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이미지는 내 머릿속의 '골목길'을 검색하여, 가장 비슷한 것을 빌려온 것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서,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던 나는 이런 골목길에서 성장했다. 집들이 있고,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에는 가게들이 즐비하고, 드문드문 주택과 상점이 뒤섞여 있는 그런 곳 말이다. 주택의 일부를 가겟방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집과 가게가 뒤섞여 있는.
대체로 도시생활이 아파트 거주로 바뀌면서 - 아파트 상가나 혹은 상가거리외에 집과 가게들이 뒤섞여 있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물론 지금도 지방 중소도시에 가면 그런 풍경들이 남아있으련만, 내가 현재 거주하는 인천 송도나 고양시 모두 아파트, 상가, 빌딩, 도로 뭐 이런 식의 구획이 분명하다. '사람의 집'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가게'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사람들이 살고, 상점들도 있지만 - 내 머릿속의 사람의 '집'과 사람의 '가게'를 현실에서 찾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도 용인의 고향땅에서 농사 짓는 일에 싫증이 나셨는지, '외도'를 몇년간 하신적이 있다. 수원의 원천호수 근처 마을에서 '가게'를 여셨다. 그 가게라는 것이, 호숫 입구 마을의 마당있는 보통 집이었는데, 원천 유원지 입구이고, 버스정거장도 바로 집앞에 있는지라, 그냥 보통 마당있는 집의 마루에 '물건'을 진열하여 팔기 시작하셨는데,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그 마루를 개조한 가게의 수입이 짤짤해지고, 그러면서 판매되는 물건의 종류도 점점 다양해지고, 뭐 간판을 달지도 않았지만, 그 가게를 하면서 두분이 수원바닥의 돈을 쓸어 모았다는 얘기도 있고, 어쨌거나 한재산 모으셨으리라. 개울건너 밭건너에 '선경직물' 공장과, '삼성전자' 공장이 그 당시 지어지고 있었고, 이어서 그곳에서 일하는 '공장 직원'들이 빵이나 사탕, 사이다를 사 먹을데가 우리집 밖에 없었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 이다. 상가도 상점도 무엇도 아닌, 그냥 마당있는 집 마루에 대충 만든 가게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내 머릿속에 뿌리내린 '가게'의 이미지는 그런 것이다. 사람의 집과 사람의 상점이 결합된. 그런것들은 새들이 멸종하고, 식물이 멸종하듯이 멸종되는 중이리라.
그런데, 오랫동안 남에게 빌려줬던 고양시의 내 집으로 이십여년만에 철새처럼 돌아온 요즘, 바로 내 집 근처에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우리집에서 길을 건너면 구청이다. 우리집 베란다에서는 구청의 마당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내가 원한다면 구청장님과 구청직원들이 출퇴근하는 것도 '감시'할수 있다. 집 앞에서 건널목을 건너면 구청담을 끼고 산책을 할수 있는데, 구청 담을 끼고 조금 걷다가 길을 건너면, 상가건물 사이로 '차의 통행이 금지된 구역'이 나온다. 거기서부터 대략 500미터 정도 되는 길의 양 옆으로 각종 가게들이 있다. 오늘 오후에 내가 산책을 나가서 들렀던 가게들을 저 끝에서부터 되뇌어 보자. 길의 끝까지 갔다가 집쪽으로 차례차례 되돌아 오며 가게를 들르는 것이다.
정말 '구멍가게'라고 할만한 자그마한 '구멍' 혹은 '굴'같은 도넛가게가 있다. 거기서 나는 모짜렐라 치즈볼을 4개에 오천원을 주고 샀다. 그집 꽈배기도 맛있지만, 나는 새로 발견한 치즈볼에 재미가 들려서 그걸 산다. 딱 한개만 먹으면 되는데 왜 네개를 사느냐하면 - 그냥 오천원 내는게 편해서 그렇다. (나이 먹은 사람이 잔돈 주고 받고 하는게 어쩐지 미안해서. 그정도 여유는 있으니까. 그렇게 작은 가게에서 크레딧카드 쓰는것도 어딘가 미안해서 꼭 현금으로.)
도넛가게 맞은편에 떡볶이, 어묵, 각종 튀김 그런것 파는 역시 작은 가게가 있다. 일전에 군대 제대한 조카가 온다고 해서, 조카 주려고 그집에서 떡볶이를 산 적이 있다. 오천원어치 샀는데, 조카와 둘이 1/3 정도 먹고, 나머지 2/3는 아직 냉장고에 있다. 나중에 먹을 것이다. 오늘은 그 집에서 튀김 오천원어치를 샀다. 튀김 한개에 800원이라고 해서, 그냥 오천원어치 달라고 했더니 일곱개를 준다. 오늘 한개 먹었다. 나머지는,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생각날때 꺼내 먹어야지. 나이 먹으면 먹는 양이 줄어든다. 생각같이 많이 먹지를 못한다.
