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ism2009. 12. 29. 00:00

 

 

미국 사실주의 속의 지역주의

 

http://americanart.textcube.com/118 이전 페이지에서 미국미술사에 나타나는 '사실주의' 흐름을 제가 대충 정리한 바 있습니다. (공부를 해 가면서 내용을 조금씩 손을 보게 되는군요. 잘 못 알고 있던 것은 바로잡고... 첨가도 하고..)

 

그 표를 다시 갖다 놓고 살펴보겠습니다. 아래 표가 제가 대충 잡은 윤곽인데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search/?search=ashcan  Ashcan 에 속했던 화가들을 소개한 적이 있쟎아요. 이분들이 미국 사실주의의 원조들이었다 할 만 합니다. 이들중에 Social Realist 로 분류가 될만한 화가도 있고, 아닌경우도 있고.  가령 Sloan 은 사회주의적 잡지 편집에도 관계했지만, 스스로는 사회주의와 거리를 두기도 했지요.  본격적인 사회 사실주의 화가로는 벤 샨 같은 작가들이 있지요. (벤샨은, 제가 꽤 흥미를 가진 화가 이기 때문에 오히려 페이지 정리하기가 어렵게 느껴집니다....)

 

이번에는 지역주의 (Regionalism) 작가군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삼총사'와 같은 작가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1930년대에 탄생하는 '지역주의 (Regionalism)'의 주요 작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 Grant Wood (1892-1942)

 * Thomas Hart Benton (1889-1975)

 * John Steuart Curry (1897-1946)

 

그러니까...가령...아주 유치한 미술 문제를 낸다고 가정해봅니다.

 

다음 화가들중에서 미국의 지역주의 화가가 아닌 사람은?

(1) 그랜드 우드 (2) 토마스 벤튼 (3) 조지아 오키프  (4) 존 커리

 

이런 문제가 나오면 답은 (3)번을 찍으셔야 한다는 것이지요 :)

 

 

지역주의의 탄생과 허상

 

 

 

그러면, 이 regionalism 이라고 명명된 지역주의는 어떤 배경에서 탄생 한 것일까요? 미술비평책마다 대동소이하거나 백과사전식의 설명을 하고 있는데요, 대략 '교과서'처럼 알려진 것은 이런 내용입니다. 우선 지역주의가 1930년대에 탄생하는데, 대공황과 맞물려 있지요.  그래서 미국인의 애국심을 고취 시키고자 하는 미술 운동이 일어났고, 유럽 일변도의 미술판에 저항하여 소외되어 있었던 미국의 중서부 지역에서, 신토불이의 미술이 탄생한거다 이런 내용이죠.  아 저역시 최근까지 이런 식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지역주의의 탄생에 대한 또다른 설명을 접할수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그 내용을 조금 정리하겠습니다.  American Visions: The Epic History of Art in America by Robert Hughes 책 내용을 대충 요약해서 옮기겠습니다.

 

 

1933년에, 캔자스 출신으로 뉴욕에서 미술거래상으로 활동하던 Maynard Walker 라는 사람이 캔자스 시티에서 35점의 그림을 걸어놓고 "American Painting Since Whistler 휘슬러이래의 미국 회화" 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엽니다.  전시회에 참가했던 화가들 중에 Thomas Hart Benton, John Steuart Curry, Grant Wood 가 있었던 것이지요. 당시 벤턴은 뉴욕에서 활동중이었고,  우드역시 이미 American Gothic 이라는 불후의 명작(?)으로 큰 상을 거머쥔 후였고, 커리역시 '휘트니 미술관'이 이미 그의 작품을 여러점 사들인 후였습니다.  나름대로 이미 미술계에서 어느정도 알려진 인물들이었지요.  그런데 이 세사람은 피차 서로 본적도 없고,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리고 뭐 Regionalism 같은 것도 생각도 못해냈겠지요.

