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ArtBookReview2013. 9. 13.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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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생이 내게 보내준 책 보따리에 낑겨 있던 책.  


표지만 쓱 보고, "이건 뭐 내가 고등학생이야, 이런 인문학 가면을 쓴 잡문 책이나 보라는건가?  잘나가는 가짜 인문학자 하나 잡아서 돈 좀 벌려고 기획한 책인것 같군, 쳇" 이런 5초 평가를 마치고 거의 쓰레기통에 넣을 뻔 했던 책.  (나는 아무나 '인문학'이라고 내세워서 엉터리 책 내는 것에 대하여 인문학을 모욕하는 처사라고 신경질을 내고 있던 중이었다. 만만한게 홍어$ 이고, 만만한게 인문학이더냐! 헹! ) 


그런데, 심심풀이로, 쓰레기통에 넣기 전에 들여다봤다가 책에서 '천둥치는 소리' 같은 것을 듣고는 -- 지금 심각허게 읽는 중.  (이것은 지팔님, 찬삐님에게도 한번 읽혀야 허는 귀중헌 책이여~)




그중 한 챕터를 작가나 출판사의 허락도 얻지 않고 그냥 카메라로 찍어서 올려드린다.  (출판사님, 제가 이 책 광고 단단히 해 드리는 것이니 용서해주셔요). 내용이 맘에 드시면 돈 아끼지 말고 책 사서 마저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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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별표 그리고 밑줄 그은 "타자와의 관계는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라는 대목에서 내 머리를 친 것은 우리 대장 예수님의 선언이시다.


마태복음 10장 34-36절.  내가 신학자도 아니고, 그냥 '독서가'의 입장에서 내 언어로 이 말씀을 풀이하자면:




"내가 세상에 평화를 갖다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이곳에 평화를 가져 온 것이 아니라 칼을 가져왔다.  왜냐하면 나는 남자가 그의 아비에게 대항하고, 딸이 그 어미에게 대항하고, 며느리가 시어미에게 대항토록 하고자 온 것이며, 바로 그의 가족들이 그의 적이 될 것이다."




Matthew 10:34. "Do not think that I came to bring peace on earth. I did not come to bring peace but a sword.

35 "For I have come to 'set a man against his father, a daughter against her mother, and a daughter-in-law against her mother-in-law';

36 "and 'a man's enemies will be those of his own household.'






이 말씀을 (신학자들은 신학적으로 설명을 하실 것이고), 내가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타자와의 관계'의 측면에서 해석하자면 아주 딱딱 들어 맞는데... 생각해보자, 예수쟁이이거나 아니거나 상식과 교양을 갖춘 평범한 사람이라면 '예수'는 온인류를 구제하러 이땅에 왔고, 구원과 평화와 사랑의 존재라는 '상식'쯤은 대개 갖고 있다 (동의하거나 안하거나 상식선에서).  예수 살아 당시에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런 환상과 믿음을 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이 이 땅에 평화가 아닌 '칼'을 갖고 왔다고 선포 하신다.  그렇다면 '평화'는 '칼'과 반대되는 개념처럼 보이고, 예수님은 '칼'이다. 평화와 반대다.


그런데 이것은 역설이다. 여태까지 인류가 누린, 인류가 상상해 온 평화는 '가짜 평화'다.  그 '가짜 평화'를 깨버리지 않으면 '진짜 평화'는 불가능하다.  집안이 화목해보이는가? 그것이 진정한 '즐거운 나의 집'인가?  혹시 그 '즐거운 나의 집'이 어느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 구성된 가짜는 아닐까? 누군가 압제당하는 속에, 차별당하고 멸시하거나 무시당하는 속에서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 속에서 누리는 평화는 진짜가 아니다. 가짜다. 문제를 문제로 인지하고 인정하고 수긍해야 한다. 그러니 아들이 아버지에게 '잠깐...우리 대화좀...' 하고 시도해야 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우리 대화 좀...'하고 시도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압제받는 사람이 지배자에게 제 목소리를 낼때, 그 때 진짜 평화로 가는 긴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세상의 '가짜'를 없애기 위해서 오신 '칼'이다.  그 칼은 진정한 평화를 위해 빛난다.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가짜 평화는 가라.  가짜 조화, 가짜 화합, 가짜 협조, 가짜 형제님 자매님은 가라.  개인의 생의 위대성을 무시하는 전체주의는 가라.  모든 가면을 쓴 허위들은 가라. 가짜 평화는 가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인즉.   가까운 친구끼리 오해가 발생해서 서로 다투고 나서 더욱 깊은 우정을 키우게 되는 원리는 그 사이를 가리는 것들을 싸움과 대화를 통해서 많이 걸러 냈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다툼은 발전을 위한 징검다리였을 뿐.  다투지 않고  입다물고 각자 딴길로 갔다면 그것은 다툼만도 못한 가짜평화이지.






기득권자가 기득권을 내려놓고, 압제받는 자가 자라처럼 움추린 목을 길게 빼고 목소리를 내고 -- 서로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진정한 이해로 갈때 그 때 진짜 평화가 온다. (그게 인간 세상에서 가능할까?  나는 회의적이다. 희망을 간직할 뿐). 그러니까 예수님의 선포도 내 짧은 생각속에서 백프로 옳으시다.  예수님은 틀린말씀 안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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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타자'와 '차이'의 문제는 내 전공 분야인 응용/사회 언어학 분야에서도 빈번하게 논의되는 주제이고, 매 학기마다 나는 책을 펼치고 이 주제에 대한 공부를 새로 하곤 한다. (그래도 내가 뭘 아는지 모르는지 가늠이 잘 안된다.)  내가 주로 보는 쪽은 언어와 사회성, 언어와 정체성과 관련하여 '타자' '차이' '중심성' 이런것을 분석하는 쪽이고,  강신주 선생은 이 짧은 챕터에서 주로 '사람의 관계'에 촛점을 맞춰서,  이것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을경우 어떻게 파시즘이 우리 삶에 뿌리를 내릴수 있는지를 참 쉬운말로, 참 알기쉽게 설명을 해 주신다.


