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Column2011. 4. 6. 18:57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179343

천재지변을 겪는 와중에 일본이 보인 ‘독도’ 관련 망발에 대해 한국정부나 한국인들의 감정은 매우 복잡해 보인다. 나 역시 매우 착잡한 심정이다. 그 착잡한 심정으로 미국에서 발견되는 지도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된다.

얼마 전, 스미소니언 아시아 미술 박물관인 프리어 갤러리(Freer Gallery)와 자연사 박물관(Smithsonian Natural History Museum)을 둘러보았다. 이 두 스미소니언 계열 박물관에서 동일한 지도에 각기 지명을 다르게 표기한 것을 확인했다.

현재 한국의 동해바다는 ‘동해(East Sea)’라고 한국 측의 지도에 표기가 되거나, 혹은 ‘일본해(Sea of Japan)’로 일본 측의 지도에 표기가 되고 있다. ‘동해인가? 일본해인가?’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외교적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결국 이번에 문제가 된 ‘독도’ 역시 이 동해바다 문제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스미소니언 박물관들은 이런 외교적 분쟁이 될 만한 지역의 표기를 어떤 식으로 하고 있을까? 나는 세 가지 각기 다른 표기 방법을 확인했다.

첫째, ‘일본해(Sea of Japan)’. 프리어 갤러리의 아시아 불교 관련 전시장에서는 불교의 전파 내용을 소개하는 안내판에서 Sea of Japan이라고 표기했다. 이런 표기는 역시 이곳의 일본 병풍 전시실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둘째, ‘동해(East Sea)’. 프리어 갤러리의 한국 도자기 전시장의 안내판에는 동일한 바다에 대하여 East Sea라고 표기했다. 한국 관련 전시장이라서 표기에 신경을 쓴 것일까?

셋째, 표기 생략.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의 한국관에도 안내판이 있고,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 지도에는 바다에 대한 표기를 아예 생략했다.

정리해보면, 프리어 갤러리에서는 아시아 관련 안내판이나 일본 관련 안내판에는 ‘일본해’로 표기하고, 오직 한국 전시장에서만 ‘동해’로 표기했는데, 결국 이 박물관에서는 일본해라고 두 번 표기하고, 동해라고는 한 번 표기했다. 자연사박물관의 한국관은, 그곳이 한국관 임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바다 이름 표기를 생략하고 지나갔다.

프리어 갤러리는 일견 공평한 듯 해 보이지만, 그들이 한국관이 아닌 곳에서는 일괄적으로 ‘일본해’로 표기를 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자연사 박물관의 한국관에서는 아예 ‘동해(East Sea)’라고도 표기도 안 한 것 역시 마음에 걸린다. 지도를 제작할 때 정보나 자료를 제공한 한국 측의 관련 단체는 어떤 역할을 한 것인가? 여러 가지 의문점과 생각들이 교차했다.

미국 내에서 동해를 Sea of Japan이라고 표기한 지도는 이곳 외에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예일대 출판부 같은 유수의 대학 출판사가 제작한 책에도 Sea of Japan이라는 표기를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현재 미국에 사는 나는 이런 문제들을 내가 개인 자격으로 어떻게 접근하고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일단은 자료 수집을 위하여 이러한 지도가 보이는 대로 사진을 찍어 모아두고 있다. 그런데, 어떤 방법이 체계적인 문제 해결 방법인지 알 수가 없어서 고민하고 있다. 개인자격으로 사진파일들을 모두 모아서 박물관 책임자들에게 메일이나 서신을 띄우면 어떨까? 이런 고민도 해보고,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는 미국에서 살다가 혹시 어딘가에서 이런 지도가 발견되면 상세하게 사진을 찍고 알려달라는 부탁도 한다.

한일간의 동해를 둘러싼 영토 관련 분쟁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고, 정부가 뚜렷한 원칙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 민간차원의 노력도 애매해지기 십상이다. 어쨌거나, 이제 나는 내가 우리의 바다 ‘동해’와 ‘독도’를 위해 개인 차원에서 무엇을 실천할 수 있는지 많은 전문가에게 질문을 하고 조언을 듣고 싶다. 각자의 자리에서 고민하는 우리 개개인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체계적인 대응 방법을 의논할 때가 온 것일지도 모른다. 차분하게, 그리고 합리적으로.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3. 30. 19:05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175860

여러 형제 중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여덟 살에 부모를 모두 잃고, 큰형의 집에서 더부살이로 자랐다. 가난한 형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그는 열 살부터 일을 하여 스스로 밥벌이를 해결하고 공부를 했다. 그는 대학에 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천부적인 재능과 열정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실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가난하고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그에게 좋은 직장은 쉽게 오지 않았다.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그를 고용한 사람들은 이런 저런 구실로 그에게 약속한 보수도 제대로 챙겨주지 않았다. 그는 정해진 일 외에도 여러 가지 잡무를 해야만 했다. 보수는 형편없었고,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언젠가 공개 채용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곳에서 그가 보여준 실력은 심사위원 만장일치의 탁월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 취직을 하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재단 측에서 ‘실력보다는 기부금을 많이 내는 후보를 뽑겠다’고 알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빈자리는 실력은 형편없었으나 많은 기부금을 낸 사람에게 돌아갔다. 그가 실력이 있다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공개리에 멸시를 당한 적도 있다.

그는 빠듯한 수입으로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성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사색하고, 연구했다. 운이 좋았던 세월도 있었지만, 생활고는 평생 그를 따라 다녔다. 나이가 들자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에게는 백내장이 찾아왔다. 그는 ‘돌팔이’ 의사에게 두 번의 수술을 받고 완전히 실명하게 되어 마침내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평생 성실하게 살아온 그가 죽어갈 때 아무도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았고, 그의 고용주는 그가 죽기 전 이미 후임자까지 뽑아놓고 그를 멸시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미망인에게 지급되기로 했던 연금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독일의 문호로 알려진 괴테는, 그가 지은 음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했다. “천지창조 이전에 하느님이 자신과 나눈 대화.”


(이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한 분은 아래 -- 더 보기)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3. 26. 01:23




영화보다 생생했던 케네디센터 공연 끝났지만
버지니아 오페라단, 내달 3일 GMU에서 공연


나비부인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173849

지난 2월 26일부터 3월 19일 케네디 센터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54)의 오페라 ‘나비부인(Madama Butterfly)’의 공연이 진행되었다. 워싱턴 국립 오페라단의 공연으로 테너 가수로 유명한 플라시도 도밍고(Placido Domingo)가 감독, 무대 디자인과 의상 및 분장은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이 맡았다.

오페라 ‘나비부인’은 미국인 J. L. Long이 1898년 센츄리라는 잡지에 발표한 소설이었다. 그런데 1903년 이 작품을 무대 연극으로 관람한 푸치니가 영감을 얻어서 곧바로 작곡에 착수하여 1904년 초연을 하였다.

줄거리는 미군 중위 핑커톤이 일본의 항구도시 나가사키에서 15세의 일본처녀 치오치오상(나비)을 아내로 맞이한다. 3년 후 나비부인은 돌아오기로 약속하고 떠난 핑커톤을 여전히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데, 소원대로 항구에 남편이 탄 배가 도착한다. 그러나 정작 나타난 것은 핑커톤이 미국에 가서 결혼한 아내. 나비부인은 혼자 낳아서 키운 아이를 아버지인 핑커톤의 품에 보내기로 약속하고 자결하고 만다.

오페라 나비부인 공연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도 나비부인의 아리아 ‘어떤 개인 날(One Fine Day)’라는 곡은 친근한 편이다. 이 노래는 나비부인이 3년 내내 소식 한 번 없는 남편을 기다리며 부르는 것이다.

‘어느 개인 날 그이가 탄 배가 나타날 거야. 나는 언덕위에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겠어.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의 가슴이 터져버릴 테니까 나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을래….’

내가 어릴 때 구경했던 오페라는 외국어로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 가사를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답답하고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무대 위에 흐르는 자막 덕분에 가수들이 하는 노래 대사들을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아름다운 오케스트라의 선율과 함께 가수들의 애절한 노래 가사에 마음을 실어 공연을 보니 오페라가 영화보다도 생생하고 감동적이다.

입장표 25달러


케네디 센터 오페라하우스의 입장표는 적게는 55달러에서 300달러까지 여러 계층의 가격이 존재한다. 무대나 오케스트라 가까운 자리에서부터 멀어지면서 가격이 내려가는 구조이다. 나는 지난 3월 15일 공연을 보았는데 내가 아들과 함께 산 입장표는 1인당 25달러였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운 좋게 25달러짜리 저렴한 티켓을 살 수 있었을까? 나비부인 공연 소식을 듣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공연티켓이 이미 거의 예매가 끝난 상황이었고, 15일자 공연 티켓이 몇 장 남아있었는데, 그것은 ‘젊은 예술가(Young Artist)’들이 공연한다는 단서가 붙어있었다. 값도 일괄적으로 25달러였다.

케네디 센터 오페라하우스면 세계적인 무대이고, 무대장치나 오케스트라 모두 뛰어난데, 오직 출연진에서 약간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 같은 일반 관객 입장에서는 출연 가수가 누구인가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아름다운 무대와 오페라를 감상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싼 표를 사놓고, 동행하는 아들에게도 ‘무대는 대단한데 출연진은 기대하지는 말아라’ 하고 설명을 해줬다.

고등학생 아들 역시, 오페라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대가 된다며 좋아했다. 그런데 공연을 보니, 출연자들은 이 오페라에서 조연으로 연기하는 사람들이었다. 주요 무대에서 조연으로 연기하는 출연자들에게 딱 하루 주연으로 연기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래서 표 값이 저렴했지만, 그들이 역량이 부족한 가수들은 아니다. 그날은 특히나 플라시도 도밍고가 직접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지휘를 하여, 오히려 예상을 뛰어넘는 공연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덕분에 우리는 아주 싼 값에 고급 공연을 관람하는 행운을 누리게 된 것이다.

