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etch2019. 9. 27. 15:54

엄마 집에 있던 김치 냉장고가 작동을 멈췄다. 그 자리에 있은지 십년도 넘은 것이고, 형제 중에 누군가가 쓰던걸 엄마한테 넘긴 것이라고 하니, 수명이 다 할법도 할 것이다. 그 김치 냉장고는 내가 기억하는 한 고대의 시간부터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내 집에서 김치냉장고를 가져 본 적이 없어 그것이 왜 필요한지 그것도 잘 모른다.  김치를 많이 먹지도 않으니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이런 내 시선으로 볼 때, 엄마 집에서 김치 냉장고가 사라진대도 별로 상관이 없어 보였다.  엄마 집 냉장고는 우리집 냉장고보다 두배쯤 클 것이다.  사실 엄마의 김치 냉장고에 김치가 많이 들어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창고'처럼 이것저것 구겨 넣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래서, 그냥 그 김치냉장고를 내다버리고 덕분에 넓어진 주방을 향유하시면 되는 일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쩐지 엄마는 고장난 것이라도 그냥 끼고 살고 싶은 표정이었다.  노인들은 뭘 버리는 것을 무척 섭섭해하신다.  그래서 살살 달래며 이리저리 물어보니, 그 자리를 비게 놓아두면 안되고, 그러면 추석 명절에 자식들이나 손자 손녀들이 드린 용돈이 꽤 된다며 그것으로 김치냉장고를 하나 사면 되겠다고 하신다.  어딘가 마음이 아려온다.  엄마가 왜 돈이 없지? 엄마가 왜 손자 손녀들이 드린 용돈을 모아서 살림을 사실 생각을 하시는거지? 그렇게 돈이 없었어? 왜? 여러가지 의문이 든다. 엄마가 구차스럽게 살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형제들 사이에서 중론은, 지금 엄마 냉장고만해도 충분히 크니까 김치냉장고가 딱히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었다.  김치냉장고 내다 버리고 그냥 냉장고로 생활해도 불편할게 없다는 것이다. 내 생각도 동일했다. 

 

그런데, 

 

꼭 사지 않아도, 언라인으로 외국 유명 패션 브랜드의 신상품 카탈로그를 보거나 패션쇼를 보는 일은 눈요기만으로도 즐겁다. 그리고 그걸 구경하다보면 하나 사고 싶다는 허망한 욕망이 질기게 들러붙기도 한다. 모 패션브랜드의 가을 카디건 한장에 백만원도 넘는 것을 눈요기로 구경하다가 문득, 저게 한 오십만원이라면 내가 그냥 눈 질끈 감고 사지 않을까? 왜냐하면, 갖고 싶으니까.  백만원이 넘는 지갑 한개를 침 흘리며 들여다보다 생각한다 - 나 기분 내키면 저것도 지금 당장 살 수 있는데...

 

그러다 문득, 엄마의 김치냉장고 생각이 났다.  노인 살림에 어마무시한 김치냉장고도 필요없고, 엄마가 원하는것은 그냥 박스형 단촐한 것인데. 그거 얼마나 하나? 검색을 해보니 예쁘장한 것이 육십만원 정도면 되는 정도다. 

 

만약에 엄마가 어느 백화점 가방가게 앞을 지나치다가 이쁘장한 육십만원 짜리 가방을 가리키면서, "저것 이쁘구나. 나 저것 갖고 싶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나는 두 말 않고 그것을 사 드릴 것이다. 나라면 돈 아까워서 안 사도, 엄마가 사달라면 예쁜 가방 기꺼이 사드린다.  쓸데도 없는 가방을 말이다.  그런데, 엄마가 김치 냉장고를 내다버리고 나면 허전하니 그 자리를 김치냉장고 자그마한 것으로 채우고 싶다는데, 내가 왜 그것을 '필요하지 않다'고 단정지어 버린것인가?  예쁜 옷은 꼭 필요해서 사는가? 그냥 예쁘니까 산다.  내가 신발이 없어서 기십만원 짜리 구두를 사나? 아니 그냥 그 구두가 예뻐서 갖고 싶어서 산다.  명품 가방은 필요해서 사는가? 아니, 그냥 그게 갖고 싶어서 갖는거다.  그러면 김치냉장고는 반드시 필요해야만 사는가?  그것도 엄마가 갖고 싶다고 하면 사드리면 되는거다.  

