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3. 08:16



내가 미국에서 둘러본 미술관들 중에서 미국의 유명한 재벌이 직접 열었거나 혹은 혁혁하게 기여한 미술관들.  (참고: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Museums)

 

 

 

 미술관

 설립자 (기여자)

 비고

 뉴욕 현대 미술관 (MoMA)

http://americanart.textcube.com/80        

 

 Rockefeller 가문

 미국 최대 석유 재벌     

 구겐하임 미술관

(맨해턴 소재의 미술관 방문, 2008 )

 

 

 Guggenheim 가문

 광산, 금광

 디트로이트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94

 

 

 Ford 가문 (기여)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자동차

 카네기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159

 

 

 Carnegie 가문

 펜실베니아

피츠버그

철강업

 크라이슬러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190

 

 Chrysler 가문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자동차

 코코란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97

 

 

 Corcoran 가문

 광산

 필립스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35

 

 

 Phillips 가문

 광산

 Walters Art Museum (볼티모어) 무료입장

 

 

 Walter 가문

 재벌

 

Freeer Gallery http://americanart.textcube.com/225

 

 

 

Freer

미시간 디트로이트 철도 산업및 기차 제조 투자자

아내와 자식 없었음.

워싱턴 디씨에 최초로 스미소니언 산하 뮤지엄 건물을 기증함

그의 19세기-20세기 미국미술및 아시아 미술 소장품을 연방정부에 모두 기증

 

 

Sacler Gallery

Hirshhorn

Kreeger

 

                                                   

 

 

 

 

 

 

 



작은 재벌들의 개인 전시관 규모의 미술관은 제외하고 큼직한것 중에서 내가 직접 가 본 (크라이슬러는 조만간 방문 예정) 미술관들과 재벌들과의 관계를 표로 한번 만들어 본 것입니다.  록펠러의 현대미술관은 20달러쯤의 입장료를 받지만,  버지니아의 크라이슬러 미술관은 '무료 입장'입니다. (고마우셔라).  뉴욕 맨해턴에 있는 거의 모든 미술관들이 입장료를 듬뿍 받아 챙기는 편이고, 그 외의 도시의 미술관 입장료는 착하거나 (저렴) 혹은 너무 착한 (무료)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살면서 새로운 '재벌' 미술관을 방문하면 이 페이지를 업데이트 해 보겠습니다.

 

이런 미술관을 방문할때, 처음에 저는 그저 피상적으로  참 훌륭한 일을 하셨구나,  덕분에 내가 이렇게 세계적인 명품들을 무료로 혹은 약간의 돈을 내고 맘껏 볼수 있구나 뭐 이렇게 가볍게 생각을 하고 기쁜 마음으로 전시품들을 보는 정도 였습니다.  가끔은 '결국 문화라는 것도 돈 있는 사람들의 놀이이지. 돈 없으면 그림도 음악도 힘들지.  메디치가를 봐도 그렇고, 창작하는 사람들은 돈 가진 사람들의 도움을 받거나...결국 문화는 돈인거야..대충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촛점을 맞춰서, 피상적으로 대충 볼것이 아니라, 뭔가 주제를 정해서 파고 들어가보자 작정하고 미국미술을 들여다보니, 자연히 미국역사를 들여다보게 되고, 미국 역사속에서 재벌들이 어떤 노선을 취했는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이 아름다운것을 알고 있지만 (제가 뉴욕 맨해턴에 갔을때 처음 보고 반한 건물이 크라이슬러 건물이었습니다.)  크라이슬러 자동차 공장에서 노동자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카네기가 대단한 자선가라는 것은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카네기가 노동자들을 어떻게 탄압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화려하고 즐거운 정보에는 많이 노출되어 있지만, 슬프고 어둡고 아픈 역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생명가진 것들은 본래 어둡고 아픈것은 회피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것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결국, 이면으로 이면으로 파들어가게 되더란 것이지요.

