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eums2016. 8. 27. 01:55

Written on Jan. 10, 2010 (updated on August 25, 2016)


공식 홈페이지: http://www.delart.org/

델라웨어주의 주도(행정 수도)인 윌밍턴 (Wilmington)에 있는 델라웨어 미술관

 

 

 

우리집에서 120마일 거리의, 델라웨어주의 주도 (행정수도) 윌밍턴 시에 있는 델라웨어 미술관. 이곳은

 * 미국 식민지시절 그리고 19세기 미술작품

 * 미국 20세기 사실주의

 * 미국 20세기 사실주의 이후의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작품들

 * 영국의 프리 라파엘라이트 작품들

 * 일러스트레이터 Pyle 의 작품들

을  소장하고 영구전시하고 있다. 물론 특별전시도 진행되고 있다.

 

그러니까. 이 미술관에서 세계 여러나라의 역사적인 명품들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피카소도, 마티스도 없으며 이집트 유물도 없다. 위에 명시된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와같이 '미국미술'을 집중적으로 관찰하거나 감상하는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상상치도 못했던 역사적인 작품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윌밍턴 시 변두리 주택가 안쪽에 위치한 델라웨어 미술관 앞모습.  1층 2층에 전시관및 카페, 뮤지엄 샵등을 갖추었고, 지하층은 교육실과 행정실로 사용된다. 겉보기에 나지막하고 작아보이지만, 측면과 후면쪽이 깊고 넓게 설계되어 있어 겉보기보다 전시장이 크고 알차다.

 

 

 

가장 나를 사로잡은 것은 2층 John Sloan과 The Eight 의 작품들을 전시해 놓은 곳.  이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 심장 박동이 갑자기 증가하여 심호흡을 해야 했다.  (기대도 못하고 갔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아아아, 마침내 존 슬로언의 초상화 앞에 서다!  (전생의 애인을 다시 만난듯 반가웠다... 내 원 참...)

 

 

 

 

이건 또 뭐냐. 내가 간밤까지 고민을 하던 레지날드 마시 오빠가 아닌가.  마시 오빠가 여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이쯤 되면 오늘을 그냥 내 생일로 지정을 해도 좋을것 같다...

 

 

 

 

 

그뿐인가! 현대미술 전시장에서 나를 반기던 저 문간의 색동 무늬.  저 색동무늬는 워싱턴 디씨 태생의 Gene Davis 가 아닌가!   데이비스님은 어떻게 내가 여기 오는걸 아시고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시는고?   게다가, 저기 저 벽뒤에 빨간 말대가리! 저 말대가리는 Deborah Butterfield 의 말이 아닌가!

 

 

오오 나의 말대가리야 오랫만이다! 잘 있었니?

 

 

 

 

오오, 인간말대가리! 너도 잘 지냈니?  요즘도 네 어머니는 너를 '말대가리'라고 부르시니?

       응, 우리엄마는 내가 고집세고 질기다고 말대가리라고 부르시지.

 

 

 

말대가리!  말대가리! 정말 반가워!

            나도 반가워 인간말대가리야! 네 머리는 여전히 말총머리구나 인간말대가리!

 

 

 

 

그런데 인간 말대가리야, 네 머리에 난 뿔은 뭐냐?

 

    그건 내가 좋아하는 프랭크 스텔라의 입체 추상화 작품인것이지.. 

 

 

 

 

오오 나의 말대가리!  안녕 말대가리! 안녕...

 

 

 

카페의 음료와 음식은 양심적으로 착하고 (가격이 저렴하고 깔끔하고)

 

 

인형을 좋아하는 돌쇠같은 작은 놈, 가방에 매달라고 도깨비 인형을 기념품샵에서 사고

 

 

 

해파리가 꿈꾸듯 날아다니는 2층 창가

 

 

 

그 창가에서 내려다보이는 야외 카페와 조각공원

 

 

 

동자승같은 꼬마가 하나 서있는데, 그 뒤에 온갖 악당들을 짊어지고 구부리고 있는 사람. 제목은 Protecting Future.  어린아이를 위하여 온갖 번뇌와 시름을 모두 짊어지고 있는 어른. 아아 이것이 부모가, 기성세대가 자식을 위해 후세를 위해 취해야 할 태도인것인가. 인디언 미술을 재현한 것이라 한다.

 

 

 

그러니깐... 내가, 지켜줄테니까, 두려움 없이, 용맹정진하길.. 내가 지켜줄테니까.  너는 햇살을 향해 웃으면서 나아가길.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님에게 주고

슬픈 일이면, 슬픈 일이면, 님에게 주면 안되네...

슬픈 일은 내가 다 막아줄게

세노야 세노야...

그러니까 어디서든 언제든 행복하게 잘 살아라

건강하게...

 

 

 

 

프리 라파엘라이트 미술 전시관에서는, 수첩에  기념 스탬프도 찍어보고.  옆의 나뭇잎사귀같은 문양은 프리라파엘라이트 미술의 상징적인 버들잎 문양.

 

 

 

스탬프를 찍은 손바닥만한 수첩의 표지는 이러하고... (꽃과 요정들이 매우 촌스럽게 그려진 매우 촌스러운 수첩)

 

 

 

자질구레한 것들을 담아 가지고 다니기 위해 기념품샵에서 산 헝겊 가방.  제법 커서 내 핸드백과 책과, 뭐 소소한것들이 한꺼번에 다 해결된다.

 

 

 

 

대규모 국립 미술관에 비하면 작은 규모이지만, 기대이상으로 알찬 소장품들을 가지고 있는, 보석같은 미술관이다.

 

 

미술관 도슨트 (docent)의 안내도 받아서  재미있는 새로운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미술 책에 씌어있지 않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이야기들.  앞으로 이 미술관에서 보고 배운 미국 미술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슬슬 풀어보겠다. (아, 아, 아, 기대하셔도 좋다...)

 

 

2010년 1월 9일 (토) 맑음. redfox

 

p.s.

 

위의 Deborah Butterfield 의 말대가리 녀석과 나는 인연이 깊다.

 

이놈은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의 링컨 갤러리에 있는 말. 겉보기에는 폐목으로 만든것 같은데 재료가 Bronze (청동)이라고 해서 내가 갈때마다 들여다본다. 정말 브론즈야? 고목나무 조각 아니야?  (2008년 5월 사진)

 

 

 

이놈은, 매사추세츠주 보스톤 인근에 세일럼 (Salem)이라는 '마녀사냥'으로 유명한 항구 도시, 이곳에 Peabody Essex Museum 이 있는데, 그곳 1층에 서있던 말이다.  이 말은 주위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울타리를 쳐놔서 나를 서운하게 만들었다.  링컨 갤러리의 말에는 울타리 안쳐놨지만 아무도 건드리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이 말에는 왜 울타리를 쳐놓는가?  (2009년 8월 사진)

 

 

 

해파리가 그리웠지.  바다나 수족관에 가야 해파리를 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오늘 유리로 만든 해파리들을 봤지.  해파리라면, 한국마켓 식품부에 '해파리 냉채'용 해파리도 있었던 것이지. 해파리... 하지만 나의 해파리는 푸른 바다를  이리저리 떠돌아.  상념처럼. 기억처럼.  오래전에 지워진 기억처럼. 아주 오래되어 너덜너덜해진 기억처럼.  지워진 꿈처럼. 해파리처럼.

 

 

 

 

 

Posted by Lee Eunmee
Pop Art2011. 10. 24. 06:32

Cakes (1963) oil on canvas
Wayne Thibaud (1920- presently working)
사진. National Gallery of Art 동관 1층 2010년 1월 16일 이은미 촬영



집으로 날아온 Smithsonian Magazine 2011년 2월 호에 Wayne Thibaud 특집 기사가 실렸다.
http://www.smithsonianmag.com/arts-culture/Wayne-Thiebaud-is-Not-a-Pop-Artist.html
기사를 재미있게 읽고, 내가 갖고 있는 사진파일을 뒤져서 들여다본다.


Wayne Thiebaud (1920 - )   --'웨인 티보' 라고 발음한다-- 는 현재 91세의 현역 화가이다. 2차 대전후의 미국의 현대 미술을 주도했던, 앤디 워홀, 프란츠 클라인, 윌렌 드 쿠닝, 리히텐 스타인등 굵직 굵직한 인물들이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다.  오늘에서야 그의 이름 Thibaud 를 '티보'라고 읽을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이유는 아마도 그의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잘 몰라서였을것이다.  정확한 발음을 모를경우 기억하기가 힘들다. (이제는 아마 잊지 않을것도 같다.)

미국의 현대 회화를 지나치다보면 '반드시' 큼직하게 그려진 파이 그림을 만나게 된다. 동글동글한 파이가 모여있거나, 하나가 있거나, 아이스크림을 아주 크게 그려놓거나, 캔디볼이 있거나 이런 그림들이 보인다. 큼직한 미술관에서 이런 그림을 한점 봤다면 '웨인 티보'라고 아는척을 해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것이다.

이 다양한, 그러나 반복적인 케익 그림은 앤디 워홀의 '갭벨 수프 깡통' 그림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다. '상품'을 그림에 담아 놓은 스타일이 비슷해서일 것이다. 산업사회에서 대중적인 상품들이 가지는 '미적 가치'를 워홀만큼 신나게 대변한 이가 또 있을까. 티보의 케익 그림 역시 이런 스타일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나는 일단 티보의 케이크 그림을 '팝 아트'에 끼워 넣기로 한다. 

그러나, 티보를 팝 아티스트라고 규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가 팝 아트만 한 사람이 아니므로, 그가 팝아트적 작품들로 유명해졌고, 널리 알려진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진행중인 그의 예술세계는 팝아트를 넘어서 다채로운 시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스미소니안 기사에서는 (혹은 wayne thiebaud paintings 이미지 검색을 해보면) 그의 매우 매력적인 풍경화들이 소개가 된다.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하던 Richard Diebenkorn (1992-1993)의 풍경화 기법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는 티보의 풍경화는 간략하면서도 세밀하고 깊다.

스미소니안 기사를 읽어보면, 티보는 '만화가,' '광고미술가' 등의 이력을 거쳐 뒤늦게 본격 회화의 길에 입문하였다. 그의 이력을 보면 그는 나이 서른이 넘어서 미술 학사와 석사를 받았다. 그 자신, 헐리우드에서 광고나 영화 광고 쪽에서 활동하면서 돈을 많이 버는 일에 열중했다고 한다. 앤디 워홀 역시 상업 미술 분야에서 독보적으로 성장을 했다. 아무래도, 동부에서 앤디 워홀이 상업미술로 돈방석에 오르고 있을 즈음, 서부에서 웨인 티보가 비슷한 이력을 쌓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는 만화, 광고 일러스트레이션, 광고제작등의 이력을 거쳐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열어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의 그림의 소재들이 가게 진열대의 달콤한 케익, 사탕 항아리, 아이스크림, 오락기등인 것을 보면 광고쟁이로서의 그의 전력이 여전히 그의 회화의 밑거름이 되고 있지 않은가. 광고쟁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제품'들을 회화로 구현해 낼 생각을 했을까 말이다.

티보의 그림들을 들여다보면서, 그의 그림 소재가 된 것들의 일관성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생각해본다. ...음...문방구에 가서 문방구에 쌓인 것들을 사진기에 담아서 연작으로 그려보면 어떨까. 문방구 풍경, 문방구 안의 아이들, 문방구 앞의 전자 오락기 앞에 앉아서 노는 아이들, 그 앞에 쌓인 장난감 뽑기 껍데기, 그 알록달록한 껍데기 뭐 그런것만 시리즈로. 

티보는 UC Davis 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70에 은퇴를 했는데, 그 후에도 지금까지 명예교수로 미술 특강을 하는데 여전히 학생들이 몰려 온다고 한다. 나이 90에 현역을 달리는 화가. 참 복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나를 사로잡은 그림은 아래의 풍경화. 제목 Brown River, 2002. 그림이 빛에 반사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내 책상 밑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었는데도 아래 부분이 반사가 되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지도'와 같다. 헬리콥터나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장면 같은 풍경.  그런데 그림을 들여다보면 그림자의 방향이 일관성이 없고, 그리고 색상이 참 다채롭고 깊다.  그림자의 방향이 왜 일관성이 없을까?  예컨대 왼쪽 상단 구석의 푸른 나무 그림자를 보면 태양이 그 뒷쪽에서 비치는 것 같은데, 강 오늘쪽 굽이진 강둑의 나무 그림자는 오른쪽 위에서 태양이 빛나는 것 처럼 보인다.  어린 아이라 하더라도 빛과 그림자의 이치만 안다면 금세 알아차릴 이런 방향의 불일치를 화가가 몰랐을까?  알았다고 봐야한다. 그러면 그는 왜 이런 장난을 했을까? 이 자도안에 모든 '시간성'을 다 집어 넣고 싶었던걸까? 

 

이렇게 아름다운 '지도' 그림을 보면, 나는 가슴이 쿵쿵 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아, 얼마나 매혹적인가.






아래의 그림은 Man in Tree (나무의 남자).  티보가 1978년부터 그리기 시작하여 아직도 작업을 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30년이 넘게 그의 품에서 색을 입어가고 있는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채색이 꽤나 깊다.  그래서인지 화면에서 보석같은 색감이 불빛처럼 흘러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아 찾았다!

http://americanart.si.edu/images/2004/2004.30.4_1b.jpg
티보의 풍경화가 어딘가 눈에 익어서 뒤져보니, 내가 그의 풍경화를 본 적이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 1층.  에드워드 호퍼와 조지아 오키프 그림이 있는 전시장 왼쪽에 이 커다란 풍경화가 걸려있다. 나는 이 그림 앞에서 한참을 이유도 모른채 서성이곤 했었다.  이 '지도'같은 그림 앞에서면, 뭔가 그리워진다. 자동차를 몰고 이 풍경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위) 2011년 1월 25일 작성


(아래) 2011년 2월 12일 (토) 방문,  작성 (사진 촬영: 박찬홍)
본 페이지 맨 위에 소개된 작품. National Gallery of Art 1층에 전시된 작품. (카메라가 바뀌어서 색감도 조금 차이가 난다). 대략 사람과 비교하여 이정도 규모의 작품.




같은날,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 이작품을 보려면 에드워트 호퍼의 Cape Code Morning 이 전시된 뒷편으로 가면 된다.

위의 이미지를 보면 강물이 연분홍처럼 보이는데, 전시장에가서 원화를 보니 내 카메라에 담긴 이미지가 좀더 원화의 색감에 가까웠다. 강물이 노리끼리한 분홍빛에 가까웠다 (얼핏 노란 탁류를 연상시키는 색감이었다).







(아래) 2011년 10월에 이 전시장에 방문 했을때, 위의 LeVee Farms 가 걸려 있던 자리에 새로운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티보를 보러 가볼까...'하고 갔는데 새로운 작품이 걸려 있어서 예기치 않았던 선물을 받은듯 그렇게 반갑고 기뻤다.
이러한 풍경화는 동시대에 같은 지역에서 활동을 한 리차드 디벤콘 (Richard Diebenkon http://americanart.tistory.com/1400  )의 풍경화와 많이 닮아있다.  그래서 두사람의 풍경화를 비교해서 보는 일도 재미있다.






(아래) 2011년 4월 12일, 대학원생들과 함께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에 필드트립을 갔던 날, 3층 링컨 갤러리에서 찍은 사진.  이 작품의 제작 년대가 1962년으로 표시 되어 있다. 미국에 앤디 워홀을 위시한 팝아트 운동이 불길처럼 퍼져갈때의 팝아트 작품으로 분류 될 만하다.  팝 아트 페이지에서 간단하게 적은 바 있듯이, 이미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어 나온 대상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그냥 열심히 그렸다. 앤디 와홀은 스프 깡통이나 포장 상자를 그대로 베끼듯이 그려 댔고, 웨인 티보는 알록달록한 컵케이크들을 그려댔고. 그 와중에 이런 잭폿 기계도 그렸을 것이다.

2011년 4월 12일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 링컨 갤러리.
Posted by Lee Eunmee

Swing, 1969, Acrylic and aluminium on canvas

Photo by Lee, Eunmee, 3rd Floor,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January 14, 2011


스미소니안 아메리칸 아트 뮤지엄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 3층에 걸려있는 쌤 길리엄의 '그네 (Swing, 1969). 스미소니언 미국 미술관은 여러점의 길리엄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지만, 전시되고 있는 것은 이 작품 하나, 그리고 Luce Foundation Center (그림창고같은 전시장) 구석에 평면적인 액자 작품이 하나 걸려있다.

Corcoran 미술관에서도 그러하고, 요즘 진행되는 필립스 콜렉션의 전시회에서도 그렇고, 미술관들은 길리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커튼 널어놓은 것 같은 작품 한점과 이런 작품들의 평면 모습을 보여주는 액자 작품을 형제처럼 걸어놓는 편이다.  그리고 그 외의 평면적인 다른 작품들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분위기 이다.  그는 60년대외 70년대에 이렇게 '걸어 놓는 캔바스' 작업에 열중하고, 그 이후에는 꼴라쥬를 위시한 다양한 작업을 했는데, 미술관에서는 그의 '널어 놓는 설치 미술' 쪽에 애정을 보내고 있는듯 하다. 왜냐하면, 아무래도 이 '널어 놓는 캔바스'가 그의 독특하고, 새시대를 여는 발상이었고, 나머지는 남들도 다 하는 것들이니까 그럴 것이다.

아래는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의 쌤길리엄의 작품이 전시된 전시실 풍경이다.

