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ArtBookReview2013. 9. 13.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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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생이 내게 보내준 책 보따리에 낑겨 있던 책.  


표지만 쓱 보고, "이건 뭐 내가 고등학생이야, 이런 인문학 가면을 쓴 잡문 책이나 보라는건가?  잘나가는 가짜 인문학자 하나 잡아서 돈 좀 벌려고 기획한 책인것 같군, 쳇" 이런 5초 평가를 마치고 거의 쓰레기통에 넣을 뻔 했던 책.  (나는 아무나 '인문학'이라고 내세워서 엉터리 책 내는 것에 대하여 인문학을 모욕하는 처사라고 신경질을 내고 있던 중이었다. 만만한게 홍어$ 이고, 만만한게 인문학이더냐! 헹! ) 


그런데, 심심풀이로, 쓰레기통에 넣기 전에 들여다봤다가 책에서 '천둥치는 소리' 같은 것을 듣고는 -- 지금 심각허게 읽는 중.  (이것은 지팔님, 찬삐님에게도 한번 읽혀야 허는 귀중헌 책이여~)




그중 한 챕터를 작가나 출판사의 허락도 얻지 않고 그냥 카메라로 찍어서 올려드린다.  (출판사님, 제가 이 책 광고 단단히 해 드리는 것이니 용서해주셔요). 내용이 맘에 드시면 돈 아끼지 말고 책 사서 마저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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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별표 그리고 밑줄 그은 "타자와의 관계는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라는 대목에서 내 머리를 친 것은 우리 대장 예수님의 선언이시다.


마태복음 10장 34-36절.  내가 신학자도 아니고, 그냥 '독서가'의 입장에서 내 언어로 이 말씀을 풀이하자면:




"내가 세상에 평화를 갖다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이곳에 평화를 가져 온 것이 아니라 칼을 가져왔다.  왜냐하면 나는 남자가 그의 아비에게 대항하고, 딸이 그 어미에게 대항하고, 며느리가 시어미에게 대항토록 하고자 온 것이며, 바로 그의 가족들이 그의 적이 될 것이다."




Matthew 10:34. "Do not think that I came to bring peace on earth. I did not come to bring peace but a sword.

35 "For I have come to 'set a man against his father, a daughter against her mother, and a daughter-in-law against her mother-in-law';

36 "and 'a man's enemies will be those of his own household.'






이 말씀을 (신학자들은 신학적으로 설명을 하실 것이고), 내가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타자와의 관계'의 측면에서 해석하자면 아주 딱딱 들어 맞는데... 생각해보자, 예수쟁이이거나 아니거나 상식과 교양을 갖춘 평범한 사람이라면 '예수'는 온인류를 구제하러 이땅에 왔고, 구원과 평화와 사랑의 존재라는 '상식'쯤은 대개 갖고 있다 (동의하거나 안하거나 상식선에서).  예수 살아 당시에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런 환상과 믿음을 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이 이 땅에 평화가 아닌 '칼'을 갖고 왔다고 선포 하신다.  그렇다면 '평화'는 '칼'과 반대되는 개념처럼 보이고, 예수님은 '칼'이다. 평화와 반대다.