조지 메이슨에 오는 나비부인

케네디 센터의 ‘나비부인’ 공연은 이미 끝났지만, 오는 4월 3일(일) 오후 2시 버지니아 오페라단의 ‘나비부인’공연이 조지 메이슨대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관련 웹페이지: http://cfa.gmu.edu/calendar/474/ ) 무대나 오페라단의 규모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벚꽃이 피어나는 봄날, 나비부인의 슬픈 사랑의 노래에 우리의 슬픔을 실어 보내는 것도 위안이 되리라.

Bravo, Brava, Bravi!


참고로, 무대 공연장에서 관객이 박수를 칠 때 Bravo!(브라보) 하고 외치는 것을 많이 보게 되는데, 본래 세 종류의 감탄사가 있다. “Bravo!(브라보)”는 남성 공연자에게, “Brava!(브라바)”는 여성 공연자에게 그리고 “Bravi!(브라비)”는 다수의 공연자에게 찬사를 보낼 때 외친다.

DC 일대 공연장

워싱턴 DC 일대에는 케네디 센터를 위시한 큼직한 공연장이 많이 있다. 그래서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세계적인 공연들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이다. 그런데 대중성이 있는 공연은 예매 시작되자마자 가장 가격이 저렴한 가격대의 표가 금세 매진되어 버린다. 이런 저렴한 표를 사는 방법은 평소에 해당 웹사이트에서 공연소식을 체크하다가 맘에 드는 공연 소식을 발견하면 즉시 표를 예매하는 것이다. 이미 입소문 다 난 후에 표를 사려고 하면 웬만한 표는 매진되고 비싼 표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나는 7월 2일 울프트랩에서 공연하는 뮤지컬 ‘맘마미아’ 표를 온라인으로 예매해 놓은 상태이다.

또한 표는 가능하면 해당 공연장의 홈페이지에서 혹은 직접 방문하여 예매하는 것이 좋다. 공연 표 판매 대행사가 운영하는 웹사이트에서 표를 살 경우 본래 가격보다 차이가 많이 나게 비싼 가격으로 사게 되는 경우도 있다. 똑같은 표라도 온라인으로 구매하면 서비스료를 내야 하는데 직접 티켓 창구에 가서 사면 서비스료를 절약할 수 있다.

다음은 DC 인근 공연장들의 홈페이지이다. 메일링 리스트에 가입하면 중요 소식을 이메일로 받아 볼 수도 있고, 공연소식을 좀더 일찍 들을 수 있다.

케네디 센터 http://www.kennedy-center.org/

울프트랩 공연장 http://www.wolftrap.org/

스트라스모어 홀 http://www.strathmore.org/

조지메이슨대학 아트 센터 http://cfa.gmu.edu

워너 극장 http://www.warnertheatre.com/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3. 26. 01:04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172494


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영어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 영어를 할 수 있어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것은 20여 년 전 한국에서 어느 가족을 도와줬던 일이다.

동네 이웃이었던 그분은 내가 ‘영어 선생’이라는 것을 알고는 아주 어렵게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동생이 미국 사람하고 결혼해서 미국에 갔는데 요새 전화도 안 오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동생네 집에 전화를 걸면 미국인 신랑이 전화를 받는데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고.” 결국 내가 그 미국인과 통화해 이웃과 미국에 살고 있던 동생의 전화 통화가 이루어졌다. 그 자리에 와서 함께 전화 통화를 하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내게 고맙다고 치하를 했다. 내게는 영어가 별것이 아니었지만 어느 가족에게 영어는 담벼락같이 아득한 장애물이었으리라.

대학원 재학 중에 부속학교의 ESOL 교사로 일을 했다. ESOL 교사의 역할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이 학교에서 영어 때문에 장애를 겪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고 영어도 가르쳐주는 것이다. 학생 중에는 미국 학교에 다닌 지 4년이 넘는 중국인 남매들도 있었다. 오누이가 하이스쿨 10학년들이었는데 오빠는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힘들었고 누이동생은 그럭저럭 기초 의사소통이 되어서 둘이 힘겹게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미국 공립학교 학생으로 여러 해를 보내면서도 기초 영어 의사소통 능력이 안 되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대부분의 미국 공립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교실에서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지각 결석을 하지 않고 자리만 꼬박꼬박 지켜도 이를 존중해주는 편이다. 이렇게 그림자처럼 세월을 보내다 보면 학년은 올라가고 영어 실력은 늘지 않는다.
한국계 이민자 가족 중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는 많이 있다. 나는 종종 주변의 지인들로부터 자녀의 학교와 관련된 도움을 요청받는 편이다. 가족 중에 영어 소통이 되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해서 학교에서 급한 일이 있을 때 내게로 연락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 집은 이민온 지 수 십 년이 되었고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기초적인 영어 소통이 불가능하다.

미국에서 은행카드와 자동차만 있으면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영어 한마디 못해도 은행카드로 물건 사고 차 끌고 돌아다니면서 자유롭게 살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이민 와서 고생해 식품점이나 식당, 세탁소 그 밖의 자기 사업을 일구고 자녀 교육도 성공적으로 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중·장년층 이민자중에서 ‘영어’를 아예 손에서 놓아 버리는 사례도 많이 보인다. 영어는 해도 늘지 않고 이제는 먹고 살 만하니까, 자식들도 다 잘 컸으니까, 더 이상 영어 신경 안 쓰겠다는 판단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 땅에 살고 있는 한 영어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상황은 얼마든지 닥칠 수 있다. 영어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취직을 위해서, 사업을 하기 위해서, 그럴 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내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자유롭게 이웃과 친구 되기 위해서도 영어는 필요하다. 아주 사소한 전화 통화라도, 성장한 자식이나 혹은 영어 잘하는 이웃에게 의지하기보다 나 혼자 힘으로 해결하는 기쁨은 얼마나 클 것인가. 영어 고민에서 해방되는 길은 영어책을 집어 던지는 것이 아니고 영어를 익혀서 ‘정복’하는 것이리라.

봄이 왔다. 가을 추수를 위하여 밭을 가는 농부의 마음으로 이제 다시 영어책을 찾아 들고 지역에서 운영하는 무료 영어 교실을 노크해 보심은 어떠하신지.

2011, 3,23 중앙일보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3. 9. 20:58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165796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1932~2006) 기획전이 국립 미술관의 동관에서 오는 13일부터 10월 2일까지 열린다. 워싱턴 디씨의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은 서관(West Building)과 동관(East Building)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관에는 세계 고전 미술이 망라되어 있고, 동관에는 현대미술이 주로 전시되고 있다.

국립 미술관에서는 2009년부터 In the Tower(탑에서)라는 타이틀로 타워 전시장에서 장기 기획전을 시작했다. 첫해인 2009년에는 미국 현대 추상미술의 대가인 필립 거스톤 (Philip Guston)을 선보였고, 지난해에는 추상표현주의 작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기획전이 있었다. 이들에 이어 올 봄에 세 번째 기획전으로 백남준씨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6개월 이상 관객들과 대화를 하게 된다.

이전에 소개된 필립 거스톤이나 마크 로스코는 특유의 자신만의 화법으로 미국 미술을 세계 미술계에서 한 단계 도약시킨 유태계 거장들이고, 한국계 백남준은 시청각 예술과 테크놀로지와 세계의 신화를 융합시킨, 미국이 두고두고 자랑할 만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거스톤과 로스코가 전시되는 중에도 나는 이 곳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었는데, 그 자리에서 백남준씨의 기획전을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지난 2월 국립미술관에 갔던 나는 백남준씨의 전시회를 준비 중이라는 안내 포스터 앞에서 한국에 두고 온 친정 오라비를 만난 듯한 각별한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는 달력의 3월 13일에 빨간 동그라미를 쳐 두었다. 개관하는 날 가서 그의 작품들을 보려고. 그리고 학생들과 필드트립을 갈 계획도 세워두었다.

이 전시회에서는 백남준의 입체적 비디오 아트 작품들 이외에 그의 회화나 스케치 작품도 별도로 공개가 될 것이고, 그의 삶과 예술과 관련된 영화도 한편 틀어준다고 한다. 그러므로 설령, 백남준에 대하여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다고 해도 관객이 현장에서 그를 만나고 그를 이해하는 데는 큰 문제가 따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난 1월 5일자 칼럼에서 국립미술관에 있는 그의 ‘엄마’라는 작품과, 2월 2일자에서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소장품인 Megatron/Matrix라는 작품을 소개한바 있다. 이번 기획전에서 국립미술관은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거나 임대해온 작품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에서는 백남준을 위시한 현대 비디오아티스트들의 작품들을 한 전시장에서 선보이고 있기도 하다. 리치먼드에 있는 버지니아 미술관(Virginia Museum of Fine Arts)에서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부처(Buddha, Watching TV)’를 만나 볼 수 있고, 버지니아 남부 해안도시 노폭(Norfolk)에 있는 크라이슬러 미술관(Chrysler Museum of Art)에서는 햄릿 로보트 (Hamlet Robot)도 만나볼 수 있다.

지난해 6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라는 기획전을 관람한 적이 있는데, 그 곳에서도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를 ‘비디오 아티스트’ 정도로 알았지만, 그 당시 전시장에서 만난 그의 회화 작품들이 내게는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왜냐하면 1970년대 초반에 그가 스케치하듯 그려낸 작품들 속에 오늘날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스마트 폰’의 화면 같은 장면들이 흘렀기 때문이다. 그 때 백남준씨가 내 뒤통수를 한대 가격한 듯 한 충격을 받았다. 백씨는 오십 년 혹은 백년 후의 세계를 앞서 간 예술가처럼 보였던 것이다.