 

그래서 나는 언라인으로 엄마가 갖고 싶어하시는 자그마한 김치냉장고를 주문하여 엄마 주소를 찍어 보냈다.  그러고나니까 머릿속이 맑아졌다. (사람이 돈을 쓰면 잠시 잠깐 마약 효과가 나는것 같다. 머리가 맑아지고 가벼워진다. 하하하.)  나는 왜 내가 좋아하는 패션 용품은 돈 아까운줄 모르고 사면서, 엄마의 생필품인 김치냉장고를 단지 '냉장고 넓으니 그것이 따로 왜 필요한가?' 이런 꼬리표를 달고 필요없다고 단정한건가?  

 

내가 무엇이 필요하다/불필요하다고 판단할 때, '실용성'의 측면이 아니라 '애장품'의 측면에서 바라보니 그림이 전혀 달라진다. 엄마 옷 오십만원짜리는 망설임없이 사 줄수 있으면서, 김치냉장고는 왜 그렇게 매몰차게 '필요없다'고 말하는가?  그걸 엄마가 좋아하는 옷이나 가방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인데.

 

그래서, "엄마, 곧 김치냉장고가 갈거야. 빨간색 예쁜 김치냉장고가 갈거야"하고 전화를 드리니 어린아이처럼 기쁘게 반기신다. 저렇게 좋아하시는걸 내가 그냥 지나칠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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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9. 9. 16. 13:07

 

 

어느장관의 자녀로 인해 대한민국 수시입학과, 힘있고 돈있는 이 사회의 부모들의 넘치는 후계자 사랑이 도마위에 올라있다. 뭐,  장관 따님의 입학 서류는 5년 기한이 지나 모두 폐기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검찰이 알아서 조사할 일이고, 사실 그 일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다.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그냥, 좀, 궁금해진다.  최근 5년 사이에 한 해를 정해서, 그 한해에 서울대학교에 수시 입학한 학생들 서류를 싹 다 조사를 하여, 특히 학계, 재계, 언론계, 정계, 관계, 기타 힘쓰는 부모들 슬하의 자녀들 중심으로 이들의 스펙이 서로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연구를 하는거다. 빅 데이타 연구자들 몇 명 투입하면, 관계도가 나오지 않겠는가? 

 

문제가 발견되면, 5년 데이타 다시 조사하고, 각 '인기있는 대학'으로 조사를 확대해 나가는거다. 자식가진 죄인으로 넘쳐나는 기묘한 사회.  힘없는 부모를 가진 청소년들도 공평하게 기회를 가질수 있는 사회를 구축하는 일이 참 요원해보인다. 

 

나 역시 자식 가진 죄인이니 뭐라고 입도 뻥긋 하지 못할 처지이긴 한데, 그래도...나는...내가 근무하는 대학에서, ESL 프로그램 책임자로 있으면서도, 가끔 자식 데려다가 학교 일도 막 시켜 먹었으면서도,  내 자식 인턴 따위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하러들면 왜 못하겠나.  상장도 만들어 주러들면 왜 못하겠나.  하지만, 그건 참 비루하고, 염치없고,  남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걸 그렇게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할 수 있다니...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다. 그냥 바보로 남기로 하자, 기왕에 이렇게 된거.)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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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9. 5. 21. 12:24

 

Daniel Pink 의 'When' 이라는 책을 보면, 미래시제가 분명한 언어권 (예: 영어, 한국어)의 사람들과, 미래시제가 분명치 않아서 (예, 중국어) 현재 시제가 상황에 따라서 미래로도 해석이 가능한 언어권 사람들이 행동 패턴에 약간 차이가 보인다고 한다.  핑크는 '언어'가 행동 패턴에 영향을 끼친다기보다는 그들 문화권의 행동 패턴이 '언어'에도 반영된다는 식으로 그 상관 관계를 설명했다.  (언어가 행동을 결정하는가  환경이 언어에 영향을 끼치는가는 해묵은 언어학계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어쨌거나.)

