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Life2018.11.12 12:14


내 가까운 친구는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어느 사립중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학교에서 주욱 근무하고 있다. 한 30년쯤 되었을 것이다. 그는 매일 똑같은 직장으로 출근해왔다. 30년 쯤.  내 가까운 친구는 어느 분야의 전문가이다. 그래서 그 쪽 전문분야의 일을 30년 넘게 주욱 해 왔다. 그 사이에 소속기관을 네군데쯤 옮겼지만, 그의 정체성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그의 삶을 돌아보며 내게 말했다, "직장을 세번이나 옮기고 이것이 네번째 직장이니...참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어..."


그를 따라 고개를 주억거렸다.  "직장을 옮기는 일은 배우자나 부모가 죽는것 만큼이나 큰 스트레스를 유발한다고 하는데, 참 파란만장했군...네번이나 직장을 옮겨야 했나니...." 


그의 파란만장한 삶에 비해서 내 삶은 너무나 평이해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내 삶을 돌아보니 나도 직장을 여러번 옮긴것 같았다. "그런데, 나도 직장을 여러번 옮긴것 같긴 해.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애매한 표정으로 말하자 그가 '너 따위가 무슨 그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겠니...'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어디 어디 다녔는데? 한번 세어봐." 


그래서 나도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헤아려보았다.  


음, 그러니까 말야... 음...아르바이트 한거 빼고, 개인적인 컨설팅 해 준것, 개인지도 해준것, 번역한것, 글 써서 팔은것  그런거 다 빼고, 정식 기관이나 회사에서 월급 받으면서 일한 것만 따질까봐.  

    1. 해외 유학 컨설팅 회사에서 유학서류 꾸며주고, 인터뷰 영어 가르치고 그런 일을 했지. 유학 가본적도 없이 말이지.
    2. 그 일이 영 하품나게 재미가 없어서 무역회사에 가서 명품 오더하고, 세관 서류 작성하고, 이중장부의 기술 이런거 전수 받다가, 역시 재미 없어서 그만두고
    3. 잡지 편집을 좀 했지. 재미있는 일이었어. 그런데 아무래도 그 잡지사가 영 희망이 없어서 잡지 편집하면서 다른 직장을 찾아보았지. (역시 그 잡지사는 내가 떠난 후 1년쯤 후에 문을 닫았어)
    4. 외국 제약회사에 들어갔지. 독일어와 영어를 사용하는 자리였는데, 내게 경영학 공부를 좀 해보라고 해서 경영학 공부를 조금 했지. 눈이 빠지게 회계서류를 봐야 했는데, 적어도 이 회사는 치사하게 이중장부 놀음은 안했지만, 리베이트라는것이 있었지. 약사들과 의사들에게 나가는 리베이트에 대해서 소상하게 배웠었지.  이 회사에서 몇 년 일했는데, 애 낳고 살림하려고 그만뒀지.  (그리고 애 낳고 살림을 했지.)
    5. 벨기에 필름회사에서 역시 국제 업무를 잠시 했고
    6. 모교에서 불러서 대학 영자신문 간사를 2년을 했지...까마득히 잊고 있었군...그당시, 출근 할때면 둘째를 업고, 첫째를 걸리고 달리는거지. 그러다가 넘어지면 청바지 무릎이 나가고 무릎에서 피가 흐르는데, 등에 업힌 애 다쳤을까봐 아기부터 들여다보고. 대단했어 하하하. 지금 하라면 못하지. 젊은피가 흐를때만 가능한 일이지. 
    7. 일간지 리포터로 필명을 날렸고
    8. 차례차례, 세개의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지. (초등학교 세개를 그냥 한가지로 칠게. 계산하기 성기시니까) 교사교육도 했지만, 그것도 그냥 여기에 포함시키고. 
    9. 중학교에서도 영어를 가르쳤고
    10. 미국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지. 그래서 한국의 초등-중등 영어에 이어 미국에서 '고등'까지초중고 영어를 섭렵했다고 할 수 있지. 
    11. 박사학위 마치고 처음 시작한 일이 대학원 과정 하나를 새로 만들어내는 일이었는데, 거기서 주임교수를 몇년 했지. 워싱턴과 미주리주를 오가며 강의를 했지. 
    12. 메릴랜드주의 몽고메리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세학기
    13. 그리고 버지니아의 모 주립대에서 강의를 하다가
    14. 한국으로 와서 섬마을 여선생으로 또 몇년 살았지




물론, 그냥 일회성 계약직이나 뭐 칼럼 쓰고 이런거는 헤아리지 않았어. 그냥 월급단위로 움직인것만 헤아려본것이지.  직장을 도대체 몇번을 옮긴거야?  아마 빠트린것이 있을거야.... 잘 모르겠어. 기억이 희미해서...한 학기동안 초등학교 1학년 미술 보조교사를 '자원봉사'로 했던 것이 인상적이야. 내 인생에 미술 보조교사라니.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매주, 아이들 미술작업 고안하고 준비하고,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지. 월급을 받지 않았으니 뭐 딱히 경력에 포함할 생각은 없지만, 나로서는 흐뭇한 경력이야.  나중에 할머니가 되어 그 비슷한 작업을 또 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만약을 위해서 '한국어 교육' 자격증도 따 놓았지... 혹시 모르니까, 언젠가 내가 어딘가로 가서 한국어를 가르치게 될지. 자격증이라면, 그것 말고도... 음...그것은 나중에....


내가 중얼중얼하면서 뭔가 좀더 회상하려고 하자, 직장을 세번이나 옮긴 파란만장한 삶을 자부하던 그이는 두 손을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해! 그만해!" 