인간 관계, 그 마찰 때문에 고민하는 평범한 사람들도 읽어보면 도움을 받을 만한 좋은 내용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골치를 앓는 그 어떤 갈등'상황이나 나를 괴롭게 하는 어떤 사람이 -- 사실은 내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매우 폭력적인 것일수도 있는데, 내가 그 심각성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자신을 타박하고 말지도 모른다.  폭력에 순응하거나, 용인하거나 납득하고, 자신을 폭력에 길들게 하면 안된다. 


우리는 칼 든 강도에 대해서는 그 위험성을 즉각 알아차린다.  주변 사람들도 그 강도가 나쁜 놈이라는 것에 동의해준다. 내가 강도한테 강도를 당하는 현장을 사회가 본다면, 사회는 내 편이 되어준다. 강도가 나쁜 놈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인정하기 때문에.


그런데 세상에는 웃는 얼굴로 내 삶을 강도질하는 안보이는 강도들도 많다. 이 강도들은 제도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친익척이나 가족 혹은 공동체의 이름으로 우리 삶에 스며들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강도 당하는 줄도 모르고 강도 당하며, 아무도 내가 고통에 신음할때  내 편이 되어주거나 그 보이지 않는 강도를 비난하지 않는다.  당하는 나만 바보 병신이 되거나, 부적응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관계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은 -- 우리의 태도를 수정하거나 교정하거나 뒤바꾸는데 보이지 않는 영향을 끼키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공부를 하고, 좋은 가르침을 받고,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누군가 지혜로운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물론 신의 음성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나의 대장님은 내게 무척 친절하시다. 내게 필요한 말씀을 책을 통해서, 사색을 통해서, 산책을 통해서 내게 매일 주신다. 물론 바이블을 통해서도 말씀을 하시지만 말이지. 통로는 무궁무진하지...)





인간관계 문제를 생각하던 중, 문득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났다.  누가복음 23장 34절.  킹 제임스 버전을 그냥 내 식으로 풀어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 하소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나이다 (이하 생략)." 

Luke 23:34 Then said Jesus,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And they parted his clothing, and cast lots. (King James 2000)


저들을 용서 하소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나이다. 


자신들이 하는 행동의 위중성을 알고 의도적으로 하느냐, 모르고 하느냐에 따라서 재판정에서는 평결도 달라진다고 한다. 의도성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내가 법을 논하는 것을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 아는체 하는것이 될터이고. 그냥 상식적으로 봐도, 예수님은 참 이해심이 넘치는 분이셨다.  '저들이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저러고 있는 것이지, 설마 자신들이 하는 짓이 얼마나 끔찍한 짓인줄 안다면 저렇게 행동하겠는가. 그냥 내가 용서해주고 말지. (자식한테 살해당하는 부모가 자식이 잡힐까봐 죽어가는 마당에도 살해 증거물들을 삼켜버리거나 감춘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나를 괴롭히거나 막 스트레스 주거나 상처를 입혀서 내가 난처하고 괴로울때, 그 때에도 나는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볼만도 하다, "저 사람들이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모르니까 저러지, 알면 저러겠나.... "  그리고 사실, 대개 인간 관계는 그러한 것 같다.  내가 막 고민하고 끙끙 앓다가 그 사람에게 "나...상처받았어...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하고 말하면, 저쪽에서 화들짝 놀라며 "어머! 너 괴로웠니?  난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어머 어쩌면 좋아. 내가 정말 미안해. 내가 앞으로 조심할게" 이럴지도 모른다.  서로 잘 모르니까.


나는 내가 어떤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지 잘 모른다. (요즘 그런 생각을 하면 내가 등골이 오싹하고, 겁이 난다.  사람들 앞에 서서 가르치는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러 들면 얼마나 간단히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불가의 깨달았다는 큰 스님들도 '책 보지 말라,' '공부 하지 말라'는 지시를 하는가하면, 성경에서도 '세상 것을 좆지 말고, 세상 지식을 좆지 말고..' 뭐 이런 말씀이 나온다.  그런데 내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공부 하지 말라고 잔소리 한 성현들은 대개 크게 공부를 이룬 후에 그런 말을 한다. (자기네들은 공부 실컷 하고나서 남보고 공부하지 말란 식이다.) 하지만 한번 더 생각해보면, '공부에 함몰 되지 말라,' '책에 함몰 되어 더 깊은 깨달음으로 가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세속적인 지식에 연연하면서 더 큰 세상에 눈을 감아 버리면 안된다'는 경계의 말씀이지 -- 진짜로 공부하고 담을 쌓으라는 말씀이 아님은 명백하다. 이 좋은 책을 읽으니, 내 인식의 지평이 더 넒어지고, 사람에 대한 이해심이 더 넓어지며, 생의 경건성에 더욱 눈을 뜨게 되지 않는가.  




강신주선생은 공부를 성실하게 하고, 심사숙고하는 학자로 보인다. 그의 글은 누구나 접근 가능하게 쉬운 언어로 씌어 있으나 그 내용이나 울림은 깊고, 감동을 준다. 