그런데 이것은 역설이다. 여태까지 인류가 누린, 인류가 상상해 온 평화는 '가짜 평화'다.  그 '가짜 평화'를 깨버리지 않으면 '진짜 평화'는 불가능하다.  집안이 화목해보이는가? 그것이 진정한 '즐거운 나의 집'인가?  혹시 그 '즐거운 나의 집'이 어느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 구성된 가짜는 아닐까? 누군가 압제당하는 속에, 차별당하고 멸시하거나 무시당하는 속에서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 속에서 누리는 평화는 진짜가 아니다. 가짜다. 문제를 문제로 인지하고 인정하고 수긍해야 한다. 그러니 아들이 아버지에게 '잠깐...우리 대화좀...' 하고 시도해야 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우리 대화 좀...'하고 시도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압제받는 사람이 지배자에게 제 목소리를 낼때, 그 때 진짜 평화로 가는 긴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세상의 '가짜'를 없애기 위해서 오신 '칼'이다.  그 칼은 진정한 평화를 위해 빛난다.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가짜 평화는 가라.  가짜 조화, 가짜 화합, 가짜 협조, 가짜 형제님 자매님은 가라.  개인의 생의 위대성을 무시하는 전체주의는 가라.  모든 가면을 쓴 허위들은 가라. 가짜 평화는 가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인즉.   가까운 친구끼리 오해가 발생해서 서로 다투고 나서 더욱 깊은 우정을 키우게 되는 원리는 그 사이를 가리는 것들을 싸움과 대화를 통해서 많이 걸러 냈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다툼은 발전을 위한 징검다리였을 뿐.  다투지 않고  입다물고 각자 딴길로 갔다면 그것은 다툼만도 못한 가짜평화이지.






기득권자가 기득권을 내려놓고, 압제받는 자가 자라처럼 움추린 목을 길게 빼고 목소리를 내고 -- 서로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진정한 이해로 갈때 그 때 진짜 평화가 온다. (그게 인간 세상에서 가능할까?  나는 회의적이다. 희망을 간직할 뿐). 그러니까 예수님의 선포도 내 짧은 생각속에서 백프로 옳으시다.  예수님은 틀린말씀 안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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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타자'와 '차이'의 문제는 내 전공 분야인 응용/사회 언어학 분야에서도 빈번하게 논의되는 주제이고, 매 학기마다 나는 책을 펼치고 이 주제에 대한 공부를 새로 하곤 한다. (그래도 내가 뭘 아는지 모르는지 가늠이 잘 안된다.)  내가 주로 보는 쪽은 언어와 사회성, 언어와 정체성과 관련하여 '타자' '차이' '중심성' 이런것을 분석하는 쪽이고,  강신주 선생은 이 짧은 챕터에서 주로 '사람의 관계'에 촛점을 맞춰서,  이것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을경우 어떻게 파시즘이 우리 삶에 뿌리를 내릴수 있는지를 참 쉬운말로, 참 알기쉽게 설명을 해 주신다.


인간 관계, 그 마찰 때문에 고민하는 평범한 사람들도 읽어보면 도움을 받을 만한 좋은 내용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골치를 앓는 그 어떤 갈등'상황이나 나를 괴롭게 하는 어떤 사람이 -- 사실은 내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매우 폭력적인 것일수도 있는데, 내가 그 심각성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자신을 타박하고 말지도 모른다.  폭력에 순응하거나, 용인하거나 납득하고, 자신을 폭력에 길들게 하면 안된다. 


우리는 칼 든 강도에 대해서는 그 위험성을 즉각 알아차린다.  주변 사람들도 그 강도가 나쁜 놈이라는 것에 동의해준다. 내가 강도한테 강도를 당하는 현장을 사회가 본다면, 사회는 내 편이 되어준다. 강도가 나쁜 놈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인정하기 때문에.


그런데 세상에는 웃는 얼굴로 내 삶을 강도질하는 안보이는 강도들도 많다. 이 강도들은 제도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친익척이나 가족 혹은 공동체의 이름으로 우리 삶에 스며들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강도 당하는 줄도 모르고 강도 당하며, 아무도 내가 고통에 신음할때  내 편이 되어주거나 그 보이지 않는 강도를 비난하지 않는다.  당하는 나만 바보 병신이 되거나, 부적응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관계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은 -- 우리의 태도를 수정하거나 교정하거나 뒤바꾸는데 보이지 않는 영향을 끼키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공부를 하고, 좋은 가르침을 받고,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누군가 지혜로운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물론 신의 음성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나의 대장님은 내게 무척 친절하시다. 내게 필요한 말씀을 책을 통해서, 사색을 통해서, 산책을 통해서 내게 매일 주신다. 물론 바이블을 통해서도 말씀을 하시지만 말이지. 통로는 무궁무진하지...)