 

나는 새삼스럽게 자선가로 알려진 재벌들을 비평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사회에 제공한 화려한 미술관 뒤에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 가끔은 들여다볼 생각입니다.  그래야 세상을 균형감있게 볼수 있고, 그래야 좀 어딘가 균형이 잡혀갈것 같습니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09. 12. 21. 21:52

 

2009년 12월 19일 (일) 자정부터 자정까지 온종일 내린 눈의 총량

 

 

 

 

 

 

 

 

 

 

 

 

 

2009년 12월 20일

 

아침에 깨어났을때, 창밖은 파란 하늘과, 파랗게 반사되는 쌓인 눈으로 눈이 부셨다.  뒷마당에 쌓인 눈은 식탁의자의 허리 부분을 이미 지나 있었고, 성인 남자의 무릎 높이보다 높았다.  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쌓인 눈을 평생 몇번이나 보았는가?' 물었는데,  내 희미한 기억으로, 어릴때,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시골집 마당에 이렇게 눈이 쌓인적이 있었는데, 그 어린 나이에 눈에 갖힌 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그 후에 눈이 이렇게 많이 쌓인 것을 본 적이 없는듯 했다.

 

우리집 왕눈이는 눈에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눈이 가볍게 쌓였을때는 나가서 겅중거리고 뛰어 놀줄도 아는 개 이지만, 눈이 제 키를 넘게 쌓이자 눈을 무서워했다. 

 

옛날에 시골에서 살때, 눈이 많이 쌓이면, 할아버지는 우리집과 이웃집 사이에 이렇게 길을 내 놓으셨었다. 날이 개이면 눈길은 사라지고 말지만,  이렇게 실핏줄같은 눈길이 마을의 집과 집을 이어주곤 했었다.

 

워싱턴의 모든 관공서는 월요일 (21일) 임시 휴무일로 정했고, 금주 수요일에 방학을 시작하려던 공립학교들은 일제히 방학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방학이 일찍 시작되었다고 환호하고...쌓인 눈은 하도 높이 쌓여 하루이틀에 녹을것 같지는 않고...

 

눈길을 걸어 동네 스타벅스에 나가서

뜨거운 라테랑, 아주 달아 미치겠는 케이크 한조각 주문해가지고 난롯가에 앉아 그것을 먹으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Diary >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친구  (2) 2010.08.04
빨래 바구니의 왕눈이  (1) 2010.07.23
Slrf 2009, Michigan State University 가을  (2) 2009.10.31
Shanandoah National Park, Skyline Drive 단풍구경  (0) 2009.10.25
[Book] How Starbucks Saved My Life  (1) 2009.10.18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15. 01:28

 

 

Eastman Johnson

The Early Scholar (이른 아침 학교에 온 어린이)  c. 1865

2009년 12월 13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날씨가 쌀쌀하죠.  이런 날은 어릴때, 기온이 영하 5도 아래로 내려가길 '고대하며' 동동 걸음으로 찬바람을 맞으며 학교로 향하던 내 모습이, 그 풍경이 떠오릅니다.  아침에 나올때, 뭐 수업도 없고, 방학이니까, 편안한 옷에 '털신'까지 신었지요.  그 털신을 신고 앉아 생각해보니, 내가 어릴때 나는 한번도 '방한화'개념의 어떤 두꺼운 신발을 신어본 기억이 없어요.  털신이라니...내가 출세한거죠. 털이 보글보글한 폭신한 장화를 신고 앉아있으니.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땐, 영하 5도 이하로 기온이 내려가는날 난로를 피워줬지요. 고등학교에 가니까 영하 3도 이하로 조정되더군요.  그러니까 어릴땐 날씨가 영하 4도가 되면 난로 안때주고 영하 5도가 되면 난로를 쌔주니까, 영하 5도가 영하 4도보다 따뜻한거죠.