 

 

이 '미래시제'의 있고 없고가, 그 언어권 사람들이 '미래'를 준비하는 행동 패턴에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얼핏 생각하기에 '미래시제'가 있는 언어권에서 '미래'에 대한 준비를 체계적으로 준비 하는게 아닐까 그런 상상을 했었는데 (내가 책 읽을때 그런 상상을 했었다), 결과는 정 반대였다.  현재시제 안에 미래시제까지 뒤섞인 (미래 시제가 분명치 않은) 언어권의 사람들이 그들의 '노후대책'에 더 열심이라는 통계치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언어속에서 현재와 미래가 혼재되어 있는 문화권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먼 남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라는 것이다.  미래를 '미래'의 일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언어권 사람들이 미래 계획에 방심 한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현재 닥친 일이 아니니까. 

(예수님은 내일 일은 염려하지 말아라. 오늘 하루의 근심으로 족하다 뭐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고민에 빠진 나.)

 

흔히 '비단이 장수 왕서방'은 '돈을 밝히는 사람'으로서의 중국인을 칭하고, '중국인들은 현실적이다'라는 통념도 있는 편인데, 아마 이들의 '현실적인 사고방식'이 '재물을 축적하는 것에 열심인' 태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에게 '미래'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말이 잊었노라 노래 할 수 있는 먼 훗날이 아니고, 현재의 일이므로, 미래의 현재를 위해서는 지금 당장 돈을 아끼고 돈을 모아 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또다시, 사고를 확장시켜 생각을 해본다.

 

 

죽음을 미래의 별개의 사건으로 상정하고 오늘 하루를 사는 사람과, 오늘 하루 '죽음'을 함께 사는 사람의 삶의 패턴도 다를 것이다.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과, 죽음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이 사는 사람은 분명 다른 삶을 살 것이다.  나는 어떤가?  나는 미래에 대한 준비도 별로 안하고 오늘 하루 살고 마는데, 왜냐하면 내일 아침에 내가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에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는데 왜 내일 걱정을 해야 하는가?  이런 사고 방식은 뭐지?  내 하루에는 죽음이 깃들어 있는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9. 5. 19. 06:06

내가 세례받은 미국 감리교 예수쟁이이긴 한데, 다닐곳이 마땅치 않아서 고민고민하다가 괴상한 한국 감리교에 다니고 있기는 한데, 결국 내가 늘 갸우뚱하며 회의적으로 쳐다보던 그 교회에서 일이 터졌다. 

 

내가 소속한 교회를 '괴상한 한국 감리교회'라고 말하는 나도 내가 한심하다.  왜 그런델 다니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한국 교회 거기서 거기이고, 눈 씻고 찾아봐도 다 거기서 거기라서, 에라 모르겠다 나는 기도하고 예배 드릴 '장소'가 필요하니 '기도'하고 '예배'드리러 간다는 차원에서 다니고 있다는 변명을 늘어 놓을 수 밖에 없다.

 

지난해 연말에는 나보고 착실하고 성실하게 다닌다고 (매일 새벽예배 나가고, 일요일 예배에 빠짐없이 나가고 헌금도 착실히 하니까) '집사' 안수를 준다나 뭐라나 하는데, 내가 "I am fine, thank you." 이러고 '고사'하고 말았다.  심리적으로 나는 그 교회와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인데, 내가 그 교회와 거리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구체적인 이유는 - 그 교회를 세운 목사님이 떠억하니 자기 사진을 교회 앞 입간판에 걸어놓고 무슨 가겟집 주인아저씨 같이 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촌스러운 교회를 다닐수 밖에 없는 이 불쌍한 성도를 예수님 굽어 살피소서).  나는 그 가겟집 주인아저씨 같은 목사님이 보기 싫어서, 그분이 설교하지 않는 일요일 이른 아침 시간에 (젊고 정직한 부목사님이 설교하는 시간에) 예배드린다. 그게 내 생존 전략이다. 

 

내가 그래도 그 교회를 다니는 이유는, 조만간 가겟집 주인아저씨같은 초대 목사님이 은퇴한대서, 그러면 물갈이가 되려나, 나도 좀 제대로 예배드릴수 있게 될까 (목사를 피해다니는 것도 피곤한 일이니까) 뭐 그런 희망을 가지고 참을성 있게 기다려 온 것이지. 그래서, 아무튼 얼마전에 그 가겟집 주인아저씨같은 목사님이 명목상 은퇴라는걸 교회법에 따라서 하긴 했는데, 뭐 곳간 열쇠를 여태 틀어쥐고 내 놓지를 않는다고 한다. (내가 너 그럴줄 알았다. 아 처음부터 맘에 안들더라...뭐 이러고 만다.) 