 

그런데 전시회를 기획했던 Walker 가 Art Digest 라는 잡지에 이 전시소식을 전하면서 "real American art...which really springs from American soil and seeks to interpret American life (진정한 미국 미술...미국의 토양에서 태어나서 미국의 삶을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이런 선전을 했다고 합니다.  뭐 사실 당시 비평가들이나 콜렉터들은 이 전시회에 별 관심이 없었다는데, 워커가 제작한 카타로그가 Time 지의 중서부 담당자의 눈에 띄어서, 그것이 뉴욕의 본사로 보내집니다. 뉴욕 본사를 지키고 있던 타임지의 설립자 Henry Luce 는 미술 애호가였는데 이 별것도 아닌 소식을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그리고는...난리가 난거죠...  이제 진정한 미국의 세기 (The American Century) 가 돌아왔다는 식으로 해석을 한거죠.

 

그리하여 1934년 12월 24일판 타임지의 커버를 벤턴의 초상화가 장식하고, 커리, 우드, 그리고 Charles Burchfield, Reginald Marsh 등의 그림이 소개가 됩니다. 흙냄새 물씬 풍기는 중서부 출신의 작가들이 불러일으킨,  진정한 미국화의 탄생! 지역주의가 이런식으로 탄생을 한거죠.

 

헌데 Robert Hughes 의 설명으로는 이런식의 미국의 Regionalism 은 사실과는 상관없는 '허구'라는 것이지요.  가령 벤튼, 커리, 우드가 지역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널리 선전이 되었지만, 벤튼과 우드는 피차 서로 일면식도 없었고, 지역주의 화가로 알려진 화가들중에 정말 '중서부'에 뿌리를 내리고 활동한 화가는 그랜트 우드 뿐이라는 것이지요.  커리는 커넥티컷에서 활동했고, 벤튼의 스튜디오는 뉴욕에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이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이 '지역주의'라는 어떤 판타지가 미국의 대중들에게 비현실적인 향수와 꿈을 주었다는 것이지요. 경제 대공황으로 도시와 농촌등 전 지역이 고통을 겪고 있을때, 그랜트 우드가 보여준 풍경화는 '잃어버린 낙원'이었지요.  존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Grapes of Wrath)를 1939년에 발표하면서, 몰락한 미국 농민들의 참상을 여실히 서술한 바 있는데, 이에 비해서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는 '몽환적'이기 까지 합니다.

 

후에 벤튼은 이 허구성이 강한 지역주의 운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평을 합니다. " 이미 각본은 씌어졌고, 우리를 위한 무대장치는 만들어졌다. 그랜트 우드는 전형적인 아이오와 소읍 사람이 되었고, 존 커리는 전형적인 캔자스의 농부가 되었으며, 그리고 나는 중서부 (미조리조)의 촌뜨기가 되었다. 우리는 우리 역할을 받아들였다."

 

예. 미국의 지역주의 운동이 대충 이러한 얼개로 탄생하였고, 미국미술사에서 나름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주의 삼인방에 대한 소개는 Wood, Benton, Curry 순으로 페이지를 열어나가겠습니다.

 

2009년 12월 2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8. 12:31

워싱턴 디씨,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에, 미국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장이 몇개가 나란히 있는데, 그 중에 이런 방이 보일겁니다.  창이 두개가 있고요, 그 창사이에 그림 한장이 걸려있습니다.  그리고, 방 가운데에 푹신한 벨벳 의자가 있습니다. 거기 앉으세요. 그 의자에 앉아서 이 그림을 바라보는 겁니다.

 

 

 

 

 

 

 

 

가만히 앉아서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귀가 안들리는것 같아요.

그림속의 정적이 그림 밖으로 나와서 내 귓가에 맴돌아요.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안들리고

뺨을 스치는 눈바람을 느낄 뿐이지요.

