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Column2012. 1. 4. 17:13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31639

2012년이 활짝 열렸다. 올 한해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정치적으로 역동적인 나날이 이어질 것이다. 미국은 11월6일 치러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요즈음 공화당의 후보 경선이 한창 진행 중이다. 한국에서는 4월11일 국회의원 선거, 12월19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인 이합집산이 진행되고 있다.
 
2012년 한국의 선거가 특히 재외 국민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제 해외에 살고 있는 한국 국적의 국민들에게도 참정권을 행사 할 기회가 열렸다는 것이다. 재외 국민에게 본래 선거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정권 시절에 재외국민의 투표권을 폐지한 이래, 40년 만에 어렵게 되찾은 국민의 권리인 것이다.
 
한국을 떠나기 전, 나는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권리이기도 하고 동시에 의무이기도 한 선거권을 포기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간접적으로 체육관에서 치러졌던 기묘한 대통령 선출 방식을 경험하며 성장 했던 내게, 대통령 직접 선거를 하거나 내 손으로 시장을 뽑는다는 것이 기적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내가 표를 던진 후보가 당선되면 기뻤고, 내가 표를 주지 않은 후보가 선출되었을 때는 아쉬웠다. 하지만 나는 직접 선거 방식의 민주주의를 사랑했다. 그래서 내게 투표는 기쁜 의무와 권리였다.
 
그런데 한국 땅을 떠난 이래로 십 년 가까이 여전히 한국인으로 살면서 나는 투표권을 누릴 수 없었고, 이는 매우 서운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마침내 2012년 ‘재외국민’ 혹은 ‘부재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목소리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다.
 
그래서 얼마 전 DC의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린 위안부 문제 시위에 참석하러 가던 날, 주미 한국 대사관 총영사관에 들러서 재외국민 선거인 등록을 하였다. 총영사관에 들어서면 재외국민 등록을 위한 장소가 마련되어 있고, 담당자가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안내에 따라서 본인이 신청서 양식을 작성하고, 해외 체류자는 여권 원본과 사본을, 영주권자인 경우에는 여권 원본과 사본, 그리고 그린 카드 원본과 사본을 제출한다. 원본은 그 자리에서 돌려 받고, 사본은 신청양식에 첨부된다.
 
선거인 등록을 하고 돌아와 생각해보니 대학에 다니는 작은 아들놈이 만 19세를 넘겼다. 한국에서는 만 19세 이상이면 참정권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작은 놈도 선거인 등록을 해야 한다. 나는 녀석이 방학을 맞아 집에 오기를 기다렸다. 이제 녀석을 데리고 총영사관에 가서 등록을 할 차례다. 초등학생 시절에 미국에 와서 십 년 가까이 살아온 녀석은 한국의 정치에 대해서 잘 모른다. 나는 한국의 정치 현안과 관련된 한국 서적 몇 권을 녀석에게 던져 주었다. 한국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국민된 입장에서 제대로 투표를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요즘 한국의 서점가에서 신들린 듯 팔려나가고 있다는 책 ‘닥치고 정치’에서 저자인 김어준의 주장은 과격한 제목과는 달리 매우 평범하고 온순해 보인다. 정치란 것이 거창한 것이 아니고, 시민 각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아주 작은 권리 혹은 의무인 ‘선거권’을 휴지 조각처럼 방치하지 말라는 것이다. 국민이 ‘투표’라는 아주 작은 행위로 제 목소리를 내면 목소리 낸 것만큼 존중 받고, 그만큼 민주주의는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아주 간단한 원리를 그는 호소하고 있는 듯 해 보였다.
 
참고로 선거의 역사를 살펴보면, 초기에 선거권을 가진 이들은 유산계급, 남자들 중심이었다. 미국에서 여성이 참정권을 가진 것은 1920년에야 가능했다. 스위스에서는 1971년에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다. 대한민국은 1948년 건국과 함께 남녀 공히 참정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참정권이 간단히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은 아닌 것이다.
 
2012년 40년 만에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해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선거를 할 기회가 주어졌다. 간단히 주어진 기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설령 번거롭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권리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내일은 아들의 손을 잡고 총영사관에 가리라. 아직 늦지 않았다. 등록은 2월11일까지 가능하다.


2012, 1,  4 ㅇㅇㅁ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2. 28. 19:50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26668

연말 연초에 가족과 함께 즐겁게 볼만한 영화로 마틴 스콜세지 (Martin Scorsese)감독이 야심 차게 메가폰을 잡은 3차원 입체영화 ‘휴고(Hugo)’를 권할 만 하다. 배경은 1930년대, 전쟁 이후의 프랑스 파리. 고아 소년 휴고는 기차역의 시계탑에서 산다.

소년이 하는 일은 거대한 시계 내부를 관리하는 것. 그는 조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에 기름칠을 하고 시계바늘이 정확히 돌아가도록 돌본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아버지의 유물인 망가진 태엽 로봇을 고치는데 보낸다. 그는 이 로봇을 애초에 누가 디자인했으며 어떤 기능이 있는지 모르는 채, 이것을 수리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달랬으리라.
 
이 영화의 제작자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영화배우 조니 뎁 (Johnny Depp)이다. 이들 두 사람의 작품들을 익히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이것이 ‘영화에 미친 사나이들’이 합심하여 탄생시킨 작품임을 한눈에 알게 된다. 제작자들의 이름이 자막에 흐를 때,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영화 판의 대단한 감독과 골수 영화배우가 작심하고 영화에 헌정하는 진짜배기 작품 하나를 만들어 냈구나!”
 
이 영화는 어찌 보면 영화에 대한 영화이다. 뤼미에르 형제 시절의 원시 형태의 영화들이, 그리고 그 제작 현장들이 다큐멘터리처럼 화면을 누비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잃어버린 환상에 대한 이야기 이기도 하다.

주인공 소년 ‘휴고’가 고아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부유하는 쓸쓸한 인생들이다. 과거의 영광과 꿈을 접고 서서히 사그라져가는 노인, 부모가 누구인지 몰라서 자신의 정체를 잘 알 수 없다는 소녀, 전쟁에서 다리를 다친 경관, 전쟁에서 오라비를 잃은 꽃집 여주인, 개가 으르렁거려서 도무지 연애를 할 수 없는 여자와 남자. 이들 모두 어딘가 다치고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삶의 불꽃을 다시 지피는 방법으로는 자신의 가치를 알아 주는 사람과의 만남, 나의 소명이 무엇인가 탐구하는 열정, 사랑에게 다가가는 용기와 지혜, 이러한 것들이리라.
 
이 영화는 또한, 삶을 살아가는 소명 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기도 한다. 거대한 시계탑의 톱니바퀴에 기름을 치던 소년 휴고 가 중얼거린다. “기계에는 쓸모 없는 부분이 한군데도 없어. 모두 꼭 필요한 부품들이야. 만약에 이 세상이 어떤 위대한 목적을 가진 기계와 같다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나 역시 어떤 목적이 있어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일거야. 나는 나의 사명을 완수하고 싶어….” 꼬마 고아 소년 휴고가 생각에 잠겨서 이런 독백을 할 때, 객석의 나 역시 ‘나의 소명은 무엇일까? 나를 이 세상에 보낸 설계자가 있다면, 그 설계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기왕이면 그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완성해 나간다면 좋을 것도 같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지난 세월 동안 우리에게 선사한 것은 성인 등급의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휴고’는 온 가족이 모두 손을 잡고 가서 각자의 입장에서 볼 만한 가족영화라고 할만하다. 꿈과 환상을 제시하지만, 솜사탕같이 한없이 가볍고 달콤하지만은 않다. 제법 무게 감이 있고 진지하다. 또한 2006년에 소개된 영화 ‘보랏(Borat)’의 주인공을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보랏 역의 배우, 코언(Cohen)의 등장에 연신 웃음을 터뜨리게 될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흐를 때, 관객은 자신의 삶에 지쳐서 잃어버리고 만 열정과 꿈이 뭐였는지 돌아보게 될지도 모르고, 그 꿈을 향해 다시 나아가도 늦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2011년 한해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지난 일년을 돌아보고, 새해에 대한 설계를 해 보는 시기이기도 하다. 새해에는 많이 웃고, 그리고 내가 힘들다고 포기했던, 일상에 지쳐서 외면했던 나의 소망들에 대하여 돌아보고 다시 도전해보는 그런 시간을 살아보고 싶다. 분명 나에게도 이 세상에 내가 태어난 어떤 위대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어보는 것이다.

2011년 12월 28일, 수. 이은미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2. 21. 17:55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22490

매년 12월에 시사 주간이 타임 (Time)지는 ‘올해의 인물’을 선정하여 기사화하는 전통이 있다. 올해 12월 26일자 타임의 주인공은 ‘시위자들 (The Protester)’로 선정되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방송이나 신문에서 ‘다사다난했던’이란 표현으로 한 해를 정리하는데, 올 한해도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한국에서는 ‘무료 점심’ 투표에 이어진 ‘서울시장’ 선거로 올해 하반기가 거침없이 흘러주었고, 미국에서는 ‘월스트리트 점령’을 필두로 한 점령운동이 이어졌으며 현재 진행 중이다.

며칠 전에는 30년 넘게 북한을 통치한 최고 통치자의 사망 소식이 있었고, 그 지역에서는 3대에 걸친 세습이 이어질 모양이다. 일본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기도 하다.
 
이 많은 일 들 중에서 전세계적으로 발생하여 바이러스처럼 번져 간 한가지 현상을 타임지는 주목했다. 2011년은 전 세계의 압제 받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서 서로 생각이 통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뭉쳐서 독재자들을 몰아내거나, 진정한 민주주의의 발판을 만들기 위해서 연대했던 시간으로 기억되게 될 것이다.
 
그 발단은 튀니지에서 점화되었다고 타임은 설명한다. ‘모하메드 보와지지’라는 스물 여섯살의 청년은 튀니지의 작은 마을에서 길거리 행상으로 가족과 연명을 하며 살고 있었다. 1년 전 12월 중순, 길거리 단속에 나선 경관이 그의 저울을 빼앗고 그를 때린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단단히 화가 난 그는 관청에 찾아가 호소를 해보지만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는 몸에 인화물을 뿌리고 분신한다. 이 청년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청년은 1월4일에 운명했고, 그로 인한 튀니지의 시민 시위는 정점에 다다랐다. 그리고 튀니지의 대통령은 사우디 아라비아로 망명을 해야만 했다. 시민의 승리였다.
 
이집트에서도 칼레드 사이드라는 28세의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경찰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저항하여 일어난 시민들은 히잡을 쓴 여성들, 기독교인들, 무슬림들, 각계 각층의 빈부를 초월한 사람들이었다. 3주간 45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이는 14세 이상 이집트 전체 인구의 8%에 이른다는 통계이다. 시민들의 시위가 이어지는 동안 무바라크 대통령의 군사조직 조차 시위대에 총을 겨누지 않았다. 독재자의 실각이 이어졌다.
 
요르단, 바레인, 모로코, 알제리아, 시리아, 리비아에서 독재자들에 대항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스페인, 그리스, 이스라엘, 영국에서도 사회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마침내 7월에는 뉴욕의 경제 중심가에서 "Occupy WallStreet" 운동이 발화되기에 이른다. 이 운동은 아직도 겨울의 추위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타임지는 이 모든 시민의 저항 운동 속에서 인터넷이나, 페이스북, 트위터와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의 기능을 재조명 했다. 이전까지 인터넷은 사람들이 그저 개별적으로 음악을 찾아 듣고, 재미있는 동영상을 찾아 보고,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차단해버리는 도구로 사용했다면, SNS의 등장 이후, 사람들이 자신과 생각이 통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연대하고, 광장에 모여서 행동하도록 보조하는 도구적 역할을 해 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인터넷이 사람들을 골방으로 이끌었다면, 오늘날 SNS가 사람들을 광장에 모이게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이 세계의 민주화에 가장 기여한 것으로 미국이 개발해 낸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도구들일지도 모른다는 자평을 하고 있다.
 