평생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공부를 멈춘 적이 없으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번개 같은 아이디어를 말로 천천히 표현하지 못해서 말이 종횡무진 건너뛰었다는 백남준. 그가 3월 13일, 우리 곁에 온다. 미국이 자랑하는 국립 미술관의 타워에 부처처럼, 선지자처럼, 그의 작품들이 온다. 전시회는 10월 2일까지 계속될 것이고, 그의 예술은 영원히 우리 기억에 남을 것이다.


국립미술관의 백남준 특별전 관련 공식 페이지: http://www.nga.gov/press/exh/3376/index.shtm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3. 3. 02:26




http://search.koreadaily.com/search/search_result_news.asp?sch_col=news&query=%C0%CC%C0%BA%B9%CC%B1%B3%BC%F6&revjamo

지난 8월부터 매주 수요일에 나오는 내 칼럼 스크랩을 오늘 모두 정리 하였다.  매주 신문이 배달되면 내 칼럼이 실린 면을 잘라내어 별도의 플라스틱 봉투에 차곡차곡 쌓아 왔다.  그냥 그렇게 쌓아 놓은 것을 지난 겨울에 박선생이 와서 살펴보고 읽어보고 하더니 귀한 것을 아무렇게나 방치하다  버리면 안된다고 스크랩북을 만들라고 당부를 했다.  물론 나도 그럴 생각은 했는데, 지난 가을 학기에 나는 도무지 아무런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내가 지난 가을을 어떻게 살아서 버텨냈는지 돌아보면 용하다... 무사히 그 지옥같은 터널을 지난것을 두고두고 감사한다.)

오늘은 좀 여유가 나길래, 작정을 하고 그 스크랩더미를 가지고 학교에 출근을 했다. 그래가지고, 차례차례, 잃어버린것 하나도 없이 순서대로 엮고, 마지막으로 '차례' 표와 커버까지 만들어서 완성시켰다. (뭐 대충 했지만.)

다 모아 놓고 보니, 나는 지난 2010년 8월 18일부터 매주 수요일에 맞춰서 원고를 썼다. 대개는 월요일 오후에 송고를 했고, 편집팀에서 원고를 받았다는 확인을 해 주었다. 당시에 허태준기자가 편집국장을 하고 계셨고, 유승림 기자와 함께 내 학생의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허선생으로부터 칼럼 제안을 받았다. 매주 새로운 글을 써 보내는 일은 한편으로는 약간 긴장이 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즐거운 일이다. 때로는 '뭘 쓰지?'하고 고민에 빠지기도 하지만, 뭔가 새로운 글을 써 보내야 한다는 긴장감은 나를 '깨어있게'만들기도 했다. 나는 이런 긴장감을 좋아한다.





다 모아서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보니, 그동안 29 편의 글을 써 보냈다. 내 글이 정리된 신문조각을 정리하면서, 이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을 뽑아보았는데, 내가 가장 유쾌하게 적은 글은 9월 29일 '보노보는 왜 오렌지 주스를 사양했는가' 이다. 글쎄...내가 왜 이 글을 좋아하는지 나도 알 수 없다.  나는 여전히 영장류의 이야기 (동물 행동학)를 좋아하고, 시간이 날때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들의 행동에 대한 책을 읽고 싶다. (아니, 나는 내가 아닌 다른 동물 -- 인간을 포함한 모든 '타인'들에 대해서 늘 궁금한 편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나는 궁금한게 많다.)

내가 가장 아끼는 글은 12월 8일에 실린 '사시사철 빛나는 크리스마스 트리'.  이 제목은 편집자가 만든 것이고, 내가 원래 송고할때 제목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트리'였다.  나는 내가 쓴 이 글을 읽을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이 글은 십여년전 인터넷의 어느 매체에 썼던 글을 다듬은 것인데, 그러니까 10년가까이 내가 무척 아끼던 나의 글이었다. 이 글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나는 눈물이 난다. 나는 내 글을 읽으면서도 '감동'을 받고 울곤 한다. 나르시시즘의 극단적인 현상일것이다. 내 글이 맘에 들었던지 LA 지역에서도 게재를 한것을 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얘기니까... 하하하.)  LA 에서는 '이 아침에'라는 코너에 가끔 내 글을 옮겨다 싣는듯 하다.




원래 뭔가 스크랩 하는 것이 나의 취미이기도 했다.  컴퓨터 사용이 일상이 되면서, 이제는 정보나 글을 컴퓨터에 담는 문화가 되면서, 심지어 사진마저 디지탈 사진으로 쌓으면서, 손에 잡히는 스크랩을 잘 안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손으로 만들어 놓고 보니 이 역시 '데이타' 구실을 하게 된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고, 정리된 자료는 우리에게 '지도'와 같은 구실을 제공한다. 정리해놓고 기분이 좋아서 기록을 남긴다. 내 글이 '평화의 도구'가 되길 바란다.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3. 2. 20:38
워싱턴 디씨 내셔널 몰에 위치한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에서 2월 27일부터 6월 5일까지 ‘신화의 창조자, 고갱(Gauguin: Maker of Myth)’이라는 주제로 고갱 특별전을 열고 있다. 지난 개관 일에 고교생 아들 녀석과 함께 이 행사에 참석하였다. 전시회의 개장과 관련하여 큐레이터의 특강도 있었는데 영국의 테이트 미술관의 큐레이터이며 에딘버러 대학의 교수이기도 한 벨린다 톰슨 (Belinda Thomson)이 본래 고갱 전시회를 기획한 의도를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Why are you angry?

이 전시회는 고갱이 전 생애를 거쳐서 회화, 조각, 판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일궈낸 예술세계를 아우르는 것이라고 할 만하다. 고갱은 스스로를 ‘이야기꾼(teller of tale)’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작품들 속에는 신화적인 모티브가 풍성하다. 이 기획전은 고갱 개인의 신화, 프랑스 브리타니 지방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신화적 작품들, 남태평양 타히티 섬 지역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신화적 풍경들, 그리고 남태평양의 원시 신앙적 모티브 이렇게 크게 네 가지로 구성되었다.

고갱은 십자가의 예수 그림 속에 자신의 얼굴을 집어넣음으로써 가난 속에서 고통 받으며 예술작업을 하는 자기 자신을 순교자처럼 묘사를 한다거나, 구약에 등장하는, 야곱이 밤새도록 대천사와 씨름하는 상징적인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고, 원시림 속에서 살아가는 오염되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을 낙원의 이브처럼 묘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원시종교적인 소재와 기독교적인 요소들을 회화나 조각에서 접목시키기도 하였다.

고등학생인 아들 녀석은, 고갱이 자화상을 꽤 많이 그렸고, 혹은 그림 속의 등장인물 속에 자신의 얼굴을 많이 끼워 넣은 것으로 보아 꽤나 자기 현시적인 성격이었던 것 같다는 평을 하기도 했고, 고갱의 그림에는 여자들이 주로 그려져 있고, 어쩌다 남자가 나오면 그것은 고갱 얼굴 같다는 독특한 평을 하기도 했다.

이 전시회의 작품들의 제목을 읽어보는 일도 유쾌한 놀이가 될 듯 하다. 가령 시무룩한 표정의 처자 곁에 마을 여인들이 다가오는 그림에 ‘너 왜 골났니?(Why are you angry?)’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가 하면, 두 처녀가 앉아있는 그림의 제목은 ‘너 언제 시집 갈거니?(When will you marry?)’다.

원시림 속에서 태평하게 살아가는 마을 주민들의 풍경을 보면서, 그들의 말소리가 들릴 것 같은 제목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천국과 같았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된다. 고갱은 먼 남태평양 원시림 속의 주민들을 그렸지만, 내게는 그이들이 앞개울에서 빨래를 하며 깔깔대던 처녀시절의 내 고모들 같기도 하고, 내 이웃 아주머니 같기도 하다. 고갱이 타히티의 삶을 그릴 때, 이미 그곳은 더 이상 낙원이 아니었고, 고갱은 그리운 전설처럼, 혹은 신화처럼 주민들을 그렸다. 나 역시 이제는 ‘신도시’가 되어 아파트 단지로 뒤덮인 내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채 잊혀진 전설 같은 고향을 그리워할 뿐이다.

먼 남태평양의 주민들의 풍경을 보면서, 내가 고향을 떠올리거나 그 아름다움에 감동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작품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 정서에 있다. 단순화된 선, 면, 구도로 이루어진 고갱의 작품들 속에는 그 단순성을 뛰어넘는,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그리움이 있다. 그것을 이 전시회의 기획자는 ‘신화’라는 표현으로 풀어낸 듯 하다.

우리는 가끔 여행지의 미술관에서 띄엄띄엄 고갱을 만난다. 그런데 이번 전시회 덕분에 워싱턴에서 고갱의 전 생애를 아우르는 작품들을 한꺼번에 만나볼 수 있다. 미술책을 통해서 한 작가의 작품을 전체적으로 살필 수는 있지만, 실제로 전시장에서 한 작가의 전 생애를 한꺼번에 다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아무쪼록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어느 봄날 소풍 삼아 국립 미술관에 들러서 잃어버린 전설 같은, 혹은 깊은 우물 속의 신화 같은, 옛 동무들의 말소리가 들릴 것 같은 고갱의 그림들을 만나보시길. 입장료는 무료이나 우리가 얻는 감동은 값을 헤아리기 어렵다.

