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초 키우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만만하게, 신경안쓰고 번식시킬수 있는 화초 몇가지가 있다. 스킨답서스, 센세베리아 뭐 이런친구들과 함께 '나비란'이 있다. 가장 흔한 것이 흰 줄무늬가 들어간 (위) 종류일 것이다. 몇해전에 엄마 집에 있는 것을 조금 잘라다가 학교에서 키웠는데, 지금 무지무지 많이 번식했고, 학교에서 자라던 것 몇가지를 끊어다가 집으로 와서 뿌리를 내려 키우니, 여기서도 무섭게 번식을 하고 있다. 위의 친구는 흙이 기름지고 햇살이 좋으니 뻗어나온 꽃대가 '공룡'처럼 느껴질 정도로 '튼튼'하게 잘 자라고 있다.
아래는 내가 어제 동네 미장원 원장님에게서 얻어온 것이다. 그 미장원은 아파트 근처 개인주택가 골목에 숨어있어서 동네사람이 아니면 찾아가기도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어제 독감백신을 맞기위해 25년전에 내가 우리 어린 두아들 데리고 다니던 '가정의학과'에 들렀는데 - 백신 맞고 돌아오다가 문득 '이 머리좀 잘라야겠다' 생각하고, 근처 골목길을 기웃기웃대다가 이 미장원을 발견한 것이다. 대추차가 고요히 끓고 있던 그 미장원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가정의학과에 들렀을때에도 손님이 하나도 없어서 나는 들어서자마자 대기할것도 없이 바로 의사선생님을 만났던 것인데, 미장원에서도 대기할 필요없이 곧바로 머리를 자를수 있었다. 머리 자르다말고 원장님이 "새치 염색 안하셔요?" 하고 물었고, "머리 자르고 새치염색하는데 시간이 얼마가 걸릴까요?" 물으니 한시간도 안걸린다고 했다. 그래서 한시간도 안되는 시간에 내 용모에 변화가 올수 있다면 그것참 좋은 일이다 싶어서 새치염색까지도 함께 하기로 했다. 그렇게 머리를 하다가 미장원에 있는 화분에 눈길이 갔고, "저것은 나비란 같은 모양인데 줄무늬가 없네요...." 했더니, "갖고 싶으시면 조금 끊어 드릴까요?"하고 원장님이 흔쾌히 이걸 나눠주시겠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나비같이 가볍게 머리를 자르고, 산뜻하게 새치염색도 하고, 미장원에서 얻어온 나비란을 들여다보고 있다.
줄무늬가 없는 나비란. 이 친구가 자라는 모습을 보고싶다.
어제 오후에 산책을 나갔다가, 그 산길을 대비로 쓸고 있는 분을 발견했다. 그냥 길에서 흔히 보이는 눈에 안띄는 검정색 운동복을 입은 60대 아저씨가 맨발인채로 산길의 낙엽들을 쓸고 있었다. 천천히, 마치 집앞 마당을 거쳐 오솔길을 쓸듯 그렇게 천천히. 그래서 나도 멀리서부터 그를 발견하고 인사를 했다, "아하! 어쩐지 산길을 누군가가 빗자루로 쓸어 놓은듯이 깨끗하고 비질 자국이 보이길래 이 산길을 누가 쓰는걸까? 능 궁금했는데 선생님께서 쓸어 놓으신거군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사나이는 나의 활달한 감사인사가 싫지 않았는듯, "뭘요. 나만 쓰는게 아니에요. 좋아해주시니 저도 좋죠"하고 답을 했다.
그를 지나쳐 산길을 더 오르다보니 길가 운동틀 옆에 빗자루가 세워져 있는것이 보였다. 이거구나. 이걸로 쓰는거구나. 그래서 나도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낙엽이 쌓인 오솔길을 아까 그 아저씨가 있는 방향으로 쓸어내려갔다. 그가 쓸어 올라오고, 내가 쓸어 내려가면 중간지점에서 만나게 되리라. 아저씨가 저만치 보이는데서 빗자루를 제자리에 갖다 놓고 마저 산길을 올라갔다.
