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23:59

 

 

스미소니안 국립 미국미술 박물관, 듀잉의 작품 전시실 입니다. 2009년 7월 13일에 촬영한 것들인데요. 보시다시피...사진상태가 여엉 '아니올시다' 입니다. DSLR 갖고 다니기 전에 소형 디지털카메라로 대충대충 찍었던 사진들이라서.  (조만간 다시 들러서 작품사진들을 담아 오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에 전시되고 있는 이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스타인웨이 피아노사의 창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미국 백악관에 기증할것을 목적으로 제작된 것인데 Theodore Roosevelt 대통령 재임시 (1903) 듀잉이 '장식'을 담당한 것입니다.  이 피아노는 스타인웨이가 제작한 피아노중에서 십만번째 작품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도 이 피아노를 연주한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 피아노는 태프트, 윌슨, 하딩, 쿠어리지, 후버, 그리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임기까지 백악관에 있었다고 합니다.

 

 

 

흰 바탕에 금박으로 장식을 하고, 뚜껑 안쪽에 열명의 고운 아가씨들이 있는데요, 맨 왼편의 아가씨는 의자에 앉아있고, 나머지 아홉명은 원무를 추듯 서있는데요. 스타인웨이가 듀잉에게 작품을 의뢰하면서 America Receiving the Nine Muses (아홉명의 뮤즈들을 맞이하는 아메리카)라는 고전적 주제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아홉명의 뮤즈는 제우스와 네모신 (Mnemosyne) 의 아홉명의 딸들을 가리키는데 예술의 상징으로 서양 고전물에 많이 등장하지요.  듀잉은 뮤즈들을 그리면서 미국 건국 초기의 여성들의 옷차림을 한 여인들을 그려넣음으로써 서양 고전화에서 살찍 비껴갔다고 합니다. 뮤즈를 그리더라도 미국식으로 그리겠다는 자존감의 표현이었는지 알수 없으나 이를 애국적인 시각에서 해석하는 평자도 있습니다.

 

 

 

 

 

 

 

 

아래 작품은 In the Garden, 정원에서 (1892년) 작품입니다.

 

 

 

 

 

2009년 7월 13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23:59

 

프리어 갤러리의 듀잉과 타이론 전시실.  왼편에 있는 작품들이 듀잉. 오른쪽 벽에 걸린 작품들이 타이론의 풍경화들입니다.

 

듀잉의 작품, 왼쪽부터 (1) The Four Sylvan Sounds, (2) Before Sunrise, (3) After Sunset, (4) The Blue Dress 가 차례차례 보입니다.  대강 전시실이 이러한 분위기이고, 전시실에 걸린 작품들의 실제 크기가 이정도 된다는 '감'을 독자들께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사진에 찍힌 전시물외에도 입구쪽에, 그리고 다른 전시실에 작품들이 있으므로, 제가 프리어에서 '사냥해온' 작품들을 차례차례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전시된 작품은 '모두/깡그리' 찍어왔습니다 ^^)  <--- 이 돌쇠식 열정~ (아이참...사진 기술을 좀 익혀야 하는데...제가 게을러서요...전 아무래도 선생님이 필요해요...게으른 사람들에게는 '교실'이나 '선생님'이 동기가 되지요.  이 대충주의를 버려야 하는데...

 

 

 

이 전시실에 걸린 작품들은 디트로이트에 기반한 독신 사업가 프리어씨가 디트로이트 외곽에 저택을 지으면서 실내 장식을 목적으로 주문한 것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File:Charles Lang Freer House.jpg

디트로이트시에 1887년 세워진 프리어씨의 저택

 

이 집이 지어진 19세기 말 (1887년)은 미국이 남북전쟁 (Civol War, 1861-1865)을 넘어서서 산업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황금 시대를 구가하던 때 입니다. 그래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까지의 시기를 황금시대 (Gilded Age)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요. 이 Gilded Age 는 '허클베리핀의 모험'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미국의 '진정한 소설가, 이야기꾼' 마크 트웨인 (Mark Twain)이 처음 소개한 표현입니다.  피츠버그의 카네기와 록펠러, 디트로이트의 헨리 포드와 그리고 철도용 기차 사업가였던 프리어등 모두 당대의 재벌들이었지요. 이 신흥 산업국가 미국의 재벌들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걸신들린듯) 유럽의 명품들이나 아시아의 명품들을 사냥하고 포획하고 서로 자랑하는 것으로 삶의 기쁨을 누렸던 듯 합니다.  (제 표현이 너무 냉소적으로 느껴지신다면...죄송합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뭐 돈갖고 해볼거 다해보고 더이상 할게 없어서 이런게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돈이 있어야 문화고 뭐고 있는거니까. 특히, 문화는 돈이 없으면 끝장이 나고 맙니다... )  저야 그저 부자들의 이런 취미 덕분에 그거 헐값에 구경하는 은혜를 누리고 있으므로 불평의 여지가 없지요~ ~   앗참, 2009년 8월에 코넥티컷주 하트포드에 있는 마크 트웨인의 저택을 구경했는데요, 이 아저씨도 집안을 무슨 '중세 사원'처럼 금박으로 장식을 했더라구요.  아주 금칠갑을 했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마크트웨인에게 실망을 하고 돌아서고 말았지요.)

 

 

그래서 이렇게 황금시대를 구가하던 미국인들이 20세기 초반을 지나면서 1930년대 대공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인데요.

 

 

 

그림으로 가지요.  =)

 

'화환 Garland'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도대체 어디에 화환이 있다는거야?"하고 나름 두리번거리게 만드는 제목입니다. 여자의 왼손끝에 뭔가 희미한것이 보이실텐데요. 아주 작고 희미한 꽃줄입니다. 그 꽃줄을 시계차듯이 손목에 감지요. 그 보일락말락한 희미한 꽃줄을 그림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미술사가들은 Thomas Wilmer Dewing (1851-1938)이 1920년 이후에는 그림 작업을 하지 않았다고 전하기도 하는데요 (그러고보니 1920년대와 그 이후에 제작된 그림이 안보이는군요. 안그렸다는 뜻인가봐요) 그런 견지에서 보자면 1916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그의 말기작에 해당된다 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프리어씨의 저택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것은 아니고 후에 프리어씨가 사들인 것입니다.

 

여인이 앉아있는 의자나 테이블의 다리가 아주 가늘고 간결하지요? 테이블위의 도자기의 딱딱함과 반지르르함이 간결한 화면과 조화를 이룹니다. 여성의 자세나 표정도 '조각상'처럼 정제되어 있고 '고요'합니다. 오직 살아있는 생명체는 여성의 손에 들린 꽃줄 뿐인것 같습니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그러나 화면의 정 중앙에 배치한 꽃줄이 화면 전체에 고요한 '생기'를 불러일으키는듯 해 보입니다.

 

 

The Garland (화환) c. 1916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갤러리에서 촬영

 

 

 

이 피아노라는 작품은 1891년 프리어가 듀잉에게서 사들인 최초의 작품입니다. 듀잉이 작업하던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발견하여 사들였다고 합니다. 당시에 프리어는 그가 새로지은집의 치장에 열중해 있었고, 실내 일부를 듀잉이 맡아서 치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듀잉이 실내장식을 맡은 방에 듀잉의 작품을 걸은 것이지요 (아 돈있는 사람들은 이러고 노는군요 헤헤헤.  난 돈 없으니까, 내가 실내장식 하고, 내가 내 그림 걸고 그러면 되는거지요 하하하.  우리는 셋방에 살아도 재벌과 다를게 없습니다. 내가 내 공간을 장식하고 내 작품을 그려 붙이고, 내가 나를 부려먹고, 내가 나의 명령을 받고, 뭐 혼자서 다 하면 됩니다.)

 

화면이 여전히 간결하죠?  절제되어있고, 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같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림을 보고, 음, 편안하고 좋구나 이러면 되겠지요. 그래서 듀잉의 그림은 어릴때 침을 흘리며 들여다보던 아슴프레한 요정들의 세계 그림 같아요. 그냥 보면 좋은거죠. 편안하고, 아늑하고...

 

The Piano (피아노) 1891

Oil on Wood Panel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네가지 숲의 소리'는 듀잉이 뉴햄프셔주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한 것입니다. 뉴햄프셔는 뉴잉글랜드 지방의 일부입니다. 저도 지난 여름 (2009년 8월)에 뉴햄프셔주의 농가 (시인 Robert Frost 가 살았던 농장)를 가본적이 있는데요, 뉴잉글랜드의 여름의 숲의 정경이 바로 이 그림속에 스며있다고 할 만 하지요. 그림을 제작하던 당시 듀잉이 프리어와 주고받은 편지에 이런 사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I wish you could be here taking in this cool fresh air filled with bird notes and scents of flowers... 당신이 이곳에 와서 새들의 노래와 꽃향기 가득한 이 차고 상쾌한 공기를 마실수 있다면 좋을텐데요."

 

 

저는 듀잉의 이와같은 서술이 '사실'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뉴잉글랜드 지방까지 갈것도 없이 제가 살고 있는 버지니아, 워싱턴 지역만해도 강변의 숲길이나 호숫가 숲으로 가면 바로 이런 몽환적인 초록색의 숲에 몸을 잠기게 됩니다. 특히나 이른 봄, 겨울나뭇가지에 새순이 돋기 시작할때부터 녹음이 우거질때까지, 매일 매일 나가서 숲길을 걷다보면 그 연초록이 짙은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색조의 변화가 서서히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워싱턴에서 듀잉을 발견하고, 그 이듬해 봄 내내 숲길을 산책하면서 제가 깨달았던것 - "아하, 듀잉의 그림은 근원지가 미국이었구나. 그는 환상의 세계가 아닌, 그가 눈으로 본 아름다운 세상을 화폭에 옮긴것이구나."  물론,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주인공 여성들은 모두 환상의 세계에 살법한 뮤즈들처럼 보이지만, 그의 작품들의 배경은 뉴잉글랜드 지방의 초록색 풍경이었던 것이지요.

 

 

이 네폭 병풍은 듀잉이 '일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1895년 듀잉은 파리에서 작업하고 있던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화실에서 일본화와, 휘슬러가 작업하던 일본풍 작품들을 발견하고 일본화 기법에 감탄을 하게 되지요. 듀잉이 이 네폭 작품 작업을 하던 당시에 프리어 역시 여러점의 일본 병풍작품들을 사들이고, '일본화'의 영향이 듀잉의 그림세계에도 스며들었다 할만하지요.

 

 

 

The Four Sylvan Sounds (네가지 숲의 소리) 1896-97

Oil on Wood Panel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Before Sunrise 작품 작업을 하고 있을때 듀잉은 일본을 방문중이던 프리어로부터 일본화를 한묶음 전달 받습니다. 그리고 일본화의 매력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Kitakawa Utamaro 의 작품들에 열광하였고, 그의 작품에도 일본식 등불이 등장하게 됩니다. Before Sunrise 화면 뒷쪽의 작은 여자가 들고 있는 것이 일본식 랜턴입니다. 심지어 그는 이 작품을 Dedicated to Utamaro (우타마로에 헌정함)이라는 제목으로 부르기도 했다는 군요.  그리고 그의 작품을 거는 방에 우타마로의 작품도 함께 전시를 하여 두 작품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보여주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우타마로의 작품을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 (이제부터 18금) 흠...켁...춘화 작품도 엄청시리 많십니다...ㅋㅋ.  아무튼, 앞으로도 여러차례 논의가 되겠으나 근대에 일본화가 서양미술가들에게 끼친 영향을 '막대'합니다. (orz)  입맛이 씁쓸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죠 뭐...

 

 

 

 

 

Before Sunrise (해뜨기 전) 1894-95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갤러리에서 촬영

 

 

 

 

After Sunset 은 Before Sunrise 와 같은 크기의 그림입니다. 해뜨기전에 붉게 물든 하늘이 보였는데, 해가 지고 난 후에는 저 숲 가장자리에 기웃이 보이는 것은 저녁달 일까요?  이 작품은 듀잉이 'The Pink Dress'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다음에 보이는 그의 The Blue Dress'와 짝을 이루고 있지요. 분홍 드레스의 아가씨와 푸른 드레스의 아가씨의 포즈가 일치합니다.

 

 

 

After Sunset (해가 진 후) 1892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듀잉은 프리어 저택의 방에 전시된 그의 작품들 중에서 특히 이 작품을 사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The Blue Dress (푸른 드레스) 1892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다음에 소개되는 작품들 역시 프리어의 소장품들입니다.  악기를 들고 있거나 연주하는 세명의 아가씨들이 각각 그림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림 속의 악기, 연주는 시각적인 예술과 청각적 예술의 조화를 가능케하지요.  우리는 그림을 보면서 상상속에서 악기의 소리, 울림, 곡조를 듣고 흥얼거리게 됩니다.  참, 예술지상주의적인 작품들이지요.  듀잉의 작품들속에는 인간사회라는 것이 존재하는것 같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아름다운 여인들과, 아름다운 악기.

 

이것이 듀잉의 세계입니다.  아마도...듀잉이 미술사가들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사람들의 삶의 양태로부터 동떨어진 너무나 예술지상주의적인 듀잉의 미술에 대한 태도가 아마도 비평가들이나 미술사가들에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도대체 '이슈'가 없쟎아요.  부자들의 눈을 기쁘게 하는 장식물로 적당했을뿐...  한마디로, 그에게는 페이소스 (pathos)가 없었다는거죠.

 

(계속...)

 

 

 

Girl with Lute (류트와 소녀) 1904-1905

Oil on Wood Panel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Lady Playing the Violincello (바이올린 첼로를 연주하는 숙녀) ca. 1908

Oil on Wood Panel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An Artist (예술가) ca. 1906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08:19

 

 

Lady in Black and Rose (검정색과 장미색 드레스를 입은 숙녀) c. 1905-1909

Oil on Panel

44 x 55 cm (가로 세로)

2009년 11월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Morning Glories (나팔꽃) c. 1900

Oil and Canvas on Three Panel Boards

183 x 164 cm (세폭 전체 크기)

2009년 11월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이전 페이지, 디트로이트 미술관 ( http://americanart.textcube.com/234 )소장 듀잉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논의했던 듀잉 작품의 특징들이 이곳에서도 여전히 발견됩니다.

 

그런데, 이전 페이지에 이어서 뭔가 새로운것을 발견 하셨는지요?

 

음...'액자' 디자인이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고 있지요? 일단 금박이고, 액자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액자에 새겨진 무늬들이 일정합니다. 한 사람의 작품처럼 보이지요? 어쩐 일인지 알 수 없으나 듀잉의 작품들을 감싸고 있는 액자들은 모두 '동일범'(?)의 소행처럼 보입니다.

 

이 액자들을 디자인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퀴즈로 남겨 둬 볼까요?)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07:58

 

음, 제가 갖고 있는 토마스 윌머 듀잉의 작품 사진 파일이 많은 편입니다.  이것들을 어떻게 정리할까 고민하다가,  미술관별로 그림 소개를 하고 그리고 전체적인 정리를 하는 것이 이 아름다운 그림들을 감상하는데 도움이 될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듀잉의 그림은,  설명보다는, 그냥 그림이 전해주는 '느낌'을 받아들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듀잉의 그림속에 어떤 사회, 문화, 정치, 역사적인 '메시지'가 있는것도 아니고  화면가득한 '색채'와 색깔의 각기 다른 깊이 (tone)이 주는 것을 관조하는 것이 그림 감상의 포인트라고 봅니다.

 

습자지에 먹물이 번져가는 것을 지켜보듯, 그냥 편안하게요...  듀잉의 그림중에는 '악기'를 들고 있는 여인들, 혹은 악기 제목의 작품들도 많이 보이는데, 같은 맥략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타줄이 퉁 하고 울릴때, 잔잔하고 길게 퍼지는 소리... 딩.....이런 소리는 소리가 '들린다'기보다는 소리가 스며들죠. 

 

 

Summer (여름) 1893

Oil on Canvas

디트로이트 미술관 소장

2009년 10월 31일 사진촬영

 

 

 

Classical Figures (고전적 형상) 1898

Oil on Panel

디트로이트 미술관 소장

2009년 10월 30일 촬영

 

 

 

 

The Recitation (낭송) 1891

Oil on Canvas

디트로이트 미술관 소장

2009년 10월 31일 촬영

 

 

 

 

자, 위의 세작품에 보이는 듀잉화의 공통점들을 찾아볼까요?  제가 미술 전문가가 아니고 그저 '교양인' 수준으로 미술품을 '구경'하는 차원이라서, 뭐랄까, 미학적 분석보다는...음...텍스트 분석하듯 하는 점이 있는데, 그냥 미술을 '읽는' 저의 개성이라고 해두지요. 네, 인정합니다. 저 미술가 아닙니다. 미술 비평가도 아닙니다. 저는 텍스트(언어)를 주로 분석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만물을 텍스트 읽듯 들여다보는 편입니다. 이제 그림을 있는 그대로 그냥 들여다보는겁니다.

 

세 작품의 공통점으로 어떤것이 있을까요?

 

(1) 그림속의 주인공들이 모두 '여성'들입니다.  남자 안보이지요?  :)  '여름'과 '낭송'에서는 각각의 화면에 두명의 주인공들이 들어있습니다.  세폭 병풍같이 생긴 작품 속에는 한폭마다 한명의 여자가 그려져 있지요.

 

(2) 모두 유화이군요.

 

(3) 배경이 모두 초록색 계열이지요.

 

(4) 그리고 배경이 모두 '자연'입니다.  인공적인 '건물' 같은것은 안보이지요?

 

(5) 안개가 낀듯 화면들이 대개 '아슴프레'하지요?  사진사가 사진 실력이 없긴 하지만, 원래 작품이 이래요. 촛점이 어긋난것처럼 아슴푸레한 것이 이 세작품의 공통점입니다.

 

(6)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보이십니까? 아니지요? 팔은 가늘고 하체는 무척 길죠.  '이상화'된 여성의 체형인것처럼 보입니다.

 

 

자 이런 공통점 외에 다른 특징을 혹시 찾아내셨는지요?  찾아내셨으면 제게도 알려주십시오.  :)

 

이 그림들을 보면 어떤 음악이 떠오르시나요? Secret Garden 의 몽환적인 음악이 잘 어울릴것 같지 않은가요?  (예...제가 꽤 촌스러운 사람이라서...헤헤.)

 

 

 

 

 

다음페이지로 넘어가겠습니다.

 

2009년 12월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06:32

 

 

 

 

2007년 워싱턴 지역으로 이사온 후에 워싱턴의 각종 국립 미술관들을 들락거리는 동안, 제 눈에 띄면서도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화가가 Thomas Wilmer Dewing (1851-1938) 일것입니다.  듀잉의 작품을 자주 대하면서도 제가 관심있게 들여다보거나 주목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무래도 제가 과문한 탓으로 이 작가의 이름이 낯설었고, 따라서 미술사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작가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제가 이름을 알고 있는 미국미술가가 별로 많지도 않았지요)

 

그리고, 제가 듀잉의 아름다운 작품들을 '제끼고' 지나치곤 했던 이유는, 이 작품들이 한편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이 너무나 '동화적'으로 아름답고, 풍경역시 동화책속의 풍경처럼 몽환적으로 느껴져서, 어쩐지 '심각해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편. 듀잉의 초록색이 스며든 환상적인 작품들이 전시된 곳을 지나칠때면 저는 혼자서 '푸른 옷소매'라는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는데요.  푸른 옷소매 (Green Sleeves)라는 영국의 민요곡은 우리에게도 꽤나 친숙합니다.  많은 음악가들이 이 곡을 연주했고, 노래를 했지요. 유튜브를 검색해봐도 다양한 연주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신비한 민요의 '가사'를 정확히 알고, 노래부를수 있게 된것은 대략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해에 클래식 기타를 처음으로 가슴에 안고, 대학에서 클래식기타를 가르치는 음악교수로부터 개인지도를 받기 시작했지요.  그해에, 그러니까, 제가 온갖 경제적 빈곤함을 벗어나 슬슬 용돈벌이를 시작했는데, 그렇게 용돈벌이를 시작하는 기념으로, 첫 월급으로는 뭐 싸구려 동남아산 독일제 오디오세트를 들여놨고, 그 다음으로 클래식 기타를 산 후에 한동네에 살고 있는 선생님을 만나 기타를 튕기기 시작했지요. 카르카시 기타곡집을 연습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부교재로 영화음악곡을..."하고 우물우물 제안을 하니까,  스승께서는, 아무거나 영화음악곡집을 가져 오라고 했지요. 서점에서 영화음악 기타곡집을 하나 샀는데, 그 책에 Green Sleeves 곡과 가사가 들어있었던 겁니다.  (무슨 영화에 나왔던 곡이었을까?)