 

그리고, 초중고등학교 다니는 내내, 난로 관리는 반에서 제일 키 큰 친구들이 전담해서 했어요.  그러니까 조개탄 창고에가서 조개탄을 배급 받아 오는 일이나,  수업 마치고 난로 청소한후에 나머지 재를 들통에 담아서 내다 버리는 일이나, 이런 난로관련 업무는 반에서 제일 키 큰 서너명이 '큰 언니들'처럼 맡아서 했던거죠.  담임 선생님이 늘, 당연하다는 듯이 제일 꺽다리 애들을 지명하여 일을 지시했고, 그 꺽다리들도 마땅히 자신들이 해야할 일이라는 듯 믿음직하게 그 일을 했지요. 그 꺽다리들은 딱 큰언니 같았는데, 여자 중고등학교에서 그런 일을 하는 꺽다리들은 '오빠' 기능도 일부 담당했지요.  그냥 그 키 큰 애들을 무조건 따르는 애들도 있었으니까. 저는 또래 집단에서 큰 키에 속했지만, 제일 큰 꺽다리는 아니었으므로 주로 그런 꺽다리들하고 등등하게 어울리되 이런 어마어마한 일은 안하는. 어중간한 꺽다리과였죠.

 

 

 

한 꺽다리 친구가 생각나는군요.  그 꺽다리는 정말 '오빠'처럼 체격이 크고 늘씬하고, 성격도 무지 좋고, 공부는 그냥저냥 하는데, 뭐 인물 좋고 성격좋고, 선생님들이 허드레 일을 시키면 빙글빙글 웃으면서 척척 해내고, 우리들이 모두 그 꺽다리 '오빠'를 좋아했죠.  그런데 이 친구가 나를 예뻐했어요. 자기가 다니는 예배당에 행사 있다고 가자고 하기도 하고 (그러면 그냥 소풍가는 맛에 따라가고),  방과후에 학교앞 튀김가게에 함께 가지고 하면 따라가고, 미술 시간에 10년후의 나의 집을 그려보라는 선생님의 지시에 그애가 그린 집은, '10년후에 이아무개하고 나하고 함께 살 집.'  그 이아무개가 물론 소생이죠.  그 애는 왜 십년후에 나하고 함께 살 생각을 했을까?  나의 십년후는 달랐는데... 아무튼 그래서 그 친구가 그린 집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내 방 창문앞에는 사과나무를 심어줘. 그리고 꽃도 많이 심어줘" 뭐 이런 제안을 하면서 시시덕거렸죠.

 

 

요즘 이런 얘기를 하면 죄다 '동성애 코드'로 해석하는 분위기쟎아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동성애'가 뭔지도 몰랐어요 우리는.  그당시에도 '호모'라는 말이 가끔 돌아다녔지만, 그냥 동성끼리 서로 좋아하는게 '호모'인줄 알았죠.  우리 머리속에는 도대체 '섹스'라는 개념이 탑재가 안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누가 누구하고 같이 살고 싶대' 뭐 이런 말도, 누가 누구를 꽤나 좋아한다는 말과 동의어였죠.  그 외에 다른 뉘앙스를 잘 몰랐지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냐하면, 그 친구가 나를 너무 이뻐하고, 나를 강아지처럼 데리고 돌아다니러 들고, 아무튼 내게 너무 잘해줬기 때문에 처음에는 언니/오빠처럼 좋아서 따라다니다가 나중에는 귀챦아서 멀어진것 같아요.  언니/오빠는 언니/오빠의 영역을 벗어나면 안되는건데... 사람의 관계란 그렇죠. 어떤 영역이 있어요. 그 영역안에서만 머물러야 하는데 그 선을 깨버리면 그 관계가 일그러지지요.  그런데, 그 영역이란것이 사람마다 선이 다르니까 오해나 문제가 생기고 비극이 일어나기도 하고.  돌아보면, 누군가가 내가 정한 금을 넣어 왔다는 이유로 내가 회피한 경우가 종종 있고; 어쩌면 나 역시 금을 넘어갔다는 이유로 회피의 대상이 되었겠지요.

 

아, 난로담당 친구 얘기를 하다가 엉뚱한데로 얘기가 흘러가버렸는데...

