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eums2010. 1. 17. 22:05

 

Delaware Art Museum 에서 활동하는 미술 안내인

 

 

박물관이나 미술관등, 공공 전시장을 다니다보면, 자원봉사로 전시 안내를 해주시는 분들을 만날수 있다.  이런분들을 미국에서는 Docent (도슨트)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이런 분들은 대개 미술관이나 해당 전시관에 자원 봉사자로 등록을 하고, 관련 교육을 받은후 활동을 하는 것이다.  어떤 전시장을 찾을때, 전시장 전반에 관한, 혹은 특정 전시 행사에 대한 안내를 받고 싶다면, 사전에 홈페이지를 검색하여 어떤 안내 프로그램이 있는지, 무료인지 유료인지, 미리 예약해야 하는지, 시간 맞춰가면 누구나 안내 받을수 있는 것인지 살펴보고 일정에 포함시킬것인지 결정하면 된다.

 

만약에 해외 여행중에 어떤 전시장을 찾을때, 이런 '전문 안내인'의 안내를 받을 기회가 생긴다면,  그리고 해당 언어를 익히 알고 있거나 즐겁게 배우는 입장이라면, 꼭 이런분들의 안내를 받을 것을 권한다. 가령, 영어공부 하는 사람이 미국에서 이런 도슨트의 안내를 받을 기회가 생기면, 기꺼이 따라 다니며 구경하고 들으시면 좋을것이다. (영어 듣기 공부 해결되면서 교양도 ~  ^^).  이런분들은 '자원봉사'로 하는 분들이 대부분이므로 사명감에 불타서 굉장히 성실하고 정성껏 활동을 하실 뿐 만 아니라 '팁'을 바라거나 받지도 않으므로 그냥 열심히 들어드리고 고개 주억거리고, 눈맞추고 흥미를 보이는 것으로 그분들께 '보람'을 선사할수 있다.

 

내가 워싱턴 바닥에서 '백수질' 을 하던 시절, 오갈데가 없어서 심심하던 시절, 허구헌날 포토맥강에 가서 피지도 못하는 담배만 작살내다간 '백수'에서 '폐인'으로 스킬 상승하는건 시간문제다 싶어, 겁이 덜컥나서 차비만 있으면 문제 해결되는  스미소니안 국립 박물관들을 하나하나 섭렵하는 것으로 미치겠는 실업자 시절의 강을 용케 건넜는데,  뭐 할일도 없고 한가하니 이런 '전문안내인'들의 안내도 착실히 받으면서 '국립박물관'들이 주는 온갖 '무료' 서비스의 혜택을 두루 섭렵을 한바 있다.

 

그러다보니 별별 도슨트님을 다 겪어 본 것이지...  (백수질도 이렇게 하면 신선노름이었을것이다...) 이리저리 겪은 결과 내가 파악하게 된 '전문 도슨트'가 갖춰야 할 덕목 몇가지를 스스로 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물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다.)

 

 1. 도슨트의 덕목중의 '왕중왕'급,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시간을 정확히 지킨다'이다.  한시간짜리 프로그램이면 죽어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한시간인거다.  50분에 끝내면 용서가 되지만, 61분에 끝내면 용서가 안된다. 무슨 말씀인가하면 규정된 시간안에 모든'설법'을 끝장을 내 줘야 한다는거다. (너무 아는것이 많아서 할 말이 많으면 따로 시간내고 사람 모집해서 특강을 하던가,  할말 많은것도 시간안에 정리해서 끝내줘야 하는거다.)

 

 2. '수다를 늘어놓지 않는다.' : 별것도 아닌 자기 삿적인 일화를 들이대며 귀한 시간을 보내서는 안된다.  자신이 안내해야 하는 것의 요점을 정확히 숙지하고 이를 수행해야 한다. (내가 경험한바, 1번 안 지키는 사람이 2번도 안지킨다. 최악이다).

 

 

 

 3. 제대로 공부해 가지고 와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 도슨트가 무료 자원봉사이건 아니건간에 기왕에 다른 사람들을 안내를 하겠다고 왔을때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정보를 정확히 숙지해야 한다.  사실 내가 도슨트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슨 석박사급 전문 지식은 아니다. 그냥 평이한 안내만 해줘도 고맙다. 내가 잘 모르는 평이한 내용을 그가 전해주면 내게는 아주 도움이 된다.  그런데, 가끔 나는 도슨트가 '허당을 짚는' 것을 발견한다.  제목이 없는 작품을 가리키면서 '재료'부분 명시된 것을 '제목'이라고 설명한다던가,  그림에 앨범이 그려져있는데 그것을 책이라고 설명한다던가.   이런 사소한 실수를 저지를때,  미리 들여다보고 사진기에 담아서 자료 확보하고, 그러느라 안내지까지 상세히 읽었던 나같이 세밀한 사람에게는 그런 실수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의 실수를 공개리에 반박하지는 않는다.  사소한 실수는 지나가도 무방하다고 판단하므로.  (죽을일은 아니니까...).  그냥, 좀, 사실 확인도 정확히 안해보고 사람들을 안내하는 일이 안타깝다는 생각은 한다. (좀 미리 기본 안내문이라도 읽고 와서 설명을 하시지...)

 

 

 

이 세가지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번,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2번,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이 3번이다.  사실 3번항목, 도슨트가 사소한 정보를 잘 못 전달하고, 잘 못 알고 그러는 문제는 1번 2번이 잘 지켜질경우 용서가 된다.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어떻게 다 아는가? 틀릴수도 있는것이지. 뭐 그낭 컨디션이 안좋으면 생각이 안날수도 있고.  그러나 1번 2번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 하는 중대한 사항이다.  1번 2번에서 망가지면 제아무리 똑똑해서 하늘을 날아도 이미 그는 차라리 없는게 나은 존재가 되고 만다.