 

물론 초보자용으로 편곡된 아주 간단한 곡이었기때문에 혼자서 독학으로 그 곡을 마스터했지요. 가사도 함께.  Alas, my love, you do me wrong to cast me off discourteously...  푸른 옷소매는...어떤 이름모를 아가씨가 입고 있었던 드레스의 옷소매가 아마도 초록색이었겠지.  그래서 이름도 모르는 그 아가씨를 '초록색 옷소매'라 부르는것이겠지.  혼자 상상하다보면 생전 가본적도 없는 영국의 초록색 초원과, 안개와, 신비한 물방울과, 뭐 그런 것들이 연상이 되곤 했지요.

 

10년도 전에 익힌 그 기타곡은 지금 손가락이 굳어 기억이 안나는데... (하지만 책을 꺼내서 악보를 보면 다시 칠수 있어요...)  노래만큼은 지금도 생생하게 부를수가 있습니다.  정작 Dewing 의 그림속의 여인들은 대개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초록색 옷소매는 보이지 않는데, 여인들이 담겨있는 풍경이 온통 초록색이라 이 여인들이 모두 초록 옷소매의 아가씨들처러 보이는데요. 미국미술사에서 토마스 윌머 듀잉의 존재는 '미미'합니다. 미국 미술사책을 여러권 갖고 있는데, 그의 이름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책도 있고요, 그의 이름이 등장한대도 수백페이지짜리 책에서 그저 한두줄 정도 입니다.  그렇지만, 워싱턴 디씨나 인근 대도시의 미술관에 가면 듀잉의 작품이 많이 걸려있지요.  아마도 그는 미술품 수집가들이나 대중들에게는 사랑을 받았지만, 미술 비평가들에게는 그리 인정을 못받은 그런 화가였던것 같습니다.

 

노래 '초록 옷소매' (우리나라에서는 푸른 옷소매로 널리 알려진 곳)의 가사는 헨리 8세가 앤 볼린을 위해 지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영화 '천일의앤'으로도 알려져 있는 앤 볼린. 헨리 8세는 앤볼린과 결혼하기 위해 '영국교회'를 선포한 인물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변덕이 많았던 헨리 8세는 앤 볼린 역시 사형장으로 보내버립니다. 그 앤볼린이 낳은 딸 하나가 살아남아서 엘리자베쓰 1세로 등극하지요. 처녀여왕 엘리자베스 1세. 미국의 버지니아주는 그 처녀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헌정된 이름입니다.

 

 

어쨌거나, 미국의 미술관을 헤메이다가 신비로운 초록색의 풍경속에 선녀같은, 혹은 요정같은 여인들이 긴 드레스 자락을 끌고 날아다니듯, 떠다니듯 서 있는 그림을 발견하신다면,  함께 간 친구에게 자신있게 말해줘도 됩니다. "음...듀잉의 그림이군..."  백발백중이죠. 잘난척 하셔도 됩니다.   :)

 

듀잉 페이지 이어지겠습니다.  december 2009 redfox.

 

 

 

 

 

 

 

 

 

(poss. Henry VIII of England, 1500's.)

Alas, my love, you do me wrong,
To cast me off discourteously.
For I have loved you well and long,
Delighting in your company.

아아, 내 사랑이여 나를 이렇게도 무참하게 버리다니

그대를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하였건만, 그대와 함께 있는것이 그토록이나 기뻤건만.


Chorus:
Greensleeves was all my joy
Greensleeves was my delight,
Greensleeves was my heart of gold,
And who but my lady greensleeves.

초록색 옷소매는 나의 기쁨, 즐거움이었거늘.  초록색 옷소매는 내 순정, 오직 나만의 연인이었거늘.


Your vows you've broken, like my heart,
Oh, why did you so enrapture me?
Now I remain in a world apart
But my heart remains in captivity.

당신은 약속을 깨뜨려, 내 가슴도 무너졌다네. 오, 어찌하여 그대는 나를 사로잡았는가?

나는 무너진 세상에 남겨졌지만 내 심장은 아직도 포로로 잡혀있다네


chorus

I have been ready at your hand,
To grant whatever you would crave,
I have both wagered life and land,
Your love and good-will for to have.

늘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 해주기 위해 당신의 곁을 지켰거늘

당신의 사랑과 호의를 갖기 위해 내 목숨과 영토를 모두 걸었거늘


chorus

If you intend thus to disdain,
It does the more enrapture me,
And even so, I still remain
A lover in captivity.

당신이 나를 물리칠수록 나는 더욱이나 당신에게 빠져드네, 나는 여전히 당신의 포로라네


chorus

My men were clothed all in green,
And they did ever wait on thee;
All this was gallant to be seen,
And yet thou wouldst not love me.

나의 기사들도 당신의 시중을 들기 위해 모두 초록색 옷을 입었는데 이토록이나 늠름하여도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네


chorus

Thou couldst desire no earthly thing,
but still thou hadst it readily.
Thy music still to play and sing;
And yet thou wouldst not love me.

 

그대는 속세의 재물에 관심이 없으나 당신이 원한다면 모두 당신것

당신은 여전히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지만,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네



chorus

Well, I will pray to God on high,
that thou my constancy mayst see,
And that yet once before I die,
Thou wilt vouchsafe to love me.

신께 기도드리오니 내가 눈을 감기전에 그대가 나를 사랑하게 되기를

 


chorus

Ah, Greensleeves, now farewell, adieu,
To God I pray to prosper thee,
For I am still thy lover true,
Come once again and love me.

 

아, 초록 옷소매의 그대여 지금은 안녕, 안녕.

신께 기도드리오니 당신이 안녕하시길

나는 아직도 당신의 순정한 사랑이오니

내게 다시와 나를 사랑해주시길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09. 12. 27. 06:15

공식 홈페이지: http://www.asia.si.edu/

프리어 갤러리 (http://americanart.textcube.com/225) 와 함께, 스미소니안 아시아 미술관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미소니언에서 제공하는 공식 홈페이지는 프리어, 새클러를 함께 묶어서 소개합니다.

 

역시 무료입장. 프리어 갤러리와 통로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Arthur M. Sackler 라는 분이 기증한 기금으로 건물이 지어졌고, 그가 소장하던 아시아 미술품들도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 관심분야가 미국미술 이라서, 이곳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이쯤으로 줄이겠습니다.)

 

 

 

 

아래 지도에서 봤을때 하단의 성채같은 건물 그림 아래의 왼편에 Sackler Gallery 라는 이름표가 보이지요?  이곳입니다.

 

 

 

이곳이 지도에 보이는 성채의 실제 건물입니다. 스미소니안 성 (Smithsonian Castle) 이라고도 불리우며 Smithsonian Information Center 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신생국 미국에 어마어마한 개인 재산을 남긴 영국인 Smithson 씨를 기념하는 건물이기도 하여, 이 건물에 스미손씨의 수집품들도 전시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진은 내셔널몰에서 봤을때는 '뒷편'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이곳은 스미소니안 성채의 뒷마당에 해당되는 곳이고 저 너머 앞문쪽에 내셔널몰이 있습니다. 이 뒷마당의 왼편에 Sackler Gallery 가 있고, 오른편에는 스미소니안 아프리카 미술 박물관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미술 박물관 역시 지하로 프리어나 새클러 미술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1층 현관에 커다란 요술거울이 있는데, 뭐 울룩불룩 일그러진 겨울이라서 이런 재미있는 그림이 나옵니다. 구석에 보이는 검은사람이 redfox 입니다.

 

 

 

 

 

 

 

미술관 현관에 설치된 이 재미난 대형 거울은, 우리에게 '우리는 늘 왜곡된 형상을 볼 뿐이다'라고 일깨워주는것 같기도 합니다. 

 

2009년 12월 redfox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09. 12. 27. 04:43

공식 홈페이지: http://www.asia.si.edu/

워싱턴 디씨의 모든 스미소니안계 박물관은 무료 입장입니다.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사진 촬영도 자유롭습니다.

 

 

 

 

프리어 미술관 (Freer Gallery of Art)는 연결되어 있는 쌔클러 미술관 (Sackler Gallery of Art)와 더불어 스미소니안 계열의 국립 박물관들 중에서 '아시아 미술' 전문 전시장입니다.  아래의 지도에서 보면,  붉은색 건물들이 스미소니안 국립 박물관들인데, 맨 아랫쪽 가장 외편의 네모난 건물이 프리어 미술관이고, 그 오른쪽에 직사각형 모양의 쌔클러 미술관 건물이 보입니다.  메트로 스미소니언 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워싱턴 디씨의 스미소니안 박물관들중에서 최초로 '기증된' 건물이기도 합니다. 이 박물관 건물과 소장품들을 기증한 사람이 Charles Lang Freer (1854-1919) 라는 미시건주 디트로이트 소재의 철도차량 사업가 입니다. 이 박물관 건물의 건축비만 당시에 1백만 달러가 들었다고 하는데, 전 경비를 프리어씨가 지불했고, 그가 평생 모은 미국, 아시아의 예술품들도 역시 기증했습니다.

 

 

 

프리어씨에게는 아내나 자식이 없었고, 취미삼아 예술품을 수집하게 되었는데, 후기에 그와 절친했던 미국출신 영국 미술가 James Aboot McNeill Whistler (휘슬러)의 조언에 따라서 아시아권 미술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했습니다. 그는 아시아권 미술품 수집을 위해 중국, 일본, 한국 (당시 조선)도 방문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프리어 미술관에 소장된 아시아권 작품들을 보면, 그 속에 있는 한국의 예술품들은 일단 숫자도 많지 않고, 열세라고 할 수 있지요.  아무리 우리나라 미술품이 대단하다고 해도, 몇작품 되지도 않는 청자나 백자가 어느 구석에 전시되어 있는 형편이라,  오히려 이런곳의 한국 전시물을 보고 나면 기분이 저조해지는 편입니다.  

 

 

 

 

 

 

특히나 프리어 미술관을 '미국미술과 아시아 미술 전시장'으로 소개하기도 하는데,  프리어가 '아시아 미술' 전시장임을 표방하면서도 미국미술 전시장이 여러군데에 있고, 이곳을 찾는 관객들이 많은 이유는, 이곳에 19세기말에 활약했던 미국 미술가들 Dewing, Whister, Sargent 등 당대의 걸출했던 작가들의 일련의 작품들이 이곳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에 보이는 전시장에는 Dewing (왼편벽) 과 Tyler (오른쪽 벽)의 작품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사실 이곳에 걸린 작품들은 프리어씨가 디트로이트 외곽에 지은 저택의 내부를 장식할 목적으로 제작된 것들이라고 합니다.  집을 지으면서 그 집을 장식할 작품들까지 주문제작을 한 듯 합니다.

 

 

 

 

아래는 '공작의 방 Peacock Room'으로 알려진 '방'입니다. 휘슬러가 영국의 어느 돈많은 사람의 주문으로 그 집 식당을 이런 식으로 꾸며 줬다고 하는데요, 뭐 휘슬러가 의뢰인의 부탁을 무시하고 멋대로 꾸몄다가 서로 옥신각신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후에 이 '식당' 내부 전체를 프리어씨가 사들여서 이 식당을 '뜯어'왔다고 하는데요, 최종적으로 프리어 미술관에 안착을 하게 됩니다.

 

 

 

 

이 방이 대단하다고 관객들이 많이들 찾아 오는데요. 제가 보기엔

(1) 우리나라 절집/혹은 무당집에 들어간듯한 느낌이 드는 금박무늬

(2) Princess from the land of porcelain 도자기나라에서 온 공주 그림은 딱 신전의 여신입니다. (이 의상, 일본 의상인가요?) 의상은 일본, 이목구비는 서양 여성입니다. 뭔가 '잡종적'이죠.

(3) 중국식당에 온 기분도 들고요

 

이래저래 '아시아'권의 관객인 제 눈에는 뭐랄까, 이도 저도 아닌 얼치기 인테리어 장식 같구만, 이거 만드느라고 돈 쳐들였을것이고, 이거 사온다고 또 돈 억수 들었을걸요. 아마.

 

(정작 주인공인 아시아 예술품에 대해서는 저는 생략하겠습니다. 그냥 미국미술에만 집중하려고요.)

 

프리어 미술관에 대한 소개는 이쯤으로 맺음하고, Dewing, Whistler, Sargeant 에 대해서는 따로 페이지를 만들어서 소개하겠습니다.

 

 

december 26, 2009.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3. 08:16



내가 미국에서 둘러본 미술관들 중에서 미국의 유명한 재벌이 직접 열었거나 혹은 혁혁하게 기여한 미술관들.  (참고: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Museums)

 

 

 

 미술관

 설립자 (기여자)

 비고

 뉴욕 현대 미술관 (MoMA)

http://americanart.textcube.com/80        

 

 Rockefeller 가문

 미국 최대 석유 재벌     

 구겐하임 미술관

(맨해턴 소재의 미술관 방문, 2008 )

 

 

 Guggenheim 가문

 광산, 금광

 디트로이트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94

 

 

 Ford 가문 (기여)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자동차

 카네기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159

 

 

 Carnegie 가문

 펜실베니아

피츠버그

철강업

 크라이슬러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190

 

 Chrysler 가문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자동차

 코코란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97

 

 

 Corcoran 가문

 광산

 필립스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35

 

 

 Phillips 가문

 광산

 Walters Art Museum (볼티모어) 무료입장

 

 

 Walter 가문

 재벌

 

Freeer Gallery http://americanart.textcube.com/225

 

 

 

Freer

미시간 디트로이트 철도 산업및 기차 제조 투자자

아내와 자식 없었음.

워싱턴 디씨에 최초로 스미소니언 산하 뮤지엄 건물을 기증함

그의 19세기-20세기 미국미술및 아시아 미술 소장품을 연방정부에 모두 기증

 

 

Sacler Gallery

Hirshhorn

Kreeger

 

                                                   

 

 

 

 

 

 

 



작은 재벌들의 개인 전시관 규모의 미술관은 제외하고 큼직한것 중에서 내가 직접 가 본 (크라이슬러는 조만간 방문 예정) 미술관들과 재벌들과의 관계를 표로 한번 만들어 본 것입니다.  록펠러의 현대미술관은 20달러쯤의 입장료를 받지만,  버지니아의 크라이슬러 미술관은 '무료 입장'입니다. (고마우셔라).  뉴욕 맨해턴에 있는 거의 모든 미술관들이 입장료를 듬뿍 받아 챙기는 편이고, 그 외의 도시의 미술관 입장료는 착하거나 (저렴) 혹은 너무 착한 (무료)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살면서 새로운 '재벌' 미술관을 방문하면 이 페이지를 업데이트 해 보겠습니다.

 

이런 미술관을 방문할때, 처음에 저는 그저 피상적으로  참 훌륭한 일을 하셨구나,  덕분에 내가 이렇게 세계적인 명품들을 무료로 혹은 약간의 돈을 내고 맘껏 볼수 있구나 뭐 이렇게 가볍게 생각을 하고 기쁜 마음으로 전시품들을 보는 정도 였습니다.  가끔은 '결국 문화라는 것도 돈 있는 사람들의 놀이이지. 돈 없으면 그림도 음악도 힘들지.  메디치가를 봐도 그렇고, 창작하는 사람들은 돈 가진 사람들의 도움을 받거나...결국 문화는 돈인거야..대충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촛점을 맞춰서, 피상적으로 대충 볼것이 아니라, 뭔가 주제를 정해서 파고 들어가보자 작정하고 미국미술을 들여다보니, 자연히 미국역사를 들여다보게 되고, 미국 역사속에서 재벌들이 어떤 노선을 취했는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이 아름다운것을 알고 있지만 (제가 뉴욕 맨해턴에 갔을때 처음 보고 반한 건물이 크라이슬러 건물이었습니다.)  크라이슬러 자동차 공장에서 노동자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카네기가 대단한 자선가라는 것은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카네기가 노동자들을 어떻게 탄압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화려하고 즐거운 정보에는 많이 노출되어 있지만, 슬프고 어둡고 아픈 역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생명가진 것들은 본래 어둡고 아픈것은 회피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것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결국, 이면으로 이면으로 파들어가게 되더란 것이지요.

 

나는 새삼스럽게 자선가로 알려진 재벌들을 비평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사회에 제공한 화려한 미술관 뒤에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 가끔은 들여다볼 생각입니다.  그래야 세상을 균형감있게 볼수 있고, 그래야 좀 어딘가 균형이 잡혀갈것 같습니다.

 

 

 

 


 

Posted by Lee Eunmee
Realism/Ashcan School2009. 12. 7. 23:22

소년가장 슬로언

 

John French Sloan (1871-1951)은 펜실베니아 태생의 미국 사실주의 화가로 Henri 를 중심으로 모인 Ashcan (애시캔) 그룹과 The Eight (8인회)의 멤버로 활동하였습니다.  존 슬로언은 필라델피아에서 성장하였는데 그의 고등학교 동창중에 후에 The Eight 의 멤버가 되는 William Glackens를 만나게 됩니다.

 

1888년 그가 16세 되던해에 아버지가 정신질환으로 쓰러지면서 슬로언이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소년가장이 되고 맙니다. 그는 책방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책을 읽고 화집을 들여다보며 혼자 그림을 그리던중 정식으로 야간 미술 과정에 입문하게 되고 후에는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Thomas Pollock Anschutz 의 지도를 받게되며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Willaim Glackens 를 다시 만나게 되지요.

 

1892년 Robert Henri 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들의 연대가 시작됩니다. 슬로언는 The Philadelphia Press 의 미술부에서 삽화가로 일을 하며 미술 작업을 계속해 나갑니다.

 

슬로언의 아내

 

슬로언은 아내와의 관계도 '소설'적인데,  그의 아내 Anna Maria 를 술집에서 만나서 사랑에 빠져 1901년에 결혼하게 됩니다.  안나 마리아는 백화점 점원으로 일했지만 매춘 경력이 있으며 음주벽이 있고, 아마도 이러한 전력을 거친 여성들이 보일법한 히스테리컬한 우울증도 보였던 것 같습니다. 슬로언의 아내에 사랑은 지극정성이었고 한 의사의 제안으로 1906년부터 1913년까지 매일 매일 자기가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는지 일기를 쓰게 됩니다.  (이런 남자 또 한명 있죠, 삐에르 보나르... 삐에르 보나르는 수십년간 목욕탕에서만 지내는 특수한 병을 가진 여인을 돌보며 한세상을 보냈지요. 삐에르 보나르의 그림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목욕하는 여자, 삐에르의 평생의 연인.)  그의 부인은 1943년에 죽고, 슬로언은 이듬해에 새장가를 갔으며 슬로언 자신은 1951년에 운명합니다.

 

슬로언의 사회주의 운동

 

 

1912년 그는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잡지 The Masses 에 미술 편집인으로 참가하며 다른 사회주의 사상이 강한 매체인 Call, Coming Nation 지를 위해서도 삽화를 그려줍니다.  특히나 그가 그린 1914년 6월호 The Masses  표지화가 지금도 자주 인용되거나 소개되곤 하는데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페이지에 Ludlow 학살사건의 이야기가 잠깐 소개된바 있습니다.)  그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고 민중의 생존권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긴 했지만, 예술가로서 슬로언은 '선전 (propaganda)'의 '도구'로 미술 작업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회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에는 긍정하면서도 예술이 '극단적인 정치선전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할만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예술만을 위한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반문할수 있을텐데...제가 추측하기에, 슬로언은 아마도 그 주위의 '사회주의자'들의 어떤 행동들에 거부감을 가졌을법 합니다.  그 '어떤 사회주의자들'이 요구하는 '선전물'을 만들기 싫었겠지요.  그가 꿈꿨던 사회주의와 그가 속한 사회주의자의 무리들의 행동 양식이 일치하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과 거리를 두고 싶었을겁니다.  

