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4. 11. 25. 17:20

 

두 사나이 

 

2주 전에 노란 은행잎 빛깔로 물들었던 연세 백양로의 나무들은 이제 잎을 떨구고 겨울 휴식으로 들어서는 풍경이었다. 

 

평소대로 오전 6시에 집을 나섰다. 네비게이터는 40분 후에 신촌에 도착할거라고 알려주었다. 길은 막힘없이 순하게 잘 흘러가고 있었는데, 운전을 시작한지 10여분이 흐른 후에 운전석 대쉬보드에 '타이어'에 문제가 있다는 표시등이 들어오더니, 이어서 타이어가 앞 뒤 모두 공기압이 떨어져있으니 점검하라는 좀더 상세한 메시지가 뜬다.  아마도 기온이 내려가니까 타이어 공기압이 줄어서 그런거 아닐까? 미국에서는 도로를 달리다가 이런 표시가 뜨면 근처 주유소에 들러서, 주유소 구석에 반드시 있는 공기주입기로 직접 공기를 넣어주면 되지만, 한국의 주유소에는 코인 공기주입기가 없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본적이 없다.)  살살 운전을 하면서 생각을 굴리다가, 일단 주유도 해야 하니까 근처 주유소에 차를 세우고 타이어 점검을 해보기로 했다. 

 

수색 못미처서 (고양시와 수색 경계쯤 되는 곳) 전에도 새벽에 들렀던 그 주유소에 들어서니 어딘가에서 주유해주시는 아저씨가 나타나셨다. 나는 셀프 주유를 하려고 문을 열고 나선참이라서 아저씨가 주유를 하는 동안 차를 둘어보며 발로 쿵쿵 타이어를 쳐보기도 하고, 내 식으로 타이어 점검을 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타이어 표시가 떴는데, 어디서 공기를 넣죠, 이 새벽에?"  나 혼자 타이어를 발로 쿵쿵 치면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주유하던 아저씨가 흘려듣지 않고 대꾸했다,, "왜요? 차에 타이어표시 들어왔어요?"

 

나: 네...이거 날이 차가워져서 뜨는거 같은데, 어디서 공기를 넣죠?

그: 카센터 가셔야죠 뭐.  지금 연데는 없고, 이따가 들러보세요. 

나: 그래야겠죠? (한숨)

그: 어디 가시는데요? 어디 먼데 가세요?

나: 지금부터 세브란스에 갔다가, 그 후에는 인천에 가야 하는데요...

그: 아이고, 그러면 카센터 들르기도 애매하시네... (잠시 생각하다가)...지금 급하시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봐드릴수도 있을것 같은데요.

나: 네, 일찍 서둘러서 출발해서 지금 급하지는 않아요. 봐주시면 저는 너무 좋죠.

그: 그러면, 주유 다 끝났으니까, 차를 저 구석으로 빼 놓고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이 형님이 오시면 되는데...

나: (차를 주유소 구석으로 빼 놓음)

그: 여기 계시면 우리 형님이 오실거예요. 그러면 형님이 봐주실겁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한 5분쯤 후에 새벽 어둠 속에서 또 한 사나이가 다가왔다.  그는 한구석 창소에서 공기주입기에서 연결된 호스를 가져다가 내 차의 네개의 타이어를 하나씩 점검하며 공기를 넣어주었다. 

 

그2: 겨울에는 공기압이 줄어서 이런 일이 생기죠. 일단 임시방편으로 공기 맞춰 놓았으니까, 만약에 또다시 타이어 표시가 뜨면 그땐 어딘가 빵꾸가 났을지도 모르니까 자주 다니시는 카센타 가셔서 점검 받아보세요.

 

 

 

그1과 그2는 조심해서 무사히 목적지까지 잘 가시라는 덕담과 함께 나를 그냥 보내려했고, 나는 '커피'라도 사 드시라며 인사를 챙겼다. 극구 사양하던 그분들이 내 작은 선물을 받으며 훈훈하게 웃으셨다. 이분들이 새벽에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내 오늘 하루는 훨씬 더 고단했을것이다.  

 

 (추신) '휴대용 자동차 공기주입기'를 언라인으로 검색하여, 그중에서 평이 좋고 가격이 높은 (싼게 비지떡이라, 뭔가 잘 모를땐 가격 높은걸 고른다) 것으로 주문을 했다. 차에 갖고 다니다가 '타이어' 표시등 들어오면 당황하지 말고 내가 직접 손봐야지. 

 

"내가 암에 걸렸지 정신병에 걸린줄 알아?"

 

복도에서 갑자기 쩌렁쩌렁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부터 모든것은 내가 '귀'로만 들은 내용이다. 

 

 그: 나, 주사놓은 간호사 오라고 해! 나 주사놓은 간호사 어딨어?

그의 보호자: (아마도 부인인듯, 쩔쩔매는 말투로) 아이고 알았어요, 제발 목소리좀 낮추세요...

그: 나 주사 놓은 간호가 부르라구!!!

 

온동네가 시끄럽자 마침내 그의 담당간호사였던 사람의 목소리가 등장했다. 노신사는 일부러 그 근처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들으라는 듯이 호령을 해 댔는데, 그의 큰 목소리덕분에 문제의 본말을 대체로 (주로 그의 시각에서) 주워들을수 있었다. 

