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 Art2011. 10. 24. 06:32

Cakes (1963) oil on canvas
Wayne Thibaud (1920- presently working)
사진. National Gallery of Art 동관 1층 2010년 1월 16일 이은미 촬영



집으로 날아온 Smithsonian Magazine 2011년 2월 호에 Wayne Thibaud 특집 기사가 실렸다.
http://www.smithsonianmag.com/arts-culture/Wayne-Thiebaud-is-Not-a-Pop-Artist.html
기사를 재미있게 읽고, 내가 갖고 있는 사진파일을 뒤져서 들여다본다.


Wayne Thiebaud (1920 - )   --'웨인 티보' 라고 발음한다-- 는 현재 91세의 현역 화가이다. 2차 대전후의 미국의 현대 미술을 주도했던, 앤디 워홀, 프란츠 클라인, 윌렌 드 쿠닝, 리히텐 스타인등 굵직 굵직한 인물들이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다.  오늘에서야 그의 이름 Thibaud 를 '티보'라고 읽을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이유는 아마도 그의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잘 몰라서였을것이다.  정확한 발음을 모를경우 기억하기가 힘들다. (이제는 아마 잊지 않을것도 같다.)

미국의 현대 회화를 지나치다보면 '반드시' 큼직하게 그려진 파이 그림을 만나게 된다. 동글동글한 파이가 모여있거나, 하나가 있거나, 아이스크림을 아주 크게 그려놓거나, 캔디볼이 있거나 이런 그림들이 보인다. 큼직한 미술관에서 이런 그림을 한점 봤다면 '웨인 티보'라고 아는척을 해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것이다.

이 다양한, 그러나 반복적인 케익 그림은 앤디 워홀의 '갭벨 수프 깡통' 그림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다. '상품'을 그림에 담아 놓은 스타일이 비슷해서일 것이다. 산업사회에서 대중적인 상품들이 가지는 '미적 가치'를 워홀만큼 신나게 대변한 이가 또 있을까. 티보의 케익 그림 역시 이런 스타일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나는 일단 티보의 케이크 그림을 '팝 아트'에 끼워 넣기로 한다. 

그러나, 티보를 팝 아티스트라고 규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가 팝 아트만 한 사람이 아니므로, 그가 팝아트적 작품들로 유명해졌고, 널리 알려진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진행중인 그의 예술세계는 팝아트를 넘어서 다채로운 시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스미소니안 기사에서는 (혹은 wayne thiebaud paintings 이미지 검색을 해보면) 그의 매우 매력적인 풍경화들이 소개가 된다.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하던 Richard Diebenkorn (1992-1993)의 풍경화 기법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는 티보의 풍경화는 간략하면서도 세밀하고 깊다.

스미소니안 기사를 읽어보면, 티보는 '만화가,' '광고미술가' 등의 이력을 거쳐 뒤늦게 본격 회화의 길에 입문하였다. 그의 이력을 보면 그는 나이 서른이 넘어서 미술 학사와 석사를 받았다. 그 자신, 헐리우드에서 광고나 영화 광고 쪽에서 활동하면서 돈을 많이 버는 일에 열중했다고 한다. 앤디 워홀 역시 상업 미술 분야에서 독보적으로 성장을 했다. 아무래도, 동부에서 앤디 워홀이 상업미술로 돈방석에 오르고 있을 즈음, 서부에서 웨인 티보가 비슷한 이력을 쌓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는 만화, 광고 일러스트레이션, 광고제작등의 이력을 거쳐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열어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의 그림의 소재들이 가게 진열대의 달콤한 케익, 사탕 항아리, 아이스크림, 오락기등인 것을 보면 광고쟁이로서의 그의 전력이 여전히 그의 회화의 밑거름이 되고 있지 않은가. 광고쟁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제품'들을 회화로 구현해 낼 생각을 했을까 말이다.

티보의 그림들을 들여다보면서, 그의 그림 소재가 된 것들의 일관성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생각해본다. ...음...문방구에 가서 문방구에 쌓인 것들을 사진기에 담아서 연작으로 그려보면 어떨까. 문방구 풍경, 문방구 안의 아이들, 문방구 앞의 전자 오락기 앞에 앉아서 노는 아이들, 그 앞에 쌓인 장난감 뽑기 껍데기, 그 알록달록한 껍데기 뭐 그런것만 시리즈로. 

티보는 UC Davis 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70에 은퇴를 했는데, 그 후에도 지금까지 명예교수로 미술 특강을 하는데 여전히 학생들이 몰려 온다고 한다. 나이 90에 현역을 달리는 화가. 참 복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나를 사로잡은 그림은 아래의 풍경화. 제목 Brown River, 2002. 그림이 빛에 반사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내 책상 밑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었는데도 아래 부분이 반사가 되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지도'와 같다. 헬리콥터나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장면 같은 풍경.  그런데 그림을 들여다보면 그림자의 방향이 일관성이 없고, 그리고 색상이 참 다채롭고 깊다.  그림자의 방향이 왜 일관성이 없을까?  예컨대 왼쪽 상단 구석의 푸른 나무 그림자를 보면 태양이 그 뒷쪽에서 비치는 것 같은데, 강 오늘쪽 굽이진 강둑의 나무 그림자는 오른쪽 위에서 태양이 빛나는 것 처럼 보인다.  어린 아이라 하더라도 빛과 그림자의 이치만 안다면 금세 알아차릴 이런 방향의 불일치를 화가가 몰랐을까?  알았다고 봐야한다. 그러면 그는 왜 이런 장난을 했을까? 이 자도안에 모든 '시간성'을 다 집어 넣고 싶었던걸까? 

 

이렇게 아름다운 '지도' 그림을 보면, 나는 가슴이 쿵쿵 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아, 얼마나 매혹적인가.






아래의 그림은 Man in Tree (나무의 남자).  티보가 1978년부터 그리기 시작하여 아직도 작업을 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30년이 넘게 그의 품에서 색을 입어가고 있는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채색이 꽤나 깊다.  그래서인지 화면에서 보석같은 색감이 불빛처럼 흘러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아 찾았다!

http://americanart.si.edu/images/2004/2004.30.4_1b.jpg
티보의 풍경화가 어딘가 눈에 익어서 뒤져보니, 내가 그의 풍경화를 본 적이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 1층.  에드워드 호퍼와 조지아 오키프 그림이 있는 전시장 왼쪽에 이 커다란 풍경화가 걸려있다. 나는 이 그림 앞에서 한참을 이유도 모른채 서성이곤 했었다.  이 '지도'같은 그림 앞에서면, 뭔가 그리워진다. 자동차를 몰고 이 풍경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위) 2011년 1월 25일 작성


(아래) 2011년 2월 12일 (토) 방문,  작성 (사진 촬영: 박찬홍)
본 페이지 맨 위에 소개된 작품. National Gallery of Art 1층에 전시된 작품. (카메라가 바뀌어서 색감도 조금 차이가 난다). 대략 사람과 비교하여 이정도 규모의 작품.




같은날,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 이작품을 보려면 에드워트 호퍼의 Cape Code Morning 이 전시된 뒷편으로 가면 된다.

위의 이미지를 보면 강물이 연분홍처럼 보이는데, 전시장에가서 원화를 보니 내 카메라에 담긴 이미지가 좀더 원화의 색감에 가까웠다. 강물이 노리끼리한 분홍빛에 가까웠다 (얼핏 노란 탁류를 연상시키는 색감이었다).







(아래) 2011년 10월에 이 전시장에 방문 했을때, 위의 LeVee Farms 가 걸려 있던 자리에 새로운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티보를 보러 가볼까...'하고 갔는데 새로운 작품이 걸려 있어서 예기치 않았던 선물을 받은듯 그렇게 반갑고 기뻤다.
이러한 풍경화는 동시대에 같은 지역에서 활동을 한 리차드 디벤콘 (Richard Diebenkon http://americanart.tistory.com/1400  )의 풍경화와 많이 닮아있다.  그래서 두사람의 풍경화를 비교해서 보는 일도 재미있다.






(아래) 2011년 4월 12일, 대학원생들과 함께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에 필드트립을 갔던 날, 3층 링컨 갤러리에서 찍은 사진.  이 작품의 제작 년대가 1962년으로 표시 되어 있다. 미국에 앤디 워홀을 위시한 팝아트 운동이 불길처럼 퍼져갈때의 팝아트 작품으로 분류 될 만하다.  팝 아트 페이지에서 간단하게 적은 바 있듯이, 이미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어 나온 대상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그냥 열심히 그렸다. 앤디 와홀은 스프 깡통이나 포장 상자를 그대로 베끼듯이 그려 댔고, 웨인 티보는 알록달록한 컵케이크들을 그려댔고. 그 와중에 이런 잭폿 기계도 그렸을 것이다.

2011년 4월 12일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 링컨 갤러리.
Posted by Lee Eunmee

Niagara 1889,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여

(2층, 비어시타드의 대형 풍경화 근처 통로에 있음)

 

뽀안 안개의 나이아가라가 내게 말을 걸다

 

 

 

Thomas Cole 과 허드슨 강변의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 (1801-1848)를 엮다보니

 * Thomas Moran http://americanart.textcube.com/364 (1830-1902)

 * Frederick Edwin Church: http://americanart.textcube.com/363 (1826-1900)

 * Alber Bierstadt: http://americanart.textcube.com/361 (1830-1902)

 

등과 같이 허드슨 강변의 화가들로 알려진 19세기의 대형 풍경화의 대가들을 살펴 보게 되었는데요.  이들과 더불어 George Inness (1825-1894)를 잠시 소개를 해야 할 것 같군요. 제가 차례차례 화가들의 생몰년대를 명시 해 놨는데요 토마스 콜이 대략 한세대 이전의 대가이고  토마스 모란이나, 프레데릭 처치, 비어시타드는 나이도 몇살 차이 안나는 동시대의 사람들입니다.   이 페이지의 주인공 조지 이니스도 이들과 동시대를 산 화가이고요.

 

19세기 풍경화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대략 정리를 할 생각이라서 이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허드슨강변 화가들의 '대부'격인 토마스 콜이 미국 동부의 허드슨 강변에서 실제 풍경화를 그리거나 유럽 여행을 통해서 풍경화를 익히며 상상의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던 미국 풍경화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사람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1. 토마스 모란은 미 서부의 풍경을 동부의 사람들에게 전한, 옐로우 스톤의 화가라고 할수 있고요,

2. 프레데릭 처치는 미국및 남미, 유럽등을 돌면서 세계 여러나라의 자연 환경을 관찰하고 그림으로 옮긴이로, 훔볼트나 다윈의 과학적 자연 이해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던 미국의 화가였습니다.