 

서민속에 서있던 남자

 

존 프렌치 슬로언의 작품세계는 크게

 

(1) 뉴욕의 풍경

(2) 대중의 삶의 풍경

(3) 잡지,책의 삽화가로서 작업한 세밀한 판화 작품들

 

으로 정리 될수 있습니다. 일단 그가 삽화가로 일했으므로 대중 생활 관련 묘사 작품들이 많은데, 이런 성향은 이미 십대에서부터 생계형 청년 가장으로 세상에 나아갔던 그의 삶의 이력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가 즐겨그린 도시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 가령 도심의 창가에서 빨래를 너는 여인이나, 건물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들, 술집 풍경 역시 그의 삶과 밀착된 풍경이었을 겁니다.  특히나 20세기초의 뉴욕의 전철과 천철 주변 풍경은 그의 '전매특허'와 같은 주제라 할 수 있지요. 조지 벨로우즈 페이지에서 (http://americanart.textcube.com/198)  권투선수 그림을 즐겨그린 미국 화가가 누군가? 이런 퀴즈가 나오면 자동으로 '조지 벨로우즈'를 외치면 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미술관에서 '뉴욕 고가 기차' 풍경화가 멀리서 보일경우,  당신이 애인과 함께 미술관 구경중이라면 "저기 저 뉴욕 풍경속에 고가 기차 그림이 있는 저 그림 말야...저거 아마 존 슬로언이라는 화가의 그림일거야..." 하고 '아는체'를 해도 크게 실례가 안 될 것입니다.

 

 

 

뉴욕 고가 기차 (Elevated Train: EL)

 

The City from Greenwich Village (1922)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바라본 뉴욕
oil on canvas
overall: 66 x 85.7 cm (26 x 33 3/4 in.)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2009년 9월 촬영

이 그림은 비가 그친 겨울 저녁, 맨하탄 남단에서 바라본 맨하탄의 거리 풍경입니다. 고가기찻길 위로 기차가 불을 밝히고 지나가고 비에젖은 도로에 자동차의 불빛이 반사됩니다. 비가 갠것을 눈치채는 이유는 하늘이 부염하게 밝아 있다는 것이지요. 도시는 촉촉히 비에 젖어 있고 골목의 불빛은, 그것이 골목이라서 더욱 밝아 보입니다. 건물 옥상의 물탱크도 보이고, 다리미의 모서리같이 각진 고층 건물이 오른쪽에 보이는데, 건물에서는 불빛들이 새어나옵니다. 일층의 모든 창문은 손님들을 기다리는듯 환하게 불이 켜져있습니다.  옹기종기 걸어가는 행인도 몇명 보이지요. 그림의 전체적인 윤곽은 우리가 마치 몇층 건물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듯 합니다. 액자를 창틀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창밖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기분이 듭니다.

 

 

다음 그림은 워싱턴 필립스 콜렉션이 소장하는 Six O'clock, Winter (1912) 라는 또다른 고가 기차 (EL) 풍경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사진 파일이 상태가 안좋아서 웹에서 얻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속의 여섯시의 풍경은 오전일까요 오후 일까요? (제가 볼때는 오후 여섯이인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단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기로 하고요...  )  이 작품이 1912년작이고, '그리니치 빌지지에서 바라본 뉴욕'이 1922년 작품이므로, 두 그림 사이에는 10년의 세월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두 그림을 함께 놓고 보면, 1912년 작품은 고가기차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선이고, 1922년 작품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이지요.

 

 

 

 

http://www.phillipscollection.org/research/american_art/learning/sloan-learning.htm

 

 

 

무료 커피

 

The Coffee Line (1905)

무료 커피를 받기 위해 줄서있는 사람들

2009년 11월 7일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뉴욕에서 무료 커피를 받기 위해 긴 행렬을 이룬 실업자들을 발견한 슬로언이 그려낸 겨울 저녁의 풍경입니다. 길에는 눈이 쌓여 있지요. 슬로언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 어둡고 긴 행렬을 묘사 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빈곤의 문제가 그를 사회주의 사상으로, The Masses 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비가 들이치는 페리선

 

Wake of the Ferry, No. 1 (1907)

페리선의 물길

2009년 10월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지금도 뉴저지에서 맨하탄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중에 배(Water Taxi)로 강을 건너는 직장인들이 있습니다. 100여년전 뉴욕과 뉴저지를 왕래하는 페리선을  그린것은 당시로서는 '엉뚱한' 시선이었을겁니다.  비가 들이키고 물결이 거칠게 일고, 전체적으로 '내가 그 페리선을 탄듯' 심란한 기분이 드는 그림입니다.  오른쪽 구석에 서있는 여인도 그래서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요.

 

이 그림은 그림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 만큼이나 심상치 않은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슬로언은 1904년에 뉴욕으로 활동지를 옮겼는데, 그의 알콜중독자 부인은 이후로도 걸핏하면 필라델피아의 집으로 가버리곤 했던 모양입니다. 그의 아내가 필라델피아로 가기위해 이 페리호를 종종 이용했지요. 결국 이 그림속의 여인은 슬로언의 알콜중독자 아내의 뒷모습이었던 것인데요.  1907년에 슬로언이 그의 작업실에서 The Eight 전시회를 준비하기 위해 모임을 갖고 있었을때 부인이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남자 작업장에 여자가 허락도 안받고 나타난거죠, 아마 그렇겠죠.) 술도 몇잔 마셨겠다, 화딱지가 난 슬로언이 그 자리에서 의자를 집어던져가지고 이 그림이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래가지고,  나중에 이 그림을 또다시 그리게 되는데 그 (2)번 그림은 필립스 콜렉션에 소장되어 있고, 이 (1)번 그림은 슬로언이 (2)번 그림 그린후에 손을 봐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Beal 2002).  아무래도 이런 뒷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페리선의 풍경이 슬로언과 그의 아내의 풍경이었다 싶기도 하지요.

 

 

 

 

 

 

이상에서 보신바와 같이 대도시의 뒷골목의 삶의 풍경, 이런 풍경은 Henri 가 주도했던 Ashcan 일당들의 주요 소재라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각에서 '이런 그림이 뭐가 대단한가?' 의구심이 들 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그려진 1922년 미국 화단의 상황속에서 이 그림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각은 달라질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미술의 역사는 유럽에 비해서 '일천'할수밖에 없지요. 제가 에드워드 힉스나 조쥬아 존슨과 같은 초기의 '포크 아트' 작가들에 대하여 애정을 갖고 소개를 한 이유가 있는데요, 미국은 초기에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였고 유럽 문화권의 식민지이기도 했습니다. 미국 자생의 문화가 없었다고 봐야지요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를 제외하면).  그래서...Henri 를 위시한 '사실주의' 화가들의 탄생 이전의 미국 회화사는 '유럽 베끼기'의 연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장차는 미국의 인상주의나 그 이전의 풍광, 초상와 위주의 미술과 미술가들을 차례로 소개하겠지만, 제가 왜 이들부터 시작을 안하고 풍속화가 잠깐 건드리다가 '사실주의'로 점프를 해버렸는가하면,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들 이전의 작가들에게서 제가 별 매력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뭐 대략 사이비 유럽미술 냄새가 고약하게 난다는 느낌이 드니까요. 제가 감지하기에 미국의 사실주의 화파들부터, 미국의 미술은 자신의 정체성을 슬슬 세워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에서부터 미국의 풍경이, 미국의 서민이 화면의 중심에 슬슬 등장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슬로언의 전철 그림과 도심 그림이 매력적으로 비쳐지는 것이지요. (이것은 미국인이 아닌, 아시아 출신의 어느 외국인이 이방인의 시각으로 미국 미술을 보는 관점이긴 합니다.)

 

 

 

Yeats at Petitpas'

 

이 그림은 뉴욕 웨스트 사이드의 어느 하숙집에서 열린 파티 장면입니다.  Petitpas 는 프랑스 출신의 두 자매가 경영한 하숙집 이었습니다. 

 

이곳에 영국의 철학자이며 예술가였던 John Butler Yeats (존 버틀러 예이츠 1839-1922)가 머물렀는데, 그는 영문학도들에게 (그리고 교양 차원에서 영시를 읽은 사람들에게)  친근한 시인 William Butler Yeats(1865-1939) 의 아버지입니다.  존 버틀러 예이츠는 69세 되던 해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애시캔' 화가들과 친교를 맺었고, 결국 뉴욕에서 사망하여 뉴욕에 뼈를 묻었지요. 그러고보면, 그의 아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유럽'문화를 이상화 했는데, 아버지인 자신은 말년에 문화 불모지와 같은 뉴욕에 와서 세월을 보내다가 갔군요.

 

흰 턱수염의 노인이 존 버틀러 예이츠이고, 오른쪽 끝에 보이는 검은머리 남자가 존 슬로언이군요. 음식을 들고 서있는 이는 하숙집 주인이고요, 그이의 왼쪽에 모자를 쓴 여인이 슬로언의 부인이라고 합니다. 존 버틀러 예이츠가 이 하숙집에 머무는 동안 이곳은 당시 미술,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즐겨 모이는 장소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Yeats at Petitpas' (1910)

Oil on Canvas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2009년 10월 3일 촬영

 

 

 

해부학교실

 

존 슬로언은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서 Anschutz 선생의 지도를 받았는데, 다음 작품은 해부학 강의를 하는 안슈츠 선생을 에칭 판화로 묘사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Anshutz on Anatomy (1912)

해부학 교실의 안슈츠 선생

Etching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2009년 9월 19일 촬영

 

 

 

 

제 사진 상태가 좋지 못해서, 웹에서 좀더 선명한 이미지를 빌려 왔습니다.  강단아래에 안슈츠 선생이 서서 강의를 하고 있고,  강단위에 인간 골격이 서있고, 그 옆에 성기만 가린 남자 누드 모델이 서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둘러 앉거나 서서 해부학 강의를 듣고 있는데요. 학생들중에 여학생도 보입니다.  아마도 여학생들이 없었다면 남자 누드 모델이 성기를 가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1900년대 초반에 미국 미술 학교에서는 남녀학생이 함께 작업하는 곳에서는 누드 모델이 성기를 드러내면 안되었다고 하지요.

 

 

슬로언에 관심이 많아 자료를 많이 보긴 했는데, 막상 제가 가진 작품 사진 파일이 미미하여 그의 미술 세계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소개할수 없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저는 화집이 아닌 '내 눈'으로 본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기로 작정을 했거든요.  나중에라도 슬로언 작품들이 보이면 보이는대로 잘 갈무리하여 좀더 그에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화집에서 본, 제가 좋아하는 그의 작품들로는 그의 '빨래'관련 그림들인데요. 슬로언이 도심에서 빨래를 널거나, 걷거나 하는 여인들을 모티브로 그린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 참 아름답지요. 그래서 '빨래' 주제의 페이지를 하나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는데요, 이것 역시 훗날로 미루기로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1. http://www.nga.gov/fcgi-bin/tinfo_f?object=52079

 2. Sherry Babbit (2008). Philadelphia Museum of Art: Handbook of the Collections. Philadelphia, PA.

 3. Graham W. J. Beal (2002) American Beauty: Paintings from the Detroit Institute of Arts 1770-1920. Scala Publishers Ltd. London, UK.

 

 

 

 

2009년 12월 6일 red 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Ashcan School2009. 12. 6. 02:41

New York (1911)

George Bellows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워싱턴 국립미술관 (NGA)에서 촬영

 

사진은 클릭하시면 크게 확장시켜 보실수 있습니다.

 

뉴욕풍경

 

 

Goerge Bellows (1882-1925) 의  New York (1911)은 대략 100여년전의 뉴욕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자동차와 마차가 뒤섞여 있고, 고층 건물들과 그제나 이제나 여전한 인파가 보입니다.  사실 이 뉴욕의 풍경은 사진과 같은 실제 광경은 아니라고 합니다. 뉴욕의 여러 장면을 뒤섞어서 뉴욕의 분위기를 전달했다고 봐야겠지요. 얼핏 보면 타임 스퀘어 같기도 하고 얼핀 보면 펜스테이션 앞 같기도 하고, 어찌됐거나 우리가 한번쯤 가봤거나 혹은 영화나 그림을 통해서 지겹게도 많이 본 뉴욕 번화가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일백여년전의 풍경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복장이나 마차 장면을 제외하면 어느 화가가 며칠전에 그린 것이라고 해도 그럴싸해 보입니다.

 

조지 벨로우즈 (1882-1925)는 앞서 소개드린 The Eight (팔인회)나 Ashcan (애시캔) 그룹의 정식 회원으로 활동을 한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The Eight, Ashcan school 의 리더였던 로버트 헨라이 (Robert Henri 1865-1929)와 친분이 두터웠고, 헨라이의 미술관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의 작품들이 팔인회, 애시캔 회원들의 화풍과 통했기 때문에 조지 벨로우즈를 '애시캔'의 일원으로 평가하는 비평가들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의 작품들이 미국의 도시, 서민들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냈으므로 조지 벨로우즈를 애시캔 그룹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정리를 해보는 것입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오하이오(Ohio) 의 주도(행정수도)인 콜럼버스 (Columbus) 태생입니다. 이곳에 오하이오 주립대 (Ohio State University)가 있지요.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주로 야구선수와 교지 삽화가, 그리고 잡지의 삽화가로 활동했습니다.  오하이오 주립대에 한번 가본적이 있지요. 제 친구들이 그곳 수학과에서 공부를 했는데, 한 친구는 공부 마치고 수학자로 살고 있고, 또 한 친구는 아직도 거기서 공부중입니다. (글 쓰다가 친구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Robert Henri 역시 오하이오 출신인데 그는 신시내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조지 벨로우즈와 로버트 헨리가 고향이 가까웠다는 이유로 더욱 친근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스포츠맨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오하이오 주립대를 졸업한 후에 프로야구 선수가 될것인가 잡지 삽화가로 살것인가 고민하다가, 미술 수업을 받겠다고 작정하고 뉴욕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뉴욕 미술학교 선생으로 재직하는 로버트 헨라이를 만나게 되고 그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특히나 그의 권투경기 장면이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 합니다.  그의 도시 풍경이나 다른 그림들도 그 나름의 힘과 역동성이 느껴지지만, 단답형 상식 퀴즈 대회에서 '권투하는 그림' 내 놓고 '이거 그린 사람?'하는 퀴즈가 나온다면 자동으로 '조지 벨로우즈!'을 외칠만 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그림 세계를 단순무식하게 정리해본다면 대략 세가지 정도로 분류가 됩니다:

 

 (1) 그를 대표하는, 권투선수 시리즈

 (2) 도시 주변의 풍경과 서민의 삶

 (3) 일반 서민의 초상화

 

제가 미술관들을 돌면서 '사냥'한 그의 작품 사진들을 주제별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권투선수

 

Both Members of This Club (1909)

두 선수

Oil on canvas, 45 1/4 x 63 1/8 in. (115 x 160.5 cm)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흰색의 하일라이트가 들어간 왼쪽 선수, 얼굴에 피가 낭자합니다.  오른쪽 선수, 치고 들어가는 대각선 구도가 역동적이지요. 반대방향의 대각석 구도의 관객 풍경이 그림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피가 낭자한 가운데, 아래 중앙의 관객은 입을 벌리고 웃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권투선수가 피를 흘리거나 말거나, 관객의 입장에서는 링에서 피가 튀고 살점이 튀고 누군가 되게 쓰러지고 그래야 신이 나는 법입니다.

 

웹에서 조지 벨로우스 이미지를 찾아보시면 이와 유사한 다른 권투경기 장면 그림들을 많이 발견하실수 있습니다. 그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조지 벨로우즈의 권투경기 그림을 찾아 천지를 유랑하며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어릴때, 할아버지가 권투중계의 팬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권투중계의 일정을 일일이 표시해놓고, 그의 일기장에 적어놓고 절대 빼놓지 않고 들여다봤습니다. 아마도 돌아가실때까지 그러셨을겁니다. 단지 중계방송만 보신것이 아니고, 서울 우리집에 오시면, 어린 우리들을 이끌고 월곡천 건너, 시장통에 있는 '체육관'에 구경을 가곤 했습니다. '체육관'이 뭐하는데냐 하면 당시 무명 아마추어 선수들이, 혹은 권투선수 지망생들이 모여서 연습하는 '도장'이다 이거죠.  우리들은 거기서 밤이 이슥하도록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고, 혼자 줄넘기하거나 혼자 샌드백 치면서 훈련하는것을 구경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체육관에 따로 '탈의 시설'이 없었던것 같습니다. 가끔 우리는 잘생긴 '오빠'들의 (그때 나는 꼬맹이였으므로) 실한 엉덩이 구경도 할수 있었는데,  선수들이 체육관의 구석진곳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거든요. 그 구석진 곳이 하필 우리가 염탐하던 창가였으므로 그들이 창가쪽 구석에서 후다닥 바지를 내리고 체육복으로 갈아있거나, 체육복에서 평상복으로 탈바꿈하는 광경을 볼 수 밖에 없었지요. (일부러 그런게 아니고요 -.-;; )   아니...엉덩이밖에 안 봤습니다... 헤헤헤.

 

어릴때는 할아버지가 권투중계 보시는 것이 못마땅했는데요, (왜냐하면 내가 어린이 프로를 볼 수가 없으니까) 지금도 그런 스포츠 중계에 재미를 못느끼므로 여전히 볼 일이 없는데요, 하지만 이 그림은 제 맘에 듭니다.  조지 벨로우즈가 무슨 맘으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권투 장면을 그의 그림 소재로 잡았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신선한' 시도였고, 결국 그의 트레이드마크 (Signiture) 작품이 되고 말았지만, 그것 말고도,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인생 이렇게 치고 받고 맞다가 뻗는거지...하는 비감한 생각도 들고,  누구나 그런거지, 나만 유독 두드려 맞는것도 아니지, 이런 위안감이 든다니깐요, 글쎄.

 

 

 

2009년 12월 13일,  국립 미술관에 가서 조지 벨로우즈의 Both Members of This Club (1909)라는 작품을 다시 감상하고 있었는데요, 마침 미술관 도슨트(Docent 전문 안내원)가 사람들을 이쪽으로 안내해와서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더군요. 그래서 곁에서 귀동냥을 했지요. 새로 알게된 사실은,  1900년 초반 당시에는 상업적으로 복싱 경기를 하는것이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공개적인 복싱매치가 아니고, 남성들의 '음성적인' 클럽에서 진행된 경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목도 Both Members of This Club (이 클럽의 두 회원)이라는 식으로 달린 것이라고 하네요.  두 '선수'라고 하면 안되고, 그냥 클럽의 회원간의 친선경기같은.    그러면 이 클럽에서는 복싱만 했겠는가?  다소 '음성적인' 클럽이었으므로 그 안에서는 복싱 말고도 다른, 다양한, 그러나 저로서는 전혀 알수 없는, 남자들만의 '음성적'인 오락이 진행되었겠지요~

 

 

 

 

 

뉴욕 빈민가의 아이들

 

 

이 작품은 위의 권투선수 그림보다 2년 앞서서 그려진 것입니다.  뉴욕의 East River 강변에는 그 당시 가난뱅이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서울의 허술한 한강변 산동네를 연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제목이 Forty Two Kids (42명의 아이들) 인데요 제목의 'kid'가 단순한 '아이들' 이 아닙니다. 아이들이라는 영어 단어로는 Children 이 따로 있지요.  요즘 Kids라는 단어를 '아이들'이라는 의미로 흔히 사용하기는 하지만 백여년전 이 kid 라는 말은 '슬랭'으로 대개 이민자 아이들처럼 가난뱅이 아이들을 일컫는 표현이었다고 합니다. 그냥 아이들이 아니라...말하자면...'애새끼들'이라는 뉘앙스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

 

이 kids 라는 어휘를 저도 아주 조심해서 사용하는 편인데, 제가 교육을 전공했고, 학교에서 교사로도 일을했고, 그래서 대학원 수업을 들을때도, 온통 '아이들,' '학생들' 관련 이야기였지요. 그러니까 주로 사용하는 어휘가 students, children, ESL children, ESL students 뭐 이런 언저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무심코 지도교수와 논문 이야기를 하다가, "These ESL kids..." 뭐 이러고 말을 하니까 지도교수가 주의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학생을 존중해야 하는 교육자이다. students 나 children, learners 말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적합하지만 kids 라는 말은 부적합해보인다."  그러니까 그 kids 라는 어휘가 아직도 품위있는  어휘로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 kid의 원뜻은 염소새끼 입니다.)

