어둡고 아픈 역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생명가진 것들은 본래 어둡고 아픈것은 회피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것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결국, 이면으로 이면으로 파들어가게 되더란 것이지요.

 

나는 새삼스럽게 자선가로 알려진 재벌들을 비평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사회에 제공한 화려한 미술관 뒤에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 가끔은 들여다볼 생각입니다.  그래야 세상을 균형감있게 볼수 있고, 그래야 좀 어딘가 균형이 잡혀갈것 같습니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09. 12. 21. 21:52

 

2009년 12월 19일 (일) 자정부터 자정까지 온종일 내린 눈의 총량

 

 

 

 

 

 

 

 

 

 

 

 

 

2009년 12월 20일

 

아침에 깨어났을때, 창밖은 파란 하늘과, 파랗게 반사되는 쌓인 눈으로 눈이 부셨다.  뒷마당에 쌓인 눈은 식탁의자의 허리 부분을 이미 지나 있었고, 성인 남자의 무릎 높이보다 높았다.  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쌓인 눈을 평생 몇번이나 보았는가?' 물었는데,  내 희미한 기억으로, 어릴때,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시골집 마당에 이렇게 눈이 쌓인적이 있었는데, 그 어린 나이에 눈에 갖힌 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그 후에 눈이 이렇게 많이 쌓인 것을 본 적이 없는듯 했다.

 

우리집 왕눈이는 눈에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눈이 가볍게 쌓였을때는 나가서 겅중거리고 뛰어 놀줄도 아는 개 이지만, 눈이 제 키를 넘게 쌓이자 눈을 무서워했다. 

 

옛날에 시골에서 살때, 눈이 많이 쌓이면, 할아버지는 우리집과 이웃집 사이에 이렇게 길을 내 놓으셨었다. 날이 개이면 눈길은 사라지고 말지만,  이렇게 실핏줄같은 눈길이 마을의 집과 집을 이어주곤 했었다.

 

워싱턴의 모든 관공서는 월요일 (21일) 임시 휴무일로 정했고, 금주 수요일에 방학을 시작하려던 공립학교들은 일제히 방학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방학이 일찍 시작되었다고 환호하고...쌓인 눈은 하도 높이 쌓여 하루이틀에 녹을것 같지는 않고...

 

눈길을 걸어 동네 스타벅스에 나가서

뜨거운 라테랑, 아주 달아 미치겠는 케이크 한조각 주문해가지고 난롯가에 앉아 그것을 먹으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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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15. 01:28

 

 

Eastman Johnson

The Early Scholar (이른 아침 학교에 온 어린이)  c. 1865

2009년 12월 13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날씨가 쌀쌀하죠.  이런 날은 어릴때, 기온이 영하 5도 아래로 내려가길 '고대하며' 동동 걸음으로 찬바람을 맞으며 학교로 향하던 내 모습이, 그 풍경이 떠오릅니다.  아침에 나올때, 뭐 수업도 없고, 방학이니까, 편안한 옷에 '털신'까지 신었지요.  그 털신을 신고 앉아 생각해보니, 내가 어릴때 나는 한번도 '방한화'개념의 어떤 두꺼운 신발을 신어본 기억이 없어요.  털신이라니...내가 출세한거죠. 털이 보글보글한 폭신한 장화를 신고 앉아있으니.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땐, 영하 5도 이하로 기온이 내려가는날 난로를 피워줬지요. 고등학교에 가니까 영하 3도 이하로 조정되더군요.  그러니까 어릴땐 날씨가 영하 4도가 되면 난로 안때주고 영하 5도가 되면 난로를 쌔주니까, 영하 5도가 영하 4도보다 따뜻한거죠.

 

그리고, 초중고등학교 다니는 내내, 난로 관리는 반에서 제일 키 큰 친구들이 전담해서 했어요.  그러니까 조개탄 창고에가서 조개탄을 배급 받아 오는 일이나,  수업 마치고 난로 청소한후에 나머지 재를 들통에 담아서 내다 버리는 일이나, 이런 난로관련 업무는 반에서 제일 키 큰 서너명이 '큰 언니들'처럼 맡아서 했던거죠.  담임 선생님이 늘, 당연하다는 듯이 제일 꺽다리 애들을 지명하여 일을 지시했고, 그 꺽다리들도 마땅히 자신들이 해야할 일이라는 듯 믿음직하게 그 일을 했지요. 그 꺽다리들은 딱 큰언니 같았는데, 여자 중고등학교에서 그런 일을 하는 꺽다리들은 '오빠' 기능도 일부 담당했지요.  그냥 그 키 큰 애들을 무조건 따르는 애들도 있었으니까. 저는 또래 집단에서 큰 키에 속했지만, 제일 큰 꺽다리는 아니었으므로 주로 그런 꺽다리들하고 등등하게 어울리되 이런 어마어마한 일은 안하는. 어중간한 꺽다리과였죠.

 

 

 

한 꺽다리 친구가 생각나는군요.  그 꺽다리는 정말 '오빠'처럼 체격이 크고 늘씬하고, 성격도 무지 좋고, 공부는 그냥저냥 하는데, 뭐 인물 좋고 성격좋고, 선생님들이 허드레 일을 시키면 빙글빙글 웃으면서 척척 해내고, 우리들이 모두 그 꺽다리 '오빠'를 좋아했죠.  그런데 이 친구가 나를 예뻐했어요. 자기가 다니는 예배당에 행사 있다고 가자고 하기도 하고 (그러면 그냥 소풍가는 맛에 따라가고),  방과후에 학교앞 튀김가게에 함께 가지고 하면 따라가고, 미술 시간에 10년후의 나의 집을 그려보라는 선생님의 지시에 그애가 그린 집은, '10년후에 이아무개하고 나하고 함께 살 집.'  그 이아무개가 물론 소생이죠.  그 애는 왜 십년후에 나하고 함께 살 생각을 했을까?  나의 십년후는 달랐는데... 아무튼 그래서 그 친구가 그린 집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내 방 창문앞에는 사과나무를 심어줘. 그리고 꽃도 많이 심어줘" 뭐 이런 제안을 하면서 시시덕거렸죠.

 

 

요즘 이런 얘기를 하면 죄다 '동성애 코드'로 해석하는 분위기쟎아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동성애'가 뭔지도 몰랐어요 우리는.  그당시에도 '호모'라는 말이 가끔 돌아다녔지만, 그냥 동성끼리 서로 좋아하는게 '호모'인줄 알았죠.  우리 머리속에는 도대체 '섹스'라는 개념이 탑재가 안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누가 누구하고 같이 살고 싶대' 뭐 이런 말도, 누가 누구를 꽤나 좋아한다는 말과 동의어였죠.  그 외에 다른 뉘앙스를 잘 몰랐지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냐하면, 그 친구가 나를 너무 이뻐하고, 나를 강아지처럼 데리고 돌아다니러 들고, 아무튼 내게 너무 잘해줬기 때문에 처음에는 언니/오빠처럼 좋아서 따라다니다가 나중에는 귀챦아서 멀어진것 같아요.  언니/오빠는 언니/오빠의 영역을 벗어나면 안되는건데... 사람의 관계란 그렇죠. 어떤 영역이 있어요. 그 영역안에서만 머물러야 하는데 그 선을 깨버리면 그 관계가 일그러지지요.  그런데, 그 영역이란것이 사람마다 선이 다르니까 오해나 문제가 생기고 비극이 일어나기도 하고.  돌아보면, 누군가가 내가 정한 금을 넣어 왔다는 이유로 내가 회피한 경우가 종종 있고; 어쩌면 나 역시 금을 넘어갔다는 이유로 회피의 대상이 되었겠지요.

 

아, 난로담당 친구 얘기를 하다가 엉뚱한데로 얘기가 흘러가버렸는데...

 

 

Eastman Johnson 은 제가 언젠가 따로 페이지를 낼 화가인데요. 오늘은 어제 국립미술관에서 발견한 이 사랑스러운 그림 소개만 할게요.  The Early Scholar. 대략, 이른 아침에 학교에 도착한 생도라는 뜻인것 같죠.  뒤에 벤치들이 보여요. 초기의 교실 풍경같죠. 그리고 난로가 하나 있는데 이 꼬마친구가 불을 피우고 있는것 같아요. 아니면 선생님이 미리 피워놓은 난롯불을 쬐고 있거나. 난롯가에 커다란 장작 쪼가리 하나가 누워있는것도 보이고.

 

이렇게 일상의 어떤 풍경을 그리는 것을 장르 페인팅 (genre painting) 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냥 '풍속화'라고 해석하는 편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는거죠. Eastman Johnson 은 그런 풍속화가지요.

 

날씨가 추워서, 뭐 따뜻한 그림을 하나 올리고 싶어서 끄적끄적...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14. 23:23

National Archives

 

공식 홈페이지: http://www.archives.gov/

 

워싱턴 디씨에 있는 국립 문서 기록 보관소 (National Archives = Archives of the United State of American)는 이름 그대로 문서 기록을 보관하는 '창고'라고 할수 있습니다. 예전에 '국사'시간에 우리도 배운적이 있지요. 왕실의 기록을 조선땅 여기저기에 보관해 놓았다고 해서 그 장소를 달달 외운 기억이 있는데요, 그래서 외침으로 궁성이 여러차례 불 탔어도 조선왕조실록이니 하는 사료들이 잘 보관되어 전해졌다고 하지요.  워싱턴의 국립 문서 기록 보관소도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보관하는 장소이고,  미국의 각지에 이러한 보관소들이 있다고 합니다.  워싱턴디씨에 있는 보관소에는 특히나 영국의 권리장전, 미국의 독립선언문, 헌법초안, 헌번 개정안등의 원본에 대중들을 위해 전시되어 있어서,  이곳은 미국 전역의 중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으로 워싱턴을 방문할때 반드시 들르는 장소입니다.  저희집 아이들도 중학생때 플로리다에서 워싱턴까지 수학여행을 가서 이곳을 구경한 적이 있지요. (큰놈은 제법 이곳에서 판매하는 독립 선언서 카피본을 기념품으로 한장 사다가 제게 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어디 처박혀 있는지도 알수 없지만요.)

 

 

이렇게 일년 내내 많은 미국인들과 여행자들이 찾은 장소라서, 특히나 니콜라스 케이지가 출연했던 National Treasure 영화 시리즈 덕분에 이곳을 호기심을 갖고 꼭 보고싶어 하는 청소년들이 많은데요, 그래서 주말이나 휴일에 이곳을 보려면 몇시간씩 뙤약볕 아래서 줄서서 기다려야 합니다.  전에도 몇차례인가 이곳을 지나다가 기웃거려 봤지만 줄이 길어서 번번이 포기했지요 (줄서서 구경하고, 줄서서 식당 들어가고 그러는거 무척 귀챦아 하는 편이거든요. 줄 서라고 하면 그냥 딴거 하고 말죠).  마침 비오는 12월의 일요일.  비는 죽죽 내리는데 누가 이런데까지 마실을 오겠습니까. 날도 춥고.  지나는 길에 들여다보니 뭐 한가로와 보이길래 결국 잠시 들르게 되었습니다.