입을 닥치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도 겸손하게 말했다, "뭐, 별거 없어. 손에 쥔게 아무것도 없는 모래와 같은 인생이야.... 끈질긴데가 없어, 쉽게 싫증이 나서 한군데 오래 붙어있을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러니까, 남편과 두 아들에 대해서 나는 책임이 있으니까, 그 책임은 죽을때까지 안고 가는거고, 나머지는 언제든 떠나거나 떠나 보낼수 있는것이지. 나를 한자리에 묶어두는 이는 남편과 두 아들 뿐이지.  그들을 위해서 돌아올 뿐, 나는 매일 길을 떠나는거야.    


언젠가, 우리 언니가 '내가 결혼이후에 몇 번이나 이사를 했냐면...' 하고 헤아리길래, 나도 옆에서 덩달아 손가락 셈을 했는데, 역시 우리 언니가 내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 막았다. "닥쳐! 그만해!"  내가 줄줄이 읊어대는 이사의 이력에 언니의 귀가 따가워졌던 것이다.  


가끔 나는 내가 수백년을 살은것 같은 피로를 느껴.  남들이 수백년동안 살아낼것을 한 생에서 살아낸것이 아닌가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하지.  그러니까, 난 언제 죽어도 별로 억울하지 않다는 생각이지.남들보다 아주 많이 살았거든.  앞으로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갈지 난 몰라. 우리 예수님만 아실일이지. 그래도, 예수님하고 같이 가는 길이니까 그다지 힘이 들지는 않겠지. 이 생의 끝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또 하루 사는거지 뭐. 어디쯤서 이 이야기는 끝이 나는걸까?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11.09 14:55

세상물정의 물리학, 김범준 지음

복잡한 세상을 꿰뚫어 보는 통계물리학의 아름다움


집에 있길래 읽었다 (우리 집에는 그냥 와서 쌓이는 책이 많으므로 독서 잡식이 용이하다. 내가 서점에 나가서 사온 책은 아니다.) 첫 장 '뒷담화를 권한다'가 인상적이라서, 대충 끝까지 읽었는데, 이 책은 물리학하고 상관없이 사는 보통 사람이 가방에 가지고 다니다가 전철에서 앉아 갈때 꺼내서 여기 저기 그냥 기분 내키는대로 읽기에 적당한 책이다. 챕터별로 토픽이 바뀌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읽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주제도 다양한데 공통점은, 세상의 잡다한 현상을 수식화 하거나 그래프로 설명을 해 준다.  '왜 그래프나 도표가 필요한가?' 저자에게 물으면 아마도 저자는 '그냥 궁금해서...'라고 대답할 것이 틀림없다. 


그냥 심심파적으로 읽다가 특히 내 눈길을 끈 것.


내 이름도 눈에 띈다. 빈도수가 높은 이름이니 좋게 말하면 '인기 있는, 선호하는 '이름이고, 나쁘게 말하면 '진부하고 흔해빠지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여자이름이라는 말이 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내 절친한 친구 두명은 60년대에 유행했던 이름이고, 내 이름은 그래도 70년대 이름이라는 정도.


크아, 저것이 밤하늘의 별자리라면, 내 이름은 어딘가 좀더 영롱하게 빛나는 것 같구나!  (자기도취) 


이 통계 물리학자가 남자이름은 조사를 안하고, 여자이름만 주무른 이유는 그가 딱히 페미니스트라서가 아니고, 한국 남성 이름은 '항렬'자를 따르는 경우가 많이서, 이름에 이떤 사회성의 변수가 들어있으므로 여자이름에 비해서 고유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했다.  지원, 은지, 민지, 바야흐로 '지'녀들의 이름이 이 도표에서 가장 최근 유행 패턴인듯 하다. 


음...물리학에서 별걸 다 들여다보는구나, 확인하는 정도.  아는만큼 보이는 법이니까 나는 일자무식이라 그냥 대충 봤다.  그래도 한가지 배운것이라면 -- 내가 가진 자료들도 그래프로 옮길수 있도록 데이타시스템을 만들고 살펴보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귀챦은 일이지만 의미있는 일임을 새삼 깨달았다.  


이름에 대하여 

며칠전 내 이름에 대하여 잠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나는 어릴때 내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딘가 밋밋하고 개성없고 힘도 없고 예쁘지도 않고 시시하고 한심해 보이는 이름이었다.  내 성까지 붙여서 내 이름을 읽거나 말하면 격한 소리가 없고 그냥 맹숭맹숭하다. 혜진이라던가 진주 뭐 그런 이름이 부러웠다. 내 이름은 영 맹숭맹숭했다.  나는 대학생 시절에도 그 이후에도 영 내 이름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내 이름에 대해서 내 시선이 긍정적으로 바뀐 시기가 언제 쯤일까? 나는 정말 내 이름이 나라는 사람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래서 일부러 '남자'를 연상시키는 별명까지 만들어서 사용하곤 했는데, 대학원 시절에 나의 지도교수께서 내 이름을 참 예쁘게 불러주셨다. 그분은 모든 외국인 학생들의 고유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였는데, 특히 미국인이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내 이름을 아주 정확하게 발음하며 내 이름을 불러줬다. 그리고 그이가 내이름을 부를때 내 이름이 참 곱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이가 40을 넘기면서 나는 개성없고, 기운없고, 싱겁고, 아무것도 아닌것 같은 내 이름의 '소리'가 슬슬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내 이름을 발음하면, 어딘가 뽀얀 우유 크림 같기도 하고, 은은하고, 부드럽고, 모가나지 않으며 튀지 않으며 태생부터 고귀한 것 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은은하고

우아하고

아름답고

고요하고

튀지 않으며

부드럽고


세상의 온갖 모든 부드럽고 은은하고 아름다운 요소들을 다 갖다 붙여도 모자라는 그런 소리를 내는 것 같다. "내 이름이 참 우아하지 않아?" 운전대를 잡은 내가 묻자 디오게네스 선생이 한숨을 푹 내 쉬며, 낙엽지는 창밖을 내다보며 혼잣말처럼 대꾸했다, "그렇지...그게 문제였지...그 이름에 깜빡 속은거지...."