몇 집 내려와서, 손두부 가게에서 - 사장님이 오늘 만들었다는 두부 두모를 샀다. (한개 오천원, 두개 만원). 그런데 사장님이 직접 만들었다는 누릉지도 있길래 그것은 한봉지 육천원에 샀다. 비상식으러 뒀다가, 출출하고 뭔가 뜨끈한 숭늉이 먹고 싶을때 끓여먹어야지.
길가에서 할아버지 한분이 이것저것 늘어놓고 농산물을 파시길래 감자를 한봉지 샀다. 역시 현금 오천원.
내가 고양시 집에 오면 반드시 가는 과일가게가 그 골목에 있다. 그 과일가게에서는 진열한 여러가지 과일중에 귤이 있는데, 참 이상하다. 큰 귤은 한바구니에 칠천원이고, 작은 귤을 한바구니에 만원이다. 전에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과일가게 사장님에게 물어봤다, "그런데 저것은 작은데 왜 더비싸요?" 나는 큰귤을 좋아한다. 과일사장님 왈, "원래 귤은 작은게 더 비싸요. 작은게 더 달고 맛있거든요." 어라..어라..난 큰 귤이 더 시원하고 맛있던데요? 과일사징님 왈, "그렇더라구요. 큰귤 좋아하는 분들은 작은귤 싫어하고, 작은귤 좋아하는 분들은 큰귤 싱겁대요." 나는 큰귤파다. 큰귤이 더 싸니 더 좋지 (원래 내 입맛이 저렴해요).
골목의 끝에 **생협이 있다. 사실 나는 생협이 뭔지도 모르는데, 살림의 여왕인 내 친구가 "너 생협에 멤버십 가입하고, 거기서 좋은거 사다 먹어라"하고 알려줘서, 친구가 이르는대로 멤버십가입하고 일주일에 한번은 들른다. 집에 올때마다 한번은 들르는 셈이다. 오늘은 거기서 콩나물, 쑥갗, 그리고 통영굴을 한통 샀다.
생협 맞은편에 '반찬가게'가 있다. 다섯개에 만원. 다섯개의 작은 팩에 들은 여러가지 반찬을 골라담았다. 시래기나물 두팩, 멸치볶음 두팩, 그리고 파래무침 하나.
물론 이 외에도 이 골목에는 빵집에 몇군데 있고, 남자 머리 깎는 미장원도 두군데 있고, 일반 미용실도 몇군데 있고, 여성 맞춤옷 만드는 그 옛날식 양장점 (기성복이 아니라 몸에 못 맞추는 그런것 말이다)도 두군데나 있고, 꽃집도 있고, 문방구, 김밥집, 떡집, 커피집...다음에 산책가면 입구부터 하나하나 기록을 해 볼까보다.
홈플러스나 뭐 롯데마트나 이마트를 갔다면, 나는 그 '마트'에서 이런 것들을 '카트'에 담고 한꺼번에 계산을 했겠지. 하지만, 그 가게골목에서 나는 일곱개의 가게에 들러서 일곱명의 가게 주인/점원과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주고 받고, 봉지, 봉지, 조롱 조롱 내게 필요한 먹을 거리들을 샀다. 봉지 봉지 조롱 조롱. 그중에서 무겁고 부피가 큰것은 시장가방에 담고, 찌그러지면 안되는 것은 따로 들고, 조롱 조롱. 우리 동네에 이런 가게 골목이 있다. 그래서 나는 우리 동네가 아주 맘에 든다.
2주 전에 노란 은행잎 빛깔로 물들었던 연세 백양로의 나무들은 이제 잎을 떨구고 겨울 휴식으로 들어서는 풍경이었다.
평소대로 오전 6시에 집을 나섰다. 네비게이터는 40분 후에 신촌에 도착할거라고 알려주었다. 길은 막힘없이 순하게 잘 흘러가고 있었는데, 운전을 시작한지 10여분이 흐른 후에 운전석 대쉬보드에 '타이어'에 문제가 있다는 표시등이 들어오더니, 이어서 타이어가 앞 뒤 모두 공기압이 떨어져있으니 점검하라는 좀더 상세한 메시지가 뜬다. 아마도 기온이 내려가니까 타이어 공기압이 줄어서 그런거 아닐까? 미국에서는 도로를 달리다가 이런 표시가 뜨면 근처 주유소에 들러서, 주유소 구석에 반드시 있는 공기주입기로 직접 공기를 넣어주면 되지만, 한국의 주유소에는 코인 공기주입기가 없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본적이 없다.) 살살 운전을 하면서 생각을 굴리다가, 일단 주유도 해야 하니까 근처 주유소에 차를 세우고 타이어 점검을 해보기로 했다.
