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1. 24. 13:10

19세기 미국의 풍속화가 Edward Hicks (http://americanart.textcube.com/184)페이지를 열었는데, Edward Hicks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퀘이커 교도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지금 보이는 것은 미국의 식품 매장 어디에 가나 흔히 보이는 '퀘이커'라는 식품 브랜드 입니다.

 

 

 

 

퀘이커에서 만들어내는 것으로는 오트밀, 시리얼, 각종 곡물이 들어간 식사대용 '영양바,'  쿠키 등이 있습니다. 저역시 가끔 뜨거운 물에 타서 먹는 오트밀로 점심을 때우기도 합니다.  퀘이커는 한국의 '삼양라면'처럼 미국의 일반 서민들의 생활 깊이 스며든 식품이라 할 만 합니다. (제가 삼양라면이나 혹은 퀘이커를 광고할 의도는 없습니다. 그냥 비유컨대 그렇다는 것이지요.)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난 Edward Hicks 는 본디 부모님이 '영국국교 (성공회 = Anglican)' 소속이었지만,  성장과정에서 힉스를 친아들처럼 돌봐준 아주머니의 영향으로 퀘이커교도가 됩니다. 그 아주머니가 퀘이커 교도였다고 합니다.

 

퀘이커 교단이 미국 문화사에서 어떤 위치인가 잠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미국에 메이플라워를 타고 처음 온 사람들은 '필그림'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어떤 교파였습니다. 이들은 당시의 영국국교(Anglican)에 반대하여 종교적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건너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후에 뉴잉글랜드 지역에 '퓨리턴 (puritan = 청교도)'들이 역시 영국국교에 반대하여 종교적 자유를 찾아 들어옵니다.  퓨리턴들인 매사추세츠에서 시작하여 뉴잉글랜드 지역을 장악하게 됩니다.

 

한편 뉴잉글랜드의 남쪽,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는 '영국국교회' 앵글리칸들이 정착을 합니다. 그리고 뉴잉글랜드와 버지니아의 중간쯤에 위치한 펜실베니아에 퀘이커교도들이 정착을 합니다.  펜실베니아에 영국식민지를 처음으로 개척한 사람이 바로 Edward Hicks 의 풍속화 Peaceable Kingdom (평화의 왕국)에 등장하는 William Penn 입니다. 그는 퀘이커 교도였습니다.  윌리엄 펜은 영국국교에 반대하는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옥스포드 대학에서도 추방을 당한 사람입니다.

 

퀘이커교단에서는 '모든 인간은 신과 직접 대할수 있다'는 사상을 갖고 있으며 교회조직이나 직업적인 성직자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개인의 양심과, 묵상을 통한 신과의 대화를 귀하게 생각합니다. 이들은 전쟁을 거부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옷을 입는 일이나 삶을 꾸미는 일에 대해서도 소박함을 유지하려 하였습니다.  이들이 영국에서 박해를 받다가 신대륙의 펜실베니아 지역에서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이미 영국에서 종교적 이유로 박해를 받은 경험이 있었던 펜은 그가 개척한 식민지를 '모든 종교적 박해를 받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도록 노력을 합니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 영국인뿐 아니라 유럽의 여러나라 이민자들이 몰려옵니다.  Edward Hicks 의 그림에 묘사된대로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안들과도 협정을 맺고 서로 평화롭게 협력하고 사업을 해 나갔습니다. 

 

자 미국 초기 역사에서 각기 다른 기도교 교파들이 미국의 어떤 지역을 토대로 성장했는지 간단히 정리해볼까요?

 

 

 1. Pilgrims (필그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플리머스 항에 도착하여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생존에 성공했던 사람들 입니다. 이들이 가을 추수후에 하늘에 감사하고, 선량한 이웃이었던 인디언들에게 잔치를 베풀며 함께 기쁨을 나눴던 것이 미국의 Thanks Giving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2. Puritans : 그런데 필그림들은 후에 주도 세력이 되는 Puritan (청교도) 들에게 밀려나거나 흡수되고 맙니다.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3. 한편 버지니아 남단에 King James 식민지가 개척되는데, 이곳에는 영국 국교 (Anglican = Episcopal = 성공회)신도들이 정착합니다. 버지니아에 앵글리칸 교회들이 많이 보입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일 것입니다.

 

 4. 그리고 뉴잉글랜드와 버지니아 사이의 중부, 펜실베니아에 퀘이커 교도들이 자리를 잡아서 City of Brotherly Love = 필라델피아를 일으키는데, 이곳에는 종단이나 교파에 상관없이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이주민들이 몰려와 자리를 잡게 됩니다.

 

미국사에서 '퀘이커'의 위치를 살펴보면 퀘이커 교도였던 Edward Hicks의 풍속화에 그려지는 미국의 풍경, 노아의 방주 그림등에 대하여 좀더 생생하게 이해할수 있게 되지요.  (아, 그런 배경이 있는 그림이구나, 아하!)  윌리엄 펜이 펜실베니아를 일으킨것은 17세기의 일이지만 19세기의 에드워드 힉스에게는 살아있는 영웅이었을겁니다. (다른 페이지에서, 엉클 톰스 캐빈 이야기를 잠깐 적은 적이 있는데요.  흑인 노예들이 자유를 찾아 도망을 칠때, 이들을 보호해주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퀘이커 교도들이었지요.  그 소설에서 처음 퀘이커교도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기 때문에 제게는 이들이 아주 '착한' 사람들로 각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참고문헌:

 

1. 앙드레 모로아. (1991)  미국사. 신용석 옮김. 기린총서. 기린원. 5장 (pp 46-55)

2. 청솔역사교육연구회. 이야기 미국사. 청솔출판사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1. 24. 11:05

미국에서 일년중 11월의 네번째주 목요일은 우리나라의 추석과 흡사한 추수감사절 (Thanksgiving Holiday)입니다.  각급 학교나 회사, 공공기관들은 추수감사절 전날인 수요일부터 공식적인 휴일에 들어가서 수, 목, 금요일 공식 휴일을 갖습니다. 토요일 일요일에는 원래 일을 안하는 사회이니까,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5일간 휴가를 갖는 셈입니다. 

 

그 추수감사절이 금주로 다가와서, 이와 관련 그림을 소개할까 합니다.  추수감사절 관련 그림이야 다양한 화가들이 그려냈지만, 저는 펜실베니아 출신의 풍속화가 에드워드 힉스 (Edward Hicks 1780-1849)의 그림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사진을 클릭하여 확장시키면 큰 화면을 보실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제가 워싱턴 디씨의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에서 찍은 힉스의 Peaceable Kingdom (평화의 왕국) (c.1834)이라는 유화입니다.  제가 이 작품의 제작년도를 c.1834 라고 표기했지요? circa 1834 혹은 그냥 c.1834 라고 적은 것은 '대략, 짐작컨대' 1834 년쯤으로 추정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역사적 사실을 표기할때 영문으로 circa (c.)  표시가 있으면 이는 '대략 추정된다'는 뜻입니다. (참고하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이 그림의 주인공들은 누구일까요?  크게 두가지로 나눠 볼 수 있는데 (1) 사람들 집단, 그리고 (2) 동물들이 보이지요. 우선 사람들을 들여다 볼까요?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잘 알수 없지만, 짐작컨대, 서양사람들과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모여서 뭔가 하고 있는것 같지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거래'가 되는것 같습니다. 유럽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상자에서 뭔가 꺼내어 인디언들에게 보여주고 있지요. 선채로 뭔가 설명을 하는 유럽사람이 보입니다.  이들의 거래의 장면이 평화로워 보입니다.