그렇다, 그게 문제였다. 어릴때 내 불만처럼, 내 이름은 그 느낌이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간에 도통 나하고 안 어울린다.  

(이름의 느낌)    vs  (사람의 느낌)

은은하고   ... 거칠고

우아하고  ... 시끄럽고

아름답고 ... 무섭고 

고요하고 ... 번잡스럽고 

튀지 않으며 ... 튀고, 충동적이며 

부드럽고 ... 불같이 성을 내고 


뭐, 디오게네스가 가까이에서 살아보면서 경험한 실제 사람에 대한 주관적/객관적 평가가 이러할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사기결혼을 당한 것 같다는거다. 사기 친 사람은 없다. 자신이 속았을 뿐. 하하하. 


사실 디오게네스가 인지하는 내가 실제 나의 본질에 가깝다. 싱크로율 백퍼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을 해 보았다. 본래 이러한 사람에게 왜 '이따위 (이렇게 우아한)' 이름을 지어준걸까?  이것이 혹시 '악마의 한수' 혹은 '신의 한수'가 아닐까? 이런 밑도 끝도 없고 타당성도 없는 생각을 혼자 해 보게되었다. 


내가 본래 '청룡'의 운명을 띄고 태어난 존재인데, 내 '청룡'의 운명을 내 '이름'으로 결박지어놔서, 내가 승천을 못하고 지금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 상태로 숨을 헐떡이고 있는 모양새가 아닌가?  (역학관 성명풀이 선생들이 아마 나를 요렇게 꼬셔댈지도 모른다. 비싼돈 들여서 이름을 바꾸면 장차 이나라의 황제가 될 운명을 타고 났다고.)


상상가능한 가설 (1) 내 이름을 지으신 내 아버지가 여러가지를 보는 눈이 있어가지고, 내 팔자가 사나울까봐 부드럽고 유약한 이름으로 거친 운명을 눌러 놓으셨다.  (2) 내 이름 때문에 청룡의 운명을 타고난 내가 숨을 제대로 못쉬고 끙끙 앓고 있다.  (3)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 당장 이따위 농담을 집어 치우라!


만약에 내 이름이 내 남자형제들과 동일한 항렬자를 붙여서 '희열'이나 '강열'이나 뭐 그랬다면, 나는 조금 다른 인생을 살았을까? 알수 없는일.  하여간 내 이름의 분위기와 나는 참 다르다.  (그것이 디오게네스의 주장이다) 하지만, 혹시 모르지 내가 은은하고 고요하고 아름답고 부드럽고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나이 오십을 넘긴 나는 내 이름이 무척 맘에 든다. 은은하고 고요하고 아름답고 부드럽고 착하고... 내가 청룡의 운세를 타고 났다면 나는 청룡으로 살아가겠지.  그렇지 않아도 일년에 몇차례씩 태평양 상공을 날아서 오가며 살고 있으니 원하건 원치 않건간에 하여간에, 기운차게 살고 있는 것이니. ㅋㅋㅋ. 


이름 얘기가 나왔으니, 호칭을 논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나를 부르는 다양한 호칭이 있다. 학위를 부르기도 하고, 직함을 부르기도 하고, 우리 두 아들이 부르는 내 이름은 '옴마옴마'다.  얘들은 꼭 두번씩 부른다. 그래서 그들에게 내 이름은 '옴마옴마'다.  엄마 한번 부르는 것으로 뭔가가 부족한 모양이다. 숨넘어가게 두번 부르는 옴마옴마가 내 이름이다. 디오게네스는 나를 '벤쳐'라고 부른다. 나 자신이 그에게 필생의 벤쳐라고 한다. 아주 성공적인 벤쳐모델이라고 한다. 혹은 나를 '갑'이라고 부른다. 벤쳐이며 갑이다. 그는 '을'의 신세를 면하겠다고 노래를 부르지만 어딘가 을의 입장을 즐기는 것 같은 자학모우드로 보인다.  돌아다니면서 '갑'의 '갑질'을 고자질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취미생활로 보인다. 내 친구들은 다정하고 상냥하게 내 이름을 불러준다. 


내가 싫어하는 호칭도 있다.  시장에서 '아가씨, 이리와 보셔. 이것좀 사셔' 뭐 이럴때, 뻔한 중년 아줌마한테 아가씨라는 천박한 호칭을 쓸때, 나는 절대 그 쪽을 안 쳐다본다.  뻔한 아줌마한테 왜 아가씨라고 희롱을 하는가?  '아줌마'라는 호칭은 중립적이다. 그리 싫지도 좋지도 않다. 아줌마라고 불러도 별 상관이 없다.  교회에서 나를 '집사님' 혹은 '권사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꼭 정정을 해 준다, "저 그냥 성도에요." 일반 교회 다니는 사람을 '성도'라고 부른다. 신도라는 말이다.  혹은 자매님 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참 정겹다. 자매님.  참 정겨운 호칭이다.  나를 잘 지도해주시는 우리교회 목사님은 내게 꼭 ***자매님이라고 부르신다.  그 외에 집사, 권사, 장로 이런거는 어떤 직위이다.  나는 그런 직위체계 밖에 있으니까 그냥 성도다.  그런데 내 나이를 짐작하고 자기네 맘대로 그 나이때쯤 되는 아줌마들이 가질만한 집사나 권사 이런 이름을 내게 붙이러 드는 사람도 있다.  얼마전에는 교회의 최고 대장 목사님이 내가 감사헌금 낸것을 보고는 "*** 권사님"이라고 읽더라.  짜증나서, 그 다음에 감사헌금 낼때 헛갈리지 말라고 "***성도"라고 적었다.  제 멋대로 막 이름 붙이지 말라는 뜻이다.  


