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5. 1. 2. 07:44

 

2025년이 밝았다. 하느님 올 한해도 제가 광야에서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절망하지 않게 하시고, 온전히 무사히 주님께서 정하신 길을 따라 걷게 하소서. 

 

 

 

[시편]에 이어, 결국 신약으로 왔다. 마태복음을 시작으로 신약을 쭈욱 걸어갈것이다. 예전에 2011년에 성경필사를 시작해서 2022년 말까지 구약 창세기-시편-신약을 한번 쓴적이 있다.  올 한해 신약을 다 베껴적을수 있을까?  뭐 길을 걷다보면 헤메기도 하겠고, 쉬기도 하겠지만 결국 어딘가에서 끝내겠지. 그래도 두번째 쓰기라고 - 나도 뭔가 이번에는 더 잘쓰자는 생각에, 예수님 말씀은 '빨간색'으로 쓰고 있다. 2011년에는 내가 성경을 잘 모를때 썼기때문에 쓰는 그 자체에 급급했었고 (그것만으로도 은혜였고) - 지금은 그래도 그때보다는 더 많이 알고 익숙하니까, 생각도 해가면서 내 식으로 해석도 해가면서. 오래된 연인들처럼.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12. 31. 05:53

 

신촌 연세암센터 3층 로비 (세브란스 본관과 암센타를 연결하는 입구의 로비)에 '김종학'씨의 그림이 나타났다. 2주전에 들렀을때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크리스마스 전후하여 이곳에 설치된 것으로 추측된다.  임시로 설치한 듯한 각목 받침대가 보이고, 아직 이 작품의 제목이나 작가, 그림소재를 알리는 이름표도 붙지 않았다.  대략 가로 2미터 세로 3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대작이다. 캔버스라고 보기엔 어딘가 허술하여 종이에 그린건가 싶기도 하고. 

 

병원 안내부쓰 옆의 빈 벽에 설치되어있는데, 이 그림에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아마도 암센타의 속성상 위중한 질환과 관련하여 근심에 쌓여 오가는 분들이 다수일것이고, 사람을 치료하는 사람들이나 치료 받는 사람들이나 지친듯한 표정의 일상이므로 그림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수도 있겠다. 

 

그래도 이 세상에는 '그림'에서 힘을 얻는 사람도 있는 법이고, 새벽에 이 작품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추운 겨울 아침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장작불처럼 거대하게 거기 있던 그림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쿵쿵 뛰고 온몸이 활활 불타듯 따뜻해졌다. 마법의 그림.  나는 이 그림앞에 한참 서서, 화가가 그려넣은 파란 잠자리와,거미와, 나비와 사슴벌레와, 내가 이름을 알아 맞출수 있는 꽃이름들을 하나 하나 소리내어 불러보았다. 나리꽃. 백일홍, 메꽃, 나팔꽃, 금강초롱...  '설악산 화가'라는 별명처럼 설악산의 꽃으로 거대한 화폭을 가득 채우셨구나.

 

 

 

 

여엉 가고 싶지 않은 장소이지만 (누가 암센터를 가고 싶겠는가. 의사들 조차도 자신의 직장이 싫을것 같다),  그래서 그곳에 갈때 이 그림을 볼수 있다면 위로가 될 것이다. 최소한 '아 오늘은 김종학 화가의 그림을 보러가는 날'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는거니까.

 

이 그림이 임시로 왔다가 가는게 아니라, 그냥 여기 영구소장되길 빌어본다. 김종학 화백님 감사합니다! 

환한 그림앞의 남편의 얼굴도 꽃처럼 환해지다. 241230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12. 28. 10:19

 

12월 1일부터 성경 시편 (NIV) 필사를 시작하여 오늘 마쳤다.  이어서 다음편에는 어느편을 쓸지 오늘 생각해보겠다. 평균 하루에 두시간씩 쓴것 같다. 수성볼펜 여덟자루를 다 닳게 쓰고 반자루 정도 썼다. 처음부터 쿠팡에 이것을 한 50자루 한꺼번에 저렴하게 사서, 쓰다 떨어지면 새로 꺼내다 쓰고, 다 쓴것은 별도로 봉지에 담아 보관했다 (나중에 보려고). 