Posted by Lee Eunmee
NonArtBookReview2013. 9. 3.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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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에는 아마존 인스턴트 비디오로 'A river runs through it (1992)' 영화를 보았다.  20년 된 영화인데 지금 극장에서 상영을 한대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벽해 보이는, 세월이 흘러도 아름다움이 퇴색하지 않는 영화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본것도 20년 가까이 될 터이니, 구체적인 것들이 다 지워져 있는 상태라서 새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


Joseph Gordon-Levitt 이라는 잘생긴 배우가 이 영화에서 아역으로 출연했대서 들여다보니 '형' 노만 매클레인 어린시절 역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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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영화에서 20년 가까이 기억하는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장로교 목사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칠 때, 글은 최대한 간결하게 쓰도록 지도하는데 -- 큰아들이 처음에 한바닥 쓴 글이 자꾸만 퇴짜를 받으면서 차츰 차츰 짧아져서 나중엔 한바닥이 한문장으로 줄어드는 장면.  문장의 간결성.  


또 한가지는 다트마우스에서 6년간 대학 공부를 하고 교수 자리를 기다리는 동안 집에 와서 지내던 노만이 시카고 대학 교수 자리로 오라는 편지를 받고 아버지 서재로 향했을때 -- 아버지가 혼자서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를 읽고 있는데, 아들이 다가가서 한줄 낭송하고, 아버지가 이를 보고 한줄 낭송, 이렇게 서로 한줄씩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워즈워드의 그 유명한 ('초원의 빛'으로 알려진) 장시 Ode, Intimations of Immortality 의 마지막을 낭송하는 장면



Of splendou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185
      In the primal sympathy 
      Which having been must ever be; 
      In the soothing thoughts that spring 
      Out of human suffering; 
      In the faith that looks through death, 190
In years that bring the philosophic mind. 
 
And O ye Fountains, Meadows, Hills, and Groves, 
Forebode not any severing of our loves! 
Yet in my heart of hearts I feel your might; 
I only have relinquish'd one delight 195
To live beneath your more habitual sway. 
I love the brooks which down their channels fret, 
Even more than when I tripp'd lightly as they; 
The innocent brightness of a new-born Day 
            Is lovely yet; 200
The clouds that gather round the setting sun 
Do take a sober colouring from an eye 
That hath kept watch o'er man's mortality; 
Another race hath been, and other palms are won. 
Thanks to the human heart by which we live, 205
Thanks to its tenderness, its joys, and fears, 
To me the meanest flower that blows can give 
Thoughts that do often lie too deep for tears.


그 장면만큼은 내 뇌리에 강하게 박혀서 20년 가까이 나와 함께 지냈으리라.


내게 가장 이상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이렇게 서로 시를 낭송하며 교감할 수 있는, 혹은 함께 낚시를 하거나 함께 등산을 하거나, 뭐 그런 관계이리라. (이상적인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다. 내 상상력의 너머의 세계이므로.)


역시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도 그 대목들이 여전히 내게 감동을 준다.


그래서, 원작에도 이 시 낭송 장면이 나오는가? 궁금하여 원작 소설이 담겨있는 킨들 책을 사고 말다.  책을 들여다보니 영화 대사 대부분 원작에 있는 것들을 그대로 옮겼다.  책도, 영화도 참 좋다.


이 원작은 노만 매클레인 (1902-1990)이라는, 시카고 대학에서 평생 문학 강의를 했던 문학교수가 70세가 넘은 후에 탄생시킨 것이다. 퓰리처 상 후보에도 거론 되었으나 수상을 하지는 못했다.

http://en.wikipedia.org/wiki/Norman_Maclean



원작을 읽어보니, 문장이 간결하고 명쾌하다.  










Posted by Lee Eunmee
NonArtBookReview2013. 8. 27.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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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홍이가 24일 새벽에 워싱턴에 도착하여 가방을 열었을 때 쏟아져 나온 책들. 그 책들중에서 24일에 <나의 삼촌 브루스리> 1,2 편을 읽다.


25일, 지홍이가 룸메이트와 함께 대학 근처 학생 아파트로 입주를 하므로 보따리를 챙겨서 샬롯빌로 이사를 해주고, 자리를 잡아주고 집에오니  오후 7시 반.  몸을 풀 겸 베드민턴을 한차례 땀나게 치고, 소파에 누워 <고형화 가족>을 읽다.  결국 몇 시인지 모르지만, 다 읽고 잤다.


26일, 유홀에 가서 이사용 밴을 빌려다가 몇가지 가구를 실어 나르고 돌아왔다. (내 일생의 이력서에 '유홀 밴 운전' 경력 추가)  온 몸이 땀으로 범벅.  다시 소파에 누워 <고래>를 붙잡고, 다 읽고 고래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천명관의 소설을 여기쯤서 그만 읽을까보다. 왜냐하면 -- 이보다 못한 작품을 만나게 될까봐 겁이나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단편)' 이래로 이렇게 내 가슴을 울리는 작가/작품을 처음 만난다. 그것도 장편 세편이라니!  사랑은 아름다울때 끝장나는것이 좋고, 소설가도 그가 가장 잘 쓴 작품에서 헤어지는게 좋을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성석제 선생의 근작들은 어쩐지 자꾸만 '재방송'같은 반복적인 소재라서  , 어차피 반짝 하고 사라지는 인생이 서글퍼서 내가 읽은 내색도 안하는 중이다...  여전히 그를 좋아하지만 말이다.)  천명관도 어쩌면 그렇게 될지 모른다.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설 정도로 그의 작품은 탁월하다.  탁월.  한국문학에 '고래'가 나타난것이지, 설령 그 고래가 언젠가 죽는다해도 말이지.


