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5. 1. 31. 15:46

열한자루의 검정펜과 네자루의 빨강펜

 

눈이 올듯 말듯 하더니 펑펑 오기도 하고 먼지처럼 흩뿌리기도 하면서 종일 온다. 창밖을 내다보니 많이 쌓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흰 눈이 길을 덮고 있다. 눈이 쌓이면 운전자에게는 힘들지만, 운전할 필요도 외출할 필요도, 농작물이나 하우스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는 그저 평온한 풍경일 뿐이다.  친구와 만나 점심을 먹기로 했다는 남편에게 "점심 드시고, 뒷산에 진도개 있는 집앞길을 지나 산책을 하시고, 그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따뜻한 차도 마시고 눈을 실컷 즐기고 오셔"하고 보냈는데, 정말 돌아오지 않고 있다. 즐거운 한 나절이 되기를...

 

나는  KBS FM을 배경음악으로 틀어놓고 - 지난 명절기간동안 (나흘간) 팽개쳐두었던 성경을 다시 붙잡고 필사를 하며 고요한 시간을 편안하게 보낸다.  눈오는날 '사우나'에 가면 온천에 간것 같겠다, 비록 눈오는 노천 온천은 아닐지라도... 그런 상상을 하며 동네 목욕탕에 갈까 망설이다가, 그것도 귀챦아서 집에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 입고 성경쓰기를 한가롭게 한다. 

 

쓰고 있던 빨강펜이 다 닳아서 새것으로 교체하면서 - 여태까지 쓰고 모았던 펜 껍데기들을 한자리에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다. 12월 1일부터 성경필사를 시작하여 오늘 (1월 31일)에 이르기까지 2개월간 검정펜 11자루와 빨강펜 네자루를 다 썼구나. 성경필사공책도 지금 쓰고 있는 마가복음까지 마치면 다 쓰게 될것 같다. (이미 여벌로 2권을 배달시켜 놓았으므로 아무 걱정이 없다). 

 

아래의 첫번째 사진은 서재에서 내다보이는 - 집의 뒷편 풍경이다. 멀리 산과 들판이 흰눈에 뿌옇게 보인다.  거실쪽 창으로는 구청앞 버스정거장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이 버스정거장 주위로 걷거나 서있는 모습이 작게 보인다. 정겨운 풍경이다.  남편은 이 눈속에서 절친과 눈 구경을 하고 있겠지. 

 

 

하느님, 눈이 햇살에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지듯, 저의 근심, 제가 안고 있는 문제, 이러한 것들이 눈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질것을 믿습니다. 

 

 

 

KBS FM에서는 오늘 대체로 장송곡과 같이 무겁고 어두운 음악을 주로 틀어대고 있다.  어제 일어난 포토맥강의 민간기-블랙호크 충돌로 67명이 하늘의 별이 된것을 애도하는 것인가? (이것은 나의 지나친 확대 해석인가?).  사람의 목숨이...한치 앞도 알수 없으므로, 크게 근심할일도 크게 자신할 일도 없다. 지금 살아서 숨쉬고 눈뜨고 눈구경을 할 수 있는 동안,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드리는것이 인간이 할 일이라...

 

* 유엔난민기구의 후원자가 되어 달라는 광고를 보고, '그래 후원해주지 뭐..'하고 웹으로 찾아서 들어갔는데 [후원하기] 클릭하면 - 후원에 대해서 뭐라뭐라 정보가 나온다. 그래서 후원하기 위해서 '아이디'를 만들어야 한다고 해서 '아이디 만들기'를 하려하면 --  이름과 전화번호를 넣으라고  (다른 옵션으로 이메일도 있다) -- 그래도 인증하기 위해서 -- 아무리 이름과 전화번호를 넣고 '확인코드'를 받기 위해서 클릭을 해도 - 후원하고자하면 전화를 걸어서 담당자와 이야기를 하라는 메시지만 줄창 뜬다.  내가 여러단체를 후원했지만 이렇게 까다로운 단체는 처음이다. 내가 꼭 전화까지 해야해? 그냥 후원하겠다니까!  몇차례 '전화 안걸고' 후원하려고 시도하다가 포기했다.  나는 전화걸어서 담당자와 얘기하는 그게 장대높이뛰기의 장애물처럼 높게 여겨진다.  왜, 왜, 왜, 전화를 걸라고 하는거지? 다 인증이 되는 시대에 이렇게 구태의연하게 책상놀음을 하면 될까?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5. 1. 24. 17:08

위 사진에서, 빨간 펜 끝이 가리키는 31절 - 예수님 말씀 부분. 빨간색 잉크로 인쇄되었어야 했다.