사실 이 사진을 찍었던 날은, 나의 관심이 백남준의 작품에 집중되어 있었다. 백남준 보러 갔다가, 간김에 또 한바퀴 둘러보던 식이었다. (그래서 결국 온종일 발품을 팔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왼쪽 구석에 쌤길리엄의 '그네'가 매달려 있다. 전시실 중앙에 백남준의 'Zen' 이라는 텔레비전 작품이 있다. 나는 처음에 이 백남준씨 작품을 보고 지나치면서, "테레비가 고장이 났나?" 뭐 이러고 말았었다.  그런데 바로 이 '한줄 그은듯한 선' 그것이 백남준씨가 의도한 'zen'이었다.
창문이 있고, 하얀 석고상같은 여자가 창밖을 내다보는 작품이 Georg Segal의 조각 작품이고, 오른편에 Rauchenberg 의 콜라쥬 작품이 두점 보인다.






 




3층 전시실 복도. 내가 사진을 찍는 위치가 백남준의 Megatron/Matrix 전시실 입구 쯤이 될 것이다. 내가 서 있는 왼편 전시장에 백남준의 방이 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20세기 비디오아트 기획전이 진행중이다. (현재에도 진행중).  쌤길리엄 작품 외에 전시장 전체를 담아보는 이유는, 이것이 그가 속한 미술의 어떤 시대이고, 그리고 그가 미국 현대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가늠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예술가들의 일생을 단 몇줄로 요약해보면, 대개는 그의 '대표작'이 한두가지 들어가게 되는데, 그 대표작이 그의 '마지막'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지. 삶의 어떤 시간속에 그 어떤 순간이 존재하고, 사람들은 그것만을 기억할 뿐이지.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잊혀지고 말아.  쌤 길리엄은 현재 노인이지만 젊은이 못지 않게 왕성하게 자기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고 할수 있지.  그런데, 아직 그의 삶이 끝나지도 않은 상태이지만, 획기적인 어떤 변화가 없는한, 결국 그는 벽에 걸어놓은 커튼같은 캔바스작품, 그리고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같은 설치미술작품 이 두가지로 기억되고 말것이지.

우리가 어떤 사람의 삶을 기억할때는, 그의 '종말'이 아니라, 그가 가장 빛나던 순간을 기억해주는 것이 좋을것 같다.  이래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어 시체되고 벌레들의 먹이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해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의 가장 빛나던 장면 그런 것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술가를 기억할때는 그의 마스터피스를 기억해주니까.

종말이 아닌, 삶의 장면들에 포커스를 맞춰보면, 삶은 다른 각도에서 무척 신기로와 보일것이다. The best is yet to come. 내 인생에 최상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이런 백치같은 optimism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Photo by Lee, Eunmee, Chrysler Museum, VA, November 29, 2009


버지니아 남단 Norfolk 라는 해안 도시에 Chrysler Museum이 있다. 이 박물관 중앙 천장을 장식한 쌤 길리엄의 작품. Norfolk Keels (1998).  크라이슬러 뮤지엄 앞에는 호수가 있어서, 석양에 호수가 반짝거리면 미술관 벽과 천장에 물결 그림자가 일렁인다. 환상적인 장면이다. 

그 천장을 장식한 쌤길리엄의 작품.  (관객중에 안경끼고 삐딱하게 서 있는 우리 박선생.) 


그 당시에도 이 작품이 참 인상적이어서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 두었는데, 내가 쌤 길리엄을 직접 만나서 악수를 하게 되리라고는 그때는 상상도 못했었다.






Posted by Lee Eunmee

 


Photo by Lee, Eunmee, Phillips Collection (1st Floor), Washington D.C. March 31, 2011


아주 작은 소품이다. 대략 가로 25 센티 세로 12 센치쯤 되려나? 실물 크기의 죽은 새 그림이다.  나뭇잎에 둘러싸인 죽은 새 한마리가 전부인 그림이다. 서리가 내린 듯 해 보이는 화면. 황금 새.  알버트 핑크햄 라이더의 그림이 터치가 거칠고 전체적이로 투박한 편인데, 이 그림속의 새 그림은 단순한 터치 속에서도 세밀한 묘사가 되었다.  그 점이 좀 특이했다. (평소에 내가 익히 보아오던 그의 그림 스타일과 차이가 났다.)


이 죽은새 그림을 본 순간 D.H. Lawrence 의 Self-pity 라는 시가 떠올랐다.

Self-Pity

  H.D.Lawrence

I never saw a wild thing
Sorry for itself
A small bird will drop frozen dead from a bough
Without ever having felt sorry for itself.



자기 연민

나는 들짐승이 자기 연민에 빠진것을 본적이 없다
작은새가 얼어죽어 나뭇가지에서 떨어질때
그 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슬퍼해본적도 없었으리라

(몇해전에 번역 해 봤던 시)

동일한 어떤 정서를 작가는 글을 통해, 화가는 그림을 통해 전달하는 것 같다. 이 그림과 이 시는 쌍둥이처럼, 똑같다 (내게는.)  그래서, 이런 그림을 보거나, 시를 대하게 되면 "우리가 저 작은 새와 다를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내가 중대하다고 생각하는 잡다한 것들이 뭐가 대단하단 말인가. 뭐 그다지 서러울것이 있단 말인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번 눈감고 이 세상 떠나면, 내 육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뭐 이런 생각이 들면서, 말보로 사나이처럼 쿨~ 하게 아쉽고 서러운 것들을 짐짓 외면하고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2011년 3월 31일 (목) 오루 6시 30분.  필립스 콜렉션 2층 계단 앞에서 Sam Gilliam 과 큐레이터의 대담이 있었다.  관객들은 그들 앞에 둘러서서 이야기를 듣고, 나중에 질문 답변 시간을 가졌다.

나는 작가가 정면으로 보이는 맨 앞의 마룻바닥에 편히 (퍼질러) 앉아서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였다. 사진 촬영을 금지 시켰기 때문에 아무도 사진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도, 사진을 찍지 못했으므로, 하는수 없이 갖고 있던 공책에 메모를 해 가면서 간단히 그 장면을 스케치를 하였다.  내가 스케치한 뒷 배경에 색칠한 것이 Flour Mill 이라는 그의 설치 작품이다.


아래에 내가 어렵사리 사진 한장을 찍을수 있었다.  Sam Gilliam 과 그의 뒷편의 계단과 계단 너머의 설치 작품.  쌤 길리엄의 설명으로는 계단 역시 작품에 포함되는 구도라고 했다. 계단이 장애물이 아니고, 계단과 설치 작품이 어우러지는 것이 최종적인 이 작품의 목표인듯 했다. (방앗간에서 밀가루를 빻는 과정을 상징한다고 한다).





나는 바닥에 앉아서, (아이들이 방바닥에 앉거나 누운채로 어른의 이야기를 듣듯) 편하게 이야기를 들으며 펜으로 메모를 하거나 간단한 스케치를 했는데, 그의 양말이 내 눈에 들어왔다. 가로줄무늬 그의 양말은 그와 동시대에 워싱턴에서 함께 활약했던 (그들은 모두 Washington Color Painting School 멤버들이다) Gene Davis 의 작품을 연상시켰다.  그래서 나는 Gene Davis Socks 라고 메모를 해 두었다.

Phillips Collection 에서 인상적인 작품이 뭐냐고 큐레이터가 물었을때, 1962년에 전시장에서 본 Braque (브라크)의 'Shower (소나기)'라고 답했다.  브라크의 소나기는, 내가 브라크 작품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인데!  그래서 나도 얼른 "It's my favorite, too!" 라고 메모 해 두었다.

필립스 콜렉션에 걸려있던 브라크 작품중에 내가 유일하게 관심을 갖고 사진기에 담아놓은 것이 바로 그 '소나기'라는 작품인데... 대개 브라크는 피카소와 쌍벽을 이루는 큐비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브라크의 작품중에 가장 정감이 가는 것은 큐비즘에서 약간 비껴있는 그 '소나기'라는 작품이다. 쌤 길리엄과 나의 정서가 어디쯤에서 서로 만나고 있는듯 하다.  (그래서 내가 그를 찾아 간 것이겠지만...)




그래서, 갤러리 토크가 끝나고 작가가 의자에 앉아있을때, 사람들이 다가가서 인사를 하기도 했는데, 나도 그에게 다가가서 내가 메모하고 스케치 한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1933년에 태어났고, 한국에 있는 내 엄마는 당신보다 몇년 늦게 태어났다. 우리 엄마는 아마츄어 화가이다. 나는 당신의 작품들을 유수의 미술관에서 모두 살펴 보았으며, 그래서 오늘도 당신을 보기위해서 찾아 왔다. 내게는 아주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당신의 입에서 쟁쟁한 화가들에 대한 회상이 나올때, 나는 감동받았다. 내가 미술책에서 본 사람들을 당신은 생생하게 내게 전해주고 있었다."

그는 내 공책에 싸인을 해주면서, "엄마가 한국의 어디에 계시는가?" 물었다.  나는 '서울'이라고 말했다 (일산이지만). 쌤 길리엄의 이력중에는 고교 졸업후에 군복무를 한 경력이 있다. 아마도 군복무 경력으로 대학때 학비 혜택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데...혹시 한국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아무튼 쌤 길리엄은 엄마가 한국의 어디에 계시는지 재차 물었으니까...

아무튼, 나는 쌤 길리엄의 싸인을 내가 스케치 한 것 위에 받았다. "우리 엄마에게 이것을 보여드리겠다"고 그에게 말해줬다.

그리고 물었다, "그런데 내가 당신 사진 한장 찍으면 안될까? Would you mind if I take a picture of you?"

"Oh, sure!  Go ahead!"

그는 사람좋게 허허 웃어주었다. 아, 참 마음좋은 신사 할아버지셨다. 1933년생이니까 만 78세이시다.  그래갖고 내가, 사진 촬영이 금지된 곳에서, 화가 선생님의 승락을 받고 그분의 사진을 찍어 올수 있었다는 것이지 헤헤헤. (내가 너무 흥분해갖고 카메라 조작을 실수를 해서, 동영상을 일부 찍었다. 그래서 그의 웃는 목소리까지 담아왔다.)




아, 나는 쌤 길리엄의 친필 서명이 들어있는 이 메모장을, 액자를 해 놓을 생각이다. 헤헤헤.  다음부터 미술관에 갈때는 줄쳐진 공책 말고, 작은 스케치북 (몰스킨 같은것)을 갖고 가야겠다.



갤러리토크의 내용은 추후에 정리하여 올리겠다.

아래 사진은 필립스 콜렉션이 소장하는 The Shower. Braque 의 1952년 작품이고 1953년 필립스 콜렉션이 구매했다. 1962년에 워싱턴 디씨로 이사온 쌤 길리엄이 미술관 구경을 왔을때 브라크의 이 작품이 마음에 들었는데, 그 이유는 지나가는 소나기를 브라크가 잘 그려냈으며  이를 가로지르는 '자전거'가 참 예뻐 보였다고 한다.  나도 그 자전거가 이뻐서 이 그림이 맘에 들었는데... 기본 색조는 전형적인 브라크의 색조이지만, 그의 유명한 큐비즘 추상작품과는 약간 다르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좋아했다.

오늘 심지어 쌤 길리엄과 나의 복장도 비슷했다. 우리 둘다 감색 더블 버튼, 금단추 상의를 입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양말과, 슬리퍼 신발. (하하하)






Posted by Lee Eunmee



Photo by Lee, Eunmee, National Gallery of Art, September 5, 2010


 













Posted by Lee Eunmee
Pop Art2010. 11. 16. 04:52

볼티모어 미술관 2층, 현대미술 전시장은 여러개의 연결된 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입구쪽 자그마한 방에,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문제 1)  아래의 세가지 작품은 세명의 각기 다른 작가들이 작업 한 것이다.  혹시 이 작품들의 작가들을 짐작하시는 분? 

 

 * 하나는 쉽게 맞출것 같다

 * 두개까지도 맞추는 분이 있을것이다.

 * 세개 모두 작가를 맞춘다면, 당신은 전문가일 것이다.

 

하나도 못맞췄대도 속상해하지 마시길. 관심 없으면 재미 없는 것이고, 몰라도 상관 없는 것이므로. :-)

 

 

 

 

문제 2) 그런데 이 세가지 작품이 왜 한방에 있을까? 

 

답은...나중에요... (신변잡기는 이제 작작 좀 하고, 블로그 제목에 맞게 미국 미술 좀 들이 파야겠지요... 하도 안쓰니까 이제 작가들 이름도 가물가물 해져요.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해요...)

 

 

 

 

2010년 11월 13일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촬영

 

2010년 11월 13일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촬영

 

 

2010년 11월 13일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촬영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10. 10. 21. 08:57

Flying Dutchman

completed by 1887

Albert Pinkham Ryder (1847-1917)

oil on canvas mounted on fiberboard 36.1x43.8 cm

 

Images introduced here are Albert Pinkham Ryder’s paintings on view at the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on December 29, 2009. For viewers’ better understanding the whole scale of this particular painter’s artworks, I added title tags right next to each piece.

 

Presently, SAAM holds 28 pieces of Ryder, and here is the full list of artworks at the Smithsonian: http://americanart.si.edu/collections/search/artwork/results/?id=4199.

 

Put your cursor on the image and click twice, you will have a better view of these photos.

                                                                                      --RedFox.

 

 

알버트 라이더에 대해서 제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좀, 어이없는 계기 때문인데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105 제가 에드워드 호퍼에 대해서 시리즈로 정리를 한 바 있는데,  에드워드 호퍼의 한장의 그림이 저를 매우 가렵게 했습니다.  바로 이 그림입니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중에서 (1층에 있습니다) 왼편이 Cape Cod Morning,  그리고 오른쪽의 '집' 그림 제목이 Ryder's House 였던겁니다.

 

케이프 카드라는 곳은 미국지도 보면 나옵니다. 바닷가의 유명한 휴양지이지요. 그리고 문제의 Ryder's House 도 이곳에서 호퍼가 그린것이라고 알려져있는데, 그런데 Ryder가 누구길래 그 집을 그렸냐 하는거죠.  궁금한거죠. 가려워 미치는거죠. 미술관의 작품 안내문을 봐도, 이 집의 정체는 안밝혀주고 뭐 그림의 구도나 색채에 대해서만 '잔소리'를 하는겁니다.  내가 궁금한것은, 라이더가 누구이고, 라이더의 집이 왜 중요한가 뭐 이런건데요.

 

 

 

그렇게 가려운 세월을 보내던중, 에드워드 호퍼 관련 서적에서, 간단히 지나치는 언급중에, 이 집이 미국미술가 Ryder의 집이었다는 내용이 있는겁니다. 딱 한줄짜리 내용이었습니다. "미국미술가 Ryder가 이집에 살았어? 그런데, 호퍼는 그 사람 집을 왜 그렸대? 친구였대? 뭐지?"  이렇게 혼자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중얼 하는거죠. 네, 저는 혼자 중얼거릴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입니다.  이 '라이더'의 집이 미국미술가의 집이었다는 것도 '사실'인지 아닌지 애매하고, 이 집이 작은 오두막인지 커다란 집인지도 애매합니다.  그림에서는 작아보이지만 실제로는 커다란 집이라고도 하고요. '사실'로 확인된 정보를 저는 별로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같은 미술관 2층에서 아예 '라이더'로 '도배'가 된 전시실 하나를 만났습니다.  언뜻 보기에 멀미가 날 것같은 바다 그림, 그리고 어딘가 종교적인 분이기가 팍팍 나는 그림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전시실에 들어섰는데, 이름표를 들여다보니 Ryder 였습니다.  (갸가 갸여?  이 라이더가 그 라이더인감?  거시기가 거시기여? -- 혼자 또 중얼중얼).

 

그런데 또 들여다보니, 오매, 요 사람 라이더(1847-1917)가  에드워드 호퍼 (1882-1967)보다 한세대 앞선 사람이긴 헌데, 딱 '호퍼'급이네~ 이런 기분이 사사삭 드는겁니다. 왜 호퍼를 연상시키는가하면

 

 1. 호퍼(1882-1967)가 바다와 배를 즐겨그렸는데, 그 바다와 배의 구도가 라이더(1847-1917)와 비슷해요

 2. 신비한 쓸쓸함이 묻어나요

 3. 고집스러운 의지, 은둔자의 고집스러움, 혹은 결연함 같은것이 느껴져요.

 4. 딱 loner (외톨이) 풍이에요.

 

이런것은 물론, 제가 받은 인상입니다.  미술비평가들은 Ryder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로 (1) Marsden Hartley (2) Jackson Pollock 이 두사람을 꼽습니다.  이들이 자신의 미술세계에 영향을 준, 혹은 최초의 미국 근대미술가로 '라이더'를 칭송했기 때문입니다 (Hughes, 1997. pp 362-365)).  그러면, 왜 라이더가 미국 현대 미술의 '아버지'급으로 인정을 받았는지, 책에서 읽은 내용을 전하기 전에, 그냥 그림이나 살펴보지요.  그림을 보다보면...뭐가 잡히겠지요.

 

 

 

요나 (Jonah)

 

Jonah ca.185-1895

Albert Pinkham Ryder 1847-1917

oil on canvas mounted on fiberboard 69.2x87.3cm

 

요나...는,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이지요. 요나가 거대한 물고기에게 삼켜졌다는 일화인데요.  라이더가 '구약'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그림을 그렸군요.

 

 

이 글을 적고나서 8개월이 흘렀습니다.

