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3. 9. 2. 17:27

 

기운을 차리고, 텅빈 주말의 학교에 와서 라디오 틀어놓고 밀린 일들을 처리하다가, 나의 음악회 예매 내역을 확인해보고 근래에 업데이트 된 공연 한가지를 새로 추가하였다.  첼리스트 다니엘 뮐러 쇼트가 바흐의 무반주 모음곡을 가지고 송도에 온다.  내가 악기중에 제일 좋아하는 '첼로.'  만져본 적도 없고, 그냥 듣기를 좋아하는 악기이다. 가을에 잘 어울리겠다. 

 

 

내가 내 계정에 들어가서 예매 내역을 살펴보니, 모두 연초에 사 놓은 것들이다. 그 때, 예매를 하면서도 과연 내가 이 연주회들을 모두 가 볼 수 있을까? 안심할 수 없었다.  봄에는 그럭저럭 모두 가서 볼 수 있었다.  가을엔 어떨까? 불투명했는데, 최근에 담당 의사로부터 경과가 좋다는 말씀을 들었다. 6개월 후에 다시 검사를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가을 한철도 나는 음악회를 가 볼 수 있을 것이다. 안도가 되어서 - 다시 업데이트 된 각종 공연중에서 내 스케줄에 부합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다시 예매하기 시작한다. 음악회 예매를 해 놓고, 별 문제없이 그 음악회들을 섭렵할 수 있는 여건과 건강이 허락된다면 인생은 그 자체가 천국의 일상이다. 

 

 

다니엘 뮐러 쇼트라는 사람의 프로필 사진을 보면 아마도 미남축에 끼는것 같다. 옛날 같으면 나는 잘생긴 그의 용모도 마음에 들고 그래서 열심히 그의 배경을 검색해보고 여러가지 정보를 모았을 것이다. 지금 나는 그에게 별 관심이 없다. 그냥 저런 사람이 바흐를 연주하나보다 하고 생각한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은 주로 카잘스나 로스트로포비치가 연주한 씨디로 들었다. 미샤마이스키의 연주 음반도 있었는데, 일단 거장들이 내 귀에 들어온 후에는 미샤마이스키를 꺼내 듣지 않게 되었다. 내게 바흐의 무반주 첼로조곡은 파블로 카잘스 또든  로스트로포비치이다. 다니엘 뮐러 쇼트가 이 거장들의 소리에 익숙한 나를 기쁘게 해 줄수 있을까?  안될걸. 아무도 그 위대한 할아버지들을 능가할 수는 없을걸? 뭐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 즐겁다. 괜챦아, 거장들만큼 깊지 않아도 괜챦다. 진지하게 연주만 해달라. 그러면 된다. 

 

 

* 내가 노인이 되어간다는 것을 실감할 때: 전에는 미소년이나 미남이 눈에 들어왔는데, 지금은 잘생긴것에 관심이 없어진다. 모든 인간은 나름 아름답다. 특별히 잘생긴 사람은 없다. 모두 하나하나 매력적이고 아름답다 - 이러한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3. 9. 1. 08:53

어제 저녁에는 아트센터송도에서 열린 [직장인을 위한 퇴근길 콘서트] 공연을 다녀왔다.  나는 이따금 공연 일정이 업데이트 되는 것을 확인하고, 앞서서 티켓을 사 놓곤 하는데, 지난 봄에 이미 이 표를 사 놓았던 모양이다. 공연 문자가 와서 '표 값을 냈으니 가보자'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나섰다. 무슨 공연인지 확인도 안했던 것인데 - 주제가 '라틴 음악' 이었다. 라틴 재즈가 주를 이룰것으로 짐작했다.

 

나쁘지 않았다. 일단 팜플렛에 소개도 되 있지 않았던, 서울 음대 출신 바리톤 가수가 '닐리 맘보'를 불러줬는데 - '아 저것은 내가 기타로 연주하던 그 마리아 엘레나구나!' 하면서 25년전 내가 한창 클래식기타를 연주할때 악보를 보면서 연습했던 그 마리아 엘레나를 떠올렸고, 그 시절을 떠올렸고. 그리고 생각했다, "오늘 이 마리아 엘레나를 저 바리톤 가수가 불러준것 - 그것만으로도 표 값은 톡톡히 받아냈다.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 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였다.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던 그것. 