 

 

 

 

 

 

 

 

 

건물 왼편으로 들어가면 입구가 나오는데요, 입구를 통과하면 공항의 Security Check (물품검사대)과 같은 곳이 나타납니다. 소지품 모두 검사대를 통과해야 합니다. 사람도 검사를 받고요.  아무래도 국립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라서 경비가 엄한 편입니다.  입장료는 무료.  사진도 자유롭게 찍을수 있지만 플래시 사용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요즘 카메라들이 좋아서 플래시 없이도 잘 찍히죠)

 

 

 

 

 

 

 

검사대를 통과하여 지층의 '극장'에 가서 이곳을 소개하는 짧은 교육용 영화를 봅니다.  기록의 중요성, 기록의 활용 방법을 알려주는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영화관 시설도 아주 훌륭합니다.  그리고나서  중요 문서 (영국의 권리 대장전, 미국의 독립 선언서, 미국의 헌법초안, 미국의 헌법 개정안 원본들)들이 전시되어있는 로툰다 홀로 이동하여 구경을 합니다. 조명이 침침하여 원문을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가장 구경하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이 곳이지요)

 

로툰다홀에서 나온후에 교육 전시실이라는, 미국 역사 관련 전시물들을 둘러보고, 기념품가게에서 물건 구경하다가 나오면 됩니다.  이것이 단순히 '구경'하기 위해 들르는 절차이고요, 만약에 특정 문서나 기록을 열람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다면 해당 사무실로 찾아가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고문서 전시장 (Rotunda Hall)의 벽화

 

전시장의 왼편 벽화는 독립선언문 그림입니다. 벽화 아래에 독립선언문 원본이 전시 되어 있습니다.  오른쪽 벽화는 '헌법' 그림입니다. 그 아래에 역시 헌법 원문 (Constitution), 그리고 개정안(Bill of Rights)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벽화들을 그린 화가는 Barry Faulkner (베리 포크너 1881-1966) 입니다. 뉴 햄프셔 태생으로 하바드에서 수학하다 이탈리아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받고 벽화의 본고장 로마에서 실력을 인정받은후 1910년에 귀국합니다. 포크너는 국립 문서 기록 보관소의 벽화를 위임받고 1936년 이 두장의 벽화를 완성합니다.  이 벽화들은 캔바스에 유화로 제작한 것입니다.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한  그림인데, 완성후에 건물의 벽에 벽화로 설치가 된 것이지요.  전에 앤드루 와이어드의 생가를 방문했을때, 스튜디오에 있던 어마어마한 벽화 작품을 발견하고 http://americanart.textcube.com/44,  "저 그림을 어떻게 운반했는가?" 물었더니 캔버스를 둘둘 말아가지고 운송하여 벽에 붙인후에 미술가가 다시 세밀한 보수, 교정 작업을 했다고 가르쳐주더군요.  포크너 역시 캔바스에 유화로 그린 작품을 이리 옮겨다가 벽에 붙인후에 세밀한 완성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미국 역사상 독립 선언서가 공개된것을 1776년 7월 4일로 정하고 이날을 '독립 기념일'로 기념하는데요, Declaration of Independence 그림에는 독립 선언서 초안을 작성하는데 참가했거나, 최종 서명을 한 인물들이 담겨있습니다. 미국의 3대 대통령을 지낸 토마스 제퍼슨이 이 초안의 작성자로 알려져 있지요. 당시 그의 나이가 26세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그림에서 토마스 제퍼슨이 누구인지는 우리도 가늠할수 있겠지요.  그리고 우리에게도 친숙한 인물인 벤자민 프랭클린도 보입니다.  저도 거기까지는 알아맞출수 있었는데, 나머지는 설명을 봐야 알겠더라구요.

 

 

 

 

 

 

1776년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후에 1787년에 미국의 헌법이 발표가 되는데 (그러니까 11년이 흘렀군요) 이때 헌법에 동의한주가 동부의 13개주였다고 하지요. 이 그림속에는 헌법에 동의한다고 서명한 사람들과 서명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헌법 원문 맨 뒤에 보면 어느주의 대표가 싸인을 했는지 나와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중앙에 흰 옷을 입은 키가 남들보다 커보이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대충 감으로 맞추는거죠 뭐.  미국 역사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

 

 

 

 

 

베리 포크너는 로마에서 미술 수업을 받은 사람이고, 그곳에서 실력을 인정 받은 사람이라서 그의 벽화는 로마의 화풍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벽화속의 풍경은 '사실'과는 부합되지 않고 로마의 풍경속에 미국 역사상의 인물들을 그려 넣은 식이지요.   이 벽화가 1936년대에 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PWAP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Public%20Works%20of%20Arts%20Project ) 및 공공미술이 활기차게 진행된 시기이기도 하고, 미국 지방색이 강한 그림들이 제작되던 시기이기도 한데요, 이 벽화는 이런 흐름과는 달리 로마네스크 양식을 취하고 있지요.  이는, 미국, 특히 워싱턴 디씨 지역의 건축 양식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신생국 미국이 역사속에서 '모델'로 삼았던 것이 고대 그리스 로마의 건축 양식이었습니다.   초기 미국을 건설한 사람들은 유럽 사람들이죠. 하지만 유럽의 모델을 그대로 베껴다 쓰기에는 어딘가 껄끄럽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무엇을 모델로 할것인가? 고대(古代)로 돌아가야죠. 민주주의의 시원지라 할만한 그리스의 건축양식, 대제국이었던 로마의 건축양식을 가져와야죠. 대략 그러한 사연이 있었다 할수 있지요. 

 

제가 이 그림들 관련 자료를 찾다가 아주 재미있는 페이지를 발견했습니다.

http://teachingamericanhistory.org/convention/faulkner/

이 페이지에서 그림속의 인물에 커서를 갖다 대 놓고 클릭하면 해당 인물에 대한 안내가 상세하게 나옵니다.  누가 누구인지 궁금할때 이런 안내가 참 유용하지요.  워싱턴 디씨에 있는 벽화라면...국회도서관의 벽화를 빼놓을수가 없는데, 그곳은 모든 벽이 벽화라서, 아예 책이 별도로 나와있을정도이지요.  아아아, 어마어마한 작업이 될 것 같아서 후일로 마냥 미루고 있습니다.  나중에 그것도 안내해드릴게요.  =-)

 

 

2009년 12월 14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Ashcan School2009. 12. 12. 02:12

프랜더개스트의 얼굴없는 미녀들

 

 

 

Maurice Prendergast (모리스 프렌더개스트, 1859-1924)는 캐나다에서 출생하여 미국에서 성장한 화가입니다. 사실주의 화가 그룹이었던 The Eight (팔인회)의 멤버로 함께 전시회를 가진적도 있긴 하지만,  모리스 프렌더개스트가 남긴 그림들은  '8인회'를 표상하는 '도시' '서민의 삶'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이미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가 있었던 것이겠지요.

 

가족이민으로 세살때 보스톤에 온 프렌더개스트는 8학년 (중학교)을 마치고 14세의 나이에 '상회'에 취직을 하여 살아가면서 혼자서 그림을 그립니다.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혼자서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을 그리는 정도였겠지요. 20대때는 동생 Charles 와 함께 가축용 배에 몸을 싣고 유럽으로  가서 유럽 여행을 하기도 합니다.  유럽구경을 하고 돌아온 프렌더개스트는 그제서야 '미술공부'를 제대로 해보고싶다는 열정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결국 '액자' 사업을 하게 된 동생의 후원으로 나이 30에 파리에 입성하게 됩니다. (고호에게 그의 아우 테오가 있었던 프렌더개스트에게는 아우 찰스가 있었다고 할 만 하지요) 그는 파리의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학교에서는 '석고상'이나 '대리석상'과 같은것을 그려보라는 지시를 했지만, 그는 밖으로 나가 살아움직이는 사람들을 스케치하는 일에 몰두 했다고 합니다.

 

 

제가 미술관을 돌며 수집한 그의 작품들은 모두 '유채화'인데요, 그는 초기에 수채화를 주로 그렸고, 후기에 유채화로 선회했다고 합니다.  제가 본 작품들은, 다 똑같아 보일정도로 테크닉이 유사한데,  화집이나 언라인 자료를 찾아보면 점이나 짧은 선을 이용한 화법의 작품들이 많이 보입니다. (이렇게 경쾌할수가!)

 

카네기 미술관에 걸려있는 커다란 '소풍 (Picnic)'이란 작품은 얼핏 보기에는 수채화처럼 보입니다.  저는 사실 이작품을 '수채화'로 알고 보고 지나쳤었는데,  글을 쓰기 위해 자세히 들여다보니 유채화라고 나오는군요. Oil on Unsized Canvas 라는 설명문이 있길래, 이것은 무엇인가? 자료를 찾아 봤지요. 

 

우리가 남대문 미술상에 가면 다양한 사이즈의 나무틀에 짜여진 캔버스를 살수가 있고, 혹은 아예 두루마리 캔바스를 통째로 살수도 있는데요. 대부분 이렇게 판매되는 캔버스는 젯소 가공이 된 상태라고 합니다. 헝겊을 그림 그리기에 적합하게 가공을 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Unsized Canvas 란 말하자면 이런 밑가공을 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캔바스에 표면처리가 되지 않았으므로 페인트가 스며들면서 색다른 효과가 나올수 있겠지요.  그래서 이 유화가 얼핏 보기에 '수채화'같은 느낌이 들었던것 같습니다.

 

 

 

카네기 미술관 전시실 풍경

2009년 11월 촬영

 

 

Picnic (c.1914-1915)

소풍

Oil on Unsized Canvas

가공처리 되지 않은 캔바스에 유화

196x271cm

2009년 11월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Women at Seashore (1915)

Oil on Panel

43x81cm

2009년 11월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위의 피크닉이나 Women at Seashore 모두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것인데요. 풍경이나 등장인물들의 분위기가 유사합니다. 

 

 

 

 

 

Salem Cove (1916)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3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워싱턴 디씨의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에 걸려있는 프렌더개스트의 작품입니다.  한 소년이 아빠와 함께 손을 잡고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의 작품 구경을 하면서 슬슬 지나가다가  이 그림 앞에 서더니 아빠에게 뭐라고 종알종알 이야기를 합니다.  어린이의 눈길을 잡아끄는 그림이었던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 그림.  그래서 저도 그림 앞에서 기념사진 한장 찍어봤습니다. 저도 이런 그림 한장 갖고 싶어요.