또 가서 이 작품을 봤습니다.  이번에는 홀에 앉아서 '킨들'을 꺼내어 구약의 Jonah 를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제가 성경 이야기를 잘 몰라요.  그래서 찾아 읽어보니 조나 (요나)가 야훼의 '심부름'을 피해서 도망을 갑니다.  그러니까 야훼가 '요놈 네가 도망가봤자 내 손바닥 안이니라' 이러시는 것이지요.  조나가 배을 타고 도망을 가니까 풍랑이 일게 하고, 커다란 물고기의 뱃속에서 '반성'하게 만든 것이지요.  그 후에도 조나가 뭐라고 투덜대니까 야훼가 야단을 치고 그럽니다.  저는 그 '조나 (요나)' 장을 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작품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아주 재미있는 것을 발견 했습니다.  위의 사진을 두번 클릭하면 좀더 큰 이미지로 볼수 있는데요, 가만 보면 그림 윗부분, 구름 중앙 부분에 하얀 산신령 같은 이미지가 보입니다. 아, 야훼 이십니다.  하하하.  야훼의 오른손 (우리가 보기에 왼편)에는 검은 공 같은것이 들려 있습니다.  아무래도 야훼의 손 안에 있는 '지구'가 아닐까 상상해봅니다.  아랫쪽 가운데에 물에 빠진채 두 손을 들어 올린 조나가 보이고, 그 윗쪽 오른쪽에  큰 물고기가 보입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운명이나 사명을 피할 길이 없을 때는 받아들여야만 하겠지만, 우리는 도망 가고 싶을 때가 더 많을겁니다.  투덜이 조나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매일 거울 속에서 조나와 만나기 때문일겁니다.

 

 

 

 

 

날으는 네덜란드인

Flying Dutchman

completed by 1887

Albert Pinkham Ryder (1847-1917)

oil on canvas mounted on fiberboard 36.1x43.8 cm

 

http://americanart.textcube.com/292  삽화가 하워드 파일 (1853-1911)의 페이지에서 Flying Dutchman 의 전설을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요, 똑같은 전설을 라이더는 이렇게 그려냈군요.  파일의 작품은 1900년에 그려졌고, 이 작품은 그보다 3년전에 탄생했군요.  동일한 소재를 작가들이 어떻게 구현해냈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겠군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292 해당 페이지

 

 

 

기울어진 배

With Sloping Mast and Dipping Prow, ca.1880-1885

Albert Pinkham Ryder 1847-1917

oil on canvas mounted on fiberboard 30.4x30.4cm

 

 

 

 

 

 

떠나는 페가수스

 

Pegasus Departing, by 1901

Albert Pinkham Ryder 1847-1917

oil on canvas mounted on fiberboard, 36.1x43.8cm

 

 

페가수스는 신화속의 날개달린 말 입니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죽었을때, 메두사가 흘린 피에서  나타난 말이라는 설도 있고, 바다의신 포세이돈과 메두사 사이의 자식이라는 설도 있는데요. 날개달린 말, 페가수스의 등위에 페르세우스가 타고 있지요. 페르세우스와 페가수스는 안드로메다 공주를 구원해주기도 하고, 음악의 신들의 샘이 말랐을때 페가수스가 샘을 만들어주었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전원

Pastoral Study, 1897

Albert Pinkham Ryder 1847-1917

oil on canvas mounted on fiberboard, 60.9x74.6cm

 

 

연인들의 배

 

The Lover's Boat ca.1881

Albert Pinkham Ryder 1847-1917

oil on wood 28.9x30.5cm

 

'연인들의 배'라는군요. 

 

이 그림을 보니까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가 생각났는데요. 이런 시가 있거든요.

 

Meeting at Night
   Robert Browning (1812-1889)

The gray sea and the long black land;
And the yellow half-moon large and low;
And the startled little waves that leap
In fiery ringlets from their sleep,
As I gain the cove with pushing prow,
And quench its speed i' the slushy sand.


Then a mile of warm sea-scented beach;
Three fields to cross till a farm appears;
A tap at the pane, the quick sharp scratch
And blue spurt of a lighted match,
And a voice less loud, through its joys and fears,
Than the two hearts beating each to each!

 

Browning 의 또다른 시, Porphyria's lover 라는 시도 있고요.  옛날에는, 이런 드라마틱한 사랑의 시도 즐겨서 낭송하고 그랬는데요.  미지의 어떤...사랑을 꿈꿀때.  옛날에요.  아직 인생이 뭔지, 사랑하고 헤어지고 그런게 뭔지 잘 알지 못할때. 어릴때는 어떤 '드라마'를 꿈꾸쟎아요.  지금은, '환멸'의 시대를 사는것도 같아요. 인생에는 환상의 시대가 있고, 현실의 시대도 있고, 그리고 환멸의 시기도 있는듯 한데요.  환상의 등불들이 하나, 하나, 하나 꺼져가는 시기.  특히 무엇이 나를 서럽게 한다거나 실망시켜서가 아니라,  무수히 빛나던 것들이 하나 하나 꺼져가는거죠.  그런데, 라이더는 아마도 죽을때까지 삶에 대한 어떤 환상을 간직했던것도 같아요. 이런 그림을 그린것을 보면.  (그러니까, 그가 예술가이겠지요.)  아니 가만있자, 1881년이면 1847년생이니까, 34세.  음, 34세면, 아직 뭐 연인들의 보트라던가 이런 환상을 갖고 있을만도 한 나이가 아닐까... ㅎㅎㅎ. (그래, 아직 인생에 대한 어떤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시기였는지도 모르지.)

 

 

 

 

 

 

달빛

 

Moonlight, 1887

Albert Pinkham Ryder 1847-1917

oil on mahogany panel, cradled  40.4 x 45.0 cm

 

휘영청 밝은 보름달에, 배 한척이라. 달빛이 내 뺨에 가득 어리는듯 평화로운 풍경이죠.....

 

 

 

 

울린의 딸

 

Lord Ullin's Daughter, before 1907

Albert Pinkham Ryder, 1847-1917

oil on canvas mounted on fiberboard

52.0x46.7cm

 

스코틀랜드에 전해내려오는 이야기 입니다. 율린의 딸이 마을의 청년과 사랑에 빠졌을때, 율린은 불같이 화를 내며 이들의 사랑을 반대 했습니다. 그 청년은 율린의 집안과는 원수 집안의 사람이었으니까요. (로미오와 줄리엣 얘기 같죠?)

 

율린의 딸은 애인과 도망을 칩니다. 율린의 딸이 애인과 야반도주를 하여 호숫가에 이르렀을때 풍랑이 몰아칩니다. 율린의 딸은 뱃사공에게 호수를 건너게 해 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뱃사공은 풍랑이 위험해서 배를 몰고 나가고 싶지 않아 거절합니다. 율린의 딸은 제발 호수를 건너서 도망하게 해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뱃사공은 내키지 않지만, 이 사랑하는 연인들을 위해 노를 저어 나갑니다.

 

율린의 딸이 도망친것을 알게 된 율린은 부하들을 이끌고 딸을 잡으러 달려옵니다. 잡기만 하면 이 '년놈들을' 죽여버려서 가문의 수치를 씻어버리리라 다짐하지요.

 

비운의 연인들을 싣고 풍랑을 헤치며 나아가던 뱃사공은, 그러나 그 자신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배는 풍랑에 뒤집히고 맙니다. 율린이 딸을 잡기 위해 호숫가에 이르렀을때, 풍랑은 잠잠해지고 호숫가에 이제는 시체가 되어버린 율린의 딸이 물결을 따라 밀려옵니다.  한 팔은 사랑하는 남자를 잡고, 한 팔은 구조를 요청하느라 내 뻗친채 뻗뻗한 시체가 된 처녀의 몸이 호숫가에 밀려옵니다.  두 년놈을 잡아 죽이리라 장담하던 율린은 자신을 책망하며, 가슴을 치며 통곡합니다.

 

 

Lord Ullin's Daughter

http://www.rampantscotland.com/poetry/blpoems_ullin.htm

 

 

Thomas Campbell (1777-1844)

 

A Chieftain to the Highlands bound,
Cries, 'Boatman, do not tarry;
And I'll give thee a silver pound
To row us o'er the ferry.'

'Now who be ye would cross Lochgyle,
This dark and stormy water?'
'Oh! I'm the chief of Ulva's isle,
And this Lord Ullin's daughter.

'And fast before her father's men
Three days we've fled together,
For should he find us in the glen,
My blood would stain the heather.

'His horsemen hard behind us ride;
Should they our steps discover,
Then who will cheer my bonny bride
When they have slain her lover?'

Outspoke the hardy Highland wight:
'I'll go, my chief - I'm ready:
It is not for your silver bright,
But for your winsome lady.

'And by my word, the bonny bird
In danger shall not tarry:
So, though the waves are raging white,
I'll row you o'er the ferry.'

By this the storm grew loud apace,
The water-wraith was shrieking;
And in the scowl of heaven each face
Grew dark as they were speaking.

But still, as wilder blew the wind,
And as the night grew drearer,
Adown the glen rode armed men-
Their trampling sounded nearer.

'Oh! Haste thee, haste!' the lady cries,
'Though tempests round us gather;
I'll meet the raging of the skies,
But not an angry father.'

The boat has left a stormy land,
A stormy sea before her-
When oh! Too strong for human hand,
The tempest gathered o'er her.

And still they rowed amidst the roar
Of waters fast prevailing;
Lord Ullin reach'd that fatal shore-
His wrath was chang'd to wailing.

For sore dismay'd, through storm and shade,
His child he did discover;
One lovely hand she stretch'd for aid,
And one was round her lover.

'Come back! Come back!' he cried in grief,
'Across this stormy water;
And I'll forgive your Highland chief,
My daughter!- oh, my daughter!'

'Twas vain: the loud waves lash'd the shore,
Return or aid preventing;
The waters wild went o'er his child,
And he was left lamenting.

 

 

 

 

계속...

 

 

 

 

 

참고문헌:

 

Robert Hughes (2009), American Visions: The Epic History of Art in America (pp. 352-365), New York: Random House.

 

 

 

Posted by Lee Eunmee
Conceptual Art2010. 2. 11. 00:04

Serial Project, 1 (ABCD) 1966

Baked enamel on steel units over baked enamel on aluminium

50.8 x 398.9 x 398.9 cm

(대략, 4미터짜리 정사각형 위에 51센티 높이의 도형들)

Sol LeWitt 1928-2007

2009년 9월 29일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촬영

 

 

앞서서 Sol LeWitt (1928-2007) 의 페이지들을 열었는데요

 http://americanart.tistory.com/category/Conceptual%20Art

 

제가 단순히 그의 작품들을 대충 살피면서 몇가지 열거한 그의 특징들이 있었습니다.

 

1. 삼각형 (혹은 사면체), 사각형(혹은 육면체)들이 어떤식으로든 평면적으로 혹은 입체적으로 교 차한다

 2. 선과 면들이 평면적으로 어루러져서 입체감을 드러내거나, 혹은 입체면이 평면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3. 결국, 선과 선, 삼각형, 사각형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4. 단순하다 (군 말이 필요가 없다)

 5. 경쾌하다.

 6. 작가의 싸인이 없지만, 작가의 개성을 감추지는 못한다. (너무나도 개성이 돋보인다)

 

 

회화나 예술을 따로 전공하지 않는 평범한 관객의 시각에서 이렇게 눈에 보이는대로 열거를 해 본 것인데요, 어쩌면 이런것들이 솔 레윗의 평생의 예술을 대략 정리하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솔 레윗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그에 대한 설명으로 두가지가 나옵니다.

 1. 개념예술(conceptualism)이라는 '어휘'를 최초로 도입한 미국의 현대예술가다.

 2. 미니멀리즘 (minimalism) 작가다.

 

맞는것 같죠?  우리가 대충 살펴보면서 대강 짐작했던 사항들을 미술비평가들은 이렇게 두가지로 정리 해 놓는거죠: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 예술가.  예술을 '물리적인 대상'이 아닌 '아이디어' '개념'으로 시도했다는 면에서 개념예술가였던 것이고,  군말이 필요없이 단순한 형태를 추구했다는데서 미니멀리즘을 찾아볼수 있는거죠.

 

위의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된 Serial Project 관련 문건에 LeWitt 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고 합니다:

 

"The aim of the artist would not be to instruct the viewer but to give him information. Whether the viewer understands this information is incidental to the artist; he cannot foresee the understanding of all his viewers. He would follow his predetermined premise to its conclusion avoiding subjectivity. Chance, taste, or unconsciously remembered forms would play no part in the outcome. The serial artist does not attempt to produce a beautiful or mysterious object but functions merely as a clerk cataloging the results of his premise."

http://www.moma.org/collection/browse_results.php?criteria=O%3AAD%3AE%3A3528&page_number=3&template_id=1&sort_order=1  페이지에서 발췌했습니다.

 

"예술가의 목표는 관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관객에게 정보를 주는 것이다. 관객이 주어진 정보를 이해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예술가가 통제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는 모든 관객이 자신의 의도를 이해할거라고 예견해서는 안된다. 예술가는 주관성을 배제한채로 그 자신이 정한 전제가 결과에 이르도록 한다.  우연, 취향, 무의식적으로 기억된 형태들은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연작의 예술가는 아름다움이나 신비한 것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단지 그가 세운 전제의 결과들을 카탈로그로 만드는 직공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런데 솔 레윗을 미니멀리스트라고 부르지 않고 개념주의 예술가로 칭하는 이유는, 개념주의가 미니멀리즘보다 한 발 더 앞으로 나간 개념이라서 그럴것입니다.  미니멀리즘이 감정이 분출하는 군더더기들을 배제하고 극단적인 사물의 고유의 형태을 향해 나아갔다고 정리한다면,  개념예술은 이러한 미니멀리 즘적 예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술가의 '아이디어' 자체를 예술이라 보고, 그 아이디어가 시각적인 혹은 물리적인 것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에 개입되지 않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미니멀리스트가 자신의 작품을 직접 제손으로 제작했다면, 개념예술가들은 '아이디어'만 제시할뿐 내 손으로 만드는 행동조차도 배제하러 들었다는 것이지요.  위에 솔 레윗이 적은바와 같이 예술가 자신의 취향이나 우연성, 주관성등을 작품에서 배제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카탈로그'를 만드는 직공에 자신을 비유 한 것입니다.

 

"the idea itself, even if not made visual, is as much a work of art as any finished product." (Pohl, 2008, pp 495)

"비록 시각적으로 구체화되지 않는다 하더도,  아이디어 자체는 완성된 작품과 마찬가지의 작품이다." 이 말은 솔 레윗의 1967년 발언이라고 하는데요,  앞서의 페이지에서 본 것처럼 솔 레윗은 '작품에 대한 지시'만 한장 적어서 보내는 것으로 작품 활동을 했쟎아요 (작곡자의 악보처럼). 이에 대한 그의 설명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작품에 대한 지시사항, 그것이 완성된 작품과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지요.  때로는 그것이 구체적인 결과물을 낳지 못할때도 있지만 말이지요. (악보가 있는한, 그 음악은 언제든지 연주가 가능한거쟎아요.)

 

 

개념주의(Conceptualism)는 네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1. 예술작품은 아이디어나 컨셉(개념)이지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다.  예술작품을 형성하는 아이디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술작품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 자체를 시각적으로 보지 않아도 예술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다. (뭔 소리다냐? 할수도 있죠. 동의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 RedFox)

 

2. 개념예술에서 예술작품과 언어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집니다. 예술작품을 '아이디어'로 정의하므로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지요. '아이디어'는 언어로서 구체화 되는 것이므로.  솔 레윗이 그의 '아이디어'를 종이위에 몇줄의 문장으로 끄적거려주면, 그 지시사항에 따라서 누군가가 예술작업을 하지요 (우리가 그 지시사항대로 작업을 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솔 레윗과  그 작업을 하는 '나'의 해석이 이 예술의 본질을 구성하게 됩니다. 작가와 나와 아이디어의 결과물을 연결해주는 것은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 언어'죠.

 

3. 개념예술은 예술의 상업성에 비판적 시각을 견지합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예술은 돈많은 사람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오죽하면 '플란더스의 개'에서 얘기했듯, 가난뱅이는 그 잘난 예술 작품을 '구경'하기도 어려웠겠습니까.  대우그룹의 총수였던 김우중씨가 세계적인 콜렉터였다고 하는데요, 그분이 나라에 갚아야 하는 빚이 엄청나다는데요, 미술 경매인들이 김우중씨 몰락했다고 하니까, 그 미술품좀 시장에 내 놓으라고 회유를 했다는데, 그래도 그는 꿈쩍도 안 했다고 합니다.  저는 다른 정치적인 논의를 할 생각은 없고요, 이게 무슨 말인가하면, 예술이 '아름다움'이네 '인류 문화'어쩌네 해봤자, 이게 언제부터인가 돈놓고 돈먹기식의 축재수단, 투자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아이오와 주립대가 2007년 홍수로 물에 잠겼을때,  그 대학 미술관 소장품이었던 잭슨 폴락의 작품을 팔아서 미술대를 살리자는 의견도 나왔다고 하쟎아요.  작품 하나 살리면 대학 살림이 피는거죠. 이게 다 뭐란 말입니까? 정말 한장의 그림에 그러한 가격이 매겨지는 것이 합리적인 것일까요?  단지 잭슨 폴락의 싸인이 들어있으면 걸레쪼가리도 비싼값에 팔려나가고, 뭐, 이게 온당한걸까요?   개념예술가들은 바로 이런 현상에 강한 물음표를 제기하는거죠.  작곡자의 '악보'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연주되쟎아요. 그 악보를 누군가 혼자서 독점 할수는 없는거죠.  개념예술가의 '아이디어'역시 누군가가 독점을 할수는 없는거죠.  이들의 아이디어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4. 물리적으로 만들어진 예술작품보다 그 작품의 '아이디어'를 더 중시한 개념예술가들은 예술작품의 소유가 불러오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서도 비판적입니다. 3번과 같은 맥락인데요, 미국에서도 그랬고, 현재 세계여러나라에서, 사람들이 돈 좀 벌면, 작품 사들이죠. 마치 우리가 보통 고급 학력으로 자신의 포장하듯, 가질거 다 갖추고 돈이 너무 많아서 골치 아픈 사람들이 가는 곳이 미술품 시장인데요, 그래서 대개 재벌집 여사님들이 고급 옷으로 치장을 하고 보석도 모을만큼 모은 다음에 서로 누구네집에서 뭐 사들였다더라 경쟁하듯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들을 수집하쟎아요. 제가 미국에서 돌아다니면서 구경한, 재벌들의 후원으로 세워진 박물관의 소장품들이 따지고 보면 다 서로 이렇게 경쟁하고 뭐 그런 결과인데요. 예술작품에 대한 이해보다는, 누가 누구의 것을 몇점이나 가졌다더라 식의 악세사리로서의 예술품. 혹은 끼리끼리 사이에서 '없으면 지는거다' 라던가 '너는 피카소 없지? 난 피카소가 열점이나 있단다'식의 문화 권력 놀이. 이런 현상에 대해서 이들은 비판적이었습니다.