**

관련페이지: 스미소니안 잡지 3월 호에 고갱 특집이 실렸다.  해당 웹페이지에서 전시회 작품의 일부를 감상할수 있다.
http://www.smithsonianmag.com/arts-culture/Gauguins-Bid-for-Glory.html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2. 23. 20:42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159465


“우리가 생존을 위하여 육류를 먹는 일은 도의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가축들에게 마땅한 삶을 제공해야 하며, 고통 없이 목숨을 끊어야 한다. 우리는 가축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 (원문: "I think using animals for food is an ethical thing to do, but we've got to do it right. We've got to give those animals a decent life and we've got to give them a painless death. We owe the animal respect."” )

가축 행동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콜로라도 주립대 교수로 재직 중인 템플 그랜딘 (Temple Grandin)박사는 2010년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하였는데, 그는 두 가지 이유로 유명하다. 첫째는 그가 ‘자폐증’을 딛고 최고의 학문 경지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둘째는, 남성 중심의 미국의 축산계에 여성의 몸으로 뛰어든 그가, 고기로 넘겨지는 동물들을 위해 고통 없는 죽음, 평화로운 죽음을 돕는 시스템을 개발해 냈다는 것이다. 템플 그랜딘 박사는 심신 장애인에게 역할 모델이 될만한 횃불 같은 존재로 존경을 받고 있다. 말 못하고 인간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 죽어가는 동물들에게도 그이는 영웅일 것이다. 그는 짐승의 고기를 먹는 일은 어쩔 수 없지만, 그들을 무참하게, 고통스럽게 도살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지난 해 가을부터 한국에 구제역이 번지면서 해를 넘긴 2월 말 현재도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이제는 매몰된 가축의 처리마저 큰 근심이 되고 있다. 봄기운이 도는 우리나라의 여기저기서 산채로 매장된 돼지의 시체가 땅 위로 솟아오르거나 그 잔해가 지하수를 오염시키는 또 다른 재앙이 발생하고 있다는 국내 기사가 암울하다.

구제역 발생 초기에 축산 농가에서 정성 들여 키운 소와 송아지들을 죽여야 했던 축산 농가 사람들과 도살을 담당한 공무원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알려질 때, 나 역시 이 상황이 너무나 슬퍼서 기사를 제대로 읽을 엄두를 못 냈었다. 그런데 구제역이 확산되면서 돼지 떼를 일일이 해결하지 못하고 한군데에 몰아넣고 생매장을 시켰다는 대목에서는, 멀리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나의 존재 자체가 죄스럽고 참혹했다. 이 문명시대에 아무 죄도 없는 돼지들을 속수무책으로 생매장해야 했던 사람들은 얼마나 비참했을 것이며, 영문도 모르고 발버둥치며 죽어간 돼지들은 또 어떠했을 것인가?

나는 시골 농가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할머니는 정성 들여 키우던 우리 개 ‘누렁이’도 한여름 때가 되면 동네에 돌아다니는 ‘개장수’에게 팔아 넘겼는데, 떠나가는 개를 자식처럼 쓰다듬으며 “좋은 세상으로 가라”고 몇 번이고 축수해 줬다. 닭장의 닭들도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시면 살집 좋은 놈으로 잡아다 그 자리에서 백숙을 만들었지만, 닭들을 돌보는 할머니의 손길은 손자인 우리들을 돌보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정성 들여 키운 소 역시, 집안에 큰 돈이 필요할 때 수원장에 끌고 나갔다. 소를 우시장에 끌고 나가는 것은 할아버지의 몫이었는데, 막걸리 냄새를 풍기며 저녁나절에 돌아온 할아버지는 텅 빈 외양간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어릴 때, 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를 사다가 키웠는데, 그 중에 네 마리가 무럭무럭 자라 어른이 되었다. 나는 날이 궂고 추워지면 그 닭들을 커다란 새장에 모두 담아가지고 내 방에 들여놓기도 했다. 내 닭들은 나의 ‘친구’였으며, 그 닭들은 나를 어미처럼 따라다녔다. 사람들은 닭이 머리가 나쁘다고 하지만, 내가 키운 닭들은 사람만큼이나 영리해 보였다. 한여름이 되자 이들은 단체로 삼계탕으로 변신하여 밥상에 올랐다. 나는 내 친구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을 슬퍼하며 며칠을 울었는데, 삼계탕으로 영양을 보충한 식구들의 표정은 기름지고 즐거워 보였다. 그것이 인생이었고, 나도 하는 수 없었다. 어찌되었건 가축과 우리는 가족으로 공존을 했다.

그래서 ‘먹을 때 먹더라도 잔인하게 죽이지는 말자’는 그랜딘 박사의 주장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죄 없는 가축들이 생매장 당하는 상황도 딱하고, 이를 눈뜨고 바라 봐야 하는 축산농의 상황도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이로 인해 오염되는 우리의 산하도 슬프다. 한국 정부에서 이 가축 생지옥 같은 구제역 사태를 현명하게 수습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은미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2. 17. 01:08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156217

일전에 모처럼 친구와 극장에서 조조할인으로 영화를 보았다. 제목은 ‘Biutiful’. ‘No Country for Old Men’에서 소름 끼치는 악당 역할로 2008년 아카데미 조연상을 받았던 하비에르 바뎀 (Javier Bardem)이 주연으로 나왔다. 제목 ‘Biutiful’은 ‘beautiful(아름다운)’이라는 단어를 어린아이가 잘못 표기한 것이다. 2011년 아카데미 외국영화상 후보에 올라 있다.

영화는 주인공 남자를 중심으로 스페인의 대도시, 바르셀로나의 변두리의 삶을 다큐멘터리처럼 거칠고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권이 무시된 불법이민자들의 시궁쥐 같은 삶, 마약, 매음, 자행되는 불법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드리워진 파란 하늘과 죽음. 오직 ‘죽음’ 만이 유일한 출구처럼 보이는 지옥 같은 삶.

두 시간이 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가슴에 무거운 바위가 얹혀진 것 같은 고통을 느꼈고, 자반 뒤집기 하듯 몇 번이고 몸을 뒤척여야 했다. ‘사는 것이 왜 이렇게 비참하고, 희망이 없는 것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격한 우울감에 신경이 소모되는 듯 했다. 마침내 생지옥을 견디는 듯한 사람들이 죽었을 때, 주인공 남자가 육신을 벗고 유령이 되었을 때야 나는 안도했다. ‘끝났구나. 다행이다.’ 죽음이 위안이며 ‘구원’이라는 사실을 이처럼 극명하게 보여준 영화가 또 있었던가?

지난 보름간, 한국에서 전해지는 뉴스들이 내 가슴을 여전히 무겁게 했다. 세 살짜리 어린 아이가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하고, 마땅히 누려야 할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지도 못한 채, 부모의 손에 무참하게 살해되고 동네 쓰레기장에 유기되었다는 뉴스는 나의 가슴을 무너지게 했다.

한편, 나이 서른도 한참 넘긴 한 ‘시의원’이 지역 자치 센터의 임시직원에게 행패를 부리고 고소를 당하는 일이 생기자, 문제 일으킨 시의원의 어머니가 백배 사죄하는 것으로 문제를 마무리 했다는 뉴스 앞에서, 나는 나이 세 살에 부모한테 살해당한 그 어린 아이를 생각했다. 어떤 아동보육 전문가라는 시의원은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어머니가 앞장서서 세상 문제를 모두 해결해주는데, 어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부모로부터 구박만 당하다가 쓰레기봉지에 싸여 저 세상으로 가버렸구나.

삼십 대 초반의 영화인이 지병과 생계 곤란 속에서 고통을 겪다가 요절했다는 뉴스기사 바로 옆에서는, 어느 영화배우가 신혼집을 30억 원짜리를 얻었다는 행복한 기사가 노래처럼 울려 퍼졌다. 세상의 한구석에서 젊은 예술인이 가난에 시달리다 요절한 것을 애도하는 동일한 페이지에서,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대는 수십억짜리 신혼 집 뉴스는 이세상의 비정함과 부조리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는 것은 참 부조리하며 출구 없는 방처럼 보인다. 그러면 나는 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 해답을 다시 영화 ‘Biutiful’에서 찾는다. 주인공 남자는 암에 걸려 죽어가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은다. 어린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그가 아이들을 위해서 모은 돈은 아이들에게 온전히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죽음과 함께 그의 아이들은 천애고아로 남겨지게 된다.

이 즈음에야 관객은 영화에 등장한 늙은 무녀의 말을 상기하게 된다. “네 아이들은 네가 돌보는 것이 아니야. 네 아이들을 돌보는 손은 따로 있다.” 그리고 졸지에 부모를 잃고 남겨진 아이, 그 아이가 크레파스로 그린 햇살 가득한 세상, 그 세상에 삐뚤삐뚤 적어 놓은 ‘Biutiful’이 생생하게 빛난다.

비참 속에서도 태양은 빛나고, 아이들은 그 태양을 보며 자란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세상의 비참함을 돌아보고, 그곳에 한줌의 빛이라도 뿌리는 일이 될 것이다. 어둡고 비참한 뉴스가 반복될 때마다 우리들은 잠시라도 우리 이웃을 돌아보고 내가 나눠줄 것이 없는지 생각하고 실천하면 된다. 큰 일은 하기 어렵지만, 작은 일은 실천 할 수 있는데,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주 작은 일들이다. 아름다운 (biutiful) 세상을 위하여.

이은미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2. 12. 03:32

어제는, 학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올라가려는데, 몇명의 한국인 신사분들이 맞은편에서 차쪽으로 이동해 오다가 길 가운데서 마주치게 되었다. 물론 나는 이경우 대개 시선을 내리 깔아서 외면하고 (한국식으로) 지나친다. 평소처럼 그렇게 시선을 피한채 지나치려는데 그중의 한분이 내 앞에 정지하여 서서는,  "아이구 이선생이시죠!" 이러시는거다.  (나 이선생 맞지...)

그래서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제서야 상대방을 쳐다봤는데, 물론 나는 모르는 분이다. 내가 이바닥에...아는 분이 어딨나..나는 학교에서 마주치는 사람 외에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내가 이선생 글을 매일 읽는데, 글을 참 잘쓰셔."  (이제는 주위의 일행을 둘러보며) "이선생이 신문에 글을 쓰시는데, 정말 잘 쓰셔..."  

우와, 길에서 이런 인사 받으니까, 이거 참 면구스럽고, 난감하고, 이럴때 '몸둘바를 모른다'는 말을 하는 모양이다. (아 근데, 지나가는 사람하고 신문에 손톱만하게 실린 사진하고 그걸 어떻게 연결시켜서 사람을 알아봤을까?  아 거기가 우리학교 건물주차장이라서 바로 연결시킨건가?)