 

 

 

 

 

Landscape with Figures (1921)

여러가지 모양이 있는 풍경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Landscape with Figures (1918-1923)

여러가지 모양이 있는 풍경

Oil on Canvas

2009년 10월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제가 가지고 있는 몇장 안되는 그림들을  제작 연도 순서대로 배열을 했는데요, 시간이 갈수록 그의 붓 터치가 세밀하고 조밀해지지요?  아무래도 수채화에서 유화로 넘어가면서, 그 이후로 그의 붓 터치가 깊이를 얻어간것도 같고요.  그럼에도, 그의 그림들에 등장하는 풍경이나 사람들이 마치 '동일한 그림'의 반복처럼 느껴질 정도로 유사해 보입니다.

 

이들 그림에 나타난 몇가지 공통적인 현상을 나열해볼까요?

 1.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것으로, 인물들의 얼굴에 이목구비가 생략되었습니다.

 2. 사람이나 나무나, 풍경 전체가 율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지된 풍경이 아니라 살아숨쉬는 여인의 가슴처럼 굴곡과 움직임이 있지요

 3.  드레스를 차려입고 소풍을 즐기는 남녀들이 나옵니다. (후기에는 동물들도 포함됩니다).

 4. 보시다시피, 모두 야외의 풍경이지요.

 

프렌더개스트의 전기 자료를 찾아보면, 프랜더개스트가 이탈리아 화풍의 영향을 입었다던가,  혹은 후기 인상파  점묘파 화가 쉬러(Seurat)의 영향을 받았다던가, 혹은 세잔느에 견주어지기도 하거니와, 나비파 보나르, 뷔야르의 영향도 제기가 되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당시의 유럽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거나 혹은 널리 알려진 화가들의 작품이, 혹은 그들과의 교류가  프렌더개스트의 예술세계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쳤을것은 자연스런 현상일수 있습니다.   그런데, 프랜더개스트는 단지 이쯤에서 주저않은 화가는 아닌듯 합니다.  그는 '자기 그림'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보입니다.  무슨 말씀인가하면,  누구의 어떤 화풍의 영향을 받았건 안받았건,  프랜더개스트는 이런 모든 '영향'을 초월하여 '이것은 프랜더개스트다'라고 할만한 화풍을 스스로 만들어 냈다고 하는 것이지요.

 

 

모리스 프랜더개스트는 1859년에 태어나 1924년에 사망했으므로 만 64년을 지구상에 머물렀다 할 수 있는데, 그는 평생 독신이었다고 합니다. 성격이 수줍고 조용하여 사교적이지도 않았고요.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나이 서른에 받기 시작한 이래로 죽을때까지 그림만 그렸으니 30여년간 미술가로 살다 간 셈인데, 그는 평생 '그림 생각'만 했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액자를 만들어 파는 일을 했던 그의 동생 찰스가 평생 그의 후원자가 되어주었지요.  결혼도 안하고, 사교적이지도 않고, 그림만 즐겨 그린 이 조용한 사람은 어쩌면 평생 '관찰자'로 살아간것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는 그의 성격은, 늘,  사람들을 어떤 풍경속의 일부로 파악을 했을것도 같고요.  그런 그에게 사람들의 이목구비, 사람들의 표정, 그런것들은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사람들'은 '풍경'으로 머물렀을겁니다.  그러니 그의 풍경화의 제목마저 Landscape with Figures (모양으로 이루어진 풍경화)라는 식으로 붙여졌겠지요.

 

미술평론가들은 이러한 그의 그림을 '사실주의'가 아닌 '추상적' 화법의 도입이라고 정리를 하기도 하는데요, 어쩌면 세잔느가 그러했듯 구체적인 관찰과 묘사, 혹은 인상(impression)을 넘어선 해체와 추상의 장으로 진입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엔 그냥 그의 삶이 그러하였던 것 같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다른 별에서 온 생명체가 멀찌감치서 풍경을 관찰하듯, 풍경속의 인물들도 풍경의 일부로 피상적으로 관찰을 했겠지요.

 

모리스 프랜더개스트는 1914년에 뉴욕으로 활동지를 정하고  The Eight 의 멤버였던 윌리엄 글랙슨즈의 윗층 (50 South Washington Square, New York)으로 이사를 합니다.  서로 이웃사촌으로 지냈다는 얘기지요. 

 

제 소견으로는 The Eight 의 멤버였던 William Glackens 는 '르누아르의 아류'에서 끝난 화가로 보이고, Maurice Prendergast는 유럽화풍도 공부했고, 유럽화풍의 영향권안에 있었지만, '프랜더개스트'만의 독특한 세계를 완성하고 떠난 화가로 보입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딱, 답이 나오쟎아요, 아! 프랜더개스트! 

 

 

 

2009년 12월 11일 redfox

 

 

후기: 모리스 프렌더개스트는, 사실, 저에게는 '듣보잡'과에 속하는 그림들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제가 무지한 관계로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을 발견했을때, 그냥 별 감흥없이 쓱쓱 지나쳤다는 것이지요. 미술관 이곳저곳에서 그의 그림을 보면서도, 프랜더개스트를 기억하기보다는 '저 그림 어디서 봤더라? 전에도 비슷한 것을 본적이 있는데...' 이정도로 생각하고 그냥 지나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The Eight 을 정리하느라 제가 갖고 있는 그림자료들을 정리하다보니, 어라? 이 사람  내가 제법 여기저기서 눈도장 찍은 사람이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어 그런데 그림 모아놓고 보니 매력있네!   뭔가 개성이 보이네!  이렇게 되더라구요.  그러니까,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더욱 매력이 느껴지더란 것이지요.  (모르고 죽었으면 억울할뻔 했네~ )

 

누군가를 새로 알아간다는 것은 참 흥미진진한 일입니다. 그것이 꼭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해도... 아니 어쩌면 그 대상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무엇을/누군가를 새로 알아가는 작업이 안전하고도 유쾌한 작업이 될지도 모릅니다.  산사람은, 알게되면 정들고, 혹은 싫증나고, 그러면 괴롭죠.  그냥 어떤 대상은 알면 알수록 유쾌해지지요. 싫증나면 떠나면 되고. 상처가 안남죠.   프랜더개스트도 혹시 그랬던걸까?  그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관조자, 관찰자로만 머물렀던걸까?

 

 

 

 

 

 

 

Posted by Lee Eunmee
Realism/Ashcan School2009. 12. 8. 01:15

 

William Glackens (1870-1938) 는 The Eight 의 멤버인 John French Sloan 과 고등학교 동창이고,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서도 함께 미술을 공부했으며, 슬로언의 소개로 로버트 헨라이와 만나게 되어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글랙슨 역시 슬로언과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매체에 '삽화'를 그리는 것으로 생계를 해결했습니다.  아무래도 대중적인 신문이나 잡지에 필요한 삽화를 그리는 작업이 이들을 사실주의적 화법으로, 대중의 삶에 다가가게 하는 요소가 되었을 것입니다.  

 

 

 

La Villette  (c. 1895)

2009년 11월 7일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1895년에는 헨라이, 슬로언을 위시한 미술가들과 함께 유럽 여행을 하기도 했고요, 헨라이와 함께 파리에서 일년간 머무르며 파리의 예술을 익히기도 합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을 가듯, 당시 미국의 미술가들은 파리나 다른 유럽의 도시로 미술을 공부하러 가는 것이 대세였습니다.  글랙슨 역시 헨라이의 영향으로 일상의 대중의 모습을 그려나가기도 했고 2008년 The Eight 전시회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그는 헨라이의 영향권 아래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르누아르와 같은 프랑스 인상파 화가의 화풍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La Villette 는 프랑스 파리의 풍경입니다. 강변에 사람들이 있고, 높은 구름다리도 보입니다. 1895년, 프랑스 파리에 처음 간 25세 청년의 작품입니다.  도시인의 풍경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있지요.

 

 

 

Boys Sliding (미끄럼 타는 소년들) c. 1900

Oil on Canvas

2010년 1월 9일 델라웨어 미술관에서 촬영

 

색조는 대체적으로 '어두운' 편인데요, 이게 뭘까? 궁금해서 들여다보면 아슴프레한 가운데, 언덕에서 미끄럼을 타는 아이들과, 언덕 아래에서 줄넘기를 하고 노는 소녀들이 보입니다.  언덕위에서 신사 혼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군요.  같은 시기에 그려진 저 위의 풍경화와 분위기가 비슷하지요?

 

 

 

 

1904년 결혼한 글랙슨스는 파리로 신혼여행을 갔고, 그 이후로도 프랑스와 유럽의 도시들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파리의 룩상브르그 정원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프랑스의 중상류층 사람들이 한가롭게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장면입니다.

 

Luxembourg Garden (1906)

2009년 10월 3일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Beach Umbrellas at Blue Point (1915)

2009년 10월 3일 스미소니언 렌윅 갤러리 (미국 공예 박물관)에서 촬영

 

 

 

 

 

Bath Houses, (욕실들), c. 1915

Oil on Canvas

2010년 1월 9일 델라웨어 미술관에서 촬영

 

 

저 위의 스미소니언 소장 작품과 이 'Bath Houses'그림의 '장소'나 색감이 비슷하죠. 제작 시기도 비슷하고요. 극히 개인적인 소견입니다만, 위의 바닷가풍경은  함께 활동했던 프랜더개스트의 그림을 연상시키고,  이 욕실들 그림은 타히티 여인들을 즐겨 그렸던,  폴 고갱의 아름다운 색감을 연상시킵니다.

 

 

 

 

 

그의 1927년작 Promenade (산책)는 얼핏 루누아르의 화사함을 연상시키지요?

 

 

 

The Promenade (1927)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글랙슨스는 The Eight 전시회의 회원이었고, 애시캔 그룹으로 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평생 이들과 교분을 유지하였지만, The Eight 전시회 이후 헨라이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루누아르 풍에 가까운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 나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전시장에서 눈으로 직접 봤던 그의 작품들은 '미국화'같지가 않아 보였고, 얼핏 보기에 '유럽 인상파 화가 그림같다'는 느낌을 줍니다.  어찌보면 '이도 저도 아닌' 작품들 같기도 한데요.  그래서 미술사적으로 크게 주목받지는 못하지요.  화가의 '정체성'이 그래서 중요하지요. 미국인은 미국적인 그림을 그릴때 정체성이 뚜렷하고, 한국인은 한국적인 무엇을 다룰때 정통적으로 보이지요.

 

며칠전에 아들놈이 학교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습니다.  각자 주제를 선택하여 전문가적으로 발표를 해야 하는 프로젝트였는데, 처음에 아들놈이 담당교수한테 '럭비'에 대해서 발표를 하겠다고 했답니다. 럭비선수를 한적이 있거든요.  담당교수가 '뜨아'한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들놈이 마음을 바꿔서, 태권도에 대한 발표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태권도장에서 태권도 지도를 하는 유단자거든요). 그러자 담당교수가 '그것을 발표하라'고 흔쾌히 대꾸를 했다고 합니다.  아들놈에게는 '럭비'나 '태권도'나 모두 자신이 잘 설명할수 있는 분야였는데  교수가 볼때,  명백하게 '코리안'인 학생이 '럭비'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 보다는 '태권도'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훨씬 '전문가'처럼 보였을 것이지요.  아들녀석은 태권도복까지 갖춰 입고 프레젠테이션을 했고,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합니다.