 

 

솔 레윗(1928-2007)은 러시아 출신의 유태인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고향은 커넥티컷주의 하트포드시. 한국전에도 참전했던 사람입니다. (아, 한국하고도 인연이 있던 분이군요...) 1960년대에 Jasper Johns, Robert Rauchenberg, Frank Stella 등과 어울리며 활동을 했습니다. (쟁쟁한 이름들이지요!)  예술에서 Conceptualism (개념주의)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입니다. 제가 앞서서 소개한 그의 작품들이 대개 그의 개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들입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가서 찍어와야 할 작품이 있는데, 나중에 업데이트해드리겠습니다.

 

 

개념예술은...제가 잘 모르던 분야였는데, 이것에 대해서 공부하면 할수록, 이것참, 혁명적인 아이디어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술의 권력화...이것은 사실은 예술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것이쟎아요.  2002년에 사망한 프랑스의 사상가 브르드외가 프랑스 시골출신의 수재가 1960년대에 파리에서 공부하면서 발견 한 것이 언어/문화의 권력화 현상이었거든요. 문화가, 혹은 언어가 '차별'의 수단이 되고, 문화/언어가 사회적 권력의 수단이 되더라는 것을 이 촌뜨기 수재 청년이 직시하고 직감했는데요.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솔 레윗이라는 러시아 유태인계 이민자의 아들도 '미술'이 미술의 본질에서 벗어나 상업주의와 결탁하고, 미술품이 권력의 악세사리가 되는것을 문제시한 것이지요. 각기 다른 대륙에서, 각기 다른 분야에서, 비슷한 연령의 청년들이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세상과 부딪쳐 나간것도 같군요.

 

 

사실 저 위에 제가 올려놓은 작품 사진, 저 사진 찍을때, 저는 솔 레윗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요즘 솔 레윗 들여다보다가 문득, "아, 전에 이 사람 이런 작품 어디서 봤는데..." 하다가 찾아보니 나오더라구요. 지금은 저 작품이 왜 저기 놓여있는지, 저것이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인지 대충 알지요.  아이고, 아는만큼 보이는거죠...

 

 

 

 

 

참고자료:

 

http://www.moma.org/collection/browse_results.php?criteria=O%3AAD%3AE%3A3528&page_number=3&template_id=1&sort_order=1

 

Frances K. Pohl (2008),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New York, NY: Thames & Hudson

 

Stephen Little (2007). ...isms: Understanding Art.New York, NY: Universe Publishing

 

 

Posted by Lee Eunmee
Conceptual Art2010. 2. 10. 13:10

2009년 9월 19일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촬영

 

2009년 가을, 햇살 좋던날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갔었지요.  사실 저는 여기서 앤디 와홀의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비극의 주인공 재클린이 보이지요.

 

 

 

2009년 9월 19일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촬영

 

그런데 재클린의 푸른색의 비극이 보이던 건너편에, 이번에는 불길한 붉은색, 푸른 색조의 뭔가가 보이는겁니다. 다가가서 보니 역시 앤디 와홀의 '전기의자'였습니다. 사형수들이 앉는다는 전기의자 말이지요.  재클린의 비극만큼이나 이 전기의자, 불길하죠...  불길한데, 충격적이죠.  그리고, 사람들은, 어떤 '충격'에서 쾌감을 느끼기도 하지요. (사람, 참 복잡해요...).

 

그렇게 제가 '앤디 와홀'님의 불길하고 충격적인 작품에 눈독을 들이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 이 파란 천장입니다. "뭐냐 이거, 동그라미, 세모, 네모, 가위표 다 있네 이거...천장에다가도 별 짓을 다 했어요..."  뭐 별일이다 싶어서 사진도 찍고, 그렇게 그냥 지나쳤던 것인데요.

 

 

 

 

 

Wall drawing #351, 1981

Chalk and latex paint on plaster

 

On a blue ceiling, eight geometric figures: circle, trapezoid, parallelogram, rectangle, square, triangle, right triangle, x.

 

Sol Lewitt (1928-2007)

2009년 9월 19일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촬영

 

 

벽화 351번으로 알려진 이것은 1981년작 입니다.  물론 이 천장화를 그리기 위해서 솔 레윗이 직접 미술관에 온것은 아닙니다. 그는 그저 그의 '지시 노트'만 보냈을 뿐입니다.

 

파란색 천장에, 여덟가지의 기하학적 도형: 동그라미, 사다리꼴, 평행사변형,  직사각형, 정사각형, 삼각형, 정삼각형. 가위표.

 

 

솔 레윗의 지시에 따라서,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어느 돔형 천장에 이런 천장화가 완성되었고,  그렇게 천장화가 탄생했습니다. 솔 레윗은 작업을 감독하러 나타나는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은 솔 레윗이 이탈리아의 아씨씨(Assissi) 지방에 있을때 창작해 낸 것이라고 하지요.  돔형 천장은 르네상스기의 성당 천장을 연상시키지요.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성당 벽화도 이런 둥근 천장에 그려진 것이지요. 르네상스기의 천장과 21세기의 개념미술이 만나면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천장화와 같은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지요.

 

제가  이전 페이지를 통해서 솔 레윗의 작품 사진을 올리고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런데, 미술 미평책을 들여다 볼 필요도 없이,  솔 레윗의 작품들을 그냥 시대 무시하고 주루룩 살펴보니 이들이 갖고 있는 어떤 속성이 보입니다.   어느 시기의 어떤 형식의 작품이건 간에 솔 레윗의 작품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면들은:

 1. 삼각형 (혹은 사면체), 사각형(혹은 육면체)들이 어떤식으로든 평면적으로 혹은 입체적으로 교차한다

 2. 선과 면들이 평면적으로 어루러져서 입체감을 드러내거나, 혹은 입체면이 평면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3. 결국, 선과 선, 삼각형, 사각형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4. 단순하다 (군 말이 필요가 없다)

 5. 경쾌하다.

 6. 작가의 싸인이 없지만, 작가의 개성을 감추지는 못한다. (너무나도 개성이 돋보인다)

 

그러니까, 이 솔 레윗의 개념미술 작품의 재미있는 점이 뭔가하면, 작가가 작품에 직접 개입하지도 않고 악보 던져주듯 개념만 던져주는 식으로, 자신의 창작품에서 한발짝 물러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고안해낸, 혹은 개념화한 작품은, 그 사람의 스타일을 고스란히 전달하면서 작품 자체가 그 사람의 시그니처 (signature)가 되더라는 것이지요.

 

이런 현상을 놓고, 우리의 소비 행태를 생각해보면요,

 

가령, 청소년들이나 젊은이들, 혹은 이제 명품에 눈을 뜬 사람들은 - '나는 명품이오'하는 물건들을 삽니다. 가방에 그 회사의 상징 무늬를 크게 새긴다거나 혹은 무늬가 확실히 눈에 띄는 브랜드의 물건을 사지요. 멀리서만 봐도, 그 무늬만 봐도 이것이 얼마나 비싼(!) 물건인지 알아봐줘야 하는거죠.

 

그런데, 웬만한 명품브랜드들을 섭렵했거나 혹은 돈이 지천으로 깔려서 딱히 돈 많다는것 티 낼 필요도 없는 진짜 선수들...이런 선수들은 '눈에 띄는 브랜드'를 잘 안쓰죠.  오히려 브랜드가 뭔지 도무지 짐작이 안되는 물건들을 두르고 돌아다닙니다. 헤헤헤.

 

개념미술 작품에는 작가의 서명이 없습니다. 하지만, 알만한 '선수'들은 서명도 없는 그 '명품'을 알아보고 잘난척을 하지요.  사실 아무런 표시를 안해도, 어떤 물건의 '개성' 자체를 감추기는 힘들지요. 솔 레윗이 작가 싸인을 안해도 그 작품 자체가 작가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개념미술 작가들은 '작가'가 '작품'에 개입하는 것에 의문을 품고, 작가가 작품으로부터 한발 떨어지는 시도를 했지요만,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작품 자체가 갖는 작가 고유 컨셉의 정체성은 작가에게서 아주 분리될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페이지에서 Sol LeWitt 의 예술, 그리고 개념 미술이 무엇인지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2010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Conceptual Art2010. 2. 10. 11:40

 

 

2010년 1월 20일 National Gallery of Art, Sculpture Garden

 

 

건널목 너머로 보이는 것이 워싱턴 디씨 내셔널 몰에 있는 국립미술관의 야외 조각공원입니다.  제가 사진을 찍는 이쪽은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의 서관(서쪽 건물) 앞이지요.  저만치에 워싱턴 마뉴먼트가 보이지요.  은색 밴이 서있는 뒷쪽으로 보이는 세모모양이 솔 레윗의 '피라미드' 작품이 있는 조각공원 입니다.  이 조각공원의 중앙에 분수대(연못)가 있고요. 봄, 여름, 가을에는 분수가 피어오르지만, 겨울에는 이곳이 스케이트장이 되지요.

 

조각공원을 지나 계속 가면, 자연사 박물관 (Smithsonian Museum of Natural History)이 나오지요.  그 자연사 박물관 입구에는 화석처럼 변한 아주 오래된, 거대한 나무형상이 있고요, 그리고 쇠가 중간중간에 무늬를 이룬 아주 오래된 쇠바위가 입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자연사 박물관...의...소장품들은...지구가 만들어낸 예술품들이지요.  그리고 그 예술품을 가장 잘 안내할수 있는 사람은, 과학자들이지요. 

 

 

 

 

 

 

 

Four Sided Pyramid (4면의 피라미드)

First Installation 1997, Fabricated 1999

Concrete Blocks and Mortar

458.2 x 1012.2 x 970.9 cm

 

 

자, 여기 솔 레윗의 피라미드 뒷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국립 미술관 서관(West Building)입니다.

 

 

2010년 1월 20일 촬영

 

 

 

그러니까, 저의 극히 개인적인 취향인데, 저는 로댕 이외의 조각가나 조각작품에 대해서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요.  오죽하면 제가 '미국미술' 블로그를 열어놓고서는 평면적인 회화만 들여다보겠습니까.  저는 조각작품에 대해서 그냥 별 관심을 못 느낍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 조각공원을 오가며 들를때에도 그냥 상식차원에서 부르조아의 거미라던가, 리히텐스타인의 작품을 쓱~ 보고 지나치는 정도였고요, 특히나 이런, (혹은,...이따위)  블럭으로 세워놓은 피라미드 따위, 관심도 없었다고 봐야지요.  헤헤헤.

 

 

그런데요, 제가 2010년 1월에 국립미술관 동쪽 빌딩에 있던 솔 레윗의 작품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난 후에, 며칠후에 이 조각공원 앞을 지나치는데, 이 피라미드가 눈에 띄는겁니다.  그리고는, 거의 본능적으로 혼자서 중얼거렸던 것이지요. "저거, 저거..저것은...솔 레윗인가봐..."

 

역시나, 다가가서 확인해보니 솔 레윗의 작품이었던 겁니다.

 

 

저는 사실, 이것을 보고 나 자신이 왜 솔 레윗을 떠올렸던것인지도 스스로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솔 레윗의 어떤 본질을 파악하고 나자, 길거리에 서있던, 내가 무시하고 지나치던 이 피라미드가 문득, 소리를 내는 겁니다.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그래서 저절로 알아지는거죠. 

 

제가 http://americanart.textcube.com/371  페이지에서, 허시혼의 벽화를 통해 솔 레윗의 매력을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적은 적이 있는데요. 사각형 안의 삼각형. 2003년 작품. 사실 이것은 어찌보면 피라미드이지요.  그리고 조각공원의 사면체 피라미드 작품은 1997년 작품인데요. 이 두 작품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요, 두 작품 모두 '피라미드'를 표현한 것인데, 하나는 색깔로, 하나는 입체로 표현한 것이죠. 두가지 모두 사각형과 삼각형의 조화라는 면에서는 상통하죠.  그러니까, 제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허시혼 벽화에 햇살처럼 표현된 피라미드 형상을 기억하던 저는, 솔 레윗에 대해서 좀더 알게 된 후에, 길거리에서 이 피라미드를 보면서, 부지불식간에 이 조각물의 정체를 파악한거겠지요.

 

'부지불식'이라는 표현이 있쟎아요.  이것을 인지심리학적으로 풀이하지면 '암묵적 지식'이지요. 내가 안다고 인지하지도 못하면서 알고 있는 상황.  나는 허시혼의 솔 레윗 벽화와  조각공원의 솔 레윗 피라미드를 의식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했지만, 암묵적으로 파악을 한거죠.  (사람의 인식 체계는 우리 자신이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신비하기까지 해요.)  그래서 '저것은 솔 레윗인가봐'하고 다가가서 확인해보는 순간, 아, 솔 레윗이었던거죠.

 

 

그런데요,  무조건 '감'으로만 무엇을 파악하는것으로 끝내서는, 지식의 탑을 세울수가 없지요. '감'이 맞아떨어질때, 혹은 막연히 무언가를 느끼거나 안다고 생각할때, 그때 우리는 논리적인 자세로 '공부'를 해야 하지요.  수업중에 저는 종종 "지금 그 개념을 당신의 언어로 설명해보라"고 요구할때가 있습니다.  학생들은 대개 얼버무리며 "알지만 설명을 못하겠다"고 하지요.  "알면 왜 설명을 못하는가? 설명을 못한다면 당신은 정확히 안다고 할수 없다"고 저는 좀 쌀쌀맞게 대응하는 편입니다.  대충, 아는척 하지 말라는 주문인 것이지요.  뭔가 희미하게 파악은 하되, 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면, 안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학교에서는 학문을 해야 하므로.   그렇지만, 제가 어떤 사람의 '감'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암묵적인 어떤 인지 과정이 분명 있지요.  그런데 학문에서는 이것을 구체화하고 논리화해야 하는 것이지요.

 

평소에 무심코 지나치던, 별 재미 없어보이던 '피라미드'가 갑자기 눈에 들어오고, 어떤 감이 잡힐때, 내가 저절로 무엇을 알게 되었다는 것에 흥분하고 기뻐하는 것도 좋지만, 어떻게 해서 나는 그것을 저절로 알게 되었을까?  파악해보려는 노력도 필요하죠.  음, 그것이 제가 사는 방식인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처럼 그렇게 앞뒤 논리를 따져보고 그래야 해?  그것이 과학적이기나 한거야?  이런 반론을 제기 하고 싶은 독자도 있으실겁니다.  모든 사람이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그냥, 그것이 제가 사는 방식이라는 것이지요. 모두 다 똑같다면 이세상 사는 재미가 없겠지요.)

 

 

 

솔 레윗이 그렇게 제게 다가와 둥지를 틀었습니다.

 

 

2010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Conceptual Art2010. 2. 10. 07:15

 

이미지는 클릭하면 커집니다.

 

2009년 9월 24일 스미소니안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워싱턴 디씨에는 참 매력적인 장소가, 많지요.  '제국'의 행정수도답게 모든 국립 박물관들을 무료로 개방해 놓고, 아무나 편히 느나들라는 여유를 부리는 덕에, 차비만 있으면 사실 일년 내내 백수질 하면서 쏘다닌대도 싫증이 안날만한 곳이지요.  워싱턴 디씨의 이런 무료입장 가능한 박물관들 중에서, 제가 열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좋아하는 장소가 바로 이곳, Hirshhorn 미술관안에서도 바로 이곳이지요.

 

이곳이 들어서면 개념미술 (Conceptual Art)의 창시자로 알려진 Sol Lewitt 의 큼직한 벽화가 그려져있고, 그리고 중앙에 전망좋은 유리벽과, 앉으면 침대처럼 편히 뒤로 젖혀지게 되는 무지무지 푹신하고 편안한 소파가 있지요.  이 소파의 품에 기대어 유리벽 밖을 내다보면 워싱턴에서 가장 아름다워보이는, 내셔널몰의 아름다운 박물관 건물들이 줄지어 보이지요.  자연사박물관도 보이고.  뭐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허시혼을 지나칠때면, 그러다 잠시 그곳에 들를때면, 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윗층으로 이동하여 전시장 한바퀴를 빙 돌다가 이 푹신한 소파에 기대누워서 긴 한숨처럼 다리를 펴고 창밖을 내다보기를 좋아하지요.

 

 

 

 

Wall Drawing #1113: On a wall, a triangle within a rectangle, each with broken bands of color 2003, acrylic

Drawn by Patrick Burns, Stevens Jay Carter, Larry Colbert, Megan Dyer, Joy Hayes, Thomas Ramberg, and  Michelle Talibah

 

Sol LeWitt 1928-2007

2009년 9월 24일 스미소니안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이 그림의 작가가 Sol LeWitt 이라는 사람인데요,  이 사람 이름 Sol 을 말할때마다 '햇님'을 연상하게 됩니다.  오 솔레 미오 - 오 밝은 태양 너 참아름답다!  우리가 고등학교때 '필수적'으로 불렀던 이탈리아 가곡 오 솔레미오에서 그 솔이 햇님이라쟎아요.  그래서 솔~ 하면 눈부신 햇님이 연상이 되는거지요.  하필, 제가 솔 레윗이라는 작가의 존재에 대해서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된 작품도 바로 이 작품, 햇살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이리저리 반사하는 색채같은 이 눈부신 작품이거든요.  이 작품과 솔 레윗이라는 이름이 참 잘 어울려요. 