 

 

 

문제는, 항암치료를 받으러 온 그는, 자신이 항암제를 제대로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항암치료 다 끝났으니 이제 귀가하셔도 됩니다'라는 메시지를 듣고 황당해진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제대로 처방을 받고 주사를 맞은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했다. 마침내 소환된 간호사는 '제가 아까 모두 설명 드렸습니다' 하는 입장이고, 화가 난 노신사는 '당신이 언제 나한테 설명을 했다고 그래? 왜 거짓말을 쳐? 나한테 제대로 설명 안했쟎아. 왜 나한테 설명안하고 마치 내가 못알아들은것처럼 얘기하는거지?' 이런 입장이었다.

 

 

이때, 이 노신사가 분기탱천하여 했던 한마디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암에 걸렸지, 정신병에 걸린줄 알아?" 

 

 

결국 해당 간호사가 '제가 정확히 설명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처방대로 주사 모두 맞으셨고요, 보호자님께 설명 드렸고요, 보호자님도 인정하시고요. 저의 실수에 대하여 사과드립니다. 오늘 주사 모두 끝나셨습니다.' 이렇게 설명과 사과를 나붓나붓 하는 것으로 이 소동은 끝이났다. 

 

 

그냥 어느 한구석에서 이 소동을 귀로만 듣는 내 입장에서는 노신사가 약간 히스테리컬한 면도 있었고 (그 부인은 쩔쩔매는 말투였다), 아마도 어딜가나 저렇게 장군처럼 당당하게 자기 하고 싶은 말씀은 결국 하시는 분인것도 같고, 대체로 좋은 인상을 주기는 힘들었지만 그가 했던 한마디는 두고두고 곰곰 생각하게 했다. "내가 암에 걸렸지, 정신병에 걸린줄 알아?" 

 

 

'환자'는 우리가 종종 잊고 있지만, 이 사회에서 '약자'에 속한다. 그들은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  그들이 신경질을 내면 - 환자로서의 히스테리로 보기도 쉽다. 몸이 아프기때문에 짜증을 내는 면도 있겠지만, 환자라는 이유로 어쩌면 무시당하고, 바보취급 당할수도 있을 것이다. 

 

 

비명 

 

테이크아웃으로 음식을 주문해놓고, 식당 벽에 기대서서 기다리는 동안 내 눈에 들어온 광경이다.  마침 점심시간이라서 직원과 방문객들로 장터처럼 붐비던 그 구내식당. 나는 벽에 기대서서 기다렸다가 음식을 들고 나가면 그만이었지만, 자리가 필요한 사람들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빈자리를 찾고 있었다. 

 

 

평소에 그곳은 주문대에 서있던 식당 직원이 노약자들에게 마땅한 좌석을 찾아 안내를 하기도 하는데, 가끔 그런 광경들을 발견하면 그분들이 천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우연히 내 눈안에 들어온 광경: 한 젊은 여성이 입구 가운데 서서 홀 안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 두리번두리번 하는 사이에 카운터 직원이 그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나가서 기다려주세요."  젊은 여성은 그 말을 듣고, 입구에서 밖으로 사라졌고, 마침 그의 어머니인듯한 노부인이 그를 뒤쫒아 나서며, "저기 자리 네개 맡아놨다. 먹고 가자!" 외쳤고 - 이미 기분이 나빠진 젊은 여성은 노부인을 끌고 나갔고, 노부인의 뒤를 이어서 아파보이는 노신사도 영문을 모르는채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주문한 테이크아웃을 받으러 갔다 오니 식당입구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내가, 나갈줄 몰라서 거기서 나가라고 하는거에요? 내가 그런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보여요? 우리 아버지 오늘 항암받으러 오셔서, 뭐라도 드시게 하려고 자리 찾고 있었던건데 나가서 기다리라고요? 여기 나가서 기다리는 시스템이라도 있어요? 여기 병원 식당이면, 여기 오는 사람들의 기분이 어떤지는 아실거 아니에요? 지금 이것을 안내라고 하는거에요?"  해당직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대체로 상대가 흥분을 가라앉히기를 기다리며 사과하고 달래는 중이리라. 

 

 

내게는 그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외마디 비명처럼 들렸다, '나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누군가 나를 좀 위로해줘. 내게는 늙으신 부모님이 계시고, 우리 아빠는 말기암환자야.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받으시는 중이야. 너무나 딱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는 비명같은것. 그것을 비명으로 듣는다면 - 그 카운터 직원도 칼과 같은 그의 말에 다치기보다는 공감하고 그리고 위로의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있는대로 화를 내는 그 젊은 여성에게 다가가 등을 토닥이며 - 괜챦아, 다 괜챦아질거야 - 뭐 이런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미소

 

 

 

그곳에 가면, 나는 의식적으로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때마다 방긋 웃어준다. 평소에 내가 밝게 미소를 지으면 사람들은 내 미소가 멋있다고 말한다. 그걸 기억해내고, 그곳에 가면 나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쩌다 눈이 마주친 사람들에게 그 멋있는 미소를 보내려 애쓴다.  오늘도 누군가가 "9번이 어디지..."하고 두리번 거리길래 "저기에요"라고 손가락으로 정확히 가리키며 환하게 미소를 보냈다.  항암치료를 받으러 온 그 창백하고 마른 사나이는 내 미소에 화답하듯 밝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이구 가르져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곳에 가면, 그냥 단지 미소만 보냈을뿐인데도 사람들은 고마워하고 인정의 꽃같은 미소로 화답하곤 한다. 

 

 

그래, 우리 이렇게 살다가 내일 마른꽃처럼 진다고 해도, 오늘은 인정의 꽃을 활짝활짝 피우며 순간을 화려하게 사는거다. 웃는거다.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