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erican Art History Sketch2010. 2. 10. 03:47

Mississippi Boatman 1850, oil on canvas

George Caleb Bingham (조지 케일럽 빙엄) 1811-1879

 

 

 

 

조지 케일럽 빙엄(1811-1879)는 버지니아주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지만 아버지의 투자 실패로 삶의 근거지를 중서부 미조리주로 옮기는데 성년이 되어 유럽을 여행한 것을 제외하고는 미주리주에서 평생을 지내게 됩니다.  빙엄은 뒤셀도르프에서 미술 수업을 한적도 있지만, 이는 그가 성년이 된 후에 후원을 입고 뒤늦게 수업을 들은 셈이고, 미술사가들은 빙엄을 '독학 (self-taught)'하여 입신한 화가로 평가하는 편입니다.  그러니까, 어릴때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스스로 그림을 익혔는데, 그의 그림에 대한 평가가 좋아지고 그의 입지가 단단해질 무렵에 그에게 그림 수업을 받을 기회가 주어진 것이지요.

 

빙엄은 목공예 기술을 익힌적도 있는데 그러면서 회화에 눈을 떴으리라 짐작하게 됩니다. 그보다 한세대 먼저 펜실베니아에서 활동했던 '평화의 왕국'의 화가 Edward HIcks 가 마차 장식이나 표시판 기술자로 일하면서 스스로의 화풍을 익히면서 퀘이커 교도로서 설교를 하러 다니기도 했었는데요, 빙엄 역시 목공예를 하면서 미술 작업을 하는 틈틈이 법률가가 될것인지  목사가 될것인지 고민을 하기도 했고요, 설교를 하러 돌아다니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변호사도 목사도 되지 않았고 초상화 주문을 받아 그려주는 것으로 생계를 해결하게 되었는데요.  정작 그의 예술성이 인정을 받게 된 분야는 그가 미조리주, 미시시피강변의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풍속화에서였습니다.

 

 

빙엄이 즐겨 그린 '미시시피강변의 사람들' 소재가 위의 그림에서도 나타나는데요.  미시시피강은 북미에서 가장 긴 강이지요. 미국의 중앙 북단에서 흘러내려 뉴올리안즈까지 이어지는 대동맥과도 같은 강입니다. 저는 뉴올리언즈에서 본 미시시피강 하구의 증기선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허클베리핀의 모험을 쓴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회고록 Life on the Mississippi (1883년 출판)을 대학 시절에 읽은 기억이 납니다. 마크 트웨인이 어린시절 증기선을 타고 미시시피강을 오르내리던 기억을 담은 이야기들인데요.  그의 '허클베리핀의 모험'에서도 뗏목을 타고 흑인노예 짐과 함께 강을 따라 이동하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저에게 미시시피강은 '마크 트웨인'의 책속에 흐르는 강이지요. 그래서 빙엄의 미시시피강 연안의 풍경을 볼때도, 허클베리핀의 모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아이들, 악당들, 우매한 군중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림속의 미시시피 보트맨은 아마도 그가 배로 운반한 물건들을 강변에 부려놓고 짐을 지키고 앉아있는 것 같죠. 그의 등뒤로 강가에 대어놓은 그의 납작한 배가 보입니다.  풀기라고는 없는 그의 옷처럼, 이제 젊음이 지나가버린 이 늙수그레한 사나이는 곰방대를 빨면서 관객을 응시하고 있는데요. 이 사람이 앉아서 쳐다보는 방향은 강의 상류일까요, 하류 일까요? 

 

저는 이 그림속의 시각이 오후 네시쯤의 황혼이 다가오는 시각이라고 봅니다. 분위기상.  그런데 햇살이 이 사람의 오른쪽에서 비치지요. 해가 서쪽에 있고, 오른쪽이라면, 이 사람은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지요. 미시시피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니까, 이 사람은 상류에서 내려와서 짐을 내리고 남쪽을 향해 한가롭게 앉아있다고 봐야겠지요.   내일쯤, 이 사람은 그의 자그마한 배에 새로운 짐을 싣고 북쪽으로 올가가겠지요. 이 사람의 그림에서 저는 왜 황혼을 읽는 것일까요?  빛의 분위기가 어쩐지 황혼을 닮았지요. 이울어져가는 태양의 기운 잃은 노란색, 그 노란 색조가 화면 전체를 압도하지요.  곰방대를 물고 있는 사나이의 표정도 기우는 해처럼 무심하죠. '노스탈지아 nostalgia'의 색은 무슨 색일까요?  빙엄의 그림을 보면 노스탈지아의 색은 '노란색'인것 같습니다.