 

 

 

동물들이 모여있는 광경을 볼까요? 사자, 호랑이, 양, 소, 송아지... 육식동물과 초식동물들이 태평하게 어울려 있습니다. 천사처럼 보이는 아이들이 이 동물들과 어울려 있습니다.  한마디로 '천국'에서나 가능한 풍경이겠지요?

 

 

에드워드 힉스가 꿈꾸던 '평화의 왕국'은 이렇게 신생국 아메리카에 정착하러 들어온 사람들과 이 터전에서 이미 살아온 인디언들이 서로 자신들이 가진것을 나누고 공유하는 사회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Thanksgiving Day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초기 미국 정착민들에게 도움을 준 아메리카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식사대접을 하고 잔치를 한것에서 비롯됩니다.

 

 

아래의 그림은 제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찍어온 것입니다. 제목은 Penn's Treaty with the Indians (윌리암 펜과 인디안의 협정) 입니다. 창작년도는 c.1830-1835.  대략 1830년에서 1835년 사이에 그려졌을거라 추정된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을 들여다보세요. 위의 그림속의 사람들과 약간 차이가 나지만 거의 동일한 구도로 비슷하게 그려냈습니다. 단 특별한 차이가 있다면, 가운데 서 있는 남자가 위의 그림에서는 그냥 두 팔을 펼치고 있는데, 아래의 그림에서는 그의 왼손이 펼쳐진 두루마리의 어떤 부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두루마리'가 새로 등장했다는 것 외에는 사람들 풍경이 위아래 비슷해 보이지요? (물론 위 아래의 그림을 나란히 놓고, 그림에서 서로 다른것이 무엇인지 찾아가면서 시간을 보내도 심심풀이가 될것 같습니다.)

 

 

액자에 Penn's Treaty 라고 적혀진 것으로 보아, 두루마리에는 미국정착민들과 인디안들 사이의 협정서가 적혀 있는것 같습니다.

 

 

 

 

 

 

 

 

자 여기서 제가 독자여러분께 한가지 '질문'을 던져 보고 싶습니다.

 

앞서 소개한 '평화의 왕국' (c. 1834) 과 후에 소개한 '윌리엄 펜의 협정' (c. 1830-1835) 두장의 그림은 각기 대략 1834년 추정, 1830-1835년 추정 이렇게 표시가 되어 있는데요. 그림속의 사람들의 모습과 주변 풍경을 보면 어느 그림이 역사적으로 선행되는 그림일까요?   (여우야, 여우야 네가 평화의 왕국 그림을 앞에 소개했고, 윌리엄펜의 협정을 뒤에 보여줬으니까 그 순서가 아니겠니?  --이런 추측을 하실수도 있을겁니다.)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제가 그림을 들여다보듯 저의 독자도 제 시선을 따라 그림을 읽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서 입니다.  (저는 지금 제 애인한테 그림 설명해주는 기분으로 그림을 읽고 있으니까요.)  평화의 왕국 그림 배경은 그냥 '자연'입니다. 강이 흐르고, 숲이 있고,  퀘이커 교도들을 연상케하는 복장을 한 사람들과 미국 원주민들이 모여서 물물교환을 하는듯한 풍경이지요.  윌리엄펜의 협정 그림 배경 풍경에는 '인간 문명'이 포함됩니다.  (아마도 델러웨어 강일것인데) 강에 배들이 떠있고, 건물들도 보입니다.  그리고 어떤 '조약문'이 적혀있을 두루마리가 등장을 합니다. 역사적으로 '후'에 일어난것으로 추측되지요.  그렇지만 위의 두 그림중 어떤 그림을 에드워드 힉스가 먼저 그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미술사가들도 잘 알수가 없기에 circa 표시를 했을것인데, 제가 추측하기에는 위의 평화의 왕국을 1834년에 그렸다면, 윌리엄펜의 협정 그림은 그 이후가 될것 같습니다. (추측일 뿐입니다.)

 

에드워드 힉스 (1780-1849)는 펜실베니아의 유복한 영국교 (성공회)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18개월 되던해에 어머니가 사망합니다. 그 이후로는 어머니와 절친했던 친구들의 보호속에 자라났는데 그들이 퀘이커 교도였습니다.  힉스는 마차 장식 그림에 재미를 붙여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마차장식이나 표지판등을 그리는 것으로 돈벌이를 하게 됩니다. 그가 퀘이커 교단에 입문한것은 그가 20대 청년시절 부터였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에드워드 힉스는 마차장식그림이나 표지판 그림을 그리는 일에 열중하면서 퀘이켜 교단의 설교자도 하게 됩니다. 그는 신과의 내면적 대화를 강조하는 퀘이커 교단의 교리에 심취했던듯 합니다.

 

에드워드 힉스는 1820년대부터 그가 사망하기까지 대략 30여년간 그의 '평화의 왕국'을 그려냈는데, 현존하는 작품만도 60여점에 이른다고 합니다.  제가 워싱턴의 국립미술관에서 찍어온 작품도 이 60여점 중의 하나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미술사책을 들여다보면, 시기별로 평화의 왕국 그림 내용이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래 이미지는 제가 웹에서 얻어온 것인데요 (조만간 윌리엄스버그에 가서 작품을 보고 올 생각입니다) 이것은 액자 자체까지 그림작품입니다.  액자에 새겨진 문구까지 힉스가 모두 선택하여 새겼다는 뜻입니다.  (힉스가 마차 장식과 표시판 제작을 했던 경력을 여기서 확인할수 있지요. 그림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까지도 '말'로 새겼습니다.

 

The wolf shall also dwell with the lamb,

and the leopard shall lie down with the kid

and the calf and the young lion and the fatling together

and  a little child shall lead them.

 

늑대가 또한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염소새끼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할것이며

한 아이가 이들을 이끌것이라

 

(이사야 11:6)

 

 

 

 

 

이 그림은 The Peaceable Kingdom of the Branch (c.1825-1830) (95.9x81.9 cm) 으로 그의 평화의 왕국 연작중에서 초기의 작품이라 할수 있습니다.  본래 이 '평화의 왕국' 시리즈는 영국의 Richard Westall 이라는 화가의 동명의 작품이 있었는데, 구약성서를 바탕으로한 Westall 의 그림세계에 크게 감화를 받은 힉스가 자신의 스타일로 그의 신앙심을 그가 그가 가장 잘 할줄아는 '그림'의 세계에 접목을 시켰다고 할수 있지요.  그림의 배경은 실제로 버지니아에 존재하는 '천연 다리 (Natural Bridge)' 입니다.  일치하지요?  저도 이곳을 지나친적이 있는데, 이 풍경이 힉스의 그림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지요.  그른 상상력을 발휘하여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림에 옮기거나, 혹은 역사적 사실을 그렸지만, 분명히 상상에 기반한 미술작업을 했지만 그러나 그림의 배경에 그는 그가 관찰하거나 목도했던 풍경들을, 역사적 사실에서 벗어나지 않는 풍경들을 그림의 배경으로 그렸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을 시기별로 보면서 당시 역사의 전환이나 풍경의 전환을 살펴보는 일도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림을 제대로 읽으려면, 관련 역사도 좀 알아야 하고, 그러다보면 그림 들여다보다가, 책들여다보다가, 도끼자루가 썩지요...)

 

 

 

 

http://cache.virtualtourist.com/3060528-NATURAL_BRIDGE_VIRGINIA-Natural_Bridge.jpg

 

 

 

 

다음 그림 역시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사진 찍은 것으로 제목은 Noah's Arc (노아의 방주) 입니다. 1840년 작품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기독교 경전에 실린 일화입니다.  동물들 표정이 참 순하고 착해보이죠?  아이들과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발견한다면, "무슨 동물이 있나 찾아보자"하고 놀이를 해도 좋을것 같습니다. 영어교육에 관심이 있다면 영어로 동물 이름을 불러봐도 좋겠지요. 혹은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들려줘도 좋을것 같습니다.