 

자 우리들의 조지 벨로우즈 선수(?)가 그 가난뱅이 뉴욕 빈민가의 이민자의 '애새끼'들을 화폭에 담았다는 것인데요. 정말 42명인지 한번 헤아려 볼까요?

 

 

Forty Two Kids (1907)

42명의 아이들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촬영

 

 

이 작품이 1908년 어느 전시회에 소개가 되었을때 평단의 반응은 싸늘하고 조롱기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뭐 이따위 그림을 그림이라고 그렸냐 이거죠.  가난뱅이 애새끼들이 허술한 강변에서 노는 것이 무슨 그림의 소재가 되는가 씹었을겁니다.  하지만 평단의 싸늘한 반응과는 달리, 이 작품은 곧 개인 콜렉터에게 팔려나갔는데, 이것이 조지 벨로우즈가 최초로 개인 콜렉터에게 판매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워싱턴의 코코란 미술관에 있지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Bill Bryson 의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kid 의 일화중에서 전쟁이후 베이비붐 세대로 성장했던 작가 빌 브라이슨의 회고가 소개됩니다.  그가 과장되게 술회하기를, 전후 베이비붐 세대였던 자신들은, 어딜가나 애가 넘쳐나서,  그가 살던 아이오와 시 변두리의 강변에 가면 수천명의 아이들이 모여서 멱감기를 했다고 하는데요.  물론 조지 벨로우즈 그림속의 아이들은 1907년 8월의 아이들입니다.  베이비붐 세대보다 50년전에 '이민자 붐' 세대의 아이들이지요.

 

이 그림이 제게도 낯설지 않은 이유는, 비록 지구 정반대쪽 대륙에서 성장했지만, 저 역시 60년대 70년대 베이비붐 시대의 일원으로 변두리 가난뱅이 아이로 성장했다는 공통 분모 때문일것입니다.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의 회고로는 '네 오라비나 네가 태어나던 시절에는 어느 집에서나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어느집 여자나 배가 불러 다녔다. 애가 참 많이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 많은 애들이 뭘하고 놀았을까요.  사실 도심에서 성장했지만 저는 어린시절 골목에서 뭘 하고 놀은 기억이 별로 남아있지 않고,  즐겁게 논 기억은 모두 시골집에서였습니다.  여름 한철 시골 개울가에 가면 약속도 필요없이 아이들이 있었고, 우리들은 수영복도 없이 그냥 입은 옷을 벗어던지고 물에 들어가 놀았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저는 초등학교 2학년때까지 옷을 벗고  개울에서 물놀이를 했습니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아직 몰랐다는 것이지요) 여자아이나 남자아이나 그냥 물속으로 뛰어 드는 것으로 각자 부끄러운데를 가렸다고 생각하고 그냥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는 것이지요.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빤쓰라도 입고 물장구를 쳤고, 초등학교 5학년부터는 싸구려 나이롱 수영복을 입고 노는 '문명인' 반열에 들 수 있었지요.

 

제가 가끔 이런 저의 '야만적'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  서울이나 대도시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또래 친구들은 저를 '원시인' 쳐다보듯 바라보며 무슨 외계인이나 거짓말장이를 대하듯 휑한 표정으로 대합니다.  자기네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풍경속에 내가 있었다 이거죠.  하하하. 사람들은 자기가 처한 환경을 '평균적' 환경으로 인지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신의 경험 영역 바깥의 일은 외계의 일처럼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나'역시 피할수 없는 한계죠. 나 역시 그런 눈으로 남을 판단할 것이므로.  조지 벨로우즈가 '애정'을 갖고 변두리 아이들이 벌거벗고 노는 풍경을 그렸을때, 어떤이들은 '이것도 그림이냐'로 반응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럴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지구상에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거죠...

 

 

첨언:  그런데 위의 42명의 아이들 그림이...어쩐지 Thomas Eakins The Swimming Hole(1885) 라는 그림을 연상시킵니다.  토마스 이킨스 (1844-1916)는 미국 사실주의 미술가들의 '대부'쯤되는, 후에 활동하는 사실주의 화가들 (The Eight, Ashcan)에게 가장 영향을 끼쳤던 미국화가라 할 만 합니다.  조지 벨로우즈가 선배 대가인 이킨스의 그림을 염두에 두었는지 아닌지는 알수 없으나, 참 닮았단 말이지요...  ;-)

 

 

 

 

 

변두리의 푸른아침

 

멀리로 고층 건물들이 밀집한 것으로 보아 역시 뉴욕의 강변 풍경으로 보입니다. 역시 강변 부두에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고 누군가 불을 피웠는지 흰 연기도 솟아 오릅니다.  대략 어느 추운 겨울 아침 강변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으니까요. 추우면 웅크리쟎아요. 이들의 하루는 오늘도 고단하게 흐를것입니다.  이들의 곤고한 풍경과는 달리 푸른 색조가 아름답지요? 

 

 

Blue Morning (1909)

푸른 아침

Oil on Canvas

86.3 x 111.7 cm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다리밑 외딴 숙소

 

그림 오른쪽 구조물이나 그 위를 지나는 판으로 보아 이것은 다리(교각)의 일부 같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뉴욕시의 어느 커다란 다리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있고, 그림의 중앙에 6층짜리 건물이 똠방, 대똑하게 서있습니다.  이곳이 그림의 제목이 되는 '외딴 숙소'인것 같습니다.  'tenement' 라는 어휘를 언라인으로 검색해보면 이런 의미가 소개가 됩니다. (http://www.thefreedictionary.com/tenement)

 

1. A building for human habitation, especially one that is rented to tenants.
2. A rundown, low-rental apartment building whose facilities and maintenance barely meet minimum standards.

해석: (1)  세입자 임대용의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
        (2) 극히 기초적인 수준도 안되는 시설을 갖추고 있는  싸구려 아파트 빌딩

 

 

The Lone Tenement (1909)

외딴 숙소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그림 왼편에 사람들이 모여서 불을 쬐고 있는것 같지요?  멀리 강에 은은한 햇살이 비치는데, 다리밑의 사람들은 불가에 모여 서 있습니다. 웅덩이에 보이는 물은 살얼음이 얼었을것 같습니다.  이런 뉴욕의 풍경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해던 Georgia Totto O'Keeffe (November 15, 1887 – March 6, 1986) 가 그렸던 뉴욕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Georgia O'Keeffe
Cityscape with Roses
1932
oil
84 3/8 x 48 1/2 in.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the Georgia O'Keeffe Foundation

 

 

1932년이면 미국의 경제 암흑기 입니다. 그 당시 조지아 오키프가 묘사한 뉴욕은 장미빛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작가의 작업 취향이야 각자 자유이고 조지아 오키프가 매력적인 화가임에는 틀림없으나,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에 '사회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돈많은 사진가 스티글리츠의 사랑속에 경제적인 어려움도 모르고 예술에만 전념했겠지요.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만을 들여다볼때는 그의 작품에 감탄을 하다가도, 그 당시에 혹은 그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하던 작가들과 비교해보면, 어딘가 조지아 오키프의 미술세계가 '공허'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사람'한테 관심이 없었던 사람 같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러한 저의 비판적인 시각은, 사람이나 '세상'에 관심을 가진 저 자신의 취향에서 출발하는 것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냥 문득, 조지 벨로우즈의 뉴욕 풍경 그림을 보다가, 그 속의 가난뱅이 애새끼들이라던가, 빈민들의 풍경이 그려진 그림을 보다가 문득,  조지아오키프의 뉴욕 풍경이 떠오르면서...아하...이들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았던거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National Gallery of Art 에 조지 벨로우즈의 그림이 걸려있는 풍경입니다. 왼쪽부터 '권투선수' '푸른 아침' 그리고 '뉴욕' 그리고 '쓸쓸한 숙소'가 차례차례 보입니다.

 

 

 

초상화들

 

 

다음은 크라이슬러에서 '사냥'한 그의 '피아노 앞의 엠마' 입니다. 엠마는 그의 부인입니다. 뉴욕의 미술학교에서 만났는데 엠마는 그림을 그만두고 피아노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위의 Blue Morning 에 보였던 그 푸른 빛이 이 그림에서 좀더 뚜렷하게 표현됩니다. 아, 조지 벨로우즈는 이런 색감의 푸른빛을 좋아했구나 추측하게 됩니다.

 

 

Emma at the Piano (1914)

피아노 앞의 엠마

Oil on Canvas

94x73 (가로세로)

2009년 11월 29일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의 두 딸중 큰딸인 앤 입니다. 커튼과 허리 부분의 청색과 흰 드레스가 대조를 이루는데요. 역시 Blue Morning 이나 Emma at the Piano 에서 선보인 청색과 흰색의 대조가 이 그림에서도 나타납니다.

 

Anne in White (1920)

흰 드레스의 앤

147x108.9 cm

Oil on Canvas

2009년 11월 7일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는 엠마와 결혼한 이후로 두 딸의 아빠가 되었는데, 아내와 딸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그의 그림의 소재가 도시의 풍경에서 가정적인 것으로 변모합니다. 그래서 43년의 짧은 생에서 그의 후기에는 초상화 작품들이 그려집니다. 물론 그의 초상화 작품은 그의 아내 혹은 그가 살던 마을의 마을 사람들, 이런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서 삽화 작업도 계속했고, 시카고 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습니다.  그는 '맹장'이 터져서 그만 요절을 하고 맙니다.

 

 

2009년 12월 5일 redfox

 

 

그의 마지막 작품들

 

 

Ringside Seat (1924)

맨 앞줄 관람석

2009년 9월 24일 워싱턴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The Picnic (소풍) c. 1924

Oil on Canvas

2010년 1월 23일 볼티모어 미술관 미국화 갤러리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 (1882-1925)는 43세의 나이에 (우리나라식으로 따지면 44세가 되던 해에) 맹장이 터져서 요절한 화가인데요, 위의 두 작품들은 1924년, 그가 죽기 전 1년전쯤에 그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위의 경기장 장면이 좀 뿌옇지요?  제가 사진을 잘 못 찍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흐릿한 등불 아래의 장면을 묘사하듯 노리끼리하게 아슴프레 합니다.  제가 허시혼에 여러차례 들렀는데, 볼때마다 저 작품은 좀 어딘가 노란 안개속에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아래의 '소풍'역시 그가 죽기1년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요, 그림 분위기가 매우 독특합니다.  (그림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보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미술관에 갈때마다 본 편인데요. 그러니까 제가 조지 벨로우즈에 대해서 알기 전에도 이 작품을 알고 있었습니다.  작가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채로 분위기가 특이한 작품으로 기억을 한 거죠. 

 

제목이 '소풍'인데요, 전체적인 풍경이나 분위기는 암울하고, 음침하고, 곧 어디서 천둥 번개가 칠것같은 불안감을 줍니다. 갑자가 돌풍이 불것같기도 하고요. 물빛도 하늘빛도 심상치가 않아요. 구름조차도 예사롭지가 않고요.

 

가운데에는 소녀가 줄넘기를 들고 서 있고요, 그 아래에서 누군가가 마치 절벽에서 올라오는듯 손을 뻗치고 있죠. 낚싯대를 드리운 남자와, 피크닉 보자기를 펼친 여자가 왼편에 있는데, 오른편에는 한 남자가 사지를 벌리고 하늘을 향해 누워있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서 이태전에 아이들과 대화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림이 세기말 적이야. 뭐랄까...암담해... 저 줄넘기를 들고 있는 소녀 말야, 저 줄넘기 이미지는 살바도르 달리도 그린적이 있고... 영원의 상징이라고도 해. 영원은 죽음과도 통한다는 거 알아? 죽음은 영원하쟎아.  줄넘기가 그리는 원, 그 원의 끝없는 회전, 인연의 굴레를 벗어날수 없음을 상징할수도 있고.  하필 줄넘기를 들고 언덕 가장자리에 서있는건 또 뭐니. 불안해보이쟎아.  전체적으로 참 불안해보여."

 

이 그림을 보면 벨로우즈가 즐겨 그렸던 청색 색조와 흰색의 하일라이트도 여전히 보이는데요, 신비로우면서도 스산하죠?  어쩌면 이것이 그가 사랑하는 두 딸과, 아내와 가졌던 인생 최후의 소풍이었는지도 모르죠. 그는 화면 오른쪽에 자신의 주검까지 그렸던 것인지도 몰라요. 그 자신은 그걸 의식하지 못했겠죠.

 

우리는 가끔 그런 얘기 하쟎아요. 어떤 사람이 죽었을때, 그가 죽기전에 나눴던 이야기나 일화들을 떠올리면서, "죽을걸 알고 그랬나?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 뭐 이런 얘기 하죠.  뭐 마치 죽을 사람처럼 유언처럼 몇마디 한 것이 마지막 말이 되기도 하고요.  생명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안대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뿐 안다는거죠.  그래서 죽음을 예견하는 말이나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해요 (그런 설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냥 그런 관점에서 그는 이미 그의 죽음을 예견한 그림을 남긴것이 아니었을까....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다시 만났을때, 그리고 문득 그의 생몰연대와 그림의 제작 년대를 비교해보다가, 문득,  번개치듯 문득,  이런 쓸데없는 상상도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 상상을 하자, 이 그림이 품고 있던 신비로운 세기말적 느낌에 대한 해답을 얻은 기분이 드는겁니다.  그는...다가올...죽음을...그렸나봐...

 

 

2010년 1월 29일 내용 보충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4. 09:58

 

Mrs. Abraham White, Jr. and Daughter Rose c. 1808-1809

Oil on Canvas

64.8 x 76.2 cm

2009년 11월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http://americanart.textcube.com/34  페이지에서 소개해드린대로 Joshua Johnson (조슈아 존슨 1763-1824) 은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태생의 흑백 혼혈 초상화가 입니다.  일설에 따르면 조슈아 존슨은 당대의 미술가였던  Charles Wilson Peale 과 함께 미술 수업을 받았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림속의 주인공은 이 초상화를 그린 직후에 30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을 했다고 합니다.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반쯤 열려있는 책, 그리고 아이의 손에 들려있는 들딸기는 조쥬아 존슨이 즐겨 그리는 스타일이었다고 합니다. 앞서의 페이지에 소개된 그림들보다 나중에 그려진 그림이라서 그런지 그림도 좀더 세련되어 보입니다.

 

크라이슬러 미술관 소장품입니다.

 

 

2009년 12월 3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4. 08:43

http://americanart.textcube.com/184  에드워드 힉스가 꿈꾼 평화의 나라 페이지에서 퀘이커 교도였던 힉스가 즐겨 그린 소재 두가지를 소개한바 있습니다. 한가지는 미국 정착사를 바탕으로 한 '평화의 왕국' 주제이고, 또 한가지는 성서를 바탕으로 한 '노아의 방주' 주제입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190 버지니아 남부 해안도시인 Norfolk 에 위치한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는 에드워드 힉스의 또다른 역사화를 두 점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Washington at the Delaware  c. 1849

델라웨어의 워싱턴

Oil on Canvas

90.2cmx71.1cm (가로 세로)

 

 

이 그림은 훗날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조지 워싱턴이 미국 독립전쟁 당시 영국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역사적인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힉스가 독창적으로 창작했다기 보다는 현재 보스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Thomas Sully 의 Passage of the Delaware (1819)  525.8cm x 372.2cm 를 본떠서 그린 것입니다.

 

Thomas Sully 의 그림

 

 

남의 그림을 그대로 베껴 그린것이 뭐가 대단하다고 박물관에 모셔 놓는가?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에드워드 힉스가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바 없고, 그자신이 순수 예술가라기보다는 마차를 장식하거나 표지판을 잘 만들어내는 '기술자'였고,  혼자서 익힌 그림 재주가 뛰어나서 다른 사람의 그림이 맘에 들때 이를 베껴그리거나 이런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거나 팔면서 살았다는 측면을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를 '풍속화가'로 분류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퀘이커 교도들이 '평화주의자'들이므로 전쟁을 거부하고, 그래서 병역도 거부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열렬한 퀘이커 교도였던 에드워드 힉스가 워싱턴의 역사적인 '전쟁'을 즐겨 그렸다고 하는 것이지요.  에드워드 힉스는 워싱턴과 독립군을 '신의 대리인'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의 애국심이 그의 종교관에도 영향을 끼친 것인데,  '호국불교' 정신하고도 비슷하군요 =) .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776   c.1840-1845

1776년 독립선언

Oil on Canvas

74.3cm x 65.4 cm (가로세로)

 

 

1776년 독립선언을 묘사한 이 그림의 이마에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776 이라고 새겨진 것이 보입니다.  힉스가 '표시판' 만드는 기술자였다는 대목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에드워드 힉스를 '순수 미술'의 차원에서 보기는 힘들고, 오히려 '생활속의 장인'의 측면에서 해석할때 그의 정체성에 생생하게 다가갈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때로 저는 이렇게 서툰 환쟁이들을 좋아합니다. 우리 엄마의 그림과 많이 닮았거든요.)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1. 26. 06:39

Edward Hicks 관련 페이지를 두개를 열었습니다.

 

1. http://americanart.textcube.com/184

2. http://americanart.textcube.com/185

 

해당 페이지 관련 간단한 '확인' 퀴즈 입니다. (앞으로 어떤 주제의 글을 한꼭지 마치면 퀴즈 페이지를 하나 만들기로 했습니다 = )  )

 

 

1. Edward Hicks 가 즐겨그린 주제가 두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가)

   나)

 

 

2. Edward Hicks가 속했던 종교집단은 무엇인가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

 

 

3. Edward Hicks 의 그림속에 등장하는 동물 이름 다섯가지를 적어보세요

 

  1. _____________________

  2. _____________________

  3. _____________________

  4. _____________________

  5. _____________________

 

 

 4. Edward Hicks 가 남긴 그림들중 생각나는 작품 제목이 있습니까? 제목이 무엇인가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나요?

 

  1. 제목: ______________________

  2. 내용: ______________________

 

 

 

 

수고하셨습니다. 정답은 해당 페이지에서 찾아 보셔요.  =)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1. 22. 04:05

http://americanart.textcube.com/149  이전 페이지에서 디트로이트 벽화를 그린 디에고 리베라에 대하여 간단히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이 페이지에서는 디트로이트 벽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는 이 벽화가 있는 곳은 'Rivera Hall'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벽화가 그려지기 전 원래 이곳은 내부 정원 (가든 코트 Garden Court)이었습니다.  미국의 큼직한 미술관에 가면 대개 크고작은 이런 형식의 '정원'이 있습니다.  본래 정원이었던 곳인데, 미술관장인 발렌티노가 '벽화'를 설치한다고 했을때 건물 설계자는 자신의 전체적인 건물 구상을 망쳐놓는다고 반대를 하기도 했답니다.  그렇지만 발렌티노의 벽화에 대한 의욕은 완고했고, 그는 어떠한 반대나 비난에도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지요.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벽화의 일부, 나무의 뿌리 부분 중심에 태아가 웅크리고 있는듯한 모습이 보입니다.  이것이 4면 벽화의 동쪽면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4면 벽화중에서 동쪽과 서쪽에는 다른 홀로 이어지는 '출입구'가 있으므로 온전한 큰 벽이 아닙니다.  남쪽과 서쪽벽은 온전한 벽입니다.  애초에 발렌티노가 리베라에게 주문한 것은 남쪽, 북쪽의 전면이었습니다.  그런데 리베라가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동쪽, 서쪽 벽 까지도 그림으로 채우고 싶어했고,  후원자였던 포드 (헨리 포드의 아들)도 이를 적극 지지하면서 4면 전체의 벽화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사진은 한번 클릭하시면 새창이 열리고, 그 상태에서 확장 표시를 클릭하시면 원래의 큰 사진이 열립니다.