 

나머지도 좋았다. 그러나 나는 피곤했다. 지휘자가 작두를 탄 만신처럼 혼자 굿을 해 대는 통에, 출연가수들이나 연주자들을 모두 잡아먹는 무대였다. 지휘자 혼자 미쳐 날뛰는 통에, 주위에 있던 가수, 연주자들이 빛을 잃은 이상한 무대. 나중에 집에 돌아와 '도대체 그 사람 뭐지?' 싶어서 검색을 해보니 천재라고 알려진 사람이다. 마치 '내 생일 잔치에 와서 정말 고마워, 한 상 잘 차렸으니 잘 놀가가기 바래' 하고 학예회 하듯이 혼자 굿하고 노래부르고 춤추고 난리를 치던 그 지휘자. 내가 보아왔던 지휘자 중에 '최악'이다.  연주자들의 빛을 다 꺼버리는 사람. 혼자서만 빛나는 사람. 혼자서 빛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빛과 기운을 모두 빨아들이고 혼자 발산하는 사람.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지휘자다.

 

그래도 인내심을 발휘하여 끝날때까지 기다렸다. 그들이 무대인사를 마치고, 내가 나오는데 문을 지키던 안내직원이 소근소근 물었다, "앙콜 공연 있는데 안보고 가세요?" 나는 슬픈 표정으로 대꾸했다, "앙콜을 꼭 봐야해요?" 직원은 말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

공연 관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공연자에 대학 악평만 남기는 것은 매우 무례하고 사악한 행동이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래서, 화단의 식물들을 다듬다 말고 뭔가 개선 방향을 생각해보기로 한다.

 

그 지휘자는 천재로 알려져 있고, 한국의 공연 예술 발전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일하는 예술가이다. 나는 사전에 그 사람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편견 없이, 기대 없이 '무지한' 상태로 공연을 관람했으므로 - 나의 시각은 내 개인의 주관과 그리고 철저히 무관심한 제 3자의 객관성을 띄고 있다는 점을 명시하고, 내가 생각하는 그 공연자의 발전방향은

 

 

 

1. 그 사람은 지휘자로 무대위에 섰을때, 자신을 드러나 보이지 않게 하려는 노력을 해 보면 좋을것이다.  무슨 말씀인가하면 - 어차피 지휘자가 공연을 이끌어간다. 지휘자가 아무말도 안해도, 관객을 쳐다보지 않아도, 어치피 처음부터 끝까지 지휘자가 무대와 객석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타에요, 제발 나를 봐줘요!'라고 외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지좀 말라. 피곤하다. 유치원 학예회에 나온 어린애가 '제발 나만 쳐다보고 내게 박수쳐주세요' 하는듯한 행동을 멈추라. 당신은 가만히 있어도 빛난다. 미니멀리즘이나 선불교적 절제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중간만 하라. 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그러면 나는 더욱 돋보일 것이다. 

 

 

2. 베싸메 무쵸를 출연 남자가수와 함께 불렀다. 거기 노래를 업으로 삼는 여자가수가 이미 둘이 서 있었는데도, 남자가수는 '지휘자님'과 함께 베싸메무쵸를 부르고 싶다고 했고, 지휘자는 가창력 돋보이는 음색과 그에 걸맞는 요란한 자태로 베싸메무쵸를 불렀다. 무대를 들었다 놨다 하는 공연이었다. 그런데 잠깐...여기서 생각을 해보자. 나는 그 공연이 해괴하게 여겨졌다. 세상에 '키쓰해줘! 키쓰해줘!' 하고 지랄 난동 발광을 하는 어떤 여자가 있다면 - 상대는 정말 그 여자에게 키쓰하고 싶어질까? 난 그 키스해달라고 지랄 난동을 부리는 그 여자로부터 혹은 남자로부터 멀리 멀리 저 멀리 도망을 가고 다시는 쳐다보지 않을것 같다.  당신들은 지금 베싸메무쵸 노래에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건가?  이것이 과연 새로운 곡 해석인가?  키쓰의 재해석인가 노래의 재해석인가? 아무튼 당신들은 키스의 달콤함과 은밀함 그리고 농염함에 똥을 퍼 부어댔다.  참 해괴한 무대였다. 곽객모독이라는 연극이 옛날에 있었는데 - 나는 그 연극 제목이 생각났다.  지휘자가 노래도 천재적으로 잘하는 사람이면, 그러면 가수를 하시던가.  아니면 지휘만 하시던가. 혼자서도 다 잘해낼것 같지?  아니... 뭔가 엉망진창 잡탕밥을 막 집어 던지는것 같았다. 그냥 한가지만 하시라.  그러면 더 빛나실 것이다. 이게 뭐 술자리도 아니고, 노래부르고 춤추고 장단 맞추고, 그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을 것이다. 