나보고 '보살님'이라는 사람도 있다. 짜증나는거지. 그게 절에서 내 또래 아줌니들에게 막 붙이는 이름이니까. 게다가 난 절에도 안다닌단말이지. 권사나 집사보살이나 그냥 내 허락도 안받고 자기네들 맘대로 갖다 붙이는 이름이다. 어딘가 나를 '조롱'한다는 느낌이 든다.  왜 나를 조롱하지? (나 승질나면 앞뒤 안가리고 불같이 화를 낼 수도 있는데, 이분들이 내 승질을 잘 모르시는거지...)   그냥 차라리 '아줌마'라고 불러주는게 낫겠다. 난 아줌마니까 아줌마라는 호칭이 싫지 않다. 적어도 권사, 집사, 보살보다 낫지. 그렇다고 집사, 권사, 보살님이 나한테 성낼필요는 없다. 나는 집사도, 권사도, 보살도 아니니 정확한 호칭이 아니므로 거부한다는 것이다.  


난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한테 '이모님' 이라거나 '이모' 뭐 이런 호칭 안쓴다. 그들은 내 이모가 아니니까. 남의 어머니한테 '어머님'이런 호칭 잘 안쓴다. 그 '어머니' 막쓰라는 호칭 아니다. 제 딸 강간하고 죽인 범인을 가리키면서 '그 삼촌이...' 그냥 이웃 남자가 왜 삼촌인가?  클래스메이트가 왜 '오빠'인가?  기묘한 현상이다.  전국민의 가족화 현상이 맘에 안드니까 난 그 호칭 안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들여다보고 그에 걸맞게 불러주는 것이 내게는 중요하다. 그 사람이 듣기에도 거북스럽지 않은, 다정하고 예절바른 그런 호칭에 대해서 고민을 하곤 한다 


성질 대단하다. 절대 우아하고 착하고 아름답고 부드러운  내 이름하고 안 맞는거 사실인듯.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11.05 17:54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이중표 역해




이 책은 '법륜스님의 금강경' 책을 읽고 있는 나를 위하여 내 귀한 친구가 일부러 비교해보며 읽어보라고 보내주신 책이다. 'Don't look a gift horse in the mouth' 라는 서양 격언이 있다. 선물받은 말의 이빨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직역할수 있는데, 말의 이빨을 들여다보는 이유는 말의 이빨 상태를 점검해보면 나이나 건강상태 이런 것들을 확인할수 있기 때문이다. 남이 호의로 선물을 했으면 그 선물을 점검해보고 좋네 나쁘네 따지면 안된다는 말씀이다. 


내 소중한 친구가 선물을 보내 주셨으면 나는 그 선물에 대하여 무조건 감사해야 할 일이지 이렇네 저렇네 따지는 것은 참 오만방자하고 무례도 그런 무례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랴...나는 내 친구에게 무례를 저질러야 하는 운명인것을. 


뭐랄까, 이 책은 오랫동안 불교공부에 심취해 있는 내 친구가 선뜻 보내줄만큼 좋은 책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미 머릿말에서부터 돌에 걸려 넘어지는 형국이다. 





저자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 머릿말만 읽어보면, 나는 여기서 멈추고 더이상 이 책을 읽지 않을 것같은 분위기이다. 


저자는 과거에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였던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나라가 되었고, 가장 염치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되었고, 가장 고통스러운 땅이 되었다고 단언한다. 나도 모르게 '오 마이 갓' 탄식을 하게 된다.  만약에 저자가 정말로 오늘의 한국의 현실을, 한국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풀이한다면, 나는 이런 시각을 가진 사람이 설명한 '금강경'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내 눈에 비친 이 나라는 역동적이고 잘 커나가고 있으며 이 땅의 사람들은 저땅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름답고 선량하기 때문이다. 


자살율이 세계 1위인 나라? Are you sure?

https://ko.wikipedia.org/wiki/%EC%9E%90%EC%82%B4%EB%A5%A0%EC%97%90_%EB%94%B0%EB%A5%B8_%EB%82%98%EB%9D%BC_%EB%AA%A9%EB%A1%9D


자살율이 높지...하지만 세계 1위라고 하시면 그건 사실이 아니지.


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 

https://ko.wikipedia.org/wiki/%EC%B6%9C%EC%82%B0%EC%9C%A8%EC%88%9C_%EB%82%98%EB%9D%BC_%EB%AA%A9%EB%A1%9D


과장하신것이지. 


청소년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

전세계 26개  OECD국가중에서 그나마 일본, 호주, 뉴질랜드, 아이슬란드 빼고, 22개국 중에서 최하위.  그런데 이 세상에는  OECD국가만 있는게 아니므로 이 역시 정확한 말씀이 아니고.


데이타를 아전인수격으로 자신의 세계관에 맞게 대충 편집하여 설명을 하신듯 한데... 만약에 금강경을 그런식으로 설명하신다면 나는 사실 확인도 할 수가 없고...



우리의 '삶과 전통'이 '무참하게 파괴되었다'고 그는 역설하나, 정말 우리의 과거가 현재보다 좋았는가? 조선 시대가 대한민국 시대보다 더 살기 좋았는가?  절대적 비교를 할수는 없지만, 지금이 훨씬 낫다. 여권 신장이나 인간 평등문제 이런 저런 것을 비교해봐도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곳에서 있었던 '억압'과 '구속'에 비하면 지금이 훨씬 살기 좋다. 