 

 

Eastman Johnson 은 제가 언젠가 따로 페이지를 낼 화가인데요. 오늘은 어제 국립미술관에서 발견한 이 사랑스러운 그림 소개만 할게요.  The Early Scholar. 대략, 이른 아침에 학교에 도착한 생도라는 뜻인것 같죠.  뒤에 벤치들이 보여요. 초기의 교실 풍경같죠. 그리고 난로가 하나 있는데 이 꼬마친구가 불을 피우고 있는것 같아요. 아니면 선생님이 미리 피워놓은 난롯불을 쬐고 있거나. 난롯가에 커다란 장작 쪼가리 하나가 누워있는것도 보이고.

 

이렇게 일상의 어떤 풍경을 그리는 것을 장르 페인팅 (genre painting) 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냥 '풍속화'라고 해석하는 편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는거죠. Eastman Johnson 은 그런 풍속화가지요.

 

날씨가 추워서, 뭐 따뜻한 그림을 하나 올리고 싶어서 끄적끄적...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14. 23:23

National Archives

 

공식 홈페이지: http://www.archives.gov/

 

워싱턴 디씨에 있는 국립 문서 기록 보관소 (National Archives = Archives of the United State of American)는 이름 그대로 문서 기록을 보관하는 '창고'라고 할수 있습니다. 예전에 '국사'시간에 우리도 배운적이 있지요. 왕실의 기록을 조선땅 여기저기에 보관해 놓았다고 해서 그 장소를 달달 외운 기억이 있는데요, 그래서 외침으로 궁성이 여러차례 불 탔어도 조선왕조실록이니 하는 사료들이 잘 보관되어 전해졌다고 하지요.  워싱턴의 국립 문서 기록 보관소도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보관하는 장소이고,  미국의 각지에 이러한 보관소들이 있다고 합니다.  워싱턴디씨에 있는 보관소에는 특히나 영국의 권리장전, 미국의 독립선언문, 헌법초안, 헌번 개정안등의 원본에 대중들을 위해 전시되어 있어서,  이곳은 미국 전역의 중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으로 워싱턴을 방문할때 반드시 들르는 장소입니다.  저희집 아이들도 중학생때 플로리다에서 워싱턴까지 수학여행을 가서 이곳을 구경한 적이 있지요. (큰놈은 제법 이곳에서 판매하는 독립 선언서 카피본을 기념품으로 한장 사다가 제게 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어디 처박혀 있는지도 알수 없지만요.)

 

 

이렇게 일년 내내 많은 미국인들과 여행자들이 찾은 장소라서, 특히나 니콜라스 케이지가 출연했던 National Treasure 영화 시리즈 덕분에 이곳을 호기심을 갖고 꼭 보고싶어 하는 청소년들이 많은데요, 그래서 주말이나 휴일에 이곳을 보려면 몇시간씩 뙤약볕 아래서 줄서서 기다려야 합니다.  전에도 몇차례인가 이곳을 지나다가 기웃거려 봤지만 줄이 길어서 번번이 포기했지요 (줄서서 구경하고, 줄서서 식당 들어가고 그러는거 무척 귀챦아 하는 편이거든요. 줄 서라고 하면 그냥 딴거 하고 말죠).  마침 비오는 12월의 일요일.  비는 죽죽 내리는데 누가 이런데까지 마실을 오겠습니까. 날도 춥고.  지나는 길에 들여다보니 뭐 한가로와 보이길래 결국 잠시 들르게 되었습니다.

 

 

 

 

 

 

 

 

 

건물 왼편으로 들어가면 입구가 나오는데요, 입구를 통과하면 공항의 Security Check (물품검사대)과 같은 곳이 나타납니다. 소지품 모두 검사대를 통과해야 합니다. 사람도 검사를 받고요.  아무래도 국립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라서 경비가 엄한 편입니다.  입장료는 무료.  사진도 자유롭게 찍을수 있지만 플래시 사용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요즘 카메라들이 좋아서 플래시 없이도 잘 찍히죠)

 

 

 

 

 

 

 