3. 알버트 비어시타드는 미 서부를 돌며 미국의 대자연을 스케치하고 관찰했지만, 그가 그린 미국의 풍경은 유럽 알프스산의 풍경까지 뒤섞인, 이상화된 풍경을 대형 화폭에 담았던 화가였습니다.

 

그러면 비슷한 시기의 조지 이니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미술사가나 평자에 따라서 조지 이니스를 허드슨강 화파에 포함시키는이가 있는가하면, 그가 허드슨 화파와는 다른 풍경화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평하는 이도 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화가'라는 측면에서 그를 허드슨 풍경화파에 대충 때려 넣는 경우도 있고,  그를 좀더 세밀히 연구하는 사람이 볼때는 이런 '때려넣기'는 어불성성일수 있지요.  무슨 말씀인가하면, 어떤 역사를 단순하게 처리할때 - 이런 상반된 시각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 자신 조지 이니스를 '허드슨 파'에 포함시킬것인가 말것인가 조금 고민을 했는데요,  저로서는 그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발견했고, 그의 그림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좋아하므로, 그를 별도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조지 이니스를 '발견'하게 된 그림은, 저 위에 올려 놓은 '나이아가라'라는 그림에서였습니다.  국립 미술관급의 미술관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보면 보이는 것이 명작이요, 역사적인 기념비들인데,  명작 아닌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들이 있게 마련인데요.  풍경화에 별 관심이 없었던 제 눈에 띄었던 것이 그의 1889년작 '나이아가라'였습니다.  나이아가라는 앞서의 페이지에 소개된 바와 같이 프레데릭 처치가 대형으로 그려서 선보이기도 했는데요. 아래에 프레데릭 처치의 나이아가라 그림을 옮겨다 놨습니다. 

 

Niagara Falls, 1857, Oil on Canvas (42 1/2 x 90 1/2 inches)

Frederick Church

2009년 10월 3일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물론 크기에서도 처치의 작품이 압도적이긴 한데요,  처치의 그림이 '압도적'이라는 느낌을 줬다면,   그보다 32년후에 그려진 조지 이니스의 나이아가라는 물안개가 걷히지 않는 나이아가라의 또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조지 이니스의 안개속의 나이아가라를 좋아했지요. 그런데요, 이 나아이가라를 발견했을때, 저는 조지 이니스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보면서 떠올린 화가는 Thomas Wilmer Dewing 이었습니다. 저는 아슴푸레한 초록 안개속의 풍경과 여인들을 그린 미국 화가 Dewing 을 알고 있었거든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236 )    어떤가요. 저 초록 안개에 싸인 나이아가라 그림과, 아래의 듀잉의 그림의 분위기가 흡사하지 않은가요?

 

 

Before Sunrise (해뜨기 전) 1894-95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갤러리에서 촬영

 

 

그래서 저는 '나이아가라'를 '듀잉'이 그렸을거라고 상상했는데, 다가가보니 '조지 이니스'의 이름표가 붙어 있었단 것이지요.   '두 사람 그림이 참 분위기가 비슷하다 ...'  혼자서 이런 생각을 가끔 했었는데요.  어느날 공부하다가 이 두사람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풀렸습니다.

 

미국 회화사에 Tonalism (색조주의)이라는 미술 화법이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잠시 떠오른 적이 있는데요,  회화의 구체적인 이미지보다는 회화가 전하는 '색조'와 '빛' '분위기'를 중시 여기는 화법입니다.  바로 그 Tonalism 의 주요 화가로 알려진 이들이

 1. George Inness (1825-1894)

 2. 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

 3. Thomas Wilmer Dewing (1851-1938)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제가 이니스의 그림을 보면서 '듀잉'의 그림일거라고 짐작했던 이유는, 바로 이들의 '색조주의적' 개성 때문이었을겁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지금은 책상 앞에 앉아 슬슬 적고 있지만,  이러한 사실들을 접하거나, 혼란스러워하거나,  궁금해하거나 혹은 책을 찾아보고 뭔가 발견하고 그러면서 흘러간 세월은 두해쯤 되는거죠.  그 사이에 시간이 많이 흘러간 것이지요....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뒤지면서, 지금도 여전히 뭔가 새로 알아가고 있는 중이고요.)

 

 

 

여기까지는 제가 이니스를 처음 발견하던 일에 대해서 정리했고요,  이제부터는 제가 갖고 있는 그림 파일들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고 조지 이니스의 발자취와 미술의 흐름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국립 미술관 (NGA): 이니스의 초기 풍경화들

 

 

조지 이니스 (1825-1894)는 뉴욕주의 한 농부의 열세명의 아이들중에서 다섯번째 아이로 태어납니다. 다섯살때 가족이 뉴저지의 뉴왁으로 이주하고요. 십대때 그는 뉴욕시에서 지도 판화 작업을 배우게 됩니다. 1940년대에는 National Academy of Design 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그당시 Thomas Cole, Asher Durand 등 당대의 쟁쟁한 화가의 지도를 받게 되지요.  1851년에 그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로마로 가서 미술 수업을 받게 되는데 로마에서 1년넘게 머무는 동안 Swedenborginism 이라는 스웨덴의 신흥 종교운동과 접하게 되어 정신적인 영향을 입게 됩니다. 로마에서 파리로 건너간 그는 이곳에서 '바르비종 (Barbizon)'화가들의 작업을 보게 됩니다.  '바르비종' 화가들은 19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바르비종, 폰텐블루 숲에서 전원을 찬미하는 그림을 그렸었지요. 우리들에게 가장 친숙한 화가로는 장 프랑소와 밀레가 있지요. 밀레의 풍경화를 떠올리시면 바르비종 화파의 대강의 분위기를 짐작하실수 있을겁니다.

 

하여, 전체적으로 조지 이니스의 미술세계에 영향을 끼친 요소들로는

 1. 스승 토마스 콜의 허드슨강 화파의 풍경화

 2. 프랑스 바르비종 화파의 낭만적 풍경화

 3. 신성이 속세에도 반영될것이라고 봤던 스웨덴 신흥 종파의 세계관

등이라고 할 만 합니다.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돌아온 이니스는 델라웨어 철도 부설 사업자로부터 철도 사업을 기록하고 홍보할만한 그림을 위탁받아 작업을 합니다. 아래의 라카와나 골짜기의 그림이 바로 당시 위탁받아 그린 작품중의 하나입니다. 언덕위에서 내려다보는 기찻길, 달리는 기차, 기차역은 우리에게 '그리운' 혹은 '아쉬운'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키지 않나요?  그 기차에서 누군가 그리운 사람이 내려주었으면 좋겠지요. 이런 우리의 일반적인 정서와는 달리, 이 그림은 기록성, 홍보성에 목적을 둔 작품입니다.  물론 작가가 주문자의 의도를 얼마나 반영했을지는 알수 없지만요.

 

 

The Lackawanna Valley 1855,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10년 1월 20일 워싱턴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에서 촬영

 

 

 

 

 

 

View of the Tiber Near Perugia 1874, oil on canvas

페루지아 인근에서 바라본 티버강 풍경

George Inness 1825-1894

2010년 1월 20일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이 그림은 이탈리아 페루지아의 티버강 그림이군요. 그가 당시 여행을 가서 그린것인지, 아니면 과거를 회상하며 그린것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아래, 갤러리 풍경 사진에서 프레데릭 처치의 대형 그림 옆에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입니다.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전시장. 왼편의 대형 그림이 Frederick Church 의 '빛의 강'

그 오른편에 조지 이니스의 풍경화가 보임.

2010년 1월 20일 NGA 에서 촬영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이니스의 완숙기의 풍경화들

 

 

 

September Afternoon 1887,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1층,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뒷쪽 갤러리 중앙에 걸려있음)

 

 

1885년에 조지 이니스는 뉴저지주의 Mont Claire 에 정착하게 됩니다.  완숙기에 들어선 그의 그림에서 선의 경계가 부드러워지거나 흐릿해지지요.  특히, 앞서 지적한 바 있지만, 이 '나이아가라' 그림에서 그의 선과 경게가 해체가 된듯한 느낌이 듭니다. 사물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해체되고 오직 색감과 분위기만 안개 입자처럼 떠돌지요. 

 

그런데, 얼마전에 스미소니안에 갔을때, 안내인이었던 Judith 할머니가 이런 얘기를 들려주시는 겁니다. 그 할머니는 나이아가라 인근에서 태어나고 자랐기때문에 늘 나이아가라를 봤대요.  고향을 떠난 지금도 그의 귓가에는 나이아가라 폭포 소리가 들리겠지요.  사람들은 이니스의 나이아가라 폭포 그림을 가리키면서, '이 그림이 인상주의적인 그림이다, 이니스는 인상파였다' 뭐 이런 설명을 하는데 자신은 이 그림을 인상파 그림으로 보지 않는대요.  이 그림은 '인상'이 아니라는거죠.  저는 그 사람의 말귀를 알아 들었습니다.  그래서 되물었죠:

 

 "You mean that, it's not the impression of Niagara, it's, the reality?"

 (이 그림은 나이아가라 '인상'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인가?)

 Judith: Yes, that's what I mean!

 (그래, 바로 그것이지!)

 

주디스 할머니의 예술관은 여기까지 이지요.  인상파 화가들은 '인상'을 스케치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을 잡으려고 했던 것인데.  인상파화가들은 현장에서 내 눈으로 직시하는 '바로 그 순간, 그 것'을 잡으려고 했던 것인데. 그것이 그들에겐 Reality 였던 것인데...  주디스 할머니는 인상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셨던것도 같은데...하지만 그가 내게 말하고 싶어했던 것은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이 나이아가라 그림은 '상상속의 어떤 이미지'가 아니라 '사진'같이 정확한 사실이라는 것이지요.  나이아가라를 가슴에 품고 있는 주디스 할머니에게 이 아슴푸레한 풍경은 더욱 생생한 사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Reality 란 무엇인가?  이 논의는 훗날로 미루기로 하지요, 저로서는 너무 어려운 주제이니까요.)