대개 책은 친한 사람과 돌려 보면 돈도 덜 들고 좋지만, 이 책들은 아무도 안빌려줄거다. 물론 이사다닐때 내다 버리지도 않을거다.  두고두고 심심하고 울적할때, 여기 저기 열어보며 '그런데 인생이란게 말이지...'하고 종알거리는 천씨와 대화하면 재미있을테니까.  돈이 안 아까운 책이라는 말씀. 









Posted by Lee Eunmee
NonArtBookReview2013. 8. 10.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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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영화 마르셀의 여름 상/하 편은 영문으로는 My Father's Glory, My Mother's Castle 로 소개가 된다. 아빠의 영광. 엄마의 성. 


일전에 아이튠즈를 통해서 '아빠의 영광' 편을 렌트해서 봤다.  '엄마의 성'은 아무리 뒤져도 돈 내고 볼만한 것이 안 나온다. 


마르셀 빠뇰의 '분위기'가 좋아서 영문 번역본 헌책을 한권 주문했는데 한 열흘만에 온 것 같다. 1.5달러 가격표가 붙어있다. 이런 책은 그냥 갖고 있다가 아무데나 펼쳐봐도 좋으니까.  (내 친구는 불어 선수이니까 이정도는 원본을 사서 읽을수 있겠지...그런 것이 부럽다.)


내게 의미 없다고 생각되면 새책도 한번 읽고 그냥 내다버리는데, 이런 책은 한번 손에 들어오면 '평생' 따라다닌다. 



Posted by Lee Eunmee
NonArtBookReview2013. 4. 24. 04:21

http://www.amazon.com/Curious-Incident-Night-Time-Contemporaries-ebook/dp/B000FC1MCS





며칠 전에 읽은 The Emphatic Brain (http://americanart.tistory.com/2321 ) 에서 저자가 '자폐증'에 대한 설명을 하던 중, 이 책의 일부를 인용한 바 있다. 인용한 부분이 매우 흥미로워서 이 책을 구해서 읽었다.


영국의 15세 자폐 소년을 일인칭으로 그린 소설 (아드리안 모올의 비밀일기의 -- 자폐증 소년 판 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미러 뉴론 (우리 신경계에서, 거울처럼 투명하게 반영하고, 모방하는 성향의 뉴런)을 논하는 책들에 종종 등장하는 에피소드중에 이런 것이 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이나, 자폐 증상을 갖고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보면 나타나는 증상중에 이런 것이 있다.  가령, 초콜렛 깡통이 있다고 치자.  그 깡통 표면에 초콜렛 그림이 그려져 있고, 초콜렛이라는 이름도 씌어져 있고, 누가 봐도 다 알수 있는 초콜렛 깡통이다.  실험자가 그 초콜렛 깡통을 아주 어린이, 혹은 자폐증 사람에게 보여준다. 


연구자: 이 안에 뭐가 들었을까?

자폐인: 초콜렛.

연구자: 맞았어. 


그리고나서 연구자가 자폐인이 보는 앞에서 초콜렛 깡통을 열고, 초콜렛을 모두 꺼내 치워버린다. 그리고나서 그 안에 탁구공 한개를 집어 넣는다. 


연구자: 이 안에 뭐가 들어있을까?

자폐인: 탁구공

연구자: 맞았어.


이때 실험실에 '영희 (혹은 아무나)'가 들어온다.  연구자가 영희를 가리키며 자폐인에게 묻는다.

연구자 : (영희를 가리키며) 내가 저 사람에게 '이 깡통안에 뭐가 들어있나?' 하고 물으면 저 사람은 뭐가 들어있다고 대답할까?

자폐인: 탁구공.


이것은, 사물의 관계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어린아이들이나 혹은 자폐 증상을 가진 사람의 경우 -- 내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보는 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미러 뉴론 연구자들은 이를 '미러 뉴론'기능의 미발달 혹은 결핍 등으로 해석하는 편이다. 



***


The Art of Racing in the Rain (http://americanart.tistory.com/2196 )이라는 책에서는 동물들의 (개의) 행동 패턴과 자폐인의 행동 패턴의 유사점을  잠시 설명하기도 한다. 짐승들은 대개의 경우 '변화'에 무척 민감하고 스트레스를 몹시 받는다고 한다.  수긍이 가는 것이, 우리가 야생 상태에서 산다고 치고, 내가 사슴이라고 가정해보면, 늘 있는 나무, 늘 있는 바위, 늘 흐르는 개울은 내게 무서울 것이 없지만, 늘 있던 나무 뒤에 평소에 보이지 않던 그림자가 지나간다면 -- 나는 포식자가 나타난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자폐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행동 패턴 중에 이렇게 낯선것, 새로운 것,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공포 증상이 있다고 하는데, 그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증상이 -- 귀를 막고 웅크린다거나, 마구 소리를 질러 댄다거나, 사나운 행동을 막 해댄다거나. 


자폐증을 크게 두가지로 단순화 시켜서 분류하면 '고기능 / 저기능' 자폐 로 나눌수도 있는데, 자폐증을 보이된 두뇌의 어떤 기능이 탁월하게 나타나는 경우 (예: 세상과 담을 쌓고, 사회활동을 전혀 못하지만 -- 높은 수준의 수학문제나 물리 문제를 척척 풀거나, 천재적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거나...)가 있고,  그냥 여러가지로 사회성도 떨어지고 대인 능력도 떨어지고, 그래서 지능도 일정 수준에서 더이상 발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 소설의 주인공은 '수학'에 천재적 소질을 보이는 자폐증이라고 할 만하다. 이 사람이 보는 시각, 이 사람이 주변 사람들의 '언어'에 반응하는 방법이 흥미롭기도 하고, 소설 자채가 영국적 썰렁 유머로 가득하다. *영국적 썰렁 유머란 -- 대놓고 웃기자고 덤벼드는 일차원적 유머가 아니라, 심각해보이는데 돌아서보니 웃기는.* 