인간관계 문제를 생각하던 중, 문득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났다.  누가복음 23장 34절.  킹 제임스 버전을 그냥 내 식으로 풀어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 하소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나이다 (이하 생략)." 

Luke 23:34 Then said Jesus,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And they parted his clothing, and cast lots. (King James 2000)


저들을 용서 하소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나이다. 


자신들이 하는 행동의 위중성을 알고 의도적으로 하느냐, 모르고 하느냐에 따라서 재판정에서는 평결도 달라진다고 한다. 의도성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내가 법을 논하는 것을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 아는체 하는것이 될터이고. 그냥 상식적으로 봐도, 예수님은 참 이해심이 넘치는 분이셨다.  '저들이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저러고 있는 것이지, 설마 자신들이 하는 짓이 얼마나 끔찍한 짓인줄 안다면 저렇게 행동하겠는가. 그냥 내가 용서해주고 말지. (자식한테 살해당하는 부모가 자식이 잡힐까봐 죽어가는 마당에도 살해 증거물들을 삼켜버리거나 감춘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나를 괴롭히거나 막 스트레스 주거나 상처를 입혀서 내가 난처하고 괴로울때, 그 때에도 나는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볼만도 하다, "저 사람들이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모르니까 저러지, 알면 저러겠나.... "  그리고 사실, 대개 인간 관계는 그러한 것 같다.  내가 막 고민하고 끙끙 앓다가 그 사람에게 "나...상처받았어...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하고 말하면, 저쪽에서 화들짝 놀라며 "어머! 너 괴로웠니?  난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어머 어쩌면 좋아. 내가 정말 미안해. 내가 앞으로 조심할게" 이럴지도 모른다.  서로 잘 모르니까.


나는 내가 어떤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지 잘 모른다. (요즘 그런 생각을 하면 내가 등골이 오싹하고, 겁이 난다.  사람들 앞에 서서 가르치는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러 들면 얼마나 간단히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불가의 깨달았다는 큰 스님들도 '책 보지 말라,' '공부 하지 말라'는 지시를 하는가하면, 성경에서도 '세상 것을 좆지 말고, 세상 지식을 좆지 말고..' 뭐 이런 말씀이 나온다.  그런데 내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공부 하지 말라고 잔소리 한 성현들은 대개 크게 공부를 이룬 후에 그런 말을 한다. (자기네들은 공부 실컷 하고나서 남보고 공부하지 말란 식이다.) 하지만 한번 더 생각해보면, '공부에 함몰 되지 말라,' '책에 함몰 되어 더 깊은 깨달음으로 가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세속적인 지식에 연연하면서 더 큰 세상에 눈을 감아 버리면 안된다'는 경계의 말씀이지 -- 진짜로 공부하고 담을 쌓으라는 말씀이 아님은 명백하다. 이 좋은 책을 읽으니, 내 인식의 지평이 더 넒어지고, 사람에 대한 이해심이 더 넓어지며, 생의 경건성에 더욱 눈을 뜨게 되지 않는가.  




강신주선생은 공부를 성실하게 하고, 심사숙고하는 학자로 보인다. 그의 글은 누구나 접근 가능하게 쉬운 언어로 씌어 있으나 그 내용이나 울림은 깊고, 감동을 준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13. 9. 8.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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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9월, 토요일 오전 아홉시 

매클레인 살 때 늘 그러했듯,  포토맥 애비뉴에 차를 세우고 강변을 따라 조지타운으로 걷다.



조지타운 간다는 말에 군소리 않고 동행한 찬삐.

이제 몸에 붙는 폴로셔츠도 제법 할랑한 느낌. 