'정적'이 이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런 '소음'이라고도 하지요

매일 포탄 터지고 총알 날아다니는 전쟁터에서 고통받던 사람이, 퇴역하여 고향에 돌아왔을때, 그 사람은 도통 무지무지한 소음때문에 귀가 아파서 견딜수 없었대요. 정적의 소리죠. Sound of Silence.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무지무지한 속도로 돌아가고 있고, 그 소리도 엄청나대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 귀가 청음가능한 음역대만 들을 뿐이죠.

 

이런 신비한 그림이 한 장 있어요.  여름에도 이 그림 앞에 앉으면 눈이 내리는 소리가 나요. 안믿겨지지요?  하지만, 한번 가보세요. 어쩌면 눈의 정적 뿐 아니라, 내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르죠. 안믿겨지죠?  후후.  믿어봐도 좋을텐데, 한번.  믿거나 말거나.

 

 

 

 

 

 

 

 

 

Round Hill Road (ca. 1890-1900)

John Henry Twachtman Born: Cincinnati, Ohio 1853 Died: Gloucester, Massachusetts 1902 oil on canvas 30 1/4 x 30 in. (76.8 x 76.2 cm.)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William T. Evans 1909.7.64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2nd Floor, East Wing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09. 12. 28. 07:52

공식 홈페이지: http://www.artic.edu/aic/

몇해전에, 시카고 지나는 길에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미술관에 들른적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에 뜨거운 한여름의 여행 이야기를 생각하니 따뜻한 기분이 드는군요.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승용차로 대략 1시간 달리면 시카고 도심이 나오고  미국의 5대호중에서 미시간호를 바로 끼고 있는 위치에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의 미술관이 있습니다. 흔히 시카고 미술대학 (시카고 미술학교)라고도 부르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는 미국의 미술대학중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명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래 사진 오른편에 청동사자 두마리 서있는 건물. 저곳이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미술관입니다. 미술관 바로 뒤로 미시건호가 펼쳐져있습니다.

 

 

 

 

위 사진과는 반대방향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사자 이쁘죠... 미술관 건물도 단아하죠...

 

 

 

 

사자가 올려다보는 하늘이 푸르고, 건물들이 예쁘네요. 시카고의 아름다운 고층 건물들입니다. '건축'을 공부하려면 시카고로 가라는 이야기가 있지요.

 

 

 

 

미술관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보면 안쪽에 이러한 코트야드가 보입니다. 레스토랑도 있어요. 레스토랑에서 뭔가 음식도 먹었었는데, 뭘 먹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미국 중서부 미술계를 대표하는 화가 Grant Wood 의 The American Gothic 이라는 작품이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사진 상태가, 요즘 인터넷 비속어로...대략...쩌는군요 -.-;;. 슬프죠... 아 그땐 똑딱이 시절이었거든요... )

 

 

 

 

에드워드 호퍼 아저씨의 작품도 큼직하게 걸려있었고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들이 무더기로 걸려있었는가 하면

 

 

 

 

조지아 오키프의 남편이었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기념 전시도 진행되고 있었지요.

 

 

아아, 제가 한때 미쳐있었던 메리 커셋 (Mary Cassatt)의 그림들도 여러점 있어서, 제가 황홀했었지요.  지금도 메리 커셋의 그림을 좋아하긴 하지만, 지금은 뭐랄까, 다른 분야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편이지요.

 

 

 

 

일본 판화의 영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그림. 역시 메리 커셋 작품.

 

 

 

아아, 동행이 없었으므로 사진을 찍어줄 사람도 없었지요. 누군가가 관객에게 부탁해서, 메리 커셋 그림 앞에서 기념촬영. 그 관객이 예술사진 전문이라 저를 아주 근사하게 찍어놨습니다.  그림 앞에서 유체이탈 일으키고 있는거죠.

 

 

 

 

내부 동선이 이러했고요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밀레니엄 파크 주변으로 한바퀴 전기 자전차 (세그웨이)를 타고 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보입니다. 저도 저거 타봤죠. 워싱턴에서. :)

 

 

 

이 밀레니엄 파크에서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가 당선자 연설을 했지요. 개표일 밤에.