 

 

신약은 내 평생에 두번째 필사이다. 이번에는 번호도 꼼꼼하게 매기고, 예수님 말씀은 성경에서처럼 '빨간색펜'으로 적고 있다. 그러다보니 아주 사소한 편집상의 실수가 발견되는데, 마가복음 필사할때 아주 아주 사소해서 '실수 할수도 있겠다' 할만한 것들이 두세번 발견되었었다.  이를테면 "말씀중에" he said, "다시 말씀..."   이 경우에 말씀을 빨간색으로 설명은 검정색으로 표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냥 빨간처리를 한 것이 몇차례 발견되었었다. 그때는 그냥 지나쳤는데, 마가복음 6장 31절은 '대형사고'라 할만하다. 아예 예수님 말씀을 통째로 검정잉크로 처리를 했으므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보면 성경을 필사하는 것의 엄중함에 대하여 잘 그려지고 있다. 나도 그 소설 읽을때 -- 옛날에 인쇄기술이 미비하여 오로지 사람 손으로 성경을 필사하여 전하는 상황에서 필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의 책임을 심각하게 지키려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을 빨간잉크로 처리하기로 약속한 책에서 말씀을 검정으로 처리하다니! (중세시대 같았으면 목이 달아날 일일것이다. 하하하) 아가페 NIV 이다. 최신판. 

 

마태복음까지는 매일 서너시간씩 성경필사를 하며 보냈고, 마가복음부터는 내가 할일들을 하면서 하루에 최소 '복음서 한장'씩 필사하고 있다. 지금 내게 성경은 나를 살아 숨쉬게 하는 유일한 안식처이다. 하느님이 지켜주실 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5. 1. 24. 09:55

우리집은 경상도나 전라도하고 별로 인연이 없는 대대손손 용인 사람들이었다. 용인에서 순박하게 농사나 짓고 사는 씨족 공동체 마을. 거기가 내 고향이다. 온동네 사람이 다 일가친척이고, 가끔 보이는 타성받이 (성씨가 다른 사람들)들은 사이좋은 이웃으로 존재했지만, 그러나 일가붙이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가갸거겨도 모르는 어린 시절부터 '타성받이'라는 말을 알았고, 우리 일가붙이와 일가붙이가 아닌 사람들을 구별할수 있었다.  용인에서 대대손손 살아온 순박한 농민들은 대체로 진보도 보수도 아닌체로 - 꼭 구분을 해야 한다면 다소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집안에서 푸대접을 받으며 성장한 나는 자동으로 그들의 '반대'쪽을 향했을 것이다.  '저 사람들이 이유없이 나를 푸대접하므로 나는 저 사람들의 생각에 동의하기 힘들다. 저 사람들이 이유없이 나를 푸대접하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은 옳지 않다. 저 사람들이 누군가를 푸대접한다면 나는 푸대접 받는 사람들 편에 서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일가붙이들이 '타성받이'라고 일컫는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에게도 꼬박꼬박 공손하게 인사를 했고, 그래서 그 타성받이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내가 공손히 인사를 할 때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이뻐해주셨다. 하여튼 나는 내 주위의 어른들이 누군가에 대하여 편가르기를 할 때 바로 심정적으로 (말없이)  주위어른들의 반대편에 섰다. (난 당신들과 반대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나를 푸대접하므로.) 만약에 그분들이 나를 '여자'라는 이유로 푸대접하지 않고 '남자'하고 똑같이 대우하며 키웠다면 아마도 나도 그분들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자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김대중'을 계속 지지했다. 주위 어른들이 '김대중은 아니지...' 했으므로.  그들은 수십년간 '김대중은 아니지'라고 말했고, 나는 (속으로) '그러면 나는 김대중이지' 했다.  결국 온갖 푸대접을 견딘 끝에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을때 나는 뿌듯했다. 

 

 

 

'김대중'에 대해서는 두가지 추억이 있다.

 

 

 

김대중의 추억 1

1986년, 나는 그로부터 Job Offer 를 받은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김대중이 동교동에 있을때였다. 어느날 "미쓰리, 나하고 동교동에 가봐야겠어. 선생님께서 영어 잘하는 비서가 필요하신데, 미쓰리가 적격이야" 하고 사장이  제안했다. 그는 후에 국회 사무처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아...그런데 그 비서 자리가 오기전에 김대중씨와 내가 한번 스친적이 있다. 어느날 사무실로 온 전화를 받았는데, 그 전화는 사장만 받는 특수 전화였다. 그런데 아무도 없고 전화벨이 자꾸 울리길래 내가 받았다.