 

 

벽화속에 내가 있다!

 

출입구로 들어가면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입니다. 마주 보이는 벽이 동벽. 오른쪽이 남벽, 왼쪽은 북벽.  천장부분에는 천창이 있어서 자연조명 역할을 합니다.  천장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리베라는 포드 자동차 공장을 그의 벽화의 주요 소재로 사용했습니다.  당시 (1932년) 디트로이트 지역의 주요 산업은 자동차, 의약, 화학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포드가에서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그의 벽화 작업에도 적극적으로 재정적 지원을 해 줬고, 리베라가 그림의 소재가 될만한 산업의 실재 현장을 확인해보고 싶어 했을때 이를 지원해준이도 포드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 작업이 진행되는 11개월간, 이 작업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의 여론이 만만치 않았는데,  종교적 신성모독과 관련된 비난도 있었고, 사회주의 사상이 엿보이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었고, 또한  디트로이트 미술관의 벽화를 왜 '포드' 공장으로 채우는가에 대한 불평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에대한 미술관장 발렌티노의 변론이 적절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도 관심도 없었고, 도와주지도 않았지 않은가. 오직 포드만 이 작업에 관심을 갖고 도와준것이 아닌가? 공장의 문을 열어 보여준것도 포드뿐이지 않았는가?  포드공장이 '주인공'으로 그려진 것에 대한 비난은 이런 논리로 잠재울수 있었다고 하는데,  단순히 짐작컨대 (1) 포드사의 재력이 다른 불만을 무마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대단했을 것 같고 (2) 포드 자동차관련 회사에 재직하는 디트로이트 시의 시민의 인구가 압도적이라서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랬을 것 같습니다.

 

리베라는 밑그림 작업을 한달가까이 했는데, 전문 사진사와 다니며 포드 자동차를 비롯한 디트로이트 지역의 다른 공장들의 작업 광경을 세밀하게 사진에 담았다고 합니다.  사진도 세밀하게 찍고, 그의 예술가적인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공장의 분위기도 관찰하고, 거기에 그의 맑시즘까지 가세하여 노동자들이 힘차게 일하는 광경을 생생하게 전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자동차 생산의 전 공정이 남쪽, 북쪽 벽화에 상세하게 실려있는데, 이 공정은 현장 실무자, 그리고 전문가들의 안목으로 봐도 정확하고, 사실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리베라는 대충 상상해서 아무렇게나 그린것이 아니라, 사실에 입각해서, 한치의 틈도 보이지 않고 성실하게 현장을 벽에 옮겨 담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리베라가 이 벽화 제작을 할 당시는 미국은 '대 공황'의 초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공황상태에서도 포드자동차 관련 공장에서 일하는 연인원이 십만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리베라는 그의 그림속에 경제대공황으로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보다는,  공장에서 활기차게 일하는 노동자들을 담는 것에 주력을 했지요. 그리고 단지 산업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 농경에서 산업화로 이어지고 과학사회로 나아가는 인류의 역사를 모두 이 벽화에 담아내려 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에 천지창조의 대 서사시를 담아냈다면, 리베라는 디트로이트 벽화에 인류 문명의 발전사를 담아 내려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벽화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을때 디트로이트의 시민들은 벽화속의 주인공들이 자기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공장노동자들이 주인공인, 민중인 주인공인 프레스코화가 탄생한 것이지요.

 

 

 

동쪽벽화

 

동쪽 벽화의 상단에는 오른쪽에 과일을 안고 있는 여인, 왼쪽에 곡물을 감고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여인들의 아랫쪽에는 미시간주에서 생산과는 과일과 채소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호박, 옥수수, 포도, 토마토, 배추, 가지, 버섯, 감자등이 소담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두 여인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왼쪽의 여인은 유럽계의 금발여인이고, 왼쪽은 남미계의 검은 머리 여인입니다. 몸집은 둥글둥글하니, 리베라가 즐겨그리는 풍만한 형태인데 풍요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중앙의 '태아' 가 그려진 그림을 살펴보면 태아를 중심으로 나무 뿌리들이 펼쳐져 있는데 그 뿌리들은 여러겹의 지층들 위에 존재합니다. 화석이 보이기도 하고요. 오래된 지구의 세월을 느끼게 해줍니다. 인간의 생명이 이렇게 지구와 자연속에 잉태되고 보호받고 성장한다는 자연친화적인 리베라의 생명관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태아 혹은 영아의 그림은 디에고와 그의 아내 프리다 칼로의 개인사 때문에 더욱 유명해집니다.  이들 부부가 디트로이트에 11개월간 머물며 벽화 제작을 하던 당시,  멕시코 출신의 칼로는 원래 건강도 안좋은 상태에서 추운 지방에 있자니 아주 괴로웠을겁니다.  이곳에서 칼로는 유산을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불구의 몸이었는데 어렵게 아이를 갖게 되었다가 유산이 되니 그 심정이 무척 괴로웠을겁니다.  디에고 리베라는 그들이 잃어버린 아이를 이 동벽에 그려서 영원히 기억하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디트로이트에서 잃어버린 아이이니까, 디트로이트에 영원히 남기고 싶었을것 같습니다.

 

 

 

 

 

 

 

 

 

 

서쪽벽화

 

돌아서서, 좀전에 지나쳐온 입구쪽 벽을 보면 서쪽벽이 보입니다.  서쪽을 향해서 섰을때 왼쪽이 남쪽, 오른쪽이 북쪽 벽입니다.

 

서쪽 벽화에는 여덟장의 그림에 항공, 항만, 에너지 관련 산업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리베라는 이 산업들의 '평화적'인 면과 '파괴적'인 면을 대비시키려 했습니다.

 

 

 

 

 

 

 

 

북쪽벽화

 

서쪽을 향한 상태에서 왼편 벽이 북쪽입니다. 북쪽 벽화 입니다. 남쪽벽화와 북쪽 벽화 상단에는 각각 두명의 거대한 인물과 거대한 손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랫쪽 큰 벽화에는 공장의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이 손들은 각기 '광석'을 쥐고 있으며 이 광물들이 나오는 '지층'에 대한 묘사가 바로 아래의 판에 그려져 있습니다.

 

 

 

이 북쪽벽화 오른편 구석쪽에 기묘한 그림이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 기독교의 예수 탄생 장면 같은데, 이 꼬마가 의학 연구실에서 주사를 맞고 있는듯한 광경입니다. 바로 아래에는 체내의 인간 태아의 생장 환경이 그려져 있습니다. 과학 혹은 생명과학이 인간의 생명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그림 때문에 당시 기독교계의 반발이 심했다고 전해집니다. 신성모독이라는 것이겠지요.  어떤 사안에 대하여 '신성모독'을 외치는 집단은 어디에나, 어떤 시기에나 있어왔습니다.  이들의 반발에 굴하지 않은 디트로이트 미술관측에 경의를 표합니다.

 

 

 

북쪽벽화의 왼쪽구석은 독가스 폭탄을 만들어내는 공장의 광경입니다.  과학기술이 생명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발전을 하기도 하지만 동일한 지식이 생명 살상의 방향으로 나아갈수도 있음을 고발하거나 경계하는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북쪽 벽화 중앙의 가장 큰 그림은 1932년 포드사의 자동차 공장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제작 공정은 그림의 왼편에서 시작하여 차례차례 다음단계에 대한 묘사고 진행되고, 맨 오른쪽에는 노동자들이 점심 식사를 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저야 '기계'쪽에 문외한이고 '공장'에서 일을 해본 경험이 없어서 모르지만, 자동차 공장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 그림 앞에서 리베라의 정확성에 감탄을 한다고 전해집니다.  그만큼 그는 공장의 전 공정을 세밀히 관찰했고,  사진 촬영도 세심하게 했고, 사실에 입각하여 그림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자동차 제작 관련 전문가가 이 그림을 본다면 저와는 다른 시각으로 관찰할것이고, 아마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줄지도 모르겠습니다.)

 

북쪽벽화에는 리베라 자신이 '까메오'로 출연을 하기도 했고요.  얼굴이 드러난 사람들중에 그의 조수라던가 실제 공장 노동자등 당시 리베라의 작업을 돕던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남쪽벽화

 

 

북쪽과 마찬가지로, 남쪽 벽화의 상단에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연상케하는 두명의 거대한 사람이 그려져 있고, 이들의 중앙에 역시 거대한 손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먹을 꽉 쥐고 있거나, 무엇을 잡을듯 벌리과 있거나 혹은 광물을 쥐고 있는 손들입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Space Odyssey 라는 1968년 영화 (http://www.imdb.com/title/tt0062622/)를 보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제목의 음악과 함께 그 왜 침팬지 같이 생긴 원시 인류가 뼈다귀를 갖고 놀다가 문득, '문득' 이를 '도구'로 사용하는, 어마어마한 인류의 도약 장면이 나오쟎아요.  아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북소리처럼 가슴이 쿵쿵 뛰는데요...이 손들을 보니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그 장면이 떠오르더라구요.  (아 생각난김에 그 영화나 빌려다 볼까....또다시 산만해지는....)  물론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다'라거나 '도구'사용이 인류 문명의 시초라고 보는 시각은 이미 있어왔지만,  리베라의 벽화에서 그 '손'에 대한 해석은 시각적인 '절정'에 달했다고 봅니다.  이만큼 사람의 '손'을 위대하게 표현한 작가가 또 있었을까요? (과문한 탓인지 저로서는 다른 작품이나 작가를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남쪽 벽화 상단 왼쪽 구석에는 '제약'관련 그림이 있습니다.  실제로 디트로이트 시에 있는 어느 제약회사의 공정이 묘사된 것이라고 합니다.  오른쪽 구석에는 화학제품 공장이 그려져있습니다. 독성이 강한 화학물질 때문인지 보호복을 입고 얼굴을 모두 가리고 일은 하는 노동자도 보입니다.

 

 

 

1933년 3월 21일 남쪽 벽화가 완성되어 공개되었을때, 이 그림에 묘사된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은 벽화에 그려진 자신들을 발견하고 놀라워 했습니다. 누구도 이 미술관의 벽화속에서 공장노동자들이 '주인공'이 될거라고는 상상을 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공장노동자로 살아가는 지역 주민들은 환호했고,  종교나 사상적으로 이 벽화들을 문제시 한 집단은 심한 반박에 나섰습니다. 1933년 3월 26일에는 일만 (10,000)명의 시민들이 이 벽화를 보기위해 몰려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이 벽화가 제작되고 있던 당시의 디트로이트의 분위기는 암담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1933년 1월부터 3월 사이에 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자동차 산업이 정지 상태였고, 2월에는 디트로이트의 금융계가 몰락했습니다. 미 전역이 대공황으로 접어드는 것과 맞물린 현상이었습니다.  이런 암담함 속에서 노동자를 중심에 세운 이 벽화는 당시의 노동자들에게는 작은 위안 혹은 희망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남쪽 벽화의 공장 노동자들 뒷편에 구경하는 무리들이 보입니다. 노동자복이 아닌 신사복을 입은 남자들,  정장 차림을 한 여성들이 보입니다.  그중에 두 여성은 가슴에 큼지막한 십자가 목걸이가 매달려있고, 손으로 네모난 물체를 안고 있지요.  손지갑이거나 성경책이거나...  이 귀부인들에 대한 리베라의 시각은 썩 유쾌해보이지 않습니다. 이 공장의 분위기와 안 어울리지요.  저는 이들을 '노동과 동떨어진 존재들'로 파악하는 편입니다. 

 

 

 

 

 

1933년 3월, 디트로이트 벽화를 완성한 리베라는 뉴욕의 록펠러 센터 벽화를 위해 디트로이트시를 떠나는데, 리베라가 록펠러 센터에 그린 벽화는 세상 빛을 보지도 못한채 완성직후 폐기되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리베라가 자신의 사상적 색채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완강히 버텼고 (벽화에 그린 레닌을 절대 지울수 없다고 우겼고), 록펠러가문으로서는 뉴욕 한복판에 소련 지도자의 초상이 그려진 벽화를 모셔둘수는 없는 입장이었으니까요.  (그 십수년후에 몰아친 매카시즘이라는 빨갱이잡기 놀이의 폭풍을 회상해본다면 록펠러가는 현명했던 것이지요. 하하하.)  Bill Bryson 이 그의 성장기 이야기를 담은 책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bolt Kid (http://americanart.textcube.com/166 )에도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당시, 뭐든 금기시되는것, 안좋은것, 이상한것은 '빨갱이'라는 말로 대치될 정도로, 엉뚱하게 사람 때려 잡을때 쓰던 말이 '빨갱이(communist)'라는 내용이 아주 코믹하게 나옵니다.  이를 미연에 방지한 록펠러가문이 역시 앞을 내다보는 눈이 있었다고 봐야지요.  (그래서 결국 우리는 어마어마한 리베라의 벽화를 볼 기회를 영원히 잃고 말았지만요.)   그런데 이 벽화보다 록펠러 센터의 벽화가 더 규모가 큰것이었다고 하는데, 얼마나 굉장한 그림이 그려졌을지,  무엇을 형상화 했을지, 그 묘사는 얼마나 사실적이고 치밀했을지 도대체 상상이 안가는데요.  아쉽군요. 파괴하기전에 상세한 화집이라도 ....남겨두시지... (웹이나 책을 뒤지면 부분적인 밑그림들이 나오긴 합니다.)

 

그리하여. 이 디트로이트 리베라 벽화가 미국에서 우리가 볼수 있는 유일한 리베라의 벽화라고 합니다.  디트로이트를 지나치면서 한나절 시간이 되신다면 이곳을 구경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RedFox  November 2009  (2009년 10월 31일에 방문하고, 11월 21일에 글 정리를 마치다.)

 

 

 

참고문헌:

 

 

 1. Diego Rivera: The Detroit Industry Murals, The Detroit Institute of Arts, 2006. Scala Publishers Ltd.

 2.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Frances K. Pohl, Thames & Hudson

 

 

관련 페이지:

 

 1. http://americanart.textcube.com/94  Detroit Institute of Art 방문기

 2. http://americanart.textcube.com/149 Diego Rivera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09. 11. 13. 03:43

피츠버그에는 피츠버그 대학교와 카네기 멜론 대학이 있습니다. 이 두 대학의 건물들이 서로 엉켜있는 시내 중심부에 카네기 미술관이 있습니다.

 

 

미술관 공식 홈페이지: http://www.cmoa.org/

 

 

피츠버그에는 네가지의 카네기 박물관이 있습니다.

 1. 카네기 미술관

 2. 카네기 자연사박물관

 3. 앤디 워홀 미술관

 4. 카네기 과학관

 

http://en.wikipedia.org/wiki/Carnegie_Museums_of_Pittsburgh

 

 

이 네가지 카네기 박물관중에서 카네기 미술관과 카네기 자연사 박물관은 입장료 (성인 15달러)를 내면 두군데 모두 관람이 가능합니다.  두가지 박물관이 서로 동일한 건물동에 있어서 미술관과 자연사 박물관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곳에 두가지 박물관이 있다고 하면 어쩐지 모두 협소하고 작을것이라는 인상을 주는데, 막상 가보면 두가지 박물관 모두 규모가 크고 전시물들이 매우 값진 것들입니다.

 

 

카네기 미술관은 1896년 (한국에 강철왕 카네기로 알려진) Andrew Carnegie 가 설립 한 이래,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장을 하고 있는 피츠버그 소재의 미술관입니다. 아래 사진은 카네기 미술관 건물을 저녁에 찍은 것입니다.  일단 전시회장을 둘러보고 폐관 시간이 되어 나와서 찍은 사진이라 주변이 어둡습니다.

 

 

 

 

통유리 벽 낭에 (분수 너머에) 알록달록한 초상화 두점이 보입니다. 알록달록한 색깔가지고 장난을 치고, 동일한 인물의 초상화 두장이 나란히 걸려있는 것을 봐서, 작가가 누구인지 짐작이 가시겠지요?  (이것은 퀴즈로 남겨 둘까요?)

 

 

 

 

 

 

 

 

 

사실 카네기 뮤지엄에 도착하기 전까지, 이 박물관의 '규모'가 어떠할지 전혀 짐작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어딘가를 찾아 갈때에는 언라인으로 사전에 정보를 많이 찾아보고 짐작을 하고 가는 편인데, 이 박물관이 홈페이지에 제공한 정보는 어딘가 허술해보였습니다.  전시관 종류가 어떠한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페이지도 없었고요.  그래서 좀 '만만하게' 보고 갔었던 것인데, 일단 박물관에 가보니 '기대이상'으로 잘 짜여진 전시장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박물관이 제대로 홍보가 안되었구나. 홈페이지에 문제 있다' 이것이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이 미술관에는 세계 여러나라의 유수의 문화재들 예술작품들이 널려있습니다.  그리스의 조각품들도 있고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명품들도 많이 있습니다. 단 제가 '미국미술' 을 연구중이므로 다른 전시장들은 그냥 쓱쓱 지나치고 주로 '미국 회화' 쪽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편입니다.

 

 

이 미술관에서 아쉬웠던 점은, 아래 사진에 보이는 근대 유럽과 미국의 회화 전시장의 진열상태였습니다.  사실 이 벽에 널려있는 작품들이 간단한 작품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닥다닥 붙여놓은 데다가, 전시장 입구에 그냥 이 작품들의 작가와 제목등 간단한 정보가 들어있는 안내문 폴더 하나를 비치해 놓았습니다.  작품의 제목이나 작가가 궁금하면 그 폴더를 들여다보고 번호와 대조해서 확인을 하라는 것입니다.  폴더는 딱 한권 뿐이었습니다.  만약에 내가 그 폴더를 들고 돌아다니면서 찬찬히 작품감상을 한다면, 다른 사람도 그 폴더의 정보가 궁금하다면, 그는 내가 감상을 마칠때까지 기다려야 할 처지입니다.  이 명화들을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늘어놓고 정보도 제대로 제공을 안하다니! 

 

 

 

 

 

이 그림 무더기 속에 있었던 장 프랑소아 밀레의 '씨뿌리는 사나이' 그림입니다.  밀레의 그림은 대개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지요?  저도 어릴때 우리 시골집 안방 벽에 밀레의 '저녁종' 액자가 걸려있었서 아기때부터 그것을 보면서 성장했습니다. 밀레의 저녁종 그림은 내가 매일 먹는 엄마의 젖이나 할어니가 씹어서 먹이던 밥처럼 그렇게 내 삶의 일부였지요.  아마 우리들은 대개 이와 비슷하게 밀레를 만났을것 같습니다. 이발소나 식당이나 혹은 친척집 마루에 걸려있던 액자나...

 

장 프랑소와 밀레를 '성자'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의 그림은 어딘가 종교적인 느낌이 들지요. 종교가 어떠하건 관계없이 그의 그림에서는 삶의 엄숙함이 아름다운 종소리처럼 울려퍼집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가장 사랑하던 화가가 '밀레'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고흐는 공개적으로, 열광적으로 밀레를 칭송했습니다.  고흐는 이 씨뿌리는 사나이와 흡사한 구도로 그의 작품을 그린적이 있습니다.  밀레와 고흐의 화집을 들여다보면 고흐가 밀레의 그림을 자기식으로 재 창조해 낸 작품이 몇가지가 발견됩니다. 밀레와 고흐. 화풍은 달라도 서로 영혼이 통했던 작가들이었지요.

 

 

 

한가롭고 여유있는 전시장 내부입니다. 주말 오후에도 이정도 한가하다는 얘기는, 이곳이 늘 이정도로 한가할 거란 뜻이지요.

 

 

 

 

 

 

 

 

 

 

 

미술관 현관에 마침 가을이라서 그런지 Alex Katz 의1999년 작품 Autumn 이 걸려있었습니다. Alex Katz 는 (나중에 소개드리겠지만) 잭슨 폴락의 영향을 받다가 후에 자신만의 독특한 미술세계를 이룩한 현대 화가입니다. 이 그림 앞에 서면 내가 가을 속에 들어있다는 기분이 듭니다. 행복한 가을. (색깔치료 받는거지요).