아무튼 그 난처하고 벌쭘한 상황속에서, 그냥 할말이 없어가지고 겸손하게 고개 숙이고, "아이고 감사합니다. 보잘것 없는 사람을 칭찬해주셔셔..." 이러고 우물거리며 자리를 떴다.  

그러고나서 내가 나를 한번 돌아봤다.  내 꼴이 어땠지? 화장은 좀 신경쓰고 나왔으니까 꼴이 흉하지는 않았겠지.  옷도, 신경써서 입고 나왔으니까 된것 같고...내 태도는 어땠지?  겸손하게 지나치고 있었지? 그것도 합격. 전체적으로 내 인상이 그리 나쁘지 않았겠구나. 다행이다...

내가 다행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 어떤분이 매주 내 글을 읽고, 내 이름을 기억하고, 그 글을 쓴 사람에 대해서 호감을 품었다고 치자. 그분은 나를 모르지만 내 글이 좋았을것이다.  그런데 눈이 밝은 그 분이 길거리에서 나라는 실재하는 사람을 발견했을때, 그때 내가 오만불손해보이고, 용모며 태도가 엉망이었다면, 그분은 여태까지 읽었던 내 글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낄것이다.  형편없는 인간이 글만 반지르르하게 썼군...하고 스스로 실망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분이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을 때는, 그가 평소에 만났던 내 글과, 눈앞에 지나가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나의 인상이 아마도 일치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반가워 했을 것이다.  (내가 선의의 어떤 모르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게 행동한 것에 대해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이따금 "글 잘 읽고 있어요" 하는 인사를 학교에서 모르는 학생으로부터 받는다거나, 그럴때가 있다.  그런데 길에서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속에서, 아무하고도 연결되지 않은,  완전히 타인인 누구로부터 인사를 받기는 처음이다.  그래서 그분이 반갑게 던진 인삿말을 곰곰 생각하다가,  나의 행동거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된다.

남의 눈에 띄거나 안띄거나, 내가 내글을 정성껏 쓰듯, 내 행동을 정성껏 하고, 그렇게 살면, 그것이 내게도 좋을뿐아니라,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 (아는 사람들,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기쁜 일이 될 것이다.  타인의 시선은 나의 지옥이 아니고, 나를 지켜보는 수호천사들의 시선이라고 할수 있다. 거기에 의지해서 내가 나를 더욱 반듯하게 세워야 하는 것이다. 나도 기쁘고, 내 이웃도 기쁘게.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하느님의 눈에도 기쁘게.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2. 9. 21:18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152931

‘Clean up after your dog.’ 미국의 거리를 걷다 보면 이러한 표지판을 만나게 된다. 개를 끌고 나온 개 주인들에게 개똥을 치우고 가라는 메시지이다.

나는 7년 전에 플로리다의 어느 동물 보호소 (Animal Shelter)에서 개를 한 마리 데려왔는데 지금도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버려진 개 한 마리를 입양하여 사는 동안 우리 가족들은 그 개로부터 많은 위안을 받았다. 남의 나라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나와 아이들이나 버려진 개나 서로에게 의지처가 필요했으리라. 엄마가 집을 비운 동안 텅 빈 집에 돌아온 아이들을 미칠 듯이 반겨주는 우리 개는 하늘이 보내준 천사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개를 키울 때 불편한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단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 및 예방접종도 실시해야 하고, 목욕도 자주 시켜야 한다. 개를 데리고 여행을 할 때는 호텔에서 개의 입실을 허용하는지 ‘Pet Allowed’ 표시가 있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 부가적인 요금을 요구하는 호텔도 많다. 셋집을 얻을 때도 역시 개를 데리고 입주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현재 세들어 사는 아파트에서도 개가 있다는 이유로 렌트비를 50달러씩 매달 꼬박꼬박 더 내고 있다.

이런 금전적인 것 외에도 매일 거르지 않고 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시켜서 용변을 밖에서 해결시켜줘야 한다는 것이다. 전에 개인주택에 살 때에는 뒷마당이 넓어서 개가 알아서 해결했는데, 지금은 3층 아파트에 살고 있으므로 아침저녁으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박이 쏟아지거나 개를 끌고 나가야만 한다.

개를 끌고 산책하다가 난감한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가령 내가 깜박 잊고 개똥 치울 비닐봉지를 안 들고 나갔는데 개가 실례를 할 때, 또는 봉지를 하나만 갖고 나갔는데 그날따라 개가 두 번씩이나 일을 볼 때 여분의 봉지가 없는 것이다. 이럴 때 개 주인들은 어떻게 할까? 솔직히 고백하건대, 주위를 살피고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없음을 확인하고, 마음 속으로 ‘저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외친 후, 36계 줄행랑을 치는 수밖에.

우리 아파트 단지 몇 군데에 개똥처리용 쓰레기통과 봉지가 준비되어 있다. 그러니까 설령 봉지를 깜박 잊고 산책을 나갔어도, 근처에 있는 개똥처리 시설로 달려가 문제 해결을 하면 된다. 그럴 때는 여분의 봉지도 한두 장 뽑아가지고 개 줄에 묶어 만약의 사태에 미리 대비를 한다.

개똥 쓰레기통과 봉지는 개를 키우는 아파트 주민을 위한 편의시설이라고 볼 수 있는데, 개똥 치우는 일이 번거롭지 않고 가뿐한 일이 되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개똥을 치우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 간단한 편의시설을 볼 때면 나는 사회적인 장치들이 사람의 행동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미국에 와 처음 놀란 것이, 미국 사람들이 줄을 서는 일에 매우 익숙하다는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어디에 가나 줄을 잘 서게끔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낮은 울타리나 줄을 쳐서 줄을 서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이런 장치에 익숙해지고 줄서기에 익숙해지면, 사람은 그 장치가 없어도 습관대로 줄을 서게 된다. 이는 어찌 보면 미국 사람들이 유독 공중 도덕의식이 높은 선진 문명권의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줄을 잘 서도록 유도하는 사회적 장치들 속에서 습관 형성이 된 것 뿐이다.

그래서, 어떤 개인이나 사람들의 행동을 평가할 때, 사람만 평가하면 우리는 큰 그림을 놓치는 실수를 범하게 될 수도 있다. 그 사회가 사람에게 제대로 된 장치를 제공했는가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입춘도 지났고, 이제 꽃피는 봄이 멀지 않다. 날이 풀리면 사람들과 애완동물들의 산책 시간도 길어질 것이다. 개를 끌고 나가실 땐 비닐봉지를 두 장쯤 개 끈에 묶어가지고 나가시는 것을 잊지 마시길. 일단 습관 형성이 되면 이런 일들이 전혀 불편하지 않고 상쾌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이은미

추가: 왕눈이가 배변 포즈를 취할때 비닐 봉지를 엉덩이 부분에 갖다 놓으면, 똥이 봉지로 투하되기 때문에 똥을 주울필요도 없이 그냥 봉지만 오무리면 작업은 끝난다. 옛날에 아이들 키울때도, 아이들이 배변 신호를 보낼때 배를 쓸어주면서 휴지를 기저귀 위치에 깔아 주면 휴지위에 배변이 되었으므로 똥기저귀를 빨 일이 줄어들었다. 배변 훈련이 이미 유아기부터 진행된 것이다.  그러니까, 개똥도 사실 주인과 박자가 정확히 맞으면 아주 간단한 일인데...이런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애정과 관찰이 필요하다.  만사는 애정과 관찰이라...껄껄~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2. 2. 22:23


백문이 불여일견.  한번 보시지요. :)  백남준씨 자료는 차근차근 정리하여 제대로 엮어보려고 계획만 열심히..촬영 이은미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150196


내일은 설날이다. 나는 워싱턴의 하늘 아래서 떡국을 끓여 조상께 드리는 차례를 지낸다. 세상 어디에 가서 산다고 해도 나는 한국인이고 한국인의 전통을 지키는 것은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의례이기도 하다. 명절 아침엔 한국의 가족이 그리워서 눈물이 난다.

           워싱턴에 살다 보면, 이곳을 찾는 지인들에게 관광 안내를 하거나 필요한 정보를 챙겨 줄 때가 있다. 워싱턴 디씨에서 한국인이 찾아 볼만한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말해주고 싶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 가봐야 해. 거기 3층에 가면 미국의 국보급 미술품들이 전시가 되어 있거든. 링컨 갤러리 중심 부분에 미국 지도를 표방한 백남준의 일렉트로닉 하이웨이 (Electronic Highway) 라는 작품이 있다는 것 정도는 웬만한 미국인들도 다 알고 있을 정도이지. 그런데, 사실 더 놀라운 작품이 거기 숨어있어. 바로 그것을 가서 봐야만 하는 것이지.”

           나는 일단 그 숨어있는 작품 생각을 하면 심장이 쿵 뛰고 코끝이 찡해진다.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 3층 북쪽 회랑의 오른쪽 구석방에 백남준의 진짜 보물이 숨겨져 있는데 제목은 메가트론/매트릭스 (Megatron/Matrix). 전체 215개의 화면에 두 가지 각기 다른 주제가 서로 연결되어 돌아간다. 메가트론 쪽에는 1988년 서울올림픽 참가국 관련 화면들이, 매트릭스 에서는 나선형 속의 개인이 비쳐지면서 개인과 세계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대화하도록 이끈다.

           나는 미술에 관심 없고, 비디오 아트가 뭔지도 몰라. 그러므로 나하고는 상관 없어라고 내 친구가 말한다면, 나는 말해주고 싶다, “이건 미술에 무지한 사람이라도 상관없고, 시각장애인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그냥 거기 가서 그 작품 앞에 5분쯤 서있거나 앉아있기만 하면 돼. 백남준이 이 작품에 숨겨놓은 것이 따로 있어.”