 

 

 * 미쓰리 (나): 여보세요

* 저쪽: 어...김*랑이 바꿔.

* 미쓰리 (나): 사장님 자리에 안계십니다.

* 저쪽: 그래? 어. 그런데 전화받는 사람은 누구야?

* 미쓰리 (나): 저 여기 직원인데요. 그런데 왜 자꾸 반말하세요?

*저쪽: 뭐? 너 누구냐?

*미쓰리 (나): 계속 반말이시네. 저 여기 직원입니다. 그런데 누구세요?

* 저쪽: 허허. 알았다.  (전화끊음)

 

 

그 이후로 사장은 별말이 없었다. 그리고 親切  (친절)을 유려한 붓글씨로 내게 써 주었다. 하하하.  그런데 며칠후 사장이 나에게 김대중씨 집으로 가자는거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는 속담이 이 사건에 해당되는 것이리라. 갓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 뵈는거 없이 오만방자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원래 '비서'따위는 꿈을 꾼 적이 없었다. 내가 비서가 어울리기나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해 가을 나는 독일회사에 비서로 들어가며 희희낙락했다).  어쨌거나, 알았다고 하고 집에 가서 밥먹으면서 지나가는 말로 얘기를 했다, "김대중씨가 영어 잘하는 비서가 필요하대요.  우리 사장이 그분하고 절친인데  저를 추천했어요. 내일 가보려고요."  이 말에 우리 아버지가 눈썹을 세우고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씀하셨다 -"기집애가 뭐 할려고 정치판에 끼어든다는거야. 그것도 김대중이 비서? 미쳤어? 집어치워!" 

 

 

그래서, 나도 정치인 개인비서질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안가기로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 전화로 왜 반말하냐고 딱딱거리던 초년병 '여자아이'를 밉게 보지 않고 비서로 면접을 보려했던 그분의 인품이 놀랍기도 하다. 내가 인물이 꽃같이 이쁘기를 한가, 목소리가 아나운서처럼 하늘하늘 하기를 한가, 싹싹하고 나긋나긋하기를 한가, 그렇다고 SKY 대학을 나왔나. 그냥 영어좀 잘 한다는거 외엔 볼것도 없는 평범하기 짝이없는 '애송이'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 집에 가지 않았고 그렇게 흘러갔다.  아무튼 대통령 후보로 그가 나올때마다 나는 그를 꾹꾹 눌렀다. 

 

 

 

김대중의 추억 2

 

2007년 가을 (1986년에서 21년이 지났구나). 퇴임 대통령이었던 그가 워싱턴 디씨를 방문했다. 무슨 평화, 햇볕정책 관련 행사에 초대받아서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뭔가 연설도 하고. 그때 나도 플로리다에서 공부를 마치고 버지니아로 이사한 후였으므로 노벨평화상 받는 전임 대통령과 그 부인을 구경하러, 민간인으로 행사장에 갔다. 행사장에서 이희호 여사와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냥 기념사진 찍고 싶다고 하니까 순순히 응해주셨다.). 그곁을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박지원씨가 지키고 서 있었는데 내가 감사하다고 인사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 김대중씨 존경한다고, 집에 아이들도 있는데 못 데려와서 안타깝다고 인사를 하니까, 눈이 초롱초롱하고 눈치가 빠른 박지원씨가 옆에서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연락을 주셨다. 윌라드 호텔로 애들 데리고 와서 김대중씨 부부와 사진을 찍으라고. 그래서 그 다음날 윌라드에 온 가족이 가서 김대중씨 부부와 가족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 사진 어디있지?...)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씨가 애들에게 덕담을 해주셨다.  뭐 그게 전부다. 이런 일은 그분들의 일상의 의무중 하나였으므로 그분들은 기억을 못 하실것이다. 게다가 이미 천국 가셨으니 상관도 없는 일이다. 기억하는 내가 있을 뿐이다. 