 

내가 만났던 도슨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분:

 

코코란 미술관에 처음 가던날, 나혼자 미술관 문여는 시간에 맞춰서 일찌감치 가서 전시물들을 세밀하게 살피고 그리고 시간이 되어 안내를 받으러 갔는데, 아시아계의 멋쟁이 중년 여성이 나와서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코코란 미술학교 졸업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는 "한시간 안에 이 좋은 것들을 다 어떻게 안내를 하나..." 하면서 '너무 좋은게 많은데 시간은 너무 짧음'을 안타까워 하였다. 중국계 여성이었는데,  중국계의 영어 액센트였지만 아주 발랄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우리들을 안내했다. 그의 손에는 몇장의 카드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미리 준비된 동선에 따라서, 우리들을 편안하게 의자에 앉도록 배려를 해 가면서 그림 안내를 해 주었다. 그는 손목시계와 준비된 카드들을 번갈아보면서 시간을 체크하고 전달해야 할 내용을 체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물이 흐르듯 유연했다.

 

이 사람은 미술 석사 학위까지 갖고 있는 전문가였고, 그리고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정해진 시간안에 많은 새로운 정보로 나를 기쁘게 해 주었다.  (내가 또 한편 기뻤던 요소는,  비록 한국인은 아니지만 나와 비슷한 아시아계, 머리 다 커서 미국에 입국하여 공부하고 그리고 미국 본바닥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으로서  그가 아주 좋은 롤모델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때 함께 안내를 받았던 사람들은 미국 백인들, 미국 각지에서 온 고등학교 미술선생님들이었었다.).

 

 

나는 대부분 도슨트들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고, 안내가 끝났을때 감사하다는 인사를 반드시 한다. 가르쳐줘서 고마우니까.  가끔, 이게 아니다 싶으면 바람 새듯 그냥 그자리를 빠져나가는 편이다.  (그래도 된다.).  그러니까, 이게 아니다 싶으면 안내 받다 도망가버리는거고, 맘에 들면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입장이니까, 끝까지 자리를 지켰을땐 만족했다는 뜻이고, 그러니 감사 인사도 해야 하는 것이고.  내가 위의 세가지 덕목을 왜 블로그에 적는가하면, 혹시라도, 미술관 안내를 하려는 분이 있다면 참고해주십사 하는 것이다.  그러면 관객이 고마워할거라는 것이다.

 

언젠가, 미술관에서 혼자 노는데, 누군가가 "한국분이시죠?"하고 반색을 한다. "네..."  그는 반가워하면서 자신이 이제 곧 여기서 한국어로 안내를 하게 되어있다며 안내 받으러 왔냐고 물었다. '아닌데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를 무조건 반가워하니까 나도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네..." 이러고는 그 한국인의 한국어 안내를 받게 되었다.  이거 내 계획에 없던건데... 하지만 저렇게 반색을 하니 빠져나가기가 애매하네... (항복. 아 난 얼마나 마음이 약한가).

 

그분은 아름다운 모국어로 (아, 영어에만 둘러싸여 있다가 한국어로 설명 들으니 귀가 다 행복하구나~ 달콤하여라~) 아주 친절하게 안내를 시작하셨다... 내가 모르던 내용도 많이 알려주셨다. 친절하고 박학하고, 열정이 넘치고, 여러가지로 장점이 많은 분이었다.  하지만 내가 학교에서 학생들 프레젠테이션을 평가하는 방식으로 그분의 안내를 평가하게 된다면 그분은, 좋은 점수를 기대할수 없을 것이다. 

 

 

 1. 시간을 지켰는가?  한시간짜리 프로그램을 1시간 45분만에 끝냈다.  오 마이 갓  (다리 아프실텐데...)

 2. 가족 얘기를 많이 하셨다.  (난 그분의 가족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

 3. 내가 나름 존경하는 한국의 원로 석학에 대하여 '미국책 베껴서 발표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함부로 이야기를 했다. 그 학자는 미술하고 상관도 없는데 갑자기 왜 상관도 없는 주변지식을 논하는가?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망각한걸까?  미술관 안내인이면 미술관 안내에 촛점을 맞춰주셔야 하는데...촛점 상실. 내가 만약에 그 남의책 베껴먹기 했다는 학자의 조카나 동생이었으면 어쩌려구?  그것이 얼마나 실례인지 모르는가... ).

 4. 기본 정보 착각 내지는 망실 (이것은 앞의 사항이 지켜질경우 내가 별로 신경 안쓰는 부분이다...내 수업에서는 얄짤없이 점수 깎지만,  뭐 여기는 미술관이니까.)

 

나는 그래서 그분의 안내자세와,  거기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자리를 떠나지도 못하고 지키고 있어야 했던 나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곰곰 해보다가 문득 이런 상상을 해보았다: "만약에 내가 일정이 촉박한 대통령부인인데, 혹은 대통령인데, 내가 시간을 내어 미술관에 갔다고 쳐보자.  그리고 그분이 한국 대통령인 나를 안내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분이 한국 대통령인 나를 안내할때도 오늘과 같은 안내를 하셨을까?   아닐걸.  아닐걸.  그분은 시간 정확히,  동선 정확히 그려가면서 아주 체계있는 안내를 해 내셨을거다."

 

그러면, 답은 나오네.  미술관 안내인은, 그것이 직업이건 자원봉사이건 뭐건 간에, 유능한 안내인으로 존경을 받으려면, 그가 안내하는 평범한 관객들을 마치 국가정상이나 다른나라에서 온 국가정상을 안내하듯, 존경하는 마음으로, 치밀하게 계획세워서 정확하게 자신의 일을 수행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내 안내를 받는 사람을 '최고의 관객'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안내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안내 받는 사람들을 앞에 세워놓고 무슨 '훈장질'하려는듯 세월아 네월아 멋대로 흘러라 이러면서 갈팡질팡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나의 결론:

 

(1) 내가 혹시 나중에 누군가를 안내할 일이 있을때

(2) 내가 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할때

 

나는

 

(1) 나의 청중을 '국가원수'를 대하듯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며, 국가원수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듯 빈틈없이 준비를 하며  (상대가 누구이건 차별없이)

(2) 청중이 나로부터 '존중받았다'는 느낌이 들도록

행동해야 한다. 이래야만 내가 프로페셔널의 세계에서 살아남을수가 있다.