 

시편을 쓰면서 발견한 것 몇가지는 

  1.  일정한 어휘가 반복된다. 시편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어휘들은 : praise the lord, forever, rock, shield, stronghold, refuge, deliverer ...
  2. Blessed are those who 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8복의 노래는 시편에 이미 존재하는 양식이었다. (아, 신약은 대체로 구약의 패턴이 그대로 옮겨진 것이구나.) 
  3. 시편 119편에는 내가 모르는 기호들이 나타나는데, 찾아보니 그것이 히브리어의 알파벳에 해당되는 것들이었다. (말하자면 가....나...다...라... 이런식의 부제를 따라서 노래들이 나온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자료를 찾아보려고 한다)
  4. 시편을 필사하다보면 - 반복되는 찬양의 표현으로 인해서 어떤 '힘'을 체험할 수 있다. 신세한탄 하는 노래에서 나의 신세한탄이 떠오르고, 위로를 바라는 노래에서 나도 위로를 바라고 있으며, 찬양의 노래에서 그럼에도 나 역시 기쁜 노래를 부르게 된다. '말'이 내 안에 들어와 아궁이의 불을 지피듯 내 영혼에 불을 지피는 듯한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필사의 시간이 하루중 가장 속 편하고, 그야말로 안전지대로 몸을 숨기듯 자꾸만 책상앞에 앉아 끄적이게 된다. 나의 살 길을 찾은듯한 기분이 든다. Praise the Lord. 

 

....

 

 

내가 시편을 필사하면서 체험했던 신비로운 경험 사례들과 새로 발견된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니 - 모든 것을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남편이 -- "아 그런것 자세히 알려면 온라인에 좋은 논문이나 자료들 많아 성경관련해서 좋은 자료 많아" 하고 아는체를 했다.  그래서 내가 진지하게 대답해주었다,

 

"물로 나도 알지, 내가 성경을 옮겨적으며 때로 이해가 잘 안되는 구절이나 구조, 혹은 새로운 발견에 대하여 좀더 깊이있게 이해하기위해서 구글 몇겹 들어가보면 차고 넘치는게 좋은 자료라는 것을.  그런데 말씀이야. 그것은 나하고 지능이 똑같은 내 수준의 사람들이 자기가 먹고 소화시키고 게워낸 것을 내가 가서 핥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요.  다른 잡다한 지식은  그렇게 접근해서 얻는게 많지만, 성경 만큼은 --  내 '몸'으로 만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이건 '교제'하는거 같은거야.  내가 어떤 사람과 교제하고 서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직접 만나야 하는거지. 나는 내가 교제하고 사랑하고 섹스를 나누고 싶은 사람을 티브이나 넷플릭스나 다른 사람들의 논평을 통해서 들여다보고 싶지가 않아요. 나는 그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나누며 음성을 즐기고, 손을 만지며 체온을 나누고 이렇게 전신으로 입체적으로 성경을 만나고 싶은거야. 남이 그와 나 사이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가 않아요. 꼭 필요할때, 그때 참고자료를 볼 수는 있지만, 그건 꼭 필요할때 뿐이야. 하느님은 논문속에 있는 존재가 아니거든. 당신이 백날을 성경 논문을 들여다보라고 거기 하느님이 계시는가..."  물론 성경속에만 하느님이 계시는 것은 아니지, 문맹이라 평생 성경을 못 읽는 이라도 믿음으로 하느님께 다가갈수 있는거니까.  하지만, 성경을 통해서도 하느님을 만날수 있는거고, 나는 하느님의 말씀이 적혀있는 성경 속으로 들어가서 그 원시림 속에서 그분과 교제하는 중이야 지금.  나의 방식으로 그분과 교제중이라는 것이지. 그런 교제에 남이 소화시킨 배설물이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어요. 나는 날것의 하느님을 가장 좋아해요."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12. 22. 01:34