 

뭐 최근에는 민주적 직선제 시스템으로 교회 신도들이 '국민투표' 형식으로 차기 담임목사님 선출을 위한 선거를 했는데, 70퍼센트 이상 득표한 부목사님에 대한 목사 승인 절차가 교회 인사위원회에서 부결이 되었다고 교회가 난리가 났다. 당회 한다고 나오라고 해서 가봤더니 싸움이 벌어졌다. 간단히 원로목사파와 원로목사가 사라지기를 희망하는 계파간에 전쟁이 난 모양이다. 나야 처음부터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며 예수님께 기도드리러 교회를 드나들던 사람이라 그냥 건성으로 구경을 하는 편인데, 전체적인 구도를 보면 - 그 가겟방 주인아저씨 품격의 초대 목사님이 아무래도 '이걸 내가 어떻게 세운 교회인데!!!' 뭐 이런 미련을 가지고 몽니를 부리고 자빠져 있는 형상이다. 

 

그래도 상황이 좀 딱해서, 70퍼센트 이상의 득표를 하고도 구석에 얌전히 찌그러져 있는 부목사님에게 내가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드렸다. 대략,

 

"목사님 기뻐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시라고 하셨으니 기뻐하십시오. 일단 70퍼센트 이상 득표하신것을 기뻐하십시오. 결국 한때 빛나던 목회자였을 저 노인께서 온갖 치졸한 방법으로 스스로의 명예를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있으니, 성난 신도들이 그동안 참고 봐주고 넘겼던 그의 비행을 하나하나 백일하에 드러내놓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빤쓰까지 다 털리고 쫒겨나게 되는 형국인데, 저분만 그걸 모르니 딱한 지경입니다.  저 가련한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할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대로 정의를 세우시게 되겠지요. 관전평." 

 

교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나는 새벽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매일 갈때마다 감사헌금 봉투에 헌금을 담아 가는데 (얼마나 착한가. 하느님 사탕이라도 잡수시라고 매일 사탕값이라도 갖고 가는 것이다. 착한 손녀딸처럼), 며칠전부터 나는 텅빈 헌금 봉투에 이러한 메시지를 적어서 낸다. 

 

"저 타락한 원로목사님이 내가 낸 감사헌금과 십일조 이런거 다 털어서 퇴직금이니 위로금이니 온갖 명목으로 다 뜯어가고, 게다가 월 350만원씩 꼬박꼬박 원로목사님 월급으로 챙겨간다니, 그 돈 다 회수할때까지 --하느님 저는 한푼도 헌금 못합니다. 하느님 드시라고 사탕값 드렸더니 하느님께서 엉뚱한 놈한테 주시다니요. 저 삐졌습니다."

 

 

우리 하느님, 나한테 암말도 못하신다. 하느님, 그러니까 교회를 바로 세워 놓으십시오. 제가 안심하고 하느님 사탕값 갖다 드릴수 있도록.  나는 여전히 새벽기도에 나가고 예배에 나간다. 이건 우리 하느님과 나 사이의 '약속'이니까. 목사놈이 무슨 지랄을 하건 말건 개의치 않는다. 처음부터 '목사'는 내 신앙체계에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오직 하느님/예수님과 나의 관계에만 치중할 뿐이다.  나머지는 다 악세사리. 없어도 그만이다. (착한 교회에서 착한 목회자의 인도를 받는것은 좋은일이지만, 없어도 할 수 없는거지 뭐. 개의치 않는다.)  그래도, 지금은 어떤 책임 의식도 있는데, 내가 착한 목사님들을 좀 돕고, 고민하는 이웃을 위하여  대범하고 쿨하게 행동하는 것도 좋을 것 이다. 그러나 그것또한 부수적인 장치이다.  예수님과 손잡고 가면 된다. 다정한 연인들처럼. 예수님하고 나하고. 

 

 

 

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9. 5. 18. 18:20

대학 근처에 있는 남자고등학교 학생들과 여자 고등학교 학생들이 지원한 '대학 체험' 프로그램.  30여명 안팎의 두 학교 학생들이 토요일 오전에 모여서 두시간 가량 '커뮤니케이션' 주제의 수업을 듣는다.