 

 

 

미술관은 카네기 자연사 박물관으로도 연결됩니다. 공룡의 화석도 보이고, 펜실베니아의 광물을 소개하는 전시장도 있고, 고생물학 자료가 많이 있습니다. (미술 블로그이니까 자연사박물관 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만...)

 

 

 

 

이 미술관을 둘어본 후에 앤드루 카네기에 대해서 자료를 좀 살펴보았습니다.  뉴욕에 가면 카네기 홀이 있지요.  그 카네기가 이 카네기입니다. =).  피츠버그에 카네기 멜론 대학이 있습니다. 역시 카네기 입니다.  피츠버그에 카네기 박물관 소속 전시장이 네가지가 됩니다. 규모도 크고 알찹니다. 모두 그 대단하다는 재벌 '강철왕' 카네기가가 기증하고 후원한 것들입니다.  그러면 이 카네기 아저씨가 참 훌륭하고 대단한 분인것 같습니다.  워싱턴 디씨에는 '국립 대성당 (National Cathedral)'이 있습니다. 원래는 '성공회 Episcopal = Anglican Church' 소속이긴 하지만, 종교나 이념에 상관없이 누구나 들어와서 각자의 방식으로 기도하도록 공개된 곳입니다.  그런데 이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래스중에는  앤드루 카네기씨를 기념하는 작품도 있습니다.  정작 카네기는 '무신론자'였지만요.  :)  (카네기가 자연사 박물관을 후원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대단한 자선가, 박애주의자에 대해서 제가 새삼스럽게 삐딱선을 타고 삐딱하게 들여다 볼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력을 살피다보면, 그가 피츠버그에서 한 행적중에 매우 불행한 사태가 있었습니다.  그는 제철소로 급 성장을 했고, 피츠버그의 노동자들 대부분이 카네기 소유의 공장에서 일을 하고 살아갔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들 사이에서 노동운동이 일어났을때, 카네기는 '노조 탄압' 혹은 '노조 소탕' 쪽으로 가닥을 잡아갑니다. 노동자들은 노동운동 결과 오히려 임금이 삭감되거나 일자리를 잃거나,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아주 무시무시하고 철통같은 노조 탄압이 자행된 결과 였습니다. 카네기는 노조를 물리치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의 성공여부와 상관없이 당시 이 재벌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냉소'와 '멸시'로 가득찼다고 합니다. 그는 한때 피츠버그에서 제대로 얼굴도 들지 못하고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후 그는 자선가로 변신합니다. 막대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데 노력합니다. 그는 국립 대성당에서 그를 기념하는 스테인드 글래스를 만들정도로 '천사'같이 삶을 마감합니다.  그가 '한때의 실수'를 이런식으로 개선한 것일까요? 오늘날 카네기를 비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양상을 들여다보면서 저는 한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는 오늘날 오바마 정권에 대한 공화당의 비판, 혹은 중산층 미국인들이 오바마를 보는 시각과도 연결됩니다.

 

오바마가 의료개혁을 하고, 전국민 의료보험 정책을 시행하고 싶어하는데, 공화당과 미국 시민들은 이를 '사회주의 정책'이라고 비난합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이 세금을 조금 더 내는것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사회주의는 한국에서 빨갱이 라는 말처럼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한국에서 빨갱이 소리 들으면 삼족이 위험에 빠지듯, 미국에서는 아직도 사회주의가  반기독교 정신처럼 지옥에 빠질 개념입니다.)  미국 시민들은 '부의 재 분배'에 대하여 적대적입니다.  이들은 그 대신 '부의 사회환원'에 박수를 칩니다.

 

'부의 재분배'와 '부의 사회 환원'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부자가 세금을 많이 내고,  가난한 사람이 세금을 조금 내는 것은 --> 부의 재분배 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돈 많이 벌었는데, 왜 내가 일도 안해서 가난뱅이로 사는 저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위해 세금을 더 내야 한단 말인가?' 이런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극단적인 예입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사회 기금이나 자선행사에 돈을 왕창 기부하는것은 ==> 부의 사회 환원 입니다. 미국은 이런식의 사회 환원에 박수와 찬사를 보냅니다.

 

정리:

 

 그들의 개념  Socialism  Capitalism
 그들의 이해  수익(부)의 재분배  수익(부)의 사회환원  
 그들의 반응

 "빨갱이!"

 

오바마는 빨갱이다!

사회주의를 외치는 놈들은 죄다 빨갱이다!

 

 "자선가!"

훌륭하신 기업인!

사회 환원 하겠다는데 탈세좀 하면 어때?

재산좀 세습하면 어때? (탈세좀 봐주면 안되니?)

 

 

 

카네기는 어떻게 했는가? 제 단견이지만, 카네기는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근사하게 돈을 사회에 환원하고 죽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 위대합니다. 내가 상상할수도 없는 많은 돈을 사회에 주고 돌아갔으니까.  하지만 한번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카네기가 노동자를 탄압하는 대신에 그가 공장에서 벌어들인 돈을 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복지와 교육에 풀었다면? 노동자들에게 월급을 더 많이 주고 그들의 주거환경 개선에 좀더 힘썼다면? 그랬다면?  당시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윤택했겠지요. 그들은 카네기를 그들의 진정한 친구로 사랑하고 존경했겠지요.

 

하지만 카네기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까지 해가면서 그의 부를 키웠고,  그리고 폼나고 근사하게 학교 세우고 박물관 세우고 각종 자선기금 펑펑 내 놓은 후에 천사처럼 천국으로 향했습니다. 돈 참 폼나게 잘 썼습니다.  광나고 폼나는 일에 잘 썼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칭송을 하기도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카네기는 부의 재분배 대신에 부의 사회 환원을 선택한 머리 좋은 사람입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는것을 우리는 비난할수 없습니다.  하지만 정승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쓸줄 아는 사람이 더 훌륭한 사람일것입니다. 카네기는 개와 정승의 조합입니다.  (제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나마 정승처럼 써줘서 땡큐를 날립니다. 덕분에 저같은 사람도 박물관에 가서 좋은 것을 많이 볼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뒤에 피츠버그 노동자들의 고혈이 있음도 잊어서는 안될것입니다.

 

자기가 집에서 부리는 '일꾼'들에게는 '인색'하게 굴면서 밖에 돌아다니며 자선행사에 열중한다면?  하지만 세상은 이런 자선가들에게도 경의를 표합니다. (일단 내가 그 희생자가 아니라면 억울할 이유가 없으니까.)  "넌 왜 하필 그런것을 들여다보는거니 빨갱이처럼?"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할말이 없습니다. 그냥 궁금해진다는거지요. 그저 궁금할 뿐입니다.

 

 

 

 

2009년 11월 7일 토요일 방문.

 

Posted by Lee Eunmee
Realism/Ashcan School2009. 10. 24. 03:21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이전페이지,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에 대한 글에 이어, 해당 페이지에서 잠깐 소개한 The Eight (8인회)의 작품 성향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페이지를 하나 만들어봅니다. 2009년 10월 4일 (한국, 추석날)에 워싱턴 Corcoran Gallery of Art http://americanart.textcube.com/97  에 갔을때 마침 The Eight 화가들 작품이 한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어서 작품 사진들을 카메라에 담아 올수 있었지요.  분명 The Eight 을 타이틀로 한 전시이긴 했으나 8인회 멤버중에서 여섯명의 작품이 있었고, 그리고 역시 이들의 후배격인 다른 두명의 화가가 추가 되었습니다. 모두 8인의 그림이 소개가 되긴 했으나 그 중 두명은 8인회 소속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들이 20세기 초반에 Social Realist 사회 사실주의로서 활동할 당시의 그림 분위기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추가된 두명의 그림이 오히려 더욱 효과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코코란에서 찍어온 사진들을 나열하면서 간단히 스케치 하겠습니다.

 

일단, 기획전 안내판입니다. The Eight (8인회)와 The 14th Street School (14번가파)로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8인회 회원중 코코란이 소장하여 전시한 작품은 Luks 와 Shinn 을 제외한 여섯명의 그림들입니다.

 

 1. William Glackens (1870-1938)  윌리암 글래큰스

 2. Robert Henri (1865-1929) 로버트 헨라이 http://americanart.textcube.com/197

 3. Goerge Luks (1867-1933) 조지 럭스 (x) http://americanart.textcube.com/278

 4. Everett Shinn (1876-1953) 이브릿 쉰 (x) http://americanart.textcube.com/272

 5. John French Sloan (1871-1951) 존 프렌치 슬로언 http://americanart.textcube.com/201

 6. Arthur B. Davies (1862-1928) 아서 데이비스 http://americanart.textcube.com/279

 7. Ernest Lawson (1873-1939) 어니스트 로슨 http://americanart.textcube.com/281

 8. Maurice Prendergast (1859-1924) 모리스 프렌더개스트  http://americanart.textcube.com/205

 

14번가파의 작가들중

 1. Reginald Marsh (1898-1954)  레기날드 마시

 2. Raphael Soyer (1899-1987) 라파엘 소여

의 작품이 전시가 되었습니다.

 

(사진은 클릭하시면 커집니다)

 

전시장 풍경입니다.

 

 

 

안내판입니다.

 

 

 

위에 명시된 순서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1. William Glackens (1870-1938)  윌리암 글래큰스

 

 

 

 

2. Robert Henri (1865-1929) 로버트 헨라이  http://americanart.textcube.com/197

 

 

3. Goerge Luks (1867-1933) 조지 럭스  (x)  http://americanart.textcube.com/278

4. Everett Shinn (1876-1953) 이브릿 쉰  (x) http://americanart.textcube.com/272

 

 

5. John French Sloan (1871-1951) 존 프렌치 슬로언 http://americanart.textcube.com/201

 

 

6. Arthur B. Davies (1862-1928) 아서 데이비스 http://americanart.textcube.com/279

 

 

 

7. Ernest Lawson (1873-1939) 어니스트 로슨

 

 

 

 

8. Maurice Prendergast (1859-1924) 모리스 프렌더개스트 http://americanart.textcube.com/205

 

 

 

14번가화파

 

1. Reginald Marsh (1898-1954)  레기날드 마시

 

 

 

 

2. Raphael Soyer (1899-1987) 라파엘 소여

 

 

 

 

제가 일찌감치 퇴근을 해야 하는 이유로 '제목'과 같은 세부 사항은 추후에 추가하여 페이지를 완성시키겠습니다만,  얼핏 보기에 '무엇이 사회적 사실주의'라는거냐?  이 그림에서 도시, 빈민, 혹은 사회주의적 비판적 시선을 가진 그림이 몇점이나 되느냐?  이런것을 소위 사회적 사실주의 그림이라고 하는거냐?  이런 의문이 들수도 있을겁니다.  보따리 싸가지고 오피스를 나가기 전에,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 기획전 자체가 '사회적 사실주의'에 촛점을 맞춘것이기보다는 코코란이 소장하고 있는 The Eight 의 화가들, 14번가화가들의 '작품'을 내 건 것입니다. 그 작가들이 그린 그림중에 코코란은 이런 그림들을 갖고 있다는 뜻이지요.   레기날드 마시가 특히 뉴욕 뒷골목 빈민가 풍경을 암울한 색조로 잘 표현해 냈지요.  헨라이가 그린 아메리카 인디언 원주민의 초상도 '초상화'로서 크게 주목할 것은 없지만, 그가 '사라져가는 힘없는 사람'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도 들여다 볼 만한 대목입니다.  소여가 그린 터미널의 모습은, 지구 어디에서도 발견될 만한 대중들의 삶의 모습이지요.  이 그림 앞에 서면, "왜 터미널은 어딜가나 다 비슷한 풍경일까?"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딱딱한 의자, 어딘가 불편하고 낯선 대합실...외딴 시외버스 터미널이건, 기차역이건, 유명한 국제선 공항이건...

 

앞 페이지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사회 사실주의 작가군에 이름이 올랐다고 해도, 그 작가들의 그림이 모두 사회 사실주의적 그림은 아닙니다. 그들의 삶의 일정시간에 사회성 강한 그림을 그린 시절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이 페이지에서는 사회사실주의 화가군에 포함되는 '화가들'의 실제 그림을 잠깐 소개한 것으로 정리하고,  다음 페이지부터 주요 작가별로 그림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페이지의 세부 정보도 나중에 채우기로 하겠습니다...즐거운 주말....)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0. 23. 07:35

 

 

 

 

 

http://americanart.textcube.com/118 미국 사실주의 계보정리 페이지에서 대략  미국 회화에서의 사실주의를  (1) '사회적 사실주의'와 (2) '지역주의적 사실주의'의 두가지 부류로 나눠서 도표를 그려본 바 있습니다.  미국 회화에서 사회적사실주의 (social realism)를 논할때, 반드시 거론되는 사람이나 단체들로는 Henri (헨라이)를 중심으로 한 "Ash Can (쓰레기통)" 화가들, "The Eight (8인회)"등이 반드시 떠오르게 되는데,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Ash Can 이나 The Eight 멤버들이 조금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미국 사실주의 화풍을 논할때 이 두 그룹은 하나의 동일한 그룹으로 간단히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동일한 그룹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비슷한 구성원들이 비슷한 사회적 안목을 가지고 사회성 있는 작품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Ash Can 학파와 The Eight 구성원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화풍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겠습니다. Ashcan 혹은 Ash Can 이라고 알려진 이 미술그룹을 우리는 Ashcan School 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Robert Henri (로버트 헨라이)를 중심으로 그와 함께 그림 작업을 하거나, 혹은 그에게서 미술 수업을 들었던 사람들이 헨라이의 영향으로 '사회성'있는 그림을 그리면서 정체성을 만들어 갔기 때문입니다. Henri 의 동료나 제자중에서 애시캔 학파로 알려진 인물들로는 Henri, Glackens, Hopper, Shinn, Sloan, Luks, Bellows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 유럽 인상파화법의 영향을 받은 미국인상파 그림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뉴욕 뒷골목의 가난한 사람들, 소외받은 사람들의 풍경을 작품에 담아냈습니다.  (그러니까 ash can - 쓰레기통 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이겠지요).

 

The Eight (8인회)는 사실 딱 한번, 1908년 뉴욕의 맥베쓰 갤러리 (Macbeth Gallery)에서 여덟명이 합동 전시회를 한것에서 비롯된 명칭입니다. 이 8인회 전시회에 참여했던 작가들은

 

 1. William Glackens (1870-1938)  윌리암 글래큰스 : http://americanart.textcube.com/202

 2. Robert Henri (1865-1929) 로버트 헨라이 : http://americanart.textcube.com/197

 3. Goerge Luks (1867-1933) 조지 럭스 : http://americanart.textcube.com/278

 4. Everett Shinn (1876-1953) 이브릿 쉰 : http://americanart.textcube.com/272

 5. John French Sloan (1871-1951) 존 프렌치 슬로언 : http://americanart.textcube.com/201

 6. Arthur B. Davies (1862-1928) 아서 데이비스 http://americanart.textcube.com/279

 7. Ernest Lawson (1873-1939) 어니스트 로슨  http://americanart.textcube.com/281

 8. Maurice Prendergast (1859-1924) 모리스 프렌더개스트 : http://americanart.textcube.com/205

 

The Eight Member가 아닌 Ahscan School 멤버였던

  *. George Bellows (1882-1925) 조지 벨로우즈  http://americanart.textcube.com/198

 

이상입니다. 이들중 다수가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삽화가'로 활동한 경력이 있습니다.  특히 The Masses 라는 사회주의 사상이 강한 잡지의 편집이나 삽화에 관여한 화가들이 여럿 있습니다.  위에 올린 이미지는 John French Sloan 이 1914년 6월호 The Masses 표지화로 그린 작품입니다.  1914년 4월 20일에 미국 콜로라도주의 광산에서 광부들의 파업이 있었습니다. '자선가'로 널리 알려진 록펠러 (Rockefeller) 집안이 운영하던 광산이었습니다. 콜로라도 국방수비대가 이들을 공격하여 어린이 11명이 포함된 20여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이 잡지는 이 사건을 표지로 실은 것입니다.  표지 그림이 생경하고 과격해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은 더욱 처참하고 과격했겠지요.  (미국 구경을 하고 돌아간 내 조카아이들의 상상속의 미국사 속에  이런 모습은 없을 것입니다. 록펠러는 하늘이 보낸 천사는 아니었겠지요).

 

물론 미국의 사회-사실주의 작가들이 모두 이런 그림을 그렸다고 상상하시면 안됩니다.  이 표지화 작업을 한 존 슬로언 역시 '예술지상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사회성이 담긴 그림을 그리되, 사회적인 이념이 '예술'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니지요. 그래서 과격한 '사회주의'라는 이념으로부터는 어느정도 거리를 유지한 편입니다. 미국의 대부분의 사회-사실주의 화가들이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와는 일정 거리를 유지한 가운데 회화 작업에 몰두했다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들 여덟명의 미술가들중에서 슬로언에 관심이 많지만, 일단 이들의 '대장'격인 Robert Henri 부터 간단히 소개하고 그 뒤를 이을 생각입니다.  헨라이는 작품보다는 그가 이끌었던 애시캔, 8인회 때문에 미국 미술사에 자신의 이름 '석자 (?)'를 박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Henri 는 '헨라이'라고 발음합니다.  Hopper 관련 책에서 읽었는데 그가 자기의 이름을 반드시 '헨라이'로 발음해줄것을 극구 강조했다는 일화가 나옵니다. 그러니 그의 희망에 따라서 '헨라이'로 소개합니다.  (제 글의 독자들이 막 - 무척 똑똑해지고 교양이 업그레이드 되는 소리가 들립니다 헤헤헤.  미술 관련 글중에 헨라이 이름을 제대로 표기한 한글 페이지 찾아보기가 힘드실걸요. 헤헤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걸어놓은 곳이다.

왼쪽 가까이에서부터: Henri, Kent, Luks 의 그림들이 차례대로 보이고

오른쪽 가까이에서부터: Everett Shinn, William Glackens 가 보인다

저 너머에 Benton 의 그림이 있다...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Posted by Lee Eunmee
Realism/EdwardHopper2009. 10. 12. 12:05

Morning Sun
1952
Oil on canvas
28 1/8 x 40 1/8 inches
Columbus Museum of Art, Ohio

 

 

 

Edward Hopper 의 그림에서 찾을 수 없는 것들은?

 

(1) 호퍼의 그림에는 아이가 안보인다. 성인 남자, 여자들이 존재하지만 아동이 보이지 않는다. 단란한 가족의 풍경이 보이지 않는 것 과도 상통한다. 

 

(2) 호퍼의 그림에는 대화가 없다.  인물들이 여럿이 나와도 이들이 소통하는 것 같지가 않다. 각기 떠도는 별 들처럼 두사람이 서로 감정이 교류되거나 일치된 듯한 장면을 찾아보기 힘들다.  호퍼가 그린 인물들에 눈동자가 생략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해진다.  관객들조차 호퍼 그림속의 인물들과 '소통'이 불가능하다.

 

호퍼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크게 두가지로 정리 될 수 있는데 (1)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보이는 세상과 같이 속도감 있게 보는 방식 (2)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 장면처럼 클로즈 업 하거나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하고 조망하는 식으로 보는 방식이다. 이 자동차 유리를 통해 보거나 극장의 스크린에 비쳐지는 혹은 영상 카메라에 비쳐지는 것을 보거나, 에드워드 호퍼이 세상보는 방식은 '거리를 유지하는 관찰자' 방식이라는 것이다.