 

 

작품 제목이 길죠. 벽화 번호 1113. 사각형 안에 삼각형. 각 삼각형은 끊어진 색깔막대로 이루어져 있음. 말하자면 이것이 제목이기도 하고, 그리고 이것이 이 작품의 '개념'이기도 해요.  제목 아래에 Drawn by ... 아무개들이 그렸다는 메시지가 적혀 있지요.  그러니까 이 작품의 개념(제목, 지시사항)을 만들어낸 작가는 솔 레윗이고, 이 개념에 따라서 직접 벽화작업을 한 사람들은 바로 저기에 이름적힌 저 사람들이지요. 작가가 직접 와서 그림을 그리고 칠을 한것이 아니고, 작가는 '개념'만 적어줬고,  그걸 저 사람들이 와서 지시사항대로 구현해 낸 것이지요.  작가는 손하나 까딱 안했다구요.  이 작품에는 솔 레윗의 싸인도 없고, 그의 흔적도 찾아볼수 없어요.  단지 작품이 거기 존재할 뿐이죠.  이것이 말하자면 '개념미술'의 성격입니다.

 

 

 

 

 

Wall Drawing #356BB: Cube within a cube 2003, acrylic on wall surface

Drawin by Patrick Burns, Stevens Jay Carter, Larry Colbert, Megan Dyer, Joy Hayes, Thomas Ramberg, and  Michelle Talibah

 

Sol LeWitt 1928-2007

2009년 9월 24일 스미소니안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2009년 9월 24일 스미소니안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2009년 9월 24일 스미소니안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2009년 9월 24일 스미소니안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이곳은 제가 워싱턴 디씨에서 좋아하는 장소중에 열 손가락 안에 꼽는 곳입니다. 이 소파에 기대 앉으면, 참 푹신하고 편안하고 좋아요.  게다가 사람도 별로 안오는 곳이라서 하루종일 이대로 있을수도 있어요.  이곳에 누군가와 함께 와 본적은 없습니다. 어쩐 일인지 이곳에 오게 될땐 늘 혼자였습니다.  이곳은 워싱턴을 겉핥기로 하루이틀에 지나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는 편입니다.  그러니까, 아는 사람만, 한가로운 사람만, 백수만, 심심해 미치겠는 사람만 오는 곳이지요. 이곳에 들어서면 오늘처럼 흐리고 눈이 뿌리는 날에도 햇살이 쨍쨍 내리 쬐는 기분이 들것입니다. 솔 레윗의 그림이 있으니까.

 

 

2010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10. 2. 10. 03:47

Mississippi Boatman 1850, oil on canvas

George Caleb Bingham (조지 케일럽 빙엄) 1811-1879

 

 

 

 

조지 케일럽 빙엄(1811-1879)는 버지니아주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지만 아버지의 투자 실패로 삶의 근거지를 중서부 미조리주로 옮기는데 성년이 되어 유럽을 여행한 것을 제외하고는 미주리주에서 평생을 지내게 됩니다.  빙엄은 뒤셀도르프에서 미술 수업을 한적도 있지만, 이는 그가 성년이 된 후에 후원을 입고 뒤늦게 수업을 들은 셈이고, 미술사가들은 빙엄을 '독학 (self-taught)'하여 입신한 화가로 평가하는 편입니다.  그러니까, 어릴때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스스로 그림을 익혔는데, 그의 그림에 대한 평가가 좋아지고 그의 입지가 단단해질 무렵에 그에게 그림 수업을 받을 기회가 주어진 것이지요.

 

빙엄은 목공예 기술을 익힌적도 있는데 그러면서 회화에 눈을 떴으리라 짐작하게 됩니다. 그보다 한세대 먼저 펜실베니아에서 활동했던 '평화의 왕국'의 화가 Edward HIcks 가 마차 장식이나 표시판 기술자로 일하면서 스스로의 화풍을 익히면서 퀘이커 교도로서 설교를 하러 다니기도 했었는데요, 빙엄 역시 목공예를 하면서 미술 작업을 하는 틈틈이 법률가가 될것인지  목사가 될것인지 고민을 하기도 했고요, 설교를 하러 돌아다니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변호사도 목사도 되지 않았고 초상화 주문을 받아 그려주는 것으로 생계를 해결하게 되었는데요.  정작 그의 예술성이 인정을 받게 된 분야는 그가 미조리주, 미시시피강변의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풍속화에서였습니다.

 

 

빙엄이 즐겨 그린 '미시시피강변의 사람들' 소재가 위의 그림에서도 나타나는데요.  미시시피강은 북미에서 가장 긴 강이지요. 미국의 중앙 북단에서 흘러내려 뉴올리안즈까지 이어지는 대동맥과도 같은 강입니다. 저는 뉴올리언즈에서 본 미시시피강 하구의 증기선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허클베리핀의 모험을 쓴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회고록 Life on the Mississippi (1883년 출판)을 대학 시절에 읽은 기억이 납니다. 마크 트웨인이 어린시절 증기선을 타고 미시시피강을 오르내리던 기억을 담은 이야기들인데요.  그의 '허클베리핀의 모험'에서도 뗏목을 타고 흑인노예 짐과 함께 강을 따라 이동하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저에게 미시시피강은 '마크 트웨인'의 책속에 흐르는 강이지요. 그래서 빙엄의 미시시피강 연안의 풍경을 볼때도, 허클베리핀의 모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아이들, 악당들, 우매한 군중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림속의 미시시피 보트맨은 아마도 그가 배로 운반한 물건들을 강변에 부려놓고 짐을 지키고 앉아있는 것 같죠. 그의 등뒤로 강가에 대어놓은 그의 납작한 배가 보입니다.  풀기라고는 없는 그의 옷처럼, 이제 젊음이 지나가버린 이 늙수그레한 사나이는 곰방대를 빨면서 관객을 응시하고 있는데요. 이 사람이 앉아서 쳐다보는 방향은 강의 상류일까요, 하류 일까요? 

 

저는 이 그림속의 시각이 오후 네시쯤의 황혼이 다가오는 시각이라고 봅니다. 분위기상.  그런데 햇살이 이 사람의 오른쪽에서 비치지요. 해가 서쪽에 있고, 오른쪽이라면, 이 사람은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지요. 미시시피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니까, 이 사람은 상류에서 내려와서 짐을 내리고 남쪽을 향해 한가롭게 앉아있다고 봐야겠지요.   내일쯤, 이 사람은 그의 자그마한 배에 새로운 짐을 싣고 북쪽으로 올가가겠지요. 이 사람의 그림에서 저는 왜 황혼을 읽는 것일까요?  빛의 분위기가 어쩐지 황혼을 닮았지요. 이울어져가는 태양의 기운 잃은 노란색, 그 노란 색조가 화면 전체를 압도하지요.  곰방대를 물고 있는 사나이의 표정도 기우는 해처럼 무심하죠. '노스탈지아 nostalgia'의 색은 무슨 색일까요?  빙엄의 그림을 보면 노스탈지아의 색은 '노란색'인것 같습니다.

 

이 그림은 1850년에 그려졌는데요, 1850년 당시만해도 미시시피 강에 뗏목이나 자그마한 배들이 여전히 운행을 하긴 했지만, 강의 운송수단의 대세는 증기선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노를 저어 운송하는 수단은 이제 사양의 길로 접어들었거나, 혹은 찾아보기가 드물어졌다고 하지요.  빙엄은 말하자면, 사라져가는 혹은 사라진, 풍경을 담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사라지고 이울어져가는 풍경을 담았던 빙엄은 미국 미술사에 '오래' 남게 된 것이지요.

 

빙엄은 풍속화, 초상화, 그리고 몇점의 역사화들을 남겼는데, 기록에 따르면 빙엄의 작품은 '모두' 미국에 있다고 합니다. 해외의 소장자가 없다고 해요.  해외에 안 알려진 화가라는 얘기죠.  워싱턴에서도 그의 작품의 수가 극히 미미하거니와 전시장에서 찾아보기도 힘듭니다.  그의 활동 기반이 미조리주였기 때문에 미조리주에 그의 작품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그의 걸작이 있다는데요, 가서 보고 와야지요.

 

 

 

 

아래의 그림은 버지니아 남단 해변도시에 있는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발견한 빙엄의 역사화입니다.  델러웨어강을 건너는 조지워싱턴을 그린것입니다. 뒤셀도르프에서 함께 수학하기도 했던 미국화가 Emmanuel Leutze 가 1851년에 그렸던 동명의 작품과 매우 흡사한 구도인데요,

 

Washington Crossing the Delaware, 1856-1871

oil on canvas, 146 x 93 cm

George Caleb Bingham 1811-1879

2009년 11월 29일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http://americanart.textcube.com/190

 

 

Emmanuel Leutze, Washington Corssing the Delaware 1851

 

 

이 그림의 제작년대가 1856-1871까지 표시가 되어있지요. 작품을 완성하는데 무려 15년이 걸렸다고요. 그 사연인즉, 빙엄이 이 그림의 초안을 잡아놓고 미조리주에서 이 그림을 사주기를 희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문을 받아서 돈을 받고 이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대요.  그래서 완성을 하지 않고 주문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다가 세월을 보낸 모양입니다. 결국 그는 주문도 받지 못하고 그림을 완성했다고 하는데요, 그가 죽을때까지 이 그림이 팔리지 않았대요. 나중에 빙엄의 유가족이 이 그림을 경매에 내놨을때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그런 사연이 있는 그림입니다.

 

 

 

 

 

Washington Crossing the Delaware 가 걸린 전시장 풍경,

(오른쪽 하단에 걸려있는 작품), 크라이슬러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190

바로위에 에드워드 힉스 http://americanart.textcube.com/193 의 조지 워싱턴 그림이 보입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빙엄의 작품은  미국 바깥에는 한점도 없다고 합니다. 오직 '미국'에서만 만날수 있는 작가이지요.  미시시피 강변의 노란 노스탈지아의 풍속화가.  미국 미술관을 순례하시다가 노란 색조의 강풍경이나 배를 탄 사람들이 노를 젓거나 배위에서 춤을 추거나 하는 풍경이 보이시면 누가 그렸는지 화가 이름을 한번 살펴 보십시오.  그가 빙엄일지 모르니까요.

 

2010년 2월 9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The Girl I Left behind Me, 1870-75, oil on canvas

Eastman Johnson 1824-190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2008년 5월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제가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 처음 가본것은 2008년 5월의 일입니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은 내셔널 몰 지역에서 조금 외떨어진 곳에 있지요.  메트로 스미소니안 역에서 내리면 양쪽에 줄줄이 서있는 스미소니안 박물관들과 국립 박물관, 그밖의 전시장들을 보는 것으로도 세월이 마냥 흘러가기 때문에, 신경써서 가지 않으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은 잊혀지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다른 미술관들에 비해서 한가한 편입니다. 출입구에서 안전검색도 하지 않고요.  저도 워싱턴으로 이사한지 거의 일년이 다 되어갈때 그곳에 처음 가본 셈이지요.  그날 처음 '미국미술관'에 가서 반했던 작품중에 하나가 바로 이스트만 존슨의 이 그림입니다. The Girl I Left Behind Me 내가 뒤에 남겨두고 온 여인 (소녀 혹은 처녀).  내가 뒤에 남겨두고 온 여인이라... 그림도 심상치가 않거니와, 거기다 제목까지.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의 심상에 따라서 그림도 다르게 해석될수 있지만,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기다리면서 살아가지 않나요?  아니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두고서 먼길을 떠나지 않나요?  나는, 떠나는 쪽이라기보다는 기다리는 쪽인것 같습니다.  내가 떠나기 보다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 떠난것도 같고요 (혹은 이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서 그런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늘 제자리에 있는데,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났다는 이런 상실감을 갖고 사는 사람이 이 그림을 볼때는, 관객 자신이 언덕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한없이 서서 기다리는 저 여인의 입장이 될 겁니다.  누군가를 버리고 떠난 사람은 돌아서서 이 여자를 쳐다보는 입장이 되겠지요. 나는 이 그림을 볼때, 내가 언덕위에 서서 바람을 맞고 서있는 입장이었던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이 그림이 참 인상적이었던지라, 그림 앞에서 사진도 찍고, 미술관 책방에서 이 그림을 표지로 한 미국미술사책도 한권 사고 그랬지요. 2008년 5월 어느날.  그날의 내 그림자는 아직도 저 그림앞을 서성일지도 모르지요.

 

이 그림은 미국 남북전쟁 (Civil War: 1861-1865)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남자들은 전쟁터로 떠나고, 여인들은 남아서 사랑하는 남편이, 애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게 되었지요.  남자들이 전쟁터로 가건, 영장을 받고 입대를 하건, 사랑하는 남자를 보내야 하는 여성들 (애인, 아내, 어머니등) 역시 떠나는 사람 만큼이나 애절해집니다. 바람은 심상치 않게 불고, 백척간두같은 언덕위에 서 있는 여인은 바람을 정면으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가슴에 들고 있는것은 성경책이겠지요 아마도. 신념과 사랑에 의지하여 저 여인은 힘겨운 세월을 저렇게 고집스럽게 버틸것입니다.

 

이스트만 존슨은 실제로 1862년에 버지니아의 마나싸쓰 (Manassas)에서 전쟁을 치렀고, 당시의 전쟁의 경험과, 전쟁 당시 젊은이들이 부르던 아일랜드 민요에서 이 그림의 제목을 따왔다고 합니다:

My mind her full image retains

Whether asleep or awaken'd

I hope to see my jewel again

For her my heart is breaking

내 마음은 그녀의 모습으로 가득찼네

잠을 잘때나 깨어있을때나

보석과도 같은 내 사랑을 다시 볼수 있기를

그녀 생각에 가슴이 무너진다네

 

혹시나 싶어서 유튜브 뒤져보니 노래가 있군요...

 

 

 

 

이스트만 존슨 (1824-1906)은 우리가 이전 페이지들에서 살펴보았던 19세기의 대형 풍경화가들 Thomas Moran, Frederick Edwin Church, Albert Bierstadt 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고 활동했던 화가 입니다.  그런데 그는 장르가 달랐죠.  이스트만 존슨을 얘기할때는 그를 '장르 화가'로 칭하는 일이 많습니다. 장르 미술 (Genre Painting)은 한국어로 옮길때는 '풍속화'라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입니다. 서민, 민중의 삶의 풍경을 화폭에 담는 것을 말하지요.  인류의 역사에 '회화'가 등장한 이래로, 회화는 주로 귀족층들이 누리던 예술 분야였습니다. 특히 서양미술을 살펴보면 르네상스 이전이나 그 이후에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왕가의 인물들, 귀족들, 부유한 사람들 혹은 역사, 풍경등이었지요.  서민들의 삶을 화폭에 옮긴 화가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화가들은 대개 부유한 사람들의 '주문'을 받고 그림을 그리는 식으로 생활을 꾸려 나갔는데, 가난뱅이 서민이 화가에게 돈을 주고 그림을 주문을 할 일이 없었다고 봐야죠.  르네상스 이후에 서양 예술에서 서서히 민중의 삶에 눈을 돌린 화가들이 나타나는데  부르겔이나 베르미어등이 바로 그런 화가들이었습니다.  밀레의 저녁종이나 혹은 반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 같은 빈농의 삶의 풍경, 그러한 것들이 바로 이런 '풍속화'의 범주에 들어가지요.

 

미국에도 이렇게 '풍속화'를 즐겨 그린 화가들이 존재하는데, 이스트만 존슨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풍속화의 얄궂은 운명이 뭔고하면,  풍속화의 소재는 '가난한 서민들'이쟎아요. 그런데 이런 그림을 향유한 층은 여전히 부유층이었다는 것이죠.  사람이 고기만 먹다보면 김치도 먹고 싶어지쟎아요.  말하자면, 고급 가구로 잘 차린 집의 거실이나 서재에 이런 풍속화를 한점 걸고, '소박하고,' '목가적인,' 삶을 찬미하는 취미를 가진 미술 애호가들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뭐 일부러 해진 옷 같은거 - 빈티지 스타일이라고, 돈 많이 주고 다 떨어진 옷 사입고 폼 잡는 것도 비슷한 행동이긴 하죠. 그것도 멋이고 자랑이다 이거죠.)  아무튼, 이런 풍속화는 돈많은 사람들의 또다른 수집 취미의 대상이었다고도 합니다.

 

 

이스트만 존슨은 메인주의 유복한 정치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6세가 되던 1840년에 보스톤의에서 리토그래프 판화를 배우고, 1849년에는 독일의 뒤셀도르프로 가서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받습니다. 그후에 헤이그, 파리등지를 돌며 역시 유럽 미술을 배우게 됩니다.  1853년에는 그의 아버지가 워싱턴 디씨의 정부 고위 공무원으로 발령받아 워싱턴으로 이주하여 백악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살게 됩니다. 1855년에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1859년 뉴욕시에 작업실을 열고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는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당시의 서민들의 삶을 그리는가하면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1872년 2월 20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개관할때 공동 설립자로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헬렌 켈러가  '만약 내가 단 하루 시력을 갖게 된다면  보고 싶은 것'들중에 포함되기도 하는 미국 최대의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스트만 존슨이 이 미술관의 설립에 앞장을 섰던 인물이군요.

 

자 이제 그의 따뜻하고 정겨운 풍속화 작품들을 살펴볼까요.

 

이 수련따는 그림은, 밀레의 이삭줍는 여인들과 비슷한 모티브로 보이죠?