 

교수를 '인종주의자'라고 탓 할 생각은 없습니다. 가령 '일본인'이 유도복을 입고 설명을 하면 어쩐지 그 사람이 유도의 전문가처럼 보이겠지만,  아프리칸이 유도복을 입고 설명하면 어쩐지...아닐것 같다는 느낌이 들테니까요.  그냥 '눈으로 보기에' 얼핏 그런 인상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정관념이라던가 '스테레오 타이핑' '인종주의'라고 비난만 할수는 없지요.

 

사람이 갖고 있는 인지구조는 본인 스스로도 통제가 잘 안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대개 이런 설명 불가능한 요소들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미국인 글랙슨스가 아무리 근사한 그림을 그려도, 그것이 어쩐지 이도 저도 아닌, 유럽화가의 작품같은 애매한 분위기를 갖기 때문에, 저와 같은 '미국화란 무엇인가' 들여다보는 이방인의 눈에는 그저 애매할 뿐이지요.  음...저의 글도 참 애매해지고 있군요...

 

 

2009년 12월 7일 redfox

 

 

 

The Purple Dress (보라색 드레스) 1908-10

Oil on Canvas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에서 촬영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글랙슨스의 보라색 드레스 그림을 발견했을때, 얼핏, '저 그림 내가 어디서 봤는데...' 이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림 파일들을 뒤져봤지요.  그리고, 제 느낌에 매우 유사해 보이는 그림을 발견했습니다.  저한테만 이런 느낌이 들지도 모르지만요.

 

Pierre Bonnard (1867년생-1947년 사망).

Misia on a Divan  ca. 1907-1914

 

 

William Glackens 는 1870년생 (1938사망).  Pierre Bonnard 는 1867 년 출생 (1947년 사망.) 두 화가 모두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비슷한 시기를 살던 사람들이지요. 보나르는 프랑스 태생이고, 글랙슨스는 미국 태생이지만, 두 사람 모두 파리에서 미술작업을 하면서 조우했습니다.  글랙슨스의 자료를 보면, 그가 프랑스에서 인상파 화가들 나비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나비파화가로 우리에게 친숙한 사람들이 뷔야르와 보나르 이지요.  이 두 사람은 미국의 큼직한 미술관에 가보면 늘 함께 붙어다닙니다. 보나르 그림 곁에 뷔야르 그림이 있습니다.  늘 함께 있습니다. 마치 오스트리아의 화가 클림트와 에곤 쉴레 두 사람의 그림이 짝짝꿍이 되어 붙어 다니는 것처럼. (클림트와 에곤 쉴레 역시 서로 불가분의 관계이지요. 클림트가 에곤 쉴레의 후견인, 스승이 되어주긴 했으나 이들의 관계가 일방적이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지요... 유럽 미술은 이쯤에서 ....) Nabis 는 '예언자'라는 뜻의 히브리 말이라고 합니다. 신비하고 독특한 붓의 터치와 색감을 유지 했는데요.  글랙슨스 역시 이들의 작품 세계를 인지하고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두 작품의 제작 연대도 거의 일치하지요.

 

뭐 두 여자 주인공들의 표정보다는, 그림 전체에 흐르는 붓의 터치와 전체적인 색감이 제게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제가 보나르의 '광팬'쯤 되는데... 제가 보나르를 좋아한다는 것을 ...우리 식구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제 남편은, '하고 많은 화가중에 왜 하필 그런 그림이 좋은가' 의아해 하지요. 제 남편은 보나르의 그림이 정신병적이라고 싫대요. 내 눈엔 이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데...  보나르가 좀 정신병적인 면이 있지요. 정신병자같은 여자를 수십년간 지성껏 돌보며 외톨이처럼 살다 간 화가거든요.  보나르의 그림에는 목욕하는 여자가 등장하고, 욕조 주변의 여자의 풍경이 다수인데 그 여자는 평생 욕조에서 살다 갔대요. 무슨 질환 때문에 그랬다는데, 보나르는 그 여자를 평생 돌봤고요.  저는 클림트의 그림을 보면 -- 차멀미같은 멀미를 느낍니다.  느끼해서 빙빙 도는것 같아요.  현기증이 날정도로 아름다우면서도 느끼하죠. 제가 클림트의 그림을 보면서 기분나빠하듯, 제 남편은 보나르의 그림이 기분 나쁜가봅니다.  아... 사람이 다 제각각이고, 각자 자기상처를 핥고 사는 짐승이라,  뭐 그렇다는거죠.)

 

 

화면 오른쪽에서 두번째 그림. 그것이 보라색드레스 그림입니다.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에서 촬영). 오른쪽의 발레 그림은 Everett Shinn,  왼쪽 풍경화는 Robert Henri, 왼쪽 설경 그림은 Rockwell Kent, 그 곁에 잘 안보이는 그림은 George Luks. 모두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입니다.

 

 

글랙슨즈 그림을 연대순으로 정리했는데요, 위에서부터 차례차례 내려오다 보면, 그의 그림이 초기에는 어두컴컴하다가 점차 밝고 화사해져 간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밝은 색감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어두운건...싫더라구요.  (나의 어둠만으로도 나는 지쳐있으므로...어둠에서 밝음을 지향하는거죠, 하하, 옛날에 우리나라 정보기관의 슬로건 아니었나요? 우덜은 어두운곳에서 밝음을 지향한다라던가 뭐라던가...저는 정보기관은 무조건 무서워요. 무서워요. 무서워요.~~ )

 

 

 

 

2010년 1월 4일 내용 보충 redfox.

2010년 1월 18일 내용 보충 red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Ashcan School2009. 12. 7. 23:22

소년가장 슬로언

 

John French Sloan (1871-1951)은 펜실베니아 태생의 미국 사실주의 화가로 Henri 를 중심으로 모인 Ashcan (애시캔) 그룹과 The Eight (8인회)의 멤버로 활동하였습니다.  존 슬로언은 필라델피아에서 성장하였는데 그의 고등학교 동창중에 후에 The Eight 의 멤버가 되는 William Glackens를 만나게 됩니다.

 

1888년 그가 16세 되던해에 아버지가 정신질환으로 쓰러지면서 슬로언이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소년가장이 되고 맙니다. 그는 책방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책을 읽고 화집을 들여다보며 혼자 그림을 그리던중 정식으로 야간 미술 과정에 입문하게 되고 후에는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Thomas Pollock Anschutz 의 지도를 받게되며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Willaim Glackens 를 다시 만나게 되지요.

 

1892년 Robert Henri 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들의 연대가 시작됩니다. 슬로언는 The Philadelphia Press 의 미술부에서 삽화가로 일을 하며 미술 작업을 계속해 나갑니다.

 

슬로언의 아내

 

슬로언은 아내와의 관계도 '소설'적인데,  그의 아내 Anna Maria 를 술집에서 만나서 사랑에 빠져 1901년에 결혼하게 됩니다.  안나 마리아는 백화점 점원으로 일했지만 매춘 경력이 있으며 음주벽이 있고, 아마도 이러한 전력을 거친 여성들이 보일법한 히스테리컬한 우울증도 보였던 것 같습니다. 슬로언의 아내에 사랑은 지극정성이었고 한 의사의 제안으로 1906년부터 1913년까지 매일 매일 자기가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는지 일기를 쓰게 됩니다.  (이런 남자 또 한명 있죠, 삐에르 보나르... 삐에르 보나르는 수십년간 목욕탕에서만 지내는 특수한 병을 가진 여인을 돌보며 한세상을 보냈지요. 삐에르 보나르의 그림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목욕하는 여자, 삐에르의 평생의 연인.)  그의 부인은 1943년에 죽고, 슬로언은 이듬해에 새장가를 갔으며 슬로언 자신은 1951년에 운명합니다.

 

슬로언의 사회주의 운동

 

 

1912년 그는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잡지 The Masses 에 미술 편집인으로 참가하며 다른 사회주의 사상이 강한 매체인 Call, Coming Nation 지를 위해서도 삽화를 그려줍니다.  특히나 그가 그린 1914년 6월호 The Masses  표지화가 지금도 자주 인용되거나 소개되곤 하는데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페이지에 Ludlow 학살사건의 이야기가 잠깐 소개된바 있습니다.)  그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고 민중의 생존권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긴 했지만, 예술가로서 슬로언은 '선전 (propaganda)'의 '도구'로 미술 작업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회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에는 긍정하면서도 예술이 '극단적인 정치선전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할만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예술만을 위한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반문할수 있을텐데...제가 추측하기에, 슬로언은 아마도 그 주위의 '사회주의자'들의 어떤 행동들에 거부감을 가졌을법 합니다.  그 '어떤 사회주의자들'이 요구하는 '선전물'을 만들기 싫었겠지요.  그가 꿈꿨던 사회주의와 그가 속한 사회주의자의 무리들의 행동 양식이 일치하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과 거리를 두고 싶었을겁니다.  

 

서민속에 서있던 남자

 

존 프렌치 슬로언의 작품세계는 크게

 

(1) 뉴욕의 풍경

(2) 대중의 삶의 풍경

(3) 잡지,책의 삽화가로서 작업한 세밀한 판화 작품들

 

으로 정리 될수 있습니다. 일단 그가 삽화가로 일했으므로 대중 생활 관련 묘사 작품들이 많은데, 이런 성향은 이미 십대에서부터 생계형 청년 가장으로 세상에 나아갔던 그의 삶의 이력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가 즐겨그린 도시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 가령 도심의 창가에서 빨래를 너는 여인이나, 건물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들, 술집 풍경 역시 그의 삶과 밀착된 풍경이었을 겁니다.  특히나 20세기초의 뉴욕의 전철과 천철 주변 풍경은 그의 '전매특허'와 같은 주제라 할 수 있지요. 조지 벨로우즈 페이지에서 (http://americanart.textcube.com/198)  권투선수 그림을 즐겨그린 미국 화가가 누군가? 이런 퀴즈가 나오면 자동으로 '조지 벨로우즈'를 외치면 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미술관에서 '뉴욕 고가 기차' 풍경화가 멀리서 보일경우,  당신이 애인과 함께 미술관 구경중이라면 "저기 저 뉴욕 풍경속에 고가 기차 그림이 있는 저 그림 말야...저거 아마 존 슬로언이라는 화가의 그림일거야..." 하고 '아는체'를 해도 크게 실례가 안 될 것입니다.

