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내가 사는 섬마을에는 내가 산책할 수 있는 거리에 서점이 세개나 된다! 교보문고가 한군데, 영풍문고가 두군데에 있다! 그러므로 심심하면, 그냥 '서점'에만 나가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인터넷서점의 약진으로 오프라인 서점들이 줄줄이 문을 닫는 미국 서점가를 생각하면, 지금 내가 누리는 호사는 보통 호사가 아니다. 서점의 신간코너를 춤을 추듯 이리저리 돌며 새 책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유희인가. 언젠가 이 수북히 쌓인 신간들 속에서 내 책을 발견하리라 상상하는 일도 즐겁다. 옛날에 내 책이 나왔을때, 일부러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내 책이 어디에 진열되었는지 확인하고, 자꾸자꾸 돌아보던 일이 생각난다. 늘 그때의 설레임으로 책방을 찾게 되는데.
그렇게 한가로운 9월 어느날 저녁, 내 눈에 '데미안'이 눈에 띄었다. 데미안이라니. 그런데, 책 서두에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그 한마디 때문에 책을 집어 들었다.
언제였더라? 데미안을 읽은 것이? 중학교 1학년 혹은 2학년? 도대체 그 때 내가 무엇을 읽은 것일까? 도대체 그때 내가 무엇을 이해하고 친구들과 비밀조직원들처럼 "너 데미안 읽었니?" 묻고 서로 아는체를 했던 것일까?
아마도 그 당시에 나의 '데미안' 읽기는 싱클레어와 막스 데미안과의 관계, 혹은 에바 부인과의 기묘한 관계에 한정되어 있었고, 내가 알지도 못하는 내용들에 대해서 '신비한 무엇'정도로 지나쳤겠지. 그리고 중학생인 우리들은 서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아프락사스라 한다"라는 그 유명한 구절을 비밀 결사단체의 암호처럼 서로 주고 받았으리라.
나이 오십이 넘어 그 책을 다시 집어 드니, 책안에서 뜨겁게 논의되는 카인에 대한 시각, 혹은 '신성'의 문제, 니체 초인철학의 그림자, 세계의 고대 종교및 보편적인 종교들, 하이데거의 '던져진 존재'를 방불케하는 이미지들이 여기저기에 수채화 물감처럼 스며 있다. 이런 담론의 주제들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성경을 읽어본적도 없고, 카인이 누군지도 몰랐던 어린 나는 책을 읽고 어떤 상상을 했던 것일까? (헛웃음이 나오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중학생들이 이 책을 읽어봤자라는 말은 아니다. 책은, 소설은 자기 수준만큼 이해하면 된다.)
이 책은 이렇게 읽으면 좋다.
어쩌면 나도 언젠가 그런 무엇이 될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내가 그걸 안단 말인가.
어쩌면 나도 찾고 또 계속 찾아야겠지.
여러해를,
그리고는 아무것도 되지 않고,
어떤 목표에도 이르지 못하겠지.
어쩌면 나도 하나의 목표에 이르겠지만
그것은 악하고, 위험하고, 무서운 목표일지도 모른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Page 129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Page 172
이 책이 지금도 내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내가 아직도 나를, 혹은 나의 운명을 찾아 내지 못했기 때문인데 문득 윤동주의 '길'과 오버랩 되기도 한다.
내가 어릴땐, 청년일땐 몰랐다, 어른이 되어도 우리의 '헤멤'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어릴때 나는 내 아버지나 내 엄마 혹은 주위의 어른들, 학교의 교수님들은 삶에 대한 어떤 확고한 답을 이미 갖고 살아가는 줄로만 알았다. 그들은 어른처럼 보였다. 그들은 이미 모든 답을 알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잘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교육을 많이 받았건 적게 받았건,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저절로 '답'을 갖게 되는건줄 알았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자신이 없어진다. 내가 혹시 인생을 낭비한 것은 아닌가, 내가 엉뚱한 곳에서 헤메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회의가 시시때때로 몰려온다. 그것은 '내가 재산을 얼마나 모았나. 나는 왜 집한칸 없이 떠도나' 이런 문제가 아니다. 그런것은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내가 정말 제대로 이 생을 살아내고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감이 자꾸 든다는 것이지.
그런이유로 '데미안'은 아직도 유효하다. 내 고민을 그대로 책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고민을 했던 작가가 이 세상에 있었으며, 그러한 사람들이 내 주위에서 비슷한 책을 읽고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자각만으로도 제법 위로가 된다.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을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남학생들은 모르겠고, 내 또래 여학생들 중에서 그래도 '책'좀 읽는다는 주위의 친구들은 대개는 '헤르만 헷세'에 미쳐지내던 시절이 반드시 있었다. 우리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너 000 읽었니?'였다. 그건 비밀결사단체의 암호 같은 것이라서 그것을 읽었다고 고개를 끄덕일때만 어쩐지 정말 친구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혜화동의 고등학교에 다닐때, 내가 존경하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 친구를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바로 그 '데미안'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고 그 친구를 정말로 존경했다. 그 친구는 나보다 키도 크고, 인물도 시원하고, 노래도 잘하고, 기타도 잘 치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세계 명작들을 이미 읽은 후였고, 공부도 나보다 잘했고, 그림도 나보다 잘 그렸고, 글짓기도 나보다 잘했다. 나는 산문을 좀더 잘썼고, 그 친구는 시를 잘 지었다. 심지어 스포츠에도 뛰어났다. 그런데다 별로 말도 없고, 쳐다볼땐 눈빛이 깊고 그윽했다. 중성적인 매력까지 있었다. 도대체 못하는 것이 없어 보이는 친구였다.