 

 

 

또한가지, 그러면 그 한국어로 안내 하신분이 개선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그분은 한번 돌아봐야 한다, 혹시 그분이 미국인들을 상대로 영어로 안내를 하실때도 시간 초과하고 안내 내용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늘어 놓으시는지. 나는 그분이 미국인/국제적인 관객들 상대로 영어로 안내할때는 시간도 잘 지키고 잡담도 별로 안하실거라는 상상을 한다.  아마도 '모국어'로 '한국인/한국계' 사람들을 안내하다보니 정서적으로 좀더 친밀감을 느끼면서 좀더 속의 말을 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함정'이다.  그것이 그분의 '문제'일수 있다.  자제하셔야 한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한국어권 관객을 상대로 푹~ 퍼지시면 실격이다.  푹 퍼지지 말고 미국인이건 국제인이건 동등한, 동질의 관객으로 한국인을 대해야한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은 미술관에서 안내를 하는 것이다. 그 안내에 촛점을 맞추셔야 한다. 나머지 하고 싶은 말은 안내 끝나도, 아쉬워서 자리 못떠나는 정 넘치는 관객들이 있다면 그분들과 따로 시간을 내서 하시면 된다.  안내인은 안내인의 본분에만 충실해주면 된다.  시간 정확히 엄수하고, 잡담의 욕망도 자제하고, 미리 짜여진 계획에 따라 정확히 안내를 하고, "안내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이 다 되었사오니 오늘 일정은 여기서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각자 관람을 즐겨주시고, 혹시 제게 따로 질문이 있으신 분?  "  이렇게 마무리 해주셔야 한다. (나 안내인 교육 받은적 없지만...상식적으로 생각할때 이러하다는 것이다. 그냥 상식선에서만 정리가 되어도 나는 감사해 할 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10. 1. 17. 09:12

 

흐리고 포근한 겨울, 토요일 아침.

국립 미술관으로 소풍을 갑니다.

 

 

 

 

 

 

워싱턴 마뉴먼트 앞에 차를 세워놓고, 씩씩하게 걸어서 갑니다.

가는 길에 조각공원 연못에서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나도 작년엔 여기서 스케이트를 탔었지...)

멀리, 중앙에 보이는 허시혼 현대 미술관, 그리고 그 앞에 리히텐쉬타인의 '리본같이 생긴' 노란 조각작품도 보입니다.

 

 

 

 

 

 

 

 

 

걷다가 지쳐서, 미술관에 도착하자마자 카페테리아에서 도시락을 먹습니다. 유부초밥과 뜨거운 차한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오늘의 목표 지점은 '현대미술'이 모여있는 국립 미술관 동쪽 빌딩.  서쪽 빌딩 입구로 들어간후 지하 통로를 통해 동관으로 가는데요. 이곳은 빛의 길 입니다. 지하 통로입니다.  SF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지요.

 

 

 

 

 

 

 

몇가지 현대미술 특별 기획전이 있어서 보러 왔는데,  아쉽게도, 특별전 작품들은 모두 '사진 촬영 금지'라서 눈으로만 구경을 해야 했습니다.  여전히 칼더의 대형 모빌이 반깁니다.  멀리 벽에 보이는 색종이같이 조각조각 붙어있는 것은 Kelly 의 작품입니다.

 

 

 

 

 

몇달만에 가본 것인데, 연말 사이에 미술관 전체 전시장이 대대적으로 새로 조직된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서관에 있던 것들이 동관으로 이동했고, 변화가 심하군요. 심지어 이곳에 몇해동안 들락거린 도슨트 조차 이렇게 확 바뀐줄 몰랐다며 정신없어 합니다. (몇해동안 조용하더니 어떤 변화를 모색하는듯 하군요.)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 작품을 모아놓은 전시실인데요 (서관에 있던것들이 동관으로 대거 이동). 중앙에 보이는 큰 그림이 모네의 그림이지요. 

 

 

 

 

 

인상파 그림 이어집니다. 오른편에 보이는 것이 모네이고요.  저 안쪽에 보이는 작품들은 세잔느.

 

 

 

 

 

 

제가 좋아하는 영국의 표현주의 작가 작품인데요.  왜 이 작가의 그림을 좋아하는가하면,

   열정이 끓어 넘쳐서, 액자 안에 얌전히 있을수 없어서, 액자 전체를 그림판으로 활용한, 그 파격이 매력적이라 그렇습니다.  이글이글 끓는 난로속의 조개탄 같기도 하고,  수박 같기도 한, 전체적으로 열정적인 분위기가 힘차고 좋습니다.

 

 

 

 

 

벽면 전체, 통유리창. 그 유리창 밖의 워싱턴 디씨 풍경, 그 자체가 예술이라는 것이겠지요.

 

 

 

 

 

 

 

 

 

Sol Levit 이라는 개념미술의 창시자가 있거든요. 그 작가의 벽화 작품입니다.  제가 이 작가를 소개하고 싶어서 근질근질 한데요. 때가 되면 짠짜잔~  하고 소개해드리지요.

 

 

 

 

 

 

자, 앤디 와홀과, 리히텐스타인과 로젠퀴스트가 있군요.

 

 

 

 

 

 

아, 드디어 국립미술관 소장의 Horace Pippin 을 만났습니다!~  제가 호레이스 피핀의 페이지를 진작 만들어 놓고도 마무리를 못한 이유가, 이 작품을 제 눈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거든요.  이걸 꼭 본후에 마무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작품을 마티스 전시실 옆에서 발견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지요...선구적인 20세기 현대미술 속에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호레이스 피핀! 오, 저는 이 전시장을 기획한 큐레이터님을 무조건 존경하기로 했습니다...

 

 

 

 

 

 

왼쪽부터 클라인, 스틸, 잭슨폴락 두점이 보입니다.

 

 

 

 

 

 

마티스 색종이 오려서 만든 작품 전시실 입구입니다. 마티스의 싸인도 근사해보이지요? 마티스의 명랑한 색감을 좋아합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요.  오늘, 덕분에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워싱턴 디씨,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 동관 (East Building) 에서

 

2010년 1월 16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10. 1. 11. 23:18

하워드 파일 전시실, 델러웨어 미술관, 2010년 1월 9일 사진 촬영

 

 

 

 

미국의 19세기 삽화가 (illustrator) 하워드 파일 (Howard Pyle 1853-1911)은 미국 델러웨어주의 주도(수도)인 윌밍턴 태생입니다.  델라웨어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288) 과 인근의 Brandywine River Museum (http://americanart.textcube.com/43 ) 에 하워드 파일의 전시관들이 있습니다.  브랜디와인 뮤지엄에서는 전시물 사진을 찍을수가 없어 자료 소개를 할수가 없고, 델라웨어 미술관에서는 영구 소장품에대한 사진 촬영이 허용이 되어 이곳에서 하워드 파일의 일러스트레이션 작품들을 사진에 담아올수 있었습니다.