 

이 그림은 1850년에 그려졌는데요, 1850년 당시만해도 미시시피 강에 뗏목이나 자그마한 배들이 여전히 운행을 하긴 했지만, 강의 운송수단의 대세는 증기선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노를 저어 운송하는 수단은 이제 사양의 길로 접어들었거나, 혹은 찾아보기가 드물어졌다고 하지요.  빙엄은 말하자면, 사라져가는 혹은 사라진, 풍경을 담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사라지고 이울어져가는 풍경을 담았던 빙엄은 미국 미술사에 '오래' 남게 된 것이지요.

 

빙엄은 풍속화, 초상화, 그리고 몇점의 역사화들을 남겼는데, 기록에 따르면 빙엄의 작품은 '모두' 미국에 있다고 합니다. 해외의 소장자가 없다고 해요.  해외에 안 알려진 화가라는 얘기죠.  워싱턴에서도 그의 작품의 수가 극히 미미하거니와 전시장에서 찾아보기도 힘듭니다.  그의 활동 기반이 미조리주였기 때문에 미조리주에 그의 작품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그의 걸작이 있다는데요, 가서 보고 와야지요.

 

 

 

 

아래의 그림은 버지니아 남단 해변도시에 있는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발견한 빙엄의 역사화입니다.  델러웨어강을 건너는 조지워싱턴을 그린것입니다. 뒤셀도르프에서 함께 수학하기도 했던 미국화가 Emmanuel Leutze 가 1851년에 그렸던 동명의 작품과 매우 흡사한 구도인데요,

 

Washington Crossing the Delaware, 1856-1871

oil on canvas, 146 x 93 cm

George Caleb Bingham 1811-1879

2009년 11월 29일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http://americanart.textcube.com/190

 

 

Emmanuel Leutze, Washington Corssing the Delaware 1851

 

 

이 그림의 제작년대가 1856-1871까지 표시가 되어있지요. 작품을 완성하는데 무려 15년이 걸렸다고요. 그 사연인즉, 빙엄이 이 그림의 초안을 잡아놓고 미조리주에서 이 그림을 사주기를 희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문을 받아서 돈을 받고 이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대요.  그래서 완성을 하지 않고 주문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다가 세월을 보낸 모양입니다. 결국 그는 주문도 받지 못하고 그림을 완성했다고 하는데요, 그가 죽을때까지 이 그림이 팔리지 않았대요. 나중에 빙엄의 유가족이 이 그림을 경매에 내놨을때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그런 사연이 있는 그림입니다.

 

 

 

 

 

Washington Crossing the Delaware 가 걸린 전시장 풍경,

(오른쪽 하단에 걸려있는 작품), 크라이슬러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190

바로위에 에드워드 힉스 http://americanart.textcube.com/193 의 조지 워싱턴 그림이 보입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빙엄의 작품은  미국 바깥에는 한점도 없다고 합니다. 오직 '미국'에서만 만날수 있는 작가이지요.  미시시피 강변의 노란 노스탈지아의 풍속화가.  미국 미술관을 순례하시다가 노란 색조의 강풍경이나 배를 탄 사람들이 노를 젓거나 배위에서 춤을 추거나 하는 풍경이 보이시면 누가 그렸는지 화가 이름을 한번 살펴 보십시오.  그가 빙엄일지 모르니까요.

 

2010년 2월 9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The Girl I Left behind Me, 1870-75, oil on canvas

Eastman Johnson 1824-190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2008년 5월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제가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 처음 가본것은 2008년 5월의 일입니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은 내셔널 몰 지역에서 조금 외떨어진 곳에 있지요.  메트로 스미소니안 역에서 내리면 양쪽에 줄줄이 서있는 스미소니안 박물관들과 국립 박물관, 그밖의 전시장들을 보는 것으로도 세월이 마냥 흘러가기 때문에, 신경써서 가지 않으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은 잊혀지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다른 미술관들에 비해서 한가한 편입니다. 출입구에서 안전검색도 하지 않고요.  저도 워싱턴으로 이사한지 거의 일년이 다 되어갈때 그곳에 처음 가본 셈이지요.  그날 처음 '미국미술관'에 가서 반했던 작품중에 하나가 바로 이스트만 존슨의 이 그림입니다. The Girl I Left Behind Me 내가 뒤에 남겨두고 온 여인 (소녀 혹은 처녀).  내가 뒤에 남겨두고 온 여인이라... 그림도 심상치가 않거니와, 거기다 제목까지.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의 심상에 따라서 그림도 다르게 해석될수 있지만,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기다리면서 살아가지 않나요?  아니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두고서 먼길을 떠나지 않나요?  나는, 떠나는 쪽이라기보다는 기다리는 쪽인것 같습니다.  내가 떠나기 보다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 떠난것도 같고요 (혹은 이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서 그런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늘 제자리에 있는데,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났다는 이런 상실감을 갖고 사는 사람이 이 그림을 볼때는, 관객 자신이 언덕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한없이 서서 기다리는 저 여인의 입장이 될 겁니다.  누군가를 버리고 떠난 사람은 돌아서서 이 여자를 쳐다보는 입장이 되겠지요. 나는 이 그림을 볼때, 내가 언덕위에 서서 바람을 맞고 서있는 입장이었던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이 그림이 참 인상적이었던지라, 그림 앞에서 사진도 찍고, 미술관 책방에서 이 그림을 표지로 한 미국미술사책도 한권 사고 그랬지요. 2008년 5월 어느날.  그날의 내 그림자는 아직도 저 그림앞을 서성일지도 모르지요.