 

 

 

 

 

 

 

 

에드워드 힉스는 그의 신앙심 (성서)을 기반으로 한 사람과 동물의 평화로운 공존의 주제

 (1) 평화의 왕국

 (2) 노아의 방주

를 시리즈로 그렸지만, 그가 그린 풍경화도 남아있습니다.  다음은 워싱턴 국립미술관에서 사진찍은 작품입니다.

 

 

 

The Cornell Farm (1848)

oil on canvas

 

 

이 작품은 Edward Hicks (1780-1849)가 68 세쯤에 그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남긴 최후의 몇점에 해당하는 그림이겠지요? 

 

(어디엔가에 기록을 한 적이 있는것 같은데, 저는 어떤 작품을 볼때, 그것이 미술작품이건 혹은 문학작품이건, 어떤 작품을 들여다볼때는 이것이 사회, 문화, 역사적으로 어떤 배경이 있는지, 이 작품을 창작할때 작가는 대략 몇살쯤이었는지 이런 상황을 들여다보는 편입니다. 이 작품의 연도를 들여다보고 그의 생몰년내를 들여다보니, 어쩐지 이 그림이 색다르게 다가오더란 말이지요.)

 

 

이 풍경화 속에는 다양한 무늬의 소와 말이 한데 어우러져있고, 돼지, 양도 있군요. (이들이 비록 가축들이긴 하지만, 여전히 평화의 왕국이나 노아의 방주 시리즈에서 보이는 동물들의 평화가 감지 되지요?),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반듯하게 줄지어 서있는 나무들이나 길, 그리고 집들이 전체적으로 조화롭고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원시림의 시대가 아닌, 정돈된 인간 문명의 시대가 그의 말기 작품에 담겨져 있습니다.

 

 

에드워드 힉스의 그림들은 '풍속화 (Folk Art)'로 분류됩니다.  무엇이 풍속화이고 무엇이 그냥 '미술'인가?  엄밀한 분류기준이 있어보이지는 않습니다. 에드워드 힉스는 정규 미술 수업을 한 사람이 아니고, 마차장식 '기술자'쯤으로 그림 그리는 일을 시작했고, 이렇게 실용적으로 시작된 그의 그림 이력이 평생 그와 함께 했습니다.  전에 정리했던 Grandma Moses (모세할머니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Grandma%20Moses ) 역시 미술수업을 받은적이 없는 풍속화가로 분류 됩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우리는 한가지 의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떻게 미술 전문 교육을 받지도 않은 사람들이 미술 전문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능가하는 일이 발생하는가? 왜 서툰 그림이 이따금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것일까? 왜 서툴고 조악해 보이는, 균형도 안맞고 엉뚱한 그림이 국립 미술관의 전시실을 차지하는 일이 발생하는것일까?  여기서 더 나아가서, 그러면 '교육'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까지도 가능해집니다.

 

 

이 질문에 누군가 전문가가 뭐라고 조언을 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혹은 제가 계속 공부를 해 나가다가 어느날 어떤 실마리에 도달하면, 다시 이 페이지로 돌아와 이야기를 마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드워드 힉스의 그림은 저를 빙긋 웃게 만듭니다.  그의 그림속의 동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바보 사자처럼, 얼간이 표범처럼, 이빨빠진 늑대처럼 빙긋 웃게 됩니다.

 

즐거운 추수감사절 되시길.

 

 

참고문헌:

 

1. 앙드레 모로아. (1991)  미국사. 신용석 옮김. 기린총서. 기린원. 5장 (pp 46-55)

2. Philadelphia Museum of Art: Handbook of the Collections (2008) Philadelphia Museum of Art

3. Frances K. Pohl  (2008)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Thames & Hudson: New York, NY.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1. 22. 08:51

 

Tasha Tudor (1915-2008)은  우리나라에 삼일운동(1919)이 일어나기 4년전인 1915년에 출생하여 지난해인 2008년까지 생존했던 미국의 삽화가이며 미술가입니다.  제가 우리나라의 삼일운동 얘기를 왜 하느냐하면,  타샤가 태어나 성장하던 시절 한국은 어떤 상황이었는지 돌아봄으로써 좀더 구체적으로 이를 기억하기 위해서이지요 (^^)  피상적인 어떤 '시간'을 좀더 구체적인 사항와 연결지어 생각하면 나중에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  삼일운동하면, 저는 33인보다는 유관순 '누나'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요. 생각해보니, 타샤 튜더는 우리 할머니와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열 여덟에 시집을 와서 열아홉에 우리 아버지를 낳으셨는데, 우리 아버지의 생년을 헤아려서 우리 할머니의 생년을 거꾸로 헤아리면 대충 우리 할머니와 타샤 튜더의 나이가 비슷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이 페이지의 사진들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타샤 튜더와 나

 

 

 

타샤 튜더는 동화의 '삽화'를 그리거나 자신이 직접 글과 그림을 그린 삽화가이면서 동화작가이기도 하고, 미술가이기도 했던 여성입니다.  제가 이분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한권의 책 때문이었습니다. 책이 하도 아름다워서 이 책을 산것이 2006년 12월의 일이군요.

 

 

The Private World of Tasha Tudor

 

 

다음은 2006년에 책을 다 읽고 간단히 메모했던 독후감입니다.

타샤 튜더 할머니의 그림 세계를 보면,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하여, 꽃 구근을 많이 사기 위하여 그림을 그려서 판다고 말할정도로 매우 현실적이다. 그의 현실성은 그의 그림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직접 자신이 관찰한 내용을 그린다. 모형을 갖다 놓고 그걸 그리는것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것들을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런 면에서 신사임당의 그림과도 많이 닮았다. 늘 맨발의 그녀는 육체노동을 마다하고 그림만 그리는 사람도 아니다. 스스로 노동하고, 자투리 시간을 그림을 그려서 그림을 팔아 살림에 보태고 스스로 먹고 사는것이다. 언제부터 화가가 전업화가이고 철학자가 전업철학자였던가. 언제부터 오로지 그림만 그리는 사람을 프로페셔널이라고 일컫고 생활속에서 살면서 그림 그리는 사람을 아마추어라고 부른것일까? 전업=프로페셔널이라는 이 잘못된 신화를 타샤 튜더 할머니는 맨발로 간단히 일축하고 마는지도 모른다. 상업화가이건 순수화가이건 사실 그건 구분의 요소라고 할수 없을지도 모른다. 보는 사람이 보고 '좋다' 이런 말이 나오면 된다는것이지. 좋다. 이 한마디가 얼마나 어려운것인가.

 

그래가지고, 당시에 약간 '헤까닥'해서 공부 하다말고 자투리 천 사다가 이런 놀이고 하고 놀았습니다. 요것이 말하자면 타샤 튜더 스타일의 앞치마인데, 손바느질로 탄생시킨 '어마어마한!' 작품이었지요... 사실 그 후에도 조각보를 만든다거나, 뜨개질로 이불을 세개나 짜내는 '괴력'을 발휘하기도 했는데, (하하하), 조각이불 세개중에서 가장 근사하게 만들어진 최종 작품은 한국의 우리 엄니한테 갖다 드렸고, 하나는 제가 현재 사용하고 있지요. 그것도 지금 돌아보면 공부 스트레스때문에 약간 '돌아가지고' 저지른 '난동'이었다고나 할까요.  아아 곱게 미쳤던 것인지도 몰라요. 어쩌면 인생 자체가 그냥 한바탕 꿈같기도 하고...