 

 

 

뉴욕 고가 기차 (Elevated Train: EL)

 

The City from Greenwich Village (1922)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바라본 뉴욕
oil on canvas
overall: 66 x 85.7 cm (26 x 33 3/4 in.)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2009년 9월 촬영

이 그림은 비가 그친 겨울 저녁, 맨하탄 남단에서 바라본 맨하탄의 거리 풍경입니다. 고가기찻길 위로 기차가 불을 밝히고 지나가고 비에젖은 도로에 자동차의 불빛이 반사됩니다. 비가 갠것을 눈치채는 이유는 하늘이 부염하게 밝아 있다는 것이지요. 도시는 촉촉히 비에 젖어 있고 골목의 불빛은, 그것이 골목이라서 더욱 밝아 보입니다. 건물 옥상의 물탱크도 보이고, 다리미의 모서리같이 각진 고층 건물이 오른쪽에 보이는데, 건물에서는 불빛들이 새어나옵니다. 일층의 모든 창문은 손님들을 기다리는듯 환하게 불이 켜져있습니다.  옹기종기 걸어가는 행인도 몇명 보이지요. 그림의 전체적인 윤곽은 우리가 마치 몇층 건물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듯 합니다. 액자를 창틀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창밖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기분이 듭니다.

 

 

다음 그림은 워싱턴 필립스 콜렉션이 소장하는 Six O'clock, Winter (1912) 라는 또다른 고가 기차 (EL) 풍경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사진 파일이 상태가 안좋아서 웹에서 얻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속의 여섯시의 풍경은 오전일까요 오후 일까요? (제가 볼때는 오후 여섯이인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단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기로 하고요...  )  이 작품이 1912년작이고, '그리니치 빌지지에서 바라본 뉴욕'이 1922년 작품이므로, 두 그림 사이에는 10년의 세월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두 그림을 함께 놓고 보면, 1912년 작품은 고가기차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선이고, 1922년 작품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이지요.

 

 

 

 

http://www.phillipscollection.org/research/american_art/learning/sloan-learning.htm

 

 

 

무료 커피

 

The Coffee Line (1905)

무료 커피를 받기 위해 줄서있는 사람들

2009년 11월 7일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뉴욕에서 무료 커피를 받기 위해 긴 행렬을 이룬 실업자들을 발견한 슬로언이 그려낸 겨울 저녁의 풍경입니다. 길에는 눈이 쌓여 있지요. 슬로언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 어둡고 긴 행렬을 묘사 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빈곤의 문제가 그를 사회주의 사상으로, The Masses 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비가 들이치는 페리선

 

Wake of the Ferry, No. 1 (1907)

페리선의 물길

2009년 10월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지금도 뉴저지에서 맨하탄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중에 배(Water Taxi)로 강을 건너는 직장인들이 있습니다. 100여년전 뉴욕과 뉴저지를 왕래하는 페리선을  그린것은 당시로서는 '엉뚱한' 시선이었을겁니다.  비가 들이키고 물결이 거칠게 일고, 전체적으로 '내가 그 페리선을 탄듯' 심란한 기분이 드는 그림입니다.  오른쪽 구석에 서있는 여인도 그래서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요.

 

이 그림은 그림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 만큼이나 심상치 않은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슬로언은 1904년에 뉴욕으로 활동지를 옮겼는데, 그의 알콜중독자 부인은 이후로도 걸핏하면 필라델피아의 집으로 가버리곤 했던 모양입니다. 그의 아내가 필라델피아로 가기위해 이 페리호를 종종 이용했지요. 결국 이 그림속의 여인은 슬로언의 알콜중독자 아내의 뒷모습이었던 것인데요.  1907년에 슬로언이 그의 작업실에서 The Eight 전시회를 준비하기 위해 모임을 갖고 있었을때 부인이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남자 작업장에 여자가 허락도 안받고 나타난거죠, 아마 그렇겠죠.) 술도 몇잔 마셨겠다, 화딱지가 난 슬로언이 그 자리에서 의자를 집어던져가지고 이 그림이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래가지고,  나중에 이 그림을 또다시 그리게 되는데 그 (2)번 그림은 필립스 콜렉션에 소장되어 있고, 이 (1)번 그림은 슬로언이 (2)번 그림 그린후에 손을 봐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Beal 2002).  아무래도 이런 뒷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페리선의 풍경이 슬로언과 그의 아내의 풍경이었다 싶기도 하지요.

 

 

 

 

 

 

이상에서 보신바와 같이 대도시의 뒷골목의 삶의 풍경, 이런 풍경은 Henri 가 주도했던 Ashcan 일당들의 주요 소재라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각에서 '이런 그림이 뭐가 대단한가?' 의구심이 들 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그려진 1922년 미국 화단의 상황속에서 이 그림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각은 달라질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미술의 역사는 유럽에 비해서 '일천'할수밖에 없지요. 제가 에드워드 힉스나 조쥬아 존슨과 같은 초기의 '포크 아트' 작가들에 대하여 애정을 갖고 소개를 한 이유가 있는데요, 미국은 초기에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였고 유럽 문화권의 식민지이기도 했습니다. 미국 자생의 문화가 없었다고 봐야지요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를 제외하면).  그래서...Henri 를 위시한 '사실주의' 화가들의 탄생 이전의 미국 회화사는 '유럽 베끼기'의 연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장차는 미국의 인상주의나 그 이전의 풍광, 초상와 위주의 미술과 미술가들을 차례로 소개하겠지만, 제가 왜 이들부터 시작을 안하고 풍속화가 잠깐 건드리다가 '사실주의'로 점프를 해버렸는가하면,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들 이전의 작가들에게서 제가 별 매력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뭐 대략 사이비 유럽미술 냄새가 고약하게 난다는 느낌이 드니까요. 제가 감지하기에 미국의 사실주의 화파들부터, 미국의 미술은 자신의 정체성을 슬슬 세워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에서부터 미국의 풍경이, 미국의 서민이 화면의 중심에 슬슬 등장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슬로언의 전철 그림과 도심 그림이 매력적으로 비쳐지는 것이지요. (이것은 미국인이 아닌, 아시아 출신의 어느 외국인이 이방인의 시각으로 미국 미술을 보는 관점이긴 합니다.)

 

 

 

Yeats at Petitpas'

 

이 그림은 뉴욕 웨스트 사이드의 어느 하숙집에서 열린 파티 장면입니다.  Petitpas 는 프랑스 출신의 두 자매가 경영한 하숙집 이었습니다. 

 

이곳에 영국의 철학자이며 예술가였던 John Butler Yeats (존 버틀러 예이츠 1839-1922)가 머물렀는데, 그는 영문학도들에게 (그리고 교양 차원에서 영시를 읽은 사람들에게)  친근한 시인 William Butler Yeats(1865-1939) 의 아버지입니다.  존 버틀러 예이츠는 69세 되던 해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애시캔' 화가들과 친교를 맺었고, 결국 뉴욕에서 사망하여 뉴욕에 뼈를 묻었지요. 그러고보면, 그의 아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유럽'문화를 이상화 했는데, 아버지인 자신은 말년에 문화 불모지와 같은 뉴욕에 와서 세월을 보내다가 갔군요.

 

흰 턱수염의 노인이 존 버틀러 예이츠이고, 오른쪽 끝에 보이는 검은머리 남자가 존 슬로언이군요. 음식을 들고 서있는 이는 하숙집 주인이고요, 그이의 왼쪽에 모자를 쓴 여인이 슬로언의 부인이라고 합니다. 존 버틀러 예이츠가 이 하숙집에 머무는 동안 이곳은 당시 미술,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즐겨 모이는 장소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Yeats at Petitpas' (1910)

Oil on Canvas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2009년 10월 3일 촬영

 

 

 

해부학교실

 

존 슬로언은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서 Anschutz 선생의 지도를 받았는데, 다음 작품은 해부학 강의를 하는 안슈츠 선생을 에칭 판화로 묘사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Anshutz on Anatomy (1912)

해부학 교실의 안슈츠 선생

Etching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2009년 9월 19일 촬영

 

 

 

 

제 사진 상태가 좋지 못해서, 웹에서 좀더 선명한 이미지를 빌려 왔습니다.  강단아래에 안슈츠 선생이 서서 강의를 하고 있고,  강단위에 인간 골격이 서있고, 그 옆에 성기만 가린 남자 누드 모델이 서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둘러 앉거나 서서 해부학 강의를 듣고 있는데요. 학생들중에 여학생도 보입니다.  아마도 여학생들이 없었다면 남자 누드 모델이 성기를 가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1900년대 초반에 미국 미술 학교에서는 남녀학생이 함께 작업하는 곳에서는 누드 모델이 성기를 드러내면 안되었다고 하지요.

 

 

슬로언에 관심이 많아 자료를 많이 보긴 했는데, 막상 제가 가진 작품 사진 파일이 미미하여 그의 미술 세계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소개할수 없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저는 화집이 아닌 '내 눈'으로 본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기로 작정을 했거든요.  나중에라도 슬로언 작품들이 보이면 보이는대로 잘 갈무리하여 좀더 그에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화집에서 본, 제가 좋아하는 그의 작품들로는 그의 '빨래'관련 그림들인데요. 슬로언이 도심에서 빨래를 널거나, 걷거나 하는 여인들을 모티브로 그린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 참 아름답지요. 그래서 '빨래' 주제의 페이지를 하나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는데요, 이것 역시 훗날로 미루기로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1. http://www.nga.gov/fcgi-bin/tinfo_f?object=52079

 2. Sherry Babbit (2008). Philadelphia Museum of Art: Handbook of the Collections. Philadelphia, PA.

 3. Graham W. J. Beal (2002) American Beauty: Paintings from the Detroit Institute of Arts 1770-1920. Scala Publishers Ltd. London, UK.

 

 

 

 

2009년 12월 6일 red 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Ashcan School2009. 12. 6. 02:41

New York (1911)

George Bellows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워싱턴 국립미술관 (NGA)에서 촬영

 

사진은 클릭하시면 크게 확장시켜 보실수 있습니다.

 

뉴욕풍경

 

 

Goerge Bellows (1882-1925) 의  New York (1911)은 대략 100여년전의 뉴욕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자동차와 마차가 뒤섞여 있고, 고층 건물들과 그제나 이제나 여전한 인파가 보입니다.  사실 이 뉴욕의 풍경은 사진과 같은 실제 광경은 아니라고 합니다. 뉴욕의 여러 장면을 뒤섞어서 뉴욕의 분위기를 전달했다고 봐야겠지요. 얼핏 보면 타임 스퀘어 같기도 하고 얼핀 보면 펜스테이션 앞 같기도 하고, 어찌됐거나 우리가 한번쯤 가봤거나 혹은 영화나 그림을 통해서 지겹게도 많이 본 뉴욕 번화가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일백여년전의 풍경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복장이나 마차 장면을 제외하면 어느 화가가 며칠전에 그린 것이라고 해도 그럴싸해 보입니다.