           미국의 심장부 워싱턴 디씨, 미국이 자랑하는 국보급 미국미술품을 소장하는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 3. 거기 빙글빙글 돌아가는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작품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가수 조용필의 노래이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소리쳐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 코드 속에 반복적으로 끝없이 심어놓은 한국의 이미지들, 그 이미지들이 모니터를 수놓으며 변화해 가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비트의 음악들이 그 흘러가는 화면들과 맞물리는데, 그 속에서 홀연히 흘러 나오는 조용필이라니.  내가 한번이라도 국립 미국미술관에서 한국인 조용필의 노래를 들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던가? 백남준씨는 물론 한국이 낳은 한국의 아들이고, 미국 국적의 아티스트로 생을 마감했다. 미국은 그를 한국 출생 미국 미술가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국적이 무슨 상관이란 말 인가, 그는 한국의 아들인데. 

           조용필은 한국의 국민가수로 알려져 있고, 그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불세출의 히트곡이라고 한다. 미국 시민권자와 결혼하여 미국을 자주 오가던 국민가수 조용필은 간단히 취득 할 수 있는 미국 영주권조차 거절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한국의 국민가수로 생을 마칠 작정인 모양이다.

           미국 미술관에서 백남준과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맞닥뜨린 이후 내가 이 미술관을 찾을 때면, 나는 어김없이 메가트론/매트릭스 작품이 설치된 전시장 구석에 가서 밥 한끼를 먹을 시간만큼 앉아있다가 나온다. 허기진 가슴이 밥 한끼만큼 차오른다. 이국 땅, 워싱턴 디씨의 심장부에서 울려 퍼지는 한국 가요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애국가보다도 그 어떤 명곡보다도 더 거친 함성으로 대한민국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남준은 미국의 심장부에 한국을 심어 놓은 것이다. 이것은 고국을 떠나 세계를 넘나들며 활동하던 백남준의 그리운 노래이리라. 그리고 나의 그리운 함성이기도 하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은 매트로 레드라인 (Red Line) Gallery Pl Chinatown 역 앞에 있으며 오전 11 30분 개장 오후 7시에 닫는다. 입장료는 물론 무료이다.



이은미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 26. 22:26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147007


요즘 한국사 교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사 교육을 강화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을 냈다는 기사도 나왔다. 나는 한국사 교육에 대한 활발한 논의를 기꺼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미국에 오기 전, 한국에서 매주 수요일 아침이면 나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눈물을 쏟곤 했다. 어느 프로그램에서 가족 찾기를 진행했는데, 미아가 되었거나 사고로 가족과 헤어졌던 사람들이 출연해 자신을 소개하며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가족을 찾는 사람들이 대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언니, 나는 내가 누구인지 기억하기 위해 매일 엄마, 아버지, 언니, 동생, 내 이름, 그리고 우리 마을 이름을 외웠어. 잊어버릴까 봐 매일 외웠어!”

고아원으로 혹은 남의 집으로 이리저리 떠도는 삶을 살아온 그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간직하기 위해 주문을 외듯 끝없이 이름들을 외웠다는 것이다. 안 그러면, 나중에는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증명할 길도 없어져 버리니까 말이다. 이는 눈물겨운,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 몸부림이었다.

나는 ‘한국사’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는 편이다. 한국사는 바로 내 핏줄에 흐르는 내 삶의 이야기이다. 내 삶의 이야기를 모르면 나의 정체성이 애매해진다.

혹자는 미국 역사는 기껏 300년도 안 되는데 한국사는 반만년이라서 한국사 공부가 상대적으로 어렵고 따분하고, 외울 것만 많아서, 교육이 힘들다고도 설명한다. 그런데, 이런 논의에 반대 의견을 말한 고등학생이 있다. 우리 집 작은 놈은 현재 12학년인데 열 살까지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린 녀석이 한글을 깨치면서 한국사 관련 만화를 비롯해 온갖 책을 들여다보더니 어른들도 모르는 시시콜콜한 한국사 이야기를 천자문 외듯이 혼자 종알거리곤 했다. 그러다가 미국으로 와서 적응하기가 힘이 들었던 듯, 좋아하던 역사책들도 손에서 놓고 말았는데 그래도 여전히 가끔 집에 굴러다니는 한국사책도 읽고, 학교에서 배우는 미국사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런다.

녀석의 설명으로는, 한국사는 반만년이나 되니까, 큰 줄기를 중심으로 배우거나 외우게 되고, 미국사는 300년 안팎이니까 시시콜콜한 것까지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에 아주 복잡하다고 한다. 그러니 학교에서 공부하기에는 한국에서 한국사 배우기나 미국에서 미국사 배우기나 그 난이도에서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런 반문도 가능하다. 한국사 배우기가 어렵다면 땅덩어리 크고 역사도 다채로운 중국의 학생들은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역사 공부를 포기할 것인가?

미국의 역사책은 백과사전처럼 두껍고 내용이 알차고, 한국의 역사책은 암기용으로 외울 것 많고 내용이 충실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학교에서 반드시 백과사전같이 두꺼운 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특히나 요즘처럼 학교나 집에서, 길에서조차 쉽게 인터넷을 활용 할 수 있는 정보 사회에서 책이 반드시 두꺼워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관심 있으면 인터넷, 도서관에서 믿을만한 정보를 취하면 된다. 나 역시 책 보다가 뭔가 궁금하면 인터넷에서 곧바로 믿을만한 자료를 찾아 살핀다. 교육 방법과 자료 탐구의 문제이지 교과서의 두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핵심적인 내용이 정리된 얇고 작은 책이 공부하기에 부담이 적을 수도 있다. 공부할 자료는 얼마든지 널린 세상이므로.

대학 입학을 위해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한다거나 각급 공무원 시험에서 국사과목을 중요 과목으로 다시 끌어올리자는 논의를 환영한다.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어 즐겁고 의미 있는 한국사 교육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국사를 아는 것은 나의 근본을 아는 것이고, 나의 정체성을 형성시켜주며,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힘이 된다. 우리가 근본을 아는 일에 힘썼기에 약소국이면서도 오늘날의 도약을 이룬 것이 아니겠는가?

이 은 미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 19. 21:00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143890


워싱턴DC 한국 영사관에서 열리고 있는‘워싱턴 한미 미술가 협회’ 회원들의 전시회를 관람했다. 작가들은 재미 한국계 미술가들로 한국과 미국의 미술대에서 실력을 닦고 왕성한 활동을 하는 분들이다.‘ Nouvelles Nuances’라는 기획전의 제목이 시사하듯 여러 가지 소재로 새로운 의미나 뉘앙스를 전달하려 애쓴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워싱턴의 한국 영사관에서 미술 전시회를 시작한 것은 2008년부터였다. 그 동안 재미 한국계 미술가들의 전시회가 활발하게 진행 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하지만 내가 미술전을 보기 위해서 영사관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워싱턴 지역에서 살아온 지난 4년간, 시간 날 때마다 워싱턴과 동부의 미술 전시장을 찾는 삶을 살아왔다. 워싱턴의 전시장은 수시로 전시 상황을 확인하고 아무 때나 뛰어가서 보곤 했다. 영사관 이웃에 필립스 컬렉션 (Phillips Collection)이라는 미술관도 있던 터라서 이곳을 지나친 적도 많았지만 영사관의 문지방을 넘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면 나는 왜 번번이 영사관 문 앞을 지키는 서재필 선생께 인사만 꾸벅 하고 그 앞을 지나쳤을까? 영사관은‘관공서’이고, 나는‘관공서’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경기도 용인의 농가에서 나고 자랐으며 나의 삶의 뿌리는 농경사회에 내려져있는데, 우리들은 파출소나 경찰서, 면사무소나 기타 관공서에 대해서 공포심을 갖고 자라났다. 어른들은 애가 울면 '순경이 잡아간다'고 협박했고, 순경은 국가기관의 상징이었으며, 따라서 국가기관과 관련된 곳은 모두 무서운 곳이었다.

상경하여 학교에 다닐 때, 우리 식구들은 무허가 단칸방에서 지냈는데, 그 시절, 가난한 우리 엄마가 ‘동사무소’에 가는 날 엄마는 아주 골치가 아픈 표정이었다. 엄마가 동사무소에 무슨 서류를 떼러 간다고 아침에 나가면 저녁에나 지친 표정으로 돌아왔는데, 나중에 엄마는 약아져서 동사무소 직원에게 담배를 두 갑 정도 사다 주면 서류를 조금 빨리 해 준다는 이치를 배웠다. 이는 모든 민원서류를 손으로 직접 써서 주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일화이다. 엄마에게도 관공서가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성인이 돼 동사무소에서 자원봉사로 영어를 가르치느라 이곳을 내 집처럼 드나들던 시절도 있었건만, 어린 시절의 어두운 기억은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녔다. 요즘 대민 공무원들이 얼마나 친절하고 신속한지 체험으로 알고 있건만, 그래도 여전히 내게 '관공서'는 무서운 곳이고, 될 수 있는 대로 안 가는 것이 상책인 곳이다. 그러니, 어린 시절의 인상은 얼마나 질긴가!

이번에 용기를 내어 영사관 문을 열어젖히니, 1층 대민 업무를 하는 공간의 벽에 미술품들이 배치가 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조심조심 눈치를 보면서 작품들을 관람했다. 사진기를 꺼내면서도 다시 한번 주위의 눈치를 살폈는데, 혹시나 누군가가 “이봐요, 지금 거기서 뭣 하는 거요?”하고 호통을 칠까 봐 조마조마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안락의자까지 마련된 그 영사관 1층 민원실에서 구경을 실컷 하고, 소파에 편히 앉아 쉬다가, 사진기를 꺼내어 작품 사진을 찍는 동안, 이런 나를 신경 써서 쳐다보거나 혹은 내 신분을 확인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민원실이면서 전시장이기도 한 그곳을 둘러보는 동안 복사기 한대를 발견했는데, 그 위에 ‘복사무료’라는 표시가 보였다. 민원인이 급히 복사해야 할 서류가 있을 때, 이곳에서 해결하라는 취지 같았다. 이런 친절한 배려까지 해 주다니! 나는 왜 이 좋은 곳을 그 동안 겁을 내고 안 들어오고 지나치기만 했을까? 길가다가 다리 쉼 하러 들어온대도 아무도 제지를 안 할 터인데.