 

몇 해전, 매주 금요일마다 동료교수들과 두시간씩 '글쓰기'시간을 가졌을때 대충대충 엮었던 책의 원고를 국내의 십여개가 넘는 출판사에 보냈을때 나는 번번히 퇴짜를 맞았는데, 마침내 어느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마침 편집자가 바로 그 주제의 책을 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이디어가 맞는 원고라는 것이다. 그래서 계약을 하고, 수정하거나 다시 쓰거나 하면서 몇년을 보냈다. 코비드가 왔다 가는 사이에 계속해서 수정 보완을 하면서, 지난주에는 맺음말을 보내라고 하더니, 오늘은 책 날개에 실을 저자 약력을 직접 쓰라는 숙제가 와서 그것도 써보냈다.  책은 언제 세상 빛을 보려는가? 크리스마스 이후가 되려나? 아니면 2025년 새해맞이로? 뭐 가장 좋은 때에 나오겠지.

 

그런데 사실 2주 쯤 전에 다음에 나올 책에 대한 계약도 이루어졌다. 지난번에는 원고를 수백페이지 써서 여기저기 뿌리고 거절당하기를 밥먹듯 하다가 계약이 성사되었다면, 이번에는 아직 '원고' 한글자 쓰지 않았는데 - 단순히 '네 머릿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 내길 바래'라는 메시지의 계약서였다. 계약서에 싸인을 했고, 돈도 받았으니, 이제 글을 써야한다. 그래도 내 평생에 - 중학교때부터 방송국에 글 써보내고 상품권 받거나, 대학교때부터 학교 신문이나 교지 이런데 투고하여 원고료 짭짤히 챙기고 하면서 늘 글 쓴후에 글값 받았는데 -- 이번에는 글을 쓰기전에 글값을 미리 받으니 내 형편이 그래도 제법 많이 좋아진것도 같아서 잠시 흐뭇했다. 글을 써서 돈을 받는 일을 하던 가운데 - 이제 선금을 받는 팔자가 되었으니 일취월장 아니던가. 에라 좋구나. 

 

그런데 전에는 글을 써서 보내고 그 글이 소개가 될까, 신문에 실릴까, 책에 실릴까, 출판을 해 줄까 뭐 그런 기다림의 시간을 보냈는데, 요즘은 '아이고 이거 덜컥 쓰겠다고 계약하고 내가 글을 못쓰면 어떻게 되는거지?' 이런 근심을 할 때가 많다. 길을 걸으면서, 운전을 하면서, 설겆이를 하면서, 샤워를 하다가, 청소기를 돌리다가도 멍하니 그 책 생각을 한다. 이걸 못쓰면 어떻게 하지? 응? 처음 느껴보는 새로운 종류의 두려움이다.  그 가운데 나는 성경필사만 줄창 하고 있다.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고 피난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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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네살 때, 시골집 사랑방에서 둘째, 셋째, 넷째 고모들이 책상 주위에 모여서 호롱불에 의지하여 책을 읽거나, 숙제를 하며 이따금 우스개 소리를 하고 왁자지껄 웃기도 할때, 내가 중학생이던 막내고모 어깨너머로 "글씨 쓰기 가르쳐줘"하고 조르던 생각이 난다. 고모가 16절지 누런 종이에 가나다라 이런것을 써주면, 내가 그것을 따라 쓰면서 한글을 떼었다. 그러니까 내게 한글을 가르쳐준이들은 내 고모들이었다.  나는 너무나 심심한 나머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집갈 준비를 하던 둘째 고모와, 당시 중학생이던 셋째, 넷째 고모들이 돌려 읽던 시집이며 소설책이며, 교과서들을 떠듬떠듬 읽어나갔다. 너무나 무료하고 심심했던 나머지.  나는 뜻도 모르고 '의적 일지매'를 읽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채 글씨들을 해독하는 재미로.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위해 서울의 가족과 합류했을때, 엄마는 시골서 데리고 온 작은 딸아이가 얼굴도 더럽고, 머리도 떡지고, 손등은 다 터지고, 사람과 들짐승 사이의 경계가 애매한 수상쩍은 몰골일지언정 길거리 간판을 소리내어 읽으며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의기양양해 하셨다. (서울에 올라오니 온거리에 읽을것 투성이라서, 그리고 그것을 읽을때마다 엄마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고 나도 잠시나마 기를 펼수 있었다.)