 

 하워드 파일은 아직 사진이 보편화되지 않던 당시, 청소년을 위한 각종 이야기책의 일러스트레이션및 정기간행 인쇄매체를 위한 삽화가로 활동하던 화가입니다.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앤드루 와이어드를 소개할때, 그의 아버지가 미국 삽화계의 거물이었다는 (http://americanart.textcube.com/44 )이야기를 한적이 있는데요, 그 N C Wyeth (1882-1945) 보다 더 큰 거물이 Howard Pyle 이었다고 할만합니다. 하워드 파일이 N C Wyeth 의 스승이었지요.  하워드 파일은 직접 미술학교를 열어 운영을 한 적도 있고요, 후에 N C Wyeth 가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후진 양성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 하워드 파일과 N C 와이어드및 그 후학들을 일컬어 브랜디와인 리버 그룹 (Brandywine River School)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사진 클릭하시면 커집니다. 영문자료 읽기 원하시면 두번클릭하여 큰화면으로 읽으시면 편안하실겁니다.

2010년 1월 9일 델러웨어 미술관에서 사진 촬영 (전시장 입구, 안내문)

 

 

 

하워드 파일은 '로빈후드'와 같은 이야기의 삽화뿐 아니라, 그 자신이 직접 이야기를 짓고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워드 파일이 작업을 할때나 후진양성을 할때, 그가 역설한 '삽화의 원칙'은 -- "글에 씌어진 내용을 삽화로 재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책에 씌어진것은 이미 독자도 알고 있으므로 그림으로 반복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행간의 장면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말로 '행간을 읽으라'는 표현이 있고, 영어로 "Read between the lines"라고도 하는데요, 글에 명시되지 않은, 그러나 그 속에 간직된 것을 파악하고 포착하여 재현해 내라는 것이지요.  글에 씌어진 내용을 재현하기도 어려운데, 행간의 내용을 상상하여 그리기 위해서, 삽화가는 글을 철저히 이해하고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워드 파일에게 있어서 삽화는 단순히 글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뛰어넘어 한단계 높여 놓는 완성작업이었겠지요.  삽화가에게 이정도의 프로페셔널리즘이 있어야 이야기의 삽화가 진정으로 살아서 독자에게 다가갈수 있을 것입니다.

 

 

 

 

 

인어공주

 

 

The Mermaid (인어공주)

 

하워드 파일은 1911년 이탈리아의 피렌체 (플로렌스)로 벽화 공부를 하러 갔다가, 그곳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던중 신장병으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그의 플로렌스 작업실에 세워져 있었던 미완성 작품입니다.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델라웨어 미술관이 파일 전시장 입구에 이 그림과, 이 그림이 세워져있던 그의 작업실 그림이 이젤에 세워져 있습니다

 

한스 안델센의 '인어공주'이야기를 대개 알고 있지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이 인어공주 이야기를 '망쳐 놓아버려서, 어쩌면 오늘날의 청소년들은 '엉뚱한' 인어공주 이야기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제가 어릴때 읽은 안델센의 인어공주 이야기는 가슴이 아파서 책장을 넘기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어릴때,  양장판, 일러스트레이션이 환상적인 동화책 (필시 일본책 번역한것)속의 인어공주 이야기를 한 번 읽은후에, 그 이야기가 너무 가슴이 아파서, 일부러 그 부분을 얼른 지나치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그 부분은 책을 절대 안 열어보는거죠. 왜냐하면, 가슴이 아프니까 피해가는거죠.  그렇게 가슴아파서 피해갔던 이야기가 인어공주 이야기하고, 플란더스의 개 마지막 장면.

 

돌아보면, 어릴땐 두가지를 무서워했어요.

 1. 영국 동화책에 나온 아일랜드의 '반시'라는 무서운 요정 -- 무섭게 생겼으니까

 2. 인어공주의 마지막 장면과 플란더스의 개 마지막 장면

저는 이 두가지 '공포'와 '슬픔'을 피해다니면서 책장을 넘겨야 했습니다. 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무섭습니다... 저에게는 삶이 아직도 어두운 숲처럼 무섭고, 이세상에 슬픈일이 일어나는것이 슬픕니다.

 

그림속의 장면은 인어공주가 인간세상을 구경하러 왔다가, 배가 난파되어 물에 빠진 왕자를 구해내는 장면인것 같죠. 왕자는 의식이 없고, 공주는 자신이 구해낸 그 인간의 왕자에게 반하고 말지요... 인어공주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절대 한마디 말도 해서는 안되고, 사랑하는 왕자를 찔러 죽일수도 없고, 결국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택할수밖에 없는데. 그 인어공주의 침묵을 생각하면, 어릴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가슴이 무너집니다. 이 세상에 여러가지 형벌이 있는데, 그중에 한가지가 침묵의 형벌일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이 그림 앞에 하염없이 서서,

내가 어릴때나, 성인이 된 지금이나, 인생은 여전히 무섭고 슬프고 고통스러운거구나, 그리고 아름답기도 한거구나 이런 생각을 두서없이 했겠지요.  이 그림앞에 서면 파도소리가 들리고요, 그리고, 한숨이 나옵니다. 한숨이...  말할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침묵해야 만 하는 것에 대하여.

 

 

 

카리브해의 해적

 

자, 독자 여러분

혹은,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이 그림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The Buccaneer was a Picturesque Fellow (그 해적은 특이한 친구였다) 1905

1905년 12월 월간지 Harpers Monthly Magazine 에 하워드 파일이 실은 '보물 마을의 운명' 삽화

Oil on Canvas

 

 

 

델라웨어 미술관에 '어린이' 관객들이 단체로 올때면 전문 안내인이 어린이들을 이끌고 이 해적 그림 전시실로 안내를 한다고 합니다. "뭐가 보이나요?"하고 물으면 꼬마들이 "조니 뎁!" 이라고 외친대요. 영화 카리브해의 해적에 Jack Sparrow 연기를 한 Johnny Depp 을 아이들이 떠올리는 것이지요.