 

대학원의 석사과정이나 박사과정에서는 '연구방법론'을 듣게 된다. 그 연구방법론 시간에 여러가지 방법이 논의 되는데, 크게는 통계처리 중심의 양적 방법론, 그리고 장시간 관찰이나 면담등을 통한 질적 방법론이 논의된다. 실험실의 관찰이 아닌 사회현상, 교육 현장을 관찰할때 크게 두가지 방법이 있다. (1) 관찰자가 관찰 대상과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고, 마치 벽에 붙은 파리 (Fly on the Wall)처럼 관찰하는 것이다.  범죄 영화 보면 수사관들이 피의자를 심문할때 심문실에 커다란 거울이 있고, 그 거울너머에서 수사관들이 관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렇게 아예 자신을 감추고 저쪽에서 일어나는 일만을 관찰하는 방법이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2) 그런하하면 관찰자가 관찰대상과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관찰 방법도 있다. 사회학 연구자가 어떤 현장에서 직접 봉사활동을 하거나, 사람들과 일상적으로 서로 협력하면서 그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 하는 수도 있다. 교육현장에서 교사가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어떤 변화를 관찰하는 식으로 연구를 할때, 관찰자는 참여자가 되기도 한다. 이를 참여적 관찰이라고 할 수 있다.  에드워드 호퍼가 그림을 그릴때, 그는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며, 벽에 붙은 파리 같은 입장에서 사물을 관찰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세상을 '관찰자'로서 살폈다.  그는 소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이런 소통단절은 그의 그림속의 등장인물들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발견된다. 그보다 30여년 후에 태어난, 한세대 이후의 역히 외톨이 사실주의 화가라 할 수 있는 앤드루 와이어드 (Andrew Wyeth)는 호퍼와는 정반대의 관찰자였다. 그는 그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그렸다. 그는 활발하게 소통하고, 친구가 된 후에야 대상을 그림에 옮겼다. 앤드루 와이어드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가 그가 잘 알고 지내는 마을 사람들, 혹은 십수년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그림에 옮긴 사람들이다. 소통을 통해 그림의 대상에게 다가갔고, 그래서 앤드루 와이어드의 풍경이나 사람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속삭인다. 반면에 호퍼의 그림은 '접근'을 불허하고, '상상'을 정지시킨다.  앤드루 와이어드는 소통을 통해, 호퍼는 소통정지를 통해 '영원'으로 가려고 시도했을지도 모르겠다.

 

 

 

여행자의 눈에 들어오는 풍경

 

이 그림은 1940년작 '주유소'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1940년이면 지금부터 대략 70년전의 그림이다. 1940년이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식민지 시절을 견디고 있었고, 윤동주 시인이 아직 연희전문 (현재 연세대) 학생이던 시간이다. 나는 중학교때, 시간을 거꾸로 되짚어 올라가서 윤동주 시인이 살던 시절로 돌아가서 그의 애인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  연세대 문과대 왼편 언덕길에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있다. (지금 왜 갑자기 윤동주 얘기냐구, 이 천치야...) 지금도 거기 그것이 있을까?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이것이 70년전의 풍경 같지가 않다.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에서 보통 여행자가  집을 떠나 하이웨이를 타게 되면 누구나, 어디서나 이 그림속의 풍경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주유소의 규모가 크거나 작거나 차이는 있겠으나, 미국의 어느 주에 가도 우리가 만나게 되는 곳. 주유소. 그리고 주유소에 달려있는 가게. 그 가게에서 커피를 사고, 빵이나 과자를 사고, 생필품이 있나 기웃거리기도 하고, 화장실에 가서 급한 용무를 해결하고, 그리고 휙 떠나면 잊혀지는 곳.  어딜 가는 비슷한 하이웨이. 지역에 따라서 가로수의 품종이 달라지긴 하지만, 가장 흔한 것은 멋대라기 없이 키만 큰 소나무들.  그리하여. 지금도 미국의 하이웨이 풍경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길이 있고, 멋대가리 없는 가로수가 있고, 주유소가 있고, 주유소에 딸린 '공중변소'가 있고, 끝없이 이어진 길과 하늘이 있을 뿐이다.

 

 

 

 

Gas (1940)

66.7x`102.2 cm

Museum of Modern Art

 

 

호퍼의 풍경화를 보면 세밀한 묘사가 생략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전 페이지에서 Andrew Wyeth 의 그림들을 살핀적이 있는데,  앤드루 와이어드가 사과 나무를 그릴때 직접 나무의 사과를 세어보고 그릴 정도로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면,  호퍼의 풍경화속의 나무나 숲, 길은 달리는 차창 밖으로 비쳐지는 것처럼 쓸려 지나가는 것 처럼 보인다.  휙휙 지나가는 풍경의 일부같은 숲, 도로.  그 속에 '영원'처럼 혹은 '박제'처럼 서있는, 표정없는 인물들.  소통두절.

 

 

영화관 스크린에 비친듯 한 풍경

 

 

Nighthawks (1942)

84.1 x 152.4 cm (33 1/8 x 60 in.)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Museum

 

 

내가 에드워드 호퍼를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그의 그림을 처음 접한 것이 바로 이 Nighthawks 였다. 대학교 1학년, 교양과목으로 '예술의 이해'라는 과목을 수강할때,  교재에 실려있던 이 그림을 신기하게 들여다봤었다.  내 눈에는 이것이 '그림'으로 보인 것이 아니고 미국영화의 한 장면, 혹은 길거리 극장 영화간판 같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이런 그림도 '예술책'에 포함이 된다는 것이 신기했었다.  (아직 철없던 내게 '명화'란 르노아르나 고흐 뭐 그런 스타일의 유럽 그림들이었다.)  그림 설명으로 '도시인의 고독' '어쩌구' 뭐 이런 식이었는데,  내 눈에는 고독이고 뭐고 딱 영화 간판이구만... (그 후로 학년이 올라가면서 나는 한국미술의 이해, 동양 미술의 이해, 서양 미술사, 서양 미술의 이해등 미술 관련 교양과목들을 하나 하나 이수해 갔는데, 그 과목들을 이수한 주요 이유는, 미술대 교수들이 학점을 잘 줘서... 흐헤헤... 예술대 학생들이 주로 수강하던 과목들이었는데, 예술대 학생들은 너무나 예술 지상주의자들이라서 학점 따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나는 학점에 신경을 바짝 쓰는 인문대생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예술지상주의자들 속에서 '학점'에 신경을 쓴 소수가 점수를 잘 받지 않았겠는가.  (^^)

 

내가 이 작품의 '맛'을 제대로 알아본것은 극히 최근 2년 사이의 일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미국에서 약 5년간 사는 동안에도 미국은 낯 선 땅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버지니아로 왔을때, 그래서 미국미술 박물관들을 쏘다니면서 미국미술 작품들을 두루 섭렵한 후에나 나는 왜 '미국이 낯 선 땅'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미국은 나에게만 낯 선 땅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낯 선 땅이다.  미국은 누구에게나 낯설다. 미국인에게도.

 

미국의 하이웨이를 달려보면, 차창밖에 휙휙 지나치는 풍경들은 모두 똑같아 보이면서도 동시에 모두 낯설어 보인다. 왜 모두 낯설어보일까?  그것은 도로의 폭이 넓고, 하이웨이의 폭이 넓고, 주변의 나무들이 모두 크고, 그리고 뭐든 크고 넓고 멀다. 쇼핑몰은 휑하니 크고, 진열품은 한산하다. 쇼핑몰의 주차장도 휑하다.  뭐든 크고 휑하다. 풍경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풍경이 휑하다. 작은 카메라 각도 안에 인물과 풍경이 적절히 조화롭게 들어가지를 못한다.  미국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자꾸만 zoom-in (줌-인)을 한다거나, 인물 표정 위주로 찍거나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풍경이 너무 한산하고 큼직해서 조화롭게 화면 안에 다 담을수가 없기 때문이다.  '뉴욕 맨해턴'에 가면 사람 많고 복잡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뉴욕이나 시카고, LA 등 극 소수의 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들이 휑하고, 썰렁하고, 도시를 제외한 지역은 사람도 많지 않고 한적하다. 맨해턴과 같은 대도시를 제외하고 웬만한 도시에서 한밤에 술한잔 걸치기도 쉽지 않다. 상점들은 저녁이면 문을 닫는다.  맥도널드가 24시간 영업을 하기도 하지만, 이런 심야 업소를 찾기는 쉽지 않다.  어딜가나 휑하고, 썰렁하고, 아스팔트가 깔려있고, 그리고 대개 한산하다.

 

이것은 나만 느끼는 현상은 아니다.  미국 텔레비전의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보면 실내 인테리어 전문 케이블도 보이는데, 한때 심심풀이로 집 고치는 프로를 줄 창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실내 인테리어나 혹은 정원 설계 같은, 집 관련 디자이너들이 평을 할때, 가장 자주 던지는 영어가 'detail (세심한 부분처리)'이 살아있다는 말이었다.  디테일.  내가 내린 결론 - 미국 사람들 '디테일'이라고 하면 아주 넘어가는구나. 

 

미국문화가 유럽식에 비해 신생국가이고 건물들이며 생활속의 디자인이 단순하고 소박한 편이다. 공장에서 찍어나오는 트레일러 하우스들도 많고. 대체적으로 상자모양의 멋대가리 없는 건축물들. 휑한 공간.  이런 식이다보니까, 실내나 외벽에 뭔가 오밀조밀한 장식 한가지만 붙여도 '디테일'이 산다고 노래를 부른다.

 

Nighthawks의 그림을 살펴보자.  심야의 식당이나 바처럼 보인다. 창백한 형광등 불 빛 아래, 바텐더의 흰 옷이 춥고 스산해보인다. 그의 등 뒤로 보이는 기구는 커피 내리는 기구 같아보인다. 식당용 스툴 (둥근 높은 의자)이 일곱개가 전면에 배치되어 있고, 그중 하나를 양복입은 신사가 차지하고 앉아있다.  저만치 남자, 여자 한쌍이 앉아있다. 거리는 텅 비어있고, 그야말로 쥐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는다.  식당에서 나오는 불빛으로 유리창 너머의 보도가 희게 빛난다.  PHILLIES 라는 단어가 보이고 그 옆에 시가 모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필리스 시가 광고같기도 하고, 식당 이름 간판같기도 하고.  이 가게의 벽에 흔한 그림한장, 메뉴 설명서 한장 붙어 있지 않다. 꽤나 썰렁하다.

 

썰렁함.  내가 체감하는 미국은 바로 그 '썰렁함'이다. 나는 이 썰렁함을 '낯설음'으로 받아들였었다.  스산함. 새로 열었다는 커다란 식당에 기대에 차서 들어갔는데, 손님도 없고 종업원도 시들하고,  그럴때가 있다.  그럴때 우리는 직감적으로 '아차, 잘 못 들어왔다. 다른데로 갈것을' 이런 느낌이 들때가  가끔 있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특히나 이리저리 떠돌며 여행을 하다 보면 우리는 이런 스산함, 휑함, 썰렁함과 익숙해지게 된다.

 

이 그림을 보면 어떤 음악이 떠오르는가? 나에게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쿨 재즈 트럽펫 연주의 낮고 음산한 음악이 떠오른다.  주인공들은 각자 상념에 잠겨 있고,  저 편에 앉아있는 남녀는 연인사이로 보이지 않는다.  좀 전에 바에서 만난 낯 선 타인들 같아보인다. 이들이 갈 곳은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이 아니고, 인근의 모텔이 될 것 같아 보인다. 이 그림속에는 '드라마' 가 있는 것 같다.  하필 이 그림이 현재 시카고 미술대 미술관에 걸려있는 관계로, 혼자 앉아 있는 양복쟁이 남자는 '시카고 갱단'의 중간 보쓰쯤이 아닐까 상상해보게 된다.  (이 그림의 본래 배경은 맨하탄이었다고 한다). 

 

평생 영화를 즐겨 본 호퍼는 그의 그림에서 영화속에서나 잡힐만한 구도의 그림들을 많이 선보였고, 또한, 영화계에서는 호퍼의 그림을 영화 속에서 다시 연출하는 일도 있었고, 호퍼와 영화는 이렇게 상호 교류하며 발전했다고 한다. 이 그림의 장면은 영화 Sting 에서 차용했다고도 하고, http://americanart.textcube.com/39  페이지에 소개된 대로 House by Railroad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역시 히치코크 감독의 작품에서 응용되었다.

 

 

몰래카메라에 잡힌 사람들

 

밤의 사무실 풍경은 특히나 '성적인' 어떤 '드라마'를 암시하는 작품으로 논의가 되는 작품이다. 여성의 성적 매력은 '가슴'과 '엉덩이'에서 두드러지는데, 그림속의 여성은  몸을 비틀어서 가슴과 엉덩이를 적절히 '관객'에게 드러내고 있다. 이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는 마치 파리의 눈과 같이 작은 몰래카메라가 이쪽 천장이나 벽의 윗쪽에 달라붙어 실내를 내려다보는 형식이다. 아니면 건물의 이쪽 벽에 창문이 있고,  이 창문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맞은편 창에서 내려다 보는 형국일지도 모른다.

 

 

 

 

 

Office at Night
1940
Oil on canvas
22 1/8 x 25 inches
Walker Art Center, Minneapolis, Minnesota

 

 

 

 

현대미술관 소장의 '밤의 창문들'에는 '훔쳐보기' 혹은 '몰래카메라'식으로 들여다보기 기법이 좀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열려진 창으로 커튼이 나부끼는데, 옷을 갈아입으려는지 여성이 짧은 드레스 혹은 속은 차림으로 구부정하게 서있다. 여자의 머리는 보이지도 않아 통통한 뒷태가 더욱 두드러진다.

 

Night Windows

1928.

Museum of Modern Art

Oil on canvas, 29 x 34" (73.7 x 86.4 cm). Gift of John Hay Whitney

 

 

에드워드 호퍼는 이런 식으로 낯선사람,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의 풍경을 많이 그렸다. 물론 Jo와 결혼 한 이후 40년이 넘도록 그가 그림 작업을 하는 동안, 그의 그림에 그려진 '모든' 여성의 모델은 그의 아내 Jo 였다.  젊은 여성이거나 늙은 여성이거나, 뒷태가 예쁜 여성이거나, 창녀이거나, 시들은 여성이거나 '모두'가 그의 아내가 모델이었으므로 호퍼가 정말로 누군가를 '훔쳐봐 가면서'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속에는 이렇게 '훔쳐보기' 식으로 잡은 전라의 혹은 반라의 여성들이 많이 등장한다.  물론 여성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고 남성도, 남자와 여자도 등장한다.

 

나는 이것을 '훔쳐보기'라고 말하지만,  호퍼가 정말로 대상을 '훔쳐봤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대상'을 관찰 했을 것이다. 창문이 보이면 창문을 관찰 했을것이고, 창밖에 풍경이 보이면 풍경을 관찰 했을 것이다.  열려진 창문으로 보이는 옷벗은 여자의 뒷태를 그는 그저 관찰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 그것이 거기에 있고, 내 눈에 보이니까.  이는 마치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의 어린 내가 혼자 유원지 숲속에서 놀다가, 나무 그늘 어둠침침한 곳에서 젊은 남녀가 아랫도리만을 내리고 뭔가 자신들만의 장난을 하는 장면을 그저 심심해서 무심코 관찰하던 것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나는 훔쳐본것이 아니고 그냥 본 것이다. 하지만,  관찰되는 대상에게는 이것이 '훔쳐보기'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사실 호퍼의 그림에서 '훔쳐보기'적 요소를 찾아내는 것은 관객들의 몫일 것이다. 실은 우리들이 '훔쳐보기' 놀이를 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호퍼의 그림을 통해서.  호퍼는 무심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그림을 던져주고, 우리는 열심히 그림을 훔쳐본다. 훔쳐보는 우리는 영원히 그림속의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한다. 그것이 훔쳐보는 이들의 운명이다.

 

 

사물에 대한 그의 애정 표현의 방식

 

호퍼는 어릴때부터 수줍음을 많이 탔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고 전해지며, 그의 이러한 성품은 늙어 죽을때까지도 변치 않았다. 40년넘게 결혼생활을 유지했던 그의 아내 Jo가 아마도 가장 가까운 친구였을 것이고, 그나마 호퍼가 가장 편안하게 대화 할 수 있는 존재 였을 것이다. 이들은 해로 했지만, 이들 결혼생활의 절반 이상은 싸움과 으르렁거리기 였다고도 한다.  서로 으르렁거리고 상처주면서도 헤어지지는 않았던.  내가 생각하기에 호퍼가 아내 조와 허구헌날 으르렁대면서도 헤어지지 않았던 이유는...그의 일관된 성품 때문일 것이다.  그가 죽을때까지 40년이 넘도록 서민 아파트를 떠나지 않고 살았던 바로 그런 이유로 그는 아내와 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호퍼를 만나서 별도로 인터뷰를 한 적이 없지만,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한번 정하면 그냥 끝까지 가는거다.  뭐 자질구레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좋건 싫건 끝까지 가는거다. 

 

호퍼에게는 자신만의 애정 표현 방식이 있었다.  호퍼가 아내에게는 어떤 식으로 애정 표현을 했을지 잘 모르겠으나, 그가 세상에 애정표현을 하는 방식을 나는 알고 있다.  그는  드러내지 않고 애정 표현을 한다. 가령 이런식이다.

 

이 그림은 '일요일 이른 아침 (Early Sunday Morning)'이라는 1930년 작품이다. 뉴욕 휘트니 미국 미술관 소장품이다. 2008년 여름에 이 작품을 보고 참 반가웠었다.  이 그림은 호퍼의 다른 작품들에서 자주 보이는  '휑하고' '썰렁한' '고립된' 듯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제목이 '일요일 이른 아침'인데, 나는 이런 풍경이 낯설지 않다.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포토맥강을 건너 산책하다 보면 조지타운 거리가 나온다. 조지타운대학 인근의 거리인데 초기 미국 역사를 담고 있는 역사적인 도시라서 나지막한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다.  이곳에 토요일이나 일요일 이른아침에 산책을 나가면 길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안보인다. 적막감만이 감돈다. 그래도 그 거리를 산책하면서 쓸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게의 쇼윈도우마다 각기 다른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어 조용하고 한가로운 거리를 나 혼자 편안하게 걷는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곧 이 적막한 거리가 주말 인파로 넘쳐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림속의 거리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그가 살던 뉴욕 맨해턴의 어디쯤, 낮은 건물들이 모여있는 어느 골목 일 것이다. 붉은 벽돌의 이층 건물. 1층에는 상점들이 있고, 2층은 주거지 일 것이다.  일층 상점들 중에서 두군데의 햇볓 가리개가 노란 색이다. 2층에는 열개의 창문이 보이는데, 그중 여섯개의 햇볕가리개가 노란색이다. 햇볕 가리개들의 높이가 제각기 다르다. 검정색 가리개도 있다. 커튼이 쳐진 곳도 있고, 창이 일부 열린 곳도 있다. 열개의 창문은 동일한 창문이면서도 커튼이나 볕가리개가 이 창문들에 각기 다른 개성을 부여한다.  이 창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개성으로 볕가리개를 올리거나 내리거나, 커튼을 치거나, 창을 열거나 했을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는 '디테일'을 대충 무시하고 선 굵게 그림을 그린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무작정 '디테일'을 뭉개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디테일'을  선사할 줄 알았다. 그는 각기 다른 창문의 풍경만으로도 사람들의 각기 다른 삶의 방식, 개성, 삶의 이야기를 표현 할 줄 알았다.

 

 

Early Sunday Morning
1930
Oil on canvas
35 x 60 in.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일요일 이른 아침'이라는 작품으로 나는 에드워드 호퍼의 이야기를 마치기로 한다.  내가 이 작품을 마침표로 소개하는 이유는, 이 작품속에 그의 '개성'이 모두 함축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행자의 시선에 무심히 스쳐 지나갈 '어느 거리'의 풍경이 될 것이다.  이 그림에는 사람 하나 등장하지 않지만, 우리는 각기 다른 창문들 속에 사람들이 여러가지 드라마를 연출하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건물은 그 자체로 '우리 읍내 (Our Town)'가 될 수도 있고, 우리는 그 속의 마을 사람 갑, 을, 병이 되어 갑자기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며 대사를 날리게 될 지도 모른다.  이 풍경은 연극의 무대가 되기도 하고, 영화의 세팅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관객은 상상속에서 무대위의 배우가 된다.  우리는 텅빈 거리를 걸으며 가게의 유리를 기웃거리거나 2층 창문 속에 어떤 이들이 있을까 상상하며 목을 빼고 열려진 커튼 너머를 유심히 살피기도 한다.  우리는 거리를 걷는다. 그러나 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관객인 나 만 그 풍경을 보고 있을 뿐이다.  나는 어쩌면 이 햇살 가득한 텅빈 거리의 아무데나 앉아 해바라기를 하며 다리 쉼을 할지도 모르겠다. 