 

 

 

Niagara 1889,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여

(2층, 비어시타드의 대형 풍경화 근처 통로에 있음)

 

 

 

코코란, 델라웨어: 말년의 황혼

 

 

 

Early Autumn, Montclaire 1891,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10년 1월 9일 델라웨어 미술관에서 촬영

 

 

이니스의 작품 사진들을 시간 순서대로 늘어놓고 보니, 그의 그림의 변화가 눈에 들어오지요. 그의 말기의 작품들은 경계의 해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빛과 어둠을 들여다보는 영역으로 나아갑니다.  이전에 이니스가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했다면, 말기에 그는 빛의 세계로 나아가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코코란 미술관에 소장하는 '숲속의 황혼' 작품은 황혼이 내리는 숲속에 한줄이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나무 기둥에 신비할 정도로 환한 빛으로 어룽대지요.  가끔 이런 광경을 볼때가 있어요.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빛과 어둠의 대비. 이런 풍경을 대면할때, 우리는 설령 우리가 무신론자일지라도 어떤 신성, 초자연적인 숨결을 상상하게 됩니다. 

 

 

 

Sunset in the Woods, George Inness, 1891

출입문 왼편에 면한 벽에 Frederick Church 의 Niagara Falls, 그리고 Albert Bierstadt 의 '들소의 최후'가

나란히 걸려있다.

 

 

 

Sunset in the Woods 1891, oil on canvas

70 x 48 inches

George Inness 1825-1894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촬영

 

 

 

 

자, 조지 이니스의 미술 세계를 다시 한번 정리해볼까요?

 1. 토마스 콜에게서 사사 받았고, 혹자는 그를 허드슨 강 화파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2. 프랑스 바르비종 미술 운동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3. 스웨덴에서 일어난 새로운 종교운동의 영향으로 신성이 세속에 투영된다는 시각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그는 미국의 Tonalist 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미국 미술사에서 크게는 그를 허드슨 화파, 혹은 인상주의 화가로 분류를 하기도 하는데요, 어찌보면 그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 화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2010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역사를 만들어낸 한장의 그림

 

 

 

 

The Grand Canyon of the Yellow Stone, 1893-1901, oil on canvas

427.8 x 245.1 cm (대략 4.3 미터 x 2.5 미터)

Thomas Moran (1837-192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 가면, 엄청시리 커다란 풍경화 그림이 여기~ 여기~ 걸려있는데요. 저로서는 뭐 엄청나게 큰, 그것도 주로 바위로 이루어진 풍경화에 별 매력을 못 느끼므로, 막무가내로 통과~ 해버리는거죠. 이 엄청난 풍경화 앞을 지나면서 대략 '이름표'라도 볼라치면 Moran 이라는 이름이 눈에 띕니다. 

 

"모란?  이름이 모란이야?  성남의 모란 시장이 생각이 나는군. 거기 가면 강아지 팔고 그랬는데. 이름이 모란이면 모란꽃 뭐 그런거 그려야 하는거 아니야? 아 왜 바윗덩어리 산만 그려 놓은거냐구..." 

 

이렇게 중얼거리며 지나치는거죠. ㅎㅎㅎ.  그래가지고, 사실, 스미소니안을 라면집 드나들듯 드나든 저에게도 모란의 작품 사진이 별로 없습니다.  관심 없으니까 대충 지나간거죠.  아, 다음에 가면 제대로 작품 좀 들여다봐야지...

 

Thomas Moran (1837-1926)은 영국태생으로 어린 시절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와서 펜실베니아에서 성장한 화가입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 Hudson River School 의 원조 Thomas Cole 의 페이지에서 잠시 언급한대로 Thomas Moran 은 그가 미국의 자연 환경을 대형 화폭에 담았다는면에서 허드슨강변의 화가로 분류가 되기도 하고, 혹은 토마스 모란이 특히 로키 산맥, 옐로우스톤의 풍경에 골몰한데서 Rocky Mountain 화가로 분류가 되기도 합니다.

 

제가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찍어온 그의 대형 그림 사진속의 풍경이 대개 '노리끼리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림이 '노리끼리'로 일관하는 이유는, 그가 Yellow Stone (노란 바위) 지역의 화가라서 그런것이지요 (알고보니 뭐 단순하군요.헤헤).

 

토마스 모란은  형제들도 그림을 그렸고요, 어릴때부터 목공, 판화 등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1862년에 영국으로 그림을 배우러 갔을때 그곳에서 터너 (Turner, 1775-1851)의 웅장하고 숭고한 풍경화에 감화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8년 여름에 뉴욕 현대미술관에 갔을때, 마침 터너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지요.  스케일 큰 풍경화를 실컷 보기는 했는데, 저 자신이 사람 하나 안보이는 풍경화에 별 재미를 못느끼기는 했지요.  지금은, 풍경화를 보는 안목도 좀 생겨서, 코코란에서 현재 진행중인 터너에서 세잔까지의 기획전 http://www.corcoran.org/turnertocezanne/index.php 을  보러 갈 생각입니다.)

 

토마스 모란이 미 서부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1871년 Hayden Geological Survey (헤이든 지리 연구) 팀에 초대되어 40일간 미 서부 옐로스톤 일대를 탐사하게 되면서부터 입니다. 연구팀에는 사진가 Wiliam Henry Jackson도  있었는데, 토마스 모란과 잭슨이 현장 스케치를 남기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흑백 사진만 가능했으므로 현장의 생생한 풍경은 화가가 담을수 있었다고 합니다.

 

 

The Grand Canyon of the Yellow Stone, 1893-1901, oil on canvas

427.8 x 245.1 cm (대략 4.3 미터 x 2.5 미터)

Thomas Moran (1837-192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위의 그림은 아니지만, 같은 제목의, 비슷한 각도에서 본 그랜드 캐년 그림이 1872년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가 되는데 그 그림은 미 의사당의 상원에 팔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옐로우스톤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게 하는데 혁혁한 공헌을 하게 되지요. 이를 시발점으로 미 의회는 1916년 정식으로  '국립공원 National Park System'을 도입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여름 휴가철에 '미서부 관광'이나 '옐로우스톤 국립공원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이 지역을 관광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미국에서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 Yellowstone National Park 이고요,  이곳이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게 되었을때, 그 배후에 토마스 모란의 그림 한장이 있었던 것이지요.  흑백사진 기술조차 미미하던 시절, 오로지 스케치나 수채화와 같은 것으로 시각자료가 전해지던 시절, 한장의 대형 풍경화가 전하는 미지의 세계는 보는이들에게 충분히 감동을 선사했을 법 합니다.

 

 

토마스 모란은 때로 Thomas Yellowstone Moran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고요, 이따금 그는 서명할때 Thomas Y. Moran 이라고 적기도 했답니다. 가운데의 Y 는 yellowstone 의 Y 이지요. 그리고 토마스 모란이 '미 국립공원'의 지정과 개발에 기여한 것을 기념하여 http://en.wikipedia.org/wiki/Mount_Moran  모란 산 (Mount Moran)이라는 이름도 붙여졌다고 합니다.  한장의 그림이 미국 역사에, 미국 국립공원의 산파 역할을 했다니, 그림을 만만히 보면 안될 일이군요.  다음에 스미소니안에 가면 그의 대형 그림 사진들을 모두 찍어와야 할것 같습니다. :)

 

 

화면 왼편 그림: The Cahsm of the Colorado, 1873-1874, oil on canvas mounted on aluminium

367.6 x 214.3 cm (대략 3.6 미터 x 2.1 미터)

Thomas Moran (1837 - 192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아, 참고로, 저 전시실 가운데에 둥그런 평상같이 생긴 의자가 있는데요. 곰털 같은 털가죽이 덮여있습니다.  관객이 저기에 편히 앉아서 쉬면서 그림을 감상할수 있도록 설치 해 놓았는데요. 옐로우스톤에 가면 '곰'이 많이 나오지요.  옛날에 옛날에 1998년에, 제가 미국땅 처음 밟아본것이 '미서부 관광' 패키지 여행을 통해서였는데요, 그때 관광 안내원이 '곰'이 나올지 모르니 주의하라고 당부하던 일이 생각이 나는군요.   그러니까, 저 곰가죽같은 의자나 혹은 그림 옆에 세워 놓은 화분도, 이 전시장의 장치 입니다. 풍경화에 어울리는 소품을 제시하여, 관객이 '풍경'속에 들어와있는듯한 기분이 들도록 유도하는 것이지요.

 

 

 

2009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앞서서 Albert Bierstadt (http://americanart.textcube.com/361)  페이지를 열면서 코코란 미술관의 전시장을 보여드렸는데요.  오른쪽의 대형 그림이 비어시타드(1830-1902)의 '버팔로의 최후.' 왼편에 보이는 대형 그림이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의 나이아가라 입니다. 오늘은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1826-1900)의 그림을 보기로 하지요. 제가 두 사람의 생몰 년대를 적어놨는데 처치가 4년 먼저 태어났지만, 형제들처럼 한 시대를 함께 활동한 화가들로 봐도 되겠지요.  (이래서, 미술관에서 비어시타드와 처치가 늘 함께 붙어다니거죠.)

 

 

나이아가라 폭포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제가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라는 미국 화가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작품이 바로 이 '나이아가라 폭포'입니다. 2008년 5월 이른 아침에 코코란 미술관에 혼자 가서 열시의 개관 시간을 기다리던 일이 생각이 나는군요. 그 날 한가롭게 안내인의 안내를 받았는데, 이 그림 앞에 앉아서 제법 상세한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직접 가서 본 것은 2005년 8월의 일이었는데요,  가서 보고 깜짝 놀랐었죠.  당시에 주변에 있던 유학생 가족들도 여름에 아이들과 미 동부 여행을 다녀오곤 했는데, 저는 돈도 없고 공부도 바빠서 여행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가 여행 다녀온 사람들을 붙잡고 묻곤 했습니다.  "어디가 제일 좋았나?"  어른들은 뉴욕과 워싱턴이 인상깊었다고 얘기하고, 청소년들은 '나이아가라 폭포'가 너무너무 근사했다고 대꾸들을 했지요.  나이아가라 폭포야 그냥 폭포인데 그게 근사할게 뭐가 있나?  그냥 그러려니 했었는데, 막상 가보니 기가 막히더라구요.  나이아가라 관광하는 동안 정말 애들처럼 좋아 죽는줄 알았습니다. 신나서. 하하하

 

나이아가라는, 가서 봐야 하는거지, 영화 백날 봐 봤자, 현실감이 없죠. 

 

1700년대에 유럽인이 처음 나이아가라를 발견한 이래로,  유럽대륙에 나이아가라에 대한 환상이 자라났다고 합니다. 당시에 사진이 있었대도 흑백사진을 간신히 만들던 시절이라, 사진가지고 그 현장의 감동을 전하기는 어려웠을테고, 결국 그림이 가장 현실적인 수단이었겠지요.  그래서 프레데릭 처치 외에도 여러명의 화가들이 나이아가라 폭포 그림을 그렸습니다.