수색 못미처서 (고양시와 수색 경계쯤 되는 곳) 전에도 새벽에 들렀던 그 주유소에 들어서니 어딘가에서 주유해주시는 아저씨가 나타나셨다. 나는 셀프 주유를 하려고 문을 열고 나선참이라서 아저씨가 주유를 하는 동안 차를 둘어보며 발로 쿵쿵 타이어를 쳐보기도 하고, 내 식으로 타이어 점검을 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타이어 표시가 떴는데, 어디서 공기를 넣죠, 이 새벽에?" 나 혼자 타이어를 발로 쿵쿵 치면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주유하던 아저씨가 흘려듣지 않고 대꾸했다,, "왜요? 차에 타이어표시 들어왔어요?"
그: 그러면, 주유 다 끝났으니까, 차를 저 구석으로 빼 놓고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이 형님이 오시면 되는데...
나: (차를 주유소 구석으로 빼 놓음)
그: 여기 계시면 우리 형님이 오실거예요. 그러면 형님이 봐주실겁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한 5분쯤 후에 새벽 어둠 속에서 또 한 사나이가 다가왔다. 그는 한구석 창소에서 공기주입기에서 연결된 호스를 가져다가 내 차의 네개의 타이어를 하나씩 점검하며 공기를 넣어주었다.
그2: 겨울에는 공기압이 줄어서 이런 일이 생기죠. 일단 임시방편으로 공기 맞춰 놓았으니까, 만약에 또다시 타이어 표시가 뜨면 그땐 어딘가 빵꾸가 났을지도 모르니까 자주 다니시는 카센타 가셔서 점검 받아보세요.
그1과 그2는 조심해서 무사히 목적지까지 잘 가시라는 덕담과 함께 나를 그냥 보내려했고, 나는 '커피'라도 사 드시라며 인사를 챙겼다. 극구 사양하던 그분들이 내 작은 선물을 받으며 훈훈하게 웃으셨다. 이분들이 새벽에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내 오늘 하루는 훨씬 더 고단했을것이다.
(추신) '휴대용 자동차 공기주입기'를 언라인으로 검색하여, 그중에서 평이 좋고 가격이 높은 (싼게 비지떡이라, 뭔가 잘 모를땐 가격 높은걸 고른다) 것으로 주문을 했다. 차에 갖고 다니다가 '타이어' 표시등 들어오면 당황하지 말고 내가 직접 손봐야지.
"내가 암에 걸렸지 정신병에 걸린줄 알아?"
복도에서 갑자기 쩌렁쩌렁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부터 모든것은 내가 '귀'로만 들은 내용이다.
온동네가 시끄럽자 마침내 그의 담당간호사였던 사람의 목소리가 등장했다. 노신사는 일부러 그 근처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들으라는 듯이 호령을 해 댔는데, 그의 큰 목소리덕분에 문제의 본말을 대체로 (주로 그의 시각에서) 주워들을수 있었다.
문제는, 항암치료를 받으러 온 그는, 자신이 항암제를 제대로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항암치료 다 끝났으니 이제 귀가하셔도 됩니다'라는 메시지를 듣고 황당해진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제대로 처방을 받고 주사를 맞은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했다. 마침내 소환된 간호사는 '제가 아까 모두 설명 드렸습니다' 하는 입장이고, 화가 난 노신사는 '당신이 언제 나한테 설명을 했다고 그래? 왜 거짓말을 쳐? 나한테 제대로 설명 안했쟎아. 왜 나한테 설명안하고 마치 내가 못알아들은것처럼 얘기하는거지?' 이런 입장이었다.
이때, 이 노신사가 분기탱천하여 했던 한마디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암에 걸렸지, 정신병에 걸린줄 알아?"
결국 해당 간호사가 '제가 정확히 설명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처방대로 주사 모두 맞으셨고요, 보호자님께 설명 드렸고요, 보호자님도 인정하시고요. 저의 실수에 대하여 사과드립니다. 오늘 주사 모두 끝나셨습니다.' 이렇게 설명과 사과를 나붓나붓 하는 것으로 이 소동은 끝이났다.