 

 

 

 

ChristmasGift.jpg

 

 

앞치마를 입은 모습입니다. 앞의 털복숭이는 우리 강아지 (아무리 늙어도 영원한 강아지)

ChristmasGift_006.jpg

 

 

 

타샤 튜더 할머니는 본업이 삽화가, 미술가이긴 하지만, 그가 우리나라에까지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도 한국에도 번역소개 된 '타샤 튜더의 정원'류의 그의 삶을 모습을 닮은 책들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환경문제가 전지구적인 화제로 대두 되고, 웰빙 바람이 불면서 미국에서 친자연적으로 살아가는 화가의 삶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그 분위기가 일본과 한국에도 흘러 들어오면서 타샤 튜더가 일약 유명인사가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에 소개한 책 외에도, 도서관에서 아래의 책들을 빌려 올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탸샤 튜더 관련 책들이 많이 있지요.

 

 

탸샤 튜더의 어린시절

 

타샤는 매사추세츠주의 보스턴 (Boston)에서 1915년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건축 설계자였고, 어머니는 미술가였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좋아했는데, 여주인공 이름인 나타샤를 딸에게 붙여주었는데 결국 '타샤'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튜더라는 성은 어머니의 성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어린 딸을 데리고 친구를 만날때, "여기 튜더의 딸이 왔노라"하고 말하길 좋아했으므로, 타샤는 자신의 이름이 타샤 튜더인줄로 알았다고 하는데요,  공식적으로는 아버지의 성을 갖고 살다가 첫 남편과 결혼한후 남편의 성을 사용했고, 그 남편과 이혼 하면서부터 '튜더'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로 결정 했다고 합니다.  (타샤 튜더는 두번 결혼하고 두번 이혼했습니다.)

 

'나로'님이 타샤 튜더에게 한국인 며느님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셔서 웹 검색을 해보니 그분이 쓰신 시어머니 타샤 튜더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곳에 나옵니다. (내용이 좋으니까 여러 블로거들이 스크랩을 한것으로 보입니다.)  그 중에 http://kr.blog.yahoo.com/jjssslee/15  페이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시어머님은 학교교육을 8학년까지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트에 관한 한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지식과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약간, 타샤 튜더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것 같습니다. 타샤 튜더의 교육 관련 자료를 찾다 보면 그가  Boston Museum School of Fine Arts (http://en.wikipedia.org/wiki/School_of_the_Museum_of_Fine_Arts,_Boston) 에서 수학했다는 내용이 있고, 그 외에도 미술가들로부터 개인 지도를 받았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타샤 튜더가 이 학교의 어떤 과정에서 몇해동안 수학했는지 알 수 없고, 이 학교에서 8학년 과정까지 공부를 했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만, 타샤 튜더가 성장하던 시기 (1915년생 미국 소녀가 성장하던 시기)에 미국 여성들중 정규 대학 교육을 받은 고학력 인구가 얼마나 될지 상상해 본다면 타샤 튜더의 8학년까지의 교육 이력이나 혹은 그의 미술학교 수학 이력이  교육적으로 열악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타샤 튜더의 어머니도 미술가였고,  어머니와 교류하던 절친한 사람들도 미술가였던 점, 그리고 그가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거나 미술가들로부터 개인지도를 받았음을 볼때, 그는 미술가가 될만한 교육을 충분히 받았다고 봐야 마땅할 것입니다. (당시 조선의 소녀였던 우리 할머니는 소학교도 못다닌 농가의 규수였지만, 아무도 우리 할머니를 학교 교육도 못받은 불학무식한 처자로 보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교육제도는 오늘날과 달랐으므로.  똑같은 이유로 타샤 튜더가 설령 8학년까지만 학교를 다녔다해도, 오늘날의 기준으로 그의 교육을 가늠하면 곤란하다는 것이지요.

 

 

타샤 튜더의 부모님은 타샤가 9세가 되던 해에 이혼을 합니다. 타샤는 엄마와 함께 뉴욕의 예술가들의 거리에서 살면서 성장하다가 후에는 커넥티컷주에 있는 엄마 친구의 집에서 지내면서 이따금 엄마를 만나게 됩니다.  아래의 지도는 미국 영토중에 우리가 '뉴잉글랜드'라고 말하는 지역의 지도입니다.  이 뉴잉글랜드 지도를 왜 소개하는가 하면 '미국사'혹은 '미국 문화사'에서 뉴잉글랜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기 때문이고,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타샤 튜더가 전생애를 이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지냈으며 뉴잉글랜드의 전통 문화를 평생 지키며 살다간 사람이기 때문 입니다.

 

뉴잉글랜드

 

 

Map of New England.

https://americancoloniesdana.wikispaces.com/Economy+-+New+England+Colonies

 

 

우리나라에서 호남, 영남 뭐 이런 식으로 지역을 구분하듯이 미국에서도 땅덩어리를 몇개의 구역으로 나눠서 이름을 붙이는데, 중서부도 있고, 서부도 있고, 여러가지 갈래중에 '뉴잉글랜드'라는 갈래가 있습니다. 

 

 * Connecticut 커넥티컷

 * Rhode Island 로드 아일랜드

 * Massachusetts 매사추세츠

 * New Hampshire 뉴 햄프셔

 * Vermont 버몬드

 * Maine 메인

 

이상의 여섯개 주가 뉴잉글랜드 문화권에 속합니다.  며칠후에 미국에 추수감사절 (Thanks Giving Holidays)이 다가오는데, 이 추수감사절은 이 뉴잉글랜드에 미국 건국초기에 정착했던 사람들이 인디언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식사접대를 한것에서 유래합니다.  뉴잉글랜드는 말하자면 신생국가 '미국'이 태어나 태를 묻은 곳과  같은 곳입니다. 뉴잉글랜드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영국'을 기리는, 영국의 문화가 많이 스며든 곳이기도 하지요. 

 

뉴잉글랜드에서 결혼 생활 그리고 동화책 작업

 

 

 

뉴잉글랜드의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난 타샤는 부모 이혼후에 뉴욕에서 지내다가 커넥티컷주의 농가에서 아름다운 농가 생활에 반하게 됩니다.  타샤는 아름다운 전원생활을 일찌감치 꿈꾸게 되지요. 1938년 타샤는 Thomas Leighton McCready, Jr. 와 결혼하여 코넥티컷의 '어머니의 농가'에서 살림을 시작합니다 (어머니가 과테말라로 미술 여행을 떠나서 집이 비어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남편쪽 조카를 위해서 Pumpkin Moonshine 이라는 그림 동화를 그려서 출판하게 되는데, 이 작품이 좋은 반응을 얻어 그후로 타샤 튜더는 직접 자신의 그림동화책을 만들어내거나 삽화를 그리는 일로 평생을 보낼수 있게 됩니다.  Pumpkin Moonshine 은, 미국에서 호박속을 파낸후 호박등을 만드는 전통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어린 소녀가 호박밭에 가서 아주 큰 호박을 하나 발견하는데 그 호박이 제 멋대로 띠굴띠굴 굴러다니면서 사고를 치다가 결국 잡혀서 호박등이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호박등은 매년 10월 마지막날인 할로윈데이 (만성절 이브)에 많이 만들지요.  이 작품이 그이의 출세작이었다 할 만 합니다.

 

 

 

 

 

1945년에는 그가 삽화를 그린  Mother Goose (전통 동요 모음집)로 Caldecott 상 (http://en.wikipedia.org/wiki/Caldecott_Honor ) 을 받기도 하고, 그의 동화와 삽화작업은 그에게 각종 상과 훈장을 불러옵니다.

 

 

 

 

 

 

1945년에는 그가 삽화를 그린  Mother Goose (전통 동요 모음집)로 Caldecott 상 (http://en.wikipedia.org/wiki/Caldecott_Honor ) 을 받기도 하고, 그의 동화와 삽화작업은 그에게 각종 상과 훈장을 불러옵니다.