이분의 세계관이 이런 식이라면, 이런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설명하는 '금강경'은 또 얼마나 한반향으로 치닫을 것이며, 금강경을 잘 모르는 나는 이 사람이 설명하는대로 끌려갈수밖에 없는게 아닌가?  이런 의구심이 든다는 것이지.  한마디로...이분의 머릿말은 어딘가,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ㄲㄷ'를 연상시킨다. 음...법륜스님의 설명에서 내가 커다랗게 '물음표'를 달았던 곳은 없었다.... 전형적인 '곰방대' 물고 앉아서 '세상이 엉망이고, 모든것이 패륜이며, 말세가 왔다'고 떠들어대는 뒷방 어르신적 어투인데, 어딘가 복고적 유머는 될지언정 오늘날의 화법에서는 한참 멀어져 있다. 





이걸 어쩌나... 하지만 이 책은 내 친구가 선물한 책이니 나는 끝까지 읽을 것이다.  문제는 이미 내가 이 저자에 대해서 어떤 거부감이 슬슬 들고 있으므로 과연 그의 본의를 제대로 파악할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


그건 그렇고,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인데, 그럼 '니까야'는 뭘까? 사실 책의 머리에 있는 설명을 읽어봐도, 심지어 구글 써치를 해봐도 '니까야'가 뭔지가 잘 잡히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추측컨대, 석가세존이 사용한 언어 (팔리어)로 정리된 불경. 그러니까 말하자면 '원전'인것 같다.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경전을 제대로 읽기 위해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이런 것을 익혀서 원전에 다가가려고 애쓰듯이, 불교에서도 석가의 제자들이 직접 적었던 인도의 원전에 다가가려는 노력이 있을 것인데, 이 책이 그 원전을 바탕으로 해석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자현'스님이라고, 불교사 강의를 잘 하시는 발랄한 스님이 있는데, 이분 설명에 의거하면, 불교의 발원지는 인도이지만, 불교를  성문화, 역사화한것이 '중국'이라는 평이다. 중국인들이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할 때, 문제는 인도어를 중국어로 정확히 옮기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어느 언어든지 정확히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국인들은 최선을 다해서 번역작업을 하되, 여전히 남아 있는 빈틈을 그대로 놓아두었다고 한다.  그 빈틈은 -- 불교적 상상력으로 각자 채워 넣을수 있도록.  그리고는 자신들이 번역한 불경에 의거하여 공부와 수행을 해 나갔다고 한다. 일단 번역을 마친 후에는 원전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불교'를 세계화 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중화사상'을 유지한 셈이다.  그래서, 불교를 알건 모르건 한국의 대중들도 대체로 한문으로 씌어진 불경에 익숙하고, 절에 가도 온통 한문으로 씌어진 글귀를 볼 수 있다.  이런 문화적인 이유로 내게 '니까야'라는 말 조차 생소했을 것이다. 역시 자현스님의 설명에 기대어 내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한국 사람들이 이제 먹고 살 만해졌기 때문에 한문으로 씌어진 불경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원전도 들여다보고 더 잘 배우려고 노력하게 되었다고 할 만하다. 다시 말해서 -- 한국이 먹고 살만해져서 일반 대중이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도 접하고 그러는 것이다. 한국이 저자의 말대로 지상 최악의 망가진 나라라면 저자가 쓴 '니까야 금강경' 같은것을 들여다볼 사람도 없다. 현실 파악을 똑바로 하셔야 할 듯 하다.  (하지만, 내가 불교에 대해서 일자무식이니 그의 깊은 뜻을 어찌 알랴, 저렇게 말할땐 저럴만한 혜안이 있으실지도 모른다.)


나는 리차드 도킨스의 역저 '이기적유전자' 책을 굉장히 싫어한다.  굉장히 싫어하지만 그 책은 현대인이 반드시 읽어야하는 좋은 책이라고 믿는다. 책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별개이고 그 책이 인류사에 차지하는 비중만큼은 높이 사는 것이다. 내가 그 책을 굉장히 싫어하는 이유는, 그 책에 설명되는 유전자의 무한확장하고자 하는 무시무시한, 끝 모르는 욕망과 그 생존 원리에 수긍을 하면서도 그 생존원리에 강한 거부감을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론이 매우 정교하게 수립되었다는 것을 부정할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 책을 싫어하지만 그 역저는 존경한다. 



이 책의 경우는...일단 머릿말이 이미 정나미가 떨어지는데, 과연 이것이 역저일지 긴가민가.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안보고 손톱의 때만 들여다보는 어리석음을 범하면 안되니...그의 정수를 들여다보려고 노력하겠지만, 이미 사고체계나 세계관이 다른 사람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니, 약간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긴 하다. 하지만 뭐, 내 친구가 좋다는 책이니까 읽으면 좋을것이다. 

October 24, 2018





1독후기 (November 5, 2018


글을 쓸때 주의 해야 할 사항: 자신이 전문적으로 잘 아는 것에 대해서만 논하는 것이 유익하다. 내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여 설명하기 위하여 내가 잘 아는 이것과 내가 피상적으로만 아는 '저것'을  논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전문가들이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하여 설득력있는 글을 쓰다가 자칫 실수하는 대목이, 자신의 전문 분야를 벗어나서 비 전문 분야에 대한 평을 할때이다. 촘스키 선생도 그의 저작에서 아시아 혹은 한국 문제를 논할때 삑사리를 내셨고, 개미 선생 에드워드 윌슨도 그의 전공인 생물학에서 벗어나 아시아의 문화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역시 삑사리를 내곤 했다. 왜냐, 그쪽엔 또 그쪽 전문가가 있는 법이니까.


이중표 선생은 335페이지에서 '선법이란 법이 아닌것'을 논하면서 엉뚱하게 기독교에 대한 평을 한다. 그의 기독교에 대한 평은 이러하다. 

기독교의 경우 선과 악은 모순 대립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이 세상을 선과 악이 대립하고 있다고 본다. 천사와 악마, 여호와와 사탄, 이 둘은 영원히 대립 투쟁하는 존재다. 천사는 악마가 될 수 없고, 악마는 천사가 될 수 없다. 악은 싸워서 없애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공존할 수 없다. 기독교에서 선법은 신이 내린 율법이다. 십계명이 곧 선법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를 용납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 평화는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이 세상에서 몰아내고 기독교가 온 세상을 지배할 때 가능하다. 