 

이 그림은 미국 남북전쟁 (Civil War: 1861-1865)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남자들은 전쟁터로 떠나고, 여인들은 남아서 사랑하는 남편이, 애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게 되었지요.  남자들이 전쟁터로 가건, 영장을 받고 입대를 하건, 사랑하는 남자를 보내야 하는 여성들 (애인, 아내, 어머니등) 역시 떠나는 사람 만큼이나 애절해집니다. 바람은 심상치 않게 불고, 백척간두같은 언덕위에 서 있는 여인은 바람을 정면으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가슴에 들고 있는것은 성경책이겠지요 아마도. 신념과 사랑에 의지하여 저 여인은 힘겨운 세월을 저렇게 고집스럽게 버틸것입니다.

 

이스트만 존슨은 실제로 1862년에 버지니아의 마나싸쓰 (Manassas)에서 전쟁을 치렀고, 당시의 전쟁의 경험과, 전쟁 당시 젊은이들이 부르던 아일랜드 민요에서 이 그림의 제목을 따왔다고 합니다:

My mind her full image retains

Whether asleep or awaken'd

I hope to see my jewel again

For her my heart is breaking

내 마음은 그녀의 모습으로 가득찼네

잠을 잘때나 깨어있을때나

보석과도 같은 내 사랑을 다시 볼수 있기를

그녀 생각에 가슴이 무너진다네

 

혹시나 싶어서 유튜브 뒤져보니 노래가 있군요...

 

 

 

 

이스트만 존슨 (1824-1906)은 우리가 이전 페이지들에서 살펴보았던 19세기의 대형 풍경화가들 Thomas Moran, Frederick Edwin Church, Albert Bierstadt 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고 활동했던 화가 입니다.  그런데 그는 장르가 달랐죠.  이스트만 존슨을 얘기할때는 그를 '장르 화가'로 칭하는 일이 많습니다. 장르 미술 (Genre Painting)은 한국어로 옮길때는 '풍속화'라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입니다. 서민, 민중의 삶의 풍경을 화폭에 담는 것을 말하지요.  인류의 역사에 '회화'가 등장한 이래로, 회화는 주로 귀족층들이 누리던 예술 분야였습니다. 특히 서양미술을 살펴보면 르네상스 이전이나 그 이후에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왕가의 인물들, 귀족들, 부유한 사람들 혹은 역사, 풍경등이었지요.  서민들의 삶을 화폭에 옮긴 화가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화가들은 대개 부유한 사람들의 '주문'을 받고 그림을 그리는 식으로 생활을 꾸려 나갔는데, 가난뱅이 서민이 화가에게 돈을 주고 그림을 주문을 할 일이 없었다고 봐야죠.  르네상스 이후에 서양 예술에서 서서히 민중의 삶에 눈을 돌린 화가들이 나타나는데  부르겔이나 베르미어등이 바로 그런 화가들이었습니다.  밀레의 저녁종이나 혹은 반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 같은 빈농의 삶의 풍경, 그러한 것들이 바로 이런 '풍속화'의 범주에 들어가지요.

 

미국에도 이렇게 '풍속화'를 즐겨 그린 화가들이 존재하는데, 이스트만 존슨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풍속화의 얄궂은 운명이 뭔고하면,  풍속화의 소재는 '가난한 서민들'이쟎아요. 그런데 이런 그림을 향유한 층은 여전히 부유층이었다는 것이죠.  사람이 고기만 먹다보면 김치도 먹고 싶어지쟎아요.  말하자면, 고급 가구로 잘 차린 집의 거실이나 서재에 이런 풍속화를 한점 걸고, '소박하고,' '목가적인,' 삶을 찬미하는 취미를 가진 미술 애호가들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뭐 일부러 해진 옷 같은거 - 빈티지 스타일이라고, 돈 많이 주고 다 떨어진 옷 사입고 폼 잡는 것도 비슷한 행동이긴 하죠. 그것도 멋이고 자랑이다 이거죠.)  아무튼, 이런 풍속화는 돈많은 사람들의 또다른 수집 취미의 대상이었다고도 합니다.