 

Niagara Falls, 1857, Oil on Canvas (42 1/2 x 90 1/2 inches)

2009년 10월 3일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이 그림이 처음 소개가 되었을때 유럽대륙에 없는, 오직 '신세계 New Worlld' 미국에만 있는 장관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남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이 나이아가라폭포는 제작년대를 보니 프레데릭 처치가 27세때 그린 작품이군요. 이 그림의 성공으로 프레데릭 처치는 미국의 풍경화가로서 탄탄 대로를 나아가게 됩니다.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은 커넥티컷주의 하트포드시에서 부유한 시계제조회사, 보험회사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선대가 부유하다보니 프레데릭 처치 자신은 먹고 살 걱정이 없었고, 그가 미술에 재능을 보이자 그는 일찌감치 허드슨 강변의 화가들 (Hudson River School)의 원조인 Thomas Cole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에게 연결되어 그의 제자가 됩니다.  그는 일찌감치 22세가 되던 해에 National Academy of Design 의 멤버가 되고 뉴욕에 정착하여 스케치 여행을 다니게 됩니다. 일년의 봄, 여름, 가을에는 여행을 다니고, 겨울에는 뉴욕으로 돌아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것이지요. 그는 1853년과 1857년에 남미 여행을 하기도 하면서 남미의 숲이나 풍경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후에는 유럽과 중동등 세계 여러나라를 돌면서 현지의 풍광을 스케치하고 대형 풍경화 작업을 했지요.  후기에는 그의 스승 토마스 콜과 마찬가지로 허드슨 강변에 대 저택을 짓고 정착하게 되지요.

 

 

아, 그런데 이 사람 이름이 특이하죠.  성이 Church 입니다. 예배당이 '처지' 쟎아요. 미루어 짐작컨대, 집안이 신앙심이 강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거죠. 미술 비평가들중에는 처치의 풍경화에서 어떤 '정신적인 spiritual' 면을 해석해내기도 합니다. 보편적으로 아름다운 자연 자체가 숭고성을 전하지 않나요? 어떤 사람에게 신앙이 있거나 없거나, 혹은 어떤 신앙이나 사상을 갖고 있거나 간에, 위대하고 장엄한 자연 풍경 앞에서는 스스로 옷깃을 여미고 풍경 너머의 어떤 의미를 사색하게 되쟎아요.  우리가 매일 보는 황혼이 어느날 유난히 붉을때, 혹은 달이 어느날 유난히 환할때, 별이 유난히 반짝일때도 우리는 그런 자연 현상에서 어떤 상징성을 찾고 싶어하지요. 설령 우리가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프레데릭 처치는 박물학자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 (1769-1859) 의 저서인 Cosmos 를 탐독하고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훔볼트는 남미 지역을 탐사하면서 식물 지리학이라는 분야를 개척했고,  다윈(1809-1882)은 비글호를 타고 남미를 탐험했지요.  처치 역시 이들의 영향을 받아 그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눈을 돌리고,  그의 분야, 풍경화를 통해 그가 본 것들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재미있어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지역을 돌면서, 어떤 사람은 박물학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진화론'이라는 경천동지할 가설을 탄생시켜서 우리의 사고체계를 확 뒤집어버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것을 화폭으로 옮겼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저는 누가 더 똑똑하고 잘났다는 얘기를 하기보다는,  사람마다 타고난 품성과 재능이 각자 다르므로 각자 자신의 재능과 취미대로 자신을 펼치면서 살면 인생이 재미있고 다채로워질거라는거죠.  우리 모두가 다윈이 될 필요도, 우리 모두가 화가가 될 필요도 없죠. (관객도 필요해요~ ).  그렇지만 우리 모두 각자 위대한 개인임은 분명하죠.

 

뉴포트 산 풍경

 

New Port Mountain, Mount Desert, 1851, Oil on Canvas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이 그림은 대형 작품은 아닙니다. (제가 게을러서 그림 사이즈를 정리를 안하고 이렇게 때우는군요.) 이 풍경은 뉴포트의 사실적인 풍경으로 보입니다.

 

 

 

오로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의 한 갤러리에 있는 작품인데요, 이 갤러리 앞을 지나갈때면, 어디선가에서 빛이 번쩍 나면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인상입니다.  이것이 오로라 인가봐요.  (저는 아직 오로라를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극지방에 가면 하늘에 오로라가 보인다고 하쟎아요).  오른쪽의 오로라 그림도, 왼편의 풍경화도 모두 프레데릭 처치의 작품입니다.  여기 의자가 있다는 얘기는, 이 의자에 앉아서 그림을 감상하시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 거리와 각도에서.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시면, 왼편 아랫쪽에 배하고, 썰매 팀이 작게 보이는데요, 이들은 탐험가 Issac Hayes 탐험팀입니다. 이들은 1860년에 북극 탐사를 했습니다. 그는 탐험 기록으로 많은 스케치를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미국에 돌아와보니 내전 (남북전쟁 1861-1865)으로 나라가 분열되어 있었지요. 기가 막힌 상황이었죠. 프레데릭 처치는 북극 탐사팀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탐사팀이 가져온 스케치와 이야기를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1865년, 이 오로라 그림을 완성시켰는데요. 스미소니안 미술관에서는 이 그림에 대해서 '암울한 국가적 갈등에 대한 불운한 전조'를 보여줬다는 식으로 설명을 하는데요, 관객인 제가 볼때 이 그림은 오히려, 희망의 상징처럼 보이거든요. 오로라는 신화에서 '새벽'의 여신인데, 1865년의 미국사와 '오로라'를 연결지어 본다면,  내전이 끝나고 새로운 역사가 동터오는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하는거죠.

 

 

Aurora Borealis, 1865, Oil on Canvas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

2009년 12월 29일 Smiethsonian American Art Museum 에서 촬영

 

 

 

안데스 산맥의 코토팍시 분화구

 

Cotopaxi, 1855, oil on canvas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

2009년 12월 29일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에서 촬영

 

프레데릭 처치가 남미를 여행하던 중에 봤던 풍경인것 같죠. 안데스 산맥의 코토팍시 산을 그린 것입니다.

 

 

 

 

 

빛의 강: 프레데릭 처치의 마지막 그림

 

 

 

기록에 의하면, 프레데릭 처치는 1877년 손 관절의 문제로 더이상 그림을 그릴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빛의 강'이 1877년에 제작된 것이므로 이 작품이 그의 거의 마지막 작품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자료를 찾아보면 1877년 이후에 발표된 작품을 만나기가 힘듭니다. 왜 1900년까지 생존한 사람의 작품이 1980년대에 끝나는가 의문을 가졌었는데, 신병때문에 이후에 작품 활동이 불가능해졌던 것 같습니다. (아, 전에 소개드렸던 Grandma Moses 의 경우에는 http://americanart.textcube.com/93  모세할머니가 수놓기를 즐기다가 눈이 어두워지고 손도 불편하여 수놓는걸 포기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출세을 했다고 하지요.사람 일은 알수가 없는거죠.)

 

 

 

El Rio de Luz (The River of Light), 1877, Oil on Canvas

213.7 x 138.1 cm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이 작품은 1857년 그가 남미를 여행했던 당시의 스케치와 기록과 기억을 바탕으로 20년 후인 1877년에 그린  것입니다. 51세가 된 화가가 31세때 여행했던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렸다고 것이지요.  그림을 들여다보면, 남미 열대기후에서 볼 수 있는 열대 식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고요 뽀얀 새벽안개 속의 물빛도 왠지 따뜻할것 같습니다.  '빛의 강'이라니 이 물에 잠겨 수영이라도 하면 극락일것 같지요.  이 그림을 보면, 처치의 세밀한 자연관찰력과,  자연과학 너머의 숭고한 정신세계 그 양면적인 것을 그대로 보여주지요.

 

제가 남미에는 아직 못가봤지만, 미국의 최 남단인 플로리다에서는 한 오년을 살았는데요, 바다에 가면, 바닷물이 따뜻해요. (겨울에도). 강이나 호수는 고요하고 역시 따뜻해요. 열대 식물들이 빼곡하고, 악어, 도마뱀들이 태평하게 돌아다니고.  돌아보면, 참, 내가 낙원에서 일생의 오년을 보냈구나...이런 생각이 들어요. 특히나 지금처럼 백년만의 폭설이라는 눈때문에 방에 갖혀서 꼼짝도 못하고 있을라치면, 내가 잃어버린 낙원이 미치도록 그리워지지요.

 

처치가 후년에 대지를 사들여 저택을 지은 뉴잉글랜드 지방 허드슨 강변은 사실  겨울이면 엄청 추운곳입니다. 겨울엔 그런데서 살기 싫죠. 그래서 동부의 돈많은 갑부들이 플로리다에 겨울 별장을 마련해 놓고 즐기는거죠.  자,  손에 류머티즘이 와서 손도 불편하고, 날도 춥고, 어디 나가기도 불편한 겨울날, 오십대의 화가가 작업실에 앉아서 이 그림을 그리는 광경을 상상해봅시다. 그의 추억속의 남미, 빛의 강이 얼마나 그리울지, 얼마나 미적지근하고 습기로 끈끈하며 그의 시린 어깨를 녹여줄지.

 

그의 연보를 살피다가, 이 그림이 아마도 공식적으로 공개된 그의 작품으로는 최후의 작품인것을 발견하니 새삼, 그림을 다시 보게 됩니다. 프레데릭 처치는, 아마도 온화한 말년을 보냈을것 같아요. 그의 마지막 그림이 빛과 따뜻함에 감싸인 새벽의 강인것을 보면 - 그가 돌아간 세상도 이와 비슷할지 모르죠.

 

 

2010년 2월 7일 일요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일찌기 허드슨강변의 화가 Thomas Cole 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허드슨강변의 풍경화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에 대해 잠시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이제 그들중에서 대표적인 몇사람을 소개할 시간이 된것 같습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360 이전 페이지에서 알버트 비어시타드의 대형 풍경화를 소개했지요.  비어시타드도 허드슨강변의 화가로 분류되는 사람입니다.  다음은 코코란 미술관에서 발견한 그의 대형 그림인데요,  왼편에 보이는 것은 Frederick Edwin Church 라는 화가의 '나이아가라' 라는 작품이고요,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비어스타드의 '미국들소의 최후'라는 작품입니다.  프레데릭 처치 역시 허드슨 강변의 화가에 속하므로 비어스타드 페이지를 마치고나서  소개를 하겠습니다.  일단, 사진에서 보시듯이, 작품들이 크죠.