Gathering Lilies (수련따기) 1865, oil on board

Eastman Johnson 1824-1906

2009년 12월 13일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The Early Scholar, c1865, oil on academy board on canvas

Eastman Johnson 1824-1906

2009년 12월 13일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이 꼬마 학생에 대해서는 http://americanart.textcube.com/210  이전에 관련 페이지를 적은 적이 있습니다.

 

 

 

Fiddling His Way, 1866, oil on canvas

Eastman Johnson 1824-1906

2009년 11월 29일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이 그림은 1866년에 그려진 것으로 보아, 노예해방 이후에 자유민이 된 흑인이 악기 연주를 하며 떠도는 풍경을 그린것으로 보입니다.  백인의 중산층 가족으로 보이는데요,  여인이 안고 있는 아기까지 포함하여 아이가 여섯이나 되는군요.  흑인이 악기를 연주하고,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턱을 받치고 있는 아이도 보입니다.  빗자루 막대기에 기댄채 잠시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여인의 모습도 편안해 보이지요.  비록 그림이지만, 그림 한구석에서 미국의 깽깽이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는 것 같습니다.

 

 

아래의 그림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발견하여 사진을 찍은 것인데, 조명이 하도 어두워서 사진 상태가 흐릿합니다. 이 그림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여러장 찍었는데 쓸만한 사진이 한장도 없더라구요. 아쉽습니다. 참 사랑스러운 그림인데요. 시골 농가의 헛간에 아이들이 한가롭게 앉아 있어요. 설령 이 가로대에서 떨어진다해도 아래에는 건초더미가 쌓여 있으므로 다칠 일도 없습니다. 아이들은 가로대에 나란히 앉아 종알거리고 노래를 부르거나, 그러다가 말다툼이 벌어져서 하나가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릅니다.  아기를 무릎에 안고 있는 언니도 보이지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아이들이 제비새끼들처럼 지지배배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화가도 이 그림의 제목을  '헛간의 제비들'이라고 붙였을겁니다.

 

 

Barn Swallows, 1878, oil on canvas

헛간의 제비들

Eastman Johnson 1824-1906

2009년 9월 19일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촬영

 

 

간단히 Eastman Johnson (1824-1906)의 풍속화들을 몇 점 살펴보았는데요,  이스트만 존슨에 대해서 요점정리를 해보자면

 

 1. 그는 풍속화가로 알려져 있으며, 서민들의 일상의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2.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공동 설립자이다

 3. 그는 19세기 대형 풍경화가들이 활동하던 비슷한 시기에 풍속화를 그렸던 사람이다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잠깐 퀴즈. 그런데...풍속화 (genre painting)가 뭐죠?  :)

 

 

2010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Niagara 1889,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여

(2층, 비어시타드의 대형 풍경화 근처 통로에 있음)

 

뽀안 안개의 나이아가라가 내게 말을 걸다

 

 

 

Thomas Cole 과 허드슨 강변의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 (1801-1848)를 엮다보니

 * Thomas Moran http://americanart.textcube.com/364 (1830-1902)

 * Frederick Edwin Church: http://americanart.textcube.com/363 (1826-1900)

 * Alber Bierstadt: http://americanart.textcube.com/361 (1830-1902)

 

등과 같이 허드슨 강변의 화가들로 알려진 19세기의 대형 풍경화의 대가들을 살펴 보게 되었는데요.  이들과 더불어 George Inness (1825-1894)를 잠시 소개를 해야 할 것 같군요. 제가 차례차례 화가들의 생몰년대를 명시 해 놨는데요 토마스 콜이 대략 한세대 이전의 대가이고  토마스 모란이나, 프레데릭 처치, 비어시타드는 나이도 몇살 차이 안나는 동시대의 사람들입니다.   이 페이지의 주인공 조지 이니스도 이들과 동시대를 산 화가이고요.

 

19세기 풍경화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대략 정리를 할 생각이라서 이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허드슨강변 화가들의 '대부'격인 토마스 콜이 미국 동부의 허드슨 강변에서 실제 풍경화를 그리거나 유럽 여행을 통해서 풍경화를 익히며 상상의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던 미국 풍경화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사람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1. 토마스 모란은 미 서부의 풍경을 동부의 사람들에게 전한, 옐로우 스톤의 화가라고 할수 있고요,

2. 프레데릭 처치는 미국및 남미, 유럽등을 돌면서 세계 여러나라의 자연 환경을 관찰하고 그림으로 옮긴이로, 훔볼트나 다윈의 과학적 자연 이해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던 미국의 화가였습니다.

3. 알버트 비어시타드는 미 서부를 돌며 미국의 대자연을 스케치하고 관찰했지만, 그가 그린 미국의 풍경은 유럽 알프스산의 풍경까지 뒤섞인, 이상화된 풍경을 대형 화폭에 담았던 화가였습니다.

 

그러면 비슷한 시기의 조지 이니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미술사가나 평자에 따라서 조지 이니스를 허드슨강 화파에 포함시키는이가 있는가하면, 그가 허드슨 화파와는 다른 풍경화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평하는 이도 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화가'라는 측면에서 그를 허드슨 풍경화파에 대충 때려 넣는 경우도 있고,  그를 좀더 세밀히 연구하는 사람이 볼때는 이런 '때려넣기'는 어불성성일수 있지요.  무슨 말씀인가하면, 어떤 역사를 단순하게 처리할때 - 이런 상반된 시각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 자신 조지 이니스를 '허드슨 파'에 포함시킬것인가 말것인가 조금 고민을 했는데요,  저로서는 그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발견했고, 그의 그림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좋아하므로, 그를 별도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조지 이니스를 '발견'하게 된 그림은, 저 위에 올려 놓은 '나이아가라'라는 그림에서였습니다.  국립 미술관급의 미술관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보면 보이는 것이 명작이요, 역사적인 기념비들인데,  명작 아닌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들이 있게 마련인데요.  풍경화에 별 관심이 없었던 제 눈에 띄었던 것이 그의 1889년작 '나이아가라'였습니다.  나이아가라는 앞서의 페이지에 소개된 바와 같이 프레데릭 처치가 대형으로 그려서 선보이기도 했는데요. 아래에 프레데릭 처치의 나이아가라 그림을 옮겨다 놨습니다. 

 

Niagara Falls, 1857, Oil on Canvas (42 1/2 x 90 1/2 inches)

Frederick Church

2009년 10월 3일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물론 크기에서도 처치의 작품이 압도적이긴 한데요,  처치의 그림이 '압도적'이라는 느낌을 줬다면,   그보다 32년후에 그려진 조지 이니스의 나이아가라는 물안개가 걷히지 않는 나이아가라의 또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조지 이니스의 안개속의 나이아가라를 좋아했지요. 그런데요, 이 나아이가라를 발견했을때, 저는 조지 이니스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보면서 떠올린 화가는 Thomas Wilmer Dewing 이었습니다. 저는 아슴푸레한 초록 안개속의 풍경과 여인들을 그린 미국 화가 Dewing 을 알고 있었거든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236 )    어떤가요. 저 초록 안개에 싸인 나이아가라 그림과, 아래의 듀잉의 그림의 분위기가 흡사하지 않은가요?

 

 

Before Sunrise (해뜨기 전) 1894-95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갤러리에서 촬영

 

 

그래서 저는 '나이아가라'를 '듀잉'이 그렸을거라고 상상했는데, 다가가보니 '조지 이니스'의 이름표가 붙어 있었단 것이지요.   '두 사람 그림이 참 분위기가 비슷하다 ...'  혼자서 이런 생각을 가끔 했었는데요.  어느날 공부하다가 이 두사람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풀렸습니다.

 

미국 회화사에 Tonalism (색조주의)이라는 미술 화법이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잠시 떠오른 적이 있는데요,  회화의 구체적인 이미지보다는 회화가 전하는 '색조'와 '빛' '분위기'를 중시 여기는 화법입니다.  바로 그 Tonalism 의 주요 화가로 알려진 이들이

 1. George Inness (1825-1894)

 2. 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

 3. Thomas Wilmer Dewing (1851-1938)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제가 이니스의 그림을 보면서 '듀잉'의 그림일거라고 짐작했던 이유는, 바로 이들의 '색조주의적' 개성 때문이었을겁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지금은 책상 앞에 앉아 슬슬 적고 있지만,  이러한 사실들을 접하거나, 혼란스러워하거나,  궁금해하거나 혹은 책을 찾아보고 뭔가 발견하고 그러면서 흘러간 세월은 두해쯤 되는거죠.  그 사이에 시간이 많이 흘러간 것이지요....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뒤지면서, 지금도 여전히 뭔가 새로 알아가고 있는 중이고요.)

 

 

 

여기까지는 제가 이니스를 처음 발견하던 일에 대해서 정리했고요,  이제부터는 제가 갖고 있는 그림 파일들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고 조지 이니스의 발자취와 미술의 흐름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국립 미술관 (NGA): 이니스의 초기 풍경화들

 

 

조지 이니스 (1825-1894)는 뉴욕주의 한 농부의 열세명의 아이들중에서 다섯번째 아이로 태어납니다. 다섯살때 가족이 뉴저지의 뉴왁으로 이주하고요. 십대때 그는 뉴욕시에서 지도 판화 작업을 배우게 됩니다. 1940년대에는 National Academy of Design 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그당시 Thomas Cole, Asher Durand 등 당대의 쟁쟁한 화가의 지도를 받게 되지요.  1851년에 그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로마로 가서 미술 수업을 받게 되는데 로마에서 1년넘게 머무는 동안 Swedenborginism 이라는 스웨덴의 신흥 종교운동과 접하게 되어 정신적인 영향을 입게 됩니다. 로마에서 파리로 건너간 그는 이곳에서 '바르비종 (Barbizon)'화가들의 작업을 보게 됩니다.  '바르비종' 화가들은 19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바르비종, 폰텐블루 숲에서 전원을 찬미하는 그림을 그렸었지요. 우리들에게 가장 친숙한 화가로는 장 프랑소와 밀레가 있지요. 밀레의 풍경화를 떠올리시면 바르비종 화파의 대강의 분위기를 짐작하실수 있을겁니다.

 

하여, 전체적으로 조지 이니스의 미술세계에 영향을 끼친 요소들로는

 1. 스승 토마스 콜의 허드슨강 화파의 풍경화

 2. 프랑스 바르비종 화파의 낭만적 풍경화

 3. 신성이 속세에도 반영될것이라고 봤던 스웨덴 신흥 종파의 세계관

등이라고 할 만 합니다.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돌아온 이니스는 델라웨어 철도 부설 사업자로부터 철도 사업을 기록하고 홍보할만한 그림을 위탁받아 작업을 합니다. 아래의 라카와나 골짜기의 그림이 바로 당시 위탁받아 그린 작품중의 하나입니다. 언덕위에서 내려다보는 기찻길, 달리는 기차, 기차역은 우리에게 '그리운' 혹은 '아쉬운'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키지 않나요?  그 기차에서 누군가 그리운 사람이 내려주었으면 좋겠지요. 이런 우리의 일반적인 정서와는 달리, 이 그림은 기록성, 홍보성에 목적을 둔 작품입니다.  물론 작가가 주문자의 의도를 얼마나 반영했을지는 알수 없지만요.

 

 

The Lackawanna Valley 1855,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10년 1월 20일 워싱턴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에서 촬영

 

 

 

 

 

 

View of the Tiber Near Perugia 1874, oil on canvas

페루지아 인근에서 바라본 티버강 풍경

George Inness 1825-1894

2010년 1월 20일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이 그림은 이탈리아 페루지아의 티버강 그림이군요. 그가 당시 여행을 가서 그린것인지, 아니면 과거를 회상하며 그린것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아래, 갤러리 풍경 사진에서 프레데릭 처치의 대형 그림 옆에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입니다.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전시장. 왼편의 대형 그림이 Frederick Church 의 '빛의 강'

그 오른편에 조지 이니스의 풍경화가 보임.

2010년 1월 20일 NGA 에서 촬영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이니스의 완숙기의 풍경화들

 

 

 

September Afternoon 1887,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1층,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뒷쪽 갤러리 중앙에 걸려있음)

 

 

1885년에 조지 이니스는 뉴저지주의 Mont Claire 에 정착하게 됩니다.  완숙기에 들어선 그의 그림에서 선의 경계가 부드러워지거나 흐릿해지지요.  특히, 앞서 지적한 바 있지만, 이 '나이아가라' 그림에서 그의 선과 경게가 해체가 된듯한 느낌이 듭니다. 사물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해체되고 오직 색감과 분위기만 안개 입자처럼 떠돌지요. 

 

그런데, 얼마전에 스미소니안에 갔을때, 안내인이었던 Judith 할머니가 이런 얘기를 들려주시는 겁니다. 그 할머니는 나이아가라 인근에서 태어나고 자랐기때문에 늘 나이아가라를 봤대요.  고향을 떠난 지금도 그의 귓가에는 나이아가라 폭포 소리가 들리겠지요.  사람들은 이니스의 나이아가라 폭포 그림을 가리키면서, '이 그림이 인상주의적인 그림이다, 이니스는 인상파였다' 뭐 이런 설명을 하는데 자신은 이 그림을 인상파 그림으로 보지 않는대요.  이 그림은 '인상'이 아니라는거죠.  저는 그 사람의 말귀를 알아 들었습니다.  그래서 되물었죠:

 

 "You mean that, it's not the impression of Niagara, it's, the reality?"

 (이 그림은 나이아가라 '인상'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인가?)

 Judith: Yes, that's what I mean!

 (그래, 바로 그것이지!)

 

주디스 할머니의 예술관은 여기까지 이지요.  인상파 화가들은 '인상'을 스케치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을 잡으려고 했던 것인데.  인상파화가들은 현장에서 내 눈으로 직시하는 '바로 그 순간, 그 것'을 잡으려고 했던 것인데. 그것이 그들에겐 Reality 였던 것인데...  주디스 할머니는 인상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셨던것도 같은데...하지만 그가 내게 말하고 싶어했던 것은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이 나이아가라 그림은 '상상속의 어떤 이미지'가 아니라 '사진'같이 정확한 사실이라는 것이지요.  나이아가라를 가슴에 품고 있는 주디스 할머니에게 이 아슴푸레한 풍경은 더욱 생생한 사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Reality 란 무엇인가?  이 논의는 훗날로 미루기로 하지요, 저로서는 너무 어려운 주제이니까요.)

 

 

 

Niagara 1889,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여

(2층, 비어시타드의 대형 풍경화 근처 통로에 있음)

 

 

 

코코란, 델라웨어: 말년의 황혼

 

 

 

Early Autumn, Montclaire 1891,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10년 1월 9일 델라웨어 미술관에서 촬영

 

 

이니스의 작품 사진들을 시간 순서대로 늘어놓고 보니, 그의 그림의 변화가 눈에 들어오지요. 그의 말기의 작품들은 경계의 해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빛과 어둠을 들여다보는 영역으로 나아갑니다.  이전에 이니스가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했다면, 말기에 그는 빛의 세계로 나아가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코코란 미술관에 소장하는 '숲속의 황혼' 작품은 황혼이 내리는 숲속에 한줄이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나무 기둥에 신비할 정도로 환한 빛으로 어룽대지요.  가끔 이런 광경을 볼때가 있어요.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빛과 어둠의 대비. 이런 풍경을 대면할때, 우리는 설령 우리가 무신론자일지라도 어떤 신성, 초자연적인 숨결을 상상하게 됩니다. 

 

 

 

Sunset in the Woods, George Inness, 1891

출입문 왼편에 면한 벽에 Frederick Church 의 Niagara Falls, 그리고 Albert Bierstadt 의 '들소의 최후'가

나란히 걸려있다.

 

 

 

Sunset in the Woods 1891, oil on canvas

70 x 48 inches

George Inness 1825-1894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촬영

 

 

 

 

자, 조지 이니스의 미술 세계를 다시 한번 정리해볼까요?

 1. 토마스 콜에게서 사사 받았고, 혹자는 그를 허드슨 강 화파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2. 프랑스 바르비종 미술 운동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3. 스웨덴에서 일어난 새로운 종교운동의 영향으로 신성이 세속에 투영된다는 시각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그는 미국의 Tonalist 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미국 미술사에서 크게는 그를 허드슨 화파, 혹은 인상주의 화가로 분류를 하기도 하는데요, 어찌보면 그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 화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2010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역사를 만들어낸 한장의 그림

 

 

 

 

The Grand Canyon of the Yellow Stone, 1893-1901, oil on canvas

427.8 x 245.1 cm (대략 4.3 미터 x 2.5 미터)

Thomas Moran (1837-192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 가면, 엄청시리 커다란 풍경화 그림이 여기~ 여기~ 걸려있는데요. 저로서는 뭐 엄청나게 큰, 그것도 주로 바위로 이루어진 풍경화에 별 매력을 못 느끼므로, 막무가내로 통과~ 해버리는거죠. 이 엄청난 풍경화 앞을 지나면서 대략 '이름표'라도 볼라치면 Moran 이라는 이름이 눈에 띕니다. 

 

"모란?  이름이 모란이야?  성남의 모란 시장이 생각이 나는군. 거기 가면 강아지 팔고 그랬는데. 이름이 모란이면 모란꽃 뭐 그런거 그려야 하는거 아니야? 아 왜 바윗덩어리 산만 그려 놓은거냐구..." 

 

이렇게 중얼거리며 지나치는거죠. ㅎㅎㅎ.  그래가지고, 사실, 스미소니안을 라면집 드나들듯 드나든 저에게도 모란의 작품 사진이 별로 없습니다.  관심 없으니까 대충 지나간거죠.  아, 다음에 가면 제대로 작품 좀 들여다봐야지...