 

3. 무대에서 객석을 향해 하는 말이 너무 잡다하고 무례했다. '지금 몇시죠? 우리 이거 시간 안채우면 기획자가 뭐라고 그래요. 우리 어떻게 시간을 끌어야 할텐데요.'  --- 지휘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끌때, 나는 간절히 바랬다, "그냥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끝내줘. 예의상 끝나길 기다리는 것 뿐이야."  참 무례했다. 관객이 마치 자기네 서울대학교 동문회에서 만난 가까운 친구나 후배인것처럼 행동하던 그 사람. 안하무인 천진난만 재기발랄.  아마 이런것이 한국의 음악계에 유포된 미신적으로 알려진 어떤 천재성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젊으신 분이므로, 전도양양한 인재이므로 약간만 개선하시면 앞으로 주욱 발전하실 것이다. 발전하시길 빈다. 

 

 

이 무대를 보면서 나 역시 자성을 많이 했다. 내가 공인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 섰을때,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내가 수업을 이끌때 학생들 앞에서 나는 어떤 지휘자인가. 나는 좋은 지휘자인가?  이런 문제들을 생각했다. 

  1.  나는 나의 '언어'를 매우 주의하겠다. 말 실수를 안하려면, 말을 조금만, 꼭 필요한 말만 하는 것이 좋겠고, 내가 사용하는 모든 단어에 대하여 세심하게 주의를 해야 한다. 
  2. 몸가짐 (옷 매무새와 서있는 자세, 말하는 자세) 이런 것들을 거울을 보고 세심하게 주의해야 한다. 너무 튀지 말아야 하고, 안정적이어야 하고, 그리고 겸손하면서 당당한 자세가 좋다. (이게 어렵지).
  3. 말은  짧게, 행동은 눈에 띄지 않게, 절제해야 한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3. 9. 1. 08:41

내 삶에서 반복되던 그 기분 나쁜 꿈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내가 기도가 부족한가보다. 

 

아주 오랫동안 잊을만하면 내게 나타나는 기분 나쁜 꿈이 한가지 있다. 늘 상황은 똑같다. 어떤 이유에선지 나는 어떤 알수 없는 사람을 이미 살해했고, 그 시신을 집안에 꼭꼭 숨겼으며, 그 시신이 부패하여 사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저벅저벅 누군가가 다가오고 - 나는 이제 그들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그 시신을 찾아내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불안하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다. 

 

'누구나 벽장속에 해골을 감추고 있다 (Everybody has a skeleton in the closet)'라는 속담처럼, 나도 집안 어딘가에 내가 살해한 시신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저런 속담이 있는 것을 보면 - 이런 나의 악몽은 인류의 원형질과 맥을 함께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비밀, 치부 뭐 그런것이 한두가지 쯤은 있겠지. 

 

이 악몽은 최근 수년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기도 생활을 성실하게 하고, 하루하루를 거룩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 내 영혼이 평안하였던 모양이다. 새벽에 이 악몽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내 기력이 약해져서 불안이 내 영혼을 다시 잠식하려는 모양이다.  해답은 - 깊이 깊이 기도하는 시간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리라.  약해진 몸에 영양제를 주입하고, 몸에 좋은 음식들을 먹이듯 - 약해진 내 영혼에도 밥을 먹여야 한다. 기도가 답이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3. 8. 31. 09:48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음은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함이나이다...'

 

내 영혼의 불이 다 꺼지고 내가 깊은 우물속으로 깊이 깊이 빠져들어갈때 - 나는 깨우는 장치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최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예고없이 갑자기 울리는 다급한 전화벨소리, 혹은 예고없이 들이닥치는 업무회의.

 