 

들소떼의 최후

 

 

(오른쪽 그림) The Last of the Buffallo, 1888,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그림의 제목이 '버팔로 (미국들소)의 최후'입니다. 1888년 작품인데 화가가 58세때 그린 것이므로 그의 화풍이 충분히 완성된 시기의 작품으로 봐야겠지요.  제목이 이미 어떤 비극성을 띄고 있지요.  최후라...

 

역사적으로 보면 1870년대에 미국의 평원지대에 살던 들소떼가 거의 멸종 상태에 달 할 정도로 무차별 사냥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들소의 가죽 때문이었지요.  그러니까, 들소 가죽을 얻기 위해서 들소를 죽인거죠 (마치 코끼리의 상아를 얻기 위해 코끼리를 죽이듯).  이 들소떼의 사냥에 적극적이었던 집단은 평원의 인디언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들 역시 살기 위해서, 백인들에게 들소 가죽을 넘기기 위해서 들소들을 몰살했겠지요.  그리고 그 인디언들 역시 비슷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결국, 이 그림은 어떤 면에서 미국대륙의 '원주민들'이었던 아메리칸 들소떼와,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최후를 그린 셈이지요.

 

 

The Last of the Buffallo, 1888,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부분: The Last of the Buffallo, 1888,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기개있게 피를 흘리며 싸우던 들소떼도

 

부분: The Last of the Buffallo, 1888,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창을들고 들소와 대적하던 인디언들도

 

 

The Last of the Buffallo, 1888,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저 들판을 질주하던 들소떼들도 이미 종적을 감추고 없었을겁니다, 비어시타드가 이 그림을 완성하던 1888 무렵에는.  이 그림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향수, 추억 같은 것이지요. 실재 상황을 실재 현장에 가서 스케치해서 그렸다기 보다는 비어시타드가 전에 본 일이 있던 풍경위에 그가 상상한 장면들을 덧입혀 그려낸 '상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비어스타드가 그의 경험과 상상력을 기반으로해서 탄생시킨 이 그림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현장의 역동성을, 우리가 약자들에게 자행한 살륙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지요.

 

 

이 그림 보면요, 어릴때 배운 미국 민요 '내집 가련다 들소들 거닐고~' 이 노래가 생각나요.

http://en.wikipedia.org/wiki/Home_on_the_Range 이 페이지에 여러가지 가사가 소개되는데요, 어쨌거나 이렇게 시작하죠

 

Oh, give me a home where the Buffalo roam
Where the Deer and the Antelope play;
Where seldom is heard a discouraging word,
And the sky is not cloudy all day
 

1870년대에 처음 불려진 기록이 있다는데요, 그때는 들소떼가 아직 남아 있었죠. 바로 그 1870년대에 들소 사냥의 열풍이 불어서 1880년대가 되었을때, 들소는 '추억'으로만 남게 된거죠.  사람들은 그가 지구의 어디에 있건 근본적으로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데요.  신생국 미국도 국가의 발전과 산업화와 함께, 이들이 잃어버린것이 많지요.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것들은 그리움으로 남아서 울리게 되지요.  제가 지금 버팔로의 최후 그림을 보면서 떠올리는 것은 들소떼가 사라져버린 미국의 어느 평원이 아니지요. 제 머릿속에는  아파트 개발로 사라진 내 고향마을이지요.  들소떼도 사라지고, 내가 멱감던 실개천도 사라지고... 모두 죽거나 사라지거나, 그런거죠.

 

 

 

 

 

 

 

 

에메랄드 호수

 

 

The Emerald Pool, 1870,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1월 29일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위의 들소떼의 최후나, 그 전 페이지에 소개가 되었던 시에라 네바다의 풍경이 '상상화'에 가깝다고 한다면, 이 풍경은 실재 풍경에 가깝다고 할 만 합니다.  1869년 뉴햄프셔주의 White Mountain 에 스케치 여행을 가서 습작을 그려 온 것이라고 하는데요, Mount Washington 에서 동쪽으로 수마일 가면 에머랄드 호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림 속에 멀리 희게 보이는 산이 Mount Washington 이라고 합니다.  동부에 실재하는 자연 풍광을 그린 이 작품은 허드슨 강변의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소재나 분위기를 여실히 전해주고 있지요.

 

 

The Emerald Pond, 1870,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1월 29일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루쩨른 호수, 스위스

 

 

 

Lake Lucerne, 1858

 

 

이 그림은 비어시타드가 28세때 그린, 청년기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스위스의 루쩨른 호수를 담았습니다.  아마도 스위스 여행중에 보았던 풍경이었을거라 짐작합니다.  대형이지요.  비어시타드는 이미 청년기부터 초대형 풍경화를 그렸던 것 같습니다. 

 

비어시타드는 1830년 독일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3세 되던 해에 그의 가족이 미국의 매사추세츠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23세가 되던 1853년부터 1857년까지 독일의 뒤셀도르프에서 미술 수업을 받고, 미술 지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1859년 미국으로 돌아와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그림 활동을 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이 루쩨른 호수 풍경은 그가 미국에서 활동하기 직전의 유럽 풍경을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Lake Lucerne, oil on canvas, 1858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9월 11일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1859년 그는 미국 정부의 후원을 받고 서부로의 여행을 떠납니다. 화가로서 그가 할 일은 서부의 풍경을 담아 오는 일이었지요. 그러니까 그 당시 미국 동부에서 볼때 서부는 아직 미개척의 땅이었고, 여러분야의 탐사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풍경을 스케치 할 화가도 탐사팀에 필요했겠지요.  비어스타드는 그 후에도 여러차례 동부에서 서부로 향하는 스케치 여행에 올랐고, 게다가 그는 그의 그림을 이용해 돈을 벌어들이는 재주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대형 미국의 풍경화는 그것이 진경이었건, 사실에 근거한 상상의 산물이었건 유럽 사람들의 신대륙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었습니다.  그는 살아 생전에 400점이 넘는 풍경화를 팔아 넘겼고, 그의 인기는 그의 사후에도 여전하다고 합니다.

 

비어시타드의 대형 풍경화가 저에게 그리 매력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갖는 역사성을 보면,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저는 학교에서 수업할때 'context' 읽기를 강조 할 때가 많습니다.  누가 어떤 발언을 했을때, 그 발언의 'context'가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떤 책의 누가 한 말을 인용할  때 역시 그 말이 나온 앞뒤 전후 사정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어떤 기자가 '잘못된 보도'를 해서 좀 시끄러웠는데요.  "자기 문제 자기가 해결할 능력이 있는 사람만 오라"고 어떤 사람이 말을 했다고 해서, 그 말 한 어떤 사람이 졸지에 '죽일놈'이 되었다가, 며칠 지나자 그런 잘못된 보도를 한 기자가 '죽일놈'이 되었다가 이리저리 뒤집어지고 시끄러웠습니다. 아니 뭐 지진이 난것만도 재앙인데, 그런 일 가지고 서로 죽이네 살리네 한다는 말입니까.  서로 협동해서 잘 해도 어려운 판인데요.  서로간에 여유와 아량이 필요한데요. 보도를 접하는 우리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이죠.  왜 며칠사이에 이사람, 저사람이 죽일놈이 되고 그러냐하면, 정확한 컨텍스트 없이 말이 이리저리 흘러서 그런 것이지요.

 

 

 

19세기 중반에 그려진, 지금으로부터 150여년전에 그려진 비어스타드의 대형 풍경화를 오늘날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사실 별것 아닙니다.  '좀 크군...' 하면 그만 입니다.  풍경이 뭐 스펙터클 하다 한들, 우리들은 이미 대형 스크린의 무지무지한 스펙터클에 익숙한 세대인걸요.  그런데요,  그 그림이 150년 전에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미지의 땅, 우리들이 한번도 가보지 못한 땅, 그 땅의 풍경을 실제크기처럼 어마어마하게 그린 그림.  말하자면, 비어스타드의 그림은 오늘날의 입체영화관에서 상영되는 3D 스펙터클 영화 만큼이나 당시 사람들에게 놀라운 경험이었을거란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 시대의 그림이 아닌, 백년 혹은 이백년 혹은 수백년 이전의 작품들이나 역사적 사실들을 볼때는,  현대적 안목으로 한번 살핀후에,  당시의 상황속에서 그것을 살펴보는 시각도 필요합니다.  현대적 안목으로는 별 것 아니지만, 당시에는 혁명적인 아디디어였을수도 있고요, 또 당시에는 별것 아닌것처럼 보였을지라도, 현대인의 안목으로 봤을때, 시대를 초월하는 획기적인 무엇이 들어 있을수도 있고요.

 

그래서요. 제가 요새 미술관 돌아다니며 여러 시대의 작품들을 한꺼번에 주루룩 살필 기회가 많은데요.  이렇게 한시대의 다양한 장르 혹은 여러시대의 명작들을 한꺼번에 훑다보니, 세상을 볼때도 조금 다른 시각이 자라나는 것을 느낍니다.  전후, 좌우를 살피는 습관이 들었지요.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다른 시각으로 생각해본다거나,  특히 내가 짜증나는 일이 있을때, 그 사건을 나의 시각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살펴본다거나 그런 시간이 많아졌지요.

 

세상 돌아가는 일을 '그림'처럼 보면,  관조하는 여유가 생기는것도 같아요.  컨텍스트를 들여다보고, 컨텍스트 바깥에서 들여다보고, 이리저리 사물의 다양한 면을 보는 것이지요. 누가 실수 했을때,  너무 나무라지 말고,  너무 몰아세우지 말고, 주의 주고, 반성할 시간 주고 좀 여유있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하게 됩니다. 

 

비어스타드의 풍경화가 내 눈에는 뭐 '좀 크네' 하는 정도이지만, 그렇지만, 그 당시엔 정말 대단했겠다. 그랬겠다 하고 다시 생각해보는것.  미술감상하다가 생긴 안목이지요.

 

 

 

 

Posted by Lee Eunmee

 

http://americanart.textcube.com/359  존 제임스 오드본의 페이지에서 잠시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 2층의 입구 풍경을 보여드렸는데요. 통로를 따라 이동하면 저 끝에, 커튼이 살짝 드리워진 방에 대형 풍경화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지요.  기왕에 발길 닿는대로 가는 인생,  이번에는 그 커튼 속의 대형 풍경화 이야기를 마저 해 볼까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19세기의 대형 풍경화의 시대를 전체적으로 다뤄야 할 것같아 뜸을 들이고 있었는데, 뭐 차근차근 진도 나가보죠.)