 

서울집은 시골집보다 문화적으로 더욱 궁핍해보였다. 단칸방에서 여섯식구가 기역니은 이리저리 포개서 잠을 자야 했으므로. 장난감도 없고, 산과 들도 없고, 새도 꽃도 없고, 강아지도 없고, 나는 숫기도 없어서 이웃아이들과 쉽게 친해질수 없었고, 온종일 방구석 신세였다. 그 당시에 나의 유일한 읽기책은 '엄마의 일기장'이었다. 나는 대체로 신세한탄으로 일관된 엄마의 일기장을 읽고 또 읽었는데, 그 외에 다른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 역시 애들이 일기장을 보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 식목일즈음. 비가 주룩주룩 오던날. 나는 너무나 심심한 나머지 종이를 반절을 접어서 실로 꿰메어 '공책'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책에 이야기를 쓰고 그림을 그려넣었다. 만화도 그려넣었다. 그것이 내가 제작한 최초의 책이었다. 그 후로 고등학교를 마칠때까지 나는 그런 짓을 꽤 했다. 어릴때는 직접 공책을 만들어서 내용을 잔뜩 채웠지만, 형편이 나아지고 용돈이 제법 생기면서 나는 예쁜 공책들을 사다가 좋아하는 시를 옮겨적고 그림을 그리고 장식하고 그러면서 노닥거렸다. 내가 꾸민 그런 '명시집'같은 것들은 결혼하여 애엄마가 된 셋째, 넷째 고모가 예쁘다며 달라고 했고, 나는 이미 그것을 완성할 즈음에는 그것에 싫증이 났기 때문에 누가 달라고 하면 기꺼이 그것들을 내주었다.  일기장들은 일년에 한두번씩 뒷마당에서 태워없앴다. (뭔가 그게 멋있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그 일을 반복했다.) 그래서 내게는 남아있는 일기장이 없다. 딱 두권의 일기장이 미국집에 있는데, 지홍이 찬홍이의 육아일기. 그것들이 남아있다. 

 

그러니까, 내가 한글을 호롱불 밑에서 고모들에게 배운 이래로 나는 늘 연필을 손에 쥐고 살아왔고, 나는 글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거다.  그래서, 나는 멈추지 않고 글을 쓰고 쓰고 쓸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4. 12. 22. 01:05

 