 자, 내가 별로 깊게 공부하지 않은 예수쟁이인데, 그러니까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말이다.  내가 거의 십년 가까이 예배당 드나들면서 성경공부도 하고 이것저것 공부했지만, 기독교에서 '선/악'의 모순 대립에 대하여 논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성경의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는지 모르겠다. 


천사는 악마가 될수 없고, 악마는 천사가 될수 없다고? 일단 '타락천사' Lucifer가 있다. 대천사 (하느님의 오른팔과 같은 큰 천사)였는데 타락을 해서 사탄이 되었다던가? 그러니까 일단 문서상으로 천사는 악마가 될 수 없다는 단언은 틀렸다. 악마가 천사가 된 케이스는 들어보지 못했다.  악을 싸워서 없애야 할 대상이라고 어디에 적혀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내가 몇차례 통독한 성경 구약/신약을 통틀어서 하느님이나 예수님이나 '악'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으신듯하다.  하느님이 뭐가 답답해서 '악'과 싸우시는가?  여호와와 사탄은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다.  여호와하고 사탄이 동일 선상에서 경쟁하는 구도가 아니다. 욥기에 사탄이 등장하는데, 사탄이 욥을 상대로 내기를 거는 장면에서도 하느님은 태평이시다. 상대가 되어야 대립이 되는거지. 사람하고 개미하고 대립이 성립하는가?  이중표선생하고 구더기 한마리하고 대립이 성립되는가? (대립을 원하시면 그건 개인 취향의 문제이고)  사탄도 '불가식으로 표현하면 -- 방편'쯤으로 해석될만하다. 여호와의 권능 안에 존재하는 피조물이라는 얘기다. 


불교에서 선악에 대한 관념이 명확히 자대고 죽 그은 것이 아니라 연기의 법칙에 의거한다는 설명을 하기 위해서, 있지도 않는 듣도 보도 못한 기독교의 어떤 '있지도 않는' 개념을 막 끌어다 대시면 안된다.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하여 논하지 않으셔도 된다. 그냥 아는 말씀만 하시라.


기독교에 십계명만 있는줄 아는가? 그거보다 더 높은 법이 있는데 (더 높다고 할 수는 없고...어우러지되 으뜸이 되는 법이 있는데) '사랑'이다.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내 놓고 세우신 '전 인류에 대한' 사랑. 그것이 법이다. 선법이고 악법이고 떠나서 절대법이다. 언제 예수님이 이 세상의 모든 종교를 몰아내야만 평화가 온다고 했는가? 예수님은 사람의 개별적인 가슴 가슴에 이미 천국이 있다고 가르치셨다. 그것이 기독교다.  마치 불가에서 인생 인생에 불성이 심어져 있다고 설파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가슴 가슴에 천국이 왔다고 하셨다.  피상적인 기독교의 어떤 일면만 보고 '이것이 기독교다'라고 자신의 '불교'책에 막 써대는 것은 전문가의 태도로 보이지 않는다. 


그냥 제발, 자신이 잘 설명할 수 있는 분야에 대해서만 논하시면 좋을 것이다. 똑같은 이유로, 나는 기독교 목사님들이 불경공부 한번 제대로 하지도 않은 주제에 피상적으로 불교는 어떻고 저떻다. 그래서 기독교가 최고다라고 떠드는 걸 볼때 뒤통수를 한대 쥐어 박고 싶다. (그냥, 니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말하지마....내가 챙피하니깐.)


---   ---   ---  ---

나를 깊이 사색하게 만든 대목은 두가지이다. (책을 읽고 났을때 내가 혼잣말로 정리한 것이 화엄경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일체유심조'이고 금강경은 '무주상보시'  그리고 금강경에서 내게 다가온 두가지는 '무쟁'과 '업은 있되 사람은 없다'는 말.)


무쟁. 다툼이 없는 경지에 오를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무쟁, 그거 예수님도 설파하신거임...왜냐, 그분이 '사랑'인데 다툼이 있을수가 없지 않은가?), 업은 남되 사람은 남지 않는다는 논의는 내가 사회생활을 할 때, 어떤 사건이나 문제 상황에 대하여, 인간적인 변수를 가능하면 배제하고, 문제 그 자체를 들여다보고 분석하도록 동기화 하는데도 좋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도 아마 그 업은 남되 사람은 남지 않는다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게서 떠나지 않았던 근본적인 '고민' 혹은 '의문'이 따로 있다.  좋다. 무주상보시도 좋고, 뭐 나와 타인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가 한 몸이고 뭐 다 좋다. 다 좋은 말씀이다. 그런데 내 근본적 의문은 이거다 -- 그런데 실제 삶에서 정말로 이대로 실천을 하는 이가 있는가?  소설 '겨울여자'에서 주인공 이화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가족 이기주의'가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내 가족 우선, 내 자식 우선 그런 인간적 이기심에서 그녀는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냥 구별하거나 차별하는 마음없이 사랑을 주고 싶은것이다.  이화의 태도가 좀더 보살도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금강경을 읽고, 외고 가르치는 사람들 중에서 정말로 이런 보살도를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선 나부터 좋은 옷 입고, 내 가족부터 좋은 아파트에 살아야 하고, 내 아이들이 좋은 학군에 가야하고, 가능한 좋은 차 타고 가능한 폼나게 살면서 무주상보시를 행동화 할수 있는가?  무주상보시는 그냥 '이상'이고 그리 가려고 조금조금 노력하면 되는건가?  자기 잇속은 다 따지면서 무주상보시를 매일 왼다면 무주상보시는 악세사리인가?  내 삶을 좀더 우아하게 보이게 하는 치장물?  (기독교인들이 목에 걸고 다니는 비싼 보석 십자가목걸이 같은것?)  뭐 이런 회의감이 자꾸만 들어서 생각이 분산되곤 했다.  그런데,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해를 읽을때는 이런 잡념이 별로 들지 않았다. 그이가 좀더 설득력 있게 내게 설명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밑줄 긋고, 따로 적어 놓은 부처님의 아름다운 말씀이 많이 있으니, 귀한 책이다. 