 

 

 

 

 

 

 

 

 

 

 

이들 부부는 뉴햄프셔주로 이사하여 자신들의 집과 농장을 갖게 되는데, 이곳에서 이들의 네명의 아이들이 태어나 자랍니다. 이들 부부는 1961년 이혼합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성을 비롯 자녀들의 성을 모두 '튜더'로 정하게 됩니다.  1971년 타샤는 뉴햄프셔주의 집을 팔고 버몬트주로 이사하는데, 이곳에는 그의 아들 Seth가 이미 와서 정착하여 있었습니다. 아들 Seth는 이웃으로 이사 온 어머니를 위해 직접 '손'으로 농가주택을 지어냅니다. 그것이 타샤 튜더가 2008년 작고하기까지 살게되는, 오늘날 남아 있는 집입니다.

 

 

1971년은 타샤 튜더가 '버몬트'주로 이사한 해 이기도 하지만, 그의 대표작이라 할수 있는 Corgiville Fair 가 출판되어 널리 알려진 해 이기도 합니다. Corgi는 타샤 튜더가 아끼는 개 종류이지요. 영국 여왕이 사랑하는 종류의 개라서 '여왕의 개'라고 알려져 데요.  이 개를 의인화하여 코기마을을 하나 탄생시키고 코기종의 개를 비롯하여 다양한 동물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는 배경입니다.  이야기도 삽화도 모두 타샤의 창작물인데, 배경을 보면 식민지시절 (미국 초기 시절)의 뉴잉글랜드 마을의 풍경이 세밀하게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주인공들이 개나 고양이 혹은 작은 들짐승이지만 배경에는 미국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지요.  저는 지난 여름에 이 뉴잉글랜드 지역을 여행 한 적이 있는데, 타샤 튜더 그림책속의 마을 모습과, 내가 눈으로 확인했떤 전통적인 마을의 모습이 여전히 일치했지요.  이 책이 크게 성공했기 때문에 이후로 Cogville 시리즈가 출판되기에 이르릅니다.  (타샤는 그림을 팔아 꽃뿌리를 샀겠지요.)

 

 

 

 

 

 

 

 

고집쟁이 타샤

 

버몬트에서 정원과 농장을 가꾸며, 미국 식민시절의 삶의 스타일 (복장이나 삶의 방식)을 고집하고 살면서 그림을 그리거나 동화책을 만들어 돈벌이도 하던 타샤 튜더.  그는 그림과 동화 작가라는 전문 영역과,  정원가꾸기와 농장 돌보기라는 또다른 영역을 함께 일궈냈다고 할 만 합니다.  한가지도 이루기 힘든데 두가지를 한 것이지요.  그의 결혼 생활을 보면 1938년에 첫남편과 결혼하여 1961년에 이혼했으니 첫 결혼은 23년간 지속되었고, 후에 또 한번 누군가와 결혼 했는데 오래 가지 못하고 다시 이혼했다고 합니다. 이혼 사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짐작하기에 타샤 튜더는 자기 세계가 확고한, 고집스러운 사람이었을 겁니다.  고집스럽게 세상 문명을 등지고 역사의 어느 시기, 그가 '이상화 했던' 어떤 시기의 삶을 고집하고, 그 시기의 라이프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우리나라의 안동이나, 이와 유사한 '역사적인' 마을에 가면 아직도 조선시대의 양반 복장을 고집하고, 당시의 풍습대로 제사지내고 당시의 풍습을 고집하는 분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분들에게는 자신이 지켜야 할 어떤 이상향이 있을 것입니다. 타샤 튜더 역시 이런 '자신만의 이상향'을 추구하고 고집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옳다 그르다를 논할 이유는 없지만, 아무튼 평범하지는 않은 것이지요.  그렇게 살아간다는 일이 간단하지 않지요. 

 

타샤 튜더 관련 책들 (사진으로 도배가 된 환상적인 책들)을 보면 이분의 삶의 풍경이 천국처럼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가꿔내기 위해서 타샤가 얼마나 열심히, 부지런히 일 했는지 우리는 잘 가늠할수 없습니다. 삶의 한 장면은 아름다울수 있지만, 그 장면 뒤에 숨겨진 노고는 사진에 잘 드러나지 않지요.

 

 

타샤 튜더의 아름다운 삶이 가득한 사진집 속의 어느 미국 할머니 (타샤)를 보고 있으면 그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조선땅에서 태어나 조선인, 한국인으로 살다가 타샤보다 몇 해 일찌 저승으로 떠나신 우리 할머니의 삶이 포개집니다.

 

 

 

 

 

특히나 아래에 보이는 풍경속의 타샤는 우리 할머니와 참 닮았습니다.  집도 풍경도, 사람 모습도 우리 할머니의 풍경과는 다르지만, 쌓인 눈과, 겨울 나무와, 좁다란 길을 걷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우리 할머니 같습니다.  튜더의 정원, 튜더의 아름다운 실내장식보다는 저것을 가꾸기 위해 저 노인이 기울였을 노력, 한낮의 현기증, 한겨울의 추위, 가을의 소슬바람, 이런 것들이 이제 제 눈에 들어옵니다.

 

"너 타샤 튜더처럼 살고 싶은가?" 누군가 묻는다면 저는 아마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 것입니다. 일단 저는 매우 게으르고, 농사짓는것 힘들다는것 잘 알고...  게으른 주제에 이런 아름다운 삶을 탐하면 안되겠지요. 그대신 평생 내 힘으로 일하고 내 밥벌이 내가 하고, 가능하면 남 도와주면서 사는 인생, 불평안하고, 남 탓 안하는 인생. 그런 인생은 희망하는 편입니다.  그렇게 살다 죽으며 좋을것 같습니다만 ... 아 그것도 요원하군요 저야말로 잘되면 내탓 안되면 모두 남의탓으로 돌려버리고 이불 뒤집어쓰고 신세한탄하기 일쑤이므로. ㅎㅎㅎ.

 

 

 

 

 

 

 

 

 

 

 

미국 미술사 속의 세명의 할머니

 

제가 알거나 기억하는 범위 안에서, 미국 미술계에서 '눈에 띄는' 할머니 셋을 고르라면  저는

 

(1) 모세 할머니 Grandma Moses (1860-1961)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Grandma%20Moses

(2)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fe (1887-1986)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Georgia%20O%27Keeffe

(3) 타샤 튜더 Tasha Tudor (1915-2008)

 

이렇게 세명을 꼽고 싶습니다.  (조지아 오키프 페이지도 차근차근 만들겠습니다.) 뭐, 적어도 '할머니' 소리를 들으려면 90가까이 살면서 활동을 해야겠지요.  =)

 

이 세사람중에 (1) 모세 할머니는 가난한 농가의 딸로 태어나 평생 평범한 농가의 안주인으로 남편과 해로하다가, 남편이 사망한 후에 눈이 침침해서 (!) 뭐 심심풀이로 그림 그렸다가 대박! 터진 천재였고요. (2) 조지아 오키프는 엘리트 미술 교육 과정을 거쳐 미술계의 별이 된 화가였고요, (3) 타샤 튜더는 삽화와 동화 분야에서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다가, 막판에 (?) 그의 라이프 스타일로 더욱 유명해진 분입니다. 각자 삶의 이력이나 그림의 분야가 다르지만,  '장수한 미국 미술가'라는 공통점도 있고, 다들 개성있고 매력적인 여성이었다는 공통점도 있지요.  =) 참 매력적인 할머니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나는 우리 할머니가 가장 힘있고 매력있는 할머니였다고 생각해요. 내 할머니 이니까~  나를 키워준 할머니이니까요. (무조건인거죠)

 

 

 

 

 

 

 

정리 2009년 11월 21일 RedFox

 

 