내가 이 웃기는 소설을 제법 진지하게 들여다 본 이유는 -- 외국어 학습자나 ESL학습자들 (그러니까, 영어 배워서 미국에 유학 나와 있는 사람들, 혹은 미국에 이민온 사람들, 아직 영어가 모국어처럼 자신만만하지 않고, 혹은 영어 때문에 괴로운 사람들, 영어 뿐 아니라, 아무튼 이와 유사한 상황속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세상이 -- 어쩌면 이 15세 자폐증 소년이 보는 세상과 유사할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민자, 유학생 (아무튼 남의 나라 언어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원어민'들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현들이 낯설고 이해하기 힘들고, 간단히 버스 타고 버스비 내는 것도 요령부득이고, 메트로 표를 사거나 갈아타는 것도 난해하고,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것도 매우 스트레스 쌓이고,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매사에 스트레스를 받고, 이래저래 자폐증상 사람과 매우 비슷한 양태의 삶이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외계 별에 떨어진 듯한 낯설음. 불안감. 


그래서 꽤나 공감하면서 -- 이 웃기는 소설을 심각하게 읽다.  :-)



꽤나 좋은 작품으로 널리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어서,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영화도 나온다고. 유튜브를 뒤지면 하이스쿨 드라마 클럽에서 올린 드라마 무대도 볼 수 있고, 전문 드라마 팀의 드라마 광고도 볼 수 있다.




Posted by Lee Eunmee
NonArtBookReview2013. 4. 22. 12:16




http://www.amazon.com/Empathic-Brain-Christian-Keysers/dp/9081829203


Mirroring People http://americanart.tistory.com/2298 의 저자와 비슷한 시기에 '미러 뉴론'이라는 동일한 주제의 연구 작업을 한 학자의 책이라서, 이들의 주요 논점이 뭔지 알기 위해 마저 읽었다. (킨들 책 값이 싸서, 그것도 작용했다). 


이미 앞서의 책에서 미러 뉴런 연구 관련 주요 토픽 및 개론을 대충 파악 했기 때문에 이번에 읽은 책은 읽기가 수월했다. 겹쳐지는 부분도 많고, 설명이 장황한 부분은 건성으로 지나쳤다.  마코 아이코보니의 저술에 비해서 크리스챤 케이저스의 저술은 어딘가 논점이 좀 흐릿하고 - 자꾸만 일반적인 얘기로 흐르는 것 같아서 읽는 맛은 덜 했다. 


이 책에 소개된 에피소드들 중에서 세가지 실험 이야기는 메모 해 둘만 한 것으로 보인다.


1. 좋은 놈, 나쁜 놈 실험:


여자 16명, 남자 16명 이렇게 성별이 다른 두개의 실험 집단을 구성한다.  이들은 어떤 게임을 하는데, 게임 결과에 따라서 연구자가 상금을 주는 식이다.  두명의 연구자가 이들과 작업을 하는데 한명은 상금을 공정하게, 후하게 나눠주고 (좋은 놈), 또 한 사람은 상금을 불공평하게 나눠주거나 아주 떼어먹거나 하는 식이다 (나쁜 놈). 


이 게임이 끝나고 나서,  실험 참가자들을 어느 방에 모이게 한다.  그리고 그 옆방에는 바로 위의 '좋은 놈' 과 '나쁜 놈' 연구자들이 들어있는데, 이들은 고통스런 전기충격을 받아야 하는 처지이다. 


그들에게 친절하게 행동했던 좋은놈과, 못되게 군 나쁜 놈이 차례대로 전기충격을 받는 상황인데, 이런 상황에서

 * 남자들의 반응은 -- 좋은 놈이 전기충격 받고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면 곁에서 그 소리를 듣는 남자들도 뇌의 동일한 부분에서 고통을 느끼는 신호를 보냈다. (고통에 공감했다는 뜻).  그런데 그들이 괘씸하게 여기던 '나쁜놈'이 비명을 지를 때는 '고통에 공감했다는 신호'가 나오지 않거나, 심지어 뇌의 어느 영역 -- '아이고 고소해라 (보상의 기쁨)'이 강하게 반응했다고 한다. 


 * 여자들의 반응은 -- 좋은 놈이건 나쁜 놈이건, 이들이 고통스런 비명을 지를 때 동일한 '공감'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괘씸한 놈이 고통스러워 할때 -- 남자들이 무감각하거나, 고소해라 하며 좋아할때, 여자들은 괘씸한 놈의 고통도 함께 나눴다는 것이다. 


2. 백일 (삼개월 반) 쟁이 아기들 실험:




백일쟁이 아기는 아직 손에 뭘 쥐는 것을 잘 못한다.



아기 (ㄱ) 

아기를 엄마가 안고 앉아있고, 아기의 앞에 실험자가 나타난다.  실험자가 아기 앞에 두개의 장난감 (오른쪽에 한개, 왼쪽에 한개)을 놓고, 찍찍이가 붙은 장갑을 낀 손으로 우선 오른쪽 장난감을 잡는다 (장난감이 찍찍이에 붙는다).  아기는 대략 60초 동안 이것을 들여다본다.  실험자가 동일한 행동을 반복할수록, 아기의 집중 시간이 짧아진다. 


실험자가 이번에는 왼쪽 장난감을 잡는다. 아기의 집중 시간이 다시 60초대로 올라가고, 그 후에 오른쪽 장난감을 잡으면 역시 다시 60초 가까이 집중하여 바라본다.  이것이 반복되면 집중 시간도 짧아진다.