며칠전에도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내 영혼이 깊이 깊이 나락으로 빠져들어 나는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물론 숨을 쉬고 있었지만 내 영혼이 숨을 쉬지 못하고 있는것 같았다. 나는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집요하게 전화가 울려댔다.  나는 대체로 전화를 받지 않고, 내게 전화를 거는 이들은 그것이 로봇이 거는 피싱전화이거나 광고전화이거나 혹은 가까운 사람들의 전화이거나 간에 내가 대여섯차례 벨이 울려도 받지 않으면 더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 편인데, 그날은 집요하게 계속해서 전화가 울려댔다. 끊었다 다시 걸고 끊었다 다시 걸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내 전화를 울려대던 그이는 마침내 내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님, 저 *** 인데요. 전화 통화 가능하실까요?"   그는 아마도 내가 '모르는 전화'라서 수신을 안한다고 상상했던 듯 하다.  물론 내 전화에 그의 번호가 등록되어 있어서 나는 그가 전화를 걸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단지 대답하기 싫어서 응대하지 않았던 것인데 - 그는 지속적인 전화와 문자메시지로 나를 불러대고 있었다. 엔간히 급한 일인가보다.  나는 마지못해 진땀을 닦으며 그에게 전화를 걸어준다.  내용은, 예상했던 것보다 별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내게는 별것도 아닌 것이지만 그에게는 매우 중대한 일일 수도 있으리라. 아마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의 소원수리를 해주기 위해서 나는 컴퓨터를 켜고 들어가서 간단한 작업을 해야 했는데 - 그러다가 문득 내 영혼에 불이 켜졌다. 어둠속에서 성냥불 하나가 켜지면 그게 꽤 밝아진다. 어둠속에서 순간 성냥불하나가 켜진것처럼, 문득 내 영혼에 불이 들어왔다. '모두들 지금 생존하기 위해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구!  너는 지금 누워서 뭘 하고 있는거야 사지가 멀쩡해가지고는. 어서 일어나지 그래!'  -- 누군가 내 엉덩이를 걷어차며 나를 흔들어 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날 나는 벌떡 일어나서 진땀을 내며 책상앞에 앉아 밀린 일들을 해 치웠다. 오랫만에 수직으로 일어나서 (주로 수평으로 누워있었으니까) 작업을 하니 그동안 누워있던 것이 효과가 있었던 듯 짧은 시간안에 매우 효과적으로 일들을 해치웠다.  물론 그러고나서 다시 시체처럼 누워 지내야 했지만 말이다.

 

어제도 오후 한시에 책상앞에 앉아서 노닥거리고 있을때, 내 프로젝트를 관리해주는 스태프님이 예고도 없이 내 연구실에 들이닥쳤다. 대개는 방문 직전에 "지금 시간 되세요? 미팅 하시죠"라는 문자라도 주곤 했는데 어제 그는 이런 짧은 메시지도 없이 그냥 들이닥쳤다. 예전에 그런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말이다. "뭔가 일이 생기신것 같아서 그냥 와 봤어요"가 그의 설명이었다.  그냥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것 같았다고.  그와 앉아서 미루고 있었던 일들에 대한 논의를 했다. 내가 해야 하지만 하기 싫어서 결정을 미루고 미적거리고 있었던 일들. 그 안건들을 가지고 그가 들이닥쳤다. "힘드시면 취소하셔도 될것 같은데요..."그의 배려심 가득한 한마디가 내게 용기를 줬다. "그래도 하겠다고 약속한 일이니까, 해야지요. 지금 스케줄 잡읍시다."  우리는 아주 짧은 시간에 큼직큼직한 것들을 결정하고 스케줄을 세웠다. 그와 사업 얘기를 하다보니 - 내가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누군가 깊은 우물속에 '오필리어처럼 누워있던' 내 영혼을 끄집어 내는것 같았다. 

 

그와의 미팅을 마치니, 지금 내가 서둘러서 일을 해야 한다는 각성이 일면서 뿌옇던 머릿속 안개가 조금씩 걷히는 듯 했다.

 

어제 오후에 아주 짧은 시간에 나는 또 많은 중대한 일들을 해치우고, 밀렸던 메시지들을 소화해 냈다.  그리고 모처럼, 저녁을 근처 한정식집에가서 외식으로 했다. 오랫만에 이런저런 반찬과 뜨거운 돌솥밥을 맛있게 해치웠다. 숭늉까지도 아주 달게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홈플러스에 들러서 계란과 식료품들을 사고, 나오는 길에 - 바카스를 한 상자 샀다. 나는 평소에 박카스나 그런 드링크를 안먹는다. 바카스는 어쩐지 공무원들이나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건설 노동자들이 먹는 것이라는 해괴한 상상을 품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은 어딘가 내게는 금단의 영역이었었다. (내가 위의 직업군에 어떤 편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옛날에 우리 엄마가 동사무소에 뭔가 서류 떼러 갈때면, '와이로'로 바카스 그런거 한상자 사들고 갔던 것이 머리에 박혀 있어서 그럴뿐이다. 하하하)  그런데 진열대에서 바카스를 발견한 나는 손을 뻗어 그것 한상자를 카트에 담았다. "여기 구론산도 있고, 여기 이것은 1+1 행사인데, 이건 어때?" 남편이 옆에서 나를 약간 비웃으며 거들었다. 남편도 바카스나 그런 미신적인 음료수는 입에도 대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런 것들이 모두 카페인 덩어리라는 미신적 편견을 갖고 있다. 