 

 

이스트만 존슨은 메인주의 유복한 정치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6세가 되던 1840년에 보스톤의에서 리토그래프 판화를 배우고, 1849년에는 독일의 뒤셀도르프로 가서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받습니다. 그후에 헤이그, 파리등지를 돌며 역시 유럽 미술을 배우게 됩니다.  1853년에는 그의 아버지가 워싱턴 디씨의 정부 고위 공무원으로 발령받아 워싱턴으로 이주하여 백악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살게 됩니다. 1855년에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1859년 뉴욕시에 작업실을 열고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는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당시의 서민들의 삶을 그리는가하면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1872년 2월 20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개관할때 공동 설립자로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헬렌 켈러가  '만약 내가 단 하루 시력을 갖게 된다면  보고 싶은 것'들중에 포함되기도 하는 미국 최대의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스트만 존슨이 이 미술관의 설립에 앞장을 섰던 인물이군요.

 

자 이제 그의 따뜻하고 정겨운 풍속화 작품들을 살펴볼까요.

 

이 수련따는 그림은, 밀레의 이삭줍는 여인들과 비슷한 모티브로 보이죠?

Gathering Lilies (수련따기) 1865, oil on board

Eastman Johnson 1824-1906

2009년 12월 13일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The Early Scholar, c1865, oil on academy board on canvas

Eastman Johnson 1824-1906

2009년 12월 13일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이 꼬마 학생에 대해서는 http://americanart.textcube.com/210  이전에 관련 페이지를 적은 적이 있습니다.

 

 

 

Fiddling His Way, 1866, oil on canvas

Eastman Johnson 1824-1906

2009년 11월 29일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이 그림은 1866년에 그려진 것으로 보아, 노예해방 이후에 자유민이 된 흑인이 악기 연주를 하며 떠도는 풍경을 그린것으로 보입니다.  백인의 중산층 가족으로 보이는데요,  여인이 안고 있는 아기까지 포함하여 아이가 여섯이나 되는군요.  흑인이 악기를 연주하고,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턱을 받치고 있는 아이도 보입니다.  빗자루 막대기에 기댄채 잠시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여인의 모습도 편안해 보이지요.  비록 그림이지만, 그림 한구석에서 미국의 깽깽이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는 것 같습니다.

 

 

아래의 그림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발견하여 사진을 찍은 것인데, 조명이 하도 어두워서 사진 상태가 흐릿합니다. 이 그림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여러장 찍었는데 쓸만한 사진이 한장도 없더라구요. 아쉽습니다. 참 사랑스러운 그림인데요. 시골 농가의 헛간에 아이들이 한가롭게 앉아 있어요. 설령 이 가로대에서 떨어진다해도 아래에는 건초더미가 쌓여 있으므로 다칠 일도 없습니다. 아이들은 가로대에 나란히 앉아 종알거리고 노래를 부르거나, 그러다가 말다툼이 벌어져서 하나가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릅니다.  아기를 무릎에 안고 있는 언니도 보이지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아이들이 제비새끼들처럼 지지배배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화가도 이 그림의 제목을  '헛간의 제비들'이라고 붙였을겁니다.

 

 

Barn Swallows, 1878, oil on canvas

헛간의 제비들

Eastman Johnson 1824-1906

2009년 9월 19일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촬영

 

 

간단히 Eastman Johnson (1824-1906)의 풍속화들을 몇 점 살펴보았는데요,  이스트만 존슨에 대해서 요점정리를 해보자면

 

 1. 그는 풍속화가로 알려져 있으며, 서민들의 일상의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2.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공동 설립자이다

 3. 그는 19세기 대형 풍경화가들이 활동하던 비슷한 시기에 풍속화를 그렸던 사람이다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잠깐 퀴즈. 그런데...풍속화 (genre painting)가 뭐죠?  :)

 

 

2010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Diary2010. 2. 9. 13:01

워싱턴 일대는 눈폭탄에 함락되었다. 

 

아이들은 눈을 치우지 않은 뒷마당에 요새를 구축했다.

왕눈이는 북극곰이 되었다.

 

눈은 또 쏟아질것이고

우리들은 '삽질'외에는 대책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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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Niagara 1889,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여

(2층, 비어시타드의 대형 풍경화 근처 통로에 있음)

 

뽀안 안개의 나이아가라가 내게 말을 걸다

 

 

 

Thomas Cole 과 허드슨 강변의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 (1801-1848)를 엮다보니

 * Thomas Moran http://americanart.textcube.com/364 (1830-1902)

 * Frederick Edwin Church: http://americanart.textcube.com/363 (1826-1900)

 * Alber Bierstadt: http://americanart.textcube.com/361 (1830-1902)

 

등과 같이 허드슨 강변의 화가들로 알려진 19세기의 대형 풍경화의 대가들을 살펴 보게 되었는데요.  이들과 더불어 George Inness (1825-1894)를 잠시 소개를 해야 할 것 같군요. 제가 차례차례 화가들의 생몰년대를 명시 해 놨는데요 토마스 콜이 대략 한세대 이전의 대가이고  토마스 모란이나, 프레데릭 처치, 비어시타드는 나이도 몇살 차이 안나는 동시대의 사람들입니다.   이 페이지의 주인공 조지 이니스도 이들과 동시대를 산 화가이고요.