 

 

시카고 도심을 벗어나면 펼쳐지는 끝없는 옥수수밭, 그리고 콩밭.  저는요 이 중서부지방의 콩밭을 상상할때마다 우리나라 대중가요 '칠갑산' 이 생각나요.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누나...'

 

있쟎아요. 미국의 중서부 평야지대에서 콩밭을 호미로 맬경우, 평생을 매도 다 못매요 하하하 (깔깔깔, 떼굴떼굴) 이런 상상하면 그냥 웃음이 나오고 말아요. 왜 그냥 허망한 유머중에 이런것 있쟎아요.  개미총각이 코끼리 처녀하고 결혼을 해서 살다가 코끼리가 죽었대요.  그러자 개미가 울면서 하는말, "아이고 아이고 저걸 언제 다 파묻어..."  하하하.  미국 중서부에서 호미들고 밭고랑을 파게 된다면, 우덜은 개미가 되는거죠. 아이고 아이거 저걸 언제 다 할거나...

 

아무래도 다음 페이지에서는 '그랜트 우드'를 소개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군요. :)

 

 

 

 

 

옛날에 옛날에, 전생에, 전전생에 시카고에 가 본적이 있지요.

 

2009년 12월 27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8. 04:53

토마스 윌머 듀잉

 

 

토마스 윌머 듀잉 (Thomas Wilmer Dewing 1851-1938) 은 매사추세츠주 보스톤 태생의 화가 입니다.  1876년부터 1879년까지 (그의 나이 25세부터 29세까지) 파리와 뮌헨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으며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Society of American Painters 그룹에 속하여 잡지 편집인이었던 Richard Watson Gilder의 살롱을 중심으로한 뉴욕 문화계에 어울리게 됩니다.  길더는 당시의 유명한 미술가, 작가, 재벌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이들과 '황금시대 Gilded Age'를 펼쳐 나갑니다.  미국미술사에서 '황금시대'는 말하자면 '돈'과 '예술'의 만남이었다고 할 만 하지요.

 

이곳에서 듀잉은 건축가이며 디자이너이기도 했던 Stanford White 와 친교를 맺게되는데 이들간의 돈독한 우정은 스탠포드 화이트가 죽을때까지 (1905년) 이어집니다. 스탠포드 화이트는 살해되었지요. 듀잉의 상심이 컸다고 합니다.  제가 듀잉 관련 페이지에 소개해드렸던 그의 작품들, 그 작품들이 '액자' 디자인은 모두 스탠포드 화이트의 작품입니다.

 

Gilder 의 살롱에서 듀잉은 그의 평생 아내가 되는 Maria Oakey (1845-1927)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고보니 듀잉보다 여섯살 연상이군요.  마리아 역시 화가였습니다. 마리아는 John La Farge 와 함께 미술 수업을 받았는데, 듀잉에게 화면을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조정해보라는 조언을 합니다.  듀잉이 Tonalist 로 나아간데는 아내의 역할이 지대했던 것이지요.

 

1890년부터 듀잉은 뉴 햄프셔의 스튜디오에 머무르며 초록색 계열의 이상화된 자연속의 여성들을 창조해냅니다. 1897년 그는 Society of American Painters 에서 탈퇴하여 Ten American Painters 모임에 합류하여 20여년간 이들과 함께 활동하게 됩니다.