 

나는 나를 비웃듯, 조롱하듯, 구론산이니 뭐니를 가리키는 남편에게 정색을 하고 - 노려보며 - 신경질적으로 -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지금 농담할 기분인 줄 알어? 난 지금 이거라도 먹고 이 무거운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싶은거라구! 내가 술을 해? 담배를 해? 커피도 안마시쟎아. 이 우울증에서 벗어날 뭔가 조력장치가 필요하단 말야. 난 이 바카스의 도움이라도 받고 싶다구!" 

 

사람들이 아마도 그래서 술이나, 프로포폴이나 환각제 뭐 그런 것에 빠져드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거기까지는 가지 않을거야.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그것을 내게 허락하지 않으실거니까. 그 전에 나를 치유해주실거니까. 내게는 아버지가 계시다구... 나보다 더 많이 한숨지으실 내 아버지가. 

 

오늘 아침은 어제보다 낫다. 기적적으로 아침 여덟시부터 학교에 나와 앉아있다. 집에서 나올때 바카스 몇병을 챙겨 나왔다. 학교에 오자마자 청소를 하고 바카스 한병을 마셨다.  뭔가 기분이 좋아지는것도 같고. 하하하. 

 

어둠속에 벨이 울릴때 - 누군가가 우울의 늪에서 나를 건져내기 위해 전화를 하거나 예고 없이 들이닥칠때, 나는 우리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시려고 고민고민하시다가 저 사람을 내게 보내셨구나 하고 알아차린다. 나는 우리 하나님이 나를 항상 돌보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누군가 지금도 나를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을 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3. 8. 30. 14:13

평소대로 잠이 깨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일어날 기운도 없다. 멀거니 누워있다가 -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평소같으면 부지런히 단장을 하고 일찌감치 학교로 향하겠으나, 너무 피곤하므로 조금 쉬었다 가자고 생각하고 티브이를 켜고 소파에 누워서 선풍기 바람을 쐬다가 티브이를 켜 놓은채로 다시 잠이 든다.  점심을 먹으라는 소리에 깨어서 맛도 없는 점심을 먹는둥마는둥한다. (아침 먹고 누워잤으니 점심을 먹을 필요도 식욕도 없음이 당연하다).  그나마 포도나 사과와 같은 제철과일은 나를 기쁘게한다. 그것들을 갖다 주는대로 먹는다.  티브이를 켜니 섬에가서 뭔가 만들어 먹는 오락프로그램이 나오는데 그들의 삶이 평화로워보여서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들이 주고 받는 실없는 농담과 맛있어보이는 음식들 그런것들 덕분에 기분이 조금 좋아진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진 김에 일어나서 씻고, 대충 입고, 집을 나서서,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가운데 가까운 카페에 가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사 들고 연구실에 와서 앉는다. 오후 한시.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하자.  그래도 연구실에 나오면 나는 사람처럼 작동을 한다. 마치 어느 구역에서만 작동하는 기계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집에서 연구실까지의 그 짧은 거리가 천리같이 먼것이 문제다. 여기만 오면 나는 그래도 작동을 시작한다. 

 

 

내가 해야 할일

 

 * 내 직무상 해야 할 일들은 다행히 밀리지 않고 해 내고 있다. 

 * 내가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들 - 예컨대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좀 잘라야 한다던가, 얼굴에 난 사마귀 같은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피부과 예약을 하고 가봐야 한다던가 그런 사소한 것들을 마냥 미루고 있다. 그런것들을 미뤄도 사회적으로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으니까. 

 

사회생활

 

 * 여전히 여기저기서 초대가 오고 주변은 뭔가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다. 나는 내가 반드시 꼭 해야만 할 최소한의 응대만 하면서 버티고 있다. 아직 주변에서는 눈치를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단지, '요즘 그이가 잘 안보이네' 정도로 알듯 모를듯 느끼고 지나칠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사회생활 영역의 여기저기에서 조금씩 지우개로 지우듯 지워지고 있다. 초대를 받고 거절하는것이 참 힘들다. 그래서 거절을 잘 못한다. 하지만, 거절하는 표현을 연습해서 - 거절을 할것이다. 

 

이런것을 '가면을 쓴 우울증'이라고 하는건가? 사람들은 모른다, 내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내가 여전히 활기차고 언제나 웃고, 그리고 언제든 자신들이 힘들때 찾아와 위로 받을수 있는, 에너자이저라고 상상하고 있을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