 

http://www.tashatudorandfamily.com/index.html  : 2008년 작고한 타샤 튜더 할머니의 가족이 운영하는 홈 페이지.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1. 22. 04:05

http://americanart.textcube.com/149  이전 페이지에서 디트로이트 벽화를 그린 디에고 리베라에 대하여 간단히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이 페이지에서는 디트로이트 벽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는 이 벽화가 있는 곳은 'Rivera Hall'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벽화가 그려지기 전 원래 이곳은 내부 정원 (가든 코트 Garden Court)이었습니다.  미국의 큼직한 미술관에 가면 대개 크고작은 이런 형식의 '정원'이 있습니다.  본래 정원이었던 곳인데, 미술관장인 발렌티노가 '벽화'를 설치한다고 했을때 건물 설계자는 자신의 전체적인 건물 구상을 망쳐놓는다고 반대를 하기도 했답니다.  그렇지만 발렌티노의 벽화에 대한 의욕은 완고했고, 그는 어떠한 반대나 비난에도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지요.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벽화의 일부, 나무의 뿌리 부분 중심에 태아가 웅크리고 있는듯한 모습이 보입니다.  이것이 4면 벽화의 동쪽면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4면 벽화중에서 동쪽과 서쪽에는 다른 홀로 이어지는 '출입구'가 있으므로 온전한 큰 벽이 아닙니다.  남쪽과 서쪽벽은 온전한 벽입니다.  애초에 발렌티노가 리베라에게 주문한 것은 남쪽, 북쪽의 전면이었습니다.  그런데 리베라가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동쪽, 서쪽 벽 까지도 그림으로 채우고 싶어했고,  후원자였던 포드 (헨리 포드의 아들)도 이를 적극 지지하면서 4면 전체의 벽화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사진은 한번 클릭하시면 새창이 열리고, 그 상태에서 확장 표시를 클릭하시면 원래의 큰 사진이 열립니다.

 

 

벽화속에 내가 있다!

 

출입구로 들어가면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입니다. 마주 보이는 벽이 동벽. 오른쪽이 남벽, 왼쪽은 북벽.  천장부분에는 천창이 있어서 자연조명 역할을 합니다.  천장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리베라는 포드 자동차 공장을 그의 벽화의 주요 소재로 사용했습니다.  당시 (1932년) 디트로이트 지역의 주요 산업은 자동차, 의약, 화학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포드가에서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그의 벽화 작업에도 적극적으로 재정적 지원을 해 줬고, 리베라가 그림의 소재가 될만한 산업의 실재 현장을 확인해보고 싶어 했을때 이를 지원해준이도 포드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 작업이 진행되는 11개월간, 이 작업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의 여론이 만만치 않았는데,  종교적 신성모독과 관련된 비난도 있었고, 사회주의 사상이 엿보이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었고, 또한  디트로이트 미술관의 벽화를 왜 '포드' 공장으로 채우는가에 대한 불평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에대한 미술관장 발렌티노의 변론이 적절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도 관심도 없었고, 도와주지도 않았지 않은가. 오직 포드만 이 작업에 관심을 갖고 도와준것이 아닌가? 공장의 문을 열어 보여준것도 포드뿐이지 않았는가?  포드공장이 '주인공'으로 그려진 것에 대한 비난은 이런 논리로 잠재울수 있었다고 하는데,  단순히 짐작컨대 (1) 포드사의 재력이 다른 불만을 무마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대단했을 것 같고 (2) 포드 자동차관련 회사에 재직하는 디트로이트 시의 시민의 인구가 압도적이라서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랬을 것 같습니다.

 

리베라는 밑그림 작업을 한달가까이 했는데, 전문 사진사와 다니며 포드 자동차를 비롯한 디트로이트 지역의 다른 공장들의 작업 광경을 세밀하게 사진에 담았다고 합니다.  사진도 세밀하게 찍고, 그의 예술가적인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공장의 분위기도 관찰하고, 거기에 그의 맑시즘까지 가세하여 노동자들이 힘차게 일하는 광경을 생생하게 전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자동차 생산의 전 공정이 남쪽, 북쪽 벽화에 상세하게 실려있는데, 이 공정은 현장 실무자, 그리고 전문가들의 안목으로 봐도 정확하고, 사실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리베라는 대충 상상해서 아무렇게나 그린것이 아니라, 사실에 입각해서, 한치의 틈도 보이지 않고 성실하게 현장을 벽에 옮겨 담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리베라가 이 벽화 제작을 할 당시는 미국은 '대 공황'의 초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공황상태에서도 포드자동차 관련 공장에서 일하는 연인원이 십만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리베라는 그의 그림속에 경제대공황으로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보다는,  공장에서 활기차게 일하는 노동자들을 담는 것에 주력을 했지요. 그리고 단지 산업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 농경에서 산업화로 이어지고 과학사회로 나아가는 인류의 역사를 모두 이 벽화에 담아내려 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에 천지창조의 대 서사시를 담아냈다면, 리베라는 디트로이트 벽화에 인류 문명의 발전사를 담아 내려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벽화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을때 디트로이트의 시민들은 벽화속의 주인공들이 자기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공장노동자들이 주인공인, 민중인 주인공인 프레스코화가 탄생한 것이지요.

 

 

 

동쪽벽화

 

동쪽 벽화의 상단에는 오른쪽에 과일을 안고 있는 여인, 왼쪽에 곡물을 감고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여인들의 아랫쪽에는 미시간주에서 생산과는 과일과 채소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호박, 옥수수, 포도, 토마토, 배추, 가지, 버섯, 감자등이 소담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두 여인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왼쪽의 여인은 유럽계의 금발여인이고, 왼쪽은 남미계의 검은 머리 여인입니다. 몸집은 둥글둥글하니, 리베라가 즐겨그리는 풍만한 형태인데 풍요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중앙의 '태아' 가 그려진 그림을 살펴보면 태아를 중심으로 나무 뿌리들이 펼쳐져 있는데 그 뿌리들은 여러겹의 지층들 위에 존재합니다. 화석이 보이기도 하고요. 오래된 지구의 세월을 느끼게 해줍니다. 인간의 생명이 이렇게 지구와 자연속에 잉태되고 보호받고 성장한다는 자연친화적인 리베라의 생명관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태아 혹은 영아의 그림은 디에고와 그의 아내 프리다 칼로의 개인사 때문에 더욱 유명해집니다.  이들 부부가 디트로이트에 11개월간 머물며 벽화 제작을 하던 당시,  멕시코 출신의 칼로는 원래 건강도 안좋은 상태에서 추운 지방에 있자니 아주 괴로웠을겁니다.  이곳에서 칼로는 유산을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불구의 몸이었는데 어렵게 아이를 갖게 되었다가 유산이 되니 그 심정이 무척 괴로웠을겁니다.  디에고 리베라는 그들이 잃어버린 아이를 이 동벽에 그려서 영원히 기억하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디트로이트에서 잃어버린 아이이니까, 디트로이트에 영원히 남기고 싶었을것 같습니다.

 

 

 

 

 

 

 

 

 

 

서쪽벽화

 

돌아서서, 좀전에 지나쳐온 입구쪽 벽을 보면 서쪽벽이 보입니다.  서쪽을 향해서 섰을때 왼쪽이 남쪽, 오른쪽이 북쪽 벽입니다.

 

서쪽 벽화에는 여덟장의 그림에 항공, 항만, 에너지 관련 산업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리베라는 이 산업들의 '평화적'인 면과 '파괴적'인 면을 대비시키려 했습니다.

 

 

 

 

 

 

 

 

북쪽벽화

 

서쪽을 향한 상태에서 왼편 벽이 북쪽입니다. 북쪽 벽화 입니다. 남쪽벽화와 북쪽 벽화 상단에는 각각 두명의 거대한 인물과 거대한 손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랫쪽 큰 벽화에는 공장의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이 손들은 각기 '광석'을 쥐고 있으며 이 광물들이 나오는 '지층'에 대한 묘사가 바로 아래의 판에 그려져 있습니다.