 

 

영화 '카리브해의 해적'을 제작할때, 제작진은 당시의 해적의 복장이나 장면의 자료와 고증을 위하여 델러웨어 미술관을 찾아와 협조를 구했다고 합니다. 하워드 파일의 해적 그림들의 많은 부분이 영화에 등장하는 해적들의 복장이나 장면에 반영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화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때 Delaware Art Museum 도 올라간다고 합니다.

 

 

 

 

 

 

 

 

Which Shall be Captain? (누가 캡틴이 될것인가?) 1911

Oil on Canvas

 

이 그림은 1911년 1월 Harper's Monthly Magazine 에 실린 작품으로 'The Baccuneers (해적)'라는 시의 삽화로 그려진 것입니다. (*참고로, Baccuneer는 해적중에서도 17세기 서인도 쪽에서 활약하던 해적들을 일컫습니다.)  그림 아랫쪽에 보시면 삽이 있고, 보물상자로 보이는 상자가 드러나있지요. 그리고 두명의 해적이 서로 맞장을 뜨고 있습니다. 결국 해적들중에서 가장 힘이 센 이 두명중에 이기는 사람이 캡틴이 되고 저 보물상자에서 나오는것중에서 가장 많은 몫을 차지하게 되겠지요.

 

당시 해적들은 마치 군대조직과 같이 '나름대로 법과 질서가 분명'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다투기는 하되 한사람이 죽을때까지 싸우는것은 아니고, 둘중에 하나가 항복하면 그것으로 게임 오버라고 합니다. 일단 캡틴이 정해지면 질서가 잡히는것이고요.  그 당시 해적선을 탔던 사람들은 일단 크게 한건 하면 그것을 서로 약속한대로 분배한 다음에 각자 자신의 고향으로 가서 집사고 땅사서 살았다고 합니다. (물론 다시 해적질을 하러 돌아오는 사람도 있었겠지만요).  해적이 되기 위해서 배에 오를때, 이들은 계약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만약에 '작업(?)' 도중에 팔을 하나 잃으면 얼마, 다리 한짝 잃으면 얼마, 눈을 하나 잃으면 얼마, 목숨을 잃으면 얼마 이런식으로 '보험' 들어두듯 보상금 계약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수입'이 생겼을때 그런 보상 계약이 철저히 지켜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해적을 연구한 사람들은, 해적의 시스템이 꽤나 계약적인, 그리고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혁신적인 시스템이었다는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해적들이 해적질을 하긴 했지만, 그 조직이나 수익 분배구조는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투명했다고 하는 것이지요.

 

아 이그림은 1911년에 그려진 것이쟎아요. 하워드 파일이 이탈리아 플로렌스에서 1911년에 사망하쟎아요. 이 작품이 그의 마지막 해적 그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The Flying Dutchman (날으는 네덜란드인) 1900

Oil on Canvas

 

제 블로그 이웃친구인 나로 (http://wowchan.textcube.com/) 님이 설명을 덧붙여주셨습니다.
***

검색해보니


[음악에서 'Flying Dutchman'은 '방황하는 네덜란드 인(Der fliegende Holländer)'를 뜻합니다. 바그너가 작곡한 곡입니다.

폭풍우를 만나 난항 중에 있던 네덜란드인 선장이 구출된 뒤, 다시는 배를 타지 않겠다고 신에게 맹세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맹세를 저버리고 다시 바다로 나가 배를 타고 항해합니다. 신은 이렇게 맹세를 지키지 않은 벌로써, 그는 유령선을 타고 영원히 7대양을 헤매도록 합니다. 그러다가 만 7년째가 되자 단 한 번 상륙이 허용되지요. 그러다가 한 여성에 의해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고, 북유럽에 떠돌고 있던 전설에 기초한 것입니다. 즉 한 네덜란드 선장이 신에게 저주를 받아 영원히 희망봉 근처를 맴돈다고 하는 것이지요.

Flying Dutchman은 이 전설 속의 유령선이나 그 유령선의 선장을 일컫는 말입니다.]

라고 돼 있네요! 이종격투기선수중에 플라잉 젠틀맨이라는 별명을 가진 레미본야스키 라는 네델란드 흑인이 있지요... 흠.

 

예 위의 그림은 1900년 12월 8일 Collier's Weekly 에 실린 전설의 일러스트레이션입니다.  위에 나로님이 옮겨주신대로, 동인도해를 항해하던 네덜란드 배의 선장이 희망봉 근처에서 풍랑을 만났다고 합니다. 이때 그 네덜란드인 선장이, 내가 설령 인류 최후의 날 (Judgement Day 죽을때까지)까지 항해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 곳을 통과하겠노라고 장담을 했답니다.  사탄이 이것을 듣고 그 선장과 선원들에게 저주를 내렸지요.  그래서 이들은 끝없이 영원히 항해를 하는 저주를 받았다고 합니다. 오직 7년에 한번 뭍에 오를수 있는데, 이때 순정한 여인을 만나 영원한 사랑을 약속받으면 저주가 풀릴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 그림은 해적선이라기보다는 '유령선'이야기라고 할만하죠.  그런데 해적선과 유령선 이야기는 늘 함께 손잡고 다니죠. 유럽의, 항해를 많이 해야했던 해양국가들 문화에 이런 유령선이나 해적선 이야기가 많겠지요.

 

그런데, 저 선장님, 참 근사해보이지요. 아무리 풍랑이 쳐도 절대 무릎꿇지 않겠다는 자세이쟎아요. 허만 멜빌의 해양소설 'Moby Dick (백경)'에서 선장 Ahab (에이합)이 바로 그런 인물이지요. 절대 굴하지 않는.  그 캡틴 에이합의 이미지가 헤밍웨이의 The Old Man and the Sea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하는데요.  악마의 저주를 받을망정 절대 굴복하지 않는 그 자세에 우리는 매료되지요. (음,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우리는 굴종하고, 타협하고... 아마 그런 인간의 유약함때문에 이런 전설적인 인물에 더욱 매력을 느끼는 것이겠지요.)