 

19세기 풍경화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대략 정리를 할 생각이라서 이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허드슨강변 화가들의 '대부'격인 토마스 콜이 미국 동부의 허드슨 강변에서 실제 풍경화를 그리거나 유럽 여행을 통해서 풍경화를 익히며 상상의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던 미국 풍경화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사람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1. 토마스 모란은 미 서부의 풍경을 동부의 사람들에게 전한, 옐로우 스톤의 화가라고 할수 있고요,

2. 프레데릭 처치는 미국및 남미, 유럽등을 돌면서 세계 여러나라의 자연 환경을 관찰하고 그림으로 옮긴이로, 훔볼트나 다윈의 과학적 자연 이해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던 미국의 화가였습니다.

3. 알버트 비어시타드는 미 서부를 돌며 미국의 대자연을 스케치하고 관찰했지만, 그가 그린 미국의 풍경은 유럽 알프스산의 풍경까지 뒤섞인, 이상화된 풍경을 대형 화폭에 담았던 화가였습니다.

 

그러면 비슷한 시기의 조지 이니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미술사가나 평자에 따라서 조지 이니스를 허드슨강 화파에 포함시키는이가 있는가하면, 그가 허드슨 화파와는 다른 풍경화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평하는 이도 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화가'라는 측면에서 그를 허드슨 풍경화파에 대충 때려 넣는 경우도 있고,  그를 좀더 세밀히 연구하는 사람이 볼때는 이런 '때려넣기'는 어불성성일수 있지요.  무슨 말씀인가하면, 어떤 역사를 단순하게 처리할때 - 이런 상반된 시각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 자신 조지 이니스를 '허드슨 파'에 포함시킬것인가 말것인가 조금 고민을 했는데요,  저로서는 그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발견했고, 그의 그림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좋아하므로, 그를 별도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조지 이니스를 '발견'하게 된 그림은, 저 위에 올려 놓은 '나이아가라'라는 그림에서였습니다.  국립 미술관급의 미술관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보면 보이는 것이 명작이요, 역사적인 기념비들인데,  명작 아닌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들이 있게 마련인데요.  풍경화에 별 관심이 없었던 제 눈에 띄었던 것이 그의 1889년작 '나이아가라'였습니다.  나이아가라는 앞서의 페이지에 소개된 바와 같이 프레데릭 처치가 대형으로 그려서 선보이기도 했는데요. 아래에 프레데릭 처치의 나이아가라 그림을 옮겨다 놨습니다. 

 

Niagara Falls, 1857, Oil on Canvas (42 1/2 x 90 1/2 inches)

Frederick Church

2009년 10월 3일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물론 크기에서도 처치의 작품이 압도적이긴 한데요,  처치의 그림이 '압도적'이라는 느낌을 줬다면,   그보다 32년후에 그려진 조지 이니스의 나이아가라는 물안개가 걷히지 않는 나이아가라의 또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조지 이니스의 안개속의 나이아가라를 좋아했지요. 그런데요, 이 나아이가라를 발견했을때, 저는 조지 이니스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보면서 떠올린 화가는 Thomas Wilmer Dewing 이었습니다. 저는 아슴푸레한 초록 안개속의 풍경과 여인들을 그린 미국 화가 Dewing 을 알고 있었거든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236 )    어떤가요. 저 초록 안개에 싸인 나이아가라 그림과, 아래의 듀잉의 그림의 분위기가 흡사하지 않은가요?

 

 

Before Sunrise (해뜨기 전) 1894-95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갤러리에서 촬영

 

 

그래서 저는 '나이아가라'를 '듀잉'이 그렸을거라고 상상했는데, 다가가보니 '조지 이니스'의 이름표가 붙어 있었단 것이지요.   '두 사람 그림이 참 분위기가 비슷하다 ...'  혼자서 이런 생각을 가끔 했었는데요.  어느날 공부하다가 이 두사람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풀렸습니다.

 

미국 회화사에 Tonalism (색조주의)이라는 미술 화법이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잠시 떠오른 적이 있는데요,  회화의 구체적인 이미지보다는 회화가 전하는 '색조'와 '빛' '분위기'를 중시 여기는 화법입니다.  바로 그 Tonalism 의 주요 화가로 알려진 이들이

 1. George Inness (1825-1894)

 2. 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

 3. Thomas Wilmer Dewing (1851-1938)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제가 이니스의 그림을 보면서 '듀잉'의 그림일거라고 짐작했던 이유는, 바로 이들의 '색조주의적' 개성 때문이었을겁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지금은 책상 앞에 앉아 슬슬 적고 있지만,  이러한 사실들을 접하거나, 혼란스러워하거나,  궁금해하거나 혹은 책을 찾아보고 뭔가 발견하고 그러면서 흘러간 세월은 두해쯤 되는거죠.  그 사이에 시간이 많이 흘러간 것이지요....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뒤지면서, 지금도 여전히 뭔가 새로 알아가고 있는 중이고요.)