 

Thomas Moran (1837-1926)은 영국태생으로 어린 시절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와서 펜실베니아에서 성장한 화가입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 Hudson River School 의 원조 Thomas Cole 의 페이지에서 잠시 언급한대로 Thomas Moran 은 그가 미국의 자연 환경을 대형 화폭에 담았다는면에서 허드슨강변의 화가로 분류가 되기도 하고, 혹은 토마스 모란이 특히 로키 산맥, 옐로우스톤의 풍경에 골몰한데서 Rocky Mountain 화가로 분류가 되기도 합니다.

 

제가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찍어온 그의 대형 그림 사진속의 풍경이 대개 '노리끼리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림이 '노리끼리'로 일관하는 이유는, 그가 Yellow Stone (노란 바위) 지역의 화가라서 그런것이지요 (알고보니 뭐 단순하군요.헤헤).

 

토마스 모란은  형제들도 그림을 그렸고요, 어릴때부터 목공, 판화 등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1862년에 영국으로 그림을 배우러 갔을때 그곳에서 터너 (Turner, 1775-1851)의 웅장하고 숭고한 풍경화에 감화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8년 여름에 뉴욕 현대미술관에 갔을때, 마침 터너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지요.  스케일 큰 풍경화를 실컷 보기는 했는데, 저 자신이 사람 하나 안보이는 풍경화에 별 재미를 못느끼기는 했지요.  지금은, 풍경화를 보는 안목도 좀 생겨서, 코코란에서 현재 진행중인 터너에서 세잔까지의 기획전 http://www.corcoran.org/turnertocezanne/index.php 을  보러 갈 생각입니다.)

 

토마스 모란이 미 서부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1871년 Hayden Geological Survey (헤이든 지리 연구) 팀에 초대되어 40일간 미 서부 옐로스톤 일대를 탐사하게 되면서부터 입니다. 연구팀에는 사진가 Wiliam Henry Jackson도  있었는데, 토마스 모란과 잭슨이 현장 스케치를 남기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흑백 사진만 가능했으므로 현장의 생생한 풍경은 화가가 담을수 있었다고 합니다.

 

 

The Grand Canyon of the Yellow Stone, 1893-1901, oil on canvas

427.8 x 245.1 cm (대략 4.3 미터 x 2.5 미터)

Thomas Moran (1837-192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위의 그림은 아니지만, 같은 제목의, 비슷한 각도에서 본 그랜드 캐년 그림이 1872년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가 되는데 그 그림은 미 의사당의 상원에 팔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옐로우스톤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게 하는데 혁혁한 공헌을 하게 되지요. 이를 시발점으로 미 의회는 1916년 정식으로  '국립공원 National Park System'을 도입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여름 휴가철에 '미서부 관광'이나 '옐로우스톤 국립공원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이 지역을 관광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미국에서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 Yellowstone National Park 이고요,  이곳이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게 되었을때, 그 배후에 토마스 모란의 그림 한장이 있었던 것이지요.  흑백사진 기술조차 미미하던 시절, 오로지 스케치나 수채화와 같은 것으로 시각자료가 전해지던 시절, 한장의 대형 풍경화가 전하는 미지의 세계는 보는이들에게 충분히 감동을 선사했을 법 합니다.

 

 

토마스 모란은 때로 Thomas Yellowstone Moran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고요, 이따금 그는 서명할때 Thomas Y. Moran 이라고 적기도 했답니다. 가운데의 Y 는 yellowstone 의 Y 이지요. 그리고 토마스 모란이 '미 국립공원'의 지정과 개발에 기여한 것을 기념하여 http://en.wikipedia.org/wiki/Mount_Moran  모란 산 (Mount Moran)이라는 이름도 붙여졌다고 합니다.  한장의 그림이 미국 역사에, 미국 국립공원의 산파 역할을 했다니, 그림을 만만히 보면 안될 일이군요.  다음에 스미소니안에 가면 그의 대형 그림 사진들을 모두 찍어와야 할것 같습니다. :)

 

 

화면 왼편 그림: The Cahsm of the Colorado, 1873-1874, oil on canvas mounted on aluminium

367.6 x 214.3 cm (대략 3.6 미터 x 2.1 미터)

Thomas Moran (1837 - 192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아, 참고로, 저 전시실 가운데에 둥그런 평상같이 생긴 의자가 있는데요. 곰털 같은 털가죽이 덮여있습니다.  관객이 저기에 편히 앉아서 쉬면서 그림을 감상할수 있도록 설치 해 놓았는데요. 옐로우스톤에 가면 '곰'이 많이 나오지요.  옛날에 옛날에 1998년에, 제가 미국땅 처음 밟아본것이 '미서부 관광' 패키지 여행을 통해서였는데요, 그때 관광 안내원이 '곰'이 나올지 모르니 주의하라고 당부하던 일이 생각이 나는군요.   그러니까, 저 곰가죽같은 의자나 혹은 그림 옆에 세워 놓은 화분도, 이 전시장의 장치 입니다. 풍경화에 어울리는 소품을 제시하여, 관객이 '풍경'속에 들어와있는듯한 기분이 들도록 유도하는 것이지요.

 

 

 

2009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앞서서 Albert Bierstadt (http://americanart.textcube.com/361)  페이지를 열면서 코코란 미술관의 전시장을 보여드렸는데요.  오른쪽의 대형 그림이 비어시타드(1830-1902)의 '버팔로의 최후.' 왼편에 보이는 대형 그림이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의 나이아가라 입니다. 오늘은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1826-1900)의 그림을 보기로 하지요. 제가 두 사람의 생몰 년대를 적어놨는데 처치가 4년 먼저 태어났지만, 형제들처럼 한 시대를 함께 활동한 화가들로 봐도 되겠지요.  (이래서, 미술관에서 비어시타드와 처치가 늘 함께 붙어다니거죠.)

 

 

나이아가라 폭포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제가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라는 미국 화가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작품이 바로 이 '나이아가라 폭포'입니다. 2008년 5월 이른 아침에 코코란 미술관에 혼자 가서 열시의 개관 시간을 기다리던 일이 생각이 나는군요. 그 날 한가롭게 안내인의 안내를 받았는데, 이 그림 앞에 앉아서 제법 상세한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직접 가서 본 것은 2005년 8월의 일이었는데요,  가서 보고 깜짝 놀랐었죠.  당시에 주변에 있던 유학생 가족들도 여름에 아이들과 미 동부 여행을 다녀오곤 했는데, 저는 돈도 없고 공부도 바빠서 여행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가 여행 다녀온 사람들을 붙잡고 묻곤 했습니다.  "어디가 제일 좋았나?"  어른들은 뉴욕과 워싱턴이 인상깊었다고 얘기하고, 청소년들은 '나이아가라 폭포'가 너무너무 근사했다고 대꾸들을 했지요.  나이아가라 폭포야 그냥 폭포인데 그게 근사할게 뭐가 있나?  그냥 그러려니 했었는데, 막상 가보니 기가 막히더라구요.  나이아가라 관광하는 동안 정말 애들처럼 좋아 죽는줄 알았습니다. 신나서. 하하하

 

나이아가라는, 가서 봐야 하는거지, 영화 백날 봐 봤자, 현실감이 없죠. 

 

1700년대에 유럽인이 처음 나이아가라를 발견한 이래로,  유럽대륙에 나이아가라에 대한 환상이 자라났다고 합니다. 당시에 사진이 있었대도 흑백사진을 간신히 만들던 시절이라, 사진가지고 그 현장의 감동을 전하기는 어려웠을테고, 결국 그림이 가장 현실적인 수단이었겠지요.  그래서 프레데릭 처치 외에도 여러명의 화가들이 나이아가라 폭포 그림을 그렸습니다.

 

Niagara Falls, 1857, Oil on Canvas (42 1/2 x 90 1/2 inches)

2009년 10월 3일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이 그림이 처음 소개가 되었을때 유럽대륙에 없는, 오직 '신세계 New Worlld' 미국에만 있는 장관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남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이 나이아가라폭포는 제작년대를 보니 프레데릭 처치가 27세때 그린 작품이군요. 이 그림의 성공으로 프레데릭 처치는 미국의 풍경화가로서 탄탄 대로를 나아가게 됩니다.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은 커넥티컷주의 하트포드시에서 부유한 시계제조회사, 보험회사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선대가 부유하다보니 프레데릭 처치 자신은 먹고 살 걱정이 없었고, 그가 미술에 재능을 보이자 그는 일찌감치 허드슨 강변의 화가들 (Hudson River School)의 원조인 Thomas Cole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에게 연결되어 그의 제자가 됩니다.  그는 일찌감치 22세가 되던 해에 National Academy of Design 의 멤버가 되고 뉴욕에 정착하여 스케치 여행을 다니게 됩니다. 일년의 봄, 여름, 가을에는 여행을 다니고, 겨울에는 뉴욕으로 돌아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것이지요. 그는 1853년과 1857년에 남미 여행을 하기도 하면서 남미의 숲이나 풍경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후에는 유럽과 중동등 세계 여러나라를 돌면서 현지의 풍광을 스케치하고 대형 풍경화 작업을 했지요.  후기에는 그의 스승 토마스 콜과 마찬가지로 허드슨 강변에 대 저택을 짓고 정착하게 되지요.

 

 

아, 그런데 이 사람 이름이 특이하죠.  성이 Church 입니다. 예배당이 '처지' 쟎아요. 미루어 짐작컨대, 집안이 신앙심이 강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거죠. 미술 비평가들중에는 처치의 풍경화에서 어떤 '정신적인 spiritual' 면을 해석해내기도 합니다. 보편적으로 아름다운 자연 자체가 숭고성을 전하지 않나요? 어떤 사람에게 신앙이 있거나 없거나, 혹은 어떤 신앙이나 사상을 갖고 있거나 간에, 위대하고 장엄한 자연 풍경 앞에서는 스스로 옷깃을 여미고 풍경 너머의 어떤 의미를 사색하게 되쟎아요.  우리가 매일 보는 황혼이 어느날 유난히 붉을때, 혹은 달이 어느날 유난히 환할때, 별이 유난히 반짝일때도 우리는 그런 자연 현상에서 어떤 상징성을 찾고 싶어하지요. 설령 우리가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프레데릭 처치는 박물학자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 (1769-1859) 의 저서인 Cosmos 를 탐독하고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훔볼트는 남미 지역을 탐사하면서 식물 지리학이라는 분야를 개척했고,  다윈(1809-1882)은 비글호를 타고 남미를 탐험했지요.  처치 역시 이들의 영향을 받아 그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눈을 돌리고,  그의 분야, 풍경화를 통해 그가 본 것들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재미있어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지역을 돌면서, 어떤 사람은 박물학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진화론'이라는 경천동지할 가설을 탄생시켜서 우리의 사고체계를 확 뒤집어버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것을 화폭으로 옮겼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저는 누가 더 똑똑하고 잘났다는 얘기를 하기보다는,  사람마다 타고난 품성과 재능이 각자 다르므로 각자 자신의 재능과 취미대로 자신을 펼치면서 살면 인생이 재미있고 다채로워질거라는거죠.  우리 모두가 다윈이 될 필요도, 우리 모두가 화가가 될 필요도 없죠. (관객도 필요해요~ ).  그렇지만 우리 모두 각자 위대한 개인임은 분명하죠.

 

뉴포트 산 풍경

 

New Port Mountain, Mount Desert, 1851, Oil on Canvas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이 그림은 대형 작품은 아닙니다. (제가 게을러서 그림 사이즈를 정리를 안하고 이렇게 때우는군요.) 이 풍경은 뉴포트의 사실적인 풍경으로 보입니다.

 

 

 

오로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의 한 갤러리에 있는 작품인데요, 이 갤러리 앞을 지나갈때면, 어디선가에서 빛이 번쩍 나면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인상입니다.  이것이 오로라 인가봐요.  (저는 아직 오로라를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극지방에 가면 하늘에 오로라가 보인다고 하쟎아요).  오른쪽의 오로라 그림도, 왼편의 풍경화도 모두 프레데릭 처치의 작품입니다.  여기 의자가 있다는 얘기는, 이 의자에 앉아서 그림을 감상하시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 거리와 각도에서.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시면, 왼편 아랫쪽에 배하고, 썰매 팀이 작게 보이는데요, 이들은 탐험가 Issac Hayes 탐험팀입니다. 이들은 1860년에 북극 탐사를 했습니다. 그는 탐험 기록으로 많은 스케치를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미국에 돌아와보니 내전 (남북전쟁 1861-1865)으로 나라가 분열되어 있었지요. 기가 막힌 상황이었죠. 프레데릭 처치는 북극 탐사팀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탐사팀이 가져온 스케치와 이야기를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1865년, 이 오로라 그림을 완성시켰는데요. 스미소니안 미술관에서는 이 그림에 대해서 '암울한 국가적 갈등에 대한 불운한 전조'를 보여줬다는 식으로 설명을 하는데요, 관객인 제가 볼때 이 그림은 오히려, 희망의 상징처럼 보이거든요. 오로라는 신화에서 '새벽'의 여신인데, 1865년의 미국사와 '오로라'를 연결지어 본다면,  내전이 끝나고 새로운 역사가 동터오는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하는거죠.

 

 

Aurora Borealis, 1865, Oil on Canvas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

2009년 12월 29일 Smiethsonian American Art Museum 에서 촬영

 

 

 

안데스 산맥의 코토팍시 분화구

 

Cotopaxi, 1855, oil on canvas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

2009년 12월 29일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에서 촬영

 

프레데릭 처치가 남미를 여행하던 중에 봤던 풍경인것 같죠. 안데스 산맥의 코토팍시 산을 그린 것입니다.

 

 

 

 

 

빛의 강: 프레데릭 처치의 마지막 그림

 

 

 

기록에 의하면, 프레데릭 처치는 1877년 손 관절의 문제로 더이상 그림을 그릴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빛의 강'이 1877년에 제작된 것이므로 이 작품이 그의 거의 마지막 작품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자료를 찾아보면 1877년 이후에 발표된 작품을 만나기가 힘듭니다. 왜 1900년까지 생존한 사람의 작품이 1980년대에 끝나는가 의문을 가졌었는데, 신병때문에 이후에 작품 활동이 불가능해졌던 것 같습니다. (아, 전에 소개드렸던 Grandma Moses 의 경우에는 http://americanart.textcube.com/93  모세할머니가 수놓기를 즐기다가 눈이 어두워지고 손도 불편하여 수놓는걸 포기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출세을 했다고 하지요.사람 일은 알수가 없는거죠.)

 

 

 

El Rio de Luz (The River of Light), 1877, Oil on Canvas

213.7 x 138.1 cm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이 작품은 1857년 그가 남미를 여행했던 당시의 스케치와 기록과 기억을 바탕으로 20년 후인 1877년에 그린  것입니다. 51세가 된 화가가 31세때 여행했던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렸다고 것이지요.  그림을 들여다보면, 남미 열대기후에서 볼 수 있는 열대 식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고요 뽀얀 새벽안개 속의 물빛도 왠지 따뜻할것 같습니다.  '빛의 강'이라니 이 물에 잠겨 수영이라도 하면 극락일것 같지요.  이 그림을 보면, 처치의 세밀한 자연관찰력과,  자연과학 너머의 숭고한 정신세계 그 양면적인 것을 그대로 보여주지요.

 

제가 남미에는 아직 못가봤지만, 미국의 최 남단인 플로리다에서는 한 오년을 살았는데요, 바다에 가면, 바닷물이 따뜻해요. (겨울에도). 강이나 호수는 고요하고 역시 따뜻해요. 열대 식물들이 빼곡하고, 악어, 도마뱀들이 태평하게 돌아다니고.  돌아보면, 참, 내가 낙원에서 일생의 오년을 보냈구나...이런 생각이 들어요. 특히나 지금처럼 백년만의 폭설이라는 눈때문에 방에 갖혀서 꼼짝도 못하고 있을라치면, 내가 잃어버린 낙원이 미치도록 그리워지지요.

 

처치가 후년에 대지를 사들여 저택을 지은 뉴잉글랜드 지방 허드슨 강변은 사실  겨울이면 엄청 추운곳입니다. 겨울엔 그런데서 살기 싫죠. 그래서 동부의 돈많은 갑부들이 플로리다에 겨울 별장을 마련해 놓고 즐기는거죠.  자,  손에 류머티즘이 와서 손도 불편하고, 날도 춥고, 어디 나가기도 불편한 겨울날, 오십대의 화가가 작업실에 앉아서 이 그림을 그리는 광경을 상상해봅시다. 그의 추억속의 남미, 빛의 강이 얼마나 그리울지, 얼마나 미적지근하고 습기로 끈끈하며 그의 시린 어깨를 녹여줄지.

 

그의 연보를 살피다가, 이 그림이 아마도 공식적으로 공개된 그의 작품으로는 최후의 작품인것을 발견하니 새삼, 그림을 다시 보게 됩니다. 프레데릭 처치는, 아마도 온화한 말년을 보냈을것 같아요. 그의 마지막 그림이 빛과 따뜻함에 감싸인 새벽의 강인것을 보면 - 그가 돌아간 세상도 이와 비슷할지 모르죠.

 

 

2010년 2월 7일 일요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일찌기 허드슨강변의 화가 Thomas Cole 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허드슨강변의 풍경화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에 대해 잠시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이제 그들중에서 대표적인 몇사람을 소개할 시간이 된것 같습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360 이전 페이지에서 알버트 비어시타드의 대형 풍경화를 소개했지요.  비어시타드도 허드슨강변의 화가로 분류되는 사람입니다.  다음은 코코란 미술관에서 발견한 그의 대형 그림인데요,  왼편에 보이는 것은 Frederick Edwin Church 라는 화가의 '나이아가라' 라는 작품이고요,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비어스타드의 '미국들소의 최후'라는 작품입니다.  프레데릭 처치 역시 허드슨 강변의 화가에 속하므로 비어스타드 페이지를 마치고나서  소개를 하겠습니다.  일단, 사진에서 보시듯이, 작품들이 크죠.