사실 ‘개신교’에 해당하는 영어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인데 이는 구교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저항자들’, ‘시위자들’, 구시대의 가치나 이념에 의문부호를 달고 의견 개진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인류사는 발전을 거듭해왔다. 저항이나 시위라는 말에 어떤 ‘저항’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저항이나 시위 역시 역사 발전의 동력이며 과정임을 돌아보는 안목도 필요하리라.

2011,12,21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2. 15. 05:00

        오늘은 수요일이다. 그리고 1992 1월부터 20여 년 간 매주 수요일이면 모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미 10년 전부터 이 모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집회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고, 매주 그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오늘이 이들의 천 번째 모임의 날이다. 본래, 서울의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작되어 진행된 이모임의 천 번째를 기념하기 위하여, 워싱턴 DC에서도 일본 대사관 앞에서 사람들이 모인다. 오늘 정오, 1000차 일본 종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세계 연대 시위 수요 집회가 열리는 것이다.

        2차 대전 중 일본에 의해 종군 위안부로 끌려 갔던 여성은 대략 20만 명으로 추산이 된다고 한다. 국적도 다양하여, 한국, 일본, 중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다양한데, , , 일 출신의 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했으며 그 중 한국여성이 52퍼센트, 중국여성 36 퍼센트, 일본 여성 12 퍼센트 정도 된다는 자료도 있다.  과반수가 한국에서 끌려간 소녀들 이었다는 것이다.

 
      
종군 위안부를 영어로는 ‘Comfort Women’이라고 쓰기도 하고, 좀더 정확하게는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일본군 성 노예)’라고 표기 하기도 한다. 나로서는 성 노예라는 표현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Comfort Women’이 위안부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자리를 잡은 것도 같다.

  
     
자료를 찾아보면 태평양 전쟁 말기에 12세 이상의 소녀들과 여성들을 정신대명목으로 데려다가 공장에서 일을 시키거나 위안부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1935년생인 나의 어머니도 소학교 (초등학교) 꼬마였을 때의 일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일본 순사가 처녀들을 잡아간다는 소문이 돌아서 집안의 여자들을 감추거나 얼굴에 숯검정을 칠하기도 했다고 한다.

 
      
미국의 한국계 소설가 노라 옥자 켈러 (Nora Okja Keller) 1997년에 발표한 소설 ‘Comfort Woman (위안부)’은 우리들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 세대에서 겪었던 조선인 위안부들의 처절했던 삶을 스케치 하고 있다. 취직을 하는 줄 알고 따라 나섰던 소녀는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어 먼 나라로 떠돌며 짐승 같은 대우를 받는다.

 
      
소설에 그려진 일화 중에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병들어 죽어가는 조선인 위안부를 일본인 병사들이 막대기로 입을 통과시켜 하체까지 꿰어서 마치 사냥한 짐승을 잡아 옮기듯 내다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생지옥을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 전쟁 이후의 삶 역시 편안하지 않았다. 그들은 존중 받지 못했고, 보상 받지 못했고, 위로 받지 못했다.

  
     
이러한, 역사의 오점을 바로 잡기 위한 작은 몸짓이, 바로 그 20년간 지속 되어온 수요일의 집회이다. 이들이 일본 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일본이 역사적으로 저지른 반 인간적 범죄를 시인하고, 진상을 낱낱이 밝히고, 사과 하고, 관련자를 처벌하고, 피해자에게 보상하고, 일본 역사 교과서에 이 일을 사실대로 정리하여 재발을 방지 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진정으로 참회하라는 것이다.

 
      
현재 당시의 참상을 증언 해 줄 생존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도 않다. 지난 20년간 많은 분들이 위안부라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안은 채 한 많은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 사이에 일본 정부는 이들의 시위와 요구에 대하여모르쇠로 일관 하고 있다. 희생자들이 모두 사라지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집회, 20년간 매 주 진행된 질기디 질긴 집회,‘일본 종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 집회는 사실 너무 오랫동안 진행되어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집회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제 그 1000회를 맞이하여, 워싱턴 DC에서도 이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인다. 날씨가 추운들 어떤가? 위안부 할머니들은 노구를 이끌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본 대사관 앞에 서지 않았는가?  오늘, 나도 피켓 하나를 들고 그 자리에 서리라. 우리들이 힘을 모아, 이제 그만 이 슬픈 집회가 끝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011, 12, 14, 수 이은미




간 길에 영사관에 들러서 재외국민 투표 등록도 했다. 몸은 미국에 있지만, 나도 대한민국 국민이니까, 투표 해야 하는거다.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의무이며 권리이다.


워싱턴 일본 대사관 앞에서 당일 정오에 시작된 집회



정각에 맞춰서 도착했는데, 이미 단체 버스로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에서 오신 한인 단체 어르신들이 집결해 계셨고, 주로 어르신들이 많으시다보니, 내가 이나이에 '꽃띠'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젊은 축이라서, 기록 사진사들이 나를 세워놓고 사진을 많이 찍었다 (나에게 사진이 배달이 되지는 않겠지만, 기꺼이 모델이 되어 드렸다.) 젊은 친구들은 다들 생업이 바빠서 오기가 힘들었을거라고 추측한다.

마침, 영상 카메라를 세워놓고 열심히 취재를 하는 젊은기자가 있었는데, 이 친구가 '자랑스러운 나의 제자'이다.  대학원 코스 아직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지역 방송국에 취직하여 열심히 기자와 피디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다. (테레비에도 나온다는데, 내가 테레비를 안보는 관계로 녀석을 테레비로 본적은 없고, 취재 현장에서 활동하는 것을 발견하고, 내 자식을 만난듯 반갑고 자랑스러웠다.)






참여자가 대개 한인들이었지만, 간혹, 한인이 아닌 분들도 보였다.  왼편에 '나꼼수' 후드티를 입은 분이 보인다. 나꼼수 후드티 입은 분을 여럿 발견했다.


굳게 닫힌채 미동도 않는 일본 대사관 문.  앞에 계시는 어르신은, 내가 자문해드리는 영어프로그램 담당 선생님이신데, 이자리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 프로그램에 계시는 선생님들이 모두 나오셨다고 한다.



보상하라, 사과하라, 역사에 기록하라 이런 구호들을 외치고, 애국가, 아리랑, 울밑에선 봉선화 노래도 함께 부르고, 이 조직의 대표자가 대표로 일본 대사관에 들어가서 요구문을 전달하는 것으로 이 모임은 파했다.  너무나도 대견하고, 기특하고, 자랑스러운 내 제자와 한장 찍었다. "얘가 제 제잡니다!"하고 자랑을 꽤나 했다.   이 친구가 곱상해도, 태권도가 4단이라 태권도 사범도 하고, 학보사 출신이고, 내 제자이기도 하니 팔방미인이라서 개국하는 지역 방송에서 두말 않고 좋은 조건으로 채용을 해줬다. (성격도 좋아서, 어디에 가나 성실하게 일하고 사랑을 많이 받을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2. 8. 00:44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13380
1970년대 초반, 매섭게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의 겨울 밤이었다. 서울 변두리의 단칸 셋방에서는 네 명의 아이들이 이리저리 포개진 채 잠이 들어있었다.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한 아낙은 숨겨뒀던 꾸러미를 꺼냈다.

꾸러미에서 나온 것은 아동용 초록색 벙어리 장갑 한 켤레. 짝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줄로 연결되어 목에 걸고 다닐 수 있게 만들어진 그 벙어리 장갑을 그이는 낮에 월곡천 건너 시장에서 샀다. 막내둥이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큰 아이들에게도 장갑은 없었다. 하지만 네 명의 아이에게 장갑을 사 줄 형편이 못되었던 아낙은 다섯살박이 막내의 장갑 한 켤레를 샀다. 그래도 내일이 ‘크리스마스’니까. 그리고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돌아다닌다고 하니까. 아낙은 막내 아이에게만이라도 산타 할아버지를 선물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낙이 장갑을 들여다 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일곱 살짜리 셋째가 잠이 깨어 두리번거렸다. “엄마, 그게 뭐야?” 아낙은 얼른 자신의 집게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고 속삭였다. “쉿, 막내가 깨면 안돼! 이것은 막내에게 주는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이야.”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셋째가 물었다. “엄마, 산타 할아버지가 누군데?”
 
아낙은 빙긋 웃으며 설명을 해줬다. “있어, 그런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선물을 준대. 세상에 그런 할아버지가 어디 있겠니. 다 만들어낸 얘기지. 하지만, 우리 막내가 산타 할아버지한테서 선물을 받으면 얼마나 좋아하겠니. 그러니까, 너는 모른 척 해야 해, 알았지?”
 
그날 밤 나는 이 세상에 ‘산타 할아버지’라는 경이로운 존재가 있다는 것과 그것이 ‘순거짓부렁’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한꺼번에 알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 막내둥이가 머리맡에 놓여진 초록색 장갑과 ‘산타 할아버지’의 존재감에 놀라워할 때 나는 막내의 포근한 장갑을 쳐다보며 혼자 애늙은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산타 할아버지 따위…’ 나에게도 달콤한 솜사탕 같은 ‘환상’은 필요했는데, 그것은 내게는 허용되지 않는 사치였을 것이다.
 
최근 시카고의 폭스 뉴스에서 한 여성 앵커가 “산타 클로스는 없다”고 말했다가, 사람들로부터 항의를 받고 사과방송까지 하는 일이 벌어졌다. 온가족이 다 함께 보는 뉴스 시간에 부주의한 발언을 하여 어린이들의 마음 상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사과였다. 글쎄, 산타 할아버지가 없으니까 없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과를 할 정도의 발언이었을까? 하지만 사회적인 분위기나 정서는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12월이 되면 미국의 쇼핑몰이나 공공장소에서 산타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쇼핑몰의 한 구석에서 아이들이 산타 할아버지의 무릎에 안겨서 그와 사진을 찍고 그에게 어떤 선물을 갖고 싶은지 소원을 빌기도 하고 그런다. 사진사도 있어서 그 자리에서 기념 사진을 찍기도 한다. 이곳을 지나칠 때면 성인인 나도 산타 할아버지한테 가서 소원을 빌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설령 산타 할아버지가 없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 영국에서는 산타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을 때의 주의사항을 각급학교에 배포를 했다고 한다. 가급적이면 산타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지 말 것이며 혹시 앉더라도 무릎 끝 쪽에 걸치기만 하라는 것이다. 어린이 성추행 방지를 위한 대책처럼 보인다. 이쯤 되면 산타 할아버지 품에 한번 안겨 보고 싶다는 나의 망상은 접어야 할 것도 같다.
 
산타 할아버지가 있거나 없거나, 매년 12월에 크리스마스는 온다. 1년 중 가장 추운 때, 그래서 인정의 불꽃이 가장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구세군의 종이 울리고 교회나 각종 사회단체에서 도시 인근의 가난한 청소년,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모으고 있다. 나는 워싱턴 DC 빈민가의 어린이들을 위한 선물을 마련하는 것으로 12월을 시작했다. 산타 할아버지가 그 선물을 잘 전달해주길 바라면서.

산타 할아버지가 있거나 없거나, 인정과 나눔은 우리 삶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어 줄 것을 믿는다.

2011,12,07, 수, 이은미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2. 1. 03:55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08921


올 가을에 나는 ‘백마일 걷기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는데, 띄엄띄엄 날을 잡아 20마일, 10마일, 15마일, 이런 식으로 계획을 성취할 수 있었다. 물론 매일 개를 끌고 산책을 하거나, 10마일 미만으로 걸은 거리는 계산에서 제외했다. 20마일이면 대략 32킬로미터를 상회하는 거리이다.