넷플릭스에서 본 영화로 2017년 출시작이다. 어딘가 자폐적으로 보이는, 평생을 사회정의구현을 위해 헌신한 - 커튼뒤의 '인권변호사'였던 로만. 영화 중반이 지나가도록 그의 모든 행동거지가 나를 짜증나게 했는데, 나는 그가 '덴젤 워싱턴'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만큼 덴젤 워싱턴이 연기한 인물 자체에 그대로 빠져들었던 것인지도 모르는데, 사실 영화 중반까지 부엌을 왔다갔다 하면서, 빨래를 거실에 널어가면서, 운동용 자전거에 올라 앉아 운동을 해가면서 그냥 대충대충 볼 정도로 영화에 대한 몰입감도 없었다. 그러다가 중반부터 화면에 몰입하게 되었으리라.  로만은 보통사람이 보기에는 그냥 짜증나는 '찐따'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장점을 꿰뚫어보는 똑똑한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만약에 현실에서 로만같은 사람이 내 근처에 있다면 - 나는 그 사람을 답답해하고 슬슬 피했을것이고, 그러므로 그 역시 나를 좋아하지 않았을것이다. 대체로 나를 짜증나게 하는 인간형이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을 눈여겨 보기 시작한 것은, 그가 길에서 노숙자가 죽어있었을때 - 경찰들이 그 시체를 아무렇게나 다루려고 할때 시체의 가슴에 그의 명함을 넣어두고 집요하게 경찰과 대치하던 장면부터였다. '그는 아무나가 아니야. 그도 어떤 사람이었어. 내가 장례비를 치를테니까 그를 무연고자로 태워버리지 말란말야.' 그가 이렇게 경찰과 대치하는 사이에 죽은것 같았던 노숙인이 부시럭거리고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현장을 떠나버리고 경찰과 로만의 대치도 그것으로 종결된다. ---> 지금 생각해보니, 이 장면 -- 죽은자를 살린것은 로만의 '인간애'였던것이 아닐까? 작가이며 감독이었던 사람은 그런 의도로 이 장면을 만든것은 아닐까?

 

아, 저 짜증나게 답답한 저사람이 정말 착한 사람이구나... 그래서 그 영화를 집중해서 보게 되었다. 

 

로만이 십만달러를 벌어가지고 해변으로 갔을때, 바다에서 혼자 즐길때, 나는 내심 '영화가 그냥 저기서 끝났으면 좋겠다' 하고 간절히 바랬다. 그냥 저렇게 평생 답답하게 사회정의를 위해서 살아온 사람에게도 저런 뜻밖의 행운이 찾아오고 즐거웠으면 좋겠다 하고 간절히 그를 응원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영화는 우리가 원하는 장면에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잠깐의 행운/행복은 거품처럼 사라지고, 그는 스스로가 피고가 되고 스스로가 원고가 되어 자신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글을 쓴다. 그는 회개하고 자신의 과오를 되돌리려 최선을 다한다. 그의 마지막 독백은 (기억에 의거하여 정리해보자면) -- 우리가 평생을 바쳐서 정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나 실수를 저지르고 과오를 범할수 있는데, 그럼에도 과오를 저지른 우리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되돌이켜야 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작은 과오는 용서받을수 있다 -- 대략 이런 내용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고발하고 그럼으로써 나는 용서받을수 있다 뭐 그런 거다. 영화 마지막 대사를 다시 돌려봐야 하려나? 

 

나는 문득 '노회찬'씨를 떠올렸다. 그가 왜 죽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가 무슨 명백한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는 뭔가 과오를 저질렀을수 있다. 하지만 그의 과오가 그의 목숨만큼 커다란 과오였을까? 사형선고를 받을 만큼의 과오였을까? 시절이 수상할때마다, 나는 그를 떠올린다. 그가 살아있다면 지금 그는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가끔 문득 문득 그리워지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노회찬씨가 그 몇안되는 사람들중 한사람이다. 

 

로만은 법의 엄중함을 알고, 그 법의 잣대를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하여 스스로를 고발하였다. 비록 실수를 저질렀으나 그는 그의 과오를 바로잡으려 애썼다.  우리나라에서 법 잘아는 사람들, 검사들, 그들이 그들의 잣대를 그들 스스로에게 적용한다면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지는 않겠지. 우리나라 사법연수원에서 틀어줘야 할 영화라는 생각도 잠시 했다. 물론 나의 도덕성에 대하여도 역시 ...할말이 없다....

 

오랫만에 제대로 된 좋은 영화를 봐서 리뷰를 남겨본다.  (영화 다섯편 리뷰하는 세션하나 만들까 생각해봤다. 사회정의와 관련된 잘 만들어진 영화 다섯편을 선정하여...)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