워싱턴 한미 미술가 협회의 Nouvelles Nuances(새로운 뉘앙스) 전시회에 갔던 나는, 한국의 관공서에 대한 ‘새로운 뉘앙스’를 안고 돌아올 수 있었다. 초대작가인 최아영 화백의 ‘Spring is Coming(봄이 오시네)’처럼 관공서에 대한 내 인상도 얼음이 풀리고 봄이 오는 것 같다. 이 전시회는 2월 23일까지 계속된다.


Choi, Ah-young, Spring is Coming




이 은 미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 12. 22:49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140947




지난해 11월, 애리조나 주립대 학생인 브라이언 밸린저 (Balenger)는 믿어지지 않는 연락을 받았다. 며칠 전 기차역에 놓은 채 자리를 떠나서 잃어버렸던 가방의 주인을 찾는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가방 안에는 그가 자동차를 장만하기 위해 마련한 현금 3300달러가 들어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그 가방을 발견하여 신고한 이가 노숙자, 영어로는 ‘홈리스(homeless)’로 생활하는 사나이였던 것이니, 그의 이름은 데이브 탤리(Dave Talley). 데이브는 4년 가까이 집 없이 떠돌고 있었다. 현금이 들어 있는 가방을 발견했을 때, 그는 분명 유혹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가방이 주인에게 돌아가길 원했다.

이 소식이 각종 매체를 통해 알려지면서, 감동한 시민들이 성금을 보내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그가 돌려준 3300달러를 상회하는 성금이 답지했고, 그는 직장까지 얻게 되어 ‘홈리스’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돌아갈 집이 있고, 그를 기다리는 직장이 있는 그런 삶.



요즘은 ‘천부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소개되어 유튜브의 스타가 된 사나이가 화제다.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는 14년이 넘도록 자질구레한 사고를 치고 유치장을 드나들며 노숙자로 살아왔다. 마약과 술이 그의 타락의 원인이었던 듯 하다. 오하이오의 컬럼버스시에서 그는 ‘신이 선물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설명서를 목에 건채 구걸을 하며 지낸 지도 2년이 넘었다. 어느 날 지역 기자가 그에게 제안한다. “목소리가 정말 좋다면 1달러를 주겠소.” 그리고 이때 보여준 테드 윌리엄스의 너무나도 매력적인 코멘트가 유튜브에 올려지면서 그는 홈리스 역사상 전례 없는 스타가 되고 만다. 어느 텔레비전 쇼에서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술과 마약으로 방탕한 생활을 해서 내 삶을 망가뜨렸지만, 이제 마약에서 벗어난 지 4년이나 돼요!” 그는 분명 우연히, 기적적으로 걸인에서 ‘스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마약의 늪에서 빠져 나와 4년간 버틴 일 역시 내게는 기적처럼 보인다. 이는 그 스스로 노력하여 일궈낸 기적일 것이다.


지난 연말, 한국에서는 ‘맥도널드 할머니’라는 분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십 여 년 동안 트렌치코트를 단정하게 입고, 고운 은발을 멋스럽게 빗어 올리고 꼿꼿한 몸가짐으로 커피 전문점과 맥도널드 매장, 교회를 시계바늘처럼 규칙적으로 오가며 하루를 보내는 집 없는 여성. 그이가 불문학을 전공했고, 외무부에서 공무원으로 20여 년 근무한 경력이 있다는 것과, 오늘도 여전히 국내 신문과 영자신문을 읽고 영어로 일기를 쓴다는 것도 화제가 되었다.

그는 집 없이 떠돌되, 그가 상정한 사람으로서의 자존감을 포기 하지 않고 지루하고 고단한 시간을 버텼으리라. 그이에 대한 소식은 모 방송국에서 그를 밀착 취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이는 사회단체에서 운영하는 시설에 몸을 맡기기보다는 독립적인 삶을 희망했다. 이분의 근황이 궁금해 웹을 찾아봐도 딱히 시원한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이 추운 겨울에 트렌치코트 깃을 세우고 어느 매장 구석에 앉아 추위를 피하고 있을 듯 하다. 맥도널드 할머니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은 것일까?

나는 집 밖에서 잠을 자 본 적이 한번도 없다. 심지어 텐트에서 야영을 한 적도 없다. 저녁이 되면 서둘러 집으로 가야 안심이 되는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 내게 집 없이 거리에서 지낸다는 일은 ‘다른 별’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거리에 나가보면 분명 집 없이 떠도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위에 소개된 분들의 일화에서 이분들이 나하고 한 치도 다를 바 없이 생각하고, 고통 받고, 그리고 자신과 싸우며 인간으로서 하루하루 견디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가진 것 모두 잃었을 때, 내가 그들만큼 용기 있게 삶을 지탱 할 수 있을까? 새삼 묻게 되는 것이다. 겨울바람이 차다. 문밖은 더욱 추울 것이다.

이은미 2011, 1, 12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 6. 12:53
















WednesdayColumn 카테고리는 지난해 8월부터 모 일간지에 수요일마다 실리는 2,000자 칼럼을 모으는 곳이다. (편집자가 딱 2000자로 적어 달라고 해서, 매주 2000자를 정확히 맞추려고 애를 쓰고 있다. 대개 3000자쯤 적은 후에 1000자쯤 날려버리는 식이다. 글을 간결하게 쓰는 연습을 하게 된다.)  가끔 보면 내 글이 LA 지역의 일간지에도 소개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동일한 글에 상이한 타이틀이 달리기도 하는데 나는 그냥 지켜만 보고 있다.  내가 글을 쓰고 타이틀까지 달아서 보내면, 워싱턴의 편집자가  타이틀을 바꾸거나 혹은 내가 보낸것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해서 신문에 싣는다.  나는 편집자의 입장을 이해하기 때문에 타이틀의 변화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때로는 편집자가 달아 놓은 타이틀이 훨씬 내 맘에 들기도 하고 그렇다.  LA에서 내 글을 가져다 쓸때에는 글의 일부가 잘라지기도 하는데, 내 본래 의도가 크게 훼손된 경우를 아직 못 보았으므로 그냥 지켜 보고만 있다.

집에서는 신문 스크랩을 해 놓았는데, 그래도 야금야금 쓴 것이 꽤 모였다. 불특정 주제의 잡문이라서 신경을 안 쓰고 지냈는데, 그래도 칼럼 카테고리에 정리 해 놓으면 나중에 자료화 할 때 편리할 것 같아서, 그리고 한국 식구들이 애써서 찾아보지 않아도 되도록, 내가 블로그에 모아 보기로 했다.

나는 정치 사회적으로 시사성이 강한  글을 안쓰려고 작정했는데, 관심이나 생각이 없어서는 아니고, 그런 식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냥 바람소리나 꽃이 피는 소리, 청개구리가 폴짝 뛰는 소리, 물고기가 즐거워서 물위로 점프하는 소리, 그런 미세한 소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좀 재미있는 현상은, 내가 제법 정치적, 사회적 이슈가 되는 글을 쓰면 그 글은 페이지의 머리 부분에 편집이 되고, 그 외의 글을 적으면 페이지의 하단에 편집이 된다는 것이다.  신문 면 편집자들은 정치 사회적 글은 머릿 기사가 될 만하고, 삶과 관련된 글은 대충 아무데나 편집해 실어도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신문 편집을 한 어두운 과거가 있으므로 편집자의 머릿속 그림을 아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그런 모든 일들이 부질없어 보인다는 것이지.  그래서, 지금은 볕 좋은날 물속의 송사리떼를 들여다 보는 일에 더 관심이 많다.



http://search.koreadaily.com/search_result.asp?sch_col=all&query=%C0%CC%C0%BA%B9%CC+%B1%B3%BC%F6&revjamo

위 링크에 내 글이 차곡차곡 실려있는 편이다. 매주 즐거운 일 만 적을수 있기를 희망한다. 읽는 사람이 행복할수 있도록.

내 제자는 칼럼에 실리는 내 사진이 불만인 모양이다. 사진보다 실물이 더 예쁜데, 왜 이 사진을 싣느냐고 한다. (이렇게 말한다고해서 내가 점수를 더 잘 주는 것도 아니다) 아무튼 더 예쁜 사진도 많은데 왜 하필 이렇게 평범한 사진이냐고 불평을 한다. 그래서 내가 그 친구에게 대답해줬다, "사람이 인물이 너무 좋아도 못 쓴다. 그냥 평범하게 생기고, 눈에 안 띌 정도로 보기에 좋으면 된다. 내가 이 실력에, 이 인격에, 미모까지 대단한 줄 알려져봐라, 내 인생 얼마나 피곤해지겠는가? 은인자중해야 하는거지."  사실 그렇다. 가인박명이다. 나 때문에 나라가 뒤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경국지색). 나의 애국심을 누가 따르랴.

내 칼럼을 가장 열독하시는 분은, 워싱턴지역의 호랑이 사범님, 용인 태권도 관장님이시다. 관장님께서는 내 칼럼을 통해서 나의 근황을 세밀히 체크하신다. 그리고 응원을 보내주신다. 하하하. 우리 지홍이 찬홍이의 영원한 사범님 이시다. :)  관장님께서는 지홍이가 군대에 가서 고생할까봐 노심초사 하시는 중이시다. 아이들이 관장님의 사랑속에서 건강하게 잘 지내주었다.