검사대를 통과하여 지층의 '극장'에 가서 이곳을 소개하는 짧은 교육용 영화를 봅니다.  기록의 중요성, 기록의 활용 방법을 알려주는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영화관 시설도 아주 훌륭합니다.  그리고나서  중요 문서 (영국의 권리 대장전, 미국의 독립 선언서, 미국의 헌법초안, 미국의 헌법 개정안 원본들)들이 전시되어있는 로툰다 홀로 이동하여 구경을 합니다. 조명이 침침하여 원문을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가장 구경하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이 곳이지요)

 

로툰다홀에서 나온후에 교육 전시실이라는, 미국 역사 관련 전시물들을 둘러보고, 기념품가게에서 물건 구경하다가 나오면 됩니다.  이것이 단순히 '구경'하기 위해 들르는 절차이고요, 만약에 특정 문서나 기록을 열람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다면 해당 사무실로 찾아가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고문서 전시장 (Rotunda Hall)의 벽화

 

전시장의 왼편 벽화는 독립선언문 그림입니다. 벽화 아래에 독립선언문 원본이 전시 되어 있습니다.  오른쪽 벽화는 '헌법' 그림입니다. 그 아래에 역시 헌법 원문 (Constitution), 그리고 개정안(Bill of Rights)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벽화들을 그린 화가는 Barry Faulkner (베리 포크너 1881-1966) 입니다. 뉴 햄프셔 태생으로 하바드에서 수학하다 이탈리아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받고 벽화의 본고장 로마에서 실력을 인정받은후 1910년에 귀국합니다. 포크너는 국립 문서 기록 보관소의 벽화를 위임받고 1936년 이 두장의 벽화를 완성합니다.  이 벽화들은 캔바스에 유화로 제작한 것입니다.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한  그림인데, 완성후에 건물의 벽에 벽화로 설치가 된 것이지요.  전에 앤드루 와이어드의 생가를 방문했을때, 스튜디오에 있던 어마어마한 벽화 작품을 발견하고 http://americanart.textcube.com/44,  "저 그림을 어떻게 운반했는가?" 물었더니 캔버스를 둘둘 말아가지고 운송하여 벽에 붙인후에 미술가가 다시 세밀한 보수, 교정 작업을 했다고 가르쳐주더군요.  포크너 역시 캔바스에 유화로 그린 작품을 이리 옮겨다가 벽에 붙인후에 세밀한 완성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미국 역사상 독립 선언서가 공개된것을 1776년 7월 4일로 정하고 이날을 '독립 기념일'로 기념하는데요, Declaration of Independence 그림에는 독립 선언서 초안을 작성하는데 참가했거나, 최종 서명을 한 인물들이 담겨있습니다. 미국의 3대 대통령을 지낸 토마스 제퍼슨이 이 초안의 작성자로 알려져 있지요. 당시 그의 나이가 26세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그림에서 토마스 제퍼슨이 누구인지는 우리도 가늠할수 있겠지요.  그리고 우리에게도 친숙한 인물인 벤자민 프랭클린도 보입니다.  저도 거기까지는 알아맞출수 있었는데, 나머지는 설명을 봐야 알겠더라구요.

 

 

 

 

 

 

1776년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후에 1787년에 미국의 헌법이 발표가 되는데 (그러니까 11년이 흘렀군요) 이때 헌법에 동의한주가 동부의 13개주였다고 하지요. 이 그림속에는 헌법에 동의한다고 서명한 사람들과 서명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헌법 원문 맨 뒤에 보면 어느주의 대표가 싸인을 했는지 나와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중앙에 흰 옷을 입은 키가 남들보다 커보이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대충 감으로 맞추는거죠 뭐.  미국 역사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

 

 

 

 

 