 

 

 

 

 

Marooned (유배된 해적) 1909

OIl on Canvas

 

 

제목 그래도 유배된 해적입니다.  위에 적은바와같이 해적 사회가 조직과 질서가 잡혀 있었고, 나름대로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유지가 되었는데, 해적들 내부의 규칙을 어길경우, 이렇게 외딴곳에 버리거나 유배시키는 식으로 처벌을 했다고 합니다. 이 해적은 뭔가 잘못을 저지르고 외딴섬에 버려졌는데요, 그림을 확대시켜서 자세히 보시면 물통 하나가 보입니다. 물 한통. 옷가지. 그리고 사방에서 넘실대는 파도와 물새들.  최소한 저 물새라도 잡아먹으면 며칠 연명할수 있겠네요.

 

이러고 있다가 해적선이 다시 돌아와 배에 실어주기도 하고, 혹은 운 좋으면 다른 지나가는 배를 얻어타고 뭍으로 갈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식의 처벌은 '잘못했으나 죽여버리겠다'는 식의 무법천지식 해법이 아니라 고립시켜서 고립감을 맛보게 하거나, 버리되 연명할 최소한의 물은 주고 가는 식으로 인정을 보였다는 것이지요.  해적의 세계가 도적놈들이 사회였을망정 무법천지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아아, 버려진 해적처럼 쓸쓸하구나~"  외로울땐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그림속의 파도소리를 떠올려도 좋겠네요.

 

 

 

 

 

 

세일럼의 늑대

 

 

A Wolf Had Not Been Seen in Salem for Thirty Years (세일럼에서는 30년간 늑대가 나타난적이 없었다) 1909

1909년 12월 하워드 파일 자신이 Harpers Monthly Magazine 에 실은 이야기,

The Salem Wolf (세일럼의 늑대)와 그 삽화

Oil on Canvas

 

 

이 늑대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 

 

세일럼은 뉴잉글랜드 지방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보스톤 인근의 항구도시 입니다.  이곳에서 실제로 마녀사냥의 아픈 역사가 있었고, Arthur Miller 의 The Crucible 이라는 희곡도 그 마녀사냥의 일화를 그린 것인데요.  저는 2009년 8월에 그 세일럼이라는 도시에 가본적이 있습니다. 한여름이었는데도, 세일럼에 도착하자 도시 전체에 안개가 낮게 깔리고 으스스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지요 -- 아 하, 이런 자연환경이기때문에 세일럼에 마녀이야기가 많고, 사람들이 어떤 안개 자욱한 상상을 했겠구나.

 

 

이것은 그때 세일럼 시내에서 찍은 공동묘지 사진입니다. 마녀 박물관이라던가 해적 박물관도 있고요, 시내 전체가 마녀의 도시처럼 보이지요. 일부러 그런 분위기를 관광상품으로 개발해서 관광도시로 먹고 사는것 같았습니다. 물론 항구도시이기도 하지만요.

 

 

자 이런 안개낀 으스스한 항구도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교회 집사의 딸이었던 미리암은 마을 청년과 혼인을 하기로 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마녀 할멈의 마법에 걸려서 그만 늑대로 변하고 맙니다.

늑대로 변한 미리암은 자신의 가족들을 공격하게 됩니다.

미리암의 약혼자였던 청년이 그 늑대에게 상처를 입혀 몰아냅니다. 

그런데 아침이 되어 인간으로 되돌아온 미리암에게 상처가 있는것이 발견됩니다.

청년은 자신이 늑대에게 입힌 상처와 미리암의 몸의 상처가 똑같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결국 미리암은 그 상처로 인해서 죽음을 맞이하고, 미리암의 가족들은 저주에서 풀려납니다.

 

 

슬픈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 어디서 들어본것 같지 않은가요? 

 

제가 어릴때요, 아주 아주 어릴때요, 영화관에서 '나자리노'라는 영화를 했거든요. 그 나자리노라는 영화의 주제곡이 참 슬프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꽤 인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 가수가 그 곡을 번안해서 불렀습니다. 제가 그 노래 가사를 기억해요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그대 음성 들릴듯한데

왠일인지 보이지 않은 그대모습 사랑합니다

나나나나 나나나나나 ~~

 

그 나자리노 영화를 제가 안봐서 모르지만, 대략 이야기는, 뭐 마을의 어떤 아이가 태어났는데, 늑대가 될 운명이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청년으로 성장한 후에 늑대가 되었다가 사람이 되었다가 뭐 변신을 했던것 같습니다.  그러니 비극적이었겠지요.  이 늑대 이야기를 만나니 그 나자리노라는 영화 이야기가 생각이 나는군요.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여우'가 변신을 하는데 북미나 남미에서는 '늑대'가 인간으로 변신을 하거나 인간이 늑대로 변신을 하거나 그런것 같지요?  약혼한 청년한테 맞아 죽을 운명의 아가씨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죽게 만든 청년이나, 참 딱하군요.

 

 

달의 요정

 

 

달의 요정 삽화 1895

Oil on Board

 

 

 

 

그의 삽화가 담긴 책

 

 

 