 

2시간씩 네 차례에 걸쳐서 진행되는 워크숍에서 내가 계획한 내용들은

 

  1. What is communication?   What is intrapersonal communication?
  2. What is interpersonal communication?
  3. What is intercultural communication?
  4. What is mass communication? 

 

워크숍이니 만큼, 일방적 강의보다는 주로 짝이나 팀 중심으로 주어진 과제를 수행해나가며 스스로 주제에 대한 답을 찾거나 정의를 내리는 작업 위주로 진행한다. 오늘은 사람들 사이의 소통이라는 주제로 작업을 진행하는 날이라서, 몇가지 Information Gap 과제를 진행했는데 눈부실 정도의 장면들이 많이 연출 되었다. 

 

여자고등학교, 남자고등학교에서 온 학생들이라 남학생과 여학생들은 남과 북처럼 따로 떨어져 앉아 있었는데, 나는 간단히 여학생에게 1부터 15까지 번호를 주고, 남학생에게도 동일하게 번호를 준 후에 동일한 번호끼리 짝을 지어 앉도록 하는 식으로 전혀 모르는 남/녀 학생들을 짝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합심하여 오직 '영어 말하기'로만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는 과제를 주었다.  (대학원 시절부터 주욱 해오는 작업이기도 하다).  서로 전혀 모르는 동급생 여학생 남학생이 짝이 되어 함께 뭔가를 하려니 쑥스럽기도 할 것이다. 어떤 팀은 과제가 주어지자 마자 평생 알고 지냈던 친구들처럼 서로 눈을 마주치며 열심히 문제 해결을 했고, 어떤 팀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것이 영어의 문제인지 개인 성격 (낯가림, 수줍음)의 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두번째 과제를 주었을 때는 망설이는 사람없이 모두들 잘 해 낸것으로 보아 '낯가림'을 잘 극복해 낸 것이 아닐까 추측하게 된다. 

 

짝을 지어 의사소통 작업을 열심히 해 낸 학생들을 이번에는 네명씩 소그룹으로 묶어서, 각 팀별로 'What kind of skills do we need to make our interpersonal communication successful?'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라고 했다.   강의실 벽에 넓직한 보드들이 삼면에 부착되어 있으므로 학생들은 팀별로 보드 앞에 모여서서 리스트를 작성하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일단 낯선 여학생 남학생이 짝을 이루어 몇가지 작업을 한 후, 이들을 소그룹으로 묶어주자, 이들은 '미래세대' 답게 별다른 저항감 없이 기민하게 서로 마주보며 토론을 하고 리스트를 만들어 갔다.  그리고 주저함 없이 발표를 해 나갔다. 씩씩하게, 용감하게, 막힘없이. 

 

그들이 작성한 리스트에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 책에서 볼 수 있을만한 내용들이 총 망라 되어 있었다.  예컨대

 

 

  1. Respect
  2. Empathy
  3. Rapport
  4. eye contact
  5. Don't interrup
  6. Listen carefully
  7. Speak clearly
  8. Double check
  9. Speak loud enough
  10. Understand culture
  11. gesture
  12. ask again
  13. agree
  14. polite
  15. smile
  16. remember name of the person

 

 

나올만한 것 다 나왔다. 

 

 

영어가 유창한 학생들도 있고, 머뭇대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영어' 강의를 듣고 이해하고, 영어로 말하는데 큰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아마도 영어를 대하고 사용하는 강사(나)가 편안해 보여서 그랬을 수도 있는데, 이들이 다른 상황에서 어떻게 영어 구사를 할지는 미지수이다. 대체로 학생들은 내 앞에서 영어 사용하는 것을 편안해 하는 편이다. 나는 '저 사람하고 영어 하면 무섭지 않아'하는 대상으로 이미 특화되어 있을 것이다. 어느새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는듯 하다. (나는 어쩌면 나에 대한 연구도 해야 할지 모른다. 나는 어떻게 편하게 영어를 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을까?) 

 

 

처음만난 남학생 여학생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최선을 다해서 영어로 정보를 교환하고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장면들이 내 눈에는 보석처럼 빛나고 아름다웠다. 고등학생들이지만 내가 가르치는 대학생들과 별 실력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아무래도 소속한 고등학교에서 스스로 자원해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토요일에 모 대학에 온 것이고, 그러므로 수업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서 인지도 모른다.  그들만큼이나 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나도 즐겁다.  이들이 최대한 의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수업 계획을 치밀하게 짜는 것이 힘든 일이긴 하지만, 힘든 만큼 보람도 있다.  어느 십대 청소년들의 빛나는 순간속에 내가 있는 것이다. 아주 잠시나마. 그것이 아주 잠시나마 즐거움의 원천이 된다.  