베리 포크너는 로마에서 미술 수업을 받은 사람이고, 그곳에서 실력을 인정 받은 사람이라서 그의 벽화는 로마의 화풍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벽화속의 풍경은 '사실'과는 부합되지 않고 로마의 풍경속에 미국 역사상의 인물들을 그려 넣은 식이지요.   이 벽화가 1936년대에 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PWAP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Public%20Works%20of%20Arts%20Project ) 및 공공미술이 활기차게 진행된 시기이기도 하고, 미국 지방색이 강한 그림들이 제작되던 시기이기도 한데요, 이 벽화는 이런 흐름과는 달리 로마네스크 양식을 취하고 있지요.  이는, 미국, 특히 워싱턴 디씨 지역의 건축 양식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신생국 미국이 역사속에서 '모델'로 삼았던 것이 고대 그리스 로마의 건축 양식이었습니다.   초기 미국을 건설한 사람들은 유럽 사람들이죠. 하지만 유럽의 모델을 그대로 베껴다 쓰기에는 어딘가 껄끄럽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무엇을 모델로 할것인가? 고대(古代)로 돌아가야죠. 민주주의의 시원지라 할만한 그리스의 건축양식, 대제국이었던 로마의 건축양식을 가져와야죠. 대략 그러한 사연이 있었다 할수 있지요. 

 

제가 이 그림들 관련 자료를 찾다가 아주 재미있는 페이지를 발견했습니다.

http://teachingamericanhistory.org/convention/faulkner/

이 페이지에서 그림속의 인물에 커서를 갖다 대 놓고 클릭하면 해당 인물에 대한 안내가 상세하게 나옵니다.  누가 누구인지 궁금할때 이런 안내가 참 유용하지요.  워싱턴 디씨에 있는 벽화라면...국회도서관의 벽화를 빼놓을수가 없는데, 그곳은 모든 벽이 벽화라서, 아예 책이 별도로 나와있을정도이지요.  아아아, 어마어마한 작업이 될 것 같아서 후일로 마냥 미루고 있습니다.  나중에 그것도 안내해드릴게요.  =-)

 

 

2009년 12월 14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Ashcan School2009. 12. 12. 02:12

프랜더개스트의 얼굴없는 미녀들

 

 

 

Maurice Prendergast (모리스 프렌더개스트, 1859-1924)는 캐나다에서 출생하여 미국에서 성장한 화가입니다. 사실주의 화가 그룹이었던 The Eight (팔인회)의 멤버로 함께 전시회를 가진적도 있긴 하지만,  모리스 프렌더개스트가 남긴 그림들은  '8인회'를 표상하는 '도시' '서민의 삶'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이미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가 있었던 것이겠지요.

 

가족이민으로 세살때 보스톤에 온 프렌더개스트는 8학년 (중학교)을 마치고 14세의 나이에 '상회'에 취직을 하여 살아가면서 혼자서 그림을 그립니다.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혼자서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을 그리는 정도였겠지요. 20대때는 동생 Charles 와 함께 가축용 배에 몸을 싣고 유럽으로  가서 유럽 여행을 하기도 합니다.  유럽구경을 하고 돌아온 프렌더개스트는 그제서야 '미술공부'를 제대로 해보고싶다는 열정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결국 '액자' 사업을 하게 된 동생의 후원으로 나이 30에 파리에 입성하게 됩니다. (고호에게 그의 아우 테오가 있었던 프렌더개스트에게는 아우 찰스가 있었다고 할 만 하지요) 그는 파리의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학교에서는 '석고상'이나 '대리석상'과 같은것을 그려보라는 지시를 했지만, 그는 밖으로 나가 살아움직이는 사람들을 스케치하는 일에 몰두 했다고 합니다.

 

 

제가 미술관을 돌며 수집한 그의 작품들은 모두 '유채화'인데요, 그는 초기에 수채화를 주로 그렸고, 후기에 유채화로 선회했다고 합니다.  제가 본 작품들은, 다 똑같아 보일정도로 테크닉이 유사한데,  화집이나 언라인 자료를 찾아보면 점이나 짧은 선을 이용한 화법의 작품들이 많이 보입니다. (이렇게 경쾌할수가!)

 

카네기 미술관에 걸려있는 커다란 '소풍 (Picnic)'이란 작품은 얼핏 보기에는 수채화처럼 보입니다.  저는 사실 이작품을 '수채화'로 알고 보고 지나쳤었는데,  글을 쓰기 위해 자세히 들여다보니 유채화라고 나오는군요. Oil on Unsized Canvas 라는 설명문이 있길래, 이것은 무엇인가? 자료를 찾아 봤지요. 