 

 

 

여기까지는 제가 이니스를 처음 발견하던 일에 대해서 정리했고요,  이제부터는 제가 갖고 있는 그림 파일들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고 조지 이니스의 발자취와 미술의 흐름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국립 미술관 (NGA): 이니스의 초기 풍경화들

 

 

조지 이니스 (1825-1894)는 뉴욕주의 한 농부의 열세명의 아이들중에서 다섯번째 아이로 태어납니다. 다섯살때 가족이 뉴저지의 뉴왁으로 이주하고요. 십대때 그는 뉴욕시에서 지도 판화 작업을 배우게 됩니다. 1940년대에는 National Academy of Design 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그당시 Thomas Cole, Asher Durand 등 당대의 쟁쟁한 화가의 지도를 받게 되지요.  1851년에 그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로마로 가서 미술 수업을 받게 되는데 로마에서 1년넘게 머무는 동안 Swedenborginism 이라는 스웨덴의 신흥 종교운동과 접하게 되어 정신적인 영향을 입게 됩니다. 로마에서 파리로 건너간 그는 이곳에서 '바르비종 (Barbizon)'화가들의 작업을 보게 됩니다.  '바르비종' 화가들은 19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바르비종, 폰텐블루 숲에서 전원을 찬미하는 그림을 그렸었지요. 우리들에게 가장 친숙한 화가로는 장 프랑소와 밀레가 있지요. 밀레의 풍경화를 떠올리시면 바르비종 화파의 대강의 분위기를 짐작하실수 있을겁니다.

 

하여, 전체적으로 조지 이니스의 미술세계에 영향을 끼친 요소들로는

 1. 스승 토마스 콜의 허드슨강 화파의 풍경화

 2. 프랑스 바르비종 화파의 낭만적 풍경화

 3. 신성이 속세에도 반영될것이라고 봤던 스웨덴 신흥 종파의 세계관

등이라고 할 만 합니다.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돌아온 이니스는 델라웨어 철도 부설 사업자로부터 철도 사업을 기록하고 홍보할만한 그림을 위탁받아 작업을 합니다. 아래의 라카와나 골짜기의 그림이 바로 당시 위탁받아 그린 작품중의 하나입니다. 언덕위에서 내려다보는 기찻길, 달리는 기차, 기차역은 우리에게 '그리운' 혹은 '아쉬운'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키지 않나요?  그 기차에서 누군가 그리운 사람이 내려주었으면 좋겠지요. 이런 우리의 일반적인 정서와는 달리, 이 그림은 기록성, 홍보성에 목적을 둔 작품입니다.  물론 작가가 주문자의 의도를 얼마나 반영했을지는 알수 없지만요.

 

 

The Lackawanna Valley 1855,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10년 1월 20일 워싱턴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에서 촬영

 

 

 

 

 

 

View of the Tiber Near Perugia 1874, oil on canvas

페루지아 인근에서 바라본 티버강 풍경

George Inness 1825-1894

2010년 1월 20일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이 그림은 이탈리아 페루지아의 티버강 그림이군요. 그가 당시 여행을 가서 그린것인지, 아니면 과거를 회상하며 그린것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아래, 갤러리 풍경 사진에서 프레데릭 처치의 대형 그림 옆에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입니다.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전시장. 왼편의 대형 그림이 Frederick Church 의 '빛의 강'

그 오른편에 조지 이니스의 풍경화가 보임.

2010년 1월 20일 NGA 에서 촬영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이니스의 완숙기의 풍경화들

 

 

 

September Afternoon 1887,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1층,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뒷쪽 갤러리 중앙에 걸려있음)

 

 

1885년에 조지 이니스는 뉴저지주의 Mont Claire 에 정착하게 됩니다.  완숙기에 들어선 그의 그림에서 선의 경계가 부드러워지거나 흐릿해지지요.  특히, 앞서 지적한 바 있지만, 이 '나이아가라' 그림에서 그의 선과 경게가 해체가 된듯한 느낌이 듭니다. 사물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해체되고 오직 색감과 분위기만 안개 입자처럼 떠돌지요. 

 

그런데, 얼마전에 스미소니안에 갔을때, 안내인이었던 Judith 할머니가 이런 얘기를 들려주시는 겁니다. 그 할머니는 나이아가라 인근에서 태어나고 자랐기때문에 늘 나이아가라를 봤대요.  고향을 떠난 지금도 그의 귓가에는 나이아가라 폭포 소리가 들리겠지요.  사람들은 이니스의 나이아가라 폭포 그림을 가리키면서, '이 그림이 인상주의적인 그림이다, 이니스는 인상파였다' 뭐 이런 설명을 하는데 자신은 이 그림을 인상파 그림으로 보지 않는대요.  이 그림은 '인상'이 아니라는거죠.  저는 그 사람의 말귀를 알아 들었습니다.  그래서 되물었죠:

 

 "You mean that, it's not the impression of Niagara, it's, the reality?"