 

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9. 5. 18. 09:46

성경의 예수님 일화 중에서, 귀신들린 사나이에게서 귀신들을 몰아내자, 그 악귀들이 갈데를 몰라 고민하다가 들판의 돼지떼에게로 옮겨간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종종 농담삼아서 'ㅇㅇ 총량의 법칙' 이야기를 한다.  가령, 청소년기에 얌전하던 사람이 늦바람이 난다거나 뒤늦게 사고를 치고 돌아 다닐때, 종종 '지랄 총량의 법칙' 얘기를 하며 웃기도 한다.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별 짓 다하고 사는건데, 누구나 실수하고 뻘짓하고 엉뚱한 짓 하다가 철이 드는 것인데, 결국 그것을 피해가기는 어려워서 어렸을 때 얌전했던 사람이라면 뒤늦게라도 결국 뻘짓을 하고야 만다는 자조적이며 인생을 관조하는 시각이기도 하다.  어린 아이들이 사고를 치고 돌아다닐땐, "저러다 크면 안그런다" 고 위로할 수 있고,  다 늦게 사고를 치는 멀쩡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릴때 안그러더니 기어코 할 짓은 다 하는구나" 그러나 '지랄'에도 총량이 있으니 저러다 말겠지 하고 위로하게 되는 것이다.

 

 

지랄 뿐일까.  선도 악도 결국 총량이 있는게 아닐까?  (사랑은 무한하다고 가정하기로 하자. 상상이라도). 

 

얼마전에 어떤 분이 자녀 문제로 고민이 심각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반에서 힘 센 녀석의 '셔틀'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을 한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은, 엄마가 직장에 다니는 분이어서, 그 아이를 이웃의 동급생 아이와 친하게 지내게 하고 그 이웃 엄마에게 아이 돌보는 일을 종종 부탁했는데, 바로 그 집 아이가 '대장질'을 하고 아이를 괴롭힌 것이다. 난감한 처지였다.  믿고 부탁한 것인데 결과가 좋지 못했다.  고민고민 끝에 그냥 내가 아이 키우던 시절의 이런 저런 난감했던 상황이나, 내가 성장기에 자행했던 '악행'과 내가 당했던 악행들을 회고하며,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나쁜짓도 하고 나쁜짓의 희생자가 되기도 하고 그런것 아니겠는가 이야기를 했었다. 그냥, 다른 방도가 없으니 "저는 기도해 드릴게요 하느님께" 라고 하고 말았다.

 

얼마후 상황을 물으니, 아이 엄마가 기민하게 대처하여 아이의 문제는 해결 되었는데, 그 '대장질'하던 아이가 대상을 다른 아이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 '대장질' 녀석은 여전히 못되게 굴고 있는데 셔틀을 더 만만한 상대로 바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얘기를 듣고 내가 실소를 하며, "악은 소멸 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론가 옮겨가는 것 같군요" 했더니, 옆에 앉아계시던 젊은 목사님이 문득, "성경에도 악이 돼지떼에게로 옮겨가쟎아요"하고 성경 얘기를 꺼내셨다.  아...그렇구나..그냥 이사를 가는 것이구나.

 

그래서 생각을 해 보았다.  마음속에 고통이나 우울감, 악한 기운 그런 것들은 항상 존재한다. 그 심상이 상황에 따라서 이리저리 옮겨 갈 뿐이다. 언제나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날것인가.  사랑도, 그리움도, 미움도 모두 모두 대상이 바뀔뿐 바람처럼 늘 내 주위에 맴돈다. 

 

 

 

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9. 2. 28. 10:57


이 만평이 왜 문제인가?  (뭐가 문젠데? 하며 뒷통수를 긁적이는 당신. 조금 사색을 해 보시고 다시 생각해 보시면 좋겠다.)


육체노동 정년이 60세에서 65세로 상향 조정되었다.  일희 일비 한다고 한다.

기쁜쪽은 정년 앞둔 남편이고, 짜증나는 쪽은 취업 앞둔 아들이라고 한다. 가운데서 일희일비 하는이는 중년 아줌마다. 