이전에 내가 하루 동안 걸은 최장 거리는 50킬로미터이다. 그날 열 시간이 넘도록 걸었는데, 동행 없이 혼자서 하루에 걷기에는 쉬운 거리가 아니라서 나 혼자 걷는 것은 하루 20마일로 잡고 걷고 있다. 혼자 나가서 20마일을 걸으려면 대략 여덟 시간은 잡아야 한다. 처음엔 빨린 걷지만 후반에 속도가 떨어지고, 중간에 휴식도 취해줘야 한다.
 
나의 걷기는 주로 포토맥 강변의 수로길(Chesapeake & Ohio Canal Road)에서 이뤄진다. 나는 이 수로의 시작점에서 68마일까지 두 발로 통과한 기록을 갖고 있다. 나의 소망이라면 워싱턴DC에서 오하이오까지 이르는 184마일 구간 전부를 내 두 발로 밟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하루에 20마일씩 걸으면 9일 혹은 10일 줄곧 걸으면 되겠다는 계산이 나오지만, 20마일마다 숙소가 나와 주는 것도 아니라서, 나 혼자 해내기에는 여러 가지로 무리다. 그래도 나는 언젠가 이 구간 전체를 걸어보리라는 꿈을 간직하고 있다.
 
지난 한 달 간 나는 새벽에 일어나서 내가 갖고 있는 영문 바이블을 베껴 적는 일을 해왔다. 새벽 네 시에 자명종 시계가 울리면 일어나서 간단히 씻고, 뜨거운 차 한 잔을 준비하고, 책상 앞에 붙어앉아 공책에 문장 하나 하나를 정확히 옮겨적었다. 물론 문장을 옮겨적기 위해서는 소리내어 읽어서 내용을 머리에 담은 후에, 그것을 펜으로 종이에 옮겨야 한다. 대략 한 시간 정도 그렇게 소리 내어 글을 읽고 공책에 베껴 적기를 하다 보면 하루에 한 챕터 정도를 적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28장이 되는 마태복음 베껴쓰기를 마치고, 요즘은 마가 복음을 베껴쓰는 중이다. 처음에는 문장 단위로 베껴적는 일이 시간이 많이 걸리더니, 요즘은 문장 전체를 한번에 읽고 옮겨 적는 일이 아주 수월해졌다. 비슷한 어휘와 비슷한 형식의 문장이 리듬감 있게 반복되므로 일단 문장과 내용에 익숙해지니 속도가 붙게 된 것이다. 그러다 뭔가 생각의 불꽃이 피어오르면, 멀리 장미 빛으로 동이 트는 창 밖을 내다보며 나의 생명과 구원의 문제 등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수 년 전 내가 미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첫 해에는 논리정연한 학자의 저널 몇 편을 골라서 수 차례 베껴적기를 한 적도 있다. 내가 한국에서 훈련받은 글쓰기 방법과 미국 대학원의 학문적 글쓰기 방법에는 차이가 있으므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미국 학자의 아주 깔끔한 저널을 직접 베껴적으면서 미국식 글쓰기 방법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려고 했었다. 이제 나는 내 삶에 집중하고 있고 같은 방법으로 바이블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새벽에 성경 베껴쓰기로 하루를 시작하고 시간날 때면 강변으로 나가서 지치도록 걷다가 돌아오는 것이 내 생활의 활력소인 셈인데 어쩌면 글 옮겨쓰기와 걷기에는 일맥 상통하는 원리가 있다. 비행기나 자동차로 여행을 하는 사람은 땅 위의 아주 세밀하고 은밀한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오직 걷는 사람 눈에 들어오는 세상이 있다. 글을 베껴적는 것 역시 속독이나 정독과는 다른 것이다. 글을 읽고 머릿속에 담아서 공책에 내 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글의 ‘체화(體化)’가 일어난다. ‘몸’으로 사색을 하는 경지가 되는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온 몸으로 길 위에 내 생명을 쓰는 것이고, 쓴다는 것은 온 몸으로 글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디지털의 속도로 이뤄지는 놀라운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느리게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일과 한 글자 한 글자 쓰는 일을 통해서, 나는 속도가 줄 수 없는 심연으로 깊이 들어선다. 나는 걷고, 나는 쓰고, 나는 웃는다.

2011, 11, 30 (수)






오늘 아침에, 마가 복음 쓰기 마쳤다.  누가복음 쓰기 시작했다.  지난주 수요일에 시작했으니까, 마가복음은 일주일 걸렸다. 누가 복음은 꽤 내용이 많으니까 일주일에 마치기는 힘들것 같고,  하여튼 박선생께서 집에 오시기 전에는 누가복음까지 마치고, 함께 복된 크리스마스를 보내야지.  음...새벽에 앉아서 쓰기 시작하면 두시간이 금방 흘러간다. (두시간 쓰고도, 재미있어서 더 쓰고 싶지만 스스로 자제하고 다른 일을 한다.)  재미있는 놀이걸이를 찾은것 같애 아무래도... (나 원래 어려서부터 책 종류 베껴쓰는게 유희였다...책은 읽어도 재밌고, 베껴써도 재밌고, 심지에 베게로 써도 좋고...)

그냥 다른 생각 안하고, 골똘히 베껴적는 그 과정이 참 좋다. 이거 하다보면 사람이 말이 없어지고, 고요해지고, 태평해지고, 대체로 평화로워진다. 함박눈이 내 영혼에 내려 쌓이듯이 그렇게 고요하고 풍성해지는 기분. 세상 근심을 잠시 잊는다.

* 아, 서점에서 성경베껴적기용 공책을 판매를 한다. 그래서 그것 한권 구해서 쓰는데, 종이 질이 좋아서 양면으로 써도 잉크가 번지지 않고 편리하다. 세부사항 기록하기도 편리하다.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1. 23. 20:52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04740

내가 태어나 성장한 용인의 고향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의 일이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 마을 사람들은 저녁이면 남포나 호롱에 불을 밝혔고, 불을 때서 밥을 짓고, 쇠죽을 끓이며 살았다. 이곳이 집성촌이었으므로, 마을 사람 대개가 일가붙이였고,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내게 ‘시누님, 우리 아기씨’라는 호칭을 쓰기도 했다.
 
우리 바로 윗집에는 우리 할머니와 비슷한 시기에 이 마을에 시집와서 평생 자매처럼 지낸 할머니가 살았다. ‘응굴’에서 시집와서 ‘응굴댁’인 그 할머니는 어쩌다 댁에서 미역국을 끓이는 날이면, 새벽이거나 저녁이거나, ‘언제나’ 미역국 한 그릇을 두 손으로 감싸안고 우리 집 안채로 달려와서 할머니를 찾았다. “정렬이 할무니, 오늘 우리 막내 생일이라 고기 좀 넣고 미역국을 끓였어유. 이것 맛이나 보시라고.” 할머니가 어느 날 그 미역국의 사연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어느 해, 만삭으로 돌아다니던 응굴댁이 며칠 보이지 않아 올라가 들여다보니, 며칠 굶은 산모는 혼자 애를 낳아 제 손으로 탯줄을 끊어 애를 안고 누워있는데, 먹을 것이 없어 다 죽어가는 얼굴이라. 내가 얼른 미역 한 꼬리를 갖다가 국을 끓이고, 쌀을 퍼다 쌀밥을 지어 뜨거운 국물에 먹이니 산모가 그제서야 살아나더라. 그 후로는 저이가 수 십 년을 미역국만 끓이면 이렇게 한 그릇 떠갖고 내려온다.” 지금은 내 할머니도, 응굴댁 할머니도 모두 고인이 되셨지만, 두 분은 천국에서도 서로 오가며 미역국을 나누실 것이다.

 1984년 겨울, 휴가를 나온 박 상병은 이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나 가난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충치로 고생이었지만, 변변한 치과 치료를 받아본 적도 없었다. 부대에서도 고통을 호소하면 진통제나 처방해 주는 정도였다. 너무나 괴로웠던 박상병은, 집 근처, 어느 치과에 들어섰다. 그는 무작정 충치 치료를 부탁하며, 자신에게는 돈이 한 푼도 없다고 설명했다.

휴가 며칠간 그는 치과에 드나들며 오랫동안 그를 괴롭히던 충치 치료를 받았다. 휴가가 끝나갈 무렵 서둘러 치료를 마친 치과의사가 박상병에게 말했다. “건강하게 잘 지내게. 내게 치료비 갚을 생각은 하지 말고, 나중에 어려운 사람 보이거든 도와주게.” 지금은 중년이 된 그 사람은, 가끔 그 치과 의사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이 글썽해진다. 이따금 듣는 똑같은 이야기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도 모두 운다. 박 상병이었던 그 사람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못 지나치는 나의 큰 시동생이다.
 
6년 전, 플로리다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이었다. 개미에게 발가락을 물렸는데, 물린지 30분도 안되어 얼굴과 몸이 붓고, 현기증이 나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가 갑자기 죽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놀란 나의 아이들이 한달음에 달려간 곳은, 마을에 살고 있었던 어느 한국인 아저씨 댁이었다. 아이들은 무작정 그 댁 문을 두드리고 “우리 엄마가 죽어요!” 하고 알렸고, 아이들의 설명을 들은 그는 한달음에 우리 집으로 왔다. 그의 손에 알러지 치료제가 한 뭉치 들려 있었다.

그는 약 한 움큼을 내게 먹이고, 급성 알러지 현상으로 보이니 이 약을 먹고 차도가 보이면 계속 약을 먹고, 차도가 보이지 않으면 응급차를 부르겠다고 했다. 그는 개미 독으로 죽은 사람도 보았다고 했다. 그는 처치 약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한참을 기다려 내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내 생명을 살렸고 졸지에 고아가 될뻔한 내 아이들과 가족을 살렸다. 그분은 자신이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을 지금 기억할까?

 내일은 ‘땡스기빙 데이 (Thanksgiving Day)’. 우리 주위에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 내가 오늘 온전히 살아 있음은, 이 세상 사람들의 사랑과 베풂이 있어 가능한 것이리라.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내가 잊고 지내던 고마우신 분들께, 예쁜 꽃 카드라도 정성껏 만들어 부쳐드리리라 하고 다짐을 해본다.


2011,11,23 (수) 이은미



****

그런데, 그 응굴댁 할머니와 관련된 에피소드 한가지 추가:

그 응굴댁 할머니는 평생동안 우리집을 자기집처럼 임의롭게 드나드셨는데,  웃기는 일이 뭔가하면, 우리집에서 기르는 개들이 응굴댁 할머니만 대문에 들어서면 으르렁대고 짖어댔다.  우리집 개들은 대대로 사랑채에 있는 바깥대문 앞 나뭇광이 침실이었다. 거기 짚을 쌓아주면 포근한 짚에서 지낼수 있으니까.  그런데 요놈들이 대문 앞을 지키고 살면서 응굴댁 할머니만 나타나면 사납게 으르렁댔다.  그러면 응굴댁 할머니는 개의 목줄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개를 피해서 지나곤 했다.

우리집 개들은 대대로, 서울 식구가 어쩌다가 나타나도 좋아서 퍽펄 뛰곤 했다.  그러니까 일년에 서너차례 내가 나타나도 나를 보면 좋아서 이리뛰고 저리 뛰면서 나를 핥고 난리를 떨었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나는 일년에 몇차례 나타났다 사라지는 '손님'이고, 응굴댁 할머니는 늘 그곳을 드다느는 식구같은 존재이건만.  개는 '내식구'와 '남의식구'를 정확히 구별해서 행동했다.