아기 (ㄴ)

이제 또 다른 아기가 등장한다. 역시 백일쟁이 아기이다.  그런데 이 아기의 실험 조건이 약간 달라진다.  우선 아기에게 위의 장난감과 비슷하지만 약간 작은 장난감을 잠시 갖고 놀게 한다.  아기 손에 찍찍이 장갑을 끼워줘서, 그 찍찍이 장갑에 장난감이 붙을수 있도록 해 준다 (아기가 물건 잡는 것이 서투니까).  그렇게 잠시 작은 사이즈의 장난감을 들여다보고 만져보고 나서 -- 이 아기는 전의 아기와 같은 실험을 맞게 된다.


아기 ㄴ 의 경우, 실험자가 오른쪽 장난감을 잡았을때, 집중헤서 보는 시간이 120초 가까이 되었다.  왼쪽 장난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집중시간이 길었다.  물론 행동이 반복되면 서서히 집중 시간이 줄어 들었다.


--> 사람은 친밀한 것, 면식이 있는것 -- 이런것에 좀더 집중한다. (교육 현장에서 보자면 생판 낯선 것을 제시하기 보다는 일단 '소개'하는 과정이 학습 효과를 높여 줄 것이다.)



3. 이웃의 고통 -- 원숭이 실험




원숭이 집 안에 줄이 하나 매달려 있다. 그 매달린 줄을 잡아 당기면 뭔가 먹을 것이 떨어진다. 몇 차례의 우연한 결과를 통해서 원숭이는 그 줄을 잡아 당기면 먹을게 떨어진다는 것을 학습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결과를 달리 해본다. 원숭이가 줄을 잡아 당기자 -- 옆 원숭이 집에 있던 이웃 원숭이가 죽겠다고 막 소리를 지른다. 전기충격을 받은 듯 하다.  원숭이가 일단 줄을 잡아 당기는 것과 이웃 원숭이의 고통이 상관관계가 있다고 파악하는 순간부터, 원숭이는 절대 끈을 잡아 당가지 않는다고 한다.  (---> 이런 것을 보면 동물들에게도 인간에 못지 않은 도덕감, 동정심,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물론, 보통 사람들이라면 동일한 환경에서, 절대 끈을 잡아 당기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실험을 좀더 달리 해봤다. 


옆방에서 어떤 사람이 전기 충격을 받고 막 고통스러워 한다.  이걸 듣고 있어야 하는 사람들은 고통스러우니까, 나가버리고 싶을 것이다.  이 때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어떤 선택을 준다고 치자:

"저방에 있는 사람은 전기 충격을 열두번 받아야 해. 이제 두번이 끝났어. 너는 이제 여기서 선택을 할 수 있어: 

    1. 여기서 저 소리 듣고 있기 괴로우면 그냥 나가도 돼. 
    2. 끝까지 그냥 남아 있어도 돼. 
    3. 네가 저 사람 대신 들어가서 전기충격을 받을수도 있어. 이 경우 네가 몇번 대신 전기충격을 받을지 네가 결정할수 있어. 


자 이경우 나라면, 어떻게 할까...난,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나간다. (^_^*. 난 영리하니까. 실험 상황에서 내가 그냥 나가면 전기충격도 멈출거라는걸 아니까. ---> 그러니까 이렇게 실험의 속성을 아는 사람은 이런 자리에 끼워놓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 경우 대다수가, 3번 내가 대신 고통을 조금 나누겠다는 노선을 선택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나누는 고통은 60 퍼센트까지도 올라간다고 한다. 열번의 전기 충격이 남아있다면 그중 여섯번은 자신들이 받겠다는 식인가보다.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것이다.




****




언어 발달과 미러 뉴런에 대한 챕터도 있었는데 -- 내가 기대했던 만큼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서 크게 건질 것은 없었고, 모국어에 반응하는 신경세포와 제2언어에 반응하는 신경세포가 어떠할지, 어떤 차이와 공통점이 있는지 궁금했다. 이런것을 fMRI로 들여다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내 추측에 --- 초기 학습 단계에서는 뇌의 다른 영역에서 불이 들어올것이고, 능숙한 단계가 되면 모국어와 동일한 영역에서 불이 들어올것 같다. 





Posted by Lee Eunmee
NonArtBookReview2013. 4. 20. 21:24






아마존 책방에서 Elenor Farjeon 을 검색해보면 제일 먼저 나오는 The Little Book Room 이라는 동화집.  이 동화집은 -- 계몽사 세계명작동화집 시리즈에서 '보리와 임금님'이라는 타이틀로 수십년전에 소개가 되었다.  그래서 내게는 '보리와 임금님'으로 각인 되어 있다. 


보리와 임금님의 원제목은 'The King and the Corn' '임금님과 옥수수'.  


내가 여덟살 때 쯤, 이 책을 처음 만났는데, 이 책에서 내가 제일 좋아한 부분은, 작가 서문에 나오는 이 구석방 그림. 집에 책이 많아서 여기저기 책더미가 쌓여있고, 책이 막 흘러내리고 그랬다는 대목이, 내게는 디즈니의 매직킹덤보다 더 환상적으로 여겨졌다. '저런 집에서 살아봤으면...'   지금은 --- 책이 웬수다. 아이구, 이삿짐 쌀 때마다 '저 웬수, 저 웬수' 노래를 부른다.


킨들 덕분에 책이 가득한 작은 방이 내 손에 들어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매직 킹덤이 아닌가.  나는 그래서 현대 기술 문명에 무한한 애정과 감사를 보낸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한 작품은 역시 '보리와 임금님 (임금님과 옥수수)'이다.  그냥, 좋았지... 지금도.  그래서, 이 나이에 내가 어린시절 계몽사판으로 읽었던 그 책, 삽화가 동일한 그 책의 킨들 버전을 들여다보면서 여전히 몽환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지.