 

 

 

 

내가 중학교에 갈때 그는 공장으로 갔기 때문에

 

 

 

내가 지금 김대중의 추억을 꺼내는 이유는 - 이재명 때문이다. 이재명은 1963년 12월생이다. (구글에서 프로필 뒤져보면 나온다). 나보다 한살 위다. 내가 1963년생들 틈에 끼어 학교에 다녔으므로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때 그도 경상도 시골 구석에서 초등학교에 들어갔을거다. 내가 집에서 푸대접을 받은 것과는 별개로, 나는 부모의 보호아래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어려움없이 호의호식하며 살았다. 이재명은 가난한 집 형제많은집 일원으로 -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때 공장으로 갔을것이다.  그것 때문이다. 내가 중학생 교복을 입고 후리지아 향기를 맡으며 중학교 교실로 들어설때 그는 공장 작업복을 입고 공장으로 향했다는것, 그 것 때문이다. 그가 공장 프레스공으로 일하다가 한쪽 팔을 다쳤다는것 그 것 때문이다. 나는 심정적으로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 

 

 

 

어릴때 동네 어른들은 '김대중은 안돼'라고 하던 소리를 나는 다시 듣고 있다. 이제는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이재명은 안돼.' 왜 안되는데? 나는 묻지 않는다. 어릴때도 나는 묻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만 다짐하고 다짐했을 뿐이다. 나는 동의할 수 없어. 누구는 안된다는 것은 비논리야. 당신들의 비논리에 나 역시 비논리로 답할 뿐이다. 나는 공장으로 간 소년을 응원하고 싶을 뿐이야. 다른 것은 없어. 공장으로 간 소년에게 내가 빚을 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겐 이런 기억이 있다. 어릴때 시골에서 함께 자란 '갑순(가명)'이란 친구가 있었다. 언니하고 동갑쟁이였다. 언니가 중학교에 들어갈때, 그 초봄의 시린 날, 갑순이 어머니가 갑순이를 데리고 서울의 우리집에 들르셨다. 그 아줌마가 입었던 외출복은 우리 엄마가 입다가 준 헌옷이었다. 그 옷을 입고 갑순이를 끌고 그 아줌마가 서울에 온 이유는 - 미아삼거리의 약국집에 갑순이를 '식모'로 취직시키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갑순이와 그 어머니가 언니와 내가 함께 쓰던 방에서 잠을 잤는데 - 자다가 머리맡의 '자리끼 (냉수)'가 엎질러졌다. 잠버릇이 사나운 내가 버둥거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침에 깨어난 아주머니가 그 물 엎지러진 것을 보시고 "내가 안그랬다, 내가 안그랬다.."하고 자꾸 그 말을 했다.  아무도 물 엎질러진 것에 대하여 크게 신경쓰지 않는데 아주머니는 자꾸만 변명하듯 그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나는 그게 미안했다.  밥을 먹고 학교로 향하는게 미안했다. 식모살이 간다는 갑순이를 놓아둔채 언니도 나도 학교로 향하면서 - 학교 가는 나 자신이 미안했다. 

 

 

 

나는, 남들이 학교 다닐때 공장에서 일을 했던 그 소년이 높은 자리에 가는 것에 대하여 '입지전'적이고 '개천에서 난 용'이야기이고 뭐 이래저래 힘없고 가난하고 희망없어 보이는 위치에 있는 청소년들이나 보통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거라고 생각한다. 단지 그것 때문이다. 난 원래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똑똑한 사람에 대해서 점수를 많이 쳐주는 편이다.  내가 남편과 결혼한 이유도 그가 지지리 가난한 집 청년가장이었기 때문이다. 딸린 식구들 주렁주렁하고 책임져야 할 일들이 쌓였는데 그 작은 체구에 그 책임을 다 지고 눈이 초롱초롱하길래 응원해주고 싶어서 결혼했다.  덕분에 지긋지긋하게 고생했지만 그만큼 사랑도 받았고 대접도 받았다.  내가 부유한 집 아들하고 결혼했다면 그 집에서 나 유학하는거 봐줬을까? 하지만 가난했던 내 남편이 목숨을 걸고 나를 유학시켜주었다.  나는 그래서 그가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난뱅이 출신 인재들을 여전히 응원한다.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이다. 내 취향이 그렇다고.  사람들이 '이재명은 안된다'고 말하면 말 할 수록 나는 속으로 외친다. 당신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나는 이재명을 응원할수밖에 없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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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돈 좋아한다. 부자 좋아한다. 부자 되고싶다. 부자들하고 놀고 싶다. :-)  그런데, 자수성가한 부자들을 더 좋아한다. 고생고생해서 부자된 사람들을 더 좋아한다.  그들에게는 '스토리'가 있다. 물려받은 부자들에게는 '스토리'가 없다. 그래서 그런거다. '스토리'가 있어야 재미있는거니까. 지도자도 '스토리'가 있어야 재미있다. 당신에게 어떤 스토리가 있는가? 당신의 이야기가 재미있어야 내게 매력이 있는거지...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5. 1. 9. 12:11