우리집 개들은 어떻게 그렇게 어쩌다 한번 오는 식구들을 알아서 반기고, 아웃사촌들을 '남'으로 규정을 하게 된 것일까?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1. 17. 00:22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00295

강준만씨가 최근 펴낸 ‘강남좌파: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2011)’는 한국 사회에서 ‘강남 좌파’라는 신조어가 갖는 위상과 의의를 소상하게 설명해 주며 조국,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을 그 대표적인 ‘왼편’에 그리고 소위 ‘강남 우파’라 할 만한 오세훈, 박근혜의 행보를 대별하여 스케치하고 있다. 올해 7월에 발간되어 인쇄를 거듭하고 있는 이 책이, 몇 달 후에 태어났더라면, 저자는 아마도 수 백 만원 월세를 내고서라도 셋방살이를 ‘강남’에 고집했던 박원순씨나 그를 지원했던 안철수씨를 왼편에, 강남의 고액 피부 클리닉을 드나들었던 나경원씨를 우편에 배치하지 않았을까 상상을 해보게 된다.

 강씨의 해설에 의하면 ‘강남 좌파’란 ‘고학력, 전문직, 화이트 칼라 중산층이면서 진보적 발언을 하는 이들로 기존의 좌파가 노동자 단체를 주요 지지 세력으로 하는 것과 차이가 나며, 자본주의를 비판하더라도 사회주의 이념을 고수하지 않고 복지국가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 ‘강남 좌파’가 유독 21세기의 한국 사회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라서, 다른 나라에도 명칭은 다르지만 비슷한 집단이 존재한다. 일단, 미국에는 ‘리무진 리버럴(limousine liberal)’이 있다. 리무진이나 개인 비행기를 타고 다닐 정도의 부유층이면서 진보적 발언을 하고, 환경문제에 관심을 보이되 소형차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공공교육을 주장하고 지원하면서 자신의 자녀들은 사립학교에 보낸 민주당의 테드 케네디 같은 정치지도자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사실 나는 오바마 대통령의 팬이지만, 그가 워싱턴DC에 입성하면서 그의 두 딸을 공립학교가 아닌 상류층 자녀들만 다니는 사립학교에 보냈을 때 약간 실망했었다. 워싱턴DC의 공립 교육이 열악하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대통령의 자녀가 다니기에 어려운 점이 있었겠지만, 그가 공립학교 쪽으로 결단을 내려줬다면 얼마나 멋있었을까?

 비슷한 개념으로 영국에는 ‘샴페인 사회주의자(Champagne Socialist)’가 있고, 러시아에 ‘샴페인 볼셰비키(Bollinger Bolshevik)’, 호주와 뉴질랜드에는 ‘샤도네이 사회주의자 (Chardonnay Socialist)’가 있다. 대략 빈민, 노동자 계급을 대변한다는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고급 음료 ‘샴페인’이나 ‘샤도네이 백포도주’를 즐기는 것과 같은 모순점을 지적하는 별칭이다. 독일에는 ‘토스카나 파(Toskana Fraktion)’가 있다. 여름휴가를 토스카나에서 즐기는 좌파를 지칭하는 말이다. 프랑스에는 ‘캐비아 좌파(Gauche Caviar)’가 있다. 고급 상어 알 요리를 즐기는 좌파라고 비꼬는 표현이다. 네덜란드의 ‘살롱 사회주의자(Salon Socialist)’들은 자신들이 너무나 고고한 나머지 주로 살롱에 앉아 사회주의를 논하는 데 그치고 만다는 것을 풍자한 것이고, 폴란드의 ‘커피숍 혁명가’는 사회주의를 논하긴 하지만 빈민층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중상류층 식자들을 비꼰 것이다.

 전체적으로 ‘강남 좌파’를 비롯하여, 이와 맥을 같이 하는 세계 여러 나라의 표현들은 대개는 먹고 살만한 지식인들의 좌파적인 언행과 그에 부합하지 않는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냉소적인 표현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강남 좌파’는 이제 그 개념이 초기의 부정적 이미지에서 서서히 중립적인 이미지로, 심지어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이미지로 진화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사회가 다양화되어 가고 있고,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하는 요인이 아닌 21세기에, 자본주의 체제를 살아가는 사회에서 좌파에게만 순결주의적 자기희생이나 도덕성을 묻거나 요구하는 것 역시 모순 일 수 있다는 뜻이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좌파나 우파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상황에 따라서 좌파적으로 혹은 우파적으로 판단하거나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강준만씨는 이 책에서 좌파나 우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내게 보여준다.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부지런히 자판을 두드리는 것도 내 오른손과 왼손이 아닌가?


2011,11,16 이은미


박원순씨 서울시장 취임식을 유튜브로 보면서, '아하!' 그 사람의 방법을 파악했다.  이분이 '뭐 공약이 뭐냐고 묻는데, 공약이 별건가요. 이렇게 서울 시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희망사항을 잘 꾸려나가면 되는거 아닌가요 (기억나는대로 정리)' 라는 대목이 있었다.  시장선거중 상대편이었던 나씨가 청사진을 제시하며 조목조목 따지고, 박씨한테 당신도 이런걸 제시하라고 몰아 붙일때, 박씨가 좀 어벙하게 대꾸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고 살림을 꾸려나가겠다 이거다.

가령 지도자가 큰 그림을 그리거나 제시하고 남들에게 따라오라고 제안하는 방식은 Top-down Process, 지도자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려 나가는 방식을 Bottom-up Process 라고 하는데  한쪽에서는 탑다운으로 리드를 하면서 자신의 시선을 낮추겠다고 말했고, 한 쪽에서는 큰 그림 제시 없이 밑바닥 정서부터 훑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 말하자면, Empowering Evaluation 기법이라는 것인데,  Fetterman 이라는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가 열정적으로 여러나라 지방도시에서 직접 실연을 하던 방법이기도 하다. 도시나 커뮤니티에서 뭔가 계획을 세울때, 구성원들이 모여서 가장 필요한 것을 정하고 순번을 정하고 실행 방법을 정하고...  왜 Empowering Model (Empowerment Evaluation)이라고 하는가 하면, 구성원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구성원들이 주체가 되도록 도와준다는 것이지.  박시장도 '여러분이 시장이고 제가 시민입니다'고 설명을 하는데, 바로 시민에게 힘을 실어주는 방법을 그가 서울에서 현재 실천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몇해전에 Empowerment model 을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모델을 짜면서, Fetterman 교수에게 메시지를 보냈을때, 그는 동영상으로 즉시 답신을 보내 올 정도로 그가 하는 일에 열정적이었다.  이런 일이 열정 없이는 참 하기 힘든 일이 아닌가?

이제 좌파니 우파니 하는 말은 어쩌면 걸핏하면 아무한테나  '빨갱이' 소리를 내지르는 '뭘 잘 모르는 사람'들의 언어가 될 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1. 9. 22:17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295940

http://www.imdb.com/title/tt1268799/

지난 주말 우리의 친구 ‘해롤드와 쿠마’가 크리스마스 캐롤과 함께 우리 곁에 돌아왔다. 2004년 ‘해롤드와 쿠마, 화이트 캐슬에 가다(Harold and Kumar Go to White Castle)’에 힘입어 2008년에 나온 2편, ‘해롤드와 쿠마, 관타나모를 탈옥하다 (Harold and Kumar Escape from Guantanamo Bay)’에 이어 3년 만에 이들의 크리스마스 에피소드가 나온 것이다. 특히 이 영화에는 한국계 배우인 존 조 (John Cho)가 주인공 해롤드로 나와서 한국인에게는 더욱 친밀감을 준다.
 
3편에서 ‘엄친아’인 해롤드는 성공한 비즈니스맨이 되어 있고, 쿠마는 여전히 사고를 치며 살고 있다. 그리고 또다시 소동은 시작된다. 성인물답게 포르노그라피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도처에 깔려있고, 도저히 남녀노소 온 가족이 손잡고 영화관에 가서 볼 만한 작품은 아니다.

주말의 영화관에도 주로 20대 젊은이들이 객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영화의 1편, 2편을 아직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3편은 어쩌면 그저 황당한 얘기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딱히 전작을 찾아 보지 않더라도, 3편 자체만으로 한나절 유쾌하게 웃고 지나갈 성인물로는 손색이 없어 보인다.
 
나는 사회언어학 수업이나, 문화 관련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해롤드와 쿠마’ 시리즈 1편, 2편을 보고 감상문을 작성하라는 숙제를 내주거나, 영화의 일부를 보고 함께 토론을 할 때가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인도계 미국인인 쿠마와 한국계 미국인인 해롤드이고, 영화에는 미국의 이민자 사회나 혹은 소수 문화에 대한 편견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 지뢰밭처럼 깔려 있다.
 
가령 2편에서는 해롤드와 쿠마가 관타나모 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탈옥하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이때 미국 정보국에서 해롤드의 가족과 친지를 심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계 미국인인 해롤드의 부모에게 수사관은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대화를 시도한다. 해롤드의 부모가 한국계이니 영어가 안 통할 거라고 미리 판단한 것이다. 해롤드의 아버지가 “나는 미국에서 수 십년간 살아온 미국인”이라고 유창한 영어로 설명을 해도 수사관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는 그가 ‘이상한 한국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계는 영어를 못 할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고정관념, 영어로는 스테레오타입 (stereotype)이라고 한다.
 
이들이 유태계 미국인을 심문할 때는 동전이 가득 든 주머니를 잘랑잘랑 소리나게 흔들어댄다. 유태인들은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니 돈 소리를 내면 모든 것을 자백할 거라는 생각에서다. 그 뿐만이 아니다. 공항이나 비행기 안에서 쿠마는 필요 이상으로 의심을 받는다. 그가 유색인종이고, 아랍계 사람들과 비슷한 용모라서 무조건적인 경계의 대상이 된 것이다.
 
3편에서는 쿠마가 친구와 함께 차를 타고 성공한 해롤드의 집에 도착했을 때 해롤드를 한번도 본 적이 없던 쿠마의 친구가 말을 한다. “난 네 친구 해롤드가 백인일 거라고 상상했어.” 해롤드라는 이름, 그리고 성공한 비즈니스맨을 조합하면 백인이 어울리는 것이리라. 해롤드가 결혼한 남미계 부인의 가족이 등장할 때 한 마을 사람 모두가 온듯한 장면 역시 사실은 인종적 스테레오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다문화 다민족들이 어울려 사는 미국 사회에 뿌리깊게 깔려있는 인종, 문화에 대한 소소하고도 질긴 편견들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사실 이 영화에 깔려 있는 이런 ‘편견 코드’를 얼마나 속속들이 읽어 내느냐가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관건 일수도 있겠다.
 
이태 전, 학생들에게 이 영화 속에 깔려있는 편견들을 찾아보라는 숙제를 내 준 적이 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현재 살고 있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미국인의 삶 속에 스며있는 각종 편견의 요소뿐만 아니라, 자신이 안고 있는 편견의 덩어리들을 발견하는 시간을 가졌으리라. 그런데 영화가 난잡해서 눈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는 평도 있었다. 성인물 코미디 해롤드와 쿠마, 그들이 있어 유쾌한 인생이다.

2011,11,9 이은미

아, 또 보고 싶다. 나중에 추수감사절에 찬삐 집에 오면 둘이 같이 가서 조조할인으로 또 봐야지~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1. 2. 14:00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291368
1960년대 영국. 고상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야 할 영국의 방송에서 ‘저질’ 락앤롤 (Rock and Roll) 음악이 흐르면서 청소년의 정신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위대한 영국 정부는 이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영국 영토에서의 락앤롤 방송을 금지시켜버렸다. 그러자 이 라디오 팀은 배를 타고 북해로 나갔다. 영국 영토가 아닌 바다에서 방송을 해대기 시작했다.
 
2009년 출시된 영화 ‘해적 라디오(Pirate Radio)’의 기본 플롯이다. 실화를 근거로 한 코미디 영화라고 하는데 어디까지가 실화인지는 나도 확인을 안 해 봐서 잘 모른다. 다만 이 해적 라디오 방송의 배를 침몰 시키기 위해서 정부가 공격을 감행하자 라디오를 듣던 수많은 애청자들이 작은 배들을 끌고 나타나는 장면에서는 어쩐지 눈물이 나왔다.
 