 

자, 발길을 따라 저와 이동을 해 보는겁니다.  이 통로를 따라 슬슬 걷다 보면

 

 

 

2010년 1월 31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자, 이런 방을 하나 만나는 겁니다. 이 방에는 기이하게도 커튼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풍경화가 있습니다.  방 가운데에 푹신한 벤치도 있습니다.  이제부터 이 벤치에 앉아서 그림을 보는겁니다.

 

 

 

2009년 1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그러면, 도대체, 이 방 입구에는 왜 커튼을 쳐 놓은 것일까요?

 

사연을 이야기 하기 전에.

 

제가 딴소리의 대가라는 것은 익히 아시지요? 늘 허접한 주변 얘기 하다가 본론을 잊고 마는 고질병이 있는데요.  '플란다스의 개' 이야기 아시지요?  저로서는 이세상에서 가장 슬픈 얘기, 너무 슬퍼서 심지어 테레비 어린이 만화 프로로 아로와와 네로가 행복하게 뛰어노는 장면이 보여도 그거 채널 돌리곤 했습니다. 결과를 다 아니까. 너무너무 슬픈 일이 결국 벌어질거니까. 절대 안본다 이거죠.  그렇지만, 줄거리 다 알거든요.  아무리 슬퍼도 몇번은 읽었으니까...  네로가 성당에 있는 그림을 무척 보고 싶어 하쟎아요.  이야기속에서는 그게 '루벤스'의 그림이었는데요.  그래서 저는 미술관에서 '루벤스'의 그림을 발견하면 엉뚱하게도 '플란다스의 개'를 떠올립니다.  "너 때문에 네로가 죽었단말야!" 뭐 이런 말도 안되는 심술을 루벤스의 그림을 향해 그려보는것입니다. 뭐 대단치도 않은 그림을 그리워하다가 네로가 죽고 말다니... 이런 심술도 나고요.  아무튼 네로때문에, 슬픈 이야기때문에, 저는 루벤스를 싫어합니다. (말 안되고 있죠?  루벤스는 억울하겠지만...)

 

그런데 그 플란더스의 개 이야기에 보면, 그 루벤스의 그림을 평소에 볼 수가 없쟎아요.  커튼으로 가려 놓아가지고, 특별한 행사때만, 혹은 돈을 내야만 그 그림을 볼수가 있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참 납득이 안가는데요, 그림에 커튼을 쳐 놓고 필요할때만 열어 보았다니요. 그런데 옛날엔 그랬다는군요.  그림에 먼지 탈까봐 그랬는지. 귀한거라 가려놓은것인지 알수 없지만.  아무래도 귀한것은 숨기고 싶은 법이라,  귀한 그림을 함부로 남이 볼수 없게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요, 또 이것이 납득이 가기도 해요. 뭐냐하면, 우리가 어디서 전시회 한다고 하면 돈내고 가서 보쟎아요.  요즘 한국에서 앤디 와홀전 한다는데 얼마 내고 보시나요? 못잡아도 만원은 넘게 낼거라고 추측하는데요. 뉴욕의 현대 미술관 입장료가 20달러도 넘으니까, 그림 보려고 이만원도 넘게 내고 들어가서 보는거쟎아요. 돈 없으면 그림 구경 하고 싶어도 못하는거죠.  물론 평생에 한번 볼까 말까한 명품들을 돈 일만원 이만원 내고 볼 수 있는것도 기쁜 일인데요, 하지만 돈 없는 사람에게 그 돈이 간단한 돈이 아니죠.  그러니까, 오늘날에 전시장에 돈 내고 들어가는 시스템이나, 옛날에 그림에 커튼 쳐 놓고 있다가 돈 받고 그림 구경 시켜준 시스템이나 뭐 큰 차이가 안나죠.  그렇게 생각하면 그림에 커튼치고 돈받고 구경시켜준 일도 납득이 간다는거죠.

 

 

 

 

 

 

 

미국이 18세기 중엽에 독립을 선포하고 독립전쟁도 하고 그랬지만, 그 당시에도 그리고 19세기 중반까지도 미국은 유럽에서 볼때는 낯선 곳이었지요.  그리고 미국이 독립하던 당시에 동부의 13개주만 참여했을뿐 나머지 지역은 아직 미 합중국에 속하지도 않았거든요.  미국은 독립당시에도 광활한 미개척의 땅이었던 것이지요.

 

이 그림은 미국의 풍경화가 Albert Bierstadt (알버트 비어시타드)의 작품인데, 그는 미국의 서부를 직접 여행하며 스케치를 하기도 했지만, 정작 그가 이 그림을 그린곳은 이탈리아 로마였습니다. 로마의 자신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완성하여 영국으로 보내 전시를 했지요.  전시장에 적절한 조명을 밝히고, 천막을 쳐서 그림을 가리고, 사람들에게서 입장료를 받은 후에 짜잔 하고 그림을 보여주는거죠. (서커스단에서 천막안에 진귀한것 갖다 놓고 돈받고 구경시켜주는것과 비슷했겠죠).  사진도, 인터넷도 없던시절,  유럽 사람들은 거대한 미국의 풍경화를 보면서 - 저곳은 신의 땅이 아닌가! 에덴동산이 아닌가!  경악하기도 하고, 이민의 꿈을 꾸기도 하고 그랬겠지요.

 

이 그림은 유럽을 돌며 돈을 긁어모은 후에 미국으로 건너와 보스톤에서 전시가 되었는데, 당시에 이 그림을 뜯어본 비평가중에 이 그림이 실제 미국의 '진경 산수'가 아니라는것을 알아챈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미 서부의 풍경이라고 했지만 사실 실제 이런 장소는 없었지요. 비어시타드가 서부를 돌면서 스케치했던 이곳 저곳의 풍경 중에서 근사했던 것을 총 집합시켜서 하나의 풍경화에 '때려 넣은'거죠.   하지만, 이것이 '진경산수'가 아니고 그냥 이것저것 섞어서 만들어낸 가상의 풍경이라고 해도 미국의 장대한 자연을 제대로 연출해냈다는 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만약에 독자중에 실제로 스미소니안에 가서 이 그림을 보게 되는 분들은, 이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보시기를 권합니다.  저 의자가 괜히 저기 있는것이 아니고요.  저 의자가 놓여진 곳에 앉아서 이 풍경화를 볼때, 그때 화가가 의도한 가장 '완벽한' 각도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도에서 흘끔 보고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혹은 의자에 앉아도 되나 안되나 눈치 보지 마시고) 의자에 편히 앉아서 이 풍경속의 숲과, 동물과, 물과, 산 그런것들을 즐기시길. 

 

 

 

 

 

 

Among the Sierra Nevada, California, 1868, oil on canvas

183x305 cm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내킨김에 19세기의 대형 풍경화와 풍경화가들을 시리즈로 적어볼까요.  ... 누굴 추리나...(부시럭 부시럭.)

 

 

2010년 2월 6일 RedFox

 

* 참고로 Albert Beirstadt 는 독일 태생의 미국인인데요, 그 사람 이름을 독일식으로 읽으면 /알베르트 비어쉬타트/에 가깝거든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를 /비어시타드/라고 발음하는 편입니다. 저는 독일어도 배웠고, 현재는 미국어를 많이 쓰고 있는데, 이경우 갈등이 좀 생겨요. 비어쉬타트라고 읽어야 할지 비어시타드로 표기를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는 비어쉬타트 라고 읽고, 정작 표기할때는 비어시타드라고 합니다. (어렵지요. 어차피 남의 나라말. 남의 나라 이름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361 2편에서 계속...

 

 

Posted by Lee Eunmee

19세기 미국미술: 토마스 콜 과 허드슨강 미술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263  이전 페이지에서 토마스 콜의 '인생' 시리즈를 살펴 봤습니다.

 

 

19세기 미국 미술가인 Thomas Cole (1801-1848. 토마스 콜)은 미국의 풍경화가로 널리 알려져있으며, 그의 이름 옆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허드슨강 미술가들 (Hudson River School)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1918년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합니다. 오하이오에 정착했던 그는 후에 펜실베니아 미술 학교를 거쳐서 1825년에는 뉴욕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당시에 미국의 지식인들이나 꿈을 가진 화가들이 거쳤던 노선이기도 하지요. 펜실베니아를 거쳐 뉴욕으로 가는 노선.

 

당시 뉴욕주의 허드슨 밸리 (Hudson Valley)라는 지역이 빼어난 자연경관으로 이름이 있었고 그래서 토마스 콜을 위시한 '미술학도'들이 이곳에서 풍경화를 그리거나 익혔습니다.  미국 건국 초기의 미술이라야 '초상화' 아니면 '풍경화'였다고 할만하지요.  후에 그는 이탈리아에 가서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허드슨 밸리의 Catskill 에서 결혼하여 죽을때까지 그곳에서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토마스 콜을 위시하여 허드슨강 기슭에서 풍경화 작업을 하거나, 토마스 콜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미국 풍경화가들을 일컬어 허드슨강 미술가들 (Hudson River School)이라 칭하게 됩니다.

 

허드슨강 미술가들은, 대개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미국의 풍경들을 그렸고 (말하자면 진경산수라고 할만하죠),  때로는 이상화된 풍경들도 그렸습니다. 이 허드슨 미술가들에 의해 '거대한 미국의 풍경'들이 유럽사회에 알려지게 되기도 했고요.

 

허드슨강 미술가들중에 널리 알려진, 제가 장차 페이지를 열어 소개를 하고자 하는 화가들은

 1. Albert Bierstadt (알버트 비어슈타트) : http://americanart.textcube.com/361

 2. Frederic Edwin Church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 http://americanart.textcube.com/363

 3. Thomas Moran (토마스 모란) http://americanart.textcube.com/364

등인데요.

 

이 주요 화가들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장차 허드슨강 미술가들 특징을 좀더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토마스 콜의 풍경화, 그 속에 담긴 우화들

 

 

토마스 콜은 풍경화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풍경화속에 성서적 우화들을 담기를 즐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 작품의 제목은 The Subsiding of the Waters of the Deluge 인데요.  '노아의 홍수 뒤에 차분해진 물결'로 해석이 됩니다.  Deluge 는 홍수, 범람을 의미하는 어휘인데, 성서에서 the Deluge 라고 하면 노아의 홍수를 가리킵니다.  "After me, the deluge!"  나 이후에 홍수가 오건 말건 상관없다는 뜻이지요. 나 살아생전에만 무사하면 된다 이거죠. 좀 무책임한 발상이죠. (내가 알게 뭐람).