내가 이 책 읽으면서 새삼 발견한 사실. 챕터가 넘어갈수록 기시감이 들면서, 이거 아까 한 말씀 또하네. 비슷한 말씀 또하네...그러니까 어떤 '나선형'처럼 논의가 되풀이되면서 깊어지고, 다시 아까 그 얘기로 돌아갔다가 방향이 바뀌고 그런다. 성철스님이 자꾸만 반복하고 설명하고 반복하면서 조금 다른 얘기 하시고, 그러는 화법이 기이하게 여겨졌는데 금강경 인도어 원전에 바로 그런식으로 논의가 이어진다. 나선형 구조의 말씀집이다. 새로운 구조적 발견이랄까. (이런 구조로 소설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기시감이 들긴 하는데 조금 다른 이야기, 조금 다른 전개, 그러면서 이야기는 이어지는). 


법륜스님과 이중표님의 금강경 해설집을 차례차례 읽고나서 두 책을 비교해보면 (이것은 무식한 독서가의 극히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평가인데), 법륜스님은 '승'으로서 그가 들여다 본 보통 사람들의 실질적인 삶과 금강경을 통찰하여 설명을 한것처럼 보이고, 이중표님은 불교 이론가로서 불경에 대하여 공부한 것을 설명한것처럼 보인다. 삶을 꿰뚤어보는 통찰력은  법륜스님쪽이 돋보이는것으로 평가된다 (극히 주관적인 평가이다). 학문적인 어프로치는 내가 어차피 학문적으로 불경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므로 잘 알 수 없다. 단 이중표님은 그냥 불경얘기만 하시는 것이 안전해 보인다. 그가 불경 외에 다른 것을 끌어올때 대개 삑사리가 난다.  그리고, 물리학 이론 함부로 종교경전에 갖다 붙이고 해설하러드는것 역시 위험해보인다. 안그래도 된다. 아는것만 말하는 것이 좋다. 말할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 (비트겐슈타인). 


김용옥선생의 금강경 강해는 어떨지 슬슬 호기심이 인다. 나중에 심심하면 그 때 읽어봐야지. 


그래서 내가 생각해 본 것인데, 금강경이라던가 불교라던가 혹은 다른 종교 (기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예컨대 동일한 '금강경'이라는 경에 대한 설명을 하는 자세 혹은 내용을 전개하는 방식을 보면, '법륜'스님은 이걸 사골 우리듯이 푹 푹 우려서 진국을 충분히 끌어낸 후에, 적당히 소금 치고 후추치고 뭐 파송송 얹고 해서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쌀밥과 더불어 상을 차려 허기진 사람에게 조촐한 한상을 내 주는 것처럼 여겨진다면 (참고로 나는 사골국 같은 고깃국 못 먹는다. 아주 타고난 중이지 ㅋㅋ_)  vs. 이중표교수님의 금강경은 어딘가 뭐랄까 사골을 비싼걸 사다 끓이긴 하는것 같은데, 요리에 정성도 많이 들어간 것 같은데 어딘가 설 끓고, 후추 소금 이런 간도 잘 안 맞는데 거기다가 아스파라거스나 뭐 이런걸로 장식을 시도하기도 하고 뭔가 소문난 식당인데 맛은 그저그런. 


왜 그런가?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은 '불교'라는 집에서 편안히 살면서 자유자재로 들락거리는데 (본래 집이란 거기서 살면서 들락거리는것이지 집 안에서만 지내라는게 아니지.), 어떤 사람은 '불교'라는 집에 갖혀 지내는 모양이라. 바깥세상이 어떠한지도 모르는 가운데 제 집이 최고라고 창밖에 소리를 지르는 형상이라. 집에 갖혀 지내는 그 사람이 그 집의 구조나 모양새 장판지 이음새나 벽지 무늬에 대해서 소상히 알수는 있을지언정 그이는 집의 지붕이나 집 주위의 나무나 지붕위에 내려 앉은 새나 이웃집 사람들이나 도통 알수 없는거라. 


극단적으로 종교에 갖혀 지내는 자들이 '사이비교'에 들어가 정신 못차리고 패가망신하는 중생들. 


종교는 갖혀지내는 교도소나 무덤이 아니라, 사람이 편안히 살도록 지어진 집이니 창문도 내고, 출입문도 내고, 이웃과 소통하는 오솔길도 내고, 시루떡도 노나먹고 그래야 하는거지.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11.05 13:29



팔순이 훌쩍 넘긴 유여사가 지난 번에 독감 예방 주사를 맞으러 내과에 다녀 오는 길에 길을 잃고 두어시간 가까이 고생을 했다고 한다.  노인학교라던가, 아파트 주변의 공원등 매일 왕래를 하는 곳은 아무 문제가 없지만, 건물들이 즐비한 전철역 근처 내과에라도 들를경우, 방향을 잘 못 잡을경우 엉뚱한 곳에 가서 길을 잃을 소지가 크다.  길을 잃고 당황을 하니 갑자기 아파트 이름도 생각이 안나고 주소도 생각이 안나서 누가 도와주려고 해도 방법이 없고.  그래서 고생을 하셨다고. 젊은 사람들도 이따금 방향을 잘 못 잡으면 헤메기 일쑤이니 큰 문제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그래도, 유여사의 기억력이나 인지 능력이 예전보다 많이 약해진 것도 사실이다. 산수 뺄셈을 시켜보거나 몇가지 점검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늘, '아직은 그래도 괜챦으셔...'하고 스스로 위안을 삼지만, 세월에 장사 있는가. 누구나 비슷한거지. 아직 정신이 말짱하신 것이 고마울 뿐이지.