 

조지 벨로우즈 (1882-1925)는 앞서 소개드린 The Eight (팔인회)나 Ashcan (애시캔) 그룹의 정식 회원으로 활동을 한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The Eight, Ashcan school 의 리더였던 로버트 헨라이 (Robert Henri 1865-1929)와 친분이 두터웠고, 헨라이의 미술관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의 작품들이 팔인회, 애시캔 회원들의 화풍과 통했기 때문에 조지 벨로우즈를 '애시캔'의 일원으로 평가하는 비평가들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의 작품들이 미국의 도시, 서민들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냈으므로 조지 벨로우즈를 애시캔 그룹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정리를 해보는 것입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오하이오(Ohio) 의 주도(행정수도)인 콜럼버스 (Columbus) 태생입니다. 이곳에 오하이오 주립대 (Ohio State University)가 있지요.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주로 야구선수와 교지 삽화가, 그리고 잡지의 삽화가로 활동했습니다.  오하이오 주립대에 한번 가본적이 있지요. 제 친구들이 그곳 수학과에서 공부를 했는데, 한 친구는 공부 마치고 수학자로 살고 있고, 또 한 친구는 아직도 거기서 공부중입니다. (글 쓰다가 친구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Robert Henri 역시 오하이오 출신인데 그는 신시내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조지 벨로우즈와 로버트 헨리가 고향이 가까웠다는 이유로 더욱 친근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스포츠맨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오하이오 주립대를 졸업한 후에 프로야구 선수가 될것인가 잡지 삽화가로 살것인가 고민하다가, 미술 수업을 받겠다고 작정하고 뉴욕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뉴욕 미술학교 선생으로 재직하는 로버트 헨라이를 만나게 되고 그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특히나 그의 권투경기 장면이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 합니다.  그의 도시 풍경이나 다른 그림들도 그 나름의 힘과 역동성이 느껴지지만, 단답형 상식 퀴즈 대회에서 '권투하는 그림' 내 놓고 '이거 그린 사람?'하는 퀴즈가 나온다면 자동으로 '조지 벨로우즈!'을 외칠만 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그림 세계를 단순무식하게 정리해본다면 대략 세가지 정도로 분류가 됩니다:

 

 (1) 그를 대표하는, 권투선수 시리즈

 (2) 도시 주변의 풍경과 서민의 삶

 (3) 일반 서민의 초상화

 

제가 미술관들을 돌면서 '사냥'한 그의 작품 사진들을 주제별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권투선수

 

Both Members of This Club (1909)

두 선수

Oil on canvas, 45 1/4 x 63 1/8 in. (115 x 160.5 cm)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흰색의 하일라이트가 들어간 왼쪽 선수, 얼굴에 피가 낭자합니다.  오른쪽 선수, 치고 들어가는 대각선 구도가 역동적이지요. 반대방향의 대각석 구도의 관객 풍경이 그림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피가 낭자한 가운데, 아래 중앙의 관객은 입을 벌리고 웃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권투선수가 피를 흘리거나 말거나, 관객의 입장에서는 링에서 피가 튀고 살점이 튀고 누군가 되게 쓰러지고 그래야 신이 나는 법입니다.

 

웹에서 조지 벨로우스 이미지를 찾아보시면 이와 유사한 다른 권투경기 장면 그림들을 많이 발견하실수 있습니다. 그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조지 벨로우즈의 권투경기 그림을 찾아 천지를 유랑하며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어릴때, 할아버지가 권투중계의 팬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권투중계의 일정을 일일이 표시해놓고, 그의 일기장에 적어놓고 절대 빼놓지 않고 들여다봤습니다. 아마도 돌아가실때까지 그러셨을겁니다. 단지 중계방송만 보신것이 아니고, 서울 우리집에 오시면, 어린 우리들을 이끌고 월곡천 건너, 시장통에 있는 '체육관'에 구경을 가곤 했습니다. '체육관'이 뭐하는데냐 하면 당시 무명 아마추어 선수들이, 혹은 권투선수 지망생들이 모여서 연습하는 '도장'이다 이거죠.  우리들은 거기서 밤이 이슥하도록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고, 혼자 줄넘기하거나 혼자 샌드백 치면서 훈련하는것을 구경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체육관에 따로 '탈의 시설'이 없었던것 같습니다. 가끔 우리는 잘생긴 '오빠'들의 (그때 나는 꼬맹이였으므로) 실한 엉덩이 구경도 할수 있었는데,  선수들이 체육관의 구석진곳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거든요. 그 구석진 곳이 하필 우리가 염탐하던 창가였으므로 그들이 창가쪽 구석에서 후다닥 바지를 내리고 체육복으로 갈아있거나, 체육복에서 평상복으로 탈바꿈하는 광경을 볼 수 밖에 없었지요. (일부러 그런게 아니고요 -.-;; )   아니...엉덩이밖에 안 봤습니다... 헤헤헤.

 

어릴때는 할아버지가 권투중계 보시는 것이 못마땅했는데요, (왜냐하면 내가 어린이 프로를 볼 수가 없으니까) 지금도 그런 스포츠 중계에 재미를 못느끼므로 여전히 볼 일이 없는데요, 하지만 이 그림은 제 맘에 듭니다.  조지 벨로우즈가 무슨 맘으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권투 장면을 그의 그림 소재로 잡았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신선한' 시도였고, 결국 그의 트레이드마크 (Signiture) 작품이 되고 말았지만, 그것 말고도,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인생 이렇게 치고 받고 맞다가 뻗는거지...하는 비감한 생각도 들고,  누구나 그런거지, 나만 유독 두드려 맞는것도 아니지, 이런 위안감이 든다니깐요, 글쎄.

 

 

 

2009년 12월 13일,  국립 미술관에 가서 조지 벨로우즈의 Both Members of This Club (1909)라는 작품을 다시 감상하고 있었는데요, 마침 미술관 도슨트(Docent 전문 안내원)가 사람들을 이쪽으로 안내해와서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더군요. 그래서 곁에서 귀동냥을 했지요. 새로 알게된 사실은,  1900년 초반 당시에는 상업적으로 복싱 경기를 하는것이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공개적인 복싱매치가 아니고, 남성들의 '음성적인' 클럽에서 진행된 경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목도 Both Members of This Club (이 클럽의 두 회원)이라는 식으로 달린 것이라고 하네요.  두 '선수'라고 하면 안되고, 그냥 클럽의 회원간의 친선경기같은.    그러면 이 클럽에서는 복싱만 했겠는가?  다소 '음성적인' 클럽이었으므로 그 안에서는 복싱 말고도 다른, 다양한, 그러나 저로서는 전혀 알수 없는, 남자들만의 '음성적'인 오락이 진행되었겠지요~

 

 

 

 

 

뉴욕 빈민가의 아이들

 

 

이 작품은 위의 권투선수 그림보다 2년 앞서서 그려진 것입니다.  뉴욕의 East River 강변에는 그 당시 가난뱅이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서울의 허술한 한강변 산동네를 연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제목이 Forty Two Kids (42명의 아이들) 인데요 제목의 'kid'가 단순한 '아이들' 이 아닙니다. 아이들이라는 영어 단어로는 Children 이 따로 있지요.  요즘 Kids라는 단어를 '아이들'이라는 의미로 흔히 사용하기는 하지만 백여년전 이 kid 라는 말은 '슬랭'으로 대개 이민자 아이들처럼 가난뱅이 아이들을 일컫는 표현이었다고 합니다. 그냥 아이들이 아니라...말하자면...'애새끼들'이라는 뉘앙스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

 

이 kids 라는 어휘를 저도 아주 조심해서 사용하는 편인데, 제가 교육을 전공했고, 학교에서 교사로도 일을했고, 그래서 대학원 수업을 들을때도, 온통 '아이들,' '학생들' 관련 이야기였지요. 그러니까 주로 사용하는 어휘가 students, children, ESL children, ESL students 뭐 이런 언저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무심코 지도교수와 논문 이야기를 하다가, "These ESL kids..." 뭐 이러고 말을 하니까 지도교수가 주의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학생을 존중해야 하는 교육자이다. students 나 children, learners 말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적합하지만 kids 라는 말은 부적합해보인다."  그러니까 그 kids 라는 어휘가 아직도 품위있는  어휘로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 kid의 원뜻은 염소새끼 입니다.)

 

자 우리들의 조지 벨로우즈 선수(?)가 그 가난뱅이 뉴욕 빈민가의 이민자의 '애새끼'들을 화폭에 담았다는 것인데요. 정말 42명인지 한번 헤아려 볼까요?

 

 

Forty Two Kids (1907)

42명의 아이들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촬영

 

 

이 작품이 1908년 어느 전시회에 소개가 되었을때 평단의 반응은 싸늘하고 조롱기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뭐 이따위 그림을 그림이라고 그렸냐 이거죠.  가난뱅이 애새끼들이 허술한 강변에서 노는 것이 무슨 그림의 소재가 되는가 씹었을겁니다.  하지만 평단의 싸늘한 반응과는 달리, 이 작품은 곧 개인 콜렉터에게 팔려나갔는데, 이것이 조지 벨로우즈가 최초로 개인 콜렉터에게 판매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워싱턴의 코코란 미술관에 있지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Bill Bryson 의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kid 의 일화중에서 전쟁이후 베이비붐 세대로 성장했던 작가 빌 브라이슨의 회고가 소개됩니다.  그가 과장되게 술회하기를, 전후 베이비붐 세대였던 자신들은, 어딜가나 애가 넘쳐나서,  그가 살던 아이오와 시 변두리의 강변에 가면 수천명의 아이들이 모여서 멱감기를 했다고 하는데요.  물론 조지 벨로우즈 그림속의 아이들은 1907년 8월의 아이들입니다.  베이비붐 세대보다 50년전에 '이민자 붐' 세대의 아이들이지요.

 

이 그림이 제게도 낯설지 않은 이유는, 비록 지구 정반대쪽 대륙에서 성장했지만, 저 역시 60년대 70년대 베이비붐 시대의 일원으로 변두리 가난뱅이 아이로 성장했다는 공통 분모 때문일것입니다.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의 회고로는 '네 오라비나 네가 태어나던 시절에는 어느 집에서나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어느집 여자나 배가 불러 다녔다. 애가 참 많이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 많은 애들이 뭘하고 놀았을까요.  사실 도심에서 성장했지만 저는 어린시절 골목에서 뭘 하고 놀은 기억이 별로 남아있지 않고,  즐겁게 논 기억은 모두 시골집에서였습니다.  여름 한철 시골 개울가에 가면 약속도 필요없이 아이들이 있었고, 우리들은 수영복도 없이 그냥 입은 옷을 벗어던지고 물에 들어가 놀았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저는 초등학교 2학년때까지 옷을 벗고  개울에서 물놀이를 했습니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아직 몰랐다는 것이지요) 여자아이나 남자아이나 그냥 물속으로 뛰어 드는 것으로 각자 부끄러운데를 가렸다고 생각하고 그냥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는 것이지요.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빤쓰라도 입고 물장구를 쳤고, 초등학교 5학년부터는 싸구려 나이롱 수영복을 입고 노는 '문명인' 반열에 들 수 있었지요.