나는 용인의 농가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우리 할아버지는 집 안팎에서 일을 할 때면 늘 라디오를 곁에 두셨다. 가는귀를 먹은 할아버지가 라디오를 틀면 대문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아주 소리가 컸다. 할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란 나는 그래서 할아버지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학습했다.

매시마다 꼬박꼬박 흘러나오는 뉴스 덕분에 뜻도 모르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하여 아는 척을 하거나, 누군지도 모르는 세계 지도자나 정치 지도자의 이름에 밝았다. 돌아보건대 가족과 떨어져서 할아버지 품에서 자라던 꼬마에게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라디오는 햇살 같은 위안이었다.


 
최근에 나는 이상한 라디오를 가끔 듣는다. 디지털 미디어 파일로 올라오는 프로그램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팟캐스트 (podcast)’라고 부른다. 내가 가끔 심심풀이로 듣는 것은 ‘나는 꼼수다,' 줄여서 ‘나꼼수’라고 하는 이상한 라디오다.
 
‘나꼼수’에는 네 명의 이상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자신을 ‘총수’라고 소개하는 사람, ‘목사아들 돼지’라는 시사 평론가, 전직 국회의원이며 치명적 매력남이라고 자화자찬하는 인물도 있고, 시사 잡지의 기자도 있다. 이들과 함께 초대손님들이 나와서 뭔가 심각한 얘기를 농담처럼 떠들어댄다.
 
얼마 전에는 집권 여당의 대표라는 의원이 이 프로그램에 등장을 했다. 그는 자신이 ‘나꼼수’에 출연할 테니 황금 시간대에 인터뷰를 잡아달라고 청해서 사람들을 폭소하게 만들었다.

인터뷰 도중에도 그는 이 프로그램의 생리를 잘 이해 못하고 이 방송의 정체에 대하여 재차 물었다. 그러자 고정 출연자들이 설명을 해준다, “의원님, 이것은 방송이 아닙니다. 팟캐스트이지요. 현재 방송법의 범주 바깥에 존재합니다.” 팟캐스트를 하는데 황금 시간대라는 것은 존재 하지 않으며 아무나, 아무 때나, 어디서나 올려진 파일을 클릭하거나 다운받아서 들으면 그만이라는 것을 그 의원님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또한 현행법이 정한 방송이나 미디어 법의 규제 범위 밖에 있어서 현행법으로는 통제가 불가능 하다는 것도 출연자들의 설명으로 알게 된다.
 
며칠 전에는 어느 철학자가 출연하여 교육방송에서 자신의 프로그램이 중단되게 생겼다고 호소를 한다. 그의 소망은 그냥 본래 계획대로 철학강의를 마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해적같은 네 명의 고정 출연자들은 열심히 응원해드리겠다며 허풍을 친다. 나도 한가롭게 집안 청소를 하며 이 프로그램을 듣다가 이들과 함께 깔깔대고 만다. 그리고 파일의 정지 버튼을 누른다. 다른 할 일이 있으니 나머지는 나중에 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세상이 바뀌고 매체도 바뀌지만 우리의 삶의 양태와 고민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어릴 때 할아버지의 라디오에서 듣던 것을 이제 나는 아이팟이나 노트북 컴퓨터를 통해 듣는다. 영국에서 법으로 라디오 방송을 규제하려고 했을 때 이들이 배를 타고 나가 해적 방송을 띄웠듯, 소통에 답답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대안 매체로 이동하여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어릴 때 시간을 놓쳐버리면 방송을 들을 수 없었지만, 나는 이제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아무 때나 내가 편할 때 파일을 꺼내서 필요한 만큼 들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멋진 신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2011, 11, 2 수. 이은미


추신: 원고를 보내고 난 후, 간밤에 김용옥 교수가 교육방송에서 중용 강의를 완주하게 되었다는 뉴스가 올라왔다. 반가운 소식이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다.  음, 아, 이거슨 나꼼수 헌정 칼럼 되시겠다 ㅋㅋㅋ.


아래는 뉴욕 타임스 11월 1일자 언라인 기사 카피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0. 26. 18:27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286809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10월30일까지 ‘렘브란트와 예수의 얼굴’이라는 주제로 특별 전시회를 하고 있다. 이 전시회는 프랑스의 루브르와 필라델피아, 그리고 디트로이트 미술관이 합동 기획 한 것으로 루브르에서는 올해 4월부터 7월까지 전시 되었고, 필라델피아에서는 8월부터 10월 말까지 전시가 되며, 11월부터 내년 2월까지는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열리게 된다.
 
렘브란트(1606-1669)는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기에 활동했는데 그의 인물화와 판화가 유명하며, 그의 판화기술은 독보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회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렘브란트가 그린 예수님의 얼굴과 예수님의 일대기 관련 유화, 그리고 판화작품과 판화를 위한 밑그림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렘브란트의 화실에서 제자로 활동했던 작가들의 그림도 전시 되고 있다.
 
지난 주에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갔는데, 미술관 입구에 루브르 소장품인 ‘엠마오의 예수 (Christ at Emmaus, 1648)’가 커다란 걸개 그림으로 걸려 있었다. 이 작품이 전시회의 대표적 작품인 셈이다. 엠마오와 관련된 이야기는 누가복음, 마가복음에 소개가 된다. 예수 사망 후 제자 클레오파스와 또 다른 제자가 슬퍼하며 길을 가고 있는데 이 때 모르는 나그네가 합류한다.

날이 저물어 엠마오에 도달하였을 때 나그네는 그냥 가려고 하는데, 제자들은 날이 저물었으니 함께 마을로 들어가서 저녁을 먹자고 그를 초대한다. 저녁을 먹기 위해 나그네가 빵을 자를 때 제자들은 그 나그네가 스승님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일화다.
 
렘브란트의 그림에는 자그마한 식당의 테이블 정면에 예수님이 앉아 있고, 그의 양 옆에 두 명의 제자가 앉아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른편에 웨이터가 시중을 들기 위해 서있다. 정면의 예수님의 시선은 어딘가 위 쪽을 향해 있고, 양 옆의 제자들의 시선은 예수님 얼굴 쪽을 향한다.

웨이터는 테이블 쪽에 시선을 내려 보내고 있다. 예수님은 왼손으로 길쭉한 빵을 받치고 있고, 오른 손으로 빵을 잘라내고 있다. 이 빵은 유태인들의 전통적인 빵으로 아직도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 빵을 손으로 자를 때 버석거리는 소리가 난다고 한다. 바로 그 빵을 자를 때 빵이 버석거린 그 순간, 문득, 제자들은 이 나그네가, 돌아가신 스승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깨달음은 빵을 자르는 순간 번개치듯 찾아왔다. 이는 불가에서 석가세존이 연꽃을 들었을 때 제자 가섭이 혼자서 그윽하게 미소를 지었다는 이심전심, 불립문자의 경지와 흡사하다. 인간의 언어로서는 전달이 안 되는 세계. 깨달음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우리의 허를 치듯 찾아와 둥지를 튼다.
 
곁에 서있는, 지금 이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르는 채로, 자신의 눈 앞에 구세주가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서있는 웨이터는 이 극적인 장면을 더욱 고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을 때 이를 눈치 채지 못하는 이가 이 사람뿐이겠는가? 그림 앞에 선 나는 눈앞에 진리가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내 일에만 열중하는 나 자신의 초상화를 그 식당 종업원에게서 발견한다.
 
이 전시회에서 새로 알게 된 것은 렌툴러스(Lentulus)의 편지라는 것으로, 렌툴러스라는 사람이 예수를 만나 그의 용모를 상세히 서술한 것이 15세기에 유럽에 알려졌다는 것이다. 이 편지의 저자는, 예수의 얼굴에 상처가 없으며 뺨은 홍조를 띠었고, 소리내어 웃지 않되 밝은 표정이었으며, 곧 눈물을 터뜨릴 듯한 눈빛이었는데 세상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얼굴을 처음 본다고 적었다.

이 서신은 근본을 알 수 없는 위서로 평가가 되지만, 중세 암흑기를 거친 당시의 인본주의 화가들은 편지에 적힌 인간적인 예수님의 용모를 재현하려고 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 예수님을 보러 필라델피아에 갔던 나는 미술관에서 무지하고 깨닫지 못하는 내 얼굴 하나를 발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딱한 내 얼굴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축복 넘치는 깨달음이었으리라.

2011,10,26 이은미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0. 19. 22:32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282047
“정당의 목적은 무엇인가?” 고등학생 시절, 사회과목 헌법 관련 시험에 이 문제가 나왔다. 사지선다형 문제였으므로 나는 ‘국민의 행복’과 같은 문항을 답으로 골랐다. 그런데 정답은 그것이 아니었다. ‘정당의 목적은 정권을 취하는 데 있다’는 것이 선생님의 설명이었다. 어린 마음에 나는 머리를 몽둥이로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선생님께서 정당이 정권을 취하기 위해서는 결국 국민이 행복해지도록 노력을 기울이게 되어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어린 나는 어떤 숭고한 이상을 상정하고 있었고, 선생님은 정치학적 이론을 설명하셨을 것이다. 아무튼 그것이 내 인생 최초로 맛본 정치에 대한 환멸이었다고 기억한다. 삶의 환상 어딘가가 우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 인생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낀 것은, 1990년 1월 김영삼씨가 3당 합당을 하고 노태우, 김종필씨와 나란히 서서 찍은 기념사진 앞에서였다. 사실 나는 우리 할아버지의 무릎에서 놀면서 신문 읽기를 배웠는데, 당시 아주 어린 내게도 여공들을 비호하다가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된 김영삼 의원은 민주주의의 위대한 전사였다. 내심 그를 존경했던 나는 1990년 그의 정치적 변신 앞에서 심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1979년 와이에이치 사건, 그리고 어떤 영웅의 탄생


1990, 엉뚱한 곳에서  애매한 분들과  서 있던 어떤 사람




 그 사이에 나는 어른이 되었고, 이제 더 이상 정당의 기본 목표에 대해서 회의하지도 않으며, 야합의 다른 말은 ‘유연성’이라는 것에도 일부 수긍을 하게 되었다. 이상은 하늘에 있고, 정치는 땅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니까.

 정치의 풍경이 내게 환멸만 가져다 준 것은 아니다. 나는 우리나라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을 때, 이것이 노 정치인에 대한 국제적인 치하라고 생각했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는 눈 앞에서 기적이 일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흑인 오바마 대통령은 내게는 희망의 옥동자처럼 보였다. 설령 오바마가 아닌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해도 나는 역시 그에게서 희망의 싹을 발견했을 것이다. 미국 역사 최초의 유색인종 대통령이나,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나 새로운 역사가 쓰여졌다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최근 한국 사회의 아주 특별한 정치적 실험 두 가지가 내 눈길을 끈다. 그 한가지는 ‘투표거부’를 통한 투표권 개념의 확장이요, 다른 한 가지는 정당을 넘어서는 개인후보의 힘에 관한 것이다. 사실 서울시장이 아무도 등 떠밀고 나가라고 한 적도 없는데, 주민이 선출해 준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도 진풍경이기는 했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투표거부’를 통한 정치적 목소리 내기라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 행동이 나타났다는 것에 주목했다.

혹자는 이에 대하여 투표권을 내던져버린 반민주적 행동이었다고 비난을 하기도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런 선례가 없었다고 해서 반민주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의미의 확대, 혹은 진화로 보는 편이다.



 둘째는 변호사이며 시민운동가로 활약하던 무소속 후보가 전체 야당의 지지와 후원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무소속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판적인 시각에서는 “이런 식으로 제대로 된 서울시 행정이 되겠는가?”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미리 안 된다고 단정을 내릴 이유가 없어 보인다. 이 역시 대의 민주주의 정신의 확장 팩이 될 수도 있다.