그 친구가 지나치는 말로 소설 무엇, 무엇, 무엇 말할때마다 나는 놓치지 않고 그것들을 찾아 읽었다. 나도 책벌레 소리 들었는데, 그 친구에 비하면 내 독서력이가난하기 그지없던 형편이라서, 학교 도서관에 자주 책을 빌리러 가야했다. (물론 그 친구의 눈에 띄지 않게 책을 읽었다. 하하). 나는 그 친구를 존경했다. 진심으로.
그렇지만, 내게 먼저 다가온 것은 그 친구였다. 나는 나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별로 없어서 늘 '관망자' '구경꾼' 정도에 머물러 있던 편이었고, 사람에게 다가가기보다는 멀리서 관망하는 편이었기때문에 그냥 내 자리에 머물러 있었고, 그가 내게 먼저 다가왔다. 다른 평범한 친구들처럼 방과후에 함께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거나, 함께 같은 방향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거나 그런 짓을 얼마간 했다. 내가 중간에 내리고 내 친구는 그 버스의 종점까지 가면 되었다. 우리는 별로 말도 없었지만, 그래도 서로 이해하고 있었다. 내 친구는 여일하게 나를 대했고 어느날 나는 내 친구에게서 도망을 쳤다. 평범한 친구 관계는 두달도 못 갔을 것이다. 나는 도망쳤다. 방과후에 함께 하교하기 위해 내 친구가 기다릴때 나는 다른 길로 가버렸고, 도서관에서 마주치면 불에 데인듯 피했다. 나는 내 친구를 여전히 존경하고 그를 신뢰하고, 언제든지 내가 힘들땐 저 친구가 나타나서 나를 위로해 줄 것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나는 최선을 다해서 내 친구를 피해다녔다. 내가 왜 그랬는지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다. 내 친구가 나를 찾아와 뭔가 말을 하자고 할 때도 나는 골난 표정으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몇번인가 내 친구는 나를 찾았고 깊은 한숨을 지으며 딱하다는 듯이 나를 들여다보다가 자리를 뜨곤 했다. 나중에 내 친구는 멀리서 웃어주기만 했고, 나도 멀리서 웃었다. 그래도 그는 나를 잊지 않았다는 듯 학년이 바뀌어 서로 다른 반으로 흩어진 후에도 갑자기 달려와 삶은 밤 몇개를 내 책상에 놓아주고 가거나, 내가 대학입시 공부에 몰두 해 있을때는 라면 부스러기 같은것을 갖다 주고 휙 가기도 했다. 나는 온순하게 그것들을 받아 먹었다. 우리들은 연결되어 있었다. 내 친구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시간을 되짚어 내가 왜 그렇게 맹렬하게 내 친구에게서 벗어나려 했는지 생각해보면, 내 친구와 내가 너무나 '닮은 꼴'이어서 였던것 같다. 내 친구와 나는 일단 외모에서 많이 닮았다. 물론 나보다 키고 크고 나보다 빼어난 외모였지만, 내 친구와 나는 서로 거울을 보는 기분이 들곤 했다. 물론 내 친구가 모든 면에서 훨씬 좋은 사람이고, 고양된 영혼의 소유자이긴 했으나, 우리는 아주 기묘하게 서로 닮아있었는데, 내 친구는 그래서 내게 친화적이었던 것 같고, 나는 그래서 아주 멀리 멀리 달아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싫었던 것인지도 모르지. 나는 내게서 달아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멀리 멀리. )
내친구의 싯귀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참 아름다운 시였다. 내 친구는 나보다 성적도 월등히 좋았으므로 선망하는 대학에 들어갔고, 내 친구가 대학원생일때 딱 한번 그의 학교 조교실에서 그를 만났다. 내 친구는 여전히 고등학교때처럼 농구를 즐겼는데, 대학에서도 장대같이 큰 남학생들과 어울려 농구를 한다고 했다. 그는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화장도 섹시하게 하고, 그리고 대학원 조교실에서 후배 남학생들과 어울려 담배를 피고 있었는데 여왕, 혹은 여신처럼 보였다. 혹은 아직도 내가 옛날에 존경하던 친구 그대로의 모습이기도 했다.
나는 가끔 그 친구 생각을 한다. 애써 찾지는 않는데, 아마도 때가 되면 어딘가에서 나타날것 같기 때문이다.
아, 그 친구 때문에 나는 헤르만 헤세의 거의 모든 작품을 다 읽었는데, 지금 그의 저서 목록을 훑어보면, 도대체 내가 그 책들을 어떻게 읽은 것인지 제목만 생각나고 줄거리는 아예 가물가물하다. 그나마 떠돌이 시인의 삶을 그린 '향수'나 성장기 고통을 그린 '수레바퀴 아래서'는 구체적인 스토리가 떠오르는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내가 읽은 당시에 열광을 했으면서도 지금 그게 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쩐지 올 가을 내내 헤르만헤세의 작품들을 하나 하나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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