 (이 그림은 나이아가라 '인상'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인가?)

 Judith: Yes, that's what I mean!

 (그래, 바로 그것이지!)

 

주디스 할머니의 예술관은 여기까지 이지요.  인상파 화가들은 '인상'을 스케치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을 잡으려고 했던 것인데.  인상파화가들은 현장에서 내 눈으로 직시하는 '바로 그 순간, 그 것'을 잡으려고 했던 것인데. 그것이 그들에겐 Reality 였던 것인데...  주디스 할머니는 인상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셨던것도 같은데...하지만 그가 내게 말하고 싶어했던 것은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이 나이아가라 그림은 '상상속의 어떤 이미지'가 아니라 '사진'같이 정확한 사실이라는 것이지요.  나이아가라를 가슴에 품고 있는 주디스 할머니에게 이 아슴푸레한 풍경은 더욱 생생한 사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Reality 란 무엇인가?  이 논의는 훗날로 미루기로 하지요, 저로서는 너무 어려운 주제이니까요.)

 

 

 

Niagara 1889,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여

(2층, 비어시타드의 대형 풍경화 근처 통로에 있음)

 

 

 

코코란, 델라웨어: 말년의 황혼

 

 

 

Early Autumn, Montclaire 1891,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10년 1월 9일 델라웨어 미술관에서 촬영

 

 

이니스의 작품 사진들을 시간 순서대로 늘어놓고 보니, 그의 그림의 변화가 눈에 들어오지요. 그의 말기의 작품들은 경계의 해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빛과 어둠을 들여다보는 영역으로 나아갑니다.  이전에 이니스가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했다면, 말기에 그는 빛의 세계로 나아가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코코란 미술관에 소장하는 '숲속의 황혼' 작품은 황혼이 내리는 숲속에 한줄이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나무 기둥에 신비할 정도로 환한 빛으로 어룽대지요.  가끔 이런 광경을 볼때가 있어요.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빛과 어둠의 대비. 이런 풍경을 대면할때, 우리는 설령 우리가 무신론자일지라도 어떤 신성, 초자연적인 숨결을 상상하게 됩니다. 

 

 

 

Sunset in the Woods, George Inness, 1891

출입문 왼편에 면한 벽에 Frederick Church 의 Niagara Falls, 그리고 Albert Bierstadt 의 '들소의 최후'가

나란히 걸려있다.

 

 

 

Sunset in the Woods 1891, oil on canvas

70 x 48 inches

George Inness 1825-1894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촬영

 

 

 

 

자, 조지 이니스의 미술 세계를 다시 한번 정리해볼까요?

 1. 토마스 콜에게서 사사 받았고, 혹자는 그를 허드슨 강 화파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2. 프랑스 바르비종 미술 운동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3. 스웨덴에서 일어난 새로운 종교운동의 영향으로 신성이 세속에 투영된다는 시각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그는 미국의 Tonalist 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미국 미술사에서 크게는 그를 허드슨 화파, 혹은 인상주의 화가로 분류를 하기도 하는데요, 어찌보면 그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 화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2010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역사를 만들어낸 한장의 그림

 

 

 

 

The Grand Canyon of the Yellow Stone, 1893-1901, oil on canvas

427.8 x 245.1 cm (대략 4.3 미터 x 2.5 미터)

Thomas Moran (1837-192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 가면, 엄청시리 커다란 풍경화 그림이 여기~ 여기~ 걸려있는데요. 저로서는 뭐 엄청나게 큰, 그것도 주로 바위로 이루어진 풍경화에 별 매력을 못 느끼므로, 막무가내로 통과~ 해버리는거죠. 이 엄청난 풍경화 앞을 지나면서 대략 '이름표'라도 볼라치면 Moran 이라는 이름이 눈에 띕니다. 

 

"모란?  이름이 모란이야?  성남의 모란 시장이 생각이 나는군. 거기 가면 강아지 팔고 그랬는데. 이름이 모란이면 모란꽃 뭐 그런거 그려야 하는거 아니야? 아 왜 바윗덩어리 산만 그려 놓은거냐구..." 

 

이렇게 중얼거리며 지나치는거죠. ㅎㅎㅎ.  그래가지고, 사실, 스미소니안을 라면집 드나들듯 드나든 저에게도 모란의 작품 사진이 별로 없습니다.  관심 없으니까 대충 지나간거죠.  아, 다음에 가면 제대로 작품 좀 들여다봐야지...

 

Thomas Moran (1837-1926)은 영국태생으로 어린 시절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와서 펜실베니아에서 성장한 화가입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 Hudson River School 의 원조 Thomas Cole 의 페이지에서 잠시 언급한대로 Thomas Moran 은 그가 미국의 자연 환경을 대형 화폭에 담았다는면에서 허드슨강변의 화가로 분류가 되기도 하고, 혹은 토마스 모란이 특히 로키 산맥, 옐로우스톤의 풍경에 골몰한데서 Rocky Mountain 화가로 분류가 되기도 합니다.