 

우리가 남대문 미술상에 가면 다양한 사이즈의 나무틀에 짜여진 캔버스를 살수가 있고, 혹은 아예 두루마리 캔바스를 통째로 살수도 있는데요. 대부분 이렇게 판매되는 캔버스는 젯소 가공이 된 상태라고 합니다. 헝겊을 그림 그리기에 적합하게 가공을 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Unsized Canvas 란 말하자면 이런 밑가공을 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캔바스에 표면처리가 되지 않았으므로 페인트가 스며들면서 색다른 효과가 나올수 있겠지요.  그래서 이 유화가 얼핏 보기에 '수채화'같은 느낌이 들었던것 같습니다.

 

 

 

카네기 미술관 전시실 풍경

2009년 11월 촬영

 

 

Picnic (c.1914-1915)

소풍

Oil on Unsized Canvas

가공처리 되지 않은 캔바스에 유화

196x271cm

2009년 11월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Women at Seashore (1915)

Oil on Panel

43x81cm

2009년 11월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위의 피크닉이나 Women at Seashore 모두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것인데요. 풍경이나 등장인물들의 분위기가 유사합니다. 

 

 

 

 

 

Salem Cove (1916)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3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워싱턴 디씨의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에 걸려있는 프렌더개스트의 작품입니다.  한 소년이 아빠와 함께 손을 잡고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의 작품 구경을 하면서 슬슬 지나가다가  이 그림 앞에 서더니 아빠에게 뭐라고 종알종알 이야기를 합니다.  어린이의 눈길을 잡아끄는 그림이었던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 그림.  그래서 저도 그림 앞에서 기념사진 한장 찍어봤습니다. 저도 이런 그림 한장 갖고 싶어요.

 

 

 

 

 

Landscape with Figures (1921)

여러가지 모양이 있는 풍경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Landscape with Figures (1918-1923)

여러가지 모양이 있는 풍경

Oil on Canvas

2009년 10월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제가 가지고 있는 몇장 안되는 그림들을  제작 연도 순서대로 배열을 했는데요, 시간이 갈수록 그의 붓 터치가 세밀하고 조밀해지지요?  아무래도 수채화에서 유화로 넘어가면서, 그 이후로 그의 붓 터치가 깊이를 얻어간것도 같고요.  그럼에도, 그의 그림들에 등장하는 풍경이나 사람들이 마치 '동일한 그림'의 반복처럼 느껴질 정도로 유사해 보입니다.

 

이들 그림에 나타난 몇가지 공통적인 현상을 나열해볼까요?

 1.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것으로, 인물들의 얼굴에 이목구비가 생략되었습니다.

 2. 사람이나 나무나, 풍경 전체가 율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지된 풍경이 아니라 살아숨쉬는 여인의 가슴처럼 굴곡과 움직임이 있지요

 3.  드레스를 차려입고 소풍을 즐기는 남녀들이 나옵니다. (후기에는 동물들도 포함됩니다).

 4. 보시다시피, 모두 야외의 풍경이지요.

 

프렌더개스트의 전기 자료를 찾아보면, 프랜더개스트가 이탈리아 화풍의 영향을 입었다던가,  혹은 후기 인상파  점묘파 화가 쉬러(Seurat)의 영향을 받았다던가, 혹은 세잔느에 견주어지기도 하거니와, 나비파 보나르, 뷔야르의 영향도 제기가 되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당시의 유럽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거나 혹은 널리 알려진 화가들의 작품이, 혹은 그들과의 교류가  프렌더개스트의 예술세계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쳤을것은 자연스런 현상일수 있습니다.   그런데, 프랜더개스트는 단지 이쯤에서 주저않은 화가는 아닌듯 합니다.  그는 '자기 그림'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보입니다.  무슨 말씀인가하면,  누구의 어떤 화풍의 영향을 받았건 안받았건,  프랜더개스트는 이런 모든 '영향'을 초월하여 '이것은 프랜더개스트다'라고 할만한 화풍을 스스로 만들어 냈다고 하는 것이지요.