그런데 -- 어릴때는 나는 이야기에만 집중했지만, 이제 어른이 되니 자연스럽게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 모두에게 관심이 생긴다. 특히나, (그래도 작가 이름 정도는 기억했으니까)...전혀 신경쓰지 않았던 '삽화가 (일러스트레이터)'에 좀더 관심이 생긴다. 왜냐하면, 이야기와 더불어 내 유년의 기억을 채워주던 것들이 바로 이런 일러스트레이션 이었으니까.  볼 책이 별로 없어서 읽고, 또 읽고,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하여 이야기와 삽화는 늘 함께  있어 주었는데. 


삽화가는 Edward Ardizzone . 어린이 동화책을 전문영역으로 활동한 삽화가이다. 



* 이미지는 맥 킨들 버전을 shift+command+3 으로 화면 캡쳐하여, 안티크 이미지로 살짝 터치하여 올린 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NonArtBookReview2013. 4. 16.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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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가을 -- 핑크 킨들. 흑백.  웹검색 가능. (출시 당시 대단한 찬사)

2012년 1월 -- 2011년 추수감사절에 출시되어 역시 선풍적 반응. (찬홍이가 사서 쓰다가 내게 양도했던 것)


2013년 4월 -- 커다란 킨들이 탐나서 새로 장만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찬홍이의 것은 찬홍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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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생께서, 어여쁜 사모님께 선물을 해 주고 싶으니 1*** 달러만큼 뭔가 사도 좋다고 명령을 하달 하신 바. 다이야몬드 대신에 이걸 달라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해서 -- 노란 가죽커버까지 해서 받음.   영감마님, 잘 쓰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


분홍커버의 흑백 킨들은 아직도 쌩쌩하다.  잘 보관 하고 있다. 

*아마존에서 나 -- 충성스러운 고객상 이런거 줘야 한다고 본다.  







Posted by Lee Eunmee
NonArtBookReview2013. 4. 11.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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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작문 기초과정 교재에 위와 같은 그림이 실렸다.  네 개의 그림의 순서를 이야기 흐름대로 번호를 매기고 문장을 작성 해 보라는 것이다.


내가 두시간 가르치는 영작문 수업 교재에 이러한 것이 실려 있었는데, 지난주에, 수업 준비하면서 '이게 뭐지? 이게 뭐지?' 한참 고민했다.  나로서는 이 그림의 흐름이 어떠한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처음에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 봤다.

 1. 오른쪽 위의 그림: 남녀가 부엌에서 일하는 모습이 첫번째다. 이들은 매일 부엌에서 설겆이 하는 일이 지루해졌다. 그래서 나가서 먹기로 한다.


2.  왼쪽 아래 그림: 그래서 식당에서 주문을 하고


3. 왼쪽 위의 그림:  맛있게 먹었다.


4. 오른쪽 아래 그림: 그런데 청구서를 보니 명품 지갑이나 명품 옷을 살만한 어마어마한 금액이라서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그런데 좀 이야기가 이상한 것 같았다. 




수업에 들어가서 영작문 기초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라고 했다.  그런데 20대의 내 학생들은 이 상황을 이구 동성으로 아주 정확하게 설명했다.



 1. 남자와 여자가 식당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고


 2. 맛있게 먹었는데


 3. 청구서를 받고 나서 -- 남자는 깨달았다, 자신이 지갑을 넣어 둔 웃옷 대신 다른 옷을 입고 왔다는 것을. 그래서 지갑이 없다.


 4. 결국 두 사람은 밥값을 못내고 식당 설겆이를 해야 했다.





20대 젊은이들이 이런 설명을 이구동성으로 하니, 이 그림을 그린 사람도 그런 의도로 그림을 조합한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런 상황을 이해를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을까?  나에게 결여 된 것이 한가지 있다. ---> 나는 식당에서 밥 먹을 때 남자가 반드시 지갑을 가져가서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을 잘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결혼 하기 전에도 나는 서로 형편 되는 사람이 돈을 내는 시스템이었고, 그래서 박선생보다 내가 더 자주 지갑을 열었고, 결혼 한 이후에도 집안의 돈은 내가 주로 다 썼다. 박선생 혼자 돈을 벌거나, 나하고 둘이 함께 벌거나, 지갑 열고 돈 쓰는 역할은 내 역할이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주로 내가 지갑을 열고 돈을 쓴다.


그러므로, 남자가 지갑을 잊고 왔으면 -- 여자가 돈 내면 되는거다. 여자는 당연히 지갑이 없단 말인가? 여자는 뭐 하고 있는건가?  그냥 입만 달고 왔단 말인가?  자기 몫을 낼 생각도 안 해봤단 말인가? 남자를 뭘 믿고 맨 손으로 따라다닌다는 말인가?  설령 식사 초대를 받았어도, 지갑을 갖고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나는 20대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파악하는 상황을 제대로 연결을 못 시키고 의아해 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나는 지금도 이 교재에 나온 이런 상황 설정에 불쾌감이 든다.  이건 남녀 평등 사상에 위배되는거다. 여자는 입만 달고 다니는 존재가 아니고, 남자가 궁지에 빠졌으면 얼른 구제해줘야 하는거지, 모든 책임을 남자한테 넘기면 안되는거다.  이 책의 내용은 수정되어야 한다.  







Posted by Lee Eunmee
NonArtBookReview2013. 4. 10.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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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mericanart.tistory.com/2273   Mirroring People 읽기를 마쳤다.