잠깐이지만 -- 산길에 쌓인 낙엽을 쓸어낼때 기분은 - 고요한 오대산 월정사 앞길을 나 혼자 쓸고 있는 느낌. 혹은 눈쌓인 고향집 바깥마당에서 이웃집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쓸고 있는 느낌. 그런것. 세상에서 가장 고요하고, 평화롭고 따스한 '순간'과 '장소'에 몰입되어 있는것 같은 느낌이었다. 세상에 이런 평화 다시 없어라 (비발디의 세상에 참평화 없어라) - 바로 그 '참평화' 의 순간이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지, 무엇이 내게 가장 위로가 되는지 아시고, 깊은 가을날 집 근처 숲에서 세상의 모든 고요를 주시다.
버지니아에서 내가 간신간신히 별로 희망도 없는 직장에서 단지 '영주권'한가지를 기다리며 '영주권 노예살이' 시기를 보낼때였다. 박사학위고 뭐고 '미용기술'이나 '손톱 다듬는 기술'보다도 돈이 안되는 학위가지고 막연한 시간을 보내던 시절 나는 생계 꾸리기도 힘든 작은 대학 교수질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기술'이라도 배우자는 심정으로 지역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간병사' 교육을 받았다. Personal Care Aide. 그래서 내가 버지니아주 간병사 자격증을 갖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제도가 운영되고 있는 것을 본다). 뭐 그냥 정해진 수업시수를 잘 채우고 성실하게 가서 듣고 간단한 실습을 하면 되는 극히 초보적인 교육 과정이다.
그런데, 간병사 과정을 배울때, 간호와 관련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초청되어 강의를 해주셨으므로 - 내가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다채로운 내용을 배우게 되었다. 호스피스 전문가도 오시고, 간호대 박사과정 선생님도 오시고 - 현장에서 평생 근무하신 간호사 선생님도 오시고. 참 많은 내용들을 귀동냥하게 되면서 CNA 코스 (Certified Nursing Assistant, 간호조무사)에 대해서 알게 되고 역시 사회단체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CNA 과정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CNA는 우리나라의 간호조무사 제도처럼 교육과정도 6개월 정도 되고, 수업이나 실습의 양이 많고 엄중하게 진행되었다. CNA 부터 뭔가 professional 의 단계로 여겨졌다. 정말 공무 열심히 해야 하는 자격증인 것이다.
나는 PCA을 착실히 했고, CNA 과정은 다니다가 그만두었는데 - 그 이유는 본래 그 자격증을 따려던 목적이 - 내가 그걸로 어딘가에 취직을 하려던 것이 아니고 -- 그 당시에 진로 고민하다가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무슨 새로운 전공을 공부해야 할까?' 고민하던 우리 귀냄이 녀석에게 "귀냄아, 간호대를 가보는 것은 어떨까? 잘만하면 그쪽도 의사 못지 않은 전도유망한 분야란 말이지..." 살살 꼬셔서 녀석과 함께 PCA도 끝내고 CNA도 함께 등록하여 공부하고 있었던 것인데, 우리 귀냄이가 주위 친구들의 강력 추천으로 Information Techonology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CNA 과정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나 역시 더이상 그것을 마칠 동기가 사라졌던 것이다. 그렇다, 내가 아들의 장럐를 위해서 자격증 공부까지 함께 해 줄 정도의 엄마이기도 했다. (내가 좋은 엄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식의 앞날을 위해서 '함께' 그 길을 가주는 친구이기는 했다.)
뭐 그래서 귀냄이는 간호대학으로 편입하려는 계획을 접고 공대로 간것이고, 나역시 '내가 뭐 현장에서 정말 환자들을 돌볼 사람도 아니므로' 대충 기본적인 상식 공부를 한 셈 치고 그 과정을 그만 둔것인데.
그런데 내가 그냥 심심파적으로, 뭔가 상식의 경계를 넓히고자 잠시 공부했던 PCA, CNA 과정이 내 삶에 전환점을 가져왔다. 그 얘기를 하려던 것인데 서론이 너무 길었다.
내가 뭔가 번듯한 직장에서 '다시 시작'해보고 싶어서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백의종군 하는 심정으로 집구석에 처박혀서 미국 전역의 2년제 4년제 사립 공립 대학교에 이력서를 보내며 소일하고 있던 어느날 메릴랜드의 몽고메리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전화가 왔다. ESL 수업을 맡아 달라고. 그래서 당장 가서 공식 채용 절차를 마쳤는데 - 다시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가 이민자를 위한 의학영어 과정을 열어야 하는데 - 네가 적임자인것 같아. 네 이력서를 보니 너는 PCA 자격증도 있고 CNA 과정도 일부 이수했다고 나오네. 너 외국에서 온 의사, 간호사들에게 의료 관련 영어를 가르치는 커리큘럼을 짜서 가르칠수 있을까? 그 과정은 특수 과정이라서 강의료도 높고, 네가 잘하면 고정적인 과정으로 자리잡을수도 있어. 우리에게 ESL 강사는 많은데 메디컬 영어를 가르칠 사람이 없어, 너밖에." 이런것을 우리 업계 용어로는 ESP (English for Special Purposes)라고 한다. 일반 영어교육이 아니라, 특수 목적의 영어 교실을 말한다, 말하자면 의사들을 위한 영어, 파일럿을 위한 영어 이런식으로 특수 직군에게 필요한 영어 과정들이다.