하워드 파일의 주요 일러스트레이션 작품들을 몇 가지 들여다 보는 것으로 미국의 일러스트레이션의 역사에 남은  큰 별의 자취를 살펴봤습니다.  미국에서 일러스트레이션 대가들의 작품을 볼 기회가 많은데요, 그때마다 어릴적 생각이 나곤 합니다.  제가 성장할 당시에는 '전국민'이 모두 가난했으므로, 제가 가난하게 성장했다고해도 그게 특별히 고생스럽지는 않았는데요, 어린시절 딱 한자기 아쉬운것은 읽을 책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었지요.  어쩌다 손에 들어오는 칼라 명작 동화집의 삽화들은 얼마나 근사하던지!  아, 온종일 그런 책들속으로 파고 들어가고 싶었지요.  글씨와 그림과 이야기가 어우러진 그 환상의 세계에 아주 빠져서 현실로 돌아오기가 싫었지요.  그러나 읽을 책은 한정되어 있었고, 집에 있는 책이나 달달 외우는 수밖에...  아, 그 어린시절, 내가 이런 삽화의 원화들을 볼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 그 어린시절 내게 이런 삽화가 가득한 세계명작동화책이 많았다면 나는 얼마나 좋았을까, 뭐 그런 아쉬움이 든다는 것이지요.  책을 많이 안사주신 부모님에 대한 원망보다는, 어릴때 책이 보고 싶은데, 차마 부모님한테 책 사달라는 소리도 할수 없었던,  아무도 감히 부모님께 무엇을 사달라고 졸라본적이 없었던 그 어린시절의 풍경이,  정성들여 그려진 삽화위에 겹쳐지더란 것이지요.  가능하면, 시간을 조작할수 있다면, 이 아름다운 이야기들과 이런 대가가 정성껏 그린 삽화들을 -- 어린시절의 나에게 가져다 주고 싶어요.  그러면 어린 나는 얼마나 행복해할것인지...

 

아, 어린 내가 아닌, 오늘날의 어린이들에게 아름다운 이야기와 책을 선사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저는 동화의 삽화가들이 어마어마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요. 아이들에게, 어른들에게, 우리들에게 꿈을 주쟎아요. 고맙습니다 삽화가님.

 

2010년 1월 10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Books2010. 1. 11. 06:59

 

The Pre-Raphaelites: Romance and Realism (Abrams Discoveries)

 

The Pre-Raphaelites: Romance and Realism  by Lawrence Des Cars

 

 

델라웨어 미술관은 (http://americanart.textcube.com/288) 미술관 관계자의 주장에 따르면, 세계에서 프리라파엘 미술품을 가장 방대하게 소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프리라파엘예술은 영국에서 18세기 중엽과 말기에 일어난,  르네상스 이전의 예술로 복귀하고자하는 운동이었는데요, 종교, 미술, 문학등 다양한 측면에서 이런 '복고적' 운동이 펼쳐졌습니다. 왜 이런 운동이 일어났는가하면, 우리는 세계사시간에 르네상스를 고대로의 복귀, 인간성의 회복으로 배우고 지나갔지만, 어떤 사람들은 르네상스 이후에 인간세상이 타락했다고 본것이죠. 특히 영국에서 산업혁명과 도시화로 사람들의 삶이 더욱 곤궁해지고 피폐해진 면이 있고, 시골 처녀들이 도시로 가서 하녀나 창녀로 전락을 하기도 했고, 이런 현상에 대해서 희의하면서 중세의 '가치'나 아름다움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지요.

 

그래서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를 비롯한 일련의 화가 작가들이 활동을 펼쳤는데, 프리라파엘 (라파엘로이전의 예술) 운동은 단기간의 어떤 현상에 그치고 말았지요.

 

그런데 영국에서 한때, 소수가 활발하게 펼쳤던 이 프리라파엘예술 작품들을  어떻게 미국의 델러웨어 미술관에서 다수 소장하게 되었는가하면, 미국인 Bancroft 라는 사업가가 친구의 조언으로 프리라파엘 예술 작품만 수집을 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는 그의 수집품을 델라웨어 미술관에 기증을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프리라파엘 작품들을 미국의 델라웨어 미술관에서 감상할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도 미술사책을 훑거나, 가끔 미술관에서 신비하고 환상적인 이런 그림들을 스치면서도 이것의 정체를 정확히 알수 없었는데요, 델라웨어 미술관에서 프리라파엘 예술의 정체를 확실히 알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술관 안내인의 설명도 들었고, 미술관에 상세히 정리해 놓은 안내문도 읽었고, 작품들도 거의 모두 사진기에 담았고, 그리고 간단한 안내서도 한권 샀습니다. 이 책입니다. 그냥 작은 안내서인데요, 그것으로도 제가 알고자 하는 내용은 충분한것 같습니다.

 

미국미술은 아니지만, 나중에 혹시 시간이 되면 프리라파엘 예술에 대하여, 작품 설명과 함께 족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프리라파엘 운동을 이해하면, 이것이 미국의 어떤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는지도 가늠이 됩니다. 제가 미국 미술관에서 본 작품들중에도 이런 분위기의 작품들이 다수 있었으니까요.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10. 1. 10. 22:07

 

델라웨어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288) 의 전문 안내인 (docent) 에게서 들은 이야기 입니다. 미국이 영국이나 유럽 열강의 식민지에서 출발하여 1776년 독립선언을 하고 신생국으로 성장해 나가쟎아요.  그러니까 그 당시 미국의 문화는 척박했지요.  그야말로 근본은 유럽땅이고, 이들은 식민지의 주민들이니까요.  이 식민지에서 살던 부유층은 자녀들을 유럽으로 보내 교육을 받게 했고,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미국땅에서 어떻게든 자력으로 살아나가야 했는데요, 유럽에서 교육받지도 못하고, 미국 내에서도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도 못한, 스스로 기술을 연마한 '미술가'들도 있었겠지요. 

 

제가 소개한적이 있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활동했던 조슈아 존슨 (Joshua Johnson http://americanart.textcube.com/34 )역시 독학으로 그림을 익힌 초상화가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속의 아이들이 어쩐지 '어른의 이목구비'를 하고 있는 '대갈장군 아이들'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서툴게 혼자 익힌 그림이므로 아이들 얼굴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비례는 어떠해야 하는지 잘 알수 없었던 것이지요.  초기의 초상화가가 조슈아 존슨 뿐만은 아니었고요, 화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채 그냥 집안의 가보로 전해내려오던 초상화들도 많았지요.  그래서 미술관을 산책하다보면 미국 건국 초기의 민간 초상화중에서 '작자미상' 작품이 종종 보입니다.  서툴고, 어설픈.