 

The Ten (미국 인상주의 화가들) 뒤에 서있는 사람들중에서 오른쪽에서 두번째 콧수염 신사가 듀잉

Seated, left to right:

(1) Edward Simmons,  (2) Willard L. Metcalf, (3) Childe Hassam, (4) J. Alden Weir, (5) Robert Reid
Standing, left to right:

(6) William Merritt Chase, (7) Frank W. Benson, (8) Edmund C. Tarbell, (9) Thomas Wilmer Dewing, (10) Joseph Rodefer De Camp

 

그리고 1905년부터는 그간의 야외 풍경에서 벗어나 실내 중심의 작품 활동을 합니다. 그의 그림에서 실내는 부드럽게 채색되고, 색조(tone)가 통일되어 있습니다.  인물들은 하나 혹은 둘이 간결한, 대부분이 생략된 공간에 존재합니다.  남자를 찾아보기 힘든 그의 그림에서 여성 인물들은 손으로 다가가 잡을수 없는 거리에서, 이상적인 형태로 그리고 고요하게 존재합니다. 그의 그림에서 인물들의 숨소리나 체온을 느끼기는 힘듭니다. 마치 숨쉬는 풀잎들처럼 그들은 존재합니다.

 

듀잉은 미국의 인상주의 미술을 이끌었던 10인회의 회원이었으므로 미국 인상파 화가로 분류가 되기도 하지만,  좀더 국소적으로는 Tonalist (색조주의자) 군에 속합니다. Tonalism (색조주의)는 1880년경부터 1915년에 이르기까지 미국출신의 화가들이 풍경화를 그릴때 보였던 양상인데 George Inness 와 James McNeill Whister 가 그 대표적인 화가들입니다.  듀잉역시 화면의 전반적인 색조로서 화면의 분위기를 전달하는데 공을 들였지요.  이 색조주의는 미국에서 인상파 화풍이 우세해지면서 그 명맥을 잃게 됩니다.

 

듀잉은 미술가로서는 매우 행운아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미술사에서 '당대'의 인정을 받고 영예를 누리다가 죽어서도 여전히 대가로 인정받은 화가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참하게 살다가 인정도 못받고 죽은후에 사후에 인정받아 그림값만 하늘 높을줄 모르고 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그러하였고, 우리나라의 박수근 선생 역시 미군부대에서 양키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는 '노동'으로 간신히 연명할수 있었으며...  그런데 듀잉은 일찌감치 뉴욕의 보험업자였던 John Galletly 그리고 디트로이트의 철도차량 사업가였던 Freer (워싱턴의 프리어 갤러리를 기증한 사람)의 열렬한 애정과 지원을 받는 행운을 누립니다.  결국 Galletly 가 수집했던 작품들은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에, 그리고 프리어가 수집한 작품들은 스미소니안 프리어 갤러리로 옮겨지게 됩니다.

 

 

초록 안개의 꿈

 

http://americanart.textcube.com/234 페이지에서 우리는 몇장의 그림을 보고 듀잉 작품세계의 어떤 특징을 꼽아본 적이 있습니다. 해당 페이지의 내용을 옮겨 보겠습니다.

 

(1) 그림속의 주인공들이 모두 '여성'들입니다.  남자 안보이지요?  :)  '여름'과 '낭송'에서는 각각의 화면에 두명의 주인공들이 들어있습니다.  세폭 병풍같이 생긴 작품 속에는 한폭마다 한명의 여자가 그려져 있지요.

 

(2) 모두 유화이군요.

 

(3) 배경이 모두 초록색 계열이지요.

 

(4) 그리고 배경이 모두 '자연'입니다.  인공적인 '건물' 같은것은 안보이지요?

 

(5) 안개가 낀듯 화면들이 대개 '아슴프레'하지요?  사진사가 사진 실력이 없긴 하지만, 원래 작품이 이래요. 촛점이 어긋난것처럼 아슴푸레한 것이 이 세작품의 공통점입니다.

 

(6)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보이십니까? 아니지요? 팔은 가늘고 하체는 무척 길죠.  '이상화'된 여성의 체형인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단지 '몇 편'의 작품만으로도 듀잉의 이런 특징들을 발견해 낼수 있었는데요.  듀잉의 이야기들이 이어지면서 뭐가 새로 추가가 되었을까요?

 

(1) 그림하고는 상관이 없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의 '액자'가 모두 통일되어 있지요. 그것이 워싱턴에 있건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 있건 액자는 동일한 사람의 작품입니다. 그와 막역한 친구이기도 했던 건축가, 디자이너 Stanford White 가 디자인 한 것입니다.