 세종대왕과 그 시대의 학자들은 남들이 모두 손사래를 치며 반대할 때 전례 없는 글자체계인 ‘한글’을 만들어내셨다. 선례가 없다고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김구 선생이나 안중근 선생이 타고나기를 혁명가로 난 것이 아니고, 시대가 이들을 혁명가로 키웠다. 판사하던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고, 변호사가 시장이 되듯, 시민운동하던 사람이 무소속으로 시장이 된다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다.

 내가 성장하는 동안 정치의 어떤 풍경들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고, 또 어떤 풍경들은 내 가슴을 쿵쿵 뛰게 만들었다. 감동을 주는 한판 승부, 서울시장 선거가 아름답게 마무리되길 기대해본다. 선거가 끝났을 때 승패가 갈리겠지만,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있는 그런 선거판을 꾸려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다.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0. 12. 18:58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277715

그가 태아였던 시절,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를 임신한 여성은 그를 부유한 부부에게 입양시키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났을 때 그 부부는 그를 거절했다. “우리가 원한 것은 여자 아이였소.” 마침 한 부부가 그 사내아이를 키우고 싶어했다. 부부는 각기 고졸, 중졸의 학력이었다. 이들은 약속을 했다 비록 자신들은 대학을 나오지 못했지만 아들만큼은 반드시 대학에 보내겠다고.

 17년 후에 그 사내아이는 대학에 입학했다. 그의 한 학기 등록금은 그의 양부모가 평생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모은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스스로 대학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그는 인류 문명사에 아름다운 ‘사과나무’를 여럿 심어 놓고, 시월의 어느 날 홀연 지구를 떠났다.

 한국의 어느 노인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방송에서는 온 종일 어느 미국인의 사망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아닌 것 같고, 그가 누구인지 노인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또 한가지 알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사람들이 죽은 사람의 집 앞에, 영정 앞에 한입 베어 먹은 사과를 갖다 놓는다는 것이었다. “이상하기도 하지. 먹다 남긴 사과를 바치다니….” 노인의 사위가 설명을 해 준다. “미국의 어느 유명한 컴퓨터 회사 창립자가 사망했는데, 그 회사 상징이 바로 그 한입 베어 물은 사과랍니다.” 내 어머니는 그제서야 손자 녀석이 매일 손에 들고 돌아다니던 기기에 사과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는 것을 회상해 냈다.

 애플 컴퓨터 회사의 그 '사과' 로고는 창립 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 애플사의 단색 ‘사과’ 로고는 1998년 이후에 사용되기 시작했고, 그 이전에는 25년 가까이 무지개 색 사과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뉴턴이 사과 나무 아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그림을 로고로 사용하던 시기도 있었다. 이 그림 주위에는 ‘뉴턴, 낯선 상념의 바다를 영원히 홀로 떠도는 정신(Newton, A mind forever voyaging through strange seas of thought alone)’ 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어제는 집 근처의 농장 직거래 장터에 나갔다. 마침 사과 농장 농부가 새벽 이슬이 아직도 생생한 사과들을 종류별로 쌓아 놓고 팔고 있었다. 그런데 한 농부가 사과 한 조각을 권하며 “This is McIntosh(이것이 매킨토시 사과입니다)!”라고 설명을 해 준다. 매킨토시? 매킨토시는 애플 컴퓨터 회사의 컴퓨터 이름이 아니었던가? 요즘은 ‘맥’이란 것이 전자제품 매장에 깔려 있지만, 그 전에는 매킨토시라는 컴퓨터가 유명했었다.

그런데 그것 역시 사과 종류 이름이었다고 한다. 매킨토시 사과는 캐나다의 사과 농장 주인의 이름을 딴 것으로 캐나다 및 미 동부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과라고 한다. 매킨토시 사과 역시 간단히 ‘맥’이라고 부른다. 나는 매킨토시 사과 몇 알을 고르고, 농부가 내미는 아이패드에 부착된 신용카드 단말기를 사용하여 카드를 입력하고, 그의 아이패드에 손가락으로 서명하는 식으로 사과 값을 치렀다. 스티브 잡스는 죽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사람들의 삶 속에 스며 있다.

 혹자는 성경에 등장하는 ‘선악과’가 ‘사과’가 아니었을까 상상한다. 그래서 남자의 목젖을 영어로는 아담의 사과(Adam's Appl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담이 한입 삼키다가 하느님께 걸려서 미처 삼키지를 못했다던가. 신화 속에서 황금 사과 한 알은 트로이 전생을 불러온 불씨가 되었고, 뉴턴은 사과가 툭 떨어지는 현상을 사색하다가 만유인력의 법칙에 다가갔다고 알려져 있다. 매일 사과 한 알을 먹으면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해서 ‘An apple a day keeps a doctor away’라는 속담도 널리 퍼져있다.

 얼마 전 평생 ‘사과’에 미쳐서 사과가 그려진 도구들을 세상에 뿌려대던 한 사나이가 지구를 떠났다. 사과가 익어서 뚝뚝 떨어지는 향기로운 어느 가을날에. 그는 지금쯤 먼먼 상념의 바다를 홀로 유유히 산책하고 있으리라.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0. 5. 21:40

The Botany of Desire: A Plant's-Eye View of the World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273039

“룸메이트 부모님이 사과 농장에서 따온 사과를 한 바구니 갖다 주셔서, 요즘 사과를 실컷 먹고 있어요.” 기숙사에 들어간 작은 아들이 사과 얘기를 전한다. 벌써 사과 따는 계절이 왔구나 깨닫게 된다.
 
본래 카자흐스탄이 원산지인 사과나무가 미국에서 왕성하게 번식하게 된 배경에는 전설적인 미국 사과의 아버지, 조니 애플씨드 (Johnny Appleseed, 1774-1845)의 노력이 있었다. 본명이 존 채프먼 (John Chapman) 인 그는 매사추세츠에서 시작하여, 펜실베니아, 오하이오, 인디애나, 일리노이에서 사과묘목을 대량으로 키워 신대륙에 이민 온 사람들에게 판매하였다. 그에게서 묘목을 사 가지고 간 사람들에 의해 미국은 ‘사과의 대륙’으로 변모하게 된 셈이다.

 마이클 폴렌 (Michael Pollan)은 그의 저서 ‘욕망의 식물학 (The Botany of Desire)’에서 채프먼이 북미대륙에 사과를 번식시킨 이야기를 상세히 전하면서 인간과 식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펼친다. 채프먼이 사과를 번식시킨 것인가, 아니면 사과가 번식을 위해서 존 채프먼에게 심부름을 시킨 것일까? 인간은 달콤한 사과를 욕망하고, 사과는 달콤함으로 인간을 유혹하여 번식에 성공을 한 것은 아닌가?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리처드 도킨스의 명저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에서도 제시 된바 있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란 것이 있는가? 아니면 인간은 유전자의 번식을 위한 생존 기계인가? 인간의 존엄성을 확고하게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관점의 전도에 불편함을 느낄 수 도 있겠으나, 인간중심에서 약간 벗어나서 다른 시각으로 주변 현상을 관찰 하다 보면 우리의 사고가 유연 해 질 수도 있다.
 
내가 달콤하고 아삭아삭한 사과를 따러 갈 때, 나는 나의 욕망을 따르는 것이지만, 사과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번식 시켜주기 위한 대리자가 그 앞에 얌전하게 나타나는 격이다.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서 그 달콤한 과육을 한입 베어 무는 순간, 나는 사과의 하수인이 된다. 그런들 어떠랴.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노라”고 공언한 철학자 스피노자 역시 사과의 하수인이 아니었던가.
 
워싱턴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나는 해마다 인근 사과 밭에 사과를 따러 간다. 볕 좋은 가을 하늘 아래서, 향기로운 사과를 실컷 따 먹고, 봉지에 담은 것만 값을 치르고 돌아오는 한나절의 소풍은 가을에 놓칠 수 없는 행사이다.
 
이태 전에는 주위의 친구가 소개한 어느 시골 사과 밭에 갔었다. 산골의 노부부가 운영하는데 규모가 작고, 농약도 치지 않는 사과 밭이라고 했다. 비포장 도로를 한참 헤매다가 찾게 된 정말 산골 구석의 과수원이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마당에 사과 따는 도구며 바구니들이 널려있는 채로 집 주인은 나가고 없었다. 일요일 오전이니 모두들 예배당에 간 것일까? 우리 가족은 주인을 기다리다가, 그냥 사과 밭으로 올라가 사과를 실컷 따먹고, 들통에도 따 담았다. 그렇게 한참을 놀면서 기다려도 사과 밭 주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과 값을 내야 할텐데, 주인이 없으니 어쩌면 좋은가?

우리들은 가을꽃이 우거진 그 집 마당에서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다 지쳐서 현관 앞에 사과 값을 놓고 돌멩이로 눌러 놓고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여 그 과수원에 전화를 해 보았다. 버지니아 시골 사투리의 노인이 전화를 받았다. 사과를 따고 사과 값을 놓고 왔는데 받으셨느냐고 물었더니, 그제서야 내가 일러주는 곳에 가서 돈을 발견하는 노인. 일러줘서 고맙다며 전화 너머에서 노인이 인사를 했다.
 
시월이 가기 전에 사과 밭에 가 봐야지. 그 산골 사과 밭의 사과도 잘 익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태 전에 내가 갔던 그 버지니아 시골의 사과 밭 주소를 잃어버렸다. 내게 사과 밭을 소개해준 친구도 이제 이곳에 없으니, 나는 그 산골 구석 노부부의 사과 밭을 찾지 못하리라. 그 사과 밭이 정말 있기나 했던 것일까?


사진 파일을 찾아 보니 2009년 10월 11일에 사과 밭에 갔었다.


2011,10,5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9. 28. 20:05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268922

 독서의 계절로 일컬어지는 가을이 강물처럼 우리 곁을 지나고 있다. 가을이 아주 가기 전에 좋은 책을 많이 읽고 싶다. 그런데 올 가을에는 나 혼자 방구석에서 읽는 대신에 어디 볕 좋은 공원에 나가 바람을 쐬며 누군가를 위해 조롱조롱 책을 읽고 싶어진다.

 워싱턴DC의 Landmark E Street Cinema 영화관에서 프랑스 영화 ‘마거릿과의 오후의 데이트 (My Afternoons with Margueritte)’가 상영 중이다.

 프랑스 어느 시골 마을에 바보 사나이가 산다. 글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고 순박하고 어수룩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를 바보 취급한다. 이 바보 사나이가 어느 날 공원의 벤치에서 책을 읽는 95세의 할머니, 마거릿과 조우하게 된다. 글을 잘 읽는 작고 상냥한 할머니와 글 읽을 줄 모르는 순박한 중년 사나이. 할머니는 소리 내어 글을 읽어주고, 사나이는 할머니가 읽어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할머니는 자신이 책 읽어주는 것을 들어주는 사나이가 고맙고, 사나이는 책 읽어주는 할머니가 고맙다.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가 시력이 나빠져서 더 이상 책을 읽어 줄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사나이는 낙심한다. 사나이는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하여 돋보기를 꺼내 들고 책 읽는 연습을 한다. 시력을 잃어가는 할머니가 너무나 딱해서. 그런 할머니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그래서 동네의 바보였던 사나이는 책 읽는 남자가 된다.

 이 영화를 보니 3년 전에 보았던 ‘The Reader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2차대전 당시 나치의 형무소를 지키던 여자는 글을 읽지 못했다. 수감된 유태인들이 여자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전쟁이 끝난 후 전차 안내원으로 살아가던 여자는 한 소년을 만나게 된다. 여자는 소년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한다. 아무도 여자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후에 여자는 나치에 협력한 죄로 감옥살이를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을 발설하지 않는다. 어른이 된 소년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여자에게 책을 읽어 녹음해 보내준다. 남자가 보내주는 테이프를 열심히 듣던 여자는 어느 날 책을 꺼내 들고 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책에 적힌 글자를 대조해 가면서 혼자서 책 읽기를 깨치고, 마침내는 아주 서툰 글씨로 남자에게 편지를 쓰게 된다.