 

그림의 제목만 보면 토마스 콜은 성서에 담긴 노아의 홍수, 그 이후의 평화를 그린것으로 풀이됩니다만, 또다른 해석도 가능해집니다. 미술관의 그림 안내지에 담긴 내용을 옮기자면, 토마스 콜은 이 그림을 통해 신생국가 미국을 찬양했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민자였던 토마스 콜 자신의 삶의 관점을 보여준것은 아니었을까요?)

 

노아의 홍수가 뜻하는 것은 묵은것의 청산, 죄악과 오류의 청산.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지요. 신생국 아메리카가 유럽의 영향권에서 독립을 하는것 역시 새로운 시작일수 있고, 유럽에서 이민 온 토마스 콜에게도 미국에서의 삶은 새로운 시작일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 깊고 어두운 동굴을 통과하여 저 멀리 노오랗게 햇살이 비치는 평화의 바다로, 신세계로 나아간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제가 사진 사이즈를 줄여놔서 잘 안보이시겠지만, (사진 두번 클릭하시면 커집니다), 사진 하단의 중앙의 바위 옆에 보시면 희끄무레한 조그만 것이 보이실겁니다. 해골바가지 입니다.  해골바가지.  이 해골바가지는 왜 그려넣은 것일까요?

 

 

노아의 홍수 이후, 새로운 에덴을 향하여

The Subsiding of the Waters of the Deluge 1829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서양 그림을 감상하실때, 서양 그림에 '해골바가지'가 자주 등장한다는 것을 감지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나라를 막론하고 유럽 화가들은 '해골'을 그려넣기를 즐겼습니다. 이를 Memento Mori (메멘토 모리: 우리가 모두 죽어야 할 생명들이라는 것을 기억함) 이라는 용어로 정리를 하기도 합니다. Memento (Remember, 기억하라), Mori (mortal,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아리따운 여인이 한손을 해골에 얹고 있는 그림은 어떤 식의 해석이 가능할까요?  인간은 유한하고, 처녀의 아름다움도 유한하다는 메시지이지요.  책상위에 모래시계와 해골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 있다면,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지지요. 시간은 흘러가고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는 죽을거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 그림에 담긴 해골은 어떤 상징을 담고 있을까요?  우리 모두 죽을거다?  뭐 그보다는.... 어떤 것의 종말을 상징할수도 있지요.  구시대는 끝났다. 이 해골을 넘어서서 저 평화로운 신천지로 나아간다는 뜻일수 있지요. 신세계 미국은 New Eden 새로운 에덴동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토마스 콜에게.

 

2003년 겨울에 (아 벌써 아주 오래전의 일이구나, 어제 같은데...) 뉴올리안즈에 간적이 있습니다. 태풍 카트리나가 강타하기 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던 곳이었지요. 뉴올리언즈 시가지에 타로 점쟁이 할머니가 앉아있길래, 난생처음으로 길거리에서 타로점을 쳐봤습니다.  아, 제 일기에 그당시 사진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그때 제가 고른 패중에 '해골'이 그려진 패가 있었거든요. 크리스마스 휴가로 간 여행이라 '신년운세'를 본것인데, 뭐 해골 패가 나왔던겁니다.  그런데 점쟁이 할머니가 제 패를 들여다보더니 설명을 해주더라구요. 이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죽음'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넌 새해에 큰 행운을 맞이할것인데, 그것을 얻기 위해 고통이나 노력이 필요하다. 잘 해내길 바란다. (히히, 점쟁이가 아닌 나 라도 그런 설명은 하겠다) 아 뭐 점쾌가 하도 안좋아서 나를 위로하려고 이러시나 했지요.

 

 

 

2003년 12월 뉴올리언즈의 타로 점쟁이 할머니와 나.

 

그런데, 그 이듬해에 저로서는 인생의 큰 전환점이 왔지요. 아주 힘든 시험도 쳤고, 새로운 관문으로 들어섰지요.  죽음은 곧 탄생이다. 새로운 탄생이다.  점쟁이 할머니의 아름다운 설명이 고마웠죠. 결국 인생 이리저리 해석하기 나름인데...

 

아, 예, 그래서 토마스 콜의 그림에 담긴 저 해골은, 죽음, 그러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구시대, 구습의 죽음, 신생국가의 새로운 에덴동산을 희구하는.

 

 

 

아래의 두편의 그림들은 십자가의 순례라는 타이틀의, 기독교 우화 연작의 일부로 보입니다. 그가 1848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 작품들이 1847년 1848년에 그려진 것이고보면 이것들이 토마스 콜의 최후의 작품들이었던것 같은데요. 그 자신이 생의 마지막에 다다랗다고 느꼈던 것일까요? 

 

시작은 끝과 통하고, 끝은 새로운 시작과 닿아있고...

 

한해를 시작하는 요즈음, 묵은것들을 털어 내시고, 또 새로운 종말을 향해 여행을 떠나야할 때이지요.  올해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수 없으나, 길을 떠나보는거죠.

 

 

 

The Pilgrim of the Cross at the End of His Journey

십자가의 순례, 그 여행의 끝 (십자가와 세상이라는 연작 시리즈를 위한 준비화)

(Study for the series; The Cross and the World) 1846-1848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The Pilgrim of the Cross at the End of His Journey (about 1847)

십자가의 순례,그 여행의 끝.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그리고 올해의 마지막날,  아름다운 한 해였노라...라고 술회 할수 있기를.

 

2010년 1월 3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2009. 12. 29. 08:18

July Fifteenth 1938

Lithograph

2009년 9월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촬영

 

아이오와의 화가 그랜트 우드

 

 

제가 미국 워싱턴과 뉴욕을 위시한 동부의 큼직한 미술관에서 발견한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는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간신히 찾아낸 아래의 리토그라피 작품이 전부 입니다.  검색을 해보면 워싱턴의 국립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이 아름다운 우드의 풍경화를 다수 소장하고 있는데, 일반 관객에 공개 된 것은 한점도 없습니다.

 

(참고로, 미술관 자료를 검색해보면 Currently on View,  Currently Not on View 이렇게 표시가 나옵니다.  현재 볼수 있다 없다 알려주는 것이지요. 자료화가 잘 된 곳은 이런 표시가 나오고, 자료화가 안 된 곳에서는 무슨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지도 불분명 합니다. 심지어 자료화가 잘 된 곳으로 정평이 난 스미소니안 미술관에서도, 제가 가서 보고 찍어온 작품이 소장품 명단에 실려 있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너무나 아쉬운 마음에, 웹에서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 자료 몇점을 빌려 왔습니다.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가 어떤 것인지 꼭, 꼭, 보여드리고 싶거든요. (넌 미술관에서도 못봤다면서 그걸 어떻게 알지? 묻고 싶으시죠...  제가 심심풀이로 하는 짓이 책방에서 비싼 화집 들여다보는 일이거든요.  화집에서 발견한 명품을 보러 미술관으로 가기도 하고, 미술관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그림들을 화집에서 찾아보고 설명을 읽기도 하고요.)

 

 

그랜트 우드는 미국 중서부의 아이오와주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활동하다가 거기서 죽은 '진정한' 아이오와의 화가 입니다.  미국지도에서 아이오와를 찾아보면,  미국 가장 중심부에 네브라스카가 있고요, 그 동쪽에, 네브라스카와 일리노이 사이에 아이오와가 있습니다.

 

 

꿈의 구장

 

 

'아이오와' 하면 생각나는 것은?  만약에 미국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대개 '옥수수밭!'이라고 대꾸 할 겁니다. 중부 평야지대인 이곳은 그야말로 '가도 가도 가도 가도'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너 그걸 어떻게 알어? 가봤어?  묻고 싶으시죠... ) 제가 아이오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옛날에, 옛날에, 제가 미국땅을 밟아보기도 전에 한국에서 봤던 영화를 통해서였습니다.  당시 한창 미남 배우 명단을 진두지휘하던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했던 Field of Dreams (한국 제목, 꿈의 구장, 1989). 그 영화의 배경이 아이오와 평원이었습니다.  한 남자가 (케빈 코스트너) 그의 옥수수밭에서 바람소리같은 어떤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는... 그 남자는 별로 경영실적도 없어 망해가는 옥수수밭을 파헤치고, 그곳에 '야구장'을 만듭니다.  야구장이 생기자, 옥수수밭에서 야구선수들이 나와요. 왕년의 유명했던, 그러나 지금은 죽었거나 혹은 업종변경하고, 꿈을 포기한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야구장에 모여듭니다.  아, 꿈의구장 영화가 나온것이 벌써 20년이 지나는 것이군요.  그러면, 내가 그 영화를 본지도 20년 가까이 되었다는 뜻이군요.  아아...

 

 

 

꿈의 구장 영화 덕분에, 저에게는 아이오와의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과 그 하늘과, 바람소리가 아주 생생하게 각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옥수수밭에 찾아가면 내 잃어버린 꿈도 되찾을수 있을까?  이런 상상까지 하고야 마는 것이지요. (영화 아직 안보셨다면, 지금 보셔도 여전히  감동이 유효할것입니다.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이 될 만하죠.)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사랑과 이별, 그리고 쓸쓸함에 대하여

 

그리고나서, 또다시 아이오와를 만난것은, Bridges of Madison County (1995) 에서였습니다. 사실 원작 소설의 사상 초유의 히트를 쳤죠.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라는 제목으로 한국에도 번역 소개가 되고,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라디오 에프앰 틀어놓고 음악듣다보면, 연극인이면서 라디오 방송 진행도 했던 '손숙'씨가 그 차분하고 이지적인 목소리로 촉촉하게 깔면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읽어보셨나요?..." 뭐 이런 광고도 해대고 그랬습니다.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뭐 아무튼 연인들이 사랑의 선물로 주는 아이템중의 하나였다니까요.  심지어는 매우 완고하고 구식이며 남성중심주의적인 부산 사나이 우리 형부도 이 책을 우리 언니에게 선물 할 정도였으니까요. 부부가 이걸 같이 읽고 울고 짜고 장난이 아니었댑니다. 하하하.

 

저는요, 그제나 지금이나, 잘난척하는 경향이 심해서, 남들이 다 근사하다고 그러면 괜히 아니꼬와서 쳐다보지도 않았지요. (헤헤헤). 쳇, 대중문화라니...하면서 속으로 빈정거리고 있었겠지요.  그러다 어느날 누군가가 이 잘난척하는 저를 위해 글쎄 교보문고에서 '수입원서'를 사다 준 겁니다. 참.. 내... 그래가지고, 매우 잘난척을 하면서 그 얇다란 영문소설책을 읽고야 만것이지요. 꼬부랑 글씨로 읽자하니 골치가 아파서 뭐 크게 감동을 받은것 같지도 않아요.  1995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님이 직접 메가폰을 잡으시고 주연까지 도맡으셨는데, 저는 그로부터 한 5년쯤 후에 비디오로 이 영화를 본것 같아요.  (소설에 별 감흥이 없었으므로 영화도 찾아다니며 볼 열정이 없었지요.)