책에 소개된 흥미로운 실험 이야기 하나:


생후 7개월 유아들에게 세 종류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동일한 장난감이다.)

    1. 한 사람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다.
    2. 자동으로 움직이는 장난감이 저 혼자서 움직이고 있다.
    3. 장난감이 시계추처럼 규칙적으로 흔들린다. 
이 세가지 움직임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을때, 유아들의 눈길을 가장 오래 붙잡아 놓는 장면은 위의 1, 2, 3번중 어느 것일까?





이와 연결된 또다른 실험이 있다.  위의 세가지 장면들이 (1) 눈앞에서 실제로 진행 될 때와,  (2) 비디오 촬영하여 화면으로 보여줄때, 유아들은 실제 상황화 비디오 녹화 상황중 어느 쪽에 눈길을 더 오래 보낼까?


내가 누군가에게 위의 세가지 상황에 대한 답을 물었을 때, 그는 답했다: 유아들은 아직 인지 발달이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우선 --  3번, 규칙적인 흔들림을 집중할 것이고, 그 다음 2번, 그 다음 1번이 아닐까? 

실제로 유아들이 보인 행동은 1--2--3 순이다.  사람이 장난감을 갖고 노는 상황을 오랫동안 주목했고, 시계추같은 움직임에 눈길을 오래 두지 않았다.  실제 눈앞에서 진행되는 것과, 비디오 녹화 장면을 볼때는 '물론' -- 당연히 -- 실제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에 더 많은 흥미를 보였다. 


1번이 유아들의 눈길을 가장 오래 붙잡을수 있었던 이유는 -- 인간은 본디 날 때부터 '사회적 상호작용'에 감응하도록 설계 되어 있다.  그리고 목적 지향적이다 (어떤 행동이나 움직임의 -- 방향, 목적이 무엇일까 추리하는 본능이 있다는 것이다.)  1번을 보면서 유아들은 지속적으로 '저이가 저것을 가지고 뭘 하는걸까?' 추리할 것이다.  2번의 경우 저 혼자 움직이는 장난감에서 유아들은 사회적 상호 작용도 일어나지 않고  최종 목적/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에  흥미를 덜 느낄 것이다. 3번의 경우, 유아들은 금세 그 규칙성을 알아차리고 호기심을 잃을 것이다. (일말의 사회적 상호작용 역시 보이지 않고.)


실제상황과 녹화 상황의 구별 능력은 유아에게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실제-- 녹화'의 대비가 될 것이다. 


책에 소개된 흥미로운 실험 이야기 둘:


대학생들/혹은 그 나이의 젊은이들 --- 학력이나 교양 정도가  비슷한 젊은이들을 두개의 그룹으로 나눈다.  

    1. 갑 그룹: 이들에게 '대학 교수'들의 행동 패턴에 대해서 종이에 상세히 적어보게 한다. 
    2. 을 그룹: 이들에게 '훌리건 (축구장에서 흥분해서 집단적으로 흥분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의 행동 패턴에 대해서 종이에 상세히 적어보게 한다. 


위의 과제를 마친 후에, 두 그룹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일반 교양 상식' 시험을 치른다. 


시험 결과를 보면 '갑 그룹'의 평균 점수가 '을 그룹'에 비해서 훨씬 높다고 한다.


왜 '대학교수'의 행동 패턴에 대해서 글을 쓴 사람들이, '훌리건'의 행동 패턴에 대해서 글을 쓴 사람들보다 평균 상식 점수가 더 놓은가?  사람은 -- 닮은 행동을 하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학자'나 '교수'의 행동 패턴에 대해서 사색할 시간을 가진 사람은 -- 교양 시험 치를때 자신도 모르게 학자처럼 행동 했을 것이다, (답을 고를때 좀더 사색적이고 신중 했을 것이다, 아마도).  '훌리건'에 대해서 기술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훌리건처럼 행동 했을 것이다. 그냥 기분 내키는대로 ...이 시험이 뭐 중요하겠나... 그냥 뭐... 아마 그러한 마음 상태가 되었을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 책의 저자가 한 것이 아니라, 읽는 내가 편안하게 상상해 본 것이다.)


내가 이 책을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은 이유는 -- 저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이야기하고 싶어  한 것이 'intersubjectivity' 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실험실의 뇌생리학자가 -- 추상적인 '상호이해'의 문제를 안고 씨름하고 있었는데, 그 '상호이해'가 내가  교육 쪽에서늘 들여다보는 연구 주제이기 때문에.  뇌의학의 시각에서, 내가 고민하는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 


가령 Think aloud 실험을 우리쪽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도 했었는데) , 그의 의견으로는 Think aloud 하는 동안에 우리들은 생각하기 힘들다 (문제 해결을 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해 준다. 그의 의견이 타당해 보였다.  꼼꼼하게 읽은 것에 만족한다. 두고두고 참고 할 만 한 책이다.


* Mirror Neuron 기능을 보는 두가지 모순적 태도:


미러 뉴론의 기능으로 우리는 '흉내내기'를 통해서 상호 교감하거나 학습을 한다.언어도 취득한다. 서로 감응한다.   그런데, 그 '흉내내기'를 통해서 어떤 사람은 미디어에서 본 '폭력'을 재현하는 '모방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세상은 미러 뉴론과, 앰퍼씨 이론에 대해서는 환영하는 분위기 이지만, 사람들이 '미디어에 나오는 폭력'을 모방 할 수도 있다는 논의에 대해서는 외면하려 한다.  맘에 드는 내용은 환영하고, 맘에 안 드는 내용은 거부하고 싶어한다. (저자는 이 점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다.)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