 신경숙씨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주인공인 엄마 역시 문맹이다. 엄마는 아들에게서 편지가 오면 학교에 다니는 딸에게 편지를 읽게 했고, 그 딸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받아 적게 했다. 그 편지를 받아 적던 딸이 소설가가 됐다. 엄마는 딸이 쓴 소설을 읽고 싶었다. 엄마는 자신이 자원봉사로 일하는 고아원의 사회 복지사에게 눈이 침침해져서 읽기가 어렵다며 책을 소리 내어 읽어 달라고 부탁한다. 엄마는 그렇게 문맹인 채로 가족들을 돌보다 사라졌다.

 내 고향 시골 마을에 살던 윗집 아주머니 생각이 난다. 어쩌다 우체부가 편지를 놓고 가면 아주머니는 편지를 들고 우리 집으로 서둘러 오셨다. “눈이 침침해서 그려, 이 편지 좀 읽어 주소.” 그러면 우리 식구 중 아무나 편지를 큰소리로 읽어 드렸다. 때로는 할아버지가, 때로는 고모가, 때로는 나 같은 어린 꼬마가 그 편지를 읽었다. 우리는 이웃 아주머니가 가져오는 편지를 큰 소리로 읽어드리며 기쁜 소식에 함께 기뻐했고, 슬픈 소식에 함께 슬퍼했다.

 내가 아이 엄마가 되었을 때, 나는 내 아이들을 위하여 소리내어 책을 읽어주었고, 몇 해 후에는 읽기를 배운 아이들이 낭랑한 목소리로 엄마인 나를 위하여 책을 읽어주었다. 돌이켜보니 내 아이들이 종알종알 소리내어 내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것이 가장 아름답고 달콤한 책 읽기였던 것 같다.

 누군가를 위하여 소리 내어 책을 읽는 행위에는 함께 나눈다는 공감의 정서가 흐른다. 책을 읽기에 좋은 가을이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다. 누군가를 위해 조롱조롱 책을 읽어 주고 싶다. 하늘이 높다.

2011,9,28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9. 21. 21:00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264444

“별들은 창공에서 빛나고
대지는 달콤한 향기로 넘쳤네.
과수원의 문은 삐걱거렸고
모랫길을 밞는 발자국 소리
꽃같이 향기로운 그녀가 들어와
내 품에 안겼었지.

내 생의 마지막 시간이 흐르고, 이제 나는 죽네. 희망도 없이
삶이 이토록 고귀한 것인 줄 여태 몰랐네.”

 
 플래시도 도밍고가 감독을 맡고 있는 워싱턴 국립 오페라단이 지난 10일부터 오는 24일까지 케네디 센터 오페라 하우스에서 푸치니 (Giacomo Puccini)의 오페라 토스카 (Tosca)를 공연하고 있다. 위에 적힌 노래는 오페라 토스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 (E lucevan le stele)’의 일부다.

 ‘토스카’는 본래 5막짜리 드라마였는데, 푸치니가 이를 3막의 오페라로 새롭게 탄생시켜 불후의 무대 예술로 거듭나게 된 셈이다. 1막은 성 안드레아 성당 안으로 잠입하는 탈옥수 안젤로티와 이를 발견하는 주인공 카라바도시. 이들은 친구 사이로 카라바도시가 친구를 숨겨주기로 한다. 카라바도시가 자신의 그림 앞에서 부르는 노래 ‘오묘한 조화 (Recondita armonia)’가 유명하다.

 2막은, 경찰서장 스카르피아의 방. 스카르피아는 카라바도시를 체포하고, 그의 목숨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애인 ‘토스카’와의 하룻밤을 요구한다. 이때 토스카가 부르는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Vissi d'arte)’가 유명하다. 오직 사랑과 예술만을 위해서 살았으며 주님께 헌신하고 착하게 살아왔는데 자신 앞에 왜 이런 불행이 닥친 것인지 알 수 없다며 한탄하는 노래다. 토스카는 애인 카라바도시의 목숨을 살려서 도망갈 수 있도록 조치를 한 후에, 스카르피아를 살해한다.

 3막은, 성의 감옥. 카라바도시가 처형의 시간이 다가오자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토스카와의 아름다웠던 시간을 회상하고,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노래를 부른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별은 빛나건만’이다. 이 때 감옥에 찾아온 토스카는 처형할 때 실탄을 쓰지 않을 것으로 약조가 되어 있으니 죽는 시늉만 하면 된다고 알려준다. 그 후에 안전하게 외국으로 떠나면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은 기쁨에 넘쳐서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약속은 이뤄지지 않았다. 카라바도시는 실탄에 맞아 운명하고, 절망한 토스카는 성에서 투신하여 죽고 만다.
 
사실 ‘오묘한 조화’,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별은 빛나건만’과 같은 노래들은 이 오페라를 본 적이 없던 나로서도 구구단 외우듯 그냥 “토스카에 나오는 노래지…” 하는 정도로 친숙한 것들이다. 유명한 성악가들이라면 무대에서 앞다투어 불렀고, 집에 쌓여있는 음반에도 많이 실려 있고 제목만 들어도 기본 멜로디는 흥얼거릴 수 있는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 평소에 듣던 ‘노래’들을 오페라 무대에서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듣게 되니 가슴을 울리는 감동같은 것이 있었다. 평소 평면적이었던 노래가 이제야 입체적으로 다가왔던 것이었으리라.

 이것은 마치 미술 책에 편집되어 실려있는 명작 그림이나 조각을 매일 들여다보다가, 어느 날 미술관에 가서 실제 작품을 발견하고 그 질감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 입체감을 돌아보는 것과 흡사하다. 에펠 탑 사진을 보다가, 에펠 탑 앞에 가서 서보고, 에펠 탑 꼭대기까지 올라가 세상을 내려다보는 기분. 현장에 가서 봤을 때만 다가오는 생생함 그리고 감동.

 이제 라디오에서 ‘오묘한 조화’가 흘러나올 때, 나는 케네디센터 오페라 하우스의 무대와 그날 밤 총총한 별이 포토맥 강에 비쳐 흘렀다는 것과, 가을 저녁이었다는 것까지 떠올리게 될 것이다. 오페라가 있는 가을 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슬픈 사랑의 노래는 얼마나 가슴에 사무치는가. 오페라 무대가 있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풍요로워지는가! 공연은 24일까지 계속된다.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9. 14. 20:59

The Social Animal

http://www.amazon.com/Social-Animal-Elliot-Aronson/dp/1429233419/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259889

 퇴진한 서울시장의 빈 자리를 누가 새롭게 차지 할 것인가로 현재 대한민국이 시끌시끌한 가운데 컴퓨터 백신으로 유명한 안철수 교수가 서울 시장 후보설을 뛰어 넘어 장차의 대권 후보로 떠오르면서, ‘안철수 신드롬’이라는 표현이 언론을 넘나들고 있다. 이러한 ‘신드롬’이 과연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날지, 아니면 활화산처럼 타오를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안씨가 수년간 부동의 일위를 다져온 현 정치인과 상대한 여러 여론 조사에서 우세한 모양새를 연출한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을까?

 사회심리 학부생들의 기초 교재이며, 고전으로 알려진 엘리엇 아론슨 (Elliot Aronson)의 저서 ‘사회적 동물 (The Social Animal)’에서 사람들이 의사 결정을 하는데 일어나는 몇 가지 현상들을 정리해주고 있다.
 첫째, 사람은 ‘전문가’나 ‘신뢰할 만한 개인’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기왕이면 전문가로 알려진 사람, 평판이 좋거나 신용이 높은 사람의 말을 우리는 높이 평가한다.

 둘째, 그 사람의 언행이 그 자신의 이익과 배치가 될 때 특히 신뢰성이 높아진다. 예컨대, 왕자의 자리를 박차고 고행의 길을 나선 석가모니, 신의 아들이며 메시아였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길을 간 것에서 인류가 감동을 받는 것은 겉보기에 스스로 자신의 이익에 위배되는 행동, 혹은 희생 때문이다. 체 게바라가 젊은이들을 사로잡는 이유 역시, 의사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던 한 청년이 자신의 조국도 아닌 다른 나라를 위하여 고난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신의 이익에 배치되는 행동을 할 때, 그 사람의 언행이 호소력이 높다는 것이다. 기득권자가 기득권을 포기하고 소외 계층을 위해서 행동할 때 그 울림이 큰 이유가 바로 이런 데 있다.
 
셋째, 그 사람이 나에게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를 보이지 않을 때, 나는 그 사람의 언행을 더욱 신뢰한다. 우리는 내 면전에서 나를 칭찬하는 사람을 의심한다. 숨은 의도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칭찬하는 사람을 신뢰한다.

 넷째,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면, 사소한 일의 경우에, 내용에 상관없이 그 사람의 언행의 영향을 받는 편이다. 예컨대,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광고 모델로 나오는 커피를 나는 선호하게 되고,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들고 있는 가방을 나도 들고 싶어진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런 원리가 잘 통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안성기씨가 과자 광고를 하면 나는 그가 광고하는 과자를 한 두 봉지 사 먹겠지만, 그가 대통령 후보로 나온다면, 냉큼 그에게 표를 던지지는 않을 것이다. 과자와 대통령은 다른 것이니까.



 위의 원칙에 안철수 신드롬을 대입 시켜 보자. 첫째, 안철수씨는 컴퓨터 백신의 독보적 전문가로 알려져 있으며, 평소의 그의 언행이 사람들에게 신뢰를 줘왔다. 둘째, 안씨는 꽤 유리한 조건으로 보였던 서울 시장 후보 자리를 그보다 인지도가 떨어지는 다른 후보에게 조건 없이 양보했다. 표면적으로 그는 자신의 이익에 위배되는 행동을 소탈하게 해 치웠다. 셋째, 그의 이러한 행동에 어떤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 같지가 않다. 물론 다른 의견을 가진 분들도 있겠으나 표면적으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넷째, 평소에 신뢰성이 높아 보여서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호감을 갖고 있던 터에, 그의 출현은 현 정치에 식상하여 ‘내 마음 갈 곳을 잃었던’ 다수의 사람들을 사로 잡았다. 그 결과가 오늘날의 '안철수 신드롬'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대권으로 향한다면, 그는 진정으로 ‘통치의 전문가’로서 자리매김할 역량을 키웠는지 검증을 받는 혹독한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그 검증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사소한 호감 혹은 거품 같은 호감에서 끝나는 인물로 떠나갈지, 아니면 유권자가 기꺼이 한 표를 던질만한 지도자상을 보여줄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한 사회에 검증해 볼 만한 인재들이 많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2011,9,14, 수

p.s. 나?  나는 안성기씨가 좋다.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 관심 없다. 안성기씨하고 라면 먹으면서 소줏잔 나누면 좋을것 같다.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9. 7. 19:54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256484


최근 고려대가 사건 발생 108일 만에 동료 여학생을 성추행 한 남학생 전원에 대하여 ‘출교’라는 조치를 취했다. 뉴스를 접하면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만다. 사필귀정. 한국 사회에서 ‘대학’은 아직도 희망의 다른 이름일 수 있겠다.

 피해자였던 여학생의 증언으로는, 어느 사이에 술이 깨어 동료 남학생들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파악을 했을 땐 너무나 망신스러워서 짐짓 모르는 척했다고 한다. 그는 추후에 증거자료와 함께 이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 하였다.

 이 사건보다 몇 달 전, 서울의 심야 전철에서 술에 취한 여성이 머리를 무릎에 대고 엎드려 있었다. 옆자리의 남성이 그 여성의 다리 사이로 손을 집어 넣는 것이 누군가의 카메라에 찍혔다. 이 사건은 문제의 남자가 수사망이 좁혀져 온다고 판단하고 겁에 질려 자수를 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의 피해자였던 여성은 정말 술김에 아무것도 몰랐던 걸까? 피해자 여성은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 창피스러워서 모르는 척 했다’는 진술을 했다.