어쩌다 우연히

흰셔츠에 청바지 커플룩

엄마와 아들.  :-)

(불쌍한 찬삐, 엄마와 커플룩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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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워킹 나갈땐 운동바지에 운동용 백팩인데, 

오늘은 모처럼 토요일 오전의 산책이라서

시내 나가는 기분을 좀 내느라 귀염둥이 배팩도 메고 청바지도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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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타운 입구에 도착하면 늘 들르던 성벽 낭떠러지.

우리 왕눈이하고 여기서 찍은 사진도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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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포토맥 강을 일년 넘게 떠나 있던 사이에 포토맥에 새로운 유행이 불어 닥쳤다.

배 위에서 땟목을 젖듯, 서서 배를 젖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일년중 가장 상쾌하고 햇살 투명한 계절 --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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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브리지로 이어지는 다리 아래 알록달록한 거리 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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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타운 입구, 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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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타운의 늘 들르던 카페에 들러

찬삐는 연어를 먹고

나는 스트로베리 쇼트케잌을 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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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시의 햇살 

수로 

멀리 아리조나 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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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이 지쳐...


초록이 지쳐 단풍의 계절이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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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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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NonArtBookReview2013. 9. 3.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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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에는 아마존 인스턴트 비디오로 'A river runs through it (1992)' 영화를 보았다.  20년 된 영화인데 지금 극장에서 상영을 한대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벽해 보이는, 세월이 흘러도 아름다움이 퇴색하지 않는 영화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본것도 20년 가까이 될 터이니, 구체적인 것들이 다 지워져 있는 상태라서 새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


Joseph Gordon-Levitt 이라는 잘생긴 배우가 이 영화에서 아역으로 출연했대서 들여다보니 '형' 노만 매클레인 어린시절 역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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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영화에서 20년 가까이 기억하는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장로교 목사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칠 때, 글은 최대한 간결하게 쓰도록 지도하는데 -- 큰아들이 처음에 한바닥 쓴 글이 자꾸만 퇴짜를 받으면서 차츰 차츰 짧아져서 나중엔 한바닥이 한문장으로 줄어드는 장면.  문장의 간결성.  


또 한가지는 다트마우스에서 6년간 대학 공부를 하고 교수 자리를 기다리는 동안 집에 와서 지내던 노만이 시카고 대학 교수 자리로 오라는 편지를 받고 아버지 서재로 향했을때 -- 아버지가 혼자서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를 읽고 있는데, 아들이 다가가서 한줄 낭송하고, 아버지가 이를 보고 한줄 낭송, 이렇게 서로 한줄씩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워즈워드의 그 유명한 ('초원의 빛'으로 알려진) 장시 Ode, Intimations of Immortality 의 마지막을 낭송하는 장면



Of splendou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185
      In the primal sympathy 
      Which having been must ever be; 
      In the soothing thoughts that spring 
      Out of human suffering; 
      In the faith that looks through death, 190
In years that bring the philosophic mind. 
 
And O ye Fountains, Meadows, Hills, and Groves, 
Forebode not any severing of our loves! 
Yet in my heart of hearts I feel your might; 
I only have relinquish'd one delight 195
To live beneath your more habitual sway. 
I love the brooks which down their channels fret, 
Even more than when I tripp'd lightly as they; 
The innocent brightness of a new-born Day 
            Is lovely yet; 200
The clouds that gather round the setting sun 
Do take a sober colouring from an eye 
That hath kept watch o'er man's mortality; 
Another race hath been, and other palms are won. 
Thanks to the human heart by which we live, 205
Thanks to its tenderness, its joys, and fears, 
To me the meanest flower that blows can give 
Thoughts that do often lie too deep for tears.


그 장면만큼은 내 뇌리에 강하게 박혀서 20년 가까이 나와 함께 지냈으리라.


내게 가장 이상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이렇게 서로 시를 낭송하며 교감할 수 있는, 혹은 함께 낚시를 하거나 함께 등산을 하거나, 뭐 그런 관계이리라. (이상적인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다. 내 상상력의 너머의 세계이므로.)


역시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도 그 대목들이 여전히 내게 감동을 준다.