우리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아마도 매주 열심히 내 글을 찾아 보셨을것이다. 내가 쓴 글은 토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반드시 '여기 틀렸다'고 잔소리를 하셨었으니까.  어릴때는 칭찬은 안하고 야단만 치는 아버지가 불만이었는데, 토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깊은 애정이었는지를 나는 몰랐던거다. 나는 바보였던거다.

글을 잘 써보겠다.  지면 낭비가 안되도록. 기쁨으로 가득찬 글을.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0. 12. 31. 11:52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135012
어제 나는 울었다. 내가 멍청하다는 생각이 들었지. 어제는 정말 엉망이었어. 그래서 아마도 하느님이 매일 새 날들을 만드나 보다. 오늘도 배는 고프지만…’

흑인 십대 소녀 클래리스는 미혼모의 가정에서 학대 받으며 자라났고, 근친에게 강간당하여 애를 낳고, 또다시 임신을 했고, 에이즈에 감염된 채로 살고 있다. 뚱뚱하고 못생겨서 주위 또래들의 조롱을 받고, 사방을 둘러봐도 친구가 없다. 그날 아침에도 클래리스는 끼니도 굶은 채 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비참한 나날들을 반추하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하느님은 인생이 너무나 비참하기 때문에 매일 ‘아침’을 선물하는 것 같다고. 2010년 아카데미 시상식장을 뒤흔든 영화 ‘Precious’에서 주인공 프레시어스 클래리스가 주린 배를 안고 내뱉는 독백이다. 길고 어두운 밤이 지나면 이 세상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아침은 밝아온다. 그러면 우리는 어둠을 잊고 다시 기운을 내어 하루를 살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태양의 아이들이니까.

시간이란 개념을 처음 생각해 낸 사람은 누구였을까? 흐르는 시간의 단위를 계산해내고, 하루, 한달, 일년이란 이름을 붙이기까지는 긴 세월이 흘렀을 것이다. 인간은 하루하루 흘러가는 날들과 지구의 자전, 공전 주기를 엮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한 바퀴 도는 일년으로 나이를 셈하게 되었다. 지구는 공전을 반복하지만, 우리의 삶은 반복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 (Heracleitos)의 말처럼, 시간을 되풀이 하여 살 수는 없다. 해는 매일 떠오르지만 우리의 매일은 새롭다. 반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비참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흑인 소녀 클래리스는 생각한다, 매일 새로 열리는 아침은 절대자가 만들어낸 선물이 아닐까 하고.

2010년이 며칠 남지 않았다. 나의 한 해를 돌아보니, 기쁜 일도, 힘겨운 일도 많았다. 한 해를 전쟁 치르듯 보낸 것 같기도 하고, 얼마 전에는 공들인 일이 수포로 돌아가는 불운도 겪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온 가족이 모두 건강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어린 시절, 우리 남매들이 모두 초등학생 중학생이던 시절, 아버지는 어느 겨울밤에 우리들을 모아놓고 종이를 한 장씩 주셨다. “이 종이에 일년간 잘했던 일, 잘 못 한 일을 적고, 그리고 내년의 희망을 적어보아라.” 우리들은 무릎을 조아리고 앉아서 열심히 그 흰 종이에 여러 가지를 적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여 일등을 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겠다던가, 매일 일찍 일어나서 마당을 쓸고, 어머니 심부름도 열심히 하겠다던가, 그런 어린 아이들의 ‘착한’ 꿈들. 아버지는 나중에 그 글쓰기의 의미를 설명 했다. 꿈이나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향해 가다 보면 설령 계획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해도 아무런 계획 없이 사는 것보다는 성과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셨다. 몇 해 동안 아버지는 연말이면 그것을 적어서 내라고 했고, 우리들의 신년계획은 아버지의 책상 서랍 속에 자물쇠로 채워진 채 보관되었다. 그 행사도 우리들이 각자 머리가 커지면서 사라졌고, 우리들은 각자 자신의 삶을 향해 나아갔다. 나중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밀봉된 아버지의 서랍 속의 서류 뭉치에서 우리들은 어릴 적 우리가 적어 냈던 새해 계획들의 흔적을 읽어 볼 수 있었다. 사실 특별할 것도 없던, 철부지 아이들의 신년 계획을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그의 서랍 속에 보관하고 계셨다는 것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었다.

이제 며칠 후면 2011년이 밝는다. 매일 반복되는 아침이지만, 우리는 어느 하루를 1월 1일로 정하고 새로운 포부와 희망을 갖고 새로운 날들을 향해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여행자가 된다. 그 새로운 한 해가 특별히 빛나고, 기쁨으로 가득 차길 소망해 본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매일 새로운 태양과 매년 새로운 첫날을 선물해 주셨으니, 우리는 기쁘게 그 나날들을 살아야 할 사명이 있다. 오늘은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신년 설계를 해 봐야겠다.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0. 11. 19. 00:46
BMA 제공 팜플렛 사진 일부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115709
2010년 11월 16일 화요일

요즘 메릴랜드주의 볼티모어 미술관(The Baltimore Museum of Art)에서는 Warhol The Last Decade(워홀 마지막 10년)라는 주제의 앤디 워홀(1928~1987)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지난 10월 17일에 전시가 시작되었으며 내년 1월 9일까지 이어질 것이다.

워싱턴 지역에서 사는 것의 장점으로, 나로서는 아무 때나 무료로 드나들 수 있는 각종 국립 박물관과 미술관들 그리고 아름다운 포토맥 강변의 트래킹 코스를 망설임 없이 꼽는다. 볼티모어 역시 워싱턴 지역에서 한 시간 안에 닿을 수 있는 거리의 역사적인 항구 도시이고, 이곳에도 꼭 가 볼만한 미술관이 몇 군데 있다. 볼티모어 미술관의 특징은 유럽 미술의 거장 ‘앙리 마티스’ 컬렉션이 미국 내 최대 규모로 있다는 것이고, 유럽과 미국의 주요 작가들의 작품이 요소요소에 숨어있어 숨바꼭질하듯 작품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앤디 워홀 기획전을 한다기에 아들 녀석과 함께 미술관 산책을 다녀왔다.

워홀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앤디 워홀’ 하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들이 있다. 알록달록한 마릴린 먼로의 초상화, 실물과 일치하게 그려낸 캠벨 수프 깡통 그림. ‘전기의자’라고 불리는 사형대 사진. ‘도대체 이것이 그림이야 장난이야? 이것이 예술이야?’ 우리는 의문에 빠질 수도 있겠다.

워홀은 미국 미술사에서 ‘팝 아트(Pop Art)’ 예술가로 분류되는데, 이는 대중생활 속에서 모티브를 얻고 대중과 호흡하는 미술 조류를 일컫는 것이다. 미국의 팝아티스트 중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이들은 앤디 워홀 외에도 미국 성조기를 다양하게 표현해낸 제스퍼 존스(Jasper Johns)나 낡은 이부자리에 물감을 흩뿌리고 폐품을 수집하여 콜라주를 시도한 라우셴버그(Rauschenberg) 등이 있다.

워홀은 사실 ‘워홀은 이것이다’라고 정의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다채로운 작업을 펼친 작가인데, 피츠버그의 카네기 대학에서 상업미술을 전공한 그는 뉴욕 맨해튼으로 가서 광고미술가로 활약을 하였다. 너무나도 재능이 넘쳤던 그는 상업미술에만 안주하지 못하고 다양한 디자인과 새로운 영역의 미술 분야로 넘나들었다. 그는 폭발하듯 다양한 작업을 거치면서, 그동안 예술의 소재가 되지 못했던 우리 삶 속의 다양한 요소들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깡통 음식 혹은 포장 상자의 무한 재생 작업, 의문의 죽음을 당한 여배우 사진의 무한 재생, 전혀 영화 같지 않은 일상의 지루한 영화들이다.

이번 특별전에 선보인 워홀의 작품은 무엄하게도 종교적 아이콘 예수의 무한 재생이었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작품을 영사기로 되쏘는 식으로 본뜨기를 한 후에 스크린 작업을 하는가 하면, 역시 최후의 만찬에 그려진 예수의 얼굴 이미지를 캠벨 깡통처럼 100회가 넘도록 반복 재생시켰다. 그리고는 길거리 낙서, 그라피티를 연상케 하는 작품 속에 문제의 예수 얼굴을 삽입시키기도 한다. 이것은 신성모독인가 신성의 대중화 인가?

혹자는 1987년 의문사한 워홀의 사망 원인과 그가 말기에 작업했던 예수 이미지의 신성모독을 연결시키기도 한다. 어쨌거나, 그의 죽음은 그가 즐겨 작업했던 여배우 마릴린 먼로의 죽음만큼이나 의문을 남기고 있다.

볼티모어 미술관(http://www.artbma.org/)은 평소에도 다수의 워홀 작품을 전시하는 편이다. 그러므로 이 기획전 뿐 아니라 상설전시장에서도 워홀의 주요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기획전의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지만, 상설 전시장의 작품은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참고로 전시 기간 중 오는 21일까지는 미술관에 음식 깡통 한 개를 가져가면 성인 입장료 15달러에서 2달러 할인을 해준다. 다가오는 추수감사절에 사회단체로 보낼 캔 음식을 모으는 행사인가 본데, 깡통 모티브를 갖고 놀았던 워홀을 기념하는 이 아이디어 역시 워홀만큼이나 발랄해 보인다. 물론 나도 깡통 한 개 갖다 내고 입장료를 할인받았다. 유쾌했다.


앤디 워홀이라는 '거인'을 어떻게든 정리하고 싶어서 밍기적거리다가 장장 1년을 보낸것 같다.  (어쩌면 앤디 워홀이라는 거인 때문에, 내 블로그의 미국미술 정리가 자꾸만 미뤄진것 같기도 하고.) 이제 슬슬 어떻게든 이 큰 산을 넘어서서 내가 본래 계획했던 일들을 마무리 해야겠다는 절박한 느낌도 든다.  말 꺼냈으니 정리하면 되겠지...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