정년 앞둔 아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취업 앞둔 딸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것 처럼 보인다.  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존재가 유독 중년 아줌마인 이유가 뭔가?  중년여자는 정년 앞둔 남편과 취업 앞둔 아들 사이에서 '삼종지도'를 지켜야 하는 여성의 표상인건가?


이 세상엔 아버지와 아들과 중간자로서의 아내/엄마만 존재하는가? 경제 주체로서의 여성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때가 어느때인데 주요 일간지 만평이 이따위인가? (그림 그린이가 남자겠지. 그리고 그는 꼰대이리라. 그에게는 딸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림속의 여성은 그의 아내일지도 모른다. 그의 아내는 전업주부일 가능성이 크다. 설령 그의 아내가 직장인이라고 해도 그의 아내는 철저하게 전업주부 역할까지 할지도 모른다. 내가 꼰대랑 살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는 내가 꼰대일 가능성이 크다. ) 






Posted by Lee Eunmee
Sketch2017. 2. 6. 12:28



지난 2월 3일 (2017년) 디씨에 있는 '국립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 의 전시품들을 둘러보다 발견한 작품과  작품설명 이름표의 잘못된 만남. 


그러니까 위 그림의 제목이 '갈릴리 호수의 예수' 라는 것이다.  나는 한참을 그 앞에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서 있었다.  그림속에서 호수나 바다를 혹은 예수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 한참 서 있다가 웹겁색으로 동 제목과 작가와 국립미술관 검색어를 넣어 보았다. 


동명의 제목과 화가 이름을 넣어서 검색하면 나오는 작품은 아래의 것이다. 국립미술관 소장품이다. 삼박자가 모두 맞아 떨어지므로 본래 아래 작품의 이름표가 마땅할 것이다.




그러면....엉뚱하게 '남의 이름표'를 달고 있는 전시장 그림의 본래 제목이나 화가는 누구인가?  내가 나름 '짱구'를 굴려서 검색을 해보니 비슷한 소재 (여자, 남자, 남자가 여자에게 흰떡 썰은것 같은것 한조각을 내미는 장면, 이러저러한 것들)의 그림 제목에 Last communion of Maria in Egypt 이런 식의 제목이 나온다.  성경이나 성경 주변 일화, 동일한 소재를 화가들이 각자 자기 스타일로 그리므로 아마 '마리아'의 어떤 일화를 그린 그림인듯 하다.  '마리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면 -- 내가 아는 유일한 일화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잠시 이집트로 피신을 한 적이 있다는 것.  아무래도 그 성가족과 관련된 그림 인듯 하다고 추측할 뿐. 아직 구체적인 작품 제목이나 화가를 조사하지 못했다 (아마 안 할 것이다. 의욕이 없으므로.)


옛날에는 미술관에 걸려있는 기독교 관련 그림들을 봐도 잘 모르겠고, 관심도 없고, 금박무늬라던가 알록달록한 화려함에 골치가 아플정도 였는데 지금은 나도 성경적인 지식이 제법 있고, 제법 알고 하니까 이런 그림들이 꽤 재미있고, 그래서 자세히 보다보니 이런 엉뚱한 미술관 직원들의 실수도 눈에 들어오게 된다. 


경비원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름표가 잘 못된것에 대해서 서로 진지하게 동의하고, 경비원이 관련 직원에게 연락을 취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나는 그냥 발길 가는데로 자리를 옮겼다.


그날 저녁 디씨에서 저녁을 먹으며, "오늘 내가 미술관 돌면서 봤던 작품들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갈릴리 호수의 예수'.  내가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웹으로 확인해보고 -- 이 그림 참 좋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그림"이라고 말했다.  내가 보지 못한 그 작품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언젠가 그 작품을 꼭 한번 보고 싶다. 


아, 이름표만 있고 작품은 없었던 그 '갈릴리 호수의 예수' 그림은,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에서 물위를 걸어 오시는 것을 보고 피터/베드로가 주님을 영접하러 나와 물위를 몇걸음 걷다가 그만 물에 빠지는 바로 그 일화를 말하는 듯 하다. 배에서 한발 내밀고 있는, 머리에 원광이 그려진 그이가 베드로일 것이다. 나도 예수님이 보고싶다.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