 

 

 

이 북쪽벽화 오른편 구석쪽에 기묘한 그림이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 기독교의 예수 탄생 장면 같은데, 이 꼬마가 의학 연구실에서 주사를 맞고 있는듯한 광경입니다. 바로 아래에는 체내의 인간 태아의 생장 환경이 그려져 있습니다. 과학 혹은 생명과학이 인간의 생명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그림 때문에 당시 기독교계의 반발이 심했다고 전해집니다. 신성모독이라는 것이겠지요.  어떤 사안에 대하여 '신성모독'을 외치는 집단은 어디에나, 어떤 시기에나 있어왔습니다.  이들의 반발에 굴하지 않은 디트로이트 미술관측에 경의를 표합니다.

 

 

 

북쪽벽화의 왼쪽구석은 독가스 폭탄을 만들어내는 공장의 광경입니다.  과학기술이 생명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발전을 하기도 하지만 동일한 지식이 생명 살상의 방향으로 나아갈수도 있음을 고발하거나 경계하는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북쪽 벽화 중앙의 가장 큰 그림은 1932년 포드사의 자동차 공장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제작 공정은 그림의 왼편에서 시작하여 차례차례 다음단계에 대한 묘사고 진행되고, 맨 오른쪽에는 노동자들이 점심 식사를 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저야 '기계'쪽에 문외한이고 '공장'에서 일을 해본 경험이 없어서 모르지만, 자동차 공장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 그림 앞에서 리베라의 정확성에 감탄을 한다고 전해집니다.  그만큼 그는 공장의 전 공정을 세밀히 관찰했고,  사진 촬영도 세심하게 했고, 사실에 입각하여 그림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자동차 제작 관련 전문가가 이 그림을 본다면 저와는 다른 시각으로 관찰할것이고, 아마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줄지도 모르겠습니다.)

 

북쪽벽화에는 리베라 자신이 '까메오'로 출연을 하기도 했고요.  얼굴이 드러난 사람들중에 그의 조수라던가 실제 공장 노동자등 당시 리베라의 작업을 돕던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남쪽벽화

 

 

북쪽과 마찬가지로, 남쪽 벽화의 상단에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연상케하는 두명의 거대한 사람이 그려져 있고, 이들의 중앙에 역시 거대한 손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먹을 꽉 쥐고 있거나, 무엇을 잡을듯 벌리과 있거나 혹은 광물을 쥐고 있는 손들입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Space Odyssey 라는 1968년 영화 (http://www.imdb.com/title/tt0062622/)를 보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제목의 음악과 함께 그 왜 침팬지 같이 생긴 원시 인류가 뼈다귀를 갖고 놀다가 문득, '문득' 이를 '도구'로 사용하는, 어마어마한 인류의 도약 장면이 나오쟎아요.  아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북소리처럼 가슴이 쿵쿵 뛰는데요...이 손들을 보니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그 장면이 떠오르더라구요.  (아 생각난김에 그 영화나 빌려다 볼까....또다시 산만해지는....)  물론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다'라거나 '도구'사용이 인류 문명의 시초라고 보는 시각은 이미 있어왔지만,  리베라의 벽화에서 그 '손'에 대한 해석은 시각적인 '절정'에 달했다고 봅니다.  이만큼 사람의 '손'을 위대하게 표현한 작가가 또 있었을까요? (과문한 탓인지 저로서는 다른 작품이나 작가를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남쪽 벽화 상단 왼쪽 구석에는 '제약'관련 그림이 있습니다.  실제로 디트로이트 시에 있는 어느 제약회사의 공정이 묘사된 것이라고 합니다.  오른쪽 구석에는 화학제품 공장이 그려져있습니다. 독성이 강한 화학물질 때문인지 보호복을 입고 얼굴을 모두 가리고 일은 하는 노동자도 보입니다.

 

 

 

1933년 3월 21일 남쪽 벽화가 완성되어 공개되었을때, 이 그림에 묘사된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은 벽화에 그려진 자신들을 발견하고 놀라워 했습니다. 누구도 이 미술관의 벽화속에서 공장노동자들이 '주인공'이 될거라고는 상상을 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공장노동자로 살아가는 지역 주민들은 환호했고,  종교나 사상적으로 이 벽화들을 문제시 한 집단은 심한 반박에 나섰습니다. 1933년 3월 26일에는 일만 (10,000)명의 시민들이 이 벽화를 보기위해 몰려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이 벽화가 제작되고 있던 당시의 디트로이트의 분위기는 암담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1933년 1월부터 3월 사이에 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자동차 산업이 정지 상태였고, 2월에는 디트로이트의 금융계가 몰락했습니다. 미 전역이 대공황으로 접어드는 것과 맞물린 현상이었습니다.  이런 암담함 속에서 노동자를 중심에 세운 이 벽화는 당시의 노동자들에게는 작은 위안 혹은 희망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남쪽 벽화의 공장 노동자들 뒷편에 구경하는 무리들이 보입니다. 노동자복이 아닌 신사복을 입은 남자들,  정장 차림을 한 여성들이 보입니다.  그중에 두 여성은 가슴에 큼지막한 십자가 목걸이가 매달려있고, 손으로 네모난 물체를 안고 있지요.  손지갑이거나 성경책이거나...  이 귀부인들에 대한 리베라의 시각은 썩 유쾌해보이지 않습니다. 이 공장의 분위기와 안 어울리지요.  저는 이들을 '노동과 동떨어진 존재들'로 파악하는 편입니다. 

 

 

 

 

 

1933년 3월, 디트로이트 벽화를 완성한 리베라는 뉴욕의 록펠러 센터 벽화를 위해 디트로이트시를 떠나는데, 리베라가 록펠러 센터에 그린 벽화는 세상 빛을 보지도 못한채 완성직후 폐기되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리베라가 자신의 사상적 색채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완강히 버텼고 (벽화에 그린 레닌을 절대 지울수 없다고 우겼고), 록펠러가문으로서는 뉴욕 한복판에 소련 지도자의 초상이 그려진 벽화를 모셔둘수는 없는 입장이었으니까요.  (그 십수년후에 몰아친 매카시즘이라는 빨갱이잡기 놀이의 폭풍을 회상해본다면 록펠러가는 현명했던 것이지요. 하하하.)  Bill Bryson 이 그의 성장기 이야기를 담은 책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bolt Kid (http://americanart.textcube.com/166 )에도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당시, 뭐든 금기시되는것, 안좋은것, 이상한것은 '빨갱이'라는 말로 대치될 정도로, 엉뚱하게 사람 때려 잡을때 쓰던 말이 '빨갱이(communist)'라는 내용이 아주 코믹하게 나옵니다.  이를 미연에 방지한 록펠러가문이 역시 앞을 내다보는 눈이 있었다고 봐야지요.  (그래서 결국 우리는 어마어마한 리베라의 벽화를 볼 기회를 영원히 잃고 말았지만요.)   그런데 이 벽화보다 록펠러 센터의 벽화가 더 규모가 큰것이었다고 하는데, 얼마나 굉장한 그림이 그려졌을지,  무엇을 형상화 했을지, 그 묘사는 얼마나 사실적이고 치밀했을지 도대체 상상이 안가는데요.  아쉽군요. 파괴하기전에 상세한 화집이라도 ....남겨두시지... (웹이나 책을 뒤지면 부분적인 밑그림들이 나오긴 합니다.)