 

제가 가끔 이런 저의 '야만적'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  서울이나 대도시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또래 친구들은 저를 '원시인' 쳐다보듯 바라보며 무슨 외계인이나 거짓말장이를 대하듯 휑한 표정으로 대합니다.  자기네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풍경속에 내가 있었다 이거죠.  하하하. 사람들은 자기가 처한 환경을 '평균적' 환경으로 인지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신의 경험 영역 바깥의 일은 외계의 일처럼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나'역시 피할수 없는 한계죠. 나 역시 그런 눈으로 남을 판단할 것이므로.  조지 벨로우즈가 '애정'을 갖고 변두리 아이들이 벌거벗고 노는 풍경을 그렸을때, 어떤이들은 '이것도 그림이냐'로 반응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럴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지구상에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거죠...

 

 

첨언:  그런데 위의 42명의 아이들 그림이...어쩐지 Thomas Eakins The Swimming Hole(1885) 라는 그림을 연상시킵니다.  토마스 이킨스 (1844-1916)는 미국 사실주의 미술가들의 '대부'쯤되는, 후에 활동하는 사실주의 화가들 (The Eight, Ashcan)에게 가장 영향을 끼쳤던 미국화가라 할 만 합니다.  조지 벨로우즈가 선배 대가인 이킨스의 그림을 염두에 두었는지 아닌지는 알수 없으나, 참 닮았단 말이지요...  ;-)

 

 

 

 

 

변두리의 푸른아침

 

멀리로 고층 건물들이 밀집한 것으로 보아 역시 뉴욕의 강변 풍경으로 보입니다. 역시 강변 부두에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고 누군가 불을 피웠는지 흰 연기도 솟아 오릅니다.  대략 어느 추운 겨울 아침 강변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으니까요. 추우면 웅크리쟎아요. 이들의 하루는 오늘도 고단하게 흐를것입니다.  이들의 곤고한 풍경과는 달리 푸른 색조가 아름답지요? 

 

 

Blue Morning (1909)

푸른 아침

Oil on Canvas

86.3 x 111.7 cm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다리밑 외딴 숙소

 

그림 오른쪽 구조물이나 그 위를 지나는 판으로 보아 이것은 다리(교각)의 일부 같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뉴욕시의 어느 커다란 다리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있고, 그림의 중앙에 6층짜리 건물이 똠방, 대똑하게 서있습니다.  이곳이 그림의 제목이 되는 '외딴 숙소'인것 같습니다.  'tenement' 라는 어휘를 언라인으로 검색해보면 이런 의미가 소개가 됩니다. (http://www.thefreedictionary.com/tenement)

 

1. A building for human habitation, especially one that is rented to tenants.
2. A rundown, low-rental apartment building whose facilities and maintenance barely meet minimum standards.

해석: (1)  세입자 임대용의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
        (2) 극히 기초적인 수준도 안되는 시설을 갖추고 있는  싸구려 아파트 빌딩

 

 

The Lone Tenement (1909)

외딴 숙소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그림 왼편에 사람들이 모여서 불을 쬐고 있는것 같지요?  멀리 강에 은은한 햇살이 비치는데, 다리밑의 사람들은 불가에 모여 서 있습니다. 웅덩이에 보이는 물은 살얼음이 얼었을것 같습니다.  이런 뉴욕의 풍경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해던 Georgia Totto O'Keeffe (November 15, 1887 – March 6, 1986) 가 그렸던 뉴욕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Georgia O'Keeffe
Cityscape with Roses
1932
oil
84 3/8 x 48 1/2 in.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the Georgia O'Keeffe Foundation

 

 

1932년이면 미국의 경제 암흑기 입니다. 그 당시 조지아 오키프가 묘사한 뉴욕은 장미빛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작가의 작업 취향이야 각자 자유이고 조지아 오키프가 매력적인 화가임에는 틀림없으나,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에 '사회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돈많은 사진가 스티글리츠의 사랑속에 경제적인 어려움도 모르고 예술에만 전념했겠지요.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만을 들여다볼때는 그의 작품에 감탄을 하다가도, 그 당시에 혹은 그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하던 작가들과 비교해보면, 어딘가 조지아 오키프의 미술세계가 '공허'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사람'한테 관심이 없었던 사람 같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러한 저의 비판적인 시각은, 사람이나 '세상'에 관심을 가진 저 자신의 취향에서 출발하는 것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냥 문득, 조지 벨로우즈의 뉴욕 풍경 그림을 보다가, 그 속의 가난뱅이 애새끼들이라던가, 빈민들의 풍경이 그려진 그림을 보다가 문득,  조지아오키프의 뉴욕 풍경이 떠오르면서...아하...이들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았던거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National Gallery of Art 에 조지 벨로우즈의 그림이 걸려있는 풍경입니다. 왼쪽부터 '권투선수' '푸른 아침' 그리고 '뉴욕' 그리고 '쓸쓸한 숙소'가 차례차례 보입니다.

 

 

 

초상화들

 

 

다음은 크라이슬러에서 '사냥'한 그의 '피아노 앞의 엠마' 입니다. 엠마는 그의 부인입니다. 뉴욕의 미술학교에서 만났는데 엠마는 그림을 그만두고 피아노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위의 Blue Morning 에 보였던 그 푸른 빛이 이 그림에서 좀더 뚜렷하게 표현됩니다. 아, 조지 벨로우즈는 이런 색감의 푸른빛을 좋아했구나 추측하게 됩니다.

 

 

Emma at the Piano (1914)

피아노 앞의 엠마

Oil on Canvas

94x73 (가로세로)

2009년 11월 29일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의 두 딸중 큰딸인 앤 입니다. 커튼과 허리 부분의 청색과 흰 드레스가 대조를 이루는데요. 역시 Blue Morning 이나 Emma at the Piano 에서 선보인 청색과 흰색의 대조가 이 그림에서도 나타납니다.

 

Anne in White (1920)

흰 드레스의 앤

147x108.9 cm

Oil on Canvas

2009년 11월 7일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는 엠마와 결혼한 이후로 두 딸의 아빠가 되었는데, 아내와 딸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그의 그림의 소재가 도시의 풍경에서 가정적인 것으로 변모합니다. 그래서 43년의 짧은 생에서 그의 후기에는 초상화 작품들이 그려집니다. 물론 그의 초상화 작품은 그의 아내 혹은 그가 살던 마을의 마을 사람들, 이런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서 삽화 작업도 계속했고, 시카고 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습니다.  그는 '맹장'이 터져서 그만 요절을 하고 맙니다.

 

 

2009년 12월 5일 redfox

 

 

그의 마지막 작품들

 

 

Ringside Seat (1924)

맨 앞줄 관람석

2009년 9월 24일 워싱턴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The Picnic (소풍) c. 1924

Oil on Canvas

2010년 1월 23일 볼티모어 미술관 미국화 갤러리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 (1882-1925)는 43세의 나이에 (우리나라식으로 따지면 44세가 되던 해에) 맹장이 터져서 요절한 화가인데요, 위의 두 작품들은 1924년, 그가 죽기 전 1년전쯤에 그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위의 경기장 장면이 좀 뿌옇지요?  제가 사진을 잘 못 찍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흐릿한 등불 아래의 장면을 묘사하듯 노리끼리하게 아슴프레 합니다.  제가 허시혼에 여러차례 들렀는데, 볼때마다 저 작품은 좀 어딘가 노란 안개속에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아래의 '소풍'역시 그가 죽기1년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요, 그림 분위기가 매우 독특합니다.  (그림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보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미술관에 갈때마다 본 편인데요. 그러니까 제가 조지 벨로우즈에 대해서 알기 전에도 이 작품을 알고 있었습니다.  작가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채로 분위기가 특이한 작품으로 기억을 한 거죠. 

 

제목이 '소풍'인데요, 전체적인 풍경이나 분위기는 암울하고, 음침하고, 곧 어디서 천둥 번개가 칠것같은 불안감을 줍니다. 갑자가 돌풍이 불것같기도 하고요. 물빛도 하늘빛도 심상치가 않아요. 구름조차도 예사롭지가 않고요.

 

가운데에는 소녀가 줄넘기를 들고 서 있고요, 그 아래에서 누군가가 마치 절벽에서 올라오는듯 손을 뻗치고 있죠. 낚싯대를 드리운 남자와, 피크닉 보자기를 펼친 여자가 왼편에 있는데, 오른편에는 한 남자가 사지를 벌리고 하늘을 향해 누워있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서 이태전에 아이들과 대화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림이 세기말 적이야. 뭐랄까...암담해... 저 줄넘기를 들고 있는 소녀 말야, 저 줄넘기 이미지는 살바도르 달리도 그린적이 있고... 영원의 상징이라고도 해. 영원은 죽음과도 통한다는 거 알아? 죽음은 영원하쟎아.  줄넘기가 그리는 원, 그 원의 끝없는 회전, 인연의 굴레를 벗어날수 없음을 상징할수도 있고.  하필 줄넘기를 들고 언덕 가장자리에 서있는건 또 뭐니. 불안해보이쟎아.  전체적으로 참 불안해보여."

 

이 그림을 보면 벨로우즈가 즐겨 그렸던 청색 색조와 흰색의 하일라이트도 여전히 보이는데요, 신비로우면서도 스산하죠?  어쩌면 이것이 그가 사랑하는 두 딸과, 아내와 가졌던 인생 최후의 소풍이었는지도 모르죠. 그는 화면 오른쪽에 자신의 주검까지 그렸던 것인지도 몰라요. 그 자신은 그걸 의식하지 못했겠죠.

 

우리는 가끔 그런 얘기 하쟎아요. 어떤 사람이 죽었을때, 그가 죽기전에 나눴던 이야기나 일화들을 떠올리면서, "죽을걸 알고 그랬나?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 뭐 이런 얘기 하죠.  뭐 마치 죽을 사람처럼 유언처럼 몇마디 한 것이 마지막 말이 되기도 하고요.  생명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안대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뿐 안다는거죠.  그래서 죽음을 예견하는 말이나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해요 (그런 설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냥 그런 관점에서 그는 이미 그의 죽음을 예견한 그림을 남긴것이 아니었을까....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다시 만났을때, 그리고 문득 그의 생몰연대와 그림의 제작 년대를 비교해보다가, 문득,  번개치듯 문득,  이런 쓸데없는 상상도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 상상을 하자, 이 그림이 품고 있던 신비로운 세기말적 느낌에 대한 해답을 얻은 기분이 드는겁니다.  그는...다가올...죽음을...그렸나봐...

 

 

2010년 1월 29일 내용 보충 Red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Ashcan School2009. 12. 5. 13:24

 

Snow in New York  뉴욕의 눈 (雪),  1902년

Robert Henri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워싱턴 국립 미술관에서 촬영

 

 

로버트 헨라이 (Robert Henri 1865-1929)는 미국 사회사실주의(Social Realism) 미술가들의 스승으로 알려진 화가 입니다.  이 사람의 가족력이 좀 흥미로운데, 본디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Cozad 였고 그래서 로버트 헨라이는 원래 Robert Henry Cozad 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웃 사람과 다투다가 총질을 하는 바람에 이웃사람게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야반도주를 하는 수 밖에요. 결국 가족들도 야반도주한 가장을 따라 도망을 가게 되었는데, 훗날 새로운 삶을 위해 성씨를 바꿔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이름이 졸지에 로버트 헨라이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아, 그는 미국출신으로 유럽에서 주로 활동했던 화가 Mary Cassett (메리 커셋)과도 친척이라고 합니다.  메리 커셋에 대한 소개는 다음으로 미루기고 하겠습니다.