후보가 나밖에 없다니 (나도 한번도 안가르쳐봤지만....), 게다가 일반 강의보다 강의료가 세배나 높은데 -- 이게 웬 떡인가. 그래서 나는 그날 당장 관련 서적들을 사들여서 착실히 공부를 하고 수업과정을 설계했다. 심지어는, 내가 PCA, CNA과정에서 전문가들로부터 이수했던 '실습'과정까지 내가 다 가르치게 되었는데 대학에서는 내가 영어와 실기까지 다 가르칠수 있다니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반겼다. 그렇게 - 몽고메리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나는 '이민자/난민' 의료인들을 위한 의료 영어 교육 전문가가 되었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고, 나는 아프리카등지에서 온 난민 학생들 (미국에서 간호사가 되고 싶어하는, 고국에서 간호사나 의사로 일했던)을 위해서 여러 사회단체에 죽어라고 이메일을 보내어서 - 희망하는 사람들이 CNA 과정을 무료로 공부할수 있도록 장학금을 끌어다 주기도 했다. (이메일 질에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내가 활발하게 일을 하자 몽고메리 칼리지에서는 내게 풀타임을 제안했다. 그 때 내가 마음이 잠깐 흔들렸다.
그런데, 그 당시 나는 조지메이슨에서도 시간강사를 하고 있었다. 몽고메리 칼리지와 조지메이슨 두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면서 내 희망은 조지메이슨에 풀타임 교수로 가는 거였다. 그런데 몽고메리에서 내게 풀타임을 제안한 것이다. 잠시 흔들렸지만 나는 곧바로 '감사'와 함께 그냥 개인 사정으로 시간강사는 할 수 있지만 풀타임은 할 의사가 없다는 답을 했다. 내가 몽고메리에 풀타임으로 자리를 잡으면 조지메이슨에서 풀타임 자리가 났을때 움직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럴경우 나를 믿고 뽑아준 몽고메리에도 미안한 노릇이고. 나는 함부로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깝지만 그자리를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학기에 나는 내 소망대로 조지메이슨에 풀타임 교수로 들어갔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최근에 내가 프로포절을 작성한 십만달러짜리 미국 정부 교육프로그램은 '난민을 대상으로 한 영어, 문화 교육 프로그램'이다. 지금 내가 속한 대학에는 '난민' 전문가 교수들도 있고, '영어교육' 전문가 교수들도 있다. 그런데, '난민 대상 영어교육' 프로그램을 디자인하거나 제공했던 사람은 '나' 한 사람 밖에 없다. 그래서 - 내가 이 프로젝트를 디자인하게 되었다.
지금 그 난민 대상 영어교육 프로그램과 -- 간병사나 간호조무사 공부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의 별것도 아닌 간병사, 간호조무사 공부 이력이 나를 '이민자들을 위한 의료 영어교육' 전문가로 키웠고, 의료영어 교육 전문가로 크는 동안 -- 내게 수업을 들은 학생들 - 정치적 난민들, 취약계층을 위하여 내가 발벗고 나서서 장학금을 끌어오거나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을 했던 이력이 나를 특수 영어 교육 전문가로 캐웠으며 ----> 그 이력이 나를 '난민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설계자로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얘기를 하려는거다.