 

성경을 읽을때나 혹은 베껴적기를 할 때, 혹은 사람들과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때, 나는 베드로가 나오는 장면에 오래 머물며, 그에 대한 얘기를 할 때면 어린아이처럼 울먹이게 된다. 오랜 습관 같다. 아마도 2011년1월부터 그러했던 것 같다. 당시에 지홍이는 군대에 가있고, 남편 역시 귀국하여 한국에 있고 찬홍이와 나 단둘이 지내던 시기인데 - 나하고 동갑쟁이였던 제자가 '신년기도회'에 가자고 하여 난생처음으로 제자를 따라서 일박이일로 진행되었던 한국인교회의 기도회에 가게 되었다. 미국교회에서는 이런 행사를 안하므로, 제자를 따라 간 한국교회의 기도회가 꽤나 신기하고 흥미진진했었다. 저녁에 어느 '기도원' 강당에 모여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그리고나서 정해진 숙소에 가서 (호텔방 같은 숙소) 자고 아침에 다시 강당에 모여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오후에 이런 모든 행사를 마치면서 그제야 빵을 나눠주었다. (그러니까 어제 저녁부터 꼬박 금식을 하고 받아 먹는 빵이라서 - 그 하와이안 브레드라고 보통 식품점에서 파는 모닝빵 덩어리 - 꽤 맛있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기도회의 마지막 행사로 빵을 나눠줘서 그걸 먹으며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데, 목사님은 베드로와 예수님이 처음 만나는 장면을 이야기해주셨다. 대략 기억에 의거하여 옮겨보면 -- '베드로는 평생 어부로 산 선수란 말이지요. 그 베드로가 밤새 아무것도 못 잡고 돌아오는데 호숫가에서 웬 낯선 남자가 서서 물어요, "물고기를 많이 잡았소?" 지친 베드로가 "한마리도 못잡았소"하고 대답을 하지요.  그러니까 그 낯선 남자가 "배를 저리 돌려서 그물을 저쪽으로 내려보시오" 이런단 말야. 프로 어부 베드로로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란거죠. 그렇지만 베드로가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이 있어서 이 낯선 남자가 범상치 않아 보였던 모양이에요. 그래가지고 이렇게 대꾸합니다, "내 밤새 한마리도 못잡았지만, 댁이 그렇게 말을 하니 내가 그러면 한번 해보지요"  이게 무슨 말인가하면 - '내가 명색이 어부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거냐. 내가 밤새 한마리도 못잡은 고기를 여기서 어떻게 잡으라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마음을 바꾸고 "댁이 그렇게 말을 하니 내가 댁네의 말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져보겠소"라고 했단 것이지요. 이해하시겠어요 이대목? "말씀에 의지하여.."가 이런 맥락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가 거기 들어있더란 것이지요. 이때 베드로가 눈을 떠요. 베드로가 예수님의 범상치 않음을 바로 자각하고 곧바로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가 시작된거죠. 

 

 

그때 목사님이 대략 이런 이야기를 아주 흥미진진하게 들려주셨는데, 그 얘기가 내 귀에 꽂혔다. 아마도 심장에 꽂힌듯 하다. 당시에 찬홍이가 운전면허 시험 준비를 하던 중이었는데, 매나서스 운전면허시험장까지 데려다주면서 내가 그 이야기를 찬홍이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내가 운전대를 잡은 채로 하이웨이에서 통곡을 했다. 찬홍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다 말고 이 대목에서 통곡을 했다. (찬홍이는 엄마가 원래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서, 늘 엉뚱한 짓을 하므로, 크게 개의치 않고 침묵을 지켜주었다. 그날 찬홍이는 운전면허시험에서 떨어졌다. 하하하.) 

 

 

그날 이후로, 나는 성경을 읽다가, 쓰다가, 성경 이야기를 하다가,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 부분이 나오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흐른다. 