 

헨라이는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서 수학했고, 당시의 미국 젊은이들이 그러하였듯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1891년 필라델피아로 다시 돌아온 헨라이는 1892년부터 미술 학교에서 미술 교육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당시 인쇄매체의 삽화가로 활동하던

 * William Glackens

 * Goerge Luks

 * Everett Shinn

 * John French Sloan

 

등과 어울리며  Ralph Waldo Emerson,  Walt Whitman, Henry David Thoreau 의 사회사상 관련 글을 읽습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미국의 '초절주의 (Transcendentalism)'와 'Self Reliance (자기 주체)' 정신으로 널리 알려진 철학자였고, 월트 휘트만은 미국 최초의 산문시인으로 풀잎과도 같이 강인한 대중들을 노래한 시인이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우리에게 월든호수 (Walden) 라는 작품으로 알려진 역시 Self Reliance 정신의 신봉자였던 인물입니다.

 

이들은 이후에 활동의 본거지를 뉴욕으로 옮기게 됩니다. 헨라이는 뉴욕의 예술학교 (New York School of Art)에서 교편을 쥐게 되는데 이때 Edward Hopper, Rockwell Kent, George Bellow, Stuart Davis 등을 가르치게 되지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미국의 상황은, 사회적으로는 노동자들이 임금이나 작업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동조합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1904년에는 한해 동안 전국적으로 4,000 번의 파업이 진행되었다는 집계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노동운동은 주로 시카고, 디트로이트, 샌프란시스코, 뉴욕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미국의 고등학생등의 필독서중에 Upton Sinclair (업튼 싱클레어)의 The Jungle (정글, 1906)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고기 가공장에서 일하는 이민자 가족의 비극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이민자들은 Self Reliance (자기 주체) 정신으로 열심히 살아가려고 애쓰지만, 이들이 처한 노동 환경은 호락호락 하지가 않습니다. 약육강식의 정글이라는 얘기지요.  미국의 Self Reliance 라는 정신적 미덕도 통하지 않는 현상을 싱클레어는 고발하고 있는데요, 이와 같은 소설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나오고, 노동운동도 활발하게 진행되는 중심에 당시의 미술가들도 서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당시 미술가들은 사실적인 사회, 사람들의 풍경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런 흐름의 선두에 서 있던 집단이 헨라이를 위시한 애쉬캔 (Ashcan) 그룹이고, 이들이 후에 The Eight (8인회)로 거듭나게 되지요. 헨라이는 그의 친구들이나 제자들에게  주변의 사람과 삶의 풍경을 그리되, 이를 상대가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로 잽싸게 그리라는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Do it all in one sitting if you can," he advisded them. "In one minute if you can."  (Pohl, 2008) 

(해석: "그자리에서 한번에 그려버리게나," 헨라이는 그들에게 충고했다. "가능하다면 일분 안에." )

 

1902년 뉴욕에서 전시회를 가진 후 그는 풍경화를 접고 초상화를 주로 그리게 되었으며, 1908년에는 맥베스 갤러리에서 "The Eight (팔인회)" 전시회를 열게 됩니다. 사실 이 전시회를 열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마치 인상파 화가들이 프랑스의 살롱전에서 푸대접을 받은 후에 홧김에 인상파의 세기를 열었던 것처럼, Ashcan 화가들이 미국의 전시장에서 푸대접을 받자 미술비평가들과 정면으로 한판 단단히 붙은 후에 이 '팔인회' 전시회를 열게 된 것인데, 그 결과는 대중적으로나 비평계 모두 아주 호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헨라이는 사실 그의 미술 작품 보다는 그가 미국 사회사실주의 화가들의 지도자 역할을 잘 해냈고, 그리고 미술 교육에서 공로가 크다는 점에서 오히려 미술사적 인정을 받는 편입니다.

 

헨라이가 후기에 초상화로 돌아서긴 했는데, 그가 초상화 작업을 통해 사회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화폭에 담아보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미술관에서 발견한 그의 초상화 작품들은 악사, 소년, 인디안 소녀,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Gypsy with a Bandurria (1906)

반두리아를 들고 있는 짚시

Oil on Canvas

2009년 12월 29일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헨라이가 그린 작품입니다. (제가 헨라이에 큰 관심이 없다보니, 사진 상태가 성의가 없어보이지요? 예... 그래도 정성껏 찍을걸 하는 후회가 생깁니다.)  헨라이는 유럽의 '마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으로 소개가 되는데요, 이 그림 사진을 보니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과 비슷한 구도와 소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리부는 소년 창작 년도를 찾아보니 1866년이군요. 다리 모양 닮았죠?  전체적인 구도도...

 

 

Manet, The Fifer (1866)

 

 

 

 

 

 

The Beach Hat (1914)

비치 모자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Boy with Plaid Scarf (1916)

격자무늬 목도리를 한 소년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Indian Girl in White Ceremonial Blanket (1917)

제사용 담요를 휘감고 있는 인디안 소녀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이 작품은 헨라이가 뉴멕시코주의 산타페를 두번째 방문했을때 현지의 인디언소녀를 모델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소녀의 이름은 Julianita 로 San Ildefonso Indian 종족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아마도 제 그림 사진 파일을 뒤져보면 어딘가에 헨라이의 초상화 사진이 몇장 더 있을것 같습니다.  때로는 미술관에서 헨라이의 작품이 보일때,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한테 매력이 없어 보였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여기저기서 중구난방으로 봤던것들을 한페이지에 시간순서대로 정리하다보니 제가 미술관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도 됩니다. 그냥 하나 하나 볼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 예를 들자면 헨라이의 초상화의 소재가 된 인물들이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혹은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 인물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면서도 모두 닮아보인다는 것 (이는 헨라이의 표현 스타일에 일관성이 있어서 그러할 것이겠지요) 뭐 이러한 것들 입니다.  짚시 악사 그림과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 그림의 유사성도 미술관에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  사진을 쳐다보면서 생각한 것이고요.  그래서,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현상'을 관찰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미술관에서 미술작품을 눈으로 감상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후의 사색이나 반추 역시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

 

돌아보면, 저는 미술관에서 작품들을 구경하면서 '쾌락'을 느끼기도 하지만, 후에 사진들을 다시 정리하거나 관련 페이지를 적으면서,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사실들도 많은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의 '미국 미술 이야기' 블로그 프로젝트를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깨닫게 되는 것들이 페이지가 쌓일수록 늘어가니까요.

 

 

 

 

 

관련 페이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118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http://americanart.textcube.com/137

 

 

참고문헌:

 

1. Frances K. Pohl (2008),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Thames & Hudson; New York, NY

2. Suzanne Bailey (2001), Essential History of American Art, Parragon Publishing, Bath BA, UK

3. William G. Scheller (2008), America: A History in Art, The American journey told by painters, sculptors, photographers, and architects. Black Dog & Leventhal Publishers; New York, NY.

4. Marcha N. Hagood & Jefferson C. Harrison (2005) American Art at the Chrysler Museum: Selected paintings, sculpture, and drawings. Chrysler Museum of Art: Norfolk, VA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5. 09:45

http://www.claremontmckenna.edu/hist/jpetropoulos/arrow/holocaust/Franklin_Roosevelt.jpg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1882-1945)은 1932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래로, 죽을때까지 (1932-1945) 미국대통령직을 유지했다. 그는 미국에서 유일무이하게 4선 까지 이른 사람이며, 미국 대통령들중에서 3선 이상을 한 유일한 사람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이후로 대통령을 2선까지만 가능하게 하는 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미국이 어떤 지도자의 '독재'의 가능성에 눈을 뜨고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고안해낸 방법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2년도 넘는 기간동안 미국을 통치하였는데, 경제 대공황때 그가 취한 경제정책 (소위 뉴 딜 정책으로 알려져 있음)이 널리 알려져 있다. 세세한 내용까지는 차치하고라도, 그가  여러가지 국책사업을 펼치가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정책을 펼쳐서 경제난을 이겨내려 했다는 것은 중고등 학교 사회책이나 세계사책에도 소개되는 내용이다 (나는 중학교때 이런 내용을 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에서는 Social Security (사회복지) 제도가 있는데 이 사회복지법 (social security act)을 최종 승인하고 시행한 대통령이 바로 이 루즈벨트 대통령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기초생계를 보장하는 '사회복지'의 초석이 마련되었다고 한다면,  '의료복지'의 초석을 만들고자 하는 이가 현재의 '오바마' 대통령이다. (그가 미국 역사상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려고 하는 것인지...) 

 

 

 

바로 이러한 '국책사업,' '국가 주도의 경제정책,'  사회복지 정책등을 이유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을 '사회주의자'라 평하는 이들도 있다.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군에 속하는 '최장기 대통령직'을 수행한 대통령이 '사회주의자'라고?  우리는 이런 의문을 품을수도 있다.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대략 간단하게는 사회 통치 시스템의 측면에서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사회주의'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다수가 동등한 권리를 누리면서 동등하게 통치하는 시스템이 '민주주의'라면,  소수의 '통치집단'이 사회 운영을 관장하고 계획을 세우고 시민들에게 각자의 역할을 분담시키는것이 '사회주의'적 통치체제라 할수 있다.  경제 구조적으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서로 상반된 방식으로 굴러가는데, 대개 민주주의적 방식과 자본주의 체제가 서로 궁합이 맞아보이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체제가 상통해보이므로 우리가 흔히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뒤섞어서 인지하기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우는 '대통령제'를 탄생시킨 미국, 자유 경제와 자본주의의 꽃으로 알려진 미국땅에서 미국을 부흥시킨 존재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거론되고, 하필 그의 정책과 관련하여 그를 '사회주의자라 부른다니 이것은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사회주의는 이것이고 민주주의는 저것이다 라던가, 자본주의는 이것이고 공산주의는 저것이다라는 양분법식 생각에서 한걸음 물러설 필요가 있어 보인다.  루즈벨트는 국가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노력했고,  사회주의적 방식이라  일컬어진 뉴딜정책은 소기의 효과를 발휘했으며, 뉴딜정책의 발판 위에서 미국은 다시 '민주주의'와 '자유경제' '자본주의'의 꽃을 활짝 피울수 있었던 것이니...

 

 

 

http://americanart.textcube.com/65

스미소니안 국립 초상화 박물관에 걸린 벤샨의 루즈벨트 대통령 초상화

 

 

 

(미국미술 공부하다 잠시 생각) 2009년 12월 4일 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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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