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그냥 막연히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고' 그런 것과 비슷하게 어떤 허기를 느낄때가 있다. 이곳 섬에 와서 3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 내가 느낀 허기는 '문화적 경험'에 관한 것이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번듯한 공연장이 안보였다. (내가 못 찾아낸 것일수도 있다).
플로리다에서 지낼때는 대학을 중심으로 그리고 주 청사를 중심으로 배고프지 않을 맘큼 다양한 공연이 제공 되었고, 버지니아에서 살 때에는 케네디센터를 비롯, 워싱턴 디씨의 역사적 공연장들이 즐비했으므로 언제든지 맘만 먹으면 세계에서 유명하다는 연주자나 악단의 연주를 쉽게 관람할 수 있었다. 그 이전에 서울에 살 때에는 지금은 우중충해보이기까지 하는 세종문화회관을 비롯, 뭐 돈이 없어서 못 갔지 갈데가 없어서 못가지는 않을 정도로 공연장이 많았다. 내 일생에 '사방을 둘러봐도 공연장이 없다'는 막막한 느낌은 최근 3년 가까이 섬에서 지낼때 처음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다, 일전에 버스타고 신촌에 다녀오는 길에 인천시내버스에 붙은 음악회 광고를 발견하고, 그길로 바로 표를 예매해서 가게 된 곳이 '인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이었고, 운좋게도 '라흐마니노프'를 들을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인천에서 나고 자랐다는. 작은 학생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학생에게 "도대체 이 근처 사는 사람들은 공연을 보러 어디로 가니?"하고 물으니 그 역시 '인천문화예술회관'이 아니면 대개는 서울 예술의 전당쪽으로 간다고 한다. 내가 못 찾은게 아니라 그것이 현실 이었구나.
금요일 저녁, 비가 솔솔 뿌리는 가운데, 전철을 타고 공연장을 찾았다. 일단 건물은 되게 커 보이고, 그 흔한 샹들리에 하나 매달려있지 않은 어딘가 쇠락해가는 듯한 느낌의 인테리어였다.
금노상씨가 지휘한 무소르그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내가 경험했던 대규모 외국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못지 않은 훌륭한 것이었다. 특히 KBS명곡 프로그램 시그널로 오래 사랑받은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을 라디오가 아닌 생생한 오케스트라 연주로 들어서 아주 기분이 좋았다. 교향곡 2번 작품은 CBS FM 저녁 배미향씨 시간에 씨그널로 나오는 멜로디가 들어있는 곡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그 멜로디가 흘러나올때, 아 저거구나! 했다. 즐거웠다.
아쉬운점은 내가 뭐 '막귀'니까 연주는 웬만하면 다 훌륭한데, 어딘가 소리가 무대에서 연주자들 사이에서만 맴도는 인상이었다. 지휘자가 열심히 지휘를 하고 연주자들이 아름답게 연주를 하는데, 그 소리가 객석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자기네들 무대에서만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느낌. 이건, 그러니까 연주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무대와 음향시설의 문제인것으로 보인다. 비유하자면 내 오피스에 좋은 오디오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어서 음악소리가 내 온몸의 세포에까지 스며드는 기분이 드는데, 집에가면 조그마한 라디오가 있고, 순간적으로 그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소리가 마치 꽉막힌 상자속에 소리가 갇혀있다는 느낌이 든다. 바로 그런 조그만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러한 건물 구조적인, 혹은 음향시설의 문제를 제외하면 연주 자체는 케네디센터에서 했을경우 전원 기립박수를 받을만해보였다.
금노상씨. 지휘자 이름을 보면서 혼자 생각했다.
나: "금노상..금노상...금수현씨 아들인가?"
옆에 있던 박선생: "금수현씨 아들은 금난새씨지.
나: "그렇군, 금난새씨가 있었지. (3초후) 그런데 금노상씨도 금수현씨 아들하면 안되나? 금수현씨가 아들이 하나밖에 없나?
박선생: 설마, 한집안에서 지휘자가 여럿 나오기가 쉬운가?
나: 금씨가 워낙 희귀성이라서 말이지. 금수현씨 아들 아니면 조카? 먼 친척?
연주회 끝나고 구글 뒤져보니 금노상씨도 금수현씨 아드님이라고 한다. 헤헤. 나는 나중에 실업자 되면 시청앞에 돗자리를 깔아도 굶어죽지는 않을거야.
음악당의 음향시설이 조금 낙후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 영혼이 목마를때 찾을수 있는 샘으로 가을에 이곳을 몇차례 더 찾을 생각이다. 내가 이 섬에서 예술의 전당을 다녀오려면 하루 품을 다 팔아도 힘든데다, 본래 게으른 인생. 이것만도 감사할 일이다.
내가 새삼 깨달은 것 세가지:
- 나는 하느님께 진짜 감사해야 한다. 내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대수롭지 않게 향유해오던 문화시설들이 사실은 한국에서 최고였거나, 미국에서 최고였던 시설들이었다. 그것들이 얼마나 굉장한 특혜인지 모르고 그냥 무심코 누리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인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을 경험하면서 자각하게 되었다. (위대한 인천광역시가 자랑하기에 인천문화예술회관은 어딘가 낙후해 보였다. 안타까운 일이다.)
- 인천시민들 정말 착하다. 불평하지 않고, 있는 것을 누릴줄 안다. 이분들에게 좀더 좋은 시설을 제공하면 안될까?
- 먹고 사는게 해결되었다면, 이제는 마음의 양식, 문화를 해결해야 한다.
인천시는 인천시민의 영혼의 갈증을 해소해줄만한 좋은 음악당도 만들어주시고, 진짜로 인천을 세계의 중심으로 키워주시길. 트리플스트리트 같은 신개념 쇼핑몰도 좋고, 국제 캠퍼스도 좋고, 다 좋은데 서해안 문화의 중심지로 키울 생각은 없으신지. 시드니에 있는 음악당 같은것 인천 바다 가까이에 지어서 서해안 문화의 기념비가 되게 하고, 바다 건너 오는 중국관광객에게도 화장품이나 치맥 같은것만 팔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문화 상품을 팔면 좋을 것이다. 요요마도 랑랑도 죠슈아 벨도 바닷가 공연장에서 연주하게 만들고, 응? 응? (인천에서도 구석에 처박힌 섬마을 사람의 일성).
'Diary >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붉은불개미에 물리면 베나드릴 알약 (0) | 2018.09.19 |
---|---|
옛 친구를 만나다: 데미안 (0) | 2018.09.17 |
대학 간판을 선호하는 사기업의 인재채용: 당신은 초대받지 못했다 (0) | 2018.09.14 |
21세기 교육의 지향점 4Cs (1) | 2018.09.13 |
A Helicopter Mom and Her Daughter (0) | 2018.09.12 |