 

 

 

 

제가 이 소설을, 혹은 영화를 인상깊게 봤던 아니건 간에, 그때의 이미지는 남아 있어요. 어떤 이미지냐하면, 이탈리아계 이민자 여성 프란체스카가 미국의 중부, 온종일 걸어가도 끝도 보이지 않는 막막한 평원지대의 농가의 아낙네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막막할까.  온가족이 모두 사랑해주지만, 행복한 아내이며 엄마이지만, 이 여자의 일상은 얼마나 지루하고 그리고....쓸쓸하고...그럴까...  프란체스카의 그 막막한 고립감에 공감을 했던 것이지요.  어쩌다 삶이 주는 축복 혹은 기회처럼 불꽃같은 정열을 불태우고 난후, 불꽃놀이가 끝난 밤하늘을 바라보듯 남겨진 그여자의 여생은 또 얼마나 쓸쓸했을까 뭐 그런 생각을 골똘히 하고 그랬죠.  그 메디슨 카운티는, 그리고 그 다리들은 아이오와에 실재로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아직 미국땅도 밟아본 적이 없던 제게 아이오와는 이렇게 영화와 소설속의 '끝없는 초록 평야' 그리고'막막함'으로 다가왔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어느날 화집을 통해 아이오와 출신의, 평생 아이오와에서 살다 죽었다는 그랜트 우드를 발견했을때, 머릿속에 갖고 있던 이미지들과 그랜트 우드가 전해주는 이미지들을 뒤섞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그랜트 우드는 제 곁에 다가왔습니다.

 

 

 

 

추억, 잊혀진 평원의 나라

 

 

 

제가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bolt Kid (http://americanart.textcube.com/166 ) 책을 읽은 것도, 빌 브라이슨이 워낙에 재미있는 글쟁이이기도 하지만, 아이오와주 태생이었던 그가 회상하는 아이오와의 삶이 어땠는지 궁금하기도 했어요. 빌 브라이슨은 현재 아이오와의 주도인 드 모인 태생이고, 드 모인과 그 변두리의 삶을 그려나갔지만, 그가 전하는 중서부 사람들의 정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요.

 

미국에서 사는 사람들 사이에 이런 농담이 있어요. "중서부에는 뉴스가 없다. 그러므로 중서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슨 말씀인가하면 미국의 역사를 봐도 그렇고 뉴스의 발원지가 되는 곳은 극히 한정적입니다. 미국의 동부 몇개 지역, 그리고 서부 캘리포니아 대도시.  그 외에 미국의 중부에 대해서 얼만큼 아시나요? 사실 우리가 상상하거나 인지하는 '미국'은 뉴욕, 워싱턴, 텍사스 목장,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뭐 그런 곳입니다. 미국 역사의 현장은 대개 동부에 몰려있고, 명문 대학들도 동부에 몰려있고... 그에 비해 미드웨스트는 그저 '옥수수밭'이나 '콩밭'으로 기억되는 그런 곳이지요.  (여담이지만, 제가 2년여전에 플로리다에서 공부를 마치고 버지니아로 왔을때, 버지니아의 학교에 전학한 저희 아이들이 학교에서 들은 농담: "플로리다에도 학교가 있어?" 헤헤헤 워싱턴이나 버지니아의 아이들에게 플로리다는 디즈니랜드의 나라, 돌고래의 나라, 사철 비치에서 놀수 있는 휴양지였던 것입니다. 거기에 학교가 있고 학생이 있다는 상상이 안된다는거죠.)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bolt Kid: A Memoir

 

그렇게 잊혀진 평원의 나라.  가도가도 옥수수밭 뿐인 나라. 그런나라에서 우리의 그랜트 우드는 태어나고 자라고, 활동하가다가 그곳에 뼈를 묻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미술가들은 모두 유럽 유학을 거쳐 뉴욕으로 몰려들던 시기에 미드웨스트에 짱박혀서 옹고집으로 미드웨스트의 풍경을 그린 화가 그랜트는 확실히 좀 독보적인 존재라 할 만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지역주의를 논할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자주, 가장 주목해서 그랜트 우드를 이야기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과 우주가 평원에서 만나다 Star Trek 2009

 

 

지난 봄에 Star Trek 2009년판이 극장에서 개봉했지요. 보셨나요? (재밌는데...)

 

그 영화 볼때요, 자세히 보시면, 아버지 없이 성장한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뭐 활개치고 돌아다니면서 우울감을 달래는데요, 그때, 이정표에 IOWA 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소년은 막막한 IOWA 평원에서 '우주 기지'를 발견해요.  실제로 아이오와에서 찍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영화에 IOWA 라는 찌그러진 이정표가 보이지요.

 

왜 하필 아이오와?  저야 모르죠. 스타트렉의 광팬이 아니라서요. 원작 소설이나 극에도 그런 설정이 있었는지 알수 없지요.  하지만, 아이오와가 뭐 꼭 동떨어어진 설정은 아니지요.  미국에서 UFO 봤다는 사람들 있고, UFO를 불러내겠다는 사람들 모임도 있고 그렇쟎아요.  그리고, 끝없는 초원에 이상한 무늬 만들고 그러는 사람들 있쟎아요. 아이오와가 평야지대이고 목초나 옥수수, 콩 이런거 한없이 펼쳐진 곳이라서 이 평원에 커다란 고무래 같은것을 끌고 돌아다니며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든다음에, 외계인이 만들고 갔다고 뻥(?)치고 그러는 사람들도 있지요.  :)  아이오와는 '우주기지'로서 아주 적당한 지역이지요.

 

그런데요, 우주가 별건가요...우리도 '우주인' 이쟎아요. 지구도 우주의 일부고, 우리도 우주의 일부이고. 우리는 영원속에 존재하는거죠.

 

 

 

그랜트 우드의 풍경속에는 '영원한 시간'이 존재한다...

 

 

아래의 이미지들은   제가 웹에서 빌려온 작품들 인데요.  이 글의 머리에 제가 사진 찍어온 작품과 아래의 풍경화들을 보시면서 이들에게 공히 보이는 어떤 특징들을 찾아 볼까요?  작품들을 찬찬히 보시지요.

 

 

 

 

Stone City 1930 (스톤 시)

 

 

Sprign Turning 1936 (봄이 오네)

 

 

Fall Plowing (가을의 쟁기질)

 

위의 풍경화들에게서 공히 보이는 요소들은

 

 1. 둥근, 곡선의 언던과 평야가 끝없이 겹쳐져 있어, 이런 평야가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죠.

 

 2. 시선은 어떤가요?  작가가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것 같은가요?  작가는 이 풍경을 아주 높은 산위나 고층건물 위에서 혹은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그러니까 이 구도는 현실적인 구도는 아니죠.  환상의 구도이지요.  (이를 영어로는 bird eye view 라고 합니다.)

 

 3. 나무들도 대개 둥글둥글 하고요 길도 곡선으로 흐르고 개울도 곡선으로 흘러요

 

 4. 그러면 곡선이 아니고 직선이거나 예각인것은?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구도입니다. 건물, 다리,  인간이 밭을 갈아놓는 형태 이러한 '인위적'인 것들은 직선이거나 예각이지요.

 

 5. 마찬가지로 '자연'과 '사람이 품을 들여서 일군' 농장이 공존합니다.

 

 6. 풍경속에 있는 사람은 굉장히, 굉장히 작아요.  온통 초록색인 Spring Turning 이라는 작품을 보셔요. 거기 보면 희게 보이는 것이 사람이 가축을 몰아 밭을 가는 모습인데요, 그 사람과 그 사람이 갈아야하는 밭의 크기를 비교해보셔요.  "저 밭을 언제 다 갈아, 엉엉엉" 한숨이 나오죠. 울음을 터뜨려도 이해해요. :)  하지만,  이 풍경화속에 슬픔이나 고통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은 태평하게 펼쳐져있고, 깨알같이 작은 인간은 그 태평한 땅을 영원히 영원히 갈아엎고 농사를 짓는 것이지요.  세상은 넓고 시간은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지만, 사람 역시 서두르지 않고 영원속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가다보면 밭은 갈리고, 씨앗은 뿌려지고, 옥수수는 익을것이며, 콩은 깍지를 터뜨리며 깔깔댈것입니다.

 

아 저는 사실,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를 화집에서 들여다볼때면 네덜란드의 풍속화가로 알려진 브르겔 (브르헬)의 아키로스의 추락 같은 그림이 떠오릅니다.

 

 

 

그림의 주제나 시사하는 바는 다르지만,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밭을 가는 브르겔 그림속의 농부와 그 구불구불한 밭의 모양이 그랜트 우드의 풍경과 많이 닮았거든요.  조망하는 듯한 작가의 시각도 똑같지요.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 (Grapes of Wrath)를 통해 묘사한 당대의 농부들의 현실은 비참한 수준이었는데요, 그랜트 우드는 이러한 시대적인 풍경과는 동떨어진채 위에 보이는 영원히 지속될것 같은 '낙원'의 풍경을 중서부의 풍경이라고 그려냈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사랑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류의 향수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영원히 돌아갈수 없는 낙원, 영원히 돌아갈수 없는 고향.  그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랜트 우드의 '우화'와도 같은 풍경화를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를 좋아하는 저 역시...

 

그리움때문에... 지금은 근사한 서울 근교 아파트 촌으로 변해버려 그 흔적조차 찾을수 없는 제 고향집과 우리 할아버지가 평생 갈고 씨를 뿌린 우리집 논, 밭, 과수원이, 우리집 앞 개울이, 그 고향마을이 어른이 된 후에 보면 작고 보잘것 없었지만, 어린 시절, 몸도 작고, 세상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 그 고향마을은 끝도 보이지 않는 평원이었으며, 온종일 걸어도 그 끝에 닿을 수 없는 왕국이었지요.  제 추억속에도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그리움이, 인종과 언어와 사회적 배경을 초월하여 어떤 그림에 함께 다가가게 만들지요. 그렇게 우드의 풍경화 속의 시간은 영원에 맞닿아 있는 것이지요.

 

 

내 카메라에 담아온 그랜트 우드의 우주

 

 

 

 

 

2009년 12월 2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