 

제가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찍어온 그의 대형 그림 사진속의 풍경이 대개 '노리끼리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림이 '노리끼리'로 일관하는 이유는, 그가 Yellow Stone (노란 바위) 지역의 화가라서 그런것이지요 (알고보니 뭐 단순하군요.헤헤).

 

토마스 모란은  형제들도 그림을 그렸고요, 어릴때부터 목공, 판화 등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1862년에 영국으로 그림을 배우러 갔을때 그곳에서 터너 (Turner, 1775-1851)의 웅장하고 숭고한 풍경화에 감화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8년 여름에 뉴욕 현대미술관에 갔을때, 마침 터너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지요.  스케일 큰 풍경화를 실컷 보기는 했는데, 저 자신이 사람 하나 안보이는 풍경화에 별 재미를 못느끼기는 했지요.  지금은, 풍경화를 보는 안목도 좀 생겨서, 코코란에서 현재 진행중인 터너에서 세잔까지의 기획전 http://www.corcoran.org/turnertocezanne/index.php 을  보러 갈 생각입니다.)

 

토마스 모란이 미 서부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1871년 Hayden Geological Survey (헤이든 지리 연구) 팀에 초대되어 40일간 미 서부 옐로스톤 일대를 탐사하게 되면서부터 입니다. 연구팀에는 사진가 Wiliam Henry Jackson도  있었는데, 토마스 모란과 잭슨이 현장 스케치를 남기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흑백 사진만 가능했으므로 현장의 생생한 풍경은 화가가 담을수 있었다고 합니다.

 

 

The Grand Canyon of the Yellow Stone, 1893-1901, oil on canvas

427.8 x 245.1 cm (대략 4.3 미터 x 2.5 미터)

Thomas Moran (1837-192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위의 그림은 아니지만, 같은 제목의, 비슷한 각도에서 본 그랜드 캐년 그림이 1872년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가 되는데 그 그림은 미 의사당의 상원에 팔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옐로우스톤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게 하는데 혁혁한 공헌을 하게 되지요. 이를 시발점으로 미 의회는 1916년 정식으로  '국립공원 National Park System'을 도입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여름 휴가철에 '미서부 관광'이나 '옐로우스톤 국립공원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이 지역을 관광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미국에서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 Yellowstone National Park 이고요,  이곳이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게 되었을때, 그 배후에 토마스 모란의 그림 한장이 있었던 것이지요.  흑백사진 기술조차 미미하던 시절, 오로지 스케치나 수채화와 같은 것으로 시각자료가 전해지던 시절, 한장의 대형 풍경화가 전하는 미지의 세계는 보는이들에게 충분히 감동을 선사했을 법 합니다.

 

 

토마스 모란은 때로 Thomas Yellowstone Moran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고요, 이따금 그는 서명할때 Thomas Y. Moran 이라고 적기도 했답니다. 가운데의 Y 는 yellowstone 의 Y 이지요. 그리고 토마스 모란이 '미 국립공원'의 지정과 개발에 기여한 것을 기념하여 http://en.wikipedia.org/wiki/Mount_Moran  모란 산 (Mount Moran)이라는 이름도 붙여졌다고 합니다.  한장의 그림이 미국 역사에, 미국 국립공원의 산파 역할을 했다니, 그림을 만만히 보면 안될 일이군요.  다음에 스미소니안에 가면 그의 대형 그림 사진들을 모두 찍어와야 할것 같습니다. :)

 

 

화면 왼편 그림: The Cahsm of the Colorado, 1873-1874, oil on canvas mounted on aluminium

367.6 x 214.3 cm (대략 3.6 미터 x 2.1 미터)

Thomas Moran (1837 - 192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아, 참고로, 저 전시실 가운데에 둥그런 평상같이 생긴 의자가 있는데요. 곰털 같은 털가죽이 덮여있습니다.  관객이 저기에 편히 앉아서 쉬면서 그림을 감상할수 있도록 설치 해 놓았는데요. 옐로우스톤에 가면 '곰'이 많이 나오지요.  옛날에 옛날에 1998년에, 제가 미국땅 처음 밟아본것이 '미서부 관광' 패키지 여행을 통해서였는데요, 그때 관광 안내원이 '곰'이 나올지 모르니 주의하라고 당부하던 일이 생각이 나는군요.   그러니까, 저 곰가죽같은 의자나 혹은 그림 옆에 세워 놓은 화분도, 이 전시장의 장치 입니다. 풍경화에 어울리는 소품을 제시하여, 관객이 '풍경'속에 들어와있는듯한 기분이 들도록 유도하는 것이지요.

 

 

 

2009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