 

(2) 일정한 색조를 유지하면서 그 색감 자체가 그림의 '주제'였다는 점에서 듀잉 활동당시 서로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 받았던 James McNeill Whistler (제임스 맥닐 휘슬러), George Inness (조지 이네스)의 Tonalism 을 그의 그림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3) 그가 후에 십인회에 가입하게 되는데, 십인회의 주요 멤버들이 미국미술사에서 '미국 인상파 화가들'로 자리매김 하게 됩니다.

 

(4) 1905년 이후에는 실내에서 여인들이 악기를 들고 있는, 실내 중심의 그림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제가 소개드린 작품들을 찬찬히 보시면, 이 블로그에 소개된 작품들 만으로도 듀잉의 활동이 '야외'에서 '실내'로 옮겨가게 된 것을 파악할수 있습니다.

 

(5) 당시에 미국이나 유럽 화가들을 사로 잡았던 '일본화' '일본화풍'이 듀잉에게도 영향을 끼친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6) 그는 당대에 '부자들의 후원'을 듬뿍 받은 운좋은 화가였지요. 그는 산업의 폭발적 발전으로 신흥대국이 된 미국의 재벌들의 '돈'과 유럽등지에서 예술 공부를 하고 돌아온 미국의 예술가들이 어울려 이뤄낸 '황금시대'의 아이였고, 수혜자였던 것이지요.  금박으로 떡칠을 하여 백악관에 기증한 스타인 피아노의 장식이나, 디트로이트 재벌 프리어의 실내 장식이나 장식용 그림을 제작해내면서, 그는 예술을 위해 배를 곯거나 화구를 사기위해 막노동을 할 필요가 없는 '아름다운' 세월을 보낼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하여, 듀잉의 그림에서 우리는

'안개속을 걷는듯한 상쾌하고 촉촉한,'

'몽환적인,'

'어디선가 아름다운 멜로디가 들려오는 듯한,'

'사람의 숨소리나 땀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선녀들같이 아름다운 여인들이 가볍게 춤을 추는'

'연두색 물감이 이러저리 스며들다 내 영혼에까지도 스며들듯한' 

이러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프리어 갤러리의 듀잉 전시실에 가면 호흡도 고요해지고, 마음도 잠시 편안해집니다.

 

 

영혼의 부재

 

그렇다면, 이토록 아름다운 작품들이, 왜 미국 미술사 책에서, 미국 미술 비평 앤솔로지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듀잉의 이름이 세계적인 화가 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미국 미술의 언저리에서 희미하게 맴돌다 마는 것일까요?

 

이전페이지에서 저는 이를 간단히 '페이소스 (pathos)가 안보인다'로 정리한 바 있습니다. 듀잉의 색조는 우리 영혼에까지도 스며들것같이 부드럽고 습기가 있으며 정제되어 있지만, 그토록이나 아름답지만,  안타깝게도 듀잉의 여인들에게서 우리는 영혼을 느낄수 없습니다. 사람의 숨소리나 땀냄새가 나지 않으므로 관객인 우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천상에만 존재하는 주인공들 곁에 우리는 다가갈수 없습니다.  다가갈수 없으므로 공감이 불가능해집니다.  저들은 관객인 나와 공감하지 않습니다. 나의 고통을 들어주지도 않고, 나의 신음소리를 듣지도 못합니다.  나는 그림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낍니다.

 

이런 재미있는 설이 있는데요. 백화점 판매직원이 '너무나도 아름다우면' 오히려 매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수 있다고 하지요.  내가 물건 사는 사람이고 판매원은 내게 도움을 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너무 근사하고 잘생기면 오히려 손님인 내가 의기소침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너무 잘난 판매원은 오히려 물건을 잘 못 판대요. (믿거나 말거나). 