 혹자는 “누군가 내 몸을 만지고 있는데 그것이 창피스러워서 모르는 척 지나가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의문을 표할 수도 있겠다. 한 술 더 떠서 “좋아서 가만히 있었겠지?” 하고 농담을 하러 들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당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기 전에는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일지도 모른다.

 내가 한국의 모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칠 때의 일이다. 학교의 교무주임 선생님이 내게 각별히 신경을 써주고 친근하게 대했다. 그런데 어느 날 교무회의를 마치고 나서는데 그 선생님이 내 엉덩이를 툭 건드리며 웃는 것이다. 나는 기분이 상하고 망신스러웠다. 그래서 모르는 척 외면하고 그 자리를 떴다. 이튿날 교무실에서 스치면서 그 선생님이 내 손을 만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오물을 뒤집어 쓴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다음날, 그 선생님이 보이길래 손을 뒤로 감췄다. 손을 만질까 봐 무서워서. 그는 내가 뒷짐 진 손을 일부러 만지고 지나갔다. 그 때 나는 이 ‘더러운 세상’을 살고 싶지가 않아졌다.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처녀도 아니었고, 애 둘을 낳아 키운 ‘아줌마’였다. 그런 나에게도 남이 내 손을 허락 없이 만지는 일이 죽고 싶을 정도로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나 학교 안가! 더러워! 다른 직장을 찾아 보겠어!” 며칠 혼자 끙끙 앓다가 마침내 남편에게 하소연을 하자 남편이 제안을 했다. “똑똑한 사람이 왜 그러시나. 그냥 그런 식으로 현장에서 도망치지 말고, 그 선생님을 만나서 정색을 하고 이야기를 해보셔.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만들라는 말이지. 그런데도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그 때는 내가 나서겠어. 그런데, 일단 혼자 힘으로 이 상황을 정리해보셔.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도망을 다닐 건데?”

 남편의 조언에, 없던 용기를 쥐어 짜내어, 그 선생님과 학교에서 만났다. 나는 정색을 하고 ‘내 몸에 손 끝 하나라도 닿으면 불편하니까, 그러지 마시라’고 설명을 했다. 그 선생님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고 사죄를 했다. 그 후로 그 선생님은 내게 깍듯이 예의를 차렸고,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할 만한 행동은 일체 하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 역시 불쾌한 상황에서 도망치는 대신에 내가 수습하는 방법 한 가지를 배웠다.

 나는 지금도 타인이 나를 건드린다거나 신체적으로 스치는 것에 대하여 매우 민감해하고 불편해 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제는 말 없이 도망치기보다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과 대면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일조차 입을 떼고 말하는 것이 여성들에게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무진장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하물며 형제같이 믿고 있던 친구들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사람의 심정이야…. 지옥같은 상황에서 용기있게 자신의 문제를 항변한 고려대 의대 여학생에게 심심한 응원을 보낸다. 용기있게 공부 마치시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어 주십사 당부 드린다.

2011, 9, 7, 수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9. 7. 19:52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252397

한국에서 미국으로 와서 생활할 때 발견되는 차이점이 무엇인가 물으면 여지 없이 나오는 답 중에, “미국에서는 쓰레기 분리수거를 안 해도 된다”는 것이 있다. 사실 한국의 대도시 특히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쓰레기 분리수거의 전문가가 되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

 음식물 쓰레기, 타는 쓰레기, 안 타는 쓰레기, 재활용 가능한 쓰레기, 재활용 쓰레기라도 종이, 플라스틱, 알루미늄 깡통 등, 이것들을 분리해야 하고, 내다 버리는 요일도 정확히 지켜야 한다. 커다란 가구를 폐기하기 위해서는 별도로 스티커를 사다 붙여서 내놓아야 하고, 뭐든 종류별로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숙지해야 한다. 이러한 것이 환경 보호를 위하여 필요한 행동 요령이긴 하지만, 이것을 잘 지켜야 하는 것이 스트레스를 유발하기도 한다.

 이렇게 철저하게 쓰레기 버리는 요령을 익히고 실천하다가 넓디 넓은 미국땅에 와서 생활하다 보면 도무지 아무도 쓰레기 버리는 것에 대하여 ‘잔소리’를 안 하기 때문에 여기야말로 ‘천국’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할 것이다. 미국식 파티는 또 얼마나 신 나는가. 일회용 식기를 이용하여 먹고 마시고 그리고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면 따로 뒤 설거지를 할 필요도 없다.

 물론 미국에도 환경 문제에 신경을 쓰고, 쓰레기를 분리 수거하는 모범 시민들이 많이 있다. 재활용 가능한 것들과, 일반 생활 쓰레기를 따로 담아 내다 놓는 시스템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런 분류는 자발적인 참여에 불과하다. 정부나 지방 자치단체에서 쓰레기 분리 수거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쓰레기를 분류하여 내다 버리라는 잔소리를 안 듣고 속 편하게 몇 년 맘대로 버리면서 살다 보니, 한국에서 환경관련 교육 받은 것들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메아리를 친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이렇게 막 쓰고 버리고 살면 안 되는데….

 이태 전의 일이다. 평소처럼 포토맥 강변에 나가 산책을 하고 있는데 강변의 나무에 ‘물수리’라는 검은 새가 거꾸로 매달려 파닥거리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누군가 쓰고 버린 투명한 낚싯줄에 발이 엉킨 새가 나뭇가지 사이로 이리저리 다니다 그만 꼼짝도 못하게 거꾸로 매달리고 만 것이다. 새가 고통스럽게 버둥거리는데, 너무 높아서 사람이 다가가서 구해 줄 수도 없었다. 결국은 야생동물보호협회에서 나와서 그 새를 구해냈지만, 지금도 그 낚싯줄은 높다란 나뭇가지에 매달려서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곤 한다.

 우리들이 하늘로 날려보내는 풍선이나 생각 없이 버리는 비닐봉지들이 바다에 흘러 들면 마치 해파리처럼 보여서 물고기들이 이것들을 삼키고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나는 생각 없이 버리지만, 누군가는 그 때문에 생명에 위협을 느끼거나 중병에 걸린다.

 최근에 나는 시장가방 세트를 샀다. 튼튼한 헝겊으로 만들어진 자루모양의 가방인데 다섯 개를 돌돌 말아 주머니에 집어 넣어도 지갑 한 개 크기 밖에 안 된다. 이것을 자동차나 가방에 갖고 다니다가 장을 볼 때 꺼내어 사용한다. 계산대에서 점원이 물건을 포장할 때 내가 갖고 있는 헝겊 시장가방을 꺼내주면 물건들을 가방에 담아 준다. 이렇게 가방에 물건을 담으면 비닐봉지가 절약된다. 가방 안에 많은 물건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에 짐을 집으로 옮기기에도 편하다. 자루 몇 개를 어깨에 척척 들러 매고 짐을 옮기는 것이 올망졸망한 비닐봉지들을 옮기는 것보다 힘이 덜 들고 편하다. 나중에 비닐봉지를 따로 정리하거나 버리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이런 봉지 절약이나 편리함 외에 시장가방이 내게 주는 더 큰 선물이 있다. 헝겊 시장 가방을 사용하고, 비닐봉지를 집에 가져오지 않으면서 가슴에서 샘이 솟듯 기쁜 노랫소리가 들린다. “지구야 사랑해. 너를 위하여 내가 조금이라도 덜 버리고, 덜 쓰고, 아낄게.” 이런 사랑의 노래가 내 가슴에서 울리면서 저절로 마음이 기뻐지는 것이다. 지구는 우리들의 어머니. 내가 지구를 사랑해줘야지, 누가 시키지 않아도.

2011, 8, 31 (수)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8. 24. 22:57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248073


 지난 주 중앙일보 유승림 기자가 기획 보도한 아주 특별한 기사가 있다. 이 특집은 ‘애난데일 한식당서 부당대우, 3주 만에 그만둔 로잔나씨. 인간 이하 취급, 밥도 서서 먹어’를 시작으로 네 편의 기사를 담고 있는데, 일부 한인 업소에서 일어나는 남미계 노동자 ‘차별’의 현장을 스케치하고 이들이 구제 받을 수 있는 방법이나 혹은 이민족에게 동등한 대우를 펼치는 모범 사례까지 담아내고 있다. 이 기획보도를 놓치신 독자는 온라인 기사를 다시 볼 수 있다.

 지난 화요일에 ‘로잔나(가명)’의 사례가 소개 되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로잔나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기 보다는, 이런 사례를 신문에 보도할 수 있었던 기자나 편집팀의 용기에 놀랐다고 할 만하다. 미국사회에서 일부 한인들이 이민족에게 그들이 법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차별 대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가 이것을 문제시할 때, 문제에 빠지는 이가 내 친구이며 내 이웃일 때, 나는 짐짓 모르는 척 지나가게 되는 것이다.

 지난주 칼럼에서 영화 ‘The Help’에 나타난 흑백 차별의 문제를 언급 한 적이 있다. 1960년대 백인 가정에서 일하던 흑인 하녀들은, 자신들이 받는 직장에서의 차별 문제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려워하였다. 백인 사회의 조직적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교육을 받은 백인 여성이 이 부당한 차별 문제에 눈을 뜨고, 흑인 하녀들이 당하는 것을 사회에 알리려고 했을 때, 정작 흑인 여성들은 그나마 직장과 목숨을 잃을까 봐 입을 다물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 아무도 입을 열어 말하지 못하는 일들이 이 세상에 이 뿐은 아니리라. 우리는 공동의 부끄러움에 눈을 감고 싶어지는 것이다. 다음은 내가 알고 있는 일부 사례들이다.

 영희(가명)씨가 일하던 모 식당에서는 한국인들과 남미인 종업원들이 있었는데, 불법으로 일하는 한국인들조차 남미인 종업원들을 마치 머슴 부리듯 했다. 영희씨는 이런 현상이 부당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부지런한 라티노 친구와 서로 도우며 지냈다. 그러자 주변에서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한국인이 라티노와 친하게 지내는 것에 대한 주위 한국인들의 눈총을 견디기가 쉽지 않아서 결국 영희씨는 동료 라티노 친구와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었다.
 
철수(가명)씨는 한인 제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처음에 그는 똑같은 시간제 종업원이면서 굳은 일은 ‘당연히’ 라티노들에게 시키고 한국인들이 라티노에게 기분 내키는대로 욕설을 하거나 함부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 분개했다. 그래서 동등하게 일하고, 동등하게 대해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철수씨 역시 힘들고 지저분한 일은 라티노 친구에게 미뤄버리고 편한 일을 골라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이렇게 말하기 부끄럽지만, 일하다 보니 저 자신도 그렇게 변하더라고요….”

 내가 어릴 때 내가 뭔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을 때, 엄마는 조용히 나를 데려다 놓고 말씀하셨다, “앞으로 다시는 절대 그러지 마라. 이것은 너하고 나만 아는 일이다. 네 형제들도 모른다.” 엄마는 이 한마디로 나의 과오를 용서했다. 종갓집 맏며느리면서 네 명의 자녀를 키워낸 엄마에게는 이런 식의 비밀이 아주 많았을 것이다. 발설되지 않는 개인의, 집안의 부끄러운 과오와 실수들. 이런 것들을 덮어주고 엄마는 살아오셨을 것이다. 우리들은 그렇게 덮어주고 용서해주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덮어주고 쉬쉬하고 넘어가서 해결되는 문제가 있고, 덮어주기 때문에 더욱 부패하고 악화되는 문제들도 있는 법이다. 상대가 어쩔 수 없는 약자이기 때문에 밟으러 든다거나, 동등한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짓밟는 현상, 이러한 것들은 우리끼리 쉬쉬하고 넘어간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유승림 기자의 용기 있는 기획취재에 박수를 보낸다. 그 용기만큼 우리 사회는 더욱 밝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2011년 8월 24일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