나는 이런 얘기를 최근에 내게 상담을 하러 온 학생에게 들려주었다. 우리학교에 회계학 전공으로 들어온 그 학생은 - 원래 간호대에 가고 싶었는데 간호대 입시에 실패해서 - 그냥 부자 할아버지가 가라고 하셔서 자기는 별로 관심도 없는 우리대학 회계학과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학생에게, 이번학기 성적관리나 잘하고 학교를 그만두라고 얘기해주었다. "간호사가 되고 싶으면 간호사가 되는 길을 가, 여기서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말고" -- 이것이 내가 그에게 해 준 말이다. 나는 그 학생에게 한국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간호대에 들어갈수 있는 여러가지 경로를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내 간병사-간호조무사 공부 얘기도 해주었다. "당장 겨울방학에 동네 구청에서 공짜로 제공하는 간병사 자격증 공부라도 심심파적으로 해봐라. 거기서 시작해서 네가 소망하던 간호사의 길을 가면 된다. 가만보니 너희 집안이 먹고 살만하고 교육수준도 되게 높아서 - 아마도 네가 어느 구석의 허름하고 이름없는 간호학과 같은데 가는것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로 보이는데 -- 그분들 말 들을거 없다. 네가 하고 싶은 공부를 차근차근 해라. 네가 가고 싶은 길을 가라. 네가 그 길을 성실하게 가다보면 - 나중에 그분들이 너를 우러러볼수 있는 그런 자리에 네가 가 있을것이 자명하다."
모처럼, 아무런 숙제도 없는 주말이다. 가을학기 개강이후에 매 주말마다 뭔가 나를 짓누르는 숙제들이 있어왔다.
교수 승진 위원회에서 승진신청 교수님들 자료 분석하고 신청추천서 작성하고, 평가 심의회에 참석하고, 누군가를 위한 변론도 해야 했고. 그 일은 아직도 진행중이긴하지만 큰 파도는 지나갔다.
몇년 끌어온 책 원고의 마지막 교정 작업도 진행했다. 그것도 마쳐서 넘겼으니 나머지는 이제 출판사에서 마무리해서 출시하겠지. 안도의 한숨.
누군가를 위한 포상 신청작업도 했다. 내가 아닌 내 주위의 훌륭한 사람이 마땅한 포상을 받을 수 있도록 추천서와 문서작업을 하는 일이었다. 그분이 상을 받을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 사이에 미국의 아들 부부가 보름간 다녀갔다. 자식이라해도 내 '구역'에 온 손님이기도 해서 - 아무것도 안해도 보름간 신경을 썼다고 할 수 있다. 애들이 가고 난 후에 '포진'도 올라오고 한차례 몸살을 앓고 지나갔다. (아, 오늘은 가까운 내과에 가서 독감 백신을 맞아야지. 그동안 몸 상태가 편치 않아서 독감 예방 접종도 미루고 있었다).
십만달러짜리 프로젝트 프로포절을 일주일 넘게 주무르며 작성하여 엊그제 보냈다. (잘 접수되었다는 확인서가 왔다). 그걸 드래프트 작업하면서 -- 나 이걸 쓰긴 쓰는데, 채택이 안되기를 내심 바라고 있다. 채택되면 일을 해야 하는데 그 일을 할 기운이 없다 -- 이런 생각을 했다. 안되면 다행이고, 되면 .... 그 때 가서 어떻게 시간과 에너지를 안배하여 이 일을 추진할 것인지 고민을 시작해야 할것이다.
2025년도 지역사회를 위한 시민 교육 프로그램 커리큘럼 디자인 작업을 현재 진행중인데 - 다행히 신임교수들께서 적극 참여 의사를 밝히셔서, 근사한 팀을 짜는데 아무 문제가 없어보인다.
그래서, 이번 주말은 - 아무런 숙제도 없이, 뭔가를 마감해서 보내야 한다는 강박감도 없이 머리 가볍게 쉬면서 보낼수 있을것이다. 물론 다음주 월요일부터 다시 고난의 시간이 시작될 것이지만 - 이제 뭐 신촌에 가야 하는 일정도 어느정도 익숙해진것도 같다. 신촌에 가는 날은, 아침 나절에 연세대 백양로를 지나쳐 캠퍼스 일대의 동산을 이리저리 산책을 하기도 한다. 지옥에도 햇살은 빛날것이다. 누군가 고통의 강을 건널때도 그 강변에 꽃이 피고 지며, 새들이 위로하듯 날아 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11월도 곧 갈 것이다. 그러면 방학이 온다. 학생들은, 고맙게도 잘 해내고 있다. 학생들의 눈빛이 깊어가는 가을처럼 깊어지며 사색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젊은 그들이 깊어지고 높아지고 성숙해지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하루하루 단풍이 붉어지듯 그들이 깊어지는 것이다. 향기로운 대학생들과 생활하는 특혜를 주신 하나님께 오늘도 감사와 찬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