 

오늘 성경을 쓰다가 내가 발견한 것은 --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어떤 면에서 -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의 대화 같다는 것이다.  사랑은 늘 나의 가슴을 뛰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던가. 아, 나는 사랑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아, 잊고 있었는데, 그 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내게 신비한 현상이 일어났었다. (어디에 사진을 찍어 놓은 것이 있으리라. 어느 파일 구석에). 기도회 모두 마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어'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돌아왔는데, 문득 내  왼손바닥에 붉은 십자가가 보였다. 나는 처음에 -- '내가 운전하면서 오다가 운전대를 너무 세게 잡아서 손바닥의 손금같은 것이 눌려서 벌겋게 된건가?' 이런 추측을 했다. 손바닥의 중심의 '명운'이라고 하는 굵고 선명한 손금을 중심으로 십자가모양으로 붉게 충혈이 되어 있었으므로.  어딘가에 눌린 자국이라고 추측을 했다.  그런데 그 붉은 십자가가 일주일 정도 그대로 그자리에 유지가 되었다.  내가 그 손바닥의 십자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모두들 신기해했다. 물감으로 칠한것도 아니므로 아무리 비누로 문질러 닦아도 지워지지 않았고, 분명 손바닥 투명한 피부 안쪽에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때 함께 일하던 우리학교 학장님이 그걸 보시고 '이런걸 스티그마 (stigma)라고 해요. 이런게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고 해요. 이교수 은혜 받았네! 밥사요!"  (그래서 내가 학장님에게 밥을 샀다.)  하하하. 

 

그게 정말로 기독교에서 일컬어지는 stigma (성흔)이라면 그게 왜 나같은 잡종 인간에게 나타난 것인지..는..잘 설명이 안된다.  어쨌거나, 하느님은 어쩌면 내가 상상하는 것 보다 더 가까이 내 곁에 계시는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살아보자.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5. 1. 5. 16:19

 

새벽에 일어나 쉬엄 쉬엄 외출준비를 하고 여섯시에 출발하려고 밖을 내다보니 눈이 쌓여 있었다. 오늘 2025년 들어서 첫 예배라서 온라인으로 드리기 싫어서 송도에 가려고 생각했는데 - 눈이 계속내리고 있으니 어쩐다?  잠시 망설였지만 -- '내가 눈길을 헤치고 예배드리러 가는데, 하느님께서 알아서 다 살펴주시겠지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송도로 향했다.  텅빈 도로, 차창으로 날아오는 함박눈, 모두 '먼 낯선 나라를 여행하는 듯한 신비한' 풍경이었다.

송도 집에 도착하여 챙겨온 밥과 국으로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뜨거운 차도 한잔 마시고, 교회로 향했다. 주차장에도 차가 몇대 없었다. 쌓인 눈을 뽀드득뽀드득 밟으며 교회로 걷는 기분이 유쾌했다. 참 좋구나. 눈이 내리는 가운데 교회로 가는 발걸음이 - 달력속의 풍경화처럼 아름답구나. 

입구에 서서 사람들을 맞이해주시던 부목사님들이 깜짝놀라시며 "이 눈길을 헤치고 오셨어요!" 하고 반가워하셨고, 목사님께서도 어디선가에서 나타나서 - 자리에 앉은 남편을 위해 안수기도를 해 주셨다. 장로님들도 권사님들도 일부러 다가와서 안부를 묻고 반가워하셨다. 우리 가족을 위하여 매일 매일 중보기도를 드려주시는 고마운 분들이다. 여기가 나의 집이다.

 

예배를 마치고 학교에 들렀다. 화단에 물을 준지 30여일쯤 된다. 그동안 목이 말랐겠다. 겨울에는 3-4주에 한번 물을 줘도 괜챦다지만 식물마다 물 먹는 주기가 조금씩 차이가 나고, 겨울철이라고 해도 학교건물에는 기본적인 난방이 계속 제공되기때문에 우리집보다도 따뜻하다. 물을 더 자주줘야 한다. 방학에 집으로 돌아간 동료 교수들이 갖다 놓은 화분들도 눈에 띄고. (식구가 일시적으로 늘어나는 계절이다.) 일단 물을 시원하게 뿌려주고, 시든 잎들을 정리해주고, 스킨답서스와 자주달개비 줄기들을 듬성듬성 잘라 담았다.  스킨답서스는 물에 담가 뿌리를 내린후에 화분에 심고, 자주달개비는 곧바로 잘라서 흙에 심으면 된다. 

 

내가 물을 퍼다가 목마른 화분들에 물을 주는 동안, 남편은 시든가지를 정리하고, 화분 주변을 청소해주었다. 즐거운 화단정리. 본된 주일이다. 눈속을 달려 귀가. 

 

 

 

 

 

 

집에서 번식시키기위하여 챙긴 스킨답서스와 자주달래비 넝굴들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