 

그리하여. 이 디트로이트 리베라 벽화가 미국에서 우리가 볼수 있는 유일한 리베라의 벽화라고 합니다.  디트로이트를 지나치면서 한나절 시간이 되신다면 이곳을 구경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RedFox  November 2009  (2009년 10월 31일에 방문하고, 11월 21일에 글 정리를 마치다.)

 

 

 

참고문헌:

 

 

 1. Diego Rivera: The Detroit Industry Murals, The Detroit Institute of Arts, 2006. Scala Publishers Ltd.

 2.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Frances K. Pohl, Thames & Hudson

 

 

관련 페이지:

 

 1. http://americanart.textcube.com/94  Detroit Institute of Art 방문기

 2. http://americanart.textcube.com/149 Diego Rivera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1. 16. 11:09

 

 

http://www.nps.gov/hafe/index.htm

 

Harpers Ferry National Historical Park 하퍼스 페리 국립 역사 공원이 웨스트 버지니아 (West Virginia)에 있는데 워싱턴에서는 대략 60마일 거리. 한나절 소풍길로 적당한 거리입니다.  이곳은 일주일 가까이 비가 내렸는데, 어제 토요일부터 조금씩 개이기 시작하더니 일요일인 오전 화창한 날씨가 열렸습니다.  사실은 버지니아 남부 해안도시인 Norfolk 에 있는 Chrystler Museum of Art (크라이슬러 미술관)에 가 볼 계획이었는데, 폭우 때문에 그 도시가 물에 잠겼다고 합니다. 미술관은 다음주에나 다시 연다고 하고.  그래서 시무룩하게 있다가 가까운 하퍼스 페리에 가볍게 다녀왔습니다.

 

하퍼스 페리는 남북전쟁 격전지로 알려져있고, 당시의 건물들이 아직도 남아있거나 재건되어 역사 유적지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포토맥강과 셰난도강 (존 덴버가 불렀던 Almost heaven, West Virginia, Blue Ridge mountains, Shanandoah River ...Country Road.. 바로 그 곳입니다)이 만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Bill Bryson이 A Walk in the Woods 라는 책을 썼는데, 그가 남북종단을 하려 했던 그 애팔라치아 산맥 트레일도 이곳에 이어져 있습니다. 이곳이 그 트레일의 가운데쯤 되는 곳입니다.  오하이오주에서 워싱턴 디씨까지 이어지는 운하길 역시 이곳에 이어져 있습니다. 이래저래 산도 아름답고 강도 아름답고, 아름다운 마을도 있어서 소풍장소로 좋은 곳인데,  뭐 제가 '풍수지리'를 잘 모르지만 들은 풍월로 읊어보자면, 이렇게 강물이 만나고 산길이 만나는 중심에 있는 마을에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라 할 만 합니다.

 

이곳에서 '사건'이 일어납니다.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 발발에 영향을 준 문학작품으로 Harriet Beecher Stowe 의 엉클 톰스 캐빈 (1852)이 유명합니다. 그런데 남북전쟁 발발에 영향을 준 또다른 인물 John Brown 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제가 존 브라운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알게 된 것도 최근의 일로, '미국 미술'을 혼자 공부한것이 그 계기였습니다.

 

Horace Pippin (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Horace%20Pippin) 이라는 미국 흑인 화가에 대하여 저는 몇페이지를 더 작성할 생각인데, 그가 그린 연작중에 John Brown 이 등장합니다. 그런가하면 앞으로 장차 소개하게될 Winslow Homer 라는 미국이 자랑하는 근대 화가의 그림에도 존 브라운이 등장합니다.  한편, 지난 8월에 저는 매사추세츠주의 콩코드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작은 아씨들'을 쓴 올코트의 집을 방문했을때에도 올코트 가문을 위시한 미국의 초절주의 (Transcendentalism) 철학자들 (Emerson, Thoreau)이 존 브라운을 지지했다는 기록을 읽은적이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존 브라운'이 등장하는데 정작 저는 그의 이름도 낯설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웹으로 '존 브라운'관련 정보를 찾다보니 내가 사는 곳 60마일 거리에 존 브라운 관련 유적지가 있다는 '정보'가 나와주는 겁니다. 하퍼스 페리가 바로 그곳입니다. 이곳은 존 브라운이라는 한 '백인'남자가 흑인 노예 해방을 외치며 폭동을 일으키고 저항하다가 미 해병대에 생포되어 처형된 곳입니다. 위키피디아의 페이지를 이곳에 링크하겠습니다.

 ( http://en.wikipedia.org/wiki/John_Brown_(abolitionist) )

 

존 브라운에 대한 평가는 좀 엇갈리는데, 광인이었다는 악평도 있고, 흑인 노예 해방을 위해 앞장선 백인 선구자라는 시각도 있고 그렇습니다.

 

 

http://www.nps.gov/hafe/index.htm

 

 

 

 

 

 

 

 

 

사실, 하퍼스 페리 마을에 도착하니 이 일대의 건물이나 기념물들이 거의가 존 브라운 사건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이 마을에는 존 브라운 뮤지엄이 있었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정면에 John Stuart Curry 가 그렸다는 그림의 사진이 걸려있습니다. 제목은 The Tragic Prelude (비극적 서문) 으로 캔자스에 실제로 있는 벽화라고 합니다.  John Stuart Curry 는 캔자스의 지역화가로, Benton, Wood 와 더불어 미국 사실주의 화풍에서 '지역주의 (Regionalism)'의 기수입니다. 

 

이제 제가 목도하거나 알고 있는 존 브라운 관련 그림을 그린 걸출한 화가들만해도 벌써 Homer, Pippin, Curry 이렇게 세명이나 되지요. 조금 더 들여다보면 더 나와줄것 같습니다.  (나중에 존 브라운 관련 그림들을 위한 페이지를 별도로 적어보겠습니다.)

 

 

 

 

 

 

 

 

 

존 브라운은 1859년 처형되고, 흑인 노예 해방을 위한 남북전쟁은 그로부터 2년후인 1861년에 발발합니다.  미국사에서 남북전쟁 관련 장을 읽어보면 남북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여러가지 정황이 복잡하게 나열됩니다. 그 여러가지 요소중에 존 브라운의 '광적인' 노예해방 운동도 어떤 기폭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 공부를 하면서, 무엇 때문에 무엇이 일어났다고 '단순하게' 정리하고 지나가지만, 그 이면에는 생략되거나 잊혀지거나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일화들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을텐데요.  존 브라운의 역사도 하퍼스 페리를 감싸고 양쪽에서 흐르는 셰난도강, 포토맥강과 함께 유유히 흐르겠지요.  하나의 강이 흐르기 위해 수많은 지류들이 모이듯, 커다란 역사의 물줄기를 만들기 위해 많은 지류들이 한방향으로 흐르는데요, 그렇게 해서 프랑스 대혁명이,  남북전쟁이 혹은 또 어떤 혁명이 탄생하고 흘러가겠지요.

 

 

 

 

 

 

 

이다리를 중앙 경계로 다리 왼쪽에서 셰난도강이 흘러내려와 다리 오른쪽의 포토맥강에 합류 합니다.


 

 

 

 

 

산골짜기라서 오후 다섯시가 되자 벌써 해가 기울고 황혼이 짙은데, 하늘에 비행기들이 바둑판을 그려놓은 것이 보였습니다.

 

 

 

아, 잊지 않게 숙제를 적어 놓겠습니다: 

(1) John Brown 관련 미국 화가들의 그림 모아서 엮기.

(2) 존 브라운에 대한 소개 페이지 따로 정리

 

실상은,  내가 하늘 아래, 강가를 걸어본지가 몇달만이지...일주일 내내 비가 온 덕분에 강이 무서운 소리를 내며 흘렀지... 난 아직 아무것과도 화해가 안된것같아. 나 자신과도. 그 무엇과도. 아무것도.  그저 세월만 흘러갔을 뿐이지...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