그래서, 원작에도 이 시 낭송 장면이 나오는가? 궁금하여 원작 소설이 담겨있는 킨들 책을 사고 말다.  책을 들여다보니 영화 대사 대부분 원작에 있는 것들을 그대로 옮겼다.  책도, 영화도 참 좋다.


이 원작은 노만 매클레인 (1902-1990)이라는, 시카고 대학에서 평생 문학 강의를 했던 문학교수가 70세가 넘은 후에 탄생시킨 것이다. 퓰리처 상 후보에도 거론 되었으나 수상을 하지는 못했다.

http://en.wikipedia.org/wiki/Norman_Maclean



원작을 읽어보니, 문장이 간결하고 명쾌하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13. 9. 2.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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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크 호수의 매력은, 이끼로 뒤덮인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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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나 자전거 타기를 하는 사람들은 잘 조성된 산책로를 선택하지만, '걷기족' 나는 이들이 잘 가지 않는 '처녀림'같은 숲속 오솔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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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기둥에까지 뒤덮인 '이끼' 는 곰팡이, 버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 내게는 초록색 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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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일곱시, 산책을 시작할때 이슬비가 뿌리더니, 숲에서 나온 오전 여덟시 반에는 구름이 걷히고 햇님이 얼굴을 내밀었다.


복된 9월.  




행 패



오늘은 새벽 예배 마치고 곧바로 호수로 차를 달려 산책을 했지만,  저녁 나절에 산책 나가야 하는데 몸도 무겁고 날이 어두워져서 혼자 나가기 싫을 때, 이럴때는 찬홍이를 꼬셔서 함께 데리고 나간다.  찬홍이는 나하고 워킹 나가는 것을 '효도' 혹은 '자식으로서 마지못해 하는 의무' 정도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찬홍이에게 워킹을 함께 나가자고 조르는데는 몇가지 난이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1단계: 찬홍이도 뭔가 운동을 하고 싶은데 내가 나가자고 하면 군말 않고 선뜻 따라 나선다.



2단계: 찬홍이는 가기 싫은데, 내가 나가자고 조를때 내가 하는 협박 -- "너 청소 할래, 산책 갈래? 양자택일 해."  마지못해 따라나서는 찬삐.



3단계: 역시 내가 행패 부릴때 -- "너 나하고 예배당 갈래, 산책 갈래?"  예배당 가는것을 '자식으로서 마지못해 하는 의무'라고 생각하는 찬삐를 구슬리는 방법 (-_-)  억지부리는것 다 알지만 찬삐가 그냥 따라 나서 준다.



4단계: 청소도 다 되어있고, 아침에 예배당도 다녀왔고, 뭐 내가 행패부려봤자 도무지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는 --> 왕눈이를 판다.  "아이고 아이고 왕눈아. 우리 왕눈이가 죽으니 엄마가 산책 나갈때 따라 나서는 자식 새끼도 하나 없구나. 아이고, 내가 더 살아서 뭣하겠는가. 우리 왕눈이 따라서 천국 가야지. 왕눈아, 왕눈아, 아이고 아이고. 내가 더 살아서 뭐해"  내가 이러고 곡을 하면 찬삐가 '내가 못살아' 하면서 따라 나선다. 



5단계: 이러한 모든 것이 통하지 않을때,  이럴때는 한국의 박선생께 전화를 때린다.  "아이고, 자식 새끼 다 소용없네. 이 껌껌한 밤에 내가 산책을 나간다는데 따라 나서는 자식새끼 하나 없네. 내가 못살아 못살아"  ---> 이러면 박선생이 "찬홍이 바꿔봐" 해가지고 뭐라뭐라 잔소리를 한다. 그러면 착하고 귀염둥이 찬삐가 한숨을 푹 내 쉬면서 내 산책에 동행을 한다. 카카카. 


아침에 나갈때는 나 혼자 나가고, 오후에는 찬홍이한테 나가자고 행패를 부릴때가 종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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