 

 

모리스 프랜더개스트는 1859년에 태어나 1924년에 사망했으므로 만 64년을 지구상에 머물렀다 할 수 있는데, 그는 평생 독신이었다고 합니다. 성격이 수줍고 조용하여 사교적이지도 않았고요.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나이 서른에 받기 시작한 이래로 죽을때까지 그림만 그렸으니 30여년간 미술가로 살다 간 셈인데, 그는 평생 '그림 생각'만 했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액자를 만들어 파는 일을 했던 그의 동생 찰스가 평생 그의 후원자가 되어주었지요.  결혼도 안하고, 사교적이지도 않고, 그림만 즐겨 그린 이 조용한 사람은 어쩌면 평생 '관찰자'로 살아간것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는 그의 성격은, 늘,  사람들을 어떤 풍경속의 일부로 파악을 했을것도 같고요.  그런 그에게 사람들의 이목구비, 사람들의 표정, 그런것들은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사람들'은 '풍경'으로 머물렀을겁니다.  그러니 그의 풍경화의 제목마저 Landscape with Figures (모양으로 이루어진 풍경화)라는 식으로 붙여졌겠지요.

 

미술평론가들은 이러한 그의 그림을 '사실주의'가 아닌 '추상적' 화법의 도입이라고 정리를 하기도 하는데요, 어쩌면 세잔느가 그러했듯 구체적인 관찰과 묘사, 혹은 인상(impression)을 넘어선 해체와 추상의 장으로 진입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엔 그냥 그의 삶이 그러하였던 것 같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다른 별에서 온 생명체가 멀찌감치서 풍경을 관찰하듯, 풍경속의 인물들도 풍경의 일부로 피상적으로 관찰을 했겠지요.

 

모리스 프랜더개스트는 1914년에 뉴욕으로 활동지를 정하고  The Eight 의 멤버였던 윌리엄 글랙슨즈의 윗층 (50 South Washington Square, New York)으로 이사를 합니다.  서로 이웃사촌으로 지냈다는 얘기지요. 

 

제 소견으로는 The Eight 의 멤버였던 William Glackens 는 '르누아르의 아류'에서 끝난 화가로 보이고, Maurice Prendergast는 유럽화풍도 공부했고, 유럽화풍의 영향권안에 있었지만, '프랜더개스트'만의 독특한 세계를 완성하고 떠난 화가로 보입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딱, 답이 나오쟎아요, 아! 프랜더개스트! 

 

 

 

2009년 12월 11일 redfox

 

 

후기: 모리스 프렌더개스트는, 사실, 저에게는 '듣보잡'과에 속하는 그림들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제가 무지한 관계로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을 발견했을때, 그냥 별 감흥없이 쓱쓱 지나쳤다는 것이지요. 미술관 이곳저곳에서 그의 그림을 보면서도, 프랜더개스트를 기억하기보다는 '저 그림 어디서 봤더라? 전에도 비슷한 것을 본적이 있는데...' 이정도로 생각하고 그냥 지나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The Eight 을 정리하느라 제가 갖고 있는 그림자료들을 정리하다보니, 어라? 이 사람  내가 제법 여기저기서 눈도장 찍은 사람이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어 그런데 그림 모아놓고 보니 매력있네!   뭔가 개성이 보이네!  이렇게 되더라구요.  그러니까,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더욱 매력이 느껴지더란 것이지요.  (모르고 죽었으면 억울할뻔 했네~ )

 

누군가를 새로 알아간다는 것은 참 흥미진진한 일입니다. 그것이 꼭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해도... 아니 어쩌면 그 대상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무엇을/누군가를 새로 알아가는 작업이 안전하고도 유쾌한 작업이 될지도 모릅니다.  산사람은, 알게되면 정들고, 혹은 싫증나고, 그러면 괴롭죠.  그냥 어떤 대상은 알면 알수록 유쾌해지지요. 싫증나면 떠나면 되고. 상처가 안남죠.   프랜더개스트도 혹시 그랬던걸까?  그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관조자, 관찰자로만 머물렀던걸까?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