 

델라웨어 미술관 전문 안내인의 설명은 이러합니다. 당시 (식민지시절과 건국 초기 당시)에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이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초상화 주문을 받았대요.  그래서 이들을 Tinker (땜쟁이)에 비유를 하더군요. 옛날에 제가 어릴때는 정말 솥단지 깨진고 그런것 땜질해주는 '땜쟁이'가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냄비나 솥단지를 수리해줬거든요. 미국에서도 그러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초상화쟁이(?)들이 이집저집 다니며 초상화를 주문받을때, 이들이 주문받아 그린것은 오직 '얼굴과 머리통'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뭐 오늘날의 포토샵과 비슷하다고 할만한데요, 미리 화판에 몸과 배경을 다 그려가지고 다니는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신사가 초상화를 주문하면 '신사몸통'을 미리 그려놓은 화판을 꺼내어 거기다가 그 주문한 신사의 얼굴만 그려 넣는 겁니다. 결혼한 여자가 주문을 하면 결혼한 여자의 몸이 그려진 화판에다가 역시 주문자의 얼굴만 그려 넣고요, 아이의 초상화를 주문받으면, 아이의 몸통이 그려진 화판에다가 주문한 아이의 얼굴만 더 그리는겁니다.  그러니까 머리를 제외한 다른 부분은 이미 기성품을 만들어서 가지고 다녔다는 것이지요.  사람 몸이야 사회적 신분에 따라서 의상만 다를뿐 비슷비슷 하니까 그냥 대충 몸과 배경을 완성해놓고, 거기다가 사람 얼굴만 비슷하게 맞춰서 그리는 것이지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 어릴적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구식' 결혼식을 하셨습니다. 우리 어머니 친정집 마당에서 전통식으로 혼례를 치른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부모님 결혼 기념 사진은 우리가 폐백드릴때 맞춰 입는 그 전통복장의 흑백 사진입니다.  어머니는 또래 친구들중에서 '흰 웨딩드레스'을 입고 결혼 사진을 찍은 것을 무척 부러워하셨습니다. 엄마 소원이 그 흰 서양식 드레스를 입어보는 것이었지요. 제가 초등학교 2학년때였나, 아직도 우리집이 셋방살이를 할때였는데,  어느날 우리집에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면사포를 뒤집어 쓴 우리 엄니와, 양복을 입은 우리 아버지의 웨딩사진 액자'가 하나 생겼습니다.  어린 저는 잘 몰랐지만, 그당시에 집집이 돌아다니면서  아무거나 맘에드는 사진을 주면 그 사진을 서양식 웨딩 사진에 합성을 하여 액자를 만들어다 주는 서비스를 하는 사진쟁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엄마는 그렇게해서라도 웨딩드레스를 입은 사진을 갖고 싶었었겠지요.  뭐, 얼굴은 우리 엄마, 우리 아빠이니까, 철없는 우리들은 그 사진을 보면서 신기해했습니다. 분명 우리 엄마, 우리 아빠이니까요.   하지만, 그날 저녁에 우리 엄니는 완고한 우리 아버지한테 무섭게 '야단'을 맞았죠 뭐. 하하하.  "결혼식을 번듯하게 잘 해놓고, 뭐가 답답해서 이따위 남의 몸뚱이에 얼굴을 붙여놓고 좋아하는건가. 이게 도대체 뭔가?  (뭐 애들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인가, 기타등등)" 하하하. 

 

엄마는 단지...웨딩드레스 입은 사진이 한장 갖고 싶었을 뿐인데...

 

아무튼 그 사진은 그 이후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민간 초상화쟁이들이 그런식으로 초상화를 그려주러 가가호호 돌아다녔다고 하는군요. 물론 이런식의 초상화일망정...가난뱅이는 아예 엄두도 못냈을것이고, 먹고살만한 부유층에서나 가질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부가 따로따로 초상화를 주문할경우, 여자는 왼쪽을 보고있을것이고, 남자는 오른편을 보고 있겠지요. 몸뚱아리는 이미 기성품으로 만들어져있고, 거기에 얼굴만 새로 그렸겠지요.

 

 

 

 

덧붙여서. 미국의 국부로 알려진 조지 워싱턴. 이 사람 초상화도 여기저기 많이 있거든요.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 작가로는 길버트 스튜어트가 가장 유명한데요, 그런데 길버트 스튜어트의 조지워싱턴 초상화 원본은 세가지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그 세가지를 '카피'한 것이라고 합니다. 

 

 

Anna Walraven (애나 워레븐)  c. 1850

작자 미상, Oil on Board

2010년 1월 9일 델러웨어 미술관에서 촬영

 

이 소녀의 초상화 배경으로 테이블에 책이 널려있쟎아요. 저것은 그 소녀의 집안 배경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뭐 일단 글을 읽고 쓸줄 아는 집안이라는 것이지요. 옛날에는 책도 귀했으니까, 집에 책이 저렇게 널려있다는 것은 먹고살만하고 교육도 잘 받았다는 뜻이겠지요. :)

 

이 델라웨어의 소녀 애나가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은 초기 '은판 사진' (daguerreotype - '다기어리어'는 프랑스의 사진술 발명가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입니다. 이 사진은 미국에서 1845년과 1855년 사이에 유행을 했고, 지금 남아있는 은판 사진들이 대개 그당시의 것이라고 합니다. 이 사진이 작자미상이고 연대를 알수 없지만, 소녀가 들고 있는 은판사진을 보면, 그림의 제작년대가 대략 어느정도라고 짐작할만 한것이지요. 이 사진이 초기 은판사진임을 알수 있는 단서는, 당시 은판사진이 대개 이러한 프레임에 담겨 있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도상학'이라는 학문이 있고, '서양화 읽는법' 이라는 책도 한국에 소개된것이 있고, 미국의 미술책 코너에 가 봐도 여러권 발견할수 있는데요. 그림속에 그려진 대상들을 조합해서 그림을 해석해 나가는 것인데요.  가령 비너스가 보고있는 '거울'은 헛된 허상을 의미한다던가, 해골은 '메멘토 모리' 포도는 '풍요와 다산' '개'는 충성 뭐 이런식으로 풀어가는 것인데요.  이런 '상징적 의미'외에도 그림에 나타나는 어떤 역사적 단서를 통해 그림의 배경을 이해하는 방법도 있지요.  그래서, 심심할때 그림을 들여다보면, 수수께끼를 풀어가는것처럼 재미있기도 해요.  아마 그래서 제가 그림 들여다보는 것을 싫증을 안내고 계속하는 것이겠지요.

 

 

 

 

 

 

2010년 1월 9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