 

풍경속에 아무도 없다.  이 풍경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최초의 어떤 사람

혹은 관객.

 

호퍼의 그림에는 '어린이'가 등장하지 않는다.  어린이는 '생장' '변화'의 상징일 것이다.  영원처럼 적막한 호퍼의 풍경은 '어린이'의 무궁한 변화와 성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호퍼 그림속의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 이들은 영원과 대화한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시간성을 뛰어 넘은 영원의 세계에서 이들은 숨을 쉰다.  그러므로 설령 호퍼의 그림을 보다가 내가 박제가 된다해도 슬퍼할 일은 아닐 것이다.

 

 

 

눈치 채셨는가?  이 페이지의 맨 위의 Morning Sun  창밖으로 벽돌 건물의 꼭대기가 보인다.  Nighthawks 의 이웃 건물이 낯익지 않은가?  혹은 Night Windows 의 차양이 노란색인 것이 눈에 띄지 않는가?  에드워드 호퍼가 어떤 대상이나 사물을 사랑하는 방식은 이런 식이다.  말없이, 그러나 늘 화폭 한켠에 담아 두는 것.  영원처럼.   그래서, 호퍼 그림 속의 주인공들  혹은 풍경은 과거의 어떤 시점에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대로 존재하며, 미래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공감을 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을 그렸으므로. 그는 미국에서  미국을 그렸지만, 그의 그림은 미국에만 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대상의 본질에 다가 섰으므로.  사물의 본질에 국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Posted by Lee Eunmee
Realism/EdwardHopper2009. 10. 10. 20:48

 

하숙생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길에

정일란 주지말자 미련일란 주지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간다

 

이런 노래가 있다. 제목이 '하숙생'이다. 우리 아버지가 인생 제대하기 전에 말년에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헤어질 무렵이면 이 노래를 부르셨다고 한다. 난 이 노래의 제목이 '인생은 나그네' 혹은 '나그네'인 줄로 알았는데 제목은 노래가사에도 없는 '하숙생'이라고 한다. (하하).

 

하숙생이란 말은 '나그네'라는 말과는 느낌이 사뭇다르다. 왜 다른가하면, 나그네는 그냥 줄창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존재같고, 하숙생은 그래도 어딘가 적을 두고 살다가 때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하숙'을 하다가 또 떠나고 그럴것 같다는 말이지.  어딘가에 적을 두긴 하지만 거기가 자기 집은 아니고 그냥 남의집 한귀퉁이 빌려 살다가 때되면 떠나는 존재. 하숙생들이 먹는 음식은 하숙집이 제공하는 하숙집밥, 집 주변 함바집, 기사식당, 혹은 편의점 주먹밥, 컵라면 뭐 이런것이 아니겠는가. 하숙생들은 소지품도 많지 않고, 갖고 있는 옷도 많지 않다. 왜냐하면 이리저리 하숙을 하며 돌아다니기 때문에 늘 일정량의 물건만을 소지 할 뿐이다.  하숙생은 공동 화장실을 쓰고, 공동 수돗가에 모여서 양치질을 할 것같고, 뭐 그것이 홈, 스위트 홈이 될 수는 없는 어중간한 주거공간을 점유할 것이다.

 

자취생하면 뭐랄까 좀더 건설적이고 독립적이며, 하하, 나만의 어떤 공간 점유가 가능해보인다. 그런데 하숙생은 이도저도 아닌 묘한 상황이란 말이지.

 

 

낯가림이 심한 가겟집 아들 에드워드 호퍼

 

에드워드 호퍼는 뉴욕주의 나이액 (Nyack)에서 태어났다. 대서양에 면해있는 이 도시는 당시 요트를 많이 제작하는 곳으로도 알려져있다. 호퍼의 부모는 중산층 집안의 사람들이었고 나이액에서 상점을 운영했다.  그런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던 호퍼의 아버지는 사업수완이 좋지 못했고, 가세는 점점 기울어져 간 것으로 보인다. 호퍼는 성장하면서 아버지 가게일을 돕거나 경리직 일을 거들기도 했다. 당시 호퍼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가게는 '공산품 가게 (Dry Goods Store)'로 알려져 있다. 꽃이나 야채, 생선과 같은 생생한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주로 공장에서 만들어진 물건들을 취급하는 가게였다.  오늘날에도 미국의 동네 가게를 살펴보면 크게 두종류로 나눠지는데 신선한 과일, 우유, 야채, 생선등이 취급되는 '그로서리 (grocery)' 가게가 있는가하면,  이런것을 제외한 물건들, 문구류, 생필품, 의약품,  그리고 이런곳에서 식품을 판다면 공장에서 만들어진 과자, 빵, 썩지않는 음료수 이런 것들을 주로 취급한다.

 

오늘날, 시카고와 같은 대도시의 도시 빈민 생활문제를 사회학자들이 지적할때, 도심에 사는 빈민들이 '신선한 음식'을 사먹을수 없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신선한 식품을 제공하는 '그로서리'에서는 식품 운송 및 보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점점 대형 회사들이 취급하게 되고, 도심의 작은 상점들은 이런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그로서리'를 포기하고 '공산품'만을 취급하게 된다.  그런데 도심의 빈민들은 '자동차'도 없다. 이들이 신선한 야채를 사려면 멀리 떨어진 곳으로 쇼핑을 가야 하는데 드문드문 오는 시내버스에 의지해서 장을 보려면 하루 온종일이 걸리고 만다. 결국 도시 빈민들은 집 근처의 공산품 가게에서 제공하는 빵, 과자, 음료수, 그리고 패스트푸드 전문점에 의지하여 생계를 해결하게 되고, 그 결과 이들의 건강이나 생계는 더욱 악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혹은 우리들이 매일 밥상에서 김치나 다른 야채를 먹을수 있다면, 우리는 하늘에 감사해야 한다. 신선한 야채를 먹고 싶어도 사먹을수도 없는 도시 빈민들도 많이 존재 한다는 것이다. 경제 대국인 미국에서조차.

 

에드워드 호퍼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상점은 바로 이런 '마른 물건'만 판매하는 공산품 가게였다.  웹에서 'Dry Goods Store' 를 검색해보니 1910년 펜실베니아의 어떤 마을의 Dry Goods Store  사진이 나온다. 잠시 빌려다 소개해본다.

 

 

에드워드 호퍼의 소개 책자들을 보면, 비사교적이고 혼자 그림그리기를 즐겨했던 소년 호퍼는 아버지의 가게일을 돕는 것을 매우 따분해 했다고 한다. 나는 소년 에드워드 호퍼가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을 돕는 광경을 상상해본다.  그는 사람도 별로 안오는 상점을 지키고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르고, 어쩌다 손님이 와서 뭔가 물으면 마지못해 대꾸를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도 소년 호퍼와 같은 시절이 있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잠시 농토를 남의 손에 맡기고 수원으로 이사를 나와서 한길가에 가게를 열고 상회를 운영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몇해동안 상점을 착실히 운영하여 한살림을 장만한 후에 다시 귀향을 하셨다. (사업에 재능이 있는 분들이었나보다).  나는 상경한 우리 가족들과 떨어져서 수원의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서 1년을 보냈는데, 그 당시 나는 '원천상회' 집 아이로 통했다.  사람들은 내 이름을 몰라도 좋았다. 나는 '원천상회' 아이였으므로.  한길 건너에 우리 상회보다 더 큰 상회가 자리잡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동네 사람들이나 인근의 유원지를 찾는 사람들, 그리고 논 건너 공장에서 일하던 직공들은 우리 상회에 들르기를 좋아했다.  우리 할머니가 사람이 싹싹하고 부지런하고, 나이가 어린 사람이나 많은 사람이나 공평하게 싹싹하게 대했으므로 사람들이 우리 할머니를 좋아 했었던 것 같다.  우리 할아버지는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나 역시, 어미 아비에게 버림받은 새새끼처럼 풀이 죽은 꼬마였으므로,  사람들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도 않았고, 누군가가 귀엽다며 내 머리를 건드려도 성난 개처럼 으르렁거리며 도망치곤 했었다.  나는 골난 표정으로 동네 골목골목을 쏘다니며 혼자 놀았고,  나는 골목골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풍경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사람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고 싹싹하게 인사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림자처럼 혼자 떠돌았지만, 자유롭게 사람들이 사는 풍경을 관찰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제법 어른들도 모르는 비밀스런 풍경을 구경하기도 했었다.  나는 유원지 숲에 데이트를 나온 공작 직공들이 옷을 반쯤 내리고 몸을 부딪치며 아픈듯 흐느끼는 광경을 멀거니 보기도 했고, 풀숲에서 포개져있던 사람들을 보기도 했다.  내 눈에 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갔고, 나는 판단력도 없이 이상스럽거나 우스꽝스러운 풍경들을 관찰했다.  

 

가겟방을 지키고 앉아있어야 했던 수줍은 소년 호퍼는 따분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는 길거리를 지나는 많은 사람을, 혹은 가게에서 내다보이는 맞은편 건물이나 가게들의 풍경을 세세하게 관찰 했을 것이다. 진열대에는 평생 썩지 않을 물품들이 말라가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마른 물건들로만 이루어진 공산품 가게가 평생 호퍼의 삶을 지배했을 거란 생각을 한다.

 

 

호퍼 삼락 (三樂)

 

맹자 빼갈먹고 가라사대, 선비에게 세가지 기쁨이 뭔고 하니 (1) 부모형제 건강하시고 (2) 세상에 부끄러운 일 좀 덜하고 (3) 남의자식 잘 가르치고 뭐 대략 이러한 것이다. 내가 가만 보니까, 나는 두가지는 되는데 한가지가 안되어서 제대로 된 선비질을 못하고 있다. 부모형제 건강하시고, 남의자식 열심히 가르치고, 대략 거기까지는 그럭저럭 되는데 하늘을 우러러 땅을 우러러 여러가지고 부끄러운 것이 많아... 나는 죽어도 군자가 못되겠네...

 

 

호퍼는 위의 내가 적은 '하숙생'같은 인생을 살다간 사람이다.  일단 호퍼는, 나이악 고향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후 뉴욕으로 가서 통신과정으로 미술공부를 좀 하다가, 일러스트레이션 (삽화) 공부 도 하고, 미술학교에 정식 입문하여 당시의 대가인 Thomas Eakens, Henri 와 같은 화가 밑에서 공부하는 과정도 거친다.  (펜실베니아 미술관에서 Eatens 작품을 무더기로 사냥하여 왔으므로 언젠가 그의 페이지가 만들어질 것이다).  궁색한 형편이었지만 예술인들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파리에 가서 머물며 그곳의 분위기를 살피기도 한다.  그런데 그는 파리에 머무는 동안 화단의 인사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혼자 미술관 구경하고, 뒷골목 구경하고, 혼자 스케치하며 떠돌았다고 한다. 그는 피카소한테도 관심이 없었고,  도통 미술계 인사들과 어울리러 들지를 않았다.  그가 당시 파리를 지배하던 인상파 화풍이나 뒤를 잇는 후기인상파의 작풍을 아주 몰라라 하지는 않았으나 이런 흐름을 자신의 그림세계로 받아들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영향은 받았을 수 있으나 그것이 호퍼의 그림 세계를 지배할 수는 없었다는 뜻이다.

 

미국에서 호퍼는 1920년대와 30년대를 지배하던 사실주의의 양대 사조 (1) 지역주의 Regionalism 과 (2)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Social Realism) 에도 속하지 않았는데,  지역주의는 경멸했고,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대해서는 다소 공감하나 자신을 그 틀에 가두려 하지 않았다. 그는 우파도 좌파도 아닌 '미술파'의 길을, 아니 미술파도 아닌 그저 '호퍼'의 길을 갔을 따름이다.

 

사십대 후반까지 호퍼는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린 화가였다.  그 이전까지는 그럭저럭 '삽화가'로 생계를 해결했고, 삽화의 연장으로 작업한 '에칭'판화 작업으로 판화업계의 대가가 되기는 했으나 그 역시 생계의 연장이었다. 그는 미국이 대공황(Great Depression)에 접어들던 싯점부터 오히려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미술계에 등단하여 난생처음으로 차를 사고, 그리고 매사추세츠주의 아름다운 해변 휴양도시인 Cape Cod 에 스튜디오를 장만하여 그의 '문패'를 다는 기쁨을 누리게 되기도 하는데 이는 40대 후반의 일들이었다.  그 때까지 그는 그저 가난뱅이 그림쟁이였을 뿐이다.  Cape Cod의 스튜디오 외에 그들이 주로 생활한 곳은 뉴욕의 자그마한 아파트 서민용 아파트.  이곳은 방한칸, 작은 싱크대가 부착된 미니부엌이 달린 스튜디오였는데  그는 죽을 때 까지 공동 화장실, 공동 샤워시설을 사용했다.  따로 작업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두 부부가 살았으므로,  호퍼가 그림 작업을 할때면 방에 분필로 금을 그어놓고 아내 '조'가 금을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Gas (1940)

Museum of Modern Art, NY

 

 

인생의 초반 50년 가까이를 가난뱅이로 살았고, 그 후에 명성을 얻고 그림이 비싸게 팔려나가 생활이 풍족한 이후에도 가난뱅이의 습관을 그대로 유지한 채 검소하게 살았던 호퍼는 주로 세가지 취미 생활에 돈을 썼다고 한다:

 

(1) 책

(2) 여행

(3) 극장

 

 

호퍼 부부는 옷을 사면 다 떨어질때까지 입었고, 호사스런 가재도구를 사 모으는데 취미가 없었다. 호퍼의 아내는 요리 따위를 즐기지도 않았다. 호퍼의 아내가 가장 즐겨 한 요리는  깡통을 따서 깡통에 담긴 음식을 밥상에 차리는 일.  그것으로 요리 끝. 즐거운 인생.  이들은 아무데서나 살 수 있는, 수십년이 지나도 변치도 않을 깡통음식을 주로 먹었고,  혹은 동네의 싸구려 음식집에서 끼니를 해결 했을 것이며, 이들이 자동차를 끌고 미국의 여기저기를 떠 돌때는 자동차를 세워놓고 아무때나 드나들수 있는 자판기 음식점 (automat), 주유소, 여관의 식당,  길거리 심야 카페등에서 그들의 주린 배를 채우면 되었을 것이다.  심심하면 극장에 가서 사람들 속에 섞여 영화를 봤을 것이고, 집에 오면 각자 상념에 잠겨 자신의 일에 몰두 했을것이다. 

 

 

호퍼의 삼락으로 내가 정리한 책, 여행, 극장 이 세가지 요소는 일관되게 호퍼의 그림 세계에 반영된다.  책읽기, 여행. 극장 구경등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이 모든것은 '관찰자'의 작업이다.  책 읽기는 외부와 내면으로의 여행이고, 여행은 실제 세상에 대한 스치는 관찰이다. 그리고 영화는 우리의 훔쳐보기 욕구를 극대화하여 충족시켜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책읽기, 여행, 영화구경은 비사교적인 사람들이 혼자서 얼마든지 즐길수 있는 놀이이기도 하다. 책읽을때 옆사람하고 종알거릴 필요 없다. 여행할때 혼자 자동차를 끌고 돌아다니다가 주유소에서 개솔린 넣고, 주유소 점방에서 아무거나 사 먹고,  길거리 모텔 아무데서나 하룻밤 자고 다시 떠나는 동안 아무하고도 말을 섞을 필요도 없다. 영화 볼때 옆사람하고 '회의'하면서 떠들면 주위의 눈총을 받는다. 영화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지만, 우리는 그다지 소통하지 않는다.  호퍼는 아무하고도 소통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관찰하고 이를 내면화하거나 화폭에 담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산품 가겟집 아들이었던 호퍼는 평생 공산품 가게에서 살 수 있는 깡통 음식 혹은 자판기 음식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으며 생활하면서, 가겟방 너머, 가게 유리창 너머의 세상을 내다보듯 자동차 유리 너머, 극장 화면너머의 세상을 관찰하고 훔쳐봤으며, 별로 가진것 없이 수십년간 공동화장실을 써야 하는 작은 아파트를 주거지 삼아 이리 저리 떠돌아 다니다, 가볍게 우리 곁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를 '미국의 풍경을 그린 가장 미국적인 화가'로 꼽지만, 그는 그가 경멸했던 '미국적인 그림을 그리자는 지역주의자'도 아니었고, 사회적인 문제를 화폭에 담은 진보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말하자면 Regionalist 도, Social Realist 도 아닌 Hopperist 였던 것이니,  가장 미국적인 풍경을 그렸다는 호퍼의 그림들이 오늘날 미국 국경을 넘어서서 세상 사람들에게 마술적으로 다가간다.  우리가 오늘날 호퍼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미국'이 아니다. 그 속에 '하숙생'과 같이 스치고 지나가는 '나'의 모습 혹은 '우리'의 모습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호퍼가 관찰 한 것은 '미국' 혹은 '미국인'이 아닌, '인간'이었던 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Realism/EdwardHopper2009. 10. 9. 05:03

에즈워드 호퍼는 (July 22, 1882 – May 15, 1967) 19세기말에 태어나 20세기 후반까지 85년을 살다간 미국 화가이다. 내가 가급적이면 작가들의 생몰 연대를 언급하는 이유는, 작가들의 활동과 그들이 살다간 지역사, 세계사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살다 간 동안 한국에서는 한일합방이 일어나고 삼일운동이 일어나고, 광복을 맞고, 그동안 세계사적으로는 세계 1차, 2차 대전이 지나가고, 한국에서는 육이오, 혹은 한국전쟁을 겪고, 419 혁명이 일어나고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우리 아빠 엄마가 결혼을 하고 우리 오빠가 태어나고, 언니가 태어나고...

 

85년을 살다간 이 화가에게 몇차례의 그림 매체의 변화가 있었다. 첫번째로, 그는 밥벌이를 위해 '삽화가'로 활동을 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예 삽화에 중요 도구가 되는 '에칭'기법을 스스로 익혀 '에칭' 활동을 열심히 하던 시절이 있었고,  미술학교에서 만나 잠시 알던 여학생 Jo와 40대에 다시 만나게 되어 그로부터 수채화를 권유받아 수채화 활동을 열심히 하던 시절이 있었다. (결국 Jo와 결혼하여 해로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 유화작업에 주력하게 된다.

 

마침 내 사진파일에 내가 '사냥'한 (나는 이를 사냥이라 부른다. 어줍지 않은 사진이지만, 내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 것들이므로) 작품들이 있어 이 세가지 매체의 작품들을 소개해본다.

 

(1) 삽화와 에칭판화 시절

(2) 수채화 시절

(3) 유화 시절

 

 

*** ***

 

 

(1) 에칭 판화: 1921년 Night Shadows (밤의 그림자).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2009년 9월 찍은 사진이다.

 

 

 

 

 

(2) 수채화: White River at Sharon (샤론의 흰 강) 1937년 작품으로 그해 9월 버몬트 (Vermont)주의 친구를 방문했을 때 그 곳의 풍경을 담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유화: 그리고,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국립 미술관, 허시혼 미술관, 코코란 미술관에서 '사냥'한 작품들

 

 

스미소니안 아메리칸 아트 뮤지엄 (Smithsonian National Museum of American Art) 1층에 2009년에 걸린 호퍼의 작품들. 왼편은 Cape Cod Morning. 오른편은 Ryder's House

 

 

 

 

 

 

 

 

 

국립 미술관에 걸린 Cape Cod Evening.  위에 있는 것은 케이프 코드의 아침.  아래의 작품은 같은 장소의 저녁.

 

 

 

 

코코란 미술관에 걸린 Ground Swell (1939)

 

 

 

 

음...2008년 여름에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미술관에서 찍은 Night Hawk 가 그의 '상징'처럼 널리 알려진 작품인데, 그 때 사진 상태가 비참하다...제대로 찍지 못했다...

 

Cape Cod Morning 이라는 작품으로 그의 작품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다음회에...)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