유여사가 그 길 잃어버린 얘기를 자꾸만 하길래, 산토끼 노래에 주소를 넣어서 노래를 외우게 했다.  예를 들면, 종로구 혜화동 꿈에 그린 아파트, 901동 201호 나의집 이지요.  뭐 이런식으로 (여기 나오는 주소는 그냥 만든 것이다. 유여사하고는 상관이 없다).  "엄마, 이 노래가 골수에 박히게 외워.  그러면 길 잃어버려도 노래를 부르면 마음 착한 사람이 길을 찾아 줄거야." (물론 엄마 가방에는 커다란 이름표가 들어있다. 주소, 연락처, 가족 연락처가 적힌). 


이걸 산책하는 내내 연습시키고 따라부르게 하고, 그랬는데, 외우는것 자체를 힘들어 하셨다. 재미도 없고. 나는 짜증이 폭발할 지경이고. (머리 명석한 대학생들 상대하다가 뇌세포가 노화된 노인을 상대하는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짜증이 터지려고 할 때마다 내가 나에게 "Calm down, calm down...be a good girl..."


내가 결심한 것은 이것이다.  내가 엄마 얼굴을 보고 웃지 않을거면 엄마를 대하지 말라.  엄마에게 무조건 웃어주고 희망을 주고, 칭찬해주고, 함께 있는 짧은 시간이 '기쁨의 시간'이기만 할것.  잔소리하거나 가르치러 들지 말것. 


수십번을 함께 노래를 했는데도, 유여사가 어딘가에서 막히곤 한다.  밤이 되었다. 나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  내가 제안을 했다.


"엄마, 내가 산토끼 노래를 부를테니까, 엄마가 대답을 하는거야. 엄마가 토끼야. 내가 엄마에게 묻는거야.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총깡총 뛰어서 어디를 가느냐? 내가 이렇게 물으면 엄마가 노래로 대답을 해. 응?"


내가 엄마에게 "엄마가 깡충깡충 토끼야"라고 말을하자, 유여사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내가 어디로 가느냐고 노래를 부르자, 유여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노래로 자신의 주소를 읊는다. 그리고 하는 말, "재밌다! 재밌다!"


유여사에게 공책을 갖다 주고 주소 가사를 적어보라고 했다. 물론 아직 글 쓰기는 잘 하신다. 또박또박 잘 적으신다.  그 옆에다가 내가 달려가는 토끼 한마리를 그려주고, "이게 엄마야. 엄마가 토끼야"하니 아주 기뻐하신다. 자신이 토끼라는게 아주 맘에 드시는 모양이다. 


유여사가 내게 묻는다, "그런데, 내가 토끼쟎어. 그런데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너는 뭐니?"  토끼의 상대가 누구냐고 물으신다.  "응, 곰이야. 곰이 묻는거야" 나는 대답과 함께 공책에다가 곰 (테디베어)을 그려 넣었다. 엄마가 아주 기뻐하신다.


그러더니, 내가 '어디로 가느냐' 노래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 큰 목소리로 자신의 주소지로 화답을 한다. "재밌다. 재밌어!" 딱 서너살때 우리집 애들 같다. 뭔가 이야기를 지어내서 설명을 해주면 눈을 빛내던 내 자식들.  이제 유여사가 그 서너살짜리 아이들같은 동심을 드러낸다. 이것이 재미있다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시다니... 



치매노인들에 대한 '음악치유'효과에 대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작고한 올리버 색스도 인터뷰에 응했고),  노인 요양센터에서 '식물'처럼 멀거니 앉아있는 노인들에게 그들에게 친숙하거나 친밀한 음악을 틀어주거나, 특히 그들이 즐겨 듣던 음악을 MP3에 담아서 헤드폰으로 들려주자, 이들중 다수가 눈을 빛내며 몸을 움직이기도 했고, 극히 정상적인 반응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연출했다.  친숙한 음악이 기억장치를 자극하여 활달히 뛰놀던 '자아'를 복구하는 것 같았다. 유여사도  친숙한 '동요'와 토끼, 곰과 같은 친밀한 동화적 장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유여사의 서서히 약화되는 뇌세포를 활성화 시킬수 있는 장치들이 무엇이 있을지 연구를 해 보아야 한다. 


매주 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유여사.  나도 똑같이 늙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민.'  우리 모두 늙을것이라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한자들, 쉽게 부스러질 것들, 작고 초라한 것들, 그런 사람들에 대한 연민. 


어느 누구도 한 밤에 길거리에서 이유도 없이 괴한에게  두드려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죽어서는 안된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11.03 05:34


프레디 머큐리 오빠가 돌아왔다!


영화 보는 내내 현실을 잊었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 앉아 있을수도 없었다. 목을 길게 빼고 앞으로 앞으로 스크린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  



못살아, 못살아, 내가 못살아...이 장면을 그대로 재현해 내다니. 어쩔려구 아이고 아이고... 난닝구 오빠. 오랫만에 성감대 자극받다. 다 필요없어. 퀸만 있으면 그뿐. 


이 세상에는 두종류의 인간이 있을 뿐이다.  프레디를 아는 인간과 그를 모르는 인간. 그를 알면서 그를 사랑하지 않을순 없다.  그러므로  그를 아는 인간과 그를 모르는 인간 사이의 소통은 거의 불가능하다. ㅋㅋ



카셋트테이프 두개에 담긴 퀸의 노래들을,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고 또 듣던 시절의 기억이 되돌아 와서 귓가에 맴돌았다. 옛날처럼, 퀸의 노래를 틀어놓고, 아리조나를 네바다 모하비 사막을 달려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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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