 

듀잉의 그림속에는 '관객 (비평가들이나 미술사가 모두 포함)'들이 동감하거나 공감할 삶의 고통이 보지지 않습니다. 부조리함이나 비뚤어짐, 망가짐 같은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극복해야할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팔자 늘어진 어떤 사람들이 식후에 페퍼민트 한잔으로 느끼함을 지우려하듯, 딱 고만큼의 아름다움만이 존재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름다운 그림들은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가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리고 지워지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화가 듀잉의 몫인것 같습니다.

 

듀잉이 만약에 물감을 사기위해 막노동을 해야 했거나,  캔바스를 새로 장만할수 없어 그림위에 또다시 그림을 그려야 했던 상황속에서 고민하고 고통을 겪었더라면, 이 아름다운 선녀들은 우리에게 좀더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줬을지도 모릅니다.  (미술가는 배부르면 안돼? 꼭 고생하다 죽어야 미술이 완성돼? 이렇게 반문하고 싶으시죠?  영화 누리면서 떵떵거리다가 세상 하직한 대가들도 여럿 있죠.  듀잉의 예술은 거기까지도 미치지 못했겠지요.)

 

저는 듀잉의 그림들을 좋아합니다. 편안하고 좋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페이지를 여섯개씩이나 만들면서 상세하게 그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동시에 안타까움도 느낀다는 것이지요...  안개처럼 희미하게 사라지고 만 그의 예술세계가 안타까운 것이지요.

 

인생은...고통스럽지만...고통을 견디면...나는 조금 더 사람 냄새를 풍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고통을 견뎌야 하는 이유 같은것을 이렇게라도 찾게 되는군요.) 나를 불후의 명작으로 만들수 없다해도, 죽는 순간까지는 불후의 명작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해야겠지요 뭐...

 

2009년 12월 27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23:59

 

 

스미소니안 국립 미국미술 박물관, 듀잉의 작품 전시실 입니다. 2009년 7월 13일에 촬영한 것들인데요. 보시다시피...사진상태가 여엉 '아니올시다' 입니다. DSLR 갖고 다니기 전에 소형 디지털카메라로 대충대충 찍었던 사진들이라서.  (조만간 다시 들러서 작품사진들을 담아 오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에 전시되고 있는 이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스타인웨이 피아노사의 창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미국 백악관에 기증할것을 목적으로 제작된 것인데 Theodore Roosevelt 대통령 재임시 (1903) 듀잉이 '장식'을 담당한 것입니다.  이 피아노는 스타인웨이가 제작한 피아노중에서 십만번째 작품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도 이 피아노를 연주한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 피아노는 태프트, 윌슨, 하딩, 쿠어리지, 후버, 그리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임기까지 백악관에 있었다고 합니다.

 

 

 

흰 바탕에 금박으로 장식을 하고, 뚜껑 안쪽에 열명의 고운 아가씨들이 있는데요, 맨 왼편의 아가씨는 의자에 앉아있고, 나머지 아홉명은 원무를 추듯 서있는데요. 스타인웨이가 듀잉에게 작품을 의뢰하면서 America Receiving the Nine Muses (아홉명의 뮤즈들을 맞이하는 아메리카)라는 고전적 주제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아홉명의 뮤즈는 제우스와 네모신 (Mnemosyne) 의 아홉명의 딸들을 가리키는데 예술의 상징으로 서양 고전물에 많이 등장하지요.  듀잉은 뮤즈들을 그리면서 미국 건국 초기의 여성들의 옷차림을 한 여인들을 그려넣음으로써 서양 고전화에서 살찍 비껴갔다고 합니다. 뮤즈를 그리더라도 미국식으로 그리겠다는 자존감의 표현이었는지 알수 없으나 이를 애국적인 시각에서 해석하는 평자도 있습니다.

 

 

 

 

 

 

 

 

아래 작품은 In the Garden, 정원에서 (1892년) 작품입니다.

 

 

 

 

 

2009년 7월 13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redfox.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