 

들소떼의 최후

 

 

(오른쪽 그림) The Last of the Buffallo, 1888,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그림의 제목이 '버팔로 (미국들소)의 최후'입니다. 1888년 작품인데 화가가 58세때 그린 것이므로 그의 화풍이 충분히 완성된 시기의 작품으로 봐야겠지요.  제목이 이미 어떤 비극성을 띄고 있지요.  최후라...

 

역사적으로 보면 1870년대에 미국의 평원지대에 살던 들소떼가 거의 멸종 상태에 달 할 정도로 무차별 사냥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들소의 가죽 때문이었지요.  그러니까, 들소 가죽을 얻기 위해서 들소를 죽인거죠 (마치 코끼리의 상아를 얻기 위해 코끼리를 죽이듯).  이 들소떼의 사냥에 적극적이었던 집단은 평원의 인디언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들 역시 살기 위해서, 백인들에게 들소 가죽을 넘기기 위해서 들소들을 몰살했겠지요.  그리고 그 인디언들 역시 비슷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결국, 이 그림은 어떤 면에서 미국대륙의 '원주민들'이었던 아메리칸 들소떼와,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최후를 그린 셈이지요.

 

 

The Last of the Buffallo, 1888,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부분: The Last of the Buffallo, 1888,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기개있게 피를 흘리며 싸우던 들소떼도

 

부분: The Last of the Buffallo, 1888,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창을들고 들소와 대적하던 인디언들도

 

 

The Last of the Buffallo, 1888,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저 들판을 질주하던 들소떼들도 이미 종적을 감추고 없었을겁니다, 비어시타드가 이 그림을 완성하던 1888 무렵에는.  이 그림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향수, 추억 같은 것이지요. 실재 상황을 실재 현장에 가서 스케치해서 그렸다기 보다는 비어시타드가 전에 본 일이 있던 풍경위에 그가 상상한 장면들을 덧입혀 그려낸 '상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비어스타드가 그의 경험과 상상력을 기반으로해서 탄생시킨 이 그림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현장의 역동성을, 우리가 약자들에게 자행한 살륙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지요.

 

 

이 그림 보면요, 어릴때 배운 미국 민요 '내집 가련다 들소들 거닐고~' 이 노래가 생각나요.

http://en.wikipedia.org/wiki/Home_on_the_Range 이 페이지에 여러가지 가사가 소개되는데요, 어쨌거나 이렇게 시작하죠

 

Oh, give me a home where the Buffalo roam
Where the Deer and the Antelope play;
Where seldom is heard a discouraging word,
And the sky is not cloudy all day
 

1870년대에 처음 불려진 기록이 있다는데요, 그때는 들소떼가 아직 남아 있었죠. 바로 그 1870년대에 들소 사냥의 열풍이 불어서 1880년대가 되었을때, 들소는 '추억'으로만 남게 된거죠.  사람들은 그가 지구의 어디에 있건 근본적으로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데요.  신생국 미국도 국가의 발전과 산업화와 함께, 이들이 잃어버린것이 많지요.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것들은 그리움으로 남아서 울리게 되지요.  제가 지금 버팔로의 최후 그림을 보면서 떠올리는 것은 들소떼가 사라져버린 미국의 어느 평원이 아니지요. 제 머릿속에는  아파트 개발로 사라진 내 고향마을이지요.  들소떼도 사라지고, 내가 멱감던 실개천도 사라지고... 모두 죽거나 사라지거나, 그런거죠.

 

 

 

 

 

 

 

 

에메랄드 호수

 

 

The Emerald Pool, 1870,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1월 29일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위의 들소떼의 최후나, 그 전 페이지에 소개가 되었던 시에라 네바다의 풍경이 '상상화'에 가깝다고 한다면, 이 풍경은 실재 풍경에 가깝다고 할 만 합니다.  1869년 뉴햄프셔주의 White Mountain 에 스케치 여행을 가서 습작을 그려 온 것이라고 하는데요, Mount Washington 에서 동쪽으로 수마일 가면 에머랄드 호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림 속에 멀리 희게 보이는 산이 Mount Washington 이라고 합니다.  동부에 실재하는 자연 풍광을 그린 이 작품은 허드슨 강변의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소재나 분위기를 여실히 전해주고 있지요.

 

 

The Emerald Pond, 1870,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1월 29일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루쩨른 호수, 스위스

 

 

 

Lake Lucerne, 1858

 

 

이 그림은 비어시타드가 28세때 그린, 청년기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스위스의 루쩨른 호수를 담았습니다.  아마도 스위스 여행중에 보았던 풍경이었을거라 짐작합니다.  대형이지요.  비어시타드는 이미 청년기부터 초대형 풍경화를 그렸던 것 같습니다. 

 

비어시타드는 1830년 독일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3세 되던 해에 그의 가족이 미국의 매사추세츠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23세가 되던 1853년부터 1857년까지 독일의 뒤셀도르프에서 미술 수업을 받고, 미술 지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1859년 미국으로 돌아와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그림 활동을 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이 루쩨른 호수 풍경은 그가 미국에서 활동하기 직전의 유럽 풍경을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Lake Lucerne, oil on canvas, 1858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9월 11일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1859년 그는 미국 정부의 후원을 받고 서부로의 여행을 떠납니다. 화가로서 그가 할 일은 서부의 풍경을 담아 오는 일이었지요. 그러니까 그 당시 미국 동부에서 볼때 서부는 아직 미개척의 땅이었고, 여러분야의 탐사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풍경을 스케치 할 화가도 탐사팀에 필요했겠지요.  비어스타드는 그 후에도 여러차례 동부에서 서부로 향하는 스케치 여행에 올랐고, 게다가 그는 그의 그림을 이용해 돈을 벌어들이는 재주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대형 미국의 풍경화는 그것이 진경이었건, 사실에 근거한 상상의 산물이었건 유럽 사람들의 신대륙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었습니다.  그는 살아 생전에 400점이 넘는 풍경화를 팔아 넘겼고, 그의 인기는 그의 사후에도 여전하다고 합니다.

 

비어시타드의 대형 풍경화가 저에게 그리 매력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갖는 역사성을 보면,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저는 학교에서 수업할때 'context' 읽기를 강조 할 때가 많습니다.  누가 어떤 발언을 했을때, 그 발언의 'context'가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떤 책의 누가 한 말을 인용할  때 역시 그 말이 나온 앞뒤 전후 사정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어떤 기자가 '잘못된 보도'를 해서 좀 시끄러웠는데요.  "자기 문제 자기가 해결할 능력이 있는 사람만 오라"고 어떤 사람이 말을 했다고 해서, 그 말 한 어떤 사람이 졸지에 '죽일놈'이 되었다가, 며칠 지나자 그런 잘못된 보도를 한 기자가 '죽일놈'이 되었다가 이리저리 뒤집어지고 시끄러웠습니다. 아니 뭐 지진이 난것만도 재앙인데, 그런 일 가지고 서로 죽이네 살리네 한다는 말입니까.  서로 협동해서 잘 해도 어려운 판인데요.  서로간에 여유와 아량이 필요한데요. 보도를 접하는 우리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이죠.  왜 며칠사이에 이사람, 저사람이 죽일놈이 되고 그러냐하면, 정확한 컨텍스트 없이 말이 이리저리 흘러서 그런 것이지요.

 

 

 

19세기 중반에 그려진, 지금으로부터 150여년전에 그려진 비어스타드의 대형 풍경화를 오늘날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사실 별것 아닙니다.  '좀 크군...' 하면 그만 입니다.  풍경이 뭐 스펙터클 하다 한들, 우리들은 이미 대형 스크린의 무지무지한 스펙터클에 익숙한 세대인걸요.  그런데요,  그 그림이 150년 전에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미지의 땅, 우리들이 한번도 가보지 못한 땅, 그 땅의 풍경을 실제크기처럼 어마어마하게 그린 그림.  말하자면, 비어스타드의 그림은 오늘날의 입체영화관에서 상영되는 3D 스펙터클 영화 만큼이나 당시 사람들에게 놀라운 경험이었을거란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 시대의 그림이 아닌, 백년 혹은 이백년 혹은 수백년 이전의 작품들이나 역사적 사실들을 볼때는,  현대적 안목으로 한번 살핀후에,  당시의 상황속에서 그것을 살펴보는 시각도 필요합니다.  현대적 안목으로는 별 것 아니지만, 당시에는 혁명적인 아디디어였을수도 있고요, 또 당시에는 별것 아닌것처럼 보였을지라도, 현대인의 안목으로 봤을때, 시대를 초월하는 획기적인 무엇이 들어 있을수도 있고요.

 

그래서요. 제가 요새 미술관 돌아다니며 여러 시대의 작품들을 한꺼번에 주루룩 살필 기회가 많은데요.  이렇게 한시대의 다양한 장르 혹은 여러시대의 명작들을 한꺼번에 훑다보니, 세상을 볼때도 조금 다른 시각이 자라나는 것을 느낍니다.  전후, 좌우를 살피는 습관이 들었지요.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다른 시각으로 생각해본다거나,  특히 내가 짜증나는 일이 있을때, 그 사건을 나의 시각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살펴본다거나 그런 시간이 많아졌지요.

 

세상 돌아가는 일을 '그림'처럼 보면,  관조하는 여유가 생기는것도 같아요.  컨텍스트를 들여다보고, 컨텍스트 바깥에서 들여다보고, 이리저리 사물의 다양한 면을 보는 것이지요. 누가 실수 했을때,  너무 나무라지 말고,  너무 몰아세우지 말고, 주의 주고, 반성할 시간 주고 좀 여유있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하게 됩니다. 

 

비어스타드의 풍경화가 내 눈에는 뭐 '좀 크네' 하는 정도이지만, 그렇지만, 그 당시엔 정말 대단했겠다. 그랬겠다 하고 다시 생각해보는것.  미술감상하다가 생긴 안목이지요.

 

 

 

 

Posted by Lee Eunmee

 

http://americanart.textcube.com/359  존 제임스 오드본의 페이지에서 잠시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 2층의 입구 풍경을 보여드렸는데요. 통로를 따라 이동하면 저 끝에, 커튼이 살짝 드리워진 방에 대형 풍경화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지요.  기왕에 발길 닿는대로 가는 인생,  이번에는 그 커튼 속의 대형 풍경화 이야기를 마저 해 볼까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19세기의 대형 풍경화의 시대를 전체적으로 다뤄야 할 것같아 뜸을 들이고 있었는데, 뭐 차근차근 진도 나가보죠.)

 

자, 발길을 따라 저와 이동을 해 보는겁니다.  이 통로를 따라 슬슬 걷다 보면

 

 

 

2010년 1월 31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자, 이런 방을 하나 만나는 겁니다. 이 방에는 기이하게도 커튼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풍경화가 있습니다.  방 가운데에 푹신한 벤치도 있습니다.  이제부터 이 벤치에 앉아서 그림을 보는겁니다.

 

 

 

2009년 1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그러면, 도대체, 이 방 입구에는 왜 커튼을 쳐 놓은 것일까요?

 

사연을 이야기 하기 전에.

 

제가 딴소리의 대가라는 것은 익히 아시지요? 늘 허접한 주변 얘기 하다가 본론을 잊고 마는 고질병이 있는데요.  '플란다스의 개' 이야기 아시지요?  저로서는 이세상에서 가장 슬픈 얘기, 너무 슬퍼서 심지어 테레비 어린이 만화 프로로 아로와와 네로가 행복하게 뛰어노는 장면이 보여도 그거 채널 돌리곤 했습니다. 결과를 다 아니까. 너무너무 슬픈 일이 결국 벌어질거니까. 절대 안본다 이거죠.  그렇지만, 줄거리 다 알거든요.  아무리 슬퍼도 몇번은 읽었으니까...  네로가 성당에 있는 그림을 무척 보고 싶어 하쟎아요.  이야기속에서는 그게 '루벤스'의 그림이었는데요.  그래서 저는 미술관에서 '루벤스'의 그림을 발견하면 엉뚱하게도 '플란다스의 개'를 떠올립니다.  "너 때문에 네로가 죽었단말야!" 뭐 이런 말도 안되는 심술을 루벤스의 그림을 향해 그려보는것입니다. 뭐 대단치도 않은 그림을 그리워하다가 네로가 죽고 말다니... 이런 심술도 나고요.  아무튼 네로때문에, 슬픈 이야기때문에, 저는 루벤스를 싫어합니다. (말 안되고 있죠?  루벤스는 억울하겠지만...)

 

그런데 그 플란더스의 개 이야기에 보면, 그 루벤스의 그림을 평소에 볼 수가 없쟎아요.  커튼으로 가려 놓아가지고, 특별한 행사때만, 혹은 돈을 내야만 그 그림을 볼수가 있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참 납득이 안가는데요, 그림에 커튼을 쳐 놓고 필요할때만 열어 보았다니요. 그런데 옛날엔 그랬다는군요.  그림에 먼지 탈까봐 그랬는지. 귀한거라 가려놓은것인지 알수 없지만.  아무래도 귀한것은 숨기고 싶은 법이라,  귀한 그림을 함부로 남이 볼수 없게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요, 또 이것이 납득이 가기도 해요. 뭐냐하면, 우리가 어디서 전시회 한다고 하면 돈내고 가서 보쟎아요.  요즘 한국에서 앤디 와홀전 한다는데 얼마 내고 보시나요? 못잡아도 만원은 넘게 낼거라고 추측하는데요. 뉴욕의 현대 미술관 입장료가 20달러도 넘으니까, 그림 보려고 이만원도 넘게 내고 들어가서 보는거쟎아요. 돈 없으면 그림 구경 하고 싶어도 못하는거죠.  물론 평생에 한번 볼까 말까한 명품들을 돈 일만원 이만원 내고 볼 수 있는것도 기쁜 일인데요, 하지만 돈 없는 사람에게 그 돈이 간단한 돈이 아니죠.  그러니까, 오늘날에 전시장에 돈 내고 들어가는 시스템이나, 옛날에 그림에 커튼 쳐 놓고 있다가 돈 받고 그림 구경 시켜준 시스템이나 뭐 큰 차이가 안나죠.  그렇게 생각하면 그림에 커튼치고 돈받고 구경시켜준 일도 납득이 간다는거죠.

 

 

 

 

 

 

 

미국이 18세기 중엽에 독립을 선포하고 독립전쟁도 하고 그랬지만, 그 당시에도 그리고 19세기 중반까지도 미국은 유럽에서 볼때는 낯선 곳이었지요.  그리고 미국이 독립하던 당시에 동부의 13개주만 참여했을뿐 나머지 지역은 아직 미 합중국에 속하지도 않았거든요.  미국은 독립당시에도 광활한 미개척의 땅이었던 것이지요.

 

이 그림은 미국의 풍경화가 Albert Bierstadt (알버트 비어시타드)의 작품인데, 그는 미국의 서부를 직접 여행하며 스케치를 하기도 했지만, 정작 그가 이 그림을 그린곳은 이탈리아 로마였습니다. 로마의 자신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완성하여 영국으로 보내 전시를 했지요.  전시장에 적절한 조명을 밝히고, 천막을 쳐서 그림을 가리고, 사람들에게서 입장료를 받은 후에 짜잔 하고 그림을 보여주는거죠. (서커스단에서 천막안에 진귀한것 갖다 놓고 돈받고 구경시켜주는것과 비슷했겠죠).  사진도, 인터넷도 없던시절,  유럽 사람들은 거대한 미국의 풍경화를 보면서 - 저곳은 신의 땅이 아닌가! 에덴동산이 아닌가!  경악하기도 하고, 이민의 꿈을 꾸기도 하고 그랬겠지요.

 

이 그림은 유럽을 돌며 돈을 긁어모은 후에 미국으로 건너와 보스톤에서 전시가 되었는데, 당시에 이 그림을 뜯어본 비평가중에 이 그림이 실제 미국의 '진경 산수'가 아니라는것을 알아챈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미 서부의 풍경이라고 했지만 사실 실제 이런 장소는 없었지요. 비어시타드가 서부를 돌면서 스케치했던 이곳 저곳의 풍경 중에서 근사했던 것을 총 집합시켜서 하나의 풍경화에 '때려 넣은'거죠.   하지만, 이것이 '진경산수'가 아니고 그냥 이것저것 섞어서 만들어낸 가상의 풍경이라고 해도 미국의 장대한 자연을 제대로 연출해냈다는 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만약에 독자중에 실제로 스미소니안에 가서 이 그림을 보게 되는 분들은, 이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보시기를 권합니다.  저 의자가 괜히 저기 있는것이 아니고요.  저 의자가 놓여진 곳에 앉아서 이 풍경화를 볼때, 그때 화가가 의도한 가장 '완벽한' 각도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도에서 흘끔 보고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혹은 의자에 앉아도 되나 안되나 눈치 보지 마시고) 의자에 편히 앉아서 이 풍경속의 숲과, 동물과, 물과, 산 그런것들을 즐기시길. 

 

 

 

 

 

 

Among the Sierra Nevada, California, 1868, oil on canvas

183x305 cm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내킨김에 19세기의 대형 풍경화와 풍경화가들을 시리즈로 적어볼까요.  ... 누굴 추리나...(부시럭 부시럭.)

 

 

2010년 2월 6일 RedFox

 

* 참고로 Albert Beirstadt 는 독일 태생의 미국인인데요, 그 사람 이름을 독일식으로 읽으면 /알베르트 비어쉬타트/에 가깝거든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를 /비어시타드/라고 발음하는 편입니다. 저는 독일어도 배웠고, 현재는 미국어를 많이 쓰고 있는데, 이경우 갈등이 좀 생겨요. 비어쉬타트라고 읽어야 할지 비어시타드로 표기를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는 비어쉬타트 라고 읽고, 정작 표기할때는 비어시타드라고 합니다. (어렵지요. 어차피 남의 나라말. 남의 나라 이름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361 2편에서 계속...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