그냥 어느 한구석에서 이 소동을 귀로만 듣는 내 입장에서는 노신사가 약간 히스테리컬한 면도 있었고 (그 부인은 쩔쩔매는 말투였다), 아마도 어딜가나 저렇게 장군처럼 당당하게 자기 하고 싶은 말씀은 결국 하시는 분인것도 같고, 대체로 좋은 인상을 주기는 힘들었지만 그가 했던 한마디는 두고두고 곰곰 생각하게 했다. "내가 암에 걸렸지, 정신병에 걸린줄 알아?"
'환자'는 우리가 종종 잊고 있지만, 이 사회에서 '약자'에 속한다. 그들은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 그들이 신경질을 내면 - 환자로서의 히스테리로 보기도 쉽다. 몸이 아프기때문에 짜증을 내는 면도 있겠지만, 환자라는 이유로 어쩌면 무시당하고, 바보취급 당할수도 있을 것이다.
비명
테이크아웃으로 음식을 주문해놓고, 식당 벽에 기대서서 기다리는 동안 내 눈에 들어온 광경이다. 마침 점심시간이라서 직원과 방문객들로 장터처럼 붐비던 그 구내식당. 나는 벽에 기대서서 기다렸다가 음식을 들고 나가면 그만이었지만, 자리가 필요한 사람들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빈자리를 찾고 있었다.
평소에 그곳은 주문대에 서있던 식당 직원이 노약자들에게 마땅한 좌석을 찾아 안내를 하기도 하는데, 가끔 그런 광경들을 발견하면 그분들이 천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우연히 내 눈안에 들어온 광경: 한 젊은 여성이 입구 가운데 서서 홀 안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 두리번두리번 하는 사이에 카운터 직원이 그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나가서 기다려주세요." 젊은 여성은 그 말을 듣고, 입구에서 밖으로 사라졌고, 마침 그의 어머니인듯한 노부인이 그를 뒤쫒아 나서며, "저기 자리 네개 맡아놨다. 먹고 가자!" 외쳤고 - 이미 기분이 나빠진 젊은 여성은 노부인을 끌고 나갔고, 노부인의 뒤를 이어서 아파보이는 노신사도 영문을 모르는채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주문한 테이크아웃을 받으러 갔다 오니 식당입구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내가, 나갈줄 몰라서 거기서 나가라고 하는거에요? 내가 그런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보여요? 우리 아버지 오늘 항암받으러 오셔서, 뭐라도 드시게 하려고 자리 찾고 있었던건데 나가서 기다리라고요? 여기 나가서 기다리는 시스템이라도 있어요? 여기 병원 식당이면, 여기 오는 사람들의 기분이 어떤지는 아실거 아니에요? 지금 이것을 안내라고 하는거에요?" 해당직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대체로 상대가 흥분을 가라앉히기를 기다리며 사과하고 달래는 중이리라.
내게는 그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외마디 비명처럼 들렸다, '나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누군가 나를 좀 위로해줘. 내게는 늙으신 부모님이 계시고, 우리 아빠는 말기암환자야.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받으시는 중이야. 너무나 딱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는 비명같은것. 그것을 비명으로 듣는다면 - 그 카운터 직원도 칼과 같은 그의 말에 다치기보다는 공감하고 그리고 위로의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있는대로 화를 내는 그 젊은 여성에게 다가가 등을 토닥이며 - 괜챦아, 다 괜챦아질거야 - 뭐 이런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미소
그곳에 가면, 나는 의식적으로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때마다 방긋 웃어준다. 평소에 내가 밝게 미소를 지으면 사람들은 내 미소가 멋있다고 말한다. 그걸 기억해내고, 그곳에 가면 나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쩌다 눈이 마주친 사람들에게 그 멋있는 미소를 보내려 애쓴다. 오늘도 누군가가 "9번이 어디지..."하고 두리번 거리길래 "저기에요"라고 손가락으로 정확히 가리키며 환하게 미소를 보냈다. 항암치료를 받으러 온 그 창백하고 마른 사나이는 내 미소에 화답하듯 밝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이구 가르져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곳에 가면, 그냥 단지 미소만 보냈을뿐인데도 사람들은 고마워하고 인정의 꽃같은 미소로 화답하곤 한다.
그래, 우리 이렇게 살다가 내일 마른꽃처럼 진다고 해도, 오늘은 인정의 꽃을 활짝활짝 피우며 순간을 화려하게 사는거다. 웃는거다.
기말이 다가오고 있다. 기말 프로젝트 제출 시한이 다가오고 있고, 기말 제출 이전에 '드래프트'를 제출하고 심사를 받는 기간이다. 그 '초안 (드래프트)'에 이러저러하게 고치고 보충하라는 피드백을 주는것이 교수에게는 아주 중요하고 골치아픈 과제이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과제를 하느라 죽을 고생을 한다고 상상하는데,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들은 하나만 하면 되지만, 가르치는 나는 이걸 수십명 분을 들여다봐야 한다구! 내가 더 중노동이라구!"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학생이 과제하다가 몸살을 겪을때 - 그 과제를 들여다보고 피드백을 적절히 줘야 하는 교수는 피드백 주다가 응급실에 실려간다. 그래서 기말이 되면 학교 전체가 조금씩 미쳐가는것도 같다. 학생들도 피로에 쩔은 얼굴이고, 교수들도 넋이 나간 사람들처럼 허둥지둥 돌아다닌다. 우리 모두 힘든 산을 함께 넘는 것이다.
내 수업을 두가지를 수강하는 학생이 있다. 참 착실하고, 의지가 되는 학생이다. 아침 9시 수업을 학생들이 회피하고, 지각을 하고 그러는 편인데 이 학생은 내가 오전 8:40 쯤에 강의실에 도착하면 이미 와 앉아있다. 이른 아침 빈 강의실에 불도 안키고 조용히 앉아 있다. 뭘 하는지 모르지만 늘 일정하게 그자리에 같은 표정으로 앉아있다. 그래서 컴퓨터를 켜고 수업 세팅을 하면서 그와 이런 저런 대화를 하곤 한다. 참 좋은 사람이다. 오후에 진행되는 다른 수업에서도 그는 성실하고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해 나간다. 그 학생이라면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모든 과제를 무난하게 잘 해낸다.
그런데, 이 학생이 '연구 논문쓰기' 관련 수업에서 뭔가 이상 증세를 보였다. 기말 연구논문 제출 전에 '초안'을 제출하라는 과제에 엉뚱한 초안을 제출했다. 그동안 배우고 익힌 연구 논문 구조와 거기에 담을 내용 전체를 싸그리 무시한 제멋대로 아무거나 담겨있는 초안이었다. 나는 몇번이나, '이것이 우리 000이가 제출한 초안이란 말인가?' 컴퓨터를 확인 또 확인해야 했다. 나로서는 믿기지 않는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뭐 이러저러하게 잡다한 피드백을 덧붙이면서 맨 마지막에 별도로 개인적인 메시지를 추가했다 -- "There's something wrong going on with you. I think we need to talk."
오늘 아침에, 역시 일찍 나온 그와 빈 교실에서 수업 세팅을 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농담하듯이 물었다, "Hey, what's going on with you? Any family issue or girl friend trouble? Your draft is telling me something... I guess you have something to tell me..."
수업은 순조럽게, 활기차고 유쾌하게 지나갔다. 학생들이 모두 떠난 빈교실에서 내가 교실 컴퓨터를 끄면서 마무리를 하고 있을때 그가 다가왔다. '지난 주에는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까마득해요. 교수님 수업 뿐 아니라 다른 수업들도 엉망이었어요. 사실은 동생이 큰 사고를 당해서, 온 가족이 모두 정신이 없었어요...'
그랬다. 사고였다. 뭔가 이상했다. 감기에 걸리면 기침을 하고 그걸 주위 사람들이 알듯이, 학생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학생은 어떤 식으로든 '기침'처럼 신호를 보내고, 우리는 감지한다. 구체적인 내용을 모를 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의기소침해진 등을 툭툭 쳐서 위로를 하고, 이 위기 상황에 어떻게 학기를 잘 마무리 할지 의논을 한다.
어제, 연세대 심리학과 김민식 교수의 '더 컨트롤러'라는 책을 읽고 있다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는 폴 사뮤엘슨 선생님의 행복공식을 발견했다. 대충 이런 식이다 (위의 낙서). 내가 책 읽다 말고, "이런 공식이 있었네!"하고 감탄하자 - 옆에 있던 남편님이, "그러니까 행복해지려면 그 분모 값을 '영'에 가깝게 하는거야. 그게 스토아 철학자들의 생각이었어. 우리나라에서 조순 경제학책이 유명한데, 사실 그 책은 말이지 사뮤엘슨의 책 내용을...블라블라블라"
세상 천지 모든것을 다 아는것처럼 깝치던 내가 - 세상 사람이 다 아는 '공식'을 모르고 앉아있었던거다, 여태까정... 그런데, 내 수학적인 머리에 뭔가 문제가 있는것인지 '행복은 소비 나누기 욕망이다'라고 하면 나는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을 분수식으로 이렇게 그려놔야 내 머릿속에 개념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나는 나눗셈 인간이 아니고 '분수'인간인것 같다. 그렇지 '분수'를 알면 되는거지. 